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4 봄. 1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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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행이 관행이 되는 한국의 정치현실

임필수 | 편집장
 
이번 호의 특집은 ‘정치적 올바름 비판’이다. 미국 대선을 살펴볼 때도 정치적 올바름이 하나의 키워드가 될 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회운동에서도 지배적인 정치 스타일로 굳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드는 시점이기 때문에, 우리도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전면적으로 다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집에 앞서, 정세초점으로 실린 임필수의 「2020년대 야권연대의 흐름과 쟁점」은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이 소수정당을 흡수하는 새로운 무기로 재탄생했다고 주장한다. 2024년 총선에서도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 창당 결정이 낳은 정치적 파장이 매우 크다. 진보당은 민주당의 이러한 결정을 노심초사 기다렸고, 2월 5일 이재명 대표의 최종 발표 후, 녹색정의당과는 전혀 달리, 당내에서 아무런 논란도 없이 곧바로 비례위성정당에 올라탔다. 그에 따라 민주노총에서도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한 진보당을 민주노총의 지지 정당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고, 진보당 지지 성향의 지도부는 이를 막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2020년 총선 당시에는 민주당이 선거법 개정 당시 이미 위성정당 창당을 염두에 두었으나, 이를 먼저 발설하기가 난처한 상황에서 이른바 ‘시민사회원로’를 자처하는 정치개혁연합이 비례위성정당의 물꼬를 열었다. 2024년 총선에서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준연동형 유지와 병립형 회귀를 두고 저울질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민중운동을 자처하는 세력이 연동형 유지와 비례위성정당 창당을 먼저 강하게 요구했다. 한국진보연대가 먼저 비례위성정당 창당과 지역구 단일화를 요구하고, 진보당이 물밑에서 준비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 글은 이 과정을 찬찬히 짚어보면서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한 세력들이 그 누구보다 철저한 ‘친명파’로서 행동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또한 필자는 2020년 비례위성정당의 최종 승리자가 ‘시민을위하여’와 ‘열린민주당’이라는 양대 ‘조국 수호’ 세력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는 2024년 ‘조국혁신당’의 부상을 예고한 셈이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야권을 ‘친명파’, ‘조국수호 세력’ 양자가 주도한다는 것은 곧 원한의 정치에 기초한 정치양극화의 극대화를 의미한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준연동형제가 유지되는 게 그나마 다행이 아니라, 최악의 위험이라고 주장한다. 파행이라고 생각했던 비례위성정당이 이제 관행으로 정착될 것이고, 따라서 이는 조국혁신당처럼 정당체계를 파괴하고 개인 팬덤에 의존한 정치집단의 등장을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회민주주의, 정당민주주의에 항구적 위협이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특집의 첫째 글, 이아림의 「정치적 올바름, 분석과 비판」은 ‘정치적 올바름’ 현상을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판하는 글이다. 필자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을 이들이 제기하는 성차별, 인종 문제와 같은 이슈를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고 하나의 정치 스타일, 행위 양식으로 정의한다. 첫째로 정치적 올바름은 소수자를 억압받아 온 피해자로 위치 지으면서 명확한 가해자 개인을 찾아 처벌하는 운동 양상을 보인다. 둘째로 정치적 올바름은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되었던 다양한 의제를 공론장에 끌어내 ‘정치화’하지만, 그 사안 자체를 정치적으로 다루기보다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문제로 다시 치환한다. 필자가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을 정치 스타일로 정의한 이유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기원이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검열주의적 행태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정치적 올바름은 보수주의자들이 대학가에서 행한 사상 검열식 행태를 ‘대항폭력’으로 대응하면서 출현했다.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한 정치적 올바름은 2010년대 들어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일련의 폭력 사태까지 이어진다. 필자는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적 지지’할 수는 없으며, 근본적인 비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정치적 올바름은 보편적인 시민 교육을 어렵게 하고, 교육의 질을 저하하며, 학생을 더욱 유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교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또한, 정치 사회운동이 정치적 올바름을 채택해서는 안 되는데, 정치적 올바름은 △ 결국에는 실패해 기존 체제에 포섭될 뿐이고, △ 정체성의 정치로는 보편적인 운동 주체를 형성할 수 없으며, △ 사법적 규제에 의존하는 방식은 정치 사회운동의 자활성을 침식하고, △ 도덕의 과잉은 대중의 냉소를 초래하며, △ 금기가 논쟁을 대체하는 문화는 정치 사회운동을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필자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역사가 사회운동이 대중적 기반과 보편적 시야를 잃는 순간 사태가 어떻게 귀결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며, 사회운동이 당파적인 기구로 여겨지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공간으로 서려면, 정치적 올바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언한다.

