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4·10 총선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의 혁신을 논해야 할 이유

박준도 | 사무처장


1. 진보당의 ‘민주진보연합’ 눈치 보기

민주노총이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할 때부터 한국진보연대는 선거연합정당이 민주진보연합의 매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거연합의 핵심은 다수세력은 집권전략, 소수세력은 교두보 전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진보대단결이 전제가 돼야 합니다.” 애초부터 한국진보연대는 민주노총 선거연합정당이 만들어지면 민주진보연합 용도로 사용할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사실 2021년 9월 진보당 정기대의원대회에 제출된 집권전략보고서는 ‘자력 원내 진출’을 강조하고 있다. 2024년 총선에서 진보의 대표성을 획득하기 위해 ① 50만 당원의 대중정당, ② 30% 노조 조직, ③ 175만 정도의 강력한 대중동원력을 갖추자는 구상이었다. 노동운동 차원에서 이를 실현하고자 제출된 노선이 바로 ‘당 중심 노동운동’이다.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 위성정당 참여를 거절당했던 진보당으로서는 자력 원내 진출을 어느 정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강성희 의원이 ‘고맙습니다. 민주당’ 구호를 내걸고 선거운동을 한 것이나, 당선 직후 처럼회 가입을 시도한 사례에서 확인되듯, 진보당은 가능하다면 언제든 야권연대를 시도해왔다. 이런 점에서 진보당의 ‘자력 원내 진출’이란 독자적 정치세력화로의 노선 변경이라기보다는 상황 논리상 자력 진출을 고려한 것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력 원내 진출, 민주진보연합 두 가지 선택사항을 열어두고 당의 정상(正常)화를 기획한 것이다. 

2023년 12월 21일 민주노총 주최의 ‘2024년 총선에서의 진보진영 대응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한국진보연대 박석운 대표는 민주진보연합 구상을 공론화하고, 2024년 1월 23일 연합정치시민회의를 결성하는 등 비례위성정당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에 앞서 2023년 12월 6일 진보당은 정의당의 선거연합정당(정의당을 플랫폼으로 한 민주노총 및 진보4당의 선거연합정당) 제안을 거절하며, 민주진보연합을 함께 추진하고 있던 진보정치연합 원탁회의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12월 12일에는 민주노총, 진보4당은 물론 기본소득당과도 선거연합을 논의할 수 있다며 ‘최대 진보’를 역제안했다. 같은 날 광주와 부산 등에서 신야권연대로 총선을 승리해야 한다는 지역 여론전을 펼쳤다. (광주에서 “내년 총선, 반윤 범야권연대 필요하다”, 부산에서 “신야권연대로 총선 승리하겠다” 등) 야권연대로 총선을 치르겠다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2024년 1월 8일 김준우 정의당 대표와의 좌담에서 윤희숙 진보당 대표는 “[진보당은] 민주당과의 연대·연합이 절대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라며, 민주당과 비례연합정당을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흘렸다. 1월 23일 연합정치시민회의가 비례연합정당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2월 5일 이재명 대표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내고 더불어민주당이 통합비례정당을 본격화하자, 2월 13일 진보당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민주진보연합을 공식화한다. 2020년과 달리 더불어민주당이 진보당에 통합비례정당 참여를 열어주자, 민주진보연합을 통한 원내 진출로 총선대응 방침을 확고히 한 것이다.
 
 

