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피폭자운동의 역사와 현황
피폭자 지원과 핵무기 철폐를 외친 70년의 투쟁
1. 들어가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계속되고 미국이 이란 지하 핵 시설을 폭격하는 등 국제정세가 갈수록 격랑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 가운데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80주년인 2025년에는, 세계 각지에서 핵무기의 위험성을 되새기고 각국 정부가 지금 바로 핵군축 논의를 개시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한국에서도 원폭피해자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에서 열린 ‘한국원폭피해자 2세 김형률 20주기 추모제’와 ‘2025 합천비핵·평화대회’, 민주노총이 주최한 ‘한국-일본 피폭자 증언대회’,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가 주최하고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한 한국 사회운동단체들이 후원한 ‘한·일 반핵평화운동 교류회’ 등 여러 행사가 열렸다. 원폭 80주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도 한국 활동가 50명 이상이 참가했다.
그러나 핵전쟁 가능성이 다시 도래하고 있음을 경고하는 세계 시민의 목소리는 아직 핵 경쟁에 돌입한 각국의 정책을 바꾸지 못했다. 올해 1월 미국 핵과학자회보(BAS)는 지구 종말시계를 다시 자정, 즉 인류 종말 쪽으로 4초 이동시켜, 역대 종말에 가장 가까운 ‘자정 85초 전’에 두었다. “러시아, 중국, 미국 등 주요국이 점점 더 공격적이고 적대적이며 민족주의적인 태도”를 보인 결과, 세계에 존재하는 핵무기의 90% 이상을 보유한 미국과 러시아의 전략 핵무기 수를 제한하기로 한 신전략무기감축조약(뉴 스타트, New START)이 2월 5일 만료되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핵실험 재개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의 핵탄두 수 증가, 핵보유국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분쟁, 2025년 6월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 핵시설 공습이 핵전쟁의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AI 기술의 오남용과 미국, 러시아, 중국에서 ‘민족주의적 독재’가 확산하는 것도 위기의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4월 27일부터 5월 22일까지 뉴욕 유엔(UN)본부에서는 NPT(핵무기비확산조약) 평가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1970년 NPT가 발효된 뒤 5년마다 조약의 이행 상황을 평가하고 국제 핵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평가회의가 개최되어 왔으나, 핵 경쟁이 부활하는 정세 속에서 NPT의 실효성도 점차 도전받고 있다. 최근 2번의 평가회의, 즉 2015년 9차 평가회의와 2022년 10차 평가회의(2020년에 열려야 했으나 코로나19로 연기)는 실질적인 합의를 채택하는 데 실패했다. 전자에서는 중동 비핵무기지대 설립과 관련된 이스라엘 핵 문제가 쟁점이었고, 후자는 같은 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핵발전소를 점령한 러시아가 최종 선언문 채택에 반대했다. 올해 11차 평가회의를 준비하는 과정도, 기존 NPT 평가회의의 주요 구도였던 핵 군축에 대한 핵보유국과 비핵보유국 간의 대립에 더해 국제 정세 변화에 따른 핵보유국 간의 긴장 격화로 순탄치 못하다.
이와 같이 녹록지 못한 현실에서, 핵무기가 낳는 참상의 산증인이자 지난 70여 년간 세계 반핵평화운동을 앞장서 이끌어 온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도 고령의 나이로 사라지고 있다. 냉전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 같았던 핵 군비경쟁이 완연히 부활한 지금, 새로운 반핵평화운동을 만들어 갈 결의를 다지며 한국과 일본의 피폭자운동이 걸어온 발자취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다양한 경로로 피폭된 피해자가 세상에 있지만, 이 글에서 다루는 ‘피폭자운동’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의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다. (직접 원자폭탄에 피폭당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한 ‘피폭자’에 비해 ‘원폭피해자’라는 용어가 좀 더 포괄적인 피해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두 용어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이 글의 목표는 약사(略史) 형식으로 흐름을 잡는 것이다. 먼저 1945년 원폭 투하 당시 피해 규모를 보고,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 피폭자운동의 역사를 살펴본다. 다음으로는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 피폭자의 존재를 알리고, 일본과 북한 간, 남북한 간 피폭자운동의 가교 역할을 한 재일조선인 피폭자운동을 검토한다. 일본과 재일조선인 피폭자운동이 해결하고자 한 북한 피폭자 문제를 본 뒤, 마지막으로 한국 피폭자운동의 역사를 볼 것이다.
필자의 역량과 지면의 한계로, 이 글에서 긴 세월 이어온 한일 피폭자운동의 역사를 온전히 다루기는 어렵다. 중요한 사건이나 쟁점이 글에 빠졌다면, 필자의 지식이 부족한 탓으로 이해를 바란다.
※ 202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80주년 발간 자료 목록
● 소책자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계로 - 절멸의 무기 핵무기에 반대한다』 (7월 29일)
● 《사회운동포커스》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연재)
①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사회진보연대 참가단이 가다! (8월 3일)
② 2025년, 세계 반핵평화운동의 토론과 모색 (8월 4일)
③ 피폭자의 경험을 미래로 계승하자 (8월 5일)
④ 최초의 피폭지 히로시마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말하다 (8월 7일)
⑤ 피폭자의 목소리가 모토야스강에서 세계로, 널리 흘러가길 바라며 (8월 11일)
⑥ 인류의 마지막 피폭지, 나가사키에서 (8월 12일)
⑦ “우리가 있어서 80년간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 나가사키 반핵평화운동가들의 이야기 (8월 14일)
⑧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들여다보기 (9월 1일)
⑨ 핵무기 없는 세계, 지금부터 우리가 만들자! (9월 18일)
● 《사회운동포커스》 지상중계
① 원폭 투하 80년, 한·일 피폭자와 연대하는 한·일 사회운동: 한국-일본 피폭자 증언대회 지상중계 (9월 16일)
② 한·일 반핵평화운동의 연대와 모색: 한·일 반핵평화운동 교류회 지상중계 (9월 19일)
● 《계간 사회진보연대》 기사
① 사회진보연대의 반핵평화운동과 한일연대: 1998~2025년 (2025년 여름호)
② 2025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 보고와 평가 (2025년 가을호)
③ 원폭의 경험을 일본과 한국이 함께 기억하는 법: 2025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 (2025년 가을호)
2. 1945년 피폭 당시 상황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의 실전용 핵무기인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투하되었다. 사흘 후인 9일, 나가사키에도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실전에 사용된 핵무기인 원자폭탄 ‘팻 맨’이 떨어졌다. 원폭 투하 순간, 히로시마 인구의 30%인 7만 명 이상이 즉사했다고 알려졌다. 화상과 부상, 피폭 등으로 인한 사망자를 포함하면 그해 말까지 16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가사키에서도 3만 명 이상이 즉사하고 같은 해 말까지 7만 명 넘게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당시 미쓰비시 조선소 등 군수품 생산 시설이 집중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징용 노동자를 포함한 조선인이 많았다. 1945년 히로시마 인구 42만 명 가운데 14만 명이 조선인이었으며 대부분 경남 합천 출신이었고, 이 중 7만 명이 1945년 8월 6일 피폭된 것으로 알려졌다. 나가사키도 전체 인구 25만 명의 10% 정도가 조선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조선인 역시 대규모로 피폭되어, 비율로는 전체 피폭자의 10% 이상, 일본인이 아닌 피폭자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한국 사회 안에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한국은 일본에 이은 세계 ‘제2의 피폭국’인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1991년 조사에 따르면 원폭 투하로 인한 조선인 피폭자는 1945년 당시 사망자 약 5만 명, 생존자 5만 명으로 총 10만여 명(히로시마 7만 명, 나가사키 3만 명)으로 추산된다. 조선인 생존자의 80% 이상은 귀국했다. 주목할 점은 조선인 피폭자의 사망률은 57.1%로 전체 피폭자 사망률 33.7%보다 훨씬 높다는 점이다. 피난에 도움이 될 인맥이 없어 피폭지에 그대로 머무른 경우가 많았고, 우선적으로 구호·복구에 동원되어 간접 피폭을 더 많이 당하고, 피폭 후 의료와 구호를 일본인에 비해 받지 못한 탓이다.
히로시마 출신 만화가 나카자와 케이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하여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은 반핵만화 『맨발의 겐』에도 작가의 실제 조선인 이웃을 토대로 만든 캐릭터 ‘박승기 아저씨’가 나온다. 그는 아버지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구호 순위에서 밀려 아무 치료도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모습에 분노하고, ‘비국민’이라고 공격받으면서도, 전쟁에 반대하고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았던 겐의 가족을 돕는 선량한 인물로 그려진다.
3. 일본 피폭자운동의 약사
여기에서는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이하 ‘피단협’, 국제적으로는 일본어 발음에 따라 ‘히단쿄’로 불린다.) 웹사이트의 ‘50년의 발걸음’과 ‘일본피단협의 운동사’, ‘국제활동’ 문서에 소개된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일본 피폭자운동의 역사를 정리한다.
1) 일본 피폭자운동의 형성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까지 패전한 일본에 주둔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종전 직후 보도 지침을 내려 원폭에 관한 보도를 사실상 금지했다. 여기에 더해 피폭자에 대한 편견, 차별도 만연하다보니, 피폭자들은 10년 가까이 숨죽이며 지내야 했다.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9년 파리와 프라하에서 개최된 ‘평화옹호세계대회’를 계기로 일본에서도 같은 대회가 열리고 일본평화위원회(당시 이름은 ‘일본평화를지키는모임’)가 발족했다. 1950년 3월부터 시작된 ‘스톡홀름 호소문’ 국제서명운동은 ‘모든 핵무기 금지’를 요구하며 “어떤 나라든 핵무기를 선제 사용하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전범국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일본 시민 645만 명이 서명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피폭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상황은 1954년 3월 1일, 미국이 태평양 비키니 환초에서 수소폭탄 ‘캐슬 브라보’ 실험을 실시하며 바뀌었다. 제5후쿠류마루호를 비롯한 일본 어선들이 피폭되자, 도쿄 스기나미구 주민들이 5월부터 ‘수소폭탄 금지 서명운동’(스기나미 호소문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도 이를 계기로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원수폭금지서명운동 전국협의회가 발족하여 전 국민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이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 문제 해결과 핵무기 철폐를 요구하는 반핵운동으로 발전했다.
전국적인 서명운동과 원수폭 금지 운동의 열기는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195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에 맞춰 제1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히로시마에서 열렸다. 대회는 “원수폭이 금지되어야 진정으로 피폭자를 구할 수 있다”고 밝히고, 피폭자와의 연대를 원수폭금지운동의 ‘기초’로 정립했다. 이 대회에는 일본 46개 도도부현과 97개 전국 조직에서 2576명의 대표가 파견되었고, 대회 전체 참가자는 5천 명을 넘었다. 해외에서도 14개국 52명이 참석해 국제연대의 출발을 알렸다. 이후 매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열린 원수폭금지세계대회는, 세계 모든 핵무기의 철폐를 촉구하고 핵무기·핵실험 피해자와 연대할 것을 다짐하는 세계 반핵평화운동 세력이 결집하는 장으로 자리잡았다. 첫 세계대회와 같은 해 9월 19일, 일본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이하 ‘원수협’)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당시 원수폭금지서명운동에 참여한 일본 시민은 3259만 명을 돌파했다.
1956년,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인 8월 9일에 개막한 제2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는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의 전국 단체인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가 결성된 것이다. 피단협은 피폭자에 대한 국가 지원을 쟁취하여 ‘스스로를 구하고’, 핵무기를 철폐하여 ‘인류를 구하는’ 운동을 결의했다.
