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을 버리고 마오와 중국혁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②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후편)
문화혁명 ‘10년 동란’
(5부 문화대혁명과 그 여파: 1966~1976년)
중국혁명과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바로 문화혁명(이하 ‘문혁’)이다. 마이스너는 문혁이 ‘마오의 역사적 이미지에 먹칠’을 했던 사건이며, 역사 속에서 그토록 이상하게 왜곡되어 기괴한 방식으로 전개된 사건은 드물다고 말한다. 단적으로 문혁은 대중민주주의를 선포했지만, 대중은 마오를 숭배하고 마오에게 자신을 종속시켰다. 또한 문혁은 관료주의에 반대하며 등장한 운동이지만 가장 억압적인 관료기구인 군대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혁명의 후계자’를 양성하겠다는 의도가 무색하게 정치적 환멸만 남은 ‘잃어버린 세대’를 양산했다. 이 글에서 이러한 문혁의 아이러니를 전부 해명하기는 어렵겠지만, 문혁의 이론은 어떠했고 실제 운동에서 마오의 역할은 무엇이었냐는 문제를 살펴보면 약간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쟁점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배경으로 문혁의 전개 과정을 간단하게 개괄하고자 한다.
문혁은 대략 세 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야오원위안(姚文元)이 마오의 지시를 받아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된 문화계 논쟁이 정치혁명으로 전환한 시점부터다. 1966년 5월 16일, 마오는 <5·16통지>를 발표해 천보다(陳伯達)를 조장으로 하는 ‘문혁소조’를 결성하고, 각 당 수준에 침투해 있는 부르주아 대변인들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촉구했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막이 올랐다. 이후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문혁 16조’)이 발표되어 문혁의 대상과 방식, 목표를 설정한다. 이러한 마오의 부름에 제일 먼저 반응한 집단은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혈통론’에 입각해 지식인을 박해하거나 출신이 좋지 않은 동료 학생을 공격한 보황파(保皇派) 홍위병과 이들에 반대해 급진적 마오주의에 반응한 조반파(造反派) 홍위병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마오가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주자파의 괴수로 지목되었던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이 자기비판을 수행하면서 첫 번째 국면이 종료된다.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부분이 바로 이 시기다.
두 번째 시기는 문혁이 노동자에게까지 확대되고 급기야 지역의 당 권력기관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奪權) 단계가 되는 1967년 이후의 시기다. 대표적으로 상하이에서 조반조직들이 시당 위원회를 무너트리는 ‘1월 혁명’이 일어나고 파리코뮌의 원칙에 따라 ‘상하이 인민공사’가 공식 선포된다. 하지만 마오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혁명조직 대표, 당 간부, 군대로 구성되는 ‘혁명위원회’를 주장한다. 그러나 인민공사의 불허는 ‘생산자 자치정부’ ‘대중의 민주적 지배기관’이라는 문혁이 표명한 대의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문혁의 이상이 한풀 꺾이는 과정에서 마오는 린뱌오(林彪)가 이끄는 인민해방군에게 ‘혁명적 좌파’를 지지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때부터 군대와 조반조직들은 서로 뒤엉켜 무력 충돌을 반복하게 된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우한에서 일어났다. 조반조직을 탄압하던 우한의 군사령관인 천짜이오(陳再道)는 중재를 위해 파견된 문화혁명소조원을 납치해 구타했다. 장칭(江青)은 이에 대항하여 홍위병들에게 “논쟁으로 반대편을 공격하고 무력으로 자기편을 보호하라”(文攻武衛)고 말하면서 무장투쟁에 기름을 끼얹는다. (물론 장칭의 발언은 “당면한 문혁의 주요 문제는 좌파의 무장”이라는 마오의 입장을 토대로 한 것이다.) 우한 사건으로 군대 역시 일사분란한 통일체가 아니었음이 드러나고, 이후 무장투쟁이 격화되면서 이대로 두었다간 중국에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져갔다.
결국 마오는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했고, 이제 문혁은 세 번째 시기에 접어든다. 1967년 9월 5일, 마오는 군대를 통해 질서를 회복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대중조직에서 무기를 회수한다. 문혁의 슬로건과 투쟁구호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지만 이제 그 대상은 당관료가 아니라 ‘극좌’ 음모가를 향했다. 이들의 실체가 조반조직 내에 분열을 획책하고 폭력투쟁을 선동한 ‘반혁명 극우분자’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문혁소조원이 이러한 논리로 숙청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보다와 린뱌오, 종국에는 사인방까지 똑같은 논리로 숙청당한다.) 실제로 1968년 여름 급진주의자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문혁 기간 중 가장 많은 인명이 살상된다. 1968~69년에는 ‘계급대오 정화운동’을 통해 기존의 당간부가 복권된다. 1969년 4월 제9차 당대회에서는 문혁의 “위대한 승리”를 찬양했고, 문혁은 ‘당의 공고화’가 곧 문혁의 목표였다는 괴이한 정치 보고를 끝으로 사실상 종료된다.
이렇게 대중조직이 중심이 된 문혁은 1966년부터 1969년까지 3년의 세월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지만 당권을 둘러싼 권력투쟁 과정에서 문혁의 구호가 부활하고 여진이 계속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마오의 공식 후계자였던 린뱌오가 실각한 이후 사인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 덩샤오핑을 비판한 비등반우(批鄧反右) 운동을 포함해 마오가 사망하고 사인방이 숙청당하는 1976년까지를 10년에 걸친 문화혁명 시대로 보겠다.
아래에서는 네 가지 쟁점을 다루고자 한다. 첫째,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운동은 있을 수 없다’라는 레닌의 말처럼, 문화‘혁명’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문혁의 이론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문혁은 유토피아를 꿈꿨던 대약진운동에서 이어지는 마오주의 혁명의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는가? 둘째, 문혁의 전 과정에서 보였던 마오의 모순적인 행동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다. 문혁에서 마오의 역할은 무엇이고, 실제 ‘주인공’은 누구라 할 수 있는가? 셋째, 문화혁명은 중국에서 일어난 특수한 문제일까? 중국혁명과 러시아혁명과의 비교를 통해 ‘문화’혁명의 의미를 더욱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마이스너의 책에서는 크게 강조되지 않았지만 문혁을 평가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는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보충해보고자 한다.
쟁점1. 문화혁명에는 혁명적인 이론이 존재했나?
마이스너는 문혁이 혼란스럽고 파괴적인 양상으로 흘렀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계급이론에 대한 혼란이라고 보았다. 마이스너는 문혁 당시 세 가지 계급분류의 입장이 있었다고 보는데, 각각 보수적, 혁명적, 개량적 입장으로 평가한다.
먼저 기존에 있었던 공식적인 입장은 사유재산의 소유 여부로 계급을 판단하는 ‘보수적’ 계급이론이었다. 국유화와 집단화가 달성된 소련에서 계급의 소멸을 주장했던 것처럼, 중국 역시 같은 의미로 1956년 제8차 당대회에서 계급투쟁의 종료와 사회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다. 물론 사회에 반혁명, 부르주아 잔당이나 그들의 자손은 남아있겠지만 이는 부차적이며, 큰 틀에서는 계급이 소멸한 사회라는 것이다.
반면 마오는 사회주의 사회에도 계급투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보수화된 당관료 집단이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이며 새로운 착취계급이 되었다는 함의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사회의 불안을 일으킬 정도로 ‘혁명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었다. 당관료 전체가 착취계급이라면, 당의 지도력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마오는 점차 개인의 경제적 또는 정치적 지위가 아니라, 개인의 정치적 행동과 입장을 중심으로 계급을 사고하게 된다. 하지만 이 같은 기준은 정적을 ‘계급의 적’으로 분류하는 데 자의적으로 이용되기 쉬웠다. 마이스너는 이러한 계급이론을 ‘개량적’이라 부른다.
