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6 봄. 194호

영국과 로마의 비교를 통해 본 헌정의 의미

『영국헌정사』, 『한국헌정사』 (상)

정성진 | 정책교육국장

영국헌정사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 (2)

지은이: 박상현, 유주형 외

출판사: 공감

출간일: 2025.8.1.

한국헌정사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 (3)

지은이: 박상현, 유주형 외

출판사: 공감

출간일: 2025.12.19.

 

국내외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시대다. 미국의 트럼프주의, 유럽의 인민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재정과 사법에 관한 권력을 대통령으로 집중시키는 작업이 진행되며 민주정이 위협받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강대국 간 ‘세력권’ 시대가 도래하는 와중에 중동의 분쟁이 번지며 세계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태다. 한 세기 전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야만’이 다가왔지만, 마르크스주의는 표류하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권위독재정으로 전락해 인민의 삶과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이다.

 

이런 시대를 마르크스주의자는 어떤 이론적·이념적 기준과 근거로 돌파할 수 있을까. 그 답을 모색하고자 전에 소개했던 『자유주의의 역사: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Ⅰ)』(2024)에 이어, 『영국헌정사: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Ⅱ)』(2025)와 『한국헌정사: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Ⅲ)』(2025)를 펼쳤다. (『자유주의의 역사』 소개 글은 2025년 가을호에 실린 필자의 「인민주의와 권위독재정에 맞서는 길」이다.) 필자는 이 저작들로부터,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의 위기와 인민주의의 부상에 대응하며 현실 사회주의 국가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로의 길을 열려면, 소유·헌정·향상이라는 세 측면에서 자유주의를 ‘추격’하는 가운데 ‘추월’해야 한다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추격 속의 추월’은 『영국헌정사』에 나온 표현으로,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로마 공화정의 혼합정체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넘어선 정체(政體)를 창출한 역사적 과정을 지칭한다. 그들은 정체 측면만이 아니라 소유·헌정·향상의 모든 측면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했다. 이 과정을 공부하며, 필자는 더 나은 사회로의 ‘이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필자가 학생 시절부터 들었던, 알튀세르가 말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공백’이 무엇인지 이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국가론이나 이데올로기에 관한 것으로 제기된 그 공백은, 사실은 헌정론과 향상론(도덕)의 부재였던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적’이라고 여겨 온 요소들, 가령 마르크스가 옹호했던 파리코뮌의 조치들(삼권의 통합, 국민소환제 등)이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랜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적 결과를 낳지 않았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역사적 경험이 아닌 관념에 기초해 민주주의를 주장할 경우, 의도와 달리 독재를 정당화하는 결론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고대 로마에서 시작해 현재에 이르는 서양 정치사 전반의 경험과 반성 속에서 확립된 헌정론을 무시할 수 없다. 오히려 이로부터,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어떠한 제도와 정치과정을 확립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영국헌정사』와 『한국헌정사』가 다루는 역사의 범위가 방대해, 두 번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호의 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먼저 전작인 『자유주의의 역사』까지 포함해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 시리즈 세 권 전반의 문제의식을 소개하고자 한다(1장). 세 저작 중 앞뒤의 두 권을 매개하는 『영국헌정사』 중, 영국 헌정사(2장)와 ‘내전의 진화과정’을 보여주는 로마 공화정의 쇠망사(3장) 부분을 소개하겠다. 두 역사의 대비가 중요한데, 영국 자유주의자들이 로마 공화정을 ‘추격하며 추월’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소결(4장)로 제시하겠다. 이 글의 소결은 『한국헌정사』의 내용을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 다음 글에서는 『한국헌정사』의 내용을 소개하고,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 시리즈 전반에 대한 결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 시리즈 전반의 문제의식

 

『영국헌정사』와 『한국헌정사』는 전작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제시한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이 현실 역사 속에서 어떠한 제도와 행위자로 구현되었는지를 살펴보며, 영국 헌정을 기준으로 삼고 로마 공화정의 내전과 쇠망을 반면교사로 삼아 헌정이 부재하거나 취약한 한국의 현실을 설명한다. 그 작의를 순서대로 살펴보겠다.

 

1) 『자유주의의 역사』

먼저 전작인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정립한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이 무엇이었는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의 출발점은 신체와 정신에 대한 침해의 공포로, 이러한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가치로 봤다. 그런데 자유주의가 다른 이념과 구별되는 지점은 단지 ‘신체와 정신의 자유’를 불가침한 경계선으로 제시한 것을 넘어, 그 자유를 현실에서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이론을 역사적 경험 속에서 축적하고 정교화해 왔다는 데 있다.

 

그 결론은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 도덕이라는 세 지주가 상호 연계적으로 강화되며 개인·시민사회가 발전할 때 비로소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소유, 헌정, 향상이라는 세 지주의 결합이다. 즉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이란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자유의 부정적 규정에서 출발해, ‘소유·헌정·향상’이라는 자유의 긍정적 규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혁명은 사회변혁의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정치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소유·헌정·향상의 연계를 통한 개인·시민사회의 강화가 사회변혁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변혁을 지향했던 현실 사회주의 운동은 정치권력은 장악했지만 사회변혁에는 실패했고, 소유의 박탈, 헌정의 파괴, 향상론의 부정을 통해 신체와 정신에 대한 침해와 공포가 만연한 사회를 낳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를 반성하며 소유·헌정·향상의 관점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레닌 말년의 신경제정책·문화혁명 구상, 유럽의 유로코뮤니즘, 일본의 시민사회파 마르크스주의도 공유하는 바다.

 

시리즈의 부제가 말하듯, 마르크스주의의 자기반성과 이론적 공백을 메우는 작업은 오늘의 정세에서 인민주의의 위협에 대응하는 과제와 결부되어 있다.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인용하는 케이헌에 따르면, 이념으로서 인민주의(populism)란 인민 다수의 단일한 의지를 근거로 적과 우리를 구분하고, 적을 절멸하며 우리 내부를 단일화하려는 일원론(monism)이다. 이는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모든 개인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가치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의 생존과 자유를 위해서라면 우리 내부와 외부의 ‘이질적 분자’의 자유는 침해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포로부터의 자유’의 보장이라는 기준에서 인민주의는 자유주의에 미달한다.

 

그러나 지금 현실에서는 인민주의가 부상하고 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했다. 『자유주의의 역사』는 이에 관해 단지 소유의 측면, 즉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주의적 소유로 인한 경제적 위기만을 원인으로 제시하는 설명을 넘어선다. 헌정과 향상의 측면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민주정의 확대에 요구되는 조건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통선거제 도입과 관련된 정치적 타협이 헌정에 가한 장기적 효과, 엘리트주의가 전문가주의로 변형되고 다시 관료주의로 타락한 과정, 정치가 소비자(대중)의 선호에 따른 선택으로 여겨지며 ‘마케팅화’한 것, 윤리적 목표 역시 개인 선호에 따르며 공통의 동의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윤리적 다원주의가 확산한 것, 나아가 도덕과 향상론의 해체 등이다. 이러한 헌정·향상 측면까지 포함한 위기 속에서 인민주의가 부상했고, 권위주의적 독재의 위협 또한 증대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과제는 인민주의와 권위독재정의 위협에 맞서 소유·헌정·향상의 세 지주를 어떻게 새롭게 재건할 것인가다. 이는 신세대 자유주의의 과제일 뿐 아니라, 재구성된 마르크스주의의 과제이기도 하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의 재구성이란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내적으로 재구성하고 마침내 추월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2) 『영국헌정사』

이 책은 영국 헌정이 로마 공화정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넘어서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 모방이 역사적 조건 속에서 변형과 창조를 수반하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원리가 형성된 것이다. ‘추격 속의 추월’이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로의 이행이 소유·헌정·향상의 연계 발전으로 이뤄졌다 할 때, 소유 측면의 역사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비교적 익숙한 주제다.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저자들이 설명했듯, 마르크스는 로크·스미스의 소유론을 계승했으며, 이에 모순을 유발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대응해 자신의 소유론을 발전시켰다. 반면, 헌정과 향상의 측면에서 어떤 전환이 일어났는지는 잘 조명되지 못했다.

 

『영국헌정사』는 이 공백을 메운다. 이 책은 영국 헌정의 전개를 중심으로,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으로 제시된 소유·헌정·향상의 연계가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떠한 제도와 행위자를 통해 구현되었는지, 특히 헌정과 향상 축을 중심으로 확인한다.

 

먼저 유주형·김태훈의 「영국헌정사: 자유주의적 제도의 형성과정」은 ‘정치적 헌정주의’(political constitutionalism)의 관점에서 영국 헌정의 발전을 분석한다. 정치적 헌정주의란 헌정을 정치공동체의 ‘체질·신체’(body politic)와 ‘기질·정신’(mind politic)의 유기체로 파악하는 관점이다. 달리 말해 정체(政體, constitution)와 그 정치문화·도덕에 관한 이론이다. 「영국헌정사」는 이 중 영국에서 정체의 발전 과정을 다룬다. 영국의 정체는 로마 공화정의 ‘혼합정체’(mixed constitution)을 모방한 것으로부터, ‘균형정체’(balanced constitution)를 거쳐 ‘의회정부’(parliamentary government)로 이행한다.

 

이어서 박상현·송인주·이태훈의 「영국헌정사: 귀족과 중간계급의 역할」은 상술한 이행 과정에서 헌정을 작동시키는 ‘기질·정신’으로서 정치문화·도덕과 주체적 조건에 주목한다. 정치행위자가 갖추어야 할 정치적 규범과 도덕으로서 ‘시빌리티’(civility)가 먼저 귀족층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이후 중간계급과 노동자계급 상층까지 확산되는 과정이 ‘향상’의 역사로 파악된다. 구체적으로는, 일련의 내전을 거치며 학습한 결과로 ‘관용’과 ‘자제’, 그리고 ‘신복’(信服, 믿고 따름)의 문화가 자리 잡았고, 이는 교육을 통해 재생산되었다. 이러한 정치문화 위에서 경쟁은 상대를 제거하는 투쟁이 아니라 규칙을 존중하는 ‘페어플레이’로 제도화되었다. 이것이 영국 헌정의 ‘체질·신체’를 떠받친 ‘기질·정신’의 핵심 내용이었다.

 

『영국헌정사』의 작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정치적 헌정주의’ 관점에서 한국의 헌정과 법치를 평가할 ‘기준’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즉 정치공동체의 ‘체질·신체’와 ‘기질·정신’의 발전을 기준으로 한국 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뒤의 『한국헌정사』 문제의식 소개에서 간략히 언급하고, 다음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한국헌정사 평가의 기준을 마련하는 데서, 『영국헌정사』는 헌정 이론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주제로 ‘내전’을 제시한다. 윤소영의 「내전의 진화과정으로서 대선 불복 ‘20년동란’」 중 ‘내전이란 무엇인가’가 이를 다룬다. 이 글은 동료 시민 간 전쟁으로서 내전에 관한 연구를 종합하며, 그 원인이 헌정 측면에서는 ‘잡종정체’(anocracy 혹은 hybrid regime)에, 향상(도덕) 측면에서는 ‘동일성 갈등’과 ‘분노 사업’에 있다고 지적한다. 고전적 사례로 로마 공화정의 쇠망을 분석하는데, 여기서 공화정의 ‘혼합정체’가 인민주의자가 일으킨 내전의 진화과정 중에 ‘잡종정체’로 퇴보하며 내전이 상시화되었다.

 

상술했듯 영국 헌정은 로마 공화정을 추격하다가, 영국 내전을 거치며 로마 공화정의 모순 근저에 있던 ‘공화주의적 자유’를 ‘자유주의적 자유’로 대체함으로써, 이후의 내전을 방지하고 혼합정체를 균형정체와 의회정부로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1987년 헌법으로 잡종정체가 형성되며 ‘내전의 진화과정’이 진행되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둘째, ‘헌정론의 부재’라는 문제에 주목하며,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정치론의 공백을 영국 헌정사의 재인식을 통해 해결하자는 것이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선언하며 그 원인으로 국가와 정치에 관한 이론의 부재를 꼽은 바 있다. 저자들은 이 공백을, 마르크스가 권리와 권리가 충돌할 때 최종적으로는 투쟁과 폭력이 결정한다는 ‘내전적 정치관’에 머물렀고, 봉기와 내전을 종결하고 화해로 이끄는 ‘구성/헌정의 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한 탓으로 설명한다.

 

필자가 이해하기에, 마르크스주의가 ‘어떤 이념 혹은 정체가 최선인가, 어떤 기준과 근거로 그러한가’(이념적 표준과 헌정에 대한 이론)라는 논의보다는,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세력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저자들이 케이헌·울로크와 포셋의 자유주의 역사 인식을 대조하며, 20세기 초에 자유주의가 세력관계상 열세를 극복하고자 그 원리를 일부 포기한 ‘타협’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포셋을 비판했듯 말이다. 즉 헌정론이 있고 나서 세력관계를 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력관계상 경쟁하는 이념들과 정체들 사이에 ‘자유의 보장’이라는 기준에서 우열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공백은 마르크스가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표준으로 설정한 데서 비롯된 면이 있다고 설명한다. 19세기 초반 프랑스에서는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며 헌정이 발전하지 못했고, 그 결과 ‘국가’는 ‘지배계급의 억압 장치’로만 이해되기 쉬웠다. 헌정(constitution)이 아닌 국가(state)를 중심으로 한 이런 인식은 마르크스주의가 ‘경제라는 최종심’을 둘러싼 인과론 논쟁이라는 이론적 곤란에 빠진 것과 결부된다.

 

영국 헌정사와 이를 중심으로 발전한 헌정론을 인식할 때, 헌정의 한 측면으로서 국가(정부)나 정치과정, 혹은 헌정 자체가 단지 계급지배의 형식, 자본주의의 반영에 불과한가라는 쟁점을 제기할 수 있다. 헌정의 발전이 자본주의 발전에 시기상 선행할뿐더러, 자본주의와 무관한 고유의 지향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요컨대 헌정이란 개인의 신체와 정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며, 정치과정과 정부는 이 목적에 종속되어야 하고, 권력의 배분과 세력관계의 조정도 그 목적 아래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헌정 고유의 역사와 이론이 있고 나서 이후에 등장한 자본주의와 상호작용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역사를 이렇게 이해하면, 마르크스주의의 두 가지 난점이 드러난다. 첫째, ‘현대 국가’에 대한 이해다. 알튀세르는 기존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한계를 인식하며, 국가를 단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반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국가가 독립적으로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고, ‘억압적 국가기구’(행정·사법·경찰·군대)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가족·종교·법·정당·노동조합·언론 등)를 구분해 제시했다. 후자는 단지 ‘지배계급의 억압 장치’로 환원될 수 없으므로, 자본주의의 변혁 과정에서도 그것들은 파괴·소멸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변형과 재구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진전에도 불구하고 난점이 남는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속하는 정당들로 구성된 의회가 법을 제정하고, 그 법을 행정부·사법부가 집행·적용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때도 행정과 사법은 여전히 ‘억압적 국가기구’인가? 의회가 장신구에 불과하고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가 자행되는 체제(가령 마르크스가 봤던 프랑스)에서는 그런 이론적 난점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헌정이 발전하여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이뤄지는 사회에서는, 민주적 정치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법의 집행과 권력 행사를 폭력이나 억압으로 환원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현실에서 마르크스주의나 노동자운동은 국가에 대한 이론적·원칙적 거부와 실용주의적·전술적 활용 사이에서 진동한 것이었다.

 

한편, 현대 국가의 경제적 기능에 관한 논의도 소유와 헌정의 관계를 중심으로 넓어질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자 브뤼노프는 화폐와 노동력의 관리를 중심으로 한 국가가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아제몰루(D. Acemoglu)와 같은 논자를 참고해, 그런 경제적 기능 이전에 더 근본적인 소유와 헌정의 관계에 주목할 수도 있다. 신체와 정신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정이 개인의 소유를 보장하고, 다시 개인의 소유가 헌정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런 보장은 한편으로는 훗날 자본주의적 소유의 확대를 뒷받침하기도 했지만, 마르크스주의가 국가에 의한 개인의 소유 박탈이 아니라 ‘노동력의 개인적 소유’로까지 소유의 확대를 지향한다면, 그 목적에도 기여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개인의 소유를 확대하려면 정치과정과 정부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자유주의의 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도 배울 게 있다는 것이다.

