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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여름. 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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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불행한 전환

『교육은 왜 교육하지 않는가』

박범진 | 교사회원모임 회원

‘너 참 착하다’라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과학적인 분석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상냥하기만 한 말로 채워진 정책을 거북하게 느낄 때가 있다. 『교육은 왜 교육하지 않는가』의 저자 프랭크 푸레디 역시 ‘학생의 선택권’, ‘학습자의 흥미와 동기’, ‘반권위주의’와 같은 수사가 교육에 미친 영향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는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 안토니오 그람시는 물론 파울로 프레이리와 존 듀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의 견해를 풍부히 인용하며, 현대사회에서 교육의 본질적 역할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무너져 왔는지를 분석한다. 푸레디가 한국의 교육현실을 직접 분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2009년에 출간된 이 책이 지금의 한국 교육현실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은 그의 분석모델이 가진 힘을 보여준다.
 

학교는 사회를 재생산하는 국가장치다. 사회의 변화와 이행을 고민하는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재생산의 공간으로서 학교는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하며 억압적인 공간으로 묘사되기 쉽다. 푸레디의 책은 이러한 개념 규정에 맞서 학교를 개혁과 진보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던, 다시 말해 학교를 통해 변화를 생산하고자 했던 사회적 흐름에 대한 평가서다. ‘변화에 대한 서구 사회의 강박은 서구 사회를 과거와 계속해서 소원해지게 한다’는 푸레디의 지적은, 과거와 달라지는 것 자체가 변화의 올바른 방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푸레디가 말하듯, 교육은 ‘인류의 지적·문화적 유산’을 이해할 기회를 학생에게 제공하는 것이며, 이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사회 변화의 역량을 보존하는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단지 과거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비추며 나아가는 것이다. 적어도 교육의 영역에서는 변화의 생산보다 변화의 역량을 재생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푸레디는 교육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여러 요인을 지적함에도, 반지성적 교육학이 유행하고 교사의 권위가 위협받는 학교에서 학생이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장의 교사 역시 학생의 변화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뿐, 어떠한 정책이 학생을 어떻게 변화시켰다고 명확히 말하지는 못한다. 교육의 효과는 아주 천천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교육 당국은 교육의 본질을 와해하는 정책을 도입하고도 그 정책의 효과가 어땠는지 발표하지 않는다. 성찰 없이 밀고 들어오는 변화의 바람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 변화의 역량을 침식한다.
 
 

교육의 역설

교육이 모든 것이 될 때, 교육은 교육이기를 멈춘다. 우리는 교육을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만능의 제도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교육을 구출할 필요가 있다. 
- 책 본문 19쪽.

‘어른의 권위 상실’이라는 개념을 통해 지금의 교육문제를 분석하는 푸레디의 글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의 변주인 것 같으면서도, 현실에 관한 진지한 탐구와 적합한 인식을 보여준다. 푸레디의 관점에서, 교육의 본질적인 역할은 청소년에게 인류의 지적·문화적 유산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지적·문화적 유산’은 과거의 것이기 때문에, 이는 불가피하게 어른의 권위 문제와 연결된다. 푸레디가 분석하기에, ‘어른의 권위 행사’의 지위가 애매모호해지는 것은 교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이 만들어낸 경향은 다음과 같다.

① 어른 권위의 모호한 지위는 교과목에 기초한 지식의 지위를 의문시하는 교육학적 신념과 관행이 힘을 얻게 하였다. 역사적으로 어른의 권위는 인류의 지적·문화적 성과물을 전달하는 어른의 능력에 기초하고 있었다. 어른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교과목 중심의 지식 공부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현재의 경험’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풍조가 형성된다.

② 정규교육의 권위가 의심을 받으면서 아동교육을 ‘전반기 학습모델’로 부르고, 이를 ‘평생학습’과 비교하는 관점이 힘을 얻는다. (‘학령기의 과업으로서 교육’이라는 관점이 약화된다.)

③ 어른 권위 일반의 부식은 교사의 지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교사는 이제 권위 있는 인물의 역할을 하는 대신 ‘학습자’나 ‘촉진자’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진다.

