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세계경제·한국경제 전망
1. 서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형성된 국제무역과 금융 질서의 변화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세계경제는 예측 불가능한 정치권력이 가하는 충격을 맞고 있다. 지난해 말 사회진보연대는 “트럼프주의자가 제시하는 미국의 대외경제정책으로 인해 길게는 2차 세계전쟁 이후, 짧게는 1990년대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시대에 미국이 주도했던 규칙 기반 다자적 질서가 최종적으로 후퇴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며, “중국이 권위주의와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넘어 탈동조화를 추구하고 일방적이고 불확실성이 높은 거래에 몰두한다면, 세계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대국이 ‘공공악’을 제공하는 ‘G 마이너스 2’의 시대로 진입하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임지섭,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겨울호) 불행히도 이 예측이 현실이 되고 있는 지금, 이번 경제전망은 수많은 경제학자가 논하고 있는 국제무역·금융의 ‘분절화’(fragmentation)의 양상을 확인하며, 규칙 기반 다자적 경제질서의 해체가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에 어떤 경제적 충격을 줄 것인지 보고자 한다. 먼저 ‘길게는 2차 세계전쟁 이후, 짧게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대에 미국이 주도했던 질서’가 무엇인지 짚자.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애덤 포즌 소장은 트럼프 재집권이 단지 무역과 같은 경제적 측면에만 아니라 세계 질서에 더 심원한 충격을 가한다며, 2차 세계전쟁 이후 미국이 세계에 제공해 온 공공재를 더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위협에 주목하자고 말한다. 포즌은 그런 글로벌 공공재의 사례로 항공·해상에서의 안전한 항행 능력, 재산이 수용으로부터 안전하다는 확신, 국제무역의 규칙, 그리고 거래 및 자산 저장을 가능케 하는 안정적 달러 자산을 드는데, 이를 ‘안보, 법치, 화폐’라 요약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이들 공공재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위한 것으로, 포즌은 트럼프 행정부가 자본주의 체계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셈이다. 이 글은 안보, 법치, 화폐 중 마지막에 가해지는 위협에 초점을 맞추겠다. 화폐 관리의 측면에서 2차 세계전쟁 이후의 질서는 미국이 관리통화제를 확립하고 달러를 세계화폐로 삼으며 형성됐다. 20세기 중반에는 미국의 경제성장과 재정을 주요 토대로 하여 달러의 가치를 지지했으나, 스태그플레이션·재정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은 세계화폐로서 달러 가치를 지지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미국 민간의 구조조정에 상응하여, 신흥시장의 경제성장에 기초한 수출달러 환류를 주요 토대로 삼은 것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형성된 질서 하에서 국제무역·금융의 핵심 패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미국의 상품시장 개방과 무역적자 확대에 상응해 (중국을 필두로 한) 신흥시장의 수출 부문이 성장했다. 미국 외 선진국 역시 신흥시장으로부터 저부가가치 제품을 수입하고 고부가가치 제품을 수출하는 분업 구조 속에서 성장했다. 미국은 기술혁신을 통해 첨단 산업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한편, 자국 산업의 구조조정과 세계경제의 성장이 결합된 결과로 이른바 ‘특권적 이익’(exorbitant privilege)을 누리게 됐다. 둘째, 미국이 누리는 ‘특권적 이익’의 핵심은 낮은 국채 금리, 즉 나머지 세계로부터 가장 낮은 비용으로 차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신흥시장과 무역흑자국의 수출달러 환류는 달러와 미 국채의 가치를 지지했다. 또한 저임금을 토대로 한 신흥시장의 수출 확대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낮은 금리를 유지하더라도 과도한 인플레이션에 직면하지 않게 했다. 그 결과 금 태환 보장이 사라진 이후에도 달러(미 국채)는 안전자산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렇게 무역적자는 재정조달 비용을 낮추는 역할을 했고, 미국은 1970년대의 재정위기를 넘어 재정적자를 더 확대할 수 있었다. 무역적자·재정적자는 대규모 자본유입을 수반했지만, 낮은 금리 덕에 미국의 대외부채는 상대적으로 완만한 속도로 증가했다. 셋째, 앞의 두 요인이 결합하면서 미국은 두 번째 특권적 이익을 얻게 된다. 이는 미국의 낮은 차입금리와 성장하는 나머지 세계에 대한 투자수익률 간의 격차다. 미국의 민간 부문은 낮은 비용으로 차입해 신흥시장과 성장하는 국가들에 대한 직접투자(FDI)와 주식 투자를 확대하고 대외자산을 축적했으며, 그 수익률 격차로 이윤을 증대시켰다. 이로 인해 미국의 대외자산 증가 속도는 대외부채 증가 속도를 상회했다. 물론 무역적자·재정적자에 따른 자본유입 규모가 대외투자 규모를 초과했기 때문에 미국은 1980년대 말 이후 줄곧 순대외채무국이었지만, 순대외채무의 증가 속도는 상대적으로 완만했다. 이러한 금융적 우위는 상술한 기술적 우위와 결합해 미국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했다. 넷째, 미국과 선진국의 신흥시장 대상 투자, 특히 FDI는 신흥시장의 수출 부문에 자본과 기술을 공급했다. 이는 다시 신흥시장의 수출 확대로 이어지며, 첫째부터 설명한 패턴이 반복되는 순환 구조를 형성했다. (이런 패턴이 뒷받침하는 미국의 ‘특권적 이익’에 대한 더 깊은 설명은 케네스 로고프의 『달러 이후의 질서』(2025; 국역: 윌북, 2025)를 참고할 수 있다) 이렇듯 1990년대 이래 달러(미 국채)의 가치는 이전처럼 미국의 재정이나 달러 기반 국제금융 질서에 참여하는 몇몇 선진국에 의해서만 지지되지 않았다. 그 가치는 미국·선진국과 신흥시장 간 상품과 자본 거래의 확대로서 무역과 금융의 세계화와 그 결과로 세계경제, 특히 신흥시장 경제가 성장한 것에 의해 지지되었다. 따라서 포즌이 말하는 화폐 관리에 대한 위협이나, 로고프가 말하는 ‘달러체제(dollar regime)의 위기’란, 단지 미국 내의 재정적자가 심각하다는 얘기만이 아니라 상술한 국제무역·금융의 패턴 전반이 위협받고 있다는 뜻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그 구조적 원인은 신흥시장의 필두인 중국경제의 이윤율 하락이다. 이는 2007~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보다 더 낮아진다. 당시 경제학자들은 중국이 자본축적에만 의존한 성장의 한계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기술혁신으로 총요소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며 그 수단으로 저임금·낮은 위안화 가치에 의존한 성장모델의 개혁과 FDI 유입의 질적 고도화를 권고했다. 또한,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무역적자·재정적자 확대가 지속 가능한가에 관한 의문이 더욱 강해졌다. 2010년대 중반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는 세계경제 불균형의 두 축인 미국의 과도한 소비와 중국의 과도한 저축을 감축하며 달러 체제의 위기를 예방할 수단으로 G2의 협력에 기초한 ‘아시아판 플라자합의’(위안화 절상)를 제안했다. 이는 미국 인민의 생활수준을 낮추고, 중국 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여 중국의 내수를 활성화함과 동시에, (이를 명시한 것은 아니나 암묵적으로는) 중국 인민에 대한 중국 당국의 통제를 약화하며, 중국 자본과 중국에 투자된 선진국 자본의 단기적 이익은 침해하나 장기적으로는 개혁과 생산성 향상을 유도하는 안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요인들로 인해 이러한 대안은 채택되지 않았고, 앞서 살펴본 국제무역·국제금융의 기존 패턴에 대한 위협은 오히려 심화됐다. 시진핑 체제하의 중국공산당은 위안화 가치와 임금 통제, 보조금에 기반한 수출 구조를 개혁하고 민간소비를 확대해 과도한 무역흑자를 축소하는 대안 대신,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경로를 선택했다. 그 결과 국유 부문 중심의 과잉투자와 비효율이 누적됐고, 이는 지방정부 재정 구조와 결합해 부동산 부문의 불균형과 거품 붕괴를 심화시키며 현재까지 중국경제에 중대한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장기화된 무역적자와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불만이 정치적으로 결집되며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후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1990년대의 초당적 합의였던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하는)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 노선에 초당적 합의를 형성했으나, 정책 수단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트럼프 1기 행정부가 대중 관세를 주요 수단으로 활용한 반면, 바이든 행정부는 대중 관세를 유지하는 동시에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특정 기술·제품에 대한 수출통제와 투자 규제를 강화했다. 중국은 한편으로는 국유 자본의 과잉과 수익성 악화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중 전략적 경쟁의 심화에 대응하면서, 성장과 안보를 결합하는 ‘쌍순환 전략’을 추진하여 국가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화했다. 이 전략은 기술과 공급망의 자립을 목표로, 국내적으로는 정부투자와 보조금을 통해 산업 고도화를 추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자원수출국과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국유 부문의 과잉자본 수출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미국의 ‘전략적 경쟁’과 중국의 쌍순환 전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보라. 임지섭, 「심화하는 전략적 경쟁, 어떻게 볼 것인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3년 가을호)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중국, 이른바 G2의 정책 노선이 변화하면서 앞서 살펴본 국제무역·국제금융의 패턴이 달라졌다는 연구가 최근 급증했다.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는 ‘분절화’(fragmentation)다. 분절화의 시작 시점을 두고는 학자마다 견해가 갈려, 멀게는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 전후부터, 가깝게는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한 2017년 이후로 본다. 그러나 세계경제에서 분절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인식 자체는 이제 지배적인 시각이 됐다. 최근 몇 년의 논의에서 분절화는 주로 ‘블록화’를 의미한다. 즉 1990~2000년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과 신흥시장 간 상품·자본 거래가 확대되던 세계화 국면에서 벗어나, 미국을 필두로 유럽·동아시아의 선진국과 일부 신흥시장이 결합한 미국 블록과, 중국을 중심으로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라 불리는 다수의 개발도상국이 포진한 중국 블록 사이에서 무역과 금융 거래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절화·블록화의 주요 원인으로는 지정학적 요인이 지목된다. 이에 따라 경제 분석에서도 지정학, 나아가 지경학(geoeconomics)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확산하고 있다. 민간기업의 이윤 극대화와 국민경제의 성장을 중심에 둔 자유주의적 경제학의 시각과 달리, 오늘날에는 중상주의적 전통에 가까운 방식으로 국가들이 무역, 제재, 투자와 같은 경제적 수단을 활용해 전략적·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행위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시각이다. 즉 경제를 상호 간 질서를 구축하고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른바 ‘윈win-윈win 게임’)보다는, 한쪽이 다른 쪽의 것을 뺏는 것(이른바 ‘윈win-루즈lose 게임’)으로 보자는 것이다. 반면 사회진보연대는 2010년대의 경제 정세 변화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한계 하에서 인민주의·권위주의의 난입’으로 본다. (사회진보연대, 「25주년 기념좌담」,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3년 겨울호.) 요컨대, 성장의 한계를 일으키는 원인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노동자연합의 건설로 대체하거나(마르크스주의), 한계 안에서도 기존 질서를 재생산하며 최대한의 성장을 일으키려 노력하는(주류경제학) 대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내버려두면서도 이를 재생산하는 제도와 이념을 공격하며 경제성장을 해침으로써 인민 전반의 생활수준을 하락시키고, 나아가 내부 대결을 조장해 ‘공멸’로 이끄는 경향이 지배력을 얻고 있다. 포즌은 이를 모두가 피해를 입는 ‘루즈(lose)-루즈(lose) 게임’의 도래로 표현한다. 이런 기준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전략적 경쟁’ 국면에서도 트럼프 1기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의 접근 방식은 성격이 다르다고 보았다. 전자가 중국 블록과의 ‘윈-루즈 게임’을 추구했다면, 후자는 여전히 규칙 기반의 다자적 질서를 유지하면서 그로부터 이탈하는 중국 블록을 견제하고 동시에 재포섭하려 했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임지섭의 글을 참조하라) 그런데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포즌, 옵스펠트, 로고프와 같은 논자들은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관세를 중심으로 한 트럼프 2기 정책이 기존의 분절화를 한층 더 심화시킬 뿐 아니라, 초점 자체도 변화시키고 있다고 우려한다. 바이든 행정부나 심지어 트럼프 1기와도 다르게, 트럼프 2기의 통상정책은 중국보다는 오히려 미국 블록 내부의 경제에 더 큰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확대됐던 선진국과 신흥시장 간 상품·자본 거래는 2010년대를 거치며 블록화라는 형태로 정체됐는데, 트럼프 2기 정책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진정한 의미의 ‘미국 우선주의’, 즉 미국과 나머지 세계의 대결 구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이러한 노선이 지속될 경우 미국 블록 내부의 분절화가 심화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경제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제2차 세계전쟁까지의 시기처럼 안정적인 세계화폐와 국제무역·금융 질서가 부재한 상태로 회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질서 해체의 양상과 경제적 효과를 무역 측면(2장)과 금융 측면(3장)으로 나눠 논한 후, 그러한 세계경제 속에서 한국경제가 처한 상황(4장)을 살펴보겠다. 2. 국제무역 분절화의 양상과 그 경제적 효과 1) 국제무역의 분절화: ‘블록화’에서 ‘탈세계화’(de-globalization) 국면으로 무역 세계화의 대표적 지표는 세계 GDP 대비 무역량의 비율이다. 이 비율이 상승하면 무역의 세계화가 심화되고, 하락하면 ‘탈세계화’가 진행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의 상단을 보면, 2007-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이 비율이 뚜렷한 상승 없이 둔화·정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슬로벌라이제이션’(slobalization)이라 부르기도 한다. 해당 지표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락했다가 일시적으로 회복했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부터 다시 하락 국면에 들어섰다. 당시에는 이 하락이 단기간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그림]의 하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 최근 IMF를 비롯한 주요 경제기구는 트럼프 2기 관세정책의 충격으로 하락세가 장기화하리라 전망한다. 하락세는 세계 수준만이 아니라 주요 경제권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특히 2010년대 이래 중국의 GDP 대비 무역 비중 하락이 두드러진다. [%=사진1%] [그림] 무역의 세계화와 탈세계화 (자료출처: CEPR, IMF) 위: 1870-2023년 세계 GDP 중 무역량(수출+수입)의 비율 (%) 아래: 2008-2030년 세계 및 각국 GDP 중 수출(왼쪽)과 수입(오른쪽)의 비율과 그 전망 (%)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무역 세계화의 지표가 1915년까지의 상승, 1915~1945년의 하락, 1945~2010년의 재상승이라는 세 국면을 거친 뒤, 2010~2022년의 정체 국면을 지나 2022년 이후 본격적인 하락, 즉 ‘탈세계화’ 국면에 진입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2010년대 중반부터 무역의 ‘블록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 다수 제기돼 왔다. 2015년 이후 세계경제를 미국·중국·EU·기타로 나눠 볼 때, 미국과 중국은 서로에 대한 교역 비중이 뚜렷하게 감소했다. 대신 미국은 EU, 기타 국가와의 수입·수출 비중을 확대했고, 중국은 EU에 대한 수출 비중과 기타 국가와의 수출·수입 비중을 늘렸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다수 국가도 관세, 무역 규제, 지정학적 요인 등으로 인한 무역비용 변화에 따라 미국 블록 또는 중국 블록으로 편입되는 무역의 블록화가 진행됐다. 그런데 이는 일부 국가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고, 양 블록 전반의 성장률을 낮추는 효과를 가한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무역 블록화는 순수한 경제적 논리라기보다 지정학적 갈등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무역 블록화는 특히 에너지와 반도체 부문에서 두드러진다. 에너지 무역의 경우, 미국이 셰일혁명을 통해 2020년을 기점으로 에너지 순수출국으로 전환한 데 이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중단하고 중국과 인도 등이 유럽이 수입하던 몫을 대신 수입하면서, 미국 블록과 중국-러시아-중동 블록 간의 분절화가 뚜렷해졌다. 반도체 무역에서는 미국이 ‘전략적 경쟁’의 일환으로 고급 반도체와 반도체 제조 장비가 중국으로 수출되는 것을 통제하면서, 미국-유럽-대만·한국-동남아 일부 국가로 구성된 공급망 연계가 강화됐다. 이러한 반도체 공급망 분절은 미중 양국 모두에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2022년 이후 본격화된 무역의 ‘탈세계화’ 국면에서, 국제무역 패턴 변화의 구체적 특징을 살펴보자. 2) 이른바 ‘2차 차이나 쇼크’의 경제적 효과 ① 중국의 무역, 특히 수출 구성의 변화: 트럼프 2기 대중 관세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제한적 2020년대 들어 중국이 추진한 ‘쌍순환 전략’의 효과는 국제무역 측면에서 이른바 ‘2차 차이나 쇼크’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GDP 대비 수출·수입 비중은 2010년대에 걸쳐 꾸준히 하락해, 세계시장으로부터의 이탈과 ‘자립’이 진전되는 듯하다. [그림]에서 보듯 수출·수입의 절대 규모도 2022년 이후 증가세가 둔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수출달러 환류의 주요 기반으로서 중국의 역할이 축소됨을 보여준다. [%=사진2%] [그림] 중국의 수출액(위)과 수출 성장률(아래) 위: 2020년 11월~2025년 10월 중국의 총수출액(왼쪽) 및 미국·EU·ASEAN 대상 수출액(오른쪽) (달러, 월 단위) 아래: 동기간 중국의 수출 성장률 (%, 월 단위, 전년 동월 대비) (자료출처: MacroMicro, TradingEconomics) 수출과 수입의 구성도 변하고 있다. 수출에서는 전자제품·기계류·고부가가치 제품의 비중이 상승했고, 전기차·에너지 부문 신산업의 수출과 생산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은 수입이 통제된 첨단 반도체를 자체 생산하지는 못하나, 선진국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확대되며 이에 필요한 구형(legacy) 반도체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고 있다. 다만 중국 제조업 무역흑자의 약 70%는 여전히 저가 소비재와 중간재에서 발생한다. 수출 대상국의 구성도 바뀌고 있다. [그림]에서 보듯 2022년 이후 중국의 대미 수출 규모는 감소세로 전환됐다. 총 수출 중 대미수출 비중 역시 하락하다가 2025년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 부과 이후에는 약 15%까지 떨어져, 미국은 ASEAN과 EU에 밀려 중국의 수출국 중 3위로 내려갔다. 이 때문에 포즌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가 중국의 수출에 부정적 충격을 주기는 하겠지만, 시간상으로는 트럼프 1기 때보다, 공간적으로는 관세를 처음 맞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충격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한다. 한편 중국의 수입은 여전히 중간재와 자본재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 의존이 지속되고 있으나, 일부 중간재와 기계 부문에서는 국산화가 진행되며 수입 의존도가 완만히 낮아지고 있다. 동시에 에너지와 원자재는 러시아·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한편, 이들 지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며 경제적 종속 관계를 강화하는 전략도 병행한다. (이는 3장 1절에서 다룬다) ② ‘2차 차이나 쇼크’의 파급력: 개발도상국의 수출 억제와 세계적 무역장벽 강화 문제는 이러한 중국의 전략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 충격을 완화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기여했으나, 동시에 EU·일본·한국 등 미국 외 선진국과 ASEAN을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와의 새로운 무역 갈등을 촉발한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의 수출 전환 전략에 내포된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중국은 전기차·배터리·반도체·전자기기 부문에서 정부투자와 보조금에 기반한 과잉생산을 통해 저가 공세를 펼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른바 ‘2차 차이나 쇼크’가 선진국 경제를 압박하고 있다. 예컨대 EU의 대중 무역적자는 최근 급격히 확대돼, 2025년에 연간 3375억 유로로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 부과 이후 중국이 대미 수출 감소를 대EU 수출 증가로 보완하며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됐다. 이에 현재 진행 중인 EU의 불공정 무역 조사 가운데 다수가 중국 관련 사안이며, 2024년 EU의 반덤핑 조치 74건 중 46%, 반보조금 조치 11건 중 38%가 중국산 수입품을 대상으로 한다. ‘2차 차이나 쇼크’의 충격은 선진국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글로벌 사우스’에서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다. 여전히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저숙련 제품 부문에서, 중국은 민간소비 부진과 대미 수출 의존 축소의 결과로 개도국 시장에 물량을 집중적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로 인해 저소득·중소득국 전체의 저숙련 제품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당 국가들의 노동인구 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28%p나 높다. 이는 중국이 가난한 나라들에서 수천만 개의 제조업 일자리를 떠받칠 수 있는 ‘수출 공간’을 지속적으로 점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개도국에 대한 중국의 생산성 우위가 아닌, 국가 보조금, 환율 통제, 과잉 생산능력 유지에 기초한 것으로 평가된다. [%=사진3%] [그림] 각국의 국내생산 중 중국산 수입 증가에 노출된 부분의 비율(%) (자료출처: 국제금융센터) 실제로 [그림]에서 중국산 수입 증가에 노출된 비율이 가장 높은 10개국 가운데 9개국이 저소득·중소득국이다. 2024년 기준 중국의 무역흑자 가운데 약 54%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 발생했다는 점 역시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한다. 이에 대응해 브릭스 회원국과 파트너국을 중심으로 대중 무역장벽을 강화하는 조치가 잇따르고 있다. (구체적 사례는 작년 경제전망을 보라. 임지섭,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겨울호) 최근 중국은 더 가난한 국가들에 대해 무관세 접근을 허용하거나, WTO에서 개도국 특별 혜택 요청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는 상징적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처럼 수출 공간을 의도적으로 내주는 전략적 전환이 없는 한, 중국의 수출 전략은 갈등을 누적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중국은 상환 능력이 부족한 개도국에 자본을 수출하고 이를 담보로 자원이나 시설 운영권을 확보하는 방식을 확대하고 있는데, 이 역시 ‘글로벌 사우스’와의 마찰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3장 1절에서 다룬다) ③ 중국 수출전략의 구조적 한계와 인민주의적 반중 정서의 추동 무엇보다 이러한 외부 갈등의 심화는 중국 내부의 구조적 모순과 맞물려 있다. 이윤율이 하락하는 가운데 환율과 임금 통제를 유지하고, 정부투자와 보조금으로 수출 부문의 가격경쟁력을 지탱하면서, 수출량은 늘어나되 수익성은 악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IMF는 중국 제조업 수출의 성장 동력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전망한다. 실제로 중국의 산업정책 지출은 2011~2023년 동안 GDP의 약 4% 수준을 유지했으며, 낭비적인 중복·과잉투자로 인한 과잉생산과 감산은 총요소생산성과 GDP 수준을 각각 1.2%와 2%씩 낮추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약 1년 치 성장분이 소멸하는 규모다. 정리하면, 201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GDP 대비 무역량 비중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수출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으나 2022년 이후 그 속도는 둔화하고 있다. 대미 수출은 감소 추세에 접어들면서, 수출달러 환류의 주요 기반으로서 중국의 역할도 점차 축소되고 있다. 대신 중국은 EU와 ASEAN을 비롯한 나머지 세계를 향해 수출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 부과는 이러한 흐름을 더 가속화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지출과 보조금에 기초한 중국의 ‘저가 출혈경쟁’ 전략이 심화하면서, 최근에는 미국 외 선진국과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대중 무역적자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무역 분쟁을 촉발하고, 각국에서 인민주의적 반중 정서를 자극할 가능성을 높인다. 실제로 상품시장 개방성을 낮추는 각국의 정책 대응은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무역적자 자체에 대한 인민주의적 불만과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구분하며, 이를 ‘전략적 경쟁’이라는 틀로 관리하려 했다. 그러나 지금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정책 탓에 인민주의와 권위주의가 상호 강화되는 악순환이 심화하며 무역의 ‘탈세계화’가 장기화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3) 트럼프 2기 행정부 관세정책의 성격과 경제적 효과 사회진보연대는 작년 경제전망에서, 트럼프 후보가 공약했던 관세와 감세 정책의 결합이 물가와 금리를 끌어올려 미국의 부채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며, 그로 인한 경제적 악영향이 1기보다 훨씬 클 것이라 보았다. 문제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 1년도 채 되지 않아 공약 대부분을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 그 결과 경제학자 사이에서 미국의 부채위기를 넘어 20세기 초 형성된 달러 기반 국제금융 체계의 위기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지경이다. 본 절에서는 트럼프 2기 관세정책의 성격과 지금까지 낳은 실물경제 측면의 효과를 먼저 살펴보겠다. ① 관세 정책의 범위와 실효관세율의 급등 트럼프 2기에서 예고·실행된 관세는 보편적 기본관세, 상호관세, 품목별 관세, 마약·이민자 이슈와 연계된 관세 등 유형이 다양하며, 대상 국가와 품목도 광범위하다. 관세율 역시 잦은 협상과 번복으로 계속 변해 그 전모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국가별 실효관세율, 즉 특정 국가로부터의 총수입액 대비 실제 납부된 관세 비율로 단순화해 정책 효과를 분석한다. [%=사진4%] [그림] 미국의 중국/나머지 국가에 대한 실효관세율과 중국의 미국/나머지 국가에 대한 실효관세율(%) (자료출처: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트럼프 1기부터 바이든 행정부까지 미국의 대중 실효관세율은 19.3%였고, 나머지 국가 대상 실효관세율은 3.0%에 그쳤다. 그러나 이는 [그림]에서 보듯 트럼프 2기 들어 급격히 상승해, 2025년 11월 10일 기준 각각 47.5%, 18.5%에 이르렀다. 관세 정책의 범위와 강도가 1기와 질적으로 다른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② 1기와 다른 점: 중국보다 ‘미국 블록’이 더 표적이 되다 트럼프 1기 관세 정책과 2기의 가장 큰 차이는 두 가지다. 첫째, 1기에는 대중 관세가 핵심이었고, 나머지 국가에는 철강·알루미늄 등 일부 품목에만 제한적으로 관세가 적용됐다. 반면 2기에는 ‘무역적자’ 자체를 줄인다는 목적을 선명히 하며, 아래 [그림]에서 보듯 1기 무역전쟁의 ‘풍선 효과’로 대미 수출이 늘어났던 미국의 동맹국과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지역, 즉 EU, 일본, 한국, 대만, 멕시코, 동남아 등이 관세의 적용 대상이 됐다. 선진국들은 단지 미국의 수입에서 중국의 빈자리를 메운 것만이 아니라, ‘전략적 경쟁’ 과정에서 중국의 생산기지나 중간재 수출지를 동남아·멕시코 등지로 이전시켰는데, 바로 그곳들이 이번 관세 부과 대상이 되면서 이중 타격을 받고 있다. [%=사진5%] [그림] 2017~2022년 사이 미국의 수출에서 각국이 점한 비중의 변화 (%p) 이는 트럼프 1기 대중 관세의 결과로 나타난 ‘풍선 효과’를 보여준다. 미국의 수입에서 중국을 대체한 이들 국가가 트럼프 2기 관세의 표적이 됐다. (출처: CEPR) 둘째, 관세를 협상 수단으로 활용해 대미 직접투자(FDI)를 끌어내는 전략이 본격화됐다. 그 대상 역시 중국 블록의 국가들보다는, 협상이 가능한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이번 한미 관세 협상에서 확인됐듯, 양국 기업이 투자를 통해 어떤 이익을 얻을지 논하기보다 액수를 늘리는 데 치중하며 고압적인 트럼프의 협상 태도는 동맹국에서조차 큰 반발을 일으켰다. ‘프렌드쇼어링’을 허용하지 않고 오직 미국으로의 ‘리쇼어링’(reshoring)만 고수하는 트럼프의 전략은 동맹국의 투자·성장 여력을 훼손한다. 게다가 이를 비효율적으로 사용할 위험성이 제기된다. (이는 3장 3절에서 다루겠다) 이런 맥락에서 포즌이 제시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실제로 더 중시하는 목표는 중국보다는 ‘미국 블록’ 국가들로부터 받는 불이익을 줄이는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다. 이는 미중 블록 간 탈동조화라기보다, ‘미국 대 나머지 세계’의 구도를 강화하는 조치에 가깝다는 것이다. 한편,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 엔비디아의 첨단 반도체 수출을 허용하며 ‘전략적 경쟁’을 거스른 것도 상징적이다. 이에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초당적으로 미 상무부 장관이 30개월 동안 첨단 칩의 대중국 수출 허가를 거부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트럼프 2기에서 더 강력해진 정책이 궁극적으로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거나 제조업을 재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전망이 지배적이다. ③ 무역적자 감축 효과: 단기적으로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불확실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으로 먼저 대중 무역적자 감축이 이뤄지고 있는지 보자. 올해 미국의 대중 실효관세율은 한때 127%까지 치솟았고(121쪽 그림), 2025년 1~7월 미국의 대중 수입은 전년 동기 대비 16.9% 감소했다가 관세가 유예된 후 8월에 일부 회복됐다. 이 과정에서 대중 무역적자는 아래 [그림]에서 보듯 올해 2분기 크게 감소했다. [%=사진6%] [그림] 트럼프 관세 부과 후 미국의 상품(서비스 제외) 무역적자 (달러, 분기 단위) 트럼프 1기 관세 부과 이후 1년 정도 무역적자가 감소했으나, 관세율이 유지되었음에도 결국 무역적자가 크게 증가했다(왼쪽 위). 이는 대중 무역적자가 초기에 감소했음에도 ‘풍선 효과’로 다른 나라 대상 무역적자가 증가했으며, 심지어 대중 무역적자도 결국 증가했기 때문이다(왼쪽 아래). 트럼프 2기에서는 2025년 1분기에 무역적자가 증가했다(오른쪽 위). 이는 관세 발효 전 미리 수입을 해놓으려는 효과에 의한 것으로 분석된다. 2분기부터는 무역적자가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으나, 베트남과 대만(반도체 관련) 대상 무역적자가 증가하는 추세다(오른쪽 아래). 이후 1기처럼 최소 1년 정도는 무역적자가 감소하리라 전망되나, 장기적 전망은 불투명하다. (자료출처: 미 경제분석국(BEA)) 수십 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전방위적 관세 부과로, 미국의 무역적자 자체를 감소시키겠다는 목표도 실현되는 듯 보인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관세 발효 이전에 미리 수입을 대거 해놓으려는 ‘선제 수입’(front-loading) 효과로 올해 초에 오히려 증가했다가, 그 효과가 차츰 사라지며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다. 다만 지금까지의 이런 결과는 트럼프 1기 때 관찰됐던 범위 내에 있다. [그림]에서 보듯 1기 때도 대중 관세 부과 후 약 1년간 대중 무역적자가 줄었다가, 실효관세율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다시 커져 2022년 1분기에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바 있다. 이후의 대중 무역적자 감소는 관세 효과라기보다, 1장에서 본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경쟁’과 중국의 ‘쌍순환 전략’이 맞물린 결과였다. 미국 제조업이 충분한 생산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특정 국가에 장벽을 세우면, 수입은 다른 국가로 이전될 뿐이라는 점, 그리고 관세가 중간재 수입가격을 올려 수출에 타격을 줘 수입 감소를 상쇄한다는 점 역시 1기 무역전쟁의 교훈이었다. 미국이 제조업 무역 적자를 해소하려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2025년 9월까지 부과된 관세보다 최소 두 배 높은 관세율이 부과되어야 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미국이 기술적 우위를 지닌 첨단 산업을 제외한) 전통적 제조업 영역에서 미국의 비교우위가 여전히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무역적자가 감축될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이번 2기 관세는 1기와 달리 매우 광범위하므로, IMF는 적어도 내년까지는 무역적자 감소 추세가 지속하리라 전망한다. ④ 관세와 FDI 유치의 제조업 부흥 효과 관세로 제조업 고용을 늘리겠다는 목표 역시 실증적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2기 관세 이후 현재까지의 자료에 따르면, 관세에 민감한 제조업 부문의 고용은 전체 제조업 고용 감소 추세 속에서 소폭 줄었다. 1기 무역전쟁에 관한 다수의 연구도 관세가 제조업 고용을 늘리지 못했거나 감소시켰다는 일관된 결론을 내린다. 이는 상술했듯 미국 제조업의 비교우위가 없는 탓인데, 현재 시점에서 더 높은 관세를 통해 서비스업 일자리를 제조업으로 이전하는 데 드는 미국 소비자의 연간 비용은 20만 달러를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세를 지렛대로 대미 FDI를 유치해 제조업을 부흥시키겠다는 구상도 단기적으로는 투자 액수를 늘릴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불확실성과 동맹국과의 갈등을 키워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지적된다. (이는 3장 3절에서 다룬다) ⑤ 미국 연방정부 재정에 대한 효과: 조세정책으로서의 관세?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를 감세와 결합해, 장기적으로 소득세를 관세로 대체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올해 관세 수입은 전년보다 크게 늘었지만, 이미 예견됐듯 재정적자를 해소하거나 소득세 수입을 대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One Big Beautiful Bill Act, 이하 ‘OBBBA’)을 통해 대규모 감세를 단행했고, 이는 미국의 재정위기 가능성을 한층 더 높이고 있다. (이는 3장 2절에서 다룬다) ⑥ 미국 물가를 상승시키는 효과 미국의 물가 흐름은 세계 전반의 추세와 점차 괴리되고 있다. IMF는 세계 소비자물가상승률(헤드라인 인플레이션)이 2025년 4.2%, 2026년 3.7%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한다. 코로나19 이후 나타난 물가 상승 둔화 흐름이 세계적으로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며, 그 주요 요인으로는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의 하락이 꼽힌다. 문제는 관세를 대폭 인상한 미국이다. 관세 인상 이전에 나타났던 선제 수입·수출 확대와 재고 축적의 효과가 점차 소진되면서, 2025년 하반기부터 미국의 물가상승률이 다시 상승세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IMF는 2025년 미국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2.7%로 제시했는데, 이는 트럼프 당선 이전인 2024년 10월 당시 하락세를 반영해 제시됐던 1.9%에서 크게 상향 조정된 수치다. 이러한 전망은 미시적 자료 분석에서도 뒷받침된다. 올해 하버드경영대학원 가격연구소는 미국의 5대 소매업체 데이터를 활용해 ▲ 수입 상품, ▲ 관세의 영향을 받는 국내산 상품, ▲ 관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국내산 상품의 가격 변동을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트럼프 관세 부과 이후, 수입 상품과 관세의 영향을 받는 국내산 상품의 가격이 관세 영향이 없는 국내산 상품에 비해 빠르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관세가 수입 상품 가격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국내산 상품의 가격 상승으로까지 파급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산 제품도 관세가 부과된 국가로부터 수입한 원자재와 중간재에 의존하며, 관세로 인해 수입품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 수요가 국내산으로 이동하면서 가격이 동반 상승하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IMF의 미국경제 성장 전망과 물가 전망을 함께 보면, 2024년 10월과 비교해 트럼프 관세의 충격으로 2025년 성장률 전망은 하향 조정된 반면(아래 [그림]), 물가상승률 전망은 상향 조정됐다. 세계경제가 전반적으로 성장률은 하락하면서도 물가 상승 압력은 점차 약해지는 흐름을 보이는 것과 달리, 미국경제는 다시금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사진7%] [그림] 2024~2026년 세계 및 각국 경제성장률 전망 (%) 2025년 경제성장률 전망에서, 트럼프 당선 이전인 2024년 10월의 전망치와 관세정책을 발표한 2025년 4월의 전망치 간의 격차가 (물론 다른 요인도 있으나) 트럼프 관세정책의 충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전시경제와 제재로 예외적인 경우인 러시아와 반도체 수출 호황이 강한 대만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경제성장률 전망이 하락했으며, 특히 멕시코·베트남의 하락이 기록적이다. 도표의 ‘아세안 5’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을 뜻한다. (자료출처: IMF) ⑦ 세계 경제성장률에 대한 효과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의 가장 중요한 거시경제적 효과는 세계 경제성장률을 하락시키는 데 있다. IMF에 따르면 2025년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트럼프 당선 이전인 2024년 10월의 3.2%에서, 2025년 4월에는 2.8%로 0.4%p 하향 조정됐다. 이는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이 촉발할 무역전쟁이 각국의 실물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반영한 결과다(위 [그림]). 이후 대중 관세가 일부 유예되고 주요국 간 관세 협상이 진행되면서 2025년 10월 전망치는 다시 3.2%로 상향 조정됐으나, IMF는 이 회복이 올해 상반기에 나타난 선제 수입 효과에 상당 부분 기인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 효과를 제거하고자 하반기에 한정해 보면, 2025년 세계 경제성장률은 연율 기준 약 3.0%로 전망되며, 이는 2024년 하반기의 연율 기준 3.6% 성장에 비해 0.6%p 낮다. 문제는 이러한 충격이 단기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미국의 실질 관세율은 여전히 약 19%로 높은 수준이며, 무역정책 불확실성 또한 해소되지 않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제 수입 효과는 소멸하고, 기업은 점차 관세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게 되며, 무역의 우회 경로가 고착할 가능성이 크다. 세계경제 전반의 효율성이 저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IMF는 단기 지표만을 근거로 관세 충격이 제한적이라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중기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우려는 더욱 분명해진다. ‘탈세계화’가 본격화한 2022년을 기점으로 세계 경제성장률의 중기 평균은 뚜렷하게 하락하는 것으로 전망된다. 2027~2030년의 연평균 성장률은 3.2%로 예상되는데, 이는 팬데믹과 지정학적 충격, 보호무역 강화 이전의 중기 평균인 3.7%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다. IMF는 세계경제의 약 3분의 2에서 중기 성장 전망이 악화하고 있으며, 하락 폭은 특히 신흥시장과 중간소득국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지역별로 보면 아시아가 특히 취약하다. IMF는 무역과 FDI 재편 과정에서 글로벌 가치사슬에 깊이 통합되고, 최근 몇 년간 대미 수출이 확대된 아시아 지역이 무역정책 충격에 가장 민감한 곳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관세 인상과 무역정책 불확실성 확대를 반영해, 아시아 국가 대부분에서 2025년과 2026년 GDP 성장률 전망치는 2024년 10월 전망보다 하향 조정됐다. 실증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무역정책 불확실성이 1표준편차 증가할 경우, 단기적으로 아시아 지역의 투자는 약 1% 감소하며, 이 효과는 신흥시장 경제에서 약 두 배 크게 나타난다. ASEAN 국가들의 성장률도 2024년 4.8%에서 2025년 4.3%로 둔화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 수치조차도 관세 협상 타결을 반영해 상향 조정된 결과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대미 무역 의존도의 차이가 성장 전망의 희비를 가른다. 