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리밸런싱 유예 및 국내주식 보유 한도 상향에 더해, 정부는 각종 자금을 주식시장으로 유입시키고자 여러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작년 12월에 출범한 국민성장펀드다. 이는 올해 5월 22일 6000억 원 물량이 일반 국민에게 판매되며 널리 알려졌다. 원금 손실의 최대 20%를 정부 재정으로 보전해 주고 소득공제와 배당소득 분리과세 등 파격적인 혜택을 몰아준 덕분이다. 다만, 국민 대상 판매분은 펀드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국민성장펀드는 5년간 총 150조 원 조성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국가재정·공공자금과 민간자금이 절반씩을 맡는 구조로 설계됐다(도표 1). 민간자금의 대부분을 담당할 기관투자자들에게도 당연히 손실 보전과 세제 혜택이 주어진다. 물론 실제로 그만큼 금액이 모일지는 미지수이지만, 어쨌든 정부는 이 막대한 자금을 AI, 반도체 등 첨단전략산업에 투자하겠다고 공언했다. 최근 세계 각국이 '주권 AI(Sovereign AI)' 기치 아래 국가 주도의 기술 투자 경쟁을 벌이고 있는 추세에 발맞춘다는 명분이다. 그러나 국민성장펀드가 과연 그런 역할을 해낼지는 의문이다. [도표 1] 국민성장펀드 운영방안 (도표 출처: 국민성장펀드 홈페이지) 과거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펀드'부터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펀드', 문재인 정부의 '국민참여형 정책펀드'에 이르기까지 관제 펀드들은 늘 수익률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번 국민성장펀드의 조기 완판 역시 정부가 내세운 산업 육성 명분 때문보다는, 증시 낙관론과 더불어 세금으로 손실 보전과 파격적인 세제 혜택이 유인책이었다는 평가다. 이는 딜레마를 낳는다. 정책 펀드로서 유망 기술 기업에 자본을 대는 취지에 충실하면 리스크로 인해 국민 세금(재정 보전액)이 낭비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비판을 피하고자 운용사들이 수익성과 안정성 위주로 자금을 굴리면, 일반 상장 펀드와 다를 바 없는 무늬만 정책 펀드로 전락하게 된다. 금융위원회가 제시한 국민성장펀드 투자대상 및 방법에 따르면, 개별 자(子)펀드는 결성 금액의 60% 이상을 주목적 투자 대상(12개 첨단전략산업 기업)에 투자해야 하며, 주목적 투자 대상 안에서 코스피 상장사 투자는 결성 금액의 10% 이내로 제한된다(도표 2). 자금의 30% 이상은 비상장기업이나 코스닥 기술특례상장사에 공급하여 모험 자본 본연의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결성 금액의 나머지 40% 이내에서 '자유 투자'가 허용된다. 운용사의 전문성을 활용해 펀드 수익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둔 이 한도가 코스피 대형주로 쏠릴 경우, 앞서 주목적 투자의 10%에 더해 전체 펀드 자금의 최대 절반이 코스피 주식을 사들이는 데 동원될 수 있다. 결국 첨단 벤처 기업을 육성한다는 정책 금융의 외피를 쓴 채, 실질적으로는 재정과 시중 자금을 동원하여 코스피 지수를 떠받치려는 '관제 증시 부양책'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도표 2] 국민성장펀드 투자대상 및 투자방법 (도표 출처: 금융위원회) 게다가 막대한 국민 세금이 손실 보전용으로 예비되어 있음에도, 정작 펀드를 굴릴 운용사를 선정하는 과정이 비공개로 처리되었다. 향후 펀드 운용 방향의 불투명성을 자초한 셈이다. 이러한 관제 펀드가 과연 첨단 기술 산업의 모험 자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아니면 정권의 입맛에 맞춰 재정을 활용해 증시를 띄우는 도구로 전락할 것인지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정부는 국민연금에 이어, 비슷하게 원리금 보장과 안정성이 핵심인 은행의 퇴직연금 자금까지 주식시장에 끌어들이려 시도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6월 11~12일 대형 퇴직연금 사업자 10곳 및 금융감독원 등 퇴직연금 관계자들과의 워크숍에서 '전 업권 실시간 ETF 매매를 전향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입장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월 일부 대형 은행의 규제 개선 요구에 대해 금융당국은 은행 퇴직연금의 ETF 실시간 직접 거래를 허용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으나, 정부가 직접 개입해 금융당국의 판단을 뒤집으려 하는 것이다. 본래 은행 퇴직연금 계좌를 통한 직접 주식 투자는 금지되어 있으나, 은행들은 증권사와의 신탁 계약 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ETF 매매를 지원해 왔다. 그러나 증권사를 거쳐야 했기에 실시간 매매가 불가능했다. 이번 고용노동부의 제안은 이러한 우회 장치 없이 은행과 보험사 퇴직연금 계좌에서 직접 실시간으로 ETF를 매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취지다. 은행과 보험업계는 주식과 ETF 투자 열풍 속에서 증권사에 빼앗겼던 고객을 되찾고자 이런 규제 완화를 요구해왔다(도표 3). [도표 3] 업권별 퇴직연금 규모 (도표 출처: 머니투데이) 퇴직연금 규모는 전반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인데, 작년부터 증시 호황에 힘입어 은행 퇴직연금보다 주식·ETF 투자가 자유로운 증권사 퇴직연금을 더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은행들은 이미 은행 퇴직연금 계좌로도 ETF 투자를 하는 마당에 굳이 증권사를 통하는 복잡한 절차를 둘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를 펼친다. 고객 편의용 조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은행과 증권사의 고유 업무 영역을 법적으로 엄격히 구분해 둔 제도적 취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금자 보호와 금융 결제 시스템 안정성이 생명인 상업은행은 채권·채무 관계에 기초한 부채성 자산(대출, 채권 등) 위주로 자금을 운용해야 하며, 지분성 투자는 엄격히 차단되어야 한다. 주식형 ETF 투자가 주식 직접 투자는 아니므로 괜찮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은행 퇴직연금에 증권사를 통한 ETF 간접 투자가 허용된 것 자체가 이미 업권 분리 원칙을 흐리는 처사였다. 여기에 직접 매매까지 허용해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다면, 주가 변동 리스크가 은행의 연금 자산으로 고스란히 확산된다. 은행과 주식시장 간 경제적 연결이 강해지는 것이다. 물론 퇴직연금 투자 손실은 가입자 개인의 책임이며 은행의 손실은 아니다. 하지만 은행들 스스로 토로하듯, 증권사로의 자금 이동(소위 '머니 무브')에 위기감을 느끼는 은행들이 퇴직연금이라는 자금줄을 지키고자 고위험 ETF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 것은 자명하다. 법적 업무 구분과 관계없이 은행의 운영이 차츰 실질적으로는 증권사처럼 되어 갈 위험성이 있다. 이미 행해지고 있는 것에 불편함을 덜어주는 정도의 조치에 불과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이에 주목하는 이유는 정부의 정책 방향성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2025년 말 기준 260조 5000억 원의 막대한 은행 자금을 국내 주식시장으로 유입시키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드러난다. 나아가 단순 고객 편의용 조치라는 이유로 금융당국이 고수해 온 업권 분리 원칙이 정부의 압박에 의해 깨진다면, 향후 주가가 흔들릴 때마다 더 강한 조치들이 실행될 수 있게 된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교훈을 상기해야 한다. 미국이 1999년 글래스-스티걸법(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을 폐지해 금융의 경계를 무너뜨린 결과, 안정적이어야 할 은행 자금과 결제망이 고위험 증권화 상품의 투기 리스크에 전염되며 전체 금융 시스템이 붕괴한 바 있다. 그 뼈아픈 경험 이후 세계 금융 제도는 다시 상업은행의 건전성과 투자 리스크 분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한국 금융당국의 기존 입장은 이 같은 역사적 교훈에 비추어 타당했다. 그러나 정부는 6월 들어 주가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자, 증시 부양을 위해 금융안정의 최후 보루인 은행마저 변동성 위험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이재명 정부 ‘금융 포퓰리즘’의 모순과 한계」(4월 14일)에서 향후 주식시장이 "개인투자자가 외국인의 ‘ATM’ 역할을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가운데, 그 손실을 재정과 국민의 저축, 신규 투자자 유입으로 메우는 악순환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 전망은 불행히도 매우 빠르게 실현되고 있다. 주식시장의 오랜 교훈으로 '구두닦이 소년' 일화가 있다. 1929년 대공황 직전, 한 유명 투자자가 구두 닦는 소년마저 주식 투자를 권하는 상황을 보고 위기가 임박했음을 감지했다는 일화다. 쉽게 말하면, 내가 산 주식을 더 비싼 값에 받아줄 다음 차례의 누군가가 남아 있느냐가 핵심이라는 뜻이다. 결국 이 게임을 멈추지 않게 할 주관적 '기대'와 이를 뒷받침할 자금의 공급이 결정적이다. AI 기술의 유망성이니 반도체 호황이니 하는 것도 객관적 지표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흥분을 자극해 더 많은 판돈을 주식시장으로 밀어 넣기 위한 '재료'로서 의미를 갖는다. 더 이상 유입될 자금이 없어 판돈의 공급이 끊기는 순간, 실물경제가 호황이더라도 주식시장은 단숨에 폭락할 수 있다. 이번 시리즈를 통해 확인한 한국 주식시장의 현황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AI 기업의 수익성은 여전히 요원한 가운데, 반도체 호황이 진행되고 있으나 주가는 갈수록 그와 괴리되고 있다. 주식시장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 도박 심리가 지배하는 판이 되어가고 있다. 이에 외국인 투자자들은 연일 한국 주식을 팔아치웠고, 특히 지난 5월에는 역대 최대 규모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갔다. (국내 기관투자자들마저 레버리지 ETF의 확산 등으로 개인투자자의 거래 동향과 동조화되면서, 시장의 하방을 안정적으로 지지하는 역할을 잃어버렸다.) 개인투자자들이 이를 '줍줍'했지만, 외국인과 국민연금이 동시에 리밸런싱(매도)에 나섰다면 주가가 버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정부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다. 정부는 시장의 공정한 관리자가 아니라, 판돈을 키워 도박판을 지탱하려는 적극적인 플레이어로 나섰다. 작년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국민연금 리밸런싱 유예, 나아가 국내주식 보유 한도 상향, 고위험 레버리지 ETF 도입, 국민성장펀드 출시 같은 정책으로 시중 자금을 증시로 계속 유도한 것이다. 특히 국민의 노후 자산인 국민연금을 이 베팅에 동원한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럼에도 6월 들어 다시 주가 상승세가 한계에 부딪히자, 은행 퇴직연금 ETF 직접 매매 허용 등과 같이 은행 자금까지 추가 판돈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다. 이런 정책들의 일관된 요지는, '내 뒤에 주식을 받아줄 다음 누군가'를 판 안으로 어떻게든 계속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그런데 외국인이 빠져나간 상황에서, 그리고 이미 웬만한 국민이 주식 투자를 하고 있고 가계의 '빚투' 규모마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상황에서, 과연 국내에서 언제까지 새로운 자금을 추가로 동원할 수 있겠는가? 개인투자자들의 입장에서는, 특히 뒤늦게 주식시장에 진입한 이들일수록 정부의 인위적 주가 부양 정책을 반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기 수익에 눈이 먼 근시안적 태도다. 연금, 국가재정, 상업은행이 주식시장과 엮이면서, 주가 폭락의 충격이 국가 신용 질서 전체로 전염될 위험이 커졌다. 올해 상반기에서 확인되듯, 주가 상승이 한계에 부딪히고 하락의 낌새가 나타날 때마다 이재명 정부는 판이 깨지는 것을 막고자 판돈의 규모와 연계 리스크를 계속해서 키우는 도박을 벌일 것이다. 주가 지탱을 위해 나라 전체의 금융 여력을 소진하고 위험을 전가하는 방식이 지속된다면, 이로 인한 금융위기는 결국 한국경제 시스템 전체의 붕괴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정부는 '비생산적'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고 그 자금을 '생산적' 주식 투자에 쓰는 것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대다수 개인투자자가 노동소득에 대한 희망을 잃고 주식시장에서의 일확천금을 통해 '내 집 마련'을 하려 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그 끝이 정작 나라 경제의 붕괴일 수 있다. 물론 주식으로 돈 벌어서 이민 가면 된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 상위 몇 %의 부자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국민은 터전을 버리고 타국에서 더 나은 삶을 꾸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주식 투자를 하지 않는 국민 입장에서는 정부 정책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연금 동원이나 국민성장펀드처럼, 정부가 주가 부양을 위해 주식 투자를 하지 않는 이들의 자산마저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의 전형이다. 그러나 2007년 금융위기 때와 달리 이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잘 이뤄지지 않는 현실이다. 「이재명 정부 1년, 한국 정치 어디로 가나」(6월 1일)에서 지적했듯, 투자의 특성상 자산이 많을수록 더 수익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재명 정부의 정책은 '개미'는 물론 주식 투자를 안 하는 국민의 자산과 국가재정까지 볼모로 잡아 자산가들을 위한 판돈을 보전해주는 꼴이다. 그러면서 노동자와 청년들에게 '너희도 베팅에 참여하면 자산가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내며,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마비시키는 역할마저 하고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제기한 '국민배당금' 논란뿐만 아니라, 이재명 대통령이 6월 11일 "국민들이 주식 투자를 통해 중간 배당도 받고 생활비도 벌 수 있게 하겠다"며 말했듯, 심지어 분배도 주식시장 성과에 기대어서 하면 된다는 식으로 얘기가 흘러가고 있다. 대다수가 노동소득만으로 적당한 수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것이 정부의 올바른 역할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경제는 이미 많이 망가져 있으며, 풀어야 할 과제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그러나 반도체와 코스피 얘기가 언론을 뒤덮고, 정부가 오히려 이를 더 추동하며, 심지어 분배 논의조차 그 광풍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여타 한국경제의 취약성이나 문제에 대한 논의가 묻혀버렸다. 사회운동, 언론,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이 거대한 광풍에 휩쓸리지 않고, 게임판 뒤에 가려진 위험성, 그리고 광풍에 가려진 진짜 경제의 현실과 시민들의 삶을 끈질기게 환기하고 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끝) (썸네일 사진 출처: 동아일보)국민성장펀드: 재정을 통한 주식시장 개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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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퇴직연금 빗장 풀기, 금융 안전판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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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부양 정치의 위험한 도박
우선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을 살펴보자.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과도하게 눌려 있었다. PER(주가수익비율) 이런 것을 따질 필요도 없이, 이상하게 너무 낮았다. 60% 정도밖에 평가 못 받았다. 비정상을 정상화한다면 어느 정도 갈까. 저는 반도체 특수 상황을 빼고, 그냥 [자본시장] 정상화 조치를 통해서 [코스피 지수] 5000을 넘길 수 있다고 봤다. 거기에 반도체 특수가 더해진 것이 2~3천 포인트 되지 않을까." 그런 후에, 당일 코스피 폭락과 리밸런싱 문제를 언급한 후, 그는 "이익 실현도 해야 하고, 밸런스 조정도 해야 하고, 불안한 사람들도 잠시 쉬었다 가는 것도 있고, 하지만 아직도 저는 [주가가]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주가는 출렁출렁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도 쭉 직선으로 가지 않는다. 반드시 흔들리면서 간다." 발언에서 '비정상'과 '저평가'에 대한 얘기가 섞여 있어 혼동을 낳는다. 이 둘은 구분해야 한다. 주가를 설명하는 객관적 모형에서, 단순하게 말하면 주가는 거시적으로는 금리, 미시적으로는 향후의 주당 배당금으로 결정된다. 주당 배당금은 주당순이익(EPS) × 배당성향이다. 「이재명 정부 '금융 포퓰리즘'의 모순과 한계」에서 짚었듯, 코스피 상승에 반도체 기업의 순이익 증가, 자본시장 '정상화'를 위한 상법 개정에 따른 주당순이익·배당성향 상승, 그리고 이에 대한 기대라는 요인은 분명히 있었다. 물론 이재명 대통령이 말한 5000포인트와 2~3000포인트처럼, 각 요인이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관한 추정 작업은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기업 경영에 대한 주주의 영향력을 키워, 신주 발행을 제한하거나 배당성향을 높이는 것이 주식 유통시장에서 주가를 올리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정작 증자와 같은 주식시장 본연의 자본조달 기능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 기업의 장기적 성과보다 단기적 주가를 중시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이재명 정부의 상법 개정이 100% 자본시장의 '정상화'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는 쟁점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추측과 달리, 반도체 호황과 자본시장 '정상화'라는 두 요인만으로 코스피 지수 상승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이 언급한 PER(주가수익비율)과 같은 지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런 지표를 중심으로 한 '고평가'니 '저평가'니 하는 얘기는 상술한 객관적 요인과 구분되는, 사람들의 '기대'에 따른 가치 평가(valuation) 차원의 논의다. PER은 주당순이익 대비 주가를 뜻한다. 즉 PER이 오른다는 것은 주당순이익이 오르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것보다 주가가 더 올랐다는 뜻이다. 이는 미래에 주가가 더 오를 것이라는 투자자들의 기대가 현재 주가에 반영되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이 때문에 IMF 금융안정보고서도 PER의 가파른 상승을 주식시장 과열이나 거품의 신호로 해석한다. 즉, PER과 같은 지표로 '저평가'니 '고평가'니 얘기할 때의 '평가'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 기대를 의미한다. 작년부터 한국의 PER은 빠르게 상승하고 있는데(도표 1), 물론 '기대'에도 객관적 요인에 대한 기대가 들어가 있다. 즉, 향후 반도체 기업의 순이익이 더 증가하고 배당성향도 상승하리라는 기대도 포함한다. (코스피 법인의 배당성향은 2024년 34.74%에서 2025년 39.83%로 약 5%p 상승했고, 올해도 상승하리라 기대된다.) 하지만 이 논리는 배당금 목적의 장기 보유가 투자의 주된 동기라는 전제 위에 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듯, 현재 주식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배당금 목적의 투자보다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 심지어 변동성을 이용한 도박에 더 가까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PER 상승을 향후 주당순이익이나 배당성향 상승에 대한 기대로 환원해 설명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주가가 급등하며, 오히려 배당수익률은 MSCI 지수 기준 2026년 5월 29일에 0.65%로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즉, 현재 시점에서 신규 투자자가 배당금 목적의 장기 투자 목적으로 주식을 살 이유가 없다. [도표 1] 주요 증시의 PER(주가수익비율, MSCI 지수 기준): 2025년 1월 ~ 2026년 5월 (배수) MSCI 한국 지수는 코스피 전체가 아니라, 모건스탠리 캐피털 인터내셔널(MSCI)에서 선정한 한국 대형주·중형주 80개 종목을 토대로 측정한 것이다. 2025년 4월부터 한국의 해당 기업의 PER(초록색)은 상승하기 시작해, 2026년 5월 23.7배에 이르렀다. 이때 미국(빨간색)은 28.3배, 일본(노란색)은 20.1배였다. '선진국 대비 저평가'라고 말하기 어렵다. 게다가 2025년 10월 IMF 금융안정보고서가 지적했듯, 미국 증시의 빠른 PER 상승은 주식시장 과열의 징후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의 23.7배는 그 역사적 평균에 비추어도 고평가된 것이다. 그러나 반도체 호황과 상법 개정으로 이전과 조건이 달라졌기에 저평가된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고, 객관적 요인에 대한 기대보다는 투기나 도박 심리가 과열되고 있다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이 '기대' 지표를 가지고 향후 주가의 향방에 대해 확실한 얘기를 할 수는 없다. (도표 출처: macromicro.me) 게다가 기대가 어느 수준이어야 적정한지를 객관적으로 산정할 방법은 없다. PER과 같은 기대 지표에는 몇 이상이면 '고평가', 몇 이하면 '저평가'라는 절대 기준이 없고, 향후 주가의 향방을 알려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역사적 평균과 비교할 수는 있지만, PER이 그보다 높아도 주가는 더 오를 수도 떨어질 수도 있으며, 낮아도 마찬가지다. 'PER이 낮으므로 향후 주가가 오를 것이다'는 법칙이 아니라, 투자자들이 쓰는 투자 기법 중 하나에서 나온 논리다. 기업의 주당 순이익 대비 주가가 역사적 평균보다 낮게 평가되어 있으므로 향후 오를 것이라는 주장인데, 정말 해당 기업의 성장성이 낮을 것으로 기대되기에 PER이 낮은 것일 수도 있다. 즉, 같은 수치를 두고 저마다 해석이 다른 것이다. (만약 'PER이 낮으면 주가가 상승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면, 이는 주가가 언제나 일정 수준으로 되돌아온다는 평균회귀를 전제하는 셈인데, 실제로는 이런 전제가 옳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런 기법을 따르더라도, PER이 24배에 가까운 현재 한국 주가를 '저평가'라고 평하기는 어렵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한국(23.7배)은 미국(28.3배)보다는 낮지만, 그 미국이야말로 IMF가 과열 신호를 경고한 시장이다. 그리고 여타 증시에 비해서는 높은 수치다. 결국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저평가'도 '고평가'도 될 수 있다. 결국, 이는 객관적 근거가 아니라 주관적 기대의 영역이다.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과 주관적 평가, 기대를 섞은 것이라 평할 수 있다. 특히 "(비정상적으로) 눌려있던" 주식시장을 "정상화"했다는 표현과 "아직도 주가가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는 부분의 연결은, 전문지식이 없는 국민 입장에서 향후 주가가 '흔들리면서(도) 간다'는 말이 당연하다고 충분히 믿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는 객관적 실적을 넘어서 한국 주식에 대한 기대 심리가 더 높아지는 게 타당하다는 메시지다. 이런 메시지를 대통령이 내는 것은 부적절한데, 실제로는 그 메시지와는 거꾸로, 낙관론을 부추켜 국민을 주식시장에 더 끌어들여서 기대 심리를 유지하는 게 목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앞으로 사람들의 기대 심리가 더 커질 것이니, 당신도 동참하라”고 말하지만, 실은 "당신이 동참함으로써 앞으로 사람들의 기대 심리가 더욱 커질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데, 바로 후술할 국민연금과 국민성장펀드, 은행 자금 동원 같은 문제들이 엮여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극심한 변동성 속에서 주가 하락의 원인으로 외국인 투자자나 기관, 국민연금의 리밸런싱을 지목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이재명 정부가 주식시장을 투자 원칙이 아니라 개인투자자의 감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투자에는 포트폴리오 이론이 있고, 실무적으로도 오랜 경험을 통해 확립된 운용 원칙이 있다. 물론 위험을 100% 통제할 수는 없지만, 기관투자자는 대체로 추정된 위험과 기대수익률에 따라 자산을 배분하고, 정해진 기준에 따라 투자 비중을 조정한다. 개인투자자 입장에서는 오르는 주식에 최대한 집중 투자하고 (얼마인지는 모르는) 고점까지 버티는 것이 수익을 극대화하는 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도 커진다. 일정한 수익률을 달성하면 일부를 매도해 안전자산으로 옮기거나, 애초에 정해둔 자산 배분 비율로 되돌리는 것이 기관투자자의 기본적인 운용 원칙이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개인투자자들이 그러하듯, 상승장의 흥분 속에서 끝까지 들고 있다가 폭락을 맞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 주가가 크게 오른 만큼 외국인이나 기관이 일부 매도에 나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투자자는 언제까지나 같은 주식을 들고 있을 수 없다. 가격이 오르면 비중이 커지고, 비중이 커지면 포트폴리오 전체의 위험도 함께 커진다. 따라서 일정 시점에서 비중을 줄이는 것은 위험을 관리하는 당연한 행위다. 물론 이는 일반 기관투자자의 얘기다. 공적 연금인 국민연금은 그보다 훨씬 보수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애초에 공적 연금이 주식투자를 하는 게 맞는지부터가 논쟁적이다. 금융시장이 가장 발전한 미국에서조차 사회보장연금 기금은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서 국민연금이 주식투자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운용은 최대한 보수적이어야 한다. 