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라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한가?
『연결된 위기』
반미라는 가치에 대한 혼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 2003년 벌어졌던 이라크 전쟁 시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사건은 전 세계에서 반전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민간인 학살과 파병 등의 문제가 이어졌고, 평택에서 미군 기지를 확장하는 문제까지 발생했다. 전쟁에 맞서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 미국이 일방적으로 벌이는 전쟁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커졌다. 필자가 데모에 처음 나가기 시작한 계기 중 하나는 이라크 전쟁이었고, 당시에는 모든 운동세력이 한뜻으로 이라크 전쟁에 대해 반대하였다.
필자는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러시아에 명분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토의 동진 ‘가능성’만으로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고 민간인들이 학살되는 상황에서 다시 반전 운동이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많은 운동세력이 나토의 동진에 맞선 러시아의 자위권 행사라는 관점으로 이 전쟁을 바라보고, 심지어 신나치에 맞선 정당한 투쟁이라는 평가까지 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세계질서가 ‘다극화된 세계’로 가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세력도 있다. 2003년 당시에는 함께 반전 운동을 펼쳤던 세력들이, 침략전쟁의 주체가 달라지자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국사회의 성격에 대해 학습하고 운동을 하며 배우는 중요한 세계관 중 하나는 ‘반미주의’였다. 해방 전후 미군정 시기부터 이어진 한국에 대한 전략과 분단의 주된 원인으로서 미국의 존재가 있었다. 발전주의를 거치며 세계체계에 편입된 한국의 지위, 그에 따른 국내의 통치전략에 대해서도 미국의 역할에 대한 분석이 빠지지 않았다. 발전주의/케인즈주의의 제도를 해체하고 등장한 신자유주의 체제, 금융 우위의 자본 축적 전략으로서 금융세계화, 그와 평행하는 군사세계화, 노동유연화를 부추기는 자본의 전략. 사회의 통치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는 미국이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2000년대 중후반 이어졌던 한미 FTA 반대 투쟁,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 광우병으로 인한 촛불 투쟁에서 미국은 한국 민중의 삶을 속박하는 주요한 주체였다.
모순으로 가득 찬 신자유주의 체제를 지양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이 만들어놓은 제도를 뛰어넘는 것이 중요했다. ‘반미’라는 구호는 운동 세력에게 당연한 가치 중 하나였다. 그런데 당연하게 생각했던 세상은 변해갔다.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부터 장기 저성장이 고착화되었고, 냉전 해체 이후의 미국 헤게모니도 위협받고 있다. ‘브릭스’(BRICs)로 불리며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한 신흥국들은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있지만, 중국과 러시아 등은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질서를 위협하고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왔던 규범을 파괴하고 있다. 또한 반미를 국가 이념으로 삼는 북한은 심각한 인권 탄압, 핵실험과 호전주의적 발언, 3대 세습과 같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계속 보이며 가장 퇴행적인 사회가 되었다.
현재의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현실에서 운동의 신념과 가치에 대한 점검이 필요했다. 운동사회가 국제정세를 논의하고 분석할 새로운 합의 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와중에 백승욱 선생의 『연결된 위기』 책을 추천받고 서평을 쓸 기회를 얻었다. 사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데도 백승욱 선생의 글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자본주의 역사 강의』 같은 책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시대 규정으로서 미국 헤게모니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대한 작동방식도 저자의 저작에서 많이 배웠다.
저자는 우선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시화된 구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대립을 ‘신냉전’이라고 분석하는 것은 오독이라고 평가한다. 현재의 정세는 냉전이 시작되던 1940년대 말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차 세계대전의 시기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제국주의적 팽창을 벌인 강대국들이 서로 견제하고 충돌하며 세계전쟁까지 초래한 그때와 유사한 상황이 현재 벌어지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 간 체계의 질서로 작동해왔던 ‘얄타체제’가,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위기로 인해 국가 내외부의 원심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정세 속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안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냉전의 틀로 역사를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시기와 냉전이 형성되던 과정에서 국가 간의 관계는 우리의 ‘상식’과 달리 매우 복잡했다. 전후 세계질서를 어떻게 수립할지에 관한 이상적인 구상과 그것의 변형이 있었다. 역사가 냉전이라는 목적을 향해 달려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다양한 변수와 역학관계가 맞물려 현실의 냉전이 개시되었지만, 냉전이라는 틀을 통해서만 과거를 이해하고 이를 미래에 투영해서는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없다.
