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4 여름. 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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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으로서 프랑스혁명 

정통주의 해석의 혁명사 인식에 대한 재검토

임지섭 | 정책교육국장

지난 글 「평등주의와 혁명적 폭력이라는 프랑스혁명사의 쟁점」에서는 프랑스혁명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인 정통주의와 수정주의를 소개하고, 그중에서 프랑스혁명의 ‘과정’을 둘러싼 주요 쟁점 중 하나인 파리 민중과 자코뱅의 평등주의와 혁명적 폭력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평등주의와 혁명적 폭력의 기저에는 프랑스혁명이 구체제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이번 글에서는 프랑스혁명이 해결하지 못한 구체제의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즉, 재정위기와 농업위기를 중심으로 프랑스 구체제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정리하면서, 프랑스혁명이 이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시도가 왜 실패했는지를 따져보고자 한다. 

이는 프랑스혁명의 ‘원인’과 ‘결과’를 둘러싼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사이의 논쟁과 연결된다. 정통주의 해석은 프랑스혁명이 복합적이기는 하지만 총체적으로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결정적인 계기를 이룬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본다. 반면 수정주의는 이러한 정통주의 해석을 비판하며, 프랑스혁명이 반자본주의적이고 복고적이라는 점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정통주의 해석과 수정주의 해석의 논쟁에서, 우리는 혁명과 이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쟁점을 잡아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프랑스혁명을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해본다. 프랑스혁명은 전제정의 자의적 지배를 법의 지배와 국민주권으로 대체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부르주아 혁명의 요소를 갖고 있었지만, 재정위기와 농업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봉기와 구성의 결합에 실패하면서 공포정치로 타락하고 이후에도 혼란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렇게 볼 때, 프랑스 민중과 자코뱅의 평등주의로부터 사회혁명과 공산주의의 맹아를 찾으려는 정통주의 해석의 혁명사 인식을 재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 구체제란 무엇인가

 
프랑스혁명사를 볼 때 가장 먼저 접하는 용어가 바로 ‘구체제’(Ancien Régime)다. 구체제는 말 그대로 ‘이전의’ 또는 ‘앞서 있었던’ 체제라는 뜻이다. 이는 혁명적 단절을 전제한 것이었는데, 실제로 구체제라는 용어는 프랑스혁명 직후인 1789~90년에 탄생해 19세기에 굳어졌다. 이후 역사학계에서 구체제를 시대구분의 단위로 사용하면서, 구체제는 넓은 의미에서 봉건제, 신분사회, 절대주의 등 다양한 층위를 갖는 역사적 총체라는 풍성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프랑스혁명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구체제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1) 봉건제와 중상주의

무엇보다 구체제는 기본적으로 농업사회였다. 18세기 프랑스의 대다수 농민은 12~13세기의 농노와 같이 영주에게 인신적으로 예속된 존재가 아니라 자유민이자 토지소유자(propriétaire)였다. 다만, 이 시기 프랑스의 토지는 영주의 상급소유권과 재판권이 적용되는 영지와 그러한 봉건적 부담을 지지 않는 자유지로 나뉘었다. 농민은 자신의 보유지를 자유로이 매매, 교환, 상속할 수 있었지만, 만약 그 보유지가 영주가 상급소유권을 보유한 영지일 경우 영주에게 여러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예를 들어 매년 수확 후 일종의 수확세인 샹파르(champart)를 영주에게 바쳐야 했으며, 보유지를 매각할 때 영주에게 매매가의 일부를 토지양도세로 납부해야 했다. 보유지를 매입한 자는 영민으로서 영주에게 취득한 토지의 정보와 함께 영주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나열한 신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러한 토지의 양도와 상속 과정은 기본적으로 영주의 상급소유권을 재확인하면서 토지가 영주의 통제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영주의 수입을 증대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농민은 전체 프랑스 토지의 약 30~40%를 소유했는데, 다만 농민의 절반 이상은 독립자영농이 아니라 타인의 토지를 임대해 경작하는 소작농이었다. 전체 토지의 60~70%를 소유하고 있지만 직접 경작하거나 경영하지 않았던 지주계급(귀족, 성직자, 부르주아 등)은 주로 임대차총괄대리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농민에게 자신의 토지를 임대하고 그 대가로 지대를 수취했다. 임대차총괄대리인은 봉건적 부과조와 교회 십일조 징수도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봉건적 부과조와 의무를 포함하는 전통적 토지 관계와 토지용익권과 지대를 교환하는 자본주의적 임대차 관계가 중첩되어, 농촌의 분배 구조가 복잡해졌다.

토지 임대차 관계는 생산물 분배 방식에 따라 정액소작제와 절반소작제로 나뉘었다. 정액소작제는 정해진 기간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사전에 정해진 액수만큼 금전이나 현물로 지대를 내는 방식이었는데, 프랑스 북부 대경작지대 일부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토지를 임차한 농민을 차지농(fermeier)이라고 불렀다. 절반소작제는 지주가 토지·가축·종자를 제공하면 임차인이 경작해 수확량의 절반을 지대로 내는 방식이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토지를 임차한 농민을 절반소작농(métayer)라고 불렀다.

17세기 말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나 영국의 농학자 아서 영은 당시 영국의 농업혁명과 비교할 때 프랑스의 지배적인 농업 생산관계였던 절반소작제를 빈곤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17~18세기를 거치며 영국은 인클로저 운동의 결과로 기존에 소규모로 분산되어 있던 보유지가 대지주나 부유한 차지농에게 집중되었다. 이들은 생산성을 높이려는 농업경영의 주체로서, 넓어진 경작면적을 바탕으로 식용작물과 사료작물을 함께 돌려 짓는 새로운 윤작법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휴경지를 없애고 가축과 비료를 증산함으로써 농업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농업혁명을 이뤘다.

반면 18세기 프랑스에 영국과 같은 자본주의적 농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여전히 소규모로 분산된 보유지와 마을 공동 경지를 여름 작물 재배지, 겨울 작물 재배지, 휴경지로 나누어 경작하는 전통적 방식인 삼포제가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그 결과 18세기 말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인구는 약 2~3배 많았지만, 수확량은 5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프랑스의 지주 계급은 농업생산성을 혁신하기보다는, 분산된 작은 단위의 토지를 농민에게 임대해 지대를 수취하거나 토지에 따르는 각종 봉건적 부과조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영주제의 잔재와 봉건적 부과조에 대한 불만이 컸다.