위험을 분산하고, 목표 수익률과 자산 배분 원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리밸런싱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렇게 오르는데 국민연금이 왜 더 많이 사지 않느냐', '왜 오르는 주식을 팔아버리느냐'는 식의 문제 제기는 국민연금의 성격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국민연금은 개인투자자의 계좌가 아니며, 정부가 주가 부양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정책 자금도 아니다. 이는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공적 기금이다. 그런 국민연금에 시장의 흥분을 따라 특정 종목이나 특정 산업에 더 크게 베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국민연금이 스스로 정한 운용 원칙을 깨고 도박판에 뛰어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더구나 평가이익과 실현이익은 다르다. 주식을 언제까지나 들고 있을 수 없는데, 국민연금처럼 규모가 큰 투자자가 특정 시장이나 종목의 비중을 과도하게 키우면, 나중에는 팔고 싶어도 팔기 어려워진다. 매도 자체가 가격 폭락을 불러오게 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과도하게 큰 손이 되어버리고, 그 결과 한국 주식시장에 갇히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주가가 오를 때는 더 사라고 압박받고, 떨어질 때는 시장 충격을 우려해 팔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평가이익 덕에 국민연금 고갈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국민연금 고갈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보유 주식을 적정 시점에 매도해 현금화하지 못한다면, 평가이익이 아무리 높아도 연금 지급에는 쓸 수 없다. 연금을 주식으로 지급할 계획이 아니라면 말이다. [도표 2] 국민연금 국내주식 보유 비중 허용 상단 및 보유 비중 추정치 지난해 12월 16일, 이재명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국내 주가가 오르면서 국민연금의 주식 보유 한도를 초과했는데 이것을 계속 팔아야 하느냐”고 질타하자,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내년 기금운용위를 개최해 투자지침 기준들을 변경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곧바로, 올 1월 기금운영위는 국내주식 비중을 14.4%에서 0.5%포인트 올리고, 비중을 초과하면 기계적 매도에 나서는 리밸런싱도 한시적으로 유예한다고 밝혔다. 또 국내주식 보유 한도를 다룬 회의록도 4년간 비공개하기로 했다. 리밸런싱 유예 만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5월 28일 국민연금 기금운영위원회는 국내주식 투자 비중을 14.9%에서 20.8%로 5.9%포인트 올리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전략적, 전술적 자산배분 허용범위 10%포인트를 더하면 30% 이상 보유할 수 있게 됐다. 즉, 유예 만기가 돼도 리밸런싱을 하지 않도록 사후적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도표 출처: 한국경제) 영국 투자은행 바클레이즈가 지적했듯, 한국 국민연금의 리밸런싱 유예는 한국 주식시장의 변동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리밸런싱을 유예하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했을 때보다 수익률이 더 높아진 것은 맞지만, 그 대가로 국민연금 포트폴리오의 위험성이 더 커졌다. 게다가 원래는 과열 국면에서 매도하고 하락 국면에서 매수를 해야 하는데, 국민연금이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코스피 시장의 변동성도 키웠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이 리밸런싱을 유예하며, 외국인 투자자의 리밸런싱 필요가 늘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5월 5월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은 318억 3000만달러 순유출을 기록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도표 3). 외국인 주식자금은 올해 1월 이후 5개월 연속 순유출 상태를 이어갔으며, 그 총액은 778억 3000만 달러(1달러 = 1500원으로 환산 시 약 117조 원)다. 일각에서는 국내 주요기업의 외국인 지분율이 높으니 괜찮다고 반론하는데, 주식 유통시장에서의 주가는 기업 소유나 경영권 개입을 목적으로 한 지분율 차원의 문제와 관련이 거의 없다. (오히려 행동주의 펀드 입장에서는 주가가 낮아야 유리하다.) 어쨌든, 국내 증시의 과열 국면에서 원래 국민연금도 외국인과 같이 매도를 했었어야 했는데, 외국인 매도 물량을 개인투자자들이 받아내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순매도에 나서지 않았다. 외국인에 의해 손실을 볼 개인투자자들을 위해 국민연금이 리스크를 대신 떠안은 형국이다. 덕분에 외국인은 손쉽게 6월 극심한 변동성 국면 직전에 '폭탄'을 떠넘기고 떠날 수 있었다. 그 리스크를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 국민들도 국민연금을 매개로 함께 지게 된 형국이다. [도표 3] 외국인 증권투자자금 한국 주식시장에서 2025년 1년 동안 외국인 자금이 70억 7천만 달러가 순유출됐는데, 올해는 절반도 지나지 않아 778억 3천만 달러가 순유출됐다. (도표 출처: 한국은행) 문제는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연금을 계속 압박하는 가운데, 공적 연금을 둘러싼 이런 중대한 결정이 석연치 않게 이뤄졌다는 점이다. 통상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회의록은 회의 다음 해에 공개된다. 그러나 기금운용 업무의 공정한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금융시장 안정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안건은 기금위 의결을 거쳐 4년 뒤에 공개할 수 있다. 국내 투자를 확대하기로 한 올해 첫 기금운용위원회 회의록이 이렇게 비공개 처리됐다. 이재명 정부 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 안에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알 수 없게 된 셈이다. 국민연금은 국민 전체의 노후 자산이지, 정권의 주가 부양 수단이 아니다. 선진국에서조차 공적 연금을 주가 부양이나 시장 안정 목적으로 동원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국민연금은 점점 더 정치화되고 있으며, 주가 부양이나 환율 방어 같은 금융시장 안정 목적에 깊이 끌려 들어가고 있다. 현재 주식시장이 극심한 변동성에 처한 가운데, 향후 상승의 '기대'를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공적 연금을 끌어들여, 심지어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 국민에게까지 위험을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 이어짐) (썸네일 사진 출처: PPSS)주가가 여전히 '저평가'되어 있으므로 상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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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과 국민연금의 리밸런싱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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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주식 얘기다. ‘역대급 불장’에 대출까지 끌어모아 전 재산을 걸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 정도까진 아니라도 개인투자자 1500만 시대, 국민 세 명 중 한 명 꼴로 직접 주식투자를 하는 상황에서 이제 주식 이야기는 어느 자리에서나 제1의 화제가 되었다. 정부 역시 주식시장 성과를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월 8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비정상적으로 억눌려 있던 한국 주식시장이 이재명 정부 들어 ‘정상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당일 코스피 지수가 8%가량 폭락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익 실현을 위한 매도나 리밸런싱 탓이라 설명하며, “하지만 아직도 저는 저평가됐다고 생각한다. 주가는 출렁출렁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도 쭉 직선으로 가지 않는다. 반드시 흔들리면서 간다”고 했다. 주식 유튜브에서나 들을 법한 말이다. “제가 오늘 하는 말을 매매를 결정하는 참고 자료로는 쓰지 말기를 바란다”는, 전형적인 주식 유튜브식 마무리 멘트까지도 말이다. 나아가 대통령은 현재의 ‘불장’이 단지 주식투자자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게도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연금 평가액이 상승하면서 고갈 시점이 24년 늦춰졌다는 언론 보도를 언급하면서 한 말이었다. 낙관론을 더욱 강하게 제기한 인물은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다. 그는 지난 5월 11일 페이스북에서, AI로 인한 반도체 호황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라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이번에는 다르다’는 말은 대개 틀렸지만, 이번 AI만큼은 정말 다르다는 취지였다. 이후 그가 언급한 ‘국민배당금’ 구상이 논란이 되었지만, 앞의 ‘구조적 장기적 반도체 호황’론이 더 중요한 쟁점이겠다. 특히 관련 주식에 재산을 건 이들에게 이 전망은 하나의 의견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주문이 됐다. 그런데 정말 ‘이번에는 다르고’, '흔들리면서(도) 가는' 것일까. 특히 지금처럼 '기대'라는 심리적 요인이 지배하는 주식시장의 향방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기관들이 지적하는 객관적 위험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한 나라의 대통령이 주가가 결국 상승할 것이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하는 것이 적절한가. 이 글은 먼저 현재 AI 관련 투자의 구조적 취약성과 최근 주식시장 자체의 변질을 검토한다. 이어서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의 관련 발언과 김용범 정책실장의 주장을 따져본다. 한국 증시가 여전히 '저평가'되어 있다는, 즉 주가가 더 오를 수 있다는 주장, 외국인과 국민연금의 리밸런싱이 문제라는 시각, 그리고 정부가 직접 설계한 국민성장펀드까지, 각각이 왜 문제인지 살펴볼 것이다. 위험 요인을 무시하고 낙관론에 편향된 메시지를 내면서, 오히려 위험을 조장하고, 국민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정상적인 경제정책이라 할 수 없다. AI 기술의 미래가 어떠할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AI 기술 발전의 가능성과 AI 관련 주가의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더라도 구분해서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주가가 거품인지 아닌지, 나아가 금융위기로 이어질 위험이 있는지는 기술 자체가 유망한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어떤 기술이 장기적으로 살아남더라도, 그 과정에서 과잉투자와 가격 조정, 금융 불안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은 세계경제를 뒤바꾼 엄청난 기술 혁신이었지만, 2000년 닷컴 버블과 뒤이은 주가 폭락은 일어났다(도표 1). 최근 AI 흐름도 이미 2022년 주가 폭락 사태를 경험한 바 있다(도표 2). [도표 1] 닷컴 버블 붕괴 전후의 주가 추이 (도표 출처: 토스증권) [도표 2] 닷컴 버블 이후 2022년 주식시장 폭락 사태 (도표 출처: 토스증권) 많은 기관이 최소한 2030년까지도 AI 산업의 수입이 자본지출의 증가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며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 전망한다. AI 기술이 유망하고 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수록, 그보다 더 큰 자본지출이 요구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IMF 금융안정보고서(2026년 4월)에 따르면, 2029년까지 예상되는 AI 관련 자본지출 규모는 3조 4000억 달러에 이른다. 실리콘밸리의 세계 최대 규모 벤처캐피털인 세쿼이어 캐피털은, 하이퍼스케일러들이 AI 인프라에 쓰고 있는 금액과 AI 생태계 전체의 실제 매출 사이에는 연간 약 6,000억 달러의 격차가 있다고 작년에 추정했는데, 올해 하이퍼스케일러 자본지출이 예상보다 더 증가하면서 그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하이퍼스케일러란 데이터센터를 소유하고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로, 대표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 메타가 있다.) 알리안츠 리서치에 따르면, AI 부문 자본지출 성장률과 매출 성장률 간 격차가 약 46%p로, 2001년 닷컴 버블 때의 32%p 격차를 이미 넘어선 수준이다(도표 3). [도표 3] AI 부문의 자본지출 성장률 - 수입 성장률 (왼쪽, 밝은 파란색, %p) 및 EV/EBITDA 비율 (오른쪽, 진한 파란색, 배수) (도표 출처: 알리안츠 리서치) EV(Enterprise Value, 기업가치)는 해당 기업을 완전히 매수할 때 필요한 총 비용으로, 시가총액에 순부채(총부채 - 현금성 자산)를 더해 구한다. EBITDA는 해당 기업의 세전·이자지급전이익이다. 영업이익에 감가상각비 등 현금 유출이 없는 비용을 더한 값으로, 기업의 실제 순수 영업현금창출력을 의미한다. 즉, EV/EBITDA 비율은 기업의 영업활동을 통한 현금창출력 대비 기업가치가 얼마나 평가받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지표다. 현재 현금창출력 대비 기업가치가 대략 25배 정도까지 오른 상태라는 뜻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AI 부문이 손실에서 이윤으로 전환하며 투자를 회수할 시점이 오히려 더 빠르게 뒤로 미뤄지고 있다는 전망이다. 막대한 투자가 불확실한 미래 이윤에 대한 '기대'에 기초해 이뤄지는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기술 혁신 초기에는 으레 있는 일이라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기업과 개인들이 AI를 많이 사용하고 생산성이 상승할지라도, 그에 수반되는 자본지출을 넘어서는 수준의 수입을 내지 못하는 한, 언제까지고 천문학적인 투자를 지속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자본조달의 측면에서 금리도 문제다. AI 부문에서는 작년부터 회사채 발행량이 급증했다. 더구나 주요 선진국의 재정적자가 악화되는 데에 더해, 최근 인플레이션 압력까지 되살아나며, 주요국 시장금리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도표 4). 이에 정책금리 상승 압력도 거세다. 일각에서는 새 연준 의장 케빈 워시의 주장을 따라, AI에 의한 생산성 상승 효과로 금리 인하 여력이 생길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학자들과 연준 내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AI의 생산성 효과는 아직 미래의 일인데, 그러한 기대가 이미 주가와 자산가격에 반영되며 소비와 투자가 과열되는 상황에서 금리 인상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오스턴 굴스비 시카고 연준 총재가 지적했듯 말이다.) 주요국 금리 인상 전망이 지배적인 상황인데(도표 5), 금리 상승은 안 그래도 막대한 투자를 감당하기 어려운 AI 기업과 관련 투자자들의 자금 조달 부담을 키우며, 부채위기의 위험을 높인다. [도표 4] G4 국채의 5년 뒤 시작되는 5년물 선도수익률 (도표 출처: IMF) 국채에는 10년물과 5년물이 있다. 10년물 금리에는 '처음 5년'과 '그다음 5년'의 금리 기대가 함께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현재의 5년물 금리를 빼면, 시장이 '그다음 5년' 구간에 대해 요구하는 금리를 추정할 수 있다. 즉, 그래프상 수치는 해당 연도로부터 5년 뒤에 요구될 5년물 금리에 대한 당시 시장의 예상을 반영한다. 맨 위의 문장은 '장기국채 수익률이 국가재정에 대한 우려로 인해 상방 압력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도표 5] 전 세계 정책금리에 대한 예측 (도표 출처: IMF) 'Expected path preconflict'로 된 점선은 중동 분쟁 이전의 예측 경로, 'Postconflict' 점선은 분쟁 발발 이후의 예측 경로다. 오른쪽 그래프에서 G4는 미국, 유로 지역, 영국, 일본의 평균이다. Latam은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멕시코, CEEMEA는 헝가리, 폴란드, 남아프리카공화국, Asia는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대만, 태국의 평균이다. 그런데 한국 입장에서는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천문학적 자본지출과 자금조달 문제는 하이퍼스케일러의 문제이고 오히려 한국은 그 지출의 수혜를 입는 쪽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반도체 호황이 AI 부문의 성장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AI 부문이 멈추면 한국 반도체 기업도 멈출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먼 미래의 위험이 아니라 이미 나타나고 있는 문제다. AI 부문이 천문학적 투자금을 외부 투자자로부터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어려워, 실제로는 내부 순환 투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AI 기업들이 반도체를 막대한 금액에 사들이지만,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도 핵심 고객이 이들에 집중되어 있어 수익을 다시 AI 기업 쪽에 투자하는 구조다. IMF는 특히 2025년 이후 AI 생태계 내부에서 순환적 자금조달 구조가 더 널리 퍼졌다고 지적한다.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순환적 금융구조는 관련 기업들의 매출을 부풀리고, 주식 가치평가가 실제 실적보다 과도하게 높아질 위험을 내포한다. IMF의 추정에 따르면, 2025년 9월 초부터 12월 초까지 순환 고리 내부 AI 기업 주식의 누적 수익률은 약 12%였는데, 이 중 7%p가 순환 고리 내부의 상관관계 강화 효과에 기인했다(도표 6). 기업들의 주가 간 상관관계가 높아지면서, 한 기업의 주가 변동이 연관 기업 전반의 주가 변동으로 확산되며 전 세계 주식시장 변동성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도표 6] 2025년 9월부터 AI 순환 투자 구조 내 기업들 주식의 누적 동일가중 수익률 (도표 출처: IMF) 누적 동일가중 수익률(cumulative equal-weighted return)이란, 여러 기업의 주식을 각각 같은 비중으로 투자했다고 가정했을 때, 그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이 시간이 지나며 누적으로 얼마나 변했는지를 나타낸 값이다. 즉, 순환 투자 구조 내부 기업들의 주식을 같은 비중으로 2025년 9월 3일에 샀을 때, 이후 각 시점에서의 수익률을 계산한 것이다. 이것이 빨간색 실선이다. 핵심은 빨간색 실선과 빨간색 점선의 비교다. 빨간색 점선은 이들 기업 사이에 내부 순환 투자가 없었다면 누적 동일가중 수익률이 어떠했을지를 추정한 것이다. 그래프에 12월 초 시점에서 양자의 차이가 표시되어 있다. 약 12%의 누적 동일가중 수익률 중 7%p 정도가 순환 고리 내부의 상관관계에 의한 효과라는 것이다. 이런 상관성은 순환 투자 구조에 속한 기업들의 주가가 서로 얽히며 함께 상승하는 효과를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하나가 하락하면 모두가 함께 하락하는 효과를 만들 수도 있다. 파란색 점선은 기업들 간 상관성이 더 높았다면 나타났을 경로이고, 초록색 점선은 상관성이 더 높은 상태에서 더 강한 주가 하락 충격까지 겹쳤을 경우의 경로다. 맨 위의 문장은 'AI 순환 구조에 속한 기업들 사이의 수익률 상관관계는 주가 평가를 높일 수 있지만, 동시에 부정적 충격이 발생할 경우 구조 전반으로 파급될 위험도 키울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AI 부문의 몇몇 기업이 주식시장 전체를 좌우하는 현상도 위험 요인이다. 이들 기업의 주가가 하락할 경우, 그 충격이 더 넓은 시장으로 연쇄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AI 관련 투자가 이미 대규모로 이루어진 상황에서, 초대형 기술주들이 현재의 높은 가치평가를 정당화할 만큼의 기대 수익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전반적인 투자심리 역시 급격히 악화될 수 있다. 주식시장 자체가 변질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IMF는 두 가지 유사한 문제를 지적한다. 첫째는 주식 옵션시장의 과열이다. 주식 옵션 거래량은 기초 현물 주식시장 거래량의 거의 80%에 가까운 수준까지 증가했다. 이는 10년 전보다 무려 60%p 상승한 수치다. 더욱이 점점 더 짧은 시간 간격으로 수익을 내는 옵션 거래 전략이 확산되면서, 충격이 발생했을 때 시장에 공급되던 변동성 완충 장치가 사라지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만큼 급격한 가치평가 조정의 위험이 커진 것이다. 둘째는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의 확대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도표 7). 레버리지 ETF는 투자자가 실제로 투자한 금액보다 더 큰 규모로 기초자산이나 시장 변동에 노출되도록 설계된 상품이다(도표 8). IMF는 전체 주식시장 시가총액에 비해 레버리지의 익스포저(변동에 노출된 금액)가 미미하게 보이지만, 이 상품은 기계적이고 경기순응적인 거래 흐름을 통해 시장에 과도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짚는다. 쉽게 말해,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이다. 레버리지 ETF는 구조상 상승장에서는 추가 매수를, 하락장에서는 강제 매도를 해야 한다. 그 결과 시장이 오를 때는 상승폭을 키우고, 떨어질 때는 하락세를 증폭시킨다. IMF는 특히 한국 사례를 짚는다. 중동 분쟁 초기 한국 주식시장에서 나타난 과도한 매도세에도 레버리지 ETF가 기여했다는 것이다. 당시 코스피 지수는 하루 만에 12% 하락했다. [도표 7] 전 세계 레버리지 ETF 자산 규모 추이 (십억 달러) (도표 출처: IMF) 종류별로 구분되어 있는데, 범례 순서상 위부터 주식 및 기타(주로 주식 여러 종목), 단일종목, 상품(주로 원자재), 암호화폐, 채권, 변동성(VIX 등 변동성지수) 추종 ETF다. 그래프상에서는 이 순서가 아래에서 위로 쌓여 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식 기반 레버리지 ETF는 여러 기업이나 부문 주식으로 구성된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을 추종하는 상품이다. 2023년 전에는 주식 및 기타, 상품, 채권, 변동성 기반 ETF만 있었으나, 맨 위의 문장이 말하듯 최근 암호화폐와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라는 새로운 유형이 추가되었고, 레버리지 ETF 전반의 규모도 급성장했다. 특히 2024년부터 그래프상 빨간색 막대, 즉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가 빠르게 커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표 8] 레버리지 주식 ETF의 자산 및 총 레버리지 익스포저 (해당 국가 주식시장 시가총액 대비 비중, bp, 100bp = 1%) (도표 출처: IMF) 초록색 막대는 해당 관할권의 주식시장 시가총액 대비 레버리지 주식 ETF의 자산 비율을 보여준다. 여기서 자산은 투자자가 실제로 ETF에 넣은 금액이다. 빨간색 막대인 총 익스포저는 이 자산에 레버리지 배율을 곱한 값으로, 주식시장 시가총액 대비 이들 ETF의 실질적 영향력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2배 수익률을 맞춰야 할 경우, 증권사는 투자된 금액에 더해 차입과 파생상품을 활용해 시장 변동에 노출되는 금액(익스포저)을 늘린다. 이런 상황은 현재 주식시장이 기술이나 기업의 실질 가치에 대한 객관적 평가, 혹은 투자 원칙보다는 AI와 관련된 단편적인 뉴스, 분석 없는 낙관론, 단기 수익을 노리는 도박 심리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7년 금융위기 당시 문제가 되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기초해 위험을 분산했던 파생금융상품과도 달리, 지금은 단일 종목을 두세 배로 추종하는 ETF처럼 위험도를 더 높인 상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투자자들이 더 큰 변동성을 선호하는 흐름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현실을 보면, 현재 주식시장 상황은 AI 기술의 실제 발전과 점점 별개의 논리로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올해 5월, 투자자들의 스승 노릇을 해오던 워런 버핏조차 “하루짜리 옵션을 사거나 판다면 그것은 투자가 아니고 투기조차 아니며 도박”이라며, “지금보다 사람들이 더 도박 심리가 강했던 적이 없었다”고 경고했다. 한국 주식시장도 변동성이 극심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이 측면에서는 오히려 세계 어느 시장보다 독보적이다. 특히 올해 5월 27일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가 국내에도 등장한 이후, 불과 일주일 만인 6월 5일부터 매일 사이드카(프로그램 매매 일시 중단)가 발동되고 있다. 변동성지수(VKOSPI)가 90을 넘어 역대 최고치(6월 9일, 도표 9)를 찍는, 비현실적이라는 말을 넘어 '기괴한'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주식시장이 공포 상태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30이다.) 심지어 변동성지수 90에서 산출되는 일간 예상 주가 등락률은 ±5.7%인데, 현실에서는 ±8%대 등락률을 기록했다. [도표 9] 2026년 한미일 주식시장 변동성 지수 추이 (도표 출처: 헤럴드경제) 문제는 정부가 이처럼 변동성이 극심한 상황에서 ‘구조적 장기 호황’, ‘아직도 저평가’, ‘흔들리면서도 간다’는 식의 주식 유튜브에서나 할 법한 메시지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정부가 주가가 떨어진다는 얘기를 해야 하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애초에 일국의 대통령이나 정부가 주가의 향방에 대해 특정한 메시지를 내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현재 정부의 메시지는 여러 기관의 객관적 진단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낙관론으로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는 데다가, 정부 스스로가 주가를 부양하겠다는 의지도 보이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한국 주식시장의 ‘저평가’ 문제, 외국인과 국민연금의 리밸런싱 문제, 그리고 정부의 주가부양책들에 대해 하나씩 따져보며, 그런 메시지가 가진 위험성을 짚어보고자 한다. (썸네일 사진 출처: 조선일보)‘불장’ 이면의 위험 요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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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전쟁으로 표면화된 한국 금융시장의 취약성