이 책은 한국의 운동세력에게도 많은 질문을 던진다. 여전히 미국은 절대악이며, 미국에 대항하는 세력은 우리의 친구인가? 현실 사회주의의 가치는 여전히 살아 있는가? 대안적인 세계체계를 만들기 위한 우리의 노선이 있는가? 각 장의 내용을 살펴보며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한반도 핵위기까지’(1,2장)는 현 국제정세 위기의 성격을 검토하고 이를 얄타체제의 해체라는 관점에서 규명한다. 2부 ‘다시 보는 얄타체제의 형성과 동아시아’(3,4장)에서는 얄타체제 형성의 역사와 동아시아에서의 변용으로서 중국혁명을 다룬다.
1장. 얄타체제의 해체로 나아가는 세계
1장은 먼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입장들을 살핀다. 크게 미국 책임론, 러시아 책임론, 양비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 세계 좌파 사이에서도 이 전쟁의 성격에 관한 논쟁이 이어진다. 특히 나토의 동진과 젤렌스키 정부의 친서방 정책이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배경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자유주의 진영(서방)과 구 사회주의 진영이 다시 대립하는 신냉전으로 보는 시각도 지배적이다. 저자는 신냉전이라는 진단은 분석의 편의성이 있으나 현재 정세를 단편적으로만 바라보는 틀이며, 전쟁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엔(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이기도 한 러시아가 영토적 온전성을 이유로 벌인 전쟁이다. 이와 같이 핵을 보유한 강대국이 다른 나라의 영토를 침범한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생하지 않았던 양상이다. 저자는 이를 ‘얄타체제의 해체’로 분석한다. 얄타체제는 유엔과 그 핵심 기구로서 안보리를 두고, 강대국들이 상호합의를 통해 영토적 침범을 자제하는 질서였다. 냉전 시기에도 이러한 얄타체제가 작동해왔으며,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여러 내전 및 국지적 전쟁에도 불구하고 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강대국 간의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자국이익 중심주의가 확산하고, 제국적 규모의 핵보유 강대국이 부상하며 군사적 연계성을 강화하기 위해 세력권을 넓혀가고 있다. 얄타체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대안적 질서가 등장하지 않는 상태에서, 세계가 공위기(空位期)에 빠질 우려가 커지고 있다.
마치 ‘다극체제’로 전환한 것처럼 보이는 현재의 세계질서는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관련되어 있다. 소련의 해체와 냉전의 종결은 일견 자유주의의 승리를 나타낸 것처럼 보였지만, 그 시기부터 이미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는 시작되고 있었다. 자본의 수익성 악화에 대응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금융 우위의 축적 구조를 확립하였다. 자본은 선별된 일부 지역에서만 금융적 통합과 축적을 온전하게 이루어냈을 뿐이고, 그 외 많은 지역은 배제되고 버려져왔다. 이러한 금융세계화와 그에 평행한 군사세계화는 자본의 축적에서 배제된 지역에서 발생하는 이탈과 국제전략적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예방적·선제적 공격을 자행해왔다. 이라크 전쟁과 같이 미국이 개입한 다양한 전쟁이 그러한 성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로 인한 위기는 지속되었고, 이는 2007~08년 금융위기와 같은 형태로 폭발하게 된다. 경제위기로 인해 개별 사회 내 통치의 구심력이 약화되고 원심력이 강해지며, 곳곳에서 사회의 위기가 초래된다. 많은 다당제 국가에서 포퓰리즘 세력이 집권하고, 보편적 가치를 배제한 집단의 목소리가 커진다. 또한 기존에 사회주의 국가였던 중국, 러시아 등은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편입했지만,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함께 더 이상 경제성장의 동력을 유지할 수 없었고 사회의 원심력도 강화된다. 이에 대한 대응은 국내에서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는 것과 ‘내정’이라는 이름으로 인근 지역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2014년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 운동에 대한 러시아의 진압, 2014년 홍콩 우산혁명에 대한 중국의 폭력적 탄압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이렇듯 냉전 해체 이후 오히려 자유주의의 한계가 드러나고, 다양한 비자유주의적 도전들이 나타났다.
