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 독자 좌담회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⑥
일시 8월 18일(일) 사회진보연대 사무실
사회 이아림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참석자 김승곤(플랜트노조 경인지부 수석부지부장), 박준형(공공운수노조 교육국장), 서선주(민주노총 인천본부 전략조직부장), 안민지(금속노조 총무국장), 이미지(사회진보연대 광전지부 정책국장), 한건희(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조직국장)
사회 이아림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참석자 김승곤(플랜트노조 경인지부 수석부지부장), 박준형(공공운수노조 교육국장), 서선주(민주노총 인천본부 전략조직부장), 안민지(금속노조 총무국장), 이미지(사회진보연대 광전지부 정책국장), 한건희(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조직국장)
※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 연재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아림 내년은 민주노총이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민주노총 차원에서도 지난 역사를 결산하는 평가 작업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세월을 함께했던 사회진보연대 역시 몇 년 전부터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2021~2022년에 노조 경력이 오랜 회원이 모여 노동운동사 세미나를 진행했고, 박준형 회원이 대표 필자로 2년에 걸쳐 긴 연재를 맡아주셨습니다. 오늘 연재를 마무리한 기념으로 필자를 모시고 이렇게 좌담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자를 포함해 오늘 좌담에 참석한 회원들은 세미나에 함께 하진 않았지만, 후배 세대로서 글의 내용 중에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질문을 빙자한 여러 토론거리도 제기해 보려고 합니다.
참석자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필자인 박준형 공공운수노조 교육국장입니다. 그리고,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한건희 조직국장, 민주노총 인천본부 서선주 전략조직부장, 플랜트노조 경인지부 김승곤 수석부지부장이 참석해주셨고, 사회진보연대 광전지부 이미지 정책국장, 금속노조 안민지 총무국장이 참석했습니다. 모두 반갑습니다.
참석자에게 사전 질문을 받았는데, 내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글 연재 순서에 따라 시대순으로 살펴보고, 마지막 연재 글을 토대로 시대를 포괄하는 종합토론을 해보겠습니다.
1. 노동자 대투쟁에서 IMF 구제금융위기 이전까지
1)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의 전환에 대한 평가
이아림 필자가 한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굵직한 정세적 계기마다 노동운동이 어떻게 대응했냐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사를 정리해 주셨는데요. 첫째 글은 3저 호황 이후 노동자운동이 폭발한 뒤 IMF 금융위기가 발발하기 전까지, 노동운동의 주요 경로와 방향성이 설정되던 시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의 전환에 대한 평가가 핵심적인 지점이라, 그 부분에 대해서 서선주 회원이 질문을 해주셨는데요.
서선주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가면서 변혁 이념이 유실되고 사회운동적 성격이 사라졌다는 게 주류적 평가인데, 정세상 불가피한 결과였는지 활동가의 선택 결과에 가까웠는지 궁금합니다. 민주노총이 출범할 때 사회개혁적 노동운동이라는 특정한 방향이 있었으니 이념이 탈각되었다기보다 그런 이념을 선택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또한, 전노협 시절에 형성된 노동체제가 현실에서 더는 작동하거나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민주노총의 행보가 단순히 ‘전노협 정신을 잃어서’ 그렇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박준형 우선 말씀드리자면, 참석자 분들 질문이 전반적으로 수준이 높고 어렵네요. 어떻게 보면 답하기에 곤란하거나 답이 없을 수도 있는 쟁점이에요. 사회진보연대가 노동운동사를 토론하고 글을 쓰자고 했던 것도 여기 나온 질문의 답을 찾아가자는 차원이라고 할 수 있고, 아직 명확하게 정리했다고 보기 어려운 쟁점도 많습니다. 제가 정답을 알고 얘기한다기보다는 오늘 좌담에서 같이 토론해 볼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그때 어떻게 해야 했을까?’ 하는 반사실적인 질문이 많은데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이라는 영화를 보면,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명대사가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알면서도 그 일을 하거든요. 우리가 그때로 돌아갔더라도 사실 다르게 하기 어려웠을 수 있고, 어떻게 보면 미래가 상당 부분 정해져 있을 수도 있어요. 과거에 어떤 실천을 비판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렇게 했으면 미래가 달랐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건 아니라는 전제로 토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러한 조건에서도 결과야 어떻든 운동 주체, 활동가가 무엇을 했어야 하는지는 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90년대 중반이 되면 전노협이 더는 유지되기 어려운 객관적 조건이 조성됩니다. 전노협이 유지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우선, 90년대 들어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의 조건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말 3저 호황을 거치며 노동운동이 분출했을 때 그때 주력은 대공장 제조업 노동조합이었습니다. 전노협은 중소영세 사업장 위주였고, 대기업 노조는 거의 전노협에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3저 호황이 끝나고 90년대 들어 경기침체가 시작되었을 때, 중소영세 사업장은 어려워지고 대기업 독점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도 중심축이 더더욱 대기업 노조로 가게 되었고요. 즉 대기업 노조를 포괄하지 못하는 전노협이 민주노조 운동을 주도하기에는 어려운 객관적 조건이 구성됩니다. 이처럼 노동시장과 산업구조가 변하면서 노사관계가 변화했다는 점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또 하나는 정치적으로 문민화가 이뤄집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정부가 노사관계 안정화를 꾀하며 노사정 타협을 시도하는데요, 즉 전노협의 전투적 경제주의라는 투쟁 방식이 유지되기 어려운 조건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랬을 때 노동계 안에서도 훗날 김영삼 정부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로 이어지는 노사정 협상을 하려면 전노협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커지면서 ‘ILO조약 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민주노총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흐름이 형성됩니다.
세 번째로는 활동가의 문제인데,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하면서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현장 활동가가 대거 이탈합니다. 조직 방침에 따라 당을 만들고자 현장을 떠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한사노당) 쪽도 있었지만, 많은 활동가가 전망을 상실하고 이탈합니다. 이 과정에서 전노협의 이념적 성격이 약화하고 변할 수밖에 없었죠.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 운동의 일부로서 노동운동이라는 관념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됐던 것입니다.
이런 여러 조건이 결합하여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전노협 청산과 한국노동운동』을 쓴 김창우 씨는 이 전환을 ‘전노협 청산’이라고 얘기하는데, 물론 그렇게 평가할 수 있겠죠. 전노협 정신이 민주노총을 주도하는 것으로 계승되지는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단지 활동가들이 전노협을 청산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일면적이고, 객관적인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강제된 부분이 있다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이아림 변혁적 이념을 잃고 방향을 상실했던 당시 활동가에게 산업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경제 정세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박준형 아예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우리도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단편적으로는 인식하지만 장기 추세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나중에 봐야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에 정세적 함의를 모두 파악하기는 어려웠겠죠. 1991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고 한국의 제조업이 급격히 중국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전노협의 주력 사업장이 없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이해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과연 노사관계에 어떤 변화를 줄 것인지 그때는 알 수 없었을 겁니다. 문제는 그 이후에라도 잘 인식했냐는 건데요. IMF 외환위기에 대해 노동운동도 무지했던 것은 물론, 부르주아 경제학자도 대부분 무지한 상태에서 대응했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한계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가 잘 인식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정부는 그나마 인식하고 대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자본주의 구조 변화 속에서 1990년대 초 임금 가이드라인을 통해 임금 인상률을 억제하고, 노개위를 거쳐 노사관계를 정부가 원하는 방식으로 안착하고자 시도했습니다. 이는 정부와 자본가계급 나름의 객관적 경제 진단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입장일 뿐이고 노동자운동의 입장에서는 다른 대안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돌아가는 상황을 다 이해하기엔 어려운 측면이 있었죠.
2) 1990년대 전후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유실
서선주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이었기에 이들이 민주노총으로 가는 과정에서 유실되고 배제되었다고 평가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실제 노동조합 운동이나 현장에 밀착한 방식이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은데, 이들이 정당 건설로 수렴되어 노조에서 이탈했다기보다는 애초에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흐름이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민주노총이나 진보정당 운동이 정권 반대 투쟁으로 민주당과 동기화되는 현재 상황과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유실을 연결 지어 평가할 수 있을까요?
박준형 우선 전제로 해야 할 것은 과거의 사건이나 주체의 행동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그 당시의 맥락과 평가 지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과거의 경험이 현재 시점에 기억으로 남아 계승되기도 하지만, 시간이 상당히 지나 다른 정세에서 비슷한 행동을 했을 때의 평가는 전혀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똑같은 노선이나 행동이라 하더라도, 과거에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지금은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죠.
전노협 시절 활동가와 노동운동의 관계는 밀접했습니다. 지역별 노동조합협의회 운영위원회에 노동운동단체가 같이 참가했고, 몇만 명의 현장 간부가 정파조직에 직간접적인 멤버십을 가지면서, 노동조합에서 하기 힘든 교육도 진행하고, 일상적인 교섭전략 논의도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노동운동이 미분화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이 상당 부분 교집합을 지녔던 것이죠.
이런 관계는 1991년을 지나면서 분화합니다. 우선 인민노련(이후 한사노당 창준위)이 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정세 변화를 고려해 기존의 비합법 전위정당 운동에서 합법 공간에서 활동하는 대중정당을 만들겠다는 노선으로 전환합니다. 당을 만들게 되면 선거 대응도 해야 하고, 노조 활동을 하기 어려우니 이탈하게 되는 것이죠. 반면,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는 정당 건설보다 노동운동의 대중적 기반 강화에 주력하게 됩니다. 전노운협에서 이탈한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의 경우에는 여전히 전위정당을 지향합니다. 또, 당시 노동교육협의회는 정당운동에 함께하지 않고 노동자 교육단체로 활동하다 나중에 한국노동사회연구소(한노사연)을 만듭니다. 이처럼, 정치적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현장 활동가가 분화합니다. 노동현장에 이념 지향 활동가가 상당히 축소된 것입니다. 당시 인민노련 활동가의 증언을 들어보면, 1990~91년을 거치면서 현장에 활동가가 싹 없어졌다고 얘기합니다.
