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3 가을. 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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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노동운동의 대응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 ③

박준형 | 회원, 공공운수노조 교육국장
 
 

1. 산별노조 건설과 산별교섭의 시도

 

1) 산별노조 건설 본격화

민주노총은 설립 당시부터, 혹은 전노협 시기부터 산별노조 건설을 가장 중요한 조직적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출범하기 전인 1994년, ‘소산별(업종) 노조’인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과기노조)가 최초로 기업별노조의 산별노조 전환 방식으로 설립된다. 지역 의료보험조합별 노동조합의 연합체였던 의보총련도 1994년 단일노조인 의보노조로 전환한다. 민주노총 설립 이후에는 유사 산업의 산별연맹 통합과 함께 산별노조 건설 추진 노력도 확산된다. 병원노련은 1994년부터 꾸준한 산별전환 추진 사업을 거쳐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2월 보건의료노조로 전환한다. 2001년에는 금속노조가 건설된다. 한국노총도 금융 구조조정 반대 공동투쟁의 과정에서 파업 투쟁의 패배를 평가하며 2000년 3월, 금융산업노조를 출범시킨다. 

산별노조 건설 흐름은 외환위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위기 이후에는 그 필요성이 더욱 강조됐다. 노동시장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고용불안에 공동으로 투쟁할 필요성이 커졌고, 확산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는 데는 기업별노조의 한계가 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은 유사한 조건에 처한 산업 업종별 노동자의 공동투쟁을 촉발했다(임영일, 2003).

산별노조 건설 초기, 각 산별노조는 산별교섭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전개했다. 대각선 교섭에서 집단교섭이나 통일교섭으로 교섭형태가 발전하는 성과도 부분적으로 이뤄냈지만, 명실상부하게 산별노사관계로 전환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2006년에는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급여지급 금지’ 같은 법·제도적 변화가 임박한 상황에서 완성차 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하고, 공공노조와 운수노조가 건설되는 등 조직형태 전환이 확산됐다. 
 

2) 금속노조 건설과 산별교섭

민주노총 산하 금속산업연맹의 산별노조 전환 여부는 산별노조 조직화에 있어서 특히 중요했다. 민주노총의 금속산업(제조업) 노동자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주력을 형성해왔으며, 전노협 조직발전 논의에서부터 산별노조 전환을 꾸준히 준비해오기도 했다. 먼저 민주노총에 각자 가맹한 금속산업 관련 연맹의 통합이 먼저 추진된다. 1998년에는 민주금속연맹, 자동차연맹, 현총련 세 조직이 통합하여 금속산업연맹을 건설한다. 산별노조인 금속노조는 연맹의 결의에 따라 2001년 2월에 출범한다. 그러나 출범 당시에는 4개 완성차노조가 참여하지 않으면서 3만여 명, 즉 연맹 조합원의 15% 수준으로 출범하게 된다. 현대자동차노조 등 완성차 4사는 2006년에 이르러서야 복수노조 허용,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가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산별노조로 전환한다.

2001년 건설된 금속노조는 대기업노조가 아직 참여하지 않은 와중에도 독자적인 산별노조로서 활동을 전개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01년에는 지부별 대각선 교섭을 진행하는 정도였지만, 이후 산별교섭을 목표로 교섭체계를 정비하려 노력한다. 2002년에는 지부 집단교섭을 통해 중앙교섭 참가를 합의하고, 이듬해 중앙교섭을 시작한다. 2003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산별 중앙교섭을 통한 산별 중앙협약을 체결한다. 2004년에는 사용자단체를 구성하기로 하는 산별협약 체결에 이른다. 2003년 중앙교섭에서는 근로기준법이 개정되기도 전에 주 5일제 시행을 합의하는 성과를 냈다. 2003년 한진중공업을 비롯한 열사 투쟁, 2004~05년 기륭전자, 하이닉스와 같은 비정규직 사업장 투쟁도 전개했다. 2004년에는 사용자단체 구성까지 합의한다. 이 시기의 금속노조는 조합원 4만여 명 수준으로 규모는 작았지만 △중앙교섭을 통한 기본협약 체결 △모든 지역지부에서 집단교섭 체제 형성 △손배가압류 금지 △산별최저임금 도입 △사내하청 보호 △구조조정 합의 시스템 구축 △사용자단체 법인화 △노동시간 단축과 주 5일제를 쟁취할 수 있었다. 지부 집단교섭을 통해 금속노조 지부 조직력이 사측을 압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2004년부터 합의된 금속산업 최저임금은 당장 산별 임금체계를 실현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임금기준을 조율하기 위한 시도로서 의미가 있었다. 산별교섭에 참여하는 사용자만이 아니라 미조직노동자까지, 금속산업 전체를 포괄한 노동기준을 형성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살펴보겠지만, 2006년 완성차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 했음에도 산별교섭이 정체되면서, 산별 최저임금의 발전도 지체된다.

금속노조는 2006년까지 여전히 완성차를 제외한 중소기업 부품사 중심의 산별노조였다. 4만여 명의 당시 금속노조에 대해서 진단된 문제는 과소한 규모로 인한 인적·재정적 자원의 취약함, 대기업 사업장의 교섭 불참과 조직 이탈, 선도적 산별노조로서의 활동과 투쟁에 따른 조직 피로도 증가가 있었다(임영일, 2008).

현대, 기아, GM대우, 쌍용차 등 완성차 노조는 2006년 산별노조로 전환한다.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IMF 이후 조직률 하락, 내부격차 확대, 비정규직 급증)를 타개할 조직방침으로서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이른바 ‘2007년 문제’, 즉, 복수노조 도입, 노조 전임자 임금지불 금지 조항이 2007년부터 발효 예정인 상황에서, 유일한 방안이 산별노조체제로의 전환이라고 인식되어서다. 또한, 노조 지도부가 산별노조 건설을 최대 목표로 설정했다는 점(현대자동차 박유기 위원장 집행부)도 작용했다(임영일, 2008).

산별전환 과정에서 완성차 사업장에 기업지부를 인정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결국 ‘본조-지역지부-사업장 지회’ 형태로 일원화하되 3년 유예 기간을 두고 대기업노조의 기업단위 지부를 한시적으로 인정하기로 한다. 조직형태 문제는 2010년대까지 상당한 논란이 지속되지만, 결국 기업별지부를 해소하지는 못했다. 현실적으로 산별노사관계가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기업별 조직을 해소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논쟁 과정에서 기업지부에 대한 인정은 기업별 노조의 권한과 관행 특히 기업별 교섭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것은 대기업노조 간부와 조합원의 사업장 기득권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것과 금속노조가 기업별 노조연합을 넘어 산별노조로서 자기 정체성을 갖는 것이 수월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박근태, 2015).

대공장 노조의 산별전환 후 2007년, 금속노조는 각 사용자에게 산별노조 건설 이후 5년간 일궈낸 기존의 합의를 수용할 것을 요구하지만 사용자들은 거부했다. 그래서 금속노조는 중앙교섭 참가를 약속하는 것으로 요구를 하향하지만, 완성차 사용자는 ‘산별교섭 준비위에서 논의하자’는 문서를 제출하는 수준으로 답했다. 하지만 금속노조는 이를 돌파하는 데 실패한다. 한미 FTA반대 파업이 주요 간부가 수배되는 탄압을 초래했고, 조합원의 파업 피로도를 높여 오히려 중앙교섭 쟁취투쟁에 집중하지 못한 요인이 되기도 해서다. 결국 현대차, 기아차 등 완성차를 비롯한 사용자에게 산별교섭 참가 확약서를 받는 수준에서 정리되었다.

금속노조는 2008년에 조합원의 관심을 중앙교섭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임금요구를 중앙교섭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러나 이는 불발로 끝나고, 예년과 마찬가지로 대기업지부와 지회 보충교섭에서 인상률이 합의되고 마무리된다. 또한, 2007년 합의한 바 있는 산별교섭 준비위를 진행했으나, ‘확약서’에도 불구하고 완성차 4사 사용자를 산별교섭에 참가시키지 못한다. 완성차 4사의 산별 중앙교섭 참여는 다시 한번 ‘확약서’ 수준으로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금속노조의 대응은 혼란스러웠다. GM대우 사측은 금속 사용자단체의 재편을 전제로 한 금속사용자협의회 가입과 산별기본협약 인정, 그를 실현하기 위한 교섭개선 위원회구성은 물론 2008년 중앙교섭 조인식 참가를 제시했다. 산별 중앙교섭의 일보 진전을 가져올 만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GM대우 의견접근안은 금속노조 중앙쟁대위에서 거듭하여 논란이 되어 2주 이상 승인이 보류된다. 그런데 하반기 들어 정부도 부정적 입장으로 관여하는 가운데(박근태, 2015), 현대차 사용자는 GM대우 의견접근안보다 낮은 수준으로 타결안을 제시한다. 그러자 사실상 현대차지부가 이에 합의하고 지부 교섭안건으로 중심을 옮기게 된다. 금속노조 중앙쟁대위는 현대차지부의 산별중앙교섭안에 대해서는 “존중하지만 승인은 하지 않는다”는 승인유보 결정을 내린다(조성재, 2009).

2009년 들어서는, 지난 2년에 걸쳐 확인했듯이 완성차의 중앙교섭 참가 강제가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금속노조는 완성차의 교섭형태를 대각선 교섭으로 전환하고 산별요구안 관철을 중심으로 교섭, 투쟁을 전개한다. 완성차를 중앙교섭에 참여시킨다는 목표는 장기적 목표로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오기형, 2021). 다음 편에 살펴보겠지만, 2010년대 이후 현재까지도 결국 완성차 사용자를 포함한 산별교섭은 실현되지 못하고 산별교섭에 참여하는 기업을 넘어서는 효력확장도 실현하지 못한 상태다. 전체 산업 노동자의 노동기준을 합의한다는 의미에서 산별교섭, 산별협약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4만 금속노조 시기에도 산별교섭은 발전해왔지만, 임금교섭은 대부분 여전히 기업별로 진행되었다. 이는 15만 금속노조로 확대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차지부는 2007년 임금교섭을 ‘10년 만의 무분규 타결’로 마무리했는데,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기업 노조(지부)의 실리주의와 사측의 지불능력을 배경으로 한 대기업 노사 간의 담합이 두드러졌다는 평가였다. 2006년 산별노조 전환의 취지를 살리려면, 대기업지부 조합원이 외부의 부품업체 조합원이나 비정규직 근로자, 다른 업종 조합원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2007년도 교섭에서 현대차지부는 사용자의 양호한 지불능력을 배경으로 최대한의 실리를 자신들만 향유했다(조성재, 2009). 박근태(2015)는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을 몇 가지로 진단한다. 우선 내부노동시장(높은 임금과 고용안정, 기업복지)이 발달한 대기업은 기업별 교섭체제와 친화력을 가진다. 그리고 대기업의 이해를 실현할 수 없어 산별교섭에 반대하는 사용자와, 실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대기업지부가 산별교섭논의를 우회하기 위해 계급 간 동맹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생긴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적 제약과 세력 관계를 뛰어넘을 금속노조의 전략이 필요했으나, 부족했다는 것이다. 산별교섭 형태의 완성만 기다리면서 주간 연속2교대제 개편과 같은 제조업의 여러 쟁점을 기업별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산별 차원에서 접근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외환위기 직후 산별노조 건설 노력이 더욱 빨라진 것은, 정리해고나 고용불안에 대한 대응과 비정규직 확산에 따른 초기업적 조직화 필요성에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산별노조 건설 목표가 제대로 실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1998~2000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정리해고 반대, 구조조정 저지 투쟁은 기업별로 진행되었으며, 공동투쟁도 한계가 있었다. 또한, 2001년 이후 생산이 회복되고 고용이 안정되면서 고용위기에 대한 공동투쟁이라는 목표도 흐려졌다. 

