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4 여름. 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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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 분석과 비판」 독자에게

이아림 | 정책교육국장
 
사회진보연대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주제에 대해 전격적으로 다룬 글은 처음이다 보니, 많은 독자가 다양한 의견을 주셨습니다. 그 의견들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쟁점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가? 정치적 올바름이 소수자 차별을 완화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 아닌가? 과연 한국에서도 유의미한 쟁점이라 할 수 있는가? 
 

1.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정치적 올바름을 하나의 ‘정치 스타일’로 정의하는 것이 옳은가? 정치적 올바름의 정의가 너무 광범해 보이는데, 정치적 올바름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가?

우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론적 비판이나 정체성 정치가 표방하는 분리주의 운동에 대한 실천적 비판은 이미 많이 해오던 것인데, 이러한 기존의 비판으로 충분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은 도대체 이들과 어떤 관계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정체성 정치, 정치적 올바름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세 개념 모두 같은 역사적 배경을 공유합니다. 이 개념들은 대략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등장했고, 1990년대에 이르면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안착했습니다. 또한, 세 개념 모두 보편적 이념에 기초한 사회운동이 퇴조하고 특히나 사회주의권 국가의 실패가 명백해진 상황에서 진보 진영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적, 운동적 조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각각은 특정한 영역이나 측면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예술 또는 철학이라는 영역에, 정체성 정치는 정치운동이라는 측면에, 정치적 올바름은 대학을 중심으로 사상 정화 운동이라는 측면에 천착합니다.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은 좁은 의미에서는 주로 해체주의 경향의 문화예술 사조를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현대사상의 근본 토대에 의문을 제기한 일련의 사상적 흐름을 통칭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적 합리주의와 객관적 현실이라는 개념에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기에, 거대 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지식의 확실성이나 안정적인 의미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정체성 정치나 정치적 올바름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지식인에게 이론적 자원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기관지 글에서도 살펴봤듯이, 정치적 올바름의 논자들은 기존의 교과과정이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문화에 기반해 있다고 보면서, 이를 성별, 인종, 종족과 같은 정체성을 포함한 커리큘럼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때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이 주된 역할을 합니다.

정체성 정치는 사회운동과 정당의 분화·분열이라는 측면에 주목하는 개념입니다. 유럽에서는 본래 사민당이나 노동당에 대한 사회운동의 광범한 지지가 있었는데, 1960~70년대에는 이러한 공식이 깨지고 여성, 인종 등 신사회운동이 독자성을 표방하고 진보정당과의 연계성이 약화되며 정체성 정치가 부상합니다.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과 블랙 팬서 운동의 분리라는 측면으로 드러났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상징되는 민권운동의 전략은 인종에 기반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보편적 시민권에 호소하면서, 개인이 특정한 집단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능력을 펼치는 데 제약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에 주력했습니다. (“개인을 속박하는 제약을 없애자.”) 반면, 블랙 팬서는 흑인, 여성, 동성애자 등등 다양한 소수자 집단 사이의 동맹을 통해 집단적 권리를 쟁취하는 정치 전략을 지향했습니다. (“특정 집단의 권리를 쟁취하자.”) 

