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로부터 얻은 용기
뜻밖에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동안 선거철마다 어김없이 노동자 정치세력화 관련 교육자료를 만들거나, 다른 누군가 만든 교육자료를 함께 검토했다. 어느 해엔 민주노총 대의원 자격으로 총선방침과 정치방침을 결정하는 데 한 표를 행사하기도 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진지하지 않았고, 으레 치르는 업무 중 하나였다. 부끄럽게도, 내겐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해 정리된 입장이나 고민은 없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진보정당’이라는 막연한 인식과 이에 대한 묘한 거부감 정도만 존재했다.
나는 지난 3월부터 정의당 양경규 국회의원실로 출근했다. 불과 몇 달이라지만, 의원실 활동이 이런 내게 어울리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한 달여 앞서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분투 중일 의원실 사람 모두에게 폐가 되진 않을까 염려했다. 그럼에도 의원실 활동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엔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다분히 이기적인 이유였다. 의정활동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이 있었고, 캐나다 교육연수를 계기로 만난 양경규 의원의 생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소하더라도, 그 사소함으로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 4개월의 임기는 법안 발의는 물론 최소한의 의정활동조차 시도하기 어려운 조건이라 생각했다. 여지없이 여의도 국회의원실 대부분은 이미 시작된 선거운동으로 준폐업 상태였고, 심판과 청산 구호가 요란한 가운데 21대 국회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사실상 종료된 시점이었다.
하지만 의원실은 분주했다. 난 첫 출근과 동시에 경남 창원지역 금속노동자들과의 간담회, 거제 한화오션 현장방문 2박 3일 출장길에 올랐다. 의원 승계를 결심하고 나서 양경규 의원의 첫걸음은 한국옵티컬하이테크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으로 향했다. 그는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과 아스팔트에 온몸을 던졌고, 경찰에 에워싸인 채 장애인 이동권과 생존권 보장을 위한 출근길 투쟁의 곁에 섰다. ‘사소하더라도, 그 사소함으로 있어야 할 곳에 있겠다. 해야 할 일을 결코 피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다짐대로였다.
외투기업 직장폐쇄, 반복되는 매각과 위탁업체 변경, 층층이 쌓아 올려진 다단계 하청구조와 나날이 증가하는 이주노동자, 법과 권리의 사각지대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노동들. 그리고 여기서 비롯되는 수다한 차별, 노조파괴, 해고, 사고, 그리고 죽음까지. 9년여 노동조합에서 활동했지만, 그 활동도 공공운수노조 교육공무직본부가 유일했기에 온통 생소한 현장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낯선 단어들에 손과 귀가 바빴다.
노동조합 바깥인 국회에서 불과 몇 주 만에 접한 노동현장의 절박함만 이 정도다. 이조차도 노동조합이 있기에 닿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 최선의 용기, 최후의 보루다. 의회의 힘은 막강하진 않지만, 노동자에게 분명 유효하다. 법과 조례 발의로 권리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감사를 통해 기업의 편향적·반노동적 운영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시기가 시기였고, 발 담그고 있는 곳이 곳인지라 자연스레 노동자 정치사회운동,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아니, 그보다는 복원되어야 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노동자계급이 이념적·조직적으로 보수주의 혹은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구별되는 정치세력이 되고자 하는 운동전략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이 일터와 지역에서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통해 체제의 부속물이 아닌 대안으로 성장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들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동자정당 혹은 진보정당 건설과 선거 참여라는 축소된 개념으로만 이해되어왔다. 노동자·민중의 정치가 ‘세력의 규합’과 선거 일정에 맞춘 ‘선택’에 그친 것이다.”
「정치세력화 다시 생각하기」, 《오늘보다》 2017년 3월호.
한국에서 보수주의 혹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누구이고, 현시점에서 어떻게 변모했는가. 그리고 그 세력과 구별되는 이념과 조직은 무엇인가. 체제의 부속물이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노동자들이 일터와 지역에서 대안으로 성장하기 위한 시도는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선거연합정당부터 비례위성정당까지 정치방침과 총선방침을 둘러싼 민주노총 내 쟁점이 혼란스럽게 전개되던 때, 그리고 정의당이 총선 결과 원외 정당이 되는 성적표를 받아들던 때, 그리고 독자적인 진보정당에 대한 어두운 전망이 오가는 지금까지 나는 내내 위의 질문들에 나름의 답을 쓰고 지우길 반복하게 된다.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라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나아가며, 국민승리21로부터 시작해 민주노동당을 지나 지금의 정의당까지.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의 부단한 역사를 양경규 의원을 통해 여러 기회로 접했다. 노동조합과 진보정당 모두 위기에 처한 지금, 각 영역을 누구보다 분주하게 오갔던 그의 삶은 내게 셀 수 없는 질문을 던졌고, 납작스런 내 생각에 부끄럼을 안겼다. 물론 지금 내게 주어진 질문과 부끄럼은 당장 내 몫이지만, 또 한편 혼자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좌절하진 않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차분하되 때 놓치지 않도록 조금은 분주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삐뚤삐뚤 현시점의 내 생각을 정리해본다. 초기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 창당 준비 시기가 지난 후에,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목표는 사실상 진보정당운동으로 제한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노동조합은 대안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시도를 진보정당에 위탁하고, 진보정당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구별되는 이념과 조직을 대리하며, 노조와 정당이 시기마다 실패와 갈등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양상이 반복되어온 것이 아닌가.