도시와 상업사회는 이러한 농업사회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과 같았다. 구체제 프랑스의 산업은 왕실과 귀족을 위한 사치품 생산에 집중되었다. 17세기 말 루이 14세의 재상 콜베르는 무역과 수출산업을 고취하기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 요지는 무역수지 흑자를 늘리기 위해 외국산 제품의 수입을 대부분 금지하고, 곡물과 원료의 수출을 금지하며, 보조금을 활용해 국가가 강력히 규제하는 견직물이나 사치품 제조소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리옹은 이렇게 성장한 견직물 산업에 기반을 둔 부유한 상인들이 지배하는 대표적인 도시였다.
 

2) 3신분제와 절대왕정

구체제는 또한 신분사회였다. 중세 이래로 유럽에서 신분제의 근간은 ‘기도하는 자’(성직자), ‘싸우는 자’(귀족), ‘노동하는 자’(평민)로 이루어진 3신분제였다. 제1신분인 성직자는 엄밀히 말하자면 신분보다는 직업에 가까웠다. 주교와 같은 고위성직자는 대개 귀족 출신이고 하급성직자는 평민 출신이었는데, 18세기로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졌다. 성직자 신분은 왕정으로부터 상당한 독립성을 누리는 한편, 독자적인 법인, 재판소, 행정기구를 운영했다. 

제2신분인 귀족은 본래 교회와 군주를 수호하는 기사의 모습이었으나, 16세기 이래로는 귀족의 혈통이나 가계를 계승한 자와 국왕의 귀족증서를 취득한 자로 규정되었다. 특히 왕정이 발달하면서 국왕은 총신을 모으고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직매매와 귀족증서 발급을 결합하기 시작했고, 상인이나 법률가와 같은 평민 출신 부르주아가 이를 활용해 귀족 사회에 통합되었다. 이렇게 귀족이 된 자들을 법복귀족(noblesse de robe)이라고 불렀다. 

법복귀족의 등장에 맞서 기존의 혈통귀족(대검귀족, noblesse d'épée)은 서류에 의해 증명되는 혈통과 미덕의 순수성을 강조하기도 하였으나, 이내 혼인과 후견제를 통해 혈통귀족과 법복귀족의 결합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절대왕정의 성장과 함께 프랑스의 귀족은 왕권에 포섭된 궁정귀족이 되었으나, 동시에 국가 재정에 깊숙이 관여하는 전주이자 재정가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특권신분으로서 귀족은 18세기 중반부터 국왕의 재정개혁 시도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제3신분인 평민은 특권신분과 비교해 단일한 신분을 이루었지만, 그 내부에서는 사회적 품계(dignité)에 따라 세밀하게 계서화되었다. 관리, 학인(學人), 귀족처럼 사는 금리생활자, 상인, 장인, 농민 등이 제3신분에 속했다. 평민의 계서제에도 신분적 질서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같은 장인이어도 귀족이 사용하는 사치품을 제조하는 장인이 생필품을 제조하는 장인보다 더 높은 품계를 가졌다.
 

이러한 신분제 사회에서 제도적인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대학, 동업조합, 아카데미, 고등법원과 같은 법인격을 지닌 ‘집단’이 존재했다. 따라서 구체제에서 보통법은 예외적으로 존재했고, 각 신분과 집단의 특수한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무수한 특수법이 존재했다. 영토 역시 특수주의의 혼합체였다. 왕령지 너머의 지방들은 왕국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독자적인 법과 지방삼부회를 유지했으며, 그 아래의 현, 도시, 읍, 촌락 역시 독자적인 집단으로서 성격을 유지했다.

이렇게 다양하고 특수한 신분, 사회집단과 법인체, 영토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국왕이었다. 본래 봉건왕정에서 프랑스의 국왕은 자신의 영지인 왕령지의 영주이자 ‘영주들의 영주’로서 종주였으나, 왕국의 신민 전체에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주권자는 아니었다. 중앙집권화 또는 절대주의의 발전은 국왕이 실질적 주권자로 변모하는 과정이었다. 

프랑스에서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화가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는 17세기였다. 루이 14세가 유럽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상비군을 확립하는 한편, 콜베르를 재무총감으로 임명하면서 재무행정이라는 근대적 의미의 행정이 출현했던 것이었다. 재무총감은 과세, 징세 청부, 화폐 주조, 교역과 관련한 업무를 관장했고, 이 재무총감을 중심으로 군주정은 행정과 전쟁을 수행했다. 이러한 변화를 두고 역사학계에서는 대법관을 중심으로 영주 간의 분쟁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사법국가’에서 재무총감을 중심으로 재무행정과 전쟁을 수행하는 ‘재정-군사국가’로 이행했다고 일컫는다.

한편 이렇게 형성된 프랑스의 정치체제를 절대군주제라고 칭하기도 한다. 본래 절대주의의 핵심원리는 국왕이 왕국의 유일한 주권자로서 절대권을 갖는다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하나의 체제로서 절대군주는 전지전능한 존재라기보다는, 단지 최고의 조정기능을 가진 특권의 조절자에 가까웠다. 즉, 프랑스 절대왕정의 중앙집권화는 여전히 지방적, 신분적, 집단적 특권이 존재하는 가운데, 재정-군사국가로서 결정권을 국왕에게 모으고 중앙과 지방 사이의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절대군주제는 시민사회의 형성에도 일정하게 기여했다. 국가가 물리적 폭력을 독점함으로써, 상업사회의 경쟁이 폭력적 수단이 아니라 이익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고 그 분배에 참여하는 비폭력적인 경제적 수단으로 집중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렇게 형성된 시민사회는 경제영역의 자율성에 기반한 자유로운 개인의 장이라는 점에서, 구체제의 제도권 바깥에 존재했다. 