현재 시점에서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유실을 평가하고 노동조합 자체가 정치적 성격을 가지고 활동해야 한다고 할 때,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당시 전노운협, 혹은 한사노당 노선이 옳냐 그르냐의 논쟁을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습니다. 또, 지금의 진보정당과 한사노당을 곧장 비교하기도 어려운데, 당시에 전위정당을 주장했던 세력도 지금은 합법정당을 지향하는 것처럼 상황이 많이 달라졌거든요.
사실, 한사노당의 1991년 전환에 대해서 좀 다른 측면에서의 평가도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당시에 사회주의를 지향한 노동운동가였다고 했을 때, 소련이 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그 당시 욕먹으면서까지 합법정당을 하겠다고 했을까요? 사회진보연대에서도 명확히 평가한 게 아니라서 쟁점이긴 한데, 이런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소련은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 전환이 실패해 붕괴까지 온 것인데, 이는 스탈린주의를 벗어나 서구 사민주의 좌파에 가까운 입장으로 전환하고자 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의 활동가는 이 사태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했지만, 한사노당 활동가는 소련조차 노선을 전환하는 마당에 남한 사회주의 운동이 계속 구 소련의 노선을 유지해가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문민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과거 군사 독재 시절에 추구한 비합법 전위정당 노선을 통해 체제 전환을 이루려는 구상이 불가능하며 사민당만 아니라 공산당도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서구와 같이 합법 정당 운동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선 전환의 의미 이전에, 일련의 경솔한 정치적 행위들이 부정적인 효과를 낳으면서 한사노당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정당 건설을 추진하면서 노동 현장으로부터 활동가가 대거 이탈하기도 했죠. 그 결과, 노동운동 내 활동가 층의 약화가 노동운동의 이념성을 약화했다는 측면은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대중정당을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대중적 투쟁과는 분리된 방식으로 나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정세 변화 속에서 사회주의 정치 운동이 어떻게 변화해가야 할 것이냐 숙고했다는 점에서,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구 소련 공산당의 노선을 정통으로 보고 계속 유지하는 것이, 좌파의 정당성을 보증해주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한편, 다소 노동운동사 평가를 초과하는 내용인데요, 지금도 보면 민주노총 집행부를 비롯한 운동권 다수는 헌법상의 탄핵 사유를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탄핵과 퇴진을 요구합니다. 민주당이야 정략적으로 한다 해도, 운동권은 진심으로 탄핵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죠. 저도 돌이켜보면 민주주의라는 걸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운동권이 엄청나게 학습을 해왔지만,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어떤 정치적 행동을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습니다. 당시 교과서처럼 보았던 발리바르의 『민주주의와 독재』의 비판처럼 자본주의 체제가 민주주의처럼 보여도 결국 부르주아 계급 독재고 이를 대체해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해야 한다는 얘기는 근본적으로 옳지만,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구체적인 정치적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는 다른 층위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정치는 어차피 부르주아 계급 독재니까, 다 부정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한국이 노태우, 김영삼 정부를 거치며 문민화된 마당에, 운동권은 아직도 민주주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비극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민주화 이후에 적합한 정치운동의 노선과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도 취약하죠.
한건희 한사노당이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운동 판에서 사라지고, 정치적 노동자운동이 유실되면서 많은 활동가가 운동을 관두거나 민주당으로 갔던 것인데요.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는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을까요? 그 몇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와 같은 반전이 일어났는지 궁금합니다.
박준형 그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일이 바로 1995년 민주노총 건설과 1996~1997년 총파업(96~97 총파업)입니다. 한사노당은 민중당에 합류했다가 잘 안되고,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역시도 잘되지 않았고, 꼬마 민주당에 가서도 계속 실패합니다. 그 과정에서 조직원 수는 몇만 명에서 몇천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민주노총은 건설 이후 노사정 협의기구에도 참여하는데요. 당시 김영삼 정부가 노사관계를 개혁하겠다는 구상 하에 민주노조 진영에도 대화를 주문했고, 이에 호응하면서 민주노총이 만들어진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사정 합의는 실패했고 결국 날치기 통과로 96~97 총파업을 진행한 것이죠.
총파업으로 노동법 재개정을 이뤄냈지만, 이 과정에서 투쟁은 민주노총이 하고 성과는 협상을 벌인 새정치국민회의가 가져갔습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 셈이었죠. 따라서 투쟁을 통해서 법 개정까지 밀고 나갈 힘이 있다면, 민주노총이 정치적 힘을 직접 발휘할 수 있겠다는 광범한 합의가 노동운동에 형성됩니다. 그래서 총파업이 끝난 그해 말 대선에 민주노총 위원장을 직접 내보내서 의미 있는 득표를 하게 되면서, 정치세력화가 탄력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진정추 세력이 대거 결합한 것은 맞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민주노총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민주노총은 이미 전노협과는 다른 조직이었습니다. 전노협처럼 이념 지향적 조직이라기보다는 대기업 노조가 주도하는 사회경제적 성격이 강한 조직이었습니다. 민주노총의 목표는 사회주의 운동 세력이 추구한 정치적 변혁이 아니라, 노동법 개정 같은 제도적 변화였던 겁니다. 사실 이를 노사정 합의로 이뤄냈으면 좋았을 텐데, 작동이 안 되었기 때문에 정당 창당으로 갔다고도 할 수가 있겠죠.
그러다 보니까 민주노동당(민노당) 내부에 두 경향이 혼재해 있던 것인데요. 주류는 민주노총 출신의 활동가였고, 여기에 과거 정치적 노동자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합류했던 것입니다. 물론 민노당은 정치적 노동자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90년대 초에 만들고자 했던 정당과는 성격이 다른 당이었죠. 민주노총 출신의 당 활동가는 민노당이 민주노총의 요구를 직접 받아서 활동해야 한다고 봤던 반면,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입장에서 민노당에 합류한 사람은 민노당이 민주노총 당이 되어선 안 된다, 조합원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고요. 이런 두 경향은 정의당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되었고, 현재 재창당 과정에서도 일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아림 한사노당 활동가가 변화하는 정세에 대응하려고 했던 취지는 알겠지만, 그전까지의 변혁 지향성에 대한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않은 채 너무 급작스레 전환한 느낌이 듭니다. 그들의 이후 행보를 봤을 때도 변혁 전망이 왜 실패했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해명하기보다는, 결국 전향 내지 청산으로 귀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무조건 비전향이 옳다고 보기 어렵지만, 운동 사회에 신노선이 남긴 효과가 굉장히 부정적이었을 것 같아서요. 이념성 탈각에 대한 비판은 하지만, 동시에 배신으로만 규정하기에는 저간의 사정이 있었다는 평가인가요?
박준형 당시 그분들의 정치적 행위가 정세변화 속에서 노동운동이 자신의 노선을 숙고하는 데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학창 시절 한사노당의 행위는 운동에 대한 배신이라 여기며 탄원서 사건을 비판했었습니다.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그들의 이러한 경솔한 행동은 활동가들의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고, 이로 인해 노선 자체에 대한 토론도 더 어려워졌습니다. 조직적으로도, 노선 전환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운동사회, 그 이전에 자기 조직 내부의 활동가 안에서 치열한 토론, 숙고를 통해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지침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제대로 설명이 안 된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문제는 1980년대 한국에 마르크스주의가 급격히 확산할 때, 당시 정세를 파악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다기보다는 훈고학적으로, 특히 1980년대 이전의 소련 교과서를 보고 받아들인 측면이 컸다는 점이 이유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미 1980년대 소련은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입장을 바꾼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마르크스주의자가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는 현실에 대해 단지 서구 자본주의 진영이 공격해서라고만 이해했지, 사회주의 체제 자체에 어떤 결함이 있었는지 미처 알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전향’ 아니면 기존 노선을 고수하는 ‘비전향’이라는 방식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한사노당은 다른 노선을 찾아보려 했다고 생각하는데, 전향과 비전향 사이의 틈이 너무 좁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길을 생각하기는 너무나 어려웠던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2. IMF 구제금융 시기, 노동자운동의 대응
이아림 둘째 글에서는 87년도 이후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노동 체제가 IMF 외환위기를 맞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전개되면서 새롭게 재편되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의 대응을 평가하는 데 있어, 노사정위원회와 관련한 부분이 가장 쟁점적일 것입니다. 안민지 회원이 그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해주셨는데요.
안민지 둘째 글에서 “정부와 자본이 어차피 강행할 노동유연화였다면 동의하지 않고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옳았을 수 있겠다”라는 평가나 “그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한계와 책임은 없었는지 인식해야 했다”, “위기의 조짐이 나타났지만, 노동운동은 노동법 관련 쟁점과 임금·단체협약 투쟁(임단투)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라는 평가가 연속적으로 있습니다. 사후적으로 끼워 맞춘 평가라는 생각도 드는데, 당시에 경제 상황에 대한 적확한 인식이 있었거나 외환위기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서 충분히 사고했다면 어떤 대응이 가능했을까요?