대미 수출 비중이 약 12%에 불과한 브라질은 미국의 관세 인상이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비교적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대미 수출 비중이 80%를 넘는 멕시코는 미국의 관세 부과로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고, 지속되는 무역 불확실성이 성장에 장기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은 교역량 변화에 그치지 않고, 중기적으로 세계경제의 성장 경로 자체를 하향 이동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특히 무역과 투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신흥시장과 중소국가일수록 충격은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4) 소결: 국제무역 분절화의 귀결 [%=사진8%] [그림] 저소득·중소득 국가의 고소득 국가와의 소득 수렴 속도와 국제무역 참여도의 상관관계 (자료출처: WTO)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화는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의 FDI 확대와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의 제조업 수출 확대를 핵심 동력으로 삼아, 저소득·중소득 국가의 빠른 성장을 이끌고 국가 간 소득 수렴과 불평등 완화에 기여해 왔다(위 [그림]). 국제상품무역의 중심도 고소득 국가 간 교역에서 선진국과 신흥시장 간 교역으로 이동했다. 물론 모든 개도국이 소득 수렴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실패한 사례는 대체로 국제무역 참여도가 낮거나, 참여하더라도 자원 수출에만 의존해 제조업 수출로 전환하지 못한 경우였다. 이러한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FDI 유치에도 실패했다. 이는 과거 사회진보연대가 지적해 온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질서로의 ‘포섭과 배제’라는 구조와 정확히 맞물린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이러한 세계화 질서는 구조적·정치적 요인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개도국, 특히 중국에서 자본축적 심화와 이윤율 하락으로 기존 성장모델의 한계가 드러난 가운데, 이에 대한 정치적 대응은 세계화의 조정이 아니라 왜곡된 방향으로 전개됐다. 중국과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들은 국가자본주의와 자립화·블록화를 추구했고, 선진국에서는 무역적자와 제조업 쇠퇴에 대한 불만을 토대로 상품시장 개방성 자체를 낮추려는 인민주의가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두 흐름은 상호 강화되며 2010년대 중반 이후 미중 간 무역비용 상승, 무역의 블록화, FDI의 블록 내부 집중(프렌드쇼어링)이라는 탈동조화 국면을 형성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두 블록 사이의 일부 신흥시장(베트남·멕시코 등)이 단기적 수혜를 얻기도 했으며, 미국 블록의 선진국(유럽·일본·한국·대만 등)도 중국의 빈자리를 대체해 수출을 늘렸다. 2025년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이러한 흐름은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국제무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는 추세가 확고해지며, 무역과 FDI가 동시에 위축되는 ‘탈세계화’ 국면으로의 진입이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FDI에 대해서는 3장 3절에서 다룬다) 미국은 전면적 관세와 리쇼어링 전략을 통해 제조업을 자국으로 되돌리려 하며, 중국은 국유자본에 기초한 자립화와 과잉생산을 통해 수출 공간을 유지하는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가치사슬은 효율성과 비용 측면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고 있으며, 그 결과 세계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전반적으로 약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 간 소득 수렴을 저해한다. 이러한 탈세계화의 비용은 모든 국가에 악영향을 주나, 가장 큰 피해는 국내 시장이 충분히 크지 않은 저소득국과 하위 중소득국에 집중될 전망이다. 인민주의적 관세로 인한 수출시장 축소와 리쇼어링·자립화로 인한 투자 위축은 이들 국가의 성장 경로를 제한한다. 한국경제와 같이 소규모이면서 글로벌 가치사슬에 고도로 통합된 경제도 충격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포즌의 표현대로, 현재 전개되고 있는 무역정책의 변화는 승자가 없는 ‘루즈(lose)–루즈(lose) 게임’의 성격을 띤다. 다만 그 가운데에서도 중국을 제외한 신흥국과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들이 ‘시진핑의 중국’과 ‘트럼프의 미국’이라는 두 문제적 대국의 사이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으며 상대적으로 더 큰 비용을 떠안고 있다. 이는 즉각적 피해만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게임의 규칙과 WTO 같은 심판이 사라지고 힘 싸움만이 지배하게 되면, 각국 경제와 인민이 생존을 위해 치러야 할 잠재적 비용은 엄청날 것이다. 이렇듯 ‘배제’의 영역을 확대하는 국제무역의 분절화와 탈세계화의 악효과는 국제무역에 그치지 않고 달러를 축으로 한 국제금융 질서와 각국의 금융 안정성으로 파급된다. 다음 장에서는 무역 분절화에 상응하는 국제금융 분절화의 경제적 효과를 살펴본다. 3. 국제금융의 분절화: 달러 체계의 위기와 금융 불안정성 확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형성된 질서에서, 선진국과 개도국 간 무역 확대는 두 가지 자본 이동 유형의 확대와 맞물려 전개됐다. 하나는 개도국의 무역흑자를 통해 축적된 달러가 다시 선진국 금융시장으로 환류되는 수출달러 환류였고, 다른 하나는 개도국에 대한 선진국의 대외직접투자(FDI) 확대였다. 이러한 무역과 금융의 결합은 달러를 중심으로 한 국제금융 체계를 지탱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작동해 왔다. [%=사진9%] [그림] 지정학적 거리별 대외 금융자산 배분의 세계 평균 대비 초과 비중 (%p) 간단히 말해, 수치가 0보다 크면 세계 평균보다 해당 집단으로부터 그만큼 더 많이 투자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표는 지정학적 거리에 따라 자본 흐름이 분절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정학적 거리’에 따른 세 범주는 UN에서의 투표 성향 등 외교정책을 기준으로 가까운 순서대로 1/3씩 나눈 것이다. (자료출처: CEPR) 그러나 러시아의 크림반도·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중 전략적 경쟁의 심화로 국제금융 흐름에서도 뚜렷한 균열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 장에서 살펴본, 국제무역이 탈동조화와 블록화를 거쳐 탈세계화 국면으로 심화되는 과정에서, 자본 이동 역시 점차 지정학적 요인을 따라 재편되었다. 유럽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분석에 따르면, 2017년 이후 국제 자본 흐름에서도 국가 간 정치적 관계에 따른 분절화가 점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아가 2025년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동맹국을 포함한 광범위한 교역 파트너 국가들에 관세를 부과하면서, 국제금융 분절화는 기존의 글로벌 북반구와 남반구 간, 혹은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 간의 긴장을 넘어 서방 내부의 금융 질서와 ‘달러 체제’ 자체로 이동하고 있다. CEPR은 트럼프 2기가 일으키는 이런 새로운 변화를 국제금융 질서에 대한 “더 근본적인 위협”으로 규정한다. 이 장에서는 국제금융의 분절화가 달러 체계에 어떤 구조적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그 결과 세계적으로 금융 불안정성이 어떻게 확대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1) 국제금융의 분절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정체 금융세계화의 지표로 국제금융 통합도가 있다. 이는 세계 GDP 대비 대외자산과 대외채무 합계의 비율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이 지표는 1990~2000년대 급격히 상승하며 금융세계화의 심화를 보여주었으나, 2010년대 들어서는 둔화·정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요컨대 국제무역과 같이 금융세계화의 속도도 현저히 낮아졌다. [%=사진10%] [그림] 국제금융 통합도: 세계 GDP 대비 세계 대외자산·부채 총합의 비율 (%) 왼쪽은 영국이나 역외 조세피난처 등 금융중심지를 ‘세계 나머지’에 넣지 않은 경우고, 오른쪽은 금융중심지를 ‘세계 나머지’에 넣은 경우다. 어떤 국가나 지역을 기준으로 그 내국인이 외국에 직접 투자하거나 외국 자산을 구입하면 대외자산이 증가하고, 반대로 외국인이 해당 국가나 지역에 투자하면 그곳의 대외부채가 증가한다. (자료출처: CEPR) 대외자산·부채의 분포는 무역과 달리 극도로 편중돼 있다. 2023년 기준 세계 대외자산과 채무의 약 65%는 미국과 미국에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국가들에 집중돼 있다. 반면 중국과 중국에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국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몇 년 사이 2~3% 수준으로 소폭 증가했을 뿐,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물론 국제금융에서는 역외 금융중심지를 매개로 한 자본 이동 규모가 커 이러한 수치를 그대로 해당 국가·지역에 귀속시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국제금융의 중심이 여전히 미국 블록이라는 점 자체는 분명하다. 아래 [그림]의 순대외투자 지위(NIIP)은 금융세계화 질서의 작동 방식과 그 변화를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사진11%] [그림] 5개 범주에 속한 국가들의 순대외투자 지위 (세계 GDP 대비 비율, %) 순대외투자 지위(NIIP, net international investment position)란, 한 국가의 모든 대외 금융자산과 채무의 차이를 나타내는 경제 지표다. 양수일 경우 자산이 채무보다 많은 순대외자산국 지위, 음수일 경우 채무가 자산보다 많은 순대외채무국 지위에 있다고 한다. (자료출처: CEPR) ① 2000년대: 수출달러 환류와 FDI·주식 투자의 순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따른 국제금융 흐름의 패턴을 보자. 2000년대 중국의 순대외자산(+) 규모가 커진다. 이 시기 중국을 필두로 한 신흥시장의 대외채무는 주로 FDI로 구성됐고, 대외자산은 외환보유고, 특히 미국 국채를 중심으로 축적됐다. 이는 FDI에 기초한 신흥국 수출 부문의 성장과, 그 결과로 발생한 수출달러의 환류가 결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상응해 같은 시기 미국은 순대외채무국(-)이었으며, 2010년까지 순대외채무의 규모는 비교적 완만하게 확대됐다. 이는 1장에서 설명했듯 미국의 대외부채가 주로 국채로 구성된 반면, 대외자산은 FDI·주식의 고수익 자산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익률 격차 덕분에 미국은 막대한 자본유입에도 불구하고 순대외채무가 급격히 증가하지 않는 ‘특권적 이익’을 누렸다. 2000년대에는 미국뿐 아니라 미국 블록에 속한 선진국도 순대외채무국(-) 지위에 있었다. 이는 달러체제의 확장 속에서 미국 블록 전체가 세계의 저축을 흡수하는 금융 중심지 역할을 수행한 결과다. 글로벌 저축은 미국 국채 외에도 유럽·영국·일본 등 미국 블록의 금융시장 전반으로 분산 유입됐다. 동시에 이들 국가 역시 저성장에 직면하여 신흥시장 대상 대외자산을 증가시켰다. ② 2010년대: 중국·러시아 측면에서의 변화 2010년대에 들어, 위의 [그림]에서 보듯 중국의 순대외자산(+) 지위는 유지됐지만 대외채무와 자산의 구성은 뚜렷하게 변화했다. 먼저 채무 측면을 보면, 미국과 선진국으로부터 유입되던 직접투자(FDI)가 점차 감소했다. 이는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성장 둔화, 국가자본주의적 전략과 국유 부문의 비중 확대, 미·중 전략적 경쟁의 심화에 따른 투자 환경 악화를 반영했다. 자산 측면에서는 중국의 외환 보유에서 미국 국채가 정점을 찍은 후 감소하는 대신, 중국 블록의 신흥시장·개도국을 대상으로 한 은행대출과 FDI가 빠르게 확대됐다. 이는 이른바 ‘일대일로’ 사업을 매개로 한 중국의 자본 수출 확대와 직결돼 있다. (아래 [그림]을 참고하라) [%=사진12%] [그림] 2017-2023년 중국의 대상국별 순대외자산 증감(위)과 2023년 중국의 대외자산·부채(아래) (10억 달러) 2017~23년 동안 중국은 신흥시장·개도국에 대한 순자산이 증가했으며, 역외 금융중심지 및 식별 불가의 경로를 통한 순자산 증가도 확인된다. 2023년 기준, 중국의 외환 보유는 미국·유럽·식별 불가에 편중되어 있는데, 외환 보유를 제외하면 중국의 대외자산 보유 대상에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케이맨 제도와 홍콩·마카오 같은 역외 금융중심지와 ‘식별 불가’의 비중이 크다. 대외자산 구성에서 세 범주 대상 FDI와 기타 투자(대출)의 크기가 상당함에 주목할 수 있다. 한편, 2023년 기준 중국의 대외부채는 여전히 대부분 FDI로 구성되어 있고, 이 또한 대부분 역외 금융중심지를 거친다. 수출달러 환류의 핵심인 중국의 미 국채 보유를 구체적으로 보자. 세계 금융위기 당시 미국 국채는 세계의 안전자산 기능을 했고, 신규 발행 물량의 약 절반이 해외로 판매됐으며, 이 가운데 약 3분의 1을 중국이 흡수했다. 그러나 중국은 2015년 대규모 자본유출 사태와 미중 무역 전쟁, 금융·기술 제재를 거치며 달러 자산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전략을 추진했다. 그 결과 중국의 미 국채 보유액은 2013년 11월 1조 3200억 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지속적으로 감소해, 2025년 7월에는 7307억 달러로 약 45% 급감했다. (작년 경제전망에 관련 그래프가 제시되어 있다. 임지섭,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2024년 겨울호) 한편, 중국 블록 국가들도 2010년대에 순대외자산(+) 지위로 이동하는데(앞의 순대외투자 지위 [그림]), 러시아는 이런 변화의 극단적 사례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서방의 금융제재를 받은 러시아는 서방 금융시장으로부터 차츰 이탈했고,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사실상 서방 금융 체계에서 거의 완전히 배제됐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대외자산 구성을 급격히 재편했으며, 외환보유고와 자산을 비서방 통화와 실물자산 중심으로 이동시켰다. 동시에 대외채무 측면에서 FDI 유입이 급감했다. 그 결과 러시아가 순대외자산국이 된 것이다. 이는 국제금융 분절화가 지정학적 충격으로 급격히 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10년대 중국의 대외금융 전략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신흥시장과 개발도상국에 대한 투자 방식이다. 중국은 FDI보다 은행대출을 선호하며, 특히 국유 금융기관을 통한 공공보증 대출이 핵심 수단으로 활용된다. (위 [그림]에서도 대외자산에서 ‘기타 투자’의 크기가 상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전모가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대출 관행에 대한 최근 조사에 따르면, 중국 국유기관이 신흥시장·개도국에 제공한 공공보증 대출의 거의 절반이 사실상 담보화돼 있으며, 그 규모는 57개국에 걸쳐 약 4200억 달러에 이른다. 담보는 현금화가 불확실한 인프라 프로젝트 자산보다는, 중국 내 은행 계좌에 예치된 현금이나 기존 원자재 수출에서 발생하는 외화 수익처럼 유동성이 높고 중국 당국이 통제하기 쉬운 자산에 설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체적으로 신흥시장·개도국 정부와 국영기업은 원자재 수출로 발생한 외화를 중국 대출기관이 통제하는 계좌를 통해 처리해야 하며, 이 계좌에 적립되는 현금 규모는 저소득 원자재 수출국의 경우 전체 공공보증 외채 상환액의 평균 20%를 초과한다. 이는 중국이 채무 불이행 위험을 회피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지만, 해당 국가들의 외화 유동성을 제약하고 중국 블록 내부 신흥국 경제에 상당한 압박을 가한다. 요컨대 2010년대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중국 블록의 국제금융 전략은, 달러 체계로부터의 점진적 이탈과 역내·개도국을 향한 자본 재배치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순대외자산 지위를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 과정에서 중국 블록 내부의 금융 불균형과 신흥국에 대한 압박을 심화시키며, 국제금융의 분절화를 한층 더 공고히 하고 있다. ③ 2010~2024년: 미국 및 선진국에서의 변화 아래 [그림] 상단에서 보듯, 2010년대에 들어 미국의 순대외채무(-)의 증가 속도가 빨라질뿐더러, 그 구성도 변화했다. 첫째, 채권 부문의 순대외채무 규모가 정체하거나 심지어 감소했다. 둘째, 2018년을 기점으로 FDI가, 2020년을 기점으로 주식 부문까지 순대외자산(+)에서 순대외채무(-)로 전환됐다.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기의 전형적인 구조, 즉 ‘나머지 세계가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이를 기반으로 미국은 대외 투자를 확대한다’는 패턴이 약해졌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미국은 이제 신흥시장의 수출 기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자본을 잘 공급하지 않으며, [그림] 하단에서 보듯 오히려 미국 외 국가들, 특히 미국 블록의 선진국이 대미 FDI와 미국 주식 투자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자본 흐름이 변했다. [%=사진13%] [그림] 위: 미국 순대외자산(채무)의 항목별 추이 (%, 미국 GDP 대비 비중) 아래: 2017과 2023년 미국의 대상국별 순대외자산 지위 (10억 달러) 서론에서 설명한 ‘특권적 이익’ 덕에 2010년대 중반까지 느리게 증가하던 순대외채무는, 2010년대 말부터 매우 빠르게 증가한다. 2003년 이래 약 10여년 간 FDI·주식 투자에서 미국은 순대외자산국(+)이었으나, 2010년대 중반부터 순대외채무국(-)으로 전환했다. 한편, 채권에서 미국은 줄곧 순대외채무국(-)이었는데, 2000년대에는 그 규모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확대된 반면, 2010년대부터 둔화·정체하고 있다. 요컨대, 수출달러 환류와 미국의 대외투자 간의 순환이 2010년대 중반부터 약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래의 그림은 이러한 전환이 시작된 이후, 미국의 순대외채무 증가를 책임진 것은 주로 아시아 선진국, 유로존, 기타 유럽 선진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자료출처: CEPR) 요컨대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한편으로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통해 미국이 누려왔던 ‘특권적 이익’이 약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대외채무 증가 속도를 고수익 대외자산으로 상쇄해 왔던 구조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는 미국 외 신흥국과 한국 등 후발 선진국들이 더 이상 충분한 자본 유입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반대로 자본이 미국으로 회귀 내지는 도피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즉, 단순히 미국경제만의 쇠퇴가 아닌 세계경제 전반의 쇠퇴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마치 한국의 부동산 경기가 전반적으로 침체하면, 지방 부동산 가격은 하락하나 되려 서울 강남으로 쏠림이 심해지며 여기서는 가격이 폭등하듯 말이다) [그림] 하단에서 2017~2023년 사이 미국의 순대외투자 지위 변화를 대상별로 살펴보면, 중국에 대한 순대외채무(-)는 소폭 증가하는 데 그친 반면, 유럽과 아시아의 선진국을 대상으로 한 순대외채무(-)는 매우 급격히 확대됐다. 앞 절에서 서술했듯, 중국 블록이 달러 자산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음에도, 미국 블록의 선진국이 미 국채와 금융자산의 가치를 지지해 왔음을 의미한다. 한편, 미국 블록 내부에서도 재편이 진행됐다. 2010년대 미국 블록의 선진국들은 순대외자산국으로 전환했다(앞의 순대외투자 지위 [그림]). 가령 유럽은 2017~2023년 사이 중국에 대해서는 순대외채무(-) 규모가 커진 한편, 미국과 유럽의 신흥시장, 중국 블록을 제외한 일부 신흥시장(대표적으로 베트남과 멕시코)에 대해서는 순대외자산(+)을 확대해 왔다. (그래프는 생락) 바로 이러한 자본 흐름의 재편 위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이들 전반에 관세를 부과하고, 관세 협상 과정에서 미국 블록 국가들에게 대미 투자 확대를 요구한 것이다. 요컨대 2010년대 중반부터의 국제금융의 분절화는 중국과 러시아가 이탈함에도 미국 블록이 미국을 지지하는 형국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질서에서 전형적이었던 자본 흐름 패턴이 변했다. 그런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은 미중 블록 간의 분절화를 넘어, 미국 블록 내부의 자본 흐름을 재조정하려는 시도로 나가고 있다. 다음 절부터 트럼프가 가하는 위협이 미 국채, FDI, 주식이라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어떻게 금융 불안정성을 심화하는지 살펴본다. 2) 미 국채: 달러체제(dollar regime)의 위기? 상술했듯 2010년대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달러 자산으로부터의 이탈, 수출달러 환류 기반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팬데믹 전까지 미 국채 금리는 낮은 수준에서 유지됐다. 이는 여러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였다. 연준의 대규모 양적 완화(그럼에도 물가가 급등하지 않는 상황), 세계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안전자산 선호 성향, 그리고 세계적으로 대체 투자자산의 기대수익률이 낮았던 환경 덕분에 미 국채를 향한 수요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블록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미 국채 수요국인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이 그 공백을 보완하며 달러체제를 지지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계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진입했고, 이에 대응한 대규모 재정지출은 미국의 부채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다. 동시에 글로벌 공급망 붕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무역 블록화에 따른 비용 상승, 그리고 신흥국 수출 부문의 동력 약화가 겹치며 물가 상승이 급격했다. 여기에 더해 AI 산업이 출현하며 미국 주식시장을 중심으로 글로벌 자산 수익률이 상승하면서, 국채의 매력은 약해졌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되며, 앞 절에서 봤듯 2020년대 들어 미국 순대외자산 구성에서 채권 부문의 순대외채무 규모가 정체·축소되고, 미국을 비롯한 주요 통화국의 장기 국채 금리가 급등한 것이다. (코로나 위기 후 주요국 장기 국채 금리 급등에 관해서는 작년 경제전망에 그래프가 제시되어 있다. 임지섭,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2024년 겨울호) 문제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이 이러한 추세를 명백히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포즌, 옵스펠트, 로고프 등 주요 경제학자들이 최근 들어 ‘달러체제의 위기’을 거론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첫째,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관세와 감세의 결합’은 연방정부의 재정수입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며 재정적자 확대를 가속화하고 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OBBBA로 인해 향후 10년간 미국은 기존 전망치보다 약 4조 달러를 추가 차입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공언한 재정적자 감축이 실제로 이행되고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옵스펠트는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공적개발원조(ODA)는 축소한 반면, 최근 아르헨티나에 (연준이 아닌) 재무부를 통해 200억 달러 규모의 스왑을 제공한 사례를 들며, 행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재정을 자의적으로 운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둘째, 2장에서 설명했듯 관세 정책 탓에 미국경제가 성장률 둔화와 인플레이션 상승을 동시에 겪을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면서, 장기 국채 금리에 추가적인 상승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완화, 즉 금리 인하 기대와 무관하게 채권 금리가 상승하는 최근의 세계적 현상과도 맞물리지만, [그림]에서 보듯 관세 발표 후 미국에서 그런 현상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사진14%] [그림] 2024년 1월부터 달러지수 및 미국과 G10의 장기채 명목금리 격차 달러는 안전자산으로 인정받는다. 2007~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 국채 금리가 하락함에도 달러 가치는 상승할 정도로 그 지위는 공고했다. 그러나 코로나 위기 이후 스태그플레이션과 재정위기 심화 우려에 국채 금리 상승과 동시에 달러 가치 하락이 동시에 일어난 적이 있었다. 올해 4월 2일 트럼프 관세 발표 이후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데, 코로나 위기 때와 다른 점은 미국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미 국채 금리가 다른 선진국의 그것보다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달러 가치가 하락한다는 것은, 달러의 안전자산 지위가 의심받는다는 뜻이다. (자료출처: IMF) 셋째, 더 근본적인 문제는 미 국채를 둘러싼 제도적 안정성 자체가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이미 이탈한 중국 블록이 아닌,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과 민간 보유자의 신뢰 상실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초기 제기됐던 이른바 ‘마러라고 협상’ 구상은 실현되진 않았으나, 강한 신호를 준 상징적 사례로 꼽힌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가 보유한 미 국채를 장기채나 영구채로 강제 전환하거나, 달러 외 통화를 사용하는 국가를 처벌하고, 외국인 투자자에게 차별적 과세를 부과하는 방안 등을 포함해, 사실상 국채 투자자를 미국에 ‘가두겠다는’ 위협으로 해석됐다. 이런 위협보다 현실적으로는 의도적인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 연준의 독립성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과 달러 가치를 낮추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발언은 제도적 신뢰를 훼손하고 있다. 이런 우려는 최근 케빈 해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차기 연준 의장으로 유력해지며 더 커지고 있다. 한편, 최근 통과된 이른바 ‘지니어스 법’(Genius Act)은 느슨한 규제 아래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의 대규모 확산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논란을 낳고 있다. 이는 글로벌 투기 수요나 일부 국가의 통화 대체 수요를 통해 미국 국채 수요를 떠받치려는 구상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오히려 달러 자산의 안정성을 훼손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포즌은 올해 트럼프 행정부가 경제 변동성을 키우는 정책 변화를 기습적으로 발표할 때마다, 실제로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미국 장기 국채 금리가 상승하는 현상이 반복됐다고 지적한다. 과거에는 관세 부과가 달러 강세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고 트럼프 1기 때도 그러했으나, 2025년에는 관세를 발표할수록 달러가 오히려 약세를 보이는 모습이 관측되고 있다. 이는 미국 정책의 불안정성에 대한 전 세계적 우려가 전통적인 안전자산 선호 경향을 압도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위 [그림]에서 보듯 달러는 올해 들어 주요 통화 대비 약 10% 절하됐다. 미국–G10 금리차가 여전히 큰 상황에서도 나타난 이례적인 현상이다. 요컨대, 최근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장기 국채 금리 상승과 달러 약세가 함께 나타나는 현상은 단순한 경기 순환이나 통화정책 변화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무엇보다 미국 정책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훼손된 결과로, 달러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당장 달러 체제가 붕괴하진 않을 것이나, 코로나 위기 이후 특히 트럼프 2기를 기점으로 불안정성이 심화하는 중이며, 내년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에 따라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달러는 다른 통화로 대체될 수 있는가? 달러의 대체 가능성을 논할 때, 미국과 동맹국 간 관계 변화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즌은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을 상대로 취해온 적대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태도와, 미국이 주도해 온 동맹 체제가 제공하던 안보 효과가 약화되면서 각국 정부가 방위비 지출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변화는 일부 동맹국 통화의 상대적 매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다만 이는 달러가 해당 통화들로 직접 대체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달러에 대한 의존이 완만하게 분산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달러의 대체 가능성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세계 외환보유고의 구성을 보자. 달러의 비중은 2000년 무렵 약 70%에서 최근 약 58% 수준으로 낮아졌다. 그러나 이 감소분이 유로의 비중 증가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유로는 지난 20여 년간 약 20% 내외의 비중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해 왔다. 대신 비중이 가장 뚜렷하게 증가한 것은 이른바 ‘비전통적’ 준비통화들이다. 뉴질랜드 달러, 싱가포르 달러 등 소규모 선진국 통화들의 합산 비중은 약 10%에서 20%로 확대됐다. 반면 위안화의 비중은 글로벌 외환보유액의 약 2%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지난 5년간에도 큰 변화가 없다. 또 하나 주목할 요소는 금이다. 현재 공식 준비자산의 약 20%가 금으로 보유되고 있으며, 이는 달러 비중이 준비자산 전체의 절반 이하, 유로는 약 16~17% 수준이라는 의미다.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은 최근 몇 년간 크게 늘어났다. 이는 장기적으로 달러의 중심성이 점진적으로 약화될 가능성에 대비하는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로의 경우, 한편으로는 통화의 국제적 역할을 확대할 수 있는 조건들이 일부 형성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방위비 부담을 동맹국에 전가하는 과정에서, 북유럽·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국채 발행을 통한 방위비 지출이 늘어나며 EU 국채 시장의 규모와 깊이가 확대되고 있다. 또한 유로는 우크라이나, 발칸 국가들, 중동과 북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에 법적 안정성과 제도적 예측 가능성 측면에서 매력적인 통화로 인식되고 있다. EU는 일단 결정을 내리면 이를 쉽게 번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신뢰를 준다. 그러나 유로화의 경제적 매력도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유럽 경제의 성장 흐름은 최근까지도 전반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2장에서 봤듯 트럼프 2기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동시에 압박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자본시장 통합에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지정학적 측면에서도 유럽연합은 여전히 미국의 안보 보장에 크게 의존하며, 완전한 전략적 자율성을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럽의 방위비 확대가 실제 군사 역량 강화로 이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최근 재정적자를 둘러싼 EU 주요 회원국들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재정 안정성에 대한 우려 역시 적지 않다. (군비와 재정을 둘러싼 유럽의 위기에 관해서는 이번 호 김영진의 「정치와 질서가 해체되어 가는 세계」를 보라) 위안화는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낮은데, 이는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적 정책 방향과 깊이 연관된다. 중국은 2015년 대규모 자본유출 사태 이후 환율 제도의 유연성을 일부 확대했으나, 여전히 수출을 위해 위안화 가치를 낮게 통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동시에 선진국은 물론 저소득·중소득국과도 수출 경쟁을 벌이며, 저숙련 제조업 분야에서도 신흥국의 수출 확대를 제한하려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자본통제와 금융시장 발전의 제약, 그리고 GDP 대비 300%에 이르는 높은 부채 수준은 위안화의 국제화를 제약한다. 법치, 금융시장의 깊이와 유동성, 가격 형성의 자율성 측면에서 중국은 여전히 미국이나 유럽에 크게 뒤쳐진다. 종합하면, 현재로서는 달러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는 단일한 세계화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이나 중국이 미국보다 먼저 재정·금융 불안정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달러 가치를 낮추거나 미 국채의 사용을 유지·확대하는 다양한 시도를 할 경우, 단기적으로는 일정한 효과를 거둘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안전자산으로서 달러의 신뢰를 훼손하고, 국제금융 체계의 안정성을 약화할 위험을 내포한 도박에 가깝다. 포즌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 (세계에 공급한 글로벌 공공재의) 체제에 가한 변화 중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달러의 유동성을 약화한 것이다. 이는 전 세계 저축자의 포트폴리오 안전성을 떨어뜨린다. 과거에는 거의 무위험으로 여겨지던 미국 자산이 이제는 완전히 안전하다고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전 세계 자본의 가용성과 흐름에 장기적·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3) FDI: 대미 투자 확대의 성격과 트럼프 2기 FDI 유치의 한계 미중 ‘전략적 경쟁’으로 2010년대 후반부터 세계 FDI는 이미 분절화되기 시작했다. 연구들에 따르면 이 과정은 이념적으로 먼 국가(가령 중국과 러시아)로부터의 이탈, 정치적으로 정렬된 국가 중심의 투자(프렌드쇼어링), 고위험 국가에 대한 노출 축소(디리스킹), 생산의 인근 이전(니어쇼어링), 그리고 일부 본국 회귀(리쇼어링)라는 다섯 가지 방향으로 진행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미 FDI는 트럼프 2기 이전부터 이미 확대되고 있었다. 2020년대 들어 세계 전체 FDI가 감소 추세에 접어든 가운데,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크게 상승했다. 이 시기 대미 FDI 증가는 전기차·배터리·재생에너지·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의 대형 프로젝트가 주도했다. 이는 미국의 기술적 우위와 인재·벤처 생태계,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 시기의 IRA·CHIPS법과 같은 산업정책에 따른 유인 효과로 설명된다. 다시 말해 대미 FDI 확대는 관세 압박의 결과라기보다, 투자수익률과 제도적 안정성에 기초한 현상이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등에서 국내 투자수익률이 대외 투자수익률을 하회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신자유주의 시기 FDI 대상이었던 중국에서는 수익성이 악화되는 가운데 국가자본주의 강화로 제도적 불확실성이 커졌다. 이 두 요인이 결합하며 글로벌 기업의 투자 방향은 점차 중국을 벗어나 미국과 일부 신흥국으로 이동했다. 실제로 중국이 받는 FDI는 2022년 이후 급격히 둔화됐다. [%=사진15%] [그림] 중국과 중국 외 신흥시장의 자본유입(위) 동남아 5개국의 FDI 유치(아래) 왼쪽: 중국과 신흥시장의 명목 GDP 대비 FDI, 채권·주식 투자, 기타 투자 유입액 비중 (%, 분기 단위, 4개 분기 이동평균) 오른쪽: 동남아 5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태국·베트남)의 FDI 유치 발표 건수 (건수, 분기 단위) (자료출처: 브루킹스연구소, IMF)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관세 협상을 통해 대미 FDI를 ‘강요’하는 방식은, 전략적 경쟁 속에서 이미 진행 중이던 FDI 재편 흐름을 오히려 교란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는 12조 달러 규모의 신규 FDI 유치를 공언했고, 벌써 9조 6천억 달러를 달성했다고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는 민간 기업의 자발적 투자 계획까지 포함한 수치이며, 12조 달러 목표는 과거 실적을 크게 상회하는 매우 비현실적인 규모다. 특히 관세 압박으로 끌어낸 투자 약속은 자원 배분과 수익성에 대한 구체 계획이 불분명해, 대규모의 비효율로 이어질 가능성이 지적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접근이 장기적으로 대미 FDI의 제도적 유인을 약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투자된 기업이 처할 수입 관세의 불확실성, 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과세 가능성(다만 OBBBA 국세법 899조 신설안은 철회되었다), 반이민 기조와 비자 정책의 경직성 등이 법인세 감면 효과를 상쇄하리라 전망된다. 포즌은 이런 환경이 지속되면 단기적으로는 압박을 통해 FDI 유입을 늘릴 수 있을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대미 투자를 위축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아울러 트럼프 2기 정책은 신흥국으로 향하던 FDI 흐름을 추가로 위축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는 중국·러시아에서 이탈한 FDI가 동남아나 멕시코 등 일부 신흥국으로 재배치될 경로가 열려 있었으나,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오직 미국으로의 대규모 투자만을 요구한다. 이는 선진국의 부담을 가중하는 동시에, 신흥국의 성장과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 공급을 축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공백을 중국의 국유 금융이 채우면서, 신흥시장·개도국이 중국에 대한 금융적 의존을 더 키우는 역설적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즉 ‘전략적 경쟁’의 구도를 스스로 약화하는 효과가 있다. 4) 위험자산 쏠림과 금융 불안정성의 확대 국제금융 분절화가 심화하면서 세계의 저축을 안정적으로 흡수하던 안전자산의 지반이 점차 흔들리고 있다. 그 결과 비달러 통화, 금, 그리고 최근에는 암호화폐와 같은 대체 자산의 가격이 급등했다. 그러나 이들 자산은 유동성이 낮아 가격 상승이 곧바로 높은 변동성과 주기적인 금융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글로벌 자금은 위험자산 중 상대적으로 시장이 깊고 유동성이 높은 미국 금융시장, 특히 주식시장으로 집중되고 있다. 비미국 투자자의 미국 증권 보유액은 2015년 16조 달러에서 2024년 31조 달러로 거의 두 배 증가했으며, 최근에는 달러 약세에도 불구하고 위험자산 가격이 동반 상승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무역 긴장, 지정학적 불확실성, 재정적자 확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음에도 금리가 낮아지며 금융 여건은 완화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자산 가격은 다시 높은 평가 수준(valuation)으로 복귀했다. [%=사진16%] [그림] 2025년 각국 주식시장의 시가총액 지수(왼쪽) 미국 S&P500 전체 기업과 기술 기업의 주가수익비율 및 집중 위험도(오른쪽) 주식시장의 집중 위험도(concentration risk)는 허핀달-허쉬만 지수(Herfindahl-Hirschman Index)를 이용하여 구한 것인데, 이는 주식시장의 시가총액 기준 상위 기업들이 전체 시가총액에서 점하는 비율을 기반으로 지수화한 것이다. (자료출처: IMF) 미국 주식시장 내부에서도 극단적 쏠림이 나타난다. 최근 주가 상승은 광범위한 분야의 기업 실적 개선보다는 AI 관련 초대형 기술주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른바 ‘매그니피센트 7’(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아마존, 엔비디아, 테슬라, 메타)이 S&P 500 전체 시가총액의 35% 이상을 차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IMF 금융안정보고서의 평가 수준 지표들은 위험자산 가격이 펀더멘털을 상당히 상회하고 있음을 시사하며, 부정적 충격이 발생했을 때 급격한 가격 조정의 가능성이 높아짐을 보여준다. 실물 투자 역시 이러한 불균형을 반영한다. 미국의 기업 설비투자는 올해 견조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나, 증가분 대부분은 AI 관련 부문에 집중되어 있다. 즉 현재의 투자 확대는 특정 기술과 산업에 대한 기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문제는 AI 산업이 아직 본격적인 이윤 창출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가운데 대규모 자본투자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재 상황을 단순히 ‘AI 버블’로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안전자산 부족과 자본의 편중, 그리고 위험자산 평가 수준의 급등이 결합하며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이 누적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국제금융 분절화와 달러 체제의 불안정성이 금융시장 전반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 5) 소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거치며 세계화폐로서 달러의 가치는 국제무역·국제금융의 순환 구조 속에서 지탱되어 왔다. 신흥시장의 수출 성장에 기반한 수출달러 환류와 선진국의 대외투자가 다시 달러와 미국 국채의 가치를 지지하며, 낮은 금리와 높은 대외투자 수익률의 결합이라는 이른바 ‘특권적 이익’을 재생산했다. 이러한 순환은 미국과 선진국, 그리고 일부 신흥시장 모두의 성장에 기여했다. 그러나 지정학적 갈등의 심화와 중국·러시아의 전략 변화, 여기에 미국의 정책 기조 변화가 맞물리며 이 순환은 더 이상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고 있다. 첫째, 신흥시장의 수출 성장은 둔화되고, 과잉경쟁이 심화되며, 성장의 동력이 약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둘째, 수출달러 환류의 기반 역시 약화되었고, 특히 중국 블록의 이탈과 더불어 환류 흐름이 점차 블록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셋째, 신흥시장과 미국 간의 수익률 격차가 축소되거나 일부에서는 역전되면서, 신흥시장으로의 직접투자 유인이 약해지고 있다. 넷째, FDI는 점차 블록 내부로 집중되어 왔다. 나아가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들어서는 미국으로의 일방적 집중이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국제금융 거래의 세계적 범위는 점차 축소되었다. 그 결과 미국 국채의 안전자산 지위는 약화한 반면, 미국 주식시장으로 전 세계 자본이 쏠리는 불균형한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달러를 대체할 명확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가 새로운 안정적 질서로의 이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계경제가 오랫동안 의존한 안전자산 공급의 구조 자체가 점차 취약해지고 있을 뿐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와 감세의 결합’, 나아가 자본시장의 제도적 안정성을 훼손할 수 있는 여러 시도는 이러한 취약화를 가속하며 제2차 세계전쟁 이후 형성된 국제금융 체계를 흔들고 있다. 