둘째는 번역 글인데, 스튜어트 홀의 「정치적 올바름을 통해서 가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어떤 길들」이다. 저자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로 버밍햄 문화연구 학파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약 30년 전에 발표된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 문건 중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다루는 글이자, 지금도 많이 인용되는 글이기 때문이다. 역자해설에서 스튜어트 홀의 생애와 이 글에서 제시하는 핵심적 통찰을 소개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쟁점분석으로 두 편의 글을 실었다. 먼저 임지섭의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의 문제점」은 1월 초 윤석열 대통령이 공언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가 총선을 앞두고 이른바 ‘개미투자자’의 표심을 노린 ‘금융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다. 개인투자자의 상장주식 거래 차익을 실현한 양도소득에 과세하지 않는 한국의 금융투자소득 과세체계는 그간 조세형평성과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10여 년간 한국 정부는 일관되게 주식 양도소득에 대한 과세 범위를 확대해 왔고, 2020년 문재인 정부는 금융투자상품 일체의 양도차익을 과세 대상에 포함하는 금융투자소득세를 입법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이러한 금융투자소득 과세체계 개혁 흐름에 완전히 역행하고 있다. 또한 윤석열 정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주식시장 저평가)를 언급하는데, 이는 한국경제에 특징적인 재벌의 낮은 수익성과 기형적 지배구조의 문제가 제대로 평가된 결과일 따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재벌의 기업지배구조 개혁이나 금융소득에 대한 조세제도의 합리화가 아니라, 그간의 세제개편 방향에 역행하는 단순한 세제 감면만으로 국내 증시를 부양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은 퇴행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아림의 「부동산 PF 문제 해설」은 지난 1월 11일 워크아웃이 확정된 태영건설 사태를 계기로 한국의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구조에 대해 해설하는 글이다. 한국의 부동산 PF는 PF가 고유하게 지니는 위험성에 더해 구조적 취약성을 보인다. 우선 영세한 시행사가 땅값마저 대출(브릿지론)을 통해 확보하기 때문에, 부동산 경기변동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경기가 나빠도 이자 부담을 고려하여 빠르게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착공 단계에서 공사비 대출(본PF)을 받아 브릿지론을 갚고, 선분양 제도를 통해 계약금, 중도금을 받아서 공사비로 쓰는 구조는 예상만큼 분양 이익을 거두지 못하게 되면 건설사의 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필자는 이번 태영건설 워크아웃 사태에 대해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규제와 고위험을 추구한 시장참여자에 대한 페널티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근본적으로 빚으로 건물을 올리는 한국의 부동산 구조 전반을 손보겠다는 계획이 수립되어야 기업구조조정에 대한 사회구성원 간 합의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번 호 ‘사회주의 역사 읽기’로는 임지섭의 「평등주의와 혁명적 폭력이라는 프랑스혁명사의 쟁점」을 담았다. 김응종의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을 읽으며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정통주의 해석과 수정주의 해석의 논쟁을 정리하고, 이로부터 평등주의와 혁명적 폭력이라는 쟁점을 제기하는 글이다. 러시아혁명을 전후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정통주의 해석은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자,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예비하는 미완의 민중 혁명의 이중주로 본다. 반면 1960년대 정통주의 해석을 비판하며 등장한 수정주의 해석은 프랑스혁명을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실패한 혁명이자, 20세기 전체주의를 예고하는 공포정치를 내포하고 있었던 혁명으로 본다. 필자는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두 상반된 해석이 제기하는 쟁점이 20세기 사회주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강조한다. 두 해석 자체가 20세기 사회주의 혁명과 그 실패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에서 돌아보았던 평등주의와 혁명적 폭력이라는 쟁점의 원형을 프랑스혁명사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혁명기 대표적 ‘반혁명’으로 여겨지는 방데 전쟁과 리옹 반란의 사례를 살펴보고, 파리 민중이 요구하고 자코뱅(산악파)이 제도화한 공포정치의 실내용을 정리한다. 이는 프랑스혁명의 ‘과정’에 대한 수정주의의 비판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필자는 혁명의 폭력과 억압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프랑스혁명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도 고찰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다음 글의 주제로 삼겠다고 말한다.

책 소개로는 박진우의 「중국에 또 다른 기회의 창이 열릴 수 있을까?」를 싣는다. 이 글은 스콧 로젤, 내털리 헬의 『보이지 않는 중국: 무엇이 중국의 지속적 성장을 가로막는가』(롤러코스터, 2022)를 다룬다. 이 책은 2030 국제정치 독서모임 <책으로 여는 세계>에서 함께 읽은 책 중 하나로, 저자들은 20년 가까이 헌신해온 농촌교육행동프로그램(REAP)의 경험을 토대로 중국 농촌의 구체적인 현실을 볼 때 중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며, 중국 농촌 빈곤문제의 원인과 농촌 아이들이 가난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고자 한다. 

지난 겨울호에서 사회진보연대 출범 25주년을 기념하며 ‘사회진보연대와 나’라는 제목으로 여러 회원의 에세이를 실었는데, 이번 호부터 ‘회원칼럼’이라는 제목으로 계속 이어갈 것이다. 김민철 회원이 「3년 뒤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민주노총 선거에서 겪었던 경험과 소회를 전해주셨다.  

편집진이 여러 차례 학습과 토론을 거치며 특집과 주요기사들을 작성했다. 회원과 독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의견개진을 기대한다. 
 
2024년 3월 14일
임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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