최근 중동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한국경제가 고물가를 넘어 고금리·고환율이 겹치는 ‘3고’ 국면에 진입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정부는 연일 대책을 내놓고 있으며, 이재명 대통령은 헌법 제76조의 ‘긴급재정경제명령권’ 발동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이는 ‘중대한 재정·경제 위기’ 시 대통령이 국회를 거치지 않고 재정·경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물론 이번 전쟁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한국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일정한 대응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발표된 대책 가운데 금액 비중이 압도적으로 큰 금융시장 안정 프로그램(도표 1)을 보면, 정책의 초점이 유가 상승에 따른 직접적 피해 대응이라기보다 금융시장 안정, 나아가 주가 하락 방어에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표 1] 중동발 충격 관련 정부 경제정책 대응 현황 (3월 16일 기준) (출처: 중소기업뉴스) 3월 31일 발표된 ‘고유가 피해지원금’ 역시 실질적 피해 보전보다는 지방선거를 앞둔 표심 확보 성격이 강한 정책으로 해석된다. 지원 대상이 유가 상승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소득 하위 70%’로 설정된 점이 이를 보여준다. 4월 10일 국회를 통과한 26.2조 원 규모의 ‘전쟁 추경’ 또한 국회의 심사 과정에서 전쟁 충격과 무관한 각종 지역 사업이 추가되었다. 이 글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금융시장 안정 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춘다. 경제위기 때마다 반복적으로 소환된 정책이라는 점에서 주목도가 낮지만, 이를 통해 현재 한국 금융시장의 상태와 주가 부양에 기울어진 정부 정책 기조의 모순과 한계를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시장 안정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시점은 3월 2~4일 주식시장 급락 직후였다. 코스피 지수는 2월 27일 6244에서 불과 사흘 만에 5093으로 18.4% 폭락했다(도표 2). 1월 22일 이재명 정부의 공약이었던 ‘코스피 5000’ 달성 이후 한 달여 만에 6000선을 넘어선 직후의 급락이었다. 특히 1500만 명이 넘는 개인투자자들의 손실이 막대한 상황이었다. 이에 3월 5일 이 대통령은 임시 국무회의에서 “주식·환율 등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100조 원 규모의 금융시장 안정 프로그램을 신속히 집행할 것을 주문했다. [도표 2]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코스피 지수 (2025.6.4. ~ 2026.4.10.) 이 프로그램은 여러 기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번 대응에서 우선 가동된 것은 ‘채권시장안정펀드’(최대 20조 원)다. 은행·증권사·보험사 등이 회사채를 매입해 대기업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장치다. 이와 함께 산업은행·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을 통한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최대 10조 원)도 추진될 수 있다. 또한, 기업 대상 정책금융상품 공급과 대출 만기 연장·상환 유예 조치도 있는데, 그 규모는 현재 24.3조 원 수준까지 확대된 상태다(도표 1 둘째 행). 한편, 3월 5일 국무회의에서 이 대통령은 주식 매입을 목적으로 하는 ‘증권시장안정펀드’는 가동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이번 대책이 “주가를 직접 떠받치겠다는 의미로 오해되어선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채권시장은 금리가 형성되는 곳이며, 금리는 주가와 환율을 동시에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다. 따라서 이러한 자금 투입은 대기업 유동성 지원을 넘어, 주가 하락 방어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부가 정책자금을 회사채 매입에 투입하는 배경에는 작년 10월 중순 이후 빠르게 경색된 채권시장이 있다. 먼저 대기업의 자금 조달 창구인 회사채 시장에서 금리 급등으로 발행 여건이 크게 악화되었다. (중소기업은 회사채 시장 접근이 어렵다.) 실제로 2026년 1~2월 회사채 발행액은 전년 동기 대비 35.9% 감소했다(도표 3). [도표 3] 2025년과 2026년 1~2월 회사채 발행액 비교 (출처: 내일신문) 회사채 금리는 국채 금리에 스프레드(가산금리)가 더해져 결정된다. 올해 들어 스프레드도 일부 확대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작년 10월 중순 이후 국채 금리가 급등하며 채권시장 전반이 경색되고 있다(도표 4). 그 상승 속도는 코로나19 이후 위기 국면에 비견될 정도다. 다만 당시와 달리, 현재는 정책금리가 2.5% 수준에서 유지되는 상황에서도 국채 금리가 상승하고 있으며, 그 결과 정책금리와 시장금리 간 괴리가 계속 확대되고 있다. [도표 4] 정책금리와 국고채(3년/10년) 금리 비교: 최근 국면(위)과 코로나19 이후 경제위기 국면(아래) 이러한 경색의 주요 요인으로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국채 발행 급증이 꼽힌다. 주요 국공채 발행액은 2024년 157.7조 원에서 2025년 226.2조 원으로 43.5% 증가했으며, 특히 2025년 하반기에 증가세가 두드러졌다(도표 5). 2026년에도 발행 규모는 225.7조 원에 달한다. 하루 약 6183억 원 규모를 소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국내 채권의 주요 보유자는 국내 은행과 보험사(궁극적으로는 예금자)인데, 이들이 공급 압력을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 채권시장 경색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도표 5] 최근 5년의 주요 국공채 발행액(위)과 2024년과 2025년 사이 분기별 증감(아래) (단위: 십억 원, %) 문제는 이러한 시장금리 상승이 주가와 환율에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주가는 각 기업의 배당이라는 미시적 요인뿐 아니라 금리·환율이라는 거시 변수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물론 한국 주식시장처럼 단기 차익을 노린 투기가 만연한 환경에서는 실물·금융 요인보다 ‘기대’와 같은 심리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작년 11월 이창용 총재의 금리 인상 시사 발언 이후 주가가 하락했듯(도표 2), 금리는 주요 변수다. 코스피는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다가 11월 조정 이후 12월 중순부터 올해 2월까지 급등했다(도표 2). 블룸버그에 따르면, 11월 이전의 완만한 코스피 상승은 ① 반도체 기업 실적 개선, ② 상법 개정에 따른 배당률 상승 기대, ③ 외국인 자금의 순유입 전환(도표 6)에 기인했다. 특히 상법 개정의 경우, 현재로서는 일각에서 기대한 기업 지배구조 개선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해소, 즉 외국인 자금 유입을 통한 주가 부양 효과가 주요 효과였다고 평할 수 있다. [도표 6] 외국인의 국내 주식 순매수 추이 (2024.1. ~ 2026.3.) (출처: 국제금융센터) 그러나 ① 10월 중순 이후 시장금리가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고, ② 이에 11~12월 환율이 급등하면서 외국인 자금 유입이 둔화되었다(도표 6). 그럼에도 ③ 같은 시기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시장 유입이 급격히 늘어나며(도표 7), 금리와 환율 상승이라는 거시적 하방 압력에도 불구하고 주가는 오히려 급등했다. 개인투자자 특유의 ‘FOMO’(Fear of Missing Out, ‘남들 다 돈 버는데 나는?’) 심리와 낙관적 기대가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이에 주식시장의 변동성, 즉 위험성을 나타내는 지수가 작년 11월부터 한국에서 유독 급속히 높아지기 시작했다(도표 8). [도표 7] 신규 개인투자자의 연령별 구성 및 월별 증가 추이 (출처: 한국경제) [도표 8] 주가변동성지수: 한국(V-KOSPI)과 미국(VIX) (출처: 한국은행) 결국 ④ 올해 2월 외국인이 차익 실현에 나서며 자금이 대거 유출되었다(도표 6). 중동 전쟁 이전부터 이미 취약해진 주식시장은 ⑤ 전쟁을 계기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자금을 더 회수하며 급락했다. 국내 개인투자자가 외국인의 ‘ATM’ 역할을 하는 전형적 패턴이 반복된 것이다. 특히 작년 10월부터 올해 2월 사이 시장에 뒤늦게 진입한 개인일수록 손실이 컸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로도 외국인과 국내 개인투자자 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졌는데, 《아시아경제》 보도에 따르면 전쟁 발발 이후 한 달 동안 개인투자자와 외국인 투자자 간 수익률은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환율 역시 같은 흐름 속에서 움직였다. 작년 말 1500원에 근접했던 환율은 자본유출 가운데 3월 1500원을 상회했다. 달러 강세라는 세계적 요인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국의 환율 상승 폭은 다른 나라보다 유독 컸다(도표 9). [도표 9] 주요 선진국 미 달러화 대비 환율 (T=2월 27일) (출처: 한국은행) [도표 10] 국채 금리와 원/달러 환율의 추이: 한국 채권시장의 약세와 원/달러 환율 상승의 상관관계 (출처: 이투데이) 그 배경에는 자본 흐름의 구조적 문제가 있다. 내국인의 해외투자 확대가 자본유출 압력을 키우는 가운데, 외국인의 한국 내 자산 보유는 장기적 채권보다 단기적 주식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불안정했다(도표 11).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자본유입 흐름을 보면, 채권시장에서는 공급 증가와 금리 상승으로 순유입되다가 올해 3월 급격히 순유출로 전환되었다(도표 12). 국채 가격 하락(금리 상승)을 통해 수요를 유도하던 국면이, 이제는 가격을 낮춰도 더 이상 수요가 붙지 않는 상황임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주식시장에서도 앞서 보았듯 올해 2~3월 순유출이 이어졌다(도표 6). [도표 11] 외국인의 국내 지분증권(주로 주식) 및 부채성증권(주로 채권) 보유액 추이 (출처: 한국은행) [도표 12] 외국인의 국내 채권 순매수 추이 (2024.1. ~ 2026.3.) (출처: 국제금융센터) 결국 내국인의 해외투자 억제, 외국인의 국내투자 유인, 외환보유고 및 국민연금 활용 등 다양한 환율 대책에도 불구하고 환율 상승을 막기 어려웠던 이유는 이러한 자본 흐름에 있다. 결국 3월의 주가 폭락과 환율 급등은 전쟁이 직접적 계기였지만, 그 이전부터 누적된 구조적 문제가 표출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반도체·방산 등 일부 산업을 제외하면 수출과 신규 투자가 정체된 실물경제, 그리고 국채 발행 급증으로 금융시장의 기반인 채권시장이 지속적으로 약세를 보여온 점이 그 배경이다. 상법 개정 기대와 일부 기업 실적 개선을 계기로 외국인 자금이 주식시장에 대거 유입되었으나, 이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자금이었고, 금리와 환율이 상승하는 국면에서 이탈하다가 전쟁을 계기로 대규모 유출로 이어졌다. 이는 다시 환율 상승을 가속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동된 금융시장 안정 프로그램은 이미 경색된 채권시장에서 민간 자금을 동원해 대기업에 공급함으로써, 회사채 금리와 함께 간접적으로는 국채 금리 상승을 억제하려는 시도다. 국채 발행 급증에 따른 시장금리 상승 압력을 민간 자금으로 완화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회사채뿐 아니라 국채 시장에 대한 직접 개입도 확대되고 있다. 한국은행은 작년 12월에 이어 올해 3월에도 3조 원 규모의 국채를 단순매입했으며, 재정경제부도 3월 27일과 4월 1일에 걸쳐 총 5조 원 규모의 국고채 바이백을 실시했다. 금리 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 대응에 총력을 기울이는 양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라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침체된 실물경제와 국채 발행 증가라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민간 자금과 중앙은행의 발권력, 국민연금과 재정을 동원해 대기업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주식시장으로의 자금 유입을 유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재명 정부의 재정 운용이 금리를 상승시키는 요인임에도, 주가 부양을 위해 금리 상승을 억제하려는 점에서 정책 간 충돌이 발생한다. 물론 정부는 이번 추경의 재원이 법인세와 증권거래세 증가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하지만, 이러한 세수는 변동성이 높고, 이에 대한 의존은 정책의 초점을 특정 대기업 지원과 주가 부양으로 더욱 기울게 할 위험이 있다. 또한 이번의 재정·정책자금 투입은 전쟁 충격에 대한 직접적 대응이라기보다 기업과 가계에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는 단기적 효과에 그칠 가능성이 크며, 결국 지금과 같은 금융시장 불안정이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환율 상승이 문제다. 이는 물가 상승을 통해 소비 비중이 높은 저소득층의 생활수준을 더 크게 악화시키는 역진적 효과를 낳는다. 또한, 원화 자산의 보유 이익을 줄여 자본유출을 유도하고, 국내 저축자와 (대체로 소득 상위계층인) 해외 자산 보유자 간의 격차를 확대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소득 하위 70%’에 대한 현금성 지원은 ‘병 주고 약 주기’에 가까운 대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최대 60만 원의 일회성 지원이라는 약보다 물가 상승이라는 병의 효과가 더 크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사회운동은 민주당의 ‘금융 포퓰리즘’과 이재명 정부의 주가 부양 중심 정책이 낳는 경제적·사회적 효과를 비판해야 한다. 일례로 코스피가 상승해 국민연금이 ‘대박’을 냈다며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비중 제한을 완화하거나 없애자는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 이는 위험 분산이 아니라 ‘될 것 같은’ 특정 자산에 ‘올인’하자는 투기적 사고방식이다. 3월의 주가 하락 국면에서 보듯, 이는 국민의 저축이 외국인 투자자에게 이전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또한, 연금 자금으로 주가를 떠받쳐 연금 수익률을 높이는 순환 속에서, 정부 정책이 대기업 지원과 주가 부양에 편향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부가 주식시장을 떠받치며 국민에게 “왜 주식을 하지 않느냐”는 신호를 보내는 정책은 노동소득에 의존하는 다수에게 박탈감을 주고 투기적 세태를 강화한다. 실제로는 개인투자자가 외국인의 ‘ATM’ 역할을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가운데, 그 손실을 재정과 국민의 저축, 신규 투자자 유입으로 메우는 악순환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 사이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대응은 지연되고, 향후 예상되는 정책금리 상승 국면으로의 전환에서 한국경제가 더 큰 충격을 받을 위험이 커질 것이다. 다음 글도 함께 보십시오. - 「금투세, 결국 폐지 수순으로 가는가」, 〈사회운동포커스〉, 2024.10.15. - 「한국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말하지 않는 대선」, 〈사회운동포커스〉, 2025.5.23. - 「이재명 정부, 쟁점과 전망」,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5년 여름호. - 「국제무역과 금융의 분절화, 달러체제의 위기 가능성과 한국경제」,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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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장 안정 프로그램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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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시장 불안이 주가와 환율에 미치는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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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된 땜질식 처방과 ‘금융 포퓰리즘’의 귀결: 위험의 이연과 심화
2026년 세계경제·한국경제 전망
1. 서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형성된 국제무역과 금융 질서의 변화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세계경제는 예측 불가능한 정치권력이 가하는 충격을 맞고 있다. 지난해 말 사회진보연대는 “트럼프주의자가 제시하는 미국의 대외경제정책으로 인해 길게는 2차 세계전쟁 이후, 짧게는 1990년대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시대에 미국이 주도했던 규칙 기반 다자적 질서가 최종적으로 후퇴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며, “중국이 권위주의와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넘어 탈동조화를 추구하고 일방적이고 불확실성이 높은 거래에 몰두한다면, 세계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대국이 ‘공공악’을 제공하는 ‘G 마이너스 2’의 시대로 진입하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임지섭,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겨울호) 불행히도 이 예측이 현실이 되고 있는 지금, 이번 경제전망은 수많은 경제학자가 논하고 있는 국제무역·금융의 ‘분절화’(fragmentation)의 양상을 확인하며, 규칙 기반 다자적 경제질서의 해체가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에 어떤 경제적 충격을 줄 것인지 보고자 한다. 먼저 ‘길게는 2차 세계전쟁 이후, 짧게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대에 미국이 주도했던 질서’가 무엇인지 짚자.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애덤 포즌 소장은 트럼프 재집권이 단지 무역과 같은 경제적 측면에만 아니라 세계 질서에 더 심원한 충격을 가한다며, 2차 세계전쟁 이후 미국이 세계에 제공해 온 공공재를 더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위협에 주목하자고 말한다. 포즌은 그런 글로벌 공공재의 사례로 항공·해상에서의 안전한 항행 능력, 재산이 수용으로부터 안전하다는 확신, 국제무역의 규칙, 그리고 거래 및 자산 저장을 가능케 하는 안정적 달러 자산을 드는데, 이를 ‘안보, 법치, 화폐’라 요약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이들 공공재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위한 것으로, 포즌은 트럼프 행정부가 자본주의 체계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셈이다. 이 글은 안보, 법치, 화폐 중 마지막에 가해지는 위협에 초점을 맞추겠다. 화폐 관리의 측면에서 2차 세계전쟁 이후의 질서는 미국이 관리통화제를 확립하고 달러를 세계화폐로 삼으며 형성됐다. 20세기 중반에는 미국의 경제성장과 재정을 주요 토대로 하여 달러의 가치를 지지했으나, 스태그플레이션·재정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은 세계화폐로서 달러 가치를 지지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미국 민간의 구조조정에 상응하여, 신흥시장의 경제성장에 기초한 수출달러 환류를 주요 토대로 삼은 것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형성된 질서 하에서 국제무역·금융의 핵심 패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미국의 상품시장 개방과 무역적자 확대에 상응해 (중국을 필두로 한) 신흥시장의 수출 부문이 성장했다. 미국 외 선진국 역시 신흥시장으로부터 저부가가치 제품을 수입하고 고부가가치 제품을 수출하는 분업 구조 속에서 성장했다. 미국은 기술혁신을 통해 첨단 산업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한편, 자국 산업의 구조조정과 세계경제의 성장이 결합된 결과로 이른바 ‘특권적 이익’(exorbitant privilege)을 누리게 됐다. 둘째, 미국이 누리는 ‘특권적 이익’의 핵심은 낮은 국채 금리, 즉 나머지 세계로부터 가장 낮은 비용으로 차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신흥시장과 무역흑자국의 수출달러 환류는 달러와 미 국채의 가치를 지지했다. 또한 저임금을 토대로 한 신흥시장의 수출 확대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낮은 금리를 유지하더라도 과도한 인플레이션에 직면하지 않게 했다. 그 결과 금 태환 보장이 사라진 이후에도 달러(미 국채)는 안전자산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렇게 무역적자는 재정조달 비용을 낮추는 역할을 했고, 미국은 1970년대의 재정위기를 넘어 재정적자를 더 확대할 수 있었다. 무역적자·재정적자는 대규모 자본유입을 수반했지만, 낮은 금리 덕에 미국의 대외부채는 상대적으로 완만한 속도로 증가했다. 셋째, 앞의 두 요인이 결합하면서 미국은 두 번째 특권적 이익을 얻게 된다. 이는 미국의 낮은 차입금리와 성장하는 나머지 세계에 대한 투자수익률 간의 격차다. 미국의 민간 부문은 낮은 비용으로 차입해 신흥시장과 성장하는 국가들에 대한 직접투자(FDI)와 주식 투자를 확대하고 대외자산을 축적했으며, 그 수익률 격차로 이윤을 증대시켰다. 이로 인해 미국의 대외자산 증가 속도는 대외부채 증가 속도를 상회했다. 물론 무역적자·재정적자에 따른 자본유입 규모가 대외투자 규모를 초과했기 때문에 미국은 1980년대 말 이후 줄곧 순대외채무국이었지만, 순대외채무의 증가 속도는 상대적으로 완만했다. 이러한 금융적 우위는 상술한 기술적 우위와 결합해 미국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했다. 넷째, 미국과 선진국의 신흥시장 대상 투자, 특히 FDI는 신흥시장의 수출 부문에 자본과 기술을 공급했다. 이는 다시 신흥시장의 수출 확대로 이어지며, 첫째부터 설명한 패턴이 반복되는 순환 구조를 형성했다. (이런 패턴이 뒷받침하는 미국의 ‘특권적 이익’에 대한 더 깊은 설명은 케네스 로고프의 『달러 이후의 질서』(2025; 국역: 윌북, 2025)를 참고할 수 있다) 이렇듯 1990년대 이래 달러(미 국채)의 가치는 이전처럼 미국의 재정이나 달러 기반 국제금융 질서에 참여하는 몇몇 선진국에 의해서만 지지되지 않았다. 그 가치는 미국·선진국과 신흥시장 간 상품과 자본 거래의 확대로서 무역과 금융의 세계화와 그 결과로 세계경제, 특히 신흥시장 경제가 성장한 것에 의해 지지되었다. 따라서 포즌이 말하는 화폐 관리에 대한 위협이나, 로고프가 말하는 ‘달러체제(dollar regime)의 위기’란, 단지 미국 내의 재정적자가 심각하다는 얘기만이 아니라 상술한 국제무역·금융의 패턴 전반이 위협받고 있다는 뜻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그 구조적 원인은 신흥시장의 필두인 중국경제의 이윤율 하락이다. 이는 2007~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보다 더 낮아진다. 당시 경제학자들은 중국이 자본축적에만 의존한 성장의 한계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기술혁신으로 총요소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며 그 수단으로 저임금·낮은 위안화 가치에 의존한 성장모델의 개혁과 FDI 유입의 질적 고도화를 권고했다. 또한,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무역적자·재정적자 확대가 지속 가능한가에 관한 의문이 더욱 강해졌다. 2010년대 중반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는 세계경제 불균형의 두 축인 미국의 과도한 소비와 중국의 과도한 저축을 감축하며 달러 체제의 위기를 예방할 수단으로 G2의 협력에 기초한 ‘아시아판 플라자합의’(위안화 절상)를 제안했다. 이는 미국 인민의 생활수준을 낮추고, 중국 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여 중국의 내수를 활성화함과 동시에, (이를 명시한 것은 아니나 암묵적으로는) 중국 인민에 대한 중국 당국의 통제를 약화하며, 중국 자본과 중국에 투자된 선진국 자본의 단기적 이익은 침해하나 장기적으로는 개혁과 생산성 향상을 유도하는 안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요인들로 인해 이러한 대안은 채택되지 않았고, 앞서 살펴본 국제무역·국제금융의 기존 패턴에 대한 위협은 오히려 심화됐다. 시진핑 체제하의 중국공산당은 위안화 가치와 임금 통제, 보조금에 기반한 수출 구조를 개혁하고 민간소비를 확대해 과도한 무역흑자를 축소하는 대안 대신,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경로를 선택했다. 그 결과 국유 부문 중심의 과잉투자와 비효율이 누적됐고, 이는 지방정부 재정 구조와 결합해 부동산 부문의 불균형과 거품 붕괴를 심화시키며 현재까지 중국경제에 중대한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장기화된 무역적자와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불만이 정치적으로 결집되며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후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1990년대의 초당적 합의였던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하는)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 노선에 초당적 합의를 형성했으나, 정책 수단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트럼프 1기 행정부가 대중 관세를 주요 수단으로 활용한 반면, 바이든 행정부는 대중 관세를 유지하는 동시에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특정 기술·제품에 대한 수출통제와 투자 규제를 강화했다. 