무역·금융세계화를 통해 확장된 지반 위에서 유지되어 온 달러의 가치는, 이미 그에 상응해 미국의 재정적자가 크게 확대된 상황에서, 국제무역·금융을 제약하며 그 지반을 미국 내부로 축소하면 유지될 수 없다. 대안을 동반하지 않은 채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길이라는 점에서, 트럼프식 정책 전환은 세계경제 전반에 상당한 위협을 가한다. 4. 한국경제: 성장이 멈춘 가운데 재정적자와 금융 불안정성이 급격히 확대 국제무역과 금융의 상황이 이렇다보니,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경제는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받고 있다. 먼저 한국은행·KDI 등의 경제전망을 토대로 1)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 후, 2) 무역 전쟁의 효과, 3) 재정적자 확대, 4) 금융 불안정성 확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전체 그림: 양극화의 심화 대다수 기관은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2024년 2.0%에서 올해 0.9%로 급락한 뒤, 2026년에는 잠재성장률과 같은 1.8%로 반등할 것으로 전망했다. 올해 3분기 반도체 수출 호조로 성장률이 예상보다 개선되면서, 11월에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0%로 0.1%p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회복 전망의 배경으로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거론된다. 첫째, 수출의 선방이다. 관세 부과 전 ‘선제 수입’의 효과로 자동차 수출이 예상과 달리 증가했고, 더 중요한 요인으로는 미국의 AI 설비투자 확대에 따른 반도체 수출 급증이 있다. 둘째, 대미 관세협상이 타결되면서 성장률에 예상됐던 부정적 충격이 일정 부분 완화됐다는 점이다. 트럼프 관세 부과로 수출 둔화는 불가피하지만, 타결 이전 전망에 비해 낙폭은 다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 내수의 완만한 회복이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급격히 위축됐던 민간소비가 점차 회복됐으며, 이재명 정부의 소비쿠폰 지급은 회복세를 더 가속했다. 건설업은 여전히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으나 느린 속도로 회복하고 있으며, 내년 정부의 SOC 투자 예산이 크게 늘며 회복세가 한층 빨라질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회복 신호가 한국경제 전반의 여건이 개선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수출 부문 내부의 양극화가 빠르게 심화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수출 회복 국면에서 수출 부문 내 양극화는 더욱 뚜렷해졌다. 수출액에서 상위 10대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2분기 31.1%에서 2025년 3분기 40.0%까지 상승했다. 특히 최근 1년 사이 급격한 집중이 나타났다. 최근 수출 호조는 반도체와 조선 등 특정 산업과 일부 대기업에 집중돼 있으며, 관세 충격으로 전체 수출 증가율이 둔화하는 가운데 다수 산업은 오히려 타격을 받고 있다. 반도체 수출 호조는 세계 AI 투자 확대라는 외생적 요인에 크게 의존한 것으로, 한국경제 전반의 투자·생산성 회복을 견인하는 내생적 동력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도체 부문을 제외한 대부분 산업에서는 설비투자도 정체 상태에 머물고 있다. [%=사진17%] [그림]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대기업/중소기업 생산지수 증감율 (위)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세부 업종별 생산지수 증감율 (아래) 제조업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성장률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2025년 3분기 제조업의 생산 확대는 반도체 수출 호황에 의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서비스업에서는 25년 3분기 중소기업의 생산이 확대되고 있는데, 이를 이끄는 업종은 도소매 및 숙박·음식업으로, 이재명 정부의 소비쿠폰 발행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자료출처: 중소벤처기업연구원, KDI) 둘째, 제조업을 중심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성장률 격차도 구조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중소 제조업의 성장률은 대기업을 따라가지 못한 채 낮은 수준에 머문다. 올해 9월 이후 수출 개선 덕분에 일부 중소 제조기업의 성장률이 간신히 플러스로 전환됐지만, 그 이전까지는 생산 규모 자체가 축소되는 흐름이었다. 앞서 언급한 수출 부문의 양극화를 감안하면, 일부 기업을 제외한 중소 제조기업의 업황은 여전히 부진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관세 충격 역시 중소기업에 더 크게 작용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중소 제조기업의 부문별 경기전망지수(SBHI)도 대부분 부문에서 올해 중반 이후 큰 폭의 하락이 나타났다. 셋째, 수출 둔화 속에서 내수의 성장 기여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현상을 긍정적으로만 해석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내수 의존도가 높은 서비스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성장률 격차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지만, 민간소비가 회복되더라도 성장률 자체는 수출 제조업에 비해 구조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소비쿠폰 지급 이후 서비스업 중에서도 특히 소상공인과 전통시장 부문의 기업경기실사지수(BSI)가 급등했는데, 이는 고질적인 저생산성 구조의 서비스업이 정부 재정지출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또한 양극화의 한 단면이다. [%=사진18%] [그림] 경제성장률에 대한 지출 부문별(왼쪽) 및 내수·수출(오른쪽)의 성장 기여도 (자료출처: 한국은행) 수요 측면에서 성장률 전망을 분해해 보면, 재화수출과 설비투자의 기여도는 하락하는 반면, 민간소비의 기여도는 상승하고 건설투자는 음의 기여에서 소폭의 양의 기여로 전환될 전망이다. 이 가운데 민간소비와 건설투자 요인은 정부 재정지출의 영향이 크다. 민간에서는 수출 제조업에서 일부 대기업만 호황을 누리고 중소기업은 약화되는 반면, 설비투자는 전반적으로 부진하다. 서비스업은 계속 성장하지만 이는 저임금·저생산성 부문이 중심이다. 정부 지출이 떠받치는 건설업이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는 정도다. 결국 일부 수출 대기업만 성장하고, 그 외 다수 부문은 정체 또는 후퇴하는 가운데 저임금 서비스업만 확대되는 구조가 고착화하며, 정부 재정에 대한 성장의 의존이 심해지고 있다. 정부 재정지출은 단기적으로 경기 하방을 완충하는 역할을 하지만, 민간 투자와 생산성 개선이 아니라 재정지출에 점점 더 의존하여 성장하는 것은 중장기적 취약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성장 구조에 상응하여 고용 전망도 양극화의 심화를 보여준다. 건설업과 제조업 고용은 건설경기 회복 지연과 미국 관세 영향으로 예상보다 부진한 반면, 서비스업 고용은 정부의 일자리 정책과 소비 개선 효과로 증가폭이 소폭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KDI는 내수 회복에 따라 고용 여건이 완만히 개선되겠지만 인구 구조 변화로 내년 취업자 수 증가는 올해 17만 명보다 줄어든 15만 명 수준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이런 고용 증가의 상당 부분은 몇몇 수출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 저임금 서비스업 일자리에 집중될 전망이다. 결국 고용 측면에서도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더 자세한 고용 전망은 이번 호 이소형의 「2026년 노동 정세전망」을 보라) 2) 무역 전쟁과 트럼프 관세의 효과 한국경제에서 무역 전쟁의 효과는 단지 수출 증감의 수치만이 아니라, 중국 시장의 구조적 상실과 미국 시장 의존의 불안정성 확대라는 이중 충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미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한국경제의 국내 투자수익률이 해외 투자수익률을 하회하며 성장 동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미·중 전략적 경쟁과 트럼프 관세는 이러한 취약성을 한층 심화시켰다. 먼저 ‘2차 차이나 쇼크’가 주는 충격이다. 한국의 대중 수출은 중간재·자본재에 크게 의존했으나, 2010년대 중반 이후 반도체를 제외한 대부분 품목에서 수출이 정체되거나 감소했다. 그 결과 2024년에는 수교 이래 처음으로 대중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직접 수출뿐 아니라, 중국 생산에 한국 중간재가 얼마나 투입되는지를 보여주는 수출연계생산 역시 2021년을 기점으로 감소세로 전환되었다. 이는 경기 요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중국의 중간재 자립, 최종재 자국화, 그리고 공급망 재편이라는 구조적 변화의 결과다. 섬유·의복에서 시작된 이러한 변화는 철강, 화학·정유를 거쳐 최근에는 IT 산업까지 확산되며, 한국 제조업의 중국 의존적 성장 모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진19%] [그림] 산업별 총산출 중 대중 수출연계생산의 비중 변화 (%p) 대중 수출연계생산이란, 중국에 직접 수출한 것 외에 중국에서의 생산의 후방산업(중간재 생산) 전반을 포괄한 것이다. 가령 중국으로의 수출품에 들어가나 국내에서 생산된 중간재, 한국 기업이 베트남 등지에서 생산했으나 중국으로 수출된 중간재 등을 포함한다. (자료출처: 한국은행) 여기에 트럼프 관세의 효과가 더해졌다. 트럼프 1기 미중 무역전쟁의 결과 201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대미 수출과 대미 투자가 증가했다. 물론 멕시코 등으로의 수출과 투자도 증가했다. 투자된 기업은 다시 한국이나 ASEAN의 한국 기업의 고숙련/저숙련 중간재를 수입했다. 다만 최근에는 미국 내 현지 조달 비중이 점차 확대 중이다.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은 그런 흐름을 강화하고, 멕시코나 베트남 등 대체 경로를 제한하려 한다. 작년 산업연구원의 관세 시나리오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현 관세와 가장 유사한 시나리오(멕시코·캐나다에는 10%, 중국에 60%, 한국을 포함한 그 외 국가들에 20%의 관세를 부과)에서 한국의 대미 수출은 13.1% 감소, 부가가치 손실도 10.6조 원으로 추정되며 상당한 크기다. [%=사진20%] [그림] 트럼프 2기 관세가 한국 제조업에 미치는 영향 추정치 (%, 조 원) 이는 작년에 트럼프 행정부가 멕시코·캐나다 10%, 중국 60%, 한국 포함 나머지 국가 2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는 시나리오 하에서 추정된 것이다. 실제 관세 부과와 협상 이후의 조건에서 추정한 분석은 아직 없다. (자료출처: 산업연구원) 무엇보다 무역전쟁의 비용은 중소기업과 후방산업에 집중되고 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관세의 간접 영향권에 속한 한국의 제조업 기업이 절반에 육박해, 이들과 직접 영향권에 속한 기업을 합치면 3분의 2 정도를 점한다. 트럼프 2기 관세의 광범위함 탓에, 미국에 완제품을 수출하는 기업뿐만 아니라, 미국 수출기업에 부품·원자재를 납품하는 기업, 미국 기업에 부품·원자재를 수출하는 기업, 중국에 부품·원자재를 수출하는 기업, 멕시코·캐나다로 수출하는 기업, 제3국(중국·멕시코·캐나다 제외) 수출 및 내수기업이 전방위적으로 타격을 받는다. 대응 능력 또한 기업 규모에 따라 크게 갈리며, 중소기업일수록 대응 계획이 없는 비중이 높다. ① 석유화학: ‘2차 차이나 쇼크’의 효과 국제무역 구조의 변화가 가하는 충격은 석유화학산업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나프타를 원료로 하는 구조상 원유 정제와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으며, 그동안 중국을 최대 수출시장으로 삼아 성장했다. 그러나 2020년대에 접어들며 이 성장 경로는 구조적 전환점에 직면하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중국의 자급률 상승이다. 중국은 2018년 대비 2023년 글로벌 에틸렌 생산능력 증가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대규모 증설을 단행했으며, 이는 한국의 증설 규모를 크게 상회한다. 그 결과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의 수입 수요가 구조적으로 축소되었다. 2010년대 후반까지 전체 석유화학 수출의 절반가량을 흡수하던 중국의 비중은 최근 40% 초반 수준으로 하락했다. 이는 단순한 경기 변동이 아니라, 중국의 자립화 전략과 과잉증설에 따른 구조적 변화다. 여기에 보호무역 강화가 겹쳤다. 미·중 무역 분쟁의 장기화와 블록화된 가치사슬의 형성,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도입, 반덤핑 제소 증가 등은 석유화학과 같은 범용 소재 산업의 교역 환경을 전반적으로 악화시키고 있다. 특히 중국의 과잉 생산능력이 글로벌 시장으로 방출되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은 가격 경쟁과 무역 장벽이라는 이중 압력에 노출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 역시 구조적 취약성을 강화한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원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중동·러시아를 둘러싼 지정학적 불안정성은 원가 변동성을 크게 확대한다. 다만 여기에는 조달선 다변화를 통해 일정 부분 대응이 이뤄져 왔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지정학적 리스크 자체보다는 중국의 자급률 상승과 보호무역 강화가 더 근본적인 위협이라고 평가한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은 석유화학산업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보다는, 이미 진행 중인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가속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대미 석유화학 수출 비중이 크지 않다는 점에서 단기적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으나, 보호무역 강화와 블록화된 공급망이라는 장기적 환경 변화 속에서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입지는 점차 축소되고 있다. ② 철강: ‘2차 차이나 쇼크’와 트럼프 관세의 결합 철강산업은 ‘2차 차이나 쇼크’와 트럼프 관세의 효과가 결합한 대표적 부문이다. 국내에서는 건설경기 침체 장기화와 제조업 성숙화로 내수가 위축되며 2024년 내수와 생산이 모두 감소했고, 중국의 내수 부진과 과잉공급은 중국산 수입 급증으로 이어져 국내 가동률 하락과 수익성 악화를 초래했다. 이에 기업들은 다른 시장으로의 수출 비중을 높이며 버티고 있으나, 수출단가 하락이 지속되면서 물량 증가에도 금액 기준 수출은 약화되는 ‘저가 압박’이 심화되고 있다. 게다가 주요 시장의 보호무역 강화가 수출 여력을 제약한다. 미국은 철강 수요가 생산을 상회해 구조적으로 수입 의존도가 높지만, 2025년 관세 강화 이후 미국 시장에서 수입산 점유율이 낮아지고 있다. 이에 미국 외 지역으로의 수출 확대(인도·베트남·튀르키예·브라질 등)로 충격을 완화하려는 다변화가 진행 중이다. 다만 강관류처럼 대미 의존도가 높은 품목은 대체 시장이 제한적이고, 미국 시장에서 경쟁국 간 점유율 경쟁이 나타나 관세 환경이 장기화할수록 수익성과 물량 모두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③ 자동차 및 부품: 트럼프 관세의 효과 미국 시장 의존도가 매우 높은 자동차산업은 트럼프 관세의 단기 효과와 중기 효과가 가장 잘 나타나는 사례다. 관세 부과 이후 대미 자동차 수출은 감소했으나, 감속 폭은 예상보다 제한적이었다. 전체 자동차 수출도 다른 지역으로의 수출 증가에 힘입어 큰 감소 없이 유지되었다. 특히 중앙아시아와 유럽 일부 국가로의 수출 확대는 대미 수출 감소분을 상당 부분 흡수했다. 또한 현대차의 미국 신공장 가동 확대에 따라 미국 내 생산과 판매가 빠르게 늘면서, 현대·기아차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오히려 상승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관세 부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산업은 수출, 생산, 판매 측면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성은 관세 충격을 흡수한 결과라기보다, 기업이 비용을 내부화한 결과에 가깝다. 관세 부과 이후에도 미국 시장에서 판매 가격을 인상하지 않아, 관세 부담은 고스란히 기업 이익 감소로 전가되었다. 실제로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매출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과 영업이익률이 큰 폭으로 하락했으며, 미국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GM은 관세 부과 이후 빠르게 적자로 전환되었다. 관세를 고려해 출고가와 수출 단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가격을 유지한 결과, 대미 수출 평균 단가는 관세 부과 이전보다 뚜렷하게 하락했다. 요컨대 신공장 가동과 지역 다변화를 통해 단기적인 물량 조정은 가능했으나, 가격 경쟁이 치열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관세를 판매 가격에 전가하기는 어려웠다. 그 결과 관세는 이익 감소라는 형태로 누적되고 있다. 이는 자동차산업 역시 석유화학·철강과 마찬가지로, 겉보기와 달리 중기적으로는 투자 여력과 고용, 하청 구조에 부담을 축적하는 경로에 놓여 있음을 시사한다. 자동차산업 내부에서도 관세 충격은 가치사슬 하단으로 갈수록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완성차 업체와 달리 자동차 부품업체는 미국 수출 감소를 다른 지역 수출로 대체하기가 훨씬 어렵다. 한국의 자동차 부품 수출은 대부분 한국 완성차 업체의 해외 생산에 연동되어 있는데, 현지에서 부품을 조달하는 비중은 이미 장기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여기에 미국의 자동차 부품 관세가 더해지면서, 완성차 업체들은 미국 내 조달을 더욱 늘릴 유인이 생겼다. 이는 국내 부품업체의 수출 기반을 직접적으로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관세 부담을 소비자 가격으로 전가하지 못한 완성차 업체들이 출고 가격을 낮추는 전략을 택하면서, 부담은 부품 단가 인하 요구로 전가되고 있다. 미국 시장뿐 아니라 제3국 시장으로 수출을 다변화하기 위해서도 가격 인하가 불가피해, 부품업체들은 이중의 가격 압박에 직면해 있다. 이런 하방 압력에 의한 조정은 단기적인 경쟁력 유지에는 기여할 수 있으나, 중소 부품업체의 수익성과 투자 여력을 크게 훼손함으로써 자동차산업 전반의 중기적 안정성을 약화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올해 관세 협상에서 쟁점이 됐던 대미투자 문제를 짚자. 2장 3절에서 언급했듯 트럼프 행정부가 요구하는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투자는 과도한 요구다. 다만 통합된 세계경제에서 무역이나 대외투자 자체가 단순히 ‘악’은 아니며, 그 경제적 이익과 손실을 구체적으로 논해야 한다. 요컨대 ‘투자 여부’ 자체가 아니라 ‘어떤 투자이며, 무엇을 대가로 얻는가’가 문제다. 미국은 여전히 반도체, 첨단 제조, 에너지, 방위산업, 디지털 기술 등에서 기술적 우위를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과 공동 투자를 통해 기술·시장·표준을 확보할 여지는 존재한다. 문제는 관세 협상에서 조선업을 제외하면 대미투자의 구체적 용도나 산업적 연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 측의 일방성 탓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산업별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준비된 전략을 제시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단순한 투자 총액이나 수익 배분에 관한 논의를 넘어, 산업별로 기술 이전, 공급망 지위, 시장 접근, 표준 선점 등 구체적 교환 조건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대미투자는 3장에서 서술했듯 비효율로, 국내에서는 그저 산업 공동화를 가속하는 비용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3) 재정적자와 정부부채의 급격한 확대 사회진보연대는 작년 한국경제 전망에서 이미 한국 정부부채의 절대 규모와 증가 속도가 위험 수준에 있음을 지적했다. 한국은 코로나19 이후 정부부채가 명목 GDP 성장률을 크게 상회하는 속도로 증가해 왔다. 이는 사실상 폰지 재정 상태다. 부채의 질적 구성도 악화하고 있다. 대응 자산이 있는 금융성 채무보다, 향후 조세로 상환해야 하는 적자성 채무의 비중이 빠르게 높아졌다. 여기에 공기업 부채와 정책금융 부채까지 포함한 공공부문 부채(D3)를 고려하면, 그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한다. 게다가 2년째 세수 결손이 발생하고, 국고채의 차환 발행 비중이 증가하며 순발행 비중이 하락하고 있다. (이아림, 「한국경제 전망과 제약 조건」,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겨울호)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 위에서, 최근 재정정책 기조의 변화는 부채 문제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올해에만 두 차례의 추가경정예산이 편성·집행되었고, 그 규모는 42조 원이 넘는다. 이는 경기 대응을 넘어 재정 확장 기조의 신호였다. 2026년도 본예산안에서도 그런 기조 변화가 분명히 드러났다. 총지출 증가율은 8%를 상회하며, 이는 코로나19 시기를 제외하면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국가재정운용계획(2025~2029년)에 따르면 향후 수년간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GDP 대비 4%대에서 고착화되고, 국가채무비율 역시 빠른 속도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확장 기조가 중기적으로 고정되는 양상이다. 재정 기조 변화의 결과는 금융시장의 반응을 통해 즉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올해 들어 기준금리는 인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고채 장기금리는 오히려 상승하며, 이례적인 정책·시장금리의 탈동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재정 확대와 국채 공급 증가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장기금리에 반영되며, 금리 정책으로 시장금리를 조절하기 어려워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12월 9일 기준 국고채 3년물을 비롯한 5년물과 10년물의 금리는 각각 3.084%, 3.302%, 3.453%로 연중 최고치를 갱신했다. 국고채의 차환 발행 비중이 높아지고 순발행 여력이 줄어드는 가운데, 향후 대규모 국채 발행이 예고되면서 재정 조달 비용은 구조적으로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정부부채 증가에 따른 국채 금리 상승을 추정한 KDI의 연구에 따르면, 금리가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정부부채가 2000조원에 도달하는 2030년에는 4.847% 수준에, 2040년에는 6.952%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확장 재정이 더이상 저금리 환경 속에서 무리 없이 흡수되지 않는 국면으로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사진21%] [그림] 정부부채 증가율 및 국채 이자율에 대한 장기 전망치 (%) 이는 작년에 추정된 것으로,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재정지출 전망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자료출처: 양주영, 2024)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가 올해 행한 정부조직 개편은 우려를 더욱 키운다. 기획재정부의 축소, 예산 기능의 분리, 금융정책 조직의 재편은 대통령의 재정·금융 정책 통제력을 강화하는 방향이다. 이번에 개편된 재정·금융기구의 구조는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개발국가 모형이나 IMF 위기 대응 국면의 김대중 정부에서 나타났던, 강한 국가 통제 모델과 유사하다. 재정 규율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장치들이 약화되는 가운데, 재정정책의 정치화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 재정준칙 도입 논의가 사실상 후퇴한 상황에서, 확장재정과 제도적 견제 약화가 결합할 경우 재정 신뢰는 빠르게 훼손될 수 있다. 이는 3장에서 서술한 국제적인 자본도피의 흐름 속에서, 원화 가치 하락과 국채 금리 상승, 나아가 자본 유출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미 환율의 구조적 상승이 실제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룬다) 부담은 결국 저축 여력이 낮고 금융자산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소득 하위계층 가계에 집중될 것이다. 4) 금융 불안정성의 급격한 확대와 자본유출 ① 유동성 확대 올해 한국은행은 유동성 완충을 확보하는 기조를 보였다. (유동성 완충(Liquidity Buffer)은 금융기관이나 기업이 예상치 못한 유동성 위기나 혼란기에 자금을 즉시 조달하여 현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두는 안전 자산이나 예비 자금을 의미한다.) 한국은행은 올해 7월부터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처음으로 정기화했다. 환매조건부채권이란, 채권 매입자/매도자가 정해진 미래의 날짜에 채권을 다시 팔기/사기로 약속하는 조건이 붙은 채권이다. 한국은행이 RP 매입을 하면, 시중은행은 잠시 채권을 내어주고 유동성을 얻은 뒤 정해진 날짜가 되면 다시 채권을 얻고 유동성을 돌려준다. 그런데 한국은행은 이를 정례화하여, 사실상 일시적인 매입을 연속화하여 유동성을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실제 유동성 조절 규모를 보면 이러한 변화는 분명하다. 통화안정증권 발행과 환매조건부채권(RP) 순매각을 포함한 한국은행의 유동성 흡수 규모는 올해 상반기 93조 원 수준이다. 통계를 공개하기 시작한 2020년 이후 처음으로 100조 원을 밑돌았다. (통화안정증권 발행이란 한국은행이 직접 채권을 발행해 팔아 시중의 유동성을 흡수하는 것이다. 환매조건부채권의 순매각이란 매각 규모가 매입 규모를 초과하는 것으로, RP 매각의 효과는 앞 문단의 매입 효과를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반면 환매조건부채권(RP) 매매는 지난해 하반기 순매입으로 전환된 데 이어, 올해에 순매입 규모가 15조 원을 넘어섰다. 나아가 한국은행은 11월 4일 국고채 단순매입 계획이 없다고 밝혔음에도, 한 달여 만에 1조 5천억 원 규모의 국고채를 매입했다. (국고채 단순매입은, 앞서 RP 매매처럼 일시적으로만 채권을 사고 다시 되파는 게 아니라, 한국은행이 국고채를 사서 소유하는 것으로, 사실상 양적 완화다.) 이는 코로나 위기 이후 3년 3개월 만의 매입이다. 명목상 이유는 향후 RP 매각을 위한 국채 확보였으나, 사실상 RP 순매입 기조인 상황에서 실제 이유는 앞 절에서 본 채권 금리 급등을 진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고 해석된다. 문제는 이 조치가 금리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채 매입 이후에도 장기 국채 금리는 오히려 연중 최고치를 경신하며 상승했고, 정책 목적과 효과 간의 괴리가 드러났다. 한편, 기준금리 정책 역시 금융안정 리스크에 종속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11월 27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네 차례 연속 동결하며, 금리 인하 사이클이 종료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는 원화 가치 하락과 부동산 시장 과열이라는 금융 불안 요인이 금리 정책의 제약 조건으로 작용함을 보여준다. 실제로 원/달러 환율은 1,470원대까지 상승했고, 미국과의 기준금리 격차가 확대되면 자본유출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는 상황이다. 동시에 서울을 중심으로 주택 가격 상승세가 이어지면서,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 대응이 자산시장 과열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한국은행 역시 통화정책방향의 표현을 수정하며, 금리 인하의 지속 여부에 유보적인 태도로 전환했다. 다만 금리 인상에 대해서는 시일이 걸릴 것이라 봤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화량 지표는 유동성 압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올해 9월 기준 광의통화(M2)는 전년 대비 8.5% 증가해, 코로나19 시기 대규모 재정지출 국면에 근접한 증가율을 보였다. 금리 인하 국면에서 수익증권으로 자금이 유입되는 가운데, 확장적 재정 기조가 맞물리며 시중 유동성은 다시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은 M2에 ETF도 포함됨을 들어 증가세가 과장되었다고 설명하지만, 자산시장과 환율에 동시에 압력이 가해지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 ② 부동산시장: 금융규제의 과잉 한국은행은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부동산 시장의 양극화가 구조적으로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구와 산업의 수도권 집중, 다주택 규제에 따른 서울 주택 선호 쏠림이 맞물리면서, 정책 변화에 따른 수도권 주택 가격의 민감도가 매우 높아졌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이러한 상황에서 가계부채 관리와 부동산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장기적으로는 자금이 부동산에서 생산적 부문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말하는 ‘생산적 부문’은 실물 투자와 생산성 제고를 의미하는 반면, 이재명 정부가 상정하는 생산적 부문은 주식시장에 가깝다는 점에서 양자의 인식에는 간극이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정부가 서울·수도권 주택 가격 상승에 대응하는 방식이 금융규제를 중심으로 극단화되었다는 점이다. 최근 발표된 10·15 부동산 대책은 집값 안정이라는 목표를 넘어, 주택시장의 거래 기능 자체를 크게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이번 대책은 서울 전역과 수도권 일부 지역을 다시 규제지역으로 묶고,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40%로 제한했다. 그 결과 근로소득을 기반으로 한 실수요자조차 대출을 통한 주택 구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예컨대 10억 원 주택을 구입하려면 6억 원 이상의 자기자본이 필요하고, 25억 원 이상 주택은 2억 원까지만 대출이 허용된다. 이는 거래 가능성을 현금 보유 여부에 따라 극단적으로 분절시키는 구조로, 시장을 사실상 고액 자산가 중심으로 재편하는 효과를 낳는다. 토지거래허가구역 확대와 2년 실거주 의무 부과 역시 주거 이동의 자유를 제약한다. 직장 이동이나 자녀 교육과 같은 현실적 사유에도 불구하고 주택 처분이나 이전이 어려워지면서, 기존 소유자의 지위는 고착되고 거래는 급감한다. 전세대출과 신용대출까지 동시에 규제되면서, 과거 무주택자가 전세를 거쳐 자가로 이동하던 ‘주거 사다리’ 역시 사실상 붕괴되었다. 실제로 10.15 대책 이후, 전월세 가격 상승폭이 확대됐다. 이러한 정책 방향은 문재인 정부 시기의 초고가 주택 대출 규제를 연상시킨다. 당시에도 정부는 투기 억제를 명분으로 들어 주택 가격을 기준으로 대출을 전면 금지했으나, 이는 국제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정책이었다. 결과적으로 규제는 투기를 억제하기보다 가격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고가 주택 시장은 현금 부유층 중심으로 고착되었고,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구간으로 수요가 몰리면서 서울 평균 주택 가격은 빠르게 상승했다. 불과 몇 년 사이 ‘초고가 주택’의 기준 자체가 상향 조정된 것은 이러한 정책의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여론도 이재명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에 비판적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부동산 규제 확대와 대출 제한 강화가 ‘적절하지 않다’는 응답이 ‘적절하다’는 응답을 상회했다. 이는 정부가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스스로 정치적·경제적 부담을 키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책 담당자들이 금리 인상기에 집값 상승세가 둔화되는 모습을 보며 금융규제의 효과를 과신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금리라는 거시적 조건이 아니라, 주택 가격·지역·거래자의 속성에 따라 대출 한도와 이자율을 세세하게 구분해 정하는 방식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이다. 더욱이 이러한 규제는 한국은행이 지적한 서울·수도권 주택 가격 상승의 근본 요인, 즉 인구·산업 집중과 과잉 유동성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거래 위축과 시장 경직을 일으켜 향후 가격 급등의 토대를 만들 위험이 있다. 결국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금융 불안정성을 완화하기보다, 시장 기능을 약화시키고 정책 리스크를 키우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자산시장 불안이 정부와 금융시스템 전체를 제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징후다. ③ 주식시장: 유동성 확대와 정책이 주도한 상승의 불안정성 올해 4월 9일 2293이었던 코스피 지수는 11월 3일 4,221까지 약 7개월간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러나 11월 초를 기점으로 하락세로 전환되면서 시장 전반에 불안이 확산되었고, 단기 조정이 아닌 공황 가능성에 대한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투자자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코스피 변동성지수(VKOSPI)는 4월 주식시장 급락 당시 수준까지 상승했다. 지난 몇 개월간의 기록적인 주가 상승에는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미국을 중심으로 한 AI 산업 투자 확대에 따라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실적이 크게 개선되었다. 여기에 방위산업, 조선, 배터리 제조업 등 일부 수출 산업의 호조도 주가 상승을 뒷받침했다. 즉 실물 기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둘째, 7월 민주당과 이재명 행정부가 추진한 상법 개정이 주주환원 기대를 높이며, 한국 주식시장의 구조적 저평가 문제를 완화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셋째, 외국인 투자 자금이 대거 유입되며 상승 흐름을 강화했다. 특히 세계적 수준보다 낮은 한국의 주가수익비율(PER)과 주가순자산비율(PBR)이 일련의 법 개정으로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외국인 수급을 자극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승이 지속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한국경제 전반이 침체 국면에 놓인 가운데, AI와 연관된 소수 산업과 기업의 주가만 급등하고 나머지 부문은 정체되거나 하락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일부 대형주의 상승이 지수 전체를 왜곡하는 구조다. 둘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주가 상승을 주도한 기업들의 실적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적 개선 속도에 비해 주가 상승 속도가 훨씬 빨랐다는 점에서 기대에 기초한 과잉 반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일부 연구자들은 2025년의 이론적 적정 코스피 지수를 3,200선 내외로 제시하고 있다. 셋째, 유동성이 과도하게 주식시장으로 집중되고 있다. 올해 10월 기준 광의통화(M2) 대비 코스피 시가총액 비율은 75.6%로, 장기 평균 수준인 57.5%를 크게 상회한다. 특히 문제적인 것은 개인투자자의 참여 양상이다. 코스피의 상승 국면에서는 외국인과 국내 기관투자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10월 말 이후 개인투자자 자금이 대거 유입되었다. 10월 30일 기준 투자자 예탁금은 85조 7천억 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신용거래융자 잔고도 25조 원을 넘어 역사적 고점에 근접했다. 이른바 ‘빚투’가 확대된 상황에서, 11월 초 주가가 하락세로 전환되자 개인투자자의 손실과 불안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실제로 불과 2주 만에 투자자 예탁금이 10조 원 이상 감소했고, 11월 한 달간 개인투자자의 국내외 주식 수익률은 모두 큰 폭의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식시장은 점차 정책과 정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심지어 이재명 정부는 ‘코스피 5000’을 정책 목표로 제시하는데, 특정 주가를 목표로 삼는 정책은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일각에서는 이재명 정부가 부동산 정책에서의 실책을 주식시장 상승으로 상쇄하려 시도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민주당과 정부는 상법 개정을 비롯해 배당소득 분리과세,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 일련의 ‘증시 부양 입법’을 추진하며 시장에 추가적인 기대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주가 하락이 시작되자, 개인투자자 사이에서 추가적인 상법 개정과 정책 개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동시에 하락의 책임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도 격화했다. 최근에는 한국은행 총재가 금리 인상 기조로의 전환을 시사한 것이 주가 하락과 환율 상승의 원인이라는 비판까지 제기되었으나, 실제로 한국은행은 완화적 기조를 상당 기간 유지해 왔다. 정책 부작용이 가시화되자 통화당국에 책임을 전가하는 양상이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민주당과 이재명 정부가 주가 부양을 위해 준비한 정책 수단들의 위험성이다. 부동산 규제를 통해 자금을 주식시장으로 유도하며 유동성을 키웠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기업의 자율성과 재무 전략을 제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크다. 여기에 국내주식 비중을 중기적으로 줄이고 자산을 다변화한다는 국민연금의 중기 자산배분 원칙을, 전술적 자산배분제도(단기적인 시장 상황 변화에 맞춰 자산군 간 비중을 적극적으로 조정하는 투자 전략)을 통해 무력화하여, 최대 30조 원 규모의 자금을 주식시장에 투입하려는 시도까지 더해졌다. 이는 단기적으로 주가를 떠받칠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연기금의 안정성과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험을 크게 키울 수 있다. 결국 현재의 주식시장 상승은 실물경제의 회복에 기초했다기보다, 유동성 집중과 정책 주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조정이 시작되면 변동성이 급격히 확대될 가능성이 높으며, 그 부담은 레버리지를 동원해 뒤늦게 진입한 개인투자자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금융 불안정성 확대가 정치와 정책 전반을 압박하고, 다시 정치가 개입하며 그 위험성의 판을 더 키우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④ 외환시장: 자본흐름 구조 전환과 원화 약세의 고착화 최근 1470원을 돌파한 원/달러 환율의 상승은 단기적 불안이나 외국인 자본 이탈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KDI에 따르면, 환율 상승의 구조적 배경에는 앞서 3장에서 살펴봤듯 한국경제의 자본수익성 하락과 이에 따른 자본흐름의 근본적 전환이 자리하고 있다.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국내 투자수익률이 점진적으로 하락한 반면, 해외 투자수익률은 상대적으로 높게 유지되었고,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 국내·해외 투자수익률이 역전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의 순해외투자는 빠르게 증가했고, 결국 소득수지가 구조적으로 흑자(+)로 전환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사진22%] [그림] 한국의 국내/대외 투자수익률, 순해외투자 지위 변화, 순대외자산 증가 3장의 국제 자본흐름 변화에서 확인했듯, 한국도 2010년대 국내/대외 투자수익률이 역전되며 순대외자산국으로 전환했다. 내국인에 의한 지속적인 자본유출 증가가 환율을 상승시키는 구조적 요인이 되었다. 이 변화는 외환위기 위험의 성격을 바꿨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한국경제의 핵심 위험은 외국인에 의한 급작스런 자본유출이었다. 그러나 2014년 이후 한국이 순대외자산국으로 전환되면서, 외국인 단기자본 유출로 인한 전통적 외환위기 가능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대신 내국인(기업, 국민연금, 개인)에 의한 구조적 해외자본 유출이 새로운 문제가 됐다. 이제 환율에 상방 압력을 가하는 주된 요인은 외국인이 아니라 내국인이다. 국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익률이 낮아지면서, 기업은 해외 직접투자와 현지 생산을 확대하고, 연기금과 기관투자자는 해외 증권투자 비중을 늘리며, 개인도 해외 자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원화를 보유하기보다 달러 자산을 선호하는 행태가 구조적으로 확산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외국인이 원화를 떠나는 것’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내국인이 원화를 버리는 것’이 장기적 환율 상승 압력의 핵심 요인이 되었다. 물론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달러의 국제적 위상은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달러 약세보다 원화 약세가 더 빠르고 더 깊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재정적자와 통화정책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자본은 여전히 달러를 원화보다는 안전한 자산으로 인식하는 반면, 한국경제의 낮은 성장률, 높은 부채 증가 속도, 자산시장 불안정성이라는 요인이 결합되며 원화의 매력도가 빠르게 저하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는 환율 안정을 위해 국민연금을 동원하고, 외환시장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 국민연금을 환율 방어의 정책 수단으로 사용하는 조치는 논란의 소지가 클뿐더러, 이를 노린 환투기를 유발할 수 있고, 국민연금의 수익률에 부담을 키울 수 있다. 게다가 금융기관의 외환 건전성 관련 규제 완화나 외국인의 국내주식 투자를 늘리려는 조치는 금융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결국 현재의 환율 문제는 일시적 충격이나 심리 요인이 아니라, 성장 둔화와 수익성 하락, 자본흐름의 구조적 전환, 그리고 재정·금융 정책의 누적된 제약이 결합된 결과다. 외환위기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원화 약세는 새로운 방식으로 한국경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재정적자 확대, 자산시장 불안정성, 금융정책의 제약과 맞물리며 한국경제가 점점 더 좁은 궁지로 밀려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5) 소결: 성장 둔화와 정책 의존 속에서 증폭되는 불안정성 이 장에서 살펴본 한국경제의 모습은 성장의 구조적 약화 위에 정책 개입이 중첩되며 불안정성이 증폭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일부 수출 대기업을 제외하면, 한국경제의 다수 부문은 이미 성장이 멈추었거나 후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2장에서 본 무역 전쟁과 글로벌 분절화는 이런 추세를 더욱 고착화하고 있다. 중국의 자립화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한국 제조업의 중간재·자본재 수출 기반을 동시에 압박하며, 자동차·철강·석유화학 등 핵심 산업에서도 수출을 유지함에도 수익성이 하락하는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실물 부문의 약화는 재정과 금융으로 전이되고 있다. 성장 둔화에 대응해 정부는 재정지출 확대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으나, 그 결과 정부부채는 명목 GDP 성장률을 상회하는 속도로 증가하며 질적으로도 악화되고 있다. 재정적자와 국채 발행 확대는 장기금리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준금리를 낮추더라도 시장금리는 이를 따라오지 않는 이례적 디커플링이 나타나는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재정·금융 구조의 변화가 있다. 금융 불안정성은 자산시장 전반에서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 유동성은 축소되지 않은 채 유지되거나 오히려 확대되고 있으며, 이는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방향을 바꿔 유입되고 있다. 부동산 시장에서는 수도권 집중과 거래 경색이 동시에 심화했고, 주식시장에서는 미국의 AI 투자 관련 소수 종목을 중심으로 한 과도한 기대가 지수를 떠받치다 조정 국면에 진입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투자자의 위험 노출은 오히려 확대되었으며, 정책 당국은 자산시장 하락의 정치적 부담을 우려해 추가적인 부양책에 더 깊이 개입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다. 환율 역시 이러한 구조적 압력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지표다. 3장에서 확인한 국제 자본 흐름의 미국 쏠림이 심해지는 가운데, 내국인의 대외투자(자본도피) 확대가 원화 약세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환율 상승은 단기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성장성과 수익성의 격차가 해소되지 않는 한, 원화 약세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막기 위해 연기금을 동원하고 금융시장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은 또 다른 위험을 내포하며, 한국경제를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결국 한국경제는 지금, 성장은 약화되고, 재정과 금융에 대한 의존은 커지며, 그 결과 불안정성은 더 빠르게 확대되는 국면에 놓여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정책이 단기적인 완충과 자산시장 방어에 집중되는 점이다. 이는 단기적으로 충격을 늦출 수는 있어도, 중장기적으로는 부채와 금융 불안정성을 더욱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5. 결론 서론에서 살펴보았듯, 현재 세계경제는 포즌이 말한 ‘루즈-루즈 게임’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국제무역과 국제금융의 분절화는 각국의 성장 잠재력을 동시에 훼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달러 체제는 점차 약화 중이나 이를 대체할 안정적인 국제통화 질서는 여전히 부재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두 정치적 흐름은 서로를 자극하며 강화하고, 점점 더 정치권력, 즉 힘과 강제에 의해 특정한 이익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대세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경제에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은 달러 체제에 깊이 편입된 개방경제이자, 글로벌 가치사슬과 국제금융 흐름에 강하게 의존해 온 국가다. 상술한 상황은 한국과 같은 수출 의존 경제에 특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세계경제의 균열 속에서 한국은 ‘시진핑의 중국’과 ‘트럼프의 미국’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충격을 받는, 구조적으로 협공당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처럼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의 성장 전망이 모두 어두워지고 안전자산의 지위가 약화하는 가운데, 사실상 AI 부문과 연계된 일부 기업만이 성장하고 있다. 갈 곳을 잃은 글로벌 유동성이 그 좁은 영역으로 집중되고, 흘러넘쳐 온갖 자산들을 향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재정지출 확대가 성장을 떠받친다. 이는 안전자산 지위 약화 과정의 일부다. 그러나 재정지출 확대, 유동성 공급, 자산시장 부양은 구조적 해법이라기보다 지연 장치에 가깝다. 실물경제의 생산성과 수익성이 회복되지 않는 한, 이러한 정책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의 표면화를 늦추며 불안정성을 누적시킬 뿐이다. 겉으로 뚜렷한 위기가 아직 폭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문제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착시를 경계해야 한다. 금융 불안정성은 주식시장, 부동산시장, 외환시장을 가로지르며 동시에 축적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이재명 정부의 정책은 이 모든 영역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 결과 정책이 스스로를 금융시장 변동성의 인질로 묶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자산가격 하락이 곧바로 정치적 부담으로 전이될수록, 조정은 더 어려워지고 비용은 사회 전체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진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이후 형성된 국제무역·국제금융 질서는 분절화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성장 경로와 모델은 아직 수립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포즌이 지적하듯 트럼프주의가 자본주의의 재생산 조건 자체를 약화시키거나 위협한다면, 그 충격은 세계 인민에게 전가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재명 정부의 정책 실패로 한국경제의 불안정성이 가시화된 위기로 나타난다면, 그 비용 역시 한국 인민이 감내하게 될 것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집권으로 정세가 급변하는 지금, 사회운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고 명료하게 경제정세를 인식해야 한다. ●-web-resources/image/13a.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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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국제정치 전망