 

둘째, 마르크스주의 이행론에서 국가 문제다. 도식화하면 이는 인민이 국가권력을 장악해 자신을 억압하는 국가를 파괴·소멸시켜야 한다는 명제다. ‘헌정’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혹은 헌정이 부재한 상황에서) ‘국가’란 억압·폭력에 불과하므로 인민의 정치권력 장악이라는 세력관계 측면의 과제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파리코뮌에서와 같이 인민의 보통선거권과 대표소환권 등 인민에게 권한과 권력을 대폭 주기만 하면 국가의 억압·폭력이 소멸하고 인민의 정치적 자유가 확대되는가라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인민이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이유가 ‘부정적’이라는 문제, 즉 ‘억압적 국가를 파괴·소멸시키기 위해서’로 제시된다는 점과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영국 헌정의 발전 과정을 보든 반면교사로서 러시아혁명을 보든, 현실에서 이행은 고도의 정치과정과 정부의 역할을 요구한다. 혁명 이후 러시아 인민이 직면한 방대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서 ‘국가란 폭력·억압에 불과하므로 소멸시켜야 한다’는 이론은 실천적 지침이 될 수 없었다. 반대로 ‘정치과정과 정부는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라는 ‘긍정적’ 규정이 요구됐던 것이다. 헌정론은 ‘정치적 자유의 보장과 확대’라는 목적에 적합한 정체와 정치문화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권력의 배분과 세력관계의 조정은 이에 종속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이 없으면, 권력 장악 이전에는 인민의 권력 장악에만 집중하다가, 장악 이후에는 기존의 국가를 파괴한다는 명분으로 권력 집중을 정당화하며 ‘부르주아 국가’보다 더 전제적으로 폭력·억압을 가하는 양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처럼 말이다.

 

향상론의 문제도 유사하다. 레닌은 부르주아 문화를 계승할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스탈린 시대에 이르러 ‘부르주아 문화’란 인민을 순종적이고 나약하게만 할 뿐이라며 부정하고, 이에 대한 반정립으로 프롤레타리아가 본성상 이미 갖고 있다고 상정된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숭상하는 스탈린주의적 문화혁명론이 지배한다. 이는 경쟁과 능력의 향상을 부정하고, ‘출신성분’과 충성에 따른 지위 배분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기존의 문화에 대한 부정적 규정 탓에, 이행론에 헌정론만 아니라 향상론도 부재했던 것이다. 이런 부재는 결국 국가 운영의 무능과 부패, 특권계급을 낳았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의 헌정과 향상에 대한 이론적 공백은 현대 국가 이해의 곤란과 이행론의 왜곡을 낳았다. 『영국헌정사』는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제도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소유와 향상과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설명한다.

 

3) 『한국헌정사』

이 책은 오늘날 한국에서 인민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내전’으로 헌정이 붕괴한 데다가 법치마저 파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며, 원인을 1970~80년대 군부독재에 의해 유린된 헌정을 회복하려던 1990년대 문민화가 실패한 데서 찾고 그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이는 『영국헌정사』에서 본 두 가지의 역사, 즉 영국 헌정사와 ‘정치적 헌정주의’, 그리고 로마 공화정 쇠망사와 ‘내전의 진화과정’이라는 틀로 설명된다.

 

정치적 헌정주의 관점에서 볼 때, 정치공동체의 ‘체질·신체’ 즉 정체 측면에서는 한국에서 영국식 혼합정체가 아닌, 로마 공화정 말기부터 제국까지와 같은 ‘잡종정체’(anocracy 혹은 hybrid regime)가 형성된 것이 중요했다. 특히 1987년 개헌이 권위주의적 체제와 선거의 결합이라는 군부독재 이전의 체제를 모방했고, 이 탓에 금권주의와 인민주의가 함께 강화되며 문민화가 좌절되고 ‘내전의 진화과정’이 전개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로마 공화정이 무너질 때 나타났던 현상이 한국에서 재현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결함, 정당정치의 파행, 헌법재판소의 사법심사를 둘러싼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 검찰·사법개혁 등의 쟁점을 영국과 로마를 통해 더 분명한 잣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문민화의 좌절에 관해 ‘기질·정신’ 측면에서는, 이승만·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군부독재에 맞서 유린된 헌정을 복원해야 했을 야권 정치인과 운동권마저 헌정론과 이에 상응하는 정치문화를 갖추지 못했다고 설명된다. 지식인의 사상투쟁(문투)에서 출발한 운동권의 투쟁은 사회성격논쟁을 거치며 일부분 사회주의 변혁론으로 전진하기도 했지만, 결국 폭력투쟁(무투)으로 귀결되었고 이후 주류화를 통해 급기야 ‘내전의 진화과정’을 이끌게 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내 헌정론·향상론의 부재라는 문제와 결부된 것으로 설명된다.

 

이런 과정을 다루는 『한국헌정사』는 박상현·송인주·이태훈의 「한국헌정사」와 유주형·김태훈의 「한국사회주의운동사」로 구성된다. 앞의 글은 상술한 헌정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데, 특히 1960년, 1979~80년, 1987년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며 이는 2000년대 내전의 진화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뒤의 글은 운동권에 초점을 맞추는데, 상술한 운동권 전반의 문제 외에도 민중민주파(PD)의 자기반성이라는 측면에 주목할 수 있겠다.

 

 

2. 영국 헌정사

 

『영국헌정사』는 복잡다단한 영국의 정치사를 다루지만, 이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은 이러하다. 로마에서는 내전을 통해 공화국의 혼합정체가 붕괴하고 참주정으로 귀결되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내전을 통해 참주정(절대군주정)이 제한되고 혼합정체(입헌군주정)가 성립했다. 이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저자들은 이 극적인 반전을 설명하기 위해 영국 헌정을 ‘정치적 헌정주의’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 글에서는 『영국헌정사』와 그 참고문헌 『케임브리지 영국헌정사』(2023년)의 내용을, 정치적 헌정주의와 헌정 개념, 영국에서 정체의 발전과 이에 상응하는 정치문화의 형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정치적 헌정주의’란 무엇이며, 이 관점에서 헌정이란 무엇인가

정치적 헌정주의는 헌정을 헌법이라는 법적 문서로 이해하지 않고, 정치공동체의 ‘신체’(체질, body politic)와 ‘정신’(기질, mind politic)의 유기적 관계라고 전제하는 관점이다.

 

첫째, 이 관점에서 헌정(constitution)은 헌법(constitutional law 혹은 대문자 The Constitution)과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후술할 ‘정치적 헌정주의’와 ‘법률적 헌정주의’ 사이의 중요한 쟁점으로 이어진다.

 

둘째, 정치공동체의 ‘신체·체질’이란 정치공동체 내부에서 권리와 책무가 어떻게 배분되고 통치자와 피치자의 관계가 어떻게 조직되는가를 규정하는 정치과정의 구조를 의미한다. 신체가 각각의 기능을 하는 조직들의 유기적 연결로 구성되어 있듯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constitution’은 ‘정체’(政體)로 번역되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 ‘정부’(government)와 혼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혼합정체(mixed constitution)’ 또는 ‘혼합정부(mixed government)’라는 표현이 그렇다. 인간의 신체가 건강하거나 그렇지 못하듯, 정체 또한 정당성과 안정성 측면에서, 나아가 자유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우열이 있다.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고전적·현대적 정체론이다.

 

셋째, 정치공동체의 ‘정신·기질’은 정체에 상응하는 정치문화와 도덕적 규범을 의미한다. 정체와 정치문화도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한다. 영국 헌정의 발전과 로마 공화정의 쇠망을 대비해 보면, 이러한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보다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영국의 귀족이 로마의 ‘공화주의적 자유’를 ‘자유주의적 자유’로 대체한 것은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 정치공동체의 신체에 우열이 있듯 정치문화와 도덕에도 우열이 있으며, 정체의 발전과 상응하는 정치문화의 발전이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적 헌정주의는 법치와 헌정을 구분한다.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정치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원리, 즉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법 위에 군림하거나 법을 도구로 지배하는 것(rule by law)을 배제하는 원리라면, 헌정은 그 법을 제정하는 정치과정에 관한 문제다. 즉 법은 정치공동체의 헌정적 정치과정과 정치문화 속에서 제정되어야 하며, 이러한 헌정 위에서만 법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헌정이 부재할 경우 법치는 단지 실정법을 따르는 형식적 질서로 전락하거나, 특정 권력이 법을 이용해 지배하는 ‘법에 의한 지배’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달리 말해, ‘법의 지배’에서 중요한 것은 입법과정이며 이것이 ‘주권’의 소재를 결정한다. 이에 관해, 헌정 이론에서 경합하는 ‘정치적 헌정주의’와 ‘법률적 헌정주의’의 두 관점이 있다. 저자들이 참고한 『케임브리지 영국헌정사』의 문장을 인용하겠다.

 

“정치적 헌정주의 관점은 헌정을 정치체제의 성격과 설계,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정치적 절차의 운영방식 속에서 찾는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헌정적 정치과정을 통해 형성된 법률 외에 그 위에 군림하는 상위법은 존재할 수 없다. 헌정상 주권자는 법이 아니라 의회다. 왜냐하면 의회는 법을 제정할 뿐 아니라, 그 운영방식 자체가 헌정적 정부의 속성, 즉 자의적 통치의 억제, 그리고 법 제정과 집행에서 모든 시민을 동등한 대상으로 대한다는 원칙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 법체계와 정치체계의 운영에 관한 최종 권위(주권)가 어디에 있는가. 정치적 헌정주의자들은 법과 법체계의 성격이 일반적으로 정치체계의 성격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들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보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행위이며, 이는 바로 그 법의 적용 대상인 시민들로부터 정치적 권한을 부여받은 자들만이, 그리고 그들에게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만 정당하게 수행할 수 있다. 한 정치공동체의 헌정은 바로 그러한 위임과 책임의 절차가 권력 행사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그리고 구성원들이 그 절차를 얼마나 정당하다고 인정하는가에 의해 성립한다. 법체계의 임무는 정치적으로 결정된 법률을 집행하는 것이므로 법관이 일정한 정치적 독립성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면, 법률적 헌정주의는 헌정을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성문화된 법적 문서, 즉 헌법과 그에 결부된 상위 규범의 체계로 이해한다. 이 관점에서는 헌법이 정치의 작동을 규정하는 기본 틀이며, 정치인(의회)과 공무원(행정부)은 헌법 규정에 따라 법정에서 책임을 진다. 이러한 관점은 권리 중심의 사법심사와 긴밀히 연결된다. 즉 사법부가 입법이나 행정이 헌법상 권리와 충돌한다고 판단할 경우 이를 무효화하거나 법률 해석을 통해 정치과정에 개입할 수 있다.

 

정치적 헌정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법률적 헌정주의에는 두 가지 연결되는 문제가 있다.

 

첫째는 경직성의 문제다. 헌법을 상위법으로 설정하는 이유는 정치과정이 헌정의 정당성과 지속성을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만약 정치과정에 의해 헌법이 자주 개폐된다면, 이는 헌법이 ‘장식’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헌법을 두는 의도에 맞지 않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헌법은 변하지 않은 채 헌정이 변화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때 헌법을 근거로 헌정의 변화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나타날 수 있으며, 헌법과 헌정 사이의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번 호 박동열의 글에 나온 트럼프주의 단일행정부론처럼 말이다.)

 

둘째는 주권의 소재 문제다. 헌정을 둘러싼 중요한 갈등이 발생했을 때 이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기관이 헌법재판소나 대법원과 같은 사법기관이라면, 가장 중요한 헌정적 정치과정의 변화를 선출되지 않은 법관이 결정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구조는 정치의 사법화, 나아가 사법의 정치화를 초래하며, 헌정의 정당성·안정성이 약해지고 시민의 자유가 침해될 위험이 있다.

 

결국 정치적 헌정주의는 헌정을 ‘인공물’로 환원하는 시각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살펴보았듯, 자연권 관념을 위로부터 부과하거나 헌법을 통해 정치과정을 변경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정치적 헌정주의 관점에서 입법과정의 정치적 정당성·안정성과 자유의 보장은, 헌법 조문이 아니라 우월한 정체와 정치문화로 담보된다. 그러한 헌정이 존재할 때 비로소 ‘법의 지배’가 유지될 수 있다.

 

정치적 헌정주의는 로마 공화정의 고전적 혼합정체를 모방한 것에서 나아가, 균형정체에서 의회정부로 발전시킨 영국 헌정사를 토대로 한 이론이다. (물론 유럽 대륙의 경험에 대한 반성도 포함한다)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정체의 우열을 평가하는 기준은 정치적 자유와 ‘법의 지배’를 얼마나 잘 보장하는가라는 문제로 더욱 정교해진다. 그 원리는 권력의 분산(dispersal of power)이 아니라,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 그리고 분립(separation of power)이다. 영국에서 15세기 이전에는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으나, 15세기와 17세기 내전을 거치며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고전적 혼합정체론의 견제와 균형 원리가 중시된다. 17세기 내전을 종결시킨 명예혁명 이후 견제와 균형은 권력분립 원리로 발전한다.

 

2) 폴리비오스의 고전적 혼합정체론

정치적 헌정주의의 사상적 기원은 고전적 혼합정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체계적으로 제시한 것은 로마 공화정 초기의 역사가이자 정치사상가인 폴리비오스다. 그는 자신 이전 정체들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정체를 ‘1인’이 지배하는 군주정(monarchy), ‘탁월한 소수’가 지배하는 귀족정(aristocracy), ‘다수’가 지배하는 민주정(democracy)으로 구분한 뒤, 이 세 요소의 장점을 결합한 혼합정체(mixed constitution)가 정치적 정당성과 안정성의 측면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제시했다. 그가 생각한 혼합정체는 당시 로마 공화정(3장 1절 참고)을 모델로 했다.

 

혼합정체를 구성하는 것은 첫째, 군주정적 요소다. 폴리비오스는 군주정, 즉 1인 지배의 장점을 강력한 행정력에서 찾았다. 정체가 정당하고 지속 가능하려면 정치공동체의 요구를 신속하게 집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는 지휘관의 신속한 판단과 행동이 요구된다. 다만 이러한 장점이 반드시 세습 군주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폴리비오스 당시 로마 공화정에서 강력한 행정권은 민회가 선출한 행정관들이 행사했다.

 

둘째, 귀족정적 요소다. 귀족정, 즉 소수 지배의 장점은 사회의 ‘탁월한’ 계층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소수’는 약소자 집단이 아니라 정치적 경험과 식견을 갖춘 엘리트 집단을 의미한다. 로마 공화정에서 원로원으로 결집한 귀족은 국가적 사안에 조언을 제공했다. 물론 귀족정의 강점도 신분제에 따른 혈통귀족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원로원은 혈통귀족이냐 평민이냐에 관계없이 행정관직을 역임한 이로 구성됐다. 즉 정치적 경험과 식견을 갖춘 집단의 존재와 참여가 핵심인 것이다.

 

셋째, 민주정적 요소다. 폴리비오스는 민주정, 즉 다수 지배의 장점을 대중적 정당성에서 찾았다. 로마 공화국의 민회에서 행정관 선출이나 주요한 정치적 결정, 입법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투표, 즉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 그 핵심이다. 요컨대 폴리비오스가 생각한 민주정은 추첨제에 기반한 그리스식 직접민주정과 달리, 행정관(군주정적 요소)이나 원로원(귀족정적 요소)이 제안한 법률과 정책에 대해 다수 평민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치가들이 연설하고 평민들과 의견을 나누는 각종 모임을 통한 여론 형성이 중요했다.

 

폴리비오스의 혼합정체론의 중요한 핵심은 세 요소가 ‘결합’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1인·소수·다수가 홀로 지배해서는 안 되며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데 있다. 그는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권력이 1인, 소수, 다수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정체가 타락한다고 설명했다. 군주정은 참주정(tyranny)으로, 귀족정은 과두정(oligarchy)으로, 민주정은 인민정(ochlocracy)으로 변질될 수 있다. 따라서 셋 중 어느 하나에만 의존하지 않아야 타락의 위험을 제어하고, 1인의 신속하고 강력한 행정력, 엘리트 집단의 정치적 식견, 다수결에 의한 대중적 정당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폴리비오스는 이런 혼합정체가 사회 여러 계층의 이해관계를 종합하고 실현하는 데서, 즉 정치적 정당성과 안정성의 측면에서 우월한 정체라고 봤다. 당시 로마 공화정에서 국가 중대사의 결정은 행정관의 판단에 따른 제안, 원로원의 조언, 민회의 여론 형성과 투표를 함께 거쳐 이뤄졌다. 폴리비오스는 혼합정체의 우월성 덕에 로마 공화정이 여타 왕국을 제치고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의 강자로 흥성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3) 영국 봉건제의 권력 분산 문제와 15세기 내전: 과두정의 위험성

영국 헌정사의 중요한 분기점은 15세기 내전과 17세기 내전으로, 이를 거치며 혼합정체가 건설된다. 중요한 것은 영국인들이 혼합정체를 제도상으로만 만든 게 아니라, 참혹한 내전의 경험을 통해 혼합정체론의 핵심을 정치적으로 깨우쳤다는 점이다.