다음으로, “노사정 협상과 무관하게 정부가 강행하려는 정리해고제를 수용하는 협상은 의미가 없었다. 거부해야 했다”, “오히려 그 이후 전개되는 고용조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공동투쟁 전선을 조직하는 것과 함께, 사회적 대책을 요구하는 노사정 협상을 병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로 진행되었다”라는 평가는 적절한 비판이자 현실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부 역시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 파트너로 생각하기보다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노사정 합의가 필요했을 뿐인데, 이를 우회하고 ‘사회적 대책 마련’을 위한 노사정 협상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총연맹의 사회적 역할, 노사정 협상에서의 지위나 조직 내부를 고려했을 때 어떤 투쟁방침과 사회적 전선, 노사정 협의에 관한 지향을 가질 수 있었을지 고민이 듭니다. 노사정 협의 과정에서 많은 일이 있었고 조직적 내홍도 겪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노사정 협상이 가능해지려면, 갖춰야 할 최소 요건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박준형 사회진보연대는 노사정 협상에 대해서 원칙적 반대나 찬성이 아니라 전술로 판단해야 한다고 평가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 쪽이 자주 사기를 치니까 어려운 문제긴 합니다. 1998년 2월 합의 이후에도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선포했다가, 다시 들어갔다가 하는데요. 사실 이 와중에 정부도 좌충우돌합니다. 선의로 해석해 주자면 김대중 정부의 정치인들은 노사정을 통해서 뭔가 해보려는 생각이 있었는데, ‘노동시장 정책이나 경제정책을 노동조합과 상의해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관료 중심으로 반대가 컸던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뭔가 해주겠다는 쪽인 정치인 얘기만 듣고 왔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맞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근데 이 점도 우리가 상수로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애초에 노사정 협상이라는 게 원래 합의되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 말입니다. 따라서 합의를 지향하긴 하지만 협의를 잘하는 기구가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문재인 정부 때도 보면, 2018년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탄력근로제 확대 방안을 청년·여성·비정규직 대표까지 배제하고 강행처리했었는데요. 그러나 이렇게 합의가 안 되는 사안은 경사노위로 올려서 명분 만들기 식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고 상응하는 책임도 져야할 일이죠.
한편, 정부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면 노동운동은 여기서 뭘 얻을 것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즉, 협의하다가 합의가 되면 추진하면 되는 것이고, 정당하고 절박한 요구인 경우 합의가 안 되면 판을 깨고 나와서 투쟁하면 되는데요. 물론 노동조합의 투쟁이 사회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게 충분히 이슈화가 되어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96~97 총파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노개위에 참여하는 이유나 어떤 논의가 오가는지를 조합원에게 광범하게 교육했던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전술이라는 명목으로 들어갔다가 충분한 내부 소통 없이 덜컥 합의하거나, 판을 깨고 나와도 조합원은 아무것도 모르고 언론을 보고 아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당시 민주노총이 어떻게 해야 했었냐는 문제는 참 어렵습니다. 사실 IMF 위기가 일어날지를 자본이나 정부도 몰랐는데, 노동조합이 그걸 몰랐다고 비판하는 것은 과도할 수 있어요. 그러나 위기 발생 직후에 단기 외채를 통한 과잉투자 등 위기의 원인이 상당히 알려졌는데, 이후에라도 이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점은 문제입니다. 그런 인식이 있었다면 1998년과 같은 대응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1998년 2월 합의에 대해 사람들은 정리해고제를 도입한 것만 생각하지만, 당시 합의에는 사회보장 제도 같은 긍정적인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근데 정리해고제는 즉각 통과했지만, 사회보장 제도에 대한 합의는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민주노총이 우왕좌왕하는 과정에서 합의가 반쪽으로, 즉 정부와 자본에 유리한 것만 이행된 것이죠.
IMF 구제금융 위기의 원인을 재벌의 과잉투자와 금융세계화의 문제로 분명하게 인식했다면, 우선 재벌이 어떻게 책임질 거냐는 문제를 제기했어야 합니다. 한계기업에는 정리해고 상황이 불가피했을 수 있지만, 모든 재벌이 그런 상황은 아니었잖아요. 정리해고를 단행하기 전에 무분별한 과잉투자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재발 방지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따져 물어야 했습니다.
또한, 금융 투기를 어떻게 규제할 것이냐는 지적이 필요했습니다. 외환위기가 노동조합의 직접적 책임은 아니었으니까요. 이런 요구를 전면에 걸면서, 이 과정에서 노동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일을 최소화하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사회적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극심한 공포에 빠져서 ‘회사가 망하니까 정리해고를 수용해야겠구나’ 하고 합의하는 게 아니라요. 그래야 신자유주의 정책이 급격하게 들어오는 상황에 관해 전체 노동자 입장에서 방어막을 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물론 대기업 노조 주도로 만들어져서 기업별 체제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보니, 민주노총이 해고자, 실업자를 대변해 사회적 대안을 요구하는 투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를 ‘전면화’하지 못한 점은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반사실적 가정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더불어, 당시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영남노동운동연구소가 ‘산별노조로 가야 노동자계급 입장에서 대응할 수 있다’, ‘노동조합의 체계를 바꿔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안민지 고용에 관한 쟁점은 모든 이슈를 압도할 만큼 파급효과가 크기에 노조의 투쟁이 거기에 집중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제는 경험이 쌓였기 때문에 총연맹 차원의 대응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일각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노사정은 어용이고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과도하고, 전술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는 평가를 남기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내부 합의가 중요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정리해 보자면, 동의와 요구를 모으는 과정을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는 점,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총파업을 비롯한 사회적 투쟁을 할 수 있을 만큼 투쟁 동력이 확인되고 조직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객관적 정세 분석, 특히 경제 상황에 대한 진단이 돼야 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또한, 총노동의 위상에 걸맞게 특수고용 노동자나 실업자의 사회안전망을 비롯한 사회적 요구를 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해 보입니다.
이미지 구체적인 정세 분석을 당시에 못 했다고 평가했는데, 그럼 지금은 가능한지 의문이 듭니다. 주류 경제학의 분석을 봐도 자신들 내부에서도 이견이 많고 혼란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노조가 정파적으로 의견이 갈려 고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세 분석 합의가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노사정 협의를 하려고 해도 실무 역량이 있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노조에서 일하면서 느꼈던 것은, 실제 노동권에 대해 다른 이해와 입장을 가지고 있고, 조직의 의사결정구조가 노조와는 결이 다른 행정 실무자와 일이 해결되는 방향으로 디테일하게 소통하고, 논의를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유도해 내는 것 또한 수많은 판단을 동반한 정치적인 실무 역량이 있어야 해결이 가능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상대방에게 휩쓸리고 들러리만 서게 되거나, 역으로 우리 주장만 하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튕겨 나와 수세적 투쟁만 반복하게 되니까요.
과연 과거에 그런 역량이 갖춰졌을까요. 당시에는 IMF라는 위기 상황에서 각기 다른 입장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계급적 대안을 가지고 이를 관철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는데, 그러면 더욱더 정치적 실무 역량이 높았어야 했을 겁니다. 또한 지금은 그때와는 좀 다른 결로 행정부나 정치권이 여론몰이나 정치적 치장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상황에서 계급의 입장을 유연하게 관철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에 맞춘 실무 역량을 키울 계획이 노조 내에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약하면, 당시 민주노총에게 노동계급의 대안을 구체화할 정세적 합의가 가능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가능한지, 설사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했다 하더라도 노동계급의 대안을 관철할 정치적 실무 역량이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겠습니다.
박준형 과거에 민주노총이 자체적으로 정세 판단을 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아무래도 지식인이 떠난 상태에서 민주노총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민주노총에 지적 자원을 제공했던 영남노동운동연구소나 한노사연이 있었는데, 비록 서로 입장은 달랐지만 노동조합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던 지식인 그룹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그때보다 더 안 좋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없어졌고, 한노사연에 이론적 자원을 제공받은 국민파도 김명환 집행부 때 뭔가 해보려다가 이제는 노조에 대한 개입력을 상당히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인민주의 성향의 지식인이 민주노총 주변에서 민주노총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상황이고, 듣기 싫지만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세력은 약화했거나 배제된 상황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회진보연대도 지식인 집단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힘을 못 쓰는 이유는 민주노총이 그런 조건에 처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아림 정치적 실무 역량 역시 협상의 필요성을 느끼고 해당 경험이 많아야 증진되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래야 교육에 관한 수요도 생기고 조직에서도 계획을 수립할 텐데, 애초에 협상을 권장하지 않는 조건이다 보니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 같네요.