산별 전환 이후에도 여전히 기업별 조직(금속노조의 기업별 지회), 기업별 교섭이 중심이었던 상황에서, 사업장을 넘어선 비정규직 조직화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금속노조 건설 10년이 지난 2011년에도 15만 조합원 중 사내하청 노동자는 3%로 5000여 명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물론 대기업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 투쟁이 꾸준히 진행되며, 하청업체를 넘어선 조직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들 사내하청 조직은 원청을 기준으로 하면 여전히 기업단위의 노조조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노조의 요구도 원청 기업에 직접고용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 즉 기업 내부노동시장으로의 편입이 목표였다는 점도 이들 조직의 기업별 성격을 보여준다.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의 경우 2014년 정규직 전환 교섭에서 조합원이 아니거나 투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불법파견 정규직 전환에서 후순위로 배정할 것을 요구하는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문제의 발단은 10여 년 동안 불법파견을 남용하고 대법원 판례도 무시한 현대차와 같은 사측이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의 대응도 조직된 노동자와 사업장을 넘어 노동시장의 보편적인 기준을 만드는 방식의 운동으로 전개되지는 못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금속노조는 산별노조 건설과 대기업노조의 산별전환 과정에서 만들어 낸 에너지를 산별노사관계 형성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산별노조 운동의 핵심이었던 금속노조가 산별 노사관계 형성에 실패한 것은, 사용자의 거부감은 물론 대기업노조의 소극적 태도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는 기업별 노사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수출 대기업의 높은 수익을 분배받는 것이 더 실리적인 선택이라는 배경 속에 이루어진 반응이었다. 산별노조 자체도 대기업지부가 핵심 임원을 맡으며 주도하는 상황에서, 산별노조 지도부의 역량 부족에 대한 평가는 어쩌면 동어반복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 속에서, 새로 조직되는 미조직 비정규직 부문도 기업별노조의 관성을 그대로 따라갔을 뿐이다.
 

3) 보건의료노조의 산별교섭 시도과 조직 갈등

보건의료 산업 노동자는 이른 시기부터 업종별, 지역별 공동투쟁을 발전시켜왔다. 노동자 대투쟁 직후인 1987년에 병원노협을, 1988년에는 이미 전국병원 노동조합연맹(병원노련)을 건설한다. 합법적 지위를 확보한 1994년 이후에는 교섭권 집중과 공동교섭을 시도하는 한편, 산별노조 건설을 추진한다. 1998년 이전까지 병원연맹은 이미 교섭권을 위임받아 지역본부가 집단 교섭과 대각선 교섭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산별노조로 조직변경을 결의한 것이다.

1997년 대의원회 결의 이후 준비과정을 통해 IMF 구제금융 위기 직후인 1998년 2월, 2만 5천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보건의료노조를 창립했다. 서울대병원노조를 포함한 국립대병원, 고려대 한양대 이화여대와 같은 사립대병원까지 대규모 병원도 초기부터 모두 참여한 것이 타 산별노조와도 구별되는 특징이다. 보건의료노조는 기업별노조를 산하 기업지부로 단순 개편했는데, 기업별지부에 교섭권과 파업권이라는 노동조합으로서의 핵심 기능을 여전히 부여하고 있었다. 금속노조가 기초조직을 지역지부로 설정하고 기업단위 지회에는 교섭권과 파업권을 부여하지 않았던 것과는 구별되는 방식이었다(임영일, 2008).

1998~99년의 산별노조 건설 초기 보건의료노조는 경제위기 이후 진행된 구조조정 반대에 집중하게 되며, 이와 더불어 산별 중앙교섭, 대정부 교섭을 요구했다. 한편 의료법 제정과 의료보험 통합, 의약분업 투쟁 등 의료공공성 확보를 위한 투쟁도 계속한다. 그러나 개별적인 단위노조, 기업별 교섭 체제로서는 구조조정에 대항하는 데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산별중앙교섭을 요구한다. 하지만 초기 보건의료노조의 전국중앙교섭과 대각선교섭 추진 노력은, 대정부 교섭투쟁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이에 따라 교섭은 결국 대각선교섭 위주로 흐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2000년 보건의료노조 최초로 직선으로 선출된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산별교섭 쟁취투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윤진호, 2008).

보건의료노조는 2002년 산별교섭 쟁취를 위해 개별 병원 사용자의 산별교섭 참여를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한다. 그 결과 주요 대학병원을 포함한 63개 병원이 산별교섭 참여를 합의하게 됐고, 2004년에는 산별중앙교섭을 처음으로 진행했다. 산벌교섭은 결렬되었으나 노조는 그 이후 산별차원의 집단조정을 중앙노동위원회에 신청하여 최초로 산업 전체를 조정했다.

6월 10일부터 시작된 산별 파업 과정에서도 중앙노동위원회를 통한 조정(임의조정)과 노사 교섭이 계속된다. 6월 23일, 보건의료노조와 사용자 측은 주 5일제 시행방안, 비정규직 처우 개선, 의료공공성 강화, 산별 기본협약을 위한 구체적 방향의 내용을 잠정 합의한다. 이후 교섭과 파업은 지부별로 전환된다. 지부별 교섭, 투쟁을 거쳐 7월 말 산별교섭 잠정합의안에 대한 보건의료노조 찬반투표가 진행되어 가결된다. 

그런데, 이 교섭과 투쟁 과정은 산별협약의 성격에 대한 논쟁과 조직적 갈등을 오히려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산별교섭 잠정합의안이 체결되던 시점에 지부파업을 계속하면서 합의안의 10장 2조 폐기를 주장해 온 서울대병원지부는 산별교섭 잠정합의안과 지부교섭 잠정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와 함께, 조건부 산별노조 탈퇴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를 실시하고 가결했다(이주희 외, 2004). 2005년 3월, 보건의료노조 중앙위원회에서 서울대병원지부장 제명결정이 내려지자 서울대지부는 다음 달 보건의료노조를 공식적으로 탈퇴한다. 뒤이어 충북대병원지부, 울산대병원지부, 경북대병원지부의 탈퇴가 이어진다.

보건의료 노사의 산별협약 제10장 2조는 산별 중앙협약을 지부협약에 우선하는 규정이었다. 이에 따라 임금 인상률이 중앙협약에서 결정되면서, 서울대병원 등 일부 대형병원지부가 크게 반발한 것이다. 
 
 
애초 쟁점은 과연 산별협약이 최저기준만 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규모별 편차를 줄이기 위해 통일기준을 정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이는 곧 본조와 지부 간의 권한 다툼, 나아가 산별노조의 진로를 둘러싼 이념적 갈등으로 비화했다. 결국 서울대병원지부를 비롯한 9개 지부가 보건의료노조를 탈퇴하는 사태로 확대된 것이다(윤진호, 2008). 

산별협약이 최저기준이 돼야 하느냐, 통일기준이 돼야 하느냐는 쟁점은 서울대병원지부의 산별노조 탈퇴 정당성과 맞물려 큰 논쟁이 되었다. 보건의료노조는 해당 조항이 불가피할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실장(2004)은 “일부 조항에 대해 통일기준 우선 적용을 추구하는 10장 2조는 ‘독소 조항’이 아니라 이후 산별교섭의 취지를 잘 살리기 위한 ‘산소 조항’이라고 주장했다. 기업별 교섭으로 후퇴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조항이라는 것이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개최한 ‘2004년 산별교섭 평가와 과제 토론회’에서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산별협약이 최소협약에 그칠 때는 산별협약이 임금과 노동조건을 규율하는 정도가 최소 수준이므로 기업별 교섭을 통해 보완할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 산별교섭과 기업별 교섭이라는 이중교섭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기업별 협약을 우선시한다면 결국 산별교섭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임영일 경남대 교수는 같은 토론회에서 “최저기준이어야 하느냐, 통일기준이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외국사례에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며 한국산업의 특수성 속에서 고찰해야 할 것이나 근본적으로 최저기준이 돼야 한다”는 비판적 입장을 밝혔다(송은정, 2004). ‘노동자의힘’을 비롯한 노동운동 현장파도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백일자(2004) 노동자의힘 편집국장은 이 사태에 대해 “상층중심의 관료화된 산별노조가 될 가능성이 크며 이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산별노조 재편을 통해 제도화하려는 정권과 자본의 의도”라며, “노조 상층을 ‘산별교섭, 사회적 교섭’이라는 형태로 묶어둠으로써 하부를 통제하는 양상은 ‘노동시장 유연화, 임금삭감, 노조투쟁력 약화’를 부르짖는 노무현 정권의 사회적 합의주의와 흐름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산별교섭이 기업별 교섭과 맺는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쟁점과 함께, 당시 사회적 합의 논쟁과 산별노조 운동 방향에 대한 입장이 중첩되어 논쟁을 형성했던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박준형, 2005)도 10장 2조가 기업별지부의 임단협이 하향평준화되는 효과를 만들게 되었으며 지부의 투쟁과 이를 위한 교섭권, 쟁의권을 억압·봉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단위 사업장별 교섭비용의 절감과 통제라는 사용자 측의 의도를 노조가 수용한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산별노조 운동의 목적에 대해서도 쟁점이 더 드러났다. 다수의 운동세력이 산별노조 건설에 대체로 동의했지만, 그 이유는 상당히 달라서였다. 산별교섭 실현을 가장 앞에 두는 입장부터, 산별노조는 더 강력한 공동투쟁을 위해 단결하는 조직이라고 보는 입장까지, 여러 입장에 따라 다르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신자유주의 시기 한국에서는 서구에서 경제성장기에 가능했던 산별 노사관계 형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무망한 시도라는 더 급진적인 비판도 제기됐다(김철순, 2006). 

그러나 10장 2조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산별협약을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든 기업별 교섭권, 쟁의권의 일정한 통제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보건의료노조 집행부가 반발이 예상되는 지부 집행부 및 조합원과 교섭 준비과정부터 “산별노조 차원의 통제”에 대한 충분한 내부 합의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또한, 비록 집행부의 일방적 조직운영에 문제가 있었더라도, 탈퇴한 지부들도 산별노조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기울였다고 보긴 어려웠다. 기업별 이해관계를 상대화하고 산별노조로 집중하자는 노조 내부의 합의가 견고하지 않다면 산별 노사관계의 형성과 유지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울대병원지부의 탈퇴로 내홍을 겪은 보건의료노조는 2005년 산별교섭이 공전하여 어려움을 겪게 된다. 2006년으로 넘어간 교섭도 결렬되면서 7월 산별 파업을 진행하다가 중앙노동위원회 중재로 임단협 투쟁이 일단락된다. 2007년과 2008년은 사실상 산별 파업이 진행되지 않고, 2008년 들어 특성별 교섭을 거쳐 합의된다. 당시 탈퇴한 병원 지부는 ‘의료연대노조’를 거쳐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로 산별노조 조직형태를 취하지만 임금·단체교섭은 이후 기업별로 진행한다.