이러한 세 층위의 계급이론이 공존하게 되면서 문혁은 혼돈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각각의 입장에 따라 ‘계급의 적’을 다르게 정의하고 공격할 수 있는 근거가 된 것이다. 당관료와 보황파는 ‘보수적’ 관점에서 지주, 반동분자와 그 후예를 공격했고, 급진적 조반파는 ‘혁명적’ 관점에서 당관료와 특권계층을 비판했고, 마오는 ‘개량적’ 관점을 가지고 당내 주자파를 숙청했다. 이처럼 상충하는 문혁의 계급이론이 문혁이 파괴적으로 흐르는 데 영향을 끼쳤다는 마이스너의 지적은 핵심을 꿰뚫고 있다.
계급은 개개인이 담지하는 것이 아닌 생산관계에서 발현되는 ‘효과’로 보아야 한다. 잉여가치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현상이나 자본편향적인 기술진보 자체가 부르주아의 실천이며, 이에 대당하여 생산자 자율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이 프롤레타리아의 실천이다. 제도와 사회구조에 대한 고찰 없이 개인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계급성을 따져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적’ ‘혁명적’ ‘개량적’, 어떤 계급이론을 따랐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문혁 시기 모든 세력은 계급을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나타내고 실천하는 것으로 보았다. 급진적인 조반파 역시도 현재의 당관료를 상대로 탈권하기 위한 실천을 했을 뿐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보수적’ 계급이론이 우위를 점하기 쉬운 구조를 형성했다. 계급성을 잣대로 상대를 탄핵하는 상황에서 대중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빠른 물질적 증거는 바로 당안(檔案)이었기 때문이다. 당안은 본인이나 부모의 출신, 과거사 문제 등 정치적 행위에 대한 신상기록부였는데, 이른바 흑색당안을 가진 이들을 차별하는 사실상 신분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상황에 따라서 상당히 자의적으로 흐를 수 있는 ‘개량적’ 계급이론에 입각하더라도 당안은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었다. 문혁의 사실상 종료 국면에 진행되었던 계급대오 정화운동 역시 당안에 따라 계급성을 판단했다. 따라서 문혁에는 적확한 계급이론이 확립되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신분제로 후퇴한 ‘보수적’ 계급이론이 성행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문화대혁명의 공식 혁명이론인 ‘계속혁명론’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이스너는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은 연속적인 과정이었다고 설명한다. 즉, 대약진운동의 근거였던 부단혁명론과 문화혁명의 계속혁명론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둘 다 마오의 급진적 유토피아주의의 발흥인데, 대약진운동이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향을 추구한 긍정적인 ‘유토피아’적 시도였다면, 문화혁명은 옛 전통의 파괴라는 부정적 측면의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농촌의 경우 문혁의 경험은 실질적으로는 대약진운동으로의 회귀였다. 농촌에 의료와 교육 자원을 의식적으로 배분하고자 했던 대약진운동 시기에 성행한 여러 제도가 문혁 시기에 부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단혁명론은 시기별 수행과제에 따라 혁명의 범위와 단계를 얘기하는 데 반해, 계속혁명론은 조반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추상적인 주장이다. 또한 대약진운동에는 소련식 중화학 공업화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농업과 경공업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경제이론이 있었던 반면, 문화혁명에는 특정한 경제이론이 없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대약진운동의 이론이 현실에서 부작용이 컸고 옳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평가하고 논쟁할 이론이 있는 데 반해 문화혁명의 이론적 혁신은 모호하다.
린뱌오와 천보다를 숙청한 이후 사인방을 중심으로 푸단대학 경제학연구소와 함께 계속혁명론의 근거를 보충하려는 이론적인 연구가 진행된다. 그 결과물이 바로 문화혁명의 경제학 교과서인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인데, 첫 번째 원고의 내용은 소련의 『경제학 교과서』와 본질적으로 동일했으며, 최종 원고에 이르러서도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생산이 직접적 사회적 생산임에도 왜 가치를 생산하느냐는 논리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 리차드 레비는 사인방의 이론적 무능력에 대해 “훌륭한 질문과 서투른 대답”이라고 평한 바 있다.
발리바르는 「마오: 스탈린주의의 내재적 비판?」에서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마오는 문화혁명기 이전이라고 말한다. 그는 문화혁명기의 마오는 “조반유리라는 혁명적 실천의 무조건적 권리만을 제외하고는 이론화를 중단한 채 수수께끼 같고 근본적으로 양면적인 지령들에 만족하는 듯” 보인다고 지적한다. 윤소영은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Ⅱ』,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Ⅲ』에서 문혁시기에는 반이론주의, 반지식인주의가 만연했으며, 따라서 대약진운동보다는 이데올로기 투쟁에 가까웠던 반우파투쟁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또한, 부단혁명론은 인민 내부의 비적대적 모순에 주목하는 반면, 계속혁명론은 주자파 타도라는 적대적 모순에 주목한다는 차이점도 지적한다. 더불어 “사인방은 홍위병의 혁명적 반란(造反)과 우파의 반혁명적 난동(翻天)을 구별”하지만 실상은 구분되지 않으며,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인간해방과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혁명이 폭력을 정당화하지는 않으므로, 홍위병의 반란은 우파와 마찬가지로 반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평가를 고려했을 때, 문혁의 이론인 계속혁명론은 그 토대가 빈약하며 혁명적 이론이라 부르기 어렵다.
쟁점2. 문화혁명에서 마오의 역할은 무엇인가?
문화혁명의 배경에는 당내 주자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라는 마오의 의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마이스너 역시 문혁의 주도자는 마오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비극의 주된 책임은 마오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문혁 시기 폭발한 대중운동 역시도 마오의 의도에 따라 움직인 것일까?
마오는 “사령부를 포격하라”라는 지령을 내렸고, 홍위병을 천안문 광장에서 친히 사열하면서 활동의 장을 열어주었으며, 조반운동을 전국적으로 융성하게 했다. 하지만 마오 역시 이후 벌어진 대파괴와 혼란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홍위병을 정치무대에 불러들이기는 쉬웠지만 해산시키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마오의 ‘혁명적’ 계급이론과 계속혁명을 끝까지 밀고 나간 성무련(후난성 프롤레타리아계급혁명 조반파 대연합위원회) 같은 급진적인 조직은 당 국가기구를 모두 파괴하고 ‘중국인민공사’를 건설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중운동이 이처럼 폭발적이고 자가발전한 이유로 마이스너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 언급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관료의 특권에 대한 폭넓은 대중적인 불만이 쌓여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 반우파투쟁에서 핍박받은 사람들, 대기근 시기 농촌으로 하방 간 젊은 청년들, 국유기업 노동자에 비해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던 계약공·임시공처럼 관료주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각 지역의 대중이 조반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문혁 시기의 혼란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집단과 불이익을 받았던 집단 사이의 충돌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혁 16조>는 문혁의 방법으로 비폭력을 설파했지만, 이처럼 사회적 이해관계가 결부되면서 대중투쟁은 폭력적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보수파에서 급진 조반파까지 모든 세력이 마오의 (“지령에 따라”가 아니라) “권위를 빌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거나 소원 풀이를 원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보인 마오의 모순적인 행보 역시 대중운동이 폭력적으로 진화하는 데 큰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오는 <문혁 16조>의 이상에 따라 코뮌을 결성한 상하이의 탈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좌파를 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군에게 결과적으로 좌파를 학살하도록 지시했다. 대중조직이 무기를 가지고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눌 수 있게끔 만든 것도 마오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다. 광둥성에서 가장 먼저 발생한 조반파 총기 탈취 사건에 대해, 마오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보았고 오히려 좌파가 무장력에서 열세이기 때문에 ‘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밑바탕에 깔린 사회적 불만이 대중운동을 키운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운동이 폭력적으로 전개돼 통제 불능의 사태까지 치닫게 된 데에는 마오의 행동이 결정적이었다. 결국 반란을 일으킬 권리를 인민에게 부여한 것도 마오이며 철회한 것도 마오였다.