올해 전 세계는 공동의 규범이 무너지고, 힘과 권위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증가하는 현실을 마주했다. 특히 국제질서의 리더이자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던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에서 다시 등장한 트럼프 행정부는 적극적으로 국제질서를 훼손하고 있다. 동시에 세계적으로 정치위기, 군사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작금의 현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서로 협력해 국가 간 관계를 조직했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2026년 국제질서는 어떤 도전과 변화를 마주할 것인가? 사회진보연대는 현 정세를 ‘인민주의, 권위주의, 팽창주의의 난입’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 글은 자유주의 국제주의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내적으로는 인민주의 세력에 의해, 외적으로는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2026년에도 이어질 핵심 쟁점을 중심으로 그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본다. 1. 민주정에 대한 위협 현존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19세기부터 서구를 중심으로 자유주의적 헌정 민주주의(헌정주의)의 부상과 함께 등장했으며, 이들 국가 주도하에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달성, 구축되었다. 그만큼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헌정 민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다. 그러나 2025년은 그러한 질서를 주도했던 나라들,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 헌정 민주주의의 위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해였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미국 민주정의 제도와 관행을 파괴했으며, 유럽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서는 트럼프주의를 모방하는 정치세력이 눈에 띄게 부상했다. 내년에는 미국 중간선거와 헝가리 총선을 비롯해 60여 개 국가의 크고 작은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헌정주의를 훼손하는 포퓰리즘 세력이 더 약진하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 장에선 미국과 유럽에서 트럼프주의를 비롯한 포퓰리즘 세력의 도전에 대해 다룬다. 1) 누가 트럼프를 견제할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월 20일 취임한 이후, 미국 정치는 ‘트럼프주의의 제도화’와 그에 따른 기존 정치제도와 관행의 붕괴로 요약할 수 있다. 집권 후 트럼프 행정부는 헤리티지 재단이 작성한 「프로젝트 2025」에서 제안된 단일행정부론에 입각한 정책을 실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프로젝트 2025」 설계자 중 한 명인 러셀 보트를 백악관 예산관리국장으로 임명했다. 뒤이어 2월 18일과 19일 행정명령을 통해 예산관리국장에게 연방기관 정책을 검토하고 자금지출을 통제할 권한을 부여했다. 아울러 행정절차를 집행할 때 연방기관이 예산관리국, 행정규제검토처와 협의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런 조치를 바탕으로 트럼프 정부는 독립성을 보장받았던 연방기관장을 대거 해고했다. 전미노동관계위원회(NLRB) 윌콕스 위원을 비롯해 여러 연방기관장은 ‘험프리 대 미국정부 사건’(1935)에 근거해 해고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5월 연방대법원은 행정권은 대통령에게 있다며 대법원에서 최종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하급법원에서 이들에게 내린 복직 명령을 정지시켰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는 연방준비제도 이사에 스티브 미란을, 행정부 공직자 인사검증을 담당하는 백악관 인사국장에 댄 스커비노를 임명했다. 즉, 친트럼프 인사를 행정부 요직에 임명하며 행정부를 장악하는 중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학과 언론에도 전례 없는 압력을 가했다. 4월 23일 행정명령을 통해 미국 주요 대학이 해외 기부금을 공개하고, 대학이 이를 따르지 않을 때 교육부장관이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정책 변경을 요구하며 저항하는 대학들의 연방정부 보조금을 삭감하겠다고 압박했다. 그 결과 하버드, 시카고, 컬럼비아 대학 등 미국 주요 대학들의 연방정부 보조금이 삭감됐다. 또한, 5월 1일 행정명령으로 공영방송과 공영라디오에 대한 보조금 지원을 중단했다. 그리고 연방통신위원회를 통해 지상파 라이선스 갱신 취소를 위협하며 주요 지상파 방송사인 CBS, NBC, ABC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방송 프로그램을 폐지하라고 압박했다. 이와 함께 AP, CNN을 비롯한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사 기자들의 백악관 출입을 제한했고,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과 같은 대형 언론사에 거액의 소송을 제기했다. 트럼프 정부의 행정기관 장악, 대학과 언론에 대한 압력에 많은 지식인이 반발했다. 예일대학교의 제이슨 스탠리와 티모시 스나이더 교수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가 해외로 이직했다. 3월 《네이처》의 연구에 따르면, 과학계 연구자 가운데 75%가 대학에 대한 압박 심화로 미국을 떠날 것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대중의 반대 시위도 거셌다. 4월 ‘손 떼라’ 시위, 그리고 6월과 10월에 ‘노 킹스’ 시위를 비롯해 트럼프 행정부의 권위주의적 행보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특히 10월 2차 노 킹스 집회에선 2,700개 이상의 도시에서 7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모였다.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시위였다. 많은 지식인과 대중의 반발에도 트럼프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유고브, IPSOS를 비롯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임기 시작 이래 40%선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공화당 지지층에서 80% 가까이 지지율을 지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권위주의적 행보를 펼치고 있다. 게다가 2026년에는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과 진 도다로 연방회계감사원장의 임기가 종료될 예정이다. 이 자리마저 친트럼프주의 인사가 임명되면, 트럼프 대통령을 견제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따라서 2026년 미국 정치의 주요 화두는 ‘누가 트럼프 행정부를 견제할 것이냐’다. 이제 트럼프주의 세력과 민주당의 동향을 살펴보겠다. (1) 트럼프주의는 강화될 것인가, 분열할 것인가? 2025년은 트럼프주의 세력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 해로 평가할 수 있다. 그 계기는 바로 ‘터닝포인트 USA’(이하 TPUSA)를 이끌며 청년 트럼프주의자들을 조직하던 찰리 커크가 피살된 사건이었다. 1993년생인 찰리 커크는 팟캐스트 ‘찰리 커크 쇼’를 운영하며 소셜미디어에서 영향력을 강화했다. TPUSA는 2월부터 미국 전역의 대학을 돌며 강연을 진행했다. 강연은 문화전쟁 이슈와 반(反) ‘정치적 올바름’을 주제로 한 연설, 그리고 청중과 일대일 토론, ‘내가 틀렸음을 증명해봐’(Prove Me Wrong)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TPUSA는 이러한 토론 장면을 유튜브 영상으로 제작해 확산하고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온라인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커크는 해외에서 트럼프주의 메시지를 확산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5월에는 영국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연을 진행했으며, 9월에는 한국에서 ‘빌드업 코리아 2025’, 일본에서 참정당 심포지엄에 참여해 트럼프주의 국제연대를 강조했다.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커크는 9월 10일 유타밸리 대학교에서 청중과의 근거리 토론 중 피살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커크를 “진실과 자유를 위한 순교자”라고 칭하며, 극좌 세력과 이를 부추기는 언론·사상을 이번 사건의 배경으로 지목하며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모식에는 트럼프 대통령을 위시해 정부 고위 인사와 공화당 주요 정치인은 물론, 스티브 배넌, 터커 칼슨을 비롯한 트럼프주의 인플루언서들도 대거 참석하여 보수진영이 결집하는 장이 되었다. 총 9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인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은 커크의 뜻을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이후 공화당과 트럼프 행정부는 70만 회원과 3천 개 이상의 학교 지부를 보유한 TPUSA의 조직망을 활용하여 청년 보수층 조직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공화당 정치인과 지지자는 TPUSA에 거액의 기부를 잇달아 내놓았고, 공화당 전국위원회 산하 청년위원회는 TPUSA 대학 지부와 협력해 순회강연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밴스 부통령과 일부 백악관, 공화당 인사가 찰리 커크쇼에 출연하며 TPUSA의 플랫폼을 통해 보수층 결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미국 보수진영에는 균열 요인도 존재한다. 현재 공화당은 매우 이질적인 집단들의 연합체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공화당은 ▲ MAGA 포퓰리스트(스티브 배넌, 밴스 부통령), ▲ 전통적 공화당 정치인(존 튠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 자유시장주의자(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 종교 우파(마이크 존슨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 테크계 우파(데이비드 색스 백악관 암호화폐관리국장) ▲ 민주당 탈당파(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의 6개 파벌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파벌은 트럼프라는 개인의 카리스마적 권위와 민주당에 대한 반감으로 뭉쳐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구체 정책을 둘러싼 견해차가 상당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물러나거나 미국 경제가 급속히 악화하면 이들 사이에서 갈등과 이견이 증폭될 가능성이 있다. MAGA 진영 내에도 분열요인이 존재한다. 막대한 조직력과 자금력, 정계와의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청년 MAGA의 아이콘인 찰리 커크가 사망한 이후 젊은 인플루언서들이 난립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1998년생 닉 푸엔테스다. 그는 2017년부터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며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를 지지하는 청년 남성 네트워크 그룹 그로이퍼스는 찰리 커크를 비롯한 주류 보수주의 집단이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합법 이민자가 미국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미국 우선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푸엔테스가 10월 27일 트럼프주의 방송인 터커 칼슨의 팟캐스트에 출연한 것을 두고 MAGA 진영 내에서 논란이 생겼다. 너무 극단적인 인물을 출연시켰다는 이유였다. 트럼프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은 보수가 분열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며 수습에 나섰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렇게 젊은 트럼프주의자 사이에서 극단적인 인물의 존재감이 커지는 상황은 미국 보수세력이 앞으로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둘지 결정해야 하는 문제를 드러내는 방아쇠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장 푸엔테스 같은 극단적인 백인 우월주의자가 MAGA 내에서 헤게모니를 차지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찰리 커크 이후 확고한 젊은 MAGA의 아이콘이 없는 상황에서 극단적 인사들이 난립하는 상황은 MAGA 진영 내에서 변수가 될 수 있다. 요컨대 공화당과 MAGA 진영은 찰리 커크 사망 이후 결집을 강화하며 안정적인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호 글 「트럼프 인민주의 정권은 미국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서 확인했듯, 광범위한 트럼프주의 연합은 장기 불황이라는 조건과 트럼프주의 정책의 모순 탓에 무너질 수도 있다. 또한, 젊은 트럼프주의자 사이에서 더욱 극단적인 인물들이 난립하는 상황은 향후 트럼프주의의 미래에 여러 변수를 낳고 있다. (2) 민주당은 트럼프주의를 막을 수 있을까? 2024년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의 최대 화두는 트럼프주의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였다.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에 강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퓨 리서치센터의 4월 분석에 따르면, 민주당 성향 유권자 가운데 83%가 ‘민주당이 트럼프 정부의 정책에 강하게 반격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드러냈다. 이러한 여론은 민주당 내 전략과 활동에 다양하게 반영되었다. 2월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에 당선된 켄 마틴은 4월 당 전략 ‘어디서나 조직하고 어디서나 승리한다’를 발표하며, 지역(주) 당 위원회에 매달 총합 100만 달러라는 역대 최대규모의 금액을 투입하고 지역 당직자들을 훈련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동시에 트럼프주의자들의 허위정보 유포에 대응하기 위해 전담 인플루언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폭스뉴스와 조 로건 팟캐스트에 민주당 대변인을 투입하는 공세적인 행보를 취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장 주목받은 정치인은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다. 그는 소셜미디어를 공격적으로 활용해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을 겨냥하는 한편, 공화당 지지층을 포섭하고자 했다. 3월에는 팟캐스트를 개설하고 초대 게스트로 찰리 커크를 초청한 데 이어 스티브 배넌을 비롯한 MAGA 진영 인사들도 초청했다. 6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연방 이민단속국의 대대적인 단속에 저항하는 시위가 격화되고 트럼프 행정부가 주방위군 배치를 지시하자, 뉴섬 주지사는 주 정부와 협의 없는 방위군 배치는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트럼프 행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민주당의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또한 뉴섬 주지사는 텍사스주가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조정하자, 캘리포니아주의 선거구를 민주당에 유리하게 조정하는 ‘주민발의안 50’을 발의했다. 이에 따르면 민주당에 유리한 선거구가 다섯 곳 늘어난다. 오바마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 주요 인사가 지지하는 가운데, ‘주민발의안 50’은 11월 4일 주민투표에서 64.4%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선거구 조정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캘리포니아 지역 언론인 조 매튜스는, 일반적으로 10년마다 인구조사 후 독립 위원회를 거쳐 선거구를 확정하는 절차가 아니라 정치인이 주도하여 주민투표를 통해 선거구를 조정하는 방식은 민주주의 규범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프린스턴대학 개리멘더링 프로젝트는 이번 캘리포니아 선거구 개편으로 캘리포니아의 공정성 점수가 기존 ‘B’에서 ‘F’로 하락했다고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올해 민주당은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펜실베니아주와 아이오와주 보궐선거에서 승리했으며, 11월에는 버지니아와 조지아 주지사 선거, 뉴욕시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거 승리가 내년 중간선거에서의 승리를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연방정부 셧다운을 둘러싸고 민주당 지지층 사이에서 민주당 지도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 또한, 개빈 뉴섬 주지사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 대응은 지지자에게 일시적으로 통쾌감을 줄 수 있으나,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위험이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 선거구 조정은 향후 연쇄적인 개리멘더링으로 이어질 수 있고, 나아가 민주주의적 제도와 규범의 안정성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사진1%] [사진]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와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 2025년 미국 의회는 회계기간 종료일인 9월 30일까지 내년도 예산안 합의에 실패했다. 그 결과 43일간 최소한의 업무를 제외하고 연방기관이 폐쇄되는 ‘셧다운’ 상태를 겪었다. 역대 최장기간이었던 올해 셧다운에서 핵심 쟁점은 12월 말에 종료되는 오바마케어(공공 건강보험) 보조금 연장 여부였다. 셧다운 기간이 길어지면서 연방 공무원들이 대거 해고되자,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이탈해 임시예산안에 협력해 셧다운이 종료되었다. 임시예산안은 셧다운 기간 해고된 공무원을 복직시키는 대신 오바마케어 보조금 연장 표결을 12월에 하기로 했다. 성과 없이 셧다운이 마무리되면서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를 향한 불만이 나타났다. (출처: 《뉴욕타임스》) 한편, 트럼프 행정부에 맞선 강경한 대응과는 별개로, 민주당 지식인들은 대안적인 정책 아젠다를 연구하고 있다. 올해 3월에 언론인 데렉 톰슨과 에즈라 클라인이 출간한 책 『풍요』(Abundance)는 민주당 성향 지식인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친민주당 성향 싱크탱크 ‘서드웨이’가 책의 주장을 반영한 정책 제안서를 제출하면서 널리 읽혔다. 저자들은 그간 진보 지식인들이 ‘분배’ 문제에 치중한 나머지 ‘성장’과 ‘풍요’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미국의 풍요를 위해서는 주거, 교통, 에너지, 의료서비스 분야의 공급을 충분히 확보해 희소성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규제 장벽을 제거해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공급하고, 코로나19 백신 개발 프로젝트 사례처럼 기술 규제 제도와 절차를 간소화해 시장에 신기술이 신속히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보호와 규제 중심의 정부가 아니라 건설하고 발명하며 구현하는 정부가 되어야 하며, 결과 중심으로 거버넌스와 관료제를 재구성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캘리포니아주는 8월에 이러한 제안을 일부 반영해 개발 관련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환경영향평가법을 개정하기도 했다. 『풍요』의 제안은 ‘성장’이란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그러나 현재 미국 경제의 문제를 단순히 과도한 규제로 인한 기술혁신 지체와 인프라 공급 제약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는 장기적인 이윤율 하락 추세로 인해 장기침체가 이어지고 부채가 누적되는 구조적 위기에 처해있다. 이 문제를 완화하려면 세계적 수준의 공조가 필요하다. 또한, 규제 완화와 기술투자로 성장과 풍요를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은 기술낙관론일 뿐이다. 이런 주장은 1970년대 이후 현저히 낮아진 생산성을 고려하지 않으며, 수익성 있는 기술진보의 어려움에서 장기침체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무시하는 결함이 있다. 민주당은 트럼프주의에 맞서 다양한 방식의 대응을 모색하고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과 대규모 감세법안으로 더욱 심화할 미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에 대해 진지하게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구조적 위기에 대응할 정책적 대안보다는 개빈 뉴섬 주지사처럼 강경한 대응으로 정치적 갈등을 키우는 행보에 치우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조지타운대 역사학 교수 마이클 케이진은 과거 민주당이 승리할 때 ‘보통 사람의 정당’을 내세웠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민주당이 21세기 들어 노동자 계층을 소외시키고 문화정책과 친기업적 행보를 강화한 점을 비판하며,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트럼프주의에 맞서 민주당이 내부의 문제점을 성찰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이어지느냐가 2026년 중간선거는 물론 향후 미국 정치지형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3) 민주사회주의자는 계속 성장할 것인가? 11월 4일 뉴욕시장 선거에서 조란 맘다니가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후보 시절부터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그가 민주사회주의자(DSA) 소속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등장과 당선은 사람들이 민주사회주의자라는 조직에 관심을 가지게끔 했다. 영국 녹색당, 독일 좌파당을 비롯해 유럽의 좌파계열 정치인들이 뉴욕으로 가 선거운동에 동참하며 맘다니와 민주사회주의자를 배우고자 했다. 민주사회주의자는 1982년 마이클 해링턴 주도 하에 민주사회주의 조직위원회와 신미국운동이라는 사회운동단체가 통합하여 탄생한 사회주의 조직이다. 민주사회주의자는 2014년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대통령 출마를 지원하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조직 규모가 급속히 커졌다. 특히 청년 활동가를 중심으로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회원과 지부 수를 크게 늘렸다. 2018년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AOC)와 라시다 틀레이브, 2020년엔 자말 보우먼을 연방의원으로 당선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민주사회주의자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전미교사연맹(AFT) 활동가이자 민주사회주의자 전국정치위원회 전(前) 위원인 리오 케이시는 《디센트 매거진》에서 민주사회주의자 내에서 원칙의 절대화 경향을 비판했다. 케이시는 민주사회주의자가 지향하는 도덕적 원칙이 현실에서 실현되기 위해선 전술, 전략, 정치적 목표로 층위를 나누어 사고하며 예외를 인정하고 단계적으로 달성 가능한 목표를 성취하는 방향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사회주의자 활동가 다수는 원칙 그 자체를 영속적이며 예외 없는 절대적 교리로 이해하는 경향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런 경향이 전략과 전술의 효용성, 실현 가능성에 관한 토론을 원칙에 대한 교조적 충성심 경쟁으로 대체해 시대의 변화에 맞게 운동을 발전시키는 것을 저해하며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다. 케이시는 대표적인 사례로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M) 집회 당시 민주사회주의자가 마주한 난점을 언급했다. 당시 민주사회주의자는 ‘경찰제도 폐지’, 이후엔 ‘경찰예산 삭감’ 구호를 강조했다. 그러나 케이시는 민주사회주의자 다수가 구호에 집중한 나머지 경찰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법률 검토, 경찰 내에서 리더십과 관행 개선, 경찰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에 관한 시민사회 차원에서의 토론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일부 도시의 경찰예산을 삭감하는 데 그쳤고 그마저도 팬데믹 이후 원상복구되었다. 케이시는 이를 ‘원칙의 절대화 경향’이 드러낸 난점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민주사회주의자 내에서 국제정세 인식을 둘러싼 갈등이 두드러진다. 댄 라 보츠 활동가는 민주사회주의자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았고 관련한 토론도 조직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일부 지부에서 우크라이나의 사회운동(SR) 연사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진행한 것에 대해, 내부에서 SR과 라보츠의 이력을 언급하며 이를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갈등을 더욱 키웠다. 전쟁 직후 이스라엘 아이언 돔 지원 승인 법안에 자말 보우먼 의원이 찬성하고 이스라엘이 국가로 존재할 권리를 인정하는 결의안에 AOC 의원이 찬성하자, 민주사회주의자 내에서 두 의원에 대한 제명 캠페인이 일어났다. 민주사회주의자 지도부는 두 의원을 제명하지는 않았지만, 2024년 7월 두 의원에 대한 지지 철회를 발표했다. 이 결정에 뉴욕지부가 반대하며 독자적으로 AOC 의원을 지지하겠다고 밝히면서, 국제정세 인식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맘다니 뉴욕시장 당선은 민주사회주의자에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언론은 선거에서 맘다니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생활비 부담 완화를 위한 정책 제안을 재치있는 짧은 영상으로 잘 풀어서 소셜미디어에 널리 퍼뜨린 홍보전략에 주목한다. 그러나 토지개발업자, 재산 소유자, 세입자 사이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공공 서비스 확대를 위한 주 정부와의 협의와 재원 조달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경찰 문제와 국제정세 인식을 비롯한 여러 쟁점적 입장과 논란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맘다니 시장과 민주사회주의자가 정치무대에서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지 않으려면, 케이시가 말한 것처럼 구체적인 목표, 전략, 전술을 체계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민주사회주의자 내부의 쟁점을 잘 풀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더욱 매서워질 유럽 포퓰리즘의 도전 2025년은 유럽 포퓰리즘 세력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진 한해였다. 특히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유럽 주요국에서 포퓰리즘 정당이 기존 주류 정당을 제치고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올라섰다. 지난 여름호에 실린 필자의 글 「주류가 된 유럽 포퓰리즘」은 포퓰리즘 세력이 정당정치와 언론을 비롯한 매개조직을 공격하며, 개별국가의 ‘민족주권’을 우선시하면서 진영과 관계없이 정책과 수사를 차용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들이 집권한 이후 사법부의 독립성을 적극적으로 훼손하는 행보가 헌정주의를 크게 위협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그 양상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겠다. (1) 주류 정치권은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2025년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는 포퓰리즘 정당이 기존 주류 정치권을 제치고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들 국가는 이민자의 증가와 함께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는 가운데 기존 정치권이 유권자들에게 신뢰를 잃고 대안세력으로 포퓰리즘 세력이 부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국가에서 부상한 포퓰리즘 세력은 기존 정치권을 공격하면서 현행 정치체제를 변경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세 나라 모두 국가 재정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국의 경우, 2024년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은 공약과 달리 2024년 국민보험료를 인상하며 사실상 증세를 감행했다. 이는 브렉시트, 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재정지출이 급격히 늘어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중이 2024년 95%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세는 노동당 정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키웠다. 또한, 안젤라 레이너 부총리의 부패 스캔들과 레이첼 리브스 재무장관이 11월 소득세 인상안을 발표했다가 금세 철회하는 해프닝이 노동당에 대한 신뢰를 크게 떨어뜨렸다. 보수당 역시 2022년 ‘미니 버짓 사태’ 이후 재정위기를 완화할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국방비 지출을 줄일 수 없다는 모순된 입장은 정책 전문가들은 물론 당원들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려 당원과 후원자가 대거 이탈했다. 프랑스 바이루 내각은 2025년에 들어 GDP 대비 국가부채 비중이 115%를 돌파하면서 위기감이 커지자 공무원 수 감축, 공휴일 축소, 사회복지지출 감소를 포함한 긴축예산을 9월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야당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 결과 바이루 내각은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다. 가뜩이나 정국이 불안정한데 긴축예산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피치, S&P 등 신용등급평가사는 프랑스 국가신용등급을 추가로 낮췄다. 그로 인해 로레알, 에어버스 등 프랑스 주요 대기업의 회사채금리보다 국채금리가 높아졌다. 마크롱 대통령이 임명한 르코르뉘 총리 내각은 더 이상의 내각 붕괴를 막고 사회당을 포섭하고자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연금개혁을 일시 중단했다. 독일은 마이너스 경제성장의 덫에 갇혔다. 2023년부터 연속으로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이를 해결하고자 독일 연방헌법에 규정된 ‘부채한도 브레이크’ 조항(연방정부의 연간 구조적 재정 적자는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0.35%를 초과할 수 없다)의 개정을 둘러싸고 사민당-자민당-녹색당 연정이 붕괴했다. 이후 들어선 기민당/기사당-사민당 대연정은 예외조항을 두는 방식으로 부채한도를 개정하며 확장 재정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늘어난 재정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두고 연정 내 갈등이 커졌다. 군 모집제도를 자원입대에서 의무요건을 강화해 신속히 병력을 충원하는 것과 시민수당(장기실업자 기초생활지원금) 및 사회복지 지출 축소를 지향하는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여기에 반대하는 사민당 사이에 이견 조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군 모집제도 변경을 둘러싸고 청년층 반발이 극심하다. 그에 따라 10월 INSA 여론조사에서 현 메르츠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25%로 하락세를 보이고 있으며, 응답자의 49%는 정권이 조기 붕괴할 것으로 전망했다. 기존 주류 정치권이 보이는 혼란과 무능의 수혜자는 그들과 차별화하며 제도 변경을 지향하는 포퓰리즘 정당이다. 영국 개혁당은 올해 당원 수가 20만 명을 넘기며 보수당(13만 명)을 제쳤고, 5월 지방선거 결과 절반이 넘는 지역 의회에서 과반을 장악했다. 보수당 대니 크루거 하원의원을 비롯해 보수당 지방의원 수십 명이 개혁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프랑스는 계속된 정치혼란에 마크롱 대통령 지지율이 20% 아래로 추락한 가운데 국민연합의 정당 지지율이 마린 르펜 전 대표의 비리 판결에도 불구하고 선두를 지키고 있다. 독일을 위한 대안(이하 대안당) 역시 여름부터 기민당/기사당을 제치고 여론조사에서 가장 높은 정당 지지율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유럽의 기성 정치권은 장기침체, 재정적자와 부채위기 속에서 헤매고 있다. 이민자 문제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국방비 증액 압박은 주류 정치권과 제도에 대한 대중의 신뢰 상실을 유발했다. 그 결과 포퓰리즘 세력이 기성 정치세력을 능가하는 지지율을 보이며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2) 점점 심해지는 매개조직 훼손 트럼프주의자들은 유럽에도 트럼프주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은 최근 헝가리 싱크탱크 MCC와 폴란드의 오르도 유리스와 세미나를 진행했다. 두 기관은 이를 토대로 올해 3월 「위대한 재설정: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주권 회복」이라는 유럽연합 개혁 보고서를 공동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선출되지 않은 유럽연합의 관료들이 회원국 정책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해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유럽사법재판소의 권한을 축소한 채 현행 유럽연합을 유지하는 방안과, 기존 유럽연합 조약과 제도를 전면 폐기하고 새로운 형태의 유럽 공동체를 구축하는 방안, 두 가지 개혁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프랑스 국민연합과 스페인의 복스(VOX)가 이 개혁안에 관심을 보인 가운데, 니콜라 콘투리스 전 유럽노조연구소(ETUI) 연구소장은 이 보고서가 극우 포퓰리즘 정당의 지향을 반영한 정치적 선언문으로 보인다며 경각심을 촉구했다. 영국 개혁당 역시 트럼프주의에 영향을 받은 싱크탱크 ‘더 나은 영국을 위한 센터’를 출범했으며, 지아 유수프 당 의장을 중심으로 영국 정부효율부팀을 6월에 꾸렸다. 지아 유수프는 9월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영국 헌정 개혁을 위한 자신과 당의 구상을 밝혔다. 그는 내각이 전문성이 떨어지는 의원들로 운영되어 비효율적이라면서, 전문성이 있는 인재들을 총리가 상원 귀족으로 제청하여 그들을 내각에 입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내각이 되기 위해 먼저 유권자에 의해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는 과정을 밟을 필요가 없게 말이다.) 그의 인터뷰을 두고 《이코노미스트》는 개혁당이 의원내각제가 아니라, 미국 대통령제와 같은 방식으로 내각을 구성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이렇듯, 유럽에서 트럼프주의를 지향하는 인사들은 의회와 유럽연합을 비롯한 각종 제도와 기관들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러한 매개조직 공격은 유럽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사법부의 독립성에 대한 공격이 극심하다. 이탈리아 멜로니 정부는 사법부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헌법 개정안을 밀어붙였다. 헌법 개정안은 올해 1월 16일 하원에서 첫 번째로 통과된 이래 10월 30일 상원까지 네 차례의 의회투표를 모두 빠르게 통과했다. 다만 2차 의회투표에서 의석의 3분의 2를 넘기지 못해 내년에 국민투표로 넘어가기로 결정되었다. 야당과 판사협회는 이 헌법 개정안이 사법부 통제 법안이라고 비판하지만, 멜로니 정부는 국민투표로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중이다. [%=사진2%] [사진] 이탈리아 사법부 개혁안에 반대하는 이탈리아 의원들 7월 22일 이탈리아 사법부 개혁을 위한 헌법 개정안 통과 표결을 앞두고 상원에서 민주당(PD) 의원들이 이탈리아 헌법전 표지 사진을 거꾸로 들며, 개정안 통과 반대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 장면. 사법부 개혁안의 구체 내용은 “김영진, 「주류가 된 유럽 포퓰리즘: 포퓰리즘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5년 여름호”를 참고할 수 있다. (출처: 《Il Sole 24 Ore》) 스페인에서도 사법부가 격렬한 정쟁의 장이 되고 있다. 특히 사법부 총평의회(CGJP) 인선을 둘러싼 여야 간 장기 대립이 사법부 전반에 인적 공백을 초래했다. 스페인 사법부 총평의회는 사법부 최고 의결기구이자 행정기관으로 법관 임명, 승진, 징계를 비롯한 사법부 인사, 사법 행정업무 전반을 담당한다. 20명의 위원 전원을 상하 양원이 각각 10명씩 선출하고 의원 5분의 3의 동의를 받아 인준한다. 이러한 임명방식은 1985년 프랑코 독재 시기에 보수적인 법관을 견제할 목적으로 사회노동당이 주도해 입법했다. 이러한 방식이 작동하려면 양당인 국민당과 사회노동당의 합의가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양당 간의 갈등이 커졌다. 결국 2018년 야당인 국민당이 총평의회 위원 임명 방식의 변경을 요구하며 합의를 거부한 이래로 5년간 총평의회 신임 위원 임명이 지체되다가, 2024년에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중재로 신임 위원 구성에 양당이 합의했다. 최근에는 사회노동당 산체스 총리 주변 인사들이 잇따라 부패 의혹에 휘말리면서 사법부 내부 갈등도 격화되었다. 