18세기에 접어들어 상업사회가 발전하는 가운데 점차 프랑스 절대주의와 중상주의의 위기가 심화하면서, 새로운 개혁이념으로서 계몽사상이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확산했다. 이 과정에서 특권은 집단적 정체성의 징표가 아니라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프랑스혁명 초기에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2. 프랑스혁명의 원인은 무엇인가

 

1) 구체제의 재정위기

17~18세기 유럽은 해운업과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첨예해지는 한편, 주요 왕조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7세기 말부터는 영국과 프랑스의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었는데, 이는 막대한 재정을 요구했다. 특히 전쟁 비용은 통상적인 조세 수입만으로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채 발행이 필수였고, 이는 미래로 전가되어 지속해서 재정 부담을 강화했다. 

이러한 재정위기에 대한 양국의 대응 방향은 서로 달랐다. 영국은 명예혁명 이후 재산소유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의회가 과세에 대한 권한을 장악하고 조세제도와 신용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재정위기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반면, 아래에서 살펴볼 것처럼, 프랑스는 부패를 조직화하여 단기적인 재무효율성을 높이는 데 성공했지만, 재정가를 매개로 특권계급이 왕국의 재정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조세제도와 신용제도를 개혁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178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의 재정위기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이는 프랑스혁명이 발생하는 핵심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프랑스 군주정의 지출은 많이 늘어났다. 은의 양으로 환산했을 때 1600년에 250톤 정도였던 지출은 1788년에 2000톤을 넘었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전체 지출에서 왕실 지출이 17%였고 군비가 평균 52%로 가장 비중이 컸다. 이 시기의 군비와 전비는 장차 누적적으로 증가하는 재정적자와 부채의 원인이 되었다. 특히 통상적인 군비 지출과 달리 단기간에 막대한 규모로 요구되었던 전비는 대부분 부채로 조달되었고, 이는 고스란히 미래의 재정부담으로 작용했다. 18세기 초까지 전체 지출에서 부채 상환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15~20%였는데, 1788년에 이르면 전체 지출의 절반을 초과하게 되었다. 결국 18세기 프랑스 군주정의 지출에서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군비와 전비 그리고 그 비용이 미래로 전가된 부채였던 셈이다.

프랑스 구체제는 이러한 재정지출을 어떻게 충당했을까? 먼저 조세제도에 대해 살펴보자. 구체제의 경상수입은 크게 보아 직접세와 간접세로 구성되었다. 직접세에는 타유세, 인두세, 20분의 1세가 있었다. 1439년 신설된 타유세(taille royale)는 군역을 대신하는 세금으로 간주되어 귀족이나 성직자는 면세되고 평민만이 과세대상이었다. 인두세와 20분의 1세는 본래 모든 프랑스인에게 부과되는 정률세로 신설되었으나, 직접세 징수를 불명예로 여기는 특권신분과 조합이 분담금을 내는 대신 조세 부과 대상에서 빠지면서, 결국 타유세에 부가되는 조세가 되었다. 간접세에는 포도주와 같은 상품의 판매에 부과되는 보조세, 소금에 부과되는 염세, 그리고 거래세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기에 경상수입은 총지출에 한참 미달했다. 예를 들어 1788년 기준으로 전체 경상수입은 약 3억 5천만 리브르였던 반면, 총지출은 6억 3천만 리브르에 달했다.

따라서 국왕은 경상수입 외에 제때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수많은 임시방편을 동원해야 했다. 대표적인 수단은 관직매매와 공채매각이었다. 관직매매는 특히 17세기에 성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법관직이 만들어졌고 재정관직이 매관직으로 바뀌었다. 관직매매는 단기간에 손쉽게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었지만, 이로 인해 비생산적 관직이 남발되었고 국가의 재무 행정이 재정관의 사적인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재정관이 국왕에 대한 대부를 독점하면서, 재정관 자신이 사적으로 관리하는 조세 국고를 담보로 국왕에게 단기 자금을 대부하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 이러한 관행에서 재정관과 징세청부업자는 국왕의 요구에 따라 앞으로 걷을 조세를 담보로 일정액을 수표로 선납해주었다. 이자율은 약 5% 정도였는데, 이는 국왕이 동원할 수 있는 부채 가운데 가장 낮은 이자율이었다. 

루이 14세 시대의 재무총감 콜베르는 이러한 관행을 제도화하여, 세입을 담보로 한 선납체제로 재무 행정을 확립했다. 이제 직접세는 해마다 중앙에서 총액을 정하고 지역별로 이를 할당하면, 지역의 재정관과 계약을 맺은 징세청부인이 조세를 거두어 약정한 금액만큼 재정관에게 납부하는 방식으로 수취되었다. 간접세 역시 마찬가지로 징세청부인이 거두어 약정한 금액만큼 국가에 납부하였는데, 다만 기존의 징세청부업을 더 큰 단위로 조직해 부호와 재정가에게 안전한 투자처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17세기 말까지 염세, 관세, 보조세, 왕령수입과 같은 거의 모든 간접세가 통합되어 하나의 총괄징세청부회사에 도급되었다. 이에 따라, 구체제 프랑스의 조세제도는 매관제와 선납제가 결합되는 독특한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렇게 매관제와 선납제가 결합된 프랑스의 조세제도는 단기적으로는 재정관을 매개로 왕국의 부를 효율적으로 결집할 수 있었으나, 경제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조세 수입 증가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직접세와 간접세 모두 징세청부업과의 계약으로 사전에 약정한 금액을 받는 총액제로 운영되었기에, 생산성·인구·교역의 증가를 조세의 증가로 흡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부분 특권신분 출신인 재정관과 이를 매개로 한 왕국의 부유층이 사적인 대부관계로 국가의 재정을 장악하면서 막강한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경상수입과 관직매매로도 채울 수 없는 재정지출은 공채매각을 통해 채워졌다. 그러나 루이 14세 시대에 막대한 전비를 채우기 위해 채권을 남발함에 따라, 1715년 시점에서 세입 대비 부채 원리금 상환액이 80%에 이르렀고, 결국 왕정은 파산을 선고했다. 루이 14세 시대의 채권을 액면가치의 절반 이하만 인정하거나, 강제로 영구공채나 종신공채로 전환해버린 것이었다. 이후에도, 1726년에는 공채이자율을 무단으로 인하했고, 1759년과 1769년에는 부분 파산을 선고했다. 