2. 하이퍼 위성정당과 의회민주주의의 파괴

박석운 대표는 2023년 12월 21일 민주노총 토론회 발제문에서 본인이 주장하는 ‘비례연합정당’은 “거대정당 독식 방식이 아닌, 소수정당과 연합정치를 통해 의석을 분점하는 방식”이기에 다른 비례위성정당과 다르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과연 더불어민주연합은 의석수를 분점하는 선거연합정당이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첫째, 민주당이 통합비례정당을 만들지 않았다면 정당 지지율 이상의 의석을 비례대표로 얻을 수 없었으나, 통합비례정당을 통해 소수정당의 몫을 가로챘다는 점(161석에서 169석)에서 애초부터 분점이라고 할 수 없다. 심지어 더불어민주연합과 통합하면서 시민사회 당선자 2명이 추가로 입당해 민주당은 더 많은 의원(171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둘째, 지역구 격전지에서 진보당 후보를 일괄 사퇴시켜 민주당으로 표를 쏠리게 하여 추가 당선자를 얻도록 도왔다는 점에서도 분점이라 보기 어렵다. 심지어 노동자 밀집 지역인 울산 동구와 창원 성산에서 민주당은 단 한 번도 당선된 적이 없었는데, 진보당의 양보로 사상 첫 당선자를 냈을 정도다. 만일 지역구 격전지에서 진보당이 독립정당답게 모두 후보를 냈다면 더불어민주당이 161석 전부를 온전히 얻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덕분에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대권가도는 물론 사당(私黨)화에 필요하면 언제든 협조를 구할 수 있는 소수정당을 거느리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기본소득당과 진보당은 이재명 사법리스크를 방어하는 데 어느 정당보다 적극적이었다. 2024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두 당의 위성정당 참여를 보장한 것은 이들 당의 생환, 생명 연장에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 기본소득당과 진보당이 이재명 민주당과 명운을 함께 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진보당은 더불어민주연합이 국민의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보다 더 자율적인 ‘준(準)’위성정당이라고 강변했지만, 결과적으로 더불어민주연합은 국민의미래보다 더 확실히 위성정당의 역할을 했다. 준(準)위성정당이 아니라 하이퍼(hyper), 즉 최고 수준의 위성정당 기능을 한 것이다. 민주당이 소수정당과 비례의석을 분점한 것이 아니라, 진보당과 기본소득당이 민주당의 국회의원 독점에 기여한 것이고 그 일부를 수혜로 받았을 뿐이다. 그것도 진보정당, 독립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어주고 ‘민주당 이중대’라는 오명을 남기면서 말이다. 

이재명 민주당의 국회의원 독식 행위는 의회정치, 정당정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더더욱 조장할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의 원내 일당 목표가 의회주의의 진전, 시민권의 신장, 민주주의 제도의 안착화에 있는 게 아니라 사당화, 즉 본인을 포함한 민주당 주요 인사의 사법리스크 관리, 정권 흔들기에 이은 정권 탈환에 있기 때문이다. 진보당은 국회의원 3석을 얻어 당의 정상화를 이루었다고 자평할지 모르지만, (기본소득당과 함께) 진보당의 민주당 위성정당 참여는 선거제도를 기망하고 민주당이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일조한 행위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3. 민주노총 정치·총선방침 무력화

진보당의 민주주의 파괴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진보당은 민주노총 총선방침을 무력화함으로써 민주노총을 정치적 분열상태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는 자신의 정치적 복권을 위해 민주노총을 희생시킨 행위다.

진보당의 민주당 위성정당 참여는 민주노총 총선방침 4항(위성정당 참여 금지)과 충돌할 뿐만 아니라 1항(진보정치세력 연대연합)과도 충돌한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결정 사항 위반이기도 할 뿐더러, 2020년 총선 당시 민주노총이 민주당 위성정당에 참여하려 한 녹색당 지지를 철회한 전례를 보아도 진보당 지지를 철회해야 했지만, 민주노총 집행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보라. 「민주노총은 진보당 지지 철회를 단호히 결정해야 한다」, 《사회운동포커스》, 2024.2.22.

2024년 2월 15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및 3월 4일 속개된 같은 회의에서 진보당 지지를 철회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 위원들은 더불어민주연합은 연합정당이지 민주당의 위성정당이 아니라며 진보정당 국회위원의 원내 진출은 조합원의 염원이라고 주장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이들은 돌연 녹색정의당 후보에 대해서도 민주노총 후보나 지지후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녹색정의당이 더불어민주연합 참여는 거부했지만, 지역구에서의 선거연합 즉 후보단일화 가능성은 열어두었다는 게 구실이었다. 진보당에 관용을 요구하다가 여의치 않자 도리어 정의당에 더 엄격한 기준을 들이민 것이다.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이후 열린 민주노총 80차 대의원대회(3월 18일)에서도 같은 논란이 반복되었다. 진보당을 지지하는 대의원들은 ‘다른 세력과 한시적, 제한적으로 연대연합하는 것을 이유로 민주노총 지지정당에서 제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라며 민주노총의 녹색정의당, 진보당, 노동당 지지를 확인하자는 수정안을 발의했다. 이 안은 상정 자체가 부결되었다. 위성정당을 비롯한 보수양당 지지를 금지한 77차 대의원대회(2023.9.14.)의 결정을 2024년 총선 사업계획에 명시하자는 수정동의안도 발의됐다. 발의자는 이는 재확인에 불과하기에 표결 없이 의결할 것을 요구했다. 위원장이 이 안을 수용하지 않고 표결을 강행하자, 표결에 반대하는 대의원들이 집단 퇴장하며 대의원대회는 유회되었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보라. 「민주노총 대대 유회, 진보당 지지 철회 여부를 놓고 격론」, 《사회운동포커스》, 2024.3.19.)

