수단 정부의 간편한 봉기진압전략 번역 임필수 사회진보연대 정책편집국장 [역주] 저자는 저스티스아프리카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케이프혼 지역의 이슬람주의와 적들》(Islamism and Its Enemies in the Horn)의 저자다. 《죽음을 부르는 기근: 수단 다르푸르 1984-85》(Famin that Kills: Darfur, Sudan 1984-85) 개정판이 옥스퍼드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이 글은 〈Counter-Insurgency on the Cheap〉, 《London Review of Books》, Vol. 26 No. 15, 5 August 2004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아프리카 전쟁들을 포괄적으로 다룬 알렉스 드 와알, 〈아프리카의 전쟁들〉, 《사회진보연대》, 2003년 9월호와 세계체계론의 입장에서 아프리카의 위기를 분석한 지오반니 아리기, 〈아프리카의 위기 : 세계체계적인 그리고 지역적인 양상들〉, 《사회진보연대》, 2002년 11월호, 2003년 1-2월호를 함께 참조할 수 있다. 다르푸르의 유목민 공동체 다르푸르의 경치는 지독히도 아름다우며 아아모의 유목민 야영지보다 세월의 변화에 더 완고한 곳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르푸르는 고대 화산이 형성한 산으로 둘러싸인 평원으로 돌투성이 황무지다. 분홍빛 모래로 이루어진 넓은 지역은 계절에 따라 생기는 와디 쿠툼 강 줄기를 나타낸다. 수년 전 나는 자룰족(族)이라고 알려진 아랍 유목민 일족의 나지르(최고 족장)의 손님으로서 그 곳에 머무른 적이 있다. 모래 위에 친 검은색 넓은 천막, 가시나무 잎을 먹는 낙타,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훌륭하게 만들어진 물품들은 민족학 잡지에 등장할 법한 것들이었다. 오늘날 아아모는 다르푸르를 해치고 있는 폭력의 중심지다. 이미 수만 명이 죽었고 수십만 명이 그들의 고향에서 떠나야만 했다. 분쟁의 첫 번째 대학살은 아아모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고, 이때 잔자위드 민병대는 쿠툼 시에서 보호 받고자했던 수십 명의 마을사람을 살해했다. 나는 1985년 나이가 지긋한 나지르인 쉐이크[아리바이 족장] 히랄 무사를 만났다. 그의 텐트에는 유목민으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의 물품인 물병, 안장, 창, 칼, 가죽가방, 오래된 라이플 총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나에게 훌륭한 페르시아 융단 위 맞은 편에 앉으라고 권했고, 수하의 사람에게 은접시 위에 달콤한 차를 내오라고 시켰다. 그는 세상이 끝나가고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당시에 다르푸르는 가뭄을 겪고 있었고 소란스러운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비옥한 산허리 위로 모래를 실어 왔고, 비가 오면 와디 강물은 주변의 비옥한 충적토가 있는 협곡을 깎아냈다. 심지어 항상 낙타 유목민을 맞아주던 마을 주민들은 그들의 이동을 막고 목초지와 우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히랄은 내가 아라비아 사람이 영국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나무랐다. 그는 모든 식민지 관리가 고전적인 아라비아 교육을 받았지 내가 알고 있는 다르푸르 수단인 식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가 마지막으로 환대한 영국인은 쿠툼 시에서 근무한 행정구 부국장 테지거였다고 말했다. 테지거는 다르푸르 최고의 명사수로 유명했다. 당시에는 오직 영국인 관리만 라이플을 소유하도록 허용되었고 사자를 쏘아 죽일 수 있는 힘과 정확성을 지녔다. 1985년 내가 다르푸르를 방문했을 때는 개인이 화기를 소유한 경우가 드물었다. 나지르는 내가 그 곳을 떠날 때 기린 꼬리로 만든 파리채를 주었다. 현재 다르푸르의 남쪽 언저리에서 사자와 기린이 사라지는 이유는 식민지 시대 사냥보다는 오히려 생태적 변화 때문이다. 다르푸르의 숲은 남부 수단과 중앙아시아공화국까지 뻗어있다. 다르푸르 북쪽의 반건조 고원에서는 사바나 지대가 사막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가젤 영양은 가끔씩만 볼 수 있다. 히랄은 나이가 팔십 대였고 깡마르고 구부정하며 거의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일족의 지도자였다. 수피교도[이슬람 신비주의]는 - 다르푸르 사람 대부분은 서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여러 수피교 종파의 신봉자다 - 바카라 즉 신이 준 권능과 축복을 받아들인다. 히랄은 ‘쉐이크의 영토는 신이 주신 것’이라고 믿었다. ‘쉐이크 영토의 등급은 인간이 만든다.’ 그는 나지르라는 공식적으로 우월한 명칭 대신에 더 낮지만 더 의미 있는 쉐이크라는 이름을 고수했다. 그는 다르푸르 넓은 지역에서 그냥 쉐이크 히랄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오늘날 그의 아들 무사의 이름은 더 널리 알려졌다. 무사 히랄은 잔자위드의 지도자며, 그의 이름은 미국 정부가 지목한 전쟁범죄 용의자 명단의 맨 위에 있다. 쉐이크 히랄은 유목민의 삶의 방식을 굳세게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부족의 모든 사람들이 낙타를 소유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손자를 가리키며 ‘저 작은 소년을 보라’, ‘저 소년도 낙타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마도 사실이리라. 그렇게 고생스러운 시절에도 히랄의 가족은 낙타 수천 마리를 소유한 것으로 유명했다. 비록 족장은 낙타를 타기에는 너무 늙고 거의 앞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낙타 떼는 비가 온 후 사막에서 자라는 부드러운 풀을 먹기 위해 북쪽 삼백 마일 위까지 이동했다. 그의 조카는 얼마전 굶주린 일가 사람들에게 식량을 주려고 백 이십 마리의 낙타를 팔았다. 그리고 히랄은 가난한 친척들에게 낙타를 여러 마리 빌려주었고, 따라서 낙타 떼는 그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빨리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우리는 서로 서로 돕는다. 자룰족은 결코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야영지로부터 겨우 한 시간 정도 걷고 난 후 가뭄 동안 낙타와 양을 모두 잃고 농사를 짓기 위해 정착한 한 자룰족의 야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툰주르 그룹(푸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지역의 가장 큰 부족 그룹이다) 출신의 지역 주민들은 그들에게 건조하고 모래투성이 땅을 주었을 뿐이었고, 와디 강 주변의 충적층 토양을 내주지는 않았다. 좋았던 시절에 와디 쿠툼은 북부 다르푸르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땅으로 유명했고, 툰주르는 다른 농민들이 땅의 법적 소유권이 얼마나 중요한가 깨닫기도 훨씬 전에 땅의 소유권을 등록할 정도로 꼼꼼했다. 자룰족족 농민은 분개했고, 약간의 기장을 키우기 위해 건조한 고원지대를 파헤쳐야 했다. 그들의 쉐이크는 체면을 차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저녁 때 그는 우리에게 양고기와 쌀로 된 후한 식사를 대접했고 우리가 쉐이크 히랄의 아들과 낙타를 찾을 수 있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우리가 몹시 배가 부를 정도로 먹고 난 후에도 그는 조카딸에게 ‘다음 코스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 코스는 없었다. 다르푸르의 사막화와 가뭄, 분쟁 영국은 1916년 다르푸르(푸르의 땅이라는 뜻이다)를 정복했고, 술탄 알리 디나르의 군대를 격파했다. 알리 디나르는 17세기 푸르 술탄국의 창건자인 술레이만 소롱의 자손이다. 오랫동안 방치된 술레이만의 무덤은 아아모 남쪽의 산비탈 양지바른 곳에 있다. 다른 다르푸르의 핵심적인 정치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소롱은 복잡한 가계 출신으로, 아버지는 아랍인이고 어머니는 푸르인이었다. ‘아랍인’과 ‘아프리카인’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하지만, 다르푸르에 사는 어느 한 개인이 어느 그룹에 속하는지 피부색으로 판단하여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모두 다 수백 년 동안 그곳에 살았고, 모두 다 이슬람교도다. 다르푸르 지도를 보면 넓은 지역을 가로질러 갈겨 쓰여진 종족 이름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이는 다르푸르에 사는 삼십 개 이상의 종족 그룹 중 하나가 어떤 지역에 배타적으로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쉽게 오해되는 것과 달리, 내부 이동, 혼합, 부족간 결혼의 긴 역사가 있었으므로 종족의 경계는 단지 편의상 붙인 이름일 뿐이다. 개인이나 심지어 그룹 전체가 하나의 이름표를 떼어내고 다른 것을 붙일 수 있다. 영국이 이 지역을 침략했을 때 그들은 최고 족장이 정밀하게 분할된 종족 그룹에 대한 권위와 그에 상응하는 영토 내의 사법권을 지녔다고 가정하는 게 편리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다르푸르 사람들은 이러한 허구에 동의했고, 이는 영국이 소수의 영국인 식민지 관리만으로도 다르푸르를 통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토착적인 행정’ 체계가 작동하도록 하기 위한 열쇠는 각 그룹에게 영토(또는 다르)를 나눠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확한 토지소유권은 아니었지만 최고 족장은 토지 거주권을 할당받았다.1) 1980년대 가뭄 때까지는 어느 종족 출신이든 토지를 경작하려고 새로 온 사람에게 줄 땅이 충분했다. 유목민은 이러한 체계에서 예외였다. 유목민 그룹은 사실상 잘 정의된 지역을 점유한 목자인 것처럼 주로 묘사되지만, 다르푸르에는 자룰족의 쉐이크 히랄처럼 몇몇 진짜 유목민 그룹이 존재했다. 그들은 다르푸르 중남부의 건조기 목초지와 북부 사막 주변의 우기 목초지 사이 굉장히 먼 거리를 이동했다. 1970년대 자파르 니메이리 사회주의 정권2)이 파타 보르노란 이름의 마을을 만들면서 (우리는 이곳에서 아아모를 찾기 위한 길을 떠났다) 자룰족에게 ‘농촌인민평의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투표를 위해 등록하거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한 장소로서 단지 행정적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자룰족은 가축 떼를 방목하기 위해서 이동성에 의존했고 푸르의 농장과 툰주르 마을주민 사이의 이동로를 가로질러 산허리에서 낙타를 방목해야 했다. 쉐이크 히랄은 그가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다르푸르의 ‘도덕적인 지도’가 무엇인지 설명했다. 그것은 바둑판을 닮은 것인데 붉은 네모는 농장이고 하얀 네모는 그들의 가축 떼를 방목할 수 있는 목초지였다. 그는 “풀과 비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알라가 주신 곳이고 나의 집이다”라고 말했다. 과거 다르푸르의 통치자였던 아흐메드 디라이지 - 그는 그 후로 오랫동안 반대파의 정치지도자였다 - 는 그의 아버지이자 푸르의 샤타이(샤타이는 최고 족장의 또 다른 이름이다)였던 이브라힘이 어떻게 제벨 마라 산의 남쪽 비탈에 있는 그의 마을 카르굴라에서 쉐이크 히랄 일족과 낙타를 환대했는지 회상했다. 샤타이 이브라힘은 자룰족을 환영하기 위해 소를 잡기도 했다. 자룰족은 수확이 끝난 땅에 낙타를 방목했고 따라서 땅을 기름지게 했고, 마을 사람들은 곡식을 시장으로 나르는 것을 도왔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히랄은 어린 낙타 두 마리를 내놓았다. 다르푸르의 다른 많은 아랍인들처럼 히랄은 종종 인종주의적인 용어를 썼다. 예를 들어 푸르와 툰자르 농민들을 주르가(검은색)이라고 불렀다. 반대로 농민들은 베두인[유목생활을 하는 아라비아인]을 야만인이고 이교도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두 공동체는 서로 서로 의존했고, 주도적인 가족들은 서로 다른 공동체의 사람과 결혼했다. 토지가 없는 자룰족과 다른 소수의 유목민 그룹은 농민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이동과 동물의 방목을 허용하는 관습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사회적 지리적인 질서에 의존했다. 이는 수십 년 동안 별탈 없이 작동했지만 1980년대 가뭄, 사막화, 농장의 확대는 이러한 권리를 위협했다. 쉐이크 히랄의 도덕적인 지도가 어지럽혀지기 시작했다. 질서가 혼돈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그는 변화를 꾀하느니 죽음을 선택하고자 했다. ‘토착 행정’은 값싼 지역정부였다. 족장은 약간의 수입을 얻었고, 지역의 전제정을 통해 보상을 받았다. 1956년 수단이 독립을 이루자 뒤이어 세워진 정부들은 경찰, 학교, 병원 같은 지역서비스를 세우려고 시도했다. 쉐이크와 나지르의 위치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그들이 한 일을 대체하기 위해 ‘인민평의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하르툼[수단의 수도]은 결코 자금을 제공한 적이 없고 1980년대 초기까지 지역정부는 파산 상태였다. 다르푸르의 통치자는 산적에 대항해 경찰작전에 착수하기 원하면 세계은행이나 원조기관이 지원하는 두 종류의 농촌개발프로젝트에 쓰이는 차량과 연료를 징발해야 했다. 그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부족간 회의를 열길 원하면 부유한 시민들에게 비용을 대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1984-85년 가뭄과 기근이 발생하자 다르푸르에서는 연쇄적인 지역분쟁이 분출했다. 전체적으로 목축자 그룹이 농민들과 대립했고, 대립은 감소하고 있는 자연자원을 위한 쓰라린 투쟁이 되어갔다. 정부는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인민들은 스스로 무장했다. 수천 마리의 낙타 떼는 도살 전에 백만 달러 이상에 달한다. 웬만큼 순진하지 않으면 가축을 보호하는 데 자동식 라이플을 사지 않을 목축자는 없었다. 1989년 화해를 위한 회의가 열렸으나, 권고안은 결코 이행되지 않았다. 중앙정부의 역할과 지리적 조건 또한 1989년 이슬람주의자들은 하르툼의 사디크 알-마흐디 정부를 무너뜨렸다 (니메이리가 물러난 일년 후 1986년 사디크는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다).3) 국가의 지배자는 독실하고 무자비한 군인 오마르 알-바시르였고, 그는 수단 이슬람정당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하산 알-투라비와 쉽지 않은 동맹을 지배했다. 이슬람주의자가 권력에 앉게 되자 다르푸르 지방정부는 잡아들인 범죄자를 포악하게 처벌함으로써 - 처형, 무장강도 시체의 공개전시, 도둑질한 자의 신체절단 - [사회경제적인] 곤궁을 보충하려고 했다. 1994년 정부는 과거의 토착행정 위원회를 다시 도입하고 족장들에게 영토를 할당했다.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아무런 자금도 없는 상태에서 (이제 극히 모자라진)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부활한 토착 행정 권위와 도처의 무장한 주민들은 정부의 이런 방침을 지역 수준의 종족청소를 위한 헌장으로 삼았다. 행정개혁 직후 다르푸르의 가장 서부지역에서는 또 다른 살인이 발생했다. 따라서 현재 분쟁의 많은 부분은 토지에 대한 권리와 지역 행정의 결핍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중앙정부 역시 이를 무시하거나 조작함으로써 다르푸르의 참상에 같은 정도로 결합하고 있다. 다르푸르의 지리적 조건은 여러 모로 불리하다. 엘 제네이나의 큰 도시는 다르푸르의 가장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차드 국경과 가까우며, 아프리카 대륙의 어느 도시보다도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다. 다르푸르의 이 지역은 지배 그룹의 이름을 따서 보통 다르 마살리트라고 불리며 1922년에야 술탄과 영국의 협정에 따라 수단으로 흡수되었다. 쇠락한 궁전 안에서 살고 있는 손자는 최근에도 종종 그가 여전히 수단으로부터 분리될 권리가 있다는 농담을 하며, 벽에 수단이 아닌 다르 마살리트와 아프리카의 지도를 걸어두었다. 하르툼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삼 일간의 여정 후 다르푸르 남부의 니알라에서 끝난다. 엘 제네이아에 가려면 만약 제벨 마라 산의 빗물이 흐르는 개울 때문에 길이 막혀 있지 않다면 최소한 하루 더 차를 타고 가야한다. 하르툼은 다르푸르를 무시해왔다. 다르푸르의 인민은 다른 지역에 비해 교육, 보건, 발전지원을 덜 받았고 행정관청도 더 적다 - 그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서기 위해 이십일 년 전 무기를 들었던 남부인조차도 더 나은 대접을 받았다.4) 다르푸르 내에서 아랍인과 비아랍인은 똑같이 주변화되었고, 그들 그룹의 지도자들이 하르툼의 무관심이라는 공통 원인을 깨닫지 못한 게 다르푸르의 비극이다. 다르푸르가 차드와 리비아의 국경에 자리잡고 있다는 게 또 다른 지리적 불행이다. 1980년대 가다피 대령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주변 사바나 지대의 ‘아랍벨트’를 꿈꿨다. 차드 북부의 아우조우에서 출발해서 차드의 통제권을 획득하는 게 가다피 구상의 핵심이었다. 그는 1987-89년 차드에서 군사적 모험을 연속해서 감행했고 리비아가 지원하는 차드 분파는 다르푸르를 배후기지로 활용했으며 지역 주민의 농작물과 가축을 마음대로 조달했다. 최소한 그들은 차드-프랑스 연합군의 침입을 유발했다. 다르푸르의 수많은 총은 그들 분파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가다피의 전쟁방식은 팽창적이었다. 그는 불만 있는 사바나 지대 아랍인과 토렉인(말리인)을 모집했고 그들을 무장시켰고 그의 공세에서 선봉으로 싸울 이슬람군단으로 바꾸어냈다. 이슬람군단에는 수단 서부에서 온 아랍인이 있었고, 그들 중 다수는 마흐디즘5)을 신봉하는 안사르 분파의 지지자였다. 안사르는 1970년대 니메이리 대통령이 강제로 추방한 인물이다. 리비아는 1988년 오아디 도움 지역에서 빈틈없는 차드 군대에게 패배했고 가다피는 실지를 회복하겠다는 꿈을 포기했다. 그는 이슬람군대를 해체하기 시작했지만, 무장력을 갖추고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 가장 중요하게도 - 악독한 아랍지상주의를 소유한 군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슬람군단의 유산은 다르푸르에 살아 있다. 잔자위드의 지도자들은 그들 중에서 나왔고, 리비아에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니메이리에 의해 추방된 인사르 분파 사람들은 니메이리가 전복된 1980년 대 중반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쉐이크 히랄을 만나고 몇 주 후 나는 사막에서 낙타를 지키는 그의 아들을 찾아 나섰다. 1987년 리비아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아랍동맹이라고 알려진 정치 블록의 형성을 주도했다. 한 측면에서 보면 아랍동맹은 불리한 처지에 있는 수단 서부 그룹들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단순한 정치적 연합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새로운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의 전달수단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과거의 인종주의적인 용어는 다르푸르에서 심상치 않은 징조가 되기 시작했다. 아랍동맹은 수단 국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곧 [다르푸르 이슬람과] 매우 이질적인 나일강 유역의 아라비즘을 꽉 틀어쥐었다. 1980년대 말 다르푸르의 전쟁은 토지에 대한 분쟁을 넘어섰다. 그것은 수단에서 새로운 아랍 이데올로기를 건설하는 첫 단계였다. 다우드 볼라드의 비극 현재 다르푸르의 전쟁을 ‘아랍인’과 ‘아프리카인’의 전쟁으로 설명하지 않는 새로운 방식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이러한 묘사는 이십 년 전이라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종족성과 시민성에 대한 다르푸르의 관념은 여전히 다르푸르의 술탄국가와, 그 후 지중해를 향해 서쪽으로 뻗어나간 연속적인 수단 국가들로부터 물려받은 게 뭉뚱그려져 녹아 있는 상태였다. 짧지만 극적인 경력을 지닌 다르푸르의 정치 지도자 다우드 볼라드의 사례는 ‘아프리카인’과 ‘아랍인’이라는 용어가 현재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볼라드는 자신 세대의 지도적인 젊은 이슬람주의자 중 하나였지만 하르툼 대학을 떠나고 존 가랑이 이끄는 수단인민해방군(SPLA)에 참여한 후 정치적 이슬람을 포기했다. SPLA의 이데올로기는 볼라드가 한때 투사로서 신봉한 이슬람주의 교리와 거리가 가장 먼 것이었다 - 그리고 이슬람주의 교리에 대해 이보다 더 적의가 넘치는 것도 없었다. 가랑은 남부인이고 그의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은 수단 남부가 분리된 국가를 세워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가랑 자신은 분리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수단의 비아랍인이 수적으로 다수를 형성하며 - 남부인과 북부의 주변화된 그룹, 예를 들어 다르푸르인들과 동맹을 이루어서 - 그들이 비종교적이고 다원적이며 통일된 수단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가랑은 누바와 에티오피아와 가까운 나일강 유역 지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북부 수단 주변의 착취 받는 비아랍 공동체에서 신병을 충원했다. 1992년 수단 정부는 성전의 기치를 들고 누바 지역 전체를 소개하려는 사상 최대의 공세에 돌입했다. 공세는 실패했고 누바 지역은 2004년 5월 케냐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의 더 넓은 틀 내에서 온건한 자율성을 달성했다. 볼라드와 지역의 은밀한 네트워크는 다르푸르에서 가랑의 입장권이 되었다. 