중국은 한편으로는 국유 자본의 과잉과 수익성 악화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중 전략적 경쟁의 심화에 대응하면서, 성장과 안보를 결합하는 ‘쌍순환 전략’을 추진하여 국가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화했다. 이 전략은 기술과 공급망의 자립을 목표로, 국내적으로는 정부투자와 보조금을 통해 산업 고도화를 추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자원수출국과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국유 부문의 과잉자본 수출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미국의 ‘전략적 경쟁’과 중국의 쌍순환 전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보라. 임지섭, 「심화하는 전략적 경쟁, 어떻게 볼 것인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3년 가을호)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중국, 이른바 G2의 정책 노선이 변화하면서 앞서 살펴본 국제무역·국제금융의 패턴이 달라졌다는 연구가 최근 급증했다.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는 ‘분절화’(fragmentation)다. 분절화의 시작 시점을 두고는 학자마다 견해가 갈려, 멀게는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 전후부터, 가깝게는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한 2017년 이후로 본다. 그러나 세계경제에서 분절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인식 자체는 이제 지배적인 시각이 됐다. 최근 몇 년의 논의에서 분절화는 주로 ‘블록화’를 의미한다. 즉 1990~2000년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과 신흥시장 간 상품·자본 거래가 확대되던 세계화 국면에서 벗어나, 미국을 필두로 유럽·동아시아의 선진국과 일부 신흥시장이 결합한 미국 블록과, 중국을 중심으로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라 불리는 다수의 개발도상국이 포진한 중국 블록 사이에서 무역과 금융 거래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절화·블록화의 주요 원인으로는 지정학적 요인이 지목된다. 이에 따라 경제 분석에서도 지정학, 나아가 지경학(geoeconomics)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확산하고 있다. 민간기업의 이윤 극대화와 국민경제의 성장을 중심에 둔 자유주의적 경제학의 시각과 달리, 오늘날에는 중상주의적 전통에 가까운 방식으로 국가들이 무역, 제재, 투자와 같은 경제적 수단을 활용해 전략적·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행위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시각이다. 즉 경제를 상호 간 질서를 구축하고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른바 ‘윈win-윈win 게임’)보다는, 한쪽이 다른 쪽의 것을 뺏는 것(이른바 ‘윈win-루즈lose 게임’)으로 보자는 것이다. 반면 사회진보연대는 2010년대의 경제 정세 변화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한계 하에서 인민주의·권위주의의 난입’으로 본다. (사회진보연대, 「25주년 기념좌담」,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3년 겨울호.) 요컨대, 성장의 한계를 일으키는 원인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노동자연합의 건설로 대체하거나(마르크스주의), 한계 안에서도 기존 질서를 재생산하며 최대한의 성장을 일으키려 노력하는(주류경제학) 대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내버려두면서도 이를 재생산하는 제도와 이념을 공격하며 경제성장을 해침으로써 인민 전반의 생활수준을 하락시키고, 나아가 내부 대결을 조장해 ‘공멸’로 이끄는 경향이 지배력을 얻고 있다. 포즌은 이를 모두가 피해를 입는 ‘루즈(lose)-루즈(lose) 게임’의 도래로 표현한다. 이런 기준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전략적 경쟁’ 국면에서도 트럼프 1기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의 접근 방식은 성격이 다르다고 보았다. 전자가 중국 블록과의 ‘윈-루즈 게임’을 추구했다면, 후자는 여전히 규칙 기반의 다자적 질서를 유지하면서 그로부터 이탈하는 중국 블록을 견제하고 동시에 재포섭하려 했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임지섭의 글을 참조하라) 그런데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포즌, 옵스펠트, 로고프와 같은 논자들은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관세를 중심으로 한 트럼프 2기 정책이 기존의 분절화를 한층 더 심화시킬 뿐 아니라, 초점 자체도 변화시키고 있다고 우려한다. 바이든 행정부나 심지어 트럼프 1기와도 다르게, 트럼프 2기의 통상정책은 중국보다는 오히려 미국 블록 내부의 경제에 더 큰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확대됐던 선진국과 신흥시장 간 상품·자본 거래는 2010년대를 거치며 블록화라는 형태로 정체됐는데, 트럼프 2기 정책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진정한 의미의 ‘미국 우선주의’, 즉 미국과 나머지 세계의 대결 구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이러한 노선이 지속될 경우 미국 블록 내부의 분절화가 심화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경제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제2차 세계전쟁까지의 시기처럼 안정적인 세계화폐와 국제무역·금융 질서가 부재한 상태로 회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질서 해체의 양상과 경제적 효과를 무역 측면(2장)과 금융 측면(3장)으로 나눠 논한 후, 그러한 세계경제 속에서 한국경제가 처한 상황(4장)을 살펴보겠다. 2. 국제무역 분절화의 양상과 그 경제적 효과 1) 국제무역의 분절화: ‘블록화’에서 ‘탈세계화’(de-globalization) 국면으로 무역 세계화의 대표적 지표는 세계 GDP 대비 무역량의 비율이다. 이 비율이 상승하면 무역의 세계화가 심화되고, 하락하면 ‘탈세계화’가 진행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의 상단을 보면, 2007-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이 비율이 뚜렷한 상승 없이 둔화·정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슬로벌라이제이션’(slobalization)이라 부르기도 한다. 해당 지표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락했다가 일시적으로 회복했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부터 다시 하락 국면에 들어섰다. 당시에는 이 하락이 단기간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그림]의 하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 최근 IMF를 비롯한 주요 경제기구는 트럼프 2기 관세정책의 충격으로 하락세가 장기화하리라 전망한다. 하락세는 세계 수준만이 아니라 주요 경제권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특히 2010년대 이래 중국의 GDP 대비 무역 비중 하락이 두드러진다. [%=사진1%] [그림] 무역의 세계화와 탈세계화 (자료출처: CEPR, IMF) 위: 1870-2023년 세계 GDP 중 무역량(수출+수입)의 비율 (%) 아래: 2008-2030년 세계 및 각국 GDP 중 수출(왼쪽)과 수입(오른쪽)의 비율과 그 전망 (%)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무역 세계화의 지표가 1915년까지의 상승, 1915~1945년의 하락, 1945~2010년의 재상승이라는 세 국면을 거친 뒤, 2010~2022년의 정체 국면을 지나 2022년 이후 본격적인 하락, 즉 ‘탈세계화’ 국면에 진입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2010년대 중반부터 무역의 ‘블록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 다수 제기돼 왔다. 2015년 이후 세계경제를 미국·중국·EU·기타로 나눠 볼 때, 미국과 중국은 서로에 대한 교역 비중이 뚜렷하게 감소했다. 대신 미국은 EU, 기타 국가와의 수입·수출 비중을 확대했고, 중국은 EU에 대한 수출 비중과 기타 국가와의 수출·수입 비중을 늘렸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다수 국가도 관세, 무역 규제, 지정학적 요인 등으로 인한 무역비용 변화에 따라 미국 블록 또는 중국 블록으로 편입되는 무역의 블록화가 진행됐다. 그런데 이는 일부 국가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고, 양 블록 전반의 성장률을 낮추는 효과를 가한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무역 블록화는 순수한 경제적 논리라기보다 지정학적 갈등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무역 블록화는 특히 에너지와 반도체 부문에서 두드러진다. 에너지 무역의 경우, 미국이 셰일혁명을 통해 2020년을 기점으로 에너지 순수출국으로 전환한 데 이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중단하고 중국과 인도 등이 유럽이 수입하던 몫을 대신 수입하면서, 미국 블록과 중국-러시아-중동 블록 간의 분절화가 뚜렷해졌다. 반도체 무역에서는 미국이 ‘전략적 경쟁’의 일환으로 고급 반도체와 반도체 제조 장비가 중국으로 수출되는 것을 통제하면서, 미국-유럽-대만·한국-동남아 일부 국가로 구성된 공급망 연계가 강화됐다. 이러한 반도체 공급망 분절은 미중 양국 모두에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2022년 이후 본격화된 무역의 ‘탈세계화’ 국면에서, 국제무역 패턴 변화의 구체적 특징을 살펴보자. 2) 이른바 ‘2차 차이나 쇼크’의 경제적 효과 ① 중국의 무역, 특히 수출 구성의 변화: 트럼프 2기 대중 관세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제한적 2020년대 들어 중국이 추진한 ‘쌍순환 전략’의 효과는 국제무역 측면에서 이른바 ‘2차 차이나 쇼크’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GDP 대비 수출·수입 비중은 2010년대에 걸쳐 꾸준히 하락해, 세계시장으로부터의 이탈과 ‘자립’이 진전되는 듯하다. [그림]에서 보듯 수출·수입의 절대 규모도 2022년 이후 증가세가 둔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수출달러 환류의 주요 기반으로서 중국의 역할이 축소됨을 보여준다. [%=사진2%] [그림] 중국의 수출액(위)과 수출 성장률(아래) 위: 2020년 11월~2025년 10월 중국의 총수출액(왼쪽) 및 미국·EU·ASEAN 대상 수출액(오른쪽) (달러, 월 단위) 아래: 동기간 중국의 수출 성장률 (%, 월 단위, 전년 동월 대비) (자료출처: MacroMicro, TradingEconomics) 수출과 수입의 구성도 변하고 있다. 수출에서는 전자제품·기계류·고부가가치 제품의 비중이 상승했고, 전기차·에너지 부문 신산업의 수출과 생산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은 수입이 통제된 첨단 반도체를 자체 생산하지는 못하나, 선진국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확대되며 이에 필요한 구형(legacy) 반도체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고 있다. 다만 중국 제조업 무역흑자의 약 70%는 여전히 저가 소비재와 중간재에서 발생한다. 수출 대상국의 구성도 바뀌고 있다. [그림]에서 보듯 2022년 이후 중국의 대미 수출 규모는 감소세로 전환됐다. 총 수출 중 대미수출 비중 역시 하락하다가 2025년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 부과 이후에는 약 15%까지 떨어져, 미국은 ASEAN과 EU에 밀려 중국의 수출국 중 3위로 내려갔다. 이 때문에 포즌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가 중국의 수출에 부정적 충격을 주기는 하겠지만, 시간상으로는 트럼프 1기 때보다, 공간적으로는 관세를 처음 맞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충격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한다. 한편 중국의 수입은 여전히 중간재와 자본재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 의존이 지속되고 있으나, 일부 중간재와 기계 부문에서는 국산화가 진행되며 수입 의존도가 완만히 낮아지고 있다. 동시에 에너지와 원자재는 러시아·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한편, 이들 지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며 경제적 종속 관계를 강화하는 전략도 병행한다. (이는 3장 1절에서 다룬다) ② ‘2차 차이나 쇼크’의 파급력: 개발도상국의 수출 억제와 세계적 무역장벽 강화 문제는 이러한 중국의 전략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 충격을 완화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기여했으나, 동시에 EU·일본·한국 등 미국 외 선진국과 ASEAN을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와의 새로운 무역 갈등을 촉발한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의 수출 전환 전략에 내포된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중국은 전기차·배터리·반도체·전자기기 부문에서 정부투자와 보조금에 기반한 과잉생산을 통해 저가 공세를 펼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른바 ‘2차 차이나 쇼크’가 선진국 경제를 압박하고 있다. 예컨대 EU의 대중 무역적자는 최근 급격히 확대돼, 2025년에 연간 3375억 유로로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 부과 이후 중국이 대미 수출 감소를 대EU 수출 증가로 보완하며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됐다. 이에 현재 진행 중인 EU의 불공정 무역 조사 가운데 다수가 중국 관련 사안이며, 2024년 EU의 반덤핑 조치 74건 중 46%, 반보조금 조치 11건 중 38%가 중국산 수입품을 대상으로 한다. ‘2차 차이나 쇼크’의 충격은 선진국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글로벌 사우스’에서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다. 여전히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저숙련 제품 부문에서, 중국은 민간소비 부진과 대미 수출 의존 축소의 결과로 개도국 시장에 물량을 집중적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로 인해 저소득·중소득국 전체의 저숙련 제품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당 국가들의 노동인구 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28%p나 높다. 이는 중국이 가난한 나라들에서 수천만 개의 제조업 일자리를 떠받칠 수 있는 ‘수출 공간’을 지속적으로 점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개도국에 대한 중국의 생산성 우위가 아닌, 국가 보조금, 환율 통제, 과잉 생산능력 유지에 기초한 것으로 평가된다. [%=사진3%] [그림] 각국의 국내생산 중 중국산 수입 증가에 노출된 부분의 비율(%) (자료출처: 국제금융센터) 실제로 [그림]에서 중국산 수입 증가에 노출된 비율이 가장 높은 10개국 가운데 9개국이 저소득·중소득국이다. 2024년 기준 중국의 무역흑자 가운데 약 54%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 발생했다는 점 역시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한다. 이에 대응해 브릭스 회원국과 파트너국을 중심으로 대중 무역장벽을 강화하는 조치가 잇따르고 있다. (구체적 사례는 작년 경제전망을 보라. 임지섭,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겨울호) 최근 중국은 더 가난한 국가들에 대해 무관세 접근을 허용하거나, WTO에서 개도국 특별 혜택 요청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는 상징적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처럼 수출 공간을 의도적으로 내주는 전략적 전환이 없는 한, 중국의 수출 전략은 갈등을 누적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중국은 상환 능력이 부족한 개도국에 자본을 수출하고 이를 담보로 자원이나 시설 운영권을 확보하는 방식을 확대하고 있는데, 이 역시 ‘글로벌 사우스’와의 마찰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3장 1절에서 다룬다) ③ 중국 수출전략의 구조적 한계와 인민주의적 반중 정서의 추동 무엇보다 이러한 외부 갈등의 심화는 중국 내부의 구조적 모순과 맞물려 있다. 이윤율이 하락하는 가운데 환율과 임금 통제를 유지하고, 정부투자와 보조금으로 수출 부문의 가격경쟁력을 지탱하면서, 수출량은 늘어나되 수익성은 악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IMF는 중국 제조업 수출의 성장 동력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전망한다. 실제로 중국의 산업정책 지출은 2011~2023년 동안 GDP의 약 4% 수준을 유지했으며, 낭비적인 중복·과잉투자로 인한 과잉생산과 감산은 총요소생산성과 GDP 수준을 각각 1.2%와 2%씩 낮추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약 1년 치 성장분이 소멸하는 규모다. 정리하면, 201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GDP 대비 무역량 비중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수출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으나 2022년 이후 그 속도는 둔화하고 있다. 대미 수출은 감소 추세에 접어들면서, 수출달러 환류의 주요 기반으로서 중국의 역할도 점차 축소되고 있다. 대신 중국은 EU와 ASEAN을 비롯한 나머지 세계를 향해 수출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 부과는 이러한 흐름을 더 가속화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지출과 보조금에 기초한 중국의 ‘저가 출혈경쟁’ 전략이 심화하면서, 최근에는 미국 외 선진국과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대중 무역적자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무역 분쟁을 촉발하고, 각국에서 인민주의적 반중 정서를 자극할 가능성을 높인다. 실제로 상품시장 개방성을 낮추는 각국의 정책 대응은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무역적자 자체에 대한 인민주의적 불만과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구분하며, 이를 ‘전략적 경쟁’이라는 틀로 관리하려 했다. 그러나 지금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정책 탓에 인민주의와 권위주의가 상호 강화되는 악순환이 심화하며 무역의 ‘탈세계화’가 장기화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3) 트럼프 2기 행정부 관세정책의 성격과 경제적 효과 사회진보연대는 작년 경제전망에서, 트럼프 후보가 공약했던 관세와 감세 정책의 결합이 물가와 금리를 끌어올려 미국의 부채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며, 그로 인한 경제적 악영향이 1기보다 훨씬 클 것이라 보았다. 문제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 1년도 채 되지 않아 공약 대부분을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 그 결과 경제학자 사이에서 미국의 부채위기를 넘어 20세기 초 형성된 달러 기반 국제금융 체계의 위기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지경이다. 본 절에서는 트럼프 2기 관세정책의 성격과 지금까지 낳은 실물경제 측면의 효과를 먼저 살펴보겠다. ① 관세 정책의 범위와 실효관세율의 급등 트럼프 2기에서 예고·실행된 관세는 보편적 기본관세, 상호관세, 품목별 관세, 마약·이민자 이슈와 연계된 관세 등 유형이 다양하며, 대상 국가와 품목도 광범위하다. 관세율 역시 잦은 협상과 번복으로 계속 변해 그 전모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국가별 실효관세율, 즉 특정 국가로부터의 총수입액 대비 실제 납부된 관세 비율로 단순화해 정책 효과를 분석한다. [%=사진4%] [그림] 미국의 중국/나머지 국가에 대한 실효관세율과 중국의 미국/나머지 국가에 대한 실효관세율(%) (자료출처: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트럼프 1기부터 바이든 행정부까지 미국의 대중 실효관세율은 19.3%였고, 나머지 국가 대상 실효관세율은 3.0%에 그쳤다. 그러나 이는 [그림]에서 보듯 트럼프 2기 들어 급격히 상승해, 2025년 11월 10일 기준 각각 47.5%, 18.5%에 이르렀다. 관세 정책의 범위와 강도가 1기와 질적으로 다른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② 1기와 다른 점: 중국보다 ‘미국 블록’이 더 표적이 되다 트럼프 1기 관세 정책과 2기의 가장 큰 차이는 두 가지다. 첫째, 1기에는 대중 관세가 핵심이었고, 나머지 국가에는 철강·알루미늄 등 일부 품목에만 제한적으로 관세가 적용됐다. 반면 2기에는 ‘무역적자’ 자체를 줄인다는 목적을 선명히 하며, 아래 [그림]에서 보듯 1기 무역전쟁의 ‘풍선 효과’로 대미 수출이 늘어났던 미국의 동맹국과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지역, 즉 EU, 일본, 한국, 대만, 멕시코, 동남아 등이 관세의 적용 대상이 됐다. 선진국들은 단지 미국의 수입에서 중국의 빈자리를 메운 것만이 아니라, ‘전략적 경쟁’ 과정에서 중국의 생산기지나 중간재 수출지를 동남아·멕시코 등지로 이전시켰는데, 바로 그곳들이 이번 관세 부과 대상이 되면서 이중 타격을 받고 있다. [%=사진5%] [그림] 2017~2022년 사이 미국의 수출에서 각국이 점한 비중의 변화 (%p) 이는 트럼프 1기 대중 관세의 결과로 나타난 ‘풍선 효과’를 보여준다. 미국의 수입에서 중국을 대체한 이들 국가가 트럼프 2기 관세의 표적이 됐다. (출처: CEPR) 둘째, 관세를 협상 수단으로 활용해 대미 직접투자(FDI)를 끌어내는 전략이 본격화됐다. 그 대상 역시 중국 블록의 국가들보다는, 협상이 가능한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이번 한미 관세 협상에서 확인됐듯, 양국 기업이 투자를 통해 어떤 이익을 얻을지 논하기보다 액수를 늘리는 데 치중하며 고압적인 트럼프의 협상 태도는 동맹국에서조차 큰 반발을 일으켰다. ‘프렌드쇼어링’을 허용하지 않고 오직 미국으로의 ‘리쇼어링’(reshoring)만 고수하는 트럼프의 전략은 동맹국의 투자·성장 여력을 훼손한다. 게다가 이를 비효율적으로 사용할 위험성이 제기된다. (이는 3장 3절에서 다루겠다) 이런 맥락에서 포즌이 제시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실제로 더 중시하는 목표는 중국보다는 ‘미국 블록’ 국가들로부터 받는 불이익을 줄이는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다. 이는 미중 블록 간 탈동조화라기보다, ‘미국 대 나머지 세계’의 구도를 강화하는 조치에 가깝다는 것이다. 한편,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 엔비디아의 첨단 반도체 수출을 허용하며 ‘전략적 경쟁’을 거스른 것도 상징적이다. 이에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초당적으로 미 상무부 장관이 30개월 동안 첨단 칩의 대중국 수출 허가를 거부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트럼프 2기에서 더 강력해진 정책이 궁극적으로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거나 제조업을 재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전망이 지배적이다. ③ 무역적자 감축 효과: 단기적으로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불확실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으로 먼저 대중 무역적자 감축이 이뤄지고 있는지 보자. 올해 미국의 대중 실효관세율은 한때 127%까지 치솟았고(121쪽 그림), 2025년 1~7월 미국의 대중 수입은 전년 동기 대비 16.9% 감소했다가 관세가 유예된 후 8월에 일부 회복됐다. 이 과정에서 대중 무역적자는 아래 [그림]에서 보듯 올해 2분기 크게 감소했다. [%=사진6%] [그림] 트럼프 관세 부과 후 미국의 상품(서비스 제외) 무역적자 (달러, 분기 단위) 트럼프 1기 관세 부과 이후 1년 정도 무역적자가 감소했으나, 관세율이 유지되었음에도 결국 무역적자가 크게 증가했다(왼쪽 위). 이는 대중 무역적자가 초기에 감소했음에도 ‘풍선 효과’로 다른 나라 대상 무역적자가 증가했으며, 심지어 대중 무역적자도 결국 증가했기 때문이다(왼쪽 아래). 트럼프 2기에서는 2025년 1분기에 무역적자가 증가했다(오른쪽 위). 이는 관세 발효 전 미리 수입을 해놓으려는 효과에 의한 것으로 분석된다. 2분기부터는 무역적자가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으나, 베트남과 대만(반도체 관련) 대상 무역적자가 증가하는 추세다(오른쪽 아래). 이후 1기처럼 최소 1년 정도는 무역적자가 감소하리라 전망되나, 장기적 전망은 불투명하다. (자료출처: 미 경제분석국(BEA)) 수십 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전방위적 관세 부과로, 미국의 무역적자 자체를 감소시키겠다는 목표도 실현되는 듯 보인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관세 발효 이전에 미리 수입을 대거 해놓으려는 ‘선제 수입’(front-loading) 효과로 올해 초에 오히려 증가했다가, 그 효과가 차츰 사라지며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다. 다만 지금까지의 이런 결과는 트럼프 1기 때 관찰됐던 범위 내에 있다. [그림]에서 보듯 1기 때도 대중 관세 부과 후 약 1년간 대중 무역적자가 줄었다가, 실효관세율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다시 커져 2022년 1분기에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바 있다. 이후의 대중 무역적자 감소는 관세 효과라기보다, 1장에서 본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경쟁’과 중국의 ‘쌍순환 전략’이 맞물린 결과였다. 미국 제조업이 충분한 생산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특정 국가에 장벽을 세우면, 수입은 다른 국가로 이전될 뿐이라는 점, 그리고 관세가 중간재 수입가격을 올려 수출에 타격을 줘 수입 감소를 상쇄한다는 점 역시 1기 무역전쟁의 교훈이었다. 