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 2005-09-03

    유럽 경제화폐동맹, 화폐위기, 단일유럽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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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경제화폐동맹, 화폐위기, 단일유럽통화 구글리엘모 카르케디 번역: 임필수 (정책편집국장) 서론 유럽 경제화폐연합(EMU)이 창설되면 유럽 경제통합은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할 것이다. 미디어는 매일 보고서와 분석을 쏟아 붓지만, 경제통합 과정의 모순을 밝혀내지 못한다. 미디어에 따르면 화폐위기의 갑작스러운 분출은 순전히 투기 자본의 운동 탓으로 돌려진다. 또한 EMU 수렴기준을 성취할 수 없는 회원국가의 무능력은 단지 재정 정책의 엄격성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단일통화 곧 유로의 도입은 순전히 화폐 제도의 변화로 이해된다. 노동가치이론 즉 가치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이론에 기초를 둔 분석은 드물다. 이 글의 목적은 노동가치이론에 기초한 대안적 분석을 계발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경제위기, 화폐, 인플레이션 지면의 제약 때문에 이 글에서 노동가치이론의 기초원리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약간의 언급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이번 절의 내용은 매우 축약된 것이므로 불완전하다. 예를 들어 신용의 역할을 다루지 않았다). 노동가치이론의 핵심은 기술경쟁이 자본주의 다이내믹스 배후의 기본 추동력이라는 점이다. 기술경쟁을 통해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진다(생산성 향상을 투자한 자본 단위당 산출 단위의 증가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이 생산수단으로 대체되므로 기술혁신은 실업을 낳는다. 이에 따라 생산물이 증가할수록 생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고 구매력이 줄어든다. 노동가치이론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가치는 인간노동으로서 (1) 자본주의 생산관계 하에서 수행되며, (2) 사용가치를 (물질적, 정신적으로) 변형하며, (3) 판매/구매, 즉 화폐를 통해 실현되는 인간노동이다. 따라서 생산물의 양이 증가하더라도, 생산물에 포함된 가치는 감소한다. 구매력의 감소는 더 적은 가치가 생산된 결과며, 달리 말해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해 더 적은 노동이 고용된 결과다. 실현(판매) 위기가 뒤따른다. 이는 이윤율의 위기와 기업파산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내적 모순의 해결책은 없지만, 생산과 실현의 위기를 지연하기 위한 여러 완화책이 고안되었다. 구매력을 ‘창출’하기 위해 화폐량을 늘리는 것이 한 방식이다. 그렇지만 화폐가 퇴장하지 않는다면 (생산부문이든 금융부문이든 간에) 인플레이션, 즉 화폐의 구매력 하락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산성 증가, 실업,1) 인플레이션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그렇지만 화폐량의 증가로 모든 기업이 이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가격이 높은 비율로 상승한 상품은 천천히 상승한 상품으로부터 가치를 영유한다(이런 재분배는 자본 사이에 발생한다). 더구나 임금재 가격의 변화율이 임금 변화율을 앞지르면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가치의 재분배가 발생한다. 양자 모두 구매력이 창출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구매력의 재분배가 발생한다. 이는 일시적으로 일부 (또는 모든) 자본의 실현 위기, 이윤율의 위기를 완화할 수 있지만, (경험적인 관찰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결국 위기가 분출한다. 화폐주의와 신케인즈주의 정책은 불가피한 위기에 대항하는 데 무력하다. 이제 기술혁신에 따른 다른 유형의 가치 재분배를 살펴보자. 각 부문 내에서 생산품이 거의 비슷한 가격에 판매된다고 가정하면 가격은 각 상품에 포함된 가치의 평균값이다. 또한 각 부문에서 생산자의 생산성 수준이 다르다고 가정하면, 생산성이 높은 기업은 더 높은 이윤을 실현하며 생산성이 더 낮은 기업은 더 낮은 이윤을 실현한다. 인플레이션이 없다고 가정하면 가격형성은 생산성 수준의 차이에 따른 가치의 재분배를 함의한다. 이와 동일한 메커니즘이 국제 수준에서도 작동한다. 가장 발전된 생산자들이 어느 한 나라에 있고 경쟁에 뒤떨어진 생산자들이 다른 나라에 있다면, 가장 발전된 생산자들과 (확대해서 보면) 그들이 활동하는 나라는 그들의 생산물(의 일부)을 팔 수조차 없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생산자들의 희생을 대가로 더 많은 가치(더 높은 이윤율)를 실현한다. 가치가 서로 다른 통화로 표현된다면 (국제) 가치의 생산과 분배 또는 가격형성은 환율메커니즘이 명백히 결합되어 있다. 노동가치이론에 따르면 환율메커니즘은 높은 생산성을 보상하는 국제가치의 재분배 메커니즘이다. 이에 대한 분석은 그 중요성에 비해 아직 초보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환율과 화폐위기 오늘날 생산과 가치실현은 국제적인 과정이다. 자본은 (1) (원자재를 포함하여) 해외 생산수단을 획득하기 위해 (2) 생산과정 전체나 일부를 [해외에] 설립하기 위해 민족 경계를 가로지른다. 또한 자본은 자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노동력을 찾고 고용한다. 게다가 생산된 가치는 자국뿐만 아니라 해외시장에서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자본은 항상 가장 높은 이윤율을 추구하기 위해 (세계 금융시장을 포함하여) 세계를 배회한다. 이 모든 것을 야기하는 경제적 단위는 작은 기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규모로 활동하고 경쟁하는 큰 과점체, 즉 초민족 법인기업이다. 대개 초민족 법인기업은 높은 수준의 생산성 때문에 효율성이 낮은 경쟁자들을 희생하여 더 많은 양의 가치를 실현한다(즉 높은 이윤율). 더욱이 그들의 생산품에 대한 수요가 충분히 크다면, 그들은 다른 부문(의 생산자)로부터 가치를 영유한다. 이러한 부문들이 국제적이므로, 가치를 영유하는 게 자본이 아니라 국가라는 착시가 발생한다. 생산품이 서로 다른 통화로 판매된다고 가정하면, 환율 메커니즘은 단지 서로 다른 통화들의 교환을 위한 의식적인 제도적 합의와는 거리가 멀며, 그 역시 국제가치를 영유하는 객관적인 체계다. 그러므로 민족 자본은 해외통화의 형태로 국제가치를 영유한다. 환율은 국제통화를 포함하여 해외통화가 민족통화 한 단위와 교환되는 비율이다.2) 만약 환율 메카니즘이 가치 영유를 함의한다면, 환율의 운동은 가치영유에 영향을 미친다. 다른 통화에 대한 어느 한 통화의 평가절상, 예를 들어 DM(독일마르크)에 대한 엔화의 평가절상은 엔화 보유자에게 더 많은 DM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며 따라서 DM으로 가격표시된 사용가치(반드시 독일에서 생산된 것은 아니다)의 더 큰 부분에 대한 권리를 부여한다. 따라서 엔화 보유자가 더 큰 국제가치를 영유한다. 엔화의 평가절하와 DM의 평가절상도 유사하다. 먼저 생산영역에서 자본가가 유일한 해외통화 보유자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평가절상은 통화가치가 상승한 나라(의 생산자)에 의한 가치영유를 함의하며, 평가절하는 통화가치가 하락된 나라(의 생산자)로부터 가치영유를 함의한다. 이것은 하나의 경향이다. 이러한 분석은 생산성, 환율, 가치영유의 변화를 다뤄야 한다. 먼저 환율이 고정되어 있을 때 기술경쟁이 국제가치의 생산과 분배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자본의 생산성 상승이 투자된 1단위 자본 당 사용가치의 양을 증가시키지만 (노동력이 생산수단으로 대체되므로) 생산된 가치를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앞서 살펴보았다. 자본이 증가된 산출물을 해외시장에서 판매한다면 민족통화와 교환되는 더 큰 양의 해외통화를 영유하며, 이는 이윤율의 상승으로 귀결된다. 혁신적인 자본은 이윤율을 상승시키지만 더 적은 (국제)가치 생산을 초래한다. 혁신적인 자본이 일본 자본이라고 가정하자. 일본의 다른 생산자들은 어떻게 반응할 수 있나? 최고의 대안은 새롭고 더 발전된 기술을 도입하여 경쟁의 우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들이 성공한다면 그들은 더 높은 이윤율로 인식할 수 있는 특별[잉여]가치(extra value)를 영유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관심을 두는 전부다). 이러한 과정이 제약을 받는다면, 환율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 경제의 한 부문이나 그 이상이 지속적이며 일반적인 생산성 향상을 경험하면 외국에서 엔화 수요가 증가하고, 따라서 이는 엔화에 대한 상승압력을 낳고 궁극적으로 엔화의 평가절상이 발생한다. 이제 이것이 수입과 수출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엔화의 평가절상으로 인해, 엔화로 가격표시된 일본 수출품은 더 많은 해외 통화로 교환된다. 일본 수입업자는 민족확폐 형태(엔화)로 환산했을 때 수입 상품 각 단위 당 더 많은 가치를 지불해야 한다. 효율성 증가로 인한 국제가치의 더 큰 영유는 오직 혁신적인 자본에게 이득을 주며, 평가절상은 모든 수출업자에게 이득을 주지만 (혁신적이든 아니든) 수입업자에게 피해를 준다. 따라서 혁신적인 수출업자의 기술혁신과 노동을 제거하는 높은 생산성에서 기인하는 평가절상 때문에 평가절상의 경향은 감소한 국제가치의 양 가운데 상대적으로 더 큰 몫을 (화폐자본으로서) 수출업자가 각각의 수출된 상품만큼 영유하며, (상품자본으로서) 수입업자가 상대적으로 더 작은 몫을 각각의 수입된 상품만큼 영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평가절상은 수출량과 수입량에 영향을 끼친다. (해외통화로 표시된 수입품의 가격이 변화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고 가정하면) 비싼 엔화는 수입을 촉진하며, 이런 측면에서 수입업자가 영유하는 국제가치의 몫은 증가한다. 이 역시 평가절상의 경향에 속한다. 그러나 반대로 수출은 방해를 받는데(해외 수입업자는 동일한 양의 엔화나 엔화로 표시된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더 많은 해외통화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수출업자가 국제가치의 몫을 영유하는 것은 저지된다. 따라서 평가절상의 반(反)경향은 평가절상이 수출량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평가절상된 나라가 감소된 국제가치의 양 중에 상대적으로 더 큰 몫을 영유하는 데 부과되는 제약이다. 기술혁신은 생산된 가치의 양을 줄이지만, 평가절상은 그렇지 않다. 평가절상은 기술혁신에 의해 가치가 감소되든 아니든 간에 오직 가치를 재분배할 뿐이다. 경험적으로 평가절상된 나라의 가치의 순 영유는 (감소된 가치 양 중에서 더 큰 몫을 영유하는 것이 수출 감소로 인해 저지되므로) 양의 값일 수도 있고 음의 값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체계의 기능에 대해서 경향과 반경향을 구별하는 게 중요하다. 경향은 이 체계의 다이내믹스를 설명한다. 혁신적인 나라는 국제가치의 영유를 통해서 생산성 증가를 보상받는다. 그러나 나라는 행동과 생각을 하지 못하며 오직 사람만이 그럴 수 있으므로, 이러한 보상은 혁신적인 생산자의 높은 이윤율의 형태를 취한다. 높은 이윤율을 추구하면서 혁신적인 생산자는 통화의 평가절상을 야기하며, 따라서 그 나라와 그 나라 통화의 보유자의 전체적인 가치영유의 몫은 더 커진다. 이러한 운동은 반경향에 의해 저지되며, 평가절상 때문에 수출이 감소되며 영유하는 국제가치가 감소된다. 다른 나라의 기술 지체자는 어떤 전략을 취할 수 있나? 그들 역시 생산성 증대를 추구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그들은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지만(가치영유 몫의 증가와 높은 이윤율), 일반적인 상황이 더 악화되는 데 기여한다(생산되는 총 국제가치의 저하와 평균 이윤율의 저하). 만약 높은 효율성이 가능하지 않다면, 선택할 수 있는 출구는 수출을 촉진하기 위한 경쟁적인 평가절하를 향해 열려 있다. 평가절하로 인해 각각의 수출 상품에 대해 받는 해외통화와 교환되는 민족통화가 감소되더라도 수출량의 증가는 민족통화로 표시된 이윤을 증가시킨다. 평가절상과 마찬가지로 평가절하는 감소된 국제가치의 양을 재분배하지만, 가치의 감소를 야기하지는 않는다. 독일이 DM을 엔화에 대해 평가절하한다고 가정하자. 독일 수출업자는 DM으로 가격표시된 각각의 수출품에 대해 더 적은 엔화를 받게 되며, 따라서 국제가치를 덜 실현하게 된다. 독일 수입업자는 엔화로 가격표시된 각각의 수입품에 대해 더 많은 DM을 지불하며, 민족통화(DM) 각 단위에 포함된 가치를 더 적게 얻게 되며, 국제가치를 더 적게 실현하게 된다. 이것은 경향이며, 국제적으로 교역되는 각 산출물에 대한 가치의 손실을 입으며 따라서 실현된 국제가치의 더 적은 몫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왜 독일은 평가절하를 하는가? 독일과 일본이 동일한 상품 x를 생산한다고 가정하자. 독일과 일본의 상품을 각각 xg와 xj라고 부르고, DM1=엔1=$1=가치 1단위=1xg=1xj이며, 각 나라의 생산성은 자본 1 단위당 10x 이며, x에 관한 국제시장은 10xg와 10xj= 20x이며, 국제가격은 달러로 표시된다고 가정하자. 각 나라의 수출업자는 10달러를 실현한다. 이제 일본의 생산성이 1자본 당 20xj로 증가한다고 가정하자. 전체 수요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가격을 낮출 수 있고, 말하자면 20xj=$19가 된다. 독일의 국제시장은 붕괴한다. 독일의 수출업자는 그들의 가격을 10xg=$9=DM9으로 내리는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으며, 국제시장에서 그들의 몫을 다시 획득할 수 있다.3) 그러나 그들의 수입은 DM10에서 DM9로 하락한다. 가치(이윤)의 1단위를 잃으며, 외화보유가 1$ 손실을 입는다. 그들은 DM과 달러로 가격표시된 상품의 구매력의 손실을 보지만(이윤 하락), 경제의 나머지 부문은 독일과 해외에서 동일한 양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그 대신에 독일은 그들의 가격을 10xg=$9로 낮추고 동시에 DM10=$9로 평가절하 할 수 있다. 그러면 10xg=$9=DM10이 된다. 독일의 x 생산자의 이윤은 변화하지 않고 유지되지만, 가치 1단위를 손실한다(독일에서 생산된 가치 10단위는 $9=국제가치 9단위와 교환된다). 또한 외화보유는 $10에서 $9로 하락한다. 이제 독일 수출업자는 동일한 양의 DM을 보유하고 따라서 독일 내에서 동일한 구매력을 보유하고 DM으로 표시된 동일한 이윤율을 보유한다. 하지만 그들의 DM은 다른 DM 보유자와 마찬가지로 더 적은 달러를 차지하며, 따라서 더 적은 국제가치를 차지한다.4) 이제 독일 수출업자는 다른 해외통화 보유자와 함께 국제가치의 손실을 나눈다. 따라서 DM이 평가절하 되든 아니든, 독일의 가치손실은 기술경쟁에서 뒤쳐진 것에 대해 지불해야 할 대가다. 이는 자본주의 기능의 지배를 따른다. 유일한 문제는 이러한 기술적 지체의 피해를 누가 감당하느냐 문제다. 평가절하를 하게 되면 국제가치의 손실은 독일의 수입업자가 달러로 표시된 상품을 수입할 때 가시적이게 된다. 이런 경우 DM은 더 적은 국제가치를 구매하게 된다. 그래서 평가절하 때문에 가치는 수출을 통해서(수출되는 각 상품에 대해 더 적은 국제가치를 얻게 되므로) 그리고 수입을 통해서(수입되는 각 상품에 대해 더 많은 국제가치를 지불해야 하므로) 가치의 손실을 입는다. 이처럼 수입과 수출을 통한 가치의 손실은 경향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DM의 평가절하는 DM으로 가격표시된 수출품의 가격을 낮추어 수출 증가를 낳는다. 독일이 손실한 국제가치의 몫은 이러한 측면에 의해서도 증가한다. 이 역시 경향의 일부분이다. 일본의 기술변화에 따라 전체 국제가치가 감소했으므로, 이는 감소한 국제가치 중에서 독일이 영유하는 절대량도 줄어든다는 것을 뜻한다(반대로 일본이 영유하는 가치의 절대량은 커질 수 있다). 다른 한편 평가절하는 독일이 수입하는 상품을 더 비싸게 하므로 수입이 줄어들고 가치 손실은 줄어들 수 있다. 이는 반경향이다. 그러므로 평가절하의 경향은 가치의 손실, 즉 감소된 국제가치 중 실현되는 몫이 더 작아지는 것이다. 수출이 증가하면 이러한 손실은 증가한다. 평가절하의 반경향은 평가절하가 수입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발생하는 손실의 감소다. 정통 경제학은 평가절하의 영향을 평가할 때 수출업자와 수입업자가 벌어들이는 화폐의 측면에서 수출업자의 이득과 수입업자의 손해만을 살펴 볼 뿐이다. 정통 경제학은 수출과 수입을 통해 발생하는 가치의 경향적 손실과 평가절하가 수출 증대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 때문에 발생하는 가치의 경향적 손실에 대해 보지 못한다. 이러한 경향은 반경향에 의해 저지되며, 이러한 반경향은 수입량의 감소에 기인한다. 환율의 작용은 특별한 성격이 있지만, 국제자본주의 맥락에서 기술혁신을 보상하기 위한 또 다른 경향적인 방식이며 기술경쟁에서 뒤쳐진 자들의 희생을 대가로 한 것이다.5) 여기까지 초점은 환율조절에 따른 자본들 (그리고 따라서 민족들) 사이의 국제가치의 재분배였다. 이러한 결과는 제국주의 체계의 중심부와 피지배 블록 사이 관계의 맥락에서(이번 절) 그리고 EU 회원국 사이의 관계의 맥락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가치 재분배를 조사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먼저 앞서 분석은 모든 나라들이 기술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이 억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현실적으로 흔히 피지배 블록은 기술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중심부(의 기업)과 경쟁할 수 없다. 피지배 블록이 제국주의 중심부의 높은 생산성 수준만큼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면, 피지배 블록은 중심부의 선진기술과 경쟁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더 오랫동안 더 강도 높게 노동하도록 강요하는 데 의지해야만 한다. 동시에 이러한 높은 생산성은 결코 높은 실질임금으로 보상되어서는 안 되며, 실질임금이 높아지면 이윤율은 상승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는 잉여가치의 증가다.6) 그러나 노동일의 증대는 인간의 육체적 지구력과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실질임금은 인플레이션을 통해 낮추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민족통화로 표시된 더 높은 가격은 더 낮은 국제 가격으로 상쇄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가치절하가 요청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높은 효율성 때문에 경쟁의 이점을 지닌 수출업자의 나라는 그들의 통화 가치를 올리는 경향이 있다. 기술적으로 열등한 경쟁자는 해외시장에서 손실을 피하고 따라서 인플레이션에 따른 이윤율의 손실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그들의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평가절하는 역으로 인플레이션을 요청한다. 사실 평가절하는 민족통화로 표시되는 수입품 가격에 타격을 주며, 따라서 수입업자의 이윤을 감소시킨다. 수입품이 생산수단인 경우 수입품의 높은 가격은 자본가의 이윤을 감소시킨다. 인플레이션을 향한 경향이 뒤따른다. 수입품이 임금재인 경우, 수입품의 높은 가격은 노동자의 구매력(임금)을 감소시키며 따라서 증가하는 이윤을 감소시킨다. 하지만 노동자는 낮은 실질임금에 저항하고 자본은 인플레이션에 의지할 수 있지만, 이는 임금재 가격의 상승률이 임금의 상승률보다 높은 조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즉 노동으로부터 자본으로의 구매력 이동은 초기에는 자본에게 이롭지만 임금재 부문의 실현 위기를 낳으며(임금재 부문의 위기는 수출을 통해 완화될 수 있다) 따라서 평가절하와 인플레이션의 심화라는 악순환으로 접어든다. 이런 바닥을 향한 소용돌이는 노동자 빈곤의 증가와 사회적 긴장, 이와 결합된 문제들을 낳는다. 게다가 이런 과정이 심화된다면 그 나라의 통화는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 발생했다. 기술적 지체와 인플레이션, 평가절하는 흔히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에서 이러한 조건들을 강요하는데 필요한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체제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진 것처럼 엄청난 비참함을 낳았다(이런 경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그 나라의 인민들에게 허리띠를 더 졸라매는 게 이익이라고 납득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 절 마지막에서는 하나의 문제를 더 언급하겠다. 즉 자기 나라의 통화가 매우 독특한 특권인 화폐주조이익(seignorage)을 누리는 나라에 대해 언급하겠다. 전후 시대 이후로 이는 미국 달러가 누린 특권이다. 미국은 단지 달러를 찍어냄으로써 실제로는 아무 가치가 없는 종이로 실재 상품에 지불하고, 따라서 가치에 지불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은 지폐를 찍어내는 중앙은행과 유사한 특권을 누린다. 그러한 지폐 역시 (국제)가치의 몫을 영유하는 데 사용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한계가 있다. 거대한 양의 달러는 달러의 구매력을 감소시키며 .외국인이 지불수단이자 보유 통화로서 달러를 유지할 의지를 감소시킨다. 이는 국제 화폐로서의 달러의 지위를 침식하며 따라서 화폐주조이익을 통해 이윤을 얻을 가능성을 침식한다. 게다가 화폐의 창조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 이는 평가절하를 야기하고 국제화폐로서의 달러의 위치를 더 침식한다.7)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절대적인 경제지배 시대에 1세계와 3세계 양자 모두 달러를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원했다. 왜냐하면 달러는 거대한 금 보유량으로 담보되었으며 싸고 품질이 좋은 미국의 상품의 구매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경제가 전쟁의 상처를 입지 않았고 [다른 나라에 비해] 생산성이 더 높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는 미국의 달러가 ‘금과 같다’고 여겨진 이유다. 1944년 브레튼우즈에서 합의된 국제화폐체계에서 달러는 금의 가치와 고정되었고, 이 상태를 반영하여 다른 나라의 통화는 고정환율체계에서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미국의 기술적 우월성을 반영하는 한에서만 부드럽게 기능할 수 있었다. 미국이 일단 경쟁의 이점을 잃기 시작하자 고정환율체계는 깨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브렌튼우즈 체계는 달러의 평가절하를 허용하지 않았고 달러의 평가절하는 국제화폐로서의 기능과 화폐주조이익을 손상시켰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국제경쟁력을 떠받치기 위한 수단으로 달러의 평가절하가 필요했다(1950년 세계 산업생산 가운데 미국이 47.8% 일본이 1.6%를 차지했으나 1985년에는 미국이 39.3% 일본이 11.5%를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딜레마에 사로잡혔다. 해결책은 달러의 ‘연착륙’, 즉 달러의 국제신뢰 침식을 피하기 위한 점진적인 평가절하였다. 그러나 이는 고정환율에서 신축[변동]환율로 변화와 1971년 벌어진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의미했다. 이는 국제화폐로서 달러의 지위를 손상시켰다. 점차 국제통화의 두 경쟁자, 즉 DM과 엔화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화폐주조이익을 잃지 않았지만 특권적인 위치는 점점 더 위협을 받았다. 이것이 현재 국제 화폐위기의 구조적 이유다. 국제화폐의 안정성은 평가절하에 종속되지 않고 따라서 투기적인 공격에 종속되지 않는 안정된 국제화폐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역할은 달러에 의해 수행되었지만 1970년대 이후로 미국이 점점 더 절대적인 기술적 지도력과 경제권력을 상실하자 달러는 더욱 더 불안정해졌다. 미국이 지배적 위치를 잃을수록 미국은 더 평가절하에 의존해야 했고, 국제지불과 보유통화의 수단으로서 달러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고, 다른 통화의 앵커로서[기축통화로서] 기능할 수 없게 되었고, 점점 더 투기에 종속되었다. 달러가치의 변동은 다른 모든 나라 통화의 변동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동시적인 화폐위기가 재발했다. 이는 화폐위기의 구조적인 원인과 위기의 정세적인 발현을 연결한다. 화폐위기는 한 민족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기술적, 경제적 지도자로 등장할 때만 크게 감소될 수 있으며, 오로지 세계의 통화들이 단 하나의 통화로 대체될 때만 확실히 사라질 수 있다. 두 가지 경우의 가능성을 살펴볼 때, 지금의 화폐위기는 꽤 오랫동안 존재할 것이다. 화폐위기는 투기자본운동의 직접적인 결과지만 경제적·기술적 권력의 장기적 관계의 변화에 의해 야기된다. 각각의 화폐위기 이후 환율은 과거 수준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새로운 평가 부근에서 결정된다. 이는 투기적인 운동이 더 심층의 구조적인 운동법칙에 기인하기 때문이며, 투기적인 운동은 그러한 운동법칙을 드러낸다. DM, 달러, 엔화의 환율을 고정시키자는 어떤 제안도 이러한 환율의 휘발성의 구조적인 이유를 밝히지 못한다. EMU와 단일통화는 오직 유럽공동체 내부의 화폐위기를 제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이 만약 달성된다고 하더라도 더 광범위한 화폐위기나 유럽 내부의 불평등한 발전을 제거할 수 없다. 