가랑은 누바와 푸른 나일강 지대에서 활동하면서 다르푸르에서 봉기를 시작할 목적으로 1991년 다르푸르에 작은 규모의 원정군을 배치했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볼라드와 그의 부대는 건기 동안 먼 거리를 가로질러야 했다. 이용할 수 있는 물은 깊은 우물 속에 있을 뿐이었고, 마을에서는 이 물을 조심스럽게 보호했다. 게다가 가축을 키우는 아랍인 그룹들이 이동 경로의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고, 그들은 SPLA에 대해 극히 적대적이었다. 정부는 정규군과 아랍인 베니 할바의 민병대를 활용해 볼라드 부대를 신속히 추격했다. 전투원 소수만이 수단 남부 뒤에 있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을 통해서 탈출했고 한 달 동안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볼라드는 사로잡혔고 그 지역의 통치자 알-타옙 이브라힘 대령의 심문을 받았다. 이브라힘은 시카 또는 쇠막대기라고 알려진 군의관이자 이슬람주의자였다. 그런 별명은 그가 하르툼 대학의 이슬람주의 지도자 - 바로 다우드 볼라드의 호위대로 활동할 때 학생 시위에 대해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생겼다. 둘이 다시 만났을 때 기록은 없다. 그 후 아무도 볼라드를 본 사람은 없다. 최악의 문제는 그의 일기를 빼앗긴 것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은밀한 네트워크의 모든 사람의 이름과 세부사항이 적혀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과 ‘유령의 집’으로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은 심문자들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매우 무기력해졌고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그들의 모든 움직임이 계속 감시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말이다. 한 세대의 반대파의 지도자들이 절멸되거나 중립화되었다. 그 후 다르푸르의 급진적인 지도자는 SPLA 소속이라고 의심받았다. 그들은 그러한 의심 때문에 자신들 전체가 제거되거나 다른 해를 입을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SPLA가 모든 저항투쟁을 지속했으므로, 수단 군대는 그러한 의혹을 제기할 수 있었고 국제적인 지지를 얻었다. 급진적인 지도자 역시 ‘아랍’ 정권의 ‘아프리카인’ 희생자라는 단순한 용어가 남부에 대한 외국의 동정심을 얻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증명되었으므로 그러한 용어로 자신의 참상을 설명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슬람 개혁의 실상 ‘아프리카인’이라는 이름표는 1990년대 동안 국제 지지자들에게 잘 통했으나 수단에서는 거의 강점이 없었다. 하나의 이유는 급진 이슬람이 유행했고 많은 다르푸르인에게 호소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하산 알-투라비가 주도하고 하르툼의 정권이 실행한 정치적 실험이 성공한 결과다. 역사적으로 수단에서 정치적 이슬람은 나일강에서 기원한 아랍화된 엘리크의 지배를 받았고 이집트와 강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것은 보수적인 운동이었고 모든 수단의 지배자들 -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 이 신념으로 삼은 아랍화와 동일했다. 그러나 투라비는 이슬람주의 운동의 의제와 지지자를 확대했다. 예를 들어 그는 여성이 이슬람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현재 하르툼 대학 학생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그는 서부 수단인과 서아프리카 이슬람을 인정했고 예를 들어 19세기 초반 풀라니족[서아프리카의 세네갈에서 나이지리아 및 카메룬에 걸쳐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 접하고 내륙을 횡단하며 10여 개의 부족군으로 산재하는 대종족. 인구는 약 500만 이상으로 추정된다]의 성전과 마그레브[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의 총칭]의 방랑하는 수피 학자들을 포용했다. 투라비는 모든 독실한 이슬람교도에게 시민권을 확대할 것이라고 보장하면서 펠라타라고 알려진 서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서부 수단인의 신분을 크게 변혁했다. 펠라타라는 그룹은 수백 만 명에 달하며 하우사와 풀라니 종족으로 구성되었고 그들의 선조는 나이지리아, 말리, 니제르에서 왔으며 메카를 향한 순례 과정이나 식민지 시대 목화 산업에서 일하기 위해 수단에 정착했다. 펠라타는 신앙심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1989년 이슬람주의 쿠데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그들은 수단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투라비는 펠라타 쉐이크들의 신분을 상승시켰고, 장기간의 예외상태를 바꾸어 새로운 선거구를 만들었다. 다르푸르에서도 푸르와 마사리트를 비롯한 다른 그룹의 종교지도자와도 손을 잡았다. 다르푸르의 통치자 알-타엡 이브라힘은 푸르인의 신앙심을 분명한 말로 칭송했고 푸르 언어를 배웠다. 공통의 종교적 신념을 통한 공통의 시민성이란 개념은 당분간 다르푸르의 민족적 해방을 위한 경로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의 약속은 허풍이었다. 실제로는 거의 바뀐 게 없다. 다르푸르인 가운데 오직 소수만이 정당과 행정부에서 높은 위치로 부상하였다. 민족 정부는 그 지역의 아랍인과 비아랍인을 상대적으로 공평하게 대우했지만, 지속적으로 다르푸르를 무시하는 맥락에게 그렇게 했을 뿐이다. 지역정부는 여전히 파산상태였고, 산적행위는 여전히 수두룩했다. 가뭄과 사막화는 계속 지역분쟁을 유발했고, 지방의 통치자는 그것을 멈출 수 없었고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 않아 수단 ‘서부인’은 그들의 이슬람이 결국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랍의 가치와 문화를 받아들일 때만 진정한 이슬람교도로 존중되었다. 1989년 반란 후 십 년 동안 대통령 바시르와 변덕스러운 투라비의 차이는 더더욱 분명해졌다. 투라비는 아프리카와 중동에 걸친 혁명이라는 야심이 있었다. 바시르는 수단을 아랍화한 엘리트의 소유물로 보는 전통적인 시각을 보유했다. 그러한 차이는 이데올로기, 대외정책, 헌법 그리고 궁극적으로 권력을 둘러싼 투쟁으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결국 바시르가 승리했다. 1999년 그는 민족의회 대변인 자리에서 투라비를 해임했고 나중에는 그를 체포했다. 이슬람주의 동맹은 반토막이 되었다. 행정부의 대다수 그리고 군대와 비밀예산으로 운영되는 다양한 안보기관을 통제하는 안보엘리트는 바시르 옆에 머물렀다. 학생과 지역 이슬람정당 세포 대부분은 투라비와 함께 반대파가 되었고 인민회의의 분리를 이루었다. 다른 일들 중에서도 투라비의 해임은 바시르에게 미국에 접근하고 SPLA와 더욱 진지한 평화협정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구실을 제공했다 - 이는 2004년 케냐에서 평화협정을 조인하는데 이르렀다.6) 다르푸르의 봉기 바시르와 투라비의 분열은 다르푸르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투라비가 지도하는 이슬람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 많은 다르푸르 사람들은 정부를 떠났고 스스로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2000년 5월 그들은 독립 이후에 세워진 민족정부에서 다르푸르 지역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나 상세히 설명하는 보고서를 냈다. 그것은 나라 전체를 자극했고, 북부 수단이 종교 노선보다는 인종적으로 양극화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보고서는 다우드 볼라드를 순교자로 묘사하면서 이슬람주의자와 다르푸르의 비종교적인 급진주의자들 간의 상징적인 화해를 표현했다. 그로부터 비종교적 급진주의자들의 동맹 - 그들은 다르푸르해방전선(DLF)을 구성하기 위해 분주했고, DLF는 2003년 수단해방군(SLA)으로 이름을 바꿨다 - 과 이슬람주의 경향의 정의평등운동(JEM)간의 이루어지지 않을 듯하던 동맹이 이루어졌다. 누구도 반역을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수단의 정치를 관측하는 사람들은 - 나를 포함하여 - 다르푸르의 고요함에 매우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투사들이 거대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조차 단지 울부짖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분명하게 수단 정부는 놀란 것처럼 보였다. 처음 몇 달 동안 수단 정부가 내놓은 평화 제안은 군사적 준비를 위해 시간을 벌려는 위선적인 행동일 따름이었다. 2003년 4월 반란자들은 엘 파셔 공항을 공격했고, 대여섯 대의 군용비행기를 파괴하고 공군 장군을 납치했다. SPLA는 지난 20년 동안 이런 종류의 일들을 해내지 못했다. 다르푸르의 반란은 이동성과 훌륭한 정보체계를 지녔고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바시르에게 매우 중요한 수단 국가의 중심축 - 1983년 이후로 전쟁을 운영했던 안보엘리트들의 비밀결사 - 은 여전히 건재했다. 수단의 지치고 넓게 퍼져있는 군대를 능가하는 반란에 직면하여 이들 안보엘리트 그룹은 무엇을 해야할지 정확하게 알았다. 남부의 전쟁 동안 여러 번에 걸쳐 그들은 간편한 봉기진압 방식에 착수했다 - 그들은 기근과 대지의 초토화를 무기로 선택했었다. 매번 그들은 지역 민병대를 찾아서 군수품과 무기를 제공하고 작전지역을 윤리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으로 선언했다. 1991년 SPLA에 대항하는 데 활용된 베니 할바의 푸르산(기병대)는 다르푸르에서 그들이 활용한 수단인 게 분명하다. 과거 이슬람군단을 포함하는 북부의 낙타 유목민 역시 그러한 무리에 참여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 - 잔자위드 - 가 ‘G3’(라이플총)과 자와드(말)이란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지만, ‘폭도’ 또는 ‘무법자’를 가리키는 수단의 사투리이기도 하다. 고삐 풀린 민병대는 안보 비밀결사에게 추가적 이득을 준다. 즉 SPLA와 거의 타결을 앞둔 평화협정을 탈선시키고 그들이 비밀예산으로 운영되는 안보기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또한 민병대는 그들이 미래에 전쟁범죄로 회부될 수 있는 책임을 면제해준다. 잔자위드가 수행하는 만행은 푸르, 툰주르, 마사리트, 자가와의 대변자들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체계적이며 지속적이다. 그 효과는 - 만에 하나 일부러 목적으로 삼은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 반란자들의 군사적 위협에 비해 크게 불균형적이다. 집단적인 강간과 희생자에게 낙인을 찍는 행위는 그들이 계획적으로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르푸르에서 과실수를 잘라내고 관개수로를 파괴하는 것은 토지에 대한 농민의 요구를 박멸하고 그들의 생활을 파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인 폭력의 수준에서 보자면, 이는 중앙정부가 1992년 누바에서 벌인 성전이나 수단 남부의 유전지대의 성가신 주민을 일소하여 자연자원을 확보하겠다는 냉정한 결정처럼 한 정부가 주도하는 집단학살 전투는 아니다. 이는 안보 비밀결사의 일상적인 잔혹성이며 오랫동안 권력을 누리며 말라버린 인간애의 표현이다. 그것은 습관적인 폭력의 집단학살이다. 농민과 유목민 사이의 안정적인 질서와 관대한 상호성이 있던 쉐이크 히랄의 세계는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사라졌다. 무자비한 빈곤은 잘못된 정부와 수입된 인종주의에 때문에 폭력으로 변화했다. 집단학살과 절박한 기근에 직면해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사 히랄과 지원자들을 전쟁범죄로 회부하는 법적인 행동은 미래에 이러한 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죄를 비난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잔자위드의 살인적인 전투로 다르푸르에서 살아온 베두인이 역사적인 희생자라는 사실이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7) 지난 이십 년 전 다르푸르의 인민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빈곤과 기아, 전염병에 직면해 있다. 원조기관들은 식량지원이 없으면 1984년 가뭄 이후 대규모 기아 사태 - 백만 명이 사망했다 - 와 같은 묵시록과 같은 전망이 현실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식량은 도착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 약 십만 명 - 다르푸르 사회는 인민들의 만만치 않은 생존기술 때문에 붕괴하지 않았다. 그들은 식량 여분이 있었고, 식량과 일 또는 자비를 찾아서 매우 먼 거리를 이동했고, 무엇보다도 숲 지대에서 야생식량을 모았다. 현재는 식량 여분과 동물을 빼앗겼고 다섯 가지의 야생풀과 열한 가지 씨앗과 약간의 초근을 채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이 수용소를 떠난다는 것은 강간과 수족절단 또는 죽음을 의미한다.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가 삼십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예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PSSP 수단 소사 1820년 이집트가 수단을 침략하다. 1876년경에는 이집트 군대가 수단의 전 지역을 장악한다. 1879년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이집트를 점령하다. 이들은 동시에 수단을 장악하고 세금을 거둔다. 1881년 무함마드 아흐메의 지도로 외세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다. 영국군이 그를 분쇄하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영국군이 패한다. 1885년 무함마드 아흐메드의 세력이 하르툼을 점령하다. 그들은 영국인 고든 장군을 처형하고, 최초의 독립 정부를 수립한다. 1898년 옴두르만 전투. 수단군이 키치너 장군의 영국군에게 학살당한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하르툼에서 남쪽으로 500마일 떨어진 파쇼다에서 충돌한다. 프랑스가 결국 물러서고, 영국은 아프리카의 다른 식민지를 포기하는 대가로 이집트와 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보장받는다. 1914년 영국이 이집트와 수단을 직접 통제한다. 총독부는 수단을 남과 북으로 분리한다. 당시에 한 총독은 이렇게 말했다. “남부 주들은 현대 세계에 노출될 준비가 안 되었다.” 1920년대 영국의 “폐쇄구역” 정책으로 수단 북부인들이 남부로 여행하거나 남부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게 금지된다. 1930년 영국은 수단 남부인들이 북부의 무슬림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민족이라고 선포한다. 수단 남부를 영국령 동아프리카로 통합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1946-7년 영국이 수단 남부 농장을 북부 엘리트에게 넘겨준다. 남부와 일체 협의가 없었다. 영국은 새 입법부에서 수단 남부를 대표하던 사람들을 지명했다. 1956년 수단, 독립을 쟁취하다. 그러나 영국이 조장한 분열이 전쟁의 발단이 된다. 1956년 수단, 독립을 쟁취하다. 그러나 영국이 조장해 놓은 분열상이 전쟁의 발단이 된다. 독립 직후에 남부와 북부 사이 전쟁이 발발한다. 1969년 군사쿠데타로 북부 중앙정부가 전복되다. 쿠데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모델로 삼은 자유장교조직이 공산당의 지원을 받으며 성공한 것이었다. 1972년 아디스 아바바 협정으로 남부와 북부간 첫 번째 평화협정이 체결되다. 1980-3년 자파르 니메이리 정부의 억압에 저항하는 투쟁의 물결이 일어나다. 그는 지지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이슬람의 성법을 공포했고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986년 IMF가 수단의 “파산??을 선언하며 모든 차관을 회수해 버린다. 5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한다. 3년 후에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다. 1991년 미국은 수단 정부가 미국의 이라크전쟁에 반대한 것을 복수하려고 곡물 선적을 중단해 버린다. 당시는 기근이 닥쳤던 시기였다. 1992년 IMF가 강요한 재정삭감정책과 수단 정부에 항의하는 파업과 폭동이 계속되다. 1993년 우마르 알-바쉬르(Umar al-Bashir)가 대통령으로 공표되다. 그가 여전히 수단의 대통령이다. 2005년 수단 중앙정부와 수단인민해방군간의 평화협정으로 1983년 재개된 남부와 북부간의 2차 내전이 종전이 선포되다. 1) [역주] 수단 분쟁의 역사적 모형은 이집트와 영국이 수단을 식민지로 삼기 전의 역사부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아랍과 북부 이슬람인에 기반을 둔 국가들은 남부를 자연자원과 노예의 원천 곧 후배지로 취급했다 (남부는 수많은 언어와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중 가장 큰 그룹은 딩카와 누에르였다). 이러한 모형은 19세기 이집트 지배 시기 동안 지속되었고, 19세기 말 잠시 등장한 수단 이슬람주의 국가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동안 북부 국가가 남부 후배지를 착취하는 모형이 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군대의 개입, 지도자의 보호권, 근거가 불확실한 시민권 부여라는 특징도 형성되었다. 이러한 모형은 1899-1947년 영국 식민지 시기 동안 완화되지 않았다. 영국은 북부 엘리트집단의 이슬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제거하려고 그들을 경찰, 군대, 관료로 등용했다. 하지만 남부인을 교육하거나 국가기구에 등용할 유인이 없었다. 1920년대 영국은 '폐쇄지구법령'을 제정하여 남부인이 아닌 사람이 남부에 사는 것을 금지했다. 이는 양면적인 효과를 발휘했는데, 한편으로는 북부 엘리트가 남부의 소유권과 권력을 차지하는 결과를 예방했지만, 인위적으로 분할로 인한 불균등한 발전과 사회적 차이의 확대를 막지 못했다. 또한 1930년대 영국은 '남부정책'을 제정하여 남부는 '아프리카' 노선을 따라 발전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영국은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남부의 고유한 권력구조, 법률, 관습을 활용하고자 했다. 남부는 북부의 상대적으로 균일한 법률, 국가체계에 비해 더욱 산만한 구조를 지녔고, 이러한 정책은 두 지역의 차이가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식민지 경제정책 역시 불균형한 발전에 기여했다. 수출세는 북부에 근거를 둔 중앙정부로 들어갔고, 북부 엘리트는 정부계약을 통해서 국가기구를 자본축적을 위해 활용할 수 있었으며, 중요한 경제프로젝트는 북부에서 일어났다. 독립에 가까워질수록 북부와 남부의 불균형이라는 다루어지지 않은 문제는 분쟁의 원천이 되었다. 본문으로 2) [역주] 수단에서 1969년 5월 '자유장교조직'이 계획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 조직은 1950년대 이집트 나세르를 모델로 삼았다. 1960년대 중반 이후로 수단공산당(SCP)은 이 조직을 지지했고, 따라서 니메이리의 혁명평의회는 중간급, 급진파 아랍인 장교들로만 권력을 장악한 게 아니었다. SCP가 군부가 직접 손을 잡은 것은 수단의 노동조합, 전문가연합, 학생들 속에서 기층을 충원했던 기존의 활동과 단절을 의미했다. 따라서 SCP 내에서 깊은 분열과 불확실성이 증대되었다. 당의 고참 활동가들은 소련에 대한 충성과 앞으로 일어나야 할 진정한 혁명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의 필요성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정통 노선을 따랐다. 그들은 니메이리 쿠데타가 '개혁적'이며 지원할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였지만,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민족주의 군사장교가 주도하는 '인민전선' 유형의 동맹에 반드시 긴밀히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통노선을 따르지 않던 공산주의자 장교들의 영향 때문에 긴밀한 관계가 발전되어 나아갔다. 그래서 SCP는 최소한 일 년 동안 니메이리 정권의 '혁명 재건' 계획에 많은 지적인 자극과 일상적인 자문을 주었다. 1970년 11월 정권이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고 공산당의 활동을 금지시키자 정통파들은 두려움을 느꼈지만 여전히 '협조주의자'들이 존재했으므로 당의 분열은 더 깊어졌다. 특히 1971년 해임된 공산주의자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자 정통파(상대적으로 소수인 집행위원회)는 '모험주의'라고 비난했고 다수파(상대적으로 다수인 중앙위원회)는 정당하다고 옹호했고, 이는 당의 분열을 결정적으로 심화했다. 본문으로 3) [역주] 니메이리 정권 역시 1980년대 초반에 이슬람 지향적인 정책전환을 단행했다. 1977-78년 수단의 경제위기가 닥치자 IMF와 미국 국제개발처(USAID)가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미국과 IMF가 금융지원의 조건으로 강요한 것은 예산축소와 국유화된 기업의 사유화였다. 이 때 니메이리 정부는 안정성을 위해 이슬람 정치정당에 대한 개방정책을 실시했다. 미국와 IMF처럼 그들의 지원은 꼬리를 물게 되었다. 이슬람주의를 지향하는 법률개혁, 이슬람은행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슬람 은행은 대규모 기계화농업 계획에 대한 투자를 모색했고, 자급적인 수단 농업을 수출용 환금작물로 바꾸길 바랬다. 이러한 계획은 프로젝트가 예정된 지역의 인민을 강제 퇴거시키려는 동기를 유발했다. 다른 자연자원이나 거대프로젝트 역시 분쟁의 원천이 되었다. 