이후 피단협은 자신들이 직접 겪은 핵무기의 절멸적 파괴성과 비인도성을 세계에 증언하며,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세계 반핵평화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다음 절에서는 그동안의 중요한 사건과 쟁점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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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 결성 선언 “세계에 보내는 인사” 제2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 2일차인 1956년 8월 10일, 나가사키에서 (필자 발췌 번역)
원폭으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처음으로 이렇게 전국에서 모일 수 있었습니다. [원폭 투하의] 그 순간에 죽지 않았던 우리가 지금 드디어 일어나 모인 최초의 전국대회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흩어져 살아남은 우리들이, 더는 가만히 있지 않고 손을 잡고 일어서려고 모인 대회입니다. 우리가 일어설 용기를 얻은 것은 작년 8월의 세계대회 덕분입니다. (중략) 우리의 이 감사와 결의의 말은, 그 순간에 무참히 죽고, 또 그 뒤에 원폭증(原爆症)으로 잇달아 죽어 간 30만 명이 넘는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 남편이나 아내의 목소리를 대신한 말로서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중략)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체험을 통해 인류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결의를 맹세합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 목소리를 모아 전 세계에 소리 높여 호소합니다. 인류는 우리의 희생과 고난을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파괴와 사멸의 방향으로 갈 우려가 있는 원자력을 결정적으로 인류의 행복과 번영의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한 유일한 소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오히려 수소폭탄 경쟁 시대에 접어들어, 위력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의 천 배인 수소폭탄의 실험까지 행해지고 있습니다. “멈춰달라”는 우리의 피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수폭 실험은 냉연(冷然)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원폭 투하 이래로 방사능 병의 무서움에 직면해 온 우리, 올해에만 하더라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여러 사람이 방사능 병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곁에서 본 우리가 공기와 물을 방사능으로 오염하는 수폭 실험을 어떻게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힘 앞에서도 더는 가만히 있지 않을 각오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모일 수 있었던 오늘 이 모임의 열기 속에서 뭔가 ‘부활’이라고 불러야 할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수난과 부활이 새로운 원자력 시대에 인류의 생명과 행복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살아있어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와 결의를 피력하며, 이 대회로부터 전 세계에 보내는 인사를 드립니다. |
2) 일본 피폭자의 ‘스스로를 구하는’ 투쟁
1956년 제2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는 “원수폭 금지 운동의 촉진”과 함께 “원수폭 희생자의 국가 보상”을 슬로건으로 걸었다. 원폭후유증과 생활고로 고통 받는 피폭자들에게 이는 시급한 사안이었다. 이에 1957년 4월 최초의 원폭 관련 지원 법인 ‘원자폭탄 피폭자의 의료 등에 관한 법률’(원폭의료법)이 시행된다. 공식적인 피폭자의 기준을 규정하고 여기에 맞는 이들에게 ‘피폭자 건강수첩’(이하 ‘수첩’)을 발급한 뒤, 이들에게 의료비와 연 2회 건강검진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는 피폭자들이 겪는 각종 어려움을 보상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으며, 공식 피폭자로 인정되는 범위도 좁았다. 또한 법에 지원 대상의 국적 관련 조건은 없었지만, 지원 범위를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한정해 한국에 귀국한 피폭자들을 사실상 배제했다.
1957년 원폭의료법 시행 이후 일본 정부는 피폭자 건강수첩(원폭 수첩)을 소지한 피폭자만을 지원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수첩은 일본 정부가 설정한 수첩 취득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 피폭자나 재외국민 피폭자의 투쟁 목표가 되었다. 수첩에는 피폭자의 인적사항과 피폭 위치 등이 쓰여 있다. 사진은 다나카 테루미 피단협 대표위원의 피폭자 건강수첩이다. [사진출처: 《도쿄신문》]
(1) ‘원폭 재판’
피폭자들이 포괄적인 구호 대책을 요구하며 싸우는 과정에서 1963년 12월, 일본 법원이 국제법상 원폭 투하의 위법성을 최초로 인정한, 이른바 ‘원폭 재판’(시모다 사건)의 판결이 나왔다. 시모다 류이치 등 피폭자 5인은 원폭 투하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 정부가 샌프란시스코조약으로 미국 정부에 대한 배상 청구권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걸었다. 이에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는 막대한 파괴를 낳은 원폭 투하는 무차별 공격과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국제법의 기본 원칙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되었다. 재판부는 “국제법상 불법 행위에 대한 배상 청구권은 ‘국가’에만 인정된다. 미국은 전시 군의 행위에 대해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일본 재판소는 미국 정부를 재판할 권한이 없으므로 원고의 청구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지 의심된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상실된 원고의 청구권은 존재한다고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대신 재판부는 “국가는 자신의 권한과 책임에 의해 시작한 전쟁으로 많은 국민을 죽음으로 이끌고 상해를 입히고 불안한 생활로 내몰았다”며, “전쟁재해에 대해서는 당연히 결과책임에 기초한 국가보상 문제가 발생”한다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지적했다. 또한 “피폭자에 대해 충분한 구제책이 시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인바, 이는 재판부의 권한을 벗어난 일이나 일본 정부의 정책 빈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일본 정부의 피폭자 구호를 촉구했다.
‘원폭 재판’ 판결은 일본 피폭자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먼저, “핵무기는 단순히 무서운 무기가 아니라 불법적인 무기”라는 틀로 국제 사회의 핵무기 철폐 여론을 형성하여, 1996년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핵무기의 위협이나 사용은 일반적으로 국제법 및 인도법에 위반된다”는 권고 의견 도출과 이를 근거로 한 2017년 UN 핵무기금지조약(TPNW)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열었다.
다음으로, 피폭자는 사회보장, 즉 단순한 복지정책이 필요한 약자가 아니라 전쟁과 원폭 투하의 피해자이며, 일본 정부가 여기에 책임이 있다는 대중적 인식이 생겼다. 일본 피폭자들은 미국에 대한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인정받는 투쟁을 이어가기보다는, “전쟁을 일으켜 국민에게 원폭 피폭과 같은 막대한 고통을 초래했으므로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는 ‘국가보상’의 논리로 일본 정부에 피폭자 구호를 요구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수인론’(受忍論, 받아들이고 참아라), “전쟁은 나라의 존망을 걸고 치르는 싸움이므로, 희생이나 피해를 입더라도 국민은 이를 개인적으로 참아내야지 정부에 책임을 추궁해서는 안 된다”는 태도였다. 피단협은 이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긍정하는 논리이므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여겼다.
1966년 피단협은 원폭 피해의 실태와 특수성을 밝히고, 국가보상의 관점에 기초한 원호(援護)법을 제정하여 실질적이고 포괄적인 피폭자 지원을 보장할 것을 촉구하는 소책자 『원폭 피해의 특질과 피폭자원호법의 요구』를 발간하며, 연좌시위, 집회, 청원 대회, 전국 순회 등 대대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1968년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특별 조치에 관한 법률’(원폭특별조치법)이 제정되었다. 원폭의료법과 원폭특별조치법은 ‘원폭2법’으로 불렸다. 이로써 피폭자에게 건강관리수당 등 각종 수당이 지급되기 시작했으나, 피단협은 이 법 또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사망자나 유족에 대한 보상도 없어, 국가보상을 회피하는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2) 피폭자원호법 쟁취 투쟁
피단협의 목표는 단순히 지원 정책을 좀 더 충실히 하고 수당을 늘리는 것이 아닌, ‘국가보상이 명시된 원호법’이었다. 피단협은 1974년 「원폭 피폭자 원호 법안을 위한 요구 골자」를 발표해 야당 4당(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공산당)과의 공동 법안 작성을 주도했다. 이 법안은 16차례나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여당인 자민당의 반대로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피단협은 핵무기 폐기 운동과 피폭자원호법 운동을 지속해갔다. 1978년 UN 군축특별총회에 피단협 대표 38명이 참가하여 전 세계에 핵무기의 폐기를 호소하고, 같은 해 8월 여러 사회단체와 함께 ‘원수폭금지·피폭자원호세계대회’를 개최하며 피폭자들의 요구에 대한 시민의 지지가 커졌다. 또한 같은 해 3월 30일, 한국인 피폭자 손진두가 제기한 수첩 취득 재판에서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은 “원폭 피해는 거슬러 올라가면 전쟁이라는 국가의 행위에 의해 초래된 것”이며, “원폭의료법은 특별한 전쟁 피해에 대해 전쟁 수행 주체였던 국가가 책임지고 구제를 도모하는 측면이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국가보상의 성격이 있다”며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손진두 재판은 뒤에서 다시 다룬다.) 손진두 판결의 여파로 일본 정부도 원폭2법을 재조정하기 위한 ‘원폭피폭자대책 기본문제간담회’(기본간)를 설치한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1980년 12월, 기본간 의견서를 통해 “전쟁 피해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감내해야 한다”는 논리로 국가보상을 거부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기본간이 설치된 맥락과 다르게, 한국인 피폭자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피단협은 즉각 반박 성명을 발표하고 1981년 ‘원폭의 비인도성과 국가의 전쟁 책임을 심판하는 국민법정’을 전국에서 83회 개최했다. 피단협이 전국적 토론 끝에 1984년 발표한 「원폭 피해자의 기본 요구」는, 원폭 피해는 절대 ‘감내’할 수 없는 것이며, 핵무기는 절멸만을 목적으로 하는 ‘절대악’의 무기이기에 폐기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원폭 피해를 전쟁 피해의 일환으로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핵무기를 부정하는 이념을 확립하고 이를 피폭자원호법 제정으로 드러내는 것이 일본의 책무라고 촉구했다. 피단협은 국민 서명운동, 국회의원 서명운동, 지방의회 결의 조직이라는 ‘3종 세트’ 운동을 대규모로 펼쳤다. 1985년 자체적으로 피폭자 1만 명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1987년 11월 ‘종이학 인간 띠 행동’으로 3500명이 후생성(보건복지부)를 포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국가보상을 명시한 원호법안은 1989년, 1992년 참의원(상원) 본회의를 통과하기도 했다.
1994년 6월, 자민당과 사회당이 연립정권을 수립하면서, 국가보상과 피폭자원호법을 강력히 요구해왔던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대표가 총리로 취임했다. 피폭자원호법 제정 논의도 물살을 타 같은 해 12월 피폭자원호법(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원호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무라야마 총리가 연립정권을 고려하여 자민당의 주장대로 “국가보상에 근거한 피폭자원호법은 어렵다”, “다른 전쟁 피해자와의 균형 문제가 있다”고 입장을 바꿔, 최종 법에는 국가보상 문구가 명시되지 않았다. 피단협은 피폭자의 유족에게 장례금 명목의 보상을 지급하고, 피폭자수당 지급에 대한 소득제한이 없어지는 등의 성과는 있지만, 국가보상 문구가 명시되지 않았고 피폭자와 유족에 지급하는 연금도 제외되었으므로 원폭2법을 통합한 수준에 그친다고 비판했다.
또한 피폭자원호법은 한국인 등 외국인 피폭자에 대한 지원책은 포함하지 않았다. 피폭자의 국적에 제한을 두지는 않았으나, 일본 밖 피폭자들이 실질적인 지원을 받기는 여전히 매우 어려웠다. 피폭자가 일본을 직접 방문하여 원폭 수첩과 수당을 신청해야 하고, 일본 내에 있을 때에만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등의 문제 탓이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한국인 피폭자와 일본 사회운동의 투쟁으로 차츰 바뀌었다. (이 과정도 뒤에서 다시 다룬다.)