위기는 자본주의 체계에 고유하다. 자본주의에서 위기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위기가 발현되는 형태를 바꿀 수 있을 따름이다. 유럽화폐동맹과 단일통화 위의 분석은 유럽화폐동맹(European Moneytary Union, EMU)에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EMU의 선구자인 유럽화폐체계(European Monetary System, EMS)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하자. EMS의 기본적인 두 특징은 환율메커니즘(Exchange Rate Mechanism, ERM)과 유럽통화단위(European Currency Unit, Ecu)다. Ecu는 모든 회원국의 통화가 서도 다른 분량(비중)으로 표현된 복수통화(composite currency)다. 민족통화는 Ecu에 대해 고정된 가치를 지니며, 따라서 각각의 민족통화에 대해 고정된 가치를 지닌다. 예를 들어 파이낸셜타임즈 1995년 3월 7일자에 따르면 1 Ecu는 2.152 Fl[네델란드 길더]과 6.406FFr[프랑스프랑]과 같다. 이를 Ecu에 대한 양자간 중심환율(bilateral central rate), 줄여서 중심환율이라고 부른다. 이는 2.152 Fl=6.406FFr 또는 1FFr=0.3359Fl, 1Fl=2.976FFr을 의미한다. 이는 양자간 교차 중심환율, 줄여서 교차환율이라고 한다. 1992년까지 회원국은 자국 통화의 변동폭을 상대적으로 좁은 폭인 교차환율의 ±2.25% 이내로 유지해야만했다(이탈리아는 ±6% 폭이 허용되었으나 1990년대에는 ±2.25%를 채택했다). 1993년 위기 이후 이러한 폭은 15%로 확대되었다(독일과 네델란드만 예외였는데, 두 나라는 ±2.25% 폭을 유지했다). FFr과 Fl의 상대적인 최대 변동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FFr이 Fl에 대해 가치를 잃는다고 가정하자(즉 FI가 FFr에 대해 가치를 얻는다고 가정하자). FFr이 최대 15% 평가절하되고 FI가 최대 15% 평가절상된다. 네델란드가 프랑스에 대해 평가절상되는 것과 프랑스가 네델라드에 대해 평가절하되는 것은 정치적으로 차이가 있다. 프랑스는 평가절하와 평가절하에 결합된 부정적인 이미지를 피하기 위해 전자의 선택을 선호할 것이다. 값을 계산할 때도 양자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평균을 취해야 한다. 예를 들어 FFr이 15% 평가절하되면 FFr은 Fl2.152=FFr7.3669로 하락하며 1Fl=FFr3.423이다. Fl이 15% 평가절상되면 Fl은 Fl=2.152=FFr.7.3669, Fl1=FFr3.5021이다. 평균을 취하면 Fl1=FFr3.457이다. 이는 FFr을 Fl에 대해 최대로 평가절하한 값이다(즉 Fl에 대해 FFr을 최대로 평가절상한 값이다). 또는 중심환율이 Fl1=FFr2.976이라고 하면, FFr은 Fl에 대해 최대 Fl1=FFr3.457까지 평가절하가 허용된다는 것이다. FFr이 Fl에 대해 평가절상하는 것도 유사하다. 통화를 양자간 한계 내로 유지하기 위해 중앙은행과 정부는 간섭해야만 한다. 약한 통화의 경우에는 중앙은행과 정부가 이자율 상승에 의존하며, 통화의 다양성을 활용하거나 재정정책을 강화하는 활동을 지지한다. 강한 통화의 경우는 반대다. 하지만 중앙은행은 양자간 한계선에 도달하기 전에 기다리지 말고 간섭해야 한다. 한 나라의 통화가 Ecu 중심환율의 허용한계의 3/4에 이르게 되면 괴리지표(divergence indicator)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정부가 이를 교정하는 행동을 할 것이라는 가정이 존재한다. 한 통화가 Ecu의 한 부분인 한에서 자신을 기준으로 변동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예를 들어 DM이 Ecu 가치의 30.2%를 형성한다면 DM은 Ecu, 즉 Ecu를 형성하는 다른 통화들에 대해 100-30.2=69.8%만큼 변동할 수 있다. 따라서 DM은 Ecu에 대해서 0.698×15=±10.47 폭 내에서 변동할 수 있다. 이제 어떻게 양자간 폭이 기술적 지체자가 경기역행수단[경기가 위축될 때 사용하는 확장정책]을 사용할 가능성을 제한하는지 살펴보자. (생산성이 높은) 독일과 (생산성이 낮은) 이탈리아를 예를 들어 보자. 독일은 해외시장에서 더 경쟁력이 높다. 또한 높은 생산성은 독일의 노동자가 더 큰 물질적인 복지를 누리도록 한다.8) 독일의 높은 이윤 추구는 인플레이션에 상대적으로 덜 의존한다. 또한 인플레이션은 가격경쟁력을 손상시키며 평가절하를 필요로 한다. 독일의 목표는 DM이 국제화폐가 되는 것인데 인플레이션은 첫 번째 적이므로 때문에 독일은 인플레이션 수단을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상황은 정반대다. 낮은 수준의 생산력은 인플레이션 정책을 실질임금을 감소시키는 (즉 잉여가치율을 증가시키고 따라서 이윤율을 증가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할 조건을 형성한다. 이탈리아는 국제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평가절하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탈출로는 ERM 내에서 상대적인 고정성 때문에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정부가 경제를 자극하기 위해 화폐를 만드는 데 의존하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하자. 이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발생시킬 것이며, 리라의 평가절하를 요청할 것이다. 하지만 양자간 변동폭은 커다란 환율변동을 불가능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가 리라의 중심환율을 완화하여 평가절하를 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무역수지의 왜곡을 받아들이거나 인플레이션율을 감소시켜야만 한다. 이러한 간접적인 방식 즉 ERM을 통한 방식을 통해 독일은 이탈리아의 인플레인션율에 제한을 가하며 이탈리아의 경기역행수단의 (제한된) 효율성을 제약한다. 또는 독일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추기 위해 이자율을 낮춘다고 가정하자. 이자율의 변화가 금융자본의 운동에 영향을 끼치므로 금융행위자는 DM을 팔고 리라를 구입한다. 이는 리라를 평가절상시키고 DM을 평가절하시키는 경향이 있다. 만약 이러한 과정이 리라를 변동폭 상한까지 올리도록 위협하면 이탈리아는 리라에 대한 압력을 덜기 위해 이자율을 낮춰야 한다. 그러나 이는 원치 않는 인플레이션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러한 방식은 겉보기에 중립적인 메커니즘처럼 보이지만, 지배적인 나라 즉 독일과 독일 과점체의 특정한 경제정책과 이익을 촉진한다. 독일은 더 큰 효율성(상대적 잉여가치)을 통해 경쟁할 수 있지만 기술적 지체자는 절대적 잉여가치를 통해 경쟁해야만 한다. 이는 생산과정에서 더 긴 노동일이나 더 높은 노동강도(오늘날 노동신축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나 재분배(인플레이션)를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 ERM은 인플레이션이란 선택을 제한하고 전자의 방식(노동신축성)을 자극한다. 그것은 더 약한 나라가 더 강한 나라의 높은 효율성에 때문에 받게 되는 가치의 손실을 인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제지하려는 능력을 저지하고 기술적 지체자가 생산과정에서 더욱 더 (절대적) 잉여가치를 추출하도록 강요한다. 따라서 이것이 노동의 측면에서 ERM이 지닌 중요한 의미다. 동시에 이 체계는 의식적인 반(反)노동 경제정책이지만 멀리 떨어진 관료정치에 의해 부과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것은 ERM 내에서 환율이 안정될 수 없는 이유를 밝혀준다. 그 이유는 회원국의 불균등한 발전이다. 그러나 역시 두 번째 이유가 있다. 투자자는 달러가치의 하락을 두려워해 달러 포지션으로부터 이탈할 때 안정적인 통화를 찾는다. 그들은 대개 다른 유럽통화를 구매하지 않고 DM을 선호한다. DM은 평가절하될 위험이 없다(또는 적다). DM에 대한 초과수요는 DM과 다른 유럽통화들 사이의 환율에 영향을 미치며, 양자간 환율 변동폭에 긴장을 주며 재조정을 강요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방식으로 달러의 거대한 유입은 자신의 목적이 재조정을 피하는 것인 ERM의 작용을 위협한다. 기술 지도자가 자신의 통화를 평가절상하고 기술 지체자가 평가절하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지적했다. 이러한 법칙은 그것을 저지하려는 의식적인 시도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EMS가 효력을 발생한 후, DM은 오직 평가절상되었고 (1979년부터 1990년까지 DM은 여섯 배 평가절상되었다), 이탈리아 리라는 오직 여섯 배 평가절하되었을 뿐이다. 인플레이션을 보자면, 1980년을 100으로 잡으면 독일의 소비자가격은 1987년 121로 상승되었고, 이탈리아는 214로 상승되었다. 게다가 실업, 해외시장과 해외통화의 상실, 대중적인 불만 또는 단지 투기적인 운동 등을 보면 ERM 무게는 약한 나라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단 하나의 해결책만 남게 되었는데, 그것은 곧 ERM을 떠나는 것이었다. 실제로 1992년 9월 이탈리아와 영국은 ERM에서 이탈했다. 이제 우리는 EMU와 단일통화 뒤에 숨어 있는 동기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ERM은 DM이 유로로 변형되고 유로가 세계통화로 변형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므로 중요하다. 현재 DM은 국제화폐 역할에 있어서 [달러의] 유일한 경쟁자다. DM의 경제적 기초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진정한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 전체 유럽연합에서 사용되는 통화가 되어야 하며, 미국의 시장에 필적하는 시장에서 사용되어야 하며, 효율적이고 기술적으로 선진적인 생산체계에 의해 공급되어야 한다. 이는 유로로 표시된 국제거래의 양을 늘릴 것이며 그로써 유로에 대한 수요가 달러에 대한 수요에 맞먹거나 능가할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성공적인 한에서 세계 중앙은행들과 기관투자가들은 그들의 포트폴리오를 달러표시[자산]으로부터 유로표시로 조정하고, 따라서 원하는 순환을 강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유로가 DM이 취하는 새로운 형태가 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유로가 독일자본의 이해를 반영하고 촉진하는 경제정책에 따라 관리되는 한에서만(비록 간접적이고 협상의 방식을 통해서라도), 즉 마스트리히트 수렴기준을 엄격히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따를 때만(최소한 독일이 EU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보유하는 한) 그러한 과정이 현실이 될 것이다. 다른 회원국의 이해가 독일의 이해에 종속되는 것은 이러한 기준을 통해서다. 단일통화는 ERM이 제공하는 평가절하(재조정)에 의존할 수 있는 제한적인 가능성조차 제거할 것이며, 안정성 기준은 약한 나라의 경제정책을 독일의 경제정책에 더 깊이 속박되게 될 것이다. EMU 내에서 ERM은 사라지지 않지만 EMU 회원이 아닌 나라를 유로에 속박할 것이다. 유로는 非유로 통화의 중심환율의 기축으로서 Ecu를 대체할 것이다. 이는 비유로 회원국의 경제정책이 유로 지역의 경제정책, 곧 지배적 국가인 독일의 경제정책에 속박되게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EMU와 유로의 도입은 유럽통합 뿐만 아니라 독일의 지배적인 위치를 더욱 강화하는 단계가 될 것이다. EMU와 유로의 도입은 유로 지역과 외부 지역의 노동자의 희생을 대가로 한다. 그러나 또한 EMU는 인플레이션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긴축조치에 의존할 것이며 따라서 노동으로부터 자본으로 잉여가치를 재분배하는 재정정책에 의존할 것이다.9) EU 가입국이 독일에 속박될수록, 노동자로부터 가치의 착취는 더 커진다. 여기에는 이중적인 속임수가 있다. 첫째, 반노동정책은 민족 정부들(다국적기업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마치 그것이 멀리 떨어져있는 관료기구에 의해 부과되는 경제정책이므로 각 회원국가는 경제정책에 대해 책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경제정책이 사회적으로 중립적인 합리성을 반영하는 것처럼 위장된다. 둘째, 궁극적으로 산업자본의 이해를 따르는 경제정책이 마치 (독일) 금융자본에 의해 강제되는 것처럼 나타난다. 실제 금융자본은 산업자본이 가난한 나라들의 경쟁수단(인플레이션과 평가절하)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며, 산업자본이 혹사되도록 요구하며, 따라서 창조된 (잉여)가치의 단순히 유리한 재분배보다는 (잉여)가치를 더 크게 창출하는 데 기능한다. 각 민족보다 상위에 있는(supra-national) 금융자본(유럽중앙은행)은 산업자본의 확대재생산에 유리한 상대적 자율성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는 미래의 위기를 저지하는 데 불충분할 것이다. 공식 이데올로기는 유로의 공통이득, 예컨대 환율비용과 연계매매(hedging)10) 를 위한 저축을 제거하는 더 나은 무역조건 등을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중심이 아니다. 컴퓨터 산업은 더 많은 수요를 얻을 것이며 자동차 산업은 수요 감소를 겪게 될 것이라는 것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다. 유럽 자본의 진정한 이득은 EMU가 ERM의 연속이며 다른 EMU 나라들의 경제, 화폐, 재정 정책이 독일의 정책에 속박되는 반면, 동시에 이 과정의 부담을 노동자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계산서는 노동자가 지불하므로 유로 따라서 독일의 지도력이 받아들여진다. 동시에 이러한 정책은 ‘공공선’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유럽’이 명령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경쟁력이 뒤쳐진 나라를 살펴 보자면, 그들은 EMU와 유럽에 가입함으로써 경기역행수단 정책과 국제경쟁의 독립적인 수단으로서 인플레이션과 평가절하를 명백하게 포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생산에서 절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는 것 즉 노동자가 더 오래, 더 강하게, 더 일반적으로는 더 신축적으로 일하도록 강요하는 게 쉬워지는 제도적인 틀과 이데올로기를 얻는다. 이런 방식으로 생산된 총 잉여가치와 따라서 총 구매력이 증가되며 반면에 인플레이션은 변화되지 않는 구매력을 재분배할 뿐이다. 공식적인 경제교리에 따르면 EMU는 화폐 안정성 지대를 창출하며 따라서 안정과 평형을 이루며 위기로부터 자유로운 경제를 획득하는 데 기여한다고 가정된다. 또한 공식 이데올로기는 EMU가 강요하는 규율은 기술혁신의 도입을 통해 경쟁력 향상을 유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내용은 ERM과 EMU는 기술이 지체된 나라가 생산에서 더 많은 절대적 잉여가치를 추출하도록 강요하며, 이는 기술혁신의 도입을 오히려 늦출 것이다. 하지만 공동의 이득은 이해의 조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예컨대 프랑스는 공동정책을 정식화하는 독일의 지도적 역할에 필적할 수 없다. 따라서 프랑스는 만약 필요하다면 유로의 평가절하가 가능하도록 공동화폐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만 단일통화에 흥미를 지닌다. 이는 프랑스가 EMU의 창설에 앞선 마스트리히트 기준과 안정성 협약의 신축적인 해석을 옹호하는 이유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중앙은행 의장의 임명과 안정성 협의회(Stability Council)의 창설을 두고 의견차이가 나타난다. 결론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EMU의 전망은 불확실하다. 1996년 1월 독일은 수렴기준에 맞추는 데 실패했고(1995년 독일의 공공적자는 GDP 3% 한계를 넘어섰다), 앞으로 가능한 세 가지 선택이 있다. 첫째는 단일통화 창설을 1~2년 연기하는 것이다(원래는 1999년으로 계획했다). 둘째는 주요국가들이 EMU에 가입할 수 있도록 마스트리히트 수렴기준을 느슨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셋째는 계획대로 EMU 창설을 진행하는 것이다.11) 독일은 수렴기준의 엄격한 준수를 집요하게 주장한다. 이는 EMU를 독일의 유럽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형하고 DM이 미국 달러의 진정한 경쟁자가 되도록 유로를 변형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은 채로 남아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렇다. 한편으로 유럽 공동체의 미래 형태는 자본주의 경쟁을 통해 형성될 것이며(경쟁은 독일, 프랑스, 영국의 관계에 집중된다) 회원국들 간의 권력관계에 따라 형성될 것이다. 다른 한편 경제, 화폐통합 과정은 유럽 노동자의 희생을 대가로 한 것이라는 의식이 광범위한 사회 계층에 퍼지기 시작했다. 최근 프랑스, 독일, 그리스, 스페인의 인상적인 파업은 유럽의 노동자가 노동자의 유럽을 형성하기 위해 새롭고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조짐일 것이다. 암스테르담 1997년 5월 17일 1) 투자한 자본 당 산출물은 새롭고 더욱 효율적인 생산기술, 기계류 등등의 도입을 통해, 즉 노동력을 제거하여 증가할 수 있다. 그리고/또는 노동강도와 노동일의 길이 등등을 강화하는 방법을 통해 증가할 수도 있다. 이번 절에서는 첫 번째 방식만을 다룬다(첫 번째 방식은 두 번째 방식과 반대로 가치의 생산을 축소한다). 본문으로 2) 이는 영국의 관습이며 간접표시환율[외국통화표시환율]이다. 직접표시환율은 해외통화 한 단위와 교환되는 국내 통화의 비율이다. 본문으로 3) 여기서는 그 가격이 독일이 시장을 다시 획득하는 데 충분하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10xj는 판매되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여기에서 더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본문으로 4) 이러한 사실은 - 노동가치이론에 대해서 모르더라도 - 평가절하를 통해 수출이 육성되더라도 그 나라는 더 가난해진다고 지적하는 (드물게 존재하는) 논평가를 통해 인식된다. 본문으로 5) 경쟁적인 가치절하에 비해 기술혁신의 결핍은 수출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예컨대 1995년 11월 1일 <파이낸셜 타임즈>에 따르면 1987-94년 사이에 이탈리아는 리라화를 엄청나게 가치절하했지만 이탈리아의 유럽연합 시장점유율은 13.22%에서 12.28%로 하락했다. 본문으로 6) 이는 저개발국가의 착취율이 개발국가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점은 저개발국가의 착취율은 그들의 기술적 후진성에 맞서는 방식[노동강도의 강화, 노동시간의 증가]으로 증대된다는 점이다. 기술적 후진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잉여가치율은 거대한 빈곤과 궁핍으로 나타날 수 있다. 본문으로 7) 따라서 미국의 거대한 무역 적자는 화폐주조이익을 통한 거대한 국제가치의 영유를 의미한다. 이는 미국의 적자가 미국의 경제침체 즉 생산성의 상대적 하락의 조짐이지만 동시에 미국 경제에 이로움을 주는 이유다. 본문으로 8) 이것이 반드시 독일의 잉여가치율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낮다고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9) 노동자 내부에서도 특정 계층, 예를 들어 여성, 아이, 외국인 노동자, 인종적 소수자 등등 더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 본문으로 10) [역주] 가격변동이나 환위험을 피하기 위해 행하는 거래로 위험회피 또는 위험분산이라고도 한다. 수출대금을 후지급 결제방식으로 계약한 경우, 수출대금의 가치는 환율의 변동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는 환율변동의 위험에 처하는데, 이러한 위험을 없애기 위하여 환율을 미리 고정시키는 거래를 말한다. 본문으로 11) [역주] 단일통화로서 유로화는 계획대로 1999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 벨기에, 핀란드,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이 같은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다(그리스는 2001년 1월 1일에 합류했다). 덴마크, 스웨덴, 영국 그리고 2004년 이후 유럽연합 가입 국가인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타,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체코, 키프로스, 폴란드, 헝가리 등의 13개 나라는 유로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유로화와 회원국 통화를 공용하는 약 3년 간의 이행기를 둔 후, 2002년부터는 유로화가 회원국의 통화를 대체하여, 유일한 법적 통화로 유통되기 시작한다. 본문으로

  • 2005-09-03

    분쟁에 휩싸인 미국 노동총연맹-산별노조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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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쟁에 휩싸인 미국 노동총연맹-산별노조협의회1) 데이비드 베이컨 *번역: 강 국(회원) 시카고 네이비야드의 휑뎅그렁한 회의장에서 대의원들이 회의장 곳곳에 분산된 네 개의 마이크 뒤에 줄지어 서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낸시 월포스는 2번 마이크 앞에 섰다. 그녀는 이 순간을 지난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려 왔다. 마이크가 켜지자 그녀는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월포스는 가냘픈 여성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회의장 곳곳의 왁자지껄한 대화를 관통하며 좌중을 압도했다. 21세기 마더 존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활동한 아일랜드 출신 미국의 노동운동 선동가, ‘광부의 천사’라고 불림 - 역자)의 격렬함과 분노에 휩싸여, 그녀는 직설적이고 꾸밈없는 진실을 동료 대의원들에게 토해냈다.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은 부시 행정부의 거짓이요 기만입니다. 우리가 이라크에 가게 된 것은 거짓된 구실 때문이었으며, 이라크에 머물게 하는 것은 핼리버튼사(현 미국 대통령 딕 체니가 몸담았던 회사로서 이라크에서 많은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 - 역자)에 있는 부시 일당들을 배불리는 것말고는 절대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그녀는 한층 목소리를 높이면서 바그다드로부터의 멀고 위험한 길을 무릅쓰고 미국산별노조총연맹(AFL-CIO) 대의원대회에 참여한 일군의 이라크 노동자들을 가리켰다. "이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녀는 일갈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미국의 점령을 끝내는 것입니다."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들은 그것을 바로 지금 원합니다, 내일 그것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갈채가 더욱 커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곳에 있는 한, 그들은 결코 자결권을 얻을 수도 진실로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회의장에 가득 모인 사람들의 갈채에 휩싸였다. 월포스의 얼굴은 눈 주변이 깊이 패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워싱턴 DC에서 활동하며 샌프란시스코의 경향과 함께 했다. 사무전문직노조의 재무서기관인 그녀는 이제 미국의 최상급 노동자운동 지도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또한 그녀는 게이와 레즈비언 노조원의 전국조직인 〈노동의 긍지〉(Pride at Work) 대표이기도 하다. 지난 2년 동안 그녀와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USLAW)에 속한 반전 대오는 오랜 투쟁을 거쳐 결국 이라크 전쟁을 AFL-CIO 시카고 회의 중앙무대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반전 문제에 관해 이와 같은 역사적 일보를 내딛은 바로 그때, 과도한 내부 분쟁으로 인해 노동운동 자체의 통일성이 희생되고 있었다. 월포스의 연설이 있기 바로 전날 세 노조가 연맹을 탈퇴했는데, 이는 국제정치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쇠퇴하는 것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한 이견 때문이었다. 전쟁은 이와 같은 구체적 관심사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많은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대의원 대회가 끝난 뒤 노조분열로 인한 대회장에서의 상처를 지켜보면서 둘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적은 내부분열, 더 많은 용기와 정치적 전망이라고 그들은 결론 내렸다. 총회가 끝난 후 활동가 앨런 벤자민과 나눈 대담에서 월포스는 그 날이 “노동운동에게 매우 나쁜 날”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대부분의 노조원들은 이런 일이 왜 발생해야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조차 이게 모두 무엇 때문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답니다. 꽤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해 왔는데도 말이에요.” 