쉐브론이 세운 파이프라인과 정유소는 북부에 있었고 남부의 분노를 일으켰다. 종글레이 운하를 건설해서 남부의 물을 북부로 전환한다는 제안은 남부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1983년 내전이 재발하자 종글레이 운하는 남부 게릴라운동의 목표물이 되었다. 본문으로 4) [역주] 수단의 일차 내전의 출발점은 1955년 토리토에서 발생한 군대폭동과 폭동참여자가 중심이 된 수단아프리카민족주의연합(SANU)의 게릴라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다른 아프리카 나라의 정치적 지지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프리카통일기구(OAU)를 구성한 정부들은 수단의 게릴라운동을 분리주의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게릴라운동은 내부 문제로 분열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장해제, 협상, 선거경쟁을 원했고 1964년 민간정부에 참여하길 바랬으나, 다른 사람은 연방국가의 건설이나 분리를 원했다. 남부 운동은 일련의 내부 쿠데타를 겪었고 그 결과 남부수단해방운동(SSLM)이라고 불린 새로운 조직이 권력을 획득했다. 그들은 에디오피아, 우간다로부터 새로운 무기를 지원 받았고 약간의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니메이리 정권과 SSLM의 협상이 이뤄져서 1972년 아디스 아바바 협정으로 정점에 달했다. 두 번째 내전 역시 1983년 1월 군대폭동이 발단이었다. 같은 해 7월 남부인민해방운동(SPLM)이 조직되었고, 지배적인 분파는 존 가랑이 이끌고 멩키스투 정권의 에디오피아에 기지를 둔 남부인민해방군(SPLA)이었다. SPLA는 수단 정권에 반대하는 다른 집단들과 결합을 추구했고 남부의 분리보다는 수단 전체의 혁명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입장은 연방국가 건설이나 완전한 독립을 지지하는 세력을 포함하는 SPLA의 분열을 낳았고, 중앙정부는 SPLA를 약화하려고 존 가랑의 반대파를 지원했다 (이는 중앙정부가 분리주의자 집단을 지원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낳았다). 정부는 봉기진압 전략의 하나로 부족 민병대와 아랍인 유목민을 활용했다. 이는 민간인 주민에 대한 공격과 보복의 악순환을 낳았으며, 이 과정에서 SPLA 역시 민간인에게 과잉폭력을 행사한 당사자가 되었다. 결국 악순환은 내전을 민간인에 대한 전쟁으로 바꿔놓아 버렸다. 1991년 멩키스투 정권이 붕괴하자 SPLA의 태도는 방어적으로 바뀌었다. 1990년대 동안 SPLA 내부의 서로 다른 분파들간 최악의 전투가 벌어졌다. 반복되는 전투, 전쟁이 유발한 기근, 원조의 정치적 활용 때문에 1990년대에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SPLA 분파는 2002년에 이르러서야 재결합했고, 2004년 케냐에서 남부와 중앙정부 사이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본문으로 5) [역주] 이슬람 시아파 교리의 핵심은 숨겨진 마지막 12번째 이맘인 마흐디의 재출현이라는 재림 사상이다. 인도자라 불리는 무함마드 알-문타자르(알-마흐디)에 대한 역사는 신비롭고 기적적인 모습을 띤다. A.D 868년에 태어난 알-마흐디는 아버지이자 11대 이맘인 하산 알-아스카리가 자신이 7살 되던 해에 죽으면서 12대 이맘으로 등극하고, 바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시아파는 그가 현재 이라크 사마라에 있는 모스크 아래의 동굴에 스스로 숨었으며, 이 동굴은 밥 알-가이바 혹은 "은폐의 문"으로 불리는 문에 의해 봉인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신이 마흐디를 세상에 다시 보낼 것이고,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재림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 주는 마흐디즘은 또한 많은 나라에서 혁명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슬람 역사 속에서 순니파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많은 반란들은 카르발라 사건의 후세인의 저항 정신과 마지막 이맘의 재림에 대한 이론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실제 19세기 후반에는 수단에서는 무함마드 아흐마드라는 사람이 구세주 마흐디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는 1881년 이집트의 지배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수차례의 승리를 통해 1898년까지 실제 마흐디 국가를 수립했었다. 본문으로 6) [역주] 2005년 1월 9일 알리 오스만 타하 수단 부통령과 존 가랑 수단인민해방군(SPLA) 의장이 케냐 나이로비에서 평화협정에 공식 서명함으로써 2002년부터 시작된 평화협정 체결과정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평화협정에 따라 오는 7월부터 수단 남부는 6년간의 과도기간에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그 후 수단 내에 존속할지, 분리 독립할지를 정하는 투표를 하게 된다. 2) 정부군과 남부 반군의 군대는 6년 자치기간 후 남부가 분리 독립하지 않으면 3만9천명 규모의 단일군으로 통합된다. 3) 하루 생산량 32만 배럴에 달하는 원유 생산수입은 북부의 수단 정부와 남부가 50대 50씩 나눠 갖게 된다. 4) 중앙 정부 내 직위는 북부와 남부에 70대30 비율로 할당하되 아브예이, 푸른 나일, 누바 산악지대 등 3개 분쟁 지역의 지방 정부에는 55대 45로 할당된다. 5) 종교문제는 북부에서는 이슬람 율법(샤리아)이 적용되고 남부 10개 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수도 하르툼에서 샤리아를 적용할지는 의회에서 결정한다. 최종 서명식에는 중재역할을 맡아온 음와이 키바키 케냐 대통령과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 지안프랑코 피니 이탈리아 외무장관도 참석해 증인 자격으로 서명했다. 본문으로 7) [역주] 지난 4월 5일 코피 아난 UN사무총장은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찰총장으로부터 다르푸르 지역에서 벌어진 잔학행위를 주도한 수단인 혐의자 51명의 명단이 포함된 서류를 받았다. 하지만 수단 정부는 주권 침탈 행위라고 격렬하게 반발했다. 바시르 대통령은 국제형사재판소(ICC)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혐의자들은 수단 법정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다르푸르의 전범재판이 ICC로 가는 과정 역시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유엔안보리 이사국들의 반대 때문에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중국은 수단에 4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였으며 자국에 들여오는 원유수입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했고, 수단에 무기와 항공기를 팔아 온 러시아 역시 수단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ICC의 발족 자체를 극력 반대했던 미국은 다르푸르 사태가 ICC로 옮겨갈 경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도 회부될 수 있는 선례가 되는 것을 걱정했다. 미국은 3월 중순까지도 다르푸르 사태를 ICC에 회부하는 대신 수단 인근 탄자니아에 특별 전범 재판소를 설치해 처리하자고 주장하다가 마지못해 ICC 회부를 승인했다. 아프리카연합(AU)은 다르푸르를 감시할 1,900여명의 병력을 파병하고 있지만 국제인권기구나 원조단체들 뿐만 아니라 반군단체조차도 서구의 군대파견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문으로
수단 정부의 간편한 봉기진압전략 번역 임필수 사회진보연대 정책편집국장 [역주] 저자는 저스티스아프리카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케이프혼 지역의 이슬람주의와 적들》(Islamism and Its Enemies in the Horn)의 저자다. 《죽음을 부르는 기근: 수단 다르푸르 1984-85》(Famin that Kills: Darfur, Sudan 1984-85) 개정판이 옥스퍼드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이 글은 〈Counter-Insurgency on the Cheap〉, 《London Review of Books》, Vol. 26 No. 15, 5 August 2004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아프리카 전쟁들을 포괄적으로 다룬 알렉스 드 와알, 〈아프리카의 전쟁들〉, 《사회진보연대》, 2003년 9월호와 세계체계론의 입장에서 아프리카의 위기를 분석한 지오반니 아리기, 〈아프리카의 위기 : 세계체계적인 그리고 지역적인 양상들〉, 《사회진보연대》, 2002년 11월호, 2003년 1-2월호를 함께 참조할 수 있다. 다르푸르의 유목민 공동체 다르푸르의 경치는 지독히도 아름다우며 아아모의 유목민 야영지보다 세월의 변화에 더 완고한 곳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르푸르는 고대 화산이 형성한 산으로 둘러싸인 평원으로 돌투성이 황무지다. 분홍빛 모래로 이루어진 넓은 지역은 계절에 따라 생기는 와디 쿠툼 강 줄기를 나타낸다. 수년 전 나는 자룰족(族)이라고 알려진 아랍 유목민 일족의 나지르(최고 족장)의 손님으로서 그 곳에 머무른 적이 있다. 모래 위에 친 검은색 넓은 천막, 가시나무 잎을 먹는 낙타,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훌륭하게 만들어진 물품들은 민족학 잡지에 등장할 법한 것들이었다. 오늘날 아아모는 다르푸르를 해치고 있는 폭력의 중심지다. 이미 수만 명이 죽었고 수십만 명이 그들의 고향에서 떠나야만 했다. 분쟁의 첫 번째 대학살은 아아모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고, 이때 잔자위드 민병대는 쿠툼 시에서 보호 받고자했던 수십 명의 마을사람을 살해했다. 나는 1985년 나이가 지긋한 나지르인 쉐이크[아리바이 족장] 히랄 무사를 만났다. 그의 텐트에는 유목민으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의 물품인 물병, 안장, 창, 칼, 가죽가방, 오래된 라이플 총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나에게 훌륭한 페르시아 융단 위 맞은 편에 앉으라고 권했고, 수하의 사람에게 은접시 위에 달콤한 차를 내오라고 시켰다. 그는 세상이 끝나가고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당시에 다르푸르는 가뭄을 겪고 있었고 소란스러운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비옥한 산허리 위로 모래를 실어 왔고, 비가 오면 와디 강물은 주변의 비옥한 충적토가 있는 협곡을 깎아냈다. 심지어 항상 낙타 유목민을 맞아주던 마을 주민들은 그들의 이동을 막고 목초지와 우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히랄은 내가 아라비아 사람이 영국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나무랐다. 그는 모든 식민지 관리가 고전적인 아라비아 교육을 받았지 내가 알고 있는 다르푸르 수단인 식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가 마지막으로 환대한 영국인은 쿠툼 시에서 근무한 행정구 부국장 테지거였다고 말했다. 테지거는 다르푸르 최고의 명사수로 유명했다. 당시에는 오직 영국인 관리만 라이플을 소유하도록 허용되었고 사자를 쏘아 죽일 수 있는 힘과 정확성을 지녔다. 1985년 내가 다르푸르를 방문했을 때는 개인이 화기를 소유한 경우가 드물었다. 나지르는 내가 그 곳을 떠날 때 기린 꼬리로 만든 파리채를 주었다. 현재 다르푸르의 남쪽 언저리에서 사자와 기린이 사라지는 이유는 식민지 시대 사냥보다는 오히려 생태적 변화 때문이다. 다르푸르의 숲은 남부 수단과 중앙아시아공화국까지 뻗어있다. 다르푸르 북쪽의 반건조 고원에서는 사바나 지대가 사막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가젤 영양은 가끔씩만 볼 수 있다. 히랄은 나이가 팔십 대였고 깡마르고 구부정하며 거의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일족의 지도자였다. 수피교도[이슬람 신비주의]는 - 다르푸르 사람 대부분은 서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여러 수피교 종파의 신봉자다 - 바카라 즉 신이 준 권능과 축복을 받아들인다. 히랄은 ‘쉐이크의 영토는 신이 주신 것’이라고 믿었다. ‘쉐이크 영토의 등급은 인간이 만든다.’ 그는 나지르라는 공식적으로 우월한 명칭 대신에 더 낮지만 더 의미 있는 쉐이크라는 이름을 고수했다. 그는 다르푸르 넓은 지역에서 그냥 쉐이크 히랄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오늘날 그의 아들 무사의 이름은 더 널리 알려졌다. 무사 히랄은 잔자위드의 지도자며, 그의 이름은 미국 정부가 지목한 전쟁범죄 용의자 명단의 맨 위에 있다. 쉐이크 히랄은 유목민의 삶의 방식을 굳세게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부족의 모든 사람들이 낙타를 소유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손자를 가리키며 ‘저 작은 소년을 보라’, ‘저 소년도 낙타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마도 사실이리라. 그렇게 고생스러운 시절에도 히랄의 가족은 낙타 수천 마리를 소유한 것으로 유명했다. 비록 족장은 낙타를 타기에는 너무 늙고 거의 앞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낙타 떼는 비가 온 후 사막에서 자라는 부드러운 풀을 먹기 위해 북쪽 삼백 마일 위까지 이동했다. 그의 조카는 얼마전 굶주린 일가 사람들에게 식량을 주려고 백 이십 마리의 낙타를 팔았다. 그리고 히랄은 가난한 친척들에게 낙타를 여러 마리 빌려주었고, 따라서 낙타 떼는 그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빨리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우리는 서로 서로 돕는다. 자룰족은 결코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야영지로부터 겨우 한 시간 정도 걷고 난 후 가뭄 동안 낙타와 양을 모두 잃고 농사를 짓기 위해 정착한 한 자룰족의 야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툰주르 그룹(푸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지역의 가장 큰 부족 그룹이다) 출신의 지역 주민들은 그들에게 건조하고 모래투성이 땅을 주었을 뿐이었고, 와디 강 주변의 충적층 토양을 내주지는 않았다. 좋았던 시절에 와디 쿠툼은 북부 다르푸르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땅으로 유명했고, 툰주르는 다른 농민들이 땅의 법적 소유권이 얼마나 중요한가 깨닫기도 훨씬 전에 땅의 소유권을 등록할 정도로 꼼꼼했다. 자룰족족 농민은 분개했고, 약간의 기장을 키우기 위해 건조한 고원지대를 파헤쳐야 했다. 그들의 쉐이크는 체면을 차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저녁 때 그는 우리에게 양고기와 쌀로 된 후한 식사를 대접했고 우리가 쉐이크 히랄의 아들과 낙타를 찾을 수 있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우리가 몹시 배가 부를 정도로 먹고 난 후에도 그는 조카딸에게 ‘다음 코스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 코스는 없었다. 다르푸르의 사막화와 가뭄, 분쟁 영국은 1916년 다르푸르(푸르의 땅이라는 뜻이다)를 정복했고, 술탄 알리 디나르의 군대를 격파했다. 알리 디나르는 17세기 푸르 술탄국의 창건자인 술레이만 소롱의 자손이다. 오랫동안 방치된 술레이만의 무덤은 아아모 남쪽의 산비탈 양지바른 곳에 있다. 다른 다르푸르의 핵심적인 정치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소롱은 복잡한 가계 출신으로, 아버지는 아랍인이고 어머니는 푸르인이었다. ‘아랍인’과 ‘아프리카인’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하지만, 다르푸르에 사는 어느 한 개인이 어느 그룹에 속하는지 피부색으로 판단하여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모두 다 수백 년 동안 그곳에 살았고, 모두 다 이슬람교도다. 다르푸르 지도를 보면 넓은 지역을 가로질러 갈겨 쓰여진 종족 이름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이는 다르푸르에 사는 삼십 개 이상의 종족 그룹 중 하나가 어떤 지역에 배타적으로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쉽게 오해되는 것과 달리, 내부 이동, 혼합, 부족간 결혼의 긴 역사가 있었으므로 종족의 경계는 단지 편의상 붙인 이름일 뿐이다. 개인이나 심지어 그룹 전체가 하나의 이름표를 떼어내고 다른 것을 붙일 수 있다. 영국이 이 지역을 침략했을 때 그들은 최고 족장이 정밀하게 분할된 종족 그룹에 대한 권위와 그에 상응하는 영토 내의 사법권을 지녔다고 가정하는 게 편리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다르푸르 사람들은 이러한 허구에 동의했고, 이는 영국이 소수의 영국인 식민지 관리만으로도 다르푸르를 통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토착적인 행정’ 체계가 작동하도록 하기 위한 열쇠는 각 그룹에게 영토(또는 다르)를 나눠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확한 토지소유권은 아니었지만 최고 족장은 토지 거주권을 할당받았다.1) 1980년대 가뭄 때까지는 어느 종족 출신이든 토지를 경작하려고 새로 온 사람에게 줄 땅이 충분했다. 유목민은 이러한 체계에서 예외였다. 유목민 그룹은 사실상 잘 정의된 지역을 점유한 목자인 것처럼 주로 묘사되지만, 다르푸르에는 자룰족의 쉐이크 히랄처럼 몇몇 진짜 유목민 그룹이 존재했다. 그들은 다르푸르 중남부의 건조기 목초지와 북부 사막 주변의 우기 목초지 사이 굉장히 먼 거리를 이동했다. 1970년대 자파르 니메이리 사회주의 정권2)이 파타 보르노란 이름의 마을을 만들면서 (우리는 이곳에서 아아모를 찾기 위한 길을 떠났다) 자룰족에게 ‘농촌인민평의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투표를 위해 등록하거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한 장소로서 단지 행정적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자룰족은 가축 떼를 방목하기 위해서 이동성에 의존했고 푸르의 농장과 툰주르 마을주민 사이의 이동로를 가로질러 산허리에서 낙타를 방목해야 했다. 쉐이크 히랄은 그가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다르푸르의 ‘도덕적인 지도’가 무엇인지 설명했다. 그것은 바둑판을 닮은 것인데 붉은 네모는 농장이고 하얀 네모는 그들의 가축 떼를 방목할 수 있는 목초지였다. 그는 “풀과 비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알라가 주신 곳이고 나의 집이다”라고 말했다. 과거 다르푸르의 통치자였던 아흐메드 디라이지 - 그는 그 후로 오랫동안 반대파의 정치지도자였다 - 는 그의 아버지이자 푸르의 샤타이(샤타이는 최고 족장의 또 다른 이름이다)였던 이브라힘이 어떻게 제벨 마라 산의 남쪽 비탈에 있는 그의 마을 카르굴라에서 쉐이크 히랄 일족과 낙타를 환대했는지 회상했다. 샤타이 이브라힘은 자룰족을 환영하기 위해 소를 잡기도 했다. 자룰족은 수확이 끝난 땅에 낙타를 방목했고 따라서 땅을 기름지게 했고, 마을 사람들은 곡식을 시장으로 나르는 것을 도왔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히랄은 어린 낙타 두 마리를 내놓았다. 다르푸르의 다른 많은 아랍인들처럼 히랄은 종종 인종주의적인 용어를 썼다. 예를 들어 푸르와 툰자르 농민들을 주르가(검은색)이라고 불렀다. 반대로 농민들은 베두인[유목생활을 하는 아라비아인]을 야만인이고 이교도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두 공동체는 서로 서로 의존했고, 주도적인 가족들은 서로 다른 공동체의 사람과 결혼했다. 토지가 없는 자룰족과 다른 소수의 유목민 그룹은 농민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이동과 동물의 방목을 허용하는 관습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사회적 지리적인 질서에 의존했다. 이는 수십 년 동안 별탈 없이 작동했지만 1980년대 가뭄, 사막화, 농장의 확대는 이러한 권리를 위협했다. 쉐이크 히랄의 도덕적인 지도가 어지럽혀지기 시작했다. 질서가 혼돈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그는 변화를 꾀하느니 죽음을 선택하고자 했다. ‘토착 행정’은 값싼 지역정부였다. 족장은 약간의 수입을 얻었고, 지역의 전제정을 통해 보상을 받았다. 1956년 수단이 독립을 이루자 뒤이어 세워진 정부들은 경찰, 학교, 병원 같은 지역서비스를 세우려고 시도했다. 쉐이크와 나지르의 위치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그들이 한 일을 대체하기 위해 ‘인민평의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하르툼[수단의 수도]은 결코 자금을 제공한 적이 없고 1980년대 초기까지 지역정부는 파산 상태였다. 다르푸르의 통치자는 산적에 대항해 경찰작전에 착수하기 원하면 세계은행이나 원조기관이 지원하는 두 종류의 농촌개발프로젝트에 쓰이는 차량과 연료를 징발해야 했다. 그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부족간 회의를 열길 원하면 부유한 시민들에게 비용을 대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1984-85년 가뭄과 기근이 발생하자 다르푸르에서는 연쇄적인 지역분쟁이 분출했다. 전체적으로 목축자 그룹이 농민들과 대립했고, 대립은 감소하고 있는 자연자원을 위한 쓰라린 투쟁이 되어갔다. 정부는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인민들은 스스로 무장했다. 수천 마리의 낙타 떼는 도살 전에 백만 달러 이상에 달한다. 웬만큼 순진하지 않으면 가축을 보호하는 데 자동식 라이플을 사지 않을 목축자는 없었다. 1989년 화해를 위한 회의가 열렸으나, 권고안은 결코 이행되지 않았다. 