3.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노동자운동의 대응: 2002년부터 2008년까지
1) 산별교섭과 기업별 교섭의 긴장관계
이아림 이제 셋째 글을 통해,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2008년 경제위기 전까지의 시기를 살펴볼 건데요. 이 시기가 노동운동이 그래도 뭔가를 주도적으로 해보려던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산별노조도 만들고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면서 양날개 전략을 수립하고, 전략조직화 사업도 시작하던 역동적인 시기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산별노조 건설 흐름이 두드러진 시기인데, 그와 관련해서 이미지 회원이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이미지 민주노총의 양대 산별이라고 일컬어지는 공공운수노조와 금속노조 모두 산별교섭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산별교섭이 힘을 가지려면 현장의 임금과 단체협약에 대한 중앙교섭권이 강화되어야 하는데, 중앙교섭이 최소 교섭이 되었을 시 이중 교섭으로 인한 산별교섭 교섭력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음을 해당 글에서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육공무직본부에서도 각 현장에서 뚫을 수 있는 의제가 중앙교섭으로 가면서 지지부진해졌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육공무직 내 소수 직종이나, 공공기관이나 지자체 중 현장 노동자의 수가 적은 경우에는 현장의 예산 자율성이 제한되어 중앙부처 대상으로 교섭하지 않으면 현장의 요구 자체가 막혀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특정 집단이 ‘최대 효과’를 보는 것과 노동자 간 임금 격차, 즉 교섭력 격차를 완화하며 ‘보편적인 기준을 형성하는 것’ 사이의 갈등은 사실 기업별 교섭에서도 있는 문제여서 노조가 일상적으로 겪는 갈등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를 기업 단위에서는 현안을 해결해주면서 노조 집행부의 지도력으로 그 갈등을 무마하는 식으로 풀어갑니다. 또는 여러 직종이 모두 교섭에 참여하게 만들어 교섭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각자 지게 만드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산별 규모로 해당 사안이 커졌을 때, 모든 직종의 교섭 참여는 불가능하고, 갈등 조정을 위한 집행부의 지도력 또한 구축되기 어려운데요. 노조의 대의제가 제 기능을 해야 산별의 지도력이 형성될 것 같은데, 난항을 겪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편적 기준 형성을 위한 조합원의 합의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더불어 산별교섭의 형태가 강화된다고 했을 때, 현장 간부 역량이 하락하는 문제도 제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육공무직본부는 교섭을 중앙에서 하면서 현장 간부가 임단협 사이클을 책임지는 것을 경험하기 어려워져 간부 역량 문제에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기존 기업별 교섭이 사실상 간부 역량 강화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나 다름이 없었을 경우, 교섭이 이관되는 와중에 현장 간부의 역할이 소실되어 조합원과 노조 중앙을 다른 의미로 괴리시키고 더 많은 노동자를 수동적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중앙교섭이 강화되면 현장을 강화할 또 다른 주체화 구조와 계급투쟁의 지점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박준형 기업별 교섭권을 통합해 산별교섭을 해보자고 지난 20년 동안 시도를 했는데, 잘 안되었죠. 사실 산별교섭을 하던 유럽 노조가 붕괴하는 상황이기에 한국에서 이 흐름을 역전한다는 게 만만치 않습니다. 여기서는 모든 교섭을 산별에 집중한다는 측면보다 산별에서 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자는 차원에서 얘기를 좀 해볼게요.
합의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난점은 한국 노동조합에서 ‘기업별 경제주의가 정당하다’는 게 보편적인 인식이라는 점 같습니다. 기업별 교섭을 통한 이익 극대화, 즉 경제주의가 노조 활동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수출 대기업이 중심인 경제 구조에서는 수출 대기업, 즉 재벌기업은 기업별 임금 극대화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여력이 있기에, 이런 노사구조가 강화된 것이죠. 초기업 교섭을 하게 되면 이런 구조가 약화할 수밖에 없고, 민주노총을 주도하는 대기업 노조가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별 노조의 경제주의를 정당화하는 관행에 더해 객관적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런 구조를 노동조합도 극복하기 어렵지만, 사용자 측에서도 바꿀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측은 산별교섭을 통해 임금 인상을 자제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그렇게 했다가는 대기업 노조가 반발해서 결국 임금 인상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에 무망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기업 노조에서 당장에 산별교섭이 어렵다고 했을 때, 대기업 노조를 포위하는 방식으로, 즉 특수고용 플랫폼 혹은 영세 사업장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초기업 노사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현 단계에서는 현실적이라고 보입니다.
사실 중앙교섭이 강화되면 현장 활동과 투쟁이 약화된다는 비판은 일각에서 산별노조를 반대하는 근거입니다. 산별교섭을 하게 되면 노동조합의 현장 기층조직은 약화할 것이라고 전제하는데, 이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현장을 강화하는 방식은 결국에는 기업별 경제투쟁을 바탕으로 한, 기업별 노조 조직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특수한 성격의 운동 주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과연 노동운동이 지향하는 주체는 누구인지,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고 노동자계급 전체에 도움이 되는 주체는 어떻게 만들 것인지 질문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 교섭구조를 단일화하면 현장 활동이 약화하는가,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노조도 과거에는 수백 개의 지역별 의료보험노조 연합체로 출발해 조직 발전을 거쳐 이제는 하나의 노동조합으로서 교섭을 중앙에서 모두 관장하게 되었거든요. 그렇다고 현장 활동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지역별 노사협의회도 하고 지역 연대 활동과 교육 사업도 하면서 바쁘게 굴러갑니다. 또, 교섭의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 현장의 논의를 바탕으로 중앙에 의견을 수렴하는 활동을 합니다. 현장의 활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활동 내용이 변화하는 것이죠.
이미지 현장에서 교섭하다 보면 아무래도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주목적이 될 수밖에 없지만, 현장 간부가 교섭 과정에서 직종별로 갈등을 조정한다거나 예산을 이해하는 회계적인 능력을 갖추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이해를 토대로 임금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할 수도 있고요. 또, 대표자에게는 조합원의 입장을 수렴해서 교섭 자리에서 발언하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산별교섭으로 가면 그런 요소가 상실되는 부분은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성을 갖는 이들의 리더십을 형성하는 구조가 지금은 너무 교섭 중심으로만 되어서 그런 것인데요. 그래서 현장 간부의 역량 강화를 위한 새로운 구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준형 간부 양성이나 현장 활동 문제는 교섭권을 상급 단위로 올리게 된 이후에 개발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장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하게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민주노총에서 가장 큰 공기업 노조인 철도노조도 지부 수준의 현장에 교섭권이 없지만, 공공운수노조에서 현장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는 곳 중 하나거든요. 교섭을 책임지는 작은 사업장의 현장 활동이 꼭 강하지도 않고요. 제조업 대기업도 비슷할 것입니다. 기업별 조직의 교섭 관장 여부가 간부 양성이나 튼튼한 현장 활동과 반드시 관련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지 또 하나 궁금한 점은 2016년 저성과자 퇴출, 성과연봉제 관련 투쟁을 할 때, 집회에서 공공기관 노조가 산별에 교섭권을 이관한다는 선언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이 전술이 당시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실제로 현장에 미친 영향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박준형 공공운수노조가 미완의 산별노조기 때문에, 공동투쟁을 위해 교섭권을 연맹에 위임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건데요. 투쟁에 성과가 있었고 정부 지침도 폐기했지만 돌이켜보면 한계가 있었는데, 투쟁의 성과를 조직적 성과로 잘 수렴하지 못했습니다. 사후에 공공기관 노조들이 교섭권을 집중했던 경험을 살려서, 내부 합의를 만들어가고 이런 틀을 안정적으로 정착하고자 노력해야 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교섭권을 중앙에 집중해서 직무급제 합의를 막고 있는 상황입니다. 근데, 이게 썩 작동이 잘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산별노조의 방침을 위반하고 직무급제를 합의하는 일이 발생하고, 그러면 공공운수노조가 이를 징계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부의 합의를 통해서 공동투쟁을 하는 용도로 교섭권을 집중해야 하는데, 방침을 위반하면 징계한다는 조직 규율로 접근하는 상황입니다. 교섭권을 형식적으로 집중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점은 투쟁 방향에 대한 진정한 합의를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산별노조가 교섭권 집중을 통해서 조직을 끌고 갈 수 있는 도덕적 헤게모니를 갖는 것이 중요한데, 이게 없으면 산하 조직이 징계를 피하고자 이면 합의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헤게모니가 있다면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겠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겠죠. 공공운수노조는 산별교섭에 대한 경험도 없고 관행도 충분치 않다 보니까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아림 산별노조 건설이 노동운동의 합의처럼 보였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진정한 합의가 있었냐는 생각도 듭니다. 산별노조에 대해 누구는 투쟁 본부 정도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고, 누구는 산별교섭이 기업별 교섭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지도력과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인데요. 후자처럼 생각한 진짜 산별주의자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싶습니다.
박준형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긍정적인 측면도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기업별 노조 체제로 출발하다 보니 산별 노조로 가는 토대가 척박한 상황에서도, 산별노조 건설이 정당하다는 합의를 형식적으로라도 이뤄냈다는 점 자체는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기업별 교섭을 하고 싶어도, 앞에서는 ‘산별은 의미 없다’라는 식의 말을 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은 그런 합의조차 점차 약화되는 상황이 되어버려서 더욱 걱정이 큽니다.
2) 2005년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논쟁과 2006년 비정규직법 강행
서선주 비정규직법이 강행되던 2005~2006년 당시를 노사정위 참여든, 투쟁이든, 아니면 다른 무슨 방법이든 써서 노동운동이 돌파할 수 있는 정세였다고 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당시 노동운동의 대응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이아림 더불어서 노사정위원회에 전술적으로라도 참여를 했었어야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입법 문제에 매달리기보다는 노총으로서 당시 노동시장에서 해결했어야 할 문제에 오히려 집중해야 했다고 생각하신 건지도 궁금했습니다.
박준형 전술적으로 노사정위원회에 꼭 들어가야 했냐는 쟁점은 당시의 세세한 상황을 봐야 하기에 지금 와서 그것까지 구체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비정규직법이 한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추진을 안 하는 게 더 나았을까요? 비정규직을 제한하기 위한 제도가 필요한 상황에서, 정부가 낸 정책이 한계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반대하는 활동만 한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다른 것을 함께 요구해서 처우 개선을 위해 활동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종합적인 대안을 가지고 장기적인 관점으로 접근했어야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적합한 사례는 아닐 수 있지만,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냈을 때, 핵심·비핵심 업무를 구분한다는 점과 포괄 범위가 좁은 게 문제라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이후에 노조가 계속 투쟁하는 과정에서 보수 정부도 대책을 냈고, 문재인 정부에 와서 정규직 전환 정책이 나왔습니다. 10여 년이 걸린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문재인 정부 정책에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하청, 간접고용 노동자까지 전환하기로 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이전 박근혜 정부 때 대규모로 무기계약직 전환이 된 것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돌이켜보면, 노동시장을 변화하는 정책이 한 번에 완벽하게 나오는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투쟁하는 과정에서 정책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거죠. 정부 정책에 반대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장기적 시야를 가지고 제도적 변화를 강제하기 위한 실천을 일관되게 끌고 나가야 뭔가 바꿀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노사정 협상에서 다루게 되는 노동시장, 노사관계 제도의 변화라면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해야 하겠죠.