노동운동가 빌 플레처가 보기에, 그 논쟁은 깊은 분열을 낳긴 했지만 노동자들의 기본 문제를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놓고 말하기 꺼려왔던 것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 말이에요. 이 사회의 우선순위는 뭔가 근본적인 잘못이 있으며, 우리는 그걸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국제서비스노조, 트럭운송조합, 연합식품산업노조의 탈퇴 토론 말미에 AFL-CIO는 이라크에서 미군의 ‘신속한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진보적인 노조원에게 이는 빛나는 순간이긴 했지만, 어두운 시절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팀 폴슨은 그의 동료 대의원들에게 전쟁과 노동자들에게 더 절실한 문제들 간의 연관성을 설명하였다. 그 도시의 중앙노동 평의회 서기인 팀 폴슨에 따르면, "폭탄과 점령에 지출되는 이 모든 돈이 보건, 고용, 기간시설에 사용될 수도 있었습니다. 남녀노동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요.“ 전국적으로 볼 때, 노조는 노조원의 감소 면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노조는 미국 노동자의 35%를 조직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1975년에는 조직률이 26%까지 떨어졌다. 이제는 전체노동자의 고작 12%, 또 사적 부문 노동자의 8%만이 노조원이다. 이들은 주로 동·서 해안의 도시 지역과 중서부의 이전 시기 공장지대에 집중되어 있거니와, 전국 대부분 지역의 노동자들은 각자의 힘으로 고용주들과 협상하도록 방치된 셈이다. 노조원의 감소는 정치역량과 경제적 수단의 감소로 이어진다. 캘리포니아(AFL-CIO 조합원의 1/6을 차지하고 있다)와 뉴욕은 다른 지역보다는 노조 비중이 높다. 하지만 이곳에서조차 노동자들은 주지사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의 전면전에 직면하고 있다. 주지사 보궐선거에 대한 조치는 캘리포니아의 강력한 공공노조가 의미 있는 정치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분쇄하겠다는 위협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이 대열을 분열시킬 때가 아니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AFL-CIO 총회 첫날, 두 노조가 연맹을 탈퇴했다. 가장 큰 노조인 국제서비스노조(SEIU)는 180만 명 규모이고, 트럭운송조합(Teamsters)는 110만 명 규모다. 총회가 끝나면서 한 노조가 탈퇴했는데 연합식품상업노조였다. 셋 모두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거대하고 중요한 노조다. [이 지역의] 국제서비스노조 지부들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톡톤에 이르는 공공노동자들을 대표하는 790 지부, 캘리포니아 주 전체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535지부, 전국에서 가장 커다란 노조 지부 중의 하나인 연합의료노동자 지부들이 있다. 베이 에어리어(샌프란시스코 만 지역 - 역자) 전역의 트럭운송조합 지부들은 트럭운송과 수송, 저장, 식품 가공 공장, 그리고 수많은 여타 사기업 노동자들을 대표한다. 연합식품상업노조는 식품판매업과 식육가공도매업 회사들에 있는 노조다. AFL-CIO에서 탈퇴한 이 세 노조는 〈승리를 위한 변화〉라 불리는 새로운 노동연합을 조직해 냈는데, 여기에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탈퇴하지 않은 다른 노조들이 속해 있다. 섬유호텔식당노조는 그 중 하나다. 이 노조의 2지부는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크고 화려한 14개 호텔과 영웅적인 투쟁을 벌여 왔다. 섬유호텔식당노조의 다른 지부들은 의류와 세탁 산업의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다. 〈승리를 위한 변화〉에는 또한 농업 노동자 노조와 건설노조, 그리고 목공노조(the Carpenters)(이들은 몇 년 전 AFL-CIO를 탈퇴했다)가 속해 있다. AFL-CIO, "이라크에서 미군의 신속한 철수“를 채택하다 이는 미국 노조의 역사에서 매우 모순적인 순간이다. 지금까지 대중들의 이목은 주로 노조의 분열에 집중되어 왔지만, 전쟁에 관한 논쟁의 반향은 앞으로 수년 동안 지속될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젊은 시위대였던 반전 연대 활동가들의 세대, 그리고 [미국의] 중앙아메리카 개입 당시 기층 활동가들이 오늘날 노조를 이끌고 있다. 이들 중 몇몇은 자신들의 뿌리를 잊어버렸거나 잊기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그렇지 않다. 월포스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운동의 침묵, 특히 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맞서 싸우고 있는 경제 체계를 지탱하기 위해 미국의 군사력이 사용되는 것에 대한 운동의 침묵을 보는 데 신물이 났다. 현재의 노동운동은 자신의 조직구조에 대한 내부 이견이 넘쳐나고 있지만, 이라크 전쟁에 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통신노조(CWA)의 부의장인 브룩스 선켓은 총회장에서 일련의 열정적인 연설을 쏟아 내면서, 30년 전 정부가 자신을 베트남 전쟁에 보낼 때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이 전쟁은 그 전쟁과 아주 유사해 보입니다. 그들은 당시 나에게 거짓말을 했는데, 지금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공무원노동자연맹의 병원노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헨리 니콜라스는 대의원들에게, 이라크에서 네 번 복무한 그의 아들이 한 차례 더 복무하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아무도 이견을 표명하지 않은 채, 연사들은 연달아 일어나 전쟁과 점령을 규탄하고 철군을 요구했다. 2년 전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국 노조 전체를 휩쓸기 시작했던 이 논쟁은 이제 최고조에 달했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침략의 의도를 품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 순간부터, 노조 활동가들은 그에 맞서기 위한 전국적 네트워크인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USLAW)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노조에서 작은 집단들의 모임으로 시작한 이 조직은 이제 백만 명 이상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노조들의 연합이 되었다. 방청석에서는 월포스가 가리킨 이라크 노조 지도자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이라크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다섯 명의 노조 활동가들과 함께 두 달 전 미국을 순회했다. 16일 동안 그들은 50개 이상의 도시를 돌면서, 미국의 노조 동지들에게 점령 중단을 위한 행동을 취할 것을 호소했다. 5월에 두 명의 이라크인이 베이 에어리어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정유노동자일반노조의 지도자인 하산 유마와 팔레 아부드였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연안 노조들 즉, 샌호세에 있는 국제서비스노조의 커다란 공공노동자 지부, 마르티네즈의 정유 노동자들, 그리고 거의 모든 베이 에어리어 노동평의회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런 경험들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애틀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었다.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는 이라크 노조원들의 순회연설을 조직하여, 그들이 미국 노동자들에게 직접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의 전국 집행자 중 한 명인 진 브루스킨(Gene Brusk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우리는 우리나라 노조들이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이라크 노동형제자매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들은 연대와 인간적 공감의 정신에 입각하여 화답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우리가 옳았습니다." 총회에서의 논쟁은 이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군대 철수를 요구하는 18개의 결의안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하여 미국 전역의 노조와 노동평의회, 그리고 주 노동 연맹들로부터 AFL-CIO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총회가 열리면서, AFL-CIO의 전국집행부는 "가능한 한 빨리" 점령을 종식시킬 것을 호소하는 결의안으로 대체하려 했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사용하는 언어였다. 그러자 총회에 참석한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 대의원들은 군대의 "신속한 철수"라는 문구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싸움이 시작되려 했고, 갑자기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AFL-CIO 집행부는 이에 동의했다. 신속한 철수라는 안이 회의장에 제출됐을 때 폴슨은, “여기서 ‘신속하게’라고 말할 때, 이는 ‘즉각’과 같은 뜻입니다 ― 우리가 이 결의안을 지지하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새로운 용어는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이 결의안은 현대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상층 지도부가 내린 지도가 아니라 미국 노동운동의 기층에서 만들어진 풀뿌리 행동의 산물이었다. 미군철수라는 호소는 그 자녀와 가족이 전쟁에 나설 것을 호출 받은 수천의 평범한 노동자와 노조원의 정서를 반향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 이제는 미국 노조의 다수가 미군의 생명을 지키는 최선의 수단은 그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라크전이 대량살상무기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은 거의 신빙성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라크 민중들에게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는 행정부의 주장은 비슷한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행정부의 5년 간의 공격 후, 부시 행정부의 가장 완고한 지지자가 아닌 다음에야 부시의 친-민주주의(pro-damecracy) 선언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라크인들이 스스로 점령이 가지는 반-민주적 효과에 대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 이라크인들이 미국 노조원들에게 전해 준 바에 의하면 미군 당국은 유전, 정유공장 그리고 다른 이라크 공기업에서 노조 조직화를 금지했다. 한편 부시의 정치요원들이 이 공기업들을 외국 기업에 처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수천 개의 일자리와, 그리고 나라를 재건하는 데 필요한 소득의 잠재적인 상실을 동반할 것이다. "이건 해방이 아닙니다. 이것은 점령입니다." 미국에서의 발언을 위해 조합원을 파견한 노조 중 하나인 이라크 노조연맹의 지도자 가십 하산이 말했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식민지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식민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신속한 철수는 단지 미국 병사들을 본국으로 데려온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구는 미국 노동자들을 이라크인들 편에 서게 하는 것인데, 부유한 세계 엘리트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나라가 개조되는 것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노동조합의 구조에 대한 논쟁 그러나 이라크에 관한 논쟁은 중요한 문제 하나를 두드러지게 했다. 노조원들은 점점 더 현명해지고 있고, 전쟁에서 무역에 이르는 세계적 쟁점이 미국의 거리에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원의 비율은 줄어들고 있고, 이 같은 이해를 실천으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조직은 더 작아지고 있다. 정치적 의식이 높아지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다. 따라서 총회 준비 기간에 이라크는 노조 논쟁의 주된 주제가 아니었다. 사실 이 주제는 자주 사뭇 다른 토론 속으로 묻혀 버렸는데, 이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개 [노조의] 생존의 위기에 대해 말했다. 결국 [노조] 분열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지만, 미국 노조의 방향을 바꾸자는 제안은, 대외 정책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고 주로 노조의 효율적인 행동을 가로막는 [노조 내부의] 구조 문제와 훨씬 더 관련이 있었다. 관련 쟁점에 대한 가장 훌륭한 지부 사례는 샌프란시스코 호텔 노동자들의 1년에 걸친 투쟁사례이다. 거대한 호텔 경영자에 맞서 전국 각 도시의 노조가 동시에 교섭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호텔 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자신들의 모든 단체 협약의 종료 시기를 동일하게 2006년으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부분은 이를 쟁취했는데, 샌프란시스코 [업자들]이 주되게 저항하고 있다. 그 도시의 [호텔] 사용자협회(Multi Employer Group)가 합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호텔 경영자들을 대표하는데, 여기에는 힐튼, 인터콘티넨탈, 스타우드, 하야트 등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호텔을 경영하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기업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만일 노조가 전국 각 도시에서 노동자 공동 전선을 꾸리면, 개별 지역 노조만의 힘으로는 쟁취할 수 없는 새로운 생활수준을 쟁취할 수 있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또한 호텔 노동자들은 2년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식품 노동자들이 겪은 쓰라린 경험을 피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곳에서 4만 명의 노동자들이 다섯 달 동안 남부 캘리포니아 전역에 걸친 새이프웨이, 알버트슨, 랄프 등의 식료품 체인에서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실질적으로 더 낮은 임금과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체인점들이 국내 다른 지역에서는 가게를 열어 이윤을 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조들이 기억해야 할 교훈은 거대한 다국적 기업과 지역적으로 교섭하는 것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부족했던 것은 연대였다 -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유나이티드 에어라인社의 노조는 유사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이 항공사 노조는 자신의 연금제도를 올해 초 연방정부에게 투매(投賣)해 버렸고, 그래서 퇴직자들은 자신들의 연금수급액이 삭감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항공 산업은 11개의 노조로 나뉘어져 있다(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항공사에만도 네 개의 노조가 있다). 이 같은 분열상태에서 노동자들이 승리하기란 어렵다. 만일 그들 모두가 단일한 노조에 속했다면, 그리고 거의 모든 항공 노동자들이 조직되어 있었다면, 승리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십 수 년을 들여 건설해 낸 퇴직 제도의 해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한 회사가 파산한다면(유나이티드 에어라인사가 파산절차에 들어갈 것이라고 위협한 것처럼), 그 파산회사의 노동자는 다른 항공사로 쉽게 흡수될 수 있을 것이다 - 만일 하나의 노조와 하나의 단체협약만이 있다면 말이다. 캘리포니아 노동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조직화 방식에 집착한 결과, 임금 삭감, 복지 삭감, 연금 상실로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반면 샌프란시스코 부두노동자조합, 즉 미서부항만노조는 3년 전 자신의 조합원에 대항한 사용자의 직장폐쇄를 물리쳤다. 그들이 이긴 것은 1930-40년대 당시 노조가 동일한 쟁점에 대해 아주 영리했기 때문이다. 부두 노동자들은 술꾼이나 부랑자 취급을 받곤 했다. 1934년 샌프란시스코 총파업 이후, 그들은 전 항구에 걸쳐 서부 연안에 있는 모든 해운 회사들과 단일한 단체협약을 맺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결과적으로 부두 노동자들의 임금은 현재 미국 산업노동자들 중 가장 높은 축에 든다. 연대가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따라서 작년 많은 노조들은 노조운영 방식을 바꾸기 위한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이 논의는 샌프란시스코 국제서비스노조의 8월 총회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 의장 앤디 스턴은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호소했다. 그리고 2004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 노조는 「승리를 위한 단결」이라 불리는 10개 조항으로 된 안을 제출하였다. 이는 즉각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노조들이 화답했다. 10개 조항에서 노조들이 교섭하고 조직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큰 노조로 통합하도록 요구하는 권한을 AFL-CIO에게 부여하기로 되어 있는 항은 가장 논쟁적인 조항이었다. 또한 [이 항에 따르면] 총연맹은 동일 산업의 노동자는 많은 노조로 분할되지 않게 명확히 하도록 하고 있다. 스턴은 한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공 산업을 예로 들어 보자면, 여기서 노조들은 직종별로, 기업별로, 노조/비노조 별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보면서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가 노동자들의 역량을 분할하고 통일된 전략을 갖지 못할 때, 대가를 치르는 것은 노동자입니다.” 많은 노조들이 자신들이 강요에 의해 통합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격렬한 이견을 표출했다. 하지만 결국 논쟁은 돈에 관한 논의로 전락했다. <승리를 위한 변화 연합>을 결성한 노조들은 AFL-CIO가 그들이 내는 조합비의 절반을 환불하여 새로운 조합원들을 조직하는 전략적 캠페인에 투여할 것을 주장했다. AFL-CIO 의장 존 스위니(그 자신이 국제서비스노조의 前의장이자 스턴의 스승이었다)는 연맹이 조직화에 비용을 늘려야 하겠지만 더 많은 비용을 선거 캠페인에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양측 모두 조직화와 정치활동 모두에 자금 투여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차이점이란 각각에 배분될 비율에 관한 것이었다. 노동조합 예산 분배에 대한 쟁점 이것이 노조연맹을 분열시킬 만한 값어치를 가진 쟁점인가? 서부 지역 국제서비스노조 부의장인 엘리시오 메디나(Eliseo Medina)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정치가나 공직자도, 그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한들 말입니다. 오직 우리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 그들을 우리 운동에 끌어들여야 합니다. 정치는 해법의 일부겠습니다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노조에 가입할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동원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핵심 산업을 조직하고자 하는 노조들에게 1인당 50% 그러니까 대략 5천만 달러를 환불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AFL-CIO는 천오백만 달러 정도로 가고자 했고, 나머지 자금은 정치[사업]에 할당하려 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차이입니다 ― 그들이 제안한 것은 그 일을 하기에 완전히 충분치 않은 것이었으니까요.” [반면] 다른 이들은 확신이 없었다. 어떤 이들은 다만 노조가 공격받고 있는 와중에 그 힘을 분열시키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논쟁이 충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빌 플레쳐는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존 스위니의 개혁 집행부가 1995년에 선출된 이후, 그는 총연맹의 교육국장이 되었고 뒤에는 스위니의 보좌관이 되었다. 급진적 정치 때문에 밀려난 이후, 그는 미국 노조의 느린 변화 속도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자가 되었다. 한 대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노조는 심각한 보수주의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 보수주의란 다름 아니라 진행 중인 변화의 성격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그래서 매우 통찰력 있는 운동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 지도자들 중 대부분은 정말이지 물러나야 합니다. 그들은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 확실히 잘 못된 가정을 하였습니다. 노조는 지배 엘리트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노조는 자본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조 지도자들 중 대부분은 노조가 지배엘리트와 자본에 의해 받아들여 질 것이라고 가정하였던 것입니다]” 플레쳐와 다른 이들은, 노조가 자금을 조직가를 고용하는데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선거운동을 진행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큰 소리를 내며 논쟁한 반면, 방향, 즉 노조가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해서는 거의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AFL-CIO 대의원대회에서 벌어진 이라크에 관한 논쟁은 자금과 노조의 구조에 지배된 논쟁에서 그나마 실체적 내용과 정치를 더해준 것이다. 노동자들에게는 그처럼 훨씬 깊이 있는 토론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199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AFL-CIO 대의원대회 이후 수백만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이주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그들을 방어하겠다는 고귀한 이상이 지금은 사라졌다.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기층 조합원으로부터 이번 대회에서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와 유사한 외침이 터져 나와 기본적인 정책에서의 또 다른 변화를 대의원대회장에 강제하였다. 그래서 노조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취업을 연방범죄로 만드는 <이주 개혁 및 통제 법>(1986 제정)과 고용허가제에 대한 이전의 지지 입장을 철회하였다. 이제 섬유호텔식당노조 공동의장이 된 존 빌헬름(John Wilhelm)은 허가제를 지지한 것은 중대한 실수였다고 선언했다. 다른 이들도 동의했다. 하지만 오늘날, 실질적으로 고용허가제를 강화시킬 두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고 있다. 양자 모두 거대한 새로운 노동연수제도를 설립할 것인데, 이는 1940-50년대 멕시코 계절 농업노동자 프로그램과 같은 것으로, 이주자들을 임시 비자로 들여와 거대 기업의 노동력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주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은 이 계획이 착취적 ― 사실상의 비자발적 노예노동 ― 이라고 보아 전통적으로 반대해 왔다. 