미국이 제조업 무역 적자를 해소하려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2025년 9월까지 부과된 관세보다 최소 두 배 높은 관세율이 부과되어야 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미국이 기술적 우위를 지닌 첨단 산업을 제외한) 전통적 제조업 영역에서 미국의 비교우위가 여전히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무역적자가 감축될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이번 2기 관세는 1기와 달리 매우 광범위하므로, IMF는 적어도 내년까지는 무역적자 감소 추세가 지속하리라 전망한다. ④ 관세와 FDI 유치의 제조업 부흥 효과 관세로 제조업 고용을 늘리겠다는 목표 역시 실증적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2기 관세 이후 현재까지의 자료에 따르면, 관세에 민감한 제조업 부문의 고용은 전체 제조업 고용 감소 추세 속에서 소폭 줄었다. 1기 무역전쟁에 관한 다수의 연구도 관세가 제조업 고용을 늘리지 못했거나 감소시켰다는 일관된 결론을 내린다. 이는 상술했듯 미국 제조업의 비교우위가 없는 탓인데, 현재 시점에서 더 높은 관세를 통해 서비스업 일자리를 제조업으로 이전하는 데 드는 미국 소비자의 연간 비용은 20만 달러를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세를 지렛대로 대미 FDI를 유치해 제조업을 부흥시키겠다는 구상도 단기적으로는 투자 액수를 늘릴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불확실성과 동맹국과의 갈등을 키워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지적된다. (이는 3장 3절에서 다룬다) ⑤ 미국 연방정부 재정에 대한 효과: 조세정책으로서의 관세?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를 감세와 결합해, 장기적으로 소득세를 관세로 대체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올해 관세 수입은 전년보다 크게 늘었지만, 이미 예견됐듯 재정적자를 해소하거나 소득세 수입을 대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One Big Beautiful Bill Act, 이하 ‘OBBBA’)을 통해 대규모 감세를 단행했고, 이는 미국의 재정위기 가능성을 한층 더 높이고 있다. (이는 3장 2절에서 다룬다) ⑥ 미국 물가를 상승시키는 효과 미국의 물가 흐름은 세계 전반의 추세와 점차 괴리되고 있다. IMF는 세계 소비자물가상승률(헤드라인 인플레이션)이 2025년 4.2%, 2026년 3.7%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한다. 코로나19 이후 나타난 물가 상승 둔화 흐름이 세계적으로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며, 그 주요 요인으로는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의 하락이 꼽힌다. 문제는 관세를 대폭 인상한 미국이다. 관세 인상 이전에 나타났던 선제 수입·수출 확대와 재고 축적의 효과가 점차 소진되면서, 2025년 하반기부터 미국의 물가상승률이 다시 상승세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IMF는 2025년 미국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2.7%로 제시했는데, 이는 트럼프 당선 이전인 2024년 10월 당시 하락세를 반영해 제시됐던 1.9%에서 크게 상향 조정된 수치다. 이러한 전망은 미시적 자료 분석에서도 뒷받침된다. 올해 하버드경영대학원 가격연구소는 미국의 5대 소매업체 데이터를 활용해 ▲ 수입 상품, ▲ 관세의 영향을 받는 국내산 상품, ▲ 관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국내산 상품의 가격 변동을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트럼프 관세 부과 이후, 수입 상품과 관세의 영향을 받는 국내산 상품의 가격이 관세 영향이 없는 국내산 상품에 비해 빠르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관세가 수입 상품 가격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국내산 상품의 가격 상승으로까지 파급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산 제품도 관세가 부과된 국가로부터 수입한 원자재와 중간재에 의존하며, 관세로 인해 수입품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 수요가 국내산으로 이동하면서 가격이 동반 상승하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IMF의 미국경제 성장 전망과 물가 전망을 함께 보면, 2024년 10월과 비교해 트럼프 관세의 충격으로 2025년 성장률 전망은 하향 조정된 반면(아래 [그림]), 물가상승률 전망은 상향 조정됐다. 세계경제가 전반적으로 성장률은 하락하면서도 물가 상승 압력은 점차 약해지는 흐름을 보이는 것과 달리, 미국경제는 다시금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사진7%] [그림] 2024~2026년 세계 및 각국 경제성장률 전망 (%) 2025년 경제성장률 전망에서, 트럼프 당선 이전인 2024년 10월의 전망치와 관세정책을 발표한 2025년 4월의 전망치 간의 격차가 (물론 다른 요인도 있으나) 트럼프 관세정책의 충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전시경제와 제재로 예외적인 경우인 러시아와 반도체 수출 호황이 강한 대만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경제성장률 전망이 하락했으며, 특히 멕시코·베트남의 하락이 기록적이다. 도표의 ‘아세안 5’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을 뜻한다. (자료출처: IMF) ⑦ 세계 경제성장률에 대한 효과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의 가장 중요한 거시경제적 효과는 세계 경제성장률을 하락시키는 데 있다. IMF에 따르면 2025년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트럼프 당선 이전인 2024년 10월의 3.2%에서, 2025년 4월에는 2.8%로 0.4%p 하향 조정됐다. 이는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이 촉발할 무역전쟁이 각국의 실물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반영한 결과다(위 [그림]). 이후 대중 관세가 일부 유예되고 주요국 간 관세 협상이 진행되면서 2025년 10월 전망치는 다시 3.2%로 상향 조정됐으나, IMF는 이 회복이 올해 상반기에 나타난 선제 수입 효과에 상당 부분 기인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 효과를 제거하고자 하반기에 한정해 보면, 2025년 세계 경제성장률은 연율 기준 약 3.0%로 전망되며, 이는 2024년 하반기의 연율 기준 3.6% 성장에 비해 0.6%p 낮다. 문제는 이러한 충격이 단기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미국의 실질 관세율은 여전히 약 19%로 높은 수준이며, 무역정책 불확실성 또한 해소되지 않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제 수입 효과는 소멸하고, 기업은 점차 관세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게 되며, 무역의 우회 경로가 고착할 가능성이 크다. 세계경제 전반의 효율성이 저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IMF는 단기 지표만을 근거로 관세 충격이 제한적이라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중기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우려는 더욱 분명해진다. ‘탈세계화’가 본격화한 2022년을 기점으로 세계 경제성장률의 중기 평균은 뚜렷하게 하락하는 것으로 전망된다. 2027~2030년의 연평균 성장률은 3.2%로 예상되는데, 이는 팬데믹과 지정학적 충격, 보호무역 강화 이전의 중기 평균인 3.7%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다. IMF는 세계경제의 약 3분의 2에서 중기 성장 전망이 악화하고 있으며, 하락 폭은 특히 신흥시장과 중간소득국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지역별로 보면 아시아가 특히 취약하다. IMF는 무역과 FDI 재편 과정에서 글로벌 가치사슬에 깊이 통합되고, 최근 몇 년간 대미 수출이 확대된 아시아 지역이 무역정책 충격에 가장 민감한 곳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관세 인상과 무역정책 불확실성 확대를 반영해, 아시아 국가 대부분에서 2025년과 2026년 GDP 성장률 전망치는 2024년 10월 전망보다 하향 조정됐다. 실증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무역정책 불확실성이 1표준편차 증가할 경우, 단기적으로 아시아 지역의 투자는 약 1% 감소하며, 이 효과는 신흥시장 경제에서 약 두 배 크게 나타난다. ASEAN 국가들의 성장률도 2024년 4.8%에서 2025년 4.3%로 둔화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 수치조차도 관세 협상 타결을 반영해 상향 조정된 결과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대미 무역 의존도의 차이가 성장 전망의 희비를 가른다. 대미 수출 비중이 약 12%에 불과한 브라질은 미국의 관세 인상이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비교적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대미 수출 비중이 80%를 넘는 멕시코는 미국의 관세 부과로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고, 지속되는 무역 불확실성이 성장에 장기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은 교역량 변화에 그치지 않고, 중기적으로 세계경제의 성장 경로 자체를 하향 이동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특히 무역과 투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신흥시장과 중소국가일수록 충격은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4) 소결: 국제무역 분절화의 귀결 [%=사진8%] [그림] 저소득·중소득 국가의 고소득 국가와의 소득 수렴 속도와 국제무역 참여도의 상관관계 (자료출처: WTO)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화는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의 FDI 확대와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의 제조업 수출 확대를 핵심 동력으로 삼아, 저소득·중소득 국가의 빠른 성장을 이끌고 국가 간 소득 수렴과 불평등 완화에 기여해 왔다(위 [그림]). 국제상품무역의 중심도 고소득 국가 간 교역에서 선진국과 신흥시장 간 교역으로 이동했다. 물론 모든 개도국이 소득 수렴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실패한 사례는 대체로 국제무역 참여도가 낮거나, 참여하더라도 자원 수출에만 의존해 제조업 수출로 전환하지 못한 경우였다. 이러한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FDI 유치에도 실패했다. 이는 과거 사회진보연대가 지적해 온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질서로의 ‘포섭과 배제’라는 구조와 정확히 맞물린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이러한 세계화 질서는 구조적·정치적 요인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개도국, 특히 중국에서 자본축적 심화와 이윤율 하락으로 기존 성장모델의 한계가 드러난 가운데, 이에 대한 정치적 대응은 세계화의 조정이 아니라 왜곡된 방향으로 전개됐다. 중국과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들은 국가자본주의와 자립화·블록화를 추구했고, 선진국에서는 무역적자와 제조업 쇠퇴에 대한 불만을 토대로 상품시장 개방성 자체를 낮추려는 인민주의가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두 흐름은 상호 강화되며 2010년대 중반 이후 미중 간 무역비용 상승, 무역의 블록화, FDI의 블록 내부 집중(프렌드쇼어링)이라는 탈동조화 국면을 형성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두 블록 사이의 일부 신흥시장(베트남·멕시코 등)이 단기적 수혜를 얻기도 했으며, 미국 블록의 선진국(유럽·일본·한국·대만 등)도 중국의 빈자리를 대체해 수출을 늘렸다. 2025년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이러한 흐름은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국제무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는 추세가 확고해지며, 무역과 FDI가 동시에 위축되는 ‘탈세계화’ 국면으로의 진입이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FDI에 대해서는 3장 3절에서 다룬다) 미국은 전면적 관세와 리쇼어링 전략을 통해 제조업을 자국으로 되돌리려 하며, 중국은 국유자본에 기초한 자립화와 과잉생산을 통해 수출 공간을 유지하는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가치사슬은 효율성과 비용 측면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고 있으며, 그 결과 세계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전반적으로 약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 간 소득 수렴을 저해한다. 이러한 탈세계화의 비용은 모든 국가에 악영향을 주나, 가장 큰 피해는 국내 시장이 충분히 크지 않은 저소득국과 하위 중소득국에 집중될 전망이다. 인민주의적 관세로 인한 수출시장 축소와 리쇼어링·자립화로 인한 투자 위축은 이들 국가의 성장 경로를 제한한다. 한국경제와 같이 소규모이면서 글로벌 가치사슬에 고도로 통합된 경제도 충격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포즌의 표현대로, 현재 전개되고 있는 무역정책의 변화는 승자가 없는 ‘루즈(lose)–루즈(lose) 게임’의 성격을 띤다. 다만 그 가운데에서도 중국을 제외한 신흥국과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들이 ‘시진핑의 중국’과 ‘트럼프의 미국’이라는 두 문제적 대국의 사이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으며 상대적으로 더 큰 비용을 떠안고 있다. 이는 즉각적 피해만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게임의 규칙과 WTO 같은 심판이 사라지고 힘 싸움만이 지배하게 되면, 각국 경제와 인민이 생존을 위해 치러야 할 잠재적 비용은 엄청날 것이다. 이렇듯 ‘배제’의 영역을 확대하는 국제무역의 분절화와 탈세계화의 악효과는 국제무역에 그치지 않고 달러를 축으로 한 국제금융 질서와 각국의 금융 안정성으로 파급된다. 다음 장에서는 무역 분절화에 상응하는 국제금융 분절화의 경제적 효과를 살펴본다. 3. 국제금융의 분절화: 달러 체계의 위기와 금융 불안정성 확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형성된 질서에서, 선진국과 개도국 간 무역 확대는 두 가지 자본 이동 유형의 확대와 맞물려 전개됐다. 하나는 개도국의 무역흑자를 통해 축적된 달러가 다시 선진국 금융시장으로 환류되는 수출달러 환류였고, 다른 하나는 개도국에 대한 선진국의 대외직접투자(FDI) 확대였다. 이러한 무역과 금융의 결합은 달러를 중심으로 한 국제금융 체계를 지탱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작동해 왔다. [%=사진9%] [그림] 지정학적 거리별 대외 금융자산 배분의 세계 평균 대비 초과 비중 (%p) 간단히 말해, 수치가 0보다 크면 세계 평균보다 해당 집단으로부터 그만큼 더 많이 투자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표는 지정학적 거리에 따라 자본 흐름이 분절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정학적 거리’에 따른 세 범주는 UN에서의 투표 성향 등 외교정책을 기준으로 가까운 순서대로 1/3씩 나눈 것이다. (자료출처: CEPR) 그러나 러시아의 크림반도·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중 전략적 경쟁의 심화로 국제금융 흐름에서도 뚜렷한 균열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 장에서 살펴본, 국제무역이 탈동조화와 블록화를 거쳐 탈세계화 국면으로 심화되는 과정에서, 자본 이동 역시 점차 지정학적 요인을 따라 재편되었다. 유럽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분석에 따르면, 2017년 이후 국제 자본 흐름에서도 국가 간 정치적 관계에 따른 분절화가 점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아가 2025년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동맹국을 포함한 광범위한 교역 파트너 국가들에 관세를 부과하면서, 국제금융 분절화는 기존의 글로벌 북반구와 남반구 간, 혹은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 간의 긴장을 넘어 서방 내부의 금융 질서와 ‘달러 체제’ 자체로 이동하고 있다. CEPR은 트럼프 2기가 일으키는 이런 새로운 변화를 국제금융 질서에 대한 “더 근본적인 위협”으로 규정한다. 이 장에서는 국제금융의 분절화가 달러 체계에 어떤 구조적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그 결과 세계적으로 금융 불안정성이 어떻게 확대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1) 국제금융의 분절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정체 금융세계화의 지표로 국제금융 통합도가 있다. 이는 세계 GDP 대비 대외자산과 대외채무 합계의 비율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이 지표는 1990~2000년대 급격히 상승하며 금융세계화의 심화를 보여주었으나, 2010년대 들어서는 둔화·정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요컨대 국제무역과 같이 금융세계화의 속도도 현저히 낮아졌다. [%=사진10%] [그림] 국제금융 통합도: 세계 GDP 대비 세계 대외자산·부채 총합의 비율 (%) 왼쪽은 영국이나 역외 조세피난처 등 금융중심지를 ‘세계 나머지’에 넣지 않은 경우고, 오른쪽은 금융중심지를 ‘세계 나머지’에 넣은 경우다. 어떤 국가나 지역을 기준으로 그 내국인이 외국에 직접 투자하거나 외국 자산을 구입하면 대외자산이 증가하고, 반대로 외국인이 해당 국가나 지역에 투자하면 그곳의 대외부채가 증가한다. (자료출처: CEPR) 대외자산·부채의 분포는 무역과 달리 극도로 편중돼 있다. 2023년 기준 세계 대외자산과 채무의 약 65%는 미국과 미국에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국가들에 집중돼 있다. 반면 중국과 중국에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국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몇 년 사이 2~3% 수준으로 소폭 증가했을 뿐,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물론 국제금융에서는 역외 금융중심지를 매개로 한 자본 이동 규모가 커 이러한 수치를 그대로 해당 국가·지역에 귀속시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국제금융의 중심이 여전히 미국 블록이라는 점 자체는 분명하다. 아래 [그림]의 순대외투자 지위(NIIP)은 금융세계화 질서의 작동 방식과 그 변화를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사진11%] [그림] 5개 범주에 속한 국가들의 순대외투자 지위 (세계 GDP 대비 비율, %) 순대외투자 지위(NIIP, net international investment position)란, 한 국가의 모든 대외 금융자산과 채무의 차이를 나타내는 경제 지표다. 양수일 경우 자산이 채무보다 많은 순대외자산국 지위, 음수일 경우 채무가 자산보다 많은 순대외채무국 지위에 있다고 한다. (자료출처: CEPR) ① 2000년대: 수출달러 환류와 FDI·주식 투자의 순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따른 국제금융 흐름의 패턴을 보자. 2000년대 중국의 순대외자산(+) 규모가 커진다. 이 시기 중국을 필두로 한 신흥시장의 대외채무는 주로 FDI로 구성됐고, 대외자산은 외환보유고, 특히 미국 국채를 중심으로 축적됐다. 이는 FDI에 기초한 신흥국 수출 부문의 성장과, 그 결과로 발생한 수출달러의 환류가 결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상응해 같은 시기 미국은 순대외채무국(-)이었으며, 2010년까지 순대외채무의 규모는 비교적 완만하게 확대됐다. 이는 1장에서 설명했듯 미국의 대외부채가 주로 국채로 구성된 반면, 대외자산은 FDI·주식의 고수익 자산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익률 격차 덕분에 미국은 막대한 자본유입에도 불구하고 순대외채무가 급격히 증가하지 않는 ‘특권적 이익’을 누렸다. 2000년대에는 미국뿐 아니라 미국 블록에 속한 선진국도 순대외채무국(-) 지위에 있었다. 이는 달러체제의 확장 속에서 미국 블록 전체가 세계의 저축을 흡수하는 금융 중심지 역할을 수행한 결과다. 글로벌 저축은 미국 국채 외에도 유럽·영국·일본 등 미국 블록의 금융시장 전반으로 분산 유입됐다. 동시에 이들 국가 역시 저성장에 직면하여 신흥시장 대상 대외자산을 증가시켰다. ② 2010년대: 중국·러시아 측면에서의 변화 2010년대에 들어, 위의 [그림]에서 보듯 중국의 순대외자산(+) 지위는 유지됐지만 대외채무와 자산의 구성은 뚜렷하게 변화했다. 먼저 채무 측면을 보면, 미국과 선진국으로부터 유입되던 직접투자(FDI)가 점차 감소했다. 이는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성장 둔화, 국가자본주의적 전략과 국유 부문의 비중 확대, 미·중 전략적 경쟁의 심화에 따른 투자 환경 악화를 반영했다. 자산 측면에서는 중국의 외환 보유에서 미국 국채가 정점을 찍은 후 감소하는 대신, 중국 블록의 신흥시장·개도국을 대상으로 한 은행대출과 FDI가 빠르게 확대됐다. 이는 이른바 ‘일대일로’ 사업을 매개로 한 중국의 자본 수출 확대와 직결돼 있다. (아래 [그림]을 참고하라) [%=사진12%] [그림] 2017-2023년 중국의 대상국별 순대외자산 증감(위)과 2023년 중국의 대외자산·부채(아래) (10억 달러) 2017~23년 동안 중국은 신흥시장·개도국에 대한 순자산이 증가했으며, 역외 금융중심지 및 식별 불가의 경로를 통한 순자산 증가도 확인된다. 2023년 기준, 중국의 외환 보유는 미국·유럽·식별 불가에 편중되어 있는데, 외환 보유를 제외하면 중국의 대외자산 보유 대상에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케이맨 제도와 홍콩·마카오 같은 역외 금융중심지와 ‘식별 불가’의 비중이 크다. 대외자산 구성에서 세 범주 대상 FDI와 기타 투자(대출)의 크기가 상당함에 주목할 수 있다. 한편, 2023년 기준 중국의 대외부채는 여전히 대부분 FDI로 구성되어 있고, 이 또한 대부분 역외 금융중심지를 거친다. 수출달러 환류의 핵심인 중국의 미 국채 보유를 구체적으로 보자. 세계 금융위기 당시 미국 국채는 세계의 안전자산 기능을 했고, 신규 발행 물량의 약 절반이 해외로 판매됐으며, 이 가운데 약 3분의 1을 중국이 흡수했다. 그러나 중국은 2015년 대규모 자본유출 사태와 미중 무역 전쟁, 금융·기술 제재를 거치며 달러 자산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전략을 추진했다. 그 결과 중국의 미 국채 보유액은 2013년 11월 1조 3200억 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지속적으로 감소해, 2025년 7월에는 7307억 달러로 약 45% 급감했다. (작년 경제전망에 관련 그래프가 제시되어 있다. 임지섭,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2024년 겨울호) 한편, 중국 블록 국가들도 2010년대에 순대외자산(+) 지위로 이동하는데(앞의 순대외투자 지위 [그림]), 러시아는 이런 변화의 극단적 사례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서방의 금융제재를 받은 러시아는 서방 금융시장으로부터 차츰 이탈했고,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사실상 서방 금융 체계에서 거의 완전히 배제됐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대외자산 구성을 급격히 재편했으며, 외환보유고와 자산을 비서방 통화와 실물자산 중심으로 이동시켰다. 동시에 대외채무 측면에서 FDI 유입이 급감했다. 그 결과 러시아가 순대외자산국이 된 것이다. 이는 국제금융 분절화가 지정학적 충격으로 급격히 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10년대 중국의 대외금융 전략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신흥시장과 개발도상국에 대한 투자 방식이다. 중국은 FDI보다 은행대출을 선호하며, 특히 국유 금융기관을 통한 공공보증 대출이 핵심 수단으로 활용된다. (위 [그림]에서도 대외자산에서 ‘기타 투자’의 크기가 상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전모가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대출 관행에 대한 최근 조사에 따르면, 중국 국유기관이 신흥시장·개도국에 제공한 공공보증 대출의 거의 절반이 사실상 담보화돼 있으며, 그 규모는 57개국에 걸쳐 약 4200억 달러에 이른다. 담보는 현금화가 불확실한 인프라 프로젝트 자산보다는, 중국 내 은행 계좌에 예치된 현금이나 기존 원자재 수출에서 발생하는 외화 수익처럼 유동성이 높고 중국 당국이 통제하기 쉬운 자산에 설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체적으로 신흥시장·개도국 정부와 국영기업은 원자재 수출로 발생한 외화를 중국 대출기관이 통제하는 계좌를 통해 처리해야 하며, 이 계좌에 적립되는 현금 규모는 저소득 원자재 수출국의 경우 전체 공공보증 외채 상환액의 평균 20%를 초과한다. 이는 중국이 채무 불이행 위험을 회피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지만, 해당 국가들의 외화 유동성을 제약하고 중국 블록 내부 신흥국 경제에 상당한 압박을 가한다. 요컨대 2010년대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중국 블록의 국제금융 전략은, 달러 체계로부터의 점진적 이탈과 역내·개도국을 향한 자본 재배치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순대외자산 지위를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 과정에서 중국 블록 내부의 금융 불균형과 신흥국에 대한 압박을 심화시키며, 국제금융의 분절화를 한층 더 공고히 하고 있다. ③ 2010~2024년: 미국 및 선진국에서의 변화 아래 [그림] 상단에서 보듯, 2010년대에 들어 미국의 순대외채무(-)의 증가 속도가 빨라질뿐더러, 그 구성도 변화했다. 첫째, 채권 부문의 순대외채무 규모가 정체하거나 심지어 감소했다. 둘째, 2018년을 기점으로 FDI가, 2020년을 기점으로 주식 부문까지 순대외자산(+)에서 순대외채무(-)로 전환됐다.