2007년 합의 중 비정규 관련 사항은 정규직이 자신의 임금인상분의 30%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비용에 사용하는 것으로, 노조는 이를 ‘아름다운 합의’라고 의미를 부각하기도 했다. 노조가 비정규직 관련 요구를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나 결과적으로 볼 때 보건의료노조의 산별교섭은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고 취약한 계층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산별 노사관계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외국과 달리 단체교섭 효력확대가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합원에게 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정규직 조합원 비율이 낮고 중소영세 병원이 참여하지 않는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은수미, 2009). 이는 보건의료노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대부분의 산별노조, 일반노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비판이었다. 이후 2010년대 말에 노조의 임금격차 완화효과가 다소 나타난 것도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가 늘어난 효과지 산별 노사관계의 효과라고 보긴 어려웠다.

한편, 서울대병원, 경북대병원 등 탈퇴 지부들은 ‘전국병원노조협의회(병노협)’를 결성한 후 2006년 ‘의료연대노조’를 별도로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이후 공공연맹에 가입한다. 공공연맹은 많은 내부 논란 끝에 2005년 서울대병원지부노조를 포함한 ‘병노협’ 조직의 가입을 받아들인다. 민주노총 중앙집행위는 서울대병원지부에는 탈퇴를 철회할 것을 권고하는 한편 보건의료노조에는 문제해결을 권고했지만, 결국 탈퇴는 굳어졌다. 이들 조직은 이후 공공노조를 거쳐 현재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민주노총 내의 산별노조와 연맹 간 관할권을 둘러싼 갈등이 비화하기도 했다.
 

4) 공공노조를 포함한 산별노조 건설 확산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와 비슷한 시기에 대학노조(1998년 11월 9일), 건설노조(1999년 7월 합법화), 언론노조(2000년 11월)와 같은 산별노조가 잇달아 창립된다. 여러 산업, 업종으로 구성된 공공연맹 안에서도 전국과학기술노조(1994년) 이후 전국연구전문노조(1997년), 전국자동차운전학원노조(2001년), 전국건설엔지니어링노조(2001년), 발전산업노조(2001), 문화예술노조(2003년) 등 업종 소산별노조가 활발하게 건설된다.

2004년부터 본격화된 공공연맹의 산별노조 건설 논의와 운수부문의 대산별 노조 건설 논의는 2006년 공공노조와 운수노조 출범으로 이어진다. 2005년에는 공공연맹, 화물통준위, 민주택시, 민주버스가 산별노조 결성을 위해 4연맹 통합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조직 건설을 본격화한다. 

공공연맹의 산별전환 과정은 산별노조 운동이 해결해야 할 여러 쟁점을 앞서서 보여준 측면이 있다. 산별노조 건설 경로를 둘러싸고, 당시 노동운동 주요 정파였던 중앙파(집행부), 국민파, 현장파의 쟁점이 대립했다. 박용석(2023)에 따르면 주요한 쟁점은 [표]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집행부 안’이란 당시 양경규 위원장 집행부(중앙파)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장파는 관료화를 우려해 산별노조 자체에 비판적인 입장(주로 대사업장 현장파 활동가)과, 지역중심 산별운동을 강조하는 흐름(지역, 비정규직 활동가)으로 입장이 갈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2006년 12월에 공공노조와 운수노조가 각각 창립했다. 2007년 1월에는 운수노조에 합류한 화물통준위, 민주버스노조, 민주택시연맹과 공공연맹과 같은 산별연맹이 사후적으로 통합하면서 ‘공공운수연맹’을 창립한다. 공공노조의 조직형태는 지역과 업종본부를 둘 다 인정하는 매트릭스 구조로 하고, 기업별지부를 인정하는 것으로 절충되었다. 그 결과 복잡한 조직형태와 옥상옥 구조가 조직의 효율적 운영을 가로막는 문제가 발생한다. 조직형식적 완성을 중심으로 산별노조 건설에 접근하다 보니, 산별교섭 실현이나 공동투쟁보다 오히려 형식적 틀을 만드는 과정에 운동의 에너지를 소모했던 것이다.

운수노조는 업종본부를 골간으로 하는 조직형태로 구성되었으나, 사실상 기업별노조인 철도본부(현 전국철도노조)가 재정과 조직에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한 점이 이후 문제가 된다. 더구나 운수노조 건설의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였던 철도본부와 화물연대의 공동파업을 통한 위력적인 투쟁이라는 구상은 2008년 공동투쟁이 실패하면서 좌절된다. 또한, 이명박 정권 집권 이후에는 인력감축에 대응하는 투쟁에서 대량의 해고자가 발생한 철도노조가 조직적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면서 운수노조도 취약해진다. 이후 공공노조와 운수노조 모두 조직적 어려움에 처하면서, 2010년대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세적 통합 분위기가 형성된다.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는 다시, 2008년까지 양 조직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각 조직이 출범한 상황에서 곧바로 통합하기는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수차례 연기된 공공노조와 운수노조의 각 산별노조의 통합은 2010년 이후에야 본격화되고, 2011년 ‘공공운수노조’의 설립으로 이어진다(박준형 외, 2022). 

그러나 그 이후에도 산별 미전환 조직이 여전히 다수라서 산별노조 조직형태 완성에 대한 조직적 논란이 이어진다. 산별노조 전환 경로보다, 산별 미전환 기업별노조가 상당수를 차지하는 상황이 문제가 된 것이다.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 등과 달리 철도노조, 건강보험노조, 서울교통공사노조처럼 대규모 기업별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하지 않는 상태도 2023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산별노조로 전환한 부문에서도 의미 있는 산별교섭을 실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공공노조를 건설한 공공연맹의 주력이었던 공기업 등 공공기관노조는 산별노조 전환을 통해 노정교섭을 기대했으나, 쉽지 않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공공기관은 노무현 정부 말기 여러 공공기관 관리 법률이 ‘공공기관운영법’으로 통합된 후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산별노조를 추진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공공노조 초반(2008년) 시도했던 공공기관 집단교섭은 산별노조로 전환한 공공기관이 과소했고 이명박 정부 집권 후 노정관계가 변하면서 좌절한다. 공공연맹은 노무현 정부 말기(2006년) 공공기관 지방 이전과 관련해 최초로 연맹 위원장과 국토부 장관이 노정합의서를 체결하는 등 노정교섭에 대한 일정한 기대도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으로 교체된 이후에는 정부 차원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노정교섭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공공운수노조의 산별전환은 물론이고 산별교섭 실현과 같은 산별노조 건설의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과제 실현이 지체된다. 그 결과 공공노조는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 등에 비해 산별노조로서는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2. 노무현 정부와 사회적 합의 시도, 노동운동의 갈등

 

1) 노무현 집권 초반: 기대에서 갈등으로

노무현 참여정부가 집권한 2003년, 정권 초반의 노정관계 분위기는 원만할 것으로 보였다. 참여정부는 12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천명했고, 직권중재, 손해배상 및 가압류, 공무원노동 기본권 보장과 같은 법 제도 개선과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 공권력 투입 자제, 일방적 민영화 철회, 노사정위원회 강화, 외국인 고용허가제 시행처럼 적극적 현안 해결을 천명했다(이원보, 2013). 

대선 후 인수위 기간인 2003년 1월 금속노조 두산중공업지회 배달호 열사가 노동탄압 중단을 외치며 분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IMF 구제금융 이후 격렬한 노사 갈등 과정에서 사용자 측이 남발한 손배 가압류, 노조 탄압을 위한 표적 해고에 항의하는 분신이었다. 사태의 원인인 손배 가압류에 대한 해결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참여정부는 노동부장관을 현장에 파견하여 중재 노력을 하는 등 ‘성의’있게 대응했다. 이어서 철도노조가 철도청의 철도공사 전환과 관련된 쟁점을 두고 파업을 앞둔 시점에 정부는 이른바 4.20 합의를 끌어내고, 화물연대에 대해서도 노정합의를 통해 요구사항을 일부 수용한다. 전교조의 NEIS(교육행정정부시스템) 도입 저지 투쟁도 어느 정도 요구사항을 수용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정청진, 2003). 당시 정부는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염두에 두고 전향적인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2003년 6월 들어, 분위기는 반전되기 시작한다. 철도노조가 정부가 4.20 합의를 위반했다며 파업투쟁에 돌입하면서 노정 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한다. 정부는 오히려 노조가 합의를 위반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정부는 파업 불과 3시간 만에 서울 곳곳의 철도노조 농성장에 공권력을 전격 투입한다. 이후 파업 참가자에 대한 징계, 해고, 손해배상 소송이 대거 진행된다. 8월 21일 시작된 화물연대 파업에도 정부는 강경하게 대처한다. 이듬해 정부는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을 개정하여 ‘업무 개시명령’ 제도를 도입한다.

8월에는 민주노총의 총파업 등 노동계가 반발하는 가운데 주 40시간제 근로기준법 개정이 진행된다(관련된 내용은 지난호 참고). 이러한 상황에서 하반기 들어, 노정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10월,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김주익 지회장이 자결하고, 며칠 후 세원테크 이해남 지회장이 분신한다. 이어 같은 달 26일 공공연맹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이용석 광주전남본부장이 분신하고 10월 말 한진중공업 곽재규 조합원이 투신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잇따른 노동자의 죽음은 노동계에 큰 충격을 준다.

민주노총은 개별 사업장의 투쟁에 연대투쟁을 조직하는 것은 물론, 11월 총파업을 비롯한 대규모 투쟁을 통해 정부를 압박한다. 그러나 이미 정책기조를 전환한 노무현 정부는 민주노총의 요구안을 수용하는 대신 강경하게 대응한다. 
 

2)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여 논란과 갈등

노정관계가 악화하는 상황이었지만 노무현 정권의 전향적 노동정책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2004년 초, 민주노총 집행부 선거에서 이수호 위원장과 이석행 사무총장이 당선된다. 현장파와 중앙파가 연합한 유덕상, 전재환 선본과 경선한 결과였다. 부위원장에 당선된 강승규 전 민택노련 위원장은 수석부위원장으로 지명된다. 이때부터 2014년 민주노총 직선제 1기 선거에서 한상균 위원장이 당선될 때까지 대체로 NL과 연합한 “국민파” 경향의 집행부가 장기간 민주노총 집행부를 주도하게 된다.

이수호 위원장 집행부는 노사정위를 통한 사회적 교섭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1998년 2월 노사정 합의가 부결된 이후, 참여와 이탈을 반복하던 민주노총은 최종적으로 1999년 2월 24일 대의원대회 결정으로 노사정위를 탈퇴한 상태였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2005년 1월 20일 대의원대회에 사회적 교섭안을 상정한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안건은 회의 성원 미달로 유회된다. 2월 1일 다시 대의원대회가 소집되었으나, 반대파 참가자들의 단상 점거로 회의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한다. 집행부는 3월 15일 다시 임시 대의원대회를 소집했으나, 안건 통과에 반대하는 대의원과 활동가가 단상을 점거하고 시너와 소화기를 뿌리는 격렬한 충돌이 발생하여 회의가 정상적으로 개최되지 못했다. 임시 대의원대회가 무산되면서 이수호 집행부는 대의원대회 의결을 유보한다. 우선 비정규직법과 같은 당시 현안 논의를 위한 ‘노사정대표자회의 참석’으로 상황을 수습하고, 이후 ‘시기가 되면 절차에 따라 대의원대회에서 논의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히게 된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노사정위 참여와 무관하게 사회적 교섭 방침은 유지하며, 노사정을 포함해 정당과 대표자 회의를 시작하고 회의에서는 최우선적으로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다룰 것을 제안한다. 만약 비정규직 관련법이 4월에 처리될 경우 이 방침 자체를 철회하겠다는 입장과 총파업 계획을 밝힌다.