결국 왕정이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파산을 반복한 프랑스에서는 안정적인 자금시장이나 장기 신용제도가 발전할 수 없었다. 18세기 말로 갈수록 프랑스 왕정은 9~10%가 넘는 고율의 이자를 약속하는 단기 부채와 종신공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빌린 자본의 4~5배에 달하는 원리금을 단기간에 상환해야 하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178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악순환은 한계에 달했고, 남은 해법은 특권신분의 면세특권을 폐지해 세수입을 늘리거나, 매관제와 선납제에 기반한 기존의 재정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그러나 주요 납세자인 제3신분의 납세 부담이 한계에 달한 가운데, 직접세 증가는 큰 사회적 저항과 특권신분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재정관과 이를 매개로 한 왕국의 부유층을 구성하는 특권신분 역시 막강한 기득권 세력으로서 국왕의 개혁에 강력히 저항했다. 루이 16세 시대에 왕실은 재정개혁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무능력 상태에 빠졌으며, 재정위기를 둘러싼 갈등은 광범위한 정치·사회적 불만이 표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루이 16세가 최후의 수단으로 소집한 삼부회가 프랑스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2) 구체제의 기근과 도시의 식량폭동

농업생산성이 낮았던 구체제 프랑스에서 기근과 식량폭동은 주기적으로 빈번하게 발생했다. 구체제의 마지막 20년간 곡가는 65% 상승한 반면, 임금은 22% 증가하는 데 그쳤는데, 근본적 원인은 인구 증가를 곡물 생산의 증가가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도시의 식량폭동은 점차 기근이라는 자연적 변수 외에도 도시화와 시장화에 따른 사회적 변수의 영향을 크게 받기 시작했다. 즉, 프랑스는 점점 더 시장에 의존하는 식량공급체계가 확대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상업사회와 시장의 원리가 민중의 삶에 빠르게 침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자급자족과 생계확보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국왕의 신성한 의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민중이 보기에, 곡물의 공급을 상인에게 온전히 맡기는 것은 국왕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1760년대부터 민중 사이에서는 ‘기근 협정’이라는 말이 널리 유행했는데, 이는 국왕이 투기꾼과 결탁해 곡물 가격을 올려 민중을 굶주리게 한다는 음모론이었다. 예를 들어 루이 15세를 비난하는 한 익명의 비방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앙리 4세 시절에는 전쟁 때문에 기근이 발생했지만, 우리에게는 왕이 있었다. 루이 14세 때에도 마찬가지로 전쟁 때문이든, 불순한 날씨 때문이든 여러 번의 기근이 발생하였지만, 역시 우리에게는 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기근이 발생한 것은 전쟁 때문도, 실제로 곡물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왕이 없다. 왕 자신이 바로 곡물 상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주요 도시에서는 국왕에 대한 탈신성화가 확산했는데, 이는 프랑스혁명 시기 왕궁에 대한 파리 민중의 급진적 행위를 설명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행된 곡물교역 자유화 정책과 뒤이은 곡가의 상승은 민중의 전통적 권리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인식되었고, 1775년 ‘밀가루전쟁’이라고 불리는 식량폭동을 불러일으켰다. 밀가루전쟁은 프랑스혁명 이전에 구체제에서 마지막으로 발생했던 주요한 식량폭동이었다. 이는 구체제 식량폭동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드러나게 될 새로운 양태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밀가루전쟁이 처음으로 시작된 보몽쉬르와즈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민중에 의한 공정가격제라는 전형적인 행동 방식에 따라 식량 확보를 위한 직접 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빵 가격은 리브르 당 2수, 밀가루 가격은 부아소 당 20수가 공정가격이라고 주장하면서 강제로 그 가격에 식량을 구매했다. 이어 식량폭동은 파리와 인근 도시로도 확산했다. 이러한 양상은 프랑스혁명기에 최고가격제를 요구한 파리 민중의 직접행동과 함께, 생존권이냐 소유권이냐를 둘러싼 논쟁이라는 형태로 반복되어 나타날 것이었다. 나아가 일부 농촌에서는 부농, 교회, 영주의 재산에 대한 직접적인 약탈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러한 식량폭동과 농민봉기의 결합은 1789년의 도시혁명과 농촌혁명의 전조인 셈이었다.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루트는 18세기 식량폭동이 영국에서는 거의 성공하지 못한 데 비해 프랑스에서는 성공적인 관행으로 정착했다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양국의 곡물정책의 차이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영국은 1670년대부터 곡물 가격을 낮게 유지해 도시 주민의 생계비와 임금을 낮게 유지함으로써 제조업을 지원하는 중상주의적 저곡가 정책 대신, 곡물수출을 장려해 농업생산자를 지원하는 정책을 선택했다. 반면, 프랑스는 콜베르의 중상주의 정책이 확립된 이후 18세기까지 중상주의적 저곡가 정책을 유지하며 곡물수출을 제한했다. 18세기 중반에 케네와 튀르고를 비롯한 중농주의자는 영국의 농업자본주의와 곡물수출 자유화 정책을 프랑스에서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정책에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대다수 프랑스 지주계급은 생산성 혁신에는 무관심한 가운데 지대와 봉건적 부과조를 수취하고 베르사유의 궁정귀족이 되는 데에만 열중했다.

결국 프랑스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지대추구적인 엘리트 집단과 권력이 모였고, 이들은 농촌에는 무관심한 반면 권력과 물리적으로 가까운 도시 민중의 움직임에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베르사유에서 불과 반나절 거리에 있으면서 당시 인구가 60만 명에 이르렀던 파리에 대해 그러했다.) 이에 대해 루트는 식량폭동과 공정가격 요구로 대표되는 도시 민중의 ‘도덕경제’의 실상이란, 농촌을 희생해 도시 주민의 불만을 달래는 불공평하고 비생산적인 체제를 반영하는 것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구체제에서 도시와 농촌의 이러한 관계는,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파리 민중의 최고가격제 요구와 방데 농민 반란에 대한 잔혹한 진압이라는 비극적인 형태로 반복되었다. 
 
 

3. 프랑스혁명으로 가는 길

 
프랑스혁명이 농촌에 미친 영향과 농민 혁명에 주목해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개척하며 정통주의 해석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받는 조르주 르페브르(1874~1959)는 프랑스혁명이 귀족 혁명, 부르주아 혁명, 도시 민중 혁명, 농민 혁명이라는 복잡한 4막극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수정주의 해석의 대표자인 퓌레 역시 이러한 설명을 대체로 따르며, 1789년 혁명은 변호사의 혁명, 파리의 혁명, 농민의 혁명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틀을 바탕으로, 위에서 살펴본 구체제의 모순이 어떻게 프랑스혁명으로 전개되는지 살펴보자.
 