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기의 전형적인 구조, 즉 ‘나머지 세계가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이를 기반으로 미국은 대외 투자를 확대한다’는 패턴이 약해졌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미국은 이제 신흥시장의 수출 기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자본을 잘 공급하지 않으며, [그림] 하단에서 보듯 오히려 미국 외 국가들, 특히 미국 블록의 선진국이 대미 FDI와 미국 주식 투자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자본 흐름이 변했다. [%=사진13%] [그림] 위: 미국 순대외자산(채무)의 항목별 추이 (%, 미국 GDP 대비 비중) 아래: 2017과 2023년 미국의 대상국별 순대외자산 지위 (10억 달러) 서론에서 설명한 ‘특권적 이익’ 덕에 2010년대 중반까지 느리게 증가하던 순대외채무는, 2010년대 말부터 매우 빠르게 증가한다. 2003년 이래 약 10여년 간 FDI·주식 투자에서 미국은 순대외자산국(+)이었으나, 2010년대 중반부터 순대외채무국(-)으로 전환했다. 한편, 채권에서 미국은 줄곧 순대외채무국(-)이었는데, 2000년대에는 그 규모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확대된 반면, 2010년대부터 둔화·정체하고 있다. 요컨대, 수출달러 환류와 미국의 대외투자 간의 순환이 2010년대 중반부터 약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래의 그림은 이러한 전환이 시작된 이후, 미국의 순대외채무 증가를 책임진 것은 주로 아시아 선진국, 유로존, 기타 유럽 선진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자료출처: CEPR) 요컨대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한편으로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통해 미국이 누려왔던 ‘특권적 이익’이 약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대외채무 증가 속도를 고수익 대외자산으로 상쇄해 왔던 구조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는 미국 외 신흥국과 한국 등 후발 선진국들이 더 이상 충분한 자본 유입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반대로 자본이 미국으로 회귀 내지는 도피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즉, 단순히 미국경제만의 쇠퇴가 아닌 세계경제 전반의 쇠퇴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마치 한국의 부동산 경기가 전반적으로 침체하면, 지방 부동산 가격은 하락하나 되려 서울 강남으로 쏠림이 심해지며 여기서는 가격이 폭등하듯 말이다) [그림] 하단에서 2017~2023년 사이 미국의 순대외투자 지위 변화를 대상별로 살펴보면, 중국에 대한 순대외채무(-)는 소폭 증가하는 데 그친 반면, 유럽과 아시아의 선진국을 대상으로 한 순대외채무(-)는 매우 급격히 확대됐다. 앞 절에서 서술했듯, 중국 블록이 달러 자산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음에도, 미국 블록의 선진국이 미 국채와 금융자산의 가치를 지지해 왔음을 의미한다. 한편, 미국 블록 내부에서도 재편이 진행됐다. 2010년대 미국 블록의 선진국들은 순대외자산국으로 전환했다(앞의 순대외투자 지위 [그림]). 가령 유럽은 2017~2023년 사이 중국에 대해서는 순대외채무(-) 규모가 커진 한편, 미국과 유럽의 신흥시장, 중국 블록을 제외한 일부 신흥시장(대표적으로 베트남과 멕시코)에 대해서는 순대외자산(+)을 확대해 왔다. (그래프는 생락) 바로 이러한 자본 흐름의 재편 위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이들 전반에 관세를 부과하고, 관세 협상 과정에서 미국 블록 국가들에게 대미 투자 확대를 요구한 것이다. 요컨대 2010년대 중반부터의 국제금융의 분절화는 중국과 러시아가 이탈함에도 미국 블록이 미국을 지지하는 형국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질서에서 전형적이었던 자본 흐름 패턴이 변했다. 그런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은 미중 블록 간의 분절화를 넘어, 미국 블록 내부의 자본 흐름을 재조정하려는 시도로 나가고 있다. 다음 절부터 트럼프가 가하는 위협이 미 국채, FDI, 주식이라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어떻게 금융 불안정성을 심화하는지 살펴본다. 2) 미 국채: 달러체제(dollar regime)의 위기? 상술했듯 2010년대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달러 자산으로부터의 이탈, 수출달러 환류 기반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팬데믹 전까지 미 국채 금리는 낮은 수준에서 유지됐다. 이는 여러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였다. 연준의 대규모 양적 완화(그럼에도 물가가 급등하지 않는 상황), 세계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안전자산 선호 성향, 그리고 세계적으로 대체 투자자산의 기대수익률이 낮았던 환경 덕분에 미 국채를 향한 수요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블록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미 국채 수요국인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이 그 공백을 보완하며 달러체제를 지지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계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진입했고, 이에 대응한 대규모 재정지출은 미국의 부채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다. 동시에 글로벌 공급망 붕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무역 블록화에 따른 비용 상승, 그리고 신흥국 수출 부문의 동력 약화가 겹치며 물가 상승이 급격했다. 여기에 더해 AI 산업이 출현하며 미국 주식시장을 중심으로 글로벌 자산 수익률이 상승하면서, 국채의 매력은 약해졌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되며, 앞 절에서 봤듯 2020년대 들어 미국 순대외자산 구성에서 채권 부문의 순대외채무 규모가 정체·축소되고, 미국을 비롯한 주요 통화국의 장기 국채 금리가 급등한 것이다. (코로나 위기 후 주요국 장기 국채 금리 급등에 관해서는 작년 경제전망에 그래프가 제시되어 있다. 임지섭,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2024년 겨울호) 문제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이 이러한 추세를 명백히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포즌, 옵스펠트, 로고프 등 주요 경제학자들이 최근 들어 ‘달러체제의 위기’을 거론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첫째,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관세와 감세의 결합’은 연방정부의 재정수입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며 재정적자 확대를 가속화하고 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OBBBA로 인해 향후 10년간 미국은 기존 전망치보다 약 4조 달러를 추가 차입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공언한 재정적자 감축이 실제로 이행되고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옵스펠트는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공적개발원조(ODA)는 축소한 반면, 최근 아르헨티나에 (연준이 아닌) 재무부를 통해 200억 달러 규모의 스왑을 제공한 사례를 들며, 행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재정을 자의적으로 운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둘째, 2장에서 설명했듯 관세 정책 탓에 미국경제가 성장률 둔화와 인플레이션 상승을 동시에 겪을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면서, 장기 국채 금리에 추가적인 상승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완화, 즉 금리 인하 기대와 무관하게 채권 금리가 상승하는 최근의 세계적 현상과도 맞물리지만, [그림]에서 보듯 관세 발표 후 미국에서 그런 현상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사진14%] [그림] 2024년 1월부터 달러지수 및 미국과 G10의 장기채 명목금리 격차 달러는 안전자산으로 인정받는다. 2007~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 국채 금리가 하락함에도 달러 가치는 상승할 정도로 그 지위는 공고했다. 그러나 코로나 위기 이후 스태그플레이션과 재정위기 심화 우려에 국채 금리 상승과 동시에 달러 가치 하락이 동시에 일어난 적이 있었다. 올해 4월 2일 트럼프 관세 발표 이후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데, 코로나 위기 때와 다른 점은 미국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미 국채 금리가 다른 선진국의 그것보다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달러 가치가 하락한다는 것은, 달러의 안전자산 지위가 의심받는다는 뜻이다. (자료출처: IMF) 셋째, 더 근본적인 문제는 미 국채를 둘러싼 제도적 안정성 자체가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이미 이탈한 중국 블록이 아닌,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과 민간 보유자의 신뢰 상실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초기 제기됐던 이른바 ‘마러라고 협상’ 구상은 실현되진 않았으나, 강한 신호를 준 상징적 사례로 꼽힌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가 보유한 미 국채를 장기채나 영구채로 강제 전환하거나, 달러 외 통화를 사용하는 국가를 처벌하고, 외국인 투자자에게 차별적 과세를 부과하는 방안 등을 포함해, 사실상 국채 투자자를 미국에 ‘가두겠다는’ 위협으로 해석됐다. 이런 위협보다 현실적으로는 의도적인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 연준의 독립성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과 달러 가치를 낮추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발언은 제도적 신뢰를 훼손하고 있다. 이런 우려는 최근 케빈 해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차기 연준 의장으로 유력해지며 더 커지고 있다. 한편, 최근 통과된 이른바 ‘지니어스 법’(Genius Act)은 느슨한 규제 아래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의 대규모 확산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논란을 낳고 있다. 이는 글로벌 투기 수요나 일부 국가의 통화 대체 수요를 통해 미국 국채 수요를 떠받치려는 구상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오히려 달러 자산의 안정성을 훼손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포즌은 올해 트럼프 행정부가 경제 변동성을 키우는 정책 변화를 기습적으로 발표할 때마다, 실제로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미국 장기 국채 금리가 상승하는 현상이 반복됐다고 지적한다. 과거에는 관세 부과가 달러 강세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고 트럼프 1기 때도 그러했으나, 2025년에는 관세를 발표할수록 달러가 오히려 약세를 보이는 모습이 관측되고 있다. 이는 미국 정책의 불안정성에 대한 전 세계적 우려가 전통적인 안전자산 선호 경향을 압도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위 [그림]에서 보듯 달러는 올해 들어 주요 통화 대비 약 10% 절하됐다. 미국–G10 금리차가 여전히 큰 상황에서도 나타난 이례적인 현상이다. 요컨대, 최근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장기 국채 금리 상승과 달러 약세가 함께 나타나는 현상은 단순한 경기 순환이나 통화정책 변화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무엇보다 미국 정책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훼손된 결과로, 달러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당장 달러 체제가 붕괴하진 않을 것이나, 코로나 위기 이후 특히 트럼프 2기를 기점으로 불안정성이 심화하는 중이며, 내년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에 따라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달러는 다른 통화로 대체될 수 있는가? 달러의 대체 가능성을 논할 때, 미국과 동맹국 간 관계 변화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즌은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을 상대로 취해온 적대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태도와, 미국이 주도해 온 동맹 체제가 제공하던 안보 효과가 약화되면서 각국 정부가 방위비 지출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변화는 일부 동맹국 통화의 상대적 매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다만 이는 달러가 해당 통화들로 직접 대체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달러에 대한 의존이 완만하게 분산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달러의 대체 가능성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세계 외환보유고의 구성을 보자. 달러의 비중은 2000년 무렵 약 70%에서 최근 약 58% 수준으로 낮아졌다. 그러나 이 감소분이 유로의 비중 증가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유로는 지난 20여 년간 약 20% 내외의 비중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해 왔다. 대신 비중이 가장 뚜렷하게 증가한 것은 이른바 ‘비전통적’ 준비통화들이다. 뉴질랜드 달러, 싱가포르 달러 등 소규모 선진국 통화들의 합산 비중은 약 10%에서 20%로 확대됐다. 반면 위안화의 비중은 글로벌 외환보유액의 약 2%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지난 5년간에도 큰 변화가 없다. 또 하나 주목할 요소는 금이다. 현재 공식 준비자산의 약 20%가 금으로 보유되고 있으며, 이는 달러 비중이 준비자산 전체의 절반 이하, 유로는 약 16~17% 수준이라는 의미다.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은 최근 몇 년간 크게 늘어났다. 이는 장기적으로 달러의 중심성이 점진적으로 약화될 가능성에 대비하는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로의 경우, 한편으로는 통화의 국제적 역할을 확대할 수 있는 조건들이 일부 형성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방위비 부담을 동맹국에 전가하는 과정에서, 북유럽·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국채 발행을 통한 방위비 지출이 늘어나며 EU 국채 시장의 규모와 깊이가 확대되고 있다. 또한 유로는 우크라이나, 발칸 국가들, 중동과 북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에 법적 안정성과 제도적 예측 가능성 측면에서 매력적인 통화로 인식되고 있다. EU는 일단 결정을 내리면 이를 쉽게 번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신뢰를 준다. 그러나 유로화의 경제적 매력도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유럽 경제의 성장 흐름은 최근까지도 전반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2장에서 봤듯 트럼프 2기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동시에 압박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자본시장 통합에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지정학적 측면에서도 유럽연합은 여전히 미국의 안보 보장에 크게 의존하며, 완전한 전략적 자율성을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럽의 방위비 확대가 실제 군사 역량 강화로 이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최근 재정적자를 둘러싼 EU 주요 회원국들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재정 안정성에 대한 우려 역시 적지 않다. (군비와 재정을 둘러싼 유럽의 위기에 관해서는 이번 호 김영진의 「정치와 질서가 해체되어 가는 세계」를 보라) 위안화는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낮은데, 이는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적 정책 방향과 깊이 연관된다. 중국은 2015년 대규모 자본유출 사태 이후 환율 제도의 유연성을 일부 확대했으나, 여전히 수출을 위해 위안화 가치를 낮게 통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동시에 선진국은 물론 저소득·중소득국과도 수출 경쟁을 벌이며, 저숙련 제조업 분야에서도 신흥국의 수출 확대를 제한하려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자본통제와 금융시장 발전의 제약, 그리고 GDP 대비 300%에 이르는 높은 부채 수준은 위안화의 국제화를 제약한다. 법치, 금융시장의 깊이와 유동성, 가격 형성의 자율성 측면에서 중국은 여전히 미국이나 유럽에 크게 뒤쳐진다. 종합하면, 현재로서는 달러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는 단일한 세계화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이나 중국이 미국보다 먼저 재정·금융 불안정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달러 가치를 낮추거나 미 국채의 사용을 유지·확대하는 다양한 시도를 할 경우, 단기적으로는 일정한 효과를 거둘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안전자산으로서 달러의 신뢰를 훼손하고, 국제금융 체계의 안정성을 약화할 위험을 내포한 도박에 가깝다. 포즌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 (세계에 공급한 글로벌 공공재의) 체제에 가한 변화 중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달러의 유동성을 약화한 것이다. 이는 전 세계 저축자의 포트폴리오 안전성을 떨어뜨린다. 과거에는 거의 무위험으로 여겨지던 미국 자산이 이제는 완전히 안전하다고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전 세계 자본의 가용성과 흐름에 장기적·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3) FDI: 대미 투자 확대의 성격과 트럼프 2기 FDI 유치의 한계 미중 ‘전략적 경쟁’으로 2010년대 후반부터 세계 FDI는 이미 분절화되기 시작했다. 연구들에 따르면 이 과정은 이념적으로 먼 국가(가령 중국과 러시아)로부터의 이탈, 정치적으로 정렬된 국가 중심의 투자(프렌드쇼어링), 고위험 국가에 대한 노출 축소(디리스킹), 생산의 인근 이전(니어쇼어링), 그리고 일부 본국 회귀(리쇼어링)라는 다섯 가지 방향으로 진행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미 FDI는 트럼프 2기 이전부터 이미 확대되고 있었다. 2020년대 들어 세계 전체 FDI가 감소 추세에 접어든 가운데,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크게 상승했다. 이 시기 대미 FDI 증가는 전기차·배터리·재생에너지·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의 대형 프로젝트가 주도했다. 이는 미국의 기술적 우위와 인재·벤처 생태계,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 시기의 IRA·CHIPS법과 같은 산업정책에 따른 유인 효과로 설명된다. 다시 말해 대미 FDI 확대는 관세 압박의 결과라기보다, 투자수익률과 제도적 안정성에 기초한 현상이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등에서 국내 투자수익률이 대외 투자수익률을 하회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신자유주의 시기 FDI 대상이었던 중국에서는 수익성이 악화되는 가운데 국가자본주의 강화로 제도적 불확실성이 커졌다. 이 두 요인이 결합하며 글로벌 기업의 투자 방향은 점차 중국을 벗어나 미국과 일부 신흥국으로 이동했다. 실제로 중국이 받는 FDI는 2022년 이후 급격히 둔화됐다. [%=사진15%] [그림] 중국과 중국 외 신흥시장의 자본유입(위) 동남아 5개국의 FDI 유치(아래) 왼쪽: 중국과 신흥시장의 명목 GDP 대비 FDI, 채권·주식 투자, 기타 투자 유입액 비중 (%, 분기 단위, 4개 분기 이동평균) 오른쪽: 동남아 5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태국·베트남)의 FDI 유치 발표 건수 (건수, 분기 단위) (자료출처: 브루킹스연구소, IMF)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관세 협상을 통해 대미 FDI를 ‘강요’하는 방식은, 전략적 경쟁 속에서 이미 진행 중이던 FDI 재편 흐름을 오히려 교란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는 12조 달러 규모의 신규 FDI 유치를 공언했고, 벌써 9조 6천억 달러를 달성했다고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는 민간 기업의 자발적 투자 계획까지 포함한 수치이며, 12조 달러 목표는 과거 실적을 크게 상회하는 매우 비현실적인 규모다. 특히 관세 압박으로 끌어낸 투자 약속은 자원 배분과 수익성에 대한 구체 계획이 불분명해, 대규모의 비효율로 이어질 가능성이 지적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접근이 장기적으로 대미 FDI의 제도적 유인을 약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투자된 기업이 처할 수입 관세의 불확실성, 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과세 가능성(다만 OBBBA 국세법 899조 신설안은 철회되었다), 반이민 기조와 비자 정책의 경직성 등이 법인세 감면 효과를 상쇄하리라 전망된다. 포즌은 이런 환경이 지속되면 단기적으로는 압박을 통해 FDI 유입을 늘릴 수 있을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대미 투자를 위축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아울러 트럼프 2기 정책은 신흥국으로 향하던 FDI 흐름을 추가로 위축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는 중국·러시아에서 이탈한 FDI가 동남아나 멕시코 등 일부 신흥국으로 재배치될 경로가 열려 있었으나,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오직 미국으로의 대규모 투자만을 요구한다. 이는 선진국의 부담을 가중하는 동시에, 신흥국의 성장과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 공급을 축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공백을 중국의 국유 금융이 채우면서, 신흥시장·개도국이 중국에 대한 금융적 의존을 더 키우는 역설적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즉 ‘전략적 경쟁’의 구도를 스스로 약화하는 효과가 있다. 4) 위험자산 쏠림과 금융 불안정성의 확대 국제금융 분절화가 심화하면서 세계의 저축을 안정적으로 흡수하던 안전자산의 지반이 점차 흔들리고 있다. 그 결과 비달러 통화, 금, 그리고 최근에는 암호화폐와 같은 대체 자산의 가격이 급등했다. 그러나 이들 자산은 유동성이 낮아 가격 상승이 곧바로 높은 변동성과 주기적인 금융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글로벌 자금은 위험자산 중 상대적으로 시장이 깊고 유동성이 높은 미국 금융시장, 특히 주식시장으로 집중되고 있다. 비미국 투자자의 미국 증권 보유액은 2015년 16조 달러에서 2024년 31조 달러로 거의 두 배 증가했으며, 최근에는 달러 약세에도 불구하고 위험자산 가격이 동반 상승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무역 긴장, 지정학적 불확실성, 재정적자 확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음에도 금리가 낮아지며 금융 여건은 완화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자산 가격은 다시 높은 평가 수준(valuation)으로 복귀했다. [%=사진16%] [그림] 2025년 각국 주식시장의 시가총액 지수(왼쪽) 미국 S&P500 전체 기업과 기술 기업의 주가수익비율 및 집중 위험도(오른쪽) 주식시장의 집중 위험도(concentration risk)는 허핀달-허쉬만 지수(Herfindahl-Hirschman Index)를 이용하여 구한 것인데, 이는 주식시장의 시가총액 기준 상위 기업들이 전체 시가총액에서 점하는 비율을 기반으로 지수화한 것이다. (자료출처: IMF) 미국 주식시장 내부에서도 극단적 쏠림이 나타난다. 최근 주가 상승은 광범위한 분야의 기업 실적 개선보다는 AI 관련 초대형 기술주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른바 ‘매그니피센트 7’(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아마존, 엔비디아, 테슬라, 메타)이 S&P 500 전체 시가총액의 35% 이상을 차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IMF 금융안정보고서의 평가 수준 지표들은 위험자산 가격이 펀더멘털을 상당히 상회하고 있음을 시사하며, 부정적 충격이 발생했을 때 급격한 가격 조정의 가능성이 높아짐을 보여준다. 실물 투자 역시 이러한 불균형을 반영한다. 미국의 기업 설비투자는 올해 견조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나, 증가분 대부분은 AI 관련 부문에 집중되어 있다. 즉 현재의 투자 확대는 특정 기술과 산업에 대한 기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문제는 AI 산업이 아직 본격적인 이윤 창출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가운데 대규모 자본투자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재 상황을 단순히 ‘AI 버블’로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안전자산 부족과 자본의 편중, 그리고 위험자산 평가 수준의 급등이 결합하며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이 누적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국제금융 분절화와 달러 체제의 불안정성이 금융시장 전반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 5) 소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거치며 세계화폐로서 달러의 가치는 국제무역·국제금융의 순환 구조 속에서 지탱되어 왔다. 신흥시장의 수출 성장에 기반한 수출달러 환류와 선진국의 대외투자가 다시 달러와 미국 국채의 가치를 지지하며, 낮은 금리와 높은 대외투자 수익률의 결합이라는 이른바 ‘특권적 이익’을 재생산했다. 