11월에는 오르티스 검찰총장이 야당 정치인의 부패 스캔들을 언론에 유출한 혐의로 검사협회에 의해 고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여권은 판결이 정치적 성향이 강한 법관들에 의해 내려진 것이라며 반발했고, 사법부의 정치화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유럽평의회를 비롯한 국제기구도 스페인 사법부의 정치화를 우려하며 사법부 총평의회 위원 선출방식의 변경을 요구했다. 이사벨 페렐로 스페인 대법원장은 정치권의 판사 비방이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고 삼권분립과 법치를 위협한다고 지적하는 한편, 정치에 관여하는 일부 법관에게도 자중을 요청하면서 정치권이 사법부 총평의회의 인적 공백 사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달라고 당부했다. 매개조직과 같은 민주적 제도가 훼손될수록 사회가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은 약화되고, 그 빈자리를 폭력이 채울 위험이 커진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정치인을 겨냥한 폭력이 우려할 수준에 이르렀다. 10월 벨기에에서는 바르트 더 베버르 총리를 드론으로 암살하려는 시도가 적발되었으며, 같은 달 스웨덴 중앙당 대표인 안나 카린 핫은 지속적인 폭력 협박과 온라인 괴롭힘 끝에 사임했다. 이러한 사건들이 이어지자, 유럽의회 조사처는 「유럽연합 내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협박」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해, 정치인을 향한 폭력이 개인에 대한 공격을 넘어 민주주의의 질을 직접적으로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정치인 보호 조치를 강화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각국의 법 집행기관과 보안기관 간 협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처럼 유럽에서는 기존 정치 엘리트뿐 아니라 다양한 매개조직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이를 재편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 이후 유럽의 포퓰리즘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사법부를 비롯해 법치를 유지하는 핵심 기관에 대한 공격이 두드러지고, 정치인과 엘리트를 향한 폭력으로 이어질 위험도 커지고 있다. 3) 소결: 포퓰리즘의 위협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2025년 민주정 국가들에서 포퓰리스트 세력의 위협은 거셌다. 미국과 유럽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자유민주당의 영향력이 2024년 중의원 선거와 2025년 참의원 선거를 거치면서 약해졌고, 레이와 신센구미나 참정당처럼 ‘제3지대’나 ‘일본우선주의’를 내세우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존재감이 커졌다. 중심부의 민주정 국가들이 마주한 최근의 도전은 개별 국가의 일시적인 정치위기를 넘어서는 심각한 문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대응이 필요한가를 두고 정치권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학계는 포퓰리즘이 기성 정당정치와 언론으로 대표되는 매개조직(민주적 제도)을 위협하며 헌정주의를 위기로 몰고간다는 점에 대체로 합의한다. 그러나 어떤 대응이 필요한 것인지를 놓고는 쟁점이 있다. ‘방어적 민주주의’ 혹은 ‘전투적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나디아 우르비나티 칼럼비아대학 교수와 얀 베르너 뮐러 프린스턴대학 교수가 벌인 논쟁이 대표적이다. 얀 베르너 뮐러 교수는 『민주주의 공부』(2022)에서 민주주의를 다양한 매개조직과 제도를 통해 언제든 다수가 교체될 수 있는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 체제라고 규정한다. 그는 포퓰리즘이 이러한 민주주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면서 제도를 훼손하는 반(反)다원주의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본다. 따라서 뮐러 교수는 포퓰리즘의 제도적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와 정당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민주주의적 정치제도를 침해하는 개인의 권리를 법적으로 제한하거나 정당을 금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우르비나티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뮐러 교수의 방어적 민주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우르비나티 교수는 특정 정당이나 개인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제한하자는 접근은 정당과 시민사회가 스스로 조정하고 개선하려는 자율적 노력을 약화시킬 수 있으며, 정치에 냉소적인 시민들에게는 정치 엘리트가 법을 통해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우르비나티 교수는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역할을 강조한다. 그녀는 정당정치와 ‘의지’의 영역에 해당하는 정치적 매개와 구별되는, 시민사회이자 ‘의견’의 영역인 사회적 매개 내에서의 불균형이 포퓰리즘이 부상한 핵심 원인이라고 본다. 일부 사회적 매개조직은 정치권과 제도에 효과적으로 연결되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영역에서는 배제와 소외가 발생한다. 이러한 소외가 확대될수록 해당 계층은 극단화의 위험에 더욱 노출된다. 따라서 우르비나티 교수는 정당정치나 제도 개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사회적 결사를 활성화하고 시민사회의 의견이 정치적 의지 형성 과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공론장을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민주정에 대한 포퓰리즘의 위협이 거센 상황에서 어떤 대응이 필요한가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고심이 깊다. 앞선 미국과 유럽의 사례에서 보았듯, 기존 정당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매개조직 침해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제도적 개입을 통한 민주주의 방어만으론 포퓰리즘 세력들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을뿐더러 관련한 법과 제도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키울 수 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에서 케이헌이 주장했듯,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가 잘 작동하기 위해선 성숙한 시민성을 갖춘 시민들의 도덕적, 능력적 향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는 시민사회 차원에서 건강한 공론장을 형성하기 위한 교육과 토론이 전제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운동은 이러한 교육과 토론의 기반을 마련하는 핵심 주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회운동이 이러한 기능을 실질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때, 민주정은 단순히 유지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혁신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3. 권위주의 국가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위협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해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로부터 이탈하면서도 무슬림에 적대적인 잭슨주의 접근법을 취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파리기후협정과 세계보건기구에서 탈퇴하고, 개발도상국 지원과 인도주의적 지원을 맡아온 미국 국제개발처를 폐지했다. 동맹국들의 안보 무임승차를 비난하며 국방비 증액을 압박하는 한편 권위주의 국가를 상대로 거래적으로 접근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 미국의 후퇴는 기존의 국제질서에 도전하는 권위주의 정권 사이의 연계를 키웠다. 올해 외교관 사이에선 중국-러시아-이란-북한으로 대표되는 ‘CRINK’(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용어) 혹은 ‘격변의 축’(Axis of upheaval)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주목받았다. 이들 국가 사이의 협력이 동시다발적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10월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 네 국가 사이의 연계를 외교, 경제, 안보 측면으로 나누어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먼저 외교적 측면에선 2022년 이후 UN 안보리 결의안 투표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기권 혹은 거부권을 통해 북한과 이란에 대한 제재를 무력화하는 경우가 늘었다. 또한, 브릭스와 상하이협력기구를 매개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거버넌스 구축에 적극적이다. 경제적으론 양자 협정을 통해 기술 교류와 에너지 연계를 강화하는 한편, 서방의 금융 제재 회피를 상호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의 미르나 중국의 크로스보더 은행간 결제시스템(CIPS)을 통해 금융 결제 플랫폼을 통합하고 있다. 안보 차원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군사적 협력이 강화되었다. 러시아는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지원, 북한의 탄약과 병력 지원, 중국의 다양한 물자 지원을 받는 대가로 첨단 군사기술을 제공했다. 그리고 양자 혹은 삼자 합동 군사훈련을 2022년부터 연평균 9.5회 진행했다. [%=사진3%] [그림]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CRINK)의 합동 군사훈련 횟수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따르면, 중국과 러시아, 이란 그리고 북한 간에 두 국가 이상의 합동 군사훈련이 늘어나는 추세다. 2003년 중국과 러시아가 첫 합동 군사훈련을 진행한 이래 2025년까지 두 국가 이상이 참여한 합동 군사훈련이 총 96회였고, 2022년 이후에만 연평균 9.5회였다. 이란은 2019년 이후 중국, 러시아와 삼자 합동군사훈련을 매년 진행하고 있으며, 북한은 2024년에 중국, 러시아와 해군 훈련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자료출처: CSIS) 보고서는 네 국가 사이의 관계에 불균등함이 존재하며 상호불신이 있다는 점도 언급한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항상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CRINK가 견고한 블록을 형성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국가 간의 협력 강화는 국제규범에 큰 도전인 만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아래는 CRINK를 구성하는 핵심 4개 권위주의 국가 중 러시아와 이란 그리고 이들 국가가 연루된 전쟁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중심으로 관련국들의 주요 동향과 전망을 살펴보겠다. (중국의 대만침공설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 정세전망은 이번호에 실린 글 「중국의 2027년 대만 침공설과 핵무력 증강, 분석과 평가」을 보라.) 1) 유럽 차원의 문제로 불거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월 28일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 사이에 벌어진 공개적 설전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휴전을 압박하며 무기 지원과 정보 공유를 일시 중단했다. 3월 11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우크라이나가 30일 휴전안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재개했다. 그러나 휴전이 성사되지 않자, 미국은 7월부터 토마호크 미사일과 155mm 포탄을 비롯한 일부 무기 지원을 중단했다. 그리고 군사 지원 방식도 직접 지원이 아닌 유럽이나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에서 무기를 구매해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킬 세계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25년 하반기 월평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규모는 상반기와 비교해 43% 감소했다. 11월 19일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압박을 다시금 강화했다. 미국이 제안한 평화안 초안은 ▲ 우크라이나의 동부 돈바스 영토 포기 ▲ 우크라이나군 병력 60만 명 제한 ▲ 우크라이나 헌법에 ‘나토 영구 불가입’ 명시 ▲ 러시아의 G8 복귀 초청 ▲ 러시아·우크라이나·유럽 간 ‘상호 불가침 협정’ 체결 ▲ 우크라이나 100일 내 조기 선거실시 ▲ 우크라이나 공용어에 러시아어 재포함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안은 우크라이나군 병력을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줄이고 러시아의 돈바스 점령을 사실상 인정하는 내용으로 러시아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연합과 영국을 비롯한 대다수 나라가 강하게 반발했다. 이후 미국은 민감한 내용을 뺐지만,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이처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이 러시아에 우호적인 종전안을 우크라이나에 강압하는 가운데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 하지만 설령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이 미국이 제안한 안을 수용하더라도 이번 전쟁이 낳은 여파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가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악용해 국제사회의 개입을 무력화하고 다른 나라의 영토주권을 침해해 소기의 성과를 거둔 이상, 이후에도 주변국을 같은 방식으로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러시아 인접국의 불안감이 커진 만큼 유럽과의 갈등도 더욱 커질 것이다. 이를 중심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러시아의 전략적 행보가 가진 리스크는 무엇인가? 러시아는 2025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외교적 공작을 병행하면서 장기 소모전을 구사했다. 원래 목표였던 우크라이나 완전 점령이 당분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여러 차례 진격을 시도했지만, 2022년 이후 추가로 획득한 영토는 매우 적고 누적 사상자 수는 10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손실이 컸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으로 미국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유럽의 군사력이 미국을 당장 대체할 수준이 아닌 상황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20%를 차지했고 북한군의 지원으로 병력 부담을 한층 덜었으며 열세인 드론 기술력 격차도 많이 좁혔다. 따라서 러시아는 협상 레버리지를 높이는 한편, 서방의 분열을 유도해 우크라이나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러시아는 미국에 휴전의사를 밝히면서도, 이미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권리 인정과 러시아에 대한 제재 해제를 비롯한 강경한 요구안을 고수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빠른 종전을 원했기에 우크라이나가 30일 휴전안을 수용하게끔 강압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배제한 채 알래스카 회담으로 종전을 꾀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최소한의 타협도 거부하며 군사력 회복을 꾀했다. 러시아는 지지부진한 휴전 협상을 지속하면서 서방의 지원이 줄어든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공세를 강화했다. 드론 공격과 미사일 폭격을 지속해 우크라이나의 방공망을 소모시켰고, 북부 도시이자 물류거점인 포크로브스크를 포위 공격했으며, 남부의 흑해 연안도시 오데사와 미콜라이우 지역에 미사일 공격을 시도했다. 특히 페스코프 러시아 정부 대변인은 흑해 연안 주민들이 러시아 편입을 원한다고 주장하고 그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출처 불명의 주장을 반복하며 ‘회색지대’ 전략을 펼쳤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정유시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우크라이나 전력망에 큰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몇 가지 중대한 위험 요인이 있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세계적인 유가 하락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2025년 9월 러시아의 배럴당 평균 원유 수출가는 57.6달러로 전년도 동기(70.5달러)에 비해 크게 하락했다. 서방의 제재로 인해 원유를 주로 인도, 중국 등 비(非)제재국에 할인된 가격으로 수출했던 만큼 타격이 더욱 컸다. 이런 와중에 우크라이나군의 정유시설 습격과 인도의 점진적인 러시아 원유 수입 축소로 재정적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폴란드 싱크탱크 동유럽연구센터에 따르면, 러시아의 재정은 전년도 3분기 0.6조 루블 흑자에서 올해 동 분기 3.8조 루블 적자로 돌아섰다. 러시아 정부는 국채발행을 계획하고 있으나, 이는 이미 낮아진 루블화 가치를 더 떨어뜨릴 수 있다. 재정문제가 악화될수록 전쟁수행 능력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문제가 크다. 진전없는 전선이라는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징집에서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러시아는 강제징집 대신 입대할 때 막대한 보조금을 주는 계약병 방식으로 병력을 충원하고 있다. 전쟁연구소(ISW)에 따르면, 러시아는 월 3~4만 명의 병력을 보충하고 있다. 병사 1인당 입대 보너스로는 40만 루블(한화 740여만 원)을 지급하는데, 이는 러시아 월평균 임금소득의 약 5배다. 여기에 병사 1명당 모집비용도 전년도 평균 150만 루블에서 올해 200만 루블로 크게 올랐다. 바로스 전쟁연구소 연구원은 병사 급여, 사망, 부상 보너스까지 합한 러시아의 군인 급여 시스템은 유지가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높은 징집 비용과 병력 유지비용은 러시아의 어려운 경제 상황과 맞물려 재정압박을 더욱 키울 수 있다. 물론 강제 징병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지만, 이는 러시아 청년의 반발을 사 푸틴 정권의 안정성에 타격을 줄 수 있다. 향후 러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 고강도 분쟁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자원을 빠르게 소진시켜, 유럽의 지원이 더 커지기 전에 전쟁을 빨리 마무리하는 시나리오 ▲ 저강도 분쟁으로 수위를 낮추되, 우크라이나의 정권교체를 기대하면서 계속해서 유럽과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는 시나리오 ▲ 휴전을 통해 역량을 회복하고 내부 리스크를 관리하는 시나리오 ▲ 평화협정 체결. 다수의 안보 전문가는 러시아가 공격 강도를 조절하면서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연계를 막고, 장기적으로 고립을 유도하리라 예상한다. 향후 러시아의 행보는 러시아의 경제 상황,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 우크라이나의 항전의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2)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4년차를 맞이한 우크라이나는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다. 미국의 군사 지원이 트럼프 집권 이후 급격히 감소하면서 전쟁수행 물자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탄약은 유럽이 미국을 대신해 지원하고 있으나, 패트리엇 미사일, 유도다연장로켓시스템, 특수 군사물자 수입은 제한되고 있다. 여기에 10월 러시아의 정유시설 집중공습으로 대규모 정전과 급수 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특히 전력 공급망 손상은 드론과 미사일 방어의 핵심인 전파방해에 차질을 주었다. 여기에 더해 겨울 난방공급에 발생하는 어려움은 우크라이나 시민의 피해를 크게 키울 수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병력보충에 애를 먹고 있다.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 연구원 잭 와틀링이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보병 수가 빠르게 줄고 있으며, 무엇보다 징집된 병사들이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해 병력 손실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병력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징집 연령을 27세에서 25세로 낮추었지만, 병사 평균 연령은 43세로 러시아(38세 추정)에 비해 여전히 높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청년들 사이에서 병역 기피가 늘어나고 있다. 젤렌스키 정부는 국내정치에서 큰 위기를 맞이했다. 대규모 실향민으로 인한 주택 위기가 발생했고, 정부 재정 대부분이 국방비로 쓰여 사회지출을 해외원조기관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올해 7월 젤렌스키 대통령은 2015년에 도입된 국가반부패국과 반부패검찰청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해당 법안은 강한 반발을 낳았다. 7월 키이우에서는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시민이 모여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를 열었다. 결국 젤렌스키 정부는 법안통과 9일 만에 앞선 조치를 철회했다. 11월에는 국영 원자력기업에서 1억 달러 규모의 횡령 사건이 폭로되었는데, 여기에 젤렌스키 대통령의 측근인 티무르 민디치를 비롯한 정권 주요 인사들이 연루되면서 논란이 커졌다. 이에 정부는 주요 국영기관을 대상으로 대규모 감사를 진행했으며, 연루된 내각 인사들을 해임했다. 폴란드 투스크 총리를 비롯한 유럽 정상들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부패를 막지 못하면 앞으로 지원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압박했다. [%=사진4%] [사진] 2025년 7월 23일 우크라이나 정부 규탄 시위 2025년 7월 22일 우크라이나 부패 감찰기관의 권한을 축소하는 법령 통과에 반대하는 시위가 수도 키이우에서 일어났다. 다음날인 23일엔 키이우뿐만 아니라 주요 도시에서 광범위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남편이 전장에 있다고 밝힌 한 시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부패를 위해 군인들이 전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우크라이나 시민사회가 10년간 쌓아올린 노력이 파괴될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대규모 시위는 7월 31일 부패 감찰기관 권한강화법이 통과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사진출처: 《AP》) 이처럼 우크라이나는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이에 우크라이나인의 항전의지가 약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된다. 갤럽에서 7월에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 중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여론은 69%로 전년도의 52%에 비해 증가했고, 계속 싸워야 한다는 여론은 24%로 작년 38%와 비교해 감소했다. 젤렌스키 정권이 부패스캔들로 흔들리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러시아에 유리한 휴전안을 우크라이나에 강요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그러나 현재 우크라이나가 직면한 위기로 인해 우크라이나인의 항전 의지가 약화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가 8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76%가 푸틴 대통령의 평화안(나토 가입 포기, 점령지 양도 등)을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언론인 나탈리아 구메뉴크는 우크라이나 내부의 결속과 민주적 제도에 대한 신뢰의 유지가 전쟁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라고 강조하며, 역으로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야말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그녀는 7월 반부패 시위에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것은 전쟁의 본질을 시민들이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민주적 제도와 내부 결속을 유지하는 게 왜 중요한지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사회운동(SR) 역시 우크라이나인이 계속 러시아에 맞서 싸우려면 보수주의자의 긴축정책이나 트럼프 행정부의 ‘가짜 평화협상’을 거부하며, 우크라이나 시민이 쟁취해 온 민주주의와 사회적 성취를 동시에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유럽의 재무장은 어떤 양상을 띨 것인가? 올해 유럽 주요국은 미국의 방위비 증액 압박과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위기감을 느끼고 공동대응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영국과 프랑스 주도로 유럽은 2월 우크라이나 전후 안전보장을 위한 비공식 협의체인 ‘의지의 연합’을 출범시켰다. 유럽연합은 3월 발간한 ‘유럽방위백서 2030’에서 방위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재정기구를 설치하고 1,500억 유로의 자금을 조달하여 유럽 차원에서 방위투자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6월 나토 정상회의에서 유럽 주요국은 방위비를 GDP의 5%(3.5%는 국방비, 1.5%는 국방 관련 지출)로 올리는 목표를 설정했다. 7월에는 유럽연합과 우크라이나가 각각 1억 유로씩 출연해 첨단 방위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에 돌입했다. 2025년 9월 말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드론 위협은 유럽 국가들의 긴장감을 높였다. 최소 10개 국가의 공항과 군사시설 상공에 러시아 드론이 나타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폴란드는 긴급 나토회의를 소집해 공동대응을 주문했다. 유럽 각국 정부와 유럽연합은 러시아의 드론 위협을 유럽의 방위태세를 시험하고 심리적, 물리적 부담을 가하려는 하이브리드 위협으로 규정했다. 10월 16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030 유럽 방위준비 로드맵’을 발표했는데, ‘드론 월’로 불리는 드론 방어 이니셔티브를 포함해 동부전선을 중심으로 한 방위태세 강화가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유럽은 여러 제약에 직면해 있다. 영국 국제전략연구소(IISS)가 9월 발표한 「유럽 방위 역량의 진전과 한계」에 따르면, 유럽 전역에 배치된 미국의 재래식 군사력을 유럽이 대체하려면 최소 1조 달러가 필요한 것으로 추산된다. 보고서는 유럽 방위력이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정찰·감시 항공기, 장거리 정밀타격 미사일, 미사일 방어체계가 부족하며,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핵심 정보수집 체계를 미국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방위산업 인력 부족으로 인해 미국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유럽 차원의 산업협력 확대와 비(非)미국 동맹국들로의 구매처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러나 가장 큰 장애요인은 재정이다. 방위비 증액과 미국 의존도 완화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투입이 필요한데, 이는 각국의 정치적 합의와 결단을 요구한다. 문제는 국가별로 국방비 증액에 대한 공감대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유럽외교협의회가 6월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덴마크와 폴란드처럼 러시아와 인접한 북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은 국방비 증액 지지가 과반을 넘겼다. 반면 이탈리아나 스페인처럼 러시아로부터 거리가 먼 남유럽 국가들에서는 국방비 증액 지지가 낮게 나타났다. 독일, 덴마크, 라트비아, 크로아티아 등 징병제 도입 또는 재도입을 추진하는 국가들에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높다. 이처럼 유럽의 무장 강화는 다양한 구조적·정치적 쟁점에 가로막혀 있으며, 앞서 언급한 포퓰리즘 세력의 부상까지 고려하면 그 진척은 더욱 더딜 수 있다. 그렇기에 일부 전문가는 유럽연합 차원의 군비 강화에 앞서 방위비 증액에 공감대가 높은 나라부터 빠르게 무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북유럽, 폴란드, 발트 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은 독자적인 국방력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4년 11월 스웨덴 하르프순드에 모인 8개국 정상은 북대서양 지역의 연대를 기반으로 한 방위협력을 우선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이후 양자·다자간 군사 협력을 확대했다. 스웨덴과 폴란드는 9월 군사기술협력약정을 체결한 데 이어 같은 달에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폴란드와 발트 3국은 유럽연합의 유럽방위로드맵과 별개로 벨라루스,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에 자체적인 방어선을 구축하는 중이다. 유럽의 무장강화 흐름은 국제법과 국제규범에 대한 논란도 촉발하고 있다. 특히 기존 규범이 러시아의 회색지대 전략에 취약하다는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코펜하겐협약과 대인지뢰금지협약(오타와협약)이다. 코펜하겐협약은 1857년 덴마크해협을 모든 상업선박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국제수역으로 지정하고 통행료를 폐지한 조약이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가 이 협약을 악용해 ‘그림자선단’를 활용한 활동을 벌이는 것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림자선단이란 제재대상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등록을 피하거나 선적정보를 조작하는 선박을 뜻하는데, 러시아는 미등록 유조선을 민간상선으로 위장해 발트해를 자유롭게 통과하면서 제재를 회피하거나 해저케이블을 훼손했다. 이 때문에 덴마크를 비롯한 주변국과 국제법학계에서는 기존의 국제법 체계만으로는 이러한 러시아의 활동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명확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현행 국제법을 보완하는 지역 협약을 채택하거나, 제재 관련 절차을 정비해서 유연하고 효과적인 집행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2025년에는 발트 3국, 폴란드, 핀란드가 의회 결의로 대인지뢰금지협약을 탈퇴했다. (대인지뢰금지협약은 1997년 채택되어 1999년 발효된 다자조약으로 현재 160여개 국이 가입했다. 정식 명칭은 ‘대인지뢰 사용, 비축, 생산, 이전 금지와 대인지뢰 페기에 관한 협약’이다.) 러시아 또는 벨라루스와 인접한 이들 국가는 러시아가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최근의 안보 환경을 고려할 때 유연한 대응과 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집속탄 사용을 금지하는 더블린협약(2010)도 같은 이유로 탈퇴 혹은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유럽에서 안보 위기감의 증가는 다양한 쟁점을 낳고 있다. 과연 유럽이 러시아에 대항해 단결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국제규범 차원의 여러 쟁점은 어떻게 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중동, 끝이 보이지 않는 극단적 폭력 트럼프 행정부는 취임 초기부터 중동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1월 스티브 위트코프 특사를 보내 이스라엘-하마스 사이에 1월 19일 휴전협정이 이뤄졌다. 지난 6월 발생한 이스라엘-이란의 12일 전쟁엔 미국이 직접 이란의 핵시설을 공습하면서 휴전이 체결되었다. 10월 10일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에 다시금 휴전협정이 발효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중동의 분쟁에 관여한 덕분에 전면전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자화자찬하며 스스로를 ‘평화의 중재자’로 칭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중동의 정세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1월 휴전은 인질 교환 이후 단계에서 진전을 거두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이란은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인 핵시설과 농축우라늄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10월 휴전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헤즈볼라 고위 간부를 암살하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중동에 정말 평화의 가능성이 있긴 한 것일까? 올 한해 중동에서 주요 행위자였던 이란과 하마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내년 중동 지역 정세에서 주목할 부분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1) 재기를 노리는 이란과 시리아의 혼란 이란은 올해 중동지역에서의 영향력에 큰 손상을 입었다. 지난해 시리아 아사드 정권이 무너졌고 레바논 헤즈볼라 역시 지도부 대부분이 사망한 가운데 이스라엘과 체결한 휴전협정으로 세가 약해졌다. 하마스 역시 지도부 다수가 사망한 가운데, 저항의 축의 세가 위축되었다. 특히 6월 12일부터의 ‘12일 전쟁’은 이란에 큰 타격을 주었다. 14명의 이란의 주요 핵 과학자들이 사망했으며, 핵시설이 있는 나탄즈, 포르도, 이스파한 지역이 공습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란의 핵시설은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그로시 총장에 따르면 약 400kg으로 추정되는 60% 이상의 고농축 우라늄(단시간 내로 90% 이상 농축하여 폭탄으로 제조가 가능한 수준) 일부가 공습 전에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란이 몇 달 내로 원심분리기를 통해 다시금 고농축 우라늄을 제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란은 의회에서 국제원자력기구와의 협력 중단 결의안을 통과시켜 국제원자력기구의 이란 핵시설 접근을 막았다. 이란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이란핵합의(JCPOA) 체결 당사국인 영국·프랑스·독일은 강하게 반발하며 스냅백 제재(2015년 핵합의 이전의 유엔 제재를 자동 복원하는 조치) 발동을 경고했고, 8월 말 관련 절차를 개시했다. 9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러시아·중국·파키스탄·알제리가 제재 종료 결의안에 찬성했지만, 다수 이사국의 반대로 인해 유엔 차원의 제재가 복원되었다. 이후 이란은 러시아와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과의 연계를 강화하면서 핵 개발 의지를 더욱 분명히 했다. 이란은 3월 중국·러시아와의 합동 군사훈련을 진행한 데 이어 7월에는 러시아 해군과의 합동훈련을 진행했다. 또한, 9월 26일에는 러시아와 4기의 원자력발전소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이란 최고지도자실 고문 카말 하라지는 중국과 러시아가 제안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협력 재개 방안에는 열려있다고 밝혀, IAEA와의 선택적 협력을 제재 완화를 위한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국내 여론에서는 핵 개발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테헤란 타임즈》는 IAEA와의 협력이 이란 핵시설 관련 정보가 미국과 이스라엘로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하며, 이란은 핵 개발 의지를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목에서 시리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을 전복한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의 시리아 신정부는 3월 언론과 표현의 자유, 여성의 정치·경제 권리 보장을 명시한 신헌법을 제정해 7월 미국 정부의 테러조직 목록에서 빠졌다. 그러나 시리아 신정부를 둘러싸고 튀르키예, 이스라엘, 쿠르드족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시리아 신정부는 같은 수니파 이슬람주의 정권인 튀르키예의 후원을 받고 있다. 튀르키예는 시리아 내전 당시 시리아 북부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알카에다 계열의 수니파 무장조직을 지원했다. (현 집권세력도 여기에 포함된다.) 튀르키예 군은 이미 시리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네 군데에 군사기지를 설치했으며, 추가로 군사기지를 설치하기로 한 합의를 포함해 현 정권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쿠르드족은 시리아 신정부와 튀르키예의 협력에 불만을 표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튀르키예의 협력을 경계하면서, 국경지대인 골란고원의 비무장지대와 전략적 요충지인 헤브론 산을 점령했다.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은 서로를 지역 패권을 노리는 제국주의 행위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쿠르드족은 더욱 갈등적인 상황이다. 미국은 이슬람국가(ISIS)와의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쿠르드족 중심의 시리아민주군과 협력하라고 시리아 신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시리아민주군을 쿠르드노동자당의 연장선으로 간주하며 적대적인 입장을 보인다. 시리아 정규군 통합을 위한 무장해제를 두고 시리아 신정부와 시리아민주군은 무력충돌을 지속하고 있다. 브루킹스 연구원의 수잔 말로니는 이스라엘, 튀르키예와 시리아 신정부, 쿠르드족 삼각구도 사이에서 갈등이 격화될 경우, 이란이 시리아 북동부와 이란-이라크 접경지대를 근거지로 하는 쿠르드족 세력에게 접근해 그들을 중심으로 대리 네트워크를 재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2) 이완되는 통치력을 전쟁으로 돌파할 하마스 10월 체결된 이스라엘–하마스 휴전의 향방에 대해 대다수 전문가는 비관적이다. 인질 석방 이후 논의되어야 할 ‘평화 단계’인 하마스의 무장해제, 이스라엘군의 단계적 철수, 과도정부 수립, 국제 안정화군 배치를 둘러싼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휴전 이후에도 저강도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 양측 모두 통치력과 내부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갈등을 지속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하마스는 가자지구 내에서 통치력과 영향력이 조금씩 약해지는 조짐을 보인다. 팔레스타인 정책조사연구센터가 10월 28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주민 사이에서 전쟁 장기화에 대한 피로감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여전히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지지받는 정치세력이다(2025년 10월 기준 전체 35%). 10월 휴전 이후 지지율도 소폭 상승했다. 그러나 2023년 이후 전체적으로 지지율은 하락했다. 특히 가자지구에서 그 감소폭이 두드러진다. 2023년 10월 공세를 지지한 비율은 개전 초기인 2024년 3월 70%대에서 2015년 10월 40%대로 떨어졌으며, ‘하마스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응답 역시 27%로 개전 초기 대비 약 30% 포인트 감소했다. 이 수치는 서안지구보다도 낮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자지구에서는 반(反)하마스 움직임이 등장하고 있다. 2025년 3월 가자지구 북부 셰자이야와 베이트 라히야에서 개전 이후 처음으로 주민 수백 명이 “하마스는 물러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또한, 하마스 통치에 불만을 가진 무장조직도 증가해, 2025년 9월 기준 최대 12개의 조직이 활동 중인 것으로 보고되었다. 하마스는 이들과 충돌하며 수십 명을 처형했다. 하마스 관리 모하메드 나잘은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들이 ‘범죄자’라고 주장하며 처형을 정당화했지만, 적법한 절차 없이 반대자를 사형하고 이를 소셜미디어에 영상으로 게시한 행위는 심각한 문제다. 무엇보다 하마스는 무장해제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하마스가 단순한 무장조직이 아니라 종교·사회·정치 네트워크를 결합한 이슬람주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매튜 레빗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하마스는 ‘다와’로 불리는 광범위한 사회복지·교육 네트워크를 통해 폭력 활동을 생산·재생산한다. 자선단체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모스크와 연계한 이슬람주의 교육을 통해 이념을 확산하며, 청년층을 조직화해 무장단원으로 흡수한다. 이 과정에서 하마스는 취약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기능을 대체함으로써 주민 지지를 확보해 왔다. 레빗은 이러한 다와 네트워크를 대체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기제를 개발하지 않는 한, 하마스의 무장해제와 폭력 중단은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하마스 지지가 여전히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이유도, 하마스를 대체할 정치세력과 제도적·사회적 네트워크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마스는 지도부 다수가 사망하고 자금난에 직면한 상황에서 내부 불만을 강경하게 통제하고 외부에서 자금·무기·인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런 조건이 유지되는 한, 하마스는 전력을 회복하는 대로 다시금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강화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3)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권과 이스라엘 시민사회의 평화운동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권도 전쟁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2026년 10월 총선을 앞둔 이스라엘에서 네타냐후 정권에 대한 여론은 매우 부정적이다. 최근 조사에서 유권자의 약 70%가 연립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네타냐후 총리 역시 여러 부패와 비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어 정치적 타격이 크다. 하지만, 네타냐후를 실질적으로 대체할 정치세력은 뚜렷하게 부상하지 못하고 있다. 야당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으며, 아랍계 정당에 대한 관점이나 안보·경제 정책 노선을 비롯한 핵심 쟁점에서 입장이 크게 갈린다. 이들이 설령 반(反) 네타냐후 전선을 구축하더라도, 명확한 공동의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전쟁 후 많은 나라와 시민사회가 네타냐후 정권의 행보를 비판했다. 일부 유럽 국가는 이스라엘의 군수품 수출입 금지를 선언했고, 유럽연합도 이스라엘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재검토하며 관세부과를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시민사회 차원에선 광범위한 이스라엘 보이콧 운동이 나타났다. 음악계에선 주요 음반사와 뮤지션이 이스라엘에서 음악 스트리밍을 중단하는 ‘집단학살을 위한 음악은 없다’ 캠페인을 진행했다. 영화계에서는 할리우드를 포함한 1천여 명의 영화인이 이스라엘 영화계와의 교류 보이콧을 선언했으며, 유럽의 수십 개 학술기관이 이스라엘 대학과의 교류를 중단했다. 문제는 시민사회 일각에서 네타냐후 정권 비판과 군수품 금지를 넘어, 이스라엘 시민 전체를 일반화해 비난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행태는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까지도 불안과 고립감을 키우며, 네타냐후의 안보위기 프레임에 더욱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영국 왕립학회장이자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벤키 라마크리슈난은 9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네타냐후 정권에 비판적인 연구자들까지 무차별적으로 보이콧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할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공감하는 이스라엘 내 시민들까지 고립시킬 수 있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따라서 이스라엘 내에서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지향하는 시민단체들의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에는 유엔의 두 국가 해법에 대한 대안으로 연합국가 방안을 주장하는 단체들이 존재한다. ‘성지연합’과 ‘모두를 위한 땅’과 같은 시민단체들은 연방제 국가 안에서 여러 민족이 공존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그 내용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 민족의 자결권을 보장하고 평화 구축을 지향하는 60여 개 유대인·팔레스타인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체인 ‘잇츠타임’(It’s Time)이 올해 5월 8~9일 민중평회정상회의(People’s Peace Summit) 포럼을 예루살렘에서 개최했다. 포럼은 토론과 워크숍, 문화행사를 비롯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온라인을 포함해 약 7천 명이 참여했다. 이스라엘 시민사회 단체들의 이러한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힘을 얻을수록, 오히려 네타냐후를 비롯한 강경 시온주의 세력이 억제될 수 있다. 또한, 인질협상 이후 답보 상태에서 벗어나, 평화적 해결방안이 진척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5%] [사진] 이스라엘 시민단체들의 평화 포럼 사진은 5월 9일 민중평회정상회의(People’s Peace Summit) 포럼 둘째 날 진행한 “파트너가 있고 길이 있다: 심연에서 벗어날 정치적 해결책” 세션 중 패널토론 장면이다. 해당 세션은 올메르트 이스라엘 전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전 외무장관인 나세르 알키드의 두 국가 해결안에 관한 발제가 있었다. 이후 진행된 패널토론에는 시민단체 활동가인 메이 푼닥, 룰라 하르달(모두를 위한 땅)과 에란 니산, 라완 오데(피닉스 프로그램) 그리고 니달 포카하(제네바 이니셔티브)가 참여해, 연합국가 방안, 안보와 국경, 난민 문제를 비롯한 구체적인 쟁점에 관한 토론을 진행했다. (출처: New Israel Fund) 3) 소결: 핵 군비 경쟁을 자극하는 권위주의 정권을 규탄해야 한다 러시아와 이란을 비롯한 권위주의 국가들은 국제사회의 제재를 회피하며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현재 진행 중인 분쟁과 전쟁을 종식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이들 국가는 핵전력을 증강하거나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질서를 위협한다. 이들의 핵 의지가 강화될수록, 다른 국가도 자국의 핵무장을 고려하게 되어 세계적인 핵 경쟁을 촉발할 위험이 커진다. 이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여러 차례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거론하며 위협을 가한 바 있다. 2023년에는 벨라루스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했으며,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도 미국이 비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퇴했다. 이어 2025년에는 핵추진 대륙간 순항미사일 ‘부레베스트니크’와 핵추진 수중 드론 ‘포세이돈’ 실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중국은 핵무기 고도화를 신속히 추진하고 있으며, 북한과 이란도 핵무기와 핵 권리를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세계적인 핵 경쟁의 확대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992년 이후 중단된 미국의 핵실험 재개를 선언했고,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 국가들에 핵 공유를 제안했다. 2010년 체결된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은 내년 2월 기한 만료와 함께 신규 협상 없이 종료될 예정이다. 핵무기가 극도로 비인도적이며 인류절멸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오늘날 국제질서는 매우 위험한 상태로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NPT체제를 비롯한 세계 평화운동이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성과를 위협한다. 따라서 권위주의 국가들의 행위가 초래할 위험을 비판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내년에 예정된 NPT 평가회의와 핵무기금지조약(TPNW) 당사국회의는 국제적 규범과 평화 질서를 둘러싼 공론을 재구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한 사회운동의 적극적 활동이 필요하다. ●