1) 귀족혁명에서 국민혁명으로

18세기는 부르주아와 계몽사상이 발전한 시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른바 봉건적 반동으로 불리는 귀족의 최종적 공세가 강화된 시대이기도 했다. 프랑스혁명의 발단은 그 공세가 절정에 달했을 때 시작되었다. 1786년 8월, 재무총감 칼론은 근본적인 재정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국왕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종래의 20분의 1세를 폐지하고, 대신 모든 토지소유자가 예외 없이 일률적으로 납부하는 보조지세(補助地稅)를 새로 부과할 것을 제안했다. 나아가 신분의 차별 없이 모든 토지소유자에 의해 선출된 대표로 구성되는 지방의회를 신설하고 이 지방의회에 세금의 할당을 일임하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계획은 특권신분의 면세특권을 제한하는 한편 구체제의 사회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칼론은 고위 성직자, 대영주, 고등법원 법관, 지방삼부회와 도시 대표 등 귀족의 여러 대표로 구성된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해 자신의 계획을 승인받고자 했다.

1788년 2월 소집된 명사회에서 명사들은 제안된 보조지세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보조지세가 보편적이며 영구한 조세가 아니라 오직 재정적자만을 보충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가 재정 상황을 명사회에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신분제와 봉건적 권리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지방삼부회가 과세를 승인하고 스스로 선택한 방법으로 징수해 중앙 재정에 선납하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명사회에 모인 귀족은 보조지세를 제한적으로 승인하는 대신, 국가 재정에 대한 감사권을 요구하는 한편 귀족이 지배하는 지방의회로 지방 행정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었다. 칼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명사회는 격렬히 항의하면서 특권신분이 그대로 으뜸가는 사회적 지위를 유지한다는 조건에서만 세금을 부담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하였다. 결국 5월에 명사회는 해산했고, 공은 고등법원으로 넘어갔다.

프랑스 구체제에서 고등법원은 본래 왕족이 관할하는 도시에서 발생한 사건을 처리한 데서 유래했는데, 사법기능 외에 국왕의 칙령을 등기(enregistrement)하는 입법기능도 수행했다. 구체제에서 국왕의 칙령은 고등법원의 등기를 거쳐야만 효력을 가질 수 있었는데, 고등법원은 국왕의 칙령 등기를 거부하고 수정을 요구하는 간주권을 갖고 있었다. 만약 고등법원이 등기를 거부하면, 국왕은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대법관과 청원심사관을 거느리고 직접 참석하는 친림법정을 열어 칙령의 등기를 강요할 수 있었다. 고등법원 법관은 16세기부터 본격화된 관직매매와 세습이 결합되어 형성된 ‘법복귀족’이 중심이었다. 루이 14세 시대에 간주권을 잃었다가 18세기에 들어서 이를 회복한 고등법원은 세제개혁 반대를 중심으로 인민의 어버이를 자처하며 국왕권에 대한 귀족적 반대의 선봉에 섰다.

파리 고등법원은 보조지세 법안 등기를 거부했고, 새로운 과세를 의결할 권리는 오직 삼부회에 있다고 주장했다. 루이 16세는 친림법정을 열어 법안을 등록시켰으나, 이내 고등법원은 이를 무효라고 선언했다. 국왕은 파리 고등법원 법관을 추방하는 것으로 대응했는데, 그러자 고등법원은 왕국의 모든 신하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자연권으로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즉, 프랑스인은 정상적인 법관에 의해서만 재판되어야 하며, 법관은 그 신분이 보장되고 자의적으로 체포되거나 구금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대귀족과 성직자 회의마저 고등법원의 편에 서자, 결국 국왕은 1789년 5월 1일 삼부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법원은 소집될 삼부회가 1614년의 삼부회와 동일하게 세 신분(성직자, 귀족, 제3신분)으로 구성되며, 각 신분은 동일한 대표 수를 가지고 표결은 신분별로 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곧 귀족신분의 승리를 의미했다. 요컨대 1789년 삼부회 소집으로 귀결된 귀족혁명이란, 국왕의 자의적 조세 부과와 사법 집행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성격과 함께, 신분적 차별과 특권을 고수하는 봉건적 성격을 동시에 갖는 것이었다.

삼부회에 참석할 각 신분의 대표는 작은 지역 선거구부터 가장 큰 대선거구에 이르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선출되었다. 각 신분의 선거인은 대표를 선출하기 전에 의견을 모아 진정서를 작성하고 이를 모아 삼부회에 제출했는데, 세 신분의 진정서 모두 절대왕권에 반대했다. 과세를 결정하고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갖는 삼부회를 정기적으로 열도록 하고, 개인의 자유와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의 헌법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3신분 대표들은 이러한 공통적 요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신분적 특권의 폐지와 함께 완전한 시민적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삼부회 소집에 앞서 1월에 출판된 시에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로 제3신분의 요구를 요약했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가? 무언가 되기를 원한다.” 제3신분은 삼부회의 대표 수와 표결 문제와 관련해서는, 제3신분의 대표 수를 성직자 대표와 귀족 대표의 수를 합한 것과 동일하게 해야 하며, 표결은 신분별 표결이 아닌 머릿수 표결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족 대표는 이를 수용할 수 없었고, 전통적 사회질서를 방어하기 위해 국왕과 손을 잡았다. 삼부회는 이제 제3신분과 특권신분 간의 투쟁이 핵심 쟁점이 되었다.

삼부회가 대표 수와 표결 방식 문제를 두고 한 달 넘게 표류하면서, 제3신분 대표들은 점차 급진화했다. 이들은 삼부회가 자율적으로 그 구성원의 자격을 심사하도록 하는 새로운 자격심사를 내걸고, 강제위임을 거부하고 각 대표에게 자유로운 발언권과 전권을 부여하는 이른바 대의적 위임을 표방하면서, 삼부회가 신분 대표가 아닌 국민 전체의 대표가 모인 의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왕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가려면 먼저 삼부회의 일체성이 확립되어야 했고, 그러려면 의회가 그 구성원의 자격을 자율적으로 심사하고 심판할 권리부터 갖추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공동 토의와 1인 1표 및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의 법적, 논리적 전제였다.)