이러한 순환은 미국과 선진국, 그리고 일부 신흥시장 모두의 성장에 기여했다. 그러나 지정학적 갈등의 심화와 중국·러시아의 전략 변화, 여기에 미국의 정책 기조 변화가 맞물리며 이 순환은 더 이상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고 있다. 첫째, 신흥시장의 수출 성장은 둔화되고, 과잉경쟁이 심화되며, 성장의 동력이 약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둘째, 수출달러 환류의 기반 역시 약화되었고, 특히 중국 블록의 이탈과 더불어 환류 흐름이 점차 블록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셋째, 신흥시장과 미국 간의 수익률 격차가 축소되거나 일부에서는 역전되면서, 신흥시장으로의 직접투자 유인이 약해지고 있다. 넷째, FDI는 점차 블록 내부로 집중되어 왔다. 나아가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들어서는 미국으로의 일방적 집중이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국제금융 거래의 세계적 범위는 점차 축소되었다. 그 결과 미국 국채의 안전자산 지위는 약화한 반면, 미국 주식시장으로 전 세계 자본이 쏠리는 불균형한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달러를 대체할 명확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가 새로운 안정적 질서로의 이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계경제가 오랫동안 의존한 안전자산 공급의 구조 자체가 점차 취약해지고 있을 뿐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와 감세의 결합’, 나아가 자본시장의 제도적 안정성을 훼손할 수 있는 여러 시도는 이러한 취약화를 가속하며 제2차 세계전쟁 이후 형성된 국제금융 체계를 흔들고 있다. 무역·금융세계화를 통해 확장된 지반 위에서 유지되어 온 달러의 가치는, 이미 그에 상응해 미국의 재정적자가 크게 확대된 상황에서, 국제무역·금융을 제약하며 그 지반을 미국 내부로 축소하면 유지될 수 없다. 대안을 동반하지 않은 채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길이라는 점에서, 트럼프식 정책 전환은 세계경제 전반에 상당한 위협을 가한다. 4. 한국경제: 성장이 멈춘 가운데 재정적자와 금융 불안정성이 급격히 확대 국제무역과 금융의 상황이 이렇다보니,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경제는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받고 있다. 먼저 한국은행·KDI 등의 경제전망을 토대로 1)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 후, 2) 무역 전쟁의 효과, 3) 재정적자 확대, 4) 금융 불안정성 확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전체 그림: 양극화의 심화 대다수 기관은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2024년 2.0%에서 올해 0.9%로 급락한 뒤, 2026년에는 잠재성장률과 같은 1.8%로 반등할 것으로 전망했다. 올해 3분기 반도체 수출 호조로 성장률이 예상보다 개선되면서, 11월에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0%로 0.1%p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회복 전망의 배경으로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거론된다. 첫째, 수출의 선방이다. 관세 부과 전 ‘선제 수입’의 효과로 자동차 수출이 예상과 달리 증가했고, 더 중요한 요인으로는 미국의 AI 설비투자 확대에 따른 반도체 수출 급증이 있다. 둘째, 대미 관세협상이 타결되면서 성장률에 예상됐던 부정적 충격이 일정 부분 완화됐다는 점이다. 트럼프 관세 부과로 수출 둔화는 불가피하지만, 타결 이전 전망에 비해 낙폭은 다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 내수의 완만한 회복이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급격히 위축됐던 민간소비가 점차 회복됐으며, 이재명 정부의 소비쿠폰 지급은 회복세를 더 가속했다. 건설업은 여전히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으나 느린 속도로 회복하고 있으며, 내년 정부의 SOC 투자 예산이 크게 늘며 회복세가 한층 빨라질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회복 신호가 한국경제 전반의 여건이 개선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수출 부문 내부의 양극화가 빠르게 심화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수출 회복 국면에서 수출 부문 내 양극화는 더욱 뚜렷해졌다. 수출액에서 상위 10대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2분기 31.1%에서 2025년 3분기 40.0%까지 상승했다. 특히 최근 1년 사이 급격한 집중이 나타났다. 최근 수출 호조는 반도체와 조선 등 특정 산업과 일부 대기업에 집중돼 있으며, 관세 충격으로 전체 수출 증가율이 둔화하는 가운데 다수 산업은 오히려 타격을 받고 있다. 반도체 수출 호조는 세계 AI 투자 확대라는 외생적 요인에 크게 의존한 것으로, 한국경제 전반의 투자·생산성 회복을 견인하는 내생적 동력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도체 부문을 제외한 대부분 산업에서는 설비투자도 정체 상태에 머물고 있다. [%=사진17%] [그림]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대기업/중소기업 생산지수 증감율 (위)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세부 업종별 생산지수 증감율 (아래) 제조업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성장률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2025년 3분기 제조업의 생산 확대는 반도체 수출 호황에 의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서비스업에서는 25년 3분기 중소기업의 생산이 확대되고 있는데, 이를 이끄는 업종은 도소매 및 숙박·음식업으로, 이재명 정부의 소비쿠폰 발행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자료출처: 중소벤처기업연구원, KDI) 둘째, 제조업을 중심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성장률 격차도 구조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중소 제조업의 성장률은 대기업을 따라가지 못한 채 낮은 수준에 머문다. 올해 9월 이후 수출 개선 덕분에 일부 중소 제조기업의 성장률이 간신히 플러스로 전환됐지만, 그 이전까지는 생산 규모 자체가 축소되는 흐름이었다. 앞서 언급한 수출 부문의 양극화를 감안하면, 일부 기업을 제외한 중소 제조기업의 업황은 여전히 부진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관세 충격 역시 중소기업에 더 크게 작용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중소 제조기업의 부문별 경기전망지수(SBHI)도 대부분 부문에서 올해 중반 이후 큰 폭의 하락이 나타났다. 셋째, 수출 둔화 속에서 내수의 성장 기여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현상을 긍정적으로만 해석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내수 의존도가 높은 서비스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성장률 격차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지만, 민간소비가 회복되더라도 성장률 자체는 수출 제조업에 비해 구조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소비쿠폰 지급 이후 서비스업 중에서도 특히 소상공인과 전통시장 부문의 기업경기실사지수(BSI)가 급등했는데, 이는 고질적인 저생산성 구조의 서비스업이 정부 재정지출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또한 양극화의 한 단면이다. [%=사진18%] [그림] 경제성장률에 대한 지출 부문별(왼쪽) 및 내수·수출(오른쪽)의 성장 기여도 (자료출처: 한국은행) 수요 측면에서 성장률 전망을 분해해 보면, 재화수출과 설비투자의 기여도는 하락하는 반면, 민간소비의 기여도는 상승하고 건설투자는 음의 기여에서 소폭의 양의 기여로 전환될 전망이다. 이 가운데 민간소비와 건설투자 요인은 정부 재정지출의 영향이 크다. 민간에서는 수출 제조업에서 일부 대기업만 호황을 누리고 중소기업은 약화되는 반면, 설비투자는 전반적으로 부진하다. 서비스업은 계속 성장하지만 이는 저임금·저생산성 부문이 중심이다. 정부 지출이 떠받치는 건설업이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는 정도다. 결국 일부 수출 대기업만 성장하고, 그 외 다수 부문은 정체 또는 후퇴하는 가운데 저임금 서비스업만 확대되는 구조가 고착화하며, 정부 재정에 대한 성장의 의존이 심해지고 있다. 정부 재정지출은 단기적으로 경기 하방을 완충하는 역할을 하지만, 민간 투자와 생산성 개선이 아니라 재정지출에 점점 더 의존하여 성장하는 것은 중장기적 취약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성장 구조에 상응하여 고용 전망도 양극화의 심화를 보여준다. 건설업과 제조업 고용은 건설경기 회복 지연과 미국 관세 영향으로 예상보다 부진한 반면, 서비스업 고용은 정부의 일자리 정책과 소비 개선 효과로 증가폭이 소폭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KDI는 내수 회복에 따라 고용 여건이 완만히 개선되겠지만 인구 구조 변화로 내년 취업자 수 증가는 올해 17만 명보다 줄어든 15만 명 수준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이런 고용 증가의 상당 부분은 몇몇 수출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 저임금 서비스업 일자리에 집중될 전망이다. 결국 고용 측면에서도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더 자세한 고용 전망은 이번 호 이소형의 「2026년 노동 정세전망」을 보라) 2) 무역 전쟁과 트럼프 관세의 효과 한국경제에서 무역 전쟁의 효과는 단지 수출 증감의 수치만이 아니라, 중국 시장의 구조적 상실과 미국 시장 의존의 불안정성 확대라는 이중 충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미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한국경제의 국내 투자수익률이 해외 투자수익률을 하회하며 성장 동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미·중 전략적 경쟁과 트럼프 관세는 이러한 취약성을 한층 심화시켰다. 먼저 ‘2차 차이나 쇼크’가 주는 충격이다. 한국의 대중 수출은 중간재·자본재에 크게 의존했으나, 2010년대 중반 이후 반도체를 제외한 대부분 품목에서 수출이 정체되거나 감소했다. 그 결과 2024년에는 수교 이래 처음으로 대중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직접 수출뿐 아니라, 중국 생산에 한국 중간재가 얼마나 투입되는지를 보여주는 수출연계생산 역시 2021년을 기점으로 감소세로 전환되었다. 이는 경기 요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중국의 중간재 자립, 최종재 자국화, 그리고 공급망 재편이라는 구조적 변화의 결과다. 섬유·의복에서 시작된 이러한 변화는 철강, 화학·정유를 거쳐 최근에는 IT 산업까지 확산되며, 한국 제조업의 중국 의존적 성장 모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진19%] [그림] 산업별 총산출 중 대중 수출연계생산의 비중 변화 (%p) 대중 수출연계생산이란, 중국에 직접 수출한 것 외에 중국에서의 생산의 후방산업(중간재 생산) 전반을 포괄한 것이다. 가령 중국으로의 수출품에 들어가나 국내에서 생산된 중간재, 한국 기업이 베트남 등지에서 생산했으나 중국으로 수출된 중간재 등을 포함한다. (자료출처: 한국은행) 여기에 트럼프 관세의 효과가 더해졌다. 트럼프 1기 미중 무역전쟁의 결과 201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대미 수출과 대미 투자가 증가했다. 물론 멕시코 등으로의 수출과 투자도 증가했다. 투자된 기업은 다시 한국이나 ASEAN의 한국 기업의 고숙련/저숙련 중간재를 수입했다. 다만 최근에는 미국 내 현지 조달 비중이 점차 확대 중이다.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은 그런 흐름을 강화하고, 멕시코나 베트남 등 대체 경로를 제한하려 한다. 작년 산업연구원의 관세 시나리오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현 관세와 가장 유사한 시나리오(멕시코·캐나다에는 10%, 중국에 60%, 한국을 포함한 그 외 국가들에 20%의 관세를 부과)에서 한국의 대미 수출은 13.1% 감소, 부가가치 손실도 10.6조 원으로 추정되며 상당한 크기다. [%=사진20%] [그림] 트럼프 2기 관세가 한국 제조업에 미치는 영향 추정치 (%, 조 원) 이는 작년에 트럼프 행정부가 멕시코·캐나다 10%, 중국 60%, 한국 포함 나머지 국가 2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는 시나리오 하에서 추정된 것이다. 실제 관세 부과와 협상 이후의 조건에서 추정한 분석은 아직 없다. (자료출처: 산업연구원) 무엇보다 무역전쟁의 비용은 중소기업과 후방산업에 집중되고 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관세의 간접 영향권에 속한 한국의 제조업 기업이 절반에 육박해, 이들과 직접 영향권에 속한 기업을 합치면 3분의 2 정도를 점한다. 트럼프 2기 관세의 광범위함 탓에, 미국에 완제품을 수출하는 기업뿐만 아니라, 미국 수출기업에 부품·원자재를 납품하는 기업, 미국 기업에 부품·원자재를 수출하는 기업, 중국에 부품·원자재를 수출하는 기업, 멕시코·캐나다로 수출하는 기업, 제3국(중국·멕시코·캐나다 제외) 수출 및 내수기업이 전방위적으로 타격을 받는다. 대응 능력 또한 기업 규모에 따라 크게 갈리며, 중소기업일수록 대응 계획이 없는 비중이 높다. ① 석유화학: ‘2차 차이나 쇼크’의 효과 국제무역 구조의 변화가 가하는 충격은 석유화학산업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나프타를 원료로 하는 구조상 원유 정제와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으며, 그동안 중국을 최대 수출시장으로 삼아 성장했다. 그러나 2020년대에 접어들며 이 성장 경로는 구조적 전환점에 직면하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중국의 자급률 상승이다. 중국은 2018년 대비 2023년 글로벌 에틸렌 생산능력 증가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대규모 증설을 단행했으며, 이는 한국의 증설 규모를 크게 상회한다. 그 결과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의 수입 수요가 구조적으로 축소되었다. 2010년대 후반까지 전체 석유화학 수출의 절반가량을 흡수하던 중국의 비중은 최근 40% 초반 수준으로 하락했다. 이는 단순한 경기 변동이 아니라, 중국의 자립화 전략과 과잉증설에 따른 구조적 변화다. 여기에 보호무역 강화가 겹쳤다. 미·중 무역 분쟁의 장기화와 블록화된 가치사슬의 형성,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도입, 반덤핑 제소 증가 등은 석유화학과 같은 범용 소재 산업의 교역 환경을 전반적으로 악화시키고 있다. 특히 중국의 과잉 생산능력이 글로벌 시장으로 방출되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은 가격 경쟁과 무역 장벽이라는 이중 압력에 노출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 역시 구조적 취약성을 강화한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원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중동·러시아를 둘러싼 지정학적 불안정성은 원가 변동성을 크게 확대한다. 다만 여기에는 조달선 다변화를 통해 일정 부분 대응이 이뤄져 왔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지정학적 리스크 자체보다는 중국의 자급률 상승과 보호무역 강화가 더 근본적인 위협이라고 평가한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은 석유화학산업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보다는, 이미 진행 중인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가속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대미 석유화학 수출 비중이 크지 않다는 점에서 단기적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으나, 보호무역 강화와 블록화된 공급망이라는 장기적 환경 변화 속에서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입지는 점차 축소되고 있다. ② 철강: ‘2차 차이나 쇼크’와 트럼프 관세의 결합 철강산업은 ‘2차 차이나 쇼크’와 트럼프 관세의 효과가 결합한 대표적 부문이다. 국내에서는 건설경기 침체 장기화와 제조업 성숙화로 내수가 위축되며 2024년 내수와 생산이 모두 감소했고, 중국의 내수 부진과 과잉공급은 중국산 수입 급증으로 이어져 국내 가동률 하락과 수익성 악화를 초래했다. 이에 기업들은 다른 시장으로의 수출 비중을 높이며 버티고 있으나, 수출단가 하락이 지속되면서 물량 증가에도 금액 기준 수출은 약화되는 ‘저가 압박’이 심화되고 있다. 게다가 주요 시장의 보호무역 강화가 수출 여력을 제약한다. 미국은 철강 수요가 생산을 상회해 구조적으로 수입 의존도가 높지만, 2025년 관세 강화 이후 미국 시장에서 수입산 점유율이 낮아지고 있다. 이에 미국 외 지역으로의 수출 확대(인도·베트남·튀르키예·브라질 등)로 충격을 완화하려는 다변화가 진행 중이다. 다만 강관류처럼 대미 의존도가 높은 품목은 대체 시장이 제한적이고, 미국 시장에서 경쟁국 간 점유율 경쟁이 나타나 관세 환경이 장기화할수록 수익성과 물량 모두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③ 자동차 및 부품: 트럼프 관세의 효과 미국 시장 의존도가 매우 높은 자동차산업은 트럼프 관세의 단기 효과와 중기 효과가 가장 잘 나타나는 사례다. 관세 부과 이후 대미 자동차 수출은 감소했으나, 감속 폭은 예상보다 제한적이었다. 전체 자동차 수출도 다른 지역으로의 수출 증가에 힘입어 큰 감소 없이 유지되었다. 특히 중앙아시아와 유럽 일부 국가로의 수출 확대는 대미 수출 감소분을 상당 부분 흡수했다. 또한 현대차의 미국 신공장 가동 확대에 따라 미국 내 생산과 판매가 빠르게 늘면서, 현대·기아차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오히려 상승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관세 부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산업은 수출, 생산, 판매 측면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성은 관세 충격을 흡수한 결과라기보다, 기업이 비용을 내부화한 결과에 가깝다. 관세 부과 이후에도 미국 시장에서 판매 가격을 인상하지 않아, 관세 부담은 고스란히 기업 이익 감소로 전가되었다. 실제로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매출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과 영업이익률이 큰 폭으로 하락했으며, 미국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GM은 관세 부과 이후 빠르게 적자로 전환되었다. 관세를 고려해 출고가와 수출 단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가격을 유지한 결과, 대미 수출 평균 단가는 관세 부과 이전보다 뚜렷하게 하락했다. 요컨대 신공장 가동과 지역 다변화를 통해 단기적인 물량 조정은 가능했으나, 가격 경쟁이 치열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관세를 판매 가격에 전가하기는 어려웠다. 그 결과 관세는 이익 감소라는 형태로 누적되고 있다. 이는 자동차산업 역시 석유화학·철강과 마찬가지로, 겉보기와 달리 중기적으로는 투자 여력과 고용, 하청 구조에 부담을 축적하는 경로에 놓여 있음을 시사한다. 자동차산업 내부에서도 관세 충격은 가치사슬 하단으로 갈수록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완성차 업체와 달리 자동차 부품업체는 미국 수출 감소를 다른 지역 수출로 대체하기가 훨씬 어렵다. 한국의 자동차 부품 수출은 대부분 한국 완성차 업체의 해외 생산에 연동되어 있는데, 현지에서 부품을 조달하는 비중은 이미 장기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여기에 미국의 자동차 부품 관세가 더해지면서, 완성차 업체들은 미국 내 조달을 더욱 늘릴 유인이 생겼다. 이는 국내 부품업체의 수출 기반을 직접적으로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관세 부담을 소비자 가격으로 전가하지 못한 완성차 업체들이 출고 가격을 낮추는 전략을 택하면서, 부담은 부품 단가 인하 요구로 전가되고 있다. 미국 시장뿐 아니라 제3국 시장으로 수출을 다변화하기 위해서도 가격 인하가 불가피해, 부품업체들은 이중의 가격 압박에 직면해 있다. 이런 하방 압력에 의한 조정은 단기적인 경쟁력 유지에는 기여할 수 있으나, 중소 부품업체의 수익성과 투자 여력을 크게 훼손함으로써 자동차산업 전반의 중기적 안정성을 약화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올해 관세 협상에서 쟁점이 됐던 대미투자 문제를 짚자. 2장 3절에서 언급했듯 트럼프 행정부가 요구하는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투자는 과도한 요구다. 다만 통합된 세계경제에서 무역이나 대외투자 자체가 단순히 ‘악’은 아니며, 그 경제적 이익과 손실을 구체적으로 논해야 한다. 요컨대 ‘투자 여부’ 자체가 아니라 ‘어떤 투자이며, 무엇을 대가로 얻는가’가 문제다. 미국은 여전히 반도체, 첨단 제조, 에너지, 방위산업, 디지털 기술 등에서 기술적 우위를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과 공동 투자를 통해 기술·시장·표준을 확보할 여지는 존재한다. 문제는 관세 협상에서 조선업을 제외하면 대미투자의 구체적 용도나 산업적 연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 측의 일방성 탓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산업별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준비된 전략을 제시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단순한 투자 총액이나 수익 배분에 관한 논의를 넘어, 산업별로 기술 이전, 공급망 지위, 시장 접근, 표준 선점 등 구체적 교환 조건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대미투자는 3장에서 서술했듯 비효율로, 국내에서는 그저 산업 공동화를 가속하는 비용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3) 재정적자와 정부부채의 급격한 확대 사회진보연대는 작년 한국경제 전망에서 이미 한국 정부부채의 절대 규모와 증가 속도가 위험 수준에 있음을 지적했다. 한국은 코로나19 이후 정부부채가 명목 GDP 성장률을 크게 상회하는 속도로 증가해 왔다. 이는 사실상 폰지 재정 상태다. 부채의 질적 구성도 악화하고 있다. 대응 자산이 있는 금융성 채무보다, 향후 조세로 상환해야 하는 적자성 채무의 비중이 빠르게 높아졌다. 여기에 공기업 부채와 정책금융 부채까지 포함한 공공부문 부채(D3)를 고려하면, 그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한다. 게다가 2년째 세수 결손이 발생하고, 국고채의 차환 발행 비중이 증가하며 순발행 비중이 하락하고 있다. (이아림, 「한국경제 전망과 제약 조건」,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겨울호)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 위에서, 최근 재정정책 기조의 변화는 부채 문제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올해에만 두 차례의 추가경정예산이 편성·집행되었고, 그 규모는 42조 원이 넘는다. 이는 경기 대응을 넘어 재정 확장 기조의 신호였다. 2026년도 본예산안에서도 그런 기조 변화가 분명히 드러났다. 총지출 증가율은 8%를 상회하며, 이는 코로나19 시기를 제외하면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국가재정운용계획(2025~2029년)에 따르면 향후 수년간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GDP 대비 4%대에서 고착화되고, 국가채무비율 역시 빠른 속도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확장 기조가 중기적으로 고정되는 양상이다. 재정 기조 변화의 결과는 금융시장의 반응을 통해 즉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올해 들어 기준금리는 인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고채 장기금리는 오히려 상승하며, 이례적인 정책·시장금리의 탈동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재정 확대와 국채 공급 증가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장기금리에 반영되며, 금리 정책으로 시장금리를 조절하기 어려워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12월 9일 기준 국고채 3년물을 비롯한 5년물과 10년물의 금리는 각각 3.084%, 3.302%, 3.453%로 연중 최고치를 갱신했다. 국고채의 차환 발행 비중이 높아지고 순발행 여력이 줄어드는 가운데, 향후 대규모 국채 발행이 예고되면서 재정 조달 비용은 구조적으로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정부부채 증가에 따른 국채 금리 상승을 추정한 KDI의 연구에 따르면, 금리가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정부부채가 2000조원에 도달하는 2030년에는 4.847% 수준에, 2040년에는 6.952%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확장 재정이 더이상 저금리 환경 속에서 무리 없이 흡수되지 않는 국면으로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사진21%] [그림] 정부부채 증가율 및 국채 이자율에 대한 장기 전망치 (%) 이는 작년에 추정된 것으로,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재정지출 전망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자료출처: 양주영, 2024)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가 올해 행한 정부조직 개편은 우려를 더욱 키운다. 기획재정부의 축소, 예산 기능의 분리, 금융정책 조직의 재편은 대통령의 재정·금융 정책 통제력을 강화하는 방향이다. 이번에 개편된 재정·금융기구의 구조는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개발국가 모형이나 IMF 위기 대응 국면의 김대중 정부에서 나타났던, 강한 국가 통제 모델과 유사하다. 재정 규율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장치들이 약화되는 가운데, 재정정책의 정치화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 재정준칙 도입 논의가 사실상 후퇴한 상황에서, 확장재정과 제도적 견제 약화가 결합할 경우 재정 신뢰는 빠르게 훼손될 수 있다. 