이후 4월 5일 6자(한국노총, 민주노총, 노사정위, 노동부, 경총, 대한상의) 3차 노사정 대표자회의가 재개되고 4월 26일 노사정 대표자회의 운영위가 열리면서, 비정규직 보호입법과 관련된 노사정 협상은 노사정위 외곽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노사정 협의에 대해서도 현장 투쟁 조직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적 입장들이 계속 제기된다.

노사정위 참여를 둘러싼 논쟁에서 두 가지 쟁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노사정위 참여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쟁점과 노동조합의 민주적 의사결정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다.

이수호 위원장 집행부가 제시한 노사정위 참여의 명분은 “교섭과 투쟁의 병행”이었다. “사회적 교섭은 전 노동자적, 전 민중적 요구를 내건 공세적 투쟁에 복무하는 전술로서 제기”되고 있다면서, “기업별 요구와 투쟁이 기업별 교섭에서 다루어지듯이 전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사회적 교섭으로 확대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강승규, 2005). 반면, 민주노총 집행부의 사회적 교섭방침을 반대하던 단체가 연합한 ‘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담합 분쇄 전국노동자 투쟁위원회’(전노투)의 상황실장 조돈희(2005)는 “사회적 교섭정책은 사회적 합의주의에 다름 아니며, 사회적 합의주의는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서 노동자 죽이기 프로젝트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신자유주의 정세에서, 또 진보정당이 취약한 한국에서는 코포라티즘 체제 형성이 불가능한 데도, 노무현 정권의 선의에 기대 추진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사회진보연대(2004)는 “유럽에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가능했던 조건은 자본주의 호황기의 정책”이며, “강력한 노조(높은 가입률)의 존재와 함께 노조의 지지를 받는 사민주의 정당의 존재가 정책협의”의 조건이었다고 진단한다. 당시 “금융세계화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변화의 국면, 그리고 만연한 경제위기와 불안한 요소(산업자본, 노동)가 혼재해있는 현시점”에서 사회적 합의주의는 불안정 노동자의 투쟁을 억압하는 기제가 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불안정노동철폐연대의 김혜진 집행위원장도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발적인 투쟁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독려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 노동운동 상층이 오히려 이런 투쟁을 통제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의 입장과 유사한 박용석(2005)는 “현시기 총연맹의 사회적 교섭 전술을 서구의 코포라티즘이나 ‘사회적 합의주의’로 확대 해석하여 비판적 견해의 근거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비판한다. “민주노총이 추진하는 사회적 교섭 전술이 일각에서 제기하는 ‘자본의 포섭전략에 조응하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전략적 차원으로 위치 지우지 않았다”는, 즉 전술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당면 정세에서는 논란이 되고 있던 비정규직법이 악법으로 추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이유가 제시되었다. 전노투 등 반대 입장은, 사회적 교섭 기구 참여가 결국 정부의 비정규직법 관철 과정에서 민주노총이 들러리를 서게 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현장파와 좌파 단체는 더 나아가 “투쟁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나 노사정 합의와 같은 담합으로 제출된 개악안을 보완하거나 절충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노동자의힘, 2004)”거나 “노사정 교섭을 중심으로 한 투쟁(일정 및 동력)의 배치가 기층에서는 대중운동의 혼란과 투쟁동력의 유실을 낳았다. 한국사회의 조건상 사회적 합의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사회진보연대, 2005)”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집행부(강승규, 2004)는 “정부의 비정규직법안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의 논의를 중단하고 비정규직법안이 강행 처리되지 않고 최소한 노정이 참여하는 교섭틀을 만들어서 처리되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정부의 비정규직법안이 국회에서 처리되는 것을 막는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요구에도 비정규직법안을 강행 처리하면 사회적 교섭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까지 밝힌다. 그러나 아래 살펴보겠지만, 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이 이후 노사정대표자회의처럼 다른 방식의 노사정 협상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비정규직법은 2006년 말 국회에서 강행되었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안건이 상정된 임시대의원대회의 파행, 특히 폭력 사태까지 이어진 3월 15일을 계기로, 민주노총 내 민주적 의사결정의 취약성에 대한 쟁점도 부각된다. 민주노총의 대의원대회를 무산시킨 전노투 등 사회적 대화 반대파는 의사결정을 위한 표결과 같은 노동조합의 민주적 절차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절차’일 뿐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독선적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노조 내부의 계파가 분파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폭력으로 노조 민주주의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그 원인으로 분권화된 기업별 노사관계 시스템에서 오는 노조 지도력의 취약성과 노조 내부의 정치적 계파의 문제가 지목된다(배규식, 2005). 반면 사회적 교섭방침 반대파는 이 사태가 민주노총 집행부가 조직 내 이견이 심각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결과라고 비판했다. “조직의 단결과 투쟁을 조직해야 할 지도부가 사회적 교섭방침 관철을 고수하는 한 ‘힘 있는 민주노총’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조돈희, 2005). 이와 유사하게 쟁점이 되는 사안을 합의로 처리하지 못하고 종종 파국적인 충돌로 번지는 일은 민주노총 내에서 이후에도 수차례 반복된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민주노총 안에서 노사정위원회 참여는 논의를 시작하기도 어려운 주제가 된다. 각자의 찬반 입장을 떠나, 조직 내 극심한 갈등을 불러올 수 있는 쟁점이라는 점에서 논의 자체가 어려워진다. 이어지는 이명박, 박근혜 보수 정권 시기에는 정부가 노동운동에 적대적인 상황에서 논의 자체가 무망한 일이었다. 문재인 정권 집권 후 2018년에야 경사노위로 재구성이 논의되었지만, 그 역시 실패한 것을 보면 당시 논란으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부 합의가 힘든 쟁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중앙 차원의 노사정 협상만이 아니라 지역, 산업별 사회적 협의도 계속 논란이 된다. 그런데 이들 협의는 지역 노동시장 개입이나 산별 노사관계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획일적 반대만으로 접근하기는 더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2004년 당시 격렬한 대립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현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2004년 당시 논쟁을 사후적으로 평가하면서 사회진보연대(이현대, 2010)는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와 반대 진영을 모두 비판한다. 민주노총은 반대론자 앞에서는 노사정위원회를 전술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처럼 변명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략적인 방향이라고 주장하면서 전혀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노사정 교섭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전술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당시 논쟁이 노사정 교섭과 관련된 모든 쟁점을 “전부 아니면 전무”로 환원하며 논의를 지나치게 과열되게 만들고 말았다. ‘사회적 교섭 틀’을 중심으로 한 상층의 제도화 전략은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일정한 정세에서는 노사정 교섭에 노동조합이 참여할 수도 있고 혹은 교섭을 오히려 전술적으로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교섭에 반대하는 진영 역시 특정 정세에서 필요할 수 있는 노사정 교섭의 전술적 활용 가능성마저도 모두 배제하고 말았던 것이다.


3) 비정규직법, 노사관계 로드맵과 저지 투쟁

노무현 정부는 노사관계 개혁과 비정규 보호입법이라는 두 가지 정책과제를 설정했다. 정부가 볼 때 1998년 노사정합의 이후 추가적인 변화가 지체되어 온 노사관계와 노동시장 제도의 개혁을 동시에 추진한 것이다. 이에 따라 2003년 노사관계 개혁의 장기전략으로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노사관계로드맵)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기업단위 복수노조 인정, 필수공익사업장 확장과 직권중재 폐지,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정리해고 사전 통보 기간의 축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민주노총은 이에 반대해 복수노조 설립 허용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필수공익사업장의 직권중재 폐지를 요구하고,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시도를 반대했다. 한편, 정부는 2004년부터 비정규직 보호법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한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 5월,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취합하여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한다. 이후 노동연구원의 연구용역을 거쳐 45개의 개혁과제를 제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노사정위원회에서 노사관계 로드맵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2004년 8월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선언하면서 논의가 중단되었다가 2005년 4월에 노사정대표자 회의를 통해 다시 노사관계 로드맵의 입법화 논의가 재개되었다. 민주노총은 당시 논의가 막 시작된 비정규직법안에 대해서만 정부와 협상한다는 전제를 두고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여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2006년 9월 11일에 민주노총이 불참하고 한국노총이 참여한 가운데 노사정합의가 이루어진다.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및 노조전임자 급여지원 금지규정 시행 3년 유예, 직권중재제도 폐지, 필수공익사업장 필수유지업무제도 도입 및 대체근로 허용, 제3자 지원 신고 제도 폐지가 그 내용이었다. 이어 9월 14일 노동부는 이를 바탕으로 노조법, 근참법, 근기법에 대한 입법 예고안을 발표한다. 

한국노총이 어떻게든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을 2009년 12월 말까지 3년간 유예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합의였다. 민주노총은 한국노총과 경총 간의 합의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야합이라고 규탄하고 향후 무효화를 위한 총파업 투쟁을 선언한다. 또한, 이를 계기로 양대노총의 대립이 격화해 민주노총 및 전해투 조합원의 한국노총 점거 농성과 이용득 위원장 폭행 사건도 벌어진다(한국노총, 2023). 

결국 노사관계 로드맵 개정 법률안은 12월 2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직 보호법안’과 ‘노사관계 로드맵’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이를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자 모두의 노동권을 박탈하는 희대의 악법 ‘날치기’로 규정하고, 이들 법안의 무력화 및 재개정 투쟁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노조법 등 노사관계 제도는 다시 개정되지 못했고, 지금까지 당시 제정된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정부가 추진한 것이 비정규직 보호입법이었다.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 2002년 27.4%를 차지하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중은 2004년 37.0%까지 빠르게 증가하다가 2005년 증가세를 멈춘 뒤 2006년 35.5%로 소폭 감소한 것으로 진단되었다(전병유 외, 2007). 2006년 당시에는 비정규직 비율이 55〜56% 안팎에서 고착된다(한국노동사회연구소 비정규직 노동자 분류 기준, 김유선, 2007). 이러한 조건에서 비정규직 남용을 규제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확산한 것이 비정규직법이 논의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비정규직 관련 제도 논의를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추진한다. 노사정위는 2003년 7월 논의 결과를 정부에 넘기고, 정부의 입법안은 2004년에 발표되었다. 이 법률안은 논란 속에 여러 차례 국회통과가 유보되다가 2006년 11월 30일, 노동계의 반대와 민주노동당의 적극 저지 속에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찬성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기간제 근로자에 대한 법안, 차별금지와 시정절차에 관한 법안, 파견근로자에 대한 법안으로 구성되었다. 기간제는 직종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으나, 사용 기간이 2년으로 제한되고, 2년 초과 시 무기계약으로 간주한다. 차별금지와 시정절차에 대해서는 동등하거나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과 근로조건 차별을 금지하도록 했다. 파견근로자에 관한 법에서는 2년이 지나면 사용사업주는 고용의무를 지도록 했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파견근로자 1인당 3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도록 했다. 

그러나 기간제 근로자 고용의 사유 제한과 같은 조치가 누락되는 바람에 비정규직을 보호하기보다 오히려 2년 미만의 비정규직 사용을 조장하는 것은 물론, 2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해고되도록 해 오히려 비정규직 인생을 고착할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파견 용역 등 간접고용에 대한 대책이 없을뿐더러 기간제를 간접고용으로 전환하는 ‘풍선효과’도 우려되었다. 더 나아가 노동시장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는데, 법안으로 인해 단지 비정규직이 양적으로 증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가 이제 정상적이고 일반적 고용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사회진보연대, 2007).

