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와 이데올로기 위기
‘장기침체’, ‘부채 슈퍼사이클’과 같은 용어는 이 시대 경제 위기의 전개양상을 예측하기 위해 등장한 표현이다. ‘포퓰리즘’, ‘과학부정론’과 같은 용어는 이 시대 정치-이데올로기의 위기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번 기관지는 이 시대의 경제 위기와 이데올로기 위기를 다루고자 한다.
먼저 임필수의 「포퓰리즘과 과학부정론: 과학부정론이라는 틀을 통해 본 오염수 배출 논란」은 일본의 오염수 처리·배출의 안전성에 관한 과학계의 합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냐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규정대로 처리된다면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는 과학계의 합의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대중의 인식은 그와 큰 차이가 있었다. 왜 이런 격차가 나타났는가. 필자는 과학계의 합의를 무시하거나 공격하는 포퓰리즘 정치가 이런 인식차를 낳았다고 보고 포퓰리즘과 과학의 관계를 다루는 문헌을 조사했다. 그런데 찾아보니 포퓰리즘과 과학부정론의 관계를 다루는 최신 글도 꽤 있었다. 또한 좌파/리버럴/진보성향도 과학부정론으로 경도되고 있다고 경고하는 글도 볼 수 있었다. 이 글은 먼저 포퓰리즘 스타일의 과학부정론이 무엇인지,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 살펴본다. 그다음으로 유전자변형농산물(GMO) 논란을 사례로 삼아, 어떻게 좌파/리버럴/진보 성향도 과학부정론 쪽으로 빠져드는지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후쿠시마 오염수 논란에 등장한 좌파/리버럴/진보 성향 논자의 논법에서도 과학부정론의 요소들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검토하고, 그 함의를 제시해 보겠다.
그다음 ‘정세초점’으로 이유미의 「중국의 전랑외교와 한국의 대응」을 싣는다. 이 글은 2023년 6월 8일 싱하이밍 대사의 공격적 발언 이후 이어진 논란이 2016년 중국의 사드보복 이후 한국의 국제정세 인식과 외교적 대응에 진전이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라고 진단한다. 중국대사의 거친 언사는 돌발행동이 아니라 ‘전랑외교’라는 중국식 힘의 외교의 일환이다. 다른 국가에는 거친 늑대 같은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중국 국민에게 당당하게 이익을 수호하는 모습으로 인정받는다면, 다른 나라의 비난은 감수하겠다는 태도다. 중국의 공격적 외교는 경제성장 둔화와 권위주의 강화로 누적된 사회불만을 애국주의로 잠재우려는 통치전략에 기인하며, 사드보복도 그러한 맥락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한국은 사드보복을 계기로 중국의 변화와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고 외교전략을 수립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은 국제정세변화에 둔감했는데, 중국의 공격적 부상과 미중 갈등 심화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을 숙고하기보다,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서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한국과 유사한 안미경중(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 국가인 호주의 사례를 비교한다. 한국과 다르게 호주는 중국의 공세적 변화가 자국에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하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미중 경쟁이 격렬해질 것을 전망하여 안미경중이 지속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새로운 외교정책 기조를 발 빠르게 수립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국제적 불확실성이 증대하는 정세에는 예측 가능한 원칙 있는 외교 행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한국도 국제정세 인식과 외교대응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시급히 마련할 것을 촉구한다.