이 법안 중 하나인 케네디-맥케인 법안은 노조의 전국 정치간부들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는 지역 노조와 기층조합원들 사이에서 그 안이 노동과 이주자들에게 미칠 영향에 관해 어떤 토론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편 의회의 가장 진보적인 이주법안은 연수생 제도를 담고 있지 않으며 [연수생제도 금지를 위해] 강화된 집행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 안이 흑인연방의원회의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도, 노조로부터는 어떤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있다. 2년 전 섬유호텔식당노조는 이주노동자 프리덤 라이드(Freedom Ride,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버스·기차여행 - 역자)를 발의했다. 단체협상에서 2 지부는 호텔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설치한 사실상의 인종 차별선을 없앨 것을 요구하면서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많은 조합원들이 노조에게 보고 싶어하는 종류의 변화는 바로 이것이다 ― 원칙에 입각한 실제적 의제, 이를 실천에 옮기려는 정직한 시도, 그리고 워싱턴의 유해한 정치 환경의 조건을 바꾸고자 하는 거리의 열기 말이다. 하지만 대신에 - 심지어 진보적인 노조에서도 -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라곤 정계 엘리트들과의 거래이다. 플레쳐가 말하듯, 논쟁은 더 첨예해져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노동운동의 단결 그리고 한편 [주요 노조들이 분리해 나간 뒤에도] 샌프란시스코의 노조와 노동평의회는 살아남아야 한다. 노동자들이 새로운 정치·경제적 투쟁의 계절을 맞이하면서 정말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대부분의 다른 지역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이 도시의 거대 공공노조, 즉 서비스 790 지부의 사무총장인 조시 무니가 이 도시 평의회 의장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무니는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메디나(국제서비스노조의 서부지역 담당 부의장 - 역자)에 따르면, 무니는 “우리는 지역적이고 전국적인 수준에서 계속 함께 일할 필요가 있으며 AFL-CIO도 동일한 입장을 취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고 있다. 전국에 걸쳐 노조들은 그들이 웬만해선 포기하고 싶지 않은 밀접한 관계들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대부분의 평의회들은 이제 <승리를 위한 변화>에 속하게 된 노조의 회비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만일 이것 없이 활동해야만 한다면, 그 평의회들은 사무처 요원들을 해고하고 활동을 줄여야만 할 것이다. 평의회들은 선거(예컨대 올 11월 캘리포니아에 찾아오는 선거) 기간 동안 수고스러운 일들의 대부분을 한다. 노조원들은 평의회가 보유한 전화명부를 이용하러 떼 지어 몰려오고, 평의회가 조직한 대중집회들을 좇아 밤에 혹은 주말에 지역을 돌아다니고, 심지어는 평의회 모임에서 누가 親노동 후보인지를 결정한다. [목수·벽돌공·연관공 등의] 건축업에서는, 공항이나 학교 다리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다루는 프로젝트 노동협약은 주로 평의회가 서명하며, 참여하는 노조들이 부기할 것이 요구된다. 만일 이 구조가 해체된다면 노조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노동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스위니는 이미 성명서 하나를 발표했는데, 어떤 AFL-CIO 사무처요원들은 이를 “자본의 입장”(the company line)이라는 냉소적 명칭으로 불렀다. 이 성명서에 의하면 총연맹에서 탈퇴한 노조들은 이후에는 지역 평의회에서 투표권을 지니고 회비를 납부하는 완전한 대의원으로 참가할 수 없다. 팀 폴슨은 흙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최근 대담에서 희망적으로 말했다. “나는 우리가 지금껏 벌였던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점을 분명히 압니다. 우리의 국제서비스노조, 트럭운송조합, 연합식품상점노조 지부들은 대의원대회 이전에는 노동운동의 일부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전국 지도자들에게 불화를 다스리는 계획표를 제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총연맹을 떠난 노조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트럭운송조합과 자동차노조(UAW)가 1960년대에 탈퇴했을 때 그러했다. 건설에서 가장 큰 노조인 목공노조는 몇 년 전 탈퇴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베이 에어리어 노동자 평의회에 참여하고 있다. AFL-CIO에 가입한 미국교사연맹은 독립전국교원연합과 협동한다 ―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양쪽의 지부가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 교원노조를 결성하기 위해 통합했다. 폴슨은 “제 생각에 우리는 항상 해 왔던 일을 계속하면 될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 간에 강고해지는 연대를 지금 모두 폐기해버리는 건 너무 위험한 도박이에요.”라고 말한다. 노조들은 단결을 지속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아니(Arnie,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별칭 - 역자)가 [우리가 잘못되기를 바라면서] 몰래 지켜보고 있지 않는가? 1) David Bacom, "Unions at War", San Frasico Bay Guardian, 8월 10일자. 본문으로

  • 2005-09-03

    분쟁에 휩싸인 미국 노동총연맹-산별노조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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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쟁에 휩싸인 미국 노동총연맹-산별노조협의회1) 데이비드 베이컨 *번역: 강 국(회원) 시카고 네이비야드의 휑뎅그렁한 회의장에서 대의원들이 회의장 곳곳에 분산된 네 개의 마이크 뒤에 줄지어 서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낸시 월포스는 2번 마이크 앞에 섰다. 그녀는 이 순간을 지난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려 왔다. 마이크가 켜지자 그녀는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월포스는 가냘픈 여성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회의장 곳곳의 왁자지껄한 대화를 관통하며 좌중을 압도했다. 21세기 마더 존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활동한 아일랜드 출신 미국의 노동운동 선동가, ‘광부의 천사’라고 불림 - 역자)의 격렬함과 분노에 휩싸여, 그녀는 직설적이고 꾸밈없는 진실을 동료 대의원들에게 토해냈다.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은 부시 행정부의 거짓이요 기만입니다. 우리가 이라크에 가게 된 것은 거짓된 구실 때문이었으며, 이라크에 머물게 하는 것은 핼리버튼사(현 미국 대통령 딕 체니가 몸담았던 회사로서 이라크에서 많은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 - 역자)에 있는 부시 일당들을 배불리는 것말고는 절대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그녀는 한층 목소리를 높이면서 바그다드로부터의 멀고 위험한 길을 무릅쓰고 미국산별노조총연맹(AFL-CIO) 대의원대회에 참여한 일군의 이라크 노동자들을 가리켰다. "이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녀는 일갈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미국의 점령을 끝내는 것입니다."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들은 그것을 바로 지금 원합니다, 내일 그것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갈채가 더욱 커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곳에 있는 한, 그들은 결코 자결권을 얻을 수도 진실로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회의장에 가득 모인 사람들의 갈채에 휩싸였다. 월포스의 얼굴은 눈 주변이 깊이 패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워싱턴 DC에서 활동하며 샌프란시스코의 경향과 함께 했다. 사무전문직노조의 재무서기관인 그녀는 이제 미국의 최상급 노동자운동 지도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또한 그녀는 게이와 레즈비언 노조원의 전국조직인 〈노동의 긍지〉(Pride at Work) 대표이기도 하다. 지난 2년 동안 그녀와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USLAW)에 속한 반전 대오는 오랜 투쟁을 거쳐 결국 이라크 전쟁을 AFL-CIO 시카고 회의 중앙무대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반전 문제에 관해 이와 같은 역사적 일보를 내딛은 바로 그때, 과도한 내부 분쟁으로 인해 노동운동 자체의 통일성이 희생되고 있었다. 월포스의 연설이 있기 바로 전날 세 노조가 연맹을 탈퇴했는데, 이는 국제정치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쇠퇴하는 것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한 이견 때문이었다. 전쟁은 이와 같은 구체적 관심사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많은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대의원 대회가 끝난 뒤 노조분열로 인한 대회장에서의 상처를 지켜보면서 둘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적은 내부분열, 더 많은 용기와 정치적 전망이라고 그들은 결론 내렸다. 총회가 끝난 후 활동가 앨런 벤자민과 나눈 대담에서 월포스는 그 날이 “노동운동에게 매우 나쁜 날”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대부분의 노조원들은 이런 일이 왜 발생해야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조차 이게 모두 무엇 때문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답니다. 꽤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해 왔는데도 말이에요.” 노동운동가 빌 플레처가 보기에, 그 논쟁은 깊은 분열을 낳긴 했지만 노동자들의 기본 문제를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놓고 말하기 꺼려왔던 것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 말이에요. 이 사회의 우선순위는 뭔가 근본적인 잘못이 있으며, 우리는 그걸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국제서비스노조, 트럭운송조합, 연합식품산업노조의 탈퇴 토론 말미에 AFL-CIO는 이라크에서 미군의 ‘신속한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진보적인 노조원에게 이는 빛나는 순간이긴 했지만, 어두운 시절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팀 폴슨은 그의 동료 대의원들에게 전쟁과 노동자들에게 더 절실한 문제들 간의 연관성을 설명하였다. 그 도시의 중앙노동 평의회 서기인 팀 폴슨에 따르면, "폭탄과 점령에 지출되는 이 모든 돈이 보건, 고용, 기간시설에 사용될 수도 있었습니다. 남녀노동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요.“ 전국적으로 볼 때, 노조는 노조원의 감소 면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노조는 미국 노동자의 35%를 조직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1975년에는 조직률이 26%까지 떨어졌다. 이제는 전체노동자의 고작 12%, 또 사적 부문 노동자의 8%만이 노조원이다. 이들은 주로 동·서 해안의 도시 지역과 중서부의 이전 시기 공장지대에 집중되어 있거니와, 전국 대부분 지역의 노동자들은 각자의 힘으로 고용주들과 협상하도록 방치된 셈이다. 노조원의 감소는 정치역량과 경제적 수단의 감소로 이어진다. 캘리포니아(AFL-CIO 조합원의 1/6을 차지하고 있다)와 뉴욕은 다른 지역보다는 노조 비중이 높다. 하지만 이곳에서조차 노동자들은 주지사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의 전면전에 직면하고 있다. 주지사 보궐선거에 대한 조치는 캘리포니아의 강력한 공공노조가 의미 있는 정치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분쇄하겠다는 위협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이 대열을 분열시킬 때가 아니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AFL-CIO 총회 첫날, 두 노조가 연맹을 탈퇴했다. 가장 큰 노조인 국제서비스노조(SEIU)는 180만 명 규모이고, 트럭운송조합(Teamsters)는 110만 명 규모다. 총회가 끝나면서 한 노조가 탈퇴했는데 연합식품상업노조였다. 셋 모두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거대하고 중요한 노조다. [이 지역의] 국제서비스노조 지부들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톡톤에 이르는 공공노동자들을 대표하는 790 지부, 캘리포니아 주 전체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535지부, 전국에서 가장 커다란 노조 지부 중의 하나인 연합의료노동자 지부들이 있다. 베이 에어리어(샌프란시스코 만 지역 - 역자) 전역의 트럭운송조합 지부들은 트럭운송과 수송, 저장, 식품 가공 공장, 그리고 수많은 여타 사기업 노동자들을 대표한다. 연합식품상업노조는 식품판매업과 식육가공도매업 회사들에 있는 노조다. AFL-CIO에서 탈퇴한 이 세 노조는 〈승리를 위한 변화〉라 불리는 새로운 노동연합을 조직해 냈는데, 여기에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탈퇴하지 않은 다른 노조들이 속해 있다. 섬유호텔식당노조는 그 중 하나다. 이 노조의 2지부는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크고 화려한 14개 호텔과 영웅적인 투쟁을 벌여 왔다. 섬유호텔식당노조의 다른 지부들은 의류와 세탁 산업의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다. 〈승리를 위한 변화〉에는 또한 농업 노동자 노조와 건설노조, 그리고 목공노조(the Carpenters)(이들은 몇 년 전 AFL-CIO를 탈퇴했다)가 속해 있다. AFL-CIO, "이라크에서 미군의 신속한 철수“를 채택하다 이는 미국 노조의 역사에서 매우 모순적인 순간이다. 지금까지 대중들의 이목은 주로 노조의 분열에 집중되어 왔지만, 전쟁에 관한 논쟁의 반향은 앞으로 수년 동안 지속될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젊은 시위대였던 반전 연대 활동가들의 세대, 그리고 [미국의] 중앙아메리카 개입 당시 기층 활동가들이 오늘날 노조를 이끌고 있다. 이들 중 몇몇은 자신들의 뿌리를 잊어버렸거나 잊기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그렇지 않다. 월포스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운동의 침묵, 특히 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맞서 싸우고 있는 경제 체계를 지탱하기 위해 미국의 군사력이 사용되는 것에 대한 운동의 침묵을 보는 데 신물이 났다. 현재의 노동운동은 자신의 조직구조에 대한 내부 이견이 넘쳐나고 있지만, 이라크 전쟁에 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통신노조(CWA)의 부의장인 브룩스 선켓은 총회장에서 일련의 열정적인 연설을 쏟아 내면서, 30년 전 정부가 자신을 베트남 전쟁에 보낼 때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이 전쟁은 그 전쟁과 아주 유사해 보입니다. 그들은 당시 나에게 거짓말을 했는데, 지금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공무원노동자연맹의 병원노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헨리 니콜라스는 대의원들에게, 이라크에서 네 번 복무한 그의 아들이 한 차례 더 복무하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아무도 이견을 표명하지 않은 채, 연사들은 연달아 일어나 전쟁과 점령을 규탄하고 철군을 요구했다. 2년 전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국 노조 전체를 휩쓸기 시작했던 이 논쟁은 이제 최고조에 달했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침략의 의도를 품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 순간부터, 노조 활동가들은 그에 맞서기 위한 전국적 네트워크인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USLAW)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노조에서 작은 집단들의 모임으로 시작한 이 조직은 이제 백만 명 이상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노조들의 연합이 되었다. 방청석에서는 월포스가 가리킨 이라크 노조 지도자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이라크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다섯 명의 노조 활동가들과 함께 두 달 전 미국을 순회했다. 16일 동안 그들은 50개 이상의 도시를 돌면서, 미국의 노조 동지들에게 점령 중단을 위한 행동을 취할 것을 호소했다. 5월에 두 명의 이라크인이 베이 에어리어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정유노동자일반노조의 지도자인 하산 유마와 팔레 아부드였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연안 노조들 즉, 샌호세에 있는 국제서비스노조의 커다란 공공노동자 지부, 마르티네즈의 정유 노동자들, 그리고 거의 모든 베이 에어리어 노동평의회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런 경험들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애틀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었다.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는 이라크 노조원들의 순회연설을 조직하여, 그들이 미국 노동자들에게 직접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의 전국 집행자 중 한 명인 진 브루스킨(Gene Brusk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우리는 우리나라 노조들이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이라크 노동형제자매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들은 연대와 인간적 공감의 정신에 입각하여 화답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우리가 옳았습니다." 총회에서의 논쟁은 이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군대 철수를 요구하는 18개의 결의안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하여 미국 전역의 노조와 노동평의회, 그리고 주 노동 연맹들로부터 AFL-CIO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총회가 열리면서, AFL-CIO의 전국집행부는 "가능한 한 빨리" 점령을 종식시킬 것을 호소하는 결의안으로 대체하려 했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사용하는 언어였다. 그러자 총회에 참석한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노동자> 대의원들은 군대의 "신속한 철수"라는 문구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싸움이 시작되려 했고, 갑자기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AFL-CIO 집행부는 이에 동의했다. 신속한 철수라는 안이 회의장에 제출됐을 때 폴슨은, “여기서 ‘신속하게’라고 말할 때, 이는 ‘즉각’과 같은 뜻입니다 ― 우리가 이 결의안을 지지하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새로운 용어는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이 결의안은 현대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상층 지도부가 내린 지도가 아니라 미국 노동운동의 기층에서 만들어진 풀뿌리 행동의 산물이었다. 미군철수라는 호소는 그 자녀와 가족이 전쟁에 나설 것을 호출 받은 수천의 평범한 노동자와 노조원의 정서를 반향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 이제는 미국 노조의 다수가 미군의 생명을 지키는 최선의 수단은 그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라크전이 대량살상무기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은 거의 신빙성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라크 민중들에게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는 행정부의 주장은 비슷한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행정부의 5년 간의 공격 후, 부시 행정부의 가장 완고한 지지자가 아닌 다음에야 부시의 친-민주주의(pro-damecracy) 선언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라크인들이 스스로 점령이 가지는 반-민주적 효과에 대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 이라크인들이 미국 노조원들에게 전해 준 바에 의하면 미군 당국은 유전, 정유공장 그리고 다른 이라크 공기업에서 노조 조직화를 금지했다. 한편 부시의 정치요원들이 이 공기업들을 외국 기업에 처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수천 개의 일자리와, 그리고 나라를 재건하는 데 필요한 소득의 잠재적인 상실을 동반할 것이다. "이건 해방이 아닙니다. 이것은 점령입니다." 미국에서의 발언을 위해 조합원을 파견한 노조 중 하나인 이라크 노조연맹의 지도자 가십 하산이 말했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식민지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식민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신속한 철수는 단지 미국 병사들을 본국으로 데려온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구는 미국 노동자들을 이라크인들 편에 서게 하는 것인데, 부유한 세계 엘리트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나라가 개조되는 것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노동조합의 구조에 대한 논쟁 그러나 이라크에 관한 논쟁은 중요한 문제 하나를 두드러지게 했다. 노조원들은 점점 더 현명해지고 있고, 전쟁에서 무역에 이르는 세계적 쟁점이 미국의 거리에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원의 비율은 줄어들고 있고, 이 같은 이해를 실천으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조직은 더 작아지고 있다. 정치적 의식이 높아지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다. 따라서 총회 준비 기간에 이라크는 노조 논쟁의 주된 주제가 아니었다. 사실 이 주제는 자주 사뭇 다른 토론 속으로 묻혀 버렸는데, 이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개 [노조의] 생존의 위기에 대해 말했다. 결국 [노조] 분열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지만, 미국 노조의 방향을 바꾸자는 제안은, 대외 정책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고 주로 노조의 효율적인 행동을 가로막는 [노조 내부의] 구조 문제와 훨씬 더 관련이 있었다. 관련 쟁점에 대한 가장 훌륭한 지부 사례는 샌프란시스코 호텔 노동자들의 1년에 걸친 투쟁사례이다. 거대한 호텔 경영자에 맞서 전국 각 도시의 노조가 동시에 교섭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호텔 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자신들의 모든 단체 협약의 종료 시기를 동일하게 2006년으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부분은 이를 쟁취했는데, 샌프란시스코 [업자들]이 주되게 저항하고 있다. 