그렇다면 왜 마오는 문혁시기 이러한 모순적인 행보를 보였던 것일까? 마오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 부분을 추측하기 위해서는 마오와 천보다의 관계를 통해 문혁을 설명한 레이먼드 와일리의 논의가 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 와일리는 마오와 천보다가 문혁을 함께 시작했지만 결국 갈라지는 상황에 대해 둘의 성향 차이를 지적한다. 천보다가 주도해 작성한 <문혁 16조>의 이상에 따라 결성된 상하이 코뮌을 마오가 거부한 것은, 와일리가 보기에 마오는 이상주의적인 천보다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유학 후 베이징대에서 강의했던 천보다는 마오보다 더 학구적이었으며 순수한 지성주의를 더 중시한 이상주의자였다. 반면, 마오는 천보다보다 실용적인 활동가였다. 따라서 천보다가 제안한 인민공사 운동을 대약진운동 당시 마오는 열렬히 받아들였지만, 문혁에서 마오는 생각을 바꿔버릴 수 있었다. 마오에게 중요했던 것은 현실의 상황에 적합하냐였지 이론적 올바름과 이상의 추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마오와 천보다 사이에 문혁의 폭력사태를 둘러싸고 이견이 있었고, 그 때문에 마오의 행동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했던 것 아니냐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1967년 여름 우한 사건 이후 문혁의 폭력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마오와 천보다 사이의 균열은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이때 문혁소조에서는 학생과 노동자의 ‘정의로운’ 폭력을 옹호하는 사인방과 시종일관 폭력 행동 자체를 반대한 천보다가 대립하고 있었다. 마오는 처음으로 천보다를 공개적으로 비판한다. 사실상 문공무위를 발언한 장칭, 즉 사인방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게다가 문혁에 대한 군의 질서회복 과정에서도 사인방은 모든 것을 반혁명 세력의 음모로 몰아붙이면서 강력한 무력진압을 지지한다. 천보다는 학생과 노동자의 폭력 행동에 반대했던 것처럼, 이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것에도 반대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실권은 빼앗긴 상태였다. 문혁소조 내에서 사인방이 부상하고 조장이었던 천보다가 숙청된 상황은 마오의 의중이 어디로 기울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혁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천보다의 생각에 대해 마오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천보다는 1969년 9차 당대회에서 마오의 후계자로 공식 확정된 린뱌오와 한배를 타게 된다. 린뱌오와 천보다는 점차 문혁의 정치투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마오 시대 이후를 대비하여 국가주석 부활과 마오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천재” 이론을 주장했고, 천보다는 전당대회에서 “광범위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성적인 옹호 연설을 하기도 한다. 마오는 대중조직에서 무기는 회수했지만, 문혁 자체를 끝내고 싶어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당 지도력과 통제권이 린뱌오에게 벌써 넘어가고 있는 상황을 바라보며 이들을 숙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천보다는 1971년에 극좌분자로 숙청당하고, 이후 “린뱌오 반당파, 반공주의자, 트로츠키파, 반역자, 수정주의자”로 판결 받는다.
문혁이 후기로 가면서 문혁소조 내에서 폭력사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또 문혁을 지속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천보다와 사인방 간 노선 갈등이 있었고 마오는 결국 사인방을 지지했다. 이쯤 되면 문혁의 진정한 주인공은 마오와 천보다가 아니라, 마오와 사인방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혁 10년의 결과 당관료의 지배는 원상회복되었다. 오히려 중하층 관료의 수는 전체적으로 증가했으며 대중은 정치적 허무주의에 빠졌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바로 마오 숭배가 극단화된 것이다. 특히, 도시에서 문혁이 시들해지면서 농촌을 중심으로 마오 숭배가 광범위하게 확산한다. 관료제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 문혁은 결국 그보다도 더 퇴행한 개인숭배의 극단화, 즉 인치(人治)로 귀결된 것처럼 보였다. 레닌은 「당 숙청」(1921)이라는 글에서 당이 관료화된 인자를 숙청(당적 박탈)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비당원 프롤레타리아나 농민에게 의견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료에 대한 대중의 감시와 견제를 어떻게 구조화할 것인가? 마오는 지도자 일인과 대중의 직접 소통의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인민주의적 통치로 흐르기 쉬웠다.
쟁점3. 문화혁명의 방향, 옛 문화의 계승인가 파괴인가?
사실 문화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는 레닌에서 기원한다. 그런데 실제 러시아에서 ‘문화혁명’을 일으킨 것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의 문혁은 중국과 비교해 덜 알려졌지만, 중국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존재한다. 마이스너는 「중국과 러시아의 우상파괴와 문화혁명」이라는 글에서 레닌과 마오의 문화혁명에 대한 차이를 강조하고 있고, 피츠패트릭은 「계급전쟁으로서 문화혁명」에서 스탈린에 이르러 레닌의 “문화혁명”이 의미가 달라졌다는 점을 짚으며 스탈린의 문혁을 설명한다. 이와 같은 내용을 종합해 마오와 스탈린의 문화혁명에 대해서 알아보자. 도대체 러시아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은 무엇이고 중국과 어떤 점이 유사했던 것일까?
그에 앞서, 레닌이 생각한 문화혁명의 상이 마오와 스탈린과는 확연히 달랐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레닌은 1924년 임종 직전에 러시아혁명이 타락한 것은 러시아의 후진성 때문이라고 개탄했다. 레닌은 10월 혁명 직후,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에게 습관의 힘이 가장 무서운 세력이다”며 문화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신경제정책 시기에는 사회주의로의 장구한 이행기에 필요한 것으로 문화혁명과 협동조합을 제기한다.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할 수 있게 하려면 노동자도 능력이 계발되어야 하기 때문인데, 이를 위해 기존 부르주아 문화의 계승, 발전을 통해 더 나은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못하면, (문화 수준이 낮은) 정복자가 (문화 수준이 높은) 피정복자의 문화에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스탈린은 부르주아 문화와 대립하는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사고했다. 문화 영역에서도 부르주아적 요소를 말살하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노동자 대중이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통해 부르주아 전문가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오가 생각하는 문화혁명 역시 스탈린의 문화혁명과 유사했다.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부르주아) 문화를 대중 투쟁을 통해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마오는 레닌과 정반대로, 후진성의 이점을 주장하며 ‘고급문화’가 부재한 현실을 찬양했다. “역사 속에서 수준 높은 문화를 영위하는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하는 자는 항상 낮은 수준의 문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마오의 발언과 “교양 있는 착취자나 정신 귀족이 될 바에야 교양 없는 노동자가 되겠다”는 장춘차오의 발언이 이를 잘 드러낸다.
이제 마오의 문화혁명과 스탈린의 문화혁명을 비교해 보자. 스탈린은 1928년부터 강제 몰수를 통한 농업집단화를 추진하기 위해 부농을 향한 계급전쟁을 선포한다. 부르주아 전문가와의 계급동맹적 성격이 있었던 기존의 문화혁명 개념도 ‘계급전쟁’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뀐다. 이러한 캠페인을 통해 스탈린은 부르주아 전문가, 정치적 반대파를 계급의 적으로 몰아 숙청하고 권력을 독점할 수 있게 된다. 마오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로 몰아세웠던 것과 비슷하게, 스탈린은 고참 볼셰비키를 계급의 적으로 고발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스탈린의 정적인 부하린은 지식인층과 가까웠기에, 학술 권력을 비판하는 문화혁명의 방식을 통해 명예를 실추시키기 쉬웠다. 게다가 신경제정책을 지지하는 ‘우파’는 부르주아 지식인, 전문가의 특권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였고 다수의 평당원은 이를 싫어했다. 일반적인 대중의 정서는 지식인을 계급의 적으로 취급하는 것이었고 이는 스탈린의 문화혁명에 근간이 된다.