 

15세기 내전 이전의 영국 봉건제 구조를 간략히 살펴보자. 이는 국왕으로부터 직접 토지를 받은 귀족인 대영주가 다시 하위 영주들에게 봉토를 재수여하는 위계적 관계로 구성됐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귀족들이 각자의 영지에서 상당히 독립적인 입법·행정·사법권을 가졌고, 이를 뒷받침하는 조세징수권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 체제에서 왕국(국가)의 재정이란 곧 군주의 재정과 같았으며, 그 원천은 기본적으로는 대영주로부터의 상납 혹은 군주 자신의 영지 수입이었다. 즉 왕국은 영국 전역에 대한 일반적 조세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저자들은 이런 분권적 구조가 중국이나 조선과 같은 중앙집권적 봉건제와 비교할 때 서유럽 봉건제의 후진성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이런 구조에서 왕실의 전쟁 수행과 전비 조달을 둘러싸고 국왕과 귀족의 대립이 발생하게 된다. 존 왕은 대륙 정복 전쟁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군주권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하려 했고, 이에 반대한 귀족들은 그에게 대헌장(Magna Carta, 1215년)을 승인하게 했다. 이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귀족(봉신)뿐만 아니라 모든 자유민이 공통의 서약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왕국)를 구성한다는 관념에 따라, 왕의 자의적 강제력 행사를 제약하려 했다. 이후 왕은 대헌장을 준수해야 했고, 25인의 봉신(대영주)이 이를 보장했다. 귀족의 신권을 통해 왕도 법을 따르도록 함으로써, 인치(人治)가 제한되고 법치(法治)가 시작되는 계기였다.

 

이후 14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에 왕실이 인력과 재원, 물자를 조달하는 과정에서 양원제 의회가 형성된다. 이는 각 주의 법원에서 선출된 평민 의원들로 구성된 평민원(하원)과, 대영주들로 구성된 귀족원(상원)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 의회는 취약한 군주정 아래에서 왕이 조세 징수를 정당화하고 귀족·평민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한 장치에 가까웠다.

 

의회로 결집한 귀족이 왕권의 자의적 행사를 견제하지만, 이 견제가 왕과 대영주 간의 권력 분산을 통해 보장되는 구조는 문제를 드러낸다. 왕권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거나 약화되며 정치체제가 무너지고, 귀족들이 왕위를 참칭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1399년부터 1487년까지 귀족들은 다섯 명의 국왕을 여섯 차례에 걸쳐 퇴위시켰다. 정통성이 취약한 국왕들은 귀족들에게 특권을 부여해 지지 기반을 마련하려 했고, 대영주들은 의회에서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익을 추구했다. 왕실이 귀족들을 중재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토지 소유권과 권력 배분을 둘러싼 귀족 간 쟁투가 격화되었다. 귀족들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적 소송보다, 곧바로 상대의 재산을 압류·약탈할 수 있는 전쟁을 선호했다. 이는 결국 15세기 왕위 계승을 둘러싼 장기 내전(장미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13세기의 단순한 왕권 제한론은 오히려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4세기에는 왕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요구보다 오히려 왕권을 신권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요구가 더 강해졌다.

 

4) 15세기 내전의 교훈:

절반의 혼합정체로서 혼합군주정과 신사귀족의 형성

15세기 내전, 귀족 파벌 간 사익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대립은 귀족가문의 3분의 1이 멸문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참상을 교훈 삼아 중요한 두 가지 방향의 변화가 이뤄진다.

 

첫째, ‘혼합군주정’(mixed monarchy)의 건설이다. 대표적 사상가 포테스큐 경은, 왕에 필적하는 수입과 무력을 가진 ‘지나치게 강력한 신하’가 왕국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따라서 왕위를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공동체의 동의 위에 성립’하는 것으로서 정당화하는 ‘혼합군주정’을 제시한다. 이는 왕권이 평상시에는 의회의 동의에 기반하지만, 비상시에는 법을 넘어서는 비상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중성을 갖는다. 이는 로마 공화정의 집정관과 독재관을 모방한 것이다. 평상시에는 국왕의 대권이 상원(귀족원)·하원(평민원)과 함께 행사되는 혼합정체를 채택하지만, 국가적 위기 시에는 국왕이 홀로 대권을 행사한다.

 

후자의 위험성에 관해, 당시 법률가와 판사들은 권력이 약한 국왕보다 오히려 대영주들이 왕국의 법을 무시하고 재판을 방해하는 사태를 더 우려했다. 즉 15세기의 관점에서 국왕의 비상대권 행사를 허용한 취지는, 지방의 대영주가 정치체제를 무력화하는 최악의 사태를 왕권으로 막자는 의미였다. 귀족의 무제한적 권력으로 인한 연속적 쿠데타와 왕의 퇴출에 대응하는 일차적 방법은 왕권 강화를 통해 질서를 회복하는 것, 곧 ‘왕의 평화’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둘째, 더 중요한 변화가 귀족 내부에서 일어났다. 참혹한 내전을 반성하는 가운데 16세기 ‘신사귀족’이 등장했고, 귀족 집단은 점차 사익만을 추구하는 지방 권력에서 벗어나 공익을 함께 추구하는 전국적 엘리트 집단으로 변모한다. 대륙에서 각종 예절지침서가 수입되며, 정치에서 ‘폭력’이 아니라 ‘말’로 해결하는 게 더 ‘고상’하고 ‘명예’ 있는 행동이라는 점을 가르친다. 16세기에 왕실이 후원하는 신학교인 옥스퍼드·케임브리지와 준비학교인 퍼블릭스쿨 등 교육이 확대된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도 내전의 참혹함을 가르쳤다. 16세기 전까지 귀족은 혈통만으로도 타고난 통치차로 인정받았고 무용을 최고의 능력으로 자랑했지만, 16세기를 거치며 통치에 필요한 품성과 자질을 갖췄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영국 귀족의 도덕적 향상은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를 가르게 된다. 권력이 중앙의 국왕과 지방의 귀족(의회) 간에 분산됐던 구조에서, 권력의 중앙집권화는 곧 왕권의 무제한적 강화로 귀결될 위험성이 있었다. 반대로 왕권에 대한 신권의 강화가 15세기 내전과 같은 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일종의 ‘중앙집권화된 신권’이 왕권을 견제하는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14~15세기 내전을 거치며 대안으로 절대군주정을 형성하는데, 영국에서는 귀족의 향상을 토대로 ‘의회 안의 국왕’(king in parliament), 즉 국왕이 의회와 함께 통치한다는 혼합정체 지향이 남은 반면, 프랑스에서는 신권이 왕권에 완전히 종속되어 버린다.

 

5) 17세기 내전: 참주정과 인민정의 위험성

16세기가 지나며 영국 ‘혼합군주정’의 공백이 차츰 드러난다. 핵심은 ‘의회 안의 국왕’(혼합정체)과 왕의 비상대권 행사 간 관계에 대한 규정이 모호했다는 점이다. 가령 왕이 외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위기감을 조성해 비상대권을 주장하고 왕당파를 통해 관철시키면, 의회와 법률을 무시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16세기 튜더 왕조 아래에서 중앙집권화가 진전되며 ‘왕의 평화’가 확립되었지만, 왕실의 권리 주장이 점차 강해졌다. 종교개혁을 통해 군주주권이 주장되었고, 왕에게는 세속적 상위자뿐 아니라 영적 상위자(신)도 없다는 논리가 대두했다. 의회의 역할은 축소되었고, 국정 운영은 왕과 그가 신임하는 소수 인물들에 의해 사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사법 영역에서도 지방과 영주의 권한이 축소·통폐합되었다. 이는 15세기 내전과 지방 영주의 무법 상태를 해소하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왕권의 도구적 법 활용(법에 의한 지배)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그 결과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인신보호영장 사건 등에서 법률가들은 다시 대헌장을 참조하며, 관습법에 기초한 ‘신체와 정신의 자유에 대한 보호’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초에 크게 두 가지 쟁점이 제기된다. 첫째, 왕은 법에 기속되는가, 그리고 왕이 이를 거부하고 법을 위반할 경우 무엇으로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둘째, ‘의회 안의 국왕’의 비상시 절대적 권력과 통상적 권력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문제. 그런데 국왕의 권위와 의회 및 관습법의 관계를 기존의 정치과정으로 명료화할 수가 있는가.

 

‘혼합군주정’의 모호성을 적극 활용해 전쟁을 벌이고, 세금을 부과하고, 반대하는 이를 자의적으로 처벌한 찰스 1세에 맞서, 의회는 1628년 ‘신민의 권리와 자유에 관한 청원’, 곧 권리청원을 제출했다. 이는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 금지, 적법절차 없는 투옥과 몰수의 금지, 소송 없는 구금의 불법성, 전시 외 계엄령의 제한, 강제공채의 부당성 등을 담았다. 이는 왕권과 법, 의회 간의 관계를 명확히 해 헌정의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이를 거부하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결국 1642년 왕당파와 의회파의 내전이 발발했다.

 

『영국헌정사』의 저자들은 17세기 영국 내전의 원인은 결국 헌정의 모호성이라 지적한다. 물론 찰스 1세의 태도도 문제였지만, 서로 다른 헌정적 주장을 기존 헌정 내에서 해결할 수 없었기에 내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내전을 종결하는 해법은 헌정의 모호성 제거였다.

 

그런데 내전의 결과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의회파는 크롬웰 장군이 이끄는 신형군의 활약으로 승리했지만, 평민을 중심으로 한 군대는 곧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의회가 군대가 요구한 찰스 1세의 처형에 미온적으로 나오고 병사들의 전시 불법 행위에 대한 사면을 거부하자, 군부는 의회에 쿠데타를 감행해 대다수 의원을 축출했다. 남은 의원들로 구성된 ‘잔부의회’는 크롬웰과 군대의 뜻에 따라 전례 없는 절차로 헌정의 급격한 변화를 단행했다. 평민원이 귀족원을 배제한 채 특별법원을 설치하여 왕을 반역죄로 심판할 권한을 부여했고, 찰스 1세는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다. 곧 평민원이 귀족원을 폐지했고, 다음날 군주정도 폐지했다. 이 모든 일이 약 2주 만에 이뤄졌다.

 

이후 10년간의 공위(空位)기는 군주가 없고 의회도 유명무실해진 가운데 실제로는 크롬웰과 군부의 독재에 가까운 체제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과정을 통해 헌정의 모호성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성문헌법의 제정을 통해 위로부터 헌정을 무(無)에서 새롭게 설계하려는 실험이 반복되었다. 수평파의 『인민협정』과 크롬웰의 『통치장전』은 세습 상원직을 폐지하고 선출직 단원제 입법부를 주장했다. 저자들은 군주정 폐지론이나 인민주권론의 입장에서는 이를 중요한 성취로 볼 수 있겠지만, 이러한 실험이 군주정적·귀족정적 요소를 배제하고 민주정적 요소만을 극단화함으로써 혼합정체론의 역사적 교훈을 무시했다고 평가한다. 로마 공화정 말기나 이후 프랑스혁명에서 보듯, 민주정적 요소만이 권력을 독점하면 내전이 상시화되며 결국 참주정으로 귀결된다. 공위기의 헌법 실험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실패했고, 크롬웰 부자는 찰스 1세보다 더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결국 군부 일각에 의해 아들 크롬웰이 실각하고, 유명무실한 잔부의회가 해산된 뒤 새로운 의회가 구성됐다. 이에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는 종교적 관용, 청교도 사면, 재산 몰수 금지, 그리고 무엇보다 의회와의 협치를 약속했다. 의회는 이러한 약속을 받아들여 찰스 2세를 국왕으로 승인했고, 1660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찰스 2세는 의회와 함께 ‘면책과 망각에 관한 일반법’을 제정하여, 찰스 1세의 시해 가담자와 일부 중범죄자를 제외한 내전기·공위기 관련 행위자들을 대체로 사면했다. 이 법은 내전기·공위기 피해를 입은 왕당파의 일부, 반대편에서는 ‘처벌 대상’ 옹호자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장기 내전을 종결하기 위한 귀족 내부의 정치적 타협을 이끌었다 평가된다.

 

중요한 것은 15세기와 17세기의 두 차례 참혹한 내전을 거치며, 영국인, 특히 귀족이 정치적 교훈을 체득했다는 점이다. 15세기 내전을 통해 그들은 무제한적인 귀족 권력의 위험을 깨달았고, 16세기 이후 사익 추구를 절제하고 예의범절과 공익에 대한 의식을 갖춘 엘리트 집단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이어 17세기 왕권 강화의 국면에서는 왕의 특권 남용에 맞서 귀족정적 저항의 전통을 되살리며 권리청원 등을 통해 ‘의회 안의 왕권’을 명료히 하려 했다. 그리고 내전 이후에는 거꾸로 귀족원 폐지, 평민원 중심 체제의 불안정성, 크롬웰 독재를 경험하며 민주정적 요소의 극단화가 지닌 위험 또한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새로 소집된 의회가 왕정을 복고시키고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타협을 성사시킨 것은, 귀족들 스스로 혼합정체론의 핵심,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세 요소 사이에 견제와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교훈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6) 명예혁명을 통한 혼합정체의 건설과 현대화

이러한 정치적 학습은 이후 명예혁명을 통해 영국에서 내전을 마침내 종결하고 화해를 이루며 혼합정체를 건설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로마 공화정의 혼합정체를 복원한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라는 현대적 정치이념에 따라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찰스 2세 시기 의회에서는 왕당파와 의회파가 대체로 균형을 이루었고, 왕도 의회의 정치과정을 존중했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왕위계승 문제가 다시 헌정위기로 번졌다.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의 계승이 정당한가를 둘러싼 논쟁이, 왕위계승권의 소재가 국왕에게 있는가 아니면 의회에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서로를 ‘토리’와 ‘휘그’로 명명한다) 다만 이미 내전의 참혹함을 경험하고 정치적 타협의 문화를 형성한 뒤여서, 이 갈등은 다시 내전으로 비화하지 않았다. 결국 조정을 통해 휘그가 제임스 2세의 즉위를 수용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그러나 제임스 2세는 종교 문제를 비롯한 여러 사안에서 의회의 반대를 자신의 신성한 권리를 내세운 절대주의적 칙령으로 돌파하려 했고, 상비군의 강화도 추진했다. 이에 토리마저 그의 ‘퇴위’에 동의하게 되었고, 의회는 그의 딸 메리와 사위 윌리엄에게 왕위 승계를 요청했다. 바로 명예혁명이다.

 

저자들은 명예혁명이 유혈사태 없이 가능했던 이유로, 내전을 반성하며 귀족 내부에 정치적 타협의 문화가 자리 잡았다는 점, 양 진영 모두 자신을 전통적 자유의 수호자로 제시하는 일종의 합의를 형성했다는 점, 특히 휘그가 제임스 2세의 ‘폐위’가 아니라 ‘퇴위’라는 방식으로 사태를 규정함으로써 토리의 수용을 이끌어냈다는 점을 든다. 즉 명예혁명은 ‘화해’를 통해, 내전, 공위기, 왕정복고, 왕위계승 위기로 이어진 17세기 장기 내전 상태를 종결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산간지방을 중심으로 자코바이트 반란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이는 내전이 아니라 의회가 이룬 합의에 불복한 소수의 반란이었다.

 

영국은 화해를 기반으로 헌정의 모호성을 바로 잡는 해법을 실현할 수 있었다. 명예혁명으로 채택된 권리장전은 크롬웰 시기의 헌법 실험들처럼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문서가 아니었다. 이는 기존 영국 헌정에서 모호하게 남아 있던 쟁점들을 정리하고 명료화하는 작업이었다. 실제 내용도 권리청원의 연장선에 있었다. 곧 ‘의회 안의 국왕’이라는 혼합정체 아래 국왕의 각료 임면권, 선전포고권, 의회 소집·정회·해산권은 유지하되,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 평시 상비군의 유지, 그리고 법집행유예권 및 관면권(특정 사안에서 국왕이 법률의 예외를 허용하는 대권)은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저자들이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표면적 성문 조항이 아니라, 그 이면의 불문적 헌정 원리의 확립이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과세와 재정에 대한 의회의 통제를 국왕이 수용하게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국왕의 자의적 간섭에 맞서는 권리와 자유의 보장, 곧 ‘법의 지배’가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국가 재정이 더 이상 왕실의 재정과 동일시되지 않고, 전국적 의회가 이를 관리하여 정부에 배분하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비로소 국왕도 법에 기속된다는 원칙을 실제로 관철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왕이 의회를 무시한 채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던 기반, 곧 재정과 군대 측면의 모호성이 제거되며 법집행유예권과 관면권의 불법화가 실질적 의미를 갖게 되고, 의회의 입법권이 절대적이게 된 것이다.