중앙정부의 역할과 지리적 조건 또한 1989년 이슬람주의자들은 하르툼의 사디크 알-마흐디 정부를 무너뜨렸다 (니메이리가 물러난 일년 후 1986년 사디크는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다).3) 국가의 지배자는 독실하고 무자비한 군인 오마르 알-바시르였고, 그는 수단 이슬람정당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하산 알-투라비와 쉽지 않은 동맹을 지배했다. 이슬람주의자가 권력에 앉게 되자 다르푸르 지방정부는 잡아들인 범죄자를 포악하게 처벌함으로써 - 처형, 무장강도 시체의 공개전시, 도둑질한 자의 신체절단 - [사회경제적인] 곤궁을 보충하려고 했다. 1994년 정부는 과거의 토착행정 위원회를 다시 도입하고 족장들에게 영토를 할당했다.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아무런 자금도 없는 상태에서 (이제 극히 모자라진)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부활한 토착 행정 권위와 도처의 무장한 주민들은 정부의 이런 방침을 지역 수준의 종족청소를 위한 헌장으로 삼았다. 행정개혁 직후 다르푸르의 가장 서부지역에서는 또 다른 살인이 발생했다. 따라서 현재 분쟁의 많은 부분은 토지에 대한 권리와 지역 행정의 결핍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중앙정부 역시 이를 무시하거나 조작함으로써 다르푸르의 참상에 같은 정도로 결합하고 있다. 다르푸르의 지리적 조건은 여러 모로 불리하다. 엘 제네이나의 큰 도시는 다르푸르의 가장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차드 국경과 가까우며, 아프리카 대륙의 어느 도시보다도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다. 다르푸르의 이 지역은 지배 그룹의 이름을 따서 보통 다르 마살리트라고 불리며 1922년에야 술탄과 영국의 협정에 따라 수단으로 흡수되었다. 쇠락한 궁전 안에서 살고 있는 손자는 최근에도 종종 그가 여전히 수단으로부터 분리될 권리가 있다는 농담을 하며, 벽에 수단이 아닌 다르 마살리트와 아프리카의 지도를 걸어두었다. 하르툼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삼 일간의 여정 후 다르푸르 남부의 니알라에서 끝난다. 엘 제네이아에 가려면 만약 제벨 마라 산의 빗물이 흐르는 개울 때문에 길이 막혀 있지 않다면 최소한 하루 더 차를 타고 가야한다. 하르툼은 다르푸르를 무시해왔다. 다르푸르의 인민은 다른 지역에 비해 교육, 보건, 발전지원을 덜 받았고 행정관청도 더 적다 - 그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서기 위해 이십일 년 전 무기를 들었던 남부인조차도 더 나은 대접을 받았다.4) 다르푸르 내에서 아랍인과 비아랍인은 똑같이 주변화되었고, 그들 그룹의 지도자들이 하르툼의 무관심이라는 공통 원인을 깨닫지 못한 게 다르푸르의 비극이다. 다르푸르가 차드와 리비아의 국경에 자리잡고 있다는 게 또 다른 지리적 불행이다. 1980년대 가다피 대령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주변 사바나 지대의 ‘아랍벨트’를 꿈꿨다. 차드 북부의 아우조우에서 출발해서 차드의 통제권을 획득하는 게 가다피 구상의 핵심이었다. 그는 1987-89년 차드에서 군사적 모험을 연속해서 감행했고 리비아가 지원하는 차드 분파는 다르푸르를 배후기지로 활용했으며 지역 주민의 농작물과 가축을 마음대로 조달했다. 최소한 그들은 차드-프랑스 연합군의 침입을 유발했다. 다르푸르의 수많은 총은 그들 분파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가다피의 전쟁방식은 팽창적이었다. 그는 불만 있는 사바나 지대 아랍인과 토렉인(말리인)을 모집했고 그들을 무장시켰고 그의 공세에서 선봉으로 싸울 이슬람군단으로 바꾸어냈다. 이슬람군단에는 수단 서부에서 온 아랍인이 있었고, 그들 중 다수는 마흐디즘5)을 신봉하는 안사르 분파의 지지자였다. 안사르는 1970년대 니메이리 대통령이 강제로 추방한 인물이다. 리비아는 1988년 오아디 도움 지역에서 빈틈없는 차드 군대에게 패배했고 가다피는 실지를 회복하겠다는 꿈을 포기했다. 그는 이슬람군대를 해체하기 시작했지만, 무장력을 갖추고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 가장 중요하게도 - 악독한 아랍지상주의를 소유한 군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슬람군단의 유산은 다르푸르에 살아 있다. 잔자위드의 지도자들은 그들 중에서 나왔고, 리비아에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니메이리에 의해 추방된 인사르 분파 사람들은 니메이리가 전복된 1980년 대 중반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쉐이크 히랄을 만나고 몇 주 후 나는 사막에서 낙타를 지키는 그의 아들을 찾아 나섰다. 1987년 리비아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아랍동맹이라고 알려진 정치 블록의 형성을 주도했다. 한 측면에서 보면 아랍동맹은 불리한 처지에 있는 수단 서부 그룹들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단순한 정치적 연합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새로운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의 전달수단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과거의 인종주의적인 용어는 다르푸르에서 심상치 않은 징조가 되기 시작했다. 아랍동맹은 수단 국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곧 [다르푸르 이슬람과] 매우 이질적인 나일강 유역의 아라비즘을 꽉 틀어쥐었다. 1980년대 말 다르푸르의 전쟁은 토지에 대한 분쟁을 넘어섰다. 그것은 수단에서 새로운 아랍 이데올로기를 건설하는 첫 단계였다. 다우드 볼라드의 비극 현재 다르푸르의 전쟁을 ‘아랍인’과 ‘아프리카인’의 전쟁으로 설명하지 않는 새로운 방식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이러한 묘사는 이십 년 전이라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종족성과 시민성에 대한 다르푸르의 관념은 여전히 다르푸르의 술탄국가와, 그 후 지중해를 향해 서쪽으로 뻗어나간 연속적인 수단 국가들로부터 물려받은 게 뭉뚱그려져 녹아 있는 상태였다. 짧지만 극적인 경력을 지닌 다르푸르의 정치 지도자 다우드 볼라드의 사례는 ‘아프리카인’과 ‘아랍인’이라는 용어가 현재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볼라드는 자신 세대의 지도적인 젊은 이슬람주의자 중 하나였지만 하르툼 대학을 떠나고 존 가랑이 이끄는 수단인민해방군(SPLA)에 참여한 후 정치적 이슬람을 포기했다. SPLA의 이데올로기는 볼라드가 한때 투사로서 신봉한 이슬람주의 교리와 거리가 가장 먼 것이었다 - 그리고 이슬람주의 교리에 대해 이보다 더 적의가 넘치는 것도 없었다. 가랑은 남부인이고 그의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은 수단 남부가 분리된 국가를 세워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가랑 자신은 분리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수단의 비아랍인이 수적으로 다수를 형성하며 - 남부인과 북부의 주변화된 그룹, 예를 들어 다르푸르인들과 동맹을 이루어서 - 그들이 비종교적이고 다원적이며 통일된 수단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가랑은 누바와 에티오피아와 가까운 나일강 유역 지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북부 수단 주변의 착취 받는 비아랍 공동체에서 신병을 충원했다. 1992년 수단 정부는 성전의 기치를 들고 누바 지역 전체를 소개하려는 사상 최대의 공세에 돌입했다. 공세는 실패했고 누바 지역은 2004년 5월 케냐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의 더 넓은 틀 내에서 온건한 자율성을 달성했다. 볼라드와 지역의 은밀한 네트워크는 다르푸르에서 가랑의 입장권이 되었다. 가랑은 누바와 푸른 나일강 지대에서 활동하면서 다르푸르에서 봉기를 시작할 목적으로 1991년 다르푸르에 작은 규모의 원정군을 배치했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볼라드와 그의 부대는 건기 동안 먼 거리를 가로질러야 했다. 이용할 수 있는 물은 깊은 우물 속에 있을 뿐이었고, 마을에서는 이 물을 조심스럽게 보호했다. 게다가 가축을 키우는 아랍인 그룹들이 이동 경로의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고, 그들은 SPLA에 대해 극히 적대적이었다. 정부는 정규군과 아랍인 베니 할바의 민병대를 활용해 볼라드 부대를 신속히 추격했다. 전투원 소수만이 수단 남부 뒤에 있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을 통해서 탈출했고 한 달 동안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볼라드는 사로잡혔고 그 지역의 통치자 알-타옙 이브라힘 대령의 심문을 받았다. 이브라힘은 시카 또는 쇠막대기라고 알려진 군의관이자 이슬람주의자였다. 그런 별명은 그가 하르툼 대학의 이슬람주의 지도자 - 바로 다우드 볼라드의 호위대로 활동할 때 학생 시위에 대해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생겼다. 둘이 다시 만났을 때 기록은 없다. 그 후 아무도 볼라드를 본 사람은 없다. 최악의 문제는 그의 일기를 빼앗긴 것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은밀한 네트워크의 모든 사람의 이름과 세부사항이 적혀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과 ‘유령의 집’으로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은 심문자들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매우 무기력해졌고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그들의 모든 움직임이 계속 감시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말이다. 한 세대의 반대파의 지도자들이 절멸되거나 중립화되었다. 그 후 다르푸르의 급진적인 지도자는 SPLA 소속이라고 의심받았다. 그들은 그러한 의심 때문에 자신들 전체가 제거되거나 다른 해를 입을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SPLA가 모든 저항투쟁을 지속했으므로, 수단 군대는 그러한 의혹을 제기할 수 있었고 국제적인 지지를 얻었다. 급진적인 지도자 역시 ‘아랍’ 정권의 ‘아프리카인’ 희생자라는 단순한 용어가 남부에 대한 외국의 동정심을 얻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증명되었으므로 그러한 용어로 자신의 참상을 설명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슬람 개혁의 실상 ‘아프리카인’이라는 이름표는 1990년대 동안 국제 지지자들에게 잘 통했으나 수단에서는 거의 강점이 없었다. 하나의 이유는 급진 이슬람이 유행했고 많은 다르푸르인에게 호소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하산 알-투라비가 주도하고 하르툼의 정권이 실행한 정치적 실험이 성공한 결과다. 역사적으로 수단에서 정치적 이슬람은 나일강에서 기원한 아랍화된 엘리크의 지배를 받았고 이집트와 강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것은 보수적인 운동이었고 모든 수단의 지배자들 -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 이 신념으로 삼은 아랍화와 동일했다. 그러나 투라비는 이슬람주의 운동의 의제와 지지자를 확대했다. 예를 들어 그는 여성이 이슬람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현재 하르툼 대학 학생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그는 서부 수단인과 서아프리카 이슬람을 인정했고 예를 들어 19세기 초반 풀라니족[서아프리카의 세네갈에서 나이지리아 및 카메룬에 걸쳐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 접하고 내륙을 횡단하며 10여 개의 부족군으로 산재하는 대종족. 인구는 약 500만 이상으로 추정된다]의 성전과 마그레브[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의 총칭]의 방랑하는 수피 학자들을 포용했다. 투라비는 모든 독실한 이슬람교도에게 시민권을 확대할 것이라고 보장하면서 펠라타라고 알려진 서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서부 수단인의 신분을 크게 변혁했다. 펠라타라는 그룹은 수백 만 명에 달하며 하우사와 풀라니 종족으로 구성되었고 그들의 선조는 나이지리아, 말리, 니제르에서 왔으며 메카를 향한 순례 과정이나 식민지 시대 목화 산업에서 일하기 위해 수단에 정착했다. 펠라타는 신앙심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1989년 이슬람주의 쿠데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그들은 수단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투라비는 펠라타 쉐이크들의 신분을 상승시켰고, 장기간의 예외상태를 바꾸어 새로운 선거구를 만들었다. 다르푸르에서도 푸르와 마사리트를 비롯한 다른 그룹의 종교지도자와도 손을 잡았다. 다르푸르의 통치자 알-타엡 이브라힘은 푸르인의 신앙심을 분명한 말로 칭송했고 푸르 언어를 배웠다. 공통의 종교적 신념을 통한 공통의 시민성이란 개념은 당분간 다르푸르의 민족적 해방을 위한 경로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의 약속은 허풍이었다. 실제로는 거의 바뀐 게 없다. 다르푸르인 가운데 오직 소수만이 정당과 행정부에서 높은 위치로 부상하였다. 민족 정부는 그 지역의 아랍인과 비아랍인을 상대적으로 공평하게 대우했지만, 지속적으로 다르푸르를 무시하는 맥락에게 그렇게 했을 뿐이다. 지역정부는 여전히 파산상태였고, 산적행위는 여전히 수두룩했다. 가뭄과 사막화는 계속 지역분쟁을 유발했고, 지방의 통치자는 그것을 멈출 수 없었고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 않아 수단 ‘서부인’은 그들의 이슬람이 결국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랍의 가치와 문화를 받아들일 때만 진정한 이슬람교도로 존중되었다. 1989년 반란 후 십 년 동안 대통령 바시르와 변덕스러운 투라비의 차이는 더더욱 분명해졌다. 투라비는 아프리카와 중동에 걸친 혁명이라는 야심이 있었다. 바시르는 수단을 아랍화한 엘리트의 소유물로 보는 전통적인 시각을 보유했다. 그러한 차이는 이데올로기, 대외정책, 헌법 그리고 궁극적으로 권력을 둘러싼 투쟁으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결국 바시르가 승리했다. 1999년 그는 민족의회 대변인 자리에서 투라비를 해임했고 나중에는 그를 체포했다. 이슬람주의 동맹은 반토막이 되었다. 행정부의 대다수 그리고 군대와 비밀예산으로 운영되는 다양한 안보기관을 통제하는 안보엘리트는 바시르 옆에 머물렀다. 학생과 지역 이슬람정당 세포 대부분은 투라비와 함께 반대파가 되었고 인민회의의 분리를 이루었다. 다른 일들 중에서도 투라비의 해임은 바시르에게 미국에 접근하고 SPLA와 더욱 진지한 평화협정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구실을 제공했다 - 이는 2004년 케냐에서 평화협정을 조인하는데 이르렀다.6) 다르푸르의 봉기 바시르와 투라비의 분열은 다르푸르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투라비가 지도하는 이슬람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 많은 다르푸르 사람들은 정부를 떠났고 스스로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2000년 5월 그들은 독립 이후에 세워진 민족정부에서 다르푸르 지역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나 상세히 설명하는 보고서를 냈다. 그것은 나라 전체를 자극했고, 북부 수단이 종교 노선보다는 인종적으로 양극화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보고서는 다우드 볼라드를 순교자로 묘사하면서 이슬람주의자와 다르푸르의 비종교적인 급진주의자들 간의 상징적인 화해를 표현했다. 그로부터 비종교적 급진주의자들의 동맹 - 그들은 다르푸르해방전선(DLF)을 구성하기 위해 분주했고, DLF는 2003년 수단해방군(SLA)으로 이름을 바꿨다 - 과 이슬람주의 경향의 정의평등운동(JEM)간의 이루어지지 않을 듯하던 동맹이 이루어졌다. 누구도 반역을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수단의 정치를 관측하는 사람들은 - 나를 포함하여 - 다르푸르의 고요함에 매우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투사들이 거대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조차 단지 울부짖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분명하게 수단 정부는 놀란 것처럼 보였다. 처음 몇 달 동안 수단 정부가 내놓은 평화 제안은 군사적 준비를 위해 시간을 벌려는 위선적인 행동일 따름이었다. 2003년 4월 반란자들은 엘 파셔 공항을 공격했고, 대여섯 대의 군용비행기를 파괴하고 공군 장군을 납치했다. SPLA는 지난 20년 동안 이런 종류의 일들을 해내지 못했다. 다르푸르의 반란은 이동성과 훌륭한 정보체계를 지녔고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바시르에게 매우 중요한 수단 국가의 중심축 - 1983년 이후로 전쟁을 운영했던 안보엘리트들의 비밀결사 - 은 여전히 건재했다. 수단의 지치고 넓게 퍼져있는 군대를 능가하는 반란에 직면하여 이들 안보엘리트 그룹은 무엇을 해야할지 정확하게 알았다. 남부의 전쟁 동안 여러 번에 걸쳐 그들은 간편한 봉기진압 방식에 착수했다 - 그들은 기근과 대지의 초토화를 무기로 선택했었다. 매번 그들은 지역 민병대를 찾아서 군수품과 무기를 제공하고 작전지역을 윤리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으로 선언했다. 1991년 SPLA에 대항하는 데 활용된 베니 할바의 푸르산(기병대)는 다르푸르에서 그들이 활용한 수단인 게 분명하다. 과거 이슬람군단을 포함하는 북부의 낙타 유목민 역시 그러한 무리에 참여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 - 잔자위드 - 가 ‘G3’(라이플총)과 자와드(말)이란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지만, ‘폭도’ 또는 ‘무법자’를 가리키는 수단의 사투리이기도 하다. 고삐 풀린 민병대는 안보 비밀결사에게 추가적 이득을 준다. 즉 SPLA와 거의 타결을 앞둔 평화협정을 탈선시키고 그들이 비밀예산으로 운영되는 안보기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또한 민병대는 그들이 미래에 전쟁범죄로 회부될 수 있는 책임을 면제해준다. 잔자위드가 수행하는 만행은 푸르, 툰주르, 마사리트, 자가와의 대변자들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체계적이며 지속적이다. 그 효과는 - 만에 하나 일부러 목적으로 삼은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 반란자들의 군사적 위협에 비해 크게 불균형적이다. 집단적인 강간과 희생자에게 낙인을 찍는 행위는 그들이 계획적으로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르푸르에서 과실수를 잘라내고 관개수로를 파괴하는 것은 토지에 대한 농민의 요구를 박멸하고 그들의 생활을 파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인 폭력의 수준에서 보자면, 이는 중앙정부가 1992년 누바에서 벌인 성전이나 수단 남부의 유전지대의 성가신 주민을 일소하여 자연자원을 확보하겠다는 냉정한 결정처럼 한 정부가 주도하는 집단학살 전투는 아니다. 이는 안보 비밀결사의 일상적인 잔혹성이며 오랫동안 권력을 누리며 말라버린 인간애의 표현이다. 그것은 습관적인 폭력의 집단학살이다. 농민과 유목민 사이의 안정적인 질서와 관대한 상호성이 있던 쉐이크 히랄의 세계는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사라졌다. 무자비한 빈곤은 잘못된 정부와 수입된 인종주의에 때문에 폭력으로 변화했다. 집단학살과 절박한 기근에 직면해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사 히랄과 지원자들을 전쟁범죄로 회부하는 법적인 행동은 미래에 이러한 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죄를 비난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잔자위드의 살인적인 전투로 다르푸르에서 살아온 베두인이 역사적인 희생자라는 사실이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7) 지난 이십 년 전 다르푸르의 인민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빈곤과 기아, 전염병에 직면해 있다. 원조기관들은 식량지원이 없으면 1984년 가뭄 이후 대규모 기아 사태 - 백만 명이 사망했다 - 와 같은 묵시록과 같은 전망이 현실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식량은 도착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 약 십만 명 - 다르푸르 사회는 인민들의 만만치 않은 생존기술 때문에 붕괴하지 않았다. 그들은 식량 여분이 있었고, 식량과 일 또는 자비를 찾아서 매우 먼 거리를 이동했고, 무엇보다도 숲 지대에서 야생식량을 모았다. 현재는 식량 여분과 동물을 빼앗겼고 다섯 가지의 야생풀과 열한 가지 씨앗과 약간의 초근을 채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이 수용소를 떠난다는 것은 강간과 수족절단 또는 죽음을 의미한다.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가 삼십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예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PSSP 수단 소사 1820년 이집트가 수단을 침략하다. 1876년경에는 이집트 군대가 수단의 전 지역을 장악한다. 1879년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이집트를 점령하다. 이들은 동시에 수단을 장악하고 세금을 거둔다. 1881년 무함마드 아흐메의 지도로 외세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다. 영국군이 그를 분쇄하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영국군이 패한다. 1885년 무함마드 아흐메드의 세력이 하르툼을 점령하다. 그들은 영국인 고든 장군을 처형하고, 최초의 독립 정부를 수립한다. 1898년 옴두르만 전투. 