북한 또한 2013년부터 경제건설·핵무력건설 병진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제기한다. 2017년에는 6차 핵실험을 단행하며 핵무기 체계를 기본적으로 완성하는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2019년 하노이 한미정상회담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북한은 더더욱 전술핵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핵사용에 대한 교리도 바뀌어, 2022년 9월 핵무력 정책법을 발표해 핵무기의 선제적 사용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중국의 대만 무력통일 위협, 북한의 핵 도발 가능성은 모두 세계질서의 공위기의 징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위협과 위기는 개별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서로 연결된 위기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북한 핵위기와 중국의 대만 무력점령 위기가 맞물리면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2장. 중국의 새로운 100년과 시진핑 체제의 도전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문제 해결자가 아니라 위기를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시진핑 체제, 시진핑 사상은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가 되었다. 시진핑은 2022년 20차 당대회와 2023년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거치면서 3연임을 달성했고,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을 모두 자신의 측근으로 채웠다. 중국의 권력은 시진핑 1인에게 상당히 집중되었고, 동시에 그는 중국공산당의 전면적인 영도를 내세우며 권위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2021년 발표된 중국공산당의 ‘제3차 역사결의’(「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과와 역사 경험에 관한 중공 중앙 결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중국공산당이 당의 기본 목표나 운영상의 중대한 변화를 추진하고자 할 때 등장하는 비상례적 선언이 당의 역사결의였다. 1945년 제1차 역사결의(「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는 이전의 ‘좌경 기회주의’를 청산하고 마오쩌둥 중심의 당 영도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제출되었다. 1981년 제2차 역사결의(「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는 마오쩌둥 사후 문화대혁명의 오류를 평가하고 마오쩌둥 개인의 책임을 지적하되, 마오쩌둥 사상의 유효성을 재확인하기 위해 제출되었다. 이렇듯 1, 2차 역사결의는 과거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과거의 문제를 청산하기 위해 등장하였다.
하지만 제3차 역사결의는 과거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나 청산이 없다. 중국 현대사를 ‘두 개의 100년’으로 구획하고, 앞으로 100년의 목표를 제시한다. 지난 100년이 모욕받은 과거와 중흥의 역사였다면, 앞으로의 100년은 중화민족 부흥의 시대로 규정한다. 앞으로의 100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시진핑 주석과 시진핑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당의 전면적 영도’이다. 이제 ‘인민’ 대신 ‘중화민족’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된다. 당의 노선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전면적인 당 관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심화되고 있는 미중대결의 시대에 “중국 특색”의 독자적 길을 걷겠다는 내용도 확인된다. 중국은 서구적 보편주의로 해석될 수 없는 예외적 지역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시진핑 1인 지배와 권위주의를 정당화한다. 지난 1, 2차 역사결의의 내용에 한참 미달하며 사회주의적 가치와도 거리가 먼 이 제3차 역사결의는 시진핑 신시대를 확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발표되었다.
이전의 집단 지도체제가 무너지고 1인 지배로 나아간 오늘날 중국의 지배세력에는 일정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는 문화대혁명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은 크게 노홍위병과 조반파로 나뉘어 서로 대립했다. 고급간부 자제들 위주로 구성된 노홍위병은 ‘혈통론’(“아버지가 혁명 영웅이면 아들은 멋진 놈, 부모가 반동이면 자식은 쓰레기”)을 옹호하며, 과거 반동세력을 문화혁명의 타격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조반파는 관료가 되어 사회특권층을 형성한 이들이 반동사상을 전파한다고 보아 노홍위병과 대립하였다. 초기에는 노홍위병이 수세에 몰리지만, 오히려 세력이 역전되며 조반파 세력은 대대적으로 검속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런 홍위병과 혈통론의 역사는 시진핑 체제 수립과 더불어 다시 전면에 등장하고, 권력의 중심에 부상한 세력은 혈통론 옹호자다.