 

영국은 유럽에서 최초로 ‘재정국가’(fiscal state)를 건설했다. 영국 전역의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할 권한이, 각지에서 선출되면서도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된 의회에 귀속된 것이다. 이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끊임없이 교체되는 국민의 대표 집단이 재정을 통제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당시 유럽 대륙의 최강국이었던 프랑스가 중앙집권적 절대군주정 아래에서 재정을 통제했던 것과 달리, 이러한 차이는 이후 양국의 역사적 경로를 근본적으로 갈라놓는 요인이 되었다.

 

혼합정체론의 관점에서 명예혁명·권리장전으로 확립된 영국 입헌군주정의 의의를 정리해 보자. 지방 각지의 귀족과 중앙의 국왕 간 관계라는 과거의 틀에서, 군주정적 요소에 대한 견제는 곧 주권의 분산으로 이어져 내전을 낳았고, 반대로 권력의 중앙집중은 귀족정적 요소의 약화와 참주정으로의 타락을 낳는 딜레마가 있었다. 이에 대한 16세기 ‘혼합군주정’은 절반의 해결책이었다. 그런데 16세기를 거치며 의회로 집결한 귀족이 각지 영주로서 사익을 넘어선 전국적 집단으로 형성되며 영국에서 ‘귀족정적 요소’, 즉 ‘국익’에 대한 엘리트 집단의 정견이 형성됐다. 이 덕에 17세기 내전과 명예혁명에서는 군주에 대한 귀족의 견제가 왕권을 목표로 한 귀족 간 내전이 아닌, 의회로의 권력 집중, 의회 입법권의 절대화와 재정국가 확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기서 혼합정체는 우선 입법에서의 ‘의회 안의 왕권’으로 이해된다. 즉 입법은 평민원(하원)과 귀족원(상원) 양쪽을 모두 통과해야 하고 왕의 재가(혹은 거부)를 거친다. 세 요소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통과된 법은 군주·귀족·평민이라는 신분을 막론하고 정치공동체 구성원 전부를 기속하는 정당성을 갖게 된다. 고전적 혼합정체론이 신분제를 전제로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혼합, 여러 사회적 이해의 타협에 초점을 맞췄다면, 영국에서는 세 요소가 혼합된 ‘의회의 지배’를 토대로 한 ‘법의 지배’의 확립이 강조된다. 이는 신분제를 넘어서는 현대적 의미를 갖는다. 즉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만든 법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

 

이렇게 혼합정체가 현대화되면서, ‘의회의 지배’ 즉 ‘입법의 우위’ 하에서 대권 자체를 셋으로 분립시키자는 ‘균형정체’ 이론이 등장한다.

 

7) 18세기 균형정체론, 내각제의 발전, ‘능력귀족’의 재생산

명예혁명으로 ‘의회의 지배’를 통해 ‘법의 지배’가 확립되며, 고전적 혼합정체론을 넘어 18세기에 균형정체론이 발전한다. 이는 입법에서 군주정·귀족정·민주정적 요소 간 ‘견제와 균형’에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을 더한다.

 

삼권분립의 측면에서 볼 때, 고전적 혼합정체에서는 군주의 대권이 입법·행정·사법권을 모두 포함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군주를 의회가 견제하며 군주와 의회가 함께 통치한 것이다. 그런데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군주나 귀족원이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 즉 입법권과 행정권이 통합된 상태, 그리고 사법부가 입법부와 행정부 어느 한쪽 또는 양자 모두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가 자유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법의 지배’가 확립되며 입법이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권력이 된 상황에서, 입법과정에서의 ‘견제와 균형’과는 별개로, 법을 제정하는 자가 그 법을 직접 집행해서는 안 될 필요성이 더해진다는 것이다. 입법부는 자신의 소관 범위를 넘어서는 권한의 행사를 자제해야 할 필요성이 가장 컸다.

 

몽테스키외는 의회의 입법권으로부터 군주·내각의 집행권(군주정적 요소)가 분리되어야 하며, 의회도 귀족으로 구성된 상원(귀족정적 요소)과 평민 대표로 구성된 하원(민주정적 요소)으로 나뉘어 상호 견제 하에 입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발전시킨 블랙스톤은, 법의 지배를 입법의 우위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을 통해 보장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블랙스톤은 입법부와 행정부에 대한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이는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데, 명예혁명 이후 18세기 영국에서 내각제가 발전한 이유를 살펴보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8세기 초에 문제가 됐던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입법권의 한 요소로서 국왕(입법을 재가하거나 거부할 권한이 있음)이 집행권을 행사하는 정부의 수반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왕권이 하원에 미치는 영향력이 문제가 된다. 둘째, 법원(판사)이 여전히 군주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한편으로는 절대화된 입법권이 스스로 견제할 수 있도록 평민원에 대한 귀족원의 견제를 두는 동시에, 군주정적 요소를 입법권과 분리된 행정권으로 규정하며 입법(귀족정·민주정)과 행정(군주정)이 상호 견제하고, 사법부를 양자에서 독립시키는 것으로 혼합정체를 재해석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는, 그런 균형정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의회의 재정권 통제로 내각이 의회 다수의 신임을 필요로 하게 된 현실, 그리고 영어가 익숙지 않았던 하노버 왕가의 특수성으로 인해 내각제가 발전한다. 군주의 집행권·입법권·사법권은 차츰 다른 행위자들에게 위임되었고, 그에 따라 군주의 지위는 점차 ‘상징적 국가원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첫째, 국가원수(군주)와 정부수반(수상)의 직책이 점차 분리된다. 군주는 주요 정치가와의 협상을 거쳐 내각을 임명하고 내각은 군주의 의향에 따라 복무하나, 집행권은 군주가 아닌 내각이 담당하며 군주는 이에 따르는 관행이 정착한다.

 

둘째, 그 과정에서 정치의 무게중심이 군주와 내각 사이의 관계에서 내각과 의회 사이로 이동한다. 과거와 달리 의회가 재정을 통제하게 되며, 이제 의회는 군주 내지는 왕실 행정에 대항하는 데서 사후의 탄핵 대신에 사전의 불신임결의(특정 정책 대상)와 불신임투표(내각 대상)에 의존하는 관행이 정착된다. 정책이 의회의 승인을 얻는 과정에서 정정될 여지가 생긴 것이다. 반면 내각의 입장에서는 의회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정책을 변경하거나 사임해야 할 수도 있으므로, 의회를 중요한 동반자로 여기게 된다.

 

셋째, 입법 과정에 대한 국왕의 형식적 역할도 거부권으로 축소된다. (그런데 1716년의 ‘7년 임기법’으로 하원의 독립성이 강화되며 실질적으로는 거부권이 폐지된다.) 평민원과 의원에 대한 왕실 내지는 집행부(내각)의 영향력을 차단하거나 제한하는 조치도 마련된다.

 

넷째, 군주는 사법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권한을 잃는다. 18세기 이후 법원은 군주가 아닌 의회의 대리인으로 이해되었다. 사법의 독립이 점차 실현된다. 판사의 임면은 군주의 의향이 아니라 판사 자신의 품행에 따라 결정되어야 했고, 급여는 국왕이나 내각의 변덕에 따르지 않고 확정되어야 했으며, 직무에 태만한 판사의 합법적 해임은 양원의 면직에 근거해야 했다.

 

18세기 내각과 하원이 주도하는 내각제의 발전에서, 초대 수상 월폴이 확립한 정치관행이 매우 중요했다. 그는 내각 즉 관직의 임명에서 의회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이고 공개적인 선거·의석 경쟁과, 내각이 주도하는 의회 내 토론에서 능력을 보이는 것을 주요한 고려사항으로 삼았다. 토리냐 휘그냐에 상관없이 말이다. 이 과정에서 내각의 폭정이나 다수 의석의 지배가 아닌, 내각과 야당의 주고받기와 협치의 정치문화가 발전한다. 이는 이후 의원내각제가 발전하는 기반이 된다.

 

이런 정치문화의 발전은 상원의원만이 아니라 선출되는 하원의원의 자질도 향상되는 과정과 결부되어 있었다. 이미 15세기 내전 이후 혈통과 무용보다는 ‘신사성’과 능력이 중시되며 ‘신사귀족’이 형성되었는데, 여기에 17세기 내전과 명예혁명의 경험이 더해진다. 18세기에는 귀족에게 의회 활동에 필수적인 공적 토론을 위한 자질과 덕성으로서 ‘시빌리티’가 요구되기 시작한다. 의원은 정치적·종교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도 합리적으로 소통할 수 있어야 했다. 이에 귀족은 가정 내 사교육 대신, 기숙학교의 단체생활을 통한 교육을 택하기 시작한다. 18세기 퍼블릭스쿨과 옥스브리지라는 공통의 교육 경로를 함께 밟은 ‘능력귀족’의 양성이 내각제 발전을 뒷받침했다. 이들 귀족은 18세기 말 정당을 구성하며, 의원내각제로의 발전을 예비한다.

 

8) 19세기 ‘의회정부’(의원내각제)로의 이행과 중간계급의 향상

삼권분립을 요체로 하는 ‘균형정체’로서의 내각제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혁명과 반혁명의 공포’(케이헌)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의회정부’(parliamentary government), 곧 의원내각제로 발전한다. 그 핵심은 민주정적 요소를 확대하면서도, 그것이 혼합정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정당정치를 통해 제약하고 조직하는 데 있었다.

 

내각제에서 의원내각제로 이행의 핵심은, 군주정적 요소로서 내각이 더 이상 군주가 임명하는 기구가 아니라, 하원에서 다수를 차지한 정당이 구성하는 기구로 변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행정부인 내각은 입법부에서 충원되고 입법부 안에서 운영되며, 하원의 신임을 상실하면 교체되어야 한다. 행정부의 권한을 의회 다수의 정치적 책임 아래 두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는 하원 선거권의 확대 즉 민주정적 요소의 강화와 결부되었다.

 

이전 균형정체론의 관점에서, 이는 분립했던 입법권과 행정권을 다시 합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양당제 하에서의 정당정치를 통해 두 권력 간의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게 된다. 물론 기존 의회파-왕당파 구도를 넘어선 의회 내 현대화된 정당의 형성(하원, 나아가 상원의 당파화)도 균형정체론의 입장에서 우려 요소였으나, 후술할 정치문화의 발전으로 해결된다.

 

의원내각제에서 정부(내각), 상원, 하원을 결합시킨 것은 정당이었다. 하원·상원에 걸쳐 조직된 정당은 일정한 정강과 정책을 제시했다. 또 한편으로는 시민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며 여론을 반영하거나 형성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내각)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 따라 유권자는 경쟁하는 정당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내각을 선출하고, 평가하고, 교체할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선거권이 점진적으로 확대되더라도 정당 운영의 원리는 여전히 귀족정적 요소, 즉 국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엘리트적 정견의 형성이라는 특성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여기서 여야 정당의 균형과 타협이 중요했다고 지적한다. 민주정적 요소의 확대가 다수의 폭정으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휘그와 토리 사이에 헌정의 변화에 관한 의견 일치, 즉 점진적이고 안정적인 선거권 확대를 수용하는 합의가 존재해야 했다. 토리는 변화에 대한 관용을, 휘그는 급진적 변화의 자제를 행했다.

 

또한 자유주의적 정치문화, 곧 18세기부터 확산한 ‘시빌리티’의 뒷받침이 중요했다. 이는 양당의 정책 경쟁에서 여당과 야당의 협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영국 의회에서 현임 내각과 잠재 내각은 같은 의회 안에 공존한다. 현임 내각은 잠재 내각의 비판과 견제를 받지만, 잠재 내각도 언제든 선거를 통해 현임 내각이 될 수 있는 ‘대기 내각’이므로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다. 이러한 질서는 여당의 관용과 야당의 자제를 통해 유지된다. 여기서 관용이란 여당이 야당에게 합법적인 정권교체 경쟁의 기회를 허용하는 것이고, 자제란 야당이 자신들에게 합법적으로 주어진 권한이라 하더라도 절제하여 행사하는 태도를 뜻한다.

 

이 점에서 의원내각제는 대통령제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대통령제에서는 선거가 이중화되어 행정부와 입법부의 정당 구성이 어긋나는 여소야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의회는 입법권·예산권·탄핵권을 과도하게 활용하고, 대통령은 거부권과 시행령 권한을 과도하게 행사하며, 나아가 사법부 재편을 통해 맞서는 식의 악순환이 생기기 쉽다. 반면 영국형 양당제 의원내각제에서는 행정부가 애초에 의회 다수에 기반해 성립하므로, 그런 충돌이 원천 차단된다. 따라서 의회가 정부를 견제하는 수준을 넘어 공격하거나, 반대로 정부수반이 의회를 단순한 추인기구로 전락시키는 상황이 제도적으로 훨씬 제약된다. (물론 양당제 정당정치에 더해, 여전히 남은 귀족정적 요소인 상원의 견제도 중요하다.)

 

이렇게 민주정적 요소가 점진적으로 확대되면서도 정당정치와 국익에 대한 양당의 합의를 통해 혼합정체에서 이탈하지 않은 데에는, 18세기 확립된 귀족 교육의 방식이 중간계급, 나아가 노동자계급 상층까지 확산된 것도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들이 향상심을 가지고 귀족의 신사적 풍속을 존경하고 모방하는 ‘신복’, 그리고 귀족이 그들을 기꺼이 귀족으로 수용하고 예우하는 문화가 선거권 확대의 도덕적 기반이었다. 특히 1832년 선거법 개정을 전후로 퍼블릭스쿨의 개혁이 시작된다. 교육 대상을 기존 귀족을 넘어 평민으로 확대하고, 단체스포츠를 학교생활의 중심으로 두었다. 단체경기에서 선수들은 자신보다 팀을 우선하고, 규칙에 따라 경기에 임하며, 승부의 결과보다는 내용과 품격을 중시하는 정신을 습득해야 했다.

 

이러한 문화가 확산되며 언론이 활성화되고, 의회와 내각의 융합 속에서 상술한 정당정치가 일어난 것이다. 이에 더해, 19세기 중반에는 행정부 공무원의 선발이 엽관제에서 공개 경쟁 채용시험으로 대체되며, 행정부도 상술한 교육과정을 밟은 이들에게 개방된다.

 

9) 20~21세기 영국 헌정: 정치적 헌정주의를 둘러싼 논쟁

19세기 ‘눈부신’ 자유주의(케이헌)를 구현한 영국헌정은, 20세기 들어 자본주의의 위기, 영국 헤게모니의 약화 속에서 혼합정체적 성격이 다소 약화된다. 이는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설명된, 20세기 초 자유주의의 위기와 ‘타협’과 관련이 있다.

 

1911년 의회법으로 상원의 거부권이 제한되며 하원의 상원에 대한 우위가 확립되고, 세계대전의 와중에 보통선거제가 도입된다. 보수당·자유당의 양당제가 보수당·노동당의 양당제로 변경된다. 다만, 거부권 제한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는 여전히 상원의 영향력과 귀족적 전통이 존중되었다. 노동당도 국익을 중심으로 한 타협의 정치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고, 노동당 지도부는 대개 퍼블릭스쿨과 옥스브리지를 거친 엘리트로 구성됐다. 1957년에 ‘능력주의 귀족’으로 업적에 근거해 1대에만 작위를 수여하는 ‘일대귀족’(life peerage) 제도가 도입된다. (아마 한국 사람에게 익숙한 일대귀족으로, 축구 감독 알렉스 퍼거슨 경이 있겠다.) 이로 인해 상원의원 수가 과도하게 늘어난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재능과 경험이 풍부한 일대귀족 남녀 의원들로 상원이 재구성된다.