근데 이게 가능해지려면 노동시장의 변화 방향에 대한 합의가 노동운동 안에 있어야 하고, 장기간 추진할 수 있는 동력과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같은 경우에는 자기 과제로 투쟁하는 현장 조직이 있었고 정부라는 단일한 주체가 있으니까 비교적 용이했는데, 노동시장의 제도 변화는 정부에만 요구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사용자까지 포함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심지어 미조직 불안정노동자의 경우에는 주체도 취약하죠.
그런데 노동운동이 변화 방향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종합적인 정책을 갖고 대응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비정규직법이 논란 끝에 결국 시행이 되었는데, 이후 이걸 어떻게 바꾸자는 운동이 제대로 이어진 것도 아니었고요. 지금도 당시 제정된 기간제법을 어떻게 개정하자는 움직임이 거의 없죠.
3) 전략조직화 사업
안민지 글에서 “독일식 산별노조–산별교섭을 모델로 노동조합과 노사관계의 발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업별 노사관계가 주류인 미국 노동운동의 전략을 결합한다는 것은 상당한 고민이 필요한 문제였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실용적인 조직 확대의 필요성 속에서 산별노조 운동과의 연계는 면밀히 고려하지 않고 별개 사업으로 진행되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별노조 운동과의 관계를 면밀히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나, 한편으로는 노조가입률의 한계와 노동자 대표성 문제, 산별교섭 제도화와 노동자운동의 정체 속에서 재생산의 필요성과 조직 확대에 방점이 있었던 것일 텐데요. 전략조직화 사업이 산별노조 운동과의 연계를 면밀히 고려했다면 어떤 노력이 병행되어야 했을지 궁금합니다. 글에는 두 가지 차원의 문제의식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는 조직 확대만이 아니라 산별노조의 내용을 채우는 조직 문화 혁신과 연계했어야 한다는 점이고요. 다른 하나로 산별교섭을 확대하기 위한 조직화 대상을 선정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부분을 짚어주셨습니다. 필자는 어떤 부분에 방점을 둔 건지가 궁금합니다.
박준형 민주노총 안에서 합의된 노선 중 하나가 전략조직사업인데, 전략조직사업의 목표는 사람마다 달랐던 것 같습니다.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자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조직해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측면이 가장 주된 이유였지만, 부수적으로 몇 가지 효과를 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조직 문화 혁신의 측면에서, 기존 노동조합이 전체 노동자를 대변하기 위해 운동하는 조직으로 이념적 쇄신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더불어, 등 따신 정규직 노조와 달리 전략조직사업으로 조직한 노동자가 전투적 투쟁을 통해 침체한 노동운동에 활력을 주고 투쟁 기풍을 세울 것이라는 의미에서 조직 문화의 변화를 기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가 산별교섭과의 연계를 강조하긴 했지만, 이 측면도 부수적인 기대효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 조직되는 부문에서 처음부터 산별 노사관계를 만들다 보면 기업별 교섭구조가 안착한 쪽보다는 산별 노사관계를 형성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했던 겁니다.
또 하나 기대한 목표는 민주노총의 약해진 사회경제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조직 확대가 필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노조의 조직 확대가 전략조직사업 때문인지는 물음표가 남습니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정책으로 인해 전략조직사업을 전혀 하지 않던 한국노총이 민주노총보다 더 많이 조직되기도 했고요. 조직 문화 측면에서는 노조가 조합원만이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까지 대변해야 한다는 인식을 남긴 것은 확실한 성과로 보입니다. 그런데, 새롭게 조직된 사람들이 과연 새로운 운동 주체였냐고 했을 때는 꼭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비정규직 사업장이라도 기업별 임금 투쟁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죠.
금속은 전략조직사업을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했는데요. 그 이유 중 하나는 금속노조는 지역지부 차원에서 산별교섭을 할 수 있고 새로운 영역을 조직할 필요 없이 공단을 조직하면 되기에, 이건 기존 지역지부 업무인데 굳이 전략조직사업 개념으로 해야 하는가 싶어 공감대가 적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공공의 경우는 비교적 빨리 시작했는데, 2004년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공공연맹 이승원 위원장이 비정규직 전략조직사업을 통해 지역에 기반을 둔 산별노조를 건설해 보자는 전략적 구상을 수립합니다. 물론 현재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이런 시도는 전략조직사업과 산별교섭, 그리고 노동시장의 변화에 대응한 종합적인 구상이었습니다.
근데 대부분 전략조직사업은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지 못했습니다. 조직화 사업은 열심히 했지만, 초기업적인 노사관계를 만들기보다는 기업별 교섭을 늘렸던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사회서비스 영역도 비슷한 결과를 낳았는데, 불안정한 사회서비스 노동자 전체를 대변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사회서비스원이라는 기업별 노조 조직화로 귀결되었습니다. 결국 투쟁은 치열하게 했지만 정책 변화로 인해 사업장이 없어져 노조가 사라진 상황입니다.
그래도 건설노조나 화물연대의 조직 확대는 초기업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결합했기에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민주노총 차원에서도 기왕 전략조직사업을 한다면 초기업적 노사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플랫폼 노동자라든가 특수고용 노동자를 조직하는 데 힘을 더 쏟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노동조합이 막대한 재정과 역량을 투입하는 사업이라면 조직 문화의 혁신에 그칠 게 아니라, 현실의 노사관계를 바꾸기 위한 투쟁과 조직화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이미지 전략조직사업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략조직사업을 하면 조직화가 잘될 곳을 선정하는 경우가 많고, 산별노조의 입장에서 어느 곳을 전략적으로 주목해야 하느냐는 논의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정파적인 갈등이 불거지기도 하는데요. 민족해방파의 경우 조직화의 목표가 자신의 당원 수를 확대하는 데 있기에, 어떤 집행부 때는 힘을 싣고 어떤 집행부 때는 협조하지 않는 식으로 행동합니다. 전략을 합의하는 과정이 정파를 초월해서 이뤄져야 하는데 이게 잘 안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박준형 맞습니다. 사실 글에서는 민족해방파의 전략조직사업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전략조직화를 조직 확대 규모를 중심으로 사고한다고 해도, 기존의 노조는 조합원이 많아지면 노조의 힘이 세진다고 생각하는데, 민족해방파는 조직화를 통해 당원 수를 늘려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민족해방파의 조직사업은 규모 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고 전략조직사업과 정치적 조직화를 결합했다고 할 수 있는데, 평가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내용적 조직화에 성공한 것이니까요. 물론 우리가 그들처럼 정파노조를 지향하는 건 아니고, 그들의 내용이 잘못됐기에 비판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한건희 민족해방파의 경우는 조직 확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업별 교섭을 강화하는 게 조직화에 유리하다면 그 방법을 택하는 식입니다. 불법파견 소송을 통한 조직화에 대한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도, 일단 조직화에 유리하면 불법파견 소송을 선택합니다. 조직화가 산별노조 운동과 연계되기보다 상충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요.
4.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의 노동자운동
1) 기업별로 대응한 구조조정 저지 투쟁
이아림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한국은 보수 정부가 집권했던 상황이었고, 노동운동은 공공부문 구조조정 등을 정권의 보수적 성격이 초래했다고 오인하게 됩니다. 이런 정세에서 양날개 전략이 실패한 것을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졌고, 이에 노동운동은 야권연대라는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넷째 글은 참석자들의 경험이 제일 많은 시기인데요, 우선 한건희 회원이 질문해 주셨습니다.
한건희 맨 처음에 필자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얘기를 했었는데요. 그동안 축적됐던 민주노총의 경로가 고착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지 의문이 듭니다. 특히, 쌍용자동차 투쟁에서 ‘모든 정리해고 반대’ 외에 다른 대응이 가능했을까요? 총연맹의 전반적인 이데올로기 측면에서도, 조합원 정서의 측면에서도 녹록지 않은 선택이 아니었을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아림 글에 어느 정도 실마리는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예를 들면, 단위노조야 그렇다 쳐도 왜 산별노조에서도 실업자까지 아우르는 고용 조정 정책을 제기하지 못했는지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주장이 수용되지 않았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이라고 금기시되었던 것인지, 일단 최대치를 요구해야지 그런 정책이라도 추진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박준형 경로의존성을 고려하면, 다른 대응이 가능했을지 저도 의문이긴 한데요. 금속노조 쌍차지부에서 조합원의 고용을 지키기 위해 기업별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쌍차지부보다는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가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투쟁 지원도 필요하지만, 상급 조직이 해야 할 역할은 그 이상이라고 봅니다.
부품사나 하청사에서 광범한 고용 조정이 일어난 상황에서 지역 차원의 고용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활동가가 마치 지역 차원에 대안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건 쌍용차의 기업별 투쟁을 약화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쌍용차 농성 투쟁을 어떻게 엄호하느냐로 모든 쟁점이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기업별 노조 내에서는 어쩔 수 없더라도, 밖에서는 좀 더 넓게 보고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했는데 말이죠.
지금은 다소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쌍용차, 한진중공업 투쟁 이후 대기업이 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최대한 회피하는 대신, 정규직 고용을 최소화하고 하청을 고용해 고용 불안을 외주화하는 상황이 가속화됩니다. 그래서 최근 수년간 경기가 어려웠음에도 정리해고 투쟁이 거의 없죠. 거제·통영·고성 하청노동자 투쟁도 ‘조선업 노동시장 혹은 하청 노동자 일반의 문제를 해결하는 식으로 대안이 나와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결국 원청 사용자성을 높이는 방향의 노조법 2, 3조 개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개정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는 있지만, 원청 기업에 대응하는 하청 기업별 노조의 기업별 교섭은 가능해져도 결국 원청도 다른, 즉 산업수준에서 하청 노동자를 포괄하는 산별교섭은 여전히 먼일이라는 점에서 이런 대안이 충분한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습니다.