시진핑 신시대에 중국은 국제정세의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 개혁·개방과 세계경제로의 통합은 중국 경제의 고속성장을 가져왔지만, 국내외에서 원심력이 확대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미국 중심의 세계전략에 종속되고 당의 통치성이 약화될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수세적 예외주의와 권위주의를 강화한 시진핑 신시대가 등장했다. 시진핑 정권은 당 중앙으로 권한을 집중하고, 일대일로 정책으로 중국의 세력권을 넓혀가려고 한다. 역사 다시 쓰기 작업이 시작되어, 100년 전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으로 빼앗긴 홍콩과 대만을 수복하는 과제가 중요해진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경제적·군사적 연계를 강화하는 등 긴밀한 관계 개선을 이루어낸 사실이 있다.
직접적으로 대만 위기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중국의 ‘강군몽’이다. 2050년까지 세계 제일의 군대를 만든다는 목표 아래 무기 현대화, 해군력 강화, 군사편제 재편을 추진하고 있다. 시진핑 총서기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연합지휘 총사령관이 되어, 마오쩌둥도 갖지 못한 직접적이고 집중적인 통솔권을 획득하였다. 중국은 대만 문제를 내정 문제일 뿐이라고 강조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기존 세계질서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중국의 대만 무력 점령이 현실화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금융제재를 버틸 역량, 개방경제의 취약성, 국제적 고립의 위험 등이 중국에 난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렇지만 시진핑 체제와 시진핑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대만 침공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리고 대만 위기는 곧바로 한반도의 재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3장. 루스벨트의 새로운 자유주의 구상: 단일 세계주의라는 잊힌 출발점
현 정세를 얄타체제의 동요라고 볼 수 있다면, 얄타체제가 과연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얄타체제의 출발점인 얄타협정은 1945년 2월 4~11일,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소련 스탈린 서기장, 영국 처칠 총리가 모여 합의한 전후 세계질서에 대한 협약이다. 좁은 의미의 얄타체제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의 전쟁 종결 절차에 대한 실무적 합의이다. 좀 더 넓은 의미로 보면 종전 후 국가 간 질서의 틀로 이해할 수 있다. 얄타체제는 탈식민주의를 전제로 삼는 민족국가 발전의 길을 통한 다자주의의 틀로 등장했다. 세계 기구로서 유엔을 설치하고, 강대국 간의 전쟁과 영토주의적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유엔 안보리를 구성한다. 얄타체제 아래에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상호 합의와 상호 제약의 원리가 주요하게 작동하게 된다.
1940년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뉴딜주의자들은 단일 세계주의에 기반한 글로벌 뉴딜 구상(얄타 구상)을 세웠다. 이 구상은 19세기의 식민지 질서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히 개방된 세계시장을 창설하고, 강대국 간의 합의를 통해 전쟁 억제를 추동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이 구상을 실현하려면 소련을 파트너로 끌어안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독소불가침조약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했고, 소련은 개전 한 달 동안 200만 명이 사망하고 30만 명이 포로가 될 정도로 독일에 일방적으로 밀렸다. 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무기대여법을 통해 소련에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군사 및 물자 지원을 보낸다. 루스벨트는 1941년 7월 처음으로 스탈린에게 친서를 보냈고, 두 사람은 총 304통의 서신을 주고 받았다. 여기에서 소련을 전후 구상에 끌어들이고자 한 뉴딜주의자들의 노력이 드러난다.
미국과 소련은 히틀러의 군사적 팽창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하여, 둘의 관계는 미소군사동맹 수준으로 격상하였다. 루스벨트는 서신을 통해 탈식민화된 세계와 유엔 창설을 위한 구상을 스탈린에게 제시하고, 소련이 유엔 총회와 안보리의 핵심 구성원이 될 것을 제안했다. 얄타 구상 중의 하나는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네 경찰국’ 구상이었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이런 구상이 구체화된다. 미국, 영국, 소련의 세 나라가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고, 여기에 장제스 국민당의 중국을 추가해 4강 구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한편 브레튼우즈 체제 및 국제노동기구(ILO) 개편의 핵심 구성원으로 소련을 포함시켜, 전후 세계 금융 및 노동 질서 수립에 소련을 적극적 협력자로 끌어들이고자 시도하였다, 또한 각국의 정치구도에서 공산당을 주요한 연립정부 구성원으로 포함하고자 했다.