(3) 원폭증 집단소송 투쟁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피폭자들의 투쟁은 피폭자원호법 제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1957년 원폭의료법 이래로 국가가 원폭 후유증(원폭증) 인정에 관해, 질환이 방사능에서 기인했는지 입증할 것을 지나치게 엄격히 요구하는 데 대한 불만이 쌓였다. 실제로 원폭 후유증을 인정받은 피폭자는 전체의 1%도 되지 않았다. 이에 2003년부터 전국에서 모은 원고 300여 명이 17개 지방재판소에 제소한 집단 소송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다. 2006년 오사카지방재판소의 전원 승소 판결을 시작으로 히로시마, 나가사키, 나고야, 도쿄 등에서도 피폭자들이 승소했다. 재판소는 국가가 방사능으로 발병할 확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판단하는 대신 피폭자의 상태와 생활 변화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2008년 잔류 방사능의 영향을 인정하는 새로운 원폭증 심사 방침이 책정되어 암 등 5개 질병에 대한 원폭증 인정 범위가 확대되었다. 일본 정부는 판결에 항소하기도 했으나, 2009년 8월 6일(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에 아소 다로 총리와 자민당 총재가 피단협과 ‘원폭증 인정 집단 소송의 종결에 관한 기본 방침 확인서’에 서명하며 항소를 포기하고 모든 소송 원고의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 예산을 투입하여 기금을 조성할 것을 약속했다. 이는 같은 해 12월 ‘원폭증구제법’ 제정으로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2024년 4월 기준으로 후생성에 원폭증을 인정받은 피폭자는 5,165명으로 전체의 4.8%에 불과하여 지금도 원폭증 인정을 둘러싼 항의와 재판은 계속되고 있으며, 피단협은 모든 피폭자에게 일정한 수당을 지급한 뒤, 장애의 정도에 따라 가산하는 방식으로 원폭증 인정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4) 일본 피폭자운동의 과제
2025년 피폭 80주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 사쿠마 쿠니히코 히로시마현피단협 이사장은 일본 피폭자운동의 현황을 소개했다. 2025년 3월 기준, 일본 내에 피폭자는 99,130명이 남아있다. 그런데 생존 피폭자의 수는 앞으로 줄어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늘어날 수도 있다. 피폭으로 고통 받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가 설정한 여러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피폭자 건강수첩을 받은 공식 피폭자가 되지 못한 이들(‘피폭 체험자’ 등의 명칭으로 불린다)이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일본 정부가 지정한 ‘피폭 지역’ 밖에서 방사능 낙진이 섞인 ‘검은 비’를 맞고 피폭된 사람들을 피폭자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이 정부를 상대로 계속되어왔고, 피단협이 연대한 이 싸움을 통해 피폭자의 범위와 수가 점점 늘어났다. 피단협은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피폭된 이들을 피폭자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싸움에도 함께 하고 있다.
사쿠마 이사장은 나아가 피폭자의 범위를 후손인 피폭 2세·3세까지 확장하여, 지금은 건강검진 정도의 지원만 받는 이들도 앞으로 1995년 피폭자원호법과 유사한 보건 복지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폭 2세·3세를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는 2025년 피단협 총회의 주요 주제로, 향후 운동의 방향은 “정부가 잘못된 전쟁을 일으켜 생겨난 피해자들을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틀로 하여 ‘전쟁 반대’의 메시지를 살리고 피폭자가 아닌 전쟁 피해자들까지 구제할 수 있게 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2024년 12월 히로시마고등재판소는 히로시마 피폭 2세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2심에서 “피폭자와 피폭 2세는 원폭의 영향에서 의학적·과학적으로 현저한 차이가 있다”며 원고의 항소를 기각했으며, 2026년 1월 최고재판소가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나가사키 피폭 2세들의 비슷한 소송도 앞선 2025년 1월에 최고재판소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피폭 2세·3세 문제는 일본에서도 이와 같이 현재진행형이다.
이상의 역사를 보았을 때,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에 대한 일본 사회의 예우와 지원 제도는 말 그대로 ‘스스로를 구하는’ 투쟁을 통해 쟁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3) 일본 피폭자의 ‘인류를 구하는’ 투쟁
여기에서는 일본 피폭자운동이 핵무기가 낳는 참상에 대한 산증인으로서 국제 사회의 핵무기 철폐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벌인 국제 활동을 소개한다.
(1) 1950~60년대 활동
1956년 결성 선언 제목이 “세계에 보내는 인사”였듯, 결성 직후부터 “우리의 체험을 통해 인류를 위기에서 구하는” 것은 피단협의 주요 활동이었다. 1955년 제1회부터 원수폭금지대회를 ‘세계대회’로 진행하고 세계 각국 대표를 초청했다. 또한 이미 1960년대 초반까지 스기모토 카메키치, 모리타키 이치로, 야마구치 센지 등 피단협 대표들은 원수협과 함께 소련, 중국, 몽골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와 영국,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 인도, 스리랑카 등 남아시아 국가들을 돌며 피폭 증언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소련과 중국의 핵무장 문제를 놓고 원수협이 분열했다. 원수협 내 사회당계와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계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핵무장도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공산당계가 이를 반대하자, 1965년 원수협을 탈퇴하여 ‘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원수금)’라는 별도의 조직을 창립했고, 세계대회도 양측이 따로 개최하게 되었다. (일본공산당은 1973년 사회주의 국가의 핵도 반대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꿨다.) 이 과정에서 피폭자단체들 역시 혼란을 겪었고, 히로시마에서는 공산당계와 사회당계 양측이 ‘히로시마현 피단협’이라는 동일한 명칭을 쓰며 병립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피단협 차원의 국제 활동도 중단되어, 피폭자 개개인이 해외에서 원폭의 실상을 이야기했다.
(2) 1970년대 활동
1970년대 중반부터는 피단협의 노력이 국제 사회에서 큰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1974년 11월, 원수협의 UN 파견단에 피단협 구성 단체인 나가사키원폭피재자협의회(피재협)의 코사사 하치로 회장이 참가하여 UN이 원폭 피해의 실상을 조사, 연구할 것을 호소했다. 당시 미국은 원폭 투하의 피해 규모를 축소하고 있었고, UN 차원에서도 자세한 실태 파악이 없었다. 또한 핵보유국인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의 핵실험이 계속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적국이었던 미국에 위치한 UN본부에 가서 이러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당시 일본 피폭자들에게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1975년, 피단협의 유키무네 하지메 등이 ‘핵무기 전면 금지 국제협정 체결·핵무기 사용 금지의 여러 조치의 실현을 UN에 요청하는 국민대표단’의 일원으로 UN에 핵무기 전면 금지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 다음 해에도 2차 국민대표단에 피단협이 참가하여, UN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 보고서와 핵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의 안을 제출했다. 또한 일본에서 핵무기 문제를 다루는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할 것을 요청하여, 1977년 7월 21일부터 8월 8일 ‘NGO 피폭 문제 국제 심포지엄’이 UN의 지원으로 일본에서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피폭의 실태를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전했고, 이를 계기로 각국으로부터 피폭자 초청이 늘어났다. 일본어로 피폭자를 뜻하는 ‘히바쿠샤’가 국제 사회에서 고유명사로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피단협은 이때를 “60년대 중반 원수폭금지운동의 혼란을 극복하고 피폭자 조직의 단결과 활성화를 되찾은” 계기로 평가한다.
피단협은 1978년 2~3월 제네바에서 열린 NGO 군축 국제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나가사키 피폭자 와타나베 치에코가 개회 총회에서 발언했고, 유럽 각국에서 피폭 증언을 했다. 군비 경쟁의 심화를 우려하는 비핵국가들의 촉구로, UN 역사상 최초로 군축 문제만을 다루기 위해 1978년 5~6월 1차 UN 군축특별총회가 열렸다. 이에 피단협은 UN에 핵무기 완전금지를 요청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한편, 41명이 특별총회에 참가하여 공식 행사뿐만 아니라 학교 방문, 거리 선전과 시위 참여, 각국 UN대표부 면담 등으로 핵무기 철폐를 호소했다.
(3) 1980년대 활동
피단협의 활동은 미국과 소련이 각각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Ⅱ’와 ‘SS-20’를 유럽 내에 배치하며 고조된 1980년대 유럽과 미국 반핵평화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럽 각국에서 ‘히로시마·나가사키 산증인에게 직접 원폭의 무서움을 듣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하여, 많은 피폭자가 유럽을 동분서주하며 증언하고 1983년 10월 독일 본에서 열린 50만 명의 반핵집회와 같은 대규모 집회들에서 단상에 섰다. 피단협은 유럽과 미국의 평화운동이 핵무기 전면 철폐가 아니라 동서 진영의 핵무기 균형이나 핵군축을 목표로 하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생생한 피폭 피해 사진을 담은 팸플릿 『히바쿠샤』를 대량 보급하며(1988년 5월까지 10개 언어로 120개국에 12만 부) 핵무기가 인류와 공존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2차 UN 군축특별총회(SSD Ⅱ)에 국제 NGO의 의견을 반영하는 절차로 1982년 3~4월 NGO 군축 특별 위원회 심포지엄이 열렸을 때, 사회주의 국가들이 주도하는 세계평화평의회(World Peace Council) 측 참석자들은 소련의 핵무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며 심포지엄에 영향력을 끼쳤다. 이때 피단협 사무국차장 사이토 요시오와 국제부장 고니시 사토루는 핵무기의 비인도성을 자신들의 체험에 근거하여 이야기하며 소련 옹호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같은 해 6~7월 2차 UN 군축특별총회에도 1200명이 넘는 일본 사회단체 참가단에 피단협의 41명이 함께 했다. 이때 6월 12일, 지금까지도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평화집회로 꼽히는 100만 명의 반핵평화행진이 있었다. 야마구치 센지 나가사키피재협 회장은 6월 24일 총회에서 일본 참가단을 대표하여, 피폭으로 중증 화상을 입은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핵무기에 의한 죽음과 고통을 겪는 것은 우리가 마지막이 되도록 UN이 엄숙하게 서약해 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라고 연설하고, 일본 전역에서 모은 핵무기 완전 금지와 군축 촉구 서명 2886만 2935필을 전달했다.
피폭 40주년인 1985년에는 5개 핵보유국 정상에게 호소를 전했는데, 이중 막 취임하여 개혁·개방(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을 추진한 소련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피단협에 답신을 보냈다. 얼마 뒤 고르바초프는 인류를 핵 위협에서 구하기 위해 히로시마 원폭 투하 40주년인 1985년 8월 6일부터 소련의 모든 지하 핵실험을 일방적으로 중지하겠다고 선언한다. 같은 해 11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의 미소정상회담에 피단협은 야마구치 센지, 고니시 사토루를 파견하여 미소 양국 대표단과 면담에 성공했다. 이 해 이러한 활동들이 주목받아, 피단협은 처음으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1987년 미소 모두 핵실험 재개를 단행하자 피단협은 항의 행동을 거듭 조직했다. 1985년 자체적으로 실시한 피폭자 1만 명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88문서’라 불리는 『원폭 피폭자의 호소』를 1988년 5~6월 3차 UN군축특별총회(SSD Ⅲ) 직전 발간하고, 3차 UN군축특별총회에 24명의 대표단이 참가해 핵무기 철폐를 호소했다. 1989년 10월, 1985년 피단협 조사 보고서 『그날의 증언』 영문판을 다나카 테루미 등 피단협 대표 5명이 UN과 미국 국무부를 방문하여 전달하고, 미국 각지의 평화운동단체들에 전달하며 교류했다.
(4) 1990년대 활동
피폭 45주년을 맞은 1990년에 피단협은 일본 내에서 원폭 피해에 대한 국가 보상을 요구하는 대정부 운동에 힘을 쏟는 가운데,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며 이라크 정부에 쿠웨이트로부터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중동에 피폭자를 만들지 말라”는 가두시위와 서명운동을 벌이고, 이라크, 미국 및 핵보유국 정부에 서한을 보냈다. 1991년 1월 걸프전쟁이 결국 발발하자 “즉각 휴전, 생물·화학·핵무기 사용 금지”를 외치는 가두시위를 적극적으로 조직했다. 특히 2월 미국 국방장관 리처드 체니가 “트루먼 대통령의 원폭 투하 결정은 옳았다”고 발언하며 이라크에서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시사하자 다양한 선전·항의 행동을 펼쳤다.