여기서 주의할 점은, 정체성 정치가 인종, 성별, 장애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 모두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특정한 집단의 정체성에 기반을 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분리주의 운동을 지칭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흑인 인권운동에 연대하는 백인이 운동의 전략에 대해 조언하는 것을 마뜩잖게 여기거나, 운동을 비판하는 것 자체를 인종차별이라고 규정하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이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우선, 초창기에 정치적 올바름은 정체성 정치가 대학가에서 펼친 일련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글에서는 그 실천 양식들을 크게 스피치 코드 제정, 적극적 우대정책, 교과과정 개편으로 요약했습니다. 인종과 성별에 따른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표현을 규제하고, 차별받는 집단에 대해 입학이나 교수 임용 시 ‘할당제’로 대표되는 적극적 평등을 실행하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차별적 문화를 조장한다고 간주하는 지식 체계를 고치는 데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모두 대학가에서 시도할 수 있는 실천이었던 것이죠. 단순히 학생뿐만 아니라 68세대로 대표되는 진보적인 교수층도 이를 함께 주도합니다. 정체성 정치가 좀 더 특정 집단의 당사자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정치적 올바름은 대학 내에서 진보적인 (예비)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개했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도덕적인 의미가 더 부각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천 속에, 차별적 인식이나 차별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결과를 제재하거나 교정해야 한다는 사고가 깔려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실제로 정치적 올바름은 규제와 처벌 행위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어졌고, 이는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치적 올바름이 일종의 사상 ‘정화’ 운동이라고 앞에서 언급했던 것이고, 지난 호 글에서는 모든 의제를 도덕적 문제로 치환해 ‘선과 악’의 구도로 파악하는 정치 스타일이자 행위 양식이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정치적 올바름이 확산한 시점과 장소를 통해 기원을 추적해 봤을 때, 정치적 올바름은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이 좌파적 사상에 물든 대학을 ‘정화’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행동에 대항하면서 성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일종의 미러링 전략으로 좌파식 사상검열을 진행합니다. 일종의 좌파 복음주의라고 볼 수 있겠네요. 백인 남성의 원죄 의식, 백인이 여성, 흑인, 동성애자를 억압한다는 이원론적 분열, 사소한 잘못이라도 공개적인 죄의 고백과 자책이 따라야 한다는 구도는 흡사 종교와 유사점이 있습니다. 물론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은 진보진영의 오랜 진영논리와도 통하는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정체성 정치에 반드시 내재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도식적으로 설명하자면,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의 교집합이 넓긴 하지만 차집합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종교적 심성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사상경찰 활동은, 꼭 정체성 정치에 해당하는 의제가 아니더라도 도덕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다른 분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종평등 문제도 그런 경우일 것입니다. 정체성 정치가 집단을 바탕으로 특수한 권리를 요구한다면, 최근 정치적 올바름의 양상은 개개인이 불편함을 호소하는 모든 문제로까지 이를 확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편성을 부정하고 정체성 간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개개인의 교통 가능성을 부정하고 개개인은 모두 유일하고 특수한 존재라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반대로, 차별적인 사상을 검열하고 처벌하는 운동으로 포괄되지 않는 정체성 정치의 운동 양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에는 특정한 민족 정체성을 기반으로 이들의 특수한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는 분리주의 정당들이 있는데, 이들이 모두 선악의 구도에 근거한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토대로 구체적 기준을 세워가면서 정치적 올바름의 정의를 좁혀보면 어떨까 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용어는 우파가 비하의 의도로 사용한 표현에서 기원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맞다는 의견도 있지만, 지금은 진영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시사 용어로 사용되고 있고 분명히 지칭하는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운동의 핵심 정의와 특징을 좀 더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논의하는 편이 유용해 보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의 가장 핵심적인 정의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분야를 성역화 하고 사상검열과 제재를 수행하는 정치스타일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차별적 발언에 대해서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논쟁할 수도 있고, 에티켓을 지키지 않은 발언 정도로 여길 수도 있는데, 정치적 올바름은 이를 넘어서 그 발언을 정정하고 사과해야 한다거나 재발 방지를 위해 규제해야 한다는 식으로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너무 심한 혐오 표현도 참으란 말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최소한의 도덕을 법률로 규제하고 있습니다. 명예훼손이나 모욕죄에 따른 판례를 통해 사회적으로 허용되거나 허용되지 않는 혐오표현의 기준이 존재합니다. 물론 이 기준은 시대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화하겠지만, 이를 넘어서는 항의 행동을 통한 해고 압박과 같은 사적 제재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운동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은 이러한 사상검열을 진보의 이름으로 주로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1990년대에 대두하고 2010년대에 부흥한 운동을 지칭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가장 자유로운 토론이 보장되어야 하는 공간에서 검열 문화를 꽃피웠다는 역설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던 진보가 역으로 검열을 정치적 무기로 삼는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원래 1960년대 ‘자유언론운동’을 통해 대학 내 표현의 자유를 신장시켰던 것은 좌파였습니다. 자유로운 발언의 힘이 사회를 바꾼다고 믿은 이들은 금기에 도전했습니다. 검열문화가 보수집단 내지는 비합리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집단에서 유행한 것이었다면, 정치적 올바름이 이렇게까지 사회적으로 주목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검열 문화에서 중요한 매개는 언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야말로 가장 확실한 물증이니까요. 맥락보다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의 다양한 실천 양태 중에서도 특히 언어에 대한 교정이 가장 대표성을 갖는 실천 양식이 된 것입니다. 
 