연이은 중앙집행위원회 회의(3.21.)에서도 같은 논란이 반복되었다. 결국 노동당 후보만 민주노총 후보로 인정되고 진보당은 물론 녹색정의당 후보로 출마한 민주노총 조합원조차 민주노총 후보가 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민주노총 총선방침이 무력화되면서 가맹산별조직들은 독자 행보를 하게 됐다. 진보당을 지지하는 서비스연맹과 민주일반노조는 진보당 지지 활동을 하고, 공공운수노조와 화섬노조,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는 진보당 지지를 철회하거나 (녹색)정의당하고만 정책협약을 맺는 등 민주노총 가맹조직이 각자 총선대응을 하였다. 

진보당은 당의 생존을 위해 민주노총 총선방침을 무력화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을 정치적으로 분열시켰다. 
 
 

4. 노동조합 민주주의의 위기와 민주노총의 상대화

진보당은 민주노총의 정치·총선방침을 무력화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민주주의의 근간까지 흔들었다. 대의원대회 결정을 민주노총 위원장이 임의로 해석해 집행을 유보하는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제도와 규칙을 어떻게 마련하고 운영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제도와 규칙을 무시하고, 집행부 입맛대로 해석하고 다수의 논리로 집행하려 들면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대의원대회는 민주노총 최고 의결기구인데, 그 결정을 위원장이 임의로 해석하는 것은 노동조합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다. 정파의 이해를 앞세워 이른바 ‘대중조직 논의질서’를 무너뜨린 것이다. 이는 ‘당 중심 노동운동’이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민주노총의 위상 역시 실추됐다. 대의원대회의 결정을 유보하는 ‘선례’ 뿐만 아니라, 진보당 지지도 진보당 지지 철회도 결정하지 못하는 ‘선례’ 또한 남겼기 때문이다. 정치·총선방침을 결정하고도 민주노총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했다. 이렇게 총선방침이 무력해지며 2023년 정치·총선방침 논의에서 논란이 되었던 민주노총 주도의 선거연합정당 논의마저 사실상 중단될 것이라, 민주노총이 정치방침에 관해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총선에서 가맹산별조직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개별적으로 정치 행보를 했다. 진보당 지지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적극적으로 지지 활동을 했다. (「서비스연맹 비정규직 노조 대표자 지지 선언」, 2024.4.2.) 반대로 진보당 지지 철회를 촉구했던 산별·지역본부와 위원장, 본부장은 정의당과 노동당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화섬과 공공운수노조는 각각 대의원대회(2.23.)와 중집(3.6.)을 열어 진보당 지지를 철회했다. 금속과 보건은 정의당 후보를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활동을 벌였다. (「위성정당 거부와 올바른 노동자-민중의 체제 전환 정치세력화를 위한 정당·노조·사회운동 공동 기자회견」, 2024.4.3.) 공공, 금속, 화섬, 보건은 녹색정의당과 산별교섭 법제화를 위한 정책협약식을 맺기도 했다. (「초기업·산별교섭 제도화를 위한 노조법 개정 요구」, 2024.4.3.) 그리고 이 혼란의 와중에 사무금융노조는 중집(3.20.)을 열어 민주당 국회의원 23명 지지를 선언했다. 총선방침이 무력해지자 민주노총은 사분오열했다. 

총선 평가를 두고도 갈등이 지속했다. 총선 직후 열린 4월 22일 대의원대회에서 진보당을 진보정당에서 제외하자는 수정동의안이 상정되었으나 부결됐다. 5월 21일 중앙위원회에서는 ‘총선방침 불이행, 민주노총 후보를 위한 선거투쟁의 방기, 총선평가안 미제출,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 및 조합원의 민주당 지지 선거운동 방치’를 이유로, 정치위원장 서리(대행)의 책임을 물어 그의 인준을 반대하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가까스로 인준되기도 했다. 2024년 11월 27~29일에 열릴 민주노총 정책대회(창립 30주년 사업)에 총선 평가 및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향에 대한 토론도 예정되어 있어 갈등과 논란이 지속할 전망이다. 이는 현 양경수 집행부의 지도집행력을 훼손할 것이고, 총연맹의 위상을 상대화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 
 
 

5. 진보당의 ‘민주진보연합’, 진보정치의 초석을 다졌나?