④ 어른 권위의 위기는 어른이 공유된 규범 및 가치의 체계를 어린 세대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사회의 문제는 학교의 문제와 혼동되고, 학교의 역할은 특히 사회화의 영역에서 확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⑤ 어른의 권위 행사를 둘러싼 혼란은 권위 있는 형태의 훈육을 저해해 왔다. 교사가 교실 규율을 관리할 용기를 잃고 있다는 점은 이제 쉽게 감지할 수 있을 정도다.

위계를 없애려는 교수법 프로젝트는 보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교육을 관리하고자 하는 조치로 자주 오해된다. 이러한 새로운 교수법은 어른의 권위 있는 행동에 의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행동 관리 기법을 사용하여 학생에게 동기를 부여하고자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사용하는 동기 부여 기법과 행동 관리 기법 중 많은 것이 교실에서 반지성주의적인 분위기를 조장한다(교육내용에 대한 교육기법의 승리).

푸레디가 말하는 교육의 역설은 이러한 배경에서 출현한다. 사회가 교육에 대해 더 많이 강조하고 더 많이 투자할수록 교육 그 자체의 가치는 덜 긍정되는 것, 그리고 교육의 내용에 대해서는 점점 무관심해지는 것. 이것이 푸레디가 말하는 교육의 역설이다. 교육을 어떠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하는 과정에서 각 교과목의 본래 모습이 훼손되는 문제가 생긴다. 푸레디는 교육이론가 롭 무어를 인용하여 이를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교육’의 위기라고 부른다.

푸레디의 글은 10년은 더 지난 과거 구미의 교육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지만, 지금 한국 교육문제를 분석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교육의 문제를 분석하기 위해 ‘어른의 권위’나 ‘규율’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교육의 영역에서는 좀처럼 진지한 논의대상이 되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의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교육의 영역에서 ‘규율’은 억압적인 것으로 다루어져 왔기에, 푸레디의 이론은 보완이 필요하다. 그의 이론은 아동이 한 명의 사회적 주체로 거듭나는 데에 있어 규율의 역할에 관한 이론, 즉 주체화 이론의 설명으로 보강된다.
 
 

예속화의 이론들: 주체화 이론

규율은 단지 나쁜 행동을 관리하는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청소년들의 취향과 감성을 계발하고 훈육하는 창조적 차원 역시 가지고 있다. 규율 습관의 내면화는 아이들이 독립심과 자기통제감을 갖는 데 도움을 주는 습관과 태도를 촉진한다.
- 책 본문 23~24쪽.
 
푸레디는 규율의 창조적 차원에 관해서 말한다. 교육학적으로 해석할 때, 규율은 학생의 자기통제를 증진하는 긍정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규율은 어쩔 수 없이 ‘권력에의 예속(혹은 종속)’이라는 외연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권위와 권력 일반을 비판하는 진보적 사회운동이 쉽사리 긍정하기 어려운 면모를 가지고 있다. 교육의 영역에서 규율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학생을 권력에 취약하게 만드는 것처럼 해석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른 권위 일반의 부식’을 문제 분석의 틀로 삼는 푸레디의 이론적 틀을 수용함에 있어 규율에 관한 철학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규율의 창조적 차원의 상을 그리는 일은 ‘주체화 이론’에 대한 해석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주체화 이론의 논자들은 개인이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속’(subjection)이 ‘종속’(subordination)과 ‘주체화’(subjectivation)를 모두 의미한다고 본다. 즉, 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굴복이 주체화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권력의 정당함이 아니라 ‘저항의 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학생이 학칙으로 상징되는 권력에 종속되는 것이 곧바로 학생을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권력에 대한 종속은 권력에 반대하고 저항하기 위한 자원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그중 푸코와 알튀세르의 논의만을 정리한다.