 

2. 필요한 문제 제기라는 측면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소수자 차별 완화에 기여한 측면이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혐오 표현 규제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 않은가? 또한, 적극적 우대조치도 효과가 있지 않았는가?

정치적 올바름의 긍정적 측면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개인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서 판단이 다를 수 있겠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인해 차별적 표현이나 혐오 발언에 대한 사회의 민감도가 올라간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우선, 정치적 올바름이 사회운동의 전략으로 부적절하고 효과적이지 않다는 글의 주장 근저에 있는 부분을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과연 정치적 올바름이, 그것에 내재한 위험성을 감내하고서라도 간취할 만한 긍정적 효과가 있는 것인가를 얘기해 보고 싶어서요. 결론적으로, 저는 정치적 올바름으로 인해 잃는 대의가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점에 대해서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제기하는 주장 자체는 옳기에 좀 더 예의를 차리자는 식으로 일종의 ‘비판적 지지’를 하는 입장에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의문은 제가 지난 글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한편,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도 여러 갈래로 제기됩니다. 자본에 대적하는 데 별 효과가 없다, 오히려 현실을 은폐할 뿐이다, 보편적 계급투쟁이 중요하다, 결국 좌파를 탄압하는 양날의 검이 되어 돌아온다는 비판이 그러합니다. 모두 맞는 지적이긴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반대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를 딱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저는 정치적 올바름이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이 가장 핵심을 찌른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이 침해하는 표현의 자유를 단지 인권의 한 가지 요소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현대사상에서 이는 굉장히 핵심적인 가치입니다. 생각의 기초를 신의 계시가 아닌 인간의 이성에 두고, 모든 사람이 출신과 종교에 무관하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요구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게 현대사상의 인큐베이터가 된 계몽주의의 핵심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와 성직자들은 사상경찰의 역할을 수행하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고, 계몽주의자들은 도서가 검열되거나 신성 모독으로 투옥되었습니다. 이러한 억압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출판, 언론, 표현의 자유가 인간의 권리로서 주장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생각보다 인간의 정신이 온전히 개인에게 귀속된다는 사고가 인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종교에서 해방하기 위해 분투한 결과, 오늘날에 이르러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당연한 권리가 된 것이죠. 개인의 자유를 주장한 자유주의와 그러한 개인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모두 계몽주의의 후예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계몽주의 역시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와 국가가 이성의 활용을 독점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며, 인간이 스스로 지적 능력을 계발하여 차차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진보 가능성을 신뢰했던 것이죠.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은 이러한 전제 자체를 부정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계몽주의, 이성에 대한 신뢰, 능력주의를 역사의 진보라기보다는 지배를 위한 효과적인 도구 정도로 파악합니다. 표현의 자유는 권력관계를 고착하는 데 이용될 뿐이며(우파의 레토릭에 불과하다), 엄격한 지적 토론이 지성의 정점이라는 견해는 백인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왔다는 식입니다. 자유주의는 진리의 독점권을 어떤 특정한 인종, 종교, 계층에 주지 않습니다. 반면, 정치적 올바름은 ‘피해자 관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편파성이 필요하기에 발언권에 차등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최근 정치적 올바름을 주제로 책 두 권이 한국에 번역되었습니다. 두 책의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이 현대사상의 근간을 허문다고 우려합니다.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의 저자 수잔 니먼은 “18세기 계몽주의의 유산으로 내려온 인식론적 틀과 정치적 전제를 거부하는” 지적 이론이 워크에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합니다. (워크[woke]는 ‘각성한’ 또는 ‘깨어있는’이라는 의미로, 정치적 올바름을 실현하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잘못된 단어: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의 저자 르네 피스터도 정치적 올바름이 계몽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며, ‘모든 인간은 특정 정체성의 대표자가 아니라 고유한 개인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현대사상의 토대를 침식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하나의 평등한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류 역사를 통틀어 큰 성취였던 것인데, 정치적 올바름은 이를 부정한다는 것이죠. 