안민지 하청이 원청을 상대로 교섭할 수 있게 되고 노동3권을 제대로 발휘한다는 게 역사적 의미를 봤을 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완화하는 방법이 노조법 2, 3조 개정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원청과의 교섭이 가능하게 되면 다단계 하청 구조에서 다양한 시도를 꾀할 수 있습니다. 즉, 이중구조를 완화하는 직접적인 경로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별 관계를 벗어나지 못해서 한계가 있다는 얘기를 해주신 것 같은데, 초기업적 운동을 모색하는 것과 별개로 이 역시도 중요한 시도라 생각합니다.
또한, 지역 차원의 고용 조정 정책으로 해법을 찾기가 어려운 현실적인 조건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당시에 완성차 조합원의 고용과 임금 수준을 지역의 고용 정책 차원으로 대처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현대차의 경우 지급 여력이 있었기에 복직이 가능했다면, 쌍용자동차는 먹튀 자본의 특이성이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떤 다른 시도를 할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두 가지를 평가로 남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쌍용차 투쟁은 먹튀자본 대응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지금도 이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데요. 먹튀자본과 관련해서 법 제도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상급 조직이 해야 할 그 이상의 역할이 이런 부분이라고 봅니다. 다음으로, 노동조합이 좀 더 확대되어야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우조선 투쟁을 할 때 금속노조는 지역 경제와 조선기자재 문제까지 산업 전반을 아우르고자 했습니다. 경남에 조선기자재 관련 지회들이 조직되어 있어 투쟁 주체가 있어서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승곤 지금까지 대화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단위노조에서 워낙 오래 활동해서 노정대화와 같은 사고구조가 매우 낯섭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요. 결국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은 노동조합에 거시적인 시야가 필요하다는 얘기라고 봅니다. 사측의 미시적인 대응이 거시적인 혼란을 불러오기에 정부가 있는 것일 테고, 그런 면에서 정부와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존에 우리가 가진 관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자본가의 위원회에 불과하다고 마르크스가 얘기해서 더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총연맹 차원에서 정부와 대화하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상황이 참 불행하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만, 사실 노총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정부도 없었고, 우리 역시 그런 대화를 할 만큼 우리 안에서 합의를 만들어 갈 준비도 안 돼 있는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노조가 내셔널센터로 기능하지 못하고, 미시적으로 사측만 이득을 축적하는 와중에 노동자 간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국민의 상대적 박탈감이 높고 급기야 출산율도 OECD 꼴찌인 위기 상황 아닙니까? 만약에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제안했을 때, 그런 대화를 책임지고 해나갈 상대방도 없고 우리 역시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먹튀자본 문제도 비슷한 것 같아요. 먹튀자본이라는 건 개별 자본 수준에서는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쌍용자동차가 무너지는데 현대차는 문제가 없단 말입니다. 오히려 같은 업계에서는 ‘한계기업이 잘 퇴출 당했구나’ 하고 말겠죠. 이런 문제를 정부와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면 우리가 숙고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정부든 노총이든 먹튀자본 문제로 발생하는 급격한 혼란을 최소화할 논의를 할 수 있는 상태인지 의문이 듭니다.
아까 지역 차원의 고용 정책이 무망하다는 얘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예를 들어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되었을 때 주변 공단에서 일해도 크게 문제없는 상황이면 좋겠는데, 아시겠지만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얘기죠.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되는 건 곧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과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막말로 대기업 다니던 사람이 조그만 하청 공장에 가서 일해야 하는 상황을 감수하는 게 상상이 잘 안되잖아요. 노동자 간 격차가 커진 여파로 정리해고에 대해 격하게 반대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구조를 해결해 가는 데 있어 우리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정부와 협의하여 실마리를 찾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겠습니다.
박준형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평가할 때, 말씀하신 것처럼 정부의 한계는 물론 비판해야하겠지만 노사 각 주체가 문제가 없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사회적 합의가 제대로 안 되는 이유가 정부의 태도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노동운동 안에는, 노사정 협상이라면 정부를 압박해서 사측을 굴복시켜 요구안을 관철해야 한다는 관념이 강합니다. 그런 구도를 통해 요구안을 실현하지 못하면 협상이 실패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죠. 그런데 현실이 그렇게 전개되기는 어렵다 보니 노사정 협상 자체에 대한 회의도 커지게 됩니다.
이러한 입장의 배경에는 재벌, 수출 대기업은 항상 지불 여력이 있으므로 그들을 압박해서 요구를 관철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쟁점만 봐도, 재벌 대기업이 양보하도록 압박한다고만 해서 합의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중소영세기업이나 자영업자도 이해관계자가 됩니다. 의제 측면에서도 인구문제 해결과 같이, 제로섬 게임이 아닌 쟁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사정 협상에서 노의 상대로 더 중요한 것은 오히려 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합의’라고 하면서 정부가 노의 손을 들어, 사는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압박하여 제도를 바꾸는 일은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투쟁을 통해 일방의 요구를 관철하는 장으로 볼 경우 ‘사회적 합의’는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결국 어떤 이유에서든 재벌에서 자영업자까지, 사도 동의할 수 있는 의제에 대해, 동의되는 어떤 수준으로 합의가 필요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무시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사회적 합의가 번번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노조의 대응도 실패했던 것이겠죠.
이미지 노동 의제 연구 역량이 줄어드는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은퇴하고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회협력팀으로 간 기아차의 한 간부에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역 고용 실태를 조사하면서 1, 2차 하청을 넘어 3, 4차 하청의 상황을 보게 되었는데, 옛날에 함께 일하던 동료가 중간 착취자가 돼서 2~3명 되는 작은 공장을 하청 받아 운영하는 일이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역 차원에서 이중구조 문제가 이렇게 드러나는구나 싶어 이 부분에 관해 조사하고 연구 용역을 맡기려고 해도 노동 관련한 연구 인력이 없다고 합니다. 정책이나 사업으로 추진하려면 연구 용역을 맡겨서 근거를 가지고 노동부에 예산을 요청해야 하는데 그 작업도 못 하고 있다는 거죠. 대화의 파트너인 정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연구 집단 등 총체적인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2) 야권연대와 진보정당 운동의 퇴조
한건희 소위 ‘전민항쟁’ 노선을 고집하던 민족해방파가 민주노동당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맥락이 궁금합니다. 민주노동당에 참여한 민족해방파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민주노동당의 노선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박준형 말씀하신 것처럼 민족해방파가 원래 정당 지향은 아니었죠.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총장이었던 민경우 씨가 전향한 이후 쓴 책을 참고해보면, ‘군자산의 약속’ 전까지 민노당에 결합한 민족해방파 활동가는 별로 없었습니다. 크게 민족해방파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범민련,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에서 지금의 민중민주당을 결성한 세력으로 나눠볼 때, 군자산의 약속 이후 전국연합 쪽 활동가가 민노당으로 대거 들어오게 됩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군자산의 약속은 사실상 북한의 지도로 남한의 민족해방파가 노선을 전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국연합의 주력이 전선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전선체에서 합법 정당 노선으로 전환한 것이죠. 문제는 민족해방파가 노동시장이나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어떤 정립된 노선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민노당의 정책은 대부분 과거 진정추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나 정책보좌관을 중심으로 생산되었습니다. 민족해방파는 다른 문제에 특정한 정책적 입장이 있다기보다 북한 문제 관련해서만 입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뚜렷하게 정립된 입장이 있기보다 잡다한 인민주의적 입장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북한 문제에 대해 민노당 내 민족해방파가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내기 전까지 당내에 쟁점이 있던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2000년대 중반부터 북한 쟁점이 터지고 분당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어서, 민족해방파가 민주노동당의 노선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기보다는 민주노동당이 분당하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도 전국회의나 진보당이 어떤 노선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북한의 입장이 계속 고려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북한 정부의 입장이 남한 노동자한테 유리한 것은 아닐 수 있거든요. 진보당은 남한 노동자계급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서 윤석열 정부 탄핵 투쟁을 하는 게 아니라, 정부의 대북 정책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민주노총까지 주도하고 있기에, 어떻게 보면 민주노총 집행부가 노동시장 정책에 관심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건희 민족해방파가 단독으로 집권한 양경수 집행부가 출범하기 전까지는, 전국연합이 대략 국민파의 입장에서 움직였지 민주노총의 노선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겠죠?
박준형 그렇죠. 그때는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어차피 국민파도 민주당 정부하고 잘 해보자는 입장이었기에 여기에 힘을 싣는 게 북한에도 유리했으니까요. 정권이 넘어간 다음에 퇴진 투쟁을 하는 것을 보면 일관된 행동 기준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건희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지니던 민주당이, 이후 본격적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한총련 출신을 수혈하는 과정에서 민주진보 이데올로기나 인민주의 정책을 함께 수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민주노총이 민주당의 야권연대에 동참하기 시작한 시점을 2008년 광우병촛불로 잡을 수 있을까요? 그 전에 이미 운동권이 주도하는 민주노총 내부에 인민주의적 맹아가 있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보면 민주노총이 민주당에 침식당한 게 아니라 그 반대의 서사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아림 글에서도 민주당과 민주노총의 세대 연관성, 즉 586 네트워크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추가 설명해달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박준형 노무현 정부까지만 해도 386 정치인이 후배 세대 격이었다면, 2010년대가 되어 이들이 나이도 먹고 민주당의 중심이 되면서 당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대협 의장이었던 임종석이 문재인 정부 때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한 것이 상징적인 일이죠. 2008년 광우병 촛불,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을 계기로 해서 운동권, 그리고 민주노총이 반정부 투쟁을 매개로 민주당과 더 긴밀하게 활동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만 하더라도 민주노총과 민주당 사이에 거리가 꽤 있었는데, 2010년대가 되면서 자연스레 젊은 시절 같은 경험을 한 세대가 두 집단을 주도하면서 공감대가 넓어졌습니다. 과정상으로는 야권연대가 있었지만, 그걸 넘어서 일종의 586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인적 구성의 수렴이라는 측면이 중요하고 그래서 제대로 거리를 갖기도 어려운 상태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아림 예전에 이 세대가 공유하는 핵심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냐 했을 때, 결국 경제정책이나 정치사상의 측면보다도, 반보수, 반일이라는 반테제밖에 없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정책적인 부분에서는 여야가 수렴하는 부분도 꽤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최근에 문득 정테제가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는데, 바로 북한 문제입니다. 최근 우상호가 낸 민주당사 회고록에서도 민주당의 핵심강령은 ‘한반도 평화’라고 말했는데, 결국 북한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기 위해 북한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해야 하고 이를 발판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구상이 이 세대가 공유하는 핵심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제를 버리지 않는 한, 핵 개발 이후 남한을 협박하고 있는 북한 정권조차 결과적으로는 비호를 하게 되는 것이죠.