수단군이 키치너 장군의 영국군에게 학살당한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하르툼에서 남쪽으로 500마일 떨어진 파쇼다에서 충돌한다. 프랑스가 결국 물러서고, 영국은 아프리카의 다른 식민지를 포기하는 대가로 이집트와 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보장받는다. 1914년 영국이 이집트와 수단을 직접 통제한다. 총독부는 수단을 남과 북으로 분리한다. 당시에 한 총독은 이렇게 말했다. “남부 주들은 현대 세계에 노출될 준비가 안 되었다.” 1920년대 영국의 “폐쇄구역” 정책으로 수단 북부인들이 남부로 여행하거나 남부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게 금지된다. 1930년 영국은 수단 남부인들이 북부의 무슬림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민족이라고 선포한다. 수단 남부를 영국령 동아프리카로 통합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1946-7년 영국이 수단 남부 농장을 북부 엘리트에게 넘겨준다. 남부와 일체 협의가 없었다. 영국은 새 입법부에서 수단 남부를 대표하던 사람들을 지명했다. 1956년 수단, 독립을 쟁취하다. 그러나 영국이 조장한 분열이 전쟁의 발단이 된다. 1956년 수단, 독립을 쟁취하다. 그러나 영국이 조장해 놓은 분열상이 전쟁의 발단이 된다. 독립 직후에 남부와 북부 사이 전쟁이 발발한다. 1969년 군사쿠데타로 북부 중앙정부가 전복되다. 쿠데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모델로 삼은 자유장교조직이 공산당의 지원을 받으며 성공한 것이었다. 1972년 아디스 아바바 협정으로 남부와 북부간 첫 번째 평화협정이 체결되다. 1980-3년 자파르 니메이리 정부의 억압에 저항하는 투쟁의 물결이 일어나다. 그는 지지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이슬람의 성법을 공포했고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986년 IMF가 수단의 “파산??을 선언하며 모든 차관을 회수해 버린다. 5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한다. 3년 후에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다. 1991년 미국은 수단 정부가 미국의 이라크전쟁에 반대한 것을 복수하려고 곡물 선적을 중단해 버린다. 당시는 기근이 닥쳤던 시기였다. 1992년 IMF가 강요한 재정삭감정책과 수단 정부에 항의하는 파업과 폭동이 계속되다. 1993년 우마르 알-바쉬르(Umar al-Bashir)가 대통령으로 공표되다. 그가 여전히 수단의 대통령이다. 2005년 수단 중앙정부와 수단인민해방군간의 평화협정으로 1983년 재개된 남부와 북부간의 2차 내전이 종전이 선포되다. 1) [역주] 수단 분쟁의 역사적 모형은 이집트와 영국이 수단을 식민지로 삼기 전의 역사부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아랍과 북부 이슬람인에 기반을 둔 국가들은 남부를 자연자원과 노예의 원천 곧 후배지로 취급했다 (남부는 수많은 언어와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중 가장 큰 그룹은 딩카와 누에르였다). 이러한 모형은 19세기 이집트 지배 시기 동안 지속되었고, 19세기 말 잠시 등장한 수단 이슬람주의 국가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동안 북부 국가가 남부 후배지를 착취하는 모형이 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군대의 개입, 지도자의 보호권, 근거가 불확실한 시민권 부여라는 특징도 형성되었다. 이러한 모형은 1899-1947년 영국 식민지 시기 동안 완화되지 않았다. 영국은 북부 엘리트집단의 이슬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제거하려고 그들을 경찰, 군대, 관료로 등용했다. 하지만 남부인을 교육하거나 국가기구에 등용할 유인이 없었다. 1920년대 영국은 '폐쇄지구법령'을 제정하여 남부인이 아닌 사람이 남부에 사는 것을 금지했다. 이는 양면적인 효과를 발휘했는데, 한편으로는 북부 엘리트가 남부의 소유권과 권력을 차지하는 결과를 예방했지만, 인위적으로 분할로 인한 불균등한 발전과 사회적 차이의 확대를 막지 못했다. 또한 1930년대 영국은 '남부정책'을 제정하여 남부는 '아프리카' 노선을 따라 발전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영국은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남부의 고유한 권력구조, 법률, 관습을 활용하고자 했다. 남부는 북부의 상대적으로 균일한 법률, 국가체계에 비해 더욱 산만한 구조를 지녔고, 이러한 정책은 두 지역의 차이가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식민지 경제정책 역시 불균형한 발전에 기여했다. 수출세는 북부에 근거를 둔 중앙정부로 들어갔고, 북부 엘리트는 정부계약을 통해서 국가기구를 자본축적을 위해 활용할 수 있었으며, 중요한 경제프로젝트는 북부에서 일어났다. 독립에 가까워질수록 북부와 남부의 불균형이라는 다루어지지 않은 문제는 분쟁의 원천이 되었다. 본문으로 2) [역주] 수단에서 1969년 5월 '자유장교조직'이 계획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 조직은 1950년대 이집트 나세르를 모델로 삼았다. 1960년대 중반 이후로 수단공산당(SCP)은 이 조직을 지지했고, 따라서 니메이리의 혁명평의회는 중간급, 급진파 아랍인 장교들로만 권력을 장악한 게 아니었다. SCP가 군부가 직접 손을 잡은 것은 수단의 노동조합, 전문가연합, 학생들 속에서 기층을 충원했던 기존의 활동과 단절을 의미했다. 따라서 SCP 내에서 깊은 분열과 불확실성이 증대되었다. 당의 고참 활동가들은 소련에 대한 충성과 앞으로 일어나야 할 진정한 혁명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의 필요성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정통 노선을 따랐다. 그들은 니메이리 쿠데타가 '개혁적'이며 지원할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였지만,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민족주의 군사장교가 주도하는 '인민전선' 유형의 동맹에 반드시 긴밀히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통노선을 따르지 않던 공산주의자 장교들의 영향 때문에 긴밀한 관계가 발전되어 나아갔다. 그래서 SCP는 최소한 일 년 동안 니메이리 정권의 '혁명 재건' 계획에 많은 지적인 자극과 일상적인 자문을 주었다. 1970년 11월 정권이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고 공산당의 활동을 금지시키자 정통파들은 두려움을 느꼈지만 여전히 '협조주의자'들이 존재했으므로 당의 분열은 더 깊어졌다. 특히 1971년 해임된 공산주의자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자 정통파(상대적으로 소수인 집행위원회)는 '모험주의'라고 비난했고 다수파(상대적으로 다수인 중앙위원회)는 정당하다고 옹호했고, 이는 당의 분열을 결정적으로 심화했다. 본문으로 3) [역주] 니메이리 정권 역시 1980년대 초반에 이슬람 지향적인 정책전환을 단행했다. 1977-78년 수단의 경제위기가 닥치자 IMF와 미국 국제개발처(USAID)가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미국과 IMF가 금융지원의 조건으로 강요한 것은 예산축소와 국유화된 기업의 사유화였다. 이 때 니메이리 정부는 안정성을 위해 이슬람 정치정당에 대한 개방정책을 실시했다. 미국와 IMF처럼 그들의 지원은 꼬리를 물게 되었다. 이슬람주의를 지향하는 법률개혁, 이슬람은행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슬람 은행은 대규모 기계화농업 계획에 대한 투자를 모색했고, 자급적인 수단 농업을 수출용 환금작물로 바꾸길 바랬다. 이러한 계획은 프로젝트가 예정된 지역의 인민을 강제 퇴거시키려는 동기를 유발했다. 다른 자연자원이나 거대프로젝트 역시 분쟁의 원천이 되었다. 쉐브론이 세운 파이프라인과 정유소는 북부에 있었고 남부의 분노를 일으켰다. 종글레이 운하를 건설해서 남부의 물을 북부로 전환한다는 제안은 남부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1983년 내전이 재발하자 종글레이 운하는 남부 게릴라운동의 목표물이 되었다. 본문으로 4) [역주] 수단의 일차 내전의 출발점은 1955년 토리토에서 발생한 군대폭동과 폭동참여자가 중심이 된 수단아프리카민족주의연합(SANU)의 게릴라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다른 아프리카 나라의 정치적 지지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프리카통일기구(OAU)를 구성한 정부들은 수단의 게릴라운동을 분리주의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게릴라운동은 내부 문제로 분열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장해제, 협상, 선거경쟁을 원했고 1964년 민간정부에 참여하길 바랬으나, 다른 사람은 연방국가의 건설이나 분리를 원했다. 남부 운동은 일련의 내부 쿠데타를 겪었고 그 결과 남부수단해방운동(SSLM)이라고 불린 새로운 조직이 권력을 획득했다. 그들은 에디오피아, 우간다로부터 새로운 무기를 지원 받았고 약간의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니메이리 정권과 SSLM의 협상이 이뤄져서 1972년 아디스 아바바 협정으로 정점에 달했다. 두 번째 내전 역시 1983년 1월 군대폭동이 발단이었다. 같은 해 7월 남부인민해방운동(SPLM)이 조직되었고, 지배적인 분파는 존 가랑이 이끌고 멩키스투 정권의 에디오피아에 기지를 둔 남부인민해방군(SPLA)이었다. SPLA는 수단 정권에 반대하는 다른 집단들과 결합을 추구했고 남부의 분리보다는 수단 전체의 혁명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입장은 연방국가 건설이나 완전한 독립을 지지하는 세력을 포함하는 SPLA의 분열을 낳았고, 중앙정부는 SPLA를 약화하려고 존 가랑의 반대파를 지원했다 (이는 중앙정부가 분리주의자 집단을 지원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낳았다). 정부는 봉기진압 전략의 하나로 부족 민병대와 아랍인 유목민을 활용했다. 이는 민간인 주민에 대한 공격과 보복의 악순환을 낳았으며, 이 과정에서 SPLA 역시 민간인에게 과잉폭력을 행사한 당사자가 되었다. 결국 악순환은 내전을 민간인에 대한 전쟁으로 바꿔놓아 버렸다. 1991년 멩키스투 정권이 붕괴하자 SPLA의 태도는 방어적으로 바뀌었다. 1990년대 동안 SPLA 내부의 서로 다른 분파들간 최악의 전투가 벌어졌다. 반복되는 전투, 전쟁이 유발한 기근, 원조의 정치적 활용 때문에 1990년대에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SPLA 분파는 2002년에 이르러서야 재결합했고, 2004년 케냐에서 남부와 중앙정부 사이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본문으로 5) [역주] 이슬람 시아파 교리의 핵심은 숨겨진 마지막 12번째 이맘인 마흐디의 재출현이라는 재림 사상이다. 인도자라 불리는 무함마드 알-문타자르(알-마흐디)에 대한 역사는 신비롭고 기적적인 모습을 띤다. A.D 868년에 태어난 알-마흐디는 아버지이자 11대 이맘인 하산 알-아스카리가 자신이 7살 되던 해에 죽으면서 12대 이맘으로 등극하고, 바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시아파는 그가 현재 이라크 사마라에 있는 모스크 아래의 동굴에 스스로 숨었으며, 이 동굴은 밥 알-가이바 혹은 "은폐의 문"으로 불리는 문에 의해 봉인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신이 마흐디를 세상에 다시 보낼 것이고,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재림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 주는 마흐디즘은 또한 많은 나라에서 혁명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슬람 역사 속에서 순니파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많은 반란들은 카르발라 사건의 후세인의 저항 정신과 마지막 이맘의 재림에 대한 이론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실제 19세기 후반에는 수단에서는 무함마드 아흐마드라는 사람이 구세주 마흐디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는 1881년 이집트의 지배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수차례의 승리를 통해 1898년까지 실제 마흐디 국가를 수립했었다. 본문으로 6) [역주] 2005년 1월 9일 알리 오스만 타하 수단 부통령과 존 가랑 수단인민해방군(SPLA) 의장이 케냐 나이로비에서 평화협정에 공식 서명함으로써 2002년부터 시작된 평화협정 체결과정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평화협정에 따라 오는 7월부터 수단 남부는 6년간의 과도기간에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그 후 수단 내에 존속할지, 분리 독립할지를 정하는 투표를 하게 된다. 2) 정부군과 남부 반군의 군대는 6년 자치기간 후 남부가 분리 독립하지 않으면 3만9천명 규모의 단일군으로 통합된다. 3) 하루 생산량 32만 배럴에 달하는 원유 생산수입은 북부의 수단 정부와 남부가 50대 50씩 나눠 갖게 된다. 4) 중앙 정부 내 직위는 북부와 남부에 70대30 비율로 할당하되 아브예이, 푸른 나일, 누바 산악지대 등 3개 분쟁 지역의 지방 정부에는 55대 45로 할당된다. 5) 종교문제는 북부에서는 이슬람 율법(샤리아)이 적용되고 남부 10개 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수도 하르툼에서 샤리아를 적용할지는 의회에서 결정한다. 최종 서명식에는 중재역할을 맡아온 음와이 키바키 케냐 대통령과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 지안프랑코 피니 이탈리아 외무장관도 참석해 증인 자격으로 서명했다. 본문으로 7) [역주] 지난 4월 5일 코피 아난 UN사무총장은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찰총장으로부터 다르푸르 지역에서 벌어진 잔학행위를 주도한 수단인 혐의자 51명의 명단이 포함된 서류를 받았다. 하지만 수단 정부는 주권 침탈 행위라고 격렬하게 반발했다. 바시르 대통령은 국제형사재판소(ICC)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혐의자들은 수단 법정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다르푸르의 전범재판이 ICC로 가는 과정 역시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유엔안보리 이사국들의 반대 때문에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중국은 수단에 4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였으며 자국에 들여오는 원유수입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했고, 수단에 무기와 항공기를 팔아 온 러시아 역시 수단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ICC의 발족 자체를 극력 반대했던 미국은 다르푸르 사태가 ICC로 옮겨갈 경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도 회부될 수 있는 선례가 되는 것을 걱정했다. 미국은 3월 중순까지도 다르푸르 사태를 ICC에 회부하는 대신 수단 인근 탄자니아에 특별 전범 재판소를 설치해 처리하자고 주장하다가 마지못해 ICC 회부를 승인했다. 아프리카연합(AU)은 다르푸르를 감시할 1,900여명의 병력을 파병하고 있지만 국제인권기구나 원조단체들 뿐만 아니라 반군단체조차도 서구의 군대파견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문으로
‘독도수호’가 아닌 반미반전의 관점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재편전략 비판의 현재성 정 희 찬 | 정책편집부장 ‘다케시마의 날’ 제정 이후 반일여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 3월 16일 일본의 시마네현 의회는 ‘다케시마의 날’을 정하는 조례를 상정, 가결한 이후 일제의 군국주의 부활을 규탄하고 독도수호를 주제로 한 다양한 행사와 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극우단체의 일장기 화형식, 퍼포먼스 뿐만 아니라 일부 학생들의 독도농성투쟁에 이르기까지 반일과 독도수호는 지난 3-4월 동안 한국사회의 핫이슈였다. 정부차원에서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는 ‘대일외교 4대 기조와 5대 대응방향’을 발표하면서(3월 17일) “해방의 역사를 부인하고 과거 침탈을 정당화하는 행위”라고 사태를 규정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한일관계와 관련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3월 23일)을 통해 “일개 지자체나 일부 몰지각한 국수주의자들의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집권세력과 중앙정부의 방조 아래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일본의 행위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하며 “단호히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는 중국에서 대규모 반일시위로 드러나기도 했는데 지난 4월 9일과 16일에 걸쳐 홍콩과 상해 등지에서는 수천에서 수만 명의 군중이 과거사 왜곡에 항의하면서 일본인 가게를 습격했다. 다케시마의 날 제정 이후 동북아는 한·중 양국의 대중적인 반일여론과 신사참배, 역사교과서 개정 등 현안을 둘러싼 한·일, 중·일 간 국가수준의 외교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여부, 동북아에서 한·미동맹의 위상을 둘러싼 논란(소위 ‘균형자론’) 등으로 확산되고 있는 양상이다. 과연 사회운동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정세를 어떻게 바라보고 개입할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번 사태는 미국과 일본이 한 축이 되고 남한이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적 재편전략에 대한 비판의 현재성을 분명하게 부각하고 있으며, 사회운동은 바로 이러한 현재적인 의미에 주목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반미반전 투쟁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도 영유권 분쟁의 역사적 맥락: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독도의 일본으로의 편입을 선포한 이후 독도는 40년 동안 시마네현에 속해 있었다. 당초 독도가 양국 간에 논란이 되었던 직접적인 이유는 1946년 맥아더 연합군 사령부가 항복문서의 시행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일본의 행정권을 정지할 때는 제주도 및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명기되어 있으나,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의 주권이 회복될 당시에는 독도에 대한 영토의 포기가 명시되지 않았던 데서 연유한다. 한국정부가 독도를 실질적으로 장악한 것은 1952년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해양선언”을 통해 이른바 ‘평화선’ 안에 독도를 포함시키고 1953-54년 울릉도 민병대와 일본 해상보안청의 무장충돌을 거쳐 1956년 정식으로 한국의 경찰이 경비업무를 담당하면서부터다. 일본정부는, 독도가 카이로 선인이나 포츠담선언에서 규정하는 ‘침략에 의한 약취(掠取)’ 지역이 아니라 1905년 ‘무주지 선점’에 의해 일본에 병합되었고 오히려 한국정부가 일방적으로 ‘평화선’을 설정하여 독도에 대한 일본의 ‘정당한’ 주권행사를 제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이미 독도는 ‘무주지(無主地)’가 아니라 울릉도와 더불어 조선의 영토였음이 각종 고지도와 일본막부의 인정 문서를 통해 증명된다는 점1), 또한 1905년 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은 당시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방적으로 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귀속된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일본은 1954년 무장충돌 이후 독도영유권에 대한 시비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가리자고 줄곧 제기하면서 오늘날의 상황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흔히 간과되는 것은, 독도영유권 분쟁은 무엇보다 냉전기 미국의 동아시아 재편전략과 맺고 있었던 불가분의 관계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직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급속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루즈벨트의 ‘하나의 세계’ 구상을 폐기하고 트루먼의 ‘봉쇄정책’을 실행한다. 반소·반공을 기치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복구에 주력하면서 패전국인 독일(서독)과 일본은 오히려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세계구상에서 ‘교두보’로서 새롭게 평가되고 미국은 이들 국가의 경제부흥을 물심양면으로 총력 지원하게 된다. 전후 책임보다 시장경제로의 재통합과 반공의 전진기지로서 전략적 가치에 훨씬 무게가 실린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 과정에서 드러난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패전 이후 계속된 미군정을 종식하고 주권을 회복한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전후처리를 둘러싸고 전면강화와 단독강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미국의 봉쇄정책이 소련의 원폭실험(1949.9), 중국에서 국민당의 패배와 공산당의 인민공화국 수립(1949.10) 등 일련의 정세 속에서 아시아로 확대됨에 따라 일본에 대한 강화조약은 소련과 중국을 배제한 ‘단독강화’로 귀결되고 말았다. 