그렇다면 진보당의 국회의원 3석 확보를 진보정치의 새로운 초석, 민주진보연합노선의 성과로 평가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보기 어려운 것이, 우선 민주진보연합의 수단으로서 ‘더불어민주연합’은 이재명 사당화에 동의하는 정치세력의 연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친명횡재 비명횡사’라는 신조어가 돌만큼, 더불어민주당의 이번 총선 후보 공천은 더불어민주당의 선거전략인 이른바 ‘반윤석열 세력연합’보다는 ‘이재명 사당화’에 충실했다. 더불어민주연합에서의 더불어민주당 후보공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앙위원 투표를 거치지 않고 전략공관위 심사로만 후보를 결정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재명 사당화’가 목표였던 만큼 더불어민주연합에 조국과 그의 세력이 참여하는 것도 반대했다. 조국은 반윤석열을 상징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이재명 사당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2020년에 진보당 전신인 민중당의 위성정당 참여를 거부했던 것과 달리, 2024년에는 진보당의 참여에 문호를 열었다. ‘통진당 논란’을 재연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일정하게 시간이 지난 데다가 ‘반윤석열 연합’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려면 소수정당도 어느 정도 참여시켜야 했다. 더구나 진보당은 ‘이재명 사법리스크’를 방어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재명 민주당을 비난하며 떠나는 민주당 국회의원(특히 이낙연)을 향해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친명보다 더 친명처럼 굴어왔다. 이는 기본소득당 역시 마찬가지다. 노선과 방침에 근거한 연합이 아니라, 다수당은 사당화가, 소수당은 생환이 목표인, 철저히 기회주의적인 선거연합이었다. 

진보당 역시 이런 목표에 걸맞게 선거연합을 추진했고, 이재명 민주당의 후보 교체 요구를 수용했다. 울산 북구 1곳을 양보받는 대신, 자력 진출을 대비해 출마를 결의했던 지역구 후보 85명 중 68명(79.1%)을 용퇴시켰다. (진보당이 선거연합과정에서 보인 야권연대 행태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민주노총 지지정당에서 진보당은 삭제되어야 한다」, 《사회운동포커스》, 2024.3.28.

진보당은 이런 방식으로 원내에 진입했다. 비례대표 2명뿐만 아니라 지역구 1명(울산 북구)도 자력이 아니라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을 통해 당선된 만큼, 진보당은 ‘이재명 민주당’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종속될 것이다. 진보당이 나중에라도 독립정당으로 제 역할을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정치양극화와 정치적 부족주의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그 어느 세력보다 ‘우리 편 아니면 네 편’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견지하는 이재명 민주당과 붙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합으로 진보정치의 목표인 노자 계급관계의 역전은 불가능할 것이며, 정치 발전과 민주주의 확대를 기대하는 것도 어불성설이겠다.

이번 총선은 특히 더 폐쇄적이고 방어적이며 우리가 아닌 집단을 적대하는 정치적 부족주의의 폐해가 나타난 선거였다. 2022년 대선에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 탓에 이재명 후보가 떨어졌다고 생각한 열렬 지지자들은 정의당에 대한 악선동으로 일관했다. 사실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심판 정서 탓에 ‘민주당 이중대’라 불리던 심상정 후보의 지지율도 2.37%로 급락했지만, 이재명 후보 지지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아니라 심상적이 획득한 2.37% 탓에 윤석열 후보가 0.73% 차이로 당선됐다고 봤다. 총선에서 대승하고도 이재명의 열렬 지지자들은 서울 마포갑과 도봉갑에서 국민의힘 조정훈과 김재섭이 당선된 것이 녹색정의당 김혜미 후보(마포갑 2.0%)와 윤오 후보 탓(도봉갑 3.0%)이라며 맹비난했다. 

접전이 예상되는 지역일수록 ‘이재명 민주당’은 민주당 편에 설 수 있는 소수정당의 독자진출을 억제하려 할 것이고, 이재명의 맹목적 지지자들 역시 난폭한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정당의 자력 진출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진보당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이 위성정당을 통한 소수정당 줄 세우기의 힘이다. 

진보당이 이재명 지지자들의 난폭한 행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진보당이 후보를 낸 지역구에서 국민의힘이 당선된 곳이 단 한 곳도 없었던 덕이었다. 이는 진보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지역구 선거연합이 철저히 조율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장 몇 석이라도 얻겠다는 눈앞의 실리를 택해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하지 않고 그들에 기대어 당의 생환을 보장받으려 했던 진보당이,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겠는가? 

물론 스스로 주장하듯 진보당은 민주노총이라는 조직 기반이 있고, 정의당보다 지역 기반도 더 탄탄해 지역구 선거에서 더 좋은 성적을 냈다. 이를 근거로 자립이 가능하다고 강변할 수 있다. 하지만 여의치 않을 것인데, 진보당이 작위적으로 선거연합을 추진하면서 스스로 그 기반을 다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2020년의 실패 이후 선거연합으로는 원내에 진입하기 어렵다고 느낀 진보당이, 자력당선을 위해 내세운 노선이 당 중심 노동운동이다. 미조직 사업을 통해 조직을 확대하고, 민주노총 수권조직이 되어 다수파로서 ‘집권을 목표로 하는 노동운동을 전면적으로 구현’하고자 민주노총 중심의 선거연합정당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2024년에 민주노총 정치·총선방침을 무력화함으로써 그나마 기대려 했던 자력당선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린 꼴이 됐다. 이는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과 진보정치세력의 단결을 뒤로 한 채, 당장의 실익을 위해 민주진보연합을 선택한 결과겠다. 
 