그 도시의 [호텔] 사용자협회(Multi Employer Group)가 합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호텔 경영자들을 대표하는데, 여기에는 힐튼, 인터콘티넨탈, 스타우드, 하야트 등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호텔을 경영하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기업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만일 노조가 전국 각 도시에서 노동자 공동 전선을 꾸리면, 개별 지역 노조만의 힘으로는 쟁취할 수 없는 새로운 생활수준을 쟁취할 수 있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또한 호텔 노동자들은 2년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식품 노동자들이 겪은 쓰라린 경험을 피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곳에서 4만 명의 노동자들이 다섯 달 동안 남부 캘리포니아 전역에 걸친 새이프웨이, 알버트슨, 랄프 등의 식료품 체인에서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실질적으로 더 낮은 임금과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체인점들이 국내 다른 지역에서는 가게를 열어 이윤을 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조들이 기억해야 할 교훈은 거대한 다국적 기업과 지역적으로 교섭하는 것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부족했던 것은 연대였다 -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유나이티드 에어라인社의 노조는 유사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이 항공사 노조는 자신의 연금제도를 올해 초 연방정부에게 투매(投賣)해 버렸고, 그래서 퇴직자들은 자신들의 연금수급액이 삭감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항공 산업은 11개의 노조로 나뉘어져 있다(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항공사에만도 네 개의 노조가 있다). 이 같은 분열상태에서 노동자들이 승리하기란 어렵다. 만일 그들 모두가 단일한 노조에 속했다면, 그리고 거의 모든 항공 노동자들이 조직되어 있었다면, 승리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십 수 년을 들여 건설해 낸 퇴직 제도의 해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한 회사가 파산한다면(유나이티드 에어라인사가 파산절차에 들어갈 것이라고 위협한 것처럼), 그 파산회사의 노동자는 다른 항공사로 쉽게 흡수될 수 있을 것이다 - 만일 하나의 노조와 하나의 단체협약만이 있다면 말이다. 캘리포니아 노동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조직화 방식에 집착한 결과, 임금 삭감, 복지 삭감, 연금 상실로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반면 샌프란시스코 부두노동자조합, 즉 미서부항만노조는 3년 전 자신의 조합원에 대항한 사용자의 직장폐쇄를 물리쳤다. 그들이 이긴 것은 1930-40년대 당시 노조가 동일한 쟁점에 대해 아주 영리했기 때문이다. 부두 노동자들은 술꾼이나 부랑자 취급을 받곤 했다. 1934년 샌프란시스코 총파업 이후, 그들은 전 항구에 걸쳐 서부 연안에 있는 모든 해운 회사들과 단일한 단체협약을 맺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결과적으로 부두 노동자들의 임금은 현재 미국 산업노동자들 중 가장 높은 축에 든다. 연대가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따라서 작년 많은 노조들은 노조운영 방식을 바꾸기 위한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이 논의는 샌프란시스코 국제서비스노조의 8월 총회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 의장 앤디 스턴은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호소했다. 그리고 2004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 노조는 「승리를 위한 단결」이라 불리는 10개 조항으로 된 안을 제출하였다. 이는 즉각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노조들이 화답했다. 10개 조항에서 노조들이 교섭하고 조직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큰 노조로 통합하도록 요구하는 권한을 AFL-CIO에게 부여하기로 되어 있는 항은 가장 논쟁적인 조항이었다. 또한 [이 항에 따르면] 총연맹은 동일 산업의 노동자는 많은 노조로 분할되지 않게 명확히 하도록 하고 있다. 스턴은 한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공 산업을 예로 들어 보자면, 여기서 노조들은 직종별로, 기업별로, 노조/비노조 별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보면서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가 노동자들의 역량을 분할하고 통일된 전략을 갖지 못할 때, 대가를 치르는 것은 노동자입니다.” 많은 노조들이 자신들이 강요에 의해 통합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격렬한 이견을 표출했다. 하지만 결국 논쟁은 돈에 관한 논의로 전락했다. <승리를 위한 변화 연합>을 결성한 노조들은 AFL-CIO가 그들이 내는 조합비의 절반을 환불하여 새로운 조합원들을 조직하는 전략적 캠페인에 투여할 것을 주장했다. AFL-CIO 의장 존 스위니(그 자신이 국제서비스노조의 前의장이자 스턴의 스승이었다)는 연맹이 조직화에 비용을 늘려야 하겠지만 더 많은 비용을 선거 캠페인에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양측 모두 조직화와 정치활동 모두에 자금 투여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차이점이란 각각에 배분될 비율에 관한 것이었다. 노동조합 예산 분배에 대한 쟁점 이것이 노조연맹을 분열시킬 만한 값어치를 가진 쟁점인가? 서부 지역 국제서비스노조 부의장인 엘리시오 메디나(Eliseo Medina)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정치가나 공직자도, 그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한들 말입니다. 오직 우리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 그들을 우리 운동에 끌어들여야 합니다. 정치는 해법의 일부겠습니다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노조에 가입할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동원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핵심 산업을 조직하고자 하는 노조들에게 1인당 50% 그러니까 대략 5천만 달러를 환불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AFL-CIO는 천오백만 달러 정도로 가고자 했고, 나머지 자금은 정치[사업]에 할당하려 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차이입니다 ― 그들이 제안한 것은 그 일을 하기에 완전히 충분치 않은 것이었으니까요.” [반면] 다른 이들은 확신이 없었다. 어떤 이들은 다만 노조가 공격받고 있는 와중에 그 힘을 분열시키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논쟁이 충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빌 플레쳐는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존 스위니의 개혁 집행부가 1995년에 선출된 이후, 그는 총연맹의 교육국장이 되었고 뒤에는 스위니의 보좌관이 되었다. 급진적 정치 때문에 밀려난 이후, 그는 미국 노조의 느린 변화 속도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자가 되었다. 한 대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노조는 심각한 보수주의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 보수주의란 다름 아니라 진행 중인 변화의 성격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그래서 매우 통찰력 있는 운동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 지도자들 중 대부분은 정말이지 물러나야 합니다. 그들은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 확실히 잘 못된 가정을 하였습니다. 노조는 지배 엘리트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노조는 자본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조 지도자들 중 대부분은 노조가 지배엘리트와 자본에 의해 받아들여 질 것이라고 가정하였던 것입니다]” 플레쳐와 다른 이들은, 노조가 자금을 조직가를 고용하는데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선거운동을 진행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큰 소리를 내며 논쟁한 반면, 방향, 즉 노조가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해서는 거의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AFL-CIO 대의원대회에서 벌어진 이라크에 관한 논쟁은 자금과 노조의 구조에 지배된 논쟁에서 그나마 실체적 내용과 정치를 더해준 것이다. 노동자들에게는 그처럼 훨씬 깊이 있는 토론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199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AFL-CIO 대의원대회 이후 수백만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이주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그들을 방어하겠다는 고귀한 이상이 지금은 사라졌다.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기층 조합원으로부터 이번 대회에서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와 유사한 외침이 터져 나와 기본적인 정책에서의 또 다른 변화를 대의원대회장에 강제하였다. 그래서 노조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취업을 연방범죄로 만드는 <이주 개혁 및 통제 법>(1986 제정)과 고용허가제에 대한 이전의 지지 입장을 철회하였다. 이제 섬유호텔식당노조 공동의장이 된 존 빌헬름(John Wilhelm)은 허가제를 지지한 것은 중대한 실수였다고 선언했다. 다른 이들도 동의했다. 하지만 오늘날, 실질적으로 고용허가제를 강화시킬 두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고 있다. 양자 모두 거대한 새로운 노동연수제도를 설립할 것인데, 이는 1940-50년대 멕시코 계절 농업노동자 프로그램과 같은 것으로, 이주자들을 임시 비자로 들여와 거대 기업의 노동력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주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은 이 계획이 착취적 ― 사실상의 비자발적 노예노동 ― 이라고 보아 전통적으로 반대해 왔다. 이 법안 중 하나인 케네디-맥케인 법안은 노조의 전국 정치간부들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는 지역 노조와 기층조합원들 사이에서 그 안이 노동과 이주자들에게 미칠 영향에 관해 어떤 토론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편 의회의 가장 진보적인 이주법안은 연수생 제도를 담고 있지 않으며 [연수생제도 금지를 위해] 강화된 집행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 안이 흑인연방의원회의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도, 노조로부터는 어떤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있다. 2년 전 섬유호텔식당노조는 이주노동자 프리덤 라이드(Freedom Ride,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버스·기차여행 - 역자)를 발의했다. 단체협상에서 2 지부는 호텔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설치한 사실상의 인종 차별선을 없앨 것을 요구하면서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많은 조합원들이 노조에게 보고 싶어하는 종류의 변화는 바로 이것이다 ― 원칙에 입각한 실제적 의제, 이를 실천에 옮기려는 정직한 시도, 그리고 워싱턴의 유해한 정치 환경의 조건을 바꾸고자 하는 거리의 열기 말이다. 하지만 대신에 - 심지어 진보적인 노조에서도 -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라곤 정계 엘리트들과의 거래이다. 플레쳐가 말하듯, 논쟁은 더 첨예해져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노동운동의 단결 그리고 한편 [주요 노조들이 분리해 나간 뒤에도] 샌프란시스코의 노조와 노동평의회는 살아남아야 한다. 노동자들이 새로운 정치·경제적 투쟁의 계절을 맞이하면서 정말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대부분의 다른 지역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이 도시의 거대 공공노조, 즉 서비스 790 지부의 사무총장인 조시 무니가 이 도시 평의회 의장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무니는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메디나(국제서비스노조의 서부지역 담당 부의장 - 역자)에 따르면, 무니는 “우리는 지역적이고 전국적인 수준에서 계속 함께 일할 필요가 있으며 AFL-CIO도 동일한 입장을 취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고 있다. 전국에 걸쳐 노조들은 그들이 웬만해선 포기하고 싶지 않은 밀접한 관계들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대부분의 평의회들은 이제 <승리를 위한 변화>에 속하게 된 노조의 회비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만일 이것 없이 활동해야만 한다면, 그 평의회들은 사무처 요원들을 해고하고 활동을 줄여야만 할 것이다. 평의회들은 선거(예컨대 올 11월 캘리포니아에 찾아오는 선거) 기간 동안 수고스러운 일들의 대부분을 한다. 노조원들은 평의회가 보유한 전화명부를 이용하러 떼 지어 몰려오고, 평의회가 조직한 대중집회들을 좇아 밤에 혹은 주말에 지역을 돌아다니고, 심지어는 평의회 모임에서 누가 親노동 후보인지를 결정한다. [목수·벽돌공·연관공 등의] 건축업에서는, 공항이나 학교 다리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다루는 프로젝트 노동협약은 주로 평의회가 서명하며, 참여하는 노조들이 부기할 것이 요구된다. 만일 이 구조가 해체된다면 노조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노동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스위니는 이미 성명서 하나를 발표했는데, 어떤 AFL-CIO 사무처요원들은 이를 “자본의 입장”(the company line)이라는 냉소적 명칭으로 불렀다. 이 성명서에 의하면 총연맹에서 탈퇴한 노조들은 이후에는 지역 평의회에서 투표권을 지니고 회비를 납부하는 완전한 대의원으로 참가할 수 없다. 팀 폴슨은 흙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최근 대담에서 희망적으로 말했다. “나는 우리가 지금껏 벌였던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점을 분명히 압니다. 우리의 국제서비스노조, 트럭운송조합, 연합식품상점노조 지부들은 대의원대회 이전에는 노동운동의 일부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전국 지도자들에게 불화를 다스리는 계획표를 제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총연맹을 떠난 노조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은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트럭운송조합과 자동차노조(UAW)가 1960년대에 탈퇴했을 때 그러했다. 건설에서 가장 큰 노조인 목공노조는 몇 년 전 탈퇴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베이 에어리어 노동자 평의회에 참여하고 있다. AFL-CIO에 가입한 미국교사연맹은 독립전국교원연합과 협동한다 ―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양쪽의 지부가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 교원노조를 결성하기 위해 통합했다. 폴슨은 “제 생각에 우리는 항상 해 왔던 일을 계속하면 될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 간에 강고해지는 연대를 지금 모두 폐기해버리는 건 너무 위험한 도박이에요.”라고 말한다. 노조들은 단결을 지속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아니(Arnie,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별칭 - 역자)가 [우리가 잘못되기를 바라면서] 몰래 지켜보고 있지 않는가? 1) David Bacom, "Unions at War", San Frasico Bay Guardian, 8월 10일자. 본문으로

  • 2005-09-03

    여성 이주의 현황과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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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국경을 넘어선 이주의 흐름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주의 여성화’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여성의 이주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 내에서 이주 여성의 숫자는 이주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 전체 80여만 명의 이주 인구 중 대략 35% 정도가 여성이다. 물론 이주 여성의 숫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여성의 이주를 촉진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여성 이주의 확대 양상은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맥락 속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각 국가별로 차이는 있지만, 이주 노동의 주요 수입국인 중심부 국가들의 경우 중산층 이상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이 활성화되고 첨단 금융산업과 하인노동으로 노동의 양극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정부, 보모와 같은 재생산노동, 시설관리, 청소 등의 하층 노동에 이주 여성들의 진출이 확대되고 있다. 서비스산업의 확대, 성산업의 유례없는 팽창 역시 여성 이주를 확대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제하는 급격한 농업개방은 송출국과 유입국 모두에서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 이주를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이주 여성의 문제는 금융세계화 질서 속으로 민족국가가 위계화된 형태로 통합되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노동의 불안정화, 성산업, 가족제도 등을 통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상호 결합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지난 5월 말 ‘이주여성의 현실과 문제’를 주제로 월례포럼을 진행했다. 안양 이주노동자의 집과 이주여성인권연대에서 활동하는 김민정 씨가 ‘인신매매와 성착취-아시아 이주와 한국의 이주 여성’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해주셨다.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유입경로와 형태, 현황과 문제점, 이주 여성들의 권리확보를 위한 대안과 현재 진행 중인 활동 등을 중심내용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특히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유입된 이주 여성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었는데, 여성위원회 차원에서는 이주 여성노동자들의 문제에 비해 평소 접근이 부족했던 주제였던 만큼 여러모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정리가 매우 늦었지만 이주 여성 문제에 대한 고민을 더욱 깊이 있게 가져가기 위한 계기로 삼기 위해 글을 싣는다. 김민정 씨의 발제와 토론되었던 내용을 재구성하고 이주 여성에 대한 여성위원회의 고민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글이 작성되었다. 셋째 아이 출산을 얼마 안 남겨 두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안양에서 먼 걸음 해주셨던 김민정씨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아시아에서 여성이주의 특성 아시아 내에서 이주 노동 송출국은 대부분 동남아시아 국가들이고, 수입국은 대부분 중동지방 국가들인데 2003년 당시 기준으로 약 1,000만 명 수준에 이른다. 이에 비해 한국과 일본, 홍콩, 대만 등의 동아시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유입숫자가 적은 편이다. 통상 이주 노동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주요 요인이 노동시장 내의 수요 및 자본력(기술력), 임금수준, 송출 비용 정도인데, 한국과 일본, 대만의 경우 임금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아 선호가 있기는 하지만, 송출비용이 워낙 막대하고 일정한 기술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와는 반대되는 조건을 가진 중동지방으로 이동이 집중된다.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내에서의 여성 이주는 앞서 언급한 여성 이주의 국제적 추세와 기반을 공유하면서도 다소 다른 양상도 함께 보인다. 아시아 내에서 여성 이주는 주로 제조업 부문의 노동과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주를 이룬다.1) 아시아에서 이주 노동과 국제결혼을 촉진하는데 있어 대만의 역할은 매우 컸다. 대만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 중국,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해외직접투자를 활성화했는데, 그에 따라 제조업의 상당수가 동남아시아로 이전하고 동시에 높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값싼 이주 노동이 대거 수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만과 동남아시아 국가 간 국제결혼중개업이 형성되었고, 대만의 하층 노동자계급과 몰락한 농촌의 남성들이 그 수요층으로 부상하였다. 현재 대만에서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은 약 40만 명에 달한다. 한편 국제결혼을 위한 이주 여성의 주요 송출국인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경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대만의 해외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국으로 진출한 대만남성들과의 거래를 통해 국제결혼을 산업화했다. 그 후 1990년대 이후 급격한 개방정책과 1990년대 말 경제위기 상황에서 국제결혼은 국가 차원의 외화벌이의 주요 수단으로 확대된다. 여성 이주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확대되긴 했지만, 여전히 남성 이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약조건이 많다. 이는 국제결혼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여성 이주의 제약 조건은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가부장적 통념, 현실과 결합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주노동의 형태, 결혼 여부에 따른 제약, 교육수준으로 인한 제약, 성산업으로의 유입 가능성 등이 여성 이주의 조건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의 경우 국가가 정책적으로 미혼 여성의 국제이주를 금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국가들의 이주여성은 대부분 3·40대 기혼여성들이다. 최근 국제결혼의 주요 대상국으로 떠오른 베트남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여성들의 경우 2차 산업에 유입되는 경우가 많으며, 저학력에 특별한 기술력이 없는 경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매우 많다(명목상 기술력이 이유가 되지만 실제로는 현재 한국의 2차 산업 구조가 남성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이유가 크다).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여성 이주의 형태는 저임금 2차 산업과 서비스산업, 국제결혼 등으로 집중된다. 남성 이주에 비해서도 매우 취약한 여성 이주의 조건은 여성의 비공식 이주를 증가시키는데, 이로써 성산업으로의 유입이나 인신매매의 위험이 생겨난다. 실제 전 세계 여성 인신매매의 1/3이 동남아시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이주에 나섰던 태국여성이 서아프리카의 성산업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현황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여성은 전체 이주자 중 약 37%에 이른다. 13만 명 정도가 2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13만 명, E6 비자(공연예술비자)를 통해 들어온 경우가 대략 1,200~1,300명 수준이다. 한국남성들의 국제결혼은 1990년대 이래 꾸준히 증가하여, 1990년 600여명 수준에서 2004년에는 연간 25,500여명으로 확대된다(아래 계속해서 제시될 통계수치는 통계청과 법무부 자료를 따른 것이다). 