이처럼 중국의 문화혁명과 비슷하게 스탈린의 문화혁명도 대중적 기반이 존재했다. 특히 청년조직이 대중동원을 주도하면서 문혁을 급진화했다는 측면이 공통점이다. 중국에 홍위병이 있다면 소련에는 공산주의청년동맹(Komsomol)이 있었는데, 혁명 이후에 태어난 청년세대는 혁명에 대한 낭만적인 정서가 있었고, 동시에 자신이 혁명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좌절했다. 이러한 감정은 신분상승욕구로 분출한다. 또한 청년세대는 다른 세대에 비해 과거 행적이 투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욱 전투적으로 문혁에 임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따라서 중국과 러시아 모두 학교가 괴롭힘, 해고와 같은 ‘사회적’ 숙청의 일차적 장소가 된다. 이들에 더해 관료에 대한 특권과 불평등에 분노한 비숙련노동자가 문화혁명의 주요한 대중적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자기 이해라는 자체적 동기도 있었던 것인데, 실제로 러시아에서는 문혁 기간에 노동자의 신분상승이 일어난다. 노동자, 빈농의 자녀가 고등교육을 받아 행정 및 관리직으로 대규모 계층 이동을 했고, 이들은 공산주의 사회의 새로운 엘리트 ‘비드비젠치’(Vydvizhentsy)가 된다. 비드비젠치는 1940년대 하위 당관료의 주축이자 1950~60년대 최고위 지도부인 “브레즈네프 세대”로 성장한다. 중국에서도 문혁 시기에 고등교육을 받거나, 당원이 되거나, 관리자가 되는 방식으로 신분 상승을 이뤄낸 수백만의 젊은이가 있었다. 상징적인 인물이 바로 상하이 노동자 출신에서 부주석까지 된 왕훙원이다.
스탈린과 마오의 문혁 결과, 기존 문화와 지식의 권위를 반대하는 반지식인주의가 사회에 만연하게 된다. 중국에서 문화혁명 10년의 세월 동안 초기부터 후기까지 꾸준하게 공격받은 집단은 지식인이 유일했다. 지식인은 ‘부르주아’를 색출하던 홍위병의 표적이 되었고, 정치적 공격의 화살을 피해 가려는 당관료로부터도 공격받았다. 물리적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지식인은 “아홉 번째 냄새나는 놈”(臭老九)이라는 최하층 취급을 받으며, 집을 약탈당하고, ‘학습과 비판’ 대회에 수시로 불러나가 수모를 당해야 했다. 마이스너는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전문 분야에만 파고든다는 ‘백전’(白專)의 꼬리표가 붙을까 봐, 오늘날의 연구인력은 더는 책을 읽지 않는다”며 문혁 10년을 ‘반계몽의 시대’라고 평가한다.
쟁점4. 국제정세는 문화혁명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마이스너는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으로 야기된 위협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위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며 문혁이 발발한 배경에 대해 중국의 내적 원인을 강조해 설명한다. 그래서 다소 국제정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이에 대해 스탈린이 죽은 뒤 전개되는 중소분쟁이 중국에 ‘수정주의 반대, 변절 방지’를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위기감을 조성했고 이는 문혁의 동력이 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게다가 마오는 스탈린을 대신하여 자신이 국제 혁명을 이끌 적임자라고 생각해 타국에 혁명을 수출하고 싶어 했으며 이는 린뱌오의 인민전쟁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분석의 요점이다. 아래에서 그 내용을 살펴보면서 문화혁명의 발발 배경에 대해 보충하고자 한다.
아마코 사토시는 『중화인민공화국사』(2016)에서 문혁이 단지 국내의 권력 투쟁만이 아니라 중소분쟁을 거치며 중국이 강한 고립감과 위기의식을 느껴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중국은 미국, 소련과의 직접 전쟁을 상정해 1964년 10월에는 자력으로 원폭 실험도 성공시켰으며, 연해와 대도시에 집중해 있던 군사 시설과 중공업 기지를 내륙 오지의 제3선으로 이전해 대규모 후방 기지를 건설했다. 물론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했는데, 1966년부터 시작된 5개년 계획에서 기본건설 투자 총액의 60%가 국방 건설에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1965년 베트남 전쟁이 분기점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응은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의 중립적인 국가 사이에서 중국을 더욱 고립시켰다. 대표적으로, 1966년 3월 오랜 맹우였던 일본 공산당과의 관계는 소련에 대한 평가, 베트남 지원 방식, 평화적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같은 쟁점을 둘러싸고 결렬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사회주의를 표방한 국가 중 알바니아를 제외하고 모두 반중국 입장으로 돌아서고, 아시아에서 가장 친밀했던 인도네시아와는 1965년 9·30 사건으로 국교가 단절된다.
바바 기미히코는 『세계사 속의 중국 문화대혁명』(2020)에서 문혁을 일련의 급격한 국제정세의 악화 속에서 마오가 선택했던 행동이라고 설명하면서, 1965년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9·30 사건을 중심으로 이를 상세하게 파고든다. 바바 기미히코의 설명에 따르면, 사회주의 진영에 속하지 않은 국가인 인도네시아는 중소 대립이 격화되는 와중에도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던 나라였다. 따라서 중국이 구상한 미국과 소련을 배제한 ‘중간지대론’의 핵심 국가이며, 1965년에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AA 회의) 개최를 함께 논의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 공산당과의 결별, 2차 AA 회의 무산 등 제3세력을 규합하려는 중국의 야망은 점차 무너지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 중심으로 군내 반란을 일으키다 실패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9·30 쿠데타 계획을 적어도 마오가 사전에 인지했고, 더 나아가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부추겼다는 진술이 존재한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쿠데타를 수습한 수하르토 장군을 중심으로 반공노선을 견지하게 되며 중국과 단교한다. 대만은 이 틈을 노려 인도네시아에 관여정책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문혁은 마오가 채택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선택지였다. 이제 중국은 외교노선에 기대를 걸기보다 자력갱생을 관철하면서 우익과의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또한 중국은 ‘변절’한 소련을 대신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를 자임한다. 따라서, 마오의 중간지대론은 공산당, 사회주의 국가의 국제연대가 아니라 세계 각국의 인민 간 국제연대라는 내용으로 변화한다. 이와 함께 린뱌오는 아시아-아프리카 제3세계의 인민이 제국주의 세력을 뒤집어엎으려는 세계적 규모의 계급투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인민전쟁론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무장 투쟁 노선은 전 세계 신좌파 운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련은 자본주의 진영과의 평화공존을 추구하고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 진영에 속한 서방 공산당들이 의회민주주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을 허용했으나, 각국의 신좌파 급진운동은 이에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인민전쟁론은 이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실제로 『마오쩌둥 어록』은 1966년 10월부터 다음 해 11월까지 148군데의 국가 및 지구(地區)에 25종의 언어로 발행된다.