피폭 50주년인 1995년을 앞두고, UN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핵무기의 사용과 위협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판단을 이끌어내고 이를 핵무기금지조약 형성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1992년 5월, IPB(국제평화국), IPPNW(핵전쟁 방지 국제 의사회), IALANA(국제반핵법률가협회)가 주최하는 ‘세계법정운동’(WCP) 발족 회의에 피단협이 참가하여 원폭 투하를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대한 전쟁범죄로 고발할 것을 요구했다. 세계법정운동 발족을 계기로 국제적인 피폭자 연대를 만들기 위해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 미국 네바다 등 핵실험 장소를 방문 조사하고 핵실험 피해자와 교류했다. 1993년 8월, 나가사키에서 구소련, 미국, 마셜제도, 폴리네시아의 핵실험 피해자와 간담회를 개최하고 공동 호소문 “핵무기 피해자로부터 세계로”를 채택했다. 이 호소문과 핵무기 철폐 국제조약의 체결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UN 가입 182개국 정상에게 보냈다.
1994년에 피단협은 ‘세계법정운동 일본 센터’를 설립하고, 핵무기의 사용과 위협의 위법성에 관한 민간 진술서를 국제사법재판소와 세계 각국 정부, 평화운동 단체에 보냈다. 일본 생활협동조합 연합회가 “세계법정운동을 지지하는 양심의 선언” 서명운동을 시작하자, 많은 단체, 개인이 가세하여 국민적 운동으로 발전했다. 6월,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출할 일본 정부 진술서에 “원폭 투하는 반드시 국제법 위반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는 것이 언론에 의해 밝혀졌다. (이것은 1960년대 ‘원폭 재판’ 당시 일본 정부의 입장이었다.) 피단협과 일본 센터가 강력하게 항의하여, 문제 부분을 삭제하게 했다. 한편 피단협은 1994년 8월 6일 처음으로 한국원폭피해자협회가 주최하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추도식에 초대되어 참석했다.
피단협의 제안으로, 1977년 국제 심포지엄의 성과를 잇는 피폭 50년 국제 심포지엄이 1995년 7월 31일~8월 1일 히로시마에서 열렸다. 심포지엄은 세계법정을 대비하여 원폭 투하의 범죄성을 입증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같은 해 10월~11월 마침내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핵무기의 위법성을 심판하는 세계법정이 열렸다. 피단협 대표단은 법정 방청, 평화행동, 거리 원폭 전시전, 핵실험에 항의하는 시위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96년 7월 8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원폭의 사용과 위협은 일반적으로는 인도법, 국제법에 비추어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이는 UN총회에 권고 의견으로 제출되어 이후 핵무기금지조약(TPNW)의 근거가 되었다.
1996년 재미 일본인들의 초청으로 다나카 테루미 등 피단협 대표가 미국에서 피폭 증언 투어를 돌았고, 미국 내 여러 지자체, 나아가 미국 최초로 주 의회 상원, 하원에서 핵무기 철폐 결의안을 채택하게 하는 성과를 냈다. 1997년 피폭 사진과 설명이 담긴 “원폭과 인간전” 선전자료를 제작하여 일본과 국제 생활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배포했다. 1998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나란히 핵실험을 진행하자, 아시아 지역에 힘을 쏟을 필요를 느끼고 1999년 인도 각지를 돌며 핵무기 철폐를 호소했다.
(5) 2000년대 활동
21세기는 1998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실험,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의 비준 거부로 난항에 빠진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미중러 간의 미사일 방어체제(MD) 경쟁 본격화라는 암울한 정세 속에 시작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세기에서는 반드시 핵무기를 철폐해야 한다는 결의도 넘쳤다. 비핵국가들은 핵보유국들이 1995년 5차 NPT 평가회의에서 NPT의 무기한 연장이라는 이득만 취했을 뿐 의무는 이행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다양한 압박을 진행했다. 멕시코,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웨덴, 뉴질랜드, 아일랜드, 브라질, 이집트가 핵군축 논의 주도를 위해 만든 ‘신의제 연합’(New Agenda Coalition)은 2000년 6차 NPT 평가회의에 앞서 핵보유국들을 압박하는 UN 총회 결의안을 두 차례 이끌어 냈다. 1995년부터 세계 반핵평화운동도 세계 90개국 이상, 2,000개 이상의 단체가 참여하는 “핵무기 폐기 2000년”(Abolition 2000)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피단협도 참가한 2000년 NPT 평가회의는 “자국의 핵무기의 완전한 철폐를 달성한다는 명확한 약속”을 포함한, NPT 제6조(핵 군축 의무) 이행을 위한 실제적 조치 13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최종 문서에 합의했다. 2001년 6월, 피단협 정기총회는 「21세기 피폭자 선언」을 통해 ‘핵무기도 전쟁도 없는 21세기’를 위해 살아가겠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2001년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 핵무기의 선제 사용도 선택지로 포함되고, 같은 해 9월 11일 알카에다의 ‘9.11 테러’가 일어나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2003년 3월 이라크에 대한 전쟁까지 개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피폭 60주년인 2005년 7차 NPT 평가회의는 어떠한 합의도 이루지 못하고 막을 내렸지만, 피단협 대표단은 참가국들을 향한 설득, 시민을 향한 증언 활동, 원폭 전시전, 워크숍 발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열기는 같은 해 7월 도쿄에서 열린 ‘노 모어·히로시마·나가사키 국제 시민 회의’로 이어졌다. 총 2500명이 참가한 이 회의는 원폭 투하의 범죄성을 심판하는 국제시민법정이었다. 동시에 아시아 각국에서 바라본 원폭과 일본의 전쟁 책임, 가해의 문제가 일본, 중국, 한국의 전문가를 통해 이야기되었고, 원폭 범죄를 추궁하는 데 있어 일본의 가해 책임을 명확히 확인하는 것이 아시아를 포함한 국제 여론의 형성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제임을 밝혔다. 10월에도 “핵무기도 전쟁도 없는 세계”를 구호로 내건 ‘피폭 60주년 10·18 집회’가 대규모로 성사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이미 여러 차례(1985년, 1995년, 2001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받았던 피단협은 2005년에는 최종 후보군에 포함되기도 했다. 2009년 『다시 피폭자를 만들지 마라: 일본 피단협 50년사』를 발간했다.
(6) 2010~2020년대 활동
피단협은 2010년과 2015년 NPT 평가회의에 대응하는 한편, 2013년 시작된 ‘핵무기의 비인도성에 관한 국제회의’에 참가한다. 이 회의는 노르웨이, 멕시코, 오스트리아 등 비핵국가의 주도로, 핵무기가 ‘절대악’임을 부각하여 핵무기금지조약을 이끌어내려는 목적이었다. 2016년 피단협은 이러한 흐름에 힘을 싣기 위해 한국 등 세계 각지의 피폭자들과 공동으로 핵무기금지조약 성립을 요구하는 ‘피폭자 국제 서명’을 시작하여 2017년 6월까지 296만 3889필을 모았다. 마침내 2016년 12월 UN총회는 “핵무기를 금지하고 핵무기의 전면 철폐로 이어지는 법적 구속력 있는 문서를 협상”하는 회의를 열 것을 결의한다. 2017년 3월 핵무기 금지 문서 회의가 개시된 UN총회에서 피단협의 후지모리 토시키가 발언하고, 같은 해 7월 7일, 핵무기와 관련된 활동을 포괄적으로 불법화하는 최초의 국제조약인 UN 핵무기금지조약(TPNW)이 122개국의 찬성으로 성립했다. 같은 해 말 핵무기금지조약을 추진해온 핵무기철폐캠페인(ICAN)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2021년 1월 22일, 핵무기금지조약은 50개국 이상의 비준이라는 조건을 달성하여 발효에 성공한다. 피폭자들의 염원이 국제법으로 현실화한 사례다.
2024년 말, 수십 년간 핵무기 사용에 대한 국제적 금기를 만들고 핵무기금지조약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한 공로로 피단협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피단협은 한국인 피폭자 정원술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과 피폭 2세 이태재 한국원폭피해자후손회 회장을 노벨평화상 수상식에 초청했다.
이상의 역사에서, “우리가 있어서 지난 80년 간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피단협의 주장이 결코 과장이 아니며, 이들이 세계 반핵평화운동의 역사에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음을 알 수 있다.
2025년 11월 21일 도쿄에서, (왼쪽 두 번째부터 순서대로) 원수금의 타니 마사시 사무국장, 원수협의 야스이 마사카즈, 사무국장, 피단협의 하마스미 지로 사무국장이 일본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요구하는 서명 344만 9012필을 외무성 담당자에게 전달했다. 주최자 인사에서 다나카 테루미 피단협 대표위원은 비핵3원칙의 재검토를 언급하는 다카이치 정권에 대해 “핵무기라는 악마의 도구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인가”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사진출처: 《지지통신사》]
4. 재일조선인 피폭자운동의 약사
다음으로, 일본과 세계 사회에 일본인만이 유일한 피폭자가 아님을 알리고, 일본 반핵평화운동과 흐름을 함께 하기도 한 재일조선인 피폭자운동의 활동을 히로시마현 조선인 피폭자 협의회(이하 ‘조피협’)의 활동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해방 뒤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각각 대한민국 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따라 재일한국인과 재일조선인으로 나뉘었다. 재일한국인들도 1970년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설치하는 등 여러 활동을 했지만, 이 글에서는 필자의 역량이 부족하여 이들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뒤에 한국인 피폭자 지원 부분에서만 다룬다.)
1) 히로시마현 조선인 피폭자 협의회의 피폭자 구제 활동
1975년 8월, 130명의 조선인 피폭자가 모여 재일조선인 최초의 피폭자운동 단체인 ‘히로시마현 조선인 피폭자 협의회’(조피협)를 결성했다. 1979년 4월 ‘히로시마현 조선인 피폭 2세 협의회’도 조피협의 자매단체 격으로 결성되었는데, 최초의 비(非)일본인 피폭자 2세회다. 이들은 피폭자 구제와 핵무기 폐기를 목표로 일본 반핵평화운동과 함께했다. (1979년 8월 나가사키현조선인피폭자협회도 결성되고, 1980년 조선인 피폭자 전국 조직인 재일조선인 피폭자연락협의회도 결성된다. 후자는 조피협과 동일하게 이실근이 회장을 맡았다.)
조피협 결성을 주도한 이실근 초대 회장은 원폭 투하 당일 밤 히로시마를 가로지르다 피폭되었다. 일본공산당 소속으로 한국전쟁 반대 운동을 하다 구속되어 1952년부터 8년간 복역했다. 출소 뒤에는 1955년 설립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에서 오랫동안 전업 간부로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인 피폭자는 일본 피폭자운동이 부흥하는 속에서도 망각되고 고립된 “골짜기의 피폭자”라는 생각에서 조피협을 조직했다. 조피협 결성은 조총련 상층과의 갈등으로 이어졌지만, 일본 반핵평화운동 측에서는 원수협 이사장, 원수금 대표 등이 조피협 결성대회에 참여했고 일본 언론의 보도도 많았다. 조피협 결성대회는 한반도를 향한 미국의 핵무기 사용 발언에 대한 항의문과 조선인이 포함된 피폭자 원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채택했다.
조피협은 1975년부터 1977년까지 히로시마 조선인 피폭자 실태조사를 벌였다. 조사 대상자의 59.6%가 부상이나 화상을 당했고, 48.5%는 경제적 이유로 건강검진을 받아본 적이 없으며, 72%는 치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답하는 등, 조선인 피폭자의 열악한 건강, 경제 상황이 드러났다. 조피협은 1976년부터 조선인 피폭자들의 원폭 수첩 취득을 도왔다. 1978년 3월 재일조선인 손달수 부부가 원폭으로 사망한 조선인의 유가족에게도 ‘전몰자 원호법’에 근거한 유족급여금을 달라고 신청했으나 조선인은 적용 제외라고 거절당하자, 조피협은 손달수 부부의 이의신청에 연대하며, 최초의 조선인 피폭자 전국 집회를 히로시마에서 열고 연좌농성까지 벌였다.