 

6. 정의당의 원내진입 실패,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번 총선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지민비정’(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정의당)이 아닌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혁신당) 바람이었다. 선거 중반, 정의당은 당선자가 단 한 명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한 듯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읍소했다. 정의당은 2022년 6월 지자체 선거에서도 이재명 민주당 지지자들의 악선동을 겪었는데, 2024년 총선에서도 ‘심상정 때문에 윤석열이 당선되었다, 이번에는 비례후보로 정의당을 찍을 수 없다’라는 반응을 접하자, 한 번 더 기회를 달라 즉 ‘민주당 왼쪽 날개론’, ‘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정의당’이라는 메시지가 다시 한 번 통하길 기대했다.

정의당은 녹색당과 선거연합을 했지만 ‘지민비조’ 바람 앞에서 무기력했다. 2023년 7월 이른바 ‘새진보’로 불리던 당내 분파가 이탈하고, 류호정 의원 등 당내 ‘제3지대’로 불리던 분파도 이탈한 데다가, 지역 기반이 너무도 취약해지면서 역대 가장 적은 지역구 후보자를 냈다(2016년 51명, 2020년 75명, 2024년 17명). 조국이 ‘노회찬의 길을 가겠다’라며 정의당 비례후보였던 신장식을 영입하고 ‘조국혁신당이 정의당을 대체하고 제3당이 되겠다’라고 선언하자, 정의당 당원 중 일부는 탈당하기도 했다. 

녹색정의당은 보건의료노조 전 위원장이었던 나순자 후보를 영입하고, 민주노총 전현직 임원, 간부들과 함께 노동본부를 구성하여 늦게나마 노동조합 지지를 얻기 위해 노조 간담회를 조직했지만, 민주노총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던 터라 조합원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진보당과 달리 독립정당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자 민주당 위성정당 참여는 거부했지만, 독자적인 정강을 세울 여력도, 돌아선 시민들의 표심을 되돌릴 방책도 없었다.  정의당은 부정적 여론에 압도당했다. 민주당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강했던 2022년 대선에서는 ‘민주당 이중대’라는 시민들의 비판 앞에서, 2024년 총선에서는 반대로 윤석열 당선에 기여했다는 비난 앞에서 참패를 반복했다.

민주당과 공수처법-선거법 패스트트랙 공조까지 하는 등 정의당은 정당명부 비례대표를 늘리고자 2019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선거법 개정에 당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그 사이 민주당은 진보정당, 시민운동, 노동조합의 이슈와 정책에서조차 자신이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는 ‘적응전략’에 성공했다. 독자적 이념과 정강정책이 본래도 취약했지만 진보정당 고유 의제라 여겨졌던 노동, 여성, 환경마저 민주당에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다. 

게다가 당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선거법을 개정했지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위성정당이 난립하면서 과거 병립형 비례대표제만도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양당이 얻은 비례대표 의석수는 병립형으로 환산해도 결과가 거의 같았고, 도리어 위성정당 혹은 비례전문정당의 등장으로 소수정당의 독자적인 정치적 성장 가능성만 제거됐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 왼쪽에서 지지층을 확대하려는 전략마저 조국혁신당의 등장으로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결국 단 한 명의 의원도 배출하지 못하고, 민주당 왼쪽에서 선거법 개정으로 진보정당의 생명을 연장하려 했던 정의당의 시도는 최종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7. 조국혁신당의 등장, 노동운동은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가?

조국혁신당의 등장에 따른 정의당 지지층의 이탈은 노동조합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민주노총 대의원·현장간부 대상 ‘진보당 지지 철회’ 서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반면, 직후의 ‘정의당·노동당 지지 서명’은 상대적으로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고 참여자도 적었기 때문이다. 제 정파와 활동가의 합력이 부족했던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서명운동 과정에서 민주노총 대의원·현장간부들이 조국혁신당 지지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혔던 게 큰 이유였다. 

조합원 다수가 이번 총선에서 조국혁신당을 지지한다면, 더 정확히는 그런 경향이 지배적이라면 민주노총은 어떤 정치세력화 전략을 구사해야 할까?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우리가 더 정권 심판을 잘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검찰 독재’라는 프레임을 내세우며, 불통, 독단, 불공정 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감정에 더 강력히 호소하는 것이다. 