국적별 분포를 보면, 2004년을 기준으로 중국이 70%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은데, 대부분 조선족들로 언어와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가장 선호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베트남(9.6%), 일본(4.8%), 필리핀(3.8%)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길거리 광고가 등장할 만큼 급증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과의 국제결혼은 수치상으로 그리 큰 비중은 아니지만, 여타 국가 여성과의 국제결혼이 1년 사이(2003년~2004년) 감소한 것에 비해 거의 유일하게 증가세(2003년의 경우 7.3%)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현실의 체감도가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한국 남성과 이주 여성의 국제결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농촌 거주하는 사람들의 사례에 집중되는데, 실제 현실은 많이 다르다.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여성의 거주지 분포를 보면, 2004년 기준으로 서울이 25%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경기(23%), 부산(7%), 인천(6%) 등 대도시가 주를 이룬다. 반면 농촌지역이 많이 포함되는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경우 3~4% 수준이다. 초혼과 재혼 등을 기준으로 한 결혼 종류에 따른 구분을 보면, 2001년 당시 초혼이 6,700여명, 재혼이 3,200여명이었는데 그 후 재혼의 사례가 단기간에 꾸준히 상승하여 2004년이 되면 각각 13,700여명과 11,600여명으로 비슷한 비율에 이르게 된다. 증가하고 있는 국제결혼의 경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흔한 경우가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한 유입이다. 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에서 남성은 상대 여성의 가족에게 전달되는 지참금과 방문절차 비용, 중개수수료 등을 포함하여 대략 1,400만 원 정도를 소요한다. 이 외에 통일교 등 종교단체의 알선을 통한 결혼이나 국제결혼을 한 당사자의 개인적 소개를 통한 결혼, 아주노동자 생활 과정에서 만난 사람끼리의 연애결혼 등이 있다. 국제결혼의 일부는 안정적인 거주기간을 확보하기 위한 위장결혼이다. 이 경우 한국에서 취업 이후 벌어들일 소득을 고려하여 선불-후불 분납제도를 적용하기도 하는데, 이 때 상호 얼굴 한번 대면한 적 없는 서류상의 ‘종이남편’은 이 비용의 일부를 할당받는다. 성산업으로 유입되는 경우는 가장 많은 경로가 E6 비자를 통한 입국2) 이고, 그밖에 단기비자로 입국하여 미등록 상태로 장기체류 하는 경우, 이주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신매매를 통한 유입 등의 경로가 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상업화된 형태의 국제결혼은 결혼이 성사되고 실제 이주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배우자에 대한 왜곡된 정보, 인신매매적 요소, 결혼 중개업체의 횡포 등이 대표적인 위험들이다. 많은 상담사례에서 여성에게 ‘한국에서는 농부가 부자이고 존경받는 직업이다’, ‘한 달에 300달러씩 친정에 송금해주겠다’,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얘기나 가족관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사례가 드러났다. 남성의 한 두 차례 방문으로 성혼이 이루어지고 대부분 그 방문에서 중개업체들이 성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여성은 원치 않는 성관계, 임신 같은 성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여성이 결혼을 거부할 경우 소요된 모든 비용을 여성에게 물어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폭력적 조건 속에서 여성들은 결혼여부와 배우자를 결정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기회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 최근 베트남처럼 국제결혼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국가에서는 결혼중개업체가 송출국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여성들을 모집하고 합숙생활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합숙생활 자체가 감금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여성들의 이탈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지는 강제적 조치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인신매매적 요소가 다분하며, 실제 합숙 이후 성산업으로의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갈취는 이 밖에도 매우 다양하다. 성관계 경험여부에 따라서 여성의 가족에게 차등적으로 지참금을 지불하는 사례도 있고, 처녀막 재생 수술을 종용하기도 하며, 금품을 갈취하기도 하는 등 여성 이주의 과정에는 매우 다양한 폭력이 존재한다. 이주한 여성의 생활조건과 지위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은 그 과정에서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주 이후 한국에서의 삶 또한 결코 순탄치 않다.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남성은 대부분 불안정한 직업, 빈곤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거나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소농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여성들이 처하는 일차적인 어려움은 경제적 빈곤에서 기인한다(최근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제결혼 부부 중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을 벌고 있는 가구가 52%, 끼니를 굶어본 경험이 있는 여성이 16%에 이르고 있다). 극도의 내핍생활을 감당하거나 한국 여성에 비해 열등한 조건으로 취업에 뛰어들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의 이탈을 우려하여 취업은 남편의 동의 하에서만 가능하며, 조선족들의 경우 서비스업으로 취업이 용이하다는 이점 때문에 오히려 ‘돈 벌어올 것’을 강요받거나 그를 목적으로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물론 어느 경우나 재생산노동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된다. 앞서 남성의 초혼과 재혼 등의 결혼 형태에 따른 분포를 살펴보았는데, 재혼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의 지위를 가늠하는데 있어서 매우 상징적으로 읽어야 하는 대목이다. 국제결혼을 하는 이주여성들의 연령이 대부분 20대 초·중반이고 종종 10대 후반도 있는데, 재혼을 하는 한국 남성의 경우 4~50대 어떤 경우 60대에 이른다. 이 경우 이주 여성들은 무급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의 제공자나 다름없는데, 실제로 연로하고 병든 부모나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 남성이 적지 않다. 단기 가정부, 간병인을 고용하느니 비용 면에서도 오히려 저렴하고 기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장기 고용인을 고용하는 셈인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이 연령대가 높은 남성들의 사례 또는 몇몇 예외적인 사례에만 한정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 많은 이주여성들이 성적학대, 구타와 같은 신체적 학대, 재생산노동과 유급 노동의 이·삼중 부담, 문화·언어·민족적 차이 등을 악용한 언어·정서적 학대를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폭력적 상황으로부터 이탈하고 싶어도 이주 여성들에게 그것은 곧 불법체류를 의미하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이탈을 한다고 해도 아주 극소수의 쉼터 체류자들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여성들은 대부분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직·간접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언어생활의 문제, 문화적 차이, 외국인 혐오증, 국제결혼을 한 이주 여성들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적 인식은 이주 여성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수용되고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는 데 있어 한계로 작용한다. 대부분 동남아 국가 출신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결혼은 그 형태와 절차가 ‘노골적으로’ 상업화되었다는 점에서 이주여성들의 선택과 결정의 폭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서 한국의 법·제도 또한 이주 여성들을 취약한 지위로 내몰고 있다. 이주 여성의 신분보장과 거주, 기본적 권리와 관련되는 법·제도로는 국적법, 출입국관리법, 그밖에 공공서비스 차원의 기본권의 문제가 있는데, 신분보장 및 거주의 권리는 결혼지속 여부에 철저히 종속된다. 심지어는 배우자가 위장결혼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결혼관계를 청산할 가능성도 상존하지만, 이때도 결국 여성은 불법체류자로 내몰릴 뿐이다. 그밖에 의료, 교육, 소득보조 등 공공서비스 혜택에서 이주 여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국제결혼의 경우 ‘결혼’의 한 형태라는 이유로 이주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인신매매적 요소 등에 대한 법·제도적 차원에서 규제 방법이 전무한 실정이다. 또한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되지 않는다. 이에 이주여성운동을 중심으로 국제결혼중개업체를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하고,3) 국적 취득 이전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 적용, 각종 상담 및 교육 등에 대한 지원 확대와 관련된 법·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을 진행 중이다.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이주가 제기하는 쟁점 대부분의 이주여성들이 동남아시아의 빈국 출신임을 보아 알 수 있듯, 이 여성들에게 이주는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수단이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진입하는 이주여성들은 대부분 고국에 비해 몇 배나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주를 감행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본국에서 고학력, 전문직 종사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 이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 부양이나, 빈곤탈출, 자식에게 빈곤을 대물림하지 않는다는 동기로 국제결혼을 결심한다. 여성이주의 형태 중 국제결혼의 경우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가장 대표적인 쟁점은 국제결혼이 여성매매 또는 성매매와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 편에는 국제결혼이 ‘노골적으로’ 상품화되어 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가족의 압력, 중개업체의 폭력이 개입되고 실제 인신매매도 발생한다는 점을 들어 성매매와 다름없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다른 한 편에는 이미 현실에 다수가 존재하는 결혼의 한 형태라는 점과 빈곤이 여성들에게 일반화되고 있는 조건에서 국제결혼이 이주 여성들이 선택한 하나의 대응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의 곁가지에는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남자들이 대부분 한국사회에서 주변화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노골적으로’ 상품화된 결혼의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 언제부턴가 성행하기 시작한 국내의 수많은 결혼중개업체들을 통한 결혼은 국제결혼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한 이와 같은 ‘노골적으로’ 상업적인 형태가 등장할 만큼 결혼이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현실에서 이주 여성과 토착 거주 여성은 그 삶의 조건과 양에 있어서 매우 다르다는 점이 과소평가 될 수는 없다. 여성이 가족제도 내에서의 억압과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 민족국가 내부에서 배제의 대상이라면 이주 여성은 외적 배제라는 또 다른 조건이 결합된 매우 중층적인 억압의 대상이다. 그러나 무급 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이주 여성의 지위와 재생산노동과 임금노동(또는 농사일)의 병행이라는 역할은 사실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가족제도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일반적인 지위이며 역할이다. 또한 이주여성에게 가해지는 동정과 성적인 이유에서의 멸시라는 이중적 시각은 어느 사회에서건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성녀/창녀’, ‘보호받을 자격 있는/없는 인간’이라는 이분법의 변형된 판본이다. 따라서 국제결혼이 성매매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본질적인 쟁점일 수 없다. 오늘날 왜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이주라는 삶의 형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가, 거기에 가족제도가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제결혼이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이주의 형태라는 사실은 여성 빈곤의 원인이자 결과인 가족의 역할을 사고할 때만 설명할 수 있다. 좀 더 ‘인간적인 국제결혼’을 위해 제도를 개선하라는 요구는 이주여성이 국적과 결혼지속 여부에 관계없이 여성으로서, 노동자·시민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여성을 국적에 따라 차별·배제하고 자본에게만 자유로운 이동을 허락하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반대하는 것과 결합되어야 한다. 1) 중심부 국가의 경우처럼 재생산노동을 위한 여성 이주가 아시아에서 확대되기는 힘든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차원의 문제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이와 같은 역할은 국내 여성들의 저임금 일자리로 제공되고 있으며, 예외적으로 조선족들의 경우가 상류층의 가정부로 고용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본문으로 2) E6 비자를 통해 입국해 성산업으로 유입된 러시아, 필리핀 여성들의 문제가 사회화되자, 정부는 2003년 6월부터 무용수들에 대한 E6비자 발급을 중단했고, 그 후 E6 비자를 통한 입국은 급감하였다. 본문으로 3) 지금까지는 결혼중개업체의 존립에 대한 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에는 국내결혼중개업체는 신고제로, 국제결혼중개업체는 허가제로 양성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안을 주도적으로 마련한 이주여성운동에서는 중개업체에 대한 허가제/금지/불법화 등의 선택지를 검토한 끝에 ‘결혼’의 속성을 고려하여, 허가제를 통해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선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 2005-09-03

    여성 이주의 현황과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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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국경을 넘어선 이주의 흐름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주의 여성화’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여성의 이주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 내에서 이주 여성의 숫자는 이주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 전체 80여만 명의 이주 인구 중 대략 35% 정도가 여성이다. 물론 이주 여성의 숫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여성의 이주를 촉진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여성 이주의 확대 양상은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맥락 속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각 국가별로 차이는 있지만, 이주 노동의 주요 수입국인 중심부 국가들의 경우 중산층 이상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이 활성화되고 첨단 금융산업과 하인노동으로 노동의 양극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정부, 보모와 같은 재생산노동, 시설관리, 청소 등의 하층 노동에 이주 여성들의 진출이 확대되고 있다. 서비스산업의 확대, 성산업의 유례없는 팽창 역시 여성 이주를 확대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제하는 급격한 농업개방은 송출국과 유입국 모두에서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 이주를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이주 여성의 문제는 금융세계화 질서 속으로 민족국가가 위계화된 형태로 통합되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노동의 불안정화, 성산업, 가족제도 등을 통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상호 결합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지난 5월 말 ‘이주여성의 현실과 문제’를 주제로 월례포럼을 진행했다. 안양 이주노동자의 집과 이주여성인권연대에서 활동하는 김민정 씨가 ‘인신매매와 성착취-아시아 이주와 한국의 이주 여성’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해주셨다.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유입경로와 형태, 현황과 문제점, 이주 여성들의 권리확보를 위한 대안과 현재 진행 중인 활동 등을 중심내용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특히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유입된 이주 여성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었는데, 여성위원회 차원에서는 이주 여성노동자들의 문제에 비해 평소 접근이 부족했던 주제였던 만큼 여러모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정리가 매우 늦었지만 이주 여성 문제에 대한 고민을 더욱 깊이 있게 가져가기 위한 계기로 삼기 위해 글을 싣는다. 김민정 씨의 발제와 토론되었던 내용을 재구성하고 이주 여성에 대한 여성위원회의 고민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글이 작성되었다. 셋째 아이 출산을 얼마 안 남겨 두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안양에서 먼 걸음 해주셨던 김민정씨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아시아에서 여성이주의 특성 아시아 내에서 이주 노동 송출국은 대부분 동남아시아 국가들이고, 수입국은 대부분 중동지방 국가들인데 2003년 당시 기준으로 약 1,000만 명 수준에 이른다. 이에 비해 한국과 일본, 홍콩, 대만 등의 동아시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유입숫자가 적은 편이다. 통상 이주 노동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주요 요인이 노동시장 내의 수요 및 자본력(기술력), 임금수준, 송출 비용 정도인데, 한국과 일본, 대만의 경우 임금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아 선호가 있기는 하지만, 송출비용이 워낙 막대하고 일정한 기술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와는 반대되는 조건을 가진 중동지방으로 이동이 집중된다.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내에서의 여성 이주는 앞서 언급한 여성 이주의 국제적 추세와 기반을 공유하면서도 다소 다른 양상도 함께 보인다. 아시아 내에서 여성 이주는 주로 제조업 부문의 노동과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주를 이룬다.1) 아시아에서 이주 노동과 국제결혼을 촉진하는데 있어 대만의 역할은 매우 컸다. 대만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 중국,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해외직접투자를 활성화했는데, 그에 따라 제조업의 상당수가 동남아시아로 이전하고 동시에 높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값싼 이주 노동이 대거 수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만과 동남아시아 국가 간 국제결혼중개업이 형성되었고, 대만의 하층 노동자계급과 몰락한 농촌의 남성들이 그 수요층으로 부상하였다. 현재 대만에서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은 약 40만 명에 달한다. 한편 국제결혼을 위한 이주 여성의 주요 송출국인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경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대만의 해외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국으로 진출한 대만남성들과의 거래를 통해 국제결혼을 산업화했다. 그 후 1990년대 이후 급격한 개방정책과 1990년대 말 경제위기 상황에서 국제결혼은 국가 차원의 외화벌이의 주요 수단으로 확대된다. 여성 이주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확대되긴 했지만, 여전히 남성 이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약조건이 많다. 이는 국제결혼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여성 이주의 제약 조건은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가부장적 통념, 현실과 결합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주노동의 형태, 결혼 여부에 따른 제약, 교육수준으로 인한 제약, 성산업으로의 유입 가능성 등이 여성 이주의 조건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의 경우 국가가 정책적으로 미혼 여성의 국제이주를 금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국가들의 이주여성은 대부분 3·40대 기혼여성들이다. 최근 국제결혼의 주요 대상국으로 떠오른 베트남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여성들의 경우 2차 산업에 유입되는 경우가 많으며, 저학력에 특별한 기술력이 없는 경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매우 많다(명목상 기술력이 이유가 되지만 실제로는 현재 한국의 2차 산업 구조가 남성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이유가 크다).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여성 이주의 형태는 저임금 2차 산업과 서비스산업, 국제결혼 등으로 집중된다. 남성 이주에 비해서도 매우 취약한 여성 이주의 조건은 여성의 비공식 이주를 증가시키는데, 이로써 성산업으로의 유입이나 인신매매의 위험이 생겨난다. 실제 전 세계 여성 인신매매의 1/3이 동남아시아 여성들을 대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이주에 나섰던 태국여성이 서아프리카의 성산업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현황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여성은 전체 이주자 중 약 37%에 이른다. 13만 명 정도가 2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가 13만 명, E6 비자(공연예술비자)를 통해 들어온 경우가 대략 1,200~1,300명 수준이다. 한국남성들의 국제결혼은 1990년대 이래 꾸준히 증가하여, 1990년 600여명 수준에서 2004년에는 연간 25,500여명으로 확대된다(아래 계속해서 제시될 통계수치는 통계청과 법무부 자료를 따른 것이다). 