두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1970년대에 전 세계 좌파를 아연실색하게 했던 미중수교 국면이 발생한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은 점차 베트남에서 발을 빼려하는데, 중국으로서는 고립 국면을 타개할 방안이 생긴 셈이었고, 이 틈에 빠르게 태세를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중국은 멀리 있는 미국보다 가까이에서 중국과 무력충돌까지 불사하는 소련에 실질적인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중소분쟁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두 개의 강대국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던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가능해지자 곧바로 국제적인 고립 국면을 수습하기로 한다. 1969년 닉슨 대통령이 새로 당선되면서 이른바 ‘파키스탄 루트’나 ‘폴란드 루트’를 통하여 중국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동향이 감지되고, 이에 발맞춰 중국은 소련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 강도는 누그러트리면서 국면 전환을 꾀했다. 문혁 자체의 마무리가 필요했던 국내 상황도 있겠지만, 고립 상황을 타개할 묘책이 생겨나자 문혁을 마무리할 동기가 더욱 커진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중국특색’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6부 덩샤오핑과 중국 자본주의의 기원: 1976~1998년)
1976년을 끝으로 저우언라이, 주더, 마오쩌둥 등 1세대 중국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후 중국을 이끌어 간 것은 바로 덩샤오핑이었다. 보통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비견해 제2의 혁명이라고 얘기한다. 그 정도로 마오의 노선을 획기적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우선 덩샤오핑의 세력 기반은 무엇이고, 덩샤오핑이 어떤 과정을 통해 집권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1976년 직후의 상황을 살펴보자.
마오의 후계 구도를 둘러싼 암투 결과 덩샤오핑이 승자로 부상하는데,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1976년 4월 제1차 천안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덩샤오핑에 대한 대중의 지지와 사인방에 대한 대중의 외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윽고 9월 마오가 사망하자 사인방이 숙청당한다. 어부지리로 마오의 뒤를 이은 화궈펑은 문혁 기간 이득을 본 오합지졸 하층 간부가 정치적 자산이었던 반면, 덩샤오핑은 군대 고위 간부, 고위 관료, 노간부,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다. 문혁 기간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과 환멸에 찬 홍위병도 덩샤오핑에게 기대를 걸었다. 즉, 화궈펑의 몰락과 덩샤오핑의 집권은 문혁의 역풍이라고 볼 수 있다.
덩샤오핑은 ‘극좌’ 세력을 숙청하면서 자기 부하들을 당의 수뇌부에 앉히며 전권을 쥐게 된다. 하지만 이 작업은 세심하게 이뤄질 수밖에 없었는데, 마오에 대한 평가 때문이었다. 덩샤오핑은 ‘극좌적 오류’로 인한 문혁은 비판하되(몇 달간 사인방 재판을 텔레비전으로 방송했다), 마오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즉 마오와 사인방을 구별했는데, ‘정치적 잘못’과 ‘범죄행위’는 다른 차원이라는 논리였다. 대단원은 <인민공화국 성립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1981)다. “중국혁명에 대한 마오의 공적은 그의 과실을 훨씬 능가”하기에 마오의 70%는 옳았고 30%만 잘못되었다는 내용의 결의였다. 마오를 비난하는 것은 국가의 정치적 정당성뿐 아니라 혁명의 도덕적 정당성에도 의문을 던지는 행위가 될 수 있었으므로 마오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한편, 권력을 공고히 한 이후 덩샤오핑은 개혁정책을 이끌어간다. 흔히 덩샤오핑 시대를 설명하는 두 개의 키워드가 바로 “개혁개방” 정책과 “천안문 사건”이다. 마이스너는 중국의 사회 성격을 관료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 두 사건을 설명한다. 마이스너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중국은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뤄냈지만 매판관료가 부활한 자본주의사회가 되었을 뿐이며, 그 와중에 공산당 유일지도 체제를 유지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개혁개방 정책은 시간이 지나면서 굴절된다. 초기 개혁개방 정책의 주된 방향은 중공업에 편향된 산업투자를 농업과 경공업으로 돌리는 것과 함께, 기업과 농촌 가구에 자율성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경공업과 농업을 위해 중공업과 건설 부문에 대한 투자를 대폭 삭감하게 된다. 그 결과 제6차 5개년 계획 기간 중(1981~85) 농업 11.5%, 경공업 12%, 중공업 9.3%의 성장률을 달성한다. 농촌에서는 인민공사가 폐지되고 ‘도급경영책임제’가 정착하는데, 이제 각 농가는 생산대 소유의 ‘집단’토지를 일부 사용해 생산대에 납품하는 것을 제외하고 잉여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서, 농촌의 획기적인 변화는 ‘향진기업’에서 왔다. 기존의 인민공사가 운영하던 비국유기업이 사실상 민간자본을 통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향진기업 지원책을 펼쳐 농가소득 향상과 경공업 발전을 꾀했다. 향진기업은 연평균 30%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개혁개방 시기를 이끌어갔다. 도시에서는 국유기업을 자본주의적으로 구조조정 하는 정책을 꾀했다. 정부는 경제적 결정을 각 기업에 위임하는 탈집중화 정책을 취해 기업의 자율권을 확대했는데, 이는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공장은 파산하거나 문을 닫도록 내버려 둔다는 의미였다. 전반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약화하고 민간의 자율성을 늘리는 방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1980년 중반부터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는데, 1987년에는 주요 도시의 물가가 30%나 폭등한다. 가격통제를 시행해 왔던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격 자유화 조치를 하게 되면 급격한 물가상승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동유럽에서도 겪었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재정적자로 인해 늘어난 화폐 발행, 인플레이션을 계기로 활동하는 투기세력, 정부가 취한 긴축정책의 역효과로 인해 인플레이션은 더욱 악화한다.
인플레이션은 향진기업에 특히 타격을 입혔고, 증가한 실업과 예산 부족에 골머리를 앓던 정부는 ‘재조절’이라는 정책으로 대응한다. 따라서 도시의 공업에 ‘명령경제’를 다시 확립하고 중앙계획체제로 복귀하게 된다. 장쩌민 시대에는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라”(抓大放小)라는 원칙에 따라 대형 국유기업은 효율성 증대에 집중하고 중소형 국유기업은 합병, 매각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게 된다. 소위 민영화 정책이다. 그러나 그 뒤로 점차 국유기업 구조조정 정책은 민간기업을 육성하는 방향이 아니라 기존의 국유기업의 지배력 증대로 이어진다. 개혁개방 초기에 주어진 농가와 기업의 자율성은 1990~2000년대를 지나면서 점차 사라지고 ‘자본주의적’ 국유기업이 주도하는 경제체제로 재편된다.
관료자본주의가 부활했고 사회주의는 실종되었다. 당관료는 비어있던 중국 부르주아의 자리를 차지했다. 1990년대가 되면 대외 무역과 외국인 투자가 폭발하게 되는데, 공산당이 보장해주는 ‘노동평화’와 중국의 내륙시장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외국인 투자자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외국회사와 국가무역기구 사이의 거래를 성사해 주고 거액의 수수료를 받으며 수출입 회사를 차린 이들이 바로 덩샤오핑과 자오쯔양 총리로 대표되는 공산당 최고 지도자들의 자녀였다. 이들은 ‘황태자와 공주’로 불리며 부정 축재와 부패의 뚜렷한 상징이 되었다. 농촌도 마찬가지였는데, 농촌의 가장 좋은 토지와 이윤이 많이 남는 사업을 운영할 권리는 당간부와 그들의 친척, 친구에게 넘어갔다. 관료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해 분투한 반세기 중국혁명의 결과가 도로 아미타불, 즉 관료자본주의의 부활로 귀결된 것이다.