 

유럽 통합 과정에서 정치적 헌정주의에 법률적 헌정주의가 도전한다. 즉 혼합정체로서 ‘의회의 지배’가 ‘법의 지배’를 보장하고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는 전통 대신, 기본권을 명시한 헌법으로 입법을 제약해야 한다는 제기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법률적 헌정주의를 채택하면 기본권이 무엇인지, 입법이 기본권에 부합하는지의 쟁점을 의회가 아닌, 선출되지 않은 법원이 판단하게 된다는 점에서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또한, 군주정과 상원제의 폐지론도 꾸준히 제기된다. 그러나 저자들은 영국식 의원내각제의 ‘상징적 군주’냐, 아니면 대통령제의 강력한 권한을 가진 ‘선출된 군주’냐는 쟁점을 제기한다. 쉽게 말해, 지금의 영국 국왕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 중 누가 더 ‘군주’냐는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귀족정적 요소인 상원의 폐지도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하원에서 영국독립당과 같은 세력이 부상함에도 여전히 상원의 영향력에 대한 영국인의 존중이 자유와 기본권에 대한 노골적 침해를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혼합정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선거만으로는 권력의 견제와 균형, 분립, 그리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수는 없다.

 

 

3. 내전의 진화과정

 

『영국헌정사』와 『한국헌정사』를 잇는 주제는 ‘내전’(civil war)이다. 내전은 동료 시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국가 간 전쟁과 구분되며 게릴라전이나 테러와 같은 비정규적 폭력과도 구별된다. 이런 내전의 고전적 사례가 로마 공화정 말기의 내전이다. 많은 역사가가 이를 ‘서양사 최초의 내전’으로 규정해 연구해 왔다.

 

로마 내전을 살펴봐야 할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로마 내전과의 비교를 통해 17세기 영국 내전을 종결시킨 명예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케이헌이 제시한 소유·헌정·향상이라는 틀을 빌리자면,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을 통해 재정국가를 확립하고 왕실의 독점권을 제한했으며, 자유를 위한 법의 지배와 의회의 지배를 제도화했다. 동시에 내전에 대한 ‘용서’와 ‘망각’을 통해 귀족 집단 내부의 화해와 타협의 문화를 구축함으로써 권력 투쟁을 공익을 위한 능력 경쟁으로 전환시켰다.

 

둘째, 같은 틀을 적용해 로마에서 ‘내전의 진화과정’을 인식할 수 있다. 로마에서는 개인의 경제적 이익이 공화정 정치와 과도하게 결합하면서 로마 시민의 ‘특권’이 강화되었다. 동시에 금권주의와 인민주의가 창궐하며 입법과정에서 견제와 균형이 무너졌고,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진행되며 정치 갈등이 ‘법에 의한 지배’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기존의 능력 경쟁 경로를 따르는 대신 인민의 분노를 이용해 행정관직을 얻으려는 ‘분노 사업가’들이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고, 적을 ‘청산’하는 폭력적 정치문화가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는 지금의 한국에도 비추어 볼 수 있다.

 

셋째, 정체론의 관점에서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체는 내전 연구에서 자주 지적되는 이른바 ‘잡종정체’(anocracy 혹은 hybrid regime)의 원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로마 내전을 거쳐 등장한 ‘인민주의적 참주정’은 한편으로는 영국식 혼합정체인 의회정부와,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정치체제와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한국에서는 유신체제와 전두환 정권 시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기에서 강력한 대통령 권한, 단원제 의회, 잦은 선거가 결합된 정치체제가 지속되어 왔다. 이러한 정체가 왜 내전적 정치 갈등을 낳을 수 있는지를 로마의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도 로마 공화정의 경험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설명한 17~18세기 ‘프로토자유주의 대 공화주의’(케이헌), 혹은 ‘온건 계몽주의 대 급진 계몽주의’(울로크)의 논쟁은 로마 공화정의 붕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둘러싼 것이었다. 공화주의자들은 로마 공화정 붕괴의 원인을 귀족정의 과두정으로의 타락에서 찾으며 공화정 초기 상태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반면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과두정뿐 아니라 인민정과 참주정까지 포함하는 정체의 타락을 종합적으로 인식하며 고전적 혼합정체의 복원을 지향했고, 나아가 ‘신체와 정신의 자유’를 위한 법의 지배와 의회의 지배를 통해 이를 현대적 혼합정체로 발전시켰다.

 

이처럼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은 추상적 이념 논쟁이 아니라 로마사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로마 공화정의 경험을 검토하지 않은 채 ‘민주주의’나 ‘인민주권’을 관념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역사 이해에 기반한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헌정사』가 지적하는, 한국에 헌정론이 부재하다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이러한 논의들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참주정을 무너뜨리고 왕이 없는 공화정을 세웠던 로마에서 왜 내전이 발생했고, 그 내전은 왜 참주정의 재등장으로 귀결되었는가. 『영국헌정사』의 설명이 소략하므로, 저자가 참고한 데이비드 와츠의 『독재의 탄생: 로마 공화정의 몰락』(2018; 국역: 마르코폴로, 2024)을 중심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1) 로마 공화정의 혼합정체

폴리비오스의 고전적 혼합정체론이 모델로 삼았던 것은 신분투쟁 이후의 로마 공화정이다. 로마 공화정에는 성문헌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성문법도 많지 않았다. 신분투쟁 과정에서 제정된 12표법과 같은 법률을 제외하면, 앞으로 서술할 정치 절차는 대부분 불문율에 따라 이루어진 정치적 관습이다. 이러한 관습은 통치계급(귀족)이 존중하고 시민들이 권위를 인정하는 규범이었다.

 

(1) 군주정적 요소: 행정관

 

로마에서 왕정이 폐지된 뒤, 왕이 가졌던 임페리움(imperium), 곧 대권은 집정관(consul)이라 불리는 두 명의 행정관에게 넘어갔다. 두 집정관은 서로의 행위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임기도 1년으로 제한되어 권력의 집중이 방지되었다.

 

집정관 이하 여러 행정관이 있었다. 집정관은 군대를 지휘하고 공공질서를 유지하며 행정 전반을 담당하는 최고 행정관이었다. 법무관은 사법권을 행사했고, 집정관과 마찬가지로 임페리움을 가졌다. 호민관은 평민을 보호하는 관직으로서 거부권과 중재권을 행사하며 평민회를 주재했다. 조영관은 상업 질서 유지, 경찰·소방 업무, 각종 공공 행사 등을 맡았고, 재무관은 국가 재정을 관리했다. 감찰관은 원로원 의원을 선임하고 부적절한 의원을 제명하는 권한을 가졌다.

 

군주정적 요소인 행정관과 민주정적 요소인 민회의 관계는 상호적이었다. 한편으로 행정관은 모두 민회에서 선출되었으므로, 행정관이 되려면 민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행정관은 민회를 소집하고 주재하며, 법안이나 정책을 제출해 표결에 부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즉 행정관은 민회에서 입법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다만 모든 행정관이 모든 민회에 대해 동일한 권한을 갖진 않았다. 임페리움을 가진 집정관과 법무관은 백인조회와 트리부스회에, 조영관은 트리부스회에, 호민관은 평민회에 각각 안건을 제출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전적 혼합정체에서 군주정적 요소는 행정권뿐 아니라 사법권과 입법권도 가졌다.

 

군주정적 요소인 행정관과 귀족정적 요소인 원로원의 관계 또한 중요했다. 행정관은 입법·행정·사법 전반에서, 특히 외교·군사와 재정 문제 같은 중대 사안에서는 원로원의 권고에 따라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컨대 전쟁에서 집정관은 최고사령관으로서 현장 지휘를 맡았지만, 전쟁의 개시와 종결, 외교적 협상과 같은 중대사는 반드시 원로원의 권고와 민회의 표결을 거쳐 결정되었다.

 

물론 행정관과 원로원 사이에 의견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행정관은 원로원의 권고를 수용했다. 그 이유는 현직 행정관이 곧 장차 원로원 의원이 될 사람이었고, 퇴임 후에도 원로원에 남아 미래의 행정관에게 영향을 행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원로원의 권위를 지나치게 훼손하면서까지 독자 노선을 고수할 유인이 크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행정관의 대부분은 원로원과 동일한 사회적 집단, 곧 귀족층에 속해 있었다.

 

행정관직을 둘러싼 정치적 경쟁은 주로 귀족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경쟁은 군공과 명예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내전 이전까지는 패배자가 생명이나 재산을 잃는 식의 극단적 권력투쟁으로 비화하는 경우는 없었다.

 

(2) 귀족정적 요소: 원로원

 

원로원을 이해하려면 구성원인 귀족이 누구인지 볼 필요가 있다. 본래 로마는 여러 부족의 연합으로 형성되었고, 각 부족장 가문은 세습적으로 통치 업무를 수행했다. 부족 조직이 점차 형해화한 뒤에도 이들은 유력 가문으로서 영향력을 유지했고, 원로원에 모여 왕에게 자문을 제공했다. 왕정이 폐지된 뒤 정치권력은 이들 혈통귀족(patricii)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팽창하고 더 많은 행정관직이 필요해졌고, 신분투쟁으로 행정관직이 평민(plebs)에게도 개방되면서 귀족의 범위는 점차 확대되었다. 혈통귀족이 아니더라도 군대나 행정에서 능력을 보여 행정관으로 선출되고 원로원 의원이 되면, 귀족에 편입될 수 있었다. 즉 로마 공화정에서 ‘귀족’이란, 이렇게 혈통귀족과 고위 행정관직에 진출한 평민 가문을 포괄한 ‘신귀족’(nobiles)을 뜻했다. 물론 실제로는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가난한 평민이 이런 경로를 밟기 어려웠으므로, 주로 군 복무와 정치 진출이 가능한 재산 있는 평민들이 이 새로운 귀족층에 편입되었다.

 

원로원은 전·현직 행정관으로 구성되었고 종신직이었다. (즉 혈통과 상관없이 관직에 진출한 ‘귀족’만이 원로원을 구성했다) 다만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품위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경우에는 감찰관에 의해 제명될 수 있었다.

 

귀족정적 요소와 군주정적 요소의 관계를 보면, 원로원은 전·현직 행정관들로 이루어진 집단답게 풍부한 군사·행정·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국정 전반에 대한 권고를 제시했고, 현직 행정관의 대권 행사를 지도하고 견제했다. 원로원은 직접적으로 입법·행정·사법을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이 세 영역 모두에 강한 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행정관이 법안을 민회에 제출하거나 외교 조약을 체결할 때, 원로원의 권고는 거의 항상 전제 조건처럼 작용했다. 민회에서 원로원의 권위가 컸기에, 행정관들도 원로원과 사전 협의하여 민회에 안건을 제출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몽테스키외가 고전적 혼합정체에서 군주나 귀족이 삼권을 행사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가리킨 것이다.

 

또한 원로원 의원들은 현직 행정관의 요청에 따라 전쟁 지휘관으로 참전하거나, 속주 총독직을 맡는 등 행정 실무에도 참여했다. 원로원과 행정관은 구분되는 요소였지만, 실제 정치 과정에서는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귀족정적 요소와 민주정적 요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형식상 민회의 결정은 (평민회의 결정을 제외하면) 원로원의 승인 없이는 효력을 갖지 못했다. 다만 실제로는 민회 표결 뒤에 원로원이 이를 뒤집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행정관이 애초에 원로원의 권고를 반영해 민회에 안건을 상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귀족은 개인적 보호-피보호관계와 광범위한 인맥을 통해 평민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므로, 민회에서 원로원의 권위는 매우 컸다. 물론 영향력의 정도는 민회의 종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3) 민주정적 요소: 민회

 

폴리비오스가 혼합정체론을 제시할 당시 로마 공화정에는 (유명무실해진 쿠리아회를 제외하면) 세 종류의 민회가 있었다. 첫째는 군대의 백인조에서 유래한 백인조회였다. 이는 재산 기준에 따라 투표권이 차등 배분되어 있었기에, 귀족과 부유한 평민이 결과를 좌우했다. 둘째는 지역 단위로 조직된 트리부스회였다. 여기서는 가난한 평민의 대표성이 백인조회보다 상대적으로 더 컸지만, 여전히 상층 시민의 영향력이 강했다. 셋째는 신분투쟁의 결과로 형성된 평민회였다. 평민회에는 혈통귀족이 참여하지 못했지만, 귀족은 인맥과 권위, 연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정리하면, 백인조회는 귀족 + 부유한 평민, 트리부스회는 귀족 + 부유한 평민 + 가난한 평민(미약), 평민회는 부유한 평민 + 가난한 평민이 투표 결과를 결정했다.)

 

세 민회는 각각 소집할 수 있는 행정관의 급이 달랐고, 따라서 다루는 안건의 수준도 달랐다. 백인조회는 임페리움을 가진 집정관, 혹은 집정관이 모두 전쟁터에 있을 경우 법무관만이 소집할 수 있었으며, 선전포고와 평화조약 체결, 그리고 집정관·법무관·감찰관 선출 같은 중대 사안을 다루었다. 그래서 가장 드물게 열리는 민회였다. 트리부스회는 집정관·법무관·조영관이 소집할 수 있었고, 조영관·재무관 선출 및 백인조회보다 덜 중대한 안건을 처리했다. 평민회는 호민관만이 소집할 수 있었고, 호민관 선출을 포함해 가장 많은 안건의 표결이 이루어졌으며 가장 자주 열렸다.

 

민회는 원로원과 달리 토론하는 기구가 아니라 표결을 위한 집회였다. 다만 표결 전에 정치가들을 중심으로 비공식적 연설과 설득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평민의 여론을 파악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정치가 진행되었다.

 

신분투쟁의 결과,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성문법이 제정되었고, 특히 호민관과 평민회의 권한이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두 명의 호민관은 민회에서 통과된 법률(다른 행정관이 백인조회·트리부스회에서 통과시키거나, 상대편 호민관이 평민회에서 통과시키려는 것)이나 원로원의 권고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호민관은 평민회에서 입법권을 행사했으며, 평민회에서 통과된 법은 원로원의 권고와 충돌하더라도 승인될 수 있었다. 평민회가 통과시킨 법은 평민만이 아니라 귀족을 포함한 로마 시민 전체에 효력을 가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문법상 권한에도 불구하고, 민회에 비밀투표가 도입되고 그라쿠스 형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혼합정체의 불문율이 여전히 더 강하게 작동했다는 점이다. 호민관은 대체로 원로원의 권고를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입법했고, 거부권 행사도 자제했다. 그 결과 원로원과 집정관도 백인조회에서 처리해야만 하는 국가 중대사가 아닌 안건은, 트리부스회보다는 호민관과 협력해 평민회에 부쳐 더 넓은 대중적 정당성을 얻으려 했다. 이 때문에 평민회가 세 민회 가운데 가장 자주 열리는 기구가 되었다.

 

이러한 관행 속에서, 평민만 맡을 수 있는 호민관직은 점차 로마 시민과 원로원에게 정치적 능력을 보여 주고 이후 더 높은 행정관직에 도전할 수 있는 입문직으로 자리 잡았다. 많은 부유한 평민이 호민관직을 거쳐 귀족층으로 진입했다. 이 점은 다시금, 호민관들이 법적으로는 강한 권한을 가졌음에도 실제로는 다른 행정관과 원로원과의 타협을 중시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분투쟁 이후의 로마 공화정은 군주정적 요소인 행정관, 귀족정적 요소인 원로원, 민주정적 요소인 민회가 결합된 혼합정체였다. 그러나 이 혼합은 성문헌법에 의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불문율과 관행, 그리고 귀족층 내부의 절제와 합의에 의해 유지되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세력이나 성문법상 권한을 이용해 균형과 절제의 관행을 깰 때 혼합정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이것이 실제 일어난 게 로마에서 ‘내전의 진화과정’이었다.

 

2) 대규모 전쟁과 영토 확장이 만들어낸 문제

로마 공화정은 이탈리아 반도 내부의 소규모 국가들과 전쟁과 외교를 벌이며 헤게모니를 확대해 왔다. (17~18세기 유럽 공화주의자들은 바로 이 시기를 이상화한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중반 이후 약 100년 동안, 로마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규모의 전쟁과 정복을 경험하며 큰 사회적 변동을 겪게 된다.

 

먼저 카르타고의 침공으로 대표되는 전례 없는 대규모 전쟁과 국가적 위기가 닥쳤다. 이러한 새로운 전쟁에서는 원로원의 전직 행정관들이 축적한 경험이 충분히 통용되지 않았고, 그 결과 신세대 집정관과 원로원 사이의 의견 충돌이 잦아졌다. 특히 원로원이 권고한 전략을 따랐다가 대패하는 일이 벌어진 반면, 새로운 전쟁 양상에 적응한 집정관이 개인적 역량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원로원의 권위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도 점차 약화되었다.