냉전의 시각에서 보면 이와 같은 관계를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독특한 신뢰관계를 형성하였고, 루스벨트는 스탈린과 처칠의 갈등이 있을 때 이를 중재하기도 하였다. 1943년 테헤란회담과 1945년 얄타회담 모두 루스벨트가 일정, 장소 등에서 모두 스탈린을 배려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테헤란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소련이 전후 조직으로서 유엔 총회에 참여하고 경찰국 역할을 맡는 것에 동의를 얻어냈다. 또한 종전을 위한 소련의 대일 참전, 영국의 프랑스 상륙작전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냈다. 이에 유엔 창설과 그 핵심으로 안전보장이사회를 만든다는 구상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이는 얄타회담에서의 합의로 이어졌다.
그런데 얄타구상은 현실의 얄타체제 형성으로 이어진다. 우선 전후 처리와 관련된 각국의 이해관계가 얄타구상의 변형을 가져온다. 유엔 수립과 전후 구상에 관한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협의에서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폴란드 문제였다. 소련은 폴란드를 안전지대로 만들고자 하였고, 이에 독일의 영토 축소와 연관된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의 재획정을 요구하였다. 얄타회담에서 이 문제가 합의되었지만 이는 계속해서 분란의 씨앗을 남겨놓았고, 이후 이어지는 냉전체제 형성의 시발점이 된다. 또한 폴란드에 수립할 임시정부의 주요 세력을 둘러싼 갈등이 전개된다. 우크라이나 국경 재획정 역시 문제가 되는데, 소련은 독일 침공 가능성에 대한 차단벽을 설치하고 흑해, 지중해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단일 세계주의와 얄타구상을 이끌었던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5년 4월 사망하고, 자유세계주의를 추구하는 트루먼 대통령이 등장했다. 1945년 7월 포츠담회담까지는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기본 구도가 이어진다. 하지만 터키와 이란의 신탁통치 문제, 독일 점령을 둘러싼 연합국 사이의 이견은 얄타구상이 두 세계주의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다. 본래 얄타회담 참가국이 아니었던 프랑스가 독일 점령 4개국에 포함되었고, 소련은 세력권 확보 및 전쟁배상금을 원했으나 이를 얻어내지 못했다. 4개국이 처음부터 독일의 분단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시행된 마셜플랜과 소련의 베를린 봉쇄는 동서독 분단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1946년 이후로 터키와 이란 전후 통치 방식 합의 결렬, 폴란드 임시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 동유럽과 발칸 문제, 일본 점령 지배 방식의 변경, 한반도 정세 변화가 발생한다. 소련의 이탈과 코민포름 수립, 중국공산당의 혁명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미국의 NCS-68 계획 수립,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전쟁은 냉전의 형성을 공고화했다. 얄타구상이 냉전의 얄타체제로 변용된 역사적 궤적은 계획적이고 목적론적인 의도를 가지고 진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후 구상의 주역 국가 간의 크고 작은 갈등이 계기가 되었고, 중국혁명과 같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세계질서는 서방의 자유주의 세계와 현실 사회주의 세계라는 둘로 나뉘어졌다. 특히 마셜플랜의 시행과 독일 분단은 미국 헤게모니 시대의 국가간 체계의 특징을 미국화로 귀착시킨 계기가 되었다.
현실의 얄타체제는 안정적 구도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엔 차원의 전 지구적 발전계획 수립은 불가능했고, 세계는 각자 미국과 소련을 모델로 삼는 두 진영으로 나뉜다. 하지만 후발 국가들이 미소 각자의 모델을 내부화하는 시도는 폭력적 방식으로 나타났다. 냉전 구도에 따른 상호 경쟁적 지원은 각자가 원하는 체제 수립을 위한 내부적 개입을 상시화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추악한 전쟁이나 저강도 전쟁, 인도네시아의 폭력적 학살, 아프리카·중동·동유럽에서 발생한 폭력적 개입이 그 사례이다. 제3세계가 주도해 아래로부터 대안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도 역시 신자유주의 체제의 등장 이후 소멸한다.