자본주의적 시장개혁을 지향하고, 자본가의 역할을 관료가 대신하는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중국 정부가 내놓은 대답은 ‘그렇다’였다. 중국은 사회주의 사회지만 경제적 후진성으로 인해 아직 미성숙한 사회주의 사회이며, 완전히 발전한 사회주의는 한 세기는 족히 걸릴 것이므로(덩샤오핑과 자오쯔양은 2050년, 장쩌민은 21세기 말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전까지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경제발전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마이스너가 보기에 이 논리는 마르크스주의의 외피를 걸친 일종의 경제결정론적 관념이었다. 게다가 1980년에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의 목적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회주의의 목표와 가치를 내셔널리즘적인 목적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깊게 파인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쇼비니즘적인 내셔널리즘이 사실상 중국 공산주의 국가의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마이스너는 평한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사실 덩샤오핑은 권좌에 오를 때만 하더라도 ‘사회주의 민주’와 ‘사회주의 법제’를 수호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개혁’은 정치적 민주화가 아니라 문혁으로 무너진 당의 조직규범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덩샤오핑이 이해하는 민주란 ‘문혁’에서 군중이 반란을 일으킨 광경일 따름이었기 때문에, 집권을 한 이후 덩샤오핑이 약속을 저버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1978년에 이루어진 1차 천안문 사건이 복권된 이후, 불가역적으로 민주화운동의 싹은 이미 트고 있었다. 정부는 민주화운동을 억압했고, 급기야 문혁시기 헌법에 명시된 4대 권리를 폐지했다. 그러나 당시 민주화운동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지는 못했고 1981년이 되자 자취를 감추게 된다. 얼마 뒤 1956~57년에 쌍백운동과 그 역전으로 반우파투쟁이 일어났던 비극의 역사가 반복된다.
1986년 봄이 되자, 백화정책 30주년을 맞아 덩샤오핑은 사상적 유연성을 권장하고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분위기를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학계에서도 혁명 이후의 중국 사회와 정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에 ‘소외’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활용되기에 이른다. 이윽고 1986년 12월 5일, 3천 명의 학생이 다가올 지방 대의원선거에서 실제적인 선택의 기회를 달라며 항의 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에 덩샤오핑은 ‘부르주아 자유화’에 반대하는 ‘반(反)정신오염 운동’을 벌이며 지식인을 겨냥한 마녀사냥을 또다시 반복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태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986~87년 학생시위 이후 당에서 제명되고 대학에서 해임된 팡리즈는 덩샤오핑에게 공개서한을 써 정치범에 대한 일반사면을 요구한다. 이를 계기로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지던 찰나, 1989년 4월 15일 민주화운동에 우호적이었던 후야오방(胡耀邦)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천안문 광장으로 수많은 학생이 쏟아져 나온다. 학생들은 후야오방의 죽음을 애도하며 집회,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관료의 부패와 족벌주의를 비난하며 시위를 전개한다.
고르바초프의 방중을 맞아 전 세계의 기자가 베이징에 모인 민감한 시기에 시위는 더욱 격렬해진다. 5월 17일에는 광장에 100만이 넘는 대오가 운집하게 되었고, 5월 중순에 접어들자 노동자가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진다. 사태가 노동자의 시위에 이르게 되자, 대응방식을 둘러싸고 공산당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당시 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은 협상을 원했으나 덩샤오핑은 모든 타협안을 거부하고 강경 대응을 지시한다. 마이스너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폴란드의 공포’ 즉 공산주의 국가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지식인의 ‘연대’형 동맹이 동유럽과 소련을 붕괴시켰다는 두려움이 지도부 사이에 만연했기 때문이다.
한편,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베이징대 학생대표 출신인 왕단(王丹)은 그러한 공포는 과장되었고, 오히려 당내 보수파가 정치적 이유로 타협을 거부하고 강경 대응을 강행했다고 본다. 학생운동의 요구가 타협이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었으며 철수하는 학생들을 향해 탱크가 돌진해 피해자가 발생했던 것을 봤을 때 광장 해산 시 불필요한 무력진압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결국 6월 3일 밤부터 살인적인 진압 작전이 이루어지고, 이후 1990년대 중국의 정치지형은 1980년대보다 훨씬 더 억압적으로 변하게 된다.
쟁점5. 개혁개방정책을 신민주주의의 부활이라고 볼 수 있는가?
마이스너가 보기에 개혁개방정책은 중국특색 ‘자본주의’일 따름이며, 시장정책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합리화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는 개혁개방과 신민주주의를 친화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흐름이 등장한다. 전편에서 소개한 이남주도 유사한 태도로 보이는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이 신민주주의를 폐기했던 마오의 급진주의를 해체했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개혁개방 초기 중공업에 편중되어 있던 산업정책을 농업과 경공업 우선 발전으로 전환하고, 민간기업과 국유기업의 공존을 추구하는 등 실제로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개혁개방정책은 신민주주의와 유사한 면모가 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봤듯이, 개혁개방 정책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실제 내용이 변하게 된다. 초기에는 민간의 자율성을 중시하며 향진기업을 육성했다면, 이후에는 점차 국유기업의 지배력을 향상하는 방향으로 경제정책이 전개된다. 현재 중국의 당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초기 개혁개방 정책이 보여주었던 개방적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즉, 개혁개방 초기에는 신민주주의의 부활이라고 볼만한 여지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시점부터 변화가 발생했던 것인지, 변화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해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편에서 강조한 것처럼 신민주주의 정책의 의의는 경제정책뿐만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에 동의하는 민주파 지식인을 포괄하는 계급동맹이고 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한 함의일 수 있다. 이는 다당제를 ‘실질적’으로 인정하고, 중국공산당의 권한을 분산하여 이를 통해 책임정치가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천안문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개혁개방 정책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혁개방 정책의 본래 방향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정치적 민주주의에 관한 조치가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혁개방 정책이 시간이 지나면서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부문에서 농민이나 중소사업가와 같은 민간 부문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양성하겠다는 계획과, 정치부문에서 민주화를 거부하고 공산당 지배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계획은 모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공한 민간 자본가가 정부의 계획과 투자지시에 반기를 들거나 안 따라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은 이러한 위험을 없애기 위해, 민간 자본가를 당으로 포섭하거나, 그게 어려우면 배제하길 반복했다. 덩샤오핑은 선부론(先富論)이라는 선성장 후분배론을 설파했는데, 그렇다면 누가 먼저 부유해질 것인가? 개혁개방과 당 독재의 결합은 결국 정치권력이 부의 재분배를 결정하는 양상이 되어버린다. 감시 기능을 하는 민주적 제도가 없는 조건에서 이런 양상은 자연히 만연한 사회적 불공정을 초래하게 된다. 결국 중국은 당관료와 결탁한 초민족 자본, 국유기업 주도의 경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국가의 강세, 민간의 약세’ 시대가 도래한다.
중국은 경제개방 정책과 권위주의 당 독재 체제가 양립이 가능하다며 ‘중국특색 민주주의’를 설파하지만,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면서 경제개방 정책보다 당독재 체제를 우선해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윤상우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과 발전모델 그 자체는 중국 지도부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며, 이는 중국공산당의 일당지배를 존속하고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종합하면, 개혁개방 초기 존재했던 긍정적인 요소들이 1989년 천안문 사건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억압 이후 사그라든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해볼 수 있다. 90년대 중국은 초고속 성장을 이루어 겉으로 봤을 때는 문제가 없던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 억압적인 분위기는 강화되었고 생산의 영역에서 민간의 주도력,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은 힘을 잃어갔다. 마이스너 역시 덩샤오핑이 왜 ‘진정한’ 사회주의적 해결을 고려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이렇게 답한다. 진정한 사회주의적 해결책은 생산자의 통제라는 정치적 민주화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는 공산당의 권력에 대한 직접적 도전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덩샤오핑이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산당 지배체제 유지라는 목표를 최우선으로 두지 않았다면 중국에 다른 길의 발전이 가능했을 것이라 가정해 볼 수 있다. 왕단 역시, 1989년 민주화운동을 살인 진압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정치개혁을 이뤄냈다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부패가 오늘날처럼 중국의 시스템을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며 정부와 시민 사회 간 대화의 선례를 열었을 것이라 평가한다. 또한, 오늘날 중국에서 수많은 사회적 모순이 최후에 격렬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주된 원인이 정부에 대한 인민의 불신이라며, 정치적 민주주의가 보장되었다면 이처럼 정부와 인민의 신뢰가 깨지지 않았을 것이라 개탄한다.