민주노총은 ‘노동법 개악 저지, 권리입법 쟁취’라는 기조로 대응한다.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노사관계 로드맵에 대한 노사정합의가 이루어지자,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노무현 정권 퇴진을 기조로 11월 15일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결정한다. 노사관계 민주화 입법 쟁취, 한·미 FTA협상 저지, 비정규 권리보장 입법 쟁취, 산재법 전면 개정이 총파업의 4대 핵심요구였다. 민주노총은 11월 15일에 14.5만 명, 11월 22일에 20.6만 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진행한다. 노동부 집계로는 각각 5.6만 명, 5.8만 명이지만 파업 인원은 상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별도로 한국노총은 11월 25일 약 2만여 명이 참석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여 9.11. 노사정합의대로 노사관계 로드맵을 입법할 것을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국회 본회의에서 비정규직 관련 법안이 통과되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경총은 각각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날치기 통과된 비정규직법은 실제 차별해소 효과는 미미할 뿐 아니라 비정규직을 확산하고 그들의 노동권을 박탈하는 법이라 주장하며, 이 법안의 무력화를 위해 투쟁할 것이라 선언한다. 민주노총은 이듬해 2007년 7월 1일 시행을 앞두고 비정규직법을 개악법으로 규정하고, 비정규입법 전면 재개정안을 국회에 입법 청원하는 대응도 전개한다. 그러나 당시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공공노조 서울본부, 전국비정규직노조 연대회의,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회진보연대가 공동제안한 ‘비정규연석회의준비위원회’는 전면 재개정이 아닌 전면폐기를 주장하며 악법폐기 선언을 조직하고 ‘6.30 노동권 추모의 날’ 행사를 개최하며 비판한다. 이에 대해 김태연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실상 전면 재개정과 폐기 투쟁의 실질적 차이는 별로 없음에도 투쟁 전선에 일정한 혼선이 작용하였다”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김태현 외, 2017). 

반면 한국노총은 동 법안이 한국노총의 최종 요구안에는 못 미치지만,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최초의 보호법안이라는 사실에 최소한의 의의를 두고 미흡하나마 법안이 통과된 데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입장이었다. 경총은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법 안착화를 주문해 온도 차이를 드러냈다(한국노동연구원, 2006).

정부는 비정규직 입법의 통과로 정규직 전환의 문이 열렸으며 차별개선 효과도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비정규직보호법이 입법된 후 단기적으로 비정규직이 감소하고 정규직이 증가하면서 비정규직 비율이 다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김유선, 2009). 그러나 그 이후 장기 추세를 볼 때 법 시행 15년간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이동한 비율은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으로 분석되어, 단기적인 의미도 무색해졌다. 법은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의무화했지만, 오히려 이들 비정규직의 14%가량은 1년 후 무직자가 되면서 경력의 연속성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2006년 당시 1년 일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율은 2020년에 들어 절반 가까이 줄어들고, 비정규직에서 비경제인구로 전환한 비율은 정규직 대비 3배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되었다(권태구, 2023). 당시 민주노총의 비판처럼 비정규직을 장기적으로 줄이기보다는 고착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한 사례도, 공공기관이나 정부의 영향력 하에 있는 금융권이 다수였다. 전환된 후에도 무기계약직 형태를 취하면서 ‘중규직’이라는 또 다른 차별적인 고용형태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았고, 2010년대 들어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다양한 투쟁이 전개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비정규직법은 재개정 논란에 휩싸여 이명박 정부가 ‘비정규직 고용개선 종합대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2007년 7월 이후 근로계약을 체결한 기간제와 파견제 노동자를 2년을 초과하여 사용하는 경우 그 “기간을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로 본다”는 조항 때문에, 시행 2년이 되는 2009년 7월에 “해고 대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이 논란에 편승하여 아예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연장하여 법안의 규제를 완화하고자 했다. 정부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민주노총은 2009년에 이르면 비정규직법 취지를 훼손한다며 기간제근로자 사용제한 기간 연장 반대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해고 대란”이 실제로 발생한 것도 아니었다. 사용자는 ‘무기계약직’과 같은 형태로 전환하거나, 직접고용 기간제가 아닌 하청 외주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고용을 유연화하는 대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고자 했던 노사관계, 노동시장 제도의 변화는 노정 간 충돌 속에서도 대체로 입법화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사정합의 방식으로 추진하려던 애초의 구상대로 진행하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민주노총만 배제한 2006년 9월 11일 “노사정 야합”은 최소한의 노정 간 신뢰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노사관계의 거시적 안정이라는 애초 목표로 이어지지 못했다. 노조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노사관계 개혁의 핵심적인 과제라고 할 산별교섭 촉진과 같은 개혁과제는 다루어지지도 못했다. 비정규직 관련 법안도 결국 “비정규직 보호”라는 명분도 살리지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노무현 정부의 노동개혁정책 방향 자체에 한계가 있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의 대응도 한계가 있었다. 법안 논의 과정에서는 주로 비정규직 “사용 기간”이 아니라 “사용 사유” 제한을 주장했으나 노사정 협상 참여 여부를 두고 혼란을 벌이다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사유 제한은 사용 기간 제한보다는 의미가 있었겠지만, 그러한 취지가 다소 반영(상시적·지속적 업무는 원칙적으로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가 담당)되었던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2006.8.)’도 한계가 컸던 것을 감안하면 마찬가지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노동운동은 법안 통과 후에는 악법 폐기 혹은 전면 재개정 투쟁을 선언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권이 개정을 추진하자 이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이후 결과를 평가해볼 때 비정규직법 자체가 가진 한계로 인해 역설적으로 긍정적 효과는 물론이지만 부정적 효과마저도 제한적이었다. 

당시 비정규직법안의 문제로 지적되었던 사항은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의 해고와 외주화를 막기 힘들고 그 결과 간접고용으로 전환되어 오히려 고용의 질이 악화할 수 있다는 점, 간접고용의 경우 차별시정도 규율하기 어렵다는 점, 불법파견에 대해 실질적인 규제도 어렵다는 점이었다(은수미, 2006b). 그런데 이 문제는 “비정규직법 폐기”를 통해 개선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일부 단체가 주장한 “비정규직법 전면폐기”는 실질적인 제도 개선을 위한 해법이라기보다는 투쟁을 위한 구호였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제도 개선 차원에서는 간접고용과 특수고용의 확대 속에, 원청 사용자성 인정이나 특수고용 노동자성 인정 요구를 확대하고, 주체적 차원에서는 산별교섭을 통한 격차 축소에 실천을 집중하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다.
 

4) 노동계 비리 사건

사회적 교섭 관련 논란으로 민주노총 내의 조직적 긴장이 높던 2005년 10월 20일,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가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의 비리 혐의 구속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면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는 일이 벌어진다.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은 민주택시연맹 위원장 시절 사용자로부터 뇌물과 청탁을 받은 비리 혐의로 10월 7일 긴급체포되어 10월 8일 구속되었다. 이후 민주노총 집행부는 10월 11일, ‘하반기 투쟁 뒤 조기 선거’라는 수습대책을 내놓는다. 18일에는 ‘노조비리 근절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으나 사무총국 성원 13명이 집단사직하고 중앙집행위원 9인이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현 집행부 즉각 사퇴’를 요구하는 반발에 직면한다.

결국 10월 20일, 이수호 위원장 집행부는 총사퇴했고 전재환(금속연맹위원장) 비대위원장을 포함해 중앙집행위원 9인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된다. 비상대책위원회의 임기는 2006년 1월 19일 정기대의원대회까지로, 스스로의 역할을 하반기 비정규직 투쟁, 비리척결, 차기선거 준비로 규정한다. 이듬해 2월에 열린 민주노총 4기 보궐선거에서는 다시 이수호 위원장 집행부와 유사한 세력인 국민파와 NL의 연합으로, 조준호, 김태일 후보가 새 위원장과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2006년 투쟁을 이끌게 된다. 비리 사건으로 퇴진한 집행부가 유사한 성향의 선본이 다시 당선될 정도로 이들 연합의 토대가 강했던 것이다.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의 비리 사건만이 아니었다. 한국노총에서도 2005년 1월부터 항운노조, 국민은행노조, 자동차노련 및 전 한국노총 위원장·사무총장 비리 사건이 드러났다. 민주노총에서는 기아자동차노조와 현대자동차노조의 취업비리 사건,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력 사건이 이어졌다. 이러한 사건으로 단위노조는 물론 전국 중앙조직의 지도부가 중도 사퇴하는 일들이 이어지면서, 노동운동의 도덕성과 리더십이 크게 훼손된다(이원보, 2013).

이러한 비리 사건은 노동조합 운영의 민주성, 투명성이 취약한 가운데 벌어졌다. 배규식(2005)은 이 원인으로 기업별 노사관계 체제를 들었다. 기업별로 분권화된 노사관계 시스템에서 오는 노조 지도력의 취약성, 노조 내부의 정치적 계파 때문에 노동조합의 내부 조율능력과 분파별 이해관계 억제기능이 부족한 상황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기업별 사용자도 기업별노조를 관리하고자 하고,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기업별노조의 관행이 비리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비판이다. 기업별노조에서 경쟁하는 분파는 노조 선거에서 필연적으로 조합원의 득표를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조합원의 손에 잡힐 수 있는 실리적·물질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길을 경쟁적으로 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분파 투쟁을 더욱 격렬하게 이끌게 된다. 비리 사건 상당수가 노조 선거 자금 마련과 관련되어 있기도 했다.

노조 비리 사건은 개인의 일탈이라기보다 구조적 원인이 있다는 점이 널리 인식되었기 때문에, 결국 조직혁신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가 쟁점이 된다. 배규식(2005)이 기업별노조 체제와 경제적 실리주의를 비판했다면, 민주노총에서 실제 논의는 이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수호 위원장 사퇴 후 진행된 보궐선거에서 민주노총 위원장 직선제 논의가 부상했던 것이다.
 

5) 민주노총 혁신 논의와 직선제 도입

민주노총에서 총연맹 위원장을 직선으로 선출하자는 주장은 1998년 민주노총 2기(이갑용 위원장) 집행부 공약에서부터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9년 대의원대회에서 부결(61% 찬성)되면서 더는 추진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수호 위원장 사퇴에 따라 진행된 보궐선거(2006년 대의원대회)에서 이정훈·이해관(새흐름) 후보가 직선제 도입을 주장한다. 이후 대의원대회에 상정된 안건은 성원 미달로 유예되며 추진되지 못한다. 그런데 2007년 초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대의원대회)에 출마한 양경규-김창근, 조희주-임두혁, 이석행-이용식 선본 모두가 직선제 공약을 들고나온다. 당선된 이석행 위원장은 차기 대의원대회에서 1호 안건으로 상정할 것을 약속하기도 한다. 그해 4월 열린 임시대의원대회는 직선제 직접선거를 결정하게 된다. 3년간의 준비를 거쳐 2009년 11월 6기 임원선거부터 직선제를 적용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09년 9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준비 부족을 이유로 직선제 도입을 3년간 유예하기로 한다. 2012년 김영훈 위원장 집행부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직선제 유예 안건이 다시 상정된다. 당시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여파로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첨예한 논란이 제기되면서 모바일투표를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으나 단일투표 방식으로 직선제를 시행하기에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후 2013년 대의원대회에서 2014년 12월 31일 이전에 직선제를 도입하기로 하면서 2014년 12월 첫 직선임원 선거가 시행된다(총연맹-일부 지역선거 동시선거). 2017년 12월 두 번째 직선임원 선거가 시행된다(총연맹-16개 전체 지역본부 동시선거).