이실근 조피협 회장은 1977년 히로시마에서 열린 ‘NGO 피폭 문제 국제 심포지엄’에서 재일조선인 피폭자의 실태를 알려, 최초로 이 문제가 국제적으로 토론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79년 조피협이 조선인 피폭자 19명의 증언을 담아 펴낸 『하얀 저고리의 피폭자』는 히로시마 지역 언론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유명 작가 마츠모토 세이초가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 책은 조선인의 식민 체험과 민족 차별의 역사를 피폭 체험과 관련시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조피협은 1981년 7월 ‘피폭 조선·한국인 백서’ 작성을 위한 ‘백서편집위원회’를 만들고 증언 채록을 이어갔다.
조피협은 히로시마시와 히로시마 지역 피폭자 단체들 간 간담회(‘피폭자 대표로부터 요망을 듣는 모임’)에도 조선인을 포함한 외국인 피폭자 전체의 권리를 위해 참가 자격을 요청해, 1979년부터 30년 이상 참가하고 있다. 조피협은 간담회에서 재일조선인 피폭자만이 아닌 일본 밖 피폭자 전체와의 연대를 중시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핵무기 폐기 등 평화운동의 과제를 일본 정부에 제기했다. (조피협의 북한 피폭자 연대 활동은 뒤에서 다룬다.) 1985년 8월 6일 간담회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참석했는데, 나카소네 총리는 이실근 조피협 회장 앞에서 “전쟁 중 일본이 한반도에 폐를 끼쳤으므로 피폭 대책을 위해 가능한 노력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회장이 요구한 강제징용 조선인의 유골 송환도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뤄지지는 않았다.
2) 히로시마현 조선인 피폭자 협의회의 핵무기 반대 활동
조피협은 결성 선언문에 “핵무기 정책에 반대하고 한반도 평화와 안전에 미력하나마 기여한다”는 목표를 담았다. 결성 1주일 뒤에 약 100명이 어선 21척을 빌려 히로시마에서부터 주일미군 기지가 위치한 구레까지 해상 시위를 벌이며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 사용 위협에 반대했다. 1976년 원수협, 원수금 양자의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최초로 참가했다.
UN 역사상 최초로 1978년 5~6월 1차 UN 군축특별총회가 열리게 되자, 조피협도 참가하고자 했으나 이들과 같은 ‘조선적’(朝鮮籍)이 미국에 입국한 사례는 그때까지 없었다. (조선적은 대한민국이나 북한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경우로, 일본 제도상 무국적자처럼 취급된다.) 이에 히로시마 시민사회가 조선인 피폭자의 UN 군축특별총회 참가 서명운동을 벌이고, 히로시마 YMCA(기독교청년회)가 탄원서를 쓰는 등의 노력 끝에, 이실근 회장과 백창기 부회장이 비자를 얻어 ‘핵무기 완전 금지를 요청하는 일본 국민대표단’의 옵저버로 뉴욕 군축특별총회에 참가했다. 독자 기자회견으로 조선인 원폭피해자의 존재를 알리고, 미국 평화운동단체, 재미한국인 학생 등과 교류했다.
1980년대 세계 반핵평화운동의 고양기에 이실근 회장은 활발한 반핵 국제연대 활동을 펼쳤다. 1982년 피단협과 함께 동유럽을 방문하고, 1983년 서독을 한 달 간 순회하며 강연을 하는 중 40만 명이 모인 10월 함부르크 집회에서 연설했다. 1984년 일주일 간 미국에서 강연을 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전미방사능희생자전국대회’에 참가했다 돌아온 뒤, ‘세계핵피해자대회’를 제안하여 1985년 히로시마에서 첫 ‘세계핵피해자대회’가 열린다. 1987년 8월에는 ‘피폭자긴급어필’의 대표로 소련을 방문하여 정부 대표에게 핵무기 철폐 요청문을 전달했다. 1988년 3차 UN 군축특별총회도 참가하여 워크숍에서 핵무기 철폐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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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북한 피폭자 문제
다음으로, 일본과 재일조선인 피폭자운동이 돕고자 노력했던 북한 피폭자 문제를 다룬다. 조선인 피폭자들은 합천 등 한반도 남부에 연고를 둔 경우가 많았기에, 해방 뒤 귀국자 대다수인 약 23,000명은 남한 지역에 자리 잡았다. 북으로 간 피폭자 수는 이보다 훨씬 적은 2,000명 정도로 알려졌다. 여기에 더해 1959년부터 25년간 재일조선인 북송사업(귀국사업)에 조선인 피폭자 2,000명이 참여했다.
이들에 대한 조사와 기록은 많지 않지만, 1995년 북한 피폭자들의 단체인 ‘반핵·평화를 위한 조선피폭자협회’(2010년 ‘조선피폭자협회’로 개칭)가 결성할 당시 190명이 총회에 참가했고, 2001년 일본 정부가 파견한 대표단은 북한 피폭자 1,353명을 확인하고 그 중 생존자는 928명이라고 보고했다. 북한에서도 이미 사망했거나 너무 고령이라 피해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경우, 어렸을 때 피폭당했으나 부모가 그 사실을 숨겨 자신이 피폭자인 줄 모르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실제 피폭자 규모는 더 컸다. 2007년 조선피폭자협회 조사에서는 382명의 생존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조사들에 따르면 생존자는 급속히 감소하고 있었고, 대부분이 고령이며, 같은 나이 인구 평균에 비해 건강 상태가 나빴다. 따라서 2026년 현재 생존한 북한 피폭자는 매우 적을 것으로 추정된다.
1) 일본 사회운동의 북한 피폭자 연대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중시한 일본사회당은 1955년 10월 북한을 방문해 ‘북일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등 일본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우선순위를 둔 일본 정부는 1955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가하려는 북한 대표단의 입국을 거부했다.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어 북일 관계 개선은 더욱 후순위로 밀리지만, 재일조선인운동과 일본 사회운동은 북일교류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회당은 1981년 3월 16일 조선노동당과 ‘동북아시아지역 비핵·평화지대 창설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같은 해 9월에도 사회당의 ‘조선문제 대책 특별위원회’가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피폭자 실태조사 등을 논의했다.
조피협과 이를 지원한 원수금도 북한 피폭자와 교류하고 이들을 지원하고자 했다. 이실근 조피협 회장은 1988년 1월 북한 피폭자 강팔석의 일본인 부인 강옥희로부터 지원을 호소하는 편지를 받았다. 북한에 실제로 피폭자가 살고 있음을 일본 사회가 처음으로 확인한 계기였다. 이실근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에 북한은 ‘그런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없다’고 답변했다. 같은 해 8월 북한의 조평위 대표 4명이 원수금 주최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가했고, 북한 당국은 1989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제13회 ‘세계청년학생평화우호제’에 일본전국피폭목사회 회장 이시다 아키라와 이실근을 피폭자로서 처음으로 초청했다. 이들은 이때 처음으로 북한 피폭자 10명을 만났다. 원수금 세계대회에는 1990년 북한 피폭자로서는 처음으로 강병태가 참가했고, 1991년, 1992년에도 북한 피폭자들이 참가했다.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한 박문숙은 1992년 원수금 세계대회에 참석한 뒤, 원수금의 도움으로 하루 만에 원폭 수첩을 취득했다. 현재까지 유일하게 북한 귀국 뒤 원폭 수첩을 받은 사례다.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일본에서 원폭 수첩을 이미 받은 사람도 많았지만, 북한에 온 뒤 파기, 분실한 경우가 많았다.) 박문숙은 1995년 조선피폭자협회 결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협회 부회장을 맡는다.
이러한 교류를 바탕으로, 1991년 9월 히로시마에서 처음으로 북일 피폭자 교류 창구인 ‘일조피폭자회’가 설립됐다. 1991년 원수금 세계대회에 참가한 조평위 대표단이 원수금을 초청하여, 1992년 5월 원수금 대표단이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다. 대표단에는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와 피폭 2세가 포함되었고, 이실근 조피협 회장도 원폭 수첩 신청 요지를 한글로 번역해 1만 부를 가져가 북한 피폭자 실태조사를 요청했다. 당시까지도 북한에서는 피폭자 실태가 파악되지 않았다. 나가사키 원수금은 피폭자 조사를 의뢰하고 나가사키 조선인 강제연행 명부를 참고 자료로 건넸다. 북일 대표단은 피폭자원호법의 조속한 제정과 북한 피폭자 지원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또한 “핵 없는 세계, 평화의 신아시아를 건설하자”는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하며 남북한 비핵화공동선언, 일본의 ‘비핵 3원칙’(핵무기를 갖지도, 만들지도, 들여오지도 않는다) 준수, 북일 국교정상화와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설치를 주장했다.
2) 조선피폭자협회의 결성과 북일대화
1994년 말 일본에서 피폭자원호법이 통과된 것과 원폭 50주년을 배경으로, 1995년 2월 박문숙 등의 주도로 ‘반핵평화를 위한 조선피폭자협회’가 평양에서 결성되었다. 1997년부터 조선피폭자협회가 피폭자에게 ‘피폭자증명서’를 교부하면서, 이를 받은 피폭자는 북한 내의 모든 의료기관에서 우선적으로 진찰을 받고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을 무료로 이용하게 되었다. 1999년 5월까지 약 250명이 증명서를 받았다. 그러나 북한의 실정상, 일본 사회운동 대표단이 보기에 북한 피폭자의 의료와 생활 상태는 좋지 않았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수금 등은 조선피폭자협회에 북한에서 원폭사진전을 열자고 제안했고, 이것이 1999년 8월 성사되어 평양에서 북한 최초로 원폭사진전이 열렸다. 원수금은 이를 통해 북한 피폭자 실태 파악과 보상, 북일 국교정상화 논의에 기여하는 한편, 핵무기 절대 부정론과 동북아시아 비핵화를 호소하고자 했다. 평양 사진전의 현황은 일본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일본 사회에 북한 피폭자 문제를 환기했다.
2000년 2월에는 조선피폭자협회 소속 7명이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이명국 조선피폭자협회 이사가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면담했는데, 무라야마 전 총리, 이실근 조피협 회장도 동석했다. 조선피폭자협회 방일단은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시민단체들과 교류하고 원폭병원을 견학했다. 이듬해 오부치 총리의 사망으로 큰 진전이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일본 정부 대표단은 북한 의료시설을 시찰하고 피폭자 현황을 확인했다.
한편 이실근 조피협 회장은 남북한 피폭자의 요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2001년 7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사회에 재일조선인 피폭자와 북한피폭자 문제를 알리고, 2002년 2월 방북해 조선피폭자협회와 교류하고 귀국한 뒤, 재일조선인·남북한 피폭자들이 공동으로 피폭자 지원책 요구를 정리해 일본정부에 전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2002년 들어 4월 북일적십자회담과 8월 외무성 국장급 협의 공동문서에서 북한피폭자 문제를 다뤘고,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여 북일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북일 국교정상화와 함께 북한 피폭자 문제가 해결될지 모른다는 기대가 커졌다.
3) 북한의 핵 개발과 북한 피폭자 구제의 무산
그러나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일본인 13명의 납치를 인정하자, 일본 여론이 급격히 나빠졌다. 여기에 더해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특사 등 미국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 당국이 비밀리에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탄두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일어났다. 2004년 5월 고이즈미 총리가 다시 평양을 방문해 2차 북일정상회담이 열렸으나, 북한이 반환한 납북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이 DNA 검사 결과 가짜로 밝혀지며 일본 여론은 더욱 안 좋아졌다. 2006년 10월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뒤로, 지금까지 북일관계에서 유의미한 진전은 없다. 북한 피폭자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북일 미수교를 근거로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과 대만도 국교가 없음에도 대만 피폭자는 피폭자원호법을 통해 지원하고 있다.)
양국 정부 간 대화가 단절되자 원수금은 아무 지원 없이 북한 피폭자들이 사망하면 역사에 큰 과오를 남긴다고 여기고, 2006년 10월 4~7일 북한 피폭자의 실태 조사와 이후 지원에 관한 교류를 위해 북한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이 방문을 통해 방치되어온 북한 피폭자를 일본 정부가 구체적으로 지원하도록 요구할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출발 전날인 3일, 북한의 ‘핵실험 예고’가 보도되면서 원수금은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방북을 연기한다.