이제 제3신분 대표들은 자신의 신분회의를 ‘국민의회’라고 칭하고, 성직자 대표와 귀족 대표에게 국민의회에 합류할 것을 요구했다. 즉, 제3신분은 이제 국왕의 승낙 없이 스스로 새로운 국민의 대표 기관임을 자처하며 국왕주권이 아닌 국민주권을 주장한 것이었다. 나아가 6월 20일에는 “왕국의 헌법이 제정되어 확고한 토대 위에 자리 잡을 때까지 해산하지 않고 어디서든 회의를 계속할 것을 서약”했다(테니스코트의 서약). 
 

귀족 출신과 평민 출신 대표가 섞여 있었던 성직자 대표들은 타협을 위해 과반이 국민의회에 합류할 것을 결의했다. 결국 국왕은 세 신분의 합동을 승낙했고, 6월 27일 귀족 대표도 국민의회에 합류하게 되었다. 세 신분대표가 모두 합류한 국민의회는 7월 7일 헌법기초위원회를 임명하면서 제헌의회가 되었다.

이로써 르페브르가 법률혁명 내지는 국민혁명이라고 부르는 부르주아의 혁명이 성취되었다(퓌레는 이를 ‘변호사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제3신분의 국민혁명은 국왕의 자의적 과세와 사법 집행에 반대하는 세 신분의 공통적 요구를 바탕으로 한발 더 나아가, 삼부회를 신분별 의회가 아니라 국민의 대표가 모인 국민의회로 변모시킴으로써 국왕주권이 아닌 국민주권을 실현한 것이었다. 
 

2) 도시 민중과 농민의 혁명

그러나 국민의회에 합류한 이후, 귀족 대표는 국민의회에 제대로 참석하지 않거나 자기 지방으로 내려갔다. 국왕은 파리와 베르사유 주변에 군대를 집결시켰고, 7월 11일에는 국민의회에 우호적이었던 네케르를 파면하고 새로운 내각을 조직했다. 점차 국왕과 귀족이 국민의회에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의구심이 커졌다. 바로 그때, 도시 민중과 농민의 폭력이 개입해 이를 저지했다. 르페브르는 물리적으로 취약했던 법률혁명에 도시 민중과 농민의 혁명이 결합하면서, 비로소 구체제를 완전히 끝낼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구체제 말기에 도시 민중은 수공업자와 상점주를 비롯한 소시민층부터 직인이나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지만, 대체로 세금과 귀족 신분에 불만이 많았다. 삼부회 소집과 국민의회 형성은 민중에게 변화의 희망을 품게 했는데, 특히 베르사유와 가까운 파리 민중은 삼부회와 국민의회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국왕이 네케르를 파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왕과 귀족이 무력과 외국군을 동원할 것이라는 ‘귀족의 음모’가 파리에 광범위하게 퍼졌다. 게다가 1788년부터 흉작으로 인해 다시 오르기 시작한 곡가는 이러한 귀족의 음모라는 관념을 강화하고 확대했다. 전체적으로 물가는 1726~41년을 기준으로 1785~89년에 65% 상승했다. 파리는 그나마 정부가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곡식을 시장 가격보다 싸게 판매해 사정이 나은 편이었으나, 이러한 물가상승은 루이 14세 시대 이후 최고 수준이었다. 

파리 민중은 7월 12일부터 시위에 나섰다. 부르주아는 삼부회 소집을 위해 봄에 60개의 선거구에서 선출되었던 4백여 명의 선거인의 주도로 파리 시청에 비공식적인 자치체를 구성하고 지구마다 국민방위대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 14일에는 파리 민중이 무장을 확대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고, 국왕은 수도를 잃은 셈이 되었다. 이로써 이른바 도시 혁명이 시작되었다. 파리 외의 다른 도시 역시, 부르주아가 주도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조직하고 새로운 상임위원회나 자치체(코뮌)를 형성해 도시 행정을 접수했다. 18세기부터 절대왕정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해 온 도시의 자치 요구가 국민의회 형성과 경제위기를 만나며 실현된 것이다.

‘귀족의 음모’와 경제위기의 결합은 농촌에서도 나타났다. 18세기에 물가가 평균 65% 오르는 가운데 소작료는 2배 가까이 인상되었고, 구시대의 잔재로 여겨지는 봉건적 부과조와 공납에 대한 요구는 여전했다. 낙후한 농촌에서 1788년의 흉작과 기근은 영주와 봉건적 부과조 그리고 십일조에 대한 농민의 반감에 불을 질렀고, 농촌수공업의 위기와 실업의 증대는 비적에 대한 농민의 공포를 자극했다. 결국 1789년 7월부터, 도시혁명과 거의 같은 시기에 농촌 곳곳에서 무장한 농민이 성과 수도원을 공격해 봉건적 의무가 적힌 문서를 태우는 농민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농민은 봉건제와 영주제의 잔재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고, 스스로 소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르페브르는 이 농민혁명이야말로 프랑스혁명의 가장 독특한 점이며, 농민과 도시 민중의 혁명이 없었다면 부르주아의 혁명도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의 혁명은 기본적으로 구체제에서 반복되었던 민중의 식량폭동과 공정가격 요구라는 복고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4. 프랑스혁명이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

 

1) 구체제에 반대하는 국민혁명

도시혁명과 농민혁명이 구체제를 사실상 작동불능 상태로 만든 1789년 8월 시점에서, 국민의회는 도시와 농촌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농촌에서의 소식을 들은 국민의회는 봉건제 문제를 두고 8월 4일에서 11일에 걸쳐 격렬히 논쟁했다. 논쟁의 핵심은 십일조나 봉건적 부과조와 같은 봉건적 재산권을 어떻게 폐지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십일조는 교회가 수행하는 공적봉사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가 아무런 보상 없이 폐지할 수 있다는 견해가 수용되어 무상 폐지되었다. (같은 이유로,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이를 국가의 채권자에게 담보로 제공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교회 재산의 국유화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이었는데, 이는 석 달 뒤인 11월에 실현되었다.) 다만, 교회의 유지를 위해 국가가 십일조를 대신할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문제가 남았다.