얄타구상이 현실의 얄타체제로 변형되어간 역사적 궤적은 수많은 질문거리를 남긴다. 소련은 봉쇄된 일국사회주의 모델로 퇴각했고 국제주의라는 지향은 사라졌다. 소련은 루스벨트의 단일 세계주의라는 구상에 동참했지만, 자유주의적 세계체계를 뛰어넘는 체계적인 대안을 만드는 데에 실패했다. 자유세계주의와 현실 사회주의는 분리되었고, 서로 간 교류 없이 문호를 닫게 된다. 두 세계 모두에서 성공보다는 실패의 위기가 커지고, 그 모순의 폭발점으로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현재의 세계가 지속가능한지의 질문을 던진다.
4장. 얄타체제와 중국의 ‘중간지대의 혁명’
변형된 얄타체제의 형성과 현재의 얄타체제 해제 과정에서, 중국은 세계질서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기존 질서와 충돌한다. 저자는 중국혁명의 독특한 위상을 분석하며 현재의 정세를 조망한다. 루스벨트의 전후 구상은 처음부터 네 경찰국에 중국을 포함하고 있었고, 중국을 통해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식민세력을 억제하려 했다. 얄타구상의 중국은 국민당의 중국이었다. 그런데 중국 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한국전쟁과 항미원조 이데올로기의 등장으로 동아시아의 얄타구상에 균열이 발생한다. 2차 세계대전의 대일본 전쟁을 종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과 한국전쟁을 종결한 정전협정(1953년 7월)은 동아시아의 냉전 구도를 형성한다.
저자는 중국혁명과 얄타체제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를 현대사 역사 다시 쓰기를 추진하는 양퀘이쑹과 션즈화의 해석에서 찾는다. 이들은 계급투쟁과 중국공산당의 전술을 강조하는 전통주의적 해석에서 벗어나, 중국혁명을 ‘중간지대의 혁명’으로 다루고 있다. 얄타회담 이후 소련과 미국이 갈등하면서도 유지된 관계의 중간지대로서 중국이 있었고, 이러한 국제적 세력관계를 이용해 중국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얄타구상으로 인해 중국혁명이 가능해졌다는 해석이다. 한편 이들은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종전 후 유럽의 폴란드, 독일 문제 처리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던 소련이 동아시아에서 세력권을 형성하고자 1950년 1월 이후에는 대응을 달리 했고, 그 결과 한국전쟁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현재 중국에서 가능한 이유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실질적인 출발점을 한국전쟁을 통해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 이념이 만들어진 시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국제관계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동류화’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후발 국가들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선발 국가들의 기준을 따라가는 ‘평준화’를 지향하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자기 고유의 경로를 세우는 ‘고유화’ 경향을 보이기도 하는데, ‘동류화’란 동아시아 후발국가들의 독특한 모델로, 평준화와 고유화 사이의 길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중국의 동류화 모델은 일본이었지만, 일본이 제국주의로 전환하자 소련을 새로운 동류화 모델로 삼게 된다. 1920년대 이후 국민당 개조, 1차 국공합작, 각 정치세력의 연합을 상징하는 쑨원의 삼민주의의 과정에서 소련은 중국 내외부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소련에 대한 동류화 과정을 통해 중국의 변동은 더 큰 공간의 규정을 받으며 진행된다.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홍군의 대장정, 2차 국공합작의 과정을 거치며 중국혁명이 전개된다. 코민테른의 노선과 소련의 대외정책은 명확하게 중국공산당의 편을 든 것이 아니었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소련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받게 된다. 한편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과정 또한 중국혁명과 상호작용을 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얄타회담 이후 중국 문제는 얄타구상이 변형되고 동아시아에서 냉전구도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종전 후 소련은 장제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미국을 이 지역에서 배제하려 하였고, 중국공산당을 동북 중심의 지역세력으로 묶어두려 하였다. 초창기에는 국민당의 주도 아래 공산당을 합법화하는 ‘프랑스식 연합정부’가 대안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1946년 이후 소련과 미국의 갈등이 시작된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국공 연합정부 노선을 거부하여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중국내전이 지속되고 공산당이 우세를 점하던 1949년 초까지도 소련은 국민당을 활용하고자 하였지만, 공산당은 장강을 건너 국민당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다.