푸코의 관점에서, 예속의 창조적 차원, 즉 ‘저항의 가능성’은 개인이 권력에 예속되는 과정이 반복적이기 때문에 형성된다. 개인이 규범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면, 자신이 기존에 예속되어 있던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시 다른 것에 예속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예속적인 권력은 권력에 완전히 종속된 주체의 생산이 아니라 권력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대하며 다시 다른 것에 예속되는 주체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오히려 푸코의 철학에서는 ‘권력과 저항의 공모’(저항적 주체를 만드는 것은 권력이다)가 문제로 지적된다.

알튀세르는 개인이 권력의 부름에 돌아서는 과정에서 하나의 주체가 된다는 호명이론을 통해 주체화 과정을 설명한다. 개인이 권력의 부름을 향해 돌아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근본적 의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사회의 통합과 재생산을 위해서는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하는 이데올로기적 재생산 과정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교과목을 통해서든, 규율을 통해서든 구조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알튀세르의 철학에서 ‘저항의 가능성’은 두 가지 차원에서 존재한다. 하나는 ‘산포와 미끄러짐’으로 설명이 되고, 다른 하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보편성’으로 설명이 된다. 그가 말하는 ‘미끄러짐’이란 권력과 규율이 주체에게 언어로 전달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잘못 알아들을 가능성’ 혹은 ‘제멋대로 알아들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는 언어가 개인에게 명확히 같은 의미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언어구조의 내재적 가변성). 또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대중의 이데올로기가 되기 위해서 그 안에 모순적인 요소들을 결합하고 있다. 결국, 지배 이데올로기 속에 갈등적으로 포섭된 보편성(들)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데에도 작용할 수 있다.

정리해보면, 학교에서 학생에게 규율이 전달되는 과정이 곧바로 학생을 수동적인 주체로 전락시키거나 취약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예속의 과정이 없는 주체화도 상상하기 어렵다. 주체화 이론은 대안적 주체의 생산이 교사 개인이 학생에게 해방적인 가르침을 주는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설명하기보다는, 학생을 지도하기 위해 교사가 동원하는 규율의 보편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보편적인 규율은 억압과 저항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이 규율을 스스로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이라는 철학적 가정이 저항의 가능성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즉, 보편적인 규율을 제시하는 교사의 능력이 학생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푸레디가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

교육의 영역에서는 가장 주되게 다루어져야 하는 주제지만, 실제로는 명확하게 설명된 적이 없는 질문이 있다. 바로 ‘학생은 왜 똑똑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대중교육제도를 경험한 수많은 사람은 이 질문에 대해 각자의 대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학교 교육에서 지식의 역할과 지위는 상대적인 주장들의 난립으로 인해 모호한 것이 되었다. 이 질문에 대한 푸레디의 대답 역시 그리 신선하지는 않지만, 그는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을 현재 교육제도에 대한 분석까지 일관성 있게 이끌어가려 시도한다. 아래는 푸레디의 대답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추구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장려할 만한 노력으로 긍정되는가 하는 것이다. 비록 그러한 지식이 항상 유용하거나 직접적으로 적실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학생들에게 무엇이 참인지에 대한 통찰력을 획득할 수 있는 준비를 해준다.
- 책 본문 88쪽.
 
정규교육의 주요한 의미는 사람들에게 일반화하는 능력을 길러주는데, 그리고 마이클 영이 “맥락과 무관한 또는 이론적 지식”이라고 묘사한 것을 획득하게 해주는 데 있다. 이 지식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 경험을 통해 얻는 실용적 지식과는 다르다.
- 책 본문 85~86쪽.
 
정책 입안자들은 변함없이 교육영역에 자신들의 관심사를 투영하고 있으며, 청소년에게 인류의 지적·문화적 유산을 철저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갖는 중요성을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
- 책 본문 93쪽.

위의 내용을 보면, 푸레디는 지식 본위의 교육, 즉 본질주의적인 관점에서 교육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학교에서 지식교육이 덜 이루어지는 것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로 보인다. 그러나 사회학자로서 푸레디가 제기하는 문제는 그보다 구체적이다. 교육의 의미가 퇴색되면서 학교에 생기게 된 문제, 즉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데 많은 시간을 낭비’(책 본문 300쪽)하는 문제가 푸레디의 문제의식의 중심을 이룬다. 