다음으로, 이번 호의 특집 ‘장기침체와 전략적 경쟁’을 다룬 두 글을 싣는다. 먼저 임필수의 「미국 경제, 장기침체와 부채위기의 정치적 함의」는 금융위기 이후 15년간 벌어진 부르주아 경제학계의 논쟁을 매개로 미국 경제의 변모를 살펴본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단기적인 경기예측이나 정책처방을 내놓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장기적 경향, 달리 말하면 자본축적의 역사법칙 또는 역사동역학을 밝히는 것이 마르크스 경제학의 목적이다. 그런데 2007~9년 금융위기 이후, 부르주아 경제학도 자본주의의 장기적 흐름에 대한 진단을 제시하고 있다. 장기침체 또는 장기저성장, 자연이자율과 고정자본 투자수익률의 장기적 하락, 생산성의 장기적 하락, 거대한 부채를 반복적으로 축적하는 부채 슈퍼사이클 등등. 필자는 이러한 진단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위기 이론이 제시하고자 했던 바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만, 각각의 논자가 자본주의 위기 메커니즘의 어떤 특정한 측면만을 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의 진단을 입구로 하고 마르크스의 이론을 출구로 하는 글을 쓰고자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수익성 있는 기술 진보의 어려움(고든) → 고정자본 투자수익률 하락(버냉키) → 만성적인 수요부족과 이력현상에 따른 장기침체(서머스)’라는 그림을 독자에게 제시하면서 마르크스의 위기 이론과 비교한다. 또한 ‘초거대부채 슈퍼사이클’(루비니)은 현대국가에서 재정위기와 부채위기가 발생하게 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으로 보강한다. 마지막으로 부르주아 경제학의 장기침체이론에 비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정상상태 이론을 설명하면서, 경쟁과 위기의 심화, 붕괴의 위험이라는 관점에서 현시대를 조망할 때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이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검토한다.
다음으로, 임지섭의 「심화하는 전략적 경쟁, 어떻게 볼 것인가?」는 ‘전략적 경쟁’이라는 키워드로 국제정세에 접근한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결정적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식 경제모델에 대한 회의가 확산하는 동시에 중국은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면서 이를 중국식 경제모델로 부각했다. 19세기 제국주의를 연상하는 일대일로와 강군몽을 위한 군민융합을 내세운 중국제조2025 계획이라는 형태로 드러난 중국의 변화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국가로 하여금 중국이 세계경제에 깊이 통합되어 있으면서 이를 악용해 배타적인 민족적 이익을 강화하고 국제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했다. 미국 일방주의를 내세우며 다자적 질서를 파괴하고 중국과의 무역분쟁에 몰두한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의 체제와 가치에 동의하는 동지적 국가를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고 다자적인 규칙 기반의 질서를 재구축하고자 한다. 집권 3기에 접어든 시진핑 정부는 쌍순환 전략을 내세우며 계속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현대화를 강조하고 국가자본주의에 기초한 내적 체제 공고화에 힘쓰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은 양국 간의 무역분쟁을 넘어 국제적 표준을 둘러싼 경쟁이라는 성격으로 심화하고 있다. 첨단반도체와 기술경쟁은 이러한 전략적 경쟁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전략적 경쟁이 진정한 의미의 헤게모니 경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중국이 경제모델과 국제질서에서 대안적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심화하는 전략적 경쟁에 맞서 권위주의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적 위기에 대한 공조와 협력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를 좁히면서 2020년대 세계에 하나의 ‘초거대 위협’이 되고 있다.
이소형의 「윤석열 정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 논란」은 올해 3월에 발표된 방안을 검토한다. 정부는 연장노동 단위와 총량을 탄력적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고안했고, 법정노동시간을 대상으로 하는 기존 변형근로시간제의 범위를 초과노동시간으로 확대하려 한다는 점에서, 급격하고 불가역적인 제도변화를 꾀한다. 또한 정부 개편안은 법정 노동시간이 단축되긴 했지만 장시간노동 관행을 바꾸지 못한 역사적 흐름을 이어간다. 윤 정부나 지난 과거 정부 모두 노동시간 제도 변화를 추진하며 실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고용여건을 개선한다는 이상적 목표를 제시했으나, 현실은 그와 전혀 달랐다. 필자는 일자리 나누기나 고용창출이 가능해지려면 정말로 실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노동시간을 늘리려는 개별적 노사관계의 욕구를 통제해야 하지만, 정부정책은 기업과 특정업종의 이해만을 반영하여 그와 충돌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결론을 맺는다.