국적별 분포를 보면, 2004년을 기준으로 중국이 70%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은데, 대부분 조선족들로 언어와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가장 선호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베트남(9.6%), 일본(4.8%), 필리핀(3.8%)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길거리 광고가 등장할 만큼 급증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과의 국제결혼은 수치상으로 그리 큰 비중은 아니지만, 여타 국가 여성과의 국제결혼이 1년 사이(2003년~2004년) 감소한 것에 비해 거의 유일하게 증가세(2003년의 경우 7.3%)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현실의 체감도가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한국 남성과 이주 여성의 국제결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농촌 거주하는 사람들의 사례에 집중되는데, 실제 현실은 많이 다르다.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여성의 거주지 분포를 보면, 2004년 기준으로 서울이 25%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경기(23%), 부산(7%), 인천(6%) 등 대도시가 주를 이룬다. 반면 농촌지역이 많이 포함되는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경우 3~4% 수준이다. 초혼과 재혼 등을 기준으로 한 결혼 종류에 따른 구분을 보면, 2001년 당시 초혼이 6,700여명, 재혼이 3,200여명이었는데 그 후 재혼의 사례가 단기간에 꾸준히 상승하여 2004년이 되면 각각 13,700여명과 11,600여명으로 비슷한 비율에 이르게 된다. 증가하고 있는 국제결혼의 경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흔한 경우가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한 유입이다. 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에서 남성은 상대 여성의 가족에게 전달되는 지참금과 방문절차 비용, 중개수수료 등을 포함하여 대략 1,400만 원 정도를 소요한다. 이 외에 통일교 등 종교단체의 알선을 통한 결혼이나 국제결혼을 한 당사자의 개인적 소개를 통한 결혼, 아주노동자 생활 과정에서 만난 사람끼리의 연애결혼 등이 있다. 국제결혼의 일부는 안정적인 거주기간을 확보하기 위한 위장결혼이다. 이 경우 한국에서 취업 이후 벌어들일 소득을 고려하여 선불-후불 분납제도를 적용하기도 하는데, 이 때 상호 얼굴 한번 대면한 적 없는 서류상의 ‘종이남편’은 이 비용의 일부를 할당받는다. 성산업으로 유입되는 경우는 가장 많은 경로가 E6 비자를 통한 입국2) 이고, 그밖에 단기비자로 입국하여 미등록 상태로 장기체류 하는 경우, 이주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신매매를 통한 유입 등의 경로가 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상업화된 형태의 국제결혼은 결혼이 성사되고 실제 이주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배우자에 대한 왜곡된 정보, 인신매매적 요소, 결혼 중개업체의 횡포 등이 대표적인 위험들이다. 많은 상담사례에서 여성에게 ‘한국에서는 농부가 부자이고 존경받는 직업이다’, ‘한 달에 300달러씩 친정에 송금해주겠다’,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얘기나 가족관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사례가 드러났다. 남성의 한 두 차례 방문으로 성혼이 이루어지고 대부분 그 방문에서 중개업체들이 성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여성은 원치 않는 성관계, 임신 같은 성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여성이 결혼을 거부할 경우 소요된 모든 비용을 여성에게 물어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폭력적 조건 속에서 여성들은 결혼여부와 배우자를 결정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기회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 최근 베트남처럼 국제결혼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국가에서는 결혼중개업체가 송출국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여성들을 모집하고 합숙생활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합숙생활 자체가 감금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여성들의 이탈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지는 강제적 조치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인신매매적 요소가 다분하며, 실제 합숙 이후 성산업으로의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갈취는 이 밖에도 매우 다양하다. 성관계 경험여부에 따라서 여성의 가족에게 차등적으로 지참금을 지불하는 사례도 있고, 처녀막 재생 수술을 종용하기도 하며, 금품을 갈취하기도 하는 등 여성 이주의 과정에는 매우 다양한 폭력이 존재한다. 이주한 여성의 생활조건과 지위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은 그 과정에서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주 이후 한국에서의 삶 또한 결코 순탄치 않다.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남성은 대부분 불안정한 직업, 빈곤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거나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소농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여성들이 처하는 일차적인 어려움은 경제적 빈곤에서 기인한다(최근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제결혼 부부 중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을 벌고 있는 가구가 52%, 끼니를 굶어본 경험이 있는 여성이 16%에 이르고 있다). 극도의 내핍생활을 감당하거나 한국 여성에 비해 열등한 조건으로 취업에 뛰어들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의 이탈을 우려하여 취업은 남편의 동의 하에서만 가능하며, 조선족들의 경우 서비스업으로 취업이 용이하다는 이점 때문에 오히려 ‘돈 벌어올 것’을 강요받거나 그를 목적으로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물론 어느 경우나 재생산노동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된다. 앞서 남성의 초혼과 재혼 등의 결혼 형태에 따른 분포를 살펴보았는데, 재혼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 여성의 지위를 가늠하는데 있어서 매우 상징적으로 읽어야 하는 대목이다. 국제결혼을 하는 이주여성들의 연령이 대부분 20대 초·중반이고 종종 10대 후반도 있는데, 재혼을 하는 한국 남성의 경우 4~50대 어떤 경우 60대에 이른다. 이 경우 이주 여성들은 무급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의 제공자나 다름없는데, 실제로 연로하고 병든 부모나 자식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 남성이 적지 않다. 단기 가정부, 간병인을 고용하느니 비용 면에서도 오히려 저렴하고 기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장기 고용인을 고용하는 셈인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이 연령대가 높은 남성들의 사례 또는 몇몇 예외적인 사례에만 한정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 많은 이주여성들이 성적학대, 구타와 같은 신체적 학대, 재생산노동과 유급 노동의 이·삼중 부담, 문화·언어·민족적 차이 등을 악용한 언어·정서적 학대를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폭력적 상황으로부터 이탈하고 싶어도 이주 여성들에게 그것은 곧 불법체류를 의미하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이탈을 한다고 해도 아주 극소수의 쉼터 체류자들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여성들은 대부분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직·간접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언어생활의 문제, 문화적 차이, 외국인 혐오증, 국제결혼을 한 이주 여성들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적 인식은 이주 여성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수용되고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는 데 있어 한계로 작용한다. 대부분 동남아 국가 출신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결혼은 그 형태와 절차가 ‘노골적으로’ 상업화되었다는 점에서 이주여성들의 선택과 결정의 폭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서 한국의 법·제도 또한 이주 여성들을 취약한 지위로 내몰고 있다. 이주 여성의 신분보장과 거주, 기본적 권리와 관련되는 법·제도로는 국적법, 출입국관리법, 그밖에 공공서비스 차원의 기본권의 문제가 있는데, 신분보장 및 거주의 권리는 결혼지속 여부에 철저히 종속된다. 심지어는 배우자가 위장결혼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결혼관계를 청산할 가능성도 상존하지만, 이때도 결국 여성은 불법체류자로 내몰릴 뿐이다. 그밖에 의료, 교육, 소득보조 등 공공서비스 혜택에서 이주 여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국제결혼의 경우 ‘결혼’의 한 형태라는 이유로 이주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인신매매적 요소 등에 대한 법·제도적 차원에서 규제 방법이 전무한 실정이다. 또한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되지 않는다. 이에 이주여성운동을 중심으로 국제결혼중개업체를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하고,3) 국적 취득 이전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 적용, 각종 상담 및 교육 등에 대한 지원 확대와 관련된 법·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을 진행 중이다.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이주가 제기하는 쟁점 대부분의 이주여성들이 동남아시아의 빈국 출신임을 보아 알 수 있듯, 이 여성들에게 이주는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수단이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진입하는 이주여성들은 대부분 고국에 비해 몇 배나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주를 감행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본국에서 고학력, 전문직 종사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 이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 부양이나, 빈곤탈출, 자식에게 빈곤을 대물림하지 않는다는 동기로 국제결혼을 결심한다. 여성이주의 형태 중 국제결혼의 경우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가장 대표적인 쟁점은 국제결혼이 여성매매 또는 성매매와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 편에는 국제결혼이 ‘노골적으로’ 상품화되어 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가족의 압력, 중개업체의 폭력이 개입되고 실제 인신매매도 발생한다는 점을 들어 성매매와 다름없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다른 한 편에는 이미 현실에 다수가 존재하는 결혼의 한 형태라는 점과 빈곤이 여성들에게 일반화되고 있는 조건에서 국제결혼이 이주 여성들이 선택한 하나의 대응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의 곁가지에는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남자들이 대부분 한국사회에서 주변화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노골적으로’ 상품화된 결혼의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 언제부턴가 성행하기 시작한 국내의 수많은 결혼중개업체들을 통한 결혼은 국제결혼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한 이와 같은 ‘노골적으로’ 상업적인 형태가 등장할 만큼 결혼이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현실에서 이주 여성과 토착 거주 여성은 그 삶의 조건과 양에 있어서 매우 다르다는 점이 과소평가 될 수는 없다. 여성이 가족제도 내에서의 억압과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 민족국가 내부에서 배제의 대상이라면 이주 여성은 외적 배제라는 또 다른 조건이 결합된 매우 중층적인 억압의 대상이다. 그러나 무급 가정부, 간병인, 성적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이주 여성의 지위와 재생산노동과 임금노동(또는 농사일)의 병행이라는 역할은 사실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가족제도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일반적인 지위이며 역할이다. 또한 이주여성에게 가해지는 동정과 성적인 이유에서의 멸시라는 이중적 시각은 어느 사회에서건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성녀/창녀’, ‘보호받을 자격 있는/없는 인간’이라는 이분법의 변형된 판본이다. 따라서 국제결혼이 성매매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본질적인 쟁점일 수 없다. 오늘날 왜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이주라는 삶의 형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가, 거기에 가족제도가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제결혼이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이주의 형태라는 사실은 여성 빈곤의 원인이자 결과인 가족의 역할을 사고할 때만 설명할 수 있다. 좀 더 ‘인간적인 국제결혼’을 위해 제도를 개선하라는 요구는 이주여성이 국적과 결혼지속 여부에 관계없이 여성으로서, 노동자·시민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여성을 국적에 따라 차별·배제하고 자본에게만 자유로운 이동을 허락하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반대하는 것과 결합되어야 한다. 1) 중심부 국가의 경우처럼 재생산노동을 위한 여성 이주가 아시아에서 확대되기는 힘든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차원의 문제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이와 같은 역할은 국내 여성들의 저임금 일자리로 제공되고 있으며, 예외적으로 조선족들의 경우가 상류층의 가정부로 고용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본문으로 2) E6 비자를 통해 입국해 성산업으로 유입된 러시아, 필리핀 여성들의 문제가 사회화되자, 정부는 2003년 6월부터 무용수들에 대한 E6비자 발급을 중단했고, 그 후 E6 비자를 통한 입국은 급감하였다. 본문으로 3) 지금까지는 결혼중개업체의 존립에 대한 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에는 국내결혼중개업체는 신고제로, 국제결혼중개업체는 허가제로 양성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안을 주도적으로 마련한 이주여성운동에서는 중개업체에 대한 허가제/금지/불법화 등의 선택지를 검토한 끝에 ‘결혼’의 속성을 고려하여, 허가제를 통해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선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 2005-09-03

    남미 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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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미 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1) 제임스 페트라스·티모시 F. 하딩 *번역: 윤 여 협(회원)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 지배는 한편으로는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의 증가와 다른 한편으로 혁명적 좌파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강조하는 분석은 동반한다. 많은 필자들은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영향을 강조하면서 시장의 지배와 ‘세계화’는 급진적 좌파를 시대에 뒤떨어지게 만들었다고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소비에트 시대 공산주의의 붕괴, 1980년대 게릴라운동의 소멸, 수많은 좌파운동 조직들의 자유민주적 정치운동으로의 전환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분석은 유효성이 없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는 이전 좌파운동의 형태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자율적이고 새로운 혁명적 좌파가 부활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여기서 새로운 혁명적 좌파와 이전의 좌파를 구별하는 것은 이러한 주장에 실체를 부여하고 강조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우리는 분석을 위해 남미 좌파의 세 번의 물결을 구별할 수 있다. 첫 번째 물결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운동이며, 두 번째 물결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의 운동이다. 세 번째 물결은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운동이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좌파운동은 라틴아메리카의 군사독재와 미국의 저강도전쟁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압살 당했고 일부는 체제에 흡수되었다. 당시 칠레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극단적 자유주의 체제의 하위 파트너이다. 베네주엘라의 <사회주의운동>(MAS) 지도자인 테오도로 페트코프는 국제화폐기금(IMF)이 권장하는 구조조정 정책을 시행하였고, 볼리비아의 <혁명적 좌파운동>(MIR)은 전임 우익 독재자인 휴고 반제르와 동맹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마약자본이 돈 세탁을 하는 데 깊이 연루되어있다. 이 세대는 거의 예외 없이 비판적 활동가의 기준이 되는 운동성을 상실하였고, 그 구성원들은 새로운 대중봉기를 진압하는 위치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좌파운동의 두 번째 물결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마르티민족해방전선>(FMLN), 브라질 <노동자당>(PT), 과테말라의 <혁명적민족연합>(UNRG)이 주도한 운동으로서 중앙아메리카와 브라질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시장과 선거정치의 요구에 부합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핵심 지도자들은 우익 차모로(Chamorro) 체제와 동맹을 맺고 민중의 저항을 압살했으며, 멕시코의 전임 대통령인 카를로스 살리나스와 연계를 맺고 과거 조직의 지도자들이 공직기간 동안 획득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싸웠다. 이들은 기껏해야 선거주의적 전망을 갖는 개혁주의자들이다. 1999년 대통령선거에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후보자는 어떠한 구조개혁(남미에서 구조개혁의 문제는 원래 부패하고 매판적인 사회경제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좌파가 제기했음 - 역자)에도 반대하는 자본주의 현대화 강령을 제안하였다. 과테말라의 UNRG는 조직을 서둘러 합법화하고 몇 개의 국회의석을 획득하기 위해 선거정당을 조직하였으며, 소농의 사회적 요구와 인권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브라질의 노동자당은 개혁프로그램과 대중 지지기반을 보유했지만 “재분배적” 접근을 옹호하는 급진적 사회경제적 요구들을 사실상 방기하였다. 멕시코의 <민주혁명당>(PRD)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널리 수용하였고, 1980년 이전 공식정당들의 부르주아 인민주의 연합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한마디로 1980년대의 혁명주의자들은 1990년대에 선거 개혁주의자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 과거 혁명주의 그룹들은 상파울로 포럼의 다수를 구성하는 다른 선거 야당 그룹들과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느슨한 연합에 참가하게 되었다. 과거 혁명주의자들과 선거연합들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악영향들을 비판하고 가난한 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주장을 하였지만 부의 토대와 이를 지탱하는 국제적 금융연계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하지 않고 있다. 정당들과 [선거]연합들 중 그 누구도 사회주의적 대안을 진지하게 제기하지 않고 있다. 기껏해야 그들은 자본주의 위기와 수탈의 효과를 완화하는 규제 메커니즘으로서 국가를 재도입하자고 제안할 뿐이다. 남미 좌파의 두 번째 물결이 지닌 기본적인 약점은 토지 보유와 자본 소유관계에 대한 급진적 변혁의 요구, 은행 및 대외무역 통제에 대한 요구를 버리면서 우익과 타협하려는 경향이다. 그들은 무력한 의회 내 반대 세력으로서 기능하면서 [정부·여당에 대한] 혹평과 비난으로 그 역할을 제한하고 있다. 점차 대중적 토대로부터 분리되고 현상유지에 만족하는 보수적 모습을 드러내면서 두 번째 남미 좌파는 선거 캠페인과 떨어진 대중투쟁에 개입할 수 없거나 이를 내켜하지 않는다. 이 같은 현상은 <민주혁명당>의 쿠아우테목 카르데나스가 멕시코시티 선거에서 승리하고 그 후 집권을 통해 그에게 투표한 중요한 지지세력들에게 혼란을 주고 지지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같은 시기에 브라질 <노동자당>이 집권한 포르투 알레그레 시 정부는 예산배정 우위를 공식화하면서 기층의 농민에 기초하여 효과적인 도시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함으로써 사회적 기반을 성공적으로 강화하고 확장하였다. 남미 좌파의 세 번째 물결은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결과와 기존 중도 좌파 선거정당과 선거연합체들의 무능력·무책임에 대한 대응으로서 일어났다. 베네수엘라를 제외하고, 세 번째 물결은 선거기간 전후를 경과하는 동안에도 선거정치보다 직접행동을 우위에 두는 운동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토지, 공공건물, 공장, 관청을 점거하면서 자율적인 자기통치를 위한 권력중심을 세워냈다. 이들은 2세대 운동의 권위주의적이고 제한적인 선거정치의 외부를 조직함으로서 사회구성원들의 생활에 기초한 즉각적인 요구를 제기하였다. 남미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은 브라질의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MST),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파라과이의 <전국농민연맹>,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코카재배농민을 가리킴 - 역주)소농연맹>, 에콰도르의 <전국노동자농민연합>(FENOC),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아르헨티나의 반체제지역 노동조합·시민운동들로 구성되어있다. 이 물결은 기존 중도좌파와 선거야당들과는 구별되는 몇몇 사회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사회정치운동들은 소작농들, 인디안들, 소농민들, 무토지농업노동자 등을 중심으로 농촌에 기원을 둔다. 에릭 홉스봄과 같은 관찰자들의 예측과는 달리 농촌 노동력의 상대적 쇠퇴가 정치적 구성요소로서 소농을 소멸시키지 못했다. 반대로 그들은 새로운 사회정치적 운동에서 가장 중심에 있다. 오늘날 소농과 농업 노동자운동의 지도자들은 과거 운동의 지도자들과는 매우 상이하다. 그들은 훨씬 단련되었고, 국제주의자이며, 도시의 정치 정당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운동을 조직할 수 있다. 그들은 국제회의들에 참가하고 전국적 논쟁에 개입하며 자신의 전략과 전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들은 동등한 입장에서 도시의 운동들, 노동조합, 선거정당들과 협상한다. 