당시 공산당과 사회당, 그리고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중의 평화운동은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연합국들과의 전면강화, 중립·비무장, 군사기지 제공 반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보수우익 일색이던 일본의 지배계급은 민중의 평화와 비무장을 향한 염원을 오히려 재군비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로 억압하고 재군비(경찰예비대 및 군대의 창설)를 공공연히 거론하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군사기지와 군수물자를 제공함으로써 미군의 전쟁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이는 일본이 미국의 긴밀한 정치·경제적 파트너로서 적극적인 반공의 보루로서 기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조선과 중국 등의 아시아 인민에 대한 책임문제가 유보된 상태로 체결되었다는 결정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한국이 처음에는 ‘승전국(연합국)’의 지위에서 이후 누락되는 과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후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의 자격이 없는 상태에서 일본과의 ‘수교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제국주의 비판의 현재성: 미국의 세계전략에 조응하는 일본의 ‘우경화’ 이번의 시마네현 의회의 조례제정은 일본의 ‘우경화’, 즉 국가주의/민족주의의 강화가 현재진행형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2) 일본에서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발호의 특징은 대부분 주변 국가와의 ‘과거사(근현대사) 왜곡’ 혹은 ‘섬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극우세력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극우세력의 단골메뉴는 특히 이른바 ‘북방영토 반환’ 문제3)를 둘러싸고 러시아에 보다 강경한 정부의 태도 촉구하거나,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를 비판하는 전후 역사인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구 소련과 러시아와, 후자의 경우는 총리 및 각료,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역사교과서 개정을 둘러싼 한국·중국 등과의 외교적 마찰로 비화되곤 한다. 대표적인 극우인사로서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된 도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무엇보다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원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행한 초·중·고등학교에서 국기게양과 국가제창의 의무화였다. 현재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주변국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줄곧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이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올해 일본의 극우세력은 ‘잘못된 60년’을 청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자민당 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보수세력은 극우파의 각종 활동을 묵인·방조하거나 지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우경화’를 추진하는 밑거름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로 파악하고 이를 저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군국주의 부활’로 지칭하는 현상은 일본에서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발호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의 국가주의/민족주의를 과거 ‘대일본제국’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은 일본 지배계급의 의도를 피상적으로 분석한 결과이다. 일본의 지배계급이 의도하는 것은 강력한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상징(국가/국기/영토)을 중심으로 현재 미국의 제국주의 재편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게다가 이러한 ‘군국주의 부활’의 징후는 단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라 종전 직후 일본의 현대사의 분수령이 되는 역사적 사건들을 관통하는 주된 쟁점이다. 일본 내 우익세력의 목청이 커진 이유는 장기불황과 청년층의 실업자 급증, 강력한 대중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총평-사회당 블록을 주축으로 한 이른바 ‘혁신세력’의 몰락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1990년대 냉전의 종식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에 조응하는 일본의 대외정책의 기조가 그동안 극우세력이 꾸준히 주장하던 방향과 일맥상통하게 접근하면서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쟁점이 이른바 ‘보통국가론’인데, 군대의 보유와 집단자위권을 금지하는 현재의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현재 일본의 헌법은 미점령당국(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GHQ/SCAP)4)의 초안에 기반하여 1946년 11월 공포된 이른바 ‘평화헌법’이다.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정부에게 천황제를 (상징적으로) 유지하는 대가로 자유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면서 제시한 원칙 중의 하나가 이른바 ‘전쟁의 포기’였다. 헌법 9조에는 전쟁의 포기와 육·해·공군 등 전력(戰力)보유 금지를 명문화하고 있는데5) 이는 한편으로 천황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억제책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전 당시 소·중·미·영 연합국에 의해 합의된 일본의 비무장화가 반영된 결과이다. 이러한 평화헌법은 약 60년 동안 유지되어왔는데, 보수세력의 개헌시도는 이미 1950년대 미국의 적극적인 방위분담 요구에 발맞추어 줄곧 제기되어왔지만, 항상 혁신세력(사회당, 공산당)이 개헌저지선(전체 의석의 1/3) 이상을 확보함으로써 잠복하거나, 개헌을 반대하는 국민여론에 밀려 일시적으로 제기되는 정도였다.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일본 민중의 놀라운 반전여론인데, 사실 그동안 보수우익 세력의 개헌을 중단시킨 것은 1959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반대투쟁, 1966년 베트남전 반대투쟁 등 노동자의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과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한 시위로 드러난 민중들의 반전투쟁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사회당의 침체와 급격한 몰락 (이는 일본 대중들의 정치 이데올로기 지형의 변화를 반영한다) 이후 일본의 정치지형이 ‘보수-혁신구도’에서 자민당-민주당 중심의 ‘보수-보수 구도’로 재편되면서 개헌의 가능성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3월 15일 <마이니치> 신문에 이른바 신헌법의 대강이 보도되었는데, 여기에는 군대의 보유와 집단자위권의 명문화는 물론이고 천황의 국가원수화, 국방의무의 부과, ‘유해도서’의 출판과 판매의 금지 등이 포함되어 명실상부한 천황제 국가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고 있다. 일본의 우익들은 북한이나 중국의 명시적이거나 잠재적인 위협을 강조하며 미국과의 연대를 ‘보통국가화’의 근거로 제시한다. 이미 미국 역시 이러한 일본의 시도를 지지하고 있는데 이미 1982년 나카소네 수상이 레이건 대통령과 굳건한 반공동맹을 맺은바 있거니와 1990년대 들어 미-일 안전보장 공동선언(1996), 미-일 신방위협력지침(1997), 주변사태법(1999) 등을 통해, 미·일 안전보장체제의 필수불가결성을 역설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기본틀로 규정하는가 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유사시’ 주일미군과 공동으로 일본의 자위대가 개입할 단초를 마련함으로써 미·일 관계는 ‘21세기의 지도력 분담’(power-sharing)을 지향할 정도로 강화되어왔다.6) 일본은 또한 이라크에 자위대 병력을 파견함으로써 미국의 안보전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3월18일 미국의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은 일본의 UN 상임이사국 진출을 공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증대하려는 일본정부의 노력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연내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일본의 시도는 UN 개혁에 대한 충분한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다수 회원국들의 요구에 의해 무산되었다).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의 ‘의지연합’에서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지지와 참여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이미 냉전 시대부터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요구해왔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현재 일본의 ‘우경화/재무장화’는 세계적인 수준에서 공동의 방위역할 분담을 추구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재편전략, 나아가 세계전략 속에서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적 군사재편에 대한 반대, 한-미-일 삼각동맹에 대한 비판, 나아가 ‘무한전쟁’과 ‘무한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사회운동의 반전-대안세계화의 과제 속에서 위치 지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비판하지 않는 ‘반일’은 민중의 생존을 담보로 추진되는 현재의 제국주의적 폭력을 간과, 내지 은폐하고 오히려 민중의 시선과 관심을 오로지 과거로만 맞춘다는 점에서 퇴행적일 수밖에 없다. 근대민족국가에서 영토와 국경의 의미: 민족주의/국가주의적 부르주아의 탄생 뿐만 아니라 ‘독도수호’라는 논리는 근대 이후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민족국가의 형성과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영토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향후 사회운동의 발목을 잡는 지배계급의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영토주의’는 특정한 지역의 인구와 자원에 대해 국가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권의 관념을 모사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의 영토주의적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민중들의 보편적인 권리와는 사실상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 이후의 ‘영토주의’는 대외적으로는 다른 국가에 의해 침해받지 않을 독립성을, 대내적으로는 그 어떤 권위라도 도전할 수 없는 초월성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민중들 스스로의 발언과 조직화를 가로막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주요 기제에 다름 아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민족-국가의 등장은 순수한 자본의 논리를 대변하는 도시국가 모델 (베네치아, 피렌체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 혹은 ‘한자동맹’을 매개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는 독일의 자치도시가 그 전형), 순수한 영토주의를 대변하는 제국 모델 (여기서는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제국이 원형이다) 각각의 장·단점이 결합됨으로써 가능했다. 최초로 근대적인 형태로 자본과 영토주의를 결합한 국가는 엘리자베스 2세 이후의 영국이었는데 통화의 안정에 기여한 왕립증권거래소의 설립(1560-61)은 이른바 ‘총과 돈의 동맹’을 의미했다. 이후 영국은 산업적 팽창과 영토적 팽창(해양과 非유럽 세계에서의 식민지 개척)을 주도하며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자본은 민족국가 안에서 강력한 보호자이자 동맹자를 발견했고, 국가의 지배자들은 자본의 안정적 유치를 통한 산업적 팽창이 곧 국가의 부의 증대로 귀결된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7) 영국이 성공을 거둔 자본과 영토주의의 성공적인 결합은 18세기 이후 영국을 따라잡으려는 유럽 열강에 의해 모방되었으며8) 20세기 중반 이후 식민지의 경험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성립한 민족-국가는 경계와 영토라는 제도를 통해 민족주의라는 허구적 종족성의 신화를 창출하는데 기여했다. 즉 현재 국가의 경계와 경계는 자연적인 것이며 이 범위 내의 인구집단들은 초-역사적으로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관념이 바로 그것이다. 근대의 ‘자본가 계급’을 포함하는 부르주아, 즉 정치, 경제, 문화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진짜 부르주아들은 모두가 국가 부르주아이며, 이들은 국가를 민족 형태로 재구성하고, 사회의 모든 계급의 지위를 오직 그 안에서만 유효한 방식으로 부여하였다. 여기서 전제는 국가의 등장에 앞서 존재했던 초역사적 집단으로서 ‘민족’에 대한 충성/봉사이며, 이는 곧 애국주의/민족주의라는 신념을 통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모두에게 부과되는 ‘의무’가 되었다.9)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애국주의/민족주의의 ‘문턱’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으며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참전과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동자들의 국제연대를 붕괴시키고 제2인터내셔널을 붕괴시켰다. 민족-국가 모델의 이식은 매우 폭력적인 과정이었는데 20세기 중반 식민지들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독립할 때에도 경계와 영토라는 관념은 그대로 기계적으로 수용되어 다양한 주변부·반주변부 국가들이 종교적·종족적인 분할을 따라 서로 분쟁을 벌이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카슈미르나 팔레스타인처럼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복수의 집단이 혼재되어 있는 지역은 2차대전 이후 만성적인 분쟁지역이 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나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기존의 국가가 사실상 ‘해체’ 된 이후 인종적 대량학살이 벌어지는 등 극단적인 폭력이 지배하기도 하였다. 세계화 시대 ‘경계’의 의미는 또한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경계’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이 집결하는 중심부와 빈곤과 기아, 그리고 AIDS와 같은 끔찍한 폭력에 노출된 주변부를 가로지르는 ‘요새의 성벽’과 같은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노동자와 여성, 농민들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 기업들의 각종 투자에 의해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고 있으며,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속에서 호황을 거듭하는 중심부의 금융시장의 혜택은 극소수의 ‘주주’에게만 천문학적인 부의 형태로 집중될 뿐이다. 사회의 최상부에 위치한 부르주아에게 더 이상 국경의 의미가 남아있지 않지만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려는 노동자들에게 국경은 배제와 억압의 대표적인 장벽으로서 그/녀들을 공동체로부터 분리하고 시민권을 부인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바로 오늘날 민중들을 극한적인 생존의 위협으로 몰고 가는 영토/국경에 대한 지배계급의 관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면 대안-세계화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독도수호’는 민중의 언어가 될 수 없다! -한·일 지배계급이 공명하는 ‘미국과 군사동맹’이라는 암묵적 카르텔 우리는 영유권 주장의 논리가 첫째는 근대국가의 영토주의에 호소함으로써 지배계급의 동원전략에 조응한다는 점, 둘째는 제국주의적 군사재편에 조응하는 일본의 우경화(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공명하는 것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남한의 지배계급 역시 마찬가지이다)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운동진영 일각에서 제기되는 독도수호를 위한 캠페인을 반대한다. ‘영토주의’에 대한 호소는 내부의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과 봉쇄를 사전에 봉쇄한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식민지적 사회·경제적 관계의 청산은 해방된 조선에서 해방 직후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의 해체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에 의해 폭력적으로 무산되었다. 당시 미군정이 필요로 했던 것은 사회혁명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서 구 지배계급의 부활을 꾀한다. 조선에서 일제에 협력했던 억압적 국가기구(총독부, 경찰, 군대)의 관료들은 미국의 반소·반공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바로 이들이 오늘날 한국 지배계급의 역사적 기원을 형성한다. 즉 역사적으로 한국의 지배계급에게 제국주의 전략에 동참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활적인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반공·발전주의를 추진하기 위해서 남한의 집권세력들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대해 적극적으로 편승했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갈등은 식민지적 사회·경제적 관계를 청산하기는커녕 유지·온존하는데 급급했던 미국의 동아시아에서의 전후 처리의 부차적인 산물에 다름 아니다. 미국은 전후 일본의 구 지배계급에게 면죄부를 부여했고 이는 사회주의 진영을 제외한 동아시아 국가에서 인적청산에 그치지 않는 착취와 수탈로 점철된 사회구조의 변혁을 동반한 ‘과거사 청산’은 결국 대다수 민중들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던 구 지배계급의 복권으로 귀결되었다. 게다가 최근 각종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 밝혀지는 바에 의하면 역대 한국의 정권들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포함하여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인적·물적 희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일본측의 논리를 얼마나 수수방관했는지 드러난다. 1960년대 한일국교 ‘정상화’ 당시 박정희 정권이 ‘청구권’을 포기한 결과 얼마나 많은 징용노동자, 정신대 할머니들이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가? 김대중 정권은 한·일 新어업협정을 체결하면서 독도를 양국의 중간지역으로 설정하자는 일본의 주장을 수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측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가? 또한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일본을 방문하면서 “‘과거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장담하지 않았던? 언제나 말로만 일본을 규탄하던 지배계급이었다. 오히려 이들은 일본의 보수화되고 우경화된 지배계급과 마찬가지로 미국과의 군사동맹의 신성함을 강조하면서 패권을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부담을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형편이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남한의 지배계급과 일본의 우경화가 암묵적으로 공명하는 동아시아의 제국주의적 재편전략이다. 