다음으로, ‘사회주의 역사 읽기’는 지난 호에 이어 중국을 다룬다. 이아림의 「환상을 버리고 마오와 중국혁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②」는 1966년부터 10년에 걸쳐 이어진 중국의 문화혁명과 마오쩌둥 이후 탄생한 덩샤오핑 시대의 개혁개방정책을 다룬다. 문화혁명 시기의 쟁점은 네 가지다. 첫째, 문화혁명의 이론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둘째, 문화혁명의 전 과정에서 보였던 마오의 모순적인 행동의 원인은 무엇인가. 셋째, 중국의 문화혁명은 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의 문화혁명과 과연 달랐는가. 넷째, 문화혁명 당시의 국제정세는 어떠했는가. 다음으로 덩샤오핑 시대를 평가하면서, 개혁개방정책이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지향과 달라지고 당국가 자본주의가 강화된 것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냐는 가설을 제시한다. 필자는 글을 통해 중국혁명이 처음부터 경로를 이탈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다른 가능성이 존재했던 순간을 살펴보고자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신민주주의 혁명을 포기한 1950년대 초를 기점으로 마오와 천보다가 함께 신민주주의 혁명론을 수립했던 옌안 시기와 마오가 천보다의 숙청을 감행한 문화혁명기를 비교하고, 개혁개방정책의 변화를 살피기 위해 천안문 민주화운동의 전후를 비교한다. 또다시 중국이 선택의 기로에서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글을 마무리한다.
번역글로 리처드 레비의 「마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그리고 중국혁명」을 싣는다. 저자는 우선 마오가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며 마르크스주의에 이론적으로 기여한 바가 있다고 평가한다. 마오는 사회구성체를 둘러싼 모순의 복잡성이나, 이에 따른 인과성의 복잡성, 즉 과잉결정을 사고했다. 또한 생산력의 발전이 곧 사회주의의 발전이라 규정한 스탈린의 생산력주의를 비판하며 생산관계의 변혁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사회주의를 과도기로 규정하면서 사회주의에서도 모순이 존재하며 계급투쟁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동시에 저자는 마오의 한계도 지적한다. 마오에게는 이러한 내용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논리가 없었고, 심지어 이에 필요한 필수적인 개념조차 정의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부활” 가능성을 외칠 때, 부활하는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즉 무엇을 기준으로 부활을 식별할 수 있는지 이론적으로 엄밀히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무능의 결과, 마오는 결국 자신이 비판했던 스탈린적 인식으로 회귀한다. 이러한 저자의 평가를 요약하는 게 글의 부제, ‘훌륭한 질문, 서투른 대답’이다.
이번 호 ‘사회운동사’는 ‘1987년 이후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의 세 번째로 박준형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노동운동의 대응」을 담았다. 이번 글은 대략 2002년부터 2008년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 산별노조 건설과 산별교섭 시도(금속, 보건, 공공 등), ▵ 노무현 정부의 사회적 합의 시도와 노동운동의 갈등(노사정의 참여 논란, 비정규직법·노사관계로드맵 저지 투쟁, 노동계 비리사건, 민주노총 혁신 논의와 직선제 도입), ▵ 비정규직 확대와 노동운동의 대응, ▵ 이명박 정부의 집권과 광우병 쇠고기 투쟁. 한마디로 IMF 구제금융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가 안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노동조합 운동의 변화 시도, 갈등과 혼란을 종합적으로 그려내고 평가한다.
‘페미니즘 읽기’로는 김유미의 「성폭력의 사법적 해결은 왜, 어떻게 실패하는가」를 싣는다. 이 글은 올해 출판된 『시장으로 간 성폭력: 성범죄 가해자는 어떻게 감형을 구매하는가』(김보화, 휴머니스트)를 소개하며 반성폭력운동이 확산된 후 성폭력의 ‘법적 해결’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의 의미를 읽어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독자에게’는 지난 호에 실린 정지현의 「민주노총 선거연합정당의 문제점」에 대한 독자의 질문에 필자가 답한다.
2023년 9월 12일
임필수
임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