 

대규모 전쟁을 거치며 로마의 군사활동 범위는 비약적으로 넓어졌고, 이후 지중해 세계에 대한 정복과 약탈로 전쟁의 성격이 바뀌었다. 이 변화는 부유한 평민과 귀족, 그리고 가난한 평민 사이의 격차를 크게 확대했다. 로마 군대는 스스로 무장을 준비할 수 있는 시민으로 구성되었으므로, 부유한 계층일수록 군사적·정치적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과거 로마시 주변에서의 전투가 중심이었던 때에는, 부유한 시민이 공동체의 자유를 위해 군사적 희생을 감수하고 가난한 시민은 그 덕분에 생업을 유지한다는 ‘공화주의적 자유’의 관념이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외부 세계를 향한 정복전으로 나아가며, 전쟁 참여 여부가 소득과 재산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정복전쟁에 참여한 귀족과 부유한 평민은 토지, 전리품, 노예를 분배받으며 재산을 급격히 늘릴 수 있었다. 병사 개인에게 돌아가지 않은 약탈물과 배상금, 속주로부터의 세금은 국고로 유입되었고, 이를 통제한 행정관들은 대규모 군사사업과 토목사업을 벌이며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원로원의 집단적 권위를 능가하는 개인 정치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정치적 경쟁의 성격도 바꾸었다. 원래 군공과 명예 중심이던 경쟁이 이제 국가 재정과 결부되기 시작한 것이다. 성공한 행정관은 전쟁 수익을 바탕으로 군대를 지원하고, 시민의 세금을 낮추고, 각종 공공사업을 벌이며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심지어 마케도니아 정복 이후 로마는 시민이 보유한 이탈리아 내 토지에 대한 징세를 중단할 정도로 재정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만큼 행정관직의 정치적 가치와 경쟁 비용도 함께 상승했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이르러 지중해 세계의 속주화가 거의 마무리된다. 전쟁은 더 이상 새로운 정복과 약탈을 통한 급격한 상승의 기회가 아니라, 기존 속주의 반란을 진압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전쟁을 통해 경제적 지위를 크게 끌어올리거나, 평민 출신이 귀족으로 진입하는 경로가 점차 좁아졌다. 한편 기존의 정복전쟁을 통해 이미 부와 지위를 축적한 귀족 집단은 점차 폐쇄적 집단이 되었고, 대외 팽창 대신 로마 내부의 토지 투자로 눈을 돌렸다. 이 과정에서 가난한 평민은 토지를 잃고 도시로 밀려났으며, 빈부격차와 귀족에 대한 불만도 함께 심화되었다.

 

한편으로는 귀족 내부 경쟁이 정복전쟁과 속주(식민지) 수탈에 근거하며 금권주의적으로 타락하는 경향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평민의 불만이 쌓였다.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경향을 결합시킨 인물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다.

 

3) 인민주의자 그라쿠스 형제가 일으킨 소동:

민회의 비밀투표 도입, 사익에 근거한 지지자 동원, 협박과 폭력이 정치의 수단으로 도입, 평민회의 권력 독점 주장, 유혈사태(소동) 발생

와츠는 그라쿠스 형제가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에 주목했을 뿐 아니라, 이를 고위 공직 경쟁에 활용함으로써 공화정을 위험한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이들의 등장을 가능케 한 중요한 제도적 변화로 민회의 비밀투표 도입에 주목한다. 이는 그간의 투표 관행을 크게 변화시켰다.

 

기존의 공개투표 체제에서는 귀족이 개인적 인맥과 연설을 통해 유권자를 설득하거나 매수하면,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비밀투표가 도입되자, 특정 개인·집단을 직접 설득하는 정치 방식은 급속히 약화된다. 유권자의 실제 선택을 확인할 수 없게 되면서, 정치가는 개별 시민을 설득하기보다 ‘익명의 다수’의 선호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차츰 이동했다. 이전에 귀족은 유권자의 사익과 대립하는 법안이어도, 면대면 설득과 매수를 통해 유권자가 그 법안에 투표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익명의 다수’에 직면한 이제는, 정치가에게 그런 적극성보다는 ‘수동성’이 요구됐다. 즉 누가 봐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을 얘기해야만 투표에서 이길 수 있게 됐다. 가장 직관적이고 강렬한 것은 욕망, 그것도 ‘남들이 가졌지만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마침 로마의 행정관은 정복전쟁에서의 약탈과 속주에 대한 수탈로 얻은 재정을 시민에게 베풀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그간의 급속한 영토 확장기에 그 부는 주로 귀족과 부유한 평민의 지위 향상에 사용됐다. 그러나 민회에 비밀투표가 도입되며 ‘익명의 다수’에 직면하자, 국가 재정을 활용해 관직을 얻으려는 금권주의적 경향을 빈민의 불만과 결합시켜 정치적 경쟁에서 승리하려는 자가 나오게 된다. 이 새로운 유형의 정치가들은 ‘인민주의자’(populares)라 불렸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기원전 163~132년)는 이러한 변화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기득권층의 황태자’로, 최고의 혈통을 가진 귀족 출신이다. 그는 정석 출세 코스를 밟아 젊은 나이에 재무관직에 이르렀고 당연히 다음 집정관에 선출되리라 여겨졌다. 그런데 하필 전쟁에서 자신이 보좌한 집정관의 무능 탓에 크게 패배한다. 원로원 내에서 비판이 제기되며, 차기 집정관 당선이 불확실해졌다. 억울했지만, 정치적 관습에 따라 이번 선거는 포기하고 능력을 입증할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절치부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장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회복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전쟁으로 획득한 이탈리아 반도 내 국유지에 주목했다. 이는 정복활동에 참여한 혈통귀족과 부유한 평민에게 주로 분배되어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이를 빈민에게 재분배하는 토지개혁 법안을 내세워, 엄청난 인기를 얻어 평민회의 호민관에 당선된다. 그리고 원로원과의 사전 협의 없이 토지개혁법을 평민회에 제출했다. 물론 법적으로는 평민회가 통과시킨 법은 원로원의 승인 없이 효력을 갖지만, 그간 호민관은 원로원과 사전에 협의를 거쳐 타협안을 제출해 왔다. 티베리우스는 빈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성문법상 권한을 사용해, 원로원과 민회 간의 균형을 담보하던 관습을 깼다.

 

그런데 동료 호민관이 표결 전에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한다.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그가 국유지의 대규모 소유자라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며 공개 규탄하고, 시민이 그를 호민관으로 선출했으므로 마찬가지로 그 권력을 정당하게 박탈할 수 있다며, 그의 소환을 평민회 투표에 부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회장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동원해 물리적 폭력으로 투표를 성사시켰다. 물론 이전에도 행정관이 직을 상실한 경우는 있었지만, 현직 행정관이 세력을 동원한 투표로 다른 행정관을 쫓아낸 것은 전례가 없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결국 토지개혁법은 통과되었으나, 와츠는 그 경제적 효과보다 정치적 변화가 더 중요했다고 본다. 사실 국유지의 대토지 점유자가 입은 피해는 그리 크진 않았고, 토지 재분배의 수혜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원로원과 민회의 균형 대신, 평민회의 우위를 주장하며 혼합정체의 불문율을 무너뜨렸다. 정책의 실질적 효과보다는, 반귀족 정서를 자극하는 정치를 통해 자신이 권력을 독점하는 게 중요했던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이 중재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주창했다. 익명투표를 통해 ‘대중의 의지’를 표현하는 평민회가 로마의 입법과 정책을 전적으로 결정하는 지도기관이 되어야 하며, 평민회가 통과시키려는 법안을 원로원 의원과 협의해 저지하려는 호민관은 평민회의 투표로 해임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호민관 임기 동안 지지자 동원을 통해 상당한 권력을 누렸다. 가령 페르가뭄 왕이 로마 시민에게 남긴 유산의 관리를 원래는 원로원이 맡아야 했으나, 평민회의 투표를 통해 자신이 관리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런 식의 행태 탓에, 그는 임기 종료 후 보복을 우려해 연임을 시도한다. 그는 반대자들에 맞서 지지자들을 동원해 선거 투표장을 점거한다. 이에 원로원에서 진압 여부를 논했으나 반대 의견으로 무산됐는데, 진압을 강력히 주장했던 대사제가 독단적으로 반대파 군중을 투표장으로 이끈다. 패싸움이 벌어져 티베리우스를 포함한 300여 명이 사망한다. 기원전 132년의 이 유혈사태(소동)는 이후 수백 년 내전의 출발점이었다.

 

사태의 일단락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불안감을 느낀 원로원은 토지개혁법을 유지시킨다. 그러나 10년 뒤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기원전 154~121년)가 더 급진적인 정책을 내걸고 호민관에 당선되며 갈등은 재연된다. 그는 형의 토지개혁에 더해, 국가가 곡물 보조금을 지급하고, 카르타고에 식민지를 세워 빈민에게 토지를 준다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초기에는 인기를 누렸으나, 이후 빈민에게 카르타고 식민지 건설보다 더 매력적인 정책을 내세우는 경쟁자들에게 밀려 호민관 연임에 실패한다.

 

가이우스는 퇴임 이후 호민관이 열고 집정관이 참석한, 카르타고 식민지 건설 정책 폐지 토론회에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가서 참석자들을 폭행했다. 집정관의 수행원을 비롯한 다수가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10년 전의 기억으로 공포에 질린 원로원은, 이번에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진압 권고를 집정관에게 내린다. 이는 재판 없는 즉결 처형까지 모든 수단의 사용을 허용했다. 결국 가이우스와 그 지지자 약 3천 명이 살해당한다.

 

와츠는 원로원이 시민에 대한 폭력 사용을 이례적으로 승인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이를 단순히 개혁가에 대한 ‘탄압’으로만 해석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귀족이 혼합정체의 균형과 견제를 유지하는 불문율을 옹호했던 것은 단지 권력과 재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깨졌을 때 발생할 미증유의 피해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경쟁에서 지지자의 동원과 협박, 폭력이 수단으로 이미 등장해 버린 이상, 어떤 작은 충돌도 극단적 대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와츠는 그라쿠스 형제가 (원로원에 의해 희생당했다기보다) 자신들이 열어젖힌 새로운 정치 세계의 첫 희생자였다고 평가한다.

 

4) 인민주의자 집단 마리우스파의 내란:

평민회에 의한 집정관의 군대 지휘권 이전, 군대의 사병화, 원로원 의원 축출, 경쟁자 살해

그라쿠스 형제는 관직을 둘러싼 정치적 경쟁에서 새로운 경로를 제시했다. 기존 경로를 따르지 못하는 평민이나 정치 경쟁에서 밀린 귀족이, 민회에서 기득권을 공격하고 대중의 지지를 동원해 권력을 잡는 방식이다. 이 모델을 따르는 인민주의자들은 점차 집단을 이루었고, 그 중심에 마리우스(기원전 157~86년)가 있었다.

 

마리우스는 원로원 의원을 배출한 적 없는 평민 가문 출신으로, 당시 강력했던 귀족 메텔루스 가문의 후원으로 호민관직에 당선됐으나 성과 없이 1년 만에 물러났다. 그러자 그는 후원자와의 관계를 이용해 오히려 귀족의 무능과 부패를 공격하는 전략을 구상한다.

 

그는 메텔루스 가문의 집정관이 누미디아로 출정할 때 부관으로 참전한다. 당시 혈통귀족 메텔루스 가문이 요직을 역임하며 부유한 평민의 불만이 날로 높아졌고, 메텔루스가 전황을 상당히 개선시켰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불신이 퍼진 상황이었다. 마리우스는 부관으로서 보기에 메텔루스는 귀족적 오만에 사로잡혀 전쟁에서 굼뜨다며 규탄하고, 한 번도 귀족이었던 적이 없는 “신인”(新人, homo novus)만이 신속히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 주장하며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다. 이에 메텔루스가 ‘요즘은 무자격 신인이 관직을 얻기 어려운 시대’라고 마리우스에게 충고했는데, 마리우스는 이 발언을 활용해 부유한 평민의 불만에 불을 붙였다. 귀족의 오만함, 부패, ‘자격’을 깨는 신인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전략이 더욱 먹히며,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당선된다. 그는 자신의 당선을 평민들이 “귀족을 정복하여 획득한 전리품”이라 규정했다. (그런데 이 말은 수사를 넘어, 제1차 내전에서 실현될 것이다.)

 

마리우스의 등장은 인민주의자가 호민관 정치에 머무르지 않고,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까지 장악하는 단계로 나아갔음을 의미했다. 그를 중심으로 원로원에 맞서는 인민주의자들이 결집한다. 본래 지휘관들에게 전선을 배정하는 것은 원로원의 권한이나, 마리우스파 호민관이 성문법상 권한을 통해 원로원을 무시하고 평민회에서 메텔루스의 누미디아 전선 지휘권을 마리우스로 넘기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평민의 ‘불만’에 근거한 투표로, 결격 사유가 없는 현직 집정관의 권한을 박탈해 반대편 집정관에 넘긴 것이다.

 

메텔루스에 의해 전황이 이미 상당히 개선된 상황에서, 마리우스는 전쟁과 지휘권을 사병(私兵)을 육성하는 데 이용한다. 그는 전례를 깨고 입대가 불가능한 무산층 빈민을 병사로 모집했다. 빈민층이 마리우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인 데다가, 군 복무로 얻을 이익이 가장 큰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우스는 이들이 자유롭게 약탈하게 해, 공화국이 아니라 이들을 발탁하고 보상을 약속한 자신 개인에게 충성하는 집단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들 군인을 이용한 협박을 통해, 정치적 경쟁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마리우스는 연이은 전쟁 승리와 대중적 지지, 관직에 포진한 인민주의자들의 조력으로 전례 없는 집정관 5연임에 도전해 당선된다. 이에 마리우스파는 자신에 반대하는 원로원을 굴복시킬 계획을 세운다.

 

마리우스파 호민관 사투르니누스는 로마 빈민에게 나눠주는 빵의 가격을 대폭 인하하고, 각지에 식민도시들을 건설하고, 이탈리아 각지의 토지를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에게 분배하자는 법안을 평민회에 부친다. 이는 당연히 통과될 것이므로, 그는 법안에 ‘모든 원로원 의원이 5일 내에 이 법안의 준수 서약을 해야 하며, 이를 거부할 시 처벌한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원로원 의원이 법을 어기면 직을 상실하고 심지어 로마에서 추방될 수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법이 통과되며 원로원 의원들은 전례 없는 서약을 강요받았는데, 전직 집정관 메텔루스가 정치적 관행과 원칙을 들어 서약을 거부한다. 사투르니누스가 그를 법 위반으로 평민회에 기소하자, 그는 외국으로 망명한다. (이는 뒤에서 볼, 민회 재판을 이용한 ‘사법의 정치화’의 선례였다.)

 

원로원까지 굴복시킨 마리우스파는 법무관 글라우키아를 차기 집정관으로 세우려다가 선을 넘게 된다. 투표에서 예상외로 경쟁자의 당선이 유력해지자, 이에 호민관 사투르니누스가 마리우스파 사병을 이끌고 시내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살해해 버린 것이다. 이는 행정관 선거에서 경쟁자를 살해한 최초의 사례로, 그전까지 민회 표결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폭력이 정치적 경쟁자의 제거로 범위가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 이에 경쟁자의 지지자들도 맞서며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원로원은 이를 공화정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사투르니누스·글라우키아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하며, 집정관 마리우스에게 진압을 명령한다. 마리우스는 진압을 거부하고 체제에 반역해 집정관직에서 쫓겨날 명분을 주는 것과, 자신의 조력자인 인민주의자들을 공격하며 지금껏 구축한 빈민을 대변하는 투사의 이미지를 무너뜨리는 것 양쪽 다 피하려 했다. 둘의 항복을 권유하고 반대파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의 신변을 재판 때까지 보호해, 재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나 항복 후 호송 중 반대파의 습격으로 둘이 사망하며, 마리우스는 한동안 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한다.

 

5) 마리우스 대 술라의 제1차 내전:

로마 시민의 과도한 특권 문제, 사병을 동원해 정치적 경쟁자와 그 지지자를 처형하고 약탈하는 ‘청산’의 반복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 도시들은 이미 경제적·사회적으로 로마와 통합되어 있었지만 시민권은 부여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간 인민주의적 정책으로 로마 시민권이 토지 분배, 면세, 곡물 보조금 등과 결부된 엄청난 특권이 되면서, 이들 동맹시는 시민권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로마는 군사적으로 이를 진압했지만, 정치가들은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며 자신의 새로운 지지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이 과정에서 로마 시민권은 점점 정치적 동원의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반란의 규모가 커, 전쟁 경험이 풍부한 전직 집정관 마리우스도 지휘관으로 투입된다. 그는 전과를 올리며 명성을 다소 회복했다. 그러나 반란 진압에서 가장 활약한 장군은 술라(기원전 138년~78년)였다. 공교롭게도 술라는 과거 마리우스 휘하에서 부관으로 복무했던 자다. 그 경험으로 술라는 공화국 군대를 사병화하는 법, 정치에서 사병을 유용하게 쓰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마리우스파에 붙지는 않았다.) 술라는 동맹시 반란 진압의 공으로 집정관에 당선됐는데, ‘운 좋게도’ 곧바로 소아시아 전쟁이 발발한다. 그는 이 전쟁이 엄청난 부와 권력을 안길 것이고, 자신이 지휘할 대규모 병력을 사병화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재기를 노리던 마리우스도 그 전쟁이 엄청난 기회임을 알았다. 그는 호민관 술키피우스와 결탁해, 평민회에서 술라의 소아시아 전쟁 지휘권을 자신에게 넘기는 법을 통과시켰다. (과거 메텔루스의 지휘권을 빼앗았듯 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때의 마리우스는 현직 집정관조차 아니었다.) 이것이 관습상 말도 안 되는 행태라는 점을 잘 알았던 마리우스와 술키피우스는 사병을 동원해 로마시를 장악하고, 집정관 술라와 그의 동료들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이런 행위는 공화정에 대한 반란, 즉 ‘내란’에 다름없었다.