북한의 핵시설 포기와 검증 논의가 진행되자 2007년 9월 무카이 고우시 원수금 부의장 등이 방북하여 피폭자를 인터뷰했고, 같은 해 12월 ‘재조(在朝)피폭자 지원연락회’가 결성되었다. 원수금을 비롯해 히로시마 원수금, 나가사키 원수금, 재일조선인 피폭자연락협의회, 피스보트 등이 참여했다. 2008년 4월 조선피폭자협회는 재조피폭자 지원연락회를 통해 북한 피폭자 실태조사 결과를 처음으로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원수금은 2009년 『방치된 재조피폭자: 현황과 과제』라는 책을 발간했다. 재조피폭자 지원연락회는 2008년, 2011년, 2013년 연달아 방북하여 북한 피폭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당국은 2009년 핵실험을 재개했고(2차 핵실험), ‘반핵·평화를 위한 조선피폭자협회’도 2010년 ‘조선피폭자협회’로 개칭되었다. 이후로 북한의 지속적인 핵, 미사일 실험은 일본 정부가 북한 피폭자 지원을 거부하는 명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반핵평화운동의 개입과 북일 피폭자 연대도 현실적으로 어렵게 했다.
6. 한국 피폭자운동의 약사
마지막으로, 한국 피폭자운동의 약사를 확인한다. (앞에서 본 북한 피폭자와 마찬가지로) 한국인 피폭자의 존재는 원폭 투하를 단순히 ‘한반도 해방의 계기’나 ‘일본의 피해’로 규정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 피폭자의 역사가 널리 알려져 있다거나, 원폭피해자운동이 일본에서처럼 기타 사회운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기 어렵다. 민주화 이전 한국 정부가 진보적 사회운동 전반을 억압하는 일환에서 미국의 원폭 투하나 핵 보유를 문제 삼는 행위를 금기시하고, 일본 내 진보 세력과 한국인의 교류도 최대한 막은 것이 한 까닭이다. 그 뒤로도, 미국의 원폭 투하를 한반도 해방의 계기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 북한의 핵무장을 둘러싼 사회운동 내 논쟁 등이 부정적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 원폭피해자의 존재를 인식시킨 가장 큰 계기는 2002년 3월 22일, 자신이 원폭피해자 2세로서 선천적 희귀병을 얻어 고통 받고 있다고 밝힌 고(故) 김형률 씨의 기자회견으로 여겨진다. 백혈구 이상으로 인한 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으로 면역 체계가 거의 작동하지 않아 힘겨운 삶을 살아온 김형률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표어를 내걸고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발족하여 전국의 피폭 2세를 조직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2005년 5월 29일 건강이 악화되어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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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김형률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의 글
몸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습니다. 계절은 한여름이지만 집에서나 밖에서 긴팔 옷을 입고 있습니다. (중략)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이 나빠져 갑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보통 사람에게는 단순한 소망이 제게는 너무 힘든 것이 되었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은 작은 소망조차도 이루기 힘든 ‘원폭 2세 환우’라는 제 상황이, 한 개인의 꿈마저 한 인간의 의지마저도 세상은 담보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이것은 한 원폭 2세 환우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을 2,300여 명의 한국 원폭 2세 환우들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꼭 지키고 싶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
2017년 한국 최초의 원폭자료관으로 세워진 합천원폭기념관 마당의 ‘김형률 기념비’와 심진태 합천원폭자료관 관장. 비석에 “핵 없는 세상을 일구기 위해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김형률은 생전에 일기에 “합천에 원폭기념관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썼다. [사진출처: 《경남도민일보》]
1) 2000년대 이전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대한 한일 사회의 대응
물론 김형률의 기자회견 이전에 한국인 피폭자 문제가 국내에서 전혀 이야기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후술할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이하 ‘협회’)의 활동을 제외하고서도, 관련 흐름이 있었다.
1967년 창립한 기독교 여성단체인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1974년 2월, 일본에서 열린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인 원폭피해자 문제를 접한 것을 계기로 한국 원폭피해자 연대를 시작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원폭피해자 구호를 위한 기금을 모금했을 뿐만 아니라, 1974년 협회와 협력하여 첫 번째 한국인 원폭피해자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1977년 일본에서 열리는 ‘NGO 피폭 문제 국제 심포지엄’에 참여하기 위해 두 번째 실태조사도 진행했다. 1978년 8월 1~6일 한국 최초로 서울에서 원폭사진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1974년 실태조사 보고는 이우정 한국교회여성연합회회장의 「한국 원폭피해자의 실태」로 『창작과 비평』 1975년 3월호에 실렸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1984년 『한국인 원폭피해자(실태조사보고서)』를, 1989년 『그날 이후~한국인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기록』라는 사진집을 발간했다. 기독교 여성 잡지 『새가정』에도 1973년 합천에 국내 최초로 생긴 원폭진료소를 소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인 피폭자 관련 글이 지속적으로 실렸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반미·반전·반핵운동이 활발해지면서 한국인 피폭자 문제도 사회운동 내에 알려졌고, 식민지배의 피해자였던 조선인들도 미군의 원자폭탄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핵무기를 ‘해방의 무기’로 여기는 대신 반대해야 할 근거가 되었다. 예를 들어, 1985년 출판된 『핵과 한반도』는 한반도 핵 문제를 두루 다루는 가운데,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실태와 이들의 증언, 피폭 후유증과 경제난 등 귀국자들이 겪은 어려움,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손진두 씨 등 한국인 피폭자들의 투쟁을 상세히 소개했다.
그럼에도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 원폭피해자를 집중적으로 다룬 서적은 몇 되지 않는다. 방송작가 박수복이 직접 피폭자를 찾아다니며 들은 증언을 정리한 1975년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와 한국인 원폭피해자 2세들의 구술을 담은 1986년 『핵의 아이들』(일본에도 번역 출간), 일제 시기 독립운동을 벌이다 히로시마형무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피폭된 강수원의 1976년 『가공(可恐) 원자폭탄 투하 - 과연 인류는 전멸할 것인가?』, 초창기 반핵운동가 표문태가 재일조선인 피폭자와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다룬 1987년 『버림받은 사람들』 등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9년부터 ‘한국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모임’에서 활동해온 이치바 준코 회장의 연구가 소개된다. 이는 한국 사회가 한국 원폭피해자운동의 역사와 일본 시민사회의 연대를 파악하는 참조점이 되었다. 먼저 이치바의 「삼중고를 겪어온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역사비평』 1999년 겨울호에 발표되었다. 같은 저자가 쓴 『한국의 히로시마: 20세기 백년의 분노,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누구인가』(2000년 출판)를 김형률이 발견하고 피폭 2세 이제수가 번역하여 2003년 한국어로 출판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인 피폭자 연대 활동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활발했다. 물론 1960년대까지는 일본 반핵평화운동도 한국인 원폭피해 문제를 널리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 체결과 같은 시기 베트남전쟁의 본격화로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가 다시 환기되자, 기존 반핵평화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한국인/조선인 피폭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일본 시민사회 세력이 생겼다. 예컨대, 한국인 피폭자 박수암의 편지를 받은 것을 계기로 1965년 방한 취재를 시작한 히라오카 다카시는 일본 반핵평화운동이 그때까지 조선인 피폭자 문제를 실천적 과제로 삼은 적 없다고 비판했다. (히라오카 다카시는 손진두의 ‘수첩 재판’에 주도적으로 연대했고, 1991년 히로시마시장이 되어 최초로 히로시마시 차원의 ‘평화선언’에 “식민지 지배와 전쟁으로 아시아·태평양 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1999년 시장 직권 특례 조치로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으로 옮겼다.)
1970년 한국인 피폭자 손진두가 일본으로 밀항하여 피폭 치료를 요구하고, 1972년 비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원폭의료법에 따라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해 달라는 소송을 후쿠오카지방재판소에 제기하면서, 일본 사회의 한국인 피폭자 연대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71년 1월 히로시마에서 ‘손 씨를 구원하는 시민모임’이 만들어지고, 비슷한 모임이 일본 각지에 생겨 같은 해 말 ‘손진두의 일본 체류와 치료를 요구하는 전국 시민모임’으로 발전했다. 같은 해 신영수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연대를 한국인 피폭자 문제 전반에 확장한 ‘한국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이 1971년 12월 발족하여, 1972년 2월부터 지금까지 소식지 『빨리, 원호를!』을 발행하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인 피폭자와의 연대는 인도적 지원 이상의 사안이었다. “왜 조선인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있었는가”까지 거슬러 올라가,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는 문제였다.
2) 한일 국교정상화와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결성
한국인 피폭 당사자들의 운동은 1960년대에 시작했다. 숨죽이며 살던 한국 피폭자들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 회담(한일회담)이 진행되자, 양국 간에 피폭자 보상도 협의되기를 기대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곽귀훈은 1962년 한국 외무부 등에 한일조약에서 피폭자 보상 문제를 다뤄달라고 호소했고, 마찬가지로 히로시마 피폭자인 이종욱, 오남련 부부가 1963년 한국 정부, 미국대사관 일본대표부, 신문사 등에 한국인 피폭자의 실정을 알렸다. 이 시기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에도 한국 피폭자들의 편지가 계속되어, 1963년 3월 민단 히로시마현본부가 ‘모국피폭동포구원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한일 정부에 회담에서 한국 원폭피해자 보상 문제를 다루어달라고 요청했다. 1965년 5월에는 한 달 간 한국을 방문하여 각지의 피폭자를 만나고 보건사회부, 원자력병원, 대한적십자사 등에 한국인 피폭자의 실태조사와 의료구제를 호소했다. 그러나 1965년 6월 22일 조인된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경제협력협정은 결국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이에 히로시마 미쓰비시 조선소에 징용되어 피폭된 김재근이 “주저앉아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다”며 피폭자 조직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히로시마 피폭자 서석우는 우연히 찻집에서 김재근의 이야기 소리를 듣고 동참하게 되었고, 서석우의 지인 배도환이 자금을 지원했다. 이들은 1966년 8월 가칭 ‘사단법인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를 만들고 전국을 돌며 피폭자를 조직했다. 서울 동양TV는 8월 8일 김재근을 초청하여 대한적십자사, 원자력원 의사와의 좌담회를 방송했다. 1967년 1월에는 신문에 광고를 실어 전국 각지에서 고립된 채로 지내고 있는 피폭자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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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월 31일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신문 광고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의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에서 원자폭탄에 의해 피해를 받은 동지들에게 공고한다. 우리는 8월 15일 이후 피해를 받은 몸으로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이미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우리가 받은 피해는 치유할 길을 알지 못하고, 악화일로에 있으며, 그것에 대한 대책도 없고, 누운 채로 죽을 상황에 있다. 우리의 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스스로 타개해가기 위해, 치료는 물론이고 사회복귀의 길을 열어갈 동지들의 신상을 파악하고자 생각하고 있으므로, 피폭자들은 빠짐없이 참가, 협력해줄 것을 바란다. |
방송 출연과 광고가 효과를 거두어 전국 각지에서 연락이 왔다. 그제야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원폭에서 비롯한 것을 알게 된 사람이 많았다. 1967년 7월 10일 한국원폭피해자협회(당시 명칭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 1977년 현재의 명칭으로 바꿈)가 정부로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고 정식으로 발족했다. 같은 해 말까지 1857명이 협회에 가입했다. 1968년 8월 6일 협회는 서울 조계사에서 제1회 ‘한국 원폭피해자 위령제’를 개최한다. 협회 창립자인 김재근의 글 “한국 원폭피해자의 현실”이 1968년 3월 『신동아』에 실리고, 제1회 원폭피해자 위령제 소식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실리는 등 한국 언론도 협회의 활동을 다뤘다.
발족 이후 협회는 한국 정부, 일본 정부, 미국 정부에 피폭자 구호 대책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몇 번이나 보냈지만, 한국 정부는 “현재 실정으로는 어렵다”는 답변을,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에서 한국 정부와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답변을 반복했고, 미국 정부는 회신하지 않았다.