나치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칼 슈미트는 가톨릭교회야말로 정치 제도의 원형이라고 봤으며, 도덕이 선과 악으로 규정되고 미학이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되는 것처럼, 정치도 그 근본에는 친구와 적의 대조에 있다고 주장하며 자유주의의 위선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자유주의가 보편적 대의를 말하지만 결국 권력을 가진 자가 좌우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죠. 정치적 올바름은 이와 같은 반계몽주의, 반자유주의 노선과 논리적으로 통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올바름의 사고방식이 우려스럽다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에 위선적인 부분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보편적 대의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위선의 틈새를 파고들어 실질적인 시민권을 추구하는 운동을 전개할 수도 있겠죠.)

따라서 혐오 표현 규제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 않은가 하고 묻는다면, 혐오 표현조차도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원칙적으로는 규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라는 말이 바로 표현의 자유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회적 합의를 통해 혐오 발언을 제한하더라도, 부작용을 고려해 상당히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 수준의 도덕은 시민의식의 증진이나 토론과 교육이라는 장기적인 개선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지, 행정적 방식이나 강제를 통해 달성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강연 취소 같은 ‘캔슬문화’ 역시도 사실상 상대방의 발언을 막는다는 취지에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일종의 정치투쟁으로 볼 수 있지 않냐는 의견도 있었는데, 맥락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논쟁하는 전술이 제일 좋겠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천차만별일 테니까요. 정치적 올바름은 상대방이 발언하는 행위 자체를 폭력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강의를 취소하는 행동만이 유일한 대응책이라고 봅니다. 정치투쟁과 캔슬문화 사이에 넘지 못할 강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상황에 맞춰 숙고하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다만, 현재 미국 대학가는 캔슬문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대학에서 감수성이 부족하거나 소수자에게 상처를 준다고 여겨지는 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교수가 정직당하거나 초청 연사가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소셜미디어가 활발해지면서 한국도 과거에 비해 강의실에서 발언을 가지고 퇴출 요구를 벌이거나 논쟁적 연사의 강의가 취소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상황이라, 예의주시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더불어 표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법에 명시된 권리 이상으로 대학이나 미디어를 비롯한 모든 곳에서 열린 논쟁을 지원하고 이를 높이 평가하는 문화가 조성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정 주제에 관한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터부시하거나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에서는 사실상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글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적극적 우대조치를 영구화하고 원칙화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적극적 우대조치에 긍정적 효과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아래의 적극적 우대조치의 사례는 『잘못된 언어』에서 주로 참고했습니다.) 
 
차별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판단이 다른 게 아니라, 차별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대해 자유주의적 원리와 정치적 올바름이 생각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우선 이해해야 합니다. 