민주당과 반윤석열 선거연합을 한 진보당은 물론, 정의당도 ‘정권심판 정의롭게’ 구호를 통해 비슷한 전략을 구사했는데, 조국혁신당에 비하면 특별히 효과가 있지 않았다. 이 같은 방식은 이재명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 같은 인민주의자를 당할 재간이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86세대와 97세대의 공감대, 즉 보수정치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운동권에 대한 부채감, 사법체계에 대한 불만을 자극해 자신의 정적에 대한 부정적 정념을 만들고, 원한의 감정에 휩싸인 대중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고, 그렇게 대중을 정치적으로 소비해 권력을 누리고 행사하는 데서는 민주당 인민주의자들이 누구보다도 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에 설득돼 정념에 휩싸인 대중은 이재명 대표나 조국 대표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이들의 죄가 ‘멸문지화 당할 정도의 일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윤석열 대통령과 검찰, 그의 부인 김건희 씨를 상대로는 ‘탄핵’, ‘특검’을 요구하며 사법적 처분 그 이상이 가해지길 바란다. 같은 진영에 대해선 사법적 관용을 구하지만 상대 진영에는 사법적 엄단을 촉구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지만, 대중의 이 같은 모습이야말로 정치 양극화의 토대이고, 인민주의자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하고 반복되면 대중의 합리적인 문제 해결 능력이 사라지고, 종국에는 정치 자체가 불능에 빠진다. 이것이 오늘날 인민주의가 야기할 정치의 미래다.

시민권의 경계를 확대하면서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증대하고, 갈등과 모순을 분석하며 노동자와 시민의 정치적 각성과 성장을 통해 대안적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회운동(노동운동)이, 대중을 대상화하고 정치 자체를 불능에 빠뜨릴 인민주의 전략을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회운동은 인민주의 자체에 반대해야 한다. 반보수전선 구도에 갇힌 채 민주당, 조국혁신당과 경쟁할 것이 아니라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자체를 반대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한국의 인민주의자가 보여주는 행태, 즉 첫째, 경제적 제약을 무시한 채 선심성 정책을 앞세워 대중을 기망하는 행태, 둘째, 검찰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겠다며 사법부 독립의 원리를 흔들고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태, 셋째, 정권의 유지와 찬탈을 위해 외교 사안까지 정치화하는 행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이런 비판은 고사하고 민주당 내에서 벌어진 이재명 사당화 행태조차 온전히 규탄하지 않았으니, 조국혁신당은 두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조합원이 이번 총선에서 조국혁신당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노동운동 내에서 ‘노동운동 탄압하는 윤석열 반대’ 이상의 정치활동이 없었음을 방증한다. ‘민주당 비판’, ‘인민주의 비판’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저 민주당을 친자본 보수정당으로 규정하고, 보수양당 반대 즉 국민의힘도 반대하고 민주당도 반대한다는, 원론적 수준의 이야기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런 반대는 사문화된 선언 즉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민주당을 정면으로 비판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민주당이 어떻게 여론을 호도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정치의 근간을 흔드는지’를 반박하고 조합원과 토론할 수 있어야, 조국혁신당과 같은 인민주의 정당, 친민주당 비례전문정당의 출현에 흔들리지 않고 진보정치를 일궈나갈 수 있다. 인민주의가 어떻게 사회운동을 타락시키는지 간부들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토론해야, 노동운동 스스로 인민주의를 인식하고 경계할 수 있다.
 
 

8. 민주노총 주도의 정당 통합 논의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2012년 8월 13일,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비례대표 후보 부정선거 논란에 이어 폭력사태까지 불거지는 등 통합진보당을 정상적인 정당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 중앙집행위원회 회의(2012.9.14.)에서 민주노총 새정치특위(새로운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위한 민주노총특별위원회)는 ‘진보적 정권교체를 중심과제로 하는 독자 후보 방침’을 새 대선방침으로 제시했지만, 통진당 세력과 이들을 비판하는 세력 양쪽의 입장을 절충했을 뿐이라며 양자 모두에게 비판받고 동의를 얻지 못한 채 폐기됐다. 제2의 정치세력화, 노동 중심의 정치세력화 논의가 출발도 하지 못하고 좌초했다.

2017년 2월 7일, 박근혜 탄핵과 함께 곧 닥칠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번 정치세력화 논의가 불붙었다. 중앙집행위원회는 ‘민중경선을 통한 후보전술, 2018년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자’라는 안을 마련해 대의원대회에 제출했지만, 5개나 되는 수정동의안이 발의되었고 그 중 어느 안도 과반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원안마저 35.1% 찬성만을 얻어 최종 부결되었다.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선거연합정당 논의가 또다시 좌초한 것이다. 