강대국 간 핵 통제의 부재, 위기로 치닫고 있는 NPT 체제
2026년 동북아 정세분석은 두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추겠다. 첫째는 중국의 ‘2027년 대만 침공설’이다. 2020년대 초반부터 미국 조야의 저명한 인사들이 구체적으로 2027년을 짚으며 중국의 대만 무력침공 가능성을 언급했다. 2027년이 가까워지고 있는 만큼 그 가능성과 현재 상황을 살펴본다. 둘째는 중국의 급속한 핵무력 증강이다. 중국이 궁극적으로는 무슨 의도인지, 어떤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두 가지 문제에 관한 분석과 평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중국의 2027년 대만 침공설 2027년 이내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을 처음으로 꼭 짚어 언급한 인사는 필립 데이비슨 미 인도태평양사령관이었다. 그는 2021년 3월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대만은 중국이 야심차게 노리는 정치군사적 목표고, 그 위협은 향후 6년 안에 분명해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 후 이와 같은 맥락의 말이 여러 최고위 인사의 입을 통해 이어졌다. 예를 들어 2022년 10월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 국장은 CBS 인터뷰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2027년까지 대만을 공격할 준비를 끝내라는 지시를 군에 내렸다”고 말했다. 2024년 3월 존 아퀼리노 인도 태평양사령관은 “모든 징후는 중국이 2027년까지 대만 침공 준비를 마치라는 지시를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올해, 2025년 1월 인사청문회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지명자도 (시기를 늦추기는 했지만) “중국의 계산에 극적인 변화가 없다면 향후 5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여러 최고위 인사가 지목했던 바로 그 2027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중국이 군사력을 급격히 증강하며 대만 통일을 강조하게 된 배경이나, 무력에 의한 현상변경에 강력히 반대하는 대만인의 의지를 여러 차례 자세히 다루었다. 우리는 중국의 권위주의와 팽창주의가 대만 침공이라는 위험천만한 결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고하고자 했다. 이번 글에서는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에 관한 최근 분석, 특히 군사적 측면의 분석을 살펴보고, 그 함의를 도출하고자 한다. 1) 중국의 대만 점령은 군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시각 중국의 정치적 동기가 얼마나 강렬하든 간에, 미중 간의 종합적인 군사력 격차가 매우 크기 때문에 중국의 대만 점령은 군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시각도 많다. 중국의 국방비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1.5% 수준이고, 숨겨진 지출을 더해 2% 수준이라고 봐도 미국의 지출액에 비해 1/3 수준에 머문다. 해군력을 비교해 본다면 2024년 6월 현재 해군 함정 총톤수에서는 미국(360여만 톤)이 중국(155여만 톤)보다 2.3배 우월하다. 미국의 항공모함은 11척 모두 핵 추진이지만 중국의 3척은 재래식 추진이고 함재기 규모도 적고 운영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미국이 보유한 69척의 잠수함은 모두 핵 추진이지만 중국이 보유한 71척의 잠수함은 16척만 핵 추진이다. 미국이 보유한 69척 중 55척이 공격형 잠수함(SSN), 14척이 탄도미사일 발사 잠수함(SSBN), 4척이 순항미사일 발사 잠수함(SSGN)이다. 또 미국은 미국 본토를 제외하고도 140여 국에 374개 군사기지를 확보해 운용하는 반면 중국은 해외 군사기지가 지부티 한 곳에 불과해 군사 보급 능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 흥미롭게도 2025년 1월 25일 러시아 연방정부의 싱크탱크, 러시아국제문제위원회(RIAC)가 발표한 보고서 「중국 2049 미래학적 분석」은 중국이 공격적으로 해군력을 늘리고 있으나 미국과 20년 이상의 격차가 난다고 진단했다. 러시아와도 10년의 격차가 있다고 했다. (“러시아, 부풀려진 중 해군력”, 《서울경제》, 2025년 2월 2일.) 다만 중국이 핵 전력을 빠르게 늘리고 있어 2035년경에 미·러와 대등한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는데, 중국의 핵전력 문제는 뒤에서 다시 다룬다. (1) 2023년 1월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워게임 분석 : 대만과 미국, 일본이 단호하게 대응하면 중국의 대만 점령은 불가능 그렇지만 종합적인 군사력 비교만으로 단기전의 결과를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2023년 1월,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중국의 대만침공 워게임을 분석한 보고서, 『다음 전쟁의 첫 번째 전투』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미 국방부가 많은 워게임을 수행했지만 결과는 기밀이고 제한적 정보만 알려져 있다며, 국가안보 커뮤니티에 통찰력을 제공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독자적으로 워게임을 수행하고 보고서를 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국내 언론에서도 “中, 대만 침공 성공 못해… 해군은 궤멸 美가 ‘워게임’ 해보니”(《조선일보》, 2023년 1월 9일), “중국의 대만 침공 워게임... 미-중 진영, 1만 명 이상씩 숨진다”(《한겨레》, 2023년 1월 12일)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언론에는 그 개요만 소개되었는데, 함의를 따져보기 위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보고서가 가정하는 개전 초기 상황은 이렇다. 중국군이 개전 몇 시간 동안 막강한 화력으로 선제공격을 퍼부어 대만의 해·공군력 대부분을 파괴한다. 중국군은 곧바로 해군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대만을 에워싸고 모든 해상로를 봉쇄한 뒤 지상병력을 대만 해안에 상륙시킨다. 또 공군 항공기들은 대규모 공수부대를 대만 해안선 너머 내륙 깊숙이 침투시킨다. 보고서는 대전략, 전략, 작전·전술 수준 각각에서 다음과 같이 표준 시나리오를 설정하고, 그와 다른 변형 시나리오를 제시하여, 총 24회의 워게임을 실행한다. [%=사진1%] [그림] 중국의 대만 침공에 따른 전쟁 시나리오 (자료출처: 《한겨레》) [%=사진2%] [그림] 워게임 개요를 보여주는 작전지도와 지상전투지도 (자료출처: CSIS) ■ 대전략: 정치적 의사결정 - 중국이 침공하며, 개전일을 결정한다. - 대만의 저항은 강력하다. - 미국은 자동으로 전쟁에 개입한다. * 변형: 미국이 참전하지 않아 대만이 고립된다. / 미국 폭격기의 참전이 개전 후 4일까지 지연된다. / 미국의 참전이 개전 후 14일까지 지연된다. - 미국은 대만에 사전에 주둔해 있지 않다. * 변형: 미국의 연안작전 해병연대가 사전에 배치되어 있다. - 일본은 미국이 자국 내 미군기지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용한다. * 변형: 일본이 중립을 유지한다. - 일본 자위대는 중국이 일본 영토 내부를 공격하면 반격한다. * 변형: 일본 자위대가 개전일에 바로 참전한다. - 일본 자위대가 전쟁에 개입한 후에는 모든 작전에 참여한다. * 변형: 일본은 방어적 태세로 남는다. - 필리핀은 관여하지 않는다. * 변형: 필리핀이 군사기지를 제공한다. - 호주가 유일한 동맹/파트너로 관여한다. - 이 기회를 틈탄 다른 국가(예를 들어 북한)의 공격은 없다. * 변형: 미국은 동시적 위기를 감내해야 한다. ■ 전략: 전투서열, 동원, 교전규칙 (전투서열) - 중국: 변형 시나리오에서는 중국의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증대한 경우와, 전술탄도미사일(단거리탄도미사일)을 유지하는 경우를 다룬다. - 대만: 변형 시나리오에서는 대만의 하푼미사일(대함 유도미사일) 보유량 증대가 지체되는 경우를 다룬다. - 미국: 변형 시나리오에서는 일부 잠수함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를 다룬다. (동원) - 중국: 개전 30일 전 - 미국: 개전 14일 전 (즉 미국은 중국의 은밀한 침공 준비를 주시하며, 불확실성이 존재하지만 14일 전에 항모전단을 오키나와와 도쿄에 보내고, 괌에 폭격비행단을 배치한다.) * 변형: 미국은 개전일에 동원을 시작한다/미국은 무력시위를 하지 않는다. - 대만: 즉각적인 동원 * 변형: 대만은 대응이 지체되어 개전 후 4일까지는 무력하다. (교전규칙) - 미국, 일본 영토에 대한 중국의 공습은 승인된다. - 중국 본토에 대한 미국의 공습은 승인된다. * 변형: 미국은 중국 본토에 대한 공습은 승인하지 않는다. ■ 작전과 전술: 운영능력, 무기, 인프라 (작전 운영능력) - 중국 상륙군: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과 동일하다. * 변형: 중국 상륙군의 운영능력이 떨어진다. - 대만 지상군: 중국과 동일하다. * 변형: 대만 지상군의 운영능력이 떨어진다. - 중국 공군: 미군과 동일하다. * 변형: 중국 공군의 공대공 운영능력이 떨어진다. (무기효율성) - 미국 JASSM(삼군 공용 공대지 장거리 미사일)의 대함 타격 능력: 작동한다 * 변형: 작동하지 않는다. - 미국과 중국의 함정 방어능력: 기대치만큼 작동한다. * 변형: 기대치에 비해 미흡하다. - 위성공격무기와 사이버공격: 중간 정도의 효율성 - 5세대 항공기: 미국과 중국이 동등하다. * 변형: 미국의 5세대 전투기가 우월하다. (인프라) - 일본의 항공기 강화 격납고(HAS): 현행 프로그램 수준. * 변형: 일본 내 강화 격납고를 늘린다. - 일본 민간공항 사용: 군 부대당 오직 1개의 지역 민간공항만 사용할 수 있다. * 변형: 미국과 일본은 대규모 일본 공항들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림] 재즘(왼쪽)과 군산 강화격납고(오른쪽) 재즘(JASSM, Joint Air-to-Surface Standoff Missile, 삼군 공용 공대지 장거리 미사일)은 미 공군과 해군이 운용하는 자율형, 스텔스 기능을 갖춘 장거리 재래식 공대지 정밀 타격 미사일이다. 이 무기는 200해리(약 327km) 이상의 사거리에서 방어력이 높은 고정 또는 이동식 목표물을 파괴하도록 설계되었다. 길이 4.3m, 무게 1,022kg으로, 완전 자율형 ‘발사 후 망각’(Fire and Forget) 방식으로 운용된다. 태평양공군사령부는 2020년 7월 31일 제8전투비행단이 군산기지에서 강화격납고(HAS) 준공식을 개최한 사실을 공개했다. 이번에 구축된 HAS는 모두 20개동이다. 특히 HAS는 북한군의 미사일·화학무기 등 공격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형 격납고 건설에는 총 51개월이 걸렸고 전체 예산은 1억 2,500만 달러(약 1,480억 원)에 달한다. (자료출처: 《뉴스1》) 보고서는 24번의 워게임 결과를 ▲ 표준 시나리오 외에, ▲ (미국과 파트너에 유리한) 낙관적, ▲ (중국에 유리한) 비관적, ▲ 대만 고립, ▲ 라그나로크(즉 매우 비관적) 시나리오까지 총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눈다. ① 먼저, 표준 시나리오의 경우 상대적으로 신속하고 분명한 중국의 패배로 나타났다. 이는 대부분 중국군이 대만의 항구와 공항을 점령하기 전에 미국, 대만, 일본의 대함 미사일이 중국의 상륙선을 파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상륙함대의 최소 90%가 파괴되었고, 상륙한 중국 부대는 항구나 공항을 점령하거나 사용할 수 없어서 공중투하로만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14일간 지속된 전투 후 종료시점에 상륙한 부대는 3만 명 정도며 대만 영토의 7% 정도만 통제하는 데 머물렀다. 그렇지만, 표준 시나리오의 결과가 중국의 패배라고 하더라도 양측이 입는 손실은 심대하다. 짧은 전투기간을 고려하면 미국 공군의 손실은 베트남 전쟁 이후 최대이고, 미국 해군의 손실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다. 일본도 열도에 걸쳐 있는 이착륙장이 공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대만의 인명, 인프라 피해는 막대하다. 중국의 손실도 충격적인데, 대규모 항공기와 사실상 함대 전체, 수천 명의 병력이 포함된다. 미국은 세 번의 표준 시나리오 워게임에서 168~372대의 전투항공기를 잃었는데, 대부분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따라서 미중 간의 공대공 능력은 워게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만의 비행거리 내에 미국과 동맹국의 공군기지가 부족하여 소수의 기지에 전투항공기가 밀집해 있었고, 게다가 이들 기지에는 강화 격납고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의 미사일은 미국, 대만, 일본의 항공기 다수를 파괴할 수 있었다. 미 해군은 2척의 항공모함과 7~20척의 주요 수상함(구축함과 순양함)을 잃는다. 이는 시나리오가 사전에 중국을 억지하려는 무력시위를 위해 두 척의 항공모함과 수상전투단(SAG)이 오키나와 주변의 취약한 위치에 배치하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 현대 대함 미사일의 일제사격에 수상함이 취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상함의 미사일 방어가 매우 훌륭하게 작동하더라도 공격 미사일의 수가 너무 많아 방어용 무기고가 소진되어 요격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더욱 심각한 어려움에 처할 수 있는데, 모든 군사자산이 중국의 대함 미사일 시스템 사거리 내에 있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미 공군과 해군의 막대한 피해는 중국의 집중적인 선제공격에 의한 것이다. [%=사진4%] [표] 시나리오 종료 시점에 대만 연안에 상륙한 중국군의 상황 (자료출처: CSIS) [%=사진5%] [표] 시나리오별 미국, 일본, 중국의 손실 (자료출처: CSIS) ② 다음으로, 미국과 그 파트너에게 유리한 낙관적인 시나리오에서도 동일한 결과, 즉 분명한 중국의 패배라는 결말이 나오지만 더 신속하고 사상자도 적다. 낙관적 시나리오 중 첫 번째는 ▲ 일본의 공항과 항구에 대한 미군의 접근권이 확대되고, ▲ 함선의 방어 효율성이 떨어지고, ▲ 중국의 미사일을 억제하고, ▲ (중국의 선제공격 전에) 괌에 폭격기와 항공모함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고 가정했다. 두 번째는 ▲ 일본의 공항과 항구에 대한 접근권이 확대되고, ▲ 함선의 방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가정 외에 ▲ 일본이 개전일 참전하며, ▲ 중국의 상륙 작전운영능력이 떨어지며, ▲ 미국의 5세대 항공기가 우월하며, ▲ 미국의 조종사 훈련이 우월하다는 가정을 추가했다. ③ 중국에게 유리한 비관적인 시나리오에서는 전투가 연장되는데, 그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즉, ▲ 중국의 결과적인 패배, ▲ 중국이 피해를 입은 항구와 공항을 통제하는 가운데 이어지는 교착상태. 18번의 비관적인 워게임은 모두 JASSM-ER(JASSM의 사정거리 연장 개량형)이 대함 공격능력이 없다고 가정했다. 4번은 이러한 가정만 포함하고, 나머지 14번은 다음 중 최소한 3개의 비관적 가정을 추가했다. 즉, ▲ 미군의 동원이 지연된다, ▲ 미군의 참전이 늦어진다, ▲ 대만의 작전운영능력이 떨어진다, ▲ 대만이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 미국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한다, ▲ 중국의 중거리마시일 수가 증가한다, ▲ 일본은 영토 내부가 공격 받더라도 공세적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④ 대만이 고립되는 시나리오에서는 중국군이 꾸준히 진군하여 대만 전역을 점령하여, 중국이 확실하게 승리를 거둔다. 보고서는 대만이 미국의 직접적인 지원 없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 탐구하기 위해 대만 고립 시나리오를 설계했다고 설명한다. 워게임 결과, 중국은 대만 남쪽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느리지만 꾸준히 전진하여, 10주만에 타이베이를 점령한다. 하지만 보고서는 워게임 결과가 교훈을 준다고 말한다. 대만이 싸울 의지가 있다면, 중국군이 주요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대만군과 장기간의 전투를 벌여야 하고, 이는 국제외교나 미국의 개입을 위한 시간을 벌어줄 것이라는 뜻이다. ⑤ 라그나로크 시나리오에 따르면, 미국의 공군력을 사전에 완전히 무력화할 때만 중국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보고서는 대만의 저항과 미국의 참전이 있더라도 중국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라그나로크, 즉 최악의 시나리오를 설계했다고 말한다. 중국이 승리를 거두려면 중국은 미국의 공군력, 즉 전투기와 폭격기를 완전히 무력화해야 한다. 먼저 전투기/공격기의 경우, 일본이 엄격히 중립을 유지하여 미군이 일본기지를 활용할 수 없다면 효과적으로 작전에 참여할 수 없다. 공중급유기와 괌 기지를 이용할 수 있으나, 괌 기지는 중국탄도미사일에 의해 파괴될 수 있고, 공중급유기도 요격에 노출될 수 있다. 폭격기의 경우, 중국이 무력화하기 어렵다. 중국 지상발사 미사일의 사거리를 벗어난 곳에 기반을 둘 수 있고, 여러 방향에서 접근하여 방어용 지대공 미사일의 사거리 밖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에 기반을 둔 전투기가 폭격기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미국 폭격기는 사정거리가 매우 긴 공대공 미사일을 보유한 중국 전투기에 취약할 수 있다. 미국의 공군력이 무력화된다는 라그나로크 시나리오 워게임에서는 중국군이 승리한다. 중국군이 상륙할 때 대만의 대함 순항미사일과 미군의 핵추진잠수함으로 큰 피해를 입으나 초기 전력의 2/3를 상륙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대규모 함대가 대만을 구제하기 위해 접근했으나, 공군력이 없는 상태에서 대부분 파괴된다. 보고서는 라그나로크 시나리오가 (중국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대만 방어에서 일본이라는 기반과 대함 순항미사일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결과에 따라 보고서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2026년 중국의 대만침공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첫째, 대만이 반드시 중국군에 격렬하게 저항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머지 조건은 소용없다. 둘째, 미국은 반드시 수일 내에,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적대행위에 대응해야 한다. 지연이나 어중간한 조치는 방어를 더 어렵게 하고, 미국 사상자를 늘리며, 중국이 대만 내에 확고부동한 점령지를 창출할 위험을 높인다. 셋째, 미국은 반드시 일본 내 자국 기지를 활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은 자국의 수많은 전투기와 공격기를 활용할 수 없다. 넷째, 미국은 반드시 충분한 수의 공중발사 장거리 대함미사일을 보유해야 한다. 보고서의 결론은 중국의 집중적인 선제공격으로 미국과 일본의 공군력과 해군력이 심대한 타격을 입더라도, 대만과 미국, 일본이 단호하게 대응한다면 중국에 대만에 대규모로 상륙하고 나아가 대만을 점령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결말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혔다. 한편, 보고서가 한국에 관해 언급하는 대목은 많지 않다. 보고서는 한국이 중국의 힘을 우려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초점을 흐리려 할 목적으로 북한 지도부가 감행하는 (또는 중국이 배후에서 유도하는) 북한의 적대적 도발 행동도 걱정한다고 본다. 그래서 한국군은 대만에서의 무력충돌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달리 말하면, 한국군은 언제나 기본적으로 북한군을 상대하는 게 주된 임무다. 다만 시나리오에서 미국은 한국에 배치된 미 공군 4개 비행대대 중에서 2개 대대를 (오키나와에 이동배치한 후) 대만에 투입하는데, 그래도 2개 대대는 북한 억지를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 남겨둔다. (비행대대는 보통 12-24기의 비행기로 구성된다. 2023년 시점에 한국에 배치되었던 전투비행대대 1개는 24기의 전투기로 구성되었다.) (2) 2024년 1월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전문가 설문조사 : 중국이 대만을 격리·봉쇄할 수는 있어도 침공할 수는 없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워게임 결과를 발표하고 1년이 지난 후인 2024년 1월 22일, 이번에는 미국의 전문가 52명과 대만의 전문가 35명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역시 국내 언론에 “중국, 대만 침공 역량은 아직... 봉쇄하면 대만 1~3개월 버틸 듯”(《한국일보》, 2024년 1월 23일)과 같은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보고서 발표 얼마 전인 1월 13일 16대 대만 총통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주진보당의 라이칭더 주석이 승리를 거두기도 했기 때문에 중국-대만 관계의 긴장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보고서가 더욱 주목을 받았다. 설문조사의 첫 번째 질문은 중국이 대만을 효과적으로 격리, 봉쇄, 침공할 역량을 현재 보유하고 있다고 보냐는 것이었다. 답은 대체로 ‘중국은 대만을 효과적으로 격리 또는 봉쇄할 수 있으나, 침공할 수는 없을 것’으로 나왔다. 여기서 격리(quarantine)는 비군사 행위자, 예를 들어 해안경비대, 해상민병대가 주도하며 ‘사법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상품의 유출입을 막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군사적 봉쇄에 비해서는 제한적이며, 예를 들어 세관검사라는 이름으로 일부 항구에서 운송을 제한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다.) 반면 봉쇄(blockade)는 군대가 주도하는 다영역 활동으로, 상품의 유출입을 강력히 제한하며 군사적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봉쇄 활동의 범위는 다양한데, 상선과 적대적 군사력의 차단부터 대만의 항구와 공항의 파괴에 이를 수 있다. [%=사진6%] 답변을 구체적으로 보면, 중국이 대만을 격리할 역량도 갖췄다고 평가한 이들은 미국 전문가의 91%와 대만 전문가의 63%였고, 봉쇄할 역량의 경우도 미국 전문가의 81%, 대만 전문가의 60%였다. 반면 중국이 대만을 효과적으로 침공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미국 전문가의 27%와 대만 전문가의 17%만이 긍정적으로 답했다. 또 다수의 전문가는 중국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봉쇄할 능력이 있으나, 군사적 봉쇄만으로는 강제적 통일을 실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미국 60%, 대만 69%.) 군사적 봉쇄는 결국 확전, 침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거나, 대만의 항복을 강요하려면 침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다. 군사적 봉쇄만으로도 강제적 통일을 달성할 잠재력이 있다고 답한 전문가들도 (미국 35%, 대만 31%) 대만이 침공을 확실히 믿을 만큼 중국이 위협을 가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화제를 돌려, 보고서는 앞으로 5년 내에 중국의 일차적 목표가 대만의 특정 행동이나 정책을 응징하고 변화를 강제하는 것이라면 (즉 즉각적인 강제적 통일이 아니라면) 어떤 수단을 택할 것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을 던졌고, 선택지는 ▲ 대만 외곽섬(금문도, 마조도) 격리, ▲ 대만 본섬 격리, ▲ 대만 외곽섬 강제 점령, ▲ 원거리 합동 봉쇄, ▲ 고강도 봉쇄, ▲ 대만침공으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미국 전문가는 외곽 섬 격리를 가장 많이 택했고(66%), 대만 전문가는 본섬 격리(71%)를 가장 많이 골랐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얼마나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 미국 전문가는 무력침공의 경우 96%가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완전히 또는 꽤 신뢰한다고 답했고, 46%가 완전히 신뢰한다고 답했다. 대만 전문가는 완전히 또는 꽤 신뢰한다는 73%이고, 완전히 신뢰한다는 49%였다. 보고서는 미국에 비해 대만 전문가가 신뢰도가 낮은 이유를 두 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역사적으로 미국의 정책이 양안관계의 현상유지를 선호했고 따라서 대만을 언제나 무조건 지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둘째는 최근 중국이 미국의 정책에 관한 틀린 정보나 조작된 정보를 유포하기 때문이다. [%=사진7%] [그림] 봉쇄나 침공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이라는 높은 신뢰가 존재한다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앞으로 5년 내에 이러한 시나리오가 발생한다면, 중국의 목표 달성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기꺼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얼마나 신뢰하는가? ” (자료출처: CSIS) 흥미로운 대목은 외곽 섬에 대한 중국의 격리나 강제적 점령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으로 보는 답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이다. (‘완전히’와 ‘꽤’를 합쳐서 격리는 미국 전문가 17%/대만 전문가 17%, 강제적 점령은 미국 전문가 29%/대만 전문가 35%.) 1979년에 제정된 미국의 대만관계법은 미국이 대만 지역 주민의 안보나 사회·경제 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강압적 수단에 저항할 능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하지만, 지리적 적용 범위에 금문도와 마조도를 포함하지 않았다. 따라서 외곽 섬들의 방어 문제에 관한 한 여전히 전략적 모호함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사진8%] [그림] 금문도, 마조도, 팽호도 금문도는 대만과의 거리는 약 210km에 달하지만 중국 대륙과의 거리는 불과 1.8km에 불과해 매우 가깝다. 마조도는 19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국 대륙과의 최단 거리는 약 9km다. (자료출처: 《뉴스메이커》) 이런 맥락에서 2024년 8월 14일, 미국 전쟁연구소와 기업연구소는 라이칭더 총통 취임 이후이자 미국 신임 대통령 취임 직전 시점인 6개월 내에 (즉 대만과 미국 각각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할 때) 중국이 금문도를 격리하는 조치를 실시하고 결국 강제적으로 장악하여 일국양제의 시범지역으로 삼는 가상 시나리오를 담은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보고서가 경고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이와 같은 우려는 앞으로도 계속 제기될 것이다. 2) 미국 군사력에 틈이 있다는 시각 (1) 중국의 군사력 추격 전략국제문제연구소가 워게임 보고서를 발표했던 때와 같은 해인 2023년 8월, 미국 온라인 뉴스레터 《워존》은 해군정보국이 작성한 ‘중국 해군 대 미국 해군 전력 배치’라는 제목의 슬라이드 한 장을 공개했다. 슬라이드 오른쪽 위에 ‘기밀 아님’(unclassified)이라고 쓰여 있듯이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 폭로된 것은 아니지만, 단순명쾌한 이미지가 준 충격이 있었다. [%=사진9%] [그림] 2023년 미국 해군정보국이 작성한 ‘중국 해군 대 미국 해군 전력 배치’ 슬라이드를 설명해보자. 맨 위를 보면 2020년부터 2035년까지 5년마다 미 해군과 중국 해군의 주력함 전력을 비교한다. (주력함은 전투함, 잠수함, 기뢰전함, 대형상륙함, 대형 전투지원 보조함으로 정의한다.) 중국은 355척에서 475척으로 증가하는 반면, 미국은 296척에서 305~317척으로 증가하는 데 그쳐 격차가 더 커진다. 오른쪽의 그래프 중 위의 것은 주력함의 수를 표시한 것인데, 이미 2015년쯤에 중국이 수에서 앞지른 것이 보인다. 아래는 톤 수로 비교한 것인데, 미국이 2040년까지 톤 수에서는 여전히 앞서지만 중국이 꾸준히 추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더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중국의 건조 능력’이었다. 중국 조선소의 건조 능력은 2,325만 톤인 반면, 미국은 10만 톤으로 중국이 미국의 232배다. 또 조선업 매출비중에서 해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중국은 70% 수준인 반면, 미국은 95%로 추정한다는 설명도 있다. 미국 조선업이 거의 해군 발주에 의존할 만큼 쇠퇴했다는 뜻이다. 아래에는 추가적인 설명이 더 붙어 있다. “중국은 세계 조선업에서 큰 격차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 상업 조선시장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지만, 미국은 0.5% 미만이다. 중국에는 75개 이상의 ‘저명한’ 상업 조선사가 있고, 그 중 20개가 중국 해군의 건조프로그램에 참여한다. 50개 이상의 중국 드라이 도크는 항공모함을 물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중국해군의 수상함 생산업체들은 군수용과 상업용이 혼합되어 있으며, 이와 관련된 건조는 대부분 중국국영조선공사 시설에서 완료된다는 설명도 있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가 조선업 재건에 매우 큰 관심을 보이고, 한국 정부가 마스가(MASGA), 즉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를 제안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사진10%] [그림] 주요 국가 해군력 증가의 누적량 [%=사진11%] [그림] 미국과 중국의 시기별 전투함 건조 수 비교 반면 같은 기간에 건조된 미국의 신형 전투함은 25%에 불과하다. 그래서 중국 전투함의 평균 선체 연령은 14.9년인데 반해, 미국 전투함은 24.2년으로, 미국이 10년 정도 노후화되어 있다. 특히 잠수함의 경우는 수상함보다 훨씬 더 노후화되어 있는 상태다. 미국이 보유한 69척의 잠수함 중 2027년까지 퇴역하는 10척의 평균 선체연령은 38.2년이고, 2028년에 퇴역하는 4척의 평균 선체연령은 42.5년, 2029년 퇴역하는 1척은 39년이다. (핵추진 잠수함 원자로의 수명주기는 42년이다.) 미국은 신형잠수함 건조를 해군의 최우선 계획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퇴역과 취역의 균형이 흐트러져 현행 69척에서 42척까지 줄어드는 기간을 피하기 어렵다. 반면 중국은 71척에서 76척으로 늘어나는데, 5척이 모두 핵추진 잠수함이다. 미국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2021년 9월 바이든 미 대통령이 미국과 영국이 호주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지원한다면서, 오커스(AUKUS)의 창설을 발표했다. (오커스는 핵추진 잠수함과 관련된 필라1과 첨단군사기술 공동개발과 관련된 필라2로 구성된다.) 필라1의 핵심은 ▲ 2030년대 초반부터 미국이 버지니아급 공격형 핵잠수함(SSN) 3~5척을 호주에 판매하고, ▲ 2030년대 말까지 영국이 설계하고 건조한 1척의 공격형 핵잠수함을 호주에 양도하며, ▲ 2040년대 초반까지 영국의 지원으로 호주가 1척의 공격형 핵잠수함을 건조한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로 교체되면서 오커스 계획이 중단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었으나 2025년 12월 4일 트럼프 행정부가 5개월간의 재검토 끝에 오커스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12월 8일 미국-호주 외교-국방 장관급 회의에서는 “호주가 미국의 잠수함 생산 능력 확장을 지원하기 위해 추가로 10억 달러(약 1조5천억원)를 조만간 제공한다”라고 발표했다. 그렇더라도 오커스가 계획한 일정대로 추진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확실하며,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상당 기간 전력 공백은 불가피해 보인다. 지난 아펙(APEC) 한미정상회담 다음 날, 10월 30일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밝혔는데,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군사력 공백이라는 맥락에서 그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또 이는 미국이 일본의 핵추진 잠수함 보유도 지지할 수 있다는 강력한 암시이기도 하다. (2) 중국의 추격이 함의하는 바 이처럼 중국의 급속한 군사적 팽창과 이와 대비되는 미국의 군사적 틈을 고려할 때, 중국의 무력침공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그 논거를 살펴보자. 첫째, 전통적인 세력전 이론에 따르면 도전국의 해군력이 지배국의 80~120%까지 추격, 추월하는 군사력 전이가 발생했을 때 도전국은 전쟁에서 누가 이길지 불확실하므로 싸워볼 만하다고 판단하고 전쟁에 나선다. 반면 인정투쟁 이론에 따르면 지배국과 도전국의 상대적 격차가 크더라도 자국의 군사력 증강에 고무된 도전국이 선제공격을 시도할 수 있다. 특히 군사력을 추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을수록 폭력적인 현상타파 욕구가 더 커질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05년 러일전쟁이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해군력을 증강한 1872년 당시 일본의 전투함 총 톤 수는 9,935톤으로 러시아 93,815톤의 1/10 수준이었다. 러일전쟁 직전 1903년 시점까지 일본은 23만여 톤으로 240% 증가했고, 러시아는 53만여 톤으로 78% 증가했다. 1872년에서 1903년까지 일본과 러시아의 절대적 격차는 더 커졌으나, 상대적 격차는 일본이 러시아의 약 19%에서 44%까지 추격했다. 또 러시아 해군은 북방, 발트, 흑태, 태평양, 카스피 5개함대로 구성되었는데, 러시아 태평양함대와 비교할 때 일본 해군이 우위를 점했다. 일본은 제물포, 블라디보스토크, 뤼순에 분산 배치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각개 격파하고 이후 증파될 발트함대를 함대함 결전을 통해 제압하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러일전쟁의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다. 비유를 해보자면, 미국의 해군력이 여전히 압도적인 지표가 많으나 중국은 매우 빠른 속도로 군사력을 추격하고 있고 (어떤 지표에서는 중국이 앞서는 부분도 있다), 미국의 6개 함대는 세계 각지에 분산 배치되어 있다. 둘째, 앞서 CSIS 워게임에서 기본 시나리오의 경우에도 미중 양측은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미국은 전투항공기 270기, 전투함 17척(항공모함 2척과 주요 구축함, 순양함 등), 중국은 전투항공기 155기, 전투함 138척(상륙함 86척). 그렇지만 미국과 중국의 조선업 역량 비교에서 드러나듯이 손실된 전력을 복구하고 투사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resilence)에서 미국이 오히려 뒤쳐져 중국이 빠른 시일 내에 재침공을 시도할 때,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3) 소결: ‘전쟁 이하의 강압’이 무력충돌로 번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나? 시진핑 주석이 20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행한 연설에서 나온 말, “외세가 (중국을) 괴롭히면 머리가 깨져 피 흘릴 것이다”(外勢欺負, 頭破血流; 외세기부 두파혈류)이 두고두고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시진핑 주석이 중화민족의 부흥과 함께 대만 통일을 역사적 당위로 거듭 공개적으로 천명했기 때문에,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한다면 감담해야 할 정치적 후과가 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따라서 2027년 21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의 4연임이 결정되기 전에 모종의 행동이 있지 않겠냐는 예측이 따라온다. [%=사진12%] [표] 동중국해에서 중국 해공군과 미국 해군의 활동 비교 2022년을 기점으로 중국 인민해방군(PLA) 전투기와 함정의 동중국해 활동이 대폭 증가하고 있다. 2024년 전투기의 대만 해협 중간선,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 침범 횟수는 각각 2307회와 3705회다. 중국 함정의 대만 해협 중간선 침범도 급증하여, 2024년 2507회에 이르렀다. (자료출처: 김지용, 「중국의 해군력 증강과 대만 침공 가능성 분석」, 《국제지역연구》, 2025년.) 그 모종의 행동은 무엇일까. 2024년 1월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설문조사처럼 무력침공이 아닌 격리나 봉쇄가 될 것인가. 미국 스팀슨 센터가 2025년 9월에 낸 보고서, 『중국의 위협을 다시 생각한다: 왜 중국은 대만을 침공하지 않을 것 같은가』에서도 전면 침공이 아니라 ‘전쟁 미만의 강압’(coercion below war)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제시한 논거는 이렇다. 첫째, 중국 공산당은 군사적 행동의 실현 가능성을 좌우하는 중국 내부의 경제, 인구, 정치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할 것이다. 먼저 경제 측면을 보면, 무력침공을 개시하면 공산당은 관심과 자원을 경제 문제 해결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돌려야 한다. 그러나 여러 여론조사를 보면 중국 대중은 대만 통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지보다 중국의 경제적 실적에 더 큰 관심이 있다. 현재 중국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 무력침공이 야기하는 위험부담은 공산당 통치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무력침공이 개시되면 대만해협과 말라카해협을 통해 중국 본토를 오가는 해상운송이 취약해진다. (2021년 수에즈운하 6일 봉쇄로 중국은 630억 달러의 GDP 손실을 입었다.) 덧붙여 경제제재와 비공식적 금수조치가 가해질 수 있고, 주요 작물의 수입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식량안보가 위협을 받아 대중의 지지가 취약해질 수 있다. 인구 측면을 보면, 중국은 인구고령화와 가족계획정책의 여파로 전투가능인구(17~35세)가 크게 감소했고, 현재 군인 대부분은 형제자매가 없다. 중국인이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혈통이 군인으로 동원되었다가 전쟁으로 사망하여 단절되는 비극보다 대만 통일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 젊은층은 호전적 방안보다 평화적 견해를 더 선호한다. 정치 측면을 보면, 만약 무력침공에 의한 통일이 실패한다면 당의 정통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단 한 명의 지도자에게 책임을 돌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정통성 문제는 세계 무대에서도 제기될 것인데, 중국의 국제적 평판을 훼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 인구, 정치 측면을 고려할 때 전쟁을 막는 요인은 중국 외부가 아니라 중국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일 수 있다. 