자유주의는 인간 개개인이 인종이나 성별, 특정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기 능력을 계발할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차별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사회의 각 분야에 능력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차별적 관행을 없애고 입학이나 채용 분야에서 소수인종을 배려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의 어린 네 아이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character)으로 평가받게 되는 나라에서 살게 될 날이 오리라는 꿈”이 바로 그런 뜻이겠죠. 물론 이 과정에서 사회운동이 실질적 원동력으로 뒷받침했던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은 능력주의를 성차별이나 인종차별과 같은 구조적 차별로 사고합니다. 쉽게 말해, 능력주의는 결국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은 인종차별적인 관행이나 법안이 사라질 때까지, 어느 정도 형평성이 달성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사고했던 적극적 우대조치의 대상과 영역을 계속해서 확장하는 전략을 채택합니다.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인종 간 입학률이나 소득수준의 기계적 평등이 달성되기 전까지 적극적 우대조치는 존속해야 합니다. 게다가 인종 간의 차이뿐만 아니라 인종, 성별, 성적지향, 장애 유무 등 개인을 구성하는 다양한 제약조건의 가중치를 모두 고려해서 정확한 할당제를 추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계적 평등이 1인 1표제와 같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보장되는 평등개념이라면, 능력주의의 평등 개념은 비례적 평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례적 평등이란 특정한 기준에 의해 측정된 개인의 기여에 따라 분배가 이뤄지는 평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별은 몰라도 특히 인종 면에서 적극적 우대조치의 실제 효과가 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명문대 진학률이나 학계 진입한 아프리카계, 라틴계 미국인은 늘었겠지만, 미혼모 비율, 교도소 수감 인원이나 자산 규모를 봤을 때 인종 간 격차는 여전하다고 합니다. 비록 실제 효과가 미진하더라도 적극적 우대조치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면 계속해서 시행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러나 1960년대에는 광범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적극적 우대조치는 현재로서는 국민적 합의가 낮아지고 있습니다. (2019년 퓨 리서치의 설문조사에서 73퍼센트가 인종은 대입 선발에서 아무 역할도 해서는 안 된다고 응답했습니다.) 

게다가 역차별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학업 성적만을 기준으로 선발했다면 2013년 아시아계 대학생의 비율이 19퍼센트가 아니라 43퍼센트였을 것”이라는 대학 내부 조사 자료가 보도되기도 했으며, 실제로 아시아계 학생은 SAT 점수가 백인보다 평균 150점, 흑인보다 평균 450점 정도가 높아야 입학이 가능하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교수 임용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 생명과학 학부에서 2018, 2019년 다섯 명의 교수 임용에 894명이 지원했는데, 53.7퍼센트가 백인이었고, 25.7퍼센트가 아시아계, 13.2퍼센트가 라틴계, 2.8퍼센트가 아프리카계였습니다. 1차 단계에서 오로지 다양성 기준에 따라서 지원자 680명이 걸러졌고, 2차 단계에서 비로소 자격이 역할을 했고 지원자는 22명으로 좁혀졌습니다. 그 결과, 13.6퍼센트가 백인, 18.2퍼센트가 아시아계, 59.1퍼센트가 라틴계, 9.1퍼센트가 아프리카계였습니다. 원래 56.5퍼센트였던 남성 비율은 좁혀진 목록에서는 36.4퍼센트였고 합니다. 
 
또한 2021년에 16세 이상의 백인 대학 지원자 12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할 결과, 34%의 학생이 입학허가 기회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인종을 거짓으로 적었다고 답한 결과도 있습니다.