 

그런데 로마시에서 도망쳐 나온 술라도 전례 없는 선택을 한다. 그는 군대를 찾아가, ‘전리품’ 분배를 약속하며 자신을 따르게 했다. 그리고 로마시로 진군해 무력으로 다시 도시를 점령한다. 공화국 군대가 로마시를 공격한 것은 공화정 이래 최초의 사건으로, 마리우스파의 내란이 이제 마리우스 대 술라의 내전으로 진화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시를 장악하고 권력을 되찾은 술라는 술키피우스를 비롯한 정적들을 처형하고 (마리우스는 도망침)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민회의 선거를 통제해 자신의 심복들을 행정관직에 앉힌 뒤, 임기 내에 치러 내야만 하는 소아시아 원정을 급히 떠난다.

 

이에 도망친 마리우스가 술라와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 마리우스는 술라가 집정관에 앉힌 킨나와 내통하는 데 성공했고, 킨나는 이탈리아 반도 내 아직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한 곳들에 시민권을 주거나 약속하면서 사병을 조직했다. 마리우스는 이들을 이끌고 로마시로 진군해 재점령하고, 반대파를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해 사병과 지지자에게 분배했다. 다만 마리우스는 얼마 뒤 사망하고, 킨나가 마리우스파의 세력을 승계받는다.

 

술라는 소아시아와 그리스에서 대규모 약탈을 자행하며 수만 명의 공화국 군대를 사병화하는 데 집중했다. 몇 년 뒤, 그는 이들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킨나의 군대를 부수고 로마시를 재점령한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을 포함해 수천 명 규모의 처형을 단행하고, 몰수한 재산을 자신의 군대와 지지자 수천 명에게 분배했다.

 

공화정 건설 이래 시민 간 폭력이 처음 발생하기까지는 오래 걸렸지만, 한 번 발생하자 수위는 빠르게 높아졌다. 처음에는 그라쿠스 형제 시기 민회 표결을 둘러싼 소동에서 시작해, 이후 마리우스파에 의한 정치적 경쟁자의 살해, 심지어 현직 행정관의 권한 박탈과 살해(시도)로 나아갔고, 제1차 내전을 거치며 상대편 지지자 전반에 대한 집단적 살해와 약탈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인민주의적 정책을 통해 경제가 정치에 종속된 구조가 있었다. 로마 시민에게 더 이상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삶은 매력적인 선택이 아니게 되었다. 인민주의적 정책, 즉 국가의 정복과 수탈에 기반한 재정으로 제공되는 토지, 보조금, 각종 혜택에 의존하거나, 나아가 직접 전쟁과 약탈에 참여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을 거치며, 이 약탈의 대상은 외국에서 로마 시민 내부로 확대됐다. 이제 정치적 승리에 따라 반대파 시민의 재산을 몰수하고 분배하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 되었고, 시민들은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정치가의 편에 서서 싸우는 것이 가장 확실한 부의 획득 경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과 생산에 기반한 삶은 점점 더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이게 됐다.

 

제1차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는 이러한 변화를 제도화했다. 그는 내전 승리 직후만이 아니라, 이후 국정 운영에서도 국가권력을 활용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활용했다. 이로써 이후 정치는 공화국 내부를 향한 약탈과 재분배의 수단으로 고착된다.

 

6) 술라의 과두정:

클렙토크라시, 종신 독재, 민회와 원로원의 무력화, 정치의 사법화

술라는 마리우스의 방식에서 많은 것을 학습했지만, 인민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민회의 ‘익명의 다수’에 의존하지 않았다. 소아시아 전쟁과 내전을 통해 형성된 수만의 사병과 지지자라는 직접적 권력 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라는 국가권력을 활용해 자신의 파벌에만 이익을 집중시키고, 나머지 시민을 억압하는 과두정을 구축한다.

 

경제적으로 그는 기존 인민주의 정책을 역전시켰다. 로마 시민, 특히 빈민에게 제공되던 각종 보조와 특혜를 축소하거나 폐지했고, 동맹시 등에 확대되었던 시민권도 제한하거나 박탈했다. 이에 대한 저항이 꾸준히 일어났지만 진압되었고, 반대파의 재산은 몰수되어 지지자들에게 분배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화정이 시민의 생명·자유·재산을 보호한다는 원칙은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자신의 사익을 보장하는 술라에게만 충성하는 자들이 국가권력을 통해 다수 시민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약탈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는 국가권력을 사익 추구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클렙토크라시’(kleptocracy, 도둑정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배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술라는 우선 종신 독재관을 자임한다. 원래 독재관은 공화국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최대 6개월 동안 한시적으로 임명되는 비상직이다. 행정관의 대권(임페리움)이 원로원·민회와의 균형 속에서 행사되는 것과 달리, 독재관의 비상대권 행사에는 제약이 없다. 그러나 이는 먼 옛날 카르타고와의 전쟁 이후 임명된 적이 없었다. 술라는 로마가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다고 주장하며 ‘공화국을 정상 상태로 복구할 때까지’, 즉 기한을 명시하지 않고, 스스로 독재관임을 선포했다.

 

정체 측면에서 그는 민회, 특히 평민회·호민관을 약화시켰다. 백인조회의 집정관 선거는 유지했지만 술라가 승인한 후보자만이 나올 수 있었다. 호민관의 입법권을 박탈하고 거부권을 제한했으며, 호민관 경력을 가진 자는 다른 행정관직이 될 수 없게 했다. 이는 인민주의자들이 민회를 기반으로 권력을 획득하는 통로를 봉쇄하려는 조치였다. 또한 행정관직이 될 수 있는 조건이나 승진 순서를 엄격히 규정해, 정치 엘리트의 순환을 제한하고 인사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원로원 역시 무력화되었다. 술라는 기존 300명인 원로원에 자신의 지지자 300명을 추가로 임명했는데, 이들은 행정관 경력이 없는 부유한 평민들, 즉 무자격자였다. 이들이 난입한 결과 원로원은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심의기구가 아니라, 술라의 의사를 추인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마지막으로 술라는 형사사법 체계를 재편해 정치적 통제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는 서로 다른 범죄를 담당하는 여러 상설 형사법정을 정비·확대했는데, 이는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기존 사법 구조의 성격을 바꾸는 조치였다.

 

기존에는 형사재판이 크게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민회 재판’(Iudicium populi, 직역하면 ‘인민재판’)이다. 이는 신분투쟁 이후 시민을 행정관의 자의적 처벌로부터 보호하고, 공동체에 대한 범죄(즉 형사)를 시민 전체가 판단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행정관(법무관)의 재판에 불만을 가진 시민이 민회에 항소를 제기하면, 호민관(평민회)이나 조영관(트리부스회)이 기소 여부를 결정하고, 민회의 표결로 판결하는 방식이었다. 다른 하나는 ‘상설 법정’(Quaestio Perpetua)으로, 부패 등 특정 범죄를 더 전문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법무관이 주재(판결)하나, 다양한 계층의 시민이 참여하는 배심제를 도입해 견제 구조를 가졌다.

 

술라의 형사사법 체계 개혁은 어느 정도는 인민주의자들에 의한 변질에 대응하는 면이 있었다. 민회 재판의 경우, 과거 마리우스파가 원로원 의원 메텔루스를 축출했을 때처럼, 인민주의자가 호민관의 입법권을 이용해 정치적 목적의 법을 만들고, 민회 재판을 통해 기소·판결하는 식으로 변질시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술라가 호민관·평민회를 대폭 약화시키며 상설 법정을 강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강화된 상설 법정의 경우, 배심제에 대한 통제가 문제였다. 과거에 인민주의자가 배심원 구성에서 원로원 의원을 배제했는데, 술라는 반대로 평민을 배제하고 원로원 의원으로만 제한했다. 상술했듯 술라가 원로원 자체를 자신의 지지자들로 재편했기에, 배심원단은 더 이상 독립적 판단 주체일 수 없었다. 여기에 법무관 역시 술라의 영향 아래 있었으므로, 기소·심리·판결의 전 과정이 사실상 하나의 정치권력 아래 놓였다.

 

술라는 형법 자체도 강화했다. 특히 무장 집단이나 폭력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강화했는데, 이는 일단은 인민주의자들에 맞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상술한 제도적 변화로 인해 실제로는 술라 지지자들의 불법 행위는 묵인되고, 반대파의 행위는 강력히 처벌되었다.

 

정리하면, 술라 시대에는 전과 같은 공개적인 권력 경쟁과 폭력 충돌, 내전이 사라졌다. 대신 소규모 저항이 계속 일었고, 이를 진압하고 형법과 재판을 통해 처리하며, 국가가 몰수한 재산의 분배를 통해 술라 지지자들이 ‘합법적으로’ 부를 증대하는 체제가 형성됐다. 법이 정치로부터 독립해 모든 시민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못했고, 정치권력이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반대파를 제거하는 도구로 전환됐다.

 

7) 폼페이우스 대 카이사르의 제2차 내전까지:

카이사르-클로디우스에 의한 정치의 마비, ‘거리의 정치’와 사법의 정치화

독재자 술라가 사망하자, 억압에 의해 유지되던 질서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시기 로마 정치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세 인물로 수렴되는데, 『영국헌정사』는 이들을 각각 군사정(stratocracy), 금권정(plutocracy), 인민정(ochlocracy)의 대표로 평가한다.

 

폼페이우스는 술라 진영에서 성장한 장군으로, 술라 사후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명성과 병력을 확보했다. 그는 호민관 권한을 복권시켜 그를 이용해 광범위한 지역의 군대 지휘권을 부여받아, 지중해와 소아시아 일대에서 대규모 정복을 수행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를 기반으로 사실상 자신의 독자적인 소왕국을 건설했다. 다만 그 권력에 만족해, 술라처럼 공화정의 ‘질서 회복’을 위해 로마시를 점령하고 독재관을 자임하진 않았다.

 

크라수스는 술라 시기 반대파 재산 몰수 과정을 관리한 사업가로 활동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로마의 제일 부자로, 군사적 역량보다는 재산과 인맥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사병과 후원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로마 내부 정치에서 중요한 축을 형성했다.

 

두 사람은 공동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술라의 개혁 일부를 되돌린다. 특히 호민관 권한이 복원되며 인민주의 정치의 통로가 다시 열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인민주의적 지향에서 그랬다기보다는, 권력 확보를 위해 호민관을 활용하려는 목적이 컸다. 상술했듯 폼페이우스는 호민관을 이용해 원로원의 반대를 꺾고 광범위한 군대 지휘권을 얻었다.

 

군대를 통제하는 폼페이우스가 주로 로마 외부에서 활동하며, 로마 내부에서는 정치적 불안정이 확대된다. 대표적인 사건이 카틸리나의 반란(기원전 63년)이었다. 그는 귀족 출신으로 술라 시대 부패한 지배계급의 일원이었다. 술라 사후의 혼란기에 그는 금권주의자 크라수스와 인민주의자 카이사르 양쪽의 후원을 받아, 유력자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금권주의적 방식으로 집정관 선거 운동을 펼쳤으나 키케로에게 빈번히 패배한다. 키케로가 나오지 않은 세 번째 도전에서 카틸리나는 인민주의로 노선을 틀어, 빈민을 옹호하며 ‘모든 부채의 전면 폐지’라는 공약을 내건다. 그러나 키케로가 제기한 부패 문제, 키케로가 지지한 후보의 우세로 가망이 없자, 로마시 외부의 몰락한 술라 파벌 세력과 빈민을 선동해 무장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집정관 키케로가 반란을 진압했다.

 

키케로(기원전 106~43년)는 당시로서는 아주 특이한, 즉 그라쿠스 형제 등장 이전의 로마 공화정의 정신을 구현한 듯한 인물이었다. 그는 상술한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다. 부유한 평민 가문 출신인 그는, 청년기에는 학문적 성과와 웅변 실력으로 명성을 얻었고, 술라 시대에는 술라 파벌에 의해 피해를 입은 시민을 변호하는 법률가로 활동했다. 이후 행정관직을 거치며 정치적 능력을 입증했다. 집정관 선거에서는 인민주의자 호민관이 주장하는 토지개혁법과 카틸리나가 대표하는 금권주의 양자를 비판하며 당선됐다. 집정관으로서, 그리고 퇴임 후에도 그는 원로원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키케로의 집정관 퇴임 후 몇 년 뒤,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가 집정관에 당선된다. 그는 키케로가 비판한 모든 경향을 통합했다는 점에서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나, 그 가문은 마리우스와 킨나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결국 술라의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특유의 ‘인맥 관리’ 능력으로, 술라 시대에 술라 파벌이 아님에도 정계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술라 사후, 그는 술라 파벌이 약해지자 공개적으로 그간 금기시됐던 마리우스의 업적을 찬양하며, 자신이 인민주의자의 후계자임을 선언한다. 그는 빈민의 지지를 얻으면서도, 크라수스가 대표하는 금권주의 세력과 연대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차츰 크라수스의 세력은 카이사르에게로 흡수된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실질적 권력자라 할 수 있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와 협상해, 서로가 서로의 권력 강화를 지지한다는 삼두정치를 성립시킨다. 집정관에 당선된 그는, 원로원을 무시하고 호민관을 통해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대신 갈리아 전선 지휘권을 부여받는 것을 폼페이우스로부터 인정받았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술라를 따라, 갈리아에서 군대를 사병화하는 데 성공한다. 그 사이 로마에서는 카이사르가 심은 인민주의자 클로디우스가 호민관으로서 인기를 끌며, 키케로가 대표하는 원로원을 공격했다. (클로디우스는 혈통귀족으로 호민관이 될 수 없어 평민에게로 입양을 시도했는데, 키케로의 반대에 맞서 이를 승인한 것이 카이사르였다.)

 

클로디우스는 로마시에서 밀을 무료로 배급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에 이탈리아 전역에서 빈민이 로마시로 쏟아져 들어왔다. 클로디우스는 이들을 조직해 시내에서 정치폭력을 행사했다. 민회의 호민관이자 동시에 거리 집회의 지도자로 행동한 것이다. 이들의 폭력시위 탓에 기원전 50년대 후반부 내내 로마의 정치생활이 마비됐다. 심지어 집정관 선거가 치러지지 못한 해도 있었다. 더 중요한 사례는 사법을 마비시킨 것이었다. 가령 키케로에 적대적인 카이사르파 인사가 범죄로 기소당하자, 클로디우스는 민회를 소집해 군중을 이끌고 ‘법무관의 의자를 뒤엎고 배심원의 투표 항아리를 부쉈다.’ 정치적 실력 행사로 재판 결과를 좌우하려는 ‘사법의 정치화’로 볼 수 있다. 그 정점은 민회에서 키케로를 겨냥한 법을 만들어 그를 축출한 것이다.

 

카이사르와 연계된 클로디우스가 로마시에서 일으킨 대혼란과 키케로의 축출 탓에, 원로원은 가장 강한 군사 세력인 폼페이우스에게 ‘질서 회복’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제 카이사르도 상당한 사병을 갖춘 상태였다. 결국 폼페이우스 대 카이사르의 제2차 내전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하며, 공화정은 사실상 붕괴하고 ‘인민주의적 참주정’이 등장한다.