2023년 4월 24일, 이번에는 전국회의 주도로 민주노총 정치·총선방침 논의가 개시되었다. 양경수 집행부는 노동 중심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하자며 2024년 총선에서는 선거연합정당을 만들어 공동대응하자는 골자의 안을 제시했다. 허나 이른바 진보4당 중 진보당만 찬성하는 선거연합정당안이 수용될 리 만무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4.24 임대에 상정될 정치방침·총선방침은 민주노총의 분열을 초래할 뿐이다」, 《사회운동포커스》, 2023.4.17.) 결국 논의는 하반기로 미뤄졌다. 

논란을 거듭하며 밤샘 토론을 반복하다 9월 14일 77차 대의원대회에서 극적으로 최종 합의안이 마련된다.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되 2024년 총선이 아니라 2026년 지자체 선거 공동 대응을 목표로 한다는,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사회진보연대는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는 것에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9·12 중집 최종안, 무엇이 문제인가?」, 《사회운동포커스》, 2023.9.13.) 2024년 진보당의 민주당 위성정당 참여가 대의원대회 방침 위반이라는 견해가 나온 것은 전년의 77차 대의원대회가 채택한 총선방침에 보수양당에 대한 지지를 금지하는 조항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앞서 이야기했듯 이 정치·총선방침도 진보당이 진보정치 세력과의 연합보다 더불어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을 밀어붙이면서 사실상 무력화됐다.

2012년 8월부터 2023년 9월까지 ‘노동 중심의 정치세력화’, ‘선거연합정당’ 주장이 무려 세 차례나 반복되었지만,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하거나 그나마 합의된 방침마저 파기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왜 그런가?

표면적으로는 2012년 이후 진보정당이 각개 약진한 현실이 있는데 특정 세력이 이를 백안시한 채 민주노총 중심의 선거연합정당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과 2012년 통합진보당 폭력사태라는 갈등과 분열의 역사가 있고 이에 대한 성찰이 먼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 논의가 실패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선거연합정당의 당위를 앞세우는 측과 그런 갈등과 분열의 역사에 대한 평가를 전제해야 한다는 측 사이의 선거연합정당을 둘러싼 논쟁에는 정작 가장 중요한,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이 처한 현실에 대한 진단이 빠져있거나 과소하게만 다뤄진다. 

조합원 100만 시대를 열었다고 하지만, 민주노총의 계급대표성은 여전히 취약한 상태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공공기관·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는 것에 비해 격차 축소를 위한 노력은 턱없이 부족한 데다가, 민주노총 스스로 이를 조율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는 상태다. 

단적으로 가맹산하조직의 임금투쟁 요구의 기준이 되는 민주노총 임금요구안조차 공공기관·대공장의 요구를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임금인상 목표를 정함에서 본래 경제성장률, 물가상승률, 노동소득분배 개선치를 고려했으나, 이렇게 산정된 안이 공공기관·대공장 정규직의 요구에 못 미치자 임금격차해소분(2021, 2022), 실질물가폭등 반영분(2023), 격차 보전분(2024) 등 온갖 명목이 추가돼 목표치를 높였다. 임금인상 정액요구안의 산정방식을 바꾼 것이다. 임금인상 정액요구안이 고임금 집단의 임금인상 요구액을 제한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임금격차가 그만큼 큼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외면하고 산정방식을 고임금 집단에 맞게 바꾸었다. 저임금 집단에게 민주노총 임금요구안은 너무 높아 실현 가능성 없는 다른 세상 이야기다. 격차 해소 방안 만큼은 민주노총이 능력만이 아니라 의지조차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주노총이 노동자 전체를 대표해 정부의 노동시장 정책에 개입할 수 있는 교섭 채널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최저임금위원회처럼 일부 의제에서만 목소리를 낼 뿐이다. 노동자를 대표해 정부와 교섭하는 창구가 없다 보니, 민주노총은 민주노총대로 그 역할을 매개할 수 있는 정당에 의지하게 되고, 민주당이든 진보정당이든 간에 정당에 의존하는 형태로 총선에 개입하는 정치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물론 노사정 교섭에 대한 민주노총의 부정적 기억을 단숨에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허나 이 문제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회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노사정 교섭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불거질 수 있는 의견수렴 절차 문제를 풀기 위해, 노조 내 민주적 토론 문화를 갖추고,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며 노사정 교섭에 필요한 민주노총의 리더쉽을 갖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일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장구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총은 이 문제를 아예 외면하고 있다. 