1949년 말까지 스탈린과 마오쩌둥 모두 한국전쟁 개전을 반대하였다. 소련은 독일의 전쟁배상이나 전후 복구를 위한 서방의 지원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고, 중국공산당 역시 미국과 지속적인 대화를 하는 상황이었다. 1950년 초 소련은 국민당과의 기존 조약을 폐기하고 중국공산당과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중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대만을 점령하려 하였지만, 중국을 지속적으로 견제한 소련은 한국전쟁을 위한 북한 지원으로 입장을 바꾼다.
개전 후 한국전쟁에 미온적이던 중국은 1950년 10월 참전을 결정한다. 중국과 마오쩌둥은 지속적으로 소련의 견제를 받았지만, 한국전쟁 참전을 계기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은 높아진다. 중국은 소련의 위성국이 아닌 독자적 노선을 수립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 항미원조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여 목적과 성과를 모두 표현하는 말이었다. 항미원조 이념은 중국 내적으로는 반미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통합력을 끌어냈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이 제3세계주의의 핵심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게 했다. 한국전쟁 종결을 위한 평화협정 체결을 목표로 한 1954년 제네바회담이 실패하며, 동아시아의 냉전은 다자적 협의구도를 갖는데 실패한다. 여러 지역의 냉전 양상이 얄타체제 이후의 세계질서에서 등장했고, 동아시아는 냉전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본래 냉전의 중심지역이 아니었던 동아시아의 역사 궤적이 예측 불가능하게 바뀐 것은 중국이라는 변수 때문이었다. 한편 중간지대 혁명으로서의 중국혁명은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제약을 갖게 된다. 항미원조에 따른 정치 구도는 내부적 억압을 강화하여 1957년 급속한 반우파 투쟁으로 귀결되었다. 이 노선이 중국 사회주의 전체 역사에 갖는 부정적인 함의를 강조하기 위해 ‘1957년학’이라는 독자적인 명칭이 부여되기도 한다. 문화대혁명과 이후 천안문사태 등에서 사회주의적 민주의 쟁점이 제출되고, 사회주의 건설의 주인공-주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하지만 이런 제기는 중국 내에서 억압당했으며, 주체의 자리는 당-국의 전면 영도로 채워진다. 약해진 개인의 권리를 소비주의가 대체했고, 실용주의와 결합한 선부론이 등장한다. 중간지대로서 중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세계질서를 수립할 이념이 취약했고, 새로운 보편 담론을 찾겠다는 기획이 물러난 자리를 중국 특색의 예외주의가 채울 뿐이다.
체계의 카오스와 새로운 분석틀의 필요성
1970년대 브레튼우즈 체제의 해체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등장의 역사도 벌써 50년이 되어가고, 신자유주의적 제도 역시 오래된 것이 되어버렸다.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와 같은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이 점점 통상적인 정책이 되어가고 있고,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자본주의의 유지를 위한 국가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2010년대 이래로 그리스, 홍콩, 대만, 중동 등지에서의 시위,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 러시아와 중국의 연계 강화와 권위주의 심화와 같은 국제 이슈가 발생했다. 한동안 미국 헤게모니에 포섭된 것으로 여겨진 러시아와 중국의 전쟁이나 무력 도발은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단지 미국 헤게모니의 약화와 현실 사회주의의 타락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새로운 분석틀이 필요했다.
저자는 전후 수립된 얄타체제가 강대국 상호간 무력대결과 영토적 확장을 억제하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얄타체제의 해체는 핵보유국을 중심으로 영토적 온전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증가시킬 것이다. 그 핵심에 세계체계의 ‘도전자 국가’가 된 중국의 대만 무력위협이 있다. 대만 문제의 향방이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한반도 핵위기와 연동되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이 대만과 한반도에서 동시에 위기를 증폭시키는 것이 더욱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때, 그 파괴적 확증력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절대적 위력을 지닌 핵공격의 가능성이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절멸의 위기 앞에서, 얄타체제의 해체는 사회주의 반미동맹의 승리 같은 것이 아니다. 미국 패권이 몰락하고 다극화된 세계가 도래하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없다. 사회주의적 국제주의가 몰락하고 현실의 사회주의가 권위주의로 변질된 상태에서, 얄타체제의 해체는 국가 간 폭력이 증대하는 체계의 카오스를 불러올 뿐이다. 얄타체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대안체제가 형성되지 않은 지금, 우리는 얄타체제의 유산에 기댈 수밖에 없다.