새로운 운동의 성장과 응집력은 운동 지도자들의 지도력과 직접행동의 정치가 지닌 역동적 매력과 농촌에서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신자유주의 정책수단들의 극단적 약탈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일단 남미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은 정치방식에서 중도좌파 선거연합과 다르다. 즉 결과에 반응하는 대신 새로운 운동은 “(정치적) 현실을 야기하고 있다.”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은 미경작된 거대한 토지를 점거하고, 사파티스타는 일당지배 국가(멕시코에서 <제도혁명당>(PRI)의 70여 년에 걸친 장기집권을 가리킴 - 역자)의 과도한 중앙집권주의에 대항하여 자기-통치의 공동체를 조직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는 중앙체제와 독립적으로 생산과 분배의 연계망을 세웠으며. 콜롬비아 <무장혁명군>과 <민족해방군>(ELN)는 콜롬비아 지역의 40%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에콰도르의 소농-인디오 운동은 대통령 압달라 부카람을 부패 책임을 물어 퇴임시키고, 후임 대통령이 IMF 자유시장 의제를 실행하려는 시도를 저지하였다. 오늘날 사회정치운동들은 거시적 사회경제 구조를 변혁하는 투쟁을 전개할 뿐만 아니라 대중 계급들의 직접적인 문제에 대한 대안들을 제출하고 있다. 무능한 소수자로서 전통적 중도좌파 선거 정치인들은 영원히 새로운 선거만 기다리는 반면 인민계급 다수의 지지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은 사회를 바꾸는 과정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다. 소수의 중간계급 전문가들이 계획을 세우고 수직적 결정구조를 통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결정하는 1980년대 게릴라운동 방식과는 달리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은 대중 총회, 협의회, 기층 성원에 대한 책임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산디니스타-FMLN-UNRG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정부와의] 평화협정에 대한 거부이며, 과거 게릴라조직 지도자들과 중간계급 간부들이 선거를 통한 지위상승을 노리며 인민계급의 즉각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선거주의로 이행하는 것에 대한 거부다.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은 과거의 전달 모형(대중운동은 정당의 지침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기관이라는 관념 - 역자)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거정당에 대해 독립적이다. 그들은 스스로 새로운 운동들 간에 동맹을 맺으며, 선거정당들을 지지할 수 있으나(MST는 종종 진보적인 PT당 후보를 지지한다), 그 결정은 자율적으로 이뤄지고 어떠한 경우에도 물리적 투쟁을 제한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회정치적 운동의 수많은 지도자들 나이는 대부분 20세에서 35세 사이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로서 종파적인 이데올로기 갈등과 이전 [운동]세대를 향한 충성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은 민족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들의 국제적 연계는 자유로운 연합과 교환, 연대에 기초하고 있다. 외부의 ‘혁명 중앙’으로부터 ‘계시’는 없다. 구성원 다수는 인민계급 출신이며(외부 전문가들이 아니다) 스스로 단련되었다.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은 ‘전위’가 아니라 ‘운동의 재원’으로서 참여한다. 사회정치운동들은 부문적 개혁을 넘어서서 민족적 변혁에 이르는 광범위한 의제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지역으로부터 전국적 투쟁으로 나아가고 있다. 점차 그들은 토지소유 관계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국가 전체와 엘리트 계급 내 지지자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수많은 농촌 기반 운동들은 민족적 강령과 전략을 정식화하였다.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은 일당 국가와 북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비판을 정교하게 수행하고, 소농과 인디오들의 자율적 공동체와 지역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족-민중 전략을 포함하는 탈집중화된 대안을 정식화하였다. MST는 새로운 ‘브라질 프로젝트’를 정식화하고 주요 도시의 빈민가에 거주하는 민중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였다.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는 지역 기반의 정당인 ‘인민주권 총회’를 결성하여 지역선거를 휩쓸면서 의회에서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활기찬 강령을 공식화하였다. 많은 필자와 분석가들은 낮은 임금과 어떠한 사회급여도 없이 노동자들이 고용된 거대한 ‘비공식 부문’의 성장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그들은 비공식 부문의 성장은 지위가 하락하는 노동자들이 전투적인 계급투쟁보다 개인적인 해결책을 추구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다른 관찰자들은 점증하는 권위주의적 지배 스타일을 언급한다. 이러한 지배 스타일은 행정부가 명령을 통해 지배하며, 자신의 재선출을 보장하기 위해 헌법을 교체하려고 입법부를 조종하며, ‘자유시장’ 정책을 추구하여 유권자와 의회를 주변화한다. 이런 통치 스타일의 함의는 선거 공약을 배반하더라도 사기 당한 유권자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동적 농촌운동들은 강령, 전략, 투쟁을 조정하는 <라틴아메리카 농촌조직 대회>(CLOC)에 가입해 있다. 그 안에서 젠더 평등은 더욱 발전하고 있으며, 40퍼센트 이상의 대표들이 여성이다. 실제로 종족성, 젠더, 그리고 계급적 사안은 농촌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이 수행하는 선도적인 역할과 결합된다. 새로운 운동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변혁을 지향하는 민족적인 정치프로젝트와 제휴해야 한다고 명확히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은 직접적인 사회적 행동을 하지 않는 정치운동들은 무기력에 빠지고 체제로 포섭될 것이라고 깨닫고 있다. [좌파의 세 번째] 세대의 창의력은 열린 민주주의 구조를 통해 제도적 또는 제도를 넘어서는 ‘정치’를 직접적 사회행동과 결합하는 능력이다. 오늘날 [남미 운동이 극복해야 할] 가장 거대한 도전은 농촌에서 형성된 기존 투쟁의 영역을 넘어서 도시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유사한 운동들과 동맹과 연합을 맺는 전략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농촌지역들은 체제에 포섭되지 않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의 기폭제로서 성공적 사례가 되었다. 저항으로부터 정치로, 지역으로부터 전국적 행동으로, 부문적 개혁으로부터 민족-민중적 혁명으로 나아가는 운동은 시작되었다. 신자유주의는 라틴아메리카 남부 원뿔지대(아르헨티나와 칠레 등 - 역자)에서 군사독재가 뿌린 민중의 피로부터 출현했다. 신자유주의는 국제금융기구의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기꾼들과 다를 바 없는) 집행관들과 현임 대통령들에 의해 유지·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대통령 궁에서 쓰이지 않는다. 좌파운동은 치아파스 산맥으로부터 브라질 대농장으로, 파라과이 분지로부터 볼리비아 차파레 계곡에 이르기까지 반격을 가하고 있다. 1) James Petras and Timothy F. Harding, "Introduction", Latin America Perspective, Issue 114, Vol. 27 No. 5, September 2000, pp.3-10. 본문으로

  • 2005-09-03

    남미 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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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미 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1) 제임스 페트라스·티모시 F. 하딩 *번역: 윤 여 협(회원)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 지배는 한편으로는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의 증가와 다른 한편으로 혁명적 좌파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강조하는 분석은 동반한다. 많은 필자들은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영향을 강조하면서 시장의 지배와 ‘세계화’는 급진적 좌파를 시대에 뒤떨어지게 만들었다고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소비에트 시대 공산주의의 붕괴, 1980년대 게릴라운동의 소멸, 수많은 좌파운동 조직들의 자유민주적 정치운동으로의 전환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분석은 유효성이 없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는 이전 좌파운동의 형태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자율적이고 새로운 혁명적 좌파가 부활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여기서 새로운 혁명적 좌파와 이전의 좌파를 구별하는 것은 이러한 주장에 실체를 부여하고 강조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우리는 분석을 위해 남미 좌파의 세 번의 물결을 구별할 수 있다. 첫 번째 물결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운동이며, 두 번째 물결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의 운동이다. 세 번째 물결은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운동이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좌파운동은 라틴아메리카의 군사독재와 미국의 저강도전쟁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압살 당했고 일부는 체제에 흡수되었다. 당시 칠레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극단적 자유주의 체제의 하위 파트너이다. 베네주엘라의 <사회주의운동>(MAS) 지도자인 테오도로 페트코프는 국제화폐기금(IMF)이 권장하는 구조조정 정책을 시행하였고, 볼리비아의 <혁명적 좌파운동>(MIR)은 전임 우익 독재자인 휴고 반제르와 동맹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마약자본이 돈 세탁을 하는 데 깊이 연루되어있다. 이 세대는 거의 예외 없이 비판적 활동가의 기준이 되는 운동성을 상실하였고, 그 구성원들은 새로운 대중봉기를 진압하는 위치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좌파운동의 두 번째 물결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마르티민족해방전선>(FMLN), 브라질 <노동자당>(PT), 과테말라의 <혁명적민족연합>(UNRG)이 주도한 운동으로서 중앙아메리카와 브라질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시장과 선거정치의 요구에 부합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핵심 지도자들은 우익 차모로(Chamorro) 체제와 동맹을 맺고 민중의 저항을 압살했으며, 멕시코의 전임 대통령인 카를로스 살리나스와 연계를 맺고 과거 조직의 지도자들이 공직기간 동안 획득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싸웠다. 이들은 기껏해야 선거주의적 전망을 갖는 개혁주의자들이다. 1999년 대통령선거에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후보자는 어떠한 구조개혁(남미에서 구조개혁의 문제는 원래 부패하고 매판적인 사회경제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좌파가 제기했음 - 역자)에도 반대하는 자본주의 현대화 강령을 제안하였다. 과테말라의 UNRG는 조직을 서둘러 합법화하고 몇 개의 국회의석을 획득하기 위해 선거정당을 조직하였으며, 소농의 사회적 요구와 인권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브라질의 노동자당은 개혁프로그램과 대중 지지기반을 보유했지만 “재분배적” 접근을 옹호하는 급진적 사회경제적 요구들을 사실상 방기하였다. 멕시코의 <민주혁명당>(PRD)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널리 수용하였고, 1980년 이전 공식정당들의 부르주아 인민주의 연합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한마디로 1980년대의 혁명주의자들은 1990년대에 선거 개혁주의자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 과거 혁명주의 그룹들은 상파울로 포럼의 다수를 구성하는 다른 선거 야당 그룹들과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느슨한 연합에 참가하게 되었다. 과거 혁명주의자들과 선거연합들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악영향들을 비판하고 가난한 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주장을 하였지만 부의 토대와 이를 지탱하는 국제적 금융연계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하지 않고 있다. 정당들과 [선거]연합들 중 그 누구도 사회주의적 대안을 진지하게 제기하지 않고 있다. 기껏해야 그들은 자본주의 위기와 수탈의 효과를 완화하는 규제 메커니즘으로서 국가를 재도입하자고 제안할 뿐이다. 남미 좌파의 두 번째 물결이 지닌 기본적인 약점은 토지 보유와 자본 소유관계에 대한 급진적 변혁의 요구, 은행 및 대외무역 통제에 대한 요구를 버리면서 우익과 타협하려는 경향이다. 그들은 무력한 의회 내 반대 세력으로서 기능하면서 [정부·여당에 대한] 혹평과 비난으로 그 역할을 제한하고 있다. 점차 대중적 토대로부터 분리되고 현상유지에 만족하는 보수적 모습을 드러내면서 두 번째 남미 좌파는 선거 캠페인과 떨어진 대중투쟁에 개입할 수 없거나 이를 내켜하지 않는다. 이 같은 현상은 <민주혁명당>의 쿠아우테목 카르데나스가 멕시코시티 선거에서 승리하고 그 후 집권을 통해 그에게 투표한 중요한 지지세력들에게 혼란을 주고 지지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같은 시기에 브라질 <노동자당>이 집권한 포르투 알레그레 시 정부는 예산배정 우위를 공식화하면서 기층의 농민에 기초하여 효과적인 도시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함으로써 사회적 기반을 성공적으로 강화하고 확장하였다. 남미 좌파의 세 번째 물결은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결과와 기존 중도 좌파 선거정당과 선거연합체들의 무능력·무책임에 대한 대응으로서 일어났다. 베네수엘라를 제외하고, 세 번째 물결은 선거기간 전후를 경과하는 동안에도 선거정치보다 직접행동을 우위에 두는 운동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토지, 공공건물, 공장, 관청을 점거하면서 자율적인 자기통치를 위한 권력중심을 세워냈다. 이들은 2세대 운동의 권위주의적이고 제한적인 선거정치의 외부를 조직함으로서 사회구성원들의 생활에 기초한 즉각적인 요구를 제기하였다. 남미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은 브라질의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MST),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파라과이의 <전국농민연맹>,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코카재배농민을 가리킴 - 역주)소농연맹>, 에콰도르의 <전국노동자농민연합>(FENOC),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아르헨티나의 반체제지역 노동조합·시민운동들로 구성되어있다. 이 물결은 기존 중도좌파와 선거야당들과는 구별되는 몇몇 사회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사회정치운동들은 소작농들, 인디안들, 소농민들, 무토지농업노동자 등을 중심으로 농촌에 기원을 둔다. 에릭 홉스봄과 같은 관찰자들의 예측과는 달리 농촌 노동력의 상대적 쇠퇴가 정치적 구성요소로서 소농을 소멸시키지 못했다. 반대로 그들은 새로운 사회정치적 운동에서 가장 중심에 있다. 오늘날 소농과 농업 노동자운동의 지도자들은 과거 운동의 지도자들과는 매우 상이하다. 그들은 훨씬 단련되었고, 국제주의자이며, 도시의 정치 정당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운동을 조직할 수 있다. 그들은 국제회의들에 참가하고 전국적 논쟁에 개입하며 자신의 전략과 전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들은 동등한 입장에서 도시의 운동들, 노동조합, 선거정당들과 협상한다. 새로운 운동의 성장과 응집력은 운동 지도자들의 지도력과 직접행동의 정치가 지닌 역동적 매력과 농촌에서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신자유주의 정책수단들의 극단적 약탈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일단 남미좌파운동의 세 번째 물결은 정치방식에서 중도좌파 선거연합과 다르다. 즉 결과에 반응하는 대신 새로운 운동은 “(정치적) 현실을 야기하고 있다.”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은 미경작된 거대한 토지를 점거하고, 사파티스타는 일당지배 국가(멕시코에서 <제도혁명당>(PRI)의 70여 년에 걸친 장기집권을 가리킴 - 역자)의 과도한 중앙집권주의에 대항하여 자기-통치의 공동체를 조직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는 중앙체제와 독립적으로 생산과 분배의 연계망을 세웠으며. 콜롬비아 <무장혁명군>과 <민족해방군>(ELN)는 콜롬비아 지역의 40%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에콰도르의 소농-인디오 운동은 대통령 압달라 부카람을 부패 책임을 물어 퇴임시키고, 후임 대통령이 IMF 자유시장 의제를 실행하려는 시도를 저지하였다. 오늘날 사회정치운동들은 거시적 사회경제 구조를 변혁하는 투쟁을 전개할 뿐만 아니라 대중 계급들의 직접적인 문제에 대한 대안들을 제출하고 있다. 무능한 소수자로서 전통적 중도좌파 선거 정치인들은 영원히 새로운 선거만 기다리는 반면 인민계급 다수의 지지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은 사회를 바꾸는 과정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다. 소수의 중간계급 전문가들이 계획을 세우고 수직적 결정구조를 통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결정하는 1980년대 게릴라운동 방식과는 달리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은 대중 총회, 협의회, 기층 성원에 대한 책임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산디니스타-FMLN-UNRG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정부와의] 평화협정에 대한 거부이며, 과거 게릴라조직 지도자들과 중간계급 간부들이 선거를 통한 지위상승을 노리며 인민계급의 즉각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선거주의로 이행하는 것에 대한 거부다.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은 과거의 전달 모형(대중운동은 정당의 지침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기관이라는 관념 - 역자)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거정당에 대해 독립적이다. 그들은 스스로 새로운 운동들 간에 동맹을 맺으며, 선거정당들을 지지할 수 있으나(MST는 종종 진보적인 PT당 후보를 지지한다), 그 결정은 자율적으로 이뤄지고 어떠한 경우에도 물리적 투쟁을 제한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회정치적 운동의 수많은 지도자들 나이는 대부분 20세에서 35세 사이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로서 종파적인 이데올로기 갈등과 이전 [운동]세대를 향한 충성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은 민족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들의 국제적 연계는 자유로운 연합과 교환, 연대에 기초하고 있다. 외부의 ‘혁명 중앙’으로부터 ‘계시’는 없다. 구성원 다수는 인민계급 출신이며(외부 전문가들이 아니다) 스스로 단련되었다.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은 ‘전위’가 아니라 ‘운동의 재원’으로서 참여한다. 사회정치운동들은 부문적 개혁을 넘어서서 민족적 변혁에 이르는 광범위한 의제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지역으로부터 전국적 투쟁으로 나아가고 있다. 점차 그들은 토지소유 관계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국가 전체와 엘리트 계급 내 지지자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수많은 농촌 기반 운동들은 민족적 강령과 전략을 정식화하였다.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은 일당 국가와 북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비판을 정교하게 수행하고, 소농과 인디오들의 자율적 공동체와 지역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족-민중 전략을 포함하는 탈집중화된 대안을 정식화하였다. MST는 새로운 ‘브라질 프로젝트’를 정식화하고 주요 도시의 빈민가에 거주하는 민중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였다.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는 지역 기반의 정당인 ‘인민주권 총회’를 결성하여 지역선거를 휩쓸면서 의회에서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활기찬 강령을 공식화하였다. 많은 필자와 분석가들은 낮은 임금과 어떠한 사회급여도 없이 노동자들이 고용된 거대한 ‘비공식 부문’의 성장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그들은 비공식 부문의 성장은 지위가 하락하는 노동자들이 전투적인 계급투쟁보다 개인적인 해결책을 추구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다른 관찰자들은 점증하는 권위주의적 지배 스타일을 언급한다. 이러한 지배 스타일은 행정부가 명령을 통해 지배하며, 자신의 재선출을 보장하기 위해 헌법을 교체하려고 입법부를 조종하며, ‘자유시장’ 정책을 추구하여 유권자와 의회를 주변화한다. 이런 통치 스타일의 함의는 선거 공약을 배반하더라도 사기 당한 유권자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동적 농촌운동들은 강령, 전략, 투쟁을 조정하는 <라틴아메리카 농촌조직 대회>(CLOC)에 가입해 있다. 그 안에서 젠더 평등은 더욱 발전하고 있으며, 40퍼센트 이상의 대표들이 여성이다. 실제로 종족성, 젠더, 그리고 계급적 사안은 농촌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이 수행하는 선도적인 역할과 결합된다. 새로운 운동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변혁을 지향하는 민족적인 정치프로젝트와 제휴해야 한다고 명확히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은 직접적인 사회적 행동을 하지 않는 정치운동들은 무기력에 빠지고 체제로 포섭될 것이라고 깨닫고 있다. [좌파의 세 번째] 세대의 창의력은 열린 민주주의 구조를 통해 제도적 또는 제도를 넘어서는 ‘정치’를 직접적 사회행동과 결합하는 능력이다. 오늘날 [남미 운동이 극복해야 할] 가장 거대한 도전은 농촌에서 형성된 기존 투쟁의 영역을 넘어서 도시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유사한 운동들과 동맹과 연합을 맺는 전략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농촌지역들은 체제에 포섭되지 않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의 기폭제로서 성공적 사례가 되었다. 저항으로부터 정치로, 지역으로부터 전국적 행동으로, 부문적 개혁으로부터 민족-민중적 혁명으로 나아가는 운동은 시작되었다. 신자유주의는 라틴아메리카 남부 원뿔지대(아르헨티나와 칠레 등 - 역자)에서 군사독재가 뿌린 민중의 피로부터 출현했다. 신자유주의는 국제금융기구의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기꾼들과 다를 바 없는) 집행관들과 현임 대통령들에 의해 유지·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대통령 궁에서 쓰이지 않는다. 좌파운동은 치아파스 산맥으로부터 브라질 대농장으로, 파라과이 분지로부터 볼리비아 차파레 계곡에 이르기까지 반격을 가하고 있다. 1) James Petras and Timothy F. Harding, "Introduction", Latin America Perspective, Issue 114, Vol. 27 No. 5, September 2000, pp.3-1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