보충이 필요한 쟁점들
옌안 시기의 성과: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
이 서평을 시작하며 최근 시진핑의 부상과 강화되는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 중국혁명사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마오의 모순적인 측면을 언급하며 “어떤 시점에서부터 마오는 과거의 자신과 달라진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옌안 시기에 마오가 이뤘던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성과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는 마이스너가 소략하게 설명하기도 하고 필자와 가장 큰 쟁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어 보충이 필요하다.
마이스너는 마오의 옌안 시기 저작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마오식 변용이라는 특징이 ‘선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하게 나타나 있다고 평가한다. 마이스너가 생각하는 마오식 변용은 인민주의, 의지주의가 발현된 마르크스주의의 일탈이기 때문에, 마오식 변용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약진, 문혁 시기에 비해 옌안 시기는 다소 모호하다고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마이스너는 이 시기 마오의 독창적 개념은 오직 민족 부르주아와의 동맹을 주장하는 ‘인민민주독재’라는 개념을 새롭게 덧붙인 것뿐인데, 이를 분석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고 평가한다. 마이스너에게 이 시기는 농민중심이라는 이단적 혁명전략을 잉태한 채 정통 마르크스주의 목표를 견지한 모호한 시기였다. 그러나 마이스너가 주장하는 것처럼 마오가 단지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옌안 시기(1935~1945)의 마오에게는 ‘마르크스주의 중국화’라는 이론적 기여가 분명히 있었다.
1927년 대중적인 혁명이 실패하자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는 혁명의 앞길을 모색하며 중국 사회성격논쟁을 벌이게 된다. 마르크스주의가 옳다면 혁명은 왜 실패한 것일까? 중국이 아직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일까? 애초에 중국과 상황이 다른 외국에서 생겨난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려다 실패한 것이 아닐까? 이처럼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통해 중국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지, 중국에 적합한 혁명론은 무엇일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가 시작된다. 그 총결산은 마오의 ‘관료자본주의론’과 ‘신민주주의론’이라 할 수 있다. (레닌이 러시아를 군사적, 봉건적 제국주의라 분석하며 민주주의혁명론을 수립한 것이 일종의 ‘마르크스주의의 러시아화’인 것처럼) 마오는 중국을 매판적, 봉건적 국가독점자본주의(관료자본주의)로 분석하며 인민민주혁명론(신민주주의혁명론)을 수립한다.
우선 중국을 ‘관료자본주의’로 분석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중국사회성격에 대한 정통적 테제는 이미 존재했다. 바로 1928년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제출된 ‘반(半)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중국이 자본주의에 미달한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특수한 자본주의라는 것인지 그 의미가 모호했다. 따라서 이 ‘봉건성’을 둘러싸고 두 가지 주장이 가능한데, 중국의 봉건성을 자본주의에 미달하는 것으로 보아 자본주의가 되지 못한 사회로 보거나, 반대로 중국의 봉건성을 중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이라 분석할 수도 있다. 정통적 테제와 별도로 중국 사회를 아예 서구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이미 자본주의가 된 사회라고 분석하는 입장도 있었다.
세 가지 입장은 혁명의 당면과제에서 함의하는 바가 각각 달랐다. 중국이 아직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면, 현재 중국은 부르주아 혁명이 우선이고 사회주의 혁명은 시기상조가 된다. 반대로 중국이 이미 온전한 자본주의 사회라면, 도시 노동자만이 진정한 혁명의 주체라는 입장으로 연결된다. 사실 당시 중국이 서구와 다르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주장은 이미 실패한 전례도 있었고 중국의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얘기였다. 반면, 중국 자본주의 사회의 특수성을 분석하자는 입장이 바로 ‘관료자본주의론’이다. 마오의 이론비서 천보다는 “마르크스주의는 ‘죽어가는 교조주의’가 아니라 ‘살아있는 과학’이기 때문에 중국의 특수성과 역사적 상황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중국 사회를 4대가족을 대표로 하는 국민당 관료자본이 공권력을 가지고, 반식민지에 처한 현실을 악용해 외국에 국부를 팔아넘기면서 독점자본주의를 형성했다고 분석한다. 특히 항일전쟁을 거치며 이러한 매판적 성격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면 혁명과제인 민족해방 투쟁, 반봉건 투쟁, 반독점자본 투쟁이 하나로 연결되기 때문에, 매판자본가만 제외한 ‘신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계급동맹 전략을 통해 사회주의로 가는 출발점에 설 수 있다고 보았다.
신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가 주도하는 구민주주의 혁명과 달리, 반식민지와 항일전쟁이라는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동맹 범위를 훨씬 넓혀서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즉, 러시아혁명에서는 노동자, 농민, 소부르주아가 동맹을 맺은 걸로 충분했다면, 중국에서는 이에 더해 민족부르주아와 지식인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보다는 당시 중국 산업 조직의 주요 유형을 분석해 이들의 이익을 항일전쟁에 대한 태도와 연관시켜 동맹을 맺어야 하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을 세심하게 구분한다.
일본의 침략 이후 수많은 도시 출신 학자가 중국공산당의 포부에 동의하며 옌안으로 이주했을 정도로, 신민주주의론은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천보다는 쑨원의 기본적인 생각은 마르크스주의와 많은 부분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쑨원을 계승한다는 관점을 강조하며 정치적 정당성을 얻고자 했다. 그는 5·4운동 이래로 만연했던 반(反)전통적 시각과 달리, 중국의 전통을 계승해 더 나은 ‘현대적인 문화를 가진 중국’을 만들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해야 한다고 지식인을 설득했다. 이는 1930년대 중국 지식인 사이에서 증가하는 민족주의, 애국주의 정서를 자극했다. (한편, 옌안 시기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를 통해 반전통주의적인 전통을 극복했던 중국공산당이 문혁을 통해 다시 반전통주의로 회귀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옌안 시기 마오는 천보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중국 사회에 적합하게 도입함으로써 이론적 타당성을 확립할 수 있었고, 민족주의 세력을 아울러 민족해방 혁명에 성공하면서 정치적 정당성을 얻게 된다. 이상의 과정을 돌아봤을 때, 옌안 시기 마오가 마르크스주의 중국화라는 이론적 성취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론비서인 천보다의 공이 상당했다.
천보다와 마오가 조우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마오는 당내에서 이제 막 주도권을 획득하기 시작한 상황이었고, 당시 마오의 위상은 군사 전략, 농민 운동 전문가에 국한되었다. 즉, 조직이나 전쟁 전략전술 분야 외에 이론가로서의 인정은 받지 못하던 때였다. 천보다와의 교류를 통해 마오는 기존의 반전통적 관념을 버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는 입장을 토대로 당내 이념적, 이론적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이 자리 잡기 위해선 고대 중국의 철학적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오는 1938년에 이르면 기존 입장을 철회하고 “우리는 공자에서 쑨원까지의 유산을 소중히 종합해 모든 내용을 채택해야 합니다”고 말한다.)