일상적으론 노조와 정당 간 관계는 돈과 몸 대는 역할을 노동조합이 맡고, 진보정당은 현장 요구 해결을 떠안은 형태였다. 여기에 균열이 생기게 되는데, 노동조합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했던 진보정당의 체급과 실력에 대한 아쉬움이 촛불집회를 발판 삼아 변신에 성공한 민주당의 소위 노동존중 정책과 행보로 메워졌기 때문이다. 이는 노조와 정당 간 위탁과 대리로 납작해진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결과겠지만, 왜 노조와 정당 양자 모두 민주당식 대안에 이토록 취약했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거칠게 정리해본다. 극심해진, 장기화된 경제위기 상황과 변화된 노동시장에 따른 노동운동의 새로운 모색이 부재했다. 체제 내 일부 개혁 수준의, 민주당이 대체로 흡수(가능)한 수준의 강령에 머문 진보정당은 그 존재가치를 위협받았다. 정치개혁은 선거연합과 야권연대의 세계관만 확장했다. 결국 정세와 체급에 맞는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간 관계설정에 실패했다. 물론 노동조합과 진보정당 활동가들은 각 영역에서 분투했지만, 서로에게 철저히 무심했다. 노동조합과 진보정당 모두가 이렇다 할 활로를 찾지 못하고 위기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지금, 철저한 평가와 반성을 토대로 지난한 분투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양분 삼아 혁신을 위한 상생방안을 모색할 때란 생각이다.
결국 운동과 실천은 일터와 지역에서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 반복해온 과오와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물리적 일터와 지역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할 텐데, 정치세력화운동의 출발에서 교훈과 가능성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넘어가면서 노조 밖 노동운동 조직들이 배제되었고, 노동운동의 조합주의 노선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 이후 나름의 기회가 된 순간은 국민승리21 창립을 준비하던 때였다. 노동조합 내 교육이 강화되고, 노동조합과 바깥의 노동운동, 그리고 진보정당 추진 세력이 반신자유주의 기치 아래 한 데 모였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프로세스 전반이 조직적 평가와 합의에 따라서 추진되지 못하고, 열정적 개인의 의지와 실천으로 채워졌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한계 역시 분명했다.
게다가 지금은 과거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 창당과 같이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정치세력화가 추진될 가능성이 작다. 아니, 없다고 보는 것이 낫다. 오히려 노동조합과 진보정당 각각의 한계와 가능성 모두에 주목하며, 위탁과 대리를 뛰어넘을 새로운 관계설정이 노동자 사회운동 혁신의 한 경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민주당, 인민주의 비판의 매개를 야권연대, 비례위성정당으로 삼아 정의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당운동의 새로운 경로 설정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 진보정당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교류하며, 상생할 수 있는 혁신 방안을 모색해보는 것이 어떨까.
사실 이러한 생각은 나를 돌아보며 정리해본 거라 앞서 밝혔듯 삐뚤삐뚤 모가 나고 거칠다. 틀린 것 투성이고, 정확히는 내 고백과 성찰인지조차 모르겠다. 현재로서는 길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맞서야 하는 세력의 성격은 어떠하고, 그와 구별되는 우리의 이념과 조직은 무엇인지, 나아가 그 이념과 조직을 무기로 우리는 어떤 실천을 지역과 일터에서 해야 하는지 어느 것 하나 명쾌하지 못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에 대한 솔직하고 열린 토론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상황을 탓하며 그 역할과 책임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다. 재차 다짐해본다. 나부터 편견 없이 대화할 자세를 갖추고, 수고와 시간을 쏟아야겠다.
끝으로 양경규 의원이 국회 등원 기자회견에서 인용한 함민복 시인의 <나를 위로하며>의 한 구절, ‘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라’를 떠올려보면, 지금 서로에겐 위로와 격려 역시 필요하다. 어쭙잖게 자기 위안하고 후사를 핑계로 정신 승리해선 안되겠지만 이번 22대 총선에서 정의당의 독자 완주는 의미가 있다. 진보정당 운동에서 생명 연장을 목적으로 반복해 선택한 야권연대, 그로 인한 이념적·조직적 패퇴의 한 순환을 불안정하나마 끊어냈다는 점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분명하고 단호한 단절이 힘을 얻는다. 그 힘으로 서로 솔직하게 마주하고, 편견 없이 토론하며 답을 찾아갈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