직선제를 강하게 주장했던 다수의 현장파 활동가는 조직혁신과 조합민주주의의 강화방안을 ‘관료화되고 개량화된 지도부’에 대항하여 밑으로부터의 투쟁성과 변혁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임원과 대의원을 직선으로 선출해 조합민주주의를 강화해야 강력한 투쟁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국민파와 중앙파 활동가는 직선제 도입에 동의하면서도 준비과정을 거쳐 단계적으로 도입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노광표(한노사연)는 직선제 도입 추진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직선제 주장이 조합민주주의를 임원선거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화에 기초해 있으며 직선제를 관료주의 극복의 대안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관료주의 때문이 아니며, 오히려 현재 노동조합운동은 관료제의 강화, 집중화를 통한 연대성 회복이 필요하다고 비판했다. 총연맹은 연맹들의 결사체로서, 직선제는 조직 원리 상으로도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조효래, 2007). 

조효래(2007)는 이에 더해 다수결 투표가 여전히 소수의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승자독식 원리를 구조화하게 되면서, 정파들 상호 간 혹은 조합원 내부에서 소통과 토론을 통해 해결할 문제를 선거 승리 혹은 다수 득표를 위한 소모적 논쟁으로 이어가게 한다는 점을 비판했다.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충분한 소통, 논의와 토론을 통한 숙의가 아니라 다수결로 단순화한다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업별노조와 달리 산별노조나 총연맹의 경우 조합원들 사이의 구조적 균열이 존재하며, 조합원 다수가 산업, 기업규모, 고용형태의 측면에서 특정 부문에 집중될 때 구조적으로 소수자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선거에서는 소수이지만 계급대표성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미조직노동자는 의사결정이나 선호의 집합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논쟁 과정에서는 대의제보다 직접 민주주의가 우월하다는 주장이나, 직선제가 직접 민주주의라는 주장도 혼재되어 제시되었다. 그러나 대의제가 덜 민주적인 것도 아닐뿐더러, 어차피 선출한 위원장이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상황에서 위원장 직선이 직접 민주주의라고 보기도 어렵다. 중요한 안건에 대해서 조합원 직접 투표를 일상적으로 한다면 모르겠으나, 기업별 수준을 넘은 산별노조, 총연맹 차원에서는 예외적으로 집행부의 방침에 따른 조합원 조직화를 목적으로 추진되는 총파업 투표 같은 것을 제외하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임영일(1999)은 직선제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직선제를 조직 민주주의의 관건으로 인식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직선제와 결합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범위는 지역, 지부와 같이 현장과 밀착한 단위 정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합원 수준까지 현장 토론과 숙의를 통한 결정이 가능한 단위이기 때문인데, 대규모 조직의 안건 찬반투표보다는 직접 민주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직선제는 현장과 밀착한 소규모 단위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기에 적합한 제도임에도 민주노총의 민주적 운영을 위한 대안으로 과도하게 의미 부여한 것이다.

2014년 1기 직선제 선거가 시행된 이후, 한상균, 김명환, 양경수 위원장까지 3대 집행부가 직선제로 선출되고 있다. 위원장 선출 결과를 보면 조합원들이 정세를 반영해 투표한 경향은 발견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탄압에 맞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것으로 기대한 1기 집행부, 문재인 정부 집권 후 사회적 대화를 기대한 2기 집행부, 문재인 정부와 ‘노사정 대표자회의’의 사회적 대화 실패 후 투쟁이 필요하다는 정서를 반영한 3기 집행부 당선이 그렇다. 그러나 직선제 도입 논의 당시 직선제로 달성할 것이라 기대했던 조합원으로부터의 민주주의나, 강력한 지도력과 실질적인 총파업이 실현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할 것이다. 오히려 직선제 도입에 비판적인 입장들과 우려가 해결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심심치 않게 부정선거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다. 이는 노조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추진한 직선제가 오히려 민주적 원칙을 훼손하는 사례일 것이다. 더구나 다수를 확보한 정파의 패권적 조직운영 문제는 결과적으로 더 심화했다.

정작 민주노총이 혁신해야 할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노선의 혁신과 기업별노조 체제의 지양은 지체되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 혁신 방향에 대한 많은 제안 사항 중 다른 부문에는 합의가 취약한 가운데 유독 직선제 정도만 도입된 것이다. 민주노총이 단병호 위원장 집행부 시기 2000년 10월 보고한 ‘노동운동 발전전략 보고서’는 종합적인 내용을 담았지만 채택되지 못했다. 

이후 몇 번의 발전전략 논의는 대중적 동의를 확인하지 못하고 보고서로만 마무리되었다. 2005년(이수호) 조직혁신위원회 자료집, 2009년(임성규) 노동운동혁신위원회 활동 보고서, 2010년(김영훈) 산별노조시대 민주노조의 위상과 역할 보고서, 2014년(신승철) 미래전략위원회 토론회 자료집, 2015년(한상균) 민주노조운동 전략위원회(보고서 폐기) 등으로 이어지지만 조직적 합의를 모았다고 하기 어려웠다. 이 과정에서 부각 된 직선제 선거는 노동운동의 발전전략을 제시하는 장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모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기준으로 선거 쟁점이 형성되거나 당선자가 결정되는 구조도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을 뿐이다.
 
 

3. 비정규직 확대와 노동운동의 대응

 

1)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확산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노동시장의 변화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확대를 불러왔다. 특히 이전부터 존재하던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 노동자는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가장 우선적인 해고 대상이 되었다.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고 기업 구조조정이 일상화되면서, 1980~90년대 성장기에는 그나마 존재했던 1차 노동시장(대기업 정규직)으로의 진입도 거의 봉쇄된다. 한편, 역설적이지만 파견법이 제정될 때 제조업은 근로자 파견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소사장제’ 같은 편법적 방식으로 시행되던 제조업 사내하청이 파견법에 저촉될 소지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이 분출했으며 특수한 요구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노동조합운동은 이러한 투쟁들을 기존 기업별 정규직 노조의 경제투쟁과 대별된다는 점에서 ‘비정규직 투쟁’으로 묶어서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불안정노동자의 양태가 다양했던 만큼 이 투쟁 내부에도 쟁점이 있었다. 지난 호에서 다룬 IMF 구제금융 위기 직후의 투쟁 이래로 비정규직 투쟁은 계속 이어진다. 1999~2003년 한국통신 계약직노조, 대우캐리어 사내하청노조, 화물연대,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의 투쟁에 이어, 2004년에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하이닉스-매그나칩 투쟁, 2005년에는 울산 건설플랜트노조, KTX 승무원, 기륭전자 투쟁, 2006년에는 동희오토, 화물연대, 지역 건설플랜트노조 투쟁, 2007년에는 기아차 사내하청노조, 재능교육, 코스콤, 이랜드노조 등 굵직한 투쟁이 전개된다. 2005년 10월 16일에는 ‘전국 비정규직노조 연대회의(전비연)’가 출범하여 비정규 노조 간 연대투쟁을 주도했다.
 
그런데 이들 투쟁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를 반영하여 수세적 방어적 성격이 정규직 노동자보다 강하고, 파업보다는 농성·집회·시위 방식이 많았으며, 장기간에 걸쳐 극단적 투쟁방식으로 호소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이른바 ‘장기투쟁 사업장’). 또한, 외부 연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특징이 있었다(이원보, 2013). 

한편, 2003년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의 이용석 광주지부장 분신과 노조의 투쟁 이후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해결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여론이 높아진다. 이에 따라 정부는 비정규직입법 추진과는 별도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2004 1차, 2006 2차)을 발표한다. 핵심업무를  정규직으로, 상시업무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노동운동의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전환 대상 선정 기준이 모호하고 전환 후 처우 개선도 미흡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2006)는 이 정책에 대해 무기근로계약이라는 새로운 고용형태는 정규직화라고 할 수 없는 “사기”라고 규정하고 “이른바 주변 업무, 일시업무, 단순 업무, 비정규직 업무라는 이유로 비정규직 사용을 정당화”하는 문제점을 가진다고 비판했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은 2017년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기존 정규직 직제와 완전히 통합한다는 의미로 “제대로 된 정규직화”를 주장하는 노동운동 일각의 비판은 연속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조직화와 투쟁 과정에서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산별노조나 일반노조 등 초기업별 노동조합의 산하조직이 76%로 지배적이지만 주요한 교섭방식은 기업별 교섭이었다(69.4%). 또한, 협약의 포괄범위가 개별 사업장이나 개별 기업인 경우가 대부분(92.4%)이었다는 특징이 있다(은수미, 2006b). 즉 실질적 조직형태도 기업별 성격이 강하고, 교섭과 투쟁도 기업별로 전개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 산별노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산별노조 전환의 명분으로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 초기업 교섭을 제시하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비정규직 노조 조직화로 새로운 운동 주체의 형성을 통해 기존 기업별 노사관계와 기업별 경제적 실리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실현되기 어려웠다는 점도 보여준다.

롯데호텔, 이랜드노조처럼 정규직노조가 비정규직을 조직한 사례도 있었지만, 한국통신 계약직노조, 현대차, 금호타이어 사내하청 등 정규직노조와 연대가 어려운 사례가 상당히 많았던 점도 영향을 주었다. 이 때문에 노동운동 안에서는 비정규직의 독자 조직화(별도노조)가 정당하다는 입장도 강하게 존재했다. 김혜진(2002)은 정규직노조가 협조적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정규직 독자 노조가 불가피한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하고, 이러한 경우 정규직노조가 비정규직이 독자적으로 조직될 때 적극적으로 방해하거나, 아니면 비정규직 노조의 요구를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함께 투쟁하는 길 외의 제3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다. 비정규직 노조가 “정규직화”라는 최대치의 요구를 제시한 상황에서, 전자가 부당한 것은 물론이지만 정규직노조가 후자를 선택해서 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또한, 이렇게 되면 정규직노조를 포함한 산별노조 차원에서 요구안과 투쟁방식을 조정하는 일은 상대화되거나, 오히려 운동 원칙에 어긋난 것이라고 비판된다. 사업장 단위 투쟁인 비정규직 노조의 독자적 투쟁이 강조되면서, 연대할 수 있는 대상은 산별노조보다는 다른 비정규직 노조가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전비연의 연대투쟁이 더욱 두드러졌던 것이다.
 

2) 전략조직사업과 ‘비정규직 투쟁’이라는 프레임

민주노총은 1998년 IMF 위기를 계기로 비정규직 규모 확대, 비정규직 노조 설립 확대 분위기 속에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 문제의식이 커지며 내부 논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1기 전략조직사업이 시작되고 50억 기금모금도 추진된다. 조직활동가를 양성하여 배치하는 사업이 진행되며, 유통서비스, 공공서비스, 건설일용, 특수고용, 사내하청 등 5대 부분에 23명의 조직활동가가 투입된다. 2010년 이후에는 2기 전략조직사업으로 이어진다.

이는 노조의 계급 대표성을 증진하려는 목표와 함께, 노동시장에 존재하는 격차를 노동조합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전략조직사업이 노조조직률과 사회적 정당성이 하락하는 조건에서 노동조합 재활성화 전략의 일환으로 제기된 점과 유사한 점이 있으면서도 차이도 있다. 실제로 실현되었는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민주노총 전략조직사업은 조직확대(계급 대표성 제고), 조직혁신(사업의 혁신을 통한 실리주의 극복), 운동노선 혁신(새로운 영역에서 변혁적인 조합원 운동주체의 형성)을 기대했다.