둘째, 설령 중국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고 하더라도 24만 명이 아니라 2,400만 명의 대만 주민이 남아 있다. 막대한 규모의 민간인 사상과 대만 기반시설 파괴는 중국의 대만 통치를 어렵게 할 것이다. ‘상처 뿐인 승리’를 한 중국은 군사적 공격을 받고 식량, 에너지, 디지털 기반시설을 박탈당한 2,400만 명의 대만인을 통치하는 데 극히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셋째, 중국공산당은 미국과의 갈등이 핵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넷째, 대만의 지리적 현실을 보면 대만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작전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복잡한 군사작전이 될 것이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이 대만해협을 건너 해안교두보를 확보하는 것만도 엄청난 난관이다. 그 다음 험준한 지형을 가로지르는 지상작전을 수행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대만은 중부산맥이 섬 전체 면적의 60%를 차지한다. 따라서 중국이 정치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시간 내에 대만을 점령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과거 사례를 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해 대만(포르모사)를 장악하는 ‘코즈웨이 작전’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작전상의 어려움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결국 포기하고 다른 목표물로 대체했다. 스팀슨 센터의 보고서는 중국 지도자들이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감당할 의향이 있다면 어쩌면 군사적 도전은 결국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핵과 정치 경제적 비용이라는 측면만 보더라도 무력침공은 비현실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중국이 취할 수 있는 ‘전쟁 미만의 강압’은 무엇인가. ▲ 수출통제: 행정적인 방식을 통한 대만의 수출입에 대한 금지 또는 제한. 대만으로의 운송 지연을 노린 세관과 해상 법 집행. 중국 기업의 대(對)대만 핵심 품목 수출이나 투자 제한. (핵심 품목을 집적회로, 석탄, 원유로 단계적으로 확대.) 대만의 대중국 수출 차단. (농산물, 정제 구리, 니켈.) ▲ 해상격리/봉쇄: 외곽섬 해상 격리와 나아가 강력한 봉쇄. 대만 국제무역의 일부 또는 대부분 차단. 물·에너지·금융서비스 등 핵심기반시설에 대한 사이버공격, 해저케이블 공격. 대만 정치지도자와 국민에게 심리적 충격을 가하고, 대만이 해상 격리나 봉쇄를 뚫거나 해저케이블 근처에서 활동하는 의심스러운 중국 선박에 대응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가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 징벌적 타격/작전: 봉쇄보다는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으나 전면침공보다는 수위가 낮은 조치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만 공군, 해군을 국제해역으로 유인하여 교전을 유도할 수 있다. 대만의 방공망이나 정치적으로 상징적인 목표물, 에너지 시설, 통신기반 시설을 겨냥한 공습을 단행할 수 있다. 외곽섬 하나 이상을 강제적으로 점령할 수 있다. ▲ 쿠데타/쿠드망(coup de main, 기습공격): 이 역시 강압외교보다는 현실성이 낮지만 전면적인 상륙작전보다는 현실적인 시나리오다. 중국 특수부대는 대만 정부청사를 장악하고 최고지도자를 생포하기 위한 작전을 시도하고, (실제든 상상이든) 대만 내 중국 지지자들의 쿠데타를 유도하고자 할 수 있다. 이는 여러모로 1968년 북한의 청와대 습격(이른바 ‘김신조 부대 사건’)과 유사할 수 있다. 스팀슨 센터의 보고서는 전면적인 무력침공보다는 더 개연성이 높은 분쟁 시나리오에 입각한 군사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아주 빠른 시일 내에, 또는 다른 모든 ‘전쟁 미만의 강압’ 수단이 소진되기 전에 중국의 전면적 침공을 예상하기 어렵다는 잠정적 판단을 우리가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검토를 통해 몇 가지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시진핑 시대 중국의 급격한 군사력 증강과 중국이 (대만을 포함하여) 주변국에 행사하고 있는 ‘전쟁이 아닌’ 강압 캠페인은 밀접한 상호관계가 있다. 이를 두고 얼마 전까지는 ‘회색지대 전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중국 해군, 공군이 대만해협 중간선,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에서 과거와 달리 공격적인 행동방식을 보이는 모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둘째, 따라서 중국이 당장 즉각적인 전면 침공은 아니더라도 다양한 수준에서 전개될 수 있는 강압 캠페인의 수위를 앞으로 점점 더 높일 수 있다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은 2024년부터 금문도와 마조도 해역에서 자유롭게 법 집행과 순찰을 실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그 후 이 섬들을 완전히 자국 영해에 통합하기 위해 법 집행, 군사, 경제, 법률 등 다양한 수단을 이미 동원하고 있다. 셋째, 이러한 중국의 강압 캠페인이 군사적 충돌의 불씨가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있는가. 예들 들어 중국이 대만의 외곽섬을 군사적으로 봉쇄하거나 점령하려고 한다면, 대만이 이를 포기하지 않을 때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고 또 격화될 수 있고, 미국이 중국의 행동을 전쟁행위로 해석하여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여전히 높은 긴장을 이어가고 있는 대만해협과 미중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필자는 2021년 대만 문제를 보는 기본 관점을 이렇게 쓴 바 있다. “대만에서 전개된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개혁 요구는 궁극적으로 대만이 주권적 실체로 남아 있어야만 계속 진전할 수 있다. 대만이 주권적 실체가 아니라면, 주권이 외부에 종속된다면 시민들의 변화 요구를 직접적으로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와 주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2014년, 2019년 홍콩 시위를 보며, 중국이 말하는 일국양제가 대만인이 기대하는 수준의 민주주의와 주권에 대한 요구를 반영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직접적인 대만 독립선언은 아니더라도, 주권적 실체로서 대만의 지위를 지키려는 사회 저변의 흐름은 앞으로도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홍콩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흐름을 지지한다고 할 때, 대만에서 주권적 실체를 지키며 지속해서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하려는 사회운동의 흐름을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또한 만약 이러한 흐름에 중국이 군사적 위협을 가한다면, 그러한 위협을 강하게 비판하지 않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여전히 이런 관점은 유효할 것이다. [박스기사] CSIS 워게임의 권고안 물론 CSIS 워게임은 중국의 선제공격이나 그 후 대응과정에서 겪는 타격을 줄이기 위한 정책권고도 빼놓지 않는다. 이를 도출하기 위해 먼저 보고서는 표준 시나리오와 변형 시나리오 간 차이를 낳는 변수 각각이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이를 그림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13%] 위에서 언급한 대만을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나,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의 중요도를 고려하여 보고서는 정치·전략, 교리와 태세, 무기와 플랫폼 분야별로 다음과 같은 권고안을 제시한다. ■ 정치·전략 - 일본과의 외교 군사적 관계를 심화하는 데 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 - 전쟁계획을 명확히 수립해야 한다: 군사계획은 위기상황에서 미국이 다른 국가의 영토에 연안작전 해병연대(MLR)나 육군 다영역작전부대(MDTF)를 미리 배치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호주와 일본을 제외하면 다른 국가는 미중 전쟁에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중국은 미중이 발표한 세 번의 공동성명에 따라 대만 내 미군 주둔을 인정하지 않고 격렬하게 반응할 것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이에 관한 명확한 내부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해도 작전을 지속할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절정기에 미국은 하루에 3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번 사례에서는 기본 시나리오의 경우 하루 140명이다. 2차 세계대전 때 300명이었다. 평화로운 환경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상황에 가까운 위험을 내포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 중국 본토를 타격하는 계획을 세우지 마라: 중국 본토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은 핵전쟁의 위험을 고조시킨다. 기본 시나리오에서는 대만 공격에 직접 관련되는 항구와 공항에 대한 공격에 한정했다. - 대만 지상군을 강화해야 한다. 대만 해군과 공군은 비대칭전을 향해 전환해야 한다: 중국의 로켓, 공군, 해군의 힘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만이 광범위한 대칭 능력을 유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고슴도치 전략’의 가치는 워게임에서 입증되었다. 예를 들어, 해안방어 순항미사일, 이동식 지대공미사일, 기뢰는 중국의 봉쇄에 대응하는 데 효과적이다. ■ 교리와 태세 - 일본과 괌의 공군기지 역량을 요새화하고 확대해야 한다. - 미 공군의 지상에서의 취약성을 해결하기 위해 교리와 조달을 재구조화해야 한다. - 중국 본토 상공을 비행할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 연안작전 해병연대(MLR)나 육군 다영역작전부대(MDTF)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들 수의 제한을 두어야 한다. -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전방배치는 취약성을 창출하므로 회피해야 한다: 전략가인 토마스 셀링이 말했듯이 “훌륭한 억지력은 훌륭한 표적이 될 수 있다.” 1941년 초, 미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 함대의 본거지를 하와이로 옮겼으나 그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대결에서 미국의 전진배치는 중국의 선제공격을 유혹할 수 있다. ■ 무기와 플랫폼 - 더 작고, 더 생존가능한 함선으로 바꾸어야 한다. 불능상태가 된 함선과 다수의 침몰자를 구하기 위한 구조 메커니즘을 개발해야 한다. - 잠수함과 여타 해저 플랫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 원거리 대함무기 비축량을 충분히 조달해야 한다. - 극초음속 무기의 개발과 배치를 지속해야 하지만, 그것은 틈새 기능을 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극초음속 무기는 비싸고 다수의 순항미사일을 대체할 수 없다. - 전투기보다 폭격기 부대를 우선 유지해야 한다. 즉,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권고안은 미일동맹의 강화, 대만군의 비대칭전력(고슴도치 전략) 전환에 초점을 맞춘다. 2. 중국의 핵무력 증강과 핵경쟁·핵전쟁의 위험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가 미중 워게임 보고서를 내고 난 얼마 후, 2023년 4월 18일, 《워싱턴 포스트》에는 “미중 경쟁, 실존 위험은 핵전쟁”이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공화당) 매파 정치인이나 미국의 대중 모두 핵전쟁 가능성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며 특히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 시나리오 역시 지나치게 순진하다”고 주장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워게임도 핵무기 사용은 배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의 대만 침공이 핵전쟁으로 확전될 수 있을지, 그렇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누구라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먼저 중국의 급속한 핵무기 보유량 증대와 현대화 프로그램 문제부터 살펴보고, 그 다음 미국의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도 검토한다. 그 다음으로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핵전쟁 워게임 보고서의 제목 ‘아마겟돈’(종말의 날)에 담긴 뜻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1) 중국의 급속한 핵무기 보유량 증대와 현대화 프로그램 [%=사진14%] [표] 중국의 핵전력 (자료출처: 《핵과학자회보》) 《핵과학자회보》의 “중국의 핵무기, 2025”는 중국이 “9개 핵보유국 중 가장 빠르게 핵무기를 증강하고 있는 국가”이며 “핵확산금지조약(NPT) 당사국 중 유일하게 핵무기 보유량을 상당히 늘리고 있는 국가”라고 평가했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핵무기(핵탄두) 보유고는 2010년대 중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2020년대에 급팽창했다. 그렇다면 2025년 현재 중국의 핵무기 보유고는 얼마나 될까. 《핵과학자회보》는 “중국의 핵전력 추정치는 핵 관련 정보 투명성이 높은 국가(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확실성이 더 크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2025년 중국의 핵탄두 수를 600개, 발사장치의 수를 804개(지상발사 탄도미사일 712기,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72기, 폭격기 20기)로 추정했다. 그 중에서도 최근 두드러지는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은 2020~21년부터 간쑤성, 신장 동부, 내몽골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용 대규모 격납고를 새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어떤 ICBM 기지보다 중국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미국 순항미사일의 사정권 밖이다. 그리고 ICBM 연료를 액체에서 고체 기반으로 전환하여, 즉각적인 보복 능력을 높이고자 한다. 간쑤성, 신장 동부, 내몽골에 있는 320개의 격납고에다가 DF-5 용도의 48개 격납고를 합치면 현재 러시아가 운용하는 격납고 기반 ICBM 수를 넘어서며, 미국의 전체 ICBM 전력의 3/4에 해당한다. [%=사진15%] [그림]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 격납고 위치 왼쪽 상단부터 오른쪽 순으로 하미, 위먼, 위린이다. 중국은 2020~21년 이 세 곳에 대륙간탄도미사일 격납고를 새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간쑤성에 위치한 위먼은 2020년 3월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격납고 개수는 120개다. 신장 동부 지역에 위치한 하미는 2021년 3월 건설되기 시작했고 격납고 개수는 110개다. 마지막으로 오르도스(내몽골) 지역에 위치한 위린은 격납고 90개 규모로 2021년 4~5월 건설되기 시작했다. 둘째, 괌과 동북아시아의 주요 미군기지(일본과 한국)는 물론, 러시아의 상당 부분과 인도 전역을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중거리 미사일(DF-26)의 발사장치 수를 크게 늘렸다. DF-26의 사정거리는 4,000km다. 2018년 이후 DF-26 발사장치의 수는 18대에서 250대로 늘었고, 2024년 이후로 500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DF-26은 재래식 탄두와 핵탄두, 양자 모두 탑재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역할 수행능력은 위기상황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재래식 탄두를 탑재한 DF-26 발사 준비나 실제 발사는 핵무기 발사로 오인되어 상대편의 핵 보복이나 선제공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과 핵추진 잠수함 전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기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JL-2를 대체하여 사거리가 1만km에 달하는 JL-3을 사용하면 중국 북부 해역에서 미국 북서부 지역을 타격할 수 있으며, JL-2와 달리 JL-3는 미사일 한 발당 다수의 탄두를 탑재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중국은 094급을 대체하는 096급 핵추진 탄도미사일잠수함(SSBN)을 개발, 배치할 것으로 보인다. 넷째, 2018년 이후로 중국 공군은 전략폭격기의 개량, 개발을 진행 중이다. (로켓 전력이 향상되고 구형 중거리 폭격기가 핵전쟁 발생 시 효과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커지면서 중군 공군의 핵 임무는 2018년까지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다.) 현용 장거리폭격기를 개량한 H-6N은 최근 공중발사탄도미사일(ALBM)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H-6N은 공중급유 능력이 추가되어 작전범위가 크게 늘어났다. 장기적으로 중국은 비행거리 10,000km 이상의 신형 H-20 스텔스 폭격기를 개발하여 H-6을 대체할 계획이다. 이로써 중국은 대륙간탄도미사일(지상기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해중기반), 전략폭격기(공중기반)로 구성되는 ‘핵전력 삼축체계’(nuclear triad)를 구축함으로써 핵무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덧붙여 중국은 최근 수년간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있는 로프누르 핵실험장을 확장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지하 핵실험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이 지하 핵실험을 실제로 실행한다면 서명은 했으나 비준은 하지 않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에 따른 책임을 위반하는 일이 될 것이다. 2) 중국의 핵무기 보유, 앞으로는 얼마나 늘어날까 미 국방부의 2024년 보고서는 중국의 핵탄두 보유량이 2030년까지 1,000개를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에 앞서 미 국방부의 2022년 보고서는 2035년까지 약 1,5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기도 했다. [%=사진16%] [그림] 중국의 핵보유고 예측 중국의 핵무기 비축량 증가 예측은 새롭게 건설되는 고체연료 대륙간탄도미사일용 격납고가 어떤 미사일로, 얼마나 채워지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출처: 미국과학자연맹) 그런데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중국의 신규 핵탄두 증가율을 적용했을 때 2030년 1,000개, 2035년 1,500개라는 수치가 나온다. 《핵과학자회보》는 이러한 예측에는 여러 불확실한 요소가 걸려 있다고 말한다. 즉, 중국은 ▲ 최종적으로 얼마나 많은 미사일 격납고를 건설할 것인가? ▲ 건설한 미사일 격납고 중에 얼마나 많이 실제 미사일을 채울 것인가? ▲ 각 미사일은 몇 개의 탄두를 탑재할 것인가? ▲ DF-26 중거리 탄도 미사일은 총 몇 대가 배치될 것이며, 그 중 몇 대가 핵탄두 탑재 임무를 수행할 것인가? ▲ 중국은 몇 척의 탄도미사일 잠수함을 배치할 것이며, 각 미사일은 몇 개의 탄두를 탑재할 것인가? ▲ 중국이 운용할 폭격기의 수와 각 폭격기가 탑재할 핵무기의 수는 얼마나 될까? ▲ 중국은 얼마나 핵분열성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이 위먼(간쑤성), 하미(신장 동부), 위린(내몽골) 3개 지대에 새로 건설한 대륙간탄도미사일 격납고 총 320개를 2035년까지 3탄두 미사일로 꽉 채울 경우, 2035년 중국이 보유하게 될 핵탄두의 수를 1,500개로 예측한다. 만약 격납고 중 절반 즉 160개를 1탄두 미사일로 채울 경우는 800개 미만으로 예측한다. 앞으로, 중국의 핵 관련 정보를 앞으로 좀 더 폭넓게 수집한다면, 예측치도 좀 더 정확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3) 중국의 핵전력 증강 의도는 무엇인가: 핵무기 선제사용 옵션의 보유인가? 그렇다면 중국이 이처럼 2010년대 중반 이후 핵전력을 급격하게 팽창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곧 소개할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핵전쟁 워게임 보고서는 네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중국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2차타격(second-strike) 능력을 유지하고자 한다. 2차타격 능력이란 적국으로부터 핵공격을 받은 후, 신속하게 핵으로 보복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중국은 미국의 정보·감시·정찰(ISR), 재래식 타격, 미사일방어 능력이 향상되면서, 중국의 2차타격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고 인식한다. 둘째, 중국의 강대국 지위와 시진핑 주석이 말하는 ‘신형 대국관계’를 뒷받침하려는 목적이 있다. 시 주석은 2015년 (제2포병부대에서 개편된) 인민해방군 로켓군(PLARF) 창설식에서 이 부대가 “우리나라의 강대국 지위를 뒷받침할 것”이라고 말했다. (로켓군은 핵탄두를 포함하여 탄도미사일과 전술미사일을 운용한다.) 셋째, 대만 위급 상황에서 미국의 전술핵 사용을 억제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중국 지도부와 전략가들은 대만 분쟁 상황에서 전술핵 옵션을 검토하는 미국 내 논의가 늘어나고 있다고 인식한다. 하지만 미국의 분석가들은 역으로 질문한다. 중국은 첨단 핵기술을 보유하면, 대만 분쟁에서 미국의 개입을 억제하면서도 재래식 공격을 펼칠 수 있다고 믿는가? 넷째, 핵정책을 결정하는 중국 내 관료정치에 변화가 있었다. 전통적인 핵정책 전문가 집단에 비해 군부가 정책결정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커졌다. 시 주석은 핵 현대화를 막던 모든 제약을 없애며, 군부가 신속하게 핵 개발을 달성할 수 있게 상당한 권한을 위임했다. 이는 군부 외부의 감시를 어렵게 했다. 게다가 중국 군부의 핵 개발은 상당 부분 대만 해협의 위기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데, 이는 미중 관계에 큰 함의를 지닌다. 한편 이와는 다른 각도의 분석도 있다. 협소한 군사적 관점이 아니라 지정학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 중국이 급속한 핵 증강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적은 ‘아시아에서 미국 동맹 시스템의 해체’라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은 남중국해, 동중국해에서 회색지대 전략, 또는 ‘전쟁이 아닌’ 강압 캠페인을 동시다발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중국이 대륙적 고립을 피하고 태평양에서 미국의 동맹 시스템을 약화하거나 해소하는 것이다. 중국은 점점 더 정교해지는 핵무기가 파국적인 강대국 전쟁을 촉발하지 않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더 많은 지렛대를 제공한다고 본다. 실제로 중국의 군사이론가들은 현대적 핵무기를 두고, 지역사안에 외부의 개입을 막는 ‘카드’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러시아의 핵 강압/핵협박(nuclear coercion) 때문에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깊이 개입할 수 없었다고 보고, 중국의 핵무기도 비슷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따라서 중국이 핵타격능력을 점점 더 강화한다면, 미국과 동맹국들 사이의 틈을 파고들기 위해 ‘핵 선제 불사용’ 정책을 폐기하고 싶은 유혹을 점점 더 강하게 느낄 것이다. 《핵과학자회보》의 결론은 신중하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핵 선제 불사용’ 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나, 어떤 경우에 중국이 핵 사용 명령을 내릴지는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존재한다”. 그런데 《핵과학자회보》 역시 중국의 핵전력 현대화가 중국의 핵전략과 핵정책에 점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대만에서 미국의 개입을 제한하는 ‘반개입’ 전략으로서 ‘핵무기’를 지렛대로 활용할 것이냐는 질문을 낳는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레드라인이 무엇이든 간에, 중국의 핵 선제 불사용 정책은 높은 문턱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 지도부가 비핵 전력의 현대화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이 정책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시사한다.” “많은 전문가는 미국과 같은 군사 강대국과의 재래식 충돌에서 중국이 선제 핵공격을 통해 전략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나리오는 극히 드물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대만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과 같이 이해관계가 중대한 상황에서는 중국과 미국 모두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선제공격을 포함한 핵무기 사용 옵션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미국의 핵전력 현황 이제 미국의 핵전력 현황을 보자. 아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 수는 냉전 시대에 비하면 훨씬 적고, 2000년대 이후로도 감축이 있었지만, 2007년 이후의 감축 규모는 상대적으로 적다. 2017년 이후로는 거의 비슷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2025년 1월 현재, 미국은 탄도미사일과 항공기에 탑재할 수 있는 핵탄두를 약 3,700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보유한 핵탄두 다수는 실전 배치된 상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미사일과 항공기에 탑재할 수 있도록 보관되어 있다. 현재 실전 배치된 핵탄두는 약 1,770개로 추산된다. 나머지 1,930개의 핵탄두는 기술적으로, 또는 지정학적으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여 이른바 ‘헷지’ 차원에서 보관 중이다. [%=사진17%] [그림] 1945~2024년 미국의 핵 보유량 2024년 7월 23일 미국 에너지부 산하 국가핵안보국(NNSA)이 발표한 기밀해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2023년 9월을 기준으로 보유한 핵탄두는 3,748개다. 이는 핵무기 보유량이 정점에 달했던 1967년 말의 3만1,255개보다는 88% 감소한 규모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핵무기 없는 세계’를 천명하고 재임기인 2009년부터 2017년 사이 핵무기 비축량을 공개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후 핵무기 보유량을 다시 기밀로 지정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첫 해에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기조를 따랐으나 2021년부터 2023까지는 공개 요청을 거부했다. 2024년 3,708개는 미국 과학자연맹의 추정치다. (자료출처: 미국과학자연맹) [%=사진18%] [표] 미국의 핵전력 DCA는 이중용도 항공기, LGM는 격납고 발사 지상공격 미사일, MIRV는 다탄두 각개목표설정 재돌입비행체, SERV는 안전강화형 재진입비행체를 뜻한다. 총 재고 5,177기는 총 보유량 3,700기에 해체 예정인 1,477기를 더한 것이다. (자료출처: 《핵과학자회보》) 미국의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은 ① 3대 핵전력의 고도화: △LGM-35A 센티넬 대륙간탄도미사일, △B-21 레이더 스텔스 폭격기, △콜롬비아급 잠수함 ② NC3(핵 지휘·통제·통신) 업그레이드, ③ 핵탄두 성능개량, ④ 핵무기 생산 인프라 개선으로 구성된다. 덧붙여 2026년 예산요구안을 보면 트럼프 행정부가 주안점을 두는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특히 ▲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핵심 전략핵탄두 W93 개발 예산, ▲ (전술핵무기로 분류될 수 있는) 지하침투형 핵 중력폭탄 B-61-13 생산 예산, ▲ (역시 전술핵무기로 분류될 수 있는) 해상발사 핵순항미사일(SLCM-N) 개발 예산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B-61-13, SLCM-N은 실전에서 사용가능한 핵무기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5) 대만을 무대로 미중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핵전쟁 워게임 중국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특히 대만에서 강압을 위한 지렛대로서 핵무기를 활용한다는 사고가 점점 더 공공연해지고, 미국이 사용가능성을 고려하는 핵무기 개발, 생산을 이어간다면 정말로 우리는 핵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2023년 1월 워게임 보고서가 핵무기 사용을 배제했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의식했는지, 보고서의 저자들은 2년이 지나기 전인 2024년 12월 미중 핵전쟁 워게임을 다룬 보고서를 발표했다. 제목은 『아마겟돈에 직면하다: 워게임을 통해 드러난 대만 미중 충돌의 핵억지와 그 실패』 였다. 2023년 보고서와 달리, 어떤 이유에서인지 2024년 보고서는 국내 언론에 별로 소개되지 않았다. 워게임의 기본가정은 2023년에서 가져왔다. 중국이 30일 전에 동원에 착수하고, 미국은 그로부터 15일에 대응을 시작하고, 일본은 공격을 받지 않은 한 중립을 유지하되 미국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고, 다른 적대세력이 기회주의적 공격을 하지 않는다. 다만 공격 연도는 2028년이다. 이전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85명의 게임 참가자들은 정부, 싱크탱크, 학계, 군 출신의 전문가였고, 워게임은 총 15회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각각 미국, 일본, 중국팀에 속했는데, 가급적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작전목표를 달성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목표달성에 실패할 경우 국가적, 개인적 후과가 따를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각 팀은 핵 태세, 핵무기 사용, 정치적 출구전략에 관한 최종결정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국가지휘기구에 권고를 제시할 수 있었다. 통제팀이 국가지휘기구 역할을 하여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통제팀은 가능한 한 많은 경로를 탐색하기 위해 각 팀이 제안한 권고를 모두 수용했다고 한다. 15회에 걸친 워게임의 핵 사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19%] 핵공격의 유형은 목표물에 따라 ▲ 상대방의 도시·인구·인프라를 표적으로 삼는 ‘대(對)가치’ (countervalue) 공격, ▲ 상대방의 핵전력을 표적으로 삼는 ‘대(對)전력’(counterforce) 공격, ▲ 항만과 공군 기지, 지상군, 해상 함정 등을 표적으로 삼는, ‘작전 중인 재래식 전력’(operational conventional target) 공격으로 나눌 수 있다. 또 특수한 경우로 ▲ 상대방의 지휘통신망을 표적으로 삼는 고고도 전자기 펄스(HEMP) 공격이나 ▲ 비핵동맹국에 대한 공격도 있다. 필자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대가치 공격을 ‘도시인구 공격’으로, 대전력 공격을 ‘핵전력 공격’으로 옮겼다. 결과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총 15회의 워게임 중에서 핵무기가 사용된 경우가 10회, 사용되지 않은 경우가 5회다. -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 결과는 중국의 단계적 철수 3회, 휴전 후 대만 내 중국의 영토 확보 1회, 미결 1회다. -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 미국에 유리한 결과가 많은데, 2023년 워게임이 대체로, 초반에 중국이 기습공격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이 승기를 잡는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유일한 ‘휴전 후 중국의 대만 영토 확보’ 사례는 7회차로, 미국이 초반 손실에 충격을 받고 개전 1주일 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② 핵무기를 사용한 10회 중 중국이 선제사용한 경우가 9회, 미국이 선제사용한 경우가 1회다. - 미국이 선제사용한 단 한 번의 경우는 6회차로, 미국 팀이 초반 손실에 충격을 받고, ‘부활을 위한 도박’의 방편으로 중국의 핵전력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그렇더라도 이로 인해 중국에서 최소 1천만 명의 즉각적인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고, 방사선과 기타 원인으로 수 배에 달하는 추가 사망자도 생길 것이다. 미국 팀은 이로써 중국의 핵보복 능력과 의지를 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중국은 핵보복을 가해 미국에서도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결과 미국이 대만 내 중국의 영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③ 중국이 핵무기를 선제사용한 9회 중에서 대만(경우에 따라 하와이 앞바다, 일본, 태평양)의 재래식전력을 목표로 삼은 경우가 6회, 고고도 전자기 펄스(HEMP) 공격으로 시작한 경우가 3회다. - 중국의 HEMP 공격은 전쟁 극초반이나, 중국이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한 후 이뤄졌다. 미국은 HEMP 공격을 받더라도 아무 대응을 하지 않거나, 동일하게 HEMP 공격을 가하거나, 재래식 작전을 계속했다. 따라서 HEMP 공격은 분쟁을 핵확전이나 출구로 몰고가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시나리오 4의 경우, 중국이 HEMP 공격 이후, 또 다시 대만 재래식전력에 대한 핵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사태가 대화염으로 이어졌다.) ④ 결론적으로, 15회의 워게임 중 핵전쟁이 개시되는 가장 다수의 사례는 중국이 대만의 재래식전력을 목표물로 삼아 선제 핵공격을 가하는 여섯 번의 경우다. (시나리오 4도 포함한다면 일곱 번이다.) - 왜 그런가: 2023년 워게임 결과, 초반에 중국이 기습공격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이 승기를 잡는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중국팀 쪽이 ‘부활을 위한 도박’으로 핵무기 사용 옵션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 그렇다면 중국은 무엇을 목표물로 삼는가: 도시인구나 핵전력을 목표물로 삼기보다는, 재래식전력을 목표물로 삼았다. 재래식전력 중에서도 대만 지상군을 목표물로 삼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해상전력은 한 차례(10회차)뿐이었고, 일본을 목표로 삼은 경우도 한 차례(11회차)였다. 도시인구에 대한 공격에는 금기가 존재하고, 미국 핵전력에 대한 공격은 그 대상과 수단이 마땅치 않다. 해상전력은 이미 개전 초기에 대부분 파괴되었을 것이고, 남은 해상전력을 핵무기로 파괴하려면 정밀도가 매우 높아야 한다. 일본 군사기지에 대한 핵공격은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를 낳을 것이며 즉각적 핵보복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만 대만 지상군에 대한 공격도 다수의 사상자를 낳는다. 대만 지상군에 대한 핵공격에 따른 군인 사상자는 17개 대대, 약 1만7천 명이고, 대만의 지형을 고려할 때 민간인 사망자는 8~35만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중국의 핵공격 후 미국은 어떻게 대응했고, 어떤 결과를 낳았나: 핵으로 대응하지 않은 경우가 3회, 핵으로 대응한 경우가 3회였다. 먼저 핵으로 대응하지 않은 경우를 보면, 두 번은 즉각 또는 얼마간 재래식전쟁을 이어나간 후 철수했고, 대만 내 중국의 영토를 인정했다(9회차와 13회차). 또 한 번은 중국의 조기경보체계에 재래식공격을 가했으나 그러나 결국 전략핵교환, 대화염으로 이어졌다(10회차). 핵으로 대응한 경우를 보면, 2회차에서는 중국이 대만을 핵공격한 후 일본에 대해서도 핵공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하자 미국이 중국의 도시인구를 공격하는 식으로 대응했고, 전면적인 전략핵교환, 대화염이 발생했다. 5회차에서는 미국이 대만 내 중국의 상륙거점을 핵무기로 보복공격했고, 전쟁 이전 상태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물론 이는 대만의 막대한 피해를 수반했다. 11회차에서는 미국이 중국의 핵전력을 공격했고, 중국은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다시 공격하여 양국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중국이 대만 내 영토를 확보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보고서의 저자들이 말한 것처럼, 핵전쟁의 전개 양상을 탐구하기 위해 통제팀은 참가팀들이 제안한 권고를 모두 수용하여 가능한 한 핵전쟁의 다양한 경로를 탐색했다고 했다. 하지만 핵공격이 동반되는 ‘다양한 경로’는 사실 모두 엄청난 사망자와 막대한 피해를 동반했다. 그렇다면 보고서의 저자들은 어떤 결론을 도출하는가. “핵전쟁은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통제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핵 선제사용은 ‘부활을 위한 도박’의 방편으로 사용되었으나 진정 도박이었다. 어떤 경우는 도박이 성공했으나 다른 경우는 다른 어떤 결과와도 비교할 수 없는 끔찍한 파국이었다. “핵무기의 사용은 처음으로 핵무기를 사용한 팀조차 놀라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상대방의 행동을 추동할 것이라고 믿었던 요소는 작동하지 않았고, 개별 행위자의 신념과 배경이 상황의 구조만큼이나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적 요인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또, “중국-대만 문제와 핵 문제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참여한 세 번의 워게임조차 [그들의 계산과 달리] 수억 명이 사망하는 전면적인 핵교환, 대화염으로 끝났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필자는 저자들의 결론을 ‘워게임 결과로부터 승리하는 핵전쟁의 일반적인 도식을 도출하려 하지 마라’라고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워게임 결과를 두고 ‘이런 조건에서 저런 방식으로 핵무기를 사용하면 승리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보고서의 제목에 ‘아마겟돈(종말의 날)에 직면하다’, ‘핵억지의 실패’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일 테다. 또한, 저자들은 핵전쟁이란 조건에서 ▲ (무력충돌이 벌어진다면) 완벽한 승리를 추구하며 상대방을 굴욕에 빠뜨리기보다는, 그래서 상대방이 핵공격을 감행할 극단적 상황을 연출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체면을 살려주고 일정하게 양보도 고려하는 ‘출구전략’을 항상 준비해야 하며, ▲ (무력충돌 이전부터) 핵 확전의 예측 불가능성에 관한 상호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상대방과 대화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저자들은 워게임 참가자들이 직면했던 어려움이 미국 핵무기의 양적 우위가 모자라서나, 획기적으로 새로운 핵탄두 투발수단(예를 들어 핵순항미사일)이 없어서 발생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도 강조한다. 이는 미국이 추진하는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의 적절성에 대한 의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저자들이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반핵론자는 아니다. 저자들은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의 ‘과잉’이 더 긴요한 군사안보 프로그램의 공백을 야기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6) 소결: 강대국 간 핵 통제의 부재, 위기로 치닫고 있는 NPT 체제 세계가 점점 더 핵 무정부상태(nuclear anarchy)로 빠져들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중국은 가차없이 핵무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미국과의 핵통제 테이블을 거부한다. 미국과 러시아의 핵통제 협력은 이미 위기에 빠졌고,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핵위협을 반복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흐름에 반응하여 핵태세를 수정하고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이 무질서상태를 막기 위한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유일한 메커니즘이지만, 핵무기 국가의 행동, 비핵무기 국가의 환멸, 핵프로그램을 구축하려는 일부 국가들(대표적으로 이란. 다른 한편 일본, 한국, 사우디아라비아도 저울질 중이다)의 의도는 NPT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미국-러시아 간 뉴스타트 조약도 2026년 종료 이후 새로 갱신되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렇다면 1972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이후 처음으로 미국-러시아 간 핵 경쟁을 규제하는 어떤 협정도 없는 상황이 도래할 것아다. 트럼프 대통령은 두 번째 취임 직후인 2025년 1월 24일, 러시아, 중국과의 핵군축 협상을 두고 “우리는 비핵화(denuclearize)를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데, 나는 그것이 매우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그 후로도 이와 유사한 발언을 이어갔다. 아펙 정상회담 전인 10월 22일에도 시 주석과 “핵에 관해서도 거래를 맺을 가능성이 있다”며 ‘핵 군축’을 주요 의제로 삼을 수 있다는 뜻도 내비쳤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시 주석과 회담 직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다른 나라들(중국, 러시아, 북한)의 핵실험 프로그램 때문에 전쟁부에 우리도 동등한 수준에서 핵무기 실험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라는 글을 갑자기 올려 다시금 세상을 놀라게 했다. 트럼프 대통령, 푸틴 대통령, 시진핑 주석 시대에 미국, 러시아, 중국 간 의미 있는 핵통제/핵군축 대화의 시작을 기대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듯하다. 2026년은 11차 NPT 평가회의가 열리는 해이기도 하다. 냉전의 종결 이후, 다시금 핵무기 경쟁이 국제정치의 핵심적 이슈로 부상하고, 심지어 ‘2028년 핵전쟁 시나리오’마저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서 세계 사회운동은 토론과 적극적인 활동의 장을 함께 열어야 할 것이다. ●
다른 한편, 위 그림을 보면 이러한 중국의 군사력 추격, 추월은 특히 시진핑 주석 시기에 집중적으로 달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주요 국가 해군력 증가의 누적량’을 보면, 중국의 경우 시진핑 1, 2기에 해당하는 2013~22년, 9년간 증강된 해군력이 1999~2022년 23년 증강된 해군력의 70%를 상회한다. 시진핑 지도부의 해양강국 건설이 허언이 아님이 수치로 드러난다. 또 그림 ‘미국과 중국의 시기별 전투함 건조 척수 비교’를 보면 시진핑 1~3기에 해당되는 2010년부터 2024년간 중국이 가장 많은 신형 전투함을 건조했고, 이들이 전체 전투함의 70%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4분: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