봉건적 부과조 폐지 문제는 훨씬 복잡했다. 한편에서는 봉건적 부과조 폐지 역시 일반적 의미에서 재산권 침해라는 주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봉건적 권리가 공권을 침해한 것이기 때문에 무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인신적 부과조는 무상으로 폐지하고, 물적 부과조는 마지막 액수의 30배(3.3%의 이자율)로 되사기를 통한 유상으로 폐지하기로 했다. 국민의회는 이를 종합해, 8월 11일 “봉건제를 완전히 폐지”하는 법령을 가결했다. 이 법령에서 말하는 봉건제의 폐지란, 모든 인신적 예속과 십일조를 무조건 폐지하며, 만인에게 공직을 개방하고, 영주재판권을 폐지해 평등한 무상 재판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봉건제 문제를 해결한 국민의회는 이제 1789년 혁명의 상징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작성하고 8월 26일 채택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또한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인권 선언은 일반적 원칙을 선언하는 형태로 되어 있지만, 당대인에게 그것은 구체제에 대한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반대를 담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주권이 국민에게 속한다는 것은 프랑스가 국왕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개인의 자유와 법의 지배를 강조하며 법에 따르지 않고서는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않는다는 것은 국왕의 자의적 지배와 칙명 체포장이 무효가 되었다는 것을 말했다. 인간이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는 것은 신분적 특권이 부당하다는 것이었고, 압제에 대한 저항을 인정하는 것은 7월 14일의 봉기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인권 선언은 ‘구체제의 구체적인 사망 증서’였다. 인권 선언을 작성할 때 국민의회가 생각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미래의 청사진보다는 과거와의 단절이었다.

물론 과거와 미래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국민의회는 인권 선언이 제시하는 새로운 사회의 원리에 따라 개혁을 시도했다. 국민의회의 가장 중요한 개혁 중 하나는 새로운 형사 소송의 절차와 형법의 근본 원리를 천명한 것이었다. (“아무도 법과 또한 법에 따라 규정된 수속 절차에 의하지 않고 고소, 체포, 구금되지 않는다.”) 또한 모든 사람은 유죄 판결이 있을 때까지는 무죄로 간주되어야 하며, 법은 소급할 수 없으며, 법은 필요불가결한 형벌만을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개인의 자유와 관련해 법의 지배와 형법 개혁이 강조되었던 것은 구체제에서 국왕의 자의적 지배와 형사 절차의 결함이 모든 사람을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경제활동에 대한 중상주의적 규제와 개입도 하나씩 제거되었다. 1790년 10월에는 국내 관세를 철폐하고 이듬해 3월에는 길드를 폐지해, 상품유통의 자유와 영업의 자유를 확고히 했다. 요컨대, 1789년의 혁명은 봉건제와 영주제의 잔재를 소멸시키고, 절대왕정의 자의적 지배와 개입을 법의 지배와 개인의 자유로 바꾸며, 신분적 특권을 폐지해 신민을 국민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국민혁명이었다. 
 

2) 부르주아의 무능과 반복되는 민중의 ‘질투의 권리선언’

그러나 혁명 이후에도 구체제가 붕괴한 핵심 원인 중 하나였던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조세제도 개혁과 화폐신용제도의 재구성은 사실상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민의회는 8월 10일 새로운 세제가 확정될 때까지 기존의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포고했지만, 구체제가 정지한 상황에서 실효성이 없었다. 게다가 국민의회는 구체제의 막대한 부채를 그대로 떠안았을 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폐지하면서 교회의 운영비 역시 새로이 책임져야 했다. 

결국 국민의회가 선택한 것은 또다시 국채를 발행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국민의회는 네케르가 제출한 3천만 리브르의 국채를 가결하면서 이자율을 4.5%로 정함으로써, 사실상 국채 모집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구체제의 종신공채 이자율이 9~10%에 이르렀던 점을 감안할 때, 4.5%의 이자율로는 채권자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민의회는 몇 주 뒤 다시 8천만 리브르의 국채를 승인했으나, 시행세칙을 결정하지 않고 재정 담당자에게 일임해버렸다.

이후 국민의회가 선택한 해법은 8월에 처음 제기되었던,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고 이를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아씨냐(Assignat)라고 불린 이 공채는 처음에는 5%의 이자율에 4억 리브르의 규모로 발행되었다. 그러나 가치의 기반이 되는 교회의 토지자산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 없이 남발되면서, 아씨냐는 이내 이자율이 폐지되고 강제통용력을 가진 불환지폐가 되었다. 남발된 아씨냐는 계속해서 평가절하되면서 물가상승을 추동했다. 1788년과 같은 흉작이 없었음에도, 1791년 봄에 이미 15% 가까이 감소한 아씨냐의 가치는 전쟁이 겹친 1793년 여름에는 70% 이상 감소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결과는 공포정치로의 이탈이었다. 도시 민중은 구체제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통제경제를 요구했다. 특히 파리 민중은 폭력을 동반한 직접정치를 통해 끊임없이 의회를 압박했다. 그러나 최고가격제는 유통에서 생필품을 퇴장시키고 매점매석을 추동해 물가상승과 폭동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이 과정에서 몰수의 범위는 ‘혁명의 적’의 재산으로 확대되었고, ‘혁명의 적’의 범위는 망명귀족에서 시작해 매점매석과 투기를 일삼는 비애국적인 자로까지 확대되었다. 전제정에 맞서 법의 지배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18세기 계몽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자코뱅의 공포정치는 화려한 평등주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전제정보다 더욱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정변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며 공포정치가 종식되고, 1795년 새롭게 채택된 헌법에 따라 양원제 입법부와 5인의 총재에게 위임된 행정부(총재정부)가 출범했다. 새 헌법과 총재정부의 핵심은 권력분립을 최대한으로 추구하여 공포정치와 같은 권력의 집중과 독재를 막는 한편, 왕당파와 민중파의 양극단을 제어하며 공화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재정부 역시 재정위기 해결과 화폐신용제도의 재건에는 실패했다. 이제 실질가치가 3%에 불과한 아씨냐는 결국 1796년 폐지되고, 액면가의 3.3%로 새로운 지폐인 토지어음으로 교환되었다. 토지어음은 약 10억 리브르로 평가되는 국유재산을 담보로 발행되었으나, 아무도 신용도가 전무한 토지어음을 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1년 만에 폐지되었다. 