따라서 그의 책은 ‘학생에게 어떤 지식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잘못된 교육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책이다. 그리고 푸레디가 잘못된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은 특정한 교육의 방식이라기보다는, 교육제도를 좌지우지하는 하나의 흐름이나 관점으로 인해 빚어진 일련의 결과다. 그리고 푸레디가 비판하는 흐름을 형성한 것은 정책 당국만이 아니라 진보적 교육운동이기도 하기에, 그의 비판은 세세히 검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푸레디가 말하는 교육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먼저, 푸레디는 앞서 언급했듯 학생에게 일상생활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전달하여 사회의 지적 역량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푸레디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기도 한다.

좌파-우파의 분할을 초월하여 진지한 사상가들은 교육이 세대 간 교류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현실에서 각 세대는 새로운 세대를 교육한다”라고 기술했다. …… 그녀(아렌트)는 교육이 사회에 지적 유산을 보존하는 동시에 갱신하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 책 본문 73~74쪽.

푸레디가 ‘어른의 권위’의 문제를 중요하게 언급하는 이유는 ‘미성년자의 미발달된 능력과 어른의 기준과 관습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메우는 것’을 교육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사회집단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재생산하는 것, 삶의 방식을 재생산하되 갱신하는 것은 푸레디가 말하는 교육의 역할이자 가능성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푸레디를 이해한다면, 그의 이론은 ‘교육제도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재생산도 중요하다’는 기능론적 표현을 넘어서, 재생산과 변화를 동시에 사고하는 하나의 시도로 볼 수 있다.
 
 

푸레디가 교육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푸레디가 현재 교육제도의 문제로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변화의 물신화’다. 변화와 사회변동이 우리 시대만의 독특한 특징인 것처럼 제시되고, 우리는 지금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른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상투어가 반복된다. 그러나 푸레디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사회가 과거의 변화를 경험한 방식에 대한 신중한 평가에 기초해서 얻은 결론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20세기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된 주장이며, 특히 ‘사회의 변화에 맞춰 학교도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써 활용되어 왔다.

‘변화의 물신화’가 교육제도에 끼친 영향을 푸레디가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교육을 현대화하고 개혁하고 혁신하라는 요구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어젠다가 대개는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과거를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고, 새로움에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이른바 ‘탈’[post-]이라는 용어를 통해 이전 시대와의 연속성을 지워버리는 경향)으로 교육제도에 도입된 정책들이 되려 교육을 잠식하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푸레디가 말하는 교육의 사회적 역할은 ‘미성년자와 어른 사이의 기준과 관습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메우는 것’이며, 이는 과거의 통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식에 대한 교육’, 그리고 어른의 권위라고 할 수 있는 ‘규율에 대한 교육’으로 정리된다. 그 과정은 분명 재생산의 모델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갱신을 위한 사회적 역량을 보존하는 길이기도 하기에 교육제도가 이러한 역할을 포기하게 된다면 이는 교육의 낭비로 이어진다는 것이 푸레디의 주장이다.

그리고 아무리 화려한 용어로 치장되어 있더라도, 교육의 사회적 역량을 잠식하는 시도는 교사가 학생을 제대로 가르치기 힘들게 만들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일부는 교육의 영역에서 수용가능하거나 필요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만드는 경향이다. 푸레디가 비판하는 교육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① 교과목 중심 교육과정에 대한 평가 절하
- 교과목 중심 교육과정은 변화하는 현실에 맞지 않는다.
- 지식은 인터넷으로 찾으면 된다.
- 소수 학생에게만 유리한 지식 중심 교육과정은 차별적이다.
 
② 개별 맞춤 학습으로의 전환
- 학습의 초점은 학생들의 적성과 관심에 맞춰져야 한다.
- 천편일률적 교육과정은 아이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
- 아이마다 맞는 학습의 방법이 다 다르다.
 
③ 교육의 치료요법적 전환
- 아동의 심리상태가 먼저고 교육은 그다음이다.
- 아이가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맹목적 믿음.
- 수업을 통해 긍정적인 감정을 쌓은 것에 대한 강조.
 