『24분: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 지은이: 애니 제이콥슨 출판사: 문학동네 출간일: 2025.3.17. 1. 고조하는 핵 위기 올해 9월, 원폭 80년과 해방 80년을 맞이하여 민주노총이 주최한 “기억을 계승하여 전쟁과 핵무기 없는 미래로! 한국-일본 피폭자 증언대회”(이하 ‘증언대회)가 열렸다. 그곳에서 알게 된 일본인 대학생 친구가 필자에게 언제부터 핵문제에 관심이 있었냐고 질문했다. 사실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질문이라 순간 당황했다. 지금은 너무 자연스럽게 핵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나, 돌이켜보면 핵문제에 관심이 없던 시기가 더 길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의 비극을 몰랐고,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교과서로 배운 필자로선 대화를 통해 언젠가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집권 세력에 따라 북한과의 긴장 관계가 심화하기도 했지만, 핵전쟁은 책이나 영화에 나올법한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곧 남북한이 통일될 거라며 철도 주식을 사는 지인도 있었다. 그러던 중 하노이에서 열린 2019년 북미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면서 처음으로 북한 핵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 지도부가 미국의 비핵화 개념인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인정한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 북미 간 관계는 심각하게 경색되었다. 북한은 자의적 판단으로 선제 핵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핵무력 정책을 변경했고, 70년 동안 유지하던 통일안을 폐기하고 남한을 적대국가로 규정했다. 아울러 남한과 일본을 타격할 수 있는 전술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남한이 핵폭탄을 머리 위에 지고 살고 있음을 점차 깨달았다. 한반도 밖으로 시야를 넓히면 핵전쟁 위기가 더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핵무기 사용 교리를 개정해,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는 비핵보유국’(즉 우크라이나)이 러시아를 공격하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은 어떤 국가보다도 빠른 속도로 핵탄두를 늘리고 있다. 핵위협의 위험성을 알리는 미국 《핵과학자회보》는 2025년 현재 인류종말까지 89초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2. 절멸의 무기로서 핵무기와 핵 억지론 아슬아슬한 국제정세의 현실 속에서 필자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공부하면서 진실로 핵무기를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사 안보 자료에 접근할 권한이 없고, 핵무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정치인들의 선동에 둘러싸여 있는 시민들은 핵무기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기 어렵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폭자 1세와 그 영향 아래에 있는 2세의 증언을 통해 핵무기의 비인도성과 절멸성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나가사키를 인류의 마지막 피폭지로 만들기 위해 피폭 경험을 알리고 반핵 평화 여론을 모으고 있다. 올해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열린 원수폭금지세계대회는 피폭 80년을 맞은 지금이야말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과 실상을 계승하고 확산함으로써 핵무기 철폐를 결단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핵무기의 사용을 막고 핵무기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핵 억지” 교리를 극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핵 억지란 어마어마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타국이 자국을 공격할 수 없다는 개념으로, 핵보유국과 핵우산 동맹을 형성한 국가의 안보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다. 안보 위기가 심화할수록 핵 억지에 기초한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는 여론이 남한에서도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주장처럼, 어떤 나라도 핵 억지력을 통해 자국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현실에서는 오판이나 오인 등으로 인해 핵무기 사용 직전까지 간 사례가 반복해서 발생했다. 오늘 소개할 책 『24분: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이하 『24분』) 역시 핵무기의 절멸성과 핵 억지의 허구성을 주장한다. 반핵평화운동이 과거 사례를 바탕으로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면, 『24분』은 미국 영토로 핵미사일이 발사된 직후의 순간이 어떤 모습일지에 관한 가상의 핵전쟁 시나리오를 그린다. 저자인 애니 제이콥슨은 대통령 자문위원, 각료, 핵무기 공학자, 과학자, 군인, 항공병, 특수요원, 비밀요원, 재난 관리 전문가, 정보 분석가, 공무원 등 수십년에 걸쳐 핵전쟁 시나리오를 연구해온 사람들과의 독점 인터뷰를 진행하여 수집한 기밀 정보를 바탕으로 합법적으로 알 수 있는 정보의 경계선 극단까지 독자를 안내한다. 핵 억지의 실패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고, 21세기에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떤 참상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려운 우리들에게 경각심과 반핵평화운동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저자는 1부 <빌드업: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에서 핵무기 보유의 역사를 설명하며 오늘날의 국제 정세에서는 언제든 핵 총력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부 <첫 24분>은 북한의 화성-17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이 미국 안보의 핵심인 워싱턴D.C 펜타곤(미국 국방부 청사)을 향해 발사되고 나서 첫 24분간의 상황을, 3부 <이후의 24분>은 워싱턴D.C 상공에 핵폭탄이 투하되고 24분 동안 벌어지는 일을, 4부 <마지막 24분>은 미국이 북한의 핵폭탄 투하에 공세적으로 보복하는 상황을 포함한 24분을 서술한다. 핵전쟁의 전개 속도가 매우 빠르므로, 시나리오는 초 단위로 전개된다. 불행하게도 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5부 <그 이후>에서는 핵전쟁이 종료된 후 벌어지는 암울한 미래, 즉 수십억 명이 사망하고 ‘핵 겨울’이 찾아온 지구의 모습을 설명한다. 저자의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맞이할 수도 있는 미래를 상상해보자. 3. 책 소개 1부. 빌드업: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1945년 8월과 달리 전체 핵무기 양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고, 핵무기의 위력은 더욱 강해졌으며, 핵무기 보유국도 늘었다. 핵무기의 위력을 인지한 미국이 핵무기를 늘려가던 중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보유·개발 경쟁이 가속화되었다. 1952년 미국은 수소폭탄으로 불리는 열핵폭탄을 발명했다. 열핵폭탄은 2단계 초대형 무기로, 핵폭탄 안에 핵폭탄이 들어있는 형태다. 실험을 통해 10.4메가톤의 열핵폭탄(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700배 위력)이 섬 하나를 통째로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열핵폭탄은 수백 기씩, 수천 기씩 쌓여갔다. 1967년 미국의 핵 보유량은 3만 1,255기에 이르렀다. 단 한 기의 핵폭탄만으로 1천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보니, 오늘날 미국의 핵무기 보유량은 1960년보다 감소했다. 그러나 여전히 1,770기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고 그중 대다수는 당장이라도 발사할 수 있는 상태다. 전체 탄두의 개수는 5천 기가 넘는다. 러시아는 1,674기의 핵무기를 배치해두었는데, 그중 대다수가 당장이라도 발사할 수 있는 상태다. 게다가 수천 기를 비축하고 있어서 전체 보유량은 미국보다 많다. 현재 핵무기 보유국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파키스탄, 인도, 이스라엘, 북한까지 총 9개국이다.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핵무기 보유국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등 5개국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그다음 전쟁에 대비하여 최소 6억 명을 죽일 수 있는 핵 총력전을 준비했다. 바로 미 육군, 해군, 공군의 핵무기 작전 계획을 통합한 1960년 단일통합작전계획이다. 이는 소련을 상대로 한 선제 핵 공격·총력전 계획으로, 예상 사망자 수치에는 러시아의 동일 수준 반격으로 거의 확실하게 살해당할 약 1억 명의 미국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단일통합작전계획은 작전 계획 ‘아플랜(the Operational Plan, OPLAN)8010-12’로 이어졌는데, 이 계획은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 등 네 개의 식별된 적을 겨냥하는 일단의 계획이다. 워싱턴에서 “소규모 핵전쟁 같은 건 없다”라는 말이 자주 반복되는 이유다. 『24분』은 이런 대량 학살 계획에 토대를 두고 있다. 2부. 첫 24분 이제 본격적으로 저자의 핵전쟁 시나리오와 마주해보자. 북한 시각으로 오전 4시 3분, 북한 평성에서 화성-17 ICBM이 발사된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인 ICBM은 대륙을 가로질러 표적지까지 핵무기를 운반하는 장거리 미사일이다. 화성-17 ICBM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다. 발사 후 10분도 채 되지 않아 미국 국방부 위성 체계의 경보가 울린다. 탄도미사일 발사, 경고! 이 시나리오의 심각성을 이해하려면, ICBM의 이동 속도와 추진 단계를 알아야 한다. ICBM이 막 발명된 1960년, 펜타곤의 수석 과학자 허브 요크의 연구에 따르면, 소련에서 ICBM을 발사하고 미국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26분 40초가 소요된다. 이는 비행-추진 단계(5분)-중간궤도 단계(20분)-종말 단계(100초)로 나뉜다. 첫 단계인 추진 단계는 5분간 지속된다. 미사일이 발사대에서 로켓 모터에 시동을 걸고 우주로 향하는 동력 비행을 마칠 때까지의 시간이다. 동력 비행이 끝나면 보통 800~1,100km 고도에서 탄두가 방출된다. 두 번째 단계인 중간궤도 단계는 20분간 지속된다. 방출된 탄두가 지구 주위로 호를 그리며 우주를 가로지른다. 마지막 단계인 종말 단계는 단 1.6분(100초)이다. 탄두가 지구 대기권에서 다시 들어올 때부터 핵무기가 표적지에서 폭발할 때까지다. 이 시나리오에서 화성-17 ICBM은 발사 후 33분 뒤, 미국의 펜타곤에 떨어진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핵전쟁 시 공격에 대응할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는 점이다. 발사 후 3분 15초, 북한이 미국을 향해 공격용 미사일을 발사했음을 보고받은 미국 대통령은 겨우 6분 안에 어떤 핵무기를 발사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미국의 핵전쟁 전략은 경보 시스템이 핵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기만 해도 미국이 물리적으로 핵 타격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상대국에 핵무기를 발사하는 ‘경보 즉시 발사’ 정책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핵무기 대부분을 발사 태세로 배치해둔 이유다. 하지만 경보 즉시 발사 정책이 정말로 인류에게 지혜로운 정책인지 물어야 한다. 미사일에 핵탄두가 탑재되어 있는지는 탄두가 터지기 전까지 알 수 없다. 상대의 패를 유추하고 자신의 패를 거는 도박과도 같은 불확실성이 핵전쟁을 지배한다. 이성적인 판단 역시 어렵다. 2025년에 개봉한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핵 공격이 임박했을 무렵 인간이 얼마나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지 보여준다. 원인 불명의 미사일 한 기가 미국 본토로 향하는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은 보복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항복하거나, 더 강도 높은 대응으로 전면적인 핵전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대통령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선택은 단 6분 안에 해야 한다. 결국 불확실성과 비이성은 핵전쟁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도박과 달리 핵전쟁은 수십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점이다. 일단 당장 미사일을 방어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이 군사력 1위인 미국의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이 우수하다고 생각하지만, 2017년 미국의 미사일 방어 실험 성공률은 고작 40퍼센트다. 미사일 요격은 “총알로 총알을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미국의 요격체는 겨우 44기밖에 없어서 그마저도 아껴 써야 한다. 발사 후 9분 10초, 미국의 요격 미사일이 화성-17 ICBM을 막는 데 실패했다.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에서도 미국은 미사일 방어에 실패한다. 이제 화성-17 ICBM은 중간궤도 단계에 진입했다. 탄두는 위성 센서에 전혀 잡히지 않는 채로 지구 위 어느 지점의 고점으로 향하는 고속 궤도에 올라 날아간다. 이제 대통령이 행동해야 한다.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핵무기를 발사할 권한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으며, 군사 자문위원이나 미국 의회의 동의 없이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다. 종종 미국 대통령의 핵가방을 다룬 기사를 확인할 수 있듯이, 대통령 옆에 서 있는 군사보좌관은 대통령의 비상 가방인 ‘풋볼’을 들고 있다. 풋볼 안에는 핵 공격 같은 비상 시나리오가 발생하는 즉시 발효될 수 있는 행정명령과 메시지로 이뤄진 극비 서류가 있다. 그중에 하나는 ‘흑서’로, 사용해야 하는 핵무기, 타격해야 하는 표적지, 그 결과로 추산되는 사상자의 수가 적혀있다. 수십억 명의 목숨이 대통령 개인에게 달려 있고, 그가 언제든 핵무기를 발사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핵무기는 굉장히 위험하다. 우리는 핵전쟁 시 수십억 명의 운명과 인류의 미래가 극소수의 지도자에게 달렸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 핵무기를 발사해야 한다는 전략사령본부 지휘관의 압박 속에서 갈등하는 사이 대통령은 비밀경호국의 특수 전술 부대원들에 이끌려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인 마린 원을 타고 워싱턴DC 외부의 안전한 장소로 대피한다. 발사 후 16분, 저자는 북한의 두 번째 공격을 가정한다. 이는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탄도미사일인 SLBM 공격이다. 실제로 북한의 SLBM 개발 성공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자는 2021년 북한이 일본 연안의 공해상으로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일 가능성이 높은 무언가를 발사한 사실을 바탕으로 북한의 SLBM 공격을 가정한다. ICBM의 별명이 ‘괴물’이라면, SLBM의 별명은 ‘종말의 시녀’다. 탐지하기 어려운 핵추진잠수함이 연안에 매우 가깝게 몰래 접근해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으므로 핵무기 발사부터 타격까지의 시간을 약 30분 혹은 그 이하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통령에게 핵 반격을 숙고할 시간이 단 6분간만 주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발사 후 21분, 우리는 핵전쟁에 ‘법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광기 어린 통치자들은 전쟁법을 따르지 않는다. “승리하면 해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법에는 국가 간에 절대 원자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협정이 있지만, 북한 SLBM에서 방출된 핵탄두가 캘리포니아주의 디아블로 캐니언 핵 발전소를 타격한다. 이는 캘리포니아주 에너지 관료들에게 ‘악마의 시나리오’라고 알려진 것이다. 핵미사일이 원자로를 공격하면 원자로 노심이 녹아 결과적으로 수천 년 동안 이어질 핵 재앙이 초래된다. 전직 맨해튼 프로젝트 소속 물리학자 랠프 E.랩은 원자로의 노심이 붕괴될 경우 “이렇게 녹은 잔해는 원자로 용기 밑바닥에 축적될 수 있으며 (중략) 거대한 크기의 녹아버린 방사능 덩어리는 (중략) 땅속으로 가라앉아 약 2년 동안 계속해서 크기를 늘려간다. 액화된 방사성 용암과 끓어오르는 불로 이루어진 지름 약 30미터의 뜨거운 구체가 형성되어 10년간 지속될 수 있다”라고 했다. 발사 후 23분, 대통령은 급하게 대피하느라 핵 공격이 현실이 되어서야 북한의 SLBM 공격을 보고받는다. 대통령은 압도적인 핵전력으로 북한을 압박하여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한 ‘핵 억지 복구’ 원칙에 기반하여 50기의 ICBM과 각기 4기의 핵탄두를 장착한 8기의 SLBM 발사를 지시한다. 미사일은 북한의 핵·대량살상무기 시설과 지도부, 그 외의 전쟁 유지 시설을 포함한 82개의 표적지를 향해 날아간다. 북한 사람 수백만 명을 핵탄두 폭격으로 살해하는 것이 북한 지도자가 수백만 명의 미국인을 더 죽이지 못하도록 막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가정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핵 억지가 정말 복구될 수 있을까? 미국의 보복 공격을 우려할 수 있는 이성적인 지도자라면 미국을 공격할 수 있었을까? 이미 광기 어린 통치자의 선택으로 실패한 핵 억지는 쉽사리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3부. 이후의 24분: 그라운드제로 이후의 24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까? 『24분』은 평균적인 인간의 지성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핵무기의 위험성을 구체적인 상황과 과학적 사실에 기반해 설명한다. 이 시나리오를 통해 핵전쟁이 인류에게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을 줄 수 있는지, 어떻게 한순간에 인류가 공들여 쌓아온 문명을 파괴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디아블로 캐니언 발전소가 그라운드 제로가 되면서 캘리포니아주 전력망이 붕괴한다. 약 390만 명에게 더는 전력을 공급할 수 없다. 이제 라디오나 TV로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을 수 없다. 핵폭탄은 지표면에서 폭발하여 지상 폭발보다 더 많은 양의 방사성 낙진을 만든다. 지름 1.6킬로미터의 거대한 불덩어리가 발전소 시설 전체를 집어삼킨다. 방사성 산불이 인근 산을 태우고 방사성 재가 공기를 가득 채운다. 차를 타고 대피하던 사람들은 교통이 마비되자 차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한다. 반핵평화운동이 예고하고 경고했던 핵전쟁 비극의 시작이다. 발사 후 33분, 펜타곤이 그라운드 제로가 된다. 펜타곤을 타격한 1메가톤급 핵무기의 불덩어리는 정오의 태양보다 1천 배 더 밝다. 그 빛을 똑바로 본 사람은 누구나 눈이 먼다. 불덩어리는 1.7킬로미터로 늘어나 이 공간에 존재했던 사람과 사물은 모두 불타버린다. 1차 방사범위인 링1 내 건축물은 대체로 무너진다. 링1의 바깥쪽 테두리에서는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이 액화된 도로에 갇혀 불에 타들어간다. 수십 초가 흐르면서 불덩어리는 5킬로미터쯤 솟아오른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폐허와 불길에 갇힌다. 포토맥강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신으로 꽉 막혔다. 링1의 사망률은 거의 100퍼센트다. 2차 방사 범위인 링2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대다수가 3도 화상으로 죽어가는 구역이다. 대형 화재로 방출된 에너지는 최초의 핵폭발보다 15~50배 강력하다. 이는 지름 1미터 크기의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화재 바깥에 있던 사람들을 빨아들일 만큼 강력한 바람을 동반한다. 폭탄의 전자기 펄스(EMP)가 전기를 끊어놓아 물 펌프도 작동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라운드 제로 주변의 260제곱킬로미터(혹은 그 이상) 범위 내 모든 것이 불에 탈 것이다. 공기 중의 치명적인 방사성 물질이 생존자들을 위협한다. 현대인의 상식상, 재난이 일어나면 구조대원이 구하러 온다. 그러나 핵전쟁은 일반적인 재난이나 전쟁이 아니다. 『24분』은 시민들 스스로 알아서 생존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핵전쟁을 대비하는 임무를 맡은 미국의 연방재난관리청은 핵 공격이 발생했을 때 작전 계획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정부 관료를 구하는 데 집중한다. 시민들을 구하고 싶어도 방사성 물질이나 화재 때문에 대원들이 핵폭발 지역 인근으로 갈 수 없다. 이미 구조대원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 『24분』은 국가 간 긴장 관계와 안보 동맹관계 역시 놓치지 않는다. 핵전쟁이 미국과 북한만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핵전쟁은 러시아, 유럽, 한국 등으로 너무나 쉽게 확전될 수 있다. 아울러, 핵전쟁의 빠른 전개 속도와 정보의 불확실성, 국가 간 불신과 적개심, 지도자의 편집증은 확전을 부추긴다. 이미 러시아의 조기 경보 시스템은 미국이 북한을 향해 쏜 ICBM 50기와 SLBM 8기를 인지했다.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하여 그 미사일은 북한을 향해 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확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 대통령이 그 말을 믿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 본토 위로 미사일이 지나가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미국 대통령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24분』은 핵전쟁 시 미국 대통령마저 안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시나리오에서 미국 대통령은 핵폭탄의 전자기 펄스 영향으로 헬리콥터가 추락하기 전에 낙하산을 타고 하강하다 실종된다. 미국 대통령에게 연락받지 못한 러시아 대통령은 이미 불쾌함을 표시했다. 햇빛을 로켓 배기가스로 잘못 보고하는 등 심각한 오류를 반복한다고 알려진 러시아 경보 시스템은 미국의 ICBM과 SLBM을 수백 개의 미사일과 탄두로 오해한다. 러시아는 나토 회원국의 각 기지에서 병사들이 전투 준비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토가 핵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받아들인다. 러시아는 미국과 동등한 수준의 핵무력을 갖추고 있으며 ‘경보 즉시 발사’와 같은 핵정책을 가지고 있다. 발사 후 45분, 국제사회가 러시아를 따돌린다는 편집증에 시달리던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이 러시아를 공격했다고 생각하고, 1천 기의 ICBM을 미국으로 발사한다. 다소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정보의 오류, 이성적 판단의 어려움, 지도자 개인의 특징, 국제 관계, 러시아의 핵정책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인다. 북한은 미국을 향해 또 하나의 미사일을 추가로 발사한다. 주한미군 기지의 군인들은 남한이 북한의 다음 표적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4부. 이후의 (마지막) 24분 마지막 24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핵전쟁은 최종적이다.” 러시아를 향한 미국의 공격, 북한의 82개 표적지를 향한 미국 미사일의 타격, 남한과 미국에 대한 북한의 공격, 미국과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이 24분 안에 빠르고 복잡하게 진행된다. 특정 시간대로 상황을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이 발생하고, 또 많은 이들이 죽는다. 미국 대통령이 실종되고 펜타곤이 그라운드 제로가 되면서 워싱턴 DC에 있던 대통령 계승자 명단 상위에 있는 5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리 워싱턴 DC에서 대피한 서열 6위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취임한다. 그가 취임하자마자 할 일은 대통령과 똑같이, 6분 내에 어떤 핵무기를 사용할지 정하는 일이다. 1천 기의 ICBM을 발사한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해 미국의 육해공 핵 삼위일체의 전력이 투입된다. 각 1기의 핵탄두를 장착한 400기의 ICBM을 발사하고(육상), 다수의 핵탄두를 장착한 SLBM을 여러 기 실은 핵무장 잠수함 14척(해상)과 다수의 핵탄두를 장착한 66기의 핵 탑재 폭격기(공중)를 출격시킨다. 핵탄두는 러시아의 대량살상무기 시설, 전쟁 유지 산업체, 지도부를 타격하기 위해 975개의 표적지로 향한다. 이 세 범주에 속하는 수많은 표적지는 인구밀도가 높은 러시아의 도시 지역에 있다. 종전에 발사한 미국의 미사일이 북한의 82개 표적지를 타격한다. 몇 분 전 워싱턴 DC에서 일어난 일이 북한에서 82번 일어난다. 그라운드 제로의 지름 5킬로미터 고리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타버린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소각되고 거리 위에 녹아내리고 화재의 허리케인에 휩쓸려 들어간다. 미국 역시 법을 지키지 않고 핵 시설을 타격한다. 중국 단둥과 겨우 48킬로미터 떨어진 북한 서해에도 핵폭탄이 떨어지면서, 중국 시민 수십만 명이 갑자기 죽거나 다친다. 중국도 핵전쟁에 끼어들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수백만 명이 죽어가는 동안 백두산 지하 벙커에 있는 북한 최고지도자는 남한을 향한 공격을 명령한다. 2021년 국방정보국 분석가들은 “북한에 신경마비와 물집, 출혈, 질식을 일으키는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화학전 프로그램이 있다”라고 경고했다. 화학무기를 실은 1만 기 이상의 발사체가 남한 곳곳을 타격한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남한 방어 프로그램의 능력도 뛰어나지 않다. 한 번에 몇 기의 미사일만 처리할 수 있는 THAAD(종말 단계 고고도 미사일 지역 방어 체계)는 1만 기에 이르는 공격 앞에서 무력하다. 이 시나리오에서 정점은 북한이 전자기 펄스(EMP) 공격을 위해 위성에 소형 핵탄두를 실어 궤도에 올린 뒤 미국 상공에서 핵탄두를 터뜨리는 일이다. (이를 ‘슈퍼-EMP’라고 한다.) 전직 미국 미사일 방어국 국장인 헨리 쿠퍼 대사는 미국 상공에서 고고도 전자기 펄스가 폭발할 경우 “미국의 전력망이 무기한 차단되어, 1년 안에 미국인의 최대 90퍼센트가 사망에 이를 수 있다”라고 두려움을 표명했다. 북한의 전자기 펄스 공격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은 2012년부터 주류적 인식이 되었다. 핵무기 공학자 오버그는 북한에 다녀온 뒤 슈퍼-EMP 공격이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둠즈데이 시나리오’라고 불렀다. 실제로 2016년 2월, 북한은 소형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유상하중을 가진 위성을 성공리에 발사했고, 위성은 미국 바로 위를 지나갈 수 있다.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지도자라면 슈퍼-EMP 공격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모든 지도자가 합리적이리라는 법은 없다. 이 시나리오는 이미 광기 어린 통치자 1인의 선택으로 핵 억지가 무너진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 발사 후 55분, 북한이 미국 상공 480킬로미터 지점에서 슈퍼-EMP를 터뜨리며 둠즈데이 시나리오가 실현된다. 21세기 미국은 전기로 동력을 공급받고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으로 설계된 복잡계다. 미국의 전력 공급망, 발전소, 발전기, 변전소, 고압 송전선, 배전선이 고장나고 망가진다. 가장 문제는 미국의 감시 제어 및 통제 시스템 ‘SCADA’(Supervisory Control And Data Acquisition)의 붕괴다. SCADA가 무너지며 수천 대의 지하철과 여객열차, 화물열차가 서로 충돌하거나 벽과 장벽을 들이박거나 탈선한다. 엘리베이터가 층 사이에 멈추거나 빠르게 지상으로 떨어져 박살난다. 위성이 제자리에서 벗어나 지구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미국에 남아있는 53기의 원자력 발전소는 이제 모두 예비 시스템으로 작동하여 시한을 두고 가동하기 시작한다. 조종 계통을 컴퓨터 전기 신호 장치로 바꾼 비행기들은 격렬하게 지상으로 향하고, 지상의 중요한 기간 설비 체계가 망가져 대규모 홍수가 발생한다. 인간의 배설물과 쓰레기, 시체 더미를 먹고 사는 벌레들이 들끓기까지 1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한편, 러시아의 SLBM이 미국과 유럽 전역의 나토 기지를 타격한다. 벨기에,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튀르키예 공군기지들이 사라진다. 그 외에도 저자는 파리, 베를린, 브뤼셀, 암스테르담, 로마, 앙카라, 아테네, 자그레브, 탈린, 티라나, 헬싱키, 스톡홀름, 오슬로, 키이우를 러시아가 표적지로 삼을 것이라 상정한다. 곧이어 1천 기의 러시아 핵탄두가 미국을 20분 동안 폭격한다. 핵무기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린다. “모두가 패배한다.” 5부. 이후의 24개월과 그 너머 핵전쟁이 세상의 종말이 될까? 필자는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와 그 후속작인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2024)을 통해 핵전쟁 이후의 세상을 상상할 수 있었다. 두 영화는 핵전쟁으로 현대 문명이 멸망한 22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속 시민들은 굶주림에 고통받으며 깨끗한 물을 독점한 독재자 임모탄의 지배하에 살아간다. 임모탄을 비롯한 지배 세력은 방사능에 오염되어,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여성들을 가둬놓는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벌어지는 폭력 집단 간 전쟁을 전편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핵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은 ‘녹색의 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24분』의 5부는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핵전쟁 이후 사람들이 방사능에 오염되고, 환경오염으로 자원이 부족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시나리오를 읽어보면, 두 영화의 세계관은 희망적인 편에 가깝다.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 핵전쟁 이후에도 ‘녹색의 땅’이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만큼 대규모 핵 교환의 영향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저자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최악의 시나리오인 ‘핵겨울’을 가정한다. 칼 세이건은 “핵 교환을 통해 10억 명이 넘는 사람이 즉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인 결과는 훨씬 나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모든 도시와 숲의 오랜 화재에 따른 부산물로 약 1,500억 킬로그램의 재가 대류권 상부와 성층권으로 솟아오른다. 유럽, 러시아, 아시아 일부 지역도 마찬가지다. 이 검은 가루 같은 재가 햇빛을 막아, 지구에 가혹하고 긴 저온 현상이 이어진다. 지구는 ‘핵겨울’이라 불리는 새로운 공포로 접어든다.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은 염색체 손상, 실명, 불임, 난임을 겪으며 추위와 싸워야 한다. 강수량이 50퍼센트 줄어들면서 농업이 종말한다. 기를 것이 거의 남지 않아 농장 공동체를 시작할 수 없고, 영하의 기온이 작물을 망친다. 화재폭풍은 토양과 씨앗을 훼손시켰다. 사람들이 이제는 굶어죽기 시작한다. 화학 폐기물, 수백만 구의 녹아가는 시신, 석유와 가스에 오염되지 않은 물을 찾으려는 노력도 식량을 찾으려는 노력에 필적할 정도로 절박하다. 여러 달이 지난 후, 태양의 따뜻한 광선이 이제는 살인적인 자외선을 내리쬔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핵폭발과 이어지는 화재폭풍이 오존층의 절반 이상을 파괴한다. 따라서 핵전쟁 이후 15년이 지나면 오존층이 전 세계에서 최대 75퍼센트 사라질 수 있다. 빙하와 함께 시신이 녹으면서 뇌염과 광견병, 발진티푸스 등 곤충 매개 질병이 발병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다. 과연 그 속에서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미래의 인류가 현재 인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핵 억지에 기반한 안보 정책을 유지하는 이상, 비이성적인 지도자의 우발적 선택으로 인해 핵폭탄이 언제 터질지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질문할 수밖에 없다. 4. 우리가 만들 미래는 핵전쟁인가, 핵무기 없는 세상인가 『24분』은 현실이 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미래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듯하다. 우리가 살아가고 싶은 세상은 핵전쟁으로 인류의 존속을 담보할 수 없는 미래인가? 핵무기를 완전히 철폐한 세상인가? 핵 억지가 허구적 믿음에 불과한 상황에서 핵무기는 그 자체로 인류에게 위협이며 적이다. 단호히 핵무기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핵무기 완전 철폐는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핵 강대국들이 핵무기를 현대화하고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남한에서도 자체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여론과 미국과의 핵우산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다. 안보 정책과 핵무기 사용권이 소수의 지도자에게 달렸다는 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해 무력해지기도 쉽다. 하지만 핵무기를 통제하고 철폐하기 위한 세계 반핵평화운동과 국제사회의 노력 덕분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80년 동안 핵무기가 한 번도 실전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냉전 시기 유럽의 핵군축운동은 비핵화지대 건설을 목표로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운동했고, 1987년 미국과 소련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하여 아시아와 유럽 전역에서 모든 중거리 및 단거리 미사일을 철수하고 폐기하게 했다.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은 대대적으로 반핵여론을 조직하여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생산하지 않으며, 반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핵 3원칙’을 약속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의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는 핵 금기 확립에 크게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202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21년 유엔에서는 핵무기금지조약(TPNW)이 발효되었다. 이 조약은 핵무기의 개발, 실험, 생산, 보유 및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최초의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으로 의미가 상당히 크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다면 사회진보연대 소책자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계로』 3부를 읽길 추천한다.) 2025년 현재 98개국이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하고 73개국이 비준했다. 그러나 핵무기를 보유한 9개국과 한국, 일본은 이 조약에 서명도, 비준도 하지 않고 있다. 1980년대 유럽 반핵평화운동이 “핵무기 없는 세상, 우리부터 시작하자”고 외친 것처럼, 미서명·미비준 국가들이 조약에 서명하고 비준하도록 각 나라의 시민들이 “우리부터 조약에 함께하자”고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 나아가, 핵무기는 한 국가만 해결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국경을 뛰어넘는 국제 연대가 필요하다. 필자는 올해 9월 10일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기억을 계승하여 전쟁과 핵무기 없는 미래로! 한국-일본 피폭자 증언대회’와 다음날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 주최로 열린 ‘한·일 반핵평화 운동 교류회’에 참여했다. 국내 반핵평화여론 형성을 위해 한일 간 연대를 강화하고, 한국 반핵평화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일본 반핵평화운동의 사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는 핵무기를 일본의 식민지배를 끝낸 정의의 무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고,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근거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문제를 일본이 자초한 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분명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는 비판받아 마땅하나, 이를 이유로 핵무기의 위험성에 관한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반성하는 동시에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일본 반핵평화운동과의 교류는 분명 한국에서 반핵평화 여론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의 사회운동이 ‘비핵 일본 캠페인’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핵 일본 캠페인은 일본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참가를 요구하는 캠페인으로, 피폭 증언과 함께 핵무기가 얼마나 비인도적인 무기인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국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참가를 요구하는 여론을 조성해오고 있다. 비핵 일본 캠페인은 현재 178만 명의 서명을 모으고, 전국의 지자체 41%가 일본 정부에 핵무기금지조약 참가를 요구하는 결의서를 채택하게 했다. 필자는 이로부터 우리도 노력하면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다. 우선,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한국은 핵전쟁 위협에 극명하게 노출되어 있지만, 핵 문제에 관심도 적고 위기감도 약하다. 필자 역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핵무기의 위험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핵무기 개발과 보유에 찬성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올해 필자가 속한 노동조합에서 조합원 교육을 한 결과, ‘핵무기를 잘 몰라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고 난 후 핵무기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답변한 후기가 상당히 많았다. 비인도적 무기이자 인류 절멸의 무기로서 핵무기에 대한 정보를 널리 알린다면 핵무장 여론을 제어하고 반핵평화 여론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24분』의 시나리오 역시 활용할 수 있겠다. 1백만여 명의 시민이 속한 민주노총의 사회적 역할과 영향력이 상당하므로, 민주노총과 소속 노동조합에서부터 조합원 대상 핵무기 교육을 하고 피폭자 증언대회와 같은 교류 행사를 지속한다면 한국의 여론도 점차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한 세상이 아닌, 핵무기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하나씩 모색하고 실천해보자. ●
우크라이나 좌파 조직 ‘사회운동’(Sotsialnyi Rukh, SR) 미하일로 무스타핀(Mychajlo Mustafin)과의 인터뷰
역자해설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미-러 주도 ‘우크라이나 평화안’의 현실
우크라이나 좌파의 현 사태에 대한 평가와 활동
전쟁의 현실과 좌파의 역할
전쟁이 4년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노동자들과 일반 국민이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폭탄 아래에서도 일상이 계속된다”라는 자부심 뒤에 가려진 현실, 특히 필수 기반 시설 노동자와 국내 실향민이 겪는 구체적 어려움을 듣고 싶습니다.
'사회운동'은 집회와 선거 같은 전통적 정치 활동이 제한된 계엄령하에서도 법률·심리 지원부터 노동권 캠페인, 군인과 가족 지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계엄령이 사회보장 축소의 구실로 악용되는 상황에서, 좌파 조직의 활동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내부적 도전: 신자유주의와 올리가르히 체제 대응
'사회운동'은 민영화, 규제 완화, 반노동 정책을 포함한 정부의 신자유주의 의제를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습니다. 전쟁 중에 정부의 경제 정책은 어떻게 변했고 '사회운동'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트럼프-푸틴 협상과 ‘정의로운 평화’의 조건
지난 3월 '사회운동'은 리야드 트럼프-푸틴 회담을 "침략자를 달래는 방식"이자 "강대국들의 세계 분할로의 회귀"라고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 후 앵커리지 회담을 거쳐 최근 위트코프 유출 사건까지, 미국-러시아 협상은 우크라이나에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그렇다면 '사회운동'이 생각하는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평화"의 필수 조건은 무엇인가요? 위트코프-드미트리예프 안이 "사기"라고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국제연대의 원칙과 과제
'사회운동'은 팔레스타인 민중과의 명확한 연대를 표명해 왔습니다. 우크라이나 지지 운동과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 사이에 연대가 부족한 현실을 어떻게 보십니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일관된 국제주의를 구축하기 위해 세계 좌파가 재평가하고 전환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민주노총 창립 30주년 기념 아시아노조활동가교육교류프로그램(LEAP) 특별기획 토론회> 지상중계
민주노총의 국제연대 문제의식
LEAP의 변천 과정
LEAP이 거둔 성과
LEAP이 아시아 노동운동에 끼친 영향
아시아 노동자운동의 현황
아시아 노동조합 국제연대의 다음 단계
지속 가능한 평화공존 방안을 구체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장기적 평화공존 방안 부재 속 이스라엘-하마스 휴전의 어두운 전망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민사회단체들의 평화공존 방안 노력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공존의 제도화를 위한 사회운동의 과제란?
<한·일 반핵평화운동 교류회> 지상중계
“한국과 일본이 핵무기금지조약에 참가하도록 함께 노력해나가자”
“모든 핵무기에 반대하며 국제연대를 넓혀나가자”
인류가 살아남는가 핵무기가 살아남는가, 우리에게 달렸다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⑨
나가사키 조선인/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제
《신문 아카하타(적기, 赤旗)》 인터뷰
나가사키 원폭 투하 80주년 세계집회
해외참가자 시내 선전전
나가사키 인권평화자료관
해외 참가자 송별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