노동시장 격차 축소를 위한 정책, 노동자를 대표하여 노동시장을 개입할 수단이 전무한 상황에서 민주노총 정치활동은 아예 이재명 민주당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재명 사법리스크에 대한 맞불 놓기인 민주당의 ‘검찰 독재’ 프레임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는, 양회동 열사 투쟁을 계기로 정권퇴진투쟁에 조직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 노조법 2·3조 개정조차 윤석열 정부의 거부권 행사를 유도하여 반윤석열 정서를 고양하려는 도구, 이재명 사법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민주당의 의도가 드러났음에도, 민주노총은 이를 명확히 비판하기보다는 반정권 투쟁의 근거를 늘리는 데 그쳤다. 

민주노총의 통일운동은 북한 핵무장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일체 없이 반미(반제) 자주 투쟁만을 강조한다. 세계 비핵화란 북한의 핵무장을 정당화는 논리인데, 양경수 집행부는 세계 비핵화가 민주노총 과제여야 한다며 2024년 사업계획에 이를 명시하기도 했다. 2023년에 발간된 민주노총 통일교과서는 우크라이나 침공이 러시아의 일방적인 침략전쟁이 아니라 돈바스 지역 해방과 미국의 나토 동진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전쟁임을 강조하며 러시아를 변호하고 있다. 

취약한 계급대표성, 민주당과 변별되지 않는 정치활동, 북한의 핵무장과 권위주의에 대한 맹목 등, 오늘날 진보정치를 이루기 위해 갖춰야 할 요건 중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노동 중심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사회운동 주체로서 민주노총이 어떻게 계급 대표성을 제고할 것인지, 어떤 이념적 지향을 표방하면서 독립적인 사회세력으로서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지 민주노총 스스로 준비된 대답이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은 내셔널센터로서 맡은 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9. 진보정당 운동의 한 순환 마감, 노동운동과 정치운동 혁신의 길

진보정당 운동의 한 순환이 마감되었다. 정의당은 원외 정당으로 밀려났고, 진보당은 민주당과의 선거연합 없이는 명맥을 이어가기 어려운 정당으로 전락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열과 2012년 통합진보당 폭력사태 이후 각개약진한 진보정당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당의 생환을 제1의 목표로 삼으며 진보정치의 명맥을 이어왔다. 이제 그런 한 순환조차 끝난 것이다. 

민주노총 정치세력화 운동의 한 순환도 마감되었다. 분당 이후 민주노총은 ‘노동 중심’, ‘제2의 정치세력화’라는 명명으로 정치세력화 운동에 새 기운을 불어넣으려 했지만, 매번 실패의 연속이었다. 

11년 만에 정치방침을 세우고 우여곡절 끝에 총선방침까지 수립했지만 1년도 채 안 되어 민주노총은 이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민주노총은 정의당도 진보당도 지지하는 정당임을 확인하지 못했고,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라는 것도 확인하지 못했다. 중앙집행위원회, 중앙위원회, 대의원대회 등 민주노총 주요 의결단위는 파행을 거듭했고, 당분간 파행이 지속될 공산이 크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양경수(전국회의) 집행부가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다가, 진보당의 민주당 위성정당 가입을 무리하게 방어하다 생긴 문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민주노총이 노동자를 대표할 수 없는 상태임을 스스로 진단하지 않고, 계급적 대표성을 제고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다. 

진보정당 역시 표면적으로는 당장의 당의 생환을 위해 선거법 개정에 올인(all-in)하다가 그나마 있던 지지 기반조차 잃고 원외정당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문제도 마찬가지로 진보정당이 하나의 독립된 정치세력으로서 진보정치의 가치를 시민들에게 제시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정치양극화 시대, 진보정당의 설 자리는 점점 더 축소되고 있는데, 정의당이나 진보당이나 모두 민주당 왼쪽에서의 전략(‘전략적 야권연대’)으로 돌파할 수 있다고 오판해, 정치양극화 문제를 타개할 정치전망을 스스로 세우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급격한 정세 변화, 인민주의의 득세와 이념적 혼란의 가중 속에서, 노동운동과 정당운동이 대안세력으로서 독자적인 정치적 전망을 갖추려는 노력 없이, 당장의 정치 일정에 급급하여 합종연횡을 반복한다면, 어떠한 해법도 찾기 어렵게 될 것이다. 

당장 전망을 세우기 어렵다 해도, 적어도 오늘날 국제질서의 변화와 한국 정치지형의 변화만큼은 냉정히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자신의 당면 과제를 세울 수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마땅히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 반핵평화의 기치를 지켜야 한다. 

사회세력으로서 민주노총은 민주당의 인민주의를 비판하면서 계급대표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선행하고, 진보정당은 독자적인 이념과 한국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대안정당운동을 모색하려는 시도를 우선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양자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이 자신의 사회적 표상을 재구축할 수 있어야 진보정치의 길이 열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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