④ 교육이 사회문제의 해결 역할을 맡게 되는 것
- 좋은 가치는 교육이 모조리 수용하기
- 교육과정을 정치적 목적으로 홍보하기
- 교육과정을 가치·태도·감정을 변화시키는 수단으로 간주하기
- 사회 변화의 엔진으로서 교육

이러한 교육의 변화는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말로 덮여 있으며, 누구든 지향할만한 가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푸레디에게는 바로 그것이 문제다. 사회를 재생산하는 장치로서 교육제도의 역할인 ‘보편적인 지식에 대한 교육’과 ‘규율을 가르치는 것’이 낡고 억압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난 뒤, 교육제도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교육적인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다. 푸레디는 이를 ‘행복으로의 불행한 전환’이라고 부른다.
 
 

행복으로의 불행한 전환

새로운 정책들은 교육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식습득과 지적 발달의 역할을 너무나도 자주 평가절하한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교육의 잠재력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 교육학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 책 본문 198쪽.
 
최근 한국 학교에는 학생의 선택권이나 흥미를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고교학점제와 자유학기제가 무리하게 도입되었다. 학습 부담을 줄인다는 구실로 학생이 학교에서 들어야 할 수업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재난안전, 사이버폭력예방, 가정폭력예방 등 학생이 살면서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는 뭐든지 다루는 창의적 체험학습(자율활동)은 학교가 잡다한 교육과정으로 포화된 백화점처럼 운영되도록 만든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교육적으로는 그다지 의미를 갖지 못하는 잡무를 매우 증가시킨다. 푸레디의 지적처럼, 학교는 사회적 요구를 형식적으로 수용하는 공간으로 변하고 있으며, 정책당국은 학생의 지적 발달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는 것 같다는 인식이 교사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

다행히 자신이 맡은 교과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하는 교사는 흔치 않다.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학생이 이해하기를 기대하고, 수업을 통해 지적으로 성장하는 학생을 보며 기뻐한다. 다만,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을 깨우는 교사가 ‘열정적인 교사’로 불린다는 점, 공개수업을 하면 으레 활동형 수업을 준비한다는 점, 학생이 과거에 비해 공부를 못한다는 것을 체감하는 교사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푸레디가 말한 교육의 문제가 한국에서도 징후적으로 관찰된다. 교육 당국은 아동을 유아화하며, 그들이 지식을 배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신뢰하지 않으며, 공부를 잘할 필요가 없다고 가정하고 있는 듯하다. ‘각자의 진로에 맞는 공부’가 ‘학생이라면 해야 할 공부’보다 우선시되는 문화가 점점 퍼져나가고 있다.

오늘날 교육의 문제는 돌출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큰 흐름에서 파생되었다. 즉, 교육이 사회를 재생산한다는 것을 망각한 결과다. 한국 교육 당국은 교육학적으로 증명되어 온 교육의 방식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며, 과거와 다를 뿐 그 효과성이 입증되지 못한 교육정책을 무리하게 도입하고 있다. 과거에 관한 통찰을 상대화하는 교육의 사조는 학생을 지식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며, 학생의 개별적인 흥미와 행복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의 사조는 학생이 서로 소통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공통의 논의지반을 만드는 보편적 지식은 ‘자신만의 새로운 경험’에 그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

푸레디의 주장은 ‘과거의 교육이 좋았다’는 푸념이 아니다. 푸레디는 교육의 역할에 관한 성찰을 제시한다. 교육은 사회를 지적·도덕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스스로를 갱신할 역량을 보존하는 과정이다. 교육의 본질을 해체하는 것, 혹은 교육과 유사한 외양을 가진 것으로 인해 학교에서 교육활동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 토대를 잃는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교육이 학생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도록 복원하는 것이다. 학생이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공통’의 ‘보편적’ 사고의 틀이다. 보편적인 지식이 현재로 이어질 때, 사회는 과거를 비추며 자신을 갱신한다. 교육은 사회가 파편화되는 경향을 뒤집을 수 있도록 공통의 논의지반을 복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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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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