이러한 최근 분위기를 반영해 2023년 6월 29일에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대학 입시에서 소수인종에 대한 적극적 우대조치를 위헌이라고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개인에게 가해진 핸디캡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라는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데, 인종마다 레일 설계를 다르게 하다 보니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미국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대학에서도 소수인종에 대한 적극적 우대조치를 유지하기보다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맥락에서 소득수준이나 교육 인프라, 주거 환경 등 개인에게 가해진 제약을 다양하게 고려해서 해소하는 정책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게 바로 정치적 올바름의 논리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인종차별에 있다고 보는 일원론적 관점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인종차별 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토론해 보려는 수업에서, “교수님이 빈곤이나 교육 부족을 언급하시면, 흑인 차별을 인종주의 이외에 다른 근거로 해명할 수 있다고 착각할 위험이 있습니다”라는 학생의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내에도 흑인이 겪는 모든 문제를 사회에 내재한 인종차별로 보는 게 아니라, 일정한 자기책임의 문제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셸비 스틸은 1990년에 『우리 인격의 내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중산층에 진입하지 못한 수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오늘날 여러 기준에서 민권운동이 승리하기 전보다 훨씬 더 백인에 뒤처져 있다. 그러나 흑인 미국인 사이에 이 역설을 파헤치길 꺼리는 머뭇거림이 있다. 인종차별이 줄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대부분의 상황이 악화되었다면 문제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자초한 것이 틀림없다.” 