 

8) 인민주의적 참주정:

민주정이 타락한 인민정과 군주정이 타락한 참주정의 결합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인민주의를 토대로 술라의 독재를 결합한 새로운 통치 방식을 확립했다. 그는 인민주의적 정책을 유지하며 민회를 지지 기반으로 삼는 동시에, 스스로를 종신 독재관으로 선포해 권력을 집중시켰다. 민회는 형식적으로 존속했지만, 선거와 관직 임명은 독재관의 통제 아래 들어갔고, 실질적으로는 그의 결정을 추인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카이사르의 독재가 술라와 달랐던 점은, 반대파(폼페이우스파)에 대한 대규모 숙청과 약탈 대신 관용을 택하고, 동시에 인민주의적 정책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에 술라 때와 달리, 민회는 카이사르의 거수기를 자처하게 된다. 한편, 그는 원로원을 1,000명까지 대폭 확대해 자신의 지지자로 채움으로써 완전히 무력화했다. 카이사르는 절대권력을 장악하고 통치하다 결국 암살된다.

 

이후 권력은 다시 분열되었고, 제3차 내전을 거쳐 아우구스투스가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이 과정에서 키케로는 로마에 돌아와 폴리비오스를 강론하며 혼합정체의 회복을 주창했으나, 이미 무너진 구조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만들어 놓은 정체를 완성한다. 그는 스스로를 ‘제1시민’(princeps)이라 칭하며 공화정의 외형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군사력과 재정을 장악한 단일 권력으로서 황제 지위를 확립했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인 군주정과 달리, 인민의 지지와 군대의 충성을 동시에 기반으로 삼았다.

 

혼합정체론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체제를 ‘인민주의적 참주정’이라 표현할 수 있다. 핵심은 황위의 승계 과정이다. 황위는 혈연에 따라 세습되지 않았고, 황제가 후계자를 정해 양자 결연의 방식으로 승계됐다. 후계자 자리를 놓고 정치가들이 경쟁을 펼쳤는데, 기준은 인민의 지지였다. 즉 권력을 독점하는 군주인 참주의 선정에 로마 시민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공화정 말기 정치적 경쟁에서 나타났던 경향들은 제국 성립 이후에도 계속 존재했다. 다만,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속주화하는 데 성공해 막대한 재정 증가를 바탕으로 압도적 지지와 군사력을 유지하며, 겉으로는 내전이 종결되고 안정과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불안정했다. 황제의 권력이 여전히 정복사업과 복지정책에 의존했고, 따라서 후계자로 지목받지 못한 누군가가 이집트보다 더 큰 수익을 주는 정복사업에 성공한다면, 혹은 다른 곳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군대를 사병화해 황제의 속주를 빼앗는다면, 인민의 지지를 확보해 황위를 찬탈하는 내전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내전이 다시 일어나게 된다. 인민주의적 참주정은 끊임없는 내전에서 승리한 장군이 황제에 오르는 ‘군인황제 시대’의 대혼란으로 귀결된다.

 

9) 내전의 원인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종결시킬 수 있는가

『영국헌정사』의 ‘내전이란 무엇인가’는 지금껏 살펴본 데이비드 와츠의 『독재의 탄생: 로마 공화정의 몰락』 외에도, 내전에 관한 최신의 연구들을 종합한다. 그 저작은 데이비드 아미티지의 『내전: 관념 속 역사』(2017; 국역: 글항아리, 2024), 모니카 토프트의 『내전(Civil Wars)』(Oxford University Press, 2024), 바버라 월터의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2022; 국역: 열린책들, 2025)다.

 

먼저, 동료 시민 간 전쟁으로서 내전이 3단계를 걸쳐 진화한다는 아미티지의 설명에 주목할 수 있다. 1단계 소동, 2단계 반란(내란)선동 및 반란(내란)을 거쳐, 3단계 내전으로 진화한다. 로마사로 설명하면, 그라쿠스 형제가 소동을, 마리우스파가 반란(내란)을 일으켰고, 1~3차 내전을 거쳐 아우구스투스의 ‘인민주의적 참주정’으로 귀결됐다. 이는 내전의 종결이 아닌 ‘지속’이었다. 잠깐의 평화 뒤에 내전이 상시화됐기 때문이다.

 

세 책에서 공통으로 지적하는 내전의 원인이 중요하다.

 

첫째, 잡종정체(anocracy 혹은 hybrid regime)다. 이는 민주정과 독재정(참주정·과두정)의 ‘중간’에 있는 정체를 뜻한다. 이 ‘중간’은 혼합정체론의 ‘혼합’과 달리, 양쪽의 특징이 병렬적으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군주정·귀족정·민주정적 요소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한 연계가 아니라, 참주정·과두정의 특징인 1인·소수의 권력 독점과 민주정적 요소인 선거제가 함께 있는 것이다. 월터는 특히 탈냉전기에 독재정에서 민주정으로 이행하는 민주화 과정에서 완전히 넘어가지 못하고 중간에 머문 경우에서, 그리고 최근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이 민주정에서 독재정으로 퇴보하는(backsliding) 과정에서 잡종정체에 빠져 내전이 발생한다고 분석한다.

 

왜 그런가? 독재정의 경우 억압으로 내전을 차단할 수 있다. 물론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성공하기 쉽지 않다. 술라의 과두정을 생각하면 된다. 술라 시대는 전후 시기와 비교했을 때, 물론 근본적으로는 불안했지만 비교적 평화로웠다. 반대로 민주정의 경우 사회적 갈등을 양측의 투쟁이 아니라 제도적 타협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토프트나 월터가 말하는 ‘민주정’이란 순수한 민주정적 요소(선거제)라기보다는, 헌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잡종정체에서는 정치권력이 1인 혹은 소수에게 독점되는데, 이것이 선거제와 연결되면 선거가 그 권력을 둘러싼 사생결단의 투쟁으로 변질되기 쉽다. 로마 공화정 말기와 제국의 ‘인민주의적 참주정’을 생각하면 된다. 월터는 현대 내전의 사례로부터, 잡종정체에서 내전이 발발할 확률이 독재정에 비해 3배, 민주정에 비해 6배 정도라는 통계를 제시한다.

 

둘째, ‘분노 사업가’다. 연구들은 잡종정체만으로 내전이 발발하진 않는다고 분석한다. 선거가 실제로 독점적 권력을 둘러싼 사생결단의 투쟁으로 변질되려면, 시민들을 화해할 수 없는 두 집단으로 구분하는 ‘내분’(faction), ‘동일성(identity) 갈등’이 있어야 한다. 이 동일성은 종족, 종교, 지역, 계급 등 여러 차원이 있을 수 있다. 월터는 동일성 갈등이 존재할 경우 내전 가능성이 2배, 여러 차원의 동일성 갈등이 결합될 경우 내전 가능성이 12배가 된다는 통계를 제시한다.

 

월터는 선거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동일성 갈등을 부추기고 활용하는 ‘정치 사업가·투기꾼’(political entreprenuer)에 주목한다. 『영국헌정사』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피터 슬로터다이크의 『분노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2006, 국역: 이야기가있는집, 2017)에 나오는 ‘분노 사업’과 ‘분노 사업가’의 역사를 설명한다. 대표 사례는 프랑스혁명기에 스스로 ‘인민의 벗’을 자처한 마라인데, 그는 “나는 인민의 분노, 정의로운 분노를 안다”고 말한 바 있다. 관련하여, 『영국헌정사』는 마르크스의 ‘내전적 정치관’에도 주목한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교환에서] 평등한 권리(법)가 충돌하면 [투쟁과] 폭력(세력)이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문장에 주목하면서 말이다. 물론 『한국헌정사』에서 소개한 책 『나치 마인드』(2025; 국역: 책과함께, 2025)가 설명하듯, ‘분노 사업가’의 최고 사례는 나치일 것이다.

 

토프트는 내전이 일단 발생하면 그 후로는 계속 재발하는 ‘갈등의 함정’(conflict trap)에 갇힌다는 통계를 제시한다. 이미 내전이 발발한 상황에서 이를 종결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토프트는 이에 성공한 사례들로부터 동일성 갈등을 해소하는 게 관건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과거의 청산·극복을 넘어, 과거와의 ‘화해’와 ‘용서’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월터도 비슷한 결론을 제시하며, 임박한 내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 중요한 사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만델라 대통령(민주화 세력)과 데클레르크 전 대통령(독재 세력)의 협상을 든다. 만델라는 흑인 동포들의 원한과 분노를 활용해 무력 저항을 찬성하고, 내전을 통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완전히 장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백인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완전히 박탈하지 않았다. 그리고 치유와 통합, 평화를 설파했다. 한편, 데클레르크 역시 기존 권력을 고수할 수 있었지만 정치개혁과 협상을 받아들였다. 만약 어느 한쪽이라도 이러한 선택을 거부했다면 내전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앞서 영국 헌정사에서 봤던, 여당의 ‘관용’과 야당의 ‘자제’가 그 경로를 차단한 것이다.

 

영국 헌정사에서 17세기 내전을 종결시킨 과정에서도 명예혁명 이전에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타협과 화해를 이룬 ‘면책과 망각에 관한 일반법’이 있었다. 만약 이때 화해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이후 명예혁명으로 인한 혼합정체의 완성도 없었을 것이다. 즉 내전을 어떻게 종결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이러하다. 우선 정치문화 측면에서 분노 사업가에 맞서 ‘동일성 갈등’을 화해시켜야 하고, 나아가 정체 측면에서 ‘잡종정체’를 혼합정체로 개혁해야 한다.

 

 

4. 소결: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로마 공화정의 붕괴에서 무엇을 배웠나?

 

2장에서 영국이 로마 공화정의 고전적 혼합정체를 모방하다가 명예혁명을 통해 현대적 혼합정체로 나아간 과정을 봤다. 이는 18세기 내각제와 19세기 의원내각제에 적합한 정치문화로 뒷받침됐다. 또한, 향상 측면에서 16세기 신사귀족이 형성되고, 18세기 능력귀족이 형성되며 19세기 중간계급·노동자계급 상층까지 범위가 확대된 과정을 살펴봤다. 4장에서는 소유 측면도 함께 보며, 17~18세기 자유주의자와 공화주의자의 논쟁이 무엇이었는지, 자유주의자는 로마 공화정의 쇠망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소유, 헌정, 향상 측면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소유: 개인적 소유의 의미

로마 공화정 붕괴의 핵심 요인 중 하나는, 국가의 정복활동과 복지정책에 로마 시민이 의존하게 되면서 시민권 자체가 과도한 특권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식민지로부터의 수탈에 기반한 로마 봉건제의 경제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17세기에 로크가 ‘노동에 기초한 개인적 소유’를 제기하고, 중농주의자와 스미스가 중상주의자가 주장한 식민지 수탈에 맞서 농업과 제조업을 옹호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개인이 오직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야만, 타인을 약탈하려는 전쟁의 유인을 줄이고, 헌정 측면에서도 권력 집중과 독재의 출현을 억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후 타인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자본주의적 소유가 등장하며 노동자의 개인적 소유가 보장되지 못한다.)

 

반면 공화주의자들은 로마 공화정에 대한 평가에서, 그리고 절대군주정에 맞서는 당대의 과제에서, 자유주의자의 ‘개인적 소유’ 대신 로마 공화정 초기의 ‘공동체주의’ 전통을 이상화하여 대안으로 주장한다. 공화주의는 로마 공화정을 팽창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2단계론을 제시하며, 앞 시기에서는 왕정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공동체의 소유(공익)와 자유를 위해 함께 싸웠고, 특히 귀족이 빈민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했다고 본다. 공화정의 붕괴는 귀족과 부유한 평민이 사익을 위해 정복전쟁을 확대하고 부와 권력을 독점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해결책은 초기 공화정으로의 회귀에 있다는 주장이다. (공화주의자 중에서도 극단적인 루소의 경우, 로마 공화정 초기를 넘어 ‘함께 사냥하고 싸우며 전리품을 나누는’ 원시공동체를 이상화하는 데까지 나간다.)

 

그런데 공화정 초기의 전쟁과 후기의 전쟁이 무 자르듯 구분되는 것인가가 문제다. 물론 전쟁의 규모와 성격이 변화했지만, 공화정 초기와 후기의 전쟁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카르타고가 로마를 멸망시킬 뻔했는데, 카르타고 원정을 안 떠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공화정은 단지 귀족의 부와 권력 독점으로만 무너진 게 아니었다. 공화정 후기의 조건에서 시민 공동체를 강조하며 귀족의 희생과 국가에 의한 부의 재분배를 주장한 인민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귀족에 의한 과두정 못지않게 공화정 붕괴의 핵심적인 한 축이었다. 마리우스가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약탈해 공동체의 재산을 늘리고 공동체 내부의 빈부격차 축소를 시도한 것을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이를 위해 공화주의자가 상찬하는 공화정 초기의 관습을 파괴한 것도, 단지 과두정의 결과로만 환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 노동하지 않으므로 ‘평등한’ 시민들의 공익•공공재산(공동체의 경제활동만 존재)에 기초한 ‘공화주의적 자유’와, 스스로의 노동에 기초한 개인의 소유 보장에 기초한 ‘자유주의적 자유’의 대립은, 일견 평등 대 불평등의 구도로 보인다. 하지만 역사적 경험을 보면, 전자는 공동체(국가)를 통한 힘과 약탈의 논리로 귀결된 반면, 후자가 오히려 평화를 통해 지속 가능한 평등의 조건을 형성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국가 재정의 통제권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선출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의회’에 두어 재정국가를 형성한 명예혁명의 조치가 매우 중요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헌정과 향상: ‘공포로부터의 자유’의 의미

공화주의자는 공동체 내 평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공동체주의가 전쟁의 논리로 비화하며 외부와의 대결만이 아니라 내전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문제를 로마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주의의 역사』가 설명한 자유주의 이념의 출발점인 ‘공포로부터의 자유’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겠다. 이는 ‘그 누구도’ 신체와 정신의 자유를 자의적으로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는 원리다. 중요한 것은 이 원리가 특정 계층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개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기준이라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헌정의 핵심 문제는 ‘누가 지배하느냐’가 아니라 ‘그 누구도 임의적으로 지배할 수 없도록 권력을 어떻게 제약할 것인가’로 전환된다. 이 점에서 공화주의가 말하는 ‘로마 시민의 통치’나 일반적인 인민주권 개념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설사 다수라 할지라도, 권력을 특정 주체에 긍정적으로 귀속시키는 발상 자체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와 제국에서, 그리고 영국 내전의 경험에서, 1인이든 소수든 다수든 권력을 독점하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영국 자유주의자들은 그런 역사로부터, 중요한 것은 누가 권력을 가지느냐가 아니라, 그 누구도 권력을 독점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이러한 원리는 역사적으로 고전적 혼합정체에서 현대적 혼합정체로 발전하며 점차 정교하게 구현되어 왔다. 특히 명예혁명을 통해 ‘법의 지배’와 이를 보장하는 ‘의회의 지배’를 확립한 게 중요했다.

 

특히 로마에서 그라쿠스 형제 이후 호민관이 성문법상 권한을 활용해 기존의 균형과 견제를 무시하고, 원로원이나 다른 행정관의 권한을 쥐락펴락했던 것에 주목할 수 있다. 이는 정치적 헌정주의 관점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법률이 아니라 혼합정체적 정치과정과 타협의 정치문화가 권력의 독점을 막고, ‘법의 지배’(법 앞의 평등)를 보장한다는 점을 말이다.

 

도덕과 향상의 측면에서, 로마 공화정에서 최대의 쟁점은 평민 특히 빈민의 ‘정의로운 분노’(프랑스혁명기 마라의 표현) 문제였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권력을 독점하려는 ‘분노 사업가’들의 행태였다. ‘정의의 분노’(righteous rage)에 관해서 『영국헌정사』는 조시 코언의 『분노 중독』(2024; 국역: 웅진지식하우스, 2025)을 참고한다. 이는 희생자를 표방하며 ‘정의’를 독점하는 상징적 폭력인 ‘정의의 분노’가 현실의 폭력인 복수를 낳는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는 공화주의가 말하는 ‘공동체를 위한 덕성’에 맞서 ‘공포로부터의 자유’에 기초한 ‘공감’(스미스)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자신의 신체와 정신이 침해당하는 공포로써, ‘그 누구의’ 신체와 정신이 침해되는 상황에도 같은 공포를 느끼는 게 도덕적 향상의 출발점이라는 통찰이다. 이는 ‘선’(善)이나 ‘정의’를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독점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보편성을 함의하며, 나아가 어떠한 ’응분의 정의’를 주장하는 정의론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자유주의적 도덕관은 앞서 본 바와 같이 내전의 종결 조건이 우선은 ‘화해’라는 점과도 맞닿아 있다. 영국에서 15세기·17세기 내전을 끝내고 화해와 타협의 정치문화를 쌓는 데 수백 년이 걸렸듯, 이는 매우 어려운 길이다. 하지만 내전의 역사는 이것만이 내전을 종결시키는 유일한 해법임을 확인시켜 준다. [다음 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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