보수적인 신문의 칼럼이나 사설에서는 미일동맹보다 강고한 한미동맹을 구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제출되고 있지 않았던가? “독도는 우리땅” 식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사회운동은 지배계급의 전략에 종속되어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고, 자발적으로 무장을 해제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고 나아가 그들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비판하려면, 일본의 우경화를 적극적으로 주문하는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 이에 공명하는 남한의 지배계급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군사동맹이라는 동아시아 지배계급의 암묵적 카르텔이야말로 오늘날 민중들이 투쟁해야할 대상이다! 동아시아에서 반미반전의 국제연대를 구축하자! 사회운동은 제국주의라는 지극히 현재적인 쟁점을 한국과 일본 중 누가 더 미국의 충실한 파트너가 될 것인가 하는 양국의 지배계급의 경쟁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평화에 대한 염원을 드러내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에서 오늘날 과거 제국주의 침략을 미화하고 그 책임을 은폐하기에 급급한 극우세력은 과거 일본 민중이 반핵·반전 여론이 드높을 때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극소수의 집단에 불과했다. 결국 일본의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발호를 막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재편과 일체의 전쟁과 군사적 폭력에 반대하는 민중의 단호함이다. 일본의 재무장과 우경화를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 속에서 설명하며 평택미군기지 반대투쟁, 이라크 철군투쟁 등 당면한 반전반미투쟁을 선전하고 이에 대한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를 끌어올릴 기회로 삼아야 한다. 미국의 제국주의 재편전략과 미국과의 파트너를 꿈꾸는 한국과 일본의 지배계급의 암묵적인 공명을 ‘아래로부터’ 분쇄해가는 민중들의 반미반전투쟁이 오늘날 가장 유효한 제국주의 비판이며 사회운동이 가장 우선적으로 착목해야 할 지점임을 잊지 말자. PSSP 1) 애초 조선 시대 일본과의 분쟁은 울릉도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동래 어부 안용복이 일본인을 쫓아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갈 당시 울릉도는 1430년 이래 왜구(倭寇)의 침략을 우려한 공도(空島)정책으로 인해 섬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17세기 후반 인근의 풍부한 어장을 둘러싸고 조선과 일본의 어부들 간에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하지만 지난 해 ‘경국대전’을 전거로 활용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되었던 ‘행정수도 위헌’ 판결에서 드러나듯 현재의 ‘대한민국’이 과연 ‘조선’이나 ‘대한제국’을 계승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존재한다. .본문으로 2) 일본은 이번 시마네현의 조례제정이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1970년대 연호법제화 당시 사정을 살펴보면 지방의회의 결의가 중앙정부를 압박하는 동시에 법제화의 명분을 제공한 전례를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천황의 재위기간 중에 사용하는 연호(年號)를 법제화하는 결의가 1977년 9월부터 1978년 말까지 1170개의 시·군·면 의회에서 자민당의 주도로 통과한 이후 1978년 10월 각의에서 결정이 내려진 이후 드디어 1979년 6월 ‘연호법’이 참의원을 통과함으로써 공표되었다. .본문으로 3) 여기서 ‘북방영토’란 일제가 러일전쟁(1904년) 이후 포츠머스 조약에서 획득하였으나 패전 이후 소련이 점령한 사할린 남부의 쿠릴열도(지시마 열도)의 네 개 섬인 쿠나시리, 에토로후, 시코탄, 하보마이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지시마 열도 및 포츠머스 조약으로 획득한 섬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였으나 이후 1950년대 소련과의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네 개 섬 모두의 반환을 주장했다. ‘북방영토’ 문제는 홋카이도에 속한 시코탄 하보마이 두 개 섬을 반환할 수 있다는 당시 소련의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아직까지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본문으로 4) General Head-quaters of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일본에서 미군정은 조선의 미군정과는 달리 내각을 통해 지배하는 간접통치방식을 채택하였다..본문으로 5) 헌법 9조 1항: “정의와 질서에 바탕한 국제평화를 열망하여, 일본 인민은 국가 주권으로서 전쟁과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위협, 또는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헌법 9조 2항: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타의 잠재적인 무력이나 육·해·공군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6) 일본은 2003년 6월 노무현 대통령의 방일 첫날에 3개의 ‘유사법안’을 통과시켰는데 ‘무력공격사태법’, ‘자위대법 개정안’, ‘안전보장회의 설치법 개정안’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 자위대의 출동요건은 “무력공격 발생·임박 및 예측사태”로 포괄적으로 규정되었고, 방위출동 명령 발동 이전이라도 자위대의 진지구축·무기용 토지· 식량 강제수용이 가능할 수 있도록 했으며, 총리 및 각료가 참석하는 안보회의의 기능을 보강하기 위해 산하에 일상적으로 위기관리 대책을 연구·제언하는 전문위원회를 신설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은 “일본 주변의 유사시”에 대비하는 ‘주변사태법’(1999.5)에 이어 “일본의 유사시”에 대비하는 법률적 토대를 완성하였으며 관련하여 방위청 승격, 테러·괴선박 대책관련법 등 후속 유사법제의 정비와 미·일동맹의 강화 및 국제사회에서의 군사적 역할의 확대를 위한 집단자위권의 인정 등을 추진하는 데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배정호, 「일본의 안보개혁과 유사법제 정비」, 통일연구원, 2003 참조. .본문으로 7)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성립과정에서 자본과 국가의 다양한 결합의 시도로서 제국 모델, 민족-국가 모델, 도시국가 모델에 대해서는 Geovanni Arrighi, The Long Twentieth Century, Verso, 1995 3장 참조..본문으로 8) 당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팽창세력은 또한 다름 아닌 가장 강력한 민족-국가들이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을 보라. 영국은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 ‘제국’이었다. .본문으로 9) 민족-국가의 역사적 형성과 ‘허구적 종족성’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민족형태, 그 역사와 이데올로기〉,《이론》6호 (서관모 옮김) 참조.본문으로
‘독도수호’가 아닌 반미반전의 관점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재편전략 비판의 현재성 정 희 찬 | 정책편집부장 ‘다케시마의 날’ 제정 이후 반일여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 3월 16일 일본의 시마네현 의회는 ‘다케시마의 날’을 정하는 조례를 상정, 가결한 이후 일제의 군국주의 부활을 규탄하고 독도수호를 주제로 한 다양한 행사와 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극우단체의 일장기 화형식, 퍼포먼스 뿐만 아니라 일부 학생들의 독도농성투쟁에 이르기까지 반일과 독도수호는 지난 3-4월 동안 한국사회의 핫이슈였다. 정부차원에서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는 ‘대일외교 4대 기조와 5대 대응방향’을 발표하면서(3월 17일) “해방의 역사를 부인하고 과거 침탈을 정당화하는 행위”라고 사태를 규정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한일관계와 관련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3월 23일)을 통해 “일개 지자체나 일부 몰지각한 국수주의자들의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집권세력과 중앙정부의 방조 아래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일본의 행위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하며 “단호히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는 중국에서 대규모 반일시위로 드러나기도 했는데 지난 4월 9일과 16일에 걸쳐 홍콩과 상해 등지에서는 수천에서 수만 명의 군중이 과거사 왜곡에 항의하면서 일본인 가게를 습격했다. 다케시마의 날 제정 이후 동북아는 한·중 양국의 대중적인 반일여론과 신사참배, 역사교과서 개정 등 현안을 둘러싼 한·일, 중·일 간 국가수준의 외교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여부, 동북아에서 한·미동맹의 위상을 둘러싼 논란(소위 ‘균형자론’) 등으로 확산되고 있는 양상이다. 과연 사회운동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정세를 어떻게 바라보고 개입할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번 사태는 미국과 일본이 한 축이 되고 남한이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적 재편전략에 대한 비판의 현재성을 분명하게 부각하고 있으며, 사회운동은 바로 이러한 현재적인 의미에 주목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반미반전 투쟁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도 영유권 분쟁의 역사적 맥락: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독도의 일본으로의 편입을 선포한 이후 독도는 40년 동안 시마네현에 속해 있었다. 당초 독도가 양국 간에 논란이 되었던 직접적인 이유는 1946년 맥아더 연합군 사령부가 항복문서의 시행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일본의 행정권을 정지할 때는 제주도 및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명기되어 있으나,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의 주권이 회복될 당시에는 독도에 대한 영토의 포기가 명시되지 않았던 데서 연유한다. 한국정부가 독도를 실질적으로 장악한 것은 1952년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해양선언”을 통해 이른바 ‘평화선’ 안에 독도를 포함시키고 1953-54년 울릉도 민병대와 일본 해상보안청의 무장충돌을 거쳐 1956년 정식으로 한국의 경찰이 경비업무를 담당하면서부터다. 일본정부는, 독도가 카이로 선인이나 포츠담선언에서 규정하는 ‘침략에 의한 약취(掠取)’ 지역이 아니라 1905년 ‘무주지 선점’에 의해 일본에 병합되었고 오히려 한국정부가 일방적으로 ‘평화선’을 설정하여 독도에 대한 일본의 ‘정당한’ 주권행사를 제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이미 독도는 ‘무주지(無主地)’가 아니라 울릉도와 더불어 조선의 영토였음이 각종 고지도와 일본막부의 인정 문서를 통해 증명된다는 점1), 또한 1905년 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은 당시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방적으로 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귀속된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일본은 1954년 무장충돌 이후 독도영유권에 대한 시비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가리자고 줄곧 제기하면서 오늘날의 상황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흔히 간과되는 것은, 독도영유권 분쟁은 무엇보다 냉전기 미국의 동아시아 재편전략과 맺고 있었던 불가분의 관계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직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급속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루즈벨트의 ‘하나의 세계’ 구상을 폐기하고 트루먼의 ‘봉쇄정책’을 실행한다. 반소·반공을 기치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복구에 주력하면서 패전국인 독일(서독)과 일본은 오히려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세계구상에서 ‘교두보’로서 새롭게 평가되고 미국은 이들 국가의 경제부흥을 물심양면으로 총력 지원하게 된다. 전후 책임보다 시장경제로의 재통합과 반공의 전진기지로서 전략적 가치에 훨씬 무게가 실린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 과정에서 드러난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패전 이후 계속된 미군정을 종식하고 주권을 회복한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전후처리를 둘러싸고 전면강화와 단독강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미국의 봉쇄정책이 소련의 원폭실험(1949.9), 중국에서 국민당의 패배와 공산당의 인민공화국 수립(1949.10) 등 일련의 정세 속에서 아시아로 확대됨에 따라 일본에 대한 강화조약은 소련과 중국을 배제한 ‘단독강화’로 귀결되고 말았다. 당시 공산당과 사회당, 그리고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중의 평화운동은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연합국들과의 전면강화, 중립·비무장, 군사기지 제공 반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보수우익 일색이던 일본의 지배계급은 민중의 평화와 비무장을 향한 염원을 오히려 재군비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로 억압하고 재군비(경찰예비대 및 군대의 창설)를 공공연히 거론하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군사기지와 군수물자를 제공함으로써 미군의 전쟁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이는 일본이 미국의 긴밀한 정치·경제적 파트너로서 적극적인 반공의 보루로서 기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조선과 중국 등의 아시아 인민에 대한 책임문제가 유보된 상태로 체결되었다는 결정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한국이 처음에는 ‘승전국(연합국)’의 지위에서 이후 누락되는 과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후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의 자격이 없는 상태에서 일본과의 ‘수교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제국주의 비판의 현재성: 미국의 세계전략에 조응하는 일본의 ‘우경화’ 이번의 시마네현 의회의 조례제정은 일본의 ‘우경화’, 즉 국가주의/민족주의의 강화가 현재진행형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2) 일본에서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발호의 특징은 대부분 주변 국가와의 ‘과거사(근현대사) 왜곡’ 혹은 ‘섬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극우세력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극우세력의 단골메뉴는 특히 이른바 ‘북방영토 반환’ 문제3)를 둘러싸고 러시아에 보다 강경한 정부의 태도 촉구하거나,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를 비판하는 전후 역사인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구 소련과 러시아와, 후자의 경우는 총리 및 각료,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역사교과서 개정을 둘러싼 한국·중국 등과의 외교적 마찰로 비화되곤 한다. 대표적인 극우인사로서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된 도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무엇보다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원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행한 초·중·고등학교에서 국기게양과 국가제창의 의무화였다. 현재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주변국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줄곧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이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다. 올해 일본의 극우세력은 ‘잘못된 60년’을 청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자민당 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보수세력은 극우파의 각종 활동을 묵인·방조하거나 지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우경화’를 추진하는 밑거름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로 파악하고 이를 저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군국주의 부활’로 지칭하는 현상은 일본에서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발호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의 국가주의/민족주의를 과거 ‘대일본제국’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은 일본 지배계급의 의도를 피상적으로 분석한 결과이다. 일본의 지배계급이 의도하는 것은 강력한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상징(국가/국기/영토)을 중심으로 현재 미국의 제국주의 재편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게다가 이러한 ‘군국주의 부활’의 징후는 단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라 종전 직후 일본의 현대사의 분수령이 되는 역사적 사건들을 관통하는 주된 쟁점이다. 일본 내 우익세력의 목청이 커진 이유는 장기불황과 청년층의 실업자 급증, 강력한 대중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총평-사회당 블록을 주축으로 한 이른바 ‘혁신세력’의 몰락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1990년대 냉전의 종식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에 조응하는 일본의 대외정책의 기조가 그동안 극우세력이 꾸준히 주장하던 방향과 일맥상통하게 접근하면서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쟁점이 이른바 ‘보통국가론’인데, 군대의 보유와 집단자위권을 금지하는 현재의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현재 일본의 헌법은 미점령당국(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GHQ/SCAP)4)의 초안에 기반하여 1946년 11월 공포된 이른바 ‘평화헌법’이다.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정부에게 천황제를 (상징적으로) 유지하는 대가로 자유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면서 제시한 원칙 중의 하나가 이른바 ‘전쟁의 포기’였다. 헌법 9조에는 전쟁의 포기와 육·해·공군 등 전력(戰力)보유 금지를 명문화하고 있는데5) 이는 한편으로 천황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억제책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전 당시 소·중·미·영 연합국에 의해 합의된 일본의 비무장화가 반영된 결과이다. 이러한 평화헌법은 약 60년 동안 유지되어왔는데, 보수세력의 개헌시도는 이미 1950년대 미국의 적극적인 방위분담 요구에 발맞추어 줄곧 제기되어왔지만, 항상 혁신세력(사회당, 공산당)이 개헌저지선(전체 의석의 1/3) 이상을 확보함으로써 잠복하거나, 개헌을 반대하는 국민여론에 밀려 일시적으로 제기되는 정도였다.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일본 민중의 놀라운 반전여론인데, 사실 그동안 보수우익 세력의 개헌을 중단시킨 것은 1959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반대투쟁, 1966년 베트남전 반대투쟁 등 노동자의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과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한 시위로 드러난 민중들의 반전투쟁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사회당의 침체와 급격한 몰락 (이는 일본 대중들의 정치 이데올로기 지형의 변화를 반영한다) 이후 일본의 정치지형이 ‘보수-혁신구도’에서 자민당-민주당 중심의 ‘보수-보수 구도’로 재편되면서 개헌의 가능성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3월 15일 <마이니치> 신문에 이른바 신헌법의 대강이 보도되었는데, 여기에는 군대의 보유와 집단자위권의 명문화는 물론이고 천황의 국가원수화, 국방의무의 부과, ‘유해도서’의 출판과 판매의 금지 등이 포함되어 명실상부한 천황제 국가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고 있다. 