셸비 스틸은 1964년 민권법이 제정된 이후 인종 통합정책이 진전되면서 흑인들이 오히려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열등감을 느꼈고, 이 통합 충격으로 방어기제로서 인종차별 담론이 더 강해졌다고 분석합니다. 기회가 열린다는 것은 성공의 기회뿐만 아니라 실패의 기회도 열린 셈인데, 백인이라면 실패를 개인이 극복할 문제로 접근하는 데 익숙하겠지만 통합 충격으로 취약해진 흑인은 실패를 인종차별의 문제로 생각하기 쉬웠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보기에, 피해자 정체성은 개인의 책임을 면제해 주며 자신의 발전이 집단의 발전에 달렸다고 느끼도록 부추겼습니다. 이에 흑인 사회는 개인으로서 출세하는 것을 인종적 배신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적극적 우대조치에 관해서도 비판합니다. 미국 사회가 흑인에게 자유를 가져다주긴 했지만, 자유 속에서 번영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삶의 태도를 제공하지는 못했고, 적극적 우대조치는 흑인의 실질적 향상과 발전보다는 억압에 대한 보상 쪽으로 기능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저자는 우대조치가 그 대상자의 능력이 의심스럽다는 인식을 만들어내는데, 흑인들이 말하는 미묘한 차별이 대부분 이 인식에서 온다고 봅니다. 따라서 우대조치는 “단지 피부색을 여권으로 만들 뿐”이기에, 입학 정책의 초점은 자격보다는 흑인의 능력 계발에, 인종적 다양성보다는 인종 간 평등 달성에 맞춰지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하다 보면 자칫 트럼프식의 주장과 공명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관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 올바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조롱하고 되갚아 주는 우파와는 다르게,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불똥이 튈까 두려워 침묵하지 말고 토론의 영역으로 끌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침묵하는 다수에게도 다시금 생각할 여지를 제공할 것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에서 시도한 바들이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지, 왜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았는지, 진보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무엇인지 숙고하며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소수자 운동을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일례로, 2020년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도 처음에는 미국에서만 약 260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시위자의 54퍼센트는 백인이었다고 합니다. 무기를 소지하지도 않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범죄라는 광범한 동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850년대에도 노예제는 잘못이라고 주장하던 남부의 백인이 있었고, 1920년대에도 린치 행위를 멈추려고 노력했던 남부의 백인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서사를 삭제하는 게 아니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회진보연대는 과거 성폭력의 개념을 확장해 온 반성폭력 운동이 처한 딜레마와 부작용에 대해 반성하며, 사회변혁 운동으로서 페미니즘 운동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인종차별 개념과 폭력의 개념을 확대할수록 명백하고 위협적인 행동에 오히려 면죄부를 줄 수 있으며, 실질적인 사회변혁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는 부분을 잘 설득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3. 정치적 올바름을 왜 하필 지금 시점에 검토하는가? 한국에는 아직 이 정도까지 확산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전통적인 계급운동이 쇠락한 이후 영미권을 중심으로, 나아가 전세계적으로 정치적 올바름 운동 경향이 출몰한 것은 맞습니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에 페미니스트를 중심으로 성차별적 단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운동 사회에 확산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다시 정치적 올바름이 주목받게 된 데에는, 2010년대 들어 인민주의 세력이 발호하는 가운데 특히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 주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트럼프 대통령을 탄생시킨 배경 중 하나로 지목되었고, 나아가 트럼프 시대에 맞서 정치적 올바름은 훨씬 더 진보진영과 사회운동의 주류로 부상하게 됩니다. ‘워크’(woke)가 새로운 시대의 젊은 대안 좌파로 부상한 것입니다. 이제 미국정치를 분석하는 데 있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키워드는 빼놓고 얘기하기 어려운 주제가 되었습니다. 최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문제로 미국 대학가가 갈등의 핵으로 부상한 가운데, 정치적 올바름의 ‘언더도그마’식 사고(약자를 뜻하는 ‘언더독’과 맹목적인 견해를 뜻하는 ‘도그마’를 합성한 신조어로, 약자는 언제나 선하다고 믿는 인식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마이클 프렐이 2011년 출간한 책 제목에서 비롯되었습니다.)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2010년대에 본격적으로 확산한 소셜미디어는 정치적 올바름이 확산하는 데 실질적인 원료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한국 역시 201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에서 일어난 폭력시위처럼 눈살 찌푸리게 할 만큼의 극단적 사건은 없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이전에는 논쟁이 가능하던 영역이 이제는 금기시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는가 하는 문제는 이번 글을 넘어서는 추후 과제라 생각했지만, 여기서 몇 가지 흐름을 개략적으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한국에서 보이는 특징이 크게 두 가지 있는데요. 우선,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무엇보다 역사문제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항상 정치화되기 일쑤였던 근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에서, 최근 들어 가해자-피해자 구도로 성역화된 역사해석이 공고해졌고, 관련한 논쟁 자체가 차단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여성혐오 담론에 반대하며 201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부상한 이후, 정치적 올바름의 캔슬문화가 온라인을 무대로 2~30대 남녀 모두에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역사왜곡 문제를 법적으로 처벌하려는 시도는 2000년대에도 존재했지만, 실제 입법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20년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한 이후였습니다. 