따라서 30년 뒤 문화혁명에서 천보다가 실각하는 과정을 고려할 때, 마오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옌안 시기의 마오와 문혁 시기 마오의 구분이 필요하며, 마오의 이론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마오라는 역사적 개인
“확실히 소련의 역사는 레닌이 73세가 아니라 53세에 죽고, 스탈린이 53세가 아니라 73세에 죽었다는 ‘우연한 사실’에 영향을 받았다”는 에드워드 카의 말만큼 ‘역사적 개인’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표현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개인의 선택이나 판단이 역사의 큰 방향성을 좌우하는 사람을 일컬어 역사적 개인이라 부른다. 마오 역시 중국혁명의 많은 부분을 좌우했기에 에드워드 카의 표현을 빌려 “마오가 레닌처럼 단명했다면 중국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하고 가정해 봄 직하다. 그만큼 마오라는 개인의 성향, 기질, 행동이 어떠했는가, 또 그러한 성향이 어떻게 발현되어 역사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이해하는 것 역시 중국혁명사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리쩌허우는 마오쩌둥의 사상적 특색이 그가 창작한 시사(詩詞)에 잘 표현되어 있으며, 이 점이 마오쩌둥의 사상과 개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일찍이 청년 시절 마오는 “애석하게도 저는 지나치게 감정이 풍부하여 너무 의분에 빠져 슬퍼하고 분개하는 병폐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마오의 작품 중에서 대장정 직후 창작한 「눈」(雪)이 유명한데, 여기서 마오는 시황제, 한무제, 당태종, 송태조, 칭기스 칸 모두 문재(文才)가 부족하다면서, “정녕 문무겸전의 영웅을 찾으려면, 역시 오늘을 보아야 하리라”라며 오늘날 구국의 영웅이 바로 자신임을 드러낸다. 『마오쩌둥』(2008)의 저자 로스 테릴은 이를 마오가 좋아했던 소설 『삼국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해석한다. (조조는 유비에게 “세상에서 영웅은 그대와 나뿐이오”라고 말한다.) 마오는 어렸을 때부터 『삼국지』를 포함해 『수호전』, 『수당연의』, 『악비전』, 『서유기』 등을 반복해서 읽었다. 그중에서도 미천한 출신으로 시작해 건국에 성공한 한나라 유방을 높이 쳤는데, 사회주의 교육운동 시기에는 “무식쟁이 가운데 인물이 나온다. 자고로 능력 있는 황제의 대부분은 무식쟁이 출신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마오쩌둥 평전』(2017)의 저자 알렉산더 판초프는 마오가 20대 때 친구들을 모아두고 “양산박의 영웅들을 본받자!”고 말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징강산 모델이 여기서 발원했다고 본다. 이처럼 마오는 난세의 영웅을 꿈꿨다.
마오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을 정도로 다독가로 알려졌으나, 이는 주로 자신의 관심사에 국한되었다. 철학책, 역사책 그중에서도 농민전쟁과 관련된 책이 주된 관심사였다. 반면 관심이 없거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분야, 대표적으로 경제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1942년까지도 경제분야에 관한 글을 하나도 쓴 적이 없으며, 1960년대에 들어 “경제 건설사업은 이제 막 학습을 시작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나는 공업이나 상업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한다. 농업에 대해서는 조금 알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일 뿐이다”라며 마오는 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인정했지만,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는 않았다. 왜냐면 “(경제는) 정치로 지휘”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이론과 전문적인 지식의 부재는 혁명의 열정과 확고한 의지로 메워졌다.
그러나 동시에 마오는 지식인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70년에 천보다를 숙청할 때에도 마오는 “항상 경제를 제일로 생각하고 계속혁명론을 제일로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사실 마오는 자신이 지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을 싫어하고 모종의 콤플렉스를 가졌다. 여기에는 젊은 시절 베이징대학 사서로 일했던 경험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마오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들 대다수에게 나는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 그들에게 정치나 문화를 화젯거리로 대화를 건네기도 했지만 모두 바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개 사서보가 남방 사투리로 하는 말을 들을 시간이 없었다.”
마오의 반지식인주의는 그가 진시황제를 존숭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마오는 “당시 진시황은 (유학자들을) 너무 적게 죽였다”며 “역대 정치가 중에서 공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법가들이었다. 유가들은 입으로는 인의도덕을 부르짖으면서도 마음속에는 나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유가를 비판하고 법가를 인정해주는 행위는 지식인에 대한 탄압과 쉽게 연결되는데, 마오가 말년에 벌였던 비림비공 운동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비림비공 운동에서 마오는 겉으로는 린뱌오를 내세웠지만 린뱌오 편에 섰던 천보다와 유학자인 궈모뤄(郭沫若)를 공격한다. 한편, 비림비공 운동은 1915년 신문화운동의 구호였던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 유가를 쳐부수자)에서 기원하는 ‘기존전통의 파괴’라는 맥락과도 궤를 같이한다. 중국에서 말하는 기존전통은 유가에 특히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 중국화를 통해 유가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었던 마오의 초창기 모습은 말년에 이르러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글을 마치며
마이스너는 “국가의 ‘소멸’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꿈은 유토피아적인 희망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 인민이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유토피아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사회주의 민주’는 공허한 이론적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대약진 시기 인민공사의 실험 역시 국가의 소멸이라는 이상을 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국가기구는 강화되었고 인민의 자유는 더욱 침해받았다. 국가의 사멸과 개인의 자유를 발본적으로 옹호했던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 중국 양 사회주의 국가를 거쳐 훨씬 더 비대하고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양산했다는 역사적 현실은 굉장한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이 언제부터, 왜,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규명하는 문제는 혁명사를 학습하는 데 있어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중국에 국한해서 복기해 보자면, 먼저 후진적인 나라에서 혁명을 지속하는 문제에 대해 마오보다는 레닌의 주장이 현실에 적합했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레닌은 “(후진적인 나라에서) 혁명의 시작보다 유지, 건설이 훨씬 더 곤란한 문제였다”고 보았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하는 과정을 수립하는 일이 후진국에서는 훨씬 어려웠다는 체험담이자 사후적 평가였다. 그러나 마오는 레닌의 이 말에 대해 1960년에 이러한 주석을 남긴다. “오늘날 보기에 올바르지 못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행은 후진적인 경제를 갖는 국가에서 덜 어렵다. 인민들이 빈곤하면 할수록 그만큼 혁명을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의 용어에 빗대 표현하자면 아직도 ‘사회주의의 고급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중국의 현실을 보았을 때, 마오보다는 레닌의 분석이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혁명의 유지 자체가 ‘불가능’했다기보다는 그만큼 어렵고 장기적인 과제라는 함의일 테다. 결국 마오는 농촌에서 자발적으로 협동조합이 주도력을 행사해 집단농장으로 발전하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인 중국의 공업이 곧바로 세계 최대의 철강 생산량을 달성하길 바랐다. 이러한 조급증의 결과, 중국에서 당과 국가기구의 역할은 계속해서 확장된다.
사실 마오가 처음부터 경로를 이탈했던 것은 아니었다. 건국 초기에 마오는 계급동맹을 통한 과도적 시기가 장기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대약진운동, 문화혁명의 ‘결과’ 만을 두고 애초에 마오는 그렇게 귀결될 운명이었다고 파악해서는 곤란하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목적론적, 단선적으로 보기보다는, 다른 가능성이 존재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세부적으로 살피려는 노력이 현실에 적합한 정세인식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중국혁명사의 결정적인 분기점은 신민주주의 혁명을 포기한 1950년대 초의 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1950년대를 기점으로 삼아, 마오와 천보다가 함께 신민주주의 혁명론을 수립했던 옌안 시기와, 마오가 천보다의 숙청을 감행한 문화혁명기를 비교하고자 했다.
현재 중국의 권위주의 독재체제 역시 예정된 결론은 아니었다. 마오의 사후에 일었던 ‘중국의 봄’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민주적 법 제도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사건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전국적으로 계엄 정국이 이어지면서 개혁개방 시기 불었던 훈풍은 자취를 감췄다. 결정적인 국면마다 중국이 선택했던 오답이 모여 현재의 중국을 만들어 냈다. 중국의 고도성장 시대가 종료되고 경제에 치명적인 뇌관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중국이 대만을 상대로 무력도발을 불사할지 모른다는 우려 섞인 전망이 제출되고 있다.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중국이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