박준형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으로서 노동자계급을 대변하는 독자적인 입장을 가지고, 이를 중심으로 사회와 체제를 바꿔 나가려는 구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당과 민주노총을 주도하는 세대의 공통적인 경험과 입장이 민주노총을 압도하고 있어서, 독자적인 노동자 조직으로서의 기능부전에 빠진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5. 87년 이후 노동자운동은 변화할 수 있는가
이아림 지금까지 87년 이후 30년이 넘는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를 시기별 정세와 주체의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평가를 해보았습니다. 필자가 마지막 글에서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앞으로 노동운동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변화의 계기는 무엇이 되어야 할지 화두를 던져주셨는데요. 얘기를 나눠봅시다.
서선주 2000년대를 특징지은 주요 노동문제가 노동유연화와 불평등 심화였고, 거기에 대응했던 비정규직 투쟁이 주요한 투쟁이었다면, 지금 정세에서의 주요 문제와 투쟁은 뭐라고 할 수 있을지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박준형 꼭 취지에 맞는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영국이 인종주의 폭동 때문에 난리입니다. 브렉시트라는 인민주의적 정책 때문에 1인당 국민소득이 줄고 있을 정도로 영국 경제가 붕괴했는데, 대중은 이 고달픈 현실을 이민자 탓으로 돌립니다. 처음에 브렉시트를 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이런 결과를 원했던 것은 아닐 거예요. 사실 브렉시트를 주장했던 좌파도 많았습니다. 활동가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또 특히 그 결과에 따라서 대중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는 우리 의도대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노동운동사를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운동이 어떤 실천을 통해 노동시장을 바꾸려고 투쟁해서 뭔가 변화가 일어났는데, 애초 의도와 같이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0년대에 대기업 노조가 열심히 투쟁해서 고용을 방어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노동시장이 이중화가 되었죠. 노동운동가들은 정규직 노조가 자기 일자리를 지켰으니 이제 비정규직을 위해서 행동했으면 하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투쟁의 결과가 우리가 의도한 대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정세에서 중요한 문제는 인구감소 문제, 기후위기, 경제위기, 자동화 등일 텐데요. 이에 대해 노동운동이 장기적으로 대응하는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잘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아까 쌍용차에서 해고되면 하청에서 일을 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얘기했는데, 기후위기만 생각하더라도 화력발전소 노동자가 지역의 다른 일자리로 이동할 수 있는지 하는 쟁점이 있습니다. 대책 마련을 위한 노사민정 기구에 노조가 참여할지에 관한 논란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노동운동 입장에서는 이런 문제에 관한 해결 방안을 알지 못합니다. 기업별로 고용을 지키는 것 외에는 경험이 짧습니다.
기후위기나 자동화 문제에 기업별로 대응해서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기업별 대안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략의 전환이 필요한데, 노조가 좋은 일자리의 사업장 위주로 조직돼 있다 보니까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게 너무나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이 점이야말로 민주노총이 당면한 핵심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어떤 투쟁이든, 민주노총이 기업별 구조를 극복할 수 있느냐는 쟁점 말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조직되는 영역에서 초기업적 노사관계를 만들자는 구상에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승곤 초기업 교섭의 사례로 얘기한 건설노조를 가까이서 지켜봤는데요. 사실 건설 산업 자체가 자연스럽게 산별로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개별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라는 인식보다, 해당 산업에 고용된 노동자라는 사실을 노동자도 사측도 상호가 인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사관계가 빠르게 산별로 수렴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지점은 산별노조를 지향하는 이념적 근거가 좀 취약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임금과 노동조건에서 전국적인 노동 표준을 만들겠다는 취지의 활동가가 있었고 이들을 주축으로 산별노조 건설을 추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의미가 조직 전반에 안착하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그러다 최근에 중앙교섭이 삐걱거리게 되었습니다. 사측 입장에서 산별교섭을 유지할 유인이 자꾸 감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조합원 고용을 회피함으로써 노동 비용을 줄이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점차 노조가 강제해서 산별교섭 체결을 끌고 왔던 상황이었고, 결국 사측은 자신의 고유한 권한인 인사권을 침해한다며 정부에 개입을 요청하게 됩니다.
만약 건설노조가 산별교섭을 다시 수립하게 된다면, 보편적인 요구로서 건설업체의 고유한 문제, 즉 국내에 기능공이 제때 공급이 안 되는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봅니다. 이건 노사 간에 공동의 이해가 걸려있는 부분이거든요. 그다음에 건설 안전을 확보하는 문제도 노사가 같이 합의할 부분이 있습니다. 건설노조는 이런 방향을 고민하는 와중에 너무 빠르게 공안 탄압을 받아버려서 어려움을 겪는 상황입니다.
건설노조와는 조금 성격이 다른 플랜트 노조는 지역에서 초기업 교섭을 무려 30년 전에 시작했습니다. 1989년부터 포항에서 지역의 노동 표준을 확립하고 그 역사를 30년 동안 이어오면서 조금씩 확대해 왔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건설노조와 같은 전국 단협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공고하게 자리 잡은 지역에서의 이해관계를 지양하고 전국적 질서를 창출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집단교섭이나 초기업 교섭이라는 교섭 형태의 완성만은 능사가 아닐 것이고, 그것을 왜 하는지가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조합원까지 설득해 내고 그 목표에 적합한 의제를 개발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 생각합니다.
이미지 조합원이나 노동운동이 장기적 관점을 갖고 대안적 대표성을 갖추는 것은 특정한 노조 내외의 제도나 슬로건의 형식적 완성보다는 각 정세 속에서 수많은 의식적 노력을 통해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조합원 스스로가 장기적이고 거시적으로 자신의 일터와 노동운동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을 지향할 수 있는 구체적인 투쟁 의제가 국면마다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노동운동이 오랫동안 분석해왔던 것이기도 한데요. 이에 대한 정부의 공격과 전취에 노조가 방어적인 슬로건을 형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조합원이 진심으로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가 심각하다고 여기고 해결을 요구할 구체적인 지점을 산별마다 발굴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결 과정에서 조합원의 너른 합의와 연대투쟁, 교섭에 대한 토론을 조직하고 성과를 교육에 반영하고요.
이런 방식이어야 목표에 따른 투쟁의 결과가 현장에는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귀결되는 괴리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장기적 관점을 꾀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서선주 글의 말미에 ‘앞으로는 노동조합 운동과 정당운동을 넘나드는 활동가가 (복수의) 진보정당과 연대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나을 것’이며 ‘반드시 정당 지향 운동이라는 의미만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복원과 문제 제기가 필요한 시기’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신 건가요?
박준형 사실 정치적인 운동을 하려면 정당을 만드는 게 제일 맞긴 하죠. 그러나 한국의 분열된 진보정당 모습을 봤을 때, 이들이 노동운동의 방향을 제대로 주도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노동운동이 좋은 조건이냐, 물론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떤 정당을 구심으로 하여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 상황에서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복원을 위해 정당운동가, 사회운동가 혹은 노동운동가 모두 각각의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는 건데요. 우리가 노동조합에 있으니까, 노동조합에서 무엇을 할 거냐를 좀 더 생각해 보자는 얘깁니다.
노동조합 운동에서 정치적 전망을 만든다고 했을 때, 전노운협이 주장했던 노동조합에서 정치의식을 고양하는 활동 방식에 대해 당시에 옳았냐, 그르냐를 떠나서 오히려 다시금 평가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조합을 정치적으로 고양하려면, 노조가 노동자계급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하겠고 그런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지향하는 노선적, 정책적 변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특수한 이해만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국민경제 전체를 봐야 할 텐데요. 예를 들어, 스웨덴노총은 대의원대회에서 고용률, 실업률, 임금 수준 등 거시경제 지표와 연계해서 정부에 형평성을 달성하기 위한 요구를 제시합니다. 물론 사민당이 있는 스웨덴보다 훨씬 어렵겠지만, 민주노총이라도 경제사회 구조와 노동시장의 변화에 대한 거시적 입장을 가지고 요구하는 게 필요합니다. 또 거시적 수준에서의 대안이 나온다고 했을 때 각각의 현장에서의 판단도 구체화할 수가 있겠죠. 지금은 어디에도 의존할 수 없기에 노동운동이 스스로 해야 하는 상황이죠. 사회운동노조라고 했을 때도 이런 측면으로 접근해야 기업별 경제적 노조주의를 상대화하는 운동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겠냐는 얘기입니다.