김용민 의원이 2021년 5월 13일 대표발의한 ‘역사왜곡방지법’은 “공연히 3·1운동, 4·19민주화운동, 일본 제국주의의 우리나라에 대한 폭력적·자의적 지배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 이에 저항한 독립운동에 관한 사실을 왜곡하거나 이에 동조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역사를 왜곡한 자에게 손해배상 의무를 지우며, 금지행위 위반에 대해서는 처벌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마저도 이 법이 민주주의를 왜곡한다며 반대하는 마당에 통과되진 않았지만, 대신 2021년 5·18민주화운동 특별법에서 5·18 허위사실유포죄가 신설되었고(5·18역사왜곡처벌법, 최대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2023년에는 태영호 의원의 김일성 지시설 발언 논란 이후 같은 맥락에서 4·3특별법 개정안이 발의되었습니다. 이재명 대표도 대선 후보 시절 ‘역사왜곡 단죄법’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기에, 역사해석에 대한 처벌은 이슈에 따라 언제든 살아날 수 있는 쟁점입니다. 2015년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유하 교수 사건은 우리 사회에 학문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박 교수는 얼마 전 파기환송심에서 10여 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한편 미국 대학가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캔슬문화에 대응해 우파의 대항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처럼, 한국에서는 지난 몇 년간 2~30대를 중심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져 크고 작은 사건에서 캔슬문화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감시와 개입’이 쉬워진 조건에서 이러한 경향은 점차 강화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게임 업계에서 성우나 일러스트레이터가 페미니스트로 낙인찍혀 업무에서 배제되는 일이 다수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웹툰 시장에서는 여성혐오나 폭력적인 장면에 대해 여성 독자 주도로 검열이나 퇴출을 주장해 실제로 2020년대 들어 네이버 웹툰에서는 광범한 검열이 이뤄지고 있다고 합니다. (웹툰 작가 기안84의 경우 여성혐오 논란으로 기본소득당과 여성단체들이 연재 중지와 퇴출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 사회의 정치양극화 못지않게 한국사회의 남녀 적대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2021년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28개국 2만 3천여 명을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남녀갈등이 심각하다고 대답한 비율은 한국이 전 세계 1위였는데, 그 비율이 무려 세계 평균(48%)의 1.7배인 80%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나아가 한국 역시 미국과 유사하게, 정치적 올바름이 대학가에서 처음으로 확산한 뒤 정치권이나 사회운동을 중심으로 이슈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국 대학의 사례를 예로 들자면, 한 대학교 기숙사 동에서 남녀 학생 간 단체미팅을 추진했다가 이성애 중심적 행사이고 성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비판으로 행사가 취소되기도 하고, 한 대학교 단과대에서 학생들에게 차별 없이 간식을 제공한다면서 비건용 간식만 준비해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으며, 동아리 회식에서 고기 먹는 사진을 올렸다가 동물 사체를 먹는다는 비난을 받고 공개 사과문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사안들이 2010년대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정치적 올바름의 사고를 견지한 청년층이 사회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어느 정도는 세대 편향적인 주제일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해 정치양극화가 고착화되고 있는 정치권에서는 혐오 표현의 규제라는 측면에서 상대방의 발언이나 과거 소셜미디어에 올렸던 글들을 문제 삼아 공격하는 경우가 빈번해졌습니다. 2021년에는 ‘외눈박이 대통령’ ‘절름발이 정책’ ‘정신 분열적 정부’ ‘집단적 조현병’ ‘꿀 먹은 벙어리’ 등의 표현을 사용한 정치인에게 장애인 단체 중심으로 정신적 손해배상 소송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재판부는 “명예훼손과 모욕에 대한 과도한 책임 추궁이 정치적 의견 표명이나 자유로운 토론을 막는 수단이 될 수 있다”며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2022년에는 전 대통령의 양산 사저 앞에서 연일 시위를 벌이자 “혐오표현”을 하는 집회를 금지하는 집시법 개정안 논의가 이뤄졌고, 결국 대통령 사저 주변 100미터 이내가 집회 제한구역으로 설정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이 주로 제기되는 공간은 진보적 담론 수용이 자유로운 사회운동 진영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이 새로운 진보를 대표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침체한 사회운동에서 하나의 돌파구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2010년대 들어서는 반보수전선을 통해 진영논리가 더욱 고착된 상황에서 선악으로 진영을 나누고 도덕적 잣대를 활용하는 경향이 확대했습니다.

사회운동 내에서 언더도그마식 사고나 강자의 권리는 침해해도 된다는 생각은 점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노동자운동이 보편적 노동권을 확장하고 노동자 계급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겠다고 나서는 전략보다는, 기업에 희생당한 피해자로 스스로를 묘사하기 일쑤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투쟁에 대한 다른 평가 자체가 금기시되곤 합니다. 진영논리가 강해지면서 그러한 평가나 토론이 상대편에 이익이 되는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이죠. 미국에서도, 1968년 폭력시위가 닉슨의 당선에 도움이 되었다는 연구 내용을 요약하며 2020년 폭력시위가 오히려 공화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트윗을 올린 활동가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직장을 잃은 사연이 있습니다. 이번 호에 실린 「전태일재단-조선일보 공동기획 논란을 되돌아보며」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운동이 정치적 논쟁을 도덕적 분노로 막는 데 익숙해질수록, 침묵하는 다수는 쉽게 등을 돌릴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가장 강력한 수문장은 우파가 아니라 좌파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없게 된다면, 그로 인한 이익을 얻는 사람은 결국 반민주주의자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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