이에 1967년 11월 4일, 협회 회원 20여 명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내 몸을 변상하라” 현수막을 들고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에 돌입했다. 이때 일본대사관의 입장도 “한일기본조약에서 모든 보상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정부 차원의 문제는 끝났고 인도적 입장에서 민간 차원의 모금 활동을 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3) 한국인 피폭자의 도일(渡日)투쟁
1968년 5월 일본에서 원폭특별조치법이 제정되나 한국인 피폭자는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다. 이에 한국 피폭자들은 일본에 직접 가서 치료를 요구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당시 한국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을 뿐더러, 한국인이 일본에 입국하려면 비자 발급에 많은 돈과 서류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한국인 피폭자들의 도일투쟁은 주로 밀항을 통해 전개되었다.
(1) 손귀달의 치료 요구
첫 사례는 1968년 10월 협회 부산지부의 손귀달이 야마구치에 밀입국하여, “히로시마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학도 동원으로 일하는 중에 피폭당했다. 일본에서 치료받기 위해 밀항했다”고 밝힌 일이다. 최초로 일본 현지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치료를 요구한 사례다. 이 사실이 일본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원수협, 야마구치 원자피폭자복지회관 등 일본 사회단체들이 손귀달을 돕고자 했으나 11월 손귀달은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손귀달의 빠른 송환에는 한일 양국 정부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외무부 공개 문서에는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이 일본 당국에 손귀달과 관련해 “외부인사와의 접촉에 있어서는 공산계열로부터의 접촉을 거절하도록 조치하여 줄 것을 요청”하거나, 손귀달의 면회나 일본 체류허가를 요구하는 일본 활동가들이 “공히 좌경단체” 소속임을 우려하고 이들의 인적사항을 추적한 것이 드러난다. 외무부장관도 주일대사관에 원수협이나 조총련이 손귀달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야마구치 원자피폭자복지회관 관계자들은 모금 전달과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한국 영사관은 이들이 좌익이라고 판단하여 이조차 거절했다. 일본 정부도 외국인 피폭자 지원의 전례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양국 당국의 협력으로 손귀달이 빠르게 송환된 것이다.
(2) 엄분연, 임복순의 수첩 요구
손귀달의 도일을 계기로 같은 해 10월 민단 히로시마현본부와 히로시마현 핵금회의가 ‘한국피폭자구원한일협의회’를 결성하고, 협회 부산지부장인 엄분연과 서울지부 회원인 임복순을 12월 교토의 2차 세계대전 한국인 전몰자(戰歿者) 위령제에 초청했다. 엄분연과 임복순은 위령제에 참석한 뒤 히로시마원폭병원에 입원해, “당시 일본인으로서 피폭된 우리에게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피폭자 건강수첩을 달라”고 신청했다.
일본 후생성과 법무성은 수첩 교부를 거부했고, 1969년 5월 처음으로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일본 의회에서 다룬 중의원 사회노동위원회는 “원폭2법은 일시적으로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에게는 적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전에 관광비자로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들이 수첩을 받아 의료 서비스를 받은 사례도 있었고, 엄분연, 임복순의 수첩 신청이 거부된 뒤에 일본에 관광 온 일본계 미국인 피폭자도 수첩을 받았다. 즉, 실제로는 한일기본조약을 근거로 한국인 피폭자의 지원을 거부한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은 원폭증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료진도 없었고, 국민건강보험이 정비되지 않아 의료비가 비쌌기에, 몸이 아픈 한국인 피폭자들은 계속해서 일본으로 가려 했다.
(3) 손진두의 ‘수첩 재판’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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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월 26일, 히로시마적십자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자 히로시마역에 도착한 손진두 씨(왼쪽 두 번째)와 이를 도운 일본인 연대자들의 모습이다. [사진출처: 《주고쿠신문》]
1970년 12월, 손귀달의 오빠인 손진두가 일본에 밀입국하여 원폭증 치료를 요구했다. 일본 시민들의 지원으로 자신이 히로시마 피폭자임을 증명해줄 증인을 찾고 피폭자 건강수첩 교부를 신청했다. 그러나 일본 후생성이 신청을 각하하자, 1972년 10월 이른바 ‘수첩 재판’을 후쿠오카지방재판소에 제기하며 “피폭된 모든 인간은 일절 차별 없이 원폭의료법을 적용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서술했듯 이 ‘수첩 재판’은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일본 시민사회는 손귀달과 엄분연, 임복순 연대 활동에서 쌓은 경험을 활용하여 다양한 지원 활동을 펼쳤다. 1974년 1심 판결, 1975년 2심 판결, 1978년 최고재판소 판결에서 모두 손진두가 승소하여 수첩을 취득했다. 판결의 요지는 모두 “원폭의료법은 다른 사회보장법과 달리 전쟁 피해에 대한 국가보상의 성격이 있으므로, 그 취지에 따르면 모든 피폭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손진두에 대한 판결 자체가 다른 한국 피폭자들에게도 자동으로 적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소송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4) 신영수의 수첩 취득과 ‘통달 402호’
1974년 ‘수첩 재판’ 1심 판결에서 손진두가 승소한 것에 힘입어, 도쿄의 병원에 초청되어 수술을 받고 치료 중이던 신영수 협회 회장이 도쿄도에 피폭자 건강수첩을 신청했다. 이때 후생성은 ‘수첩 재판’에 항소 중이었으나, 미노베 다츠키치 도쿄도지사가 “단기 체제하는 한국인 피폭자에게도 인도적 입장에서 수첩을 교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도지사의 권한으로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혀, 7월 25일 신영수 회장이 수첩을 받았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뒤 처음으로 한국인 피폭자가 수첩을 취득한 사례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국인 피폭자가 실질적인 지원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원폭특별조치법은 일본 밖으로 거주지를 옮긴 피폭자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후생성 공중위생국장 통달 402호, 일명 ‘통달 402호’를 내렸다. (실제 법 조문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한국인 피폭자가 수첩을 취득해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무 지원을 받을 수 없게 한 것이다. 통달은 공무원 간 전달사항이라, 한국인 피폭자는 이런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또한 수첩을 취득하면 1968년 원폭특별조치법에 의해 건강관리수당을 받을 수 있었지만, 신영수 회장은 이를 몰랐고 일본 당국은 안내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76년 한국인 피폭자 정칠선이 지인에게 수당의 존재를 듣고 히로시마시에 지급을 요청하고, ‘시민모임’과 피단협 등이 개입한 뒤에야 한국인 피폭자가 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4) 한국 피폭자 지원의 시작과 한계
(1) 손진두 ‘수첩 재판’ 최종 승소 이전
1970년대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한일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국내에서 지속한다. 1971년 7월 1일,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한일수교 이후 최초로 국빈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게 되자, 앞서 히로시마에서 피폭자 건강수첩을 신청했던 엄분연 부산지부장과 임복순 등 협회 회원 10명은 사토 총리를 만나 의료와 생활의 대책을 세워달라는 호소문을 전달하려 일본대사관으로 갔다가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같은 해 8월 6일에는 협회 회원 10여 명이 미국대사관과 일본대사관에서 시위를 했으나 “미국은 역사상 전쟁 배상을 한 적 없다”는 답을 들었다.
그러나 1973년 일본 핵병기폐절평화건설국민회의(이하 ‘핵금회의’)가 모금한 성금으로, 한국 최초의 원폭진료소가 한국인 피폭자의 70%가 거주한 경상남도 합천에 설치됐다. 앞서 손귀달 사건에서 보았듯 민주화 이전 한국 정부는 일본 좌파운동이나 재일조선인운동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매우 크게 우려했다. 이때 한국 피폭자운동이 미국의 원폭 투하와 강대국들의 핵 경쟁을 강력히 비판하며 일본공산당, 사회당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일본 피폭자운동과 만나기 어려웠던 데에는 이러한 맥락도 있었다. 이치바 준코, 도요나가 게이자부로 등 ‘시민모임’ 활동가들도 1970~80년대 한국인 피폭자 연대 활동은 일본과 한국 양자에서 당국의 경계 대상이었으며, 이 때문에 ‘시민모임’은 한국인 피폭자들에게 피해가 갈까 히로시마현 조선인 피폭자 협의회(조피협)와 교류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핵금회의는 민사당(사회당 탈퇴파)과 전일본노동조합회의(노사협력, 반공 노선 노동운동) 계열의 소수파가 미일안보조약 반대 투쟁을 문제 삼아, 원수금계보다 먼저인 1961년 원수협을 탈퇴하여 만든 단체였다. 이들의 규모는 원수협과 원수금에 비해 훨씬 작았지만, 일본 자민당 정권은 진보적 색채가 없는 반핵운동단체의 등장을 반겼다. 한국 정부 역시 핵금회의의 지원이라면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72년부터 협회와 ‘한국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모임’의 요망서를 받은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부장관이 외국인 피폭자를 위한 특별입법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1974년 손진두의 1심 승소가 있었음에도 빠른 지원이 이뤄지지 않자, 1975년 3월 4일, 원폭후유증에 시달리던 피폭자 이남수가 “내 관을 일본대사관 앞에 두고 일본에서 보상이 나올 때까지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는 일도 있었다. 이에 일본대사관이 공식적인 조의를 표하고 금일봉을 전했다.
(2) 손진두 ‘수첩 재판’ 최종 승소 이후
1978년 일본 최고재판소의 손진두 승소 판결은 앞서 보았듯 한일 양국의 피폭자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 내 피폭자 지원에서 한국인 피폭자를 분리하고자 했다. 앞서 다뤘듯 일본 정부가 손진두 판결의 여파로 ‘원폭피폭자대책 기본문제간담회’(기본간)를 설치했지만, 1980년 12월 기본간 의견서가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이를 보여준다.
‘기본간’ 설치 한 달 뒤인 1979년 6월 한일 양국 여당이 ‘한국인 피폭자에 관한 합의 메모’를 교환했는데, ○ 한국 의사를 일본에 초청하여 원폭증 치료 훈련을 받게 한다, ○ 일본의 원폭증 전문 의사를 한국에 파견하여 치료를 지도한다, ○ 일본 정부는 한국인 피폭자의 도일치료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손진두 재판이 시작되어 이슈화될 당시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제안했던 사항을 다시 꺼내든 것일 뿐이었다.
이나마도 양국 여당 간의 합의가 1년 남짓 걸려, 결과적으로 도일치료만 1980년부터 시행되었으며 그 규모도 작았다. 당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등록 회원만 해도 9000명이 넘는 상황임에도, 도일치료를 받은 한국인 피폭자 수는 5년 간 총 349명에 그쳤으며 치료 기간도 2개월이 원칙이었고, 일본 정부가 치료비와 함께 지급하기로 한 수당도 지급되지 않았다. 한일 정부가 합의한 도일치료 기간은 1986년까지로,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일본변호사연합회는 양국 정부에 도일치료 연장과 한국인 피폭자 실태조사, 일본 내와 같은 의료와 수당 지급, 한국 내 원폭병원 건설 등 근본 대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도일치료 여비를 부담하던 한국 정부가 연장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도일치료가 중단되었다.
5) 23억 달러 보상 청구와 의료지원금 40억 엔
도일투쟁과 치료를 통해 일본 피폭자와의 처지 사이를 실감한 협회는 1988년 2월 8일 야나이 신이치 일본대사를 만나, 일본 정부에 23억 달러의 보상을 청구하는 요망서를 전달했다. 이 금액은 한국인 피폭자도 일본인 피폭자와 같은 원호를 받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1984년도 일본 후생성의 국내 피폭자 1인당 지원 예산을, 귀국한 한국인 피폭자 23,000명이 지난 42년과 향후 10년만큼 받는다고 계산하여 낸 총액이다.