전략조직사업은, IMF 경제위기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여전히 정규직, 대기업노조로 구성된 상황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도 배경이었다. 그래서 1990년대 이후 영미권 노조의 조직화 노선을 민주노총이 참고하면서 수용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미국의 국제서비스노조(SEIU)가 새로운 운동 전략으로 조직화모델을 제시한 이후 미국노총(AFL-CIO)이 이를 공식 조직전략으로 채택한 것은 1995년이었다. 곧이어 영국노총(TUC)이 미국의 노조 재활성화 전략을 벤치마킹하여 1998년 조직 아카데미를 설립함으로써 새로운 실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000년대 들어 이러한 흐름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노중기, 2015).

시기별로 보면, 1998~2002년 준비단계에서는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비정규직 규모 확대, 비정규직 노조 설립 확대 분위기 속에 미조직노동자 조직화의 문제의식 커지며 내부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어 2003~2009년 시기에는 1기 전략조직사업이 진행된다. 50억 기금모금을 추진하고, 조직활동가를 양성, 배치하는 사업이 진행된다. 유통서비스, 공공서비스, 건설일용, 특수고용, 사내하청 5대 부분에 20여 명의 조직활동가를 투입한다. 이후 2010~2013년에는 2기 전략조직사업이 진행되어 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 5대 부분으로 조직화 대상을 압축하고, 2014~2017년에는 3기 전략조직사업이 핵심사업으로 지역공단, 유통서비스, 이주·청년 및 지원 사업으로 인천공항을 선정하여 진행된다. 전략조직화사업의 개념과 주요 사업도 진행 과정에서 변화하는데, ‘자원과 인력의 집중적 투입을 통한 집중 조직화 사업’에서 조직문화혁신, 노조가입 캠페인이 좀 더 강조된다.

영미권(특히 미국)에서 전략조직사업이 제기된 맥락은 전체 노조운동의 혁신적 전환 시도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직화모델은 조직혁신을 포함하는 조직전략, 정치전략, 교섭 및 연대전략을 비롯한 여타 재활성화 전략의 다른 부문 전략과 유기적으로 결합 될 때만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조직화 모델은 이념의 재정립, 노조 조직통합, 조직구조 혁신의 조직혁신전략과 함께 노동조합 재활성화를 위한 조직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된다는 것이다(노중기, 2015).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주장한 킴 무디(1998)도 ‘조직화 모델’이 기존 노조의 규모 확대나 조합원 동원을 통한 교섭력 강화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으려면,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지지를 사업장을 넘어 확대하기 위해 미조직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주노총도 전략조직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직확대만이 아니라 조직혁신과 연계해야 한다는 점을 평가한다. 민주노총의 전략조직화 사업은 출발부터 기존 조직의 내부 주체 역할 중 하나로 ‘조직문화혁신’을 포함했다. 아래로부터의 연대, 새로운 주체형성을 통한 운동정체성 회복, 산별노조의 내용을 채우는 조직문화혁신 사업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는 것이다(김종진, 2012). 

‘조직문화혁신’은 3기 전략조직사업까지 오면서 점차 강조되기는 하지만 실제로 진행되었다기보다는 여전히 사업 목표로만 남는 측면이 강했다. 노중기(2015)와 김영두(2007)의 평가에 따르면, 문제점으로 지적된 총연맹 주도성 부재 문제나 재정문제, 그리고 선택과 집중 부재 문제는 단순한 전략방안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전히 기업별노조의 구조와 관행, 제도가 관철되는 현재의 민주노총 체제에서 충분히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전략조직화와 결합된 조직문화의 혁신은 결국 새로운 산별노조운동 전략이 마련되지 않고서는 실행하기 어려운 문제였지만, 현실의 전략조직사업은 그곳에까지 시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조직화모델 자체는 영미사례에서 그러했듯이 조직의 양적 확대를 위한 전술적 도구로 전락할 개연성을 안고 있었다.

실제 사업의 출발점으로서 가장 중요한 전략조직사업 대상 영역의 설정은, 조직확대가 가능한지가 일차적인 판단 기준이었으며, 그다음에 산별노조 간 편중되지 않도록 안배하는 방식으로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결정되었다. 앞서 킴 무디(1998)의 주장과 같이 사회운동으로 연대를 확장하고 이를 위한 전제로 노조의 이념을 (사회운동 노조주의로)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로 설정되지는 않았다. 노중기(2015)의 주장과 같이 조직혁신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려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특히 문제는 이 사업이 당시 노조운동이 최대의 과제로 설정하고 있었던 산별노조운동과 유기적 관련이 있는가에 있었다. 2000년대 산별노조운동은, 산별노조 건설 후 기존에 조직된 사업장의 사용자를 묶어 집단교섭, 통일교섭을 실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미조직노동자 조직화와 산별교섭의 관계는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조직화 사업은 산별노조가 전체 노동자 계급을 대표한다는 차원에서 투자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기는 했으나(2006년 건설된 공공노조의 경우, 적극적으로 이러한 취지를 강조했다. 안태정(2014) 참고), 구체적으로 산별노조 발전 전략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200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산별교섭 실현이 지체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조직화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해보자는 성격이 강했다. 기존 사용자가 산별교섭에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신규조직이 새로운 노사관계를 시도할 여지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독일식 산별노조-산별교섭을 모델로 노동조합과 노사관계의 발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업별 노사관계가 주류인 미국 노동운동의 전략을 결합한다는 것은 상당한 고민이 필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결국 실용적인 조직확대의 필요성 속에서 산별노조 운동과의 연계는 면밀히 고려하지 않고 별개 사업으로 진행되었던 셈이다. 

산별노조운동이라는 전략에 비추어본다면, 조직화 대상의 선정과 조직화 방식, 조직화 이후의 교섭, 투쟁에서 산별노사관계 형성에 집중하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산업별 노사관계 형성이 필요한 영역에 조직화 자원 투입을 집중하고, 조직화 이후에도 기업별 교섭이 아니라 초기업 교섭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를 위해서는 기업을 넘어선 임금, 노동조건의 형성을 위한 정책이 동반될 필요가 있다. 기업을 넘어 사회적인 표준적 노동조건을 형성하고 이를 위해 미조직노동자(지역사회)와도 연대한다는 점에서 킴 무디(1998)이 제기한 사회운동적인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2010년대를 지나 실제 초기업 교섭이 가능했던 영역(이창근 외(2021) 참고)은 지금까지도 전략조직사업 대상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산별교섭이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의 돌파구로 보였던 전략조직사업이 정작 산별교섭과는 큰 상관없이 진행된 것이다.

한편,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조 결성과 투쟁이 계속 이어지고, 전략조직사업이 부각되는 데에는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임금 및 노동조건 격차가 심각하다는 배경이 있었다. 2005년 기준으로, 비정규직 시간당 임금은 정규직의 70.5%로 2002년 80.7%보다 10.2% 하락했다. 그런데 이는 고용형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고용형태별 격차를 규모별 격차와 결합해 보면, 300인 이상 정규직을 기준으로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시간당 임금 격차가 줄어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비정규직만 보아도 300인 이상과 이하에서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노사분규 이원화가 정규-비정규뿐만 아니라 대기업-중소기업 간 격차에 기초한 혼합효과일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진단되었다(은수미, 2006a).

IMF 경제위기의 충격을 벗어나 경기가 호전되는 상황,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고용 확대는 대부분 불안정노동 영역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노동운동은 ‘비정규직화’라고 규정했다. 물론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경향으로 보아야 한다는 비판적인 입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대표적으로 박하순 외(2006)을 참고할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문제는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은 ‘정규직’에 대당하는 잔여적 개념이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개념에서는 ‘정규직’을 정상적인 고용형태로 전제하고 ‘정규직화’가 최종적인 운동의 목적이 된다. 정규직이 되면 지불능력이 상대적으로 있는 사용자와 기업별 교섭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투쟁에서나 노동시장의 상황에서, ‘정규직화’가 운동의 목적이 될 수 없는 노동자가 확대되고 있었다. 특수고용노동자가 대표적이었고, 사내하청이 아닌 사외의 2~3차 하청에서도 정규직화는 운동목표가 되기 어려웠다. 은수미(2006a)의 진단처럼 기업규모에 따른 노동자의 격차 문제가 이미 드러나고 있던 것이다. 당시 노동운동이 ‘정규직화’를 목표로 삼기 어려운 불안정 노동자의 증가, 기업별 교섭으로는 대기업 정규직과 격차를 해결하기 어려운 중소규모 사업장의 격차 문제를 중시했다면 다른 접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미 강력하게 형성된 ‘비정규직 정규직화’라는 프레임 속으로 불안정 노동자 운동은 전반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노동시장의 문제가 비정규직 문제라는 프레임으로 부각되면서 비정규직 입법문제에 노사정이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홍주환(2006)은 “비정규노동 문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시장지위 격차, 또는 잘못된 하도급 구조라는 산업구조를 개선하는 것을 통해서 중소기업 부문의 낮은 임금수준을 끌어 올릴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과 동시에 추진되어야 하는, 노동시장 전반적인 문제의 하위영역”이라고 지적하고 “이러한 문제들은 비정규노동 보호입법이 마련된다고 해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노동운동 진영이 입법문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간접고용 확산과 기업별 임금격차를 비롯한 노동시장에서 해결해야 할 여러 문제가 오히려 가려진 것이다. 
 
 

4. 이명박 정부 집권과 광우병 쇠고기 투쟁

 
2007년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가 대결해 각각 48.7%, 26.1%를 얻어 민주당이 크게 패배한다. 2008년 4·9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이 153석을 얻고 손학규, 박상천 공동대표 체제의 통합민주당은 81석을 얻어, 의석수가 55석이나 감소한 민주당은 역사상 최약체 야당으로 전락한다(이하의 내용 중 광우병 쇠고기 반대 투쟁의 개요는 대체로 김동근(2019)의 정리를 요약한 것이다).

야권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에서 야권 일각에서는 이명박 탄핵 움직임이 시작된다.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선 투표가 끝난 당일, 다음카페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가 개설되는데, 범국민운동본부는 12월 22일부터 이명박 탄핵을 목표로 촛불집회를 주최하여 2008년 4월 26일까지 꾸준히 개최한다. 5월 2일에는 “미친 소 너나 처먹어라”라는 구호를 내건 촛불집회가 열린다. 이명박 탄핵을 목표로 범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한 촛불집회였으나, 광우병 촛불이 폭발하면서 사후적으로 “1차 촛불집회”로 명명된다. 1차 촛불집회 이후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카페는 가입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쥐새끼” 등 이명박에 대한 조롱, 광우병에 대한 공포와 괴담이 확산한다. 이들 범국민운동본부를 비롯한 여러 인터넷 카페는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등장 속에서 직간접적 역할을 했던 집단·개인과 상당한 관련성이 있었다. 광우병 문제는 한미FTA, 즉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유산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지만, 이들은 그런 관련성은 무시한다.