안민지 이념 지향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지향하자는 말은 예전부터 이야기해 온 당연한 얘기처럼 들리는데요. 지금에 와서는 조금 앙상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또한, 정당 지향 운동을 상대화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듭니다. 사회진보연대가 내왔던 선거 관련 방침은 왜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좀 더 풍성하게 정치세력화와 관련된 입장을 세운다면 어떤 게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정치세력화 관련해서 현실에 접점을 마련할 수 있는 교두보, 혹은 당장은 실현할 수 없더라도 이념 지향적 노동조합 운동의 구현 형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토론해 보고 싶습니다. 또한, 최근 위성정당 문제를 겪으며 갈등이 심해져 정치세력화 논의를 노조 내부에서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박준형 그래서 아예 상대화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세력화 운동을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을 단결하려고 하는 것인데, 지금은 이것이 오히려 노동조합을 분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건 무망하다고 봅니다. 심지어는 논란이 될 수 있겠지만, 진보당 반대 운동을 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는 무망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당과의 관계는 각자 잘 하시라고 하고,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사고하는 일이 차라리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당이 자기들끼리 싸우느라고 못하고 있는 거시적인 얘기에 노동조합이 주력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래도 민주노총은 분열된 상황은 아니니 말입니다.
이미지 노동조합에서 ‘사회운동’과 ‘노조의 사회운동 참여’에 대해 다양한 사람의 견해를 접하게 되는데요. 방향성은 각기 다르더라도 정당 활동이나 지역투쟁 연대 등 당사자의 일터를 벗어난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일컫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노조의 사회운동 참여’를 막연한 긍정 속에서 다양하게 해석하다보니 ‘사회운동노조주의’의 개념 또한 정착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운동노조주의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 의미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이아림 사회운동노조가 큰 틀의 이념적 방향성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결국은 정세에 따라 그 내용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준형 아까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더라도,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얘기했었는데요. 무척 어렵지만 할 수 있는 바를 계속 찾아가야 합니다.
아까 한사노당의 예를 들었는데요, 그분들이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당시 정세의 변화를 이해하고 전환을 시도한 점만은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진보정당이 정세 변화에 뒤처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제 정세가 변화하는 과정에 대해 진보당은 물론이거니와 정의당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경제, 정치 개혁 문제에서 인민주의 정당과 친화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정치적 노동자운동, 혹은 노동조합의 사회운동 성격 강화를 추구하기에는 무망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노동자운동이 붕괴했다는 것은 그만큼 정세적으로 민감하게 판단할 수 있는 주체가 붕괴했다는 얘기이기도 하거든요. 이러한 주체적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면서, 앞으로 노동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활동가들과 토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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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림 결론에 제시한 내용에 대해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요, 이렇게 대화를 나누니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 발언을 듣고 좌담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안민지 노동운동사를 보면서 바로 지금이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결론 격으로 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전체 노동시장을 대변할 수 있는 역할로서 총연맹의 기능이 회복되고 강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산별노조는 제도적 보완이나 새로운 시도에 대해 실제로 연구도 많이 하고 현실적으로 부딪혀가면서 진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산별노조가 굉장히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역시도 여러 시도를 통해 만들어왔던 것이지 처음부터 완벽히 이상적인 무언가를 설계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치세력화와 관련해서, 이것이 사실 답이 있는 영역은 아니지만 그만큼 우리가 여러 가지 형태를 많이 시도해 보지 못했다, 그러한 과정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과정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토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또한, 저도 정치세력화, 정치적 노동자운동과 관련해서는 노동자가 단결되는 것을 주요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운동 역사에서 그 지점이 가장 큰 시사점이 아닐까 합니다.
김승곤 우리가 이념 지향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하자는 얘기를 오랫동안 해오고 있지 않습니까. 정당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통해서, 생산 대중이 스스로 생산을 통제하고 나아가 공동체를 통제할 수 있는 방향을 우리가 지향하자고 한 것 같습니다. 폭동이 일어나는 게 혁명이 아니고, 노동자가 보편적 계급이 되어가는 과정이 혁명이란 것이 우리의 달라진 혁명론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노동조합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고민이 듭니다. 노동조합 상황이 엄혹하다고 해서 뛰쳐나갈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사회운동노조주의가 원칙적 수준에서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정세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로 어려운 것인지, 이것을 어느 수준에서 평가할 것인지 이런 쟁점이 조직 안에 있는 것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사회운동노조를 이야기해 온 지가 어느덧 20년 가까이 되고 있습니다. 차후에 이런 노선적 논의를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지 연구 집단이든 정당 활동가든 그리고 지식인이든, 한때 혁명에 대해 많이 고민했던, 사회 변혁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의 한 순환이 자연스럽게 생애 주기에 따라서 마감된 것 같습니다. 순환의 마감이라는 게 운동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생애 주기의 마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다음 세대를 생산하지 못한 거죠.
노동조합과 협력해 왔던 지식인 집단이 노쇠해 가는 과정과 함께, 노동조합도 따라서 노쇠해지고 앙상해지는 과정을 겪는 것 같습니다. 노동조합도 재생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옛날의 관행이나 풍습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기도 하고요. 함께 가라앉거나 고착화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독립적으로 설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풍부히 찾아야 할 텐데, 그 부분에 대한 역량 투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 항상 숙고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에서 어느 부위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거기에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은 또 누가 되어야 하고 어떤 역량을 갖추어야 할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이번 노동운동사 연재 글을 통해 큰 틀에서 과거의 운동사를 돌아보면서 몇 가지 추출 해낸 교훈이 있고 잘 구체화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새로운 주체와 구조를 형성하는 것은 우리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지점에서는 또 다른 차원의 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닌지 합니다.
서선주 아까 2000년대에는 비정규직 투쟁이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쟁점이나 투쟁이 뭐가 있을지 질문을 던진 이유는, 우리가 노동운동 평가의 결론으로서 얘기하는 사회운동노조주의의 중간 과제나 매개가 무엇일지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운동노조주의라는 말 자체를 지금의 노동운동 현실에 제기할 것이 아니라면, 지금 시대에 노동자운동의 보편적인 과제, 같이 싸워야 할 내용을 던지고 논의를 촉발하는 방식으로 민주노총을 견인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민주노총에서 30년 위원회가 꾸려져서 조직 혁신이나 정치세력화와 관련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계기를 우리가 활용해서 어떤 화두를 던져볼 수 있을지 숙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한건희 우리가 노조에서 노동운동사 교육을 하거나, 오래전부터 활동했던 주변 활동가와 얘기했을 때, 노동운동사를 다루는 전형적인 방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이분법적 피해자 서사 같은 것인데요. 우리는 착한 편이고 대의를 가지고 잘 하고 있는데, 나쁜 놈들이 몰려와서 우리를 괴롭히고 그거에 대해서 장렬히 맞서 싸웠다.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조금씩 밀리기도 했고, 현재 존재하는 노동 문제는 우리가 밀린 지점에서 생긴 것이라는 평가 말입니다. 이렇게 외부의 나쁜 놈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서사가 주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보면 전반적인 경제, 사회에 있어서 민주노총도 하나의 참여자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했던 선택이 의도치 않은 상황도 초래했고, 지금 우리가 놓인 문제적 상황에는 나쁜 놈들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고, 노동운동의 책임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번 연재를 통해서 주되게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평가가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음에도 말이죠.
지금 노동시장 이중구조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답을 딱 내기는 굉장히 어려울 수 있고, 일단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현장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최소한 어느 정도 책임 의식을 가지고 노동운동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준형 사회진보연대에도 책임이 있는 점을 인정해야겠지요. 사실 역사가 진행되는 시점에서는 잘 알기 어렵고 나중에야 평가할 수 있긴 한데요, 문제는 나중에 가서도 평가를 안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번 연재의 본격적인 주제는 아니었지만, 나중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작업은, 노동운동사 속에 하나의 참여자였던 사회진보연대의 입장과 활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어떻게 보면 민중민주파 운동을 평가한다는 얘기가 될 수 있을 텐데요. 민중민주파 운동이 소련과 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다음에 지금까지 왜 이렇게 흘러왔는가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노동자가 있으면 노동조합은 등장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운동이 필연적입니다. 그러나 이 필연적인 운동이 어떻게 나아갈 건지 정해진 방향은 없습니다. 올바른 방향으로도, 아닌 방향으로도 갈 수도 있겠죠. 그렇기에 지금 민주노총이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활동가가 과거를 잘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책임 있게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브뤼헐의 ‘장님의 우화’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마태복음(마15:14)의 말씀을 주제로 그런 것이죠. 민주노조 운동이 87년 이후 상당한 기간 거의 이런 상태에서, 마치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이끄는 것처럼 걸어왔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국이 망하지 않아서 구덩이에 안 빠지고 올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앞으로 한국이 걸어갈 길에는 인민주의나 경제위기, 동북아 국제정세의 위기와 같은 구덩이가 도처에 있어서 걱정이 많습니다. 이제는 진짜로 눈먼 자가 이끌게 되면 구덩이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살자는 심정으로 과거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지 않으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아림 사실 민주노조 운동의 초창기 시절 말고는 우리 노동운동의 모든 정세는 대부분 불황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저 호황 이후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분출했던 시절 형성된 관념이 운동을 지배하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불황기에는 도대체 어떤 제약이 존재하고, 그렇다면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인지 이런 토론이 잘되지 않았던 후과가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틀의 합의가 있어야 실마리가 풀려가지 않을까 합니다.
이번 노동운동사 연재가 노동운동이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경고하는 작업이라는 점과 함께, 사회진보연대의 용기를 보여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이번 연재 글을 세세하게 살펴보면 논쟁적이고 날카로운 평가가 많은데요. 운동사회 내에서 큰 논란이 안 된 것을 볼 때, 아직 많이들 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좌담을 계기로 다시금 읽혀서 토론이 촉발되길 기대해 보겠습니다. 긴 시간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