이는 3장에서 서술한 국제적인 자본도피의 흐름 속에서, 원화 가치 하락과 국채 금리 상승, 나아가 자본 유출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미 환율의 구조적 상승이 실제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룬다) 부담은 결국 저축 여력이 낮고 금융자산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소득 하위계층 가계에 집중될 것이다. 4) 금융 불안정성의 급격한 확대와 자본유출 ① 유동성 확대 올해 한국은행은 유동성 완충을 확보하는 기조를 보였다. (유동성 완충(Liquidity Buffer)은 금융기관이나 기업이 예상치 못한 유동성 위기나 혼란기에 자금을 즉시 조달하여 현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두는 안전 자산이나 예비 자금을 의미한다.) 한국은행은 올해 7월부터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처음으로 정기화했다. 환매조건부채권이란, 채권 매입자/매도자가 정해진 미래의 날짜에 채권을 다시 팔기/사기로 약속하는 조건이 붙은 채권이다. 한국은행이 RP 매입을 하면, 시중은행은 잠시 채권을 내어주고 유동성을 얻은 뒤 정해진 날짜가 되면 다시 채권을 얻고 유동성을 돌려준다. 그런데 한국은행은 이를 정례화하여, 사실상 일시적인 매입을 연속화하여 유동성을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실제 유동성 조절 규모를 보면 이러한 변화는 분명하다. 통화안정증권 발행과 환매조건부채권(RP) 순매각을 포함한 한국은행의 유동성 흡수 규모는 올해 상반기 93조 원 수준이다. 통계를 공개하기 시작한 2020년 이후 처음으로 100조 원을 밑돌았다. (통화안정증권 발행이란 한국은행이 직접 채권을 발행해 팔아 시중의 유동성을 흡수하는 것이다. 환매조건부채권의 순매각이란 매각 규모가 매입 규모를 초과하는 것으로, RP 매각의 효과는 앞 문단의 매입 효과를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반면 환매조건부채권(RP) 매매는 지난해 하반기 순매입으로 전환된 데 이어, 올해에 순매입 규모가 15조 원을 넘어섰다. 나아가 한국은행은 11월 4일 국고채 단순매입 계획이 없다고 밝혔음에도, 한 달여 만에 1조 5천억 원 규모의 국고채를 매입했다. (국고채 단순매입은, 앞서 RP 매매처럼 일시적으로만 채권을 사고 다시 되파는 게 아니라, 한국은행이 국고채를 사서 소유하는 것으로, 사실상 양적 완화다.) 이는 코로나 위기 이후 3년 3개월 만의 매입이다. 명목상 이유는 향후 RP 매각을 위한 국채 확보였으나, 사실상 RP 순매입 기조인 상황에서 실제 이유는 앞 절에서 본 채권 금리 급등을 진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고 해석된다. 문제는 이 조치가 금리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채 매입 이후에도 장기 국채 금리는 오히려 연중 최고치를 경신하며 상승했고, 정책 목적과 효과 간의 괴리가 드러났다. 한편, 기준금리 정책 역시 금융안정 리스크에 종속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11월 27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네 차례 연속 동결하며, 금리 인하 사이클이 종료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는 원화 가치 하락과 부동산 시장 과열이라는 금융 불안 요인이 금리 정책의 제약 조건으로 작용함을 보여준다. 실제로 원/달러 환율은 1,470원대까지 상승했고, 미국과의 기준금리 격차가 확대되면 자본유출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는 상황이다. 동시에 서울을 중심으로 주택 가격 상승세가 이어지면서,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 대응이 자산시장 과열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한국은행 역시 통화정책방향의 표현을 수정하며, 금리 인하의 지속 여부에 유보적인 태도로 전환했다. 다만 금리 인상에 대해서는 시일이 걸릴 것이라 봤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화량 지표는 유동성 압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올해 9월 기준 광의통화(M2)는 전년 대비 8.5% 증가해, 코로나19 시기 대규모 재정지출 국면에 근접한 증가율을 보였다. 금리 인하 국면에서 수익증권으로 자금이 유입되는 가운데, 확장적 재정 기조가 맞물리며 시중 유동성은 다시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은 M2에 ETF도 포함됨을 들어 증가세가 과장되었다고 설명하지만, 자산시장과 환율에 동시에 압력이 가해지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 ② 부동산시장: 금융규제의 과잉 한국은행은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부동산 시장의 양극화가 구조적으로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구와 산업의 수도권 집중, 다주택 규제에 따른 서울 주택 선호 쏠림이 맞물리면서, 정책 변화에 따른 수도권 주택 가격의 민감도가 매우 높아졌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이러한 상황에서 가계부채 관리와 부동산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장기적으로는 자금이 부동산에서 생산적 부문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말하는 ‘생산적 부문’은 실물 투자와 생산성 제고를 의미하는 반면, 이재명 정부가 상정하는 생산적 부문은 주식시장에 가깝다는 점에서 양자의 인식에는 간극이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정부가 서울·수도권 주택 가격 상승에 대응하는 방식이 금융규제를 중심으로 극단화되었다는 점이다. 최근 발표된 10·15 부동산 대책은 집값 안정이라는 목표를 넘어, 주택시장의 거래 기능 자체를 크게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이번 대책은 서울 전역과 수도권 일부 지역을 다시 규제지역으로 묶고,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40%로 제한했다. 그 결과 근로소득을 기반으로 한 실수요자조차 대출을 통한 주택 구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예컨대 10억 원 주택을 구입하려면 6억 원 이상의 자기자본이 필요하고, 25억 원 이상 주택은 2억 원까지만 대출이 허용된다. 이는 거래 가능성을 현금 보유 여부에 따라 극단적으로 분절시키는 구조로, 시장을 사실상 고액 자산가 중심으로 재편하는 효과를 낳는다. 토지거래허가구역 확대와 2년 실거주 의무 부과 역시 주거 이동의 자유를 제약한다. 직장 이동이나 자녀 교육과 같은 현실적 사유에도 불구하고 주택 처분이나 이전이 어려워지면서, 기존 소유자의 지위는 고착되고 거래는 급감한다. 전세대출과 신용대출까지 동시에 규제되면서, 과거 무주택자가 전세를 거쳐 자가로 이동하던 ‘주거 사다리’ 역시 사실상 붕괴되었다. 실제로 10.15 대책 이후, 전월세 가격 상승폭이 확대됐다. 이러한 정책 방향은 문재인 정부 시기의 초고가 주택 대출 규제를 연상시킨다. 당시에도 정부는 투기 억제를 명분으로 들어 주택 가격을 기준으로 대출을 전면 금지했으나, 이는 국제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정책이었다. 결과적으로 규제는 투기를 억제하기보다 가격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고가 주택 시장은 현금 부유층 중심으로 고착되었고,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구간으로 수요가 몰리면서 서울 평균 주택 가격은 빠르게 상승했다. 불과 몇 년 사이 ‘초고가 주택’의 기준 자체가 상향 조정된 것은 이러한 정책의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여론도 이재명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에 비판적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부동산 규제 확대와 대출 제한 강화가 ‘적절하지 않다’는 응답이 ‘적절하다’는 응답을 상회했다. 이는 정부가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스스로 정치적·경제적 부담을 키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책 담당자들이 금리 인상기에 집값 상승세가 둔화되는 모습을 보며 금융규제의 효과를 과신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금리라는 거시적 조건이 아니라, 주택 가격·지역·거래자의 속성에 따라 대출 한도와 이자율을 세세하게 구분해 정하는 방식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이다. 더욱이 이러한 규제는 한국은행이 지적한 서울·수도권 주택 가격 상승의 근본 요인, 즉 인구·산업 집중과 과잉 유동성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거래 위축과 시장 경직을 일으켜 향후 가격 급등의 토대를 만들 위험이 있다. 결국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금융 불안정성을 완화하기보다, 시장 기능을 약화시키고 정책 리스크를 키우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자산시장 불안이 정부와 금융시스템 전체를 제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징후다. ③ 주식시장: 유동성 확대와 정책이 주도한 상승의 불안정성 올해 4월 9일 2293이었던 코스피 지수는 11월 3일 4,221까지 약 7개월간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러나 11월 초를 기점으로 하락세로 전환되면서 시장 전반에 불안이 확산되었고, 단기 조정이 아닌 공황 가능성에 대한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투자자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코스피 변동성지수(VKOSPI)는 4월 주식시장 급락 당시 수준까지 상승했다. 지난 몇 개월간의 기록적인 주가 상승에는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미국을 중심으로 한 AI 산업 투자 확대에 따라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실적이 크게 개선되었다. 여기에 방위산업, 조선, 배터리 제조업 등 일부 수출 산업의 호조도 주가 상승을 뒷받침했다. 즉 실물 기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둘째, 7월 민주당과 이재명 행정부가 추진한 상법 개정이 주주환원 기대를 높이며, 한국 주식시장의 구조적 저평가 문제를 완화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셋째, 외국인 투자 자금이 대거 유입되며 상승 흐름을 강화했다. 특히 세계적 수준보다 낮은 한국의 주가수익비율(PER)과 주가순자산비율(PBR)이 일련의 법 개정으로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외국인 수급을 자극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승이 지속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한국경제 전반이 침체 국면에 놓인 가운데, AI와 연관된 소수 산업과 기업의 주가만 급등하고 나머지 부문은 정체되거나 하락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일부 대형주의 상승이 지수 전체를 왜곡하는 구조다. 둘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주가 상승을 주도한 기업들의 실적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적 개선 속도에 비해 주가 상승 속도가 훨씬 빨랐다는 점에서 기대에 기초한 과잉 반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일부 연구자들은 2025년의 이론적 적정 코스피 지수를 3,200선 내외로 제시하고 있다. 셋째, 유동성이 과도하게 주식시장으로 집중되고 있다. 올해 10월 기준 광의통화(M2) 대비 코스피 시가총액 비율은 75.6%로, 장기 평균 수준인 57.5%를 크게 상회한다. 특히 문제적인 것은 개인투자자의 참여 양상이다. 코스피의 상승 국면에서는 외국인과 국내 기관투자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10월 말 이후 개인투자자 자금이 대거 유입되었다. 10월 30일 기준 투자자 예탁금은 85조 7천억 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신용거래융자 잔고도 25조 원을 넘어 역사적 고점에 근접했다. 이른바 ‘빚투’가 확대된 상황에서, 11월 초 주가가 하락세로 전환되자 개인투자자의 손실과 불안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실제로 불과 2주 만에 투자자 예탁금이 10조 원 이상 감소했고, 11월 한 달간 개인투자자의 국내외 주식 수익률은 모두 큰 폭의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식시장은 점차 정책과 정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심지어 이재명 정부는 ‘코스피 5000’을 정책 목표로 제시하는데, 특정 주가를 목표로 삼는 정책은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일각에서는 이재명 정부가 부동산 정책에서의 실책을 주식시장 상승으로 상쇄하려 시도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민주당과 정부는 상법 개정을 비롯해 배당소득 분리과세,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 일련의 ‘증시 부양 입법’을 추진하며 시장에 추가적인 기대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주가 하락이 시작되자, 개인투자자 사이에서 추가적인 상법 개정과 정책 개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동시에 하락의 책임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도 격화했다. 최근에는 한국은행 총재가 금리 인상 기조로의 전환을 시사한 것이 주가 하락과 환율 상승의 원인이라는 비판까지 제기되었으나, 실제로 한국은행은 완화적 기조를 상당 기간 유지해 왔다. 정책 부작용이 가시화되자 통화당국에 책임을 전가하는 양상이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민주당과 이재명 정부가 주가 부양을 위해 준비한 정책 수단들의 위험성이다. 부동산 규제를 통해 자금을 주식시장으로 유도하며 유동성을 키웠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기업의 자율성과 재무 전략을 제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크다. 여기에 국내주식 비중을 중기적으로 줄이고 자산을 다변화한다는 국민연금의 중기 자산배분 원칙을, 전술적 자산배분제도(단기적인 시장 상황 변화에 맞춰 자산군 간 비중을 적극적으로 조정하는 투자 전략)을 통해 무력화하여, 최대 30조 원 규모의 자금을 주식시장에 투입하려는 시도까지 더해졌다. 이는 단기적으로 주가를 떠받칠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연기금의 안정성과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험을 크게 키울 수 있다. 결국 현재의 주식시장 상승은 실물경제의 회복에 기초했다기보다, 유동성 집중과 정책 주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조정이 시작되면 변동성이 급격히 확대될 가능성이 높으며, 그 부담은 레버리지를 동원해 뒤늦게 진입한 개인투자자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금융 불안정성 확대가 정치와 정책 전반을 압박하고, 다시 정치가 개입하며 그 위험성의 판을 더 키우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④ 외환시장: 자본흐름 구조 전환과 원화 약세의 고착화 최근 1470원을 돌파한 원/달러 환율의 상승은 단기적 불안이나 외국인 자본 이탈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KDI에 따르면, 환율 상승의 구조적 배경에는 앞서 3장에서 살펴봤듯 한국경제의 자본수익성 하락과 이에 따른 자본흐름의 근본적 전환이 자리하고 있다.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국내 투자수익률이 점진적으로 하락한 반면, 해외 투자수익률은 상대적으로 높게 유지되었고,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 국내·해외 투자수익률이 역전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의 순해외투자는 빠르게 증가했고, 결국 소득수지가 구조적으로 흑자(+)로 전환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사진22%] [그림] 한국의 국내/대외 투자수익률, 순해외투자 지위 변화, 순대외자산 증가 3장의 국제 자본흐름 변화에서 확인했듯, 한국도 2010년대 국내/대외 투자수익률이 역전되며 순대외자산국으로 전환했다. 내국인에 의한 지속적인 자본유출 증가가 환율을 상승시키는 구조적 요인이 되었다. 이 변화는 외환위기 위험의 성격을 바꿨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한국경제의 핵심 위험은 외국인에 의한 급작스런 자본유출이었다. 그러나 2014년 이후 한국이 순대외자산국으로 전환되면서, 외국인 단기자본 유출로 인한 전통적 외환위기 가능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대신 내국인(기업, 국민연금, 개인)에 의한 구조적 해외자본 유출이 새로운 문제가 됐다. 이제 환율에 상방 압력을 가하는 주된 요인은 외국인이 아니라 내국인이다. 국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익률이 낮아지면서, 기업은 해외 직접투자와 현지 생산을 확대하고, 연기금과 기관투자자는 해외 증권투자 비중을 늘리며, 개인도 해외 자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원화를 보유하기보다 달러 자산을 선호하는 행태가 구조적으로 확산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외국인이 원화를 떠나는 것’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내국인이 원화를 버리는 것’이 장기적 환율 상승 압력의 핵심 요인이 되었다. 물론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달러의 국제적 위상은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달러 약세보다 원화 약세가 더 빠르고 더 깊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재정적자와 통화정책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자본은 여전히 달러를 원화보다는 안전한 자산으로 인식하는 반면, 한국경제의 낮은 성장률, 높은 부채 증가 속도, 자산시장 불안정성이라는 요인이 결합되며 원화의 매력도가 빠르게 저하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는 환율 안정을 위해 국민연금을 동원하고, 외환시장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 국민연금을 환율 방어의 정책 수단으로 사용하는 조치는 논란의 소지가 클뿐더러, 이를 노린 환투기를 유발할 수 있고, 국민연금의 수익률에 부담을 키울 수 있다. 게다가 금융기관의 외환 건전성 관련 규제 완화나 외국인의 국내주식 투자를 늘리려는 조치는 금융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결국 현재의 환율 문제는 일시적 충격이나 심리 요인이 아니라, 성장 둔화와 수익성 하락, 자본흐름의 구조적 전환, 그리고 재정·금융 정책의 누적된 제약이 결합된 결과다. 외환위기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원화 약세는 새로운 방식으로 한국경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재정적자 확대, 자산시장 불안정성, 금융정책의 제약과 맞물리며 한국경제가 점점 더 좁은 궁지로 밀려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5) 소결: 성장 둔화와 정책 의존 속에서 증폭되는 불안정성 이 장에서 살펴본 한국경제의 모습은 성장의 구조적 약화 위에 정책 개입이 중첩되며 불안정성이 증폭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일부 수출 대기업을 제외하면, 한국경제의 다수 부문은 이미 성장이 멈추었거나 후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2장에서 본 무역 전쟁과 글로벌 분절화는 이런 추세를 더욱 고착화하고 있다. 중국의 자립화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한국 제조업의 중간재·자본재 수출 기반을 동시에 압박하며, 자동차·철강·석유화학 등 핵심 산업에서도 수출을 유지함에도 수익성이 하락하는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실물 부문의 약화는 재정과 금융으로 전이되고 있다. 성장 둔화에 대응해 정부는 재정지출 확대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으나, 그 결과 정부부채는 명목 GDP 성장률을 상회하는 속도로 증가하며 질적으로도 악화되고 있다. 재정적자와 국채 발행 확대는 장기금리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준금리를 낮추더라도 시장금리는 이를 따라오지 않는 이례적 디커플링이 나타나는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재정·금융 구조의 변화가 있다. 금융 불안정성은 자산시장 전반에서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 유동성은 축소되지 않은 채 유지되거나 오히려 확대되고 있으며, 이는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방향을 바꿔 유입되고 있다. 부동산 시장에서는 수도권 집중과 거래 경색이 동시에 심화했고, 주식시장에서는 미국의 AI 투자 관련 소수 종목을 중심으로 한 과도한 기대가 지수를 떠받치다 조정 국면에 진입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투자자의 위험 노출은 오히려 확대되었으며, 정책 당국은 자산시장 하락의 정치적 부담을 우려해 추가적인 부양책에 더 깊이 개입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다. 환율 역시 이러한 구조적 압력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지표다. 3장에서 확인한 국제 자본 흐름의 미국 쏠림이 심해지는 가운데, 내국인의 대외투자(자본도피) 확대가 원화 약세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환율 상승은 단기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성장성과 수익성의 격차가 해소되지 않는 한, 원화 약세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막기 위해 연기금을 동원하고 금융시장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은 또 다른 위험을 내포하며, 한국경제를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결국 한국경제는 지금, 성장은 약화되고, 재정과 금융에 대한 의존은 커지며, 그 결과 불안정성은 더 빠르게 확대되는 국면에 놓여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정책이 단기적인 완충과 자산시장 방어에 집중되는 점이다. 이는 단기적으로 충격을 늦출 수는 있어도, 중장기적으로는 부채와 금융 불안정성을 더욱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5. 결론 서론에서 살펴보았듯, 현재 세계경제는 포즌이 말한 ‘루즈-루즈 게임’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국제무역과 국제금융의 분절화는 각국의 성장 잠재력을 동시에 훼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달러 체제는 점차 약화 중이나 이를 대체할 안정적인 국제통화 질서는 여전히 부재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두 정치적 흐름은 서로를 자극하며 강화하고, 점점 더 정치권력, 즉 힘과 강제에 의해 특정한 이익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대세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경제에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은 달러 체제에 깊이 편입된 개방경제이자, 글로벌 가치사슬과 국제금융 흐름에 강하게 의존해 온 국가다. 상술한 상황은 한국과 같은 수출 의존 경제에 특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세계경제의 균열 속에서 한국은 ‘시진핑의 중국’과 ‘트럼프의 미국’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충격을 받는, 구조적으로 협공당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처럼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의 성장 전망이 모두 어두워지고 안전자산의 지위가 약화하는 가운데, 사실상 AI 부문과 연계된 일부 기업만이 성장하고 있다. 갈 곳을 잃은 글로벌 유동성이 그 좁은 영역으로 집중되고, 흘러넘쳐 온갖 자산들을 향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재정지출 확대가 성장을 떠받친다. 이는 안전자산 지위 약화 과정의 일부다. 그러나 재정지출 확대, 유동성 공급, 자산시장 부양은 구조적 해법이라기보다 지연 장치에 가깝다. 실물경제의 생산성과 수익성이 회복되지 않는 한, 이러한 정책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의 표면화를 늦추며 불안정성을 누적시킬 뿐이다. 겉으로 뚜렷한 위기가 아직 폭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문제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착시를 경계해야 한다. 금융 불안정성은 주식시장, 부동산시장, 외환시장을 가로지르며 동시에 축적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이재명 정부의 정책은 이 모든 영역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 결과 정책이 스스로를 금융시장 변동성의 인질로 묶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자산가격 하락이 곧바로 정치적 부담으로 전이될수록, 조정은 더 어려워지고 비용은 사회 전체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진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이후 형성된 국제무역·국제금융 질서는 분절화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성장 경로와 모델은 아직 수립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포즌이 지적하듯 트럼프주의가 자본주의의 재생산 조건 자체를 약화시키거나 위협한다면, 그 충격은 세계 인민에게 전가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재명 정부의 정책 실패로 한국경제의 불안정성이 가시화된 위기로 나타난다면, 그 비용 역시 한국 인민이 감내하게 될 것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집권으로 정세가 급변하는 지금, 사회운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고 명료하게 경제정세를 인식해야 한다. ●-web-resources/image/13a.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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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후보와 김문수 후보의 책임 없는 공약 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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