민주노총은 한미FTA 협상이 본격화되는 2006~07년 동안,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에 참여하면서 수차례의 범국민 총궐기대회, 미국 원정투쟁을 비롯한 저지 투쟁을 주도했다. 2007년 들어 범국본은  ‘한·미 FTA 협상 무효’ ‘노무현 정권 퇴진’ ‘신자유주의·미 제국주의 반대’를 투쟁의 기조로 설정하고 투쟁도 확대한다. 민주노총은 6월, 한미FTA 저지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한다. 특히 금속노조는 6월 25일부터 파업에 돌입하고, 현대자동차지부도 6월 28일 파업에 결합한다. 이상욱 현대자동차지부장은 “자동차업종이 한미FTA 수혜 부분이라고 하지만 미국의 관세 2.5%가 인하된 반면, 한국의 관세는 8% 인하됐다. 사측은 미국의 현지생산을 늘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며 파업 이유를 밝혔다. 민주노총을 위시한 민중운동의 투쟁에도 한미 정부는 2007년 4월 2일 협상을 타결하고 노무현 정부는 9월 7일,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정기국회에 상정한다.

한편 한미FTA 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배출가스 강화 기준 2009년까지 철폐, 스크린 쿼터 축소, 약값 재평가 제도 철폐 등 이른바 4대 선결 조건을 요구했다. 결국 노무현 정부가 수용한 이러한 요구는 대중의 민족주의적 반발과 각계의 반대를 더욱 촉발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한미FTA 반대만이 아니라 오히려 ‘대안무역협정’을 제기하고 노동권 조항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을 병행해야 한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현실화되기 어려웠다(윤소영, 2009).

17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 비준 동의안은 이명박 정부가 18대 국회에 상정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이어진 쇠고기 협상에서, 노무현 정부 시기보다 검역기준이 더 하향되면서 문제가 됐다. 물론, 광우병 시위 과정에서 제기된 주장의 기준에서는 노무현 정부의 협상 내용도 문제가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협상이 체결된 이후, 4월 29일 PD수첩의 <긴급취재,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가 방영되면서 논란이 증폭된다. 곧이어 5월 2일부터 촛불집회가 시작되고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반대 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된다. 이후 촛불집회가 이어진다. 6월 10일에는 “100만 촛불대행진”이 대규모로 개최되고 “정부가 7대 최소 안전기준을 바탕으로 한 재협상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정권 퇴진 투쟁도 불사할 것”이라는 입장을 천명한다.

노무현 정부시기 결성된 한미FTA저지 범국본의 경우 광우병 촛불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촛불집회에 결합하면서 광우병 쇠고기 협상으로 촉발된 정세의 본질적 의미, 즉 한미FTA 문제, 김대중·노무현의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의 본질을 제기하려 했었으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미 반MB투쟁이 모든 쟁점을 압도하게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국면에서 한반도 대운하와 같은 이명박 정권 들어 새롭게 추진되던 정책들이 부각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공공부문 노조를 중심으로 건강보험 민영화, 공공부문 민영화라는 쟁점을 결합하고자 한다. 이명박 정권의 국정 동력이 약해질수록, 정부가 추진하려는 반노동 정책도 힘을 잃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 정책의 연장선에 있는 쟁점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보호법이나 한미FTA 문제는 쉽게 수용되지 않는 암묵적 장벽이 존재했다.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 1년을 맞이하여 민주노총과 여러 사회단체가 다양한 사업을 기획했으나 촛불집회 국면과 맞물려 투쟁이 동반 고조되기보다는 오히려 이슈가 묻히고 말았다. 

6월 들어서는 노동조합 운동도 단순한 집회 참가를 넘어서 조직적으로 참여한다. 화물연대, 건설노조 건설기계분과가 파업 돌입에 돌입한다. 화물연대는 미국산 쇠고기 운송 거부 투쟁을 전개했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가 미 쇠고기 재협상을 촉구하는 민주노총의 정치파업에 참여하기 위해 실시한 파업 찬반투표는 부결되었다. 공공연맹은 광우병 문제뿐 아니라 공공부문 사유화 문제도 함께 저지하기 위해 하반기 총파업 투쟁의 시기를 당겨 6말 7초 총파업 투쟁 총투표를 추진한다. 민주노총은 ‘광우병 쇠고기 협상 전면 무효화 및 재협상, 한반도 대운하 반대, 물·전기·가스·철도·의료·교육·언론 시장화·사유화 정책 폐기, 기름값 물가폭등저지를 의제로 전 조합원 총파업 찬반투표를 실시한다(1차 투표 6월 10~14일, 2차 투표 6월 17~29일). 29일 개표결과 투표율 53.1%, 찬성률 69.78%로 파업을 가결하고 7월 2일에는 민주노총 총파업이 전개된다(금속 2시간 115,000명). 그러나 이미 6월 19일 대통령의 사과 기자회견과 함께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추가협상이 타결되고 7월 7일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평일 촛불집회 개최를 중단하기로 하면서 차츰 격렬한 시위의 분위기는 정리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국제정세는 이러한 한국의 분위기와 상당히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금융 불안정이 증가하는 가운데, 2008년 9월 14일, 리먼브라더스가 파산을 신청하면서 본격적인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9월 16일에는 국내 증시도 폭락하고, 환율은 1998년 이후 최고의 상승 폭을 보이면서 패닉 상태에 빠졌다. 본격적으로 위기가 파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기업의 수익성이 크게 악화하고, 다음 해 2009년에 들어서는 한계기업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와 같은 사태가 이어지는 것이다. 공공부문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선제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하여,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공공기관의 정원을 10~15% 씩 감축하는 긴축에 들어간다. 이러한 조건은 2009년 노동조합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재벌, 공공부문의 대기업노조는 방어 투쟁에 돌입한다. 민주노총은 이러한 상황에서 대사회적 투쟁의 명분으로 광우병 촛불을 ‘사회연대운동’으로 인식하며 집중했다고 할 수 있다. 광우병 쇠고기 저지 투쟁에 몰두하던 민주노총은 2008년 경제위기로 인한 임금격차 확대와 고용불안을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이명박 정부의 보수적 정책 때문으로 오인하고 ‘정권교체’를 위한 대정부 투쟁에 더욱 집중한다. 다음 편에서 살펴보겠지만, 그 결과는 2010년대 내내 진행된 민주당과의 ‘야권연대’를 통한 정권교체 시도였다.

2009년 4월 경기교육감 선거에서 민교협 출신의 김상곤 후보가 ‘전면 무상급식’과 ‘MB교육 심판’을 내세워 당선된 후 야권단일화, 반(反)MB(MB 심판), ‘무상’ 시리즈라는 선거 승리 공식이 확립되기 시작한다. 2009년 5월 노무현의 죽음 이후 “민주 대연합전선”이 본격화된다(임필수, 2021). 
 
 

5. 소결

 
IMF 구제금융 위기가 수습되어가던 2001년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노동시장에서는 일자리가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비정규직, 하청, 파견처럼 불안정한 고용형태였다. 위기가 지나가면서 경기회복과 함께 임금 수준도 회복되기 시작한다. 도시근로자 가구당 가계수지[가처분소득-소비지출(전세 및 자가평가액 포함)]가 외환위기 직후인 1999~2001년에 적자로 돌아서면서 생활상태가 크게 악화하였으나, 2002년부터 흑자로 돌아섰고, 2006년에는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자영업자를 제외한 노동소득분배율도 2001년 58.1%에서 2006년에는 61.8%까지 상승한다. 그러나 자영업자(특수고용노동자 포함)를 포함할 경우 오히려 노동소득분배율은 하락하여, 금융위기 당시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계층이 집중된 영세 자영업자 집단은 몰락하는 추세를 보여주었다. 또한, 소득 하위 1분위는 66만 원 적자, 10분위는 188만 원 흑자로 소득 격차는 오히려 확대되었다(김유선, 2007, 남종석, 2022).

이러한 조건에서 민주노총의 여러 노동조합은 기업별노조를 넘어 산별노조로 변화된 정세에 대응하고자 했지만, 대다수가 외환위기에서 살아남은 대기업노조였다. 산별노조도 그러한 기업별노조들의 연합이라는 형태로 건설되었다.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를 비롯해 산별노조 건설을 선도한 조직은 기업별 노사관계를 넘어 산별교섭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했다.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지만, 산별 노사관계를 안착했다거나 기업별 노사관계를 넘어섰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2004년 보건의료노조 산별협약의 10장 2조 논란은 산별교섭 위상에 대한 노동조합 내부의 합의도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각 산별노조는 안정적인 산별교섭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 2007년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앞두고, 2006년 말 완성차 노조의 산별노조 전환과 공공노조, 운수노조 건설이 이어졌지만 실질적인 산별노사관계로 가는 길은 멀었던 것이다. 산별노조운동의 에너지가 살아있고, 또한 경기가 호전되던 기회의 시기에 산별 노사관계를 안착화하지 못한 것은 특히 아쉬운 일이다. 산별 노사관계를 통해 기업과 고용형태를 넘어 임금과 처우, 고용형태를 함께 개선할 여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결국 실현하지 못하고, 그 결과 이 시기를 거치면서 소득 격차는 더 벌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열악한 일자리를 감내해야 했던 여러 업종의 불안정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통상 “비정규직 투쟁”으로 불리는 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한다. 민주노총과 산별노조는 한계는 있었지만 전략조직사업에 자원을 투자하기 시작한다. 투쟁을 통해 부분적으로 성과를 쟁취한 사업장도 있지만, 승산은 높지 않았고 처절한 장기투쟁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전투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는 이들 사업장의 투쟁방식이 노동운동이 쇄신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입장도 나타난다. 그러나 “정규직화”를 목표로 하는 비정규직 투쟁이 당시 노동시장의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었는지는 다시 평가해 볼 대목이다.

노사관계와 노동시장의 불안정은, 노동운동만이 아니라 정부와 자본 측에서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노무현 정권은 노사관계 로드맵, 비정규보호법 입법이라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고 그 경로로 노사정 협상을 구상한다. 노조운동의 주류(한국노총 및 민주노총의 국민파-NL 연합 집행부)도 이러한 구상에 호응하지만, 민주노총 내부는 참여 여부를 두고 격렬한 조직적 갈등에 휩싸인다. 결국 노사정 협상은 민주노총 내부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고 노정 갈등은 심화했으며 그 후과는 오래 지속됐다. 노무현 정부는 자신이 구상한 제도 개혁을 국회 입법을 통해 부분적으로 실현했지만,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고 그 결과는 초라했다.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가운데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다. 집권 초반, 보수 정부의 국정동력 약화라는 노동운동을 포함한 민중운동과 민주당 등 야권의 이해가 일치한다. 그들이 광우병 쇠고기 반대 투쟁의 광장에서 만난 후 ‘야권연대’의 프로세스가 추진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국제적으로는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가 촉발되고 경제위기가 확산된다. 민주노총은 2010년대 이러한 위기 상황을 정권과 자본의 구조조정 시도에 대한 방어적 투쟁과 함께 야권연대 전술로 돌파해가고자 했다.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가 안착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대응은 대체로 방어적, 수세적인 것이었다. 여러 제도 개악과 고용불안을 막는 방어 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방어 투쟁을 통해 유지하고자 했던 1990년대 호황기에 형성된 노사관계, 노동시장은 이미 해체된 상태였다. 노동운동은 자신이 앞으로 어떤 체제를 형성하고자 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주장만 요구안과 성명서에 그리면서 투쟁을 이어갔다. 그 결과, 정권교체 이후에는 그 이전의 체제, 즉 민주당 집권기로 돌아가는 것이 그나마 대안이 되는 상황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2010년대를 요약하는 현장의 경제적 방어투쟁과 정치영역에서의 야권연대라는 경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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