현재의 국제정세를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분석틀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 운동사회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신냉전과 다극화된 세계의 형성이란 틀에서 국제정세를 바라보며, 미국의 패권을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를 옹호하고 대만 위기에 대해 중국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입장, 북한 핵무장 자위권을 옹호할 수 있다는 입장이 대거 나왔다. 이와 같이 일반 대중의 상식과는 한참 벗어나 있는 운동 세력의 낡은 인식이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같은 용어로 유통되는 현실이 우려스럽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이 운동세력에게도 국제정세를 분석하는 새로운 분석틀의 하나로 소개되고, 이를 논쟁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려야 한다.
대안은 무엇인가?: 상식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중국과 관련된 저술을 주로 하였던 저자인지라 이 책에서도 중국에 관한 서술이 많이 실렸다. 책은 방대하고 복잡한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현 세계정세의 가장 큰 부분을 담당하는 미국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는 미국 헤게모니의 시대였으며, 세계의 경찰을 자처한 미국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많은 운동세력이 반미라는 역사관과 가치를 공유해왔다.
반미의식이 형성되게 된 역사가 있고, 여전히 반미라는 문제의식이 갖는 함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현 세계에서 전쟁을 일으키며 무고한 민중을 학살하고, 전쟁 위협을 통해 위기를 증폭시키는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에서 단순히 구 사회주의권을 옹호하는 것이 진보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평화운동의 과제는 여전히 미국 반대이고, 미국 헤게모니가 위협받는 현 상황이 역사적 반전을 이룰 것으로 생각하는 세력이 많다.
세계질서를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에서 우리가 대안을 찾는 일은 너무 막막한 일이 되었다. 일국에서 벌이는 반전운동과 평화운동이 핵전쟁 가능성이라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지도 미지수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상식과 보편적 가치를 통해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하고, 아닌 것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반미를 평화와 인권, 생존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보다 우선시할 수는 없다. 혁명의 전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러시아, 중국, 북한의 현재 행태를 옹호하는 것이 현 시대의 대안은 아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을 반공주의로만 치부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듯이, 우리가 현재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세계가 정말로 당연한 것은 아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현재의 시각에서 해석할 수 없는 다양한 역사적 쟁점들이 개입했다. 그렇기에 원래 알고 있던 세계를 다시 되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시각으로 현 정세를 바라보는 것이 대안을 찾는 과정의 첫 번째 과제가 될 것이다.
마치며
서평의 제목으로 삼았던 “반미라는 구호가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북중러가 주체가 되어 발생하는 세계의 연결된 위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반미라는 구호가 역사성과 유효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운동세력이 세계 질서 아래에서 한국의 위치를 돌아보고, 더 큰 정세 속에서 대안을 고민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연결된 위기에 대한 미국의 대외 정책이나 인민주의 세력에게 위협받는 미국의 정치 상황이 또 다른 돌발변수가 될 가능성 역시 적지 않다. 운동진영 내에서의 고민과 논쟁이 세계체계 속 한국의 위치를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아직 갖고 있다.
오히려 우려스러운 것은 보수정권의 실정과 비상식에 대한 대안으로 의석수 확보와 집권을 내세우며, 그러면 모든 것이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운동사회 안에서 영향력을 더 키우는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오래된 과제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믿음은 운동세력에게 세계체계 분석이나 객관적 정세인식의 필요성을 망각하게 한다. 정세 판단에 따른 실천 전략보다는 감정을 자극하는 비판과 선거공학만이 운동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사회운동의 독자성과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도 정세분석과 현 시대 규정에 대한 토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연결된 위기 속에서 사회운동이 위기의 출구를 모색하기 위한 진지한 논의와 토론이 필요한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