일본의 우익들은 북한이나 중국의 명시적이거나 잠재적인 위협을 강조하며 미국과의 연대를 ‘보통국가화’의 근거로 제시한다. 이미 미국 역시 이러한 일본의 시도를 지지하고 있는데 이미 1982년 나카소네 수상이 레이건 대통령과 굳건한 반공동맹을 맺은바 있거니와 1990년대 들어 미-일 안전보장 공동선언(1996), 미-일 신방위협력지침(1997), 주변사태법(1999) 등을 통해, 미·일 안전보장체제의 필수불가결성을 역설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기본틀로 규정하는가 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유사시’ 주일미군과 공동으로 일본의 자위대가 개입할 단초를 마련함으로써 미·일 관계는 ‘21세기의 지도력 분담’(power-sharing)을 지향할 정도로 강화되어왔다.6) 일본은 또한 이라크에 자위대 병력을 파견함으로써 미국의 안보전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3월18일 미국의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은 일본의 UN 상임이사국 진출을 공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증대하려는 일본정부의 노력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연내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일본의 시도는 UN 개혁에 대한 충분한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다수 회원국들의 요구에 의해 무산되었다).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의 ‘의지연합’에서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지지와 참여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이미 냉전 시대부터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요구해왔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현재 일본의 ‘우경화/재무장화’는 세계적인 수준에서 공동의 방위역할 분담을 추구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재편전략, 나아가 세계전략 속에서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적 군사재편에 대한 반대, 한-미-일 삼각동맹에 대한 비판, 나아가 ‘무한전쟁’과 ‘무한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사회운동의 반전-대안세계화의 과제 속에서 위치 지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비판하지 않는 ‘반일’은 민중의 생존을 담보로 추진되는 현재의 제국주의적 폭력을 간과, 내지 은폐하고 오히려 민중의 시선과 관심을 오로지 과거로만 맞춘다는 점에서 퇴행적일 수밖에 없다. 근대민족국가에서 영토와 국경의 의미: 민족주의/국가주의적 부르주아의 탄생 뿐만 아니라 ‘독도수호’라는 논리는 근대 이후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민족국가의 형성과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영토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향후 사회운동의 발목을 잡는 지배계급의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영토주의’는 특정한 지역의 인구와 자원에 대해 국가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권의 관념을 모사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의 영토주의적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민중들의 보편적인 권리와는 사실상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 이후의 ‘영토주의’는 대외적으로는 다른 국가에 의해 침해받지 않을 독립성을, 대내적으로는 그 어떤 권위라도 도전할 수 없는 초월성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민중들 스스로의 발언과 조직화를 가로막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주요 기제에 다름 아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민족-국가의 등장은 순수한 자본의 논리를 대변하는 도시국가 모델 (베네치아, 피렌체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 혹은 ‘한자동맹’을 매개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는 독일의 자치도시가 그 전형), 순수한 영토주의를 대변하는 제국 모델 (여기서는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제국이 원형이다) 각각의 장·단점이 결합됨으로써 가능했다. 최초로 근대적인 형태로 자본과 영토주의를 결합한 국가는 엘리자베스 2세 이후의 영국이었는데 통화의 안정에 기여한 왕립증권거래소의 설립(1560-61)은 이른바 ‘총과 돈의 동맹’을 의미했다. 이후 영국은 산업적 팽창과 영토적 팽창(해양과 非유럽 세계에서의 식민지 개척)을 주도하며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자본은 민족국가 안에서 강력한 보호자이자 동맹자를 발견했고, 국가의 지배자들은 자본의 안정적 유치를 통한 산업적 팽창이 곧 국가의 부의 증대로 귀결된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7) 영국이 성공을 거둔 자본과 영토주의의 성공적인 결합은 18세기 이후 영국을 따라잡으려는 유럽 열강에 의해 모방되었으며8) 20세기 중반 이후 식민지의 경험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성립한 민족-국가는 경계와 영토라는 제도를 통해 민족주의라는 허구적 종족성의 신화를 창출하는데 기여했다. 즉 현재 국가의 경계와 경계는 자연적인 것이며 이 범위 내의 인구집단들은 초-역사적으로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관념이 바로 그것이다. 근대의 ‘자본가 계급’을 포함하는 부르주아, 즉 정치, 경제, 문화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진짜 부르주아들은 모두가 국가 부르주아이며, 이들은 국가를 민족 형태로 재구성하고, 사회의 모든 계급의 지위를 오직 그 안에서만 유효한 방식으로 부여하였다. 여기서 전제는 국가의 등장에 앞서 존재했던 초역사적 집단으로서 ‘민족’에 대한 충성/봉사이며, 이는 곧 애국주의/민족주의라는 신념을 통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모두에게 부과되는 ‘의무’가 되었다.9)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애국주의/민족주의의 ‘문턱’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으며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참전과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동자들의 국제연대를 붕괴시키고 제2인터내셔널을 붕괴시켰다. 민족-국가 모델의 이식은 매우 폭력적인 과정이었는데 20세기 중반 식민지들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독립할 때에도 경계와 영토라는 관념은 그대로 기계적으로 수용되어 다양한 주변부·반주변부 국가들이 종교적·종족적인 분할을 따라 서로 분쟁을 벌이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카슈미르나 팔레스타인처럼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복수의 집단이 혼재되어 있는 지역은 2차대전 이후 만성적인 분쟁지역이 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나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기존의 국가가 사실상 ‘해체’ 된 이후 인종적 대량학살이 벌어지는 등 극단적인 폭력이 지배하기도 하였다. 세계화 시대 ‘경계’의 의미는 또한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경계’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이 집결하는 중심부와 빈곤과 기아, 그리고 AIDS와 같은 끔찍한 폭력에 노출된 주변부를 가로지르는 ‘요새의 성벽’과 같은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노동자와 여성, 농민들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 기업들의 각종 투자에 의해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고 있으며,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속에서 호황을 거듭하는 중심부의 금융시장의 혜택은 극소수의 ‘주주’에게만 천문학적인 부의 형태로 집중될 뿐이다. 사회의 최상부에 위치한 부르주아에게 더 이상 국경의 의미가 남아있지 않지만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려는 노동자들에게 국경은 배제와 억압의 대표적인 장벽으로서 그/녀들을 공동체로부터 분리하고 시민권을 부인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바로 오늘날 민중들을 극한적인 생존의 위협으로 몰고 가는 영토/국경에 대한 지배계급의 관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면 대안-세계화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독도수호’는 민중의 언어가 될 수 없다! -한·일 지배계급이 공명하는 ‘미국과 군사동맹’이라는 암묵적 카르텔 우리는 영유권 주장의 논리가 첫째는 근대국가의 영토주의에 호소함으로써 지배계급의 동원전략에 조응한다는 점, 둘째는 제국주의적 군사재편에 조응하는 일본의 우경화(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공명하는 것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남한의 지배계급 역시 마찬가지이다)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운동진영 일각에서 제기되는 독도수호를 위한 캠페인을 반대한다. ‘영토주의’에 대한 호소는 내부의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과 봉쇄를 사전에 봉쇄한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식민지적 사회·경제적 관계의 청산은 해방된 조선에서 해방 직후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의 해체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에 의해 폭력적으로 무산되었다. 당시 미군정이 필요로 했던 것은 사회혁명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서 구 지배계급의 부활을 꾀한다. 조선에서 일제에 협력했던 억압적 국가기구(총독부, 경찰, 군대)의 관료들은 미국의 반소·반공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바로 이들이 오늘날 한국 지배계급의 역사적 기원을 형성한다. 즉 역사적으로 한국의 지배계급에게 제국주의 전략에 동참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활적인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반공·발전주의를 추진하기 위해서 남한의 집권세력들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대해 적극적으로 편승했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갈등은 식민지적 사회·경제적 관계를 청산하기는커녕 유지·온존하는데 급급했던 미국의 동아시아에서의 전후 처리의 부차적인 산물에 다름 아니다. 미국은 전후 일본의 구 지배계급에게 면죄부를 부여했고 이는 사회주의 진영을 제외한 동아시아 국가에서 인적청산에 그치지 않는 착취와 수탈로 점철된 사회구조의 변혁을 동반한 ‘과거사 청산’은 결국 대다수 민중들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던 구 지배계급의 복권으로 귀결되었다. 게다가 최근 각종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 밝혀지는 바에 의하면 역대 한국의 정권들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포함하여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인적·물적 희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일본측의 논리를 얼마나 수수방관했는지 드러난다. 1960년대 한일국교 ‘정상화’ 당시 박정희 정권이 ‘청구권’을 포기한 결과 얼마나 많은 징용노동자, 정신대 할머니들이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가? 김대중 정권은 한·일 新어업협정을 체결하면서 독도를 양국의 중간지역으로 설정하자는 일본의 주장을 수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측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가? 또한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일본을 방문하면서 “‘과거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장담하지 않았던? 언제나 말로만 일본을 규탄하던 지배계급이었다. 오히려 이들은 일본의 보수화되고 우경화된 지배계급과 마찬가지로 미국과의 군사동맹의 신성함을 강조하면서 패권을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부담을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형편이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남한의 지배계급과 일본의 우경화가 암묵적으로 공명하는 동아시아의 제국주의적 재편전략이다. 보수적인 신문의 칼럼이나 사설에서는 미일동맹보다 강고한 한미동맹을 구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제출되고 있지 않았던가? “독도는 우리땅” 식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사회운동은 지배계급의 전략에 종속되어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고, 자발적으로 무장을 해제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고 나아가 그들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비판하려면, 일본의 우경화를 적극적으로 주문하는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 이에 공명하는 남한의 지배계급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군사동맹이라는 동아시아 지배계급의 암묵적 카르텔이야말로 오늘날 민중들이 투쟁해야할 대상이다! 동아시아에서 반미반전의 국제연대를 구축하자! 사회운동은 제국주의라는 지극히 현재적인 쟁점을 한국과 일본 중 누가 더 미국의 충실한 파트너가 될 것인가 하는 양국의 지배계급의 경쟁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평화에 대한 염원을 드러내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에서 오늘날 과거 제국주의 침략을 미화하고 그 책임을 은폐하기에 급급한 극우세력은 과거 일본 민중이 반핵·반전 여론이 드높을 때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극소수의 집단에 불과했다. 결국 일본의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발호를 막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재편과 일체의 전쟁과 군사적 폭력에 반대하는 민중의 단호함이다. 일본의 재무장과 우경화를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 속에서 설명하며 평택미군기지 반대투쟁, 이라크 철군투쟁 등 당면한 반전반미투쟁을 선전하고 이에 대한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를 끌어올릴 기회로 삼아야 한다. 미국의 제국주의 재편전략과 미국과의 파트너를 꿈꾸는 한국과 일본의 지배계급의 암묵적인 공명을 ‘아래로부터’ 분쇄해가는 민중들의 반미반전투쟁이 오늘날 가장 유효한 제국주의 비판이며 사회운동이 가장 우선적으로 착목해야 할 지점임을 잊지 말자. PSSP 1) 애초 조선 시대 일본과의 분쟁은 울릉도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동래 어부 안용복이 일본인을 쫓아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갈 당시 울릉도는 1430년 이래 왜구(倭寇)의 침략을 우려한 공도(空島)정책으로 인해 섬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17세기 후반 인근의 풍부한 어장을 둘러싸고 조선과 일본의 어부들 간에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하지만 지난 해 ‘경국대전’을 전거로 활용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되었던 ‘행정수도 위헌’ 판결에서 드러나듯 현재의 ‘대한민국’이 과연 ‘조선’이나 ‘대한제국’을 계승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존재한다. .본문으로 2) 일본은 이번 시마네현의 조례제정이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1970년대 연호법제화 당시 사정을 살펴보면 지방의회의 결의가 중앙정부를 압박하는 동시에 법제화의 명분을 제공한 전례를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천황의 재위기간 중에 사용하는 연호(年號)를 법제화하는 결의가 1977년 9월부터 1978년 말까지 1170개의 시·군·면 의회에서 자민당의 주도로 통과한 이후 1978년 10월 각의에서 결정이 내려진 이후 드디어 1979년 6월 ‘연호법’이 참의원을 통과함으로써 공표되었다. .본문으로 3) 여기서 ‘북방영토’란 일제가 러일전쟁(1904년) 이후 포츠머스 조약에서 획득하였으나 패전 이후 소련이 점령한 사할린 남부의 쿠릴열도(지시마 열도)의 네 개 섬인 쿠나시리, 에토로후, 시코탄, 하보마이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지시마 열도 및 포츠머스 조약으로 획득한 섬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였으나 이후 1950년대 소련과의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네 개 섬 모두의 반환을 주장했다. ‘북방영토’ 문제는 홋카이도에 속한 시코탄 하보마이 두 개 섬을 반환할 수 있다는 당시 소련의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아직까지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본문으로 4) General Head-quaters of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일본에서 미군정은 조선의 미군정과는 달리 내각을 통해 지배하는 간접통치방식을 채택하였다..본문으로 5) 헌법 9조 1항: “정의와 질서에 바탕한 국제평화를 열망하여, 일본 인민은 국가 주권으로서 전쟁과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위협, 또는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헌법 9조 2항: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타의 잠재적인 무력이나 육·해·공군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6) 일본은 2003년 6월 노무현 대통령의 방일 첫날에 3개의 ‘유사법안’을 통과시켰는데 ‘무력공격사태법’, ‘자위대법 개정안’, ‘안전보장회의 설치법 개정안’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 자위대의 출동요건은 “무력공격 발생·임박 및 예측사태”로 포괄적으로 규정되었고, 방위출동 명령 발동 이전이라도 자위대의 진지구축·무기용 토지· 식량 강제수용이 가능할 수 있도록 했으며, 총리 및 각료가 참석하는 안보회의의 기능을 보강하기 위해 산하에 일상적으로 위기관리 대책을 연구·제언하는 전문위원회를 신설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은 “일본 주변의 유사시”에 대비하는 ‘주변사태법’(1999.5)에 이어 “일본의 유사시”에 대비하는 법률적 토대를 완성하였으며 관련하여 방위청 승격, 테러·괴선박 대책관련법 등 후속 유사법제의 정비와 미·일동맹의 강화 및 국제사회에서의 군사적 역할의 확대를 위한 집단자위권의 인정 등을 추진하는 데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배정호, 「일본의 안보개혁과 유사법제 정비」, 통일연구원, 2003 참조. .본문으로 7)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성립과정에서 자본과 국가의 다양한 결합의 시도로서 제국 모델, 민족-국가 모델, 도시국가 모델에 대해서는 Geovanni Arrighi, The Long Twentieth Century, Verso, 1995 3장 참조..본문으로 8) 당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팽창세력은 또한 다름 아닌 가장 강력한 민족-국가들이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을 보라. 영국은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 ‘제국’이었다. .본문으로 9) 민족-국가의 역사적 형성과 ‘허구적 종족성’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민족형태, 그 역사와 이데올로기〉,《이론》6호 (서관모 옮김) 참조.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