반복되는 화폐신용제도의 붕괴와 그로 인한 경제위기는 부자에 대한 민중의 분노와 평등주의적 열정을 계속해서 불러일으켰다. 1795년 11월, 바뵈프는 「프랑스혁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것은 특권층과 민중, 부자와 빈자 사이의 전쟁이다. … 넉넉히 소유한 자들이 넉넉하지 못한 자들의 부족을 채워주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의무다.” 프랑스혁명으로 지배계급이 되었으나 지대추구적이었던 부르주아의 무능과, 그에 대한 반동으로 격화하는 민중의 자코뱅적 평등주의의 반복이야말로 프랑스혁명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5.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으로서 프랑스혁명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프랑스는 다시 부르봉 왕조로 돌아갔다. 다만 왕정으로의 복귀가 구체제로의 복귀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루이 18세가 반포한 헌장은 양원제 의회와 내각제를 규정했고, 법 앞에서의 평등, 취업의 자유, 재산에 비례하는 납세, 자의적인 억압과 체포로부터의 자유, 종교와 출판 및 언론의 자유, 소유권의 불가침성 등을 제시했다. 1814년 프랑스는 1789~91년 이후 25년을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프랑스는 왕정과 공화정, 극우와 극좌를 오가며 안정적인 헌정질서를 구축하지 못했다. 경제 역시 19세기 초까지는 구체제와 사실상 달라진 점이 거의 없었다. 농업에서는 소농경제가 지배적이었고, 산업에서는 필수품을 생산하는 면직물산업 대신 사치품을 생산하는 견직물산업과 모직물산업이 지배적이었다. 프랑스혁명의 결과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의 대부분은 산업자본가가 아니라 전쟁과 투기로 부자가 된 금융자본가와 청부업자였다.

프랑스와 달리 영국에서는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입헌군주제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바탕으로, 의회가 신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호하고 국왕의 채무 이행 거부로부터 채권자들을 보호함으로써 재산권을 보장했다. 나아가 상업사회의 발전에 적합하게 조세제도와 화폐신용제도를 정비하여, 민간의 부의 증가를 효과적으로 촉진하고 공공의 재정을 확충했다. 영국은 17세기 말부터 징세청부업을 폐지하고 선발된 관료를 통해 조세행정을 관리하면서 경제성장에 따른 부의 증가를 효과적으로 조세의 증가로 흡수했다. 또한 정부채권을 발행할 때마다 주로 조세저항이 적은 간접세 증대를 바탕으로 상환 기금을 적시에 마련하고, 고율의 단기 채권을 저율의 영구공채로 전환하면서 공공부채를 효과적으로 관리했다. 특히 영국은행은 정부의 채권은행으로서 국채의 신용을 지지했고 지폐발권 독점권을 획득해 화폐시장을 안정화했는데, 이는 아씨냐 지폐의 실패 속에서 허덕인 프랑스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수정주의 해석의 대표자인 퓌레는 이러한 결과에 주목하며, 프랑스혁명을 프랑스 사회가 스스로 자본주의적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것으로 본다. 그는 르페브르와 소불을 비롯한 정통주의 해석이 프랑스혁명을 귀족 혁명, 부르주아 혁명, 도시 민중혁명, 농민혁명이라는 이질적인 혁명의 종합체로 올바르게 분석하면서도, 정작 프랑스혁명을 하나의 전체로서는 자본주의적이고 시민적인 새로운 사회 건설의 결정적 계기를 만든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평가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즉, 정통주의 해석이 사회주의 혁명의 맹아로서 주목한 도시 민중혁명이나 농민혁명은 (정통주의 해석도 인정하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과거지향적인데, 이를 부르주아 혁명에 포함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결국, 프랑스혁명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해석의 차이는,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볼 수 있느냐 아니냐의 쟁점으로 귀결된다.

정통주의와 수정주의의 분석을 종합해보면, 프랑스혁명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1789년의 혁명은 전제정의 지배를 법의 지배로 바꾸고, 봉건제와 영주제의 잔재를 소멸시키며, 신분적으로 계서화된 신민을 권리에서 평등한 자유로운 개인으로 바꾼 국민혁명이라는 점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프랑스 부르주아와 민중은 구체제의 위기가 폭발한 핵심 원인이었던 재정위기와 농업위기를 해결하지 못했다. 상업사회의 발전에 적합한 새로운 경제 원리와 제도가 구성되지 못했고, 농업생산의 기술과 방식 측면에서 혁명 이후의 소농경제는 구체제와 거의 다를 바 없었다.

특히 구체제 붕괴 이후 경제와 사회의 재생산이 위기에 빠지고 귀족, 부르주아, 도시 민중, 농민의 이해관계가 갈등하는 상황에서, 아씨냐의 실패로 대표되는, 부르주아의 무능으로 인한 화폐신용제도의 반복적 위기는 민중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이런 가운데 파리 민중은 직접정치와 ‘혁명의 적’에 대한 폭력적 억압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생존권과 이해관계를 관철하고자 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코뱅은 자신이야말로 주권자 민중의 일반적 이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며 공포정치를 제도화했다. 그 결과, 전제정의 지배에 맞서 개인적 소유와 자유를 보장하고자 했던 프랑스혁명은 오히려 개인과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압적 인민의 지배로 이탈했다. 명예혁명 이후 영국과 비교하면, 프랑스혁명의 이러한 이탈은 더욱 두드러진다. 

소불을 비롯한 정통주의 해석은,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 확립된 부르주아적 재산권이 민중을 배제하기 때문에 한계적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의 원인, 공포정치로 이탈하는 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살펴보면, 프랑스혁명이 보인 한계의 핵심은 그보다는 ‘봉기와 구성의 결합’에 실패했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정통주의 해석과 달리,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라기보다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었을까. 나아가 이렇게 프랑스혁명을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으로 본다면, 프랑스 민중과 자코뱅의 이념과 운동으로부터 사회혁명과 공산주의의 맹아를 찾으려는 정통주의 해석의 혁명사 인식은 재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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