이전까지 일본 정부에 진정(陳情), 호소의 형태로 지원을 요구한 것과 달리 한국인 피폭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은 손진두 판결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책임을 회피한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가 담긴 것인 한편, 1987년 이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협회가 이전에 느꼈던 정치적 부담을 덜고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989년 한국의 전국민의료보험제도가 시작되었다. 한국 정부는 피폭자의 의료비 본인 부담분 절반을 지원하기로 했고, 신영수 협회 회장은 주한일본대사가 출석한 ‘한국인 원폭희생자 추도식’에서 나머지 절반을 협회가 모은 모금으로 충당하여 피폭자가 무료로 치료 받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본 정부가 4,200만 엔을 대한적십자사에 전달하고 운영은 협회의 처분에 맡기자, 협회는 이 기금으로 피폭자 치료의 무료화를 실현했다.
한편 1988년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일본 정부에 사할린 거주 한인과 한국인 피폭자 지원 문제를 전후 미처리 문제로 제기했다.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이 결정되면서, 일본 정부는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일시금 지급 형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물밑 교섭을 시작했다. 같은 시기, 협회도 결성 이래 가장 큰 규모로 직접행동을 했다. 1990년 3월 22일, 각 지부 회원 300여 명이 서울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일본 총리에게 ○ 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명확한 사죄, ○ 국가보상으로서 근본적인 원호 조치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일본대사관에 전달했다. 4월 13~21일 협회 15명의 ‘한국 피폭자 위령 방일단’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오사카, 도쿄 등을 돌며 일본 피폭자, 활동가와 교류하고, 19일에는 일본 외무성과 교섭했다.
그런데 5월 한일정상회담에서 가이후 도시키 총리는 “인도적 관점, 복지 향상의 관점으로 의료지원금 40억 엔”을 지원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국 피폭자들은 이에 크게 분노했다. 당시 일본의 국내 피폭자 지원 1년 예산은 2,300억 엔인 반면, 한국인 피폭자에게는 그것의 1/50도 안 되는 금액을 단 한 번 지원하고 끝내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발하며 1990년 6월 11일, 피폭자 이맹희가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문을 뿌리고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이 일에 자극을 받은 이맹희의 지인 김학순이 1991년 8월 14일, 사상 처음으로 실명과 함께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혀 ‘위안부’ 운동의 시작을 열었다.)
더구나 40억 엔은 분할 전달되는 것이며, 일본이 정한 ‘40억 엔 사용 지침서’에 따르면 이 기금은 의료 관련 목적으로만 쓰일 수 있다는 것이 사후적으로 알려졌다. 한국인 피폭자 대부분은 당시 한국의 경제 발전에도 불구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생활수당을 바랐으나, 일본 정부는 “수당이라는 현금이 한국인 피폭자 개개인에게 건네지는 것은 보상에 해당한다”며 이를 막았다.
40억 엔의 사용 관련 결정은 협회와 한국 정부, 대한적십자사 삼자에 위임되었다. 피폭자 무료 치료, 연 1회 건강진단(암 검진, 정밀검사 미포함), 1인당 매달 진료보조비와 장례비 지급,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 건립(1996년 10월 완공)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지원 규모와 구체 사항에서 일본과 차이가 크다. (40억 엔이 소진된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한국 보건복지부 예산으로 진료보조비와 장례비 지급, 수첩 미소지자의 진료비 전액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6) 피폭자원호법 동등 적용을 위한 투쟁
1994년 자민당과 사회당이 연립정권이 탄생하여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대표가 총리가 되자 한국 피폭자들의 기대도 컸다. 같은 해 7월 23일, 무라야마 총리의 방한과 한일정상회담에 맞춰 서울 지역 피폭자 113명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23억 달러 보상 청구’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음 달 무라야마 총리는 “일본인 이외의 피폭자도 일본 피폭자와 동일하게 처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상기했듯 일본 의회를 통과한 피폭자원호법에는 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
이에 곽귀훈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전 회장이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라는 말을 내걸고, 통달 402호는 위법이라는 ‘제2의 수첩 재판’을 1998년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다음 해 나가사키 조선소 징용 피폭자로 협회 부산지부 부지부장을 맡고 있던 이강녕도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 같은 재판을 제기했다.
그런데 통달 402호가 문제가 된 것은 한국 피폭자만이 아니었다. 한국 피폭자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일본 정부가 해외로 전근하거나 이주한 일본인 피폭자에게도 통달 402호를 적용하여 지원을 중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미국과 브라질에 사는 일본 출신 피폭자들도 통달 402호로 인해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에 1996년부터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피단협, 미국원폭피폭자협회, 재(在)브라질원폭피폭자협회 대표들이 매년 모여 일본 정부에 재외피폭자에게 피폭자원호법을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공동 행동을 벌였다. 미국원폭피폭자협회와 재브라질원폭피폭자협회 대표는 곽귀훈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 피폭자원호법의 재외 적용을 호소했다.
2001년 오사카지방재판소와 2002년 오사카 고등재판소가 곽귀훈의 승소 판결을 내자, 2003년 일본 정부는 통달 402호를 폐기했다. 이로써 한국 거주 피폭자 2700명과 미국 거주자 1000명, 브라질 거주자 2000명 등 약 5000명이 일본 밖에서도 의료비와 건강관리수당을 지급받을 길이 열렸다.
그럼에도 일본 후생성은 피폭자 건강수첩의 신청과 수령은 반드시 본인이 일본에 와서 해야 한다고 고집하여 고령, 중증 환자들이 새로 수첩을 취득하는 것을 사실상 막았다. 88세의 고령으로 일본 방문이 불가능했던 정남수의 소송에 2008년 11월 나가사키지방재판소가 원고 승소 판결을 하여, 일본에 직접 가지 않고 일본대사관을 통해 피폭자 건강수첩을 신청, 수령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한국 피폭자들의 법적 투쟁과 일본 시민사회의 연대로, 한국을 비롯한 재외국민 피폭자에 대한 처우 차별이 하나씩 사라졌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2008년 재외국민 피폭자에게 미지급한 건강관리수당을 소급하여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009년에는 ‘한국 원폭피해자 미쓰비시 징용자 동지회’가 통달 402호로 인해 입은 정신적 피해를 인정하여 일본 정부가 1인당 120만 엔의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판결했다. 이는 통달 402호로 인해 건강관리 수당 지급 등에 피해를 받은 모든 재외국민 피폭자들에 대한 위자료 지급으로 이어졌다. 일본 거주 피폭자들과 달리 1년에 30만 엔으로 정해져 있던 의료비 지원 상한선도 2015년 위법으로 판결했다.
7) 피폭 2세·3세 문제의 쟁점화
이와 같이 한국인 피폭자 1세대가 겪은 차별은 점차 시정되었지만, 일반인에 비해 통계적으로 훨씬 높은 확률로 각종 질환에 시달리는 피폭 2세·3세 문제는 제도적 공백으로 남았다. 대표적인 예로, 국내 유일의 원폭피해자 전문 요양시설인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은 2026년 현재까지도 직접 피폭을 당한 1세대만 입소할 수 있다. 생존한 피폭 1세의 수가 줄며 회관에 자리가 비는 상황임에도,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피폭 2세·3세는 들어갈 수 없다. 한국 원폭피해자운동도 피폭자 후손의 건강 문제를 오래전부터 절감했지만, 낙인과 차별에 대한 우려가 큰 탓에 본인을 드러내며 적극적으로 활동한 피폭 2세·3세는 없었다. 한국 사회 전반은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관심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원폭후유증이 피폭자의 자손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서 소개한 2002년 고(故) 김형률 씨의 기자회견은 숨어있던 2세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한국원폭2세환우회(이하 ‘환우회’)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환우회는 자신들의 질병은 개인의 불운이 아닌 식민지배와 전쟁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고 외치며, 국가 차원의 실태조사와 원폭 2세 지원 특별법 제정을 목표했다.
환우회와 연대단체들로 구성된 ‘원폭2세 환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는 2003년 8월 5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정부가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과 전면적인 실태조사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 결과 최초로 국가 기관이 주도한 피폭 2세 피해 실태조사가 이뤄져, 2004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의 『원폭피해자 2세의 기초현황 및 건강실태조사』 보고서가 발표됐다. 여기에서 원폭 2세들은 일반 인구에 비해 빈혈, 심근경색·협심증, 우울증, 천식, 정신분열증 등의 발병률이 수십 배 더 높게 나타났다. (2013년 경상남도가 도내 피폭 2세 244명을 조사했을 때에도, 13.9%가 선천성 기형이나 유전성 질환을 앓고 있었고 9.1%가 장애인으로 등록한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고 그 사이 김형률 환우회 회장이 사망했는데도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를 상대로 한 정책 권고를 마련하지 않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자, 2005년 10월 19일 공동대책위는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농성에 돌입하여 정부와 국회에 피해자 실태조사와 지원대책 마련,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이 대표 발의한 원폭피해자지원특별법 통과를 요구했다.
원폭피해자지원특별법은 발의와 국회 임기 만료로 인한 폐기를 반복하다 2016년에야 제정되었다. 71년 만에 처음으로 원폭피해자를 지원하는 특별법이라는 의의가 있으나, 원폭피해자의 정의를 1세대 피폭자로 제한했다. 일본 정부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피폭 2세·3세의 질환과 원폭 피폭의 연관성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피폭 2세·3세들은 지속적으로 특별법 개정안을 제출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2020년부터 진행한 ‘한국인 원폭피해자 코호트 구축 및 유전체 분석 심층연구’(피폭 1세, 2세, 3세 1,200여 명 대상)가 법 개정과 지원 제도 마련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보건복지부는 코호트 조사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2024년 말까지였던 조사를 2029년까지로 연장하고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피폭 2세·3세에 대한 제도적 지원은 없으나, 2010년 발족한 ‘합천평화의집’은 다양한 피폭2세 지원과 반핵평화 활동에 더불어, ‘원폭2세 환우 생활 쉼터 건립을 위한 땅 한 평 사기’ 운동을 벌였다. 운동의 성과로 2016년 합천평화의집이 원폭2세 환우 쉼터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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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왼쪽 두 번째)이 ‘원폭2세 환우 쉼터’인 합천평화의집에서 환우회원들의 그림 그리기 활동을 돌보고 있다. 2025년까지 한정순 회장은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으로 다리 수술을 6차례 받았고, 그 외 수술까지 총 12번의 수술을 받았다. 첫째 아들은 중증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2003년 김형률 당시 환우회 회장을 만나 자신과 아들의 고통이 원폭후유증 때문인 것과, 자신 외에도 김형률과 같이 힘든 피폭 2세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운동에 함께하게 되었다. [사진출처: 《경남도민일보》]
현재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회원은 1300여 명, 2017년 피폭 2세·3세를 아울러 결성된 한국원폭피해자후손회의 회원은 3500여 명에 이른다. 이들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자신이 피폭자 후손임을 모르는 사람들의 전체 현황은 알 수 없지만, 전체 2세·3세는 1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8) 핵무기 없는 세상을 향한 움직임
한편 정부의 감시를 의식해야 했던 시절에는 할 수 없었던 직접적인 반핵평화 촉구 활동이 한국 원폭피해자운동 안에서 늘어났다.
대표적으로, 한국인 원폭 피해 문제를 최초로 NPT 평가회의에서 제기했다. 2015년 9차 NPT 평가회의 사전대회로 열린 국제 NGO대회에서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과 김형률 씨의 아버지인 김봉대 원폭2세환우회 고문은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대한 미일 정부의 책임 인정과 진상조사, 사죄와 배상, 피폭자 문제 해결을 위한 UN의 역할을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여러 차례의 NGO 행사에서 “UN은 원폭 피해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핵무기를 폐기해야 한다. 핵무기가 있는 한 평화는 없다. 33개국 피폭자 연대를 만들어 미일 정부와 각국 정부를 압박하자”며 원폭피해자의 국제연대를 촉구했다.
2016년 5월 27일,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과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등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평화공원 방문에 맞춰 한국 원폭피해자에게 사죄하고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할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려 시도했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에서 ‘수천의 한국인’을 언급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한국 원폭피해자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지만, 피해 규모를 크게 축소했다.
2017년 8월 6일에는 한국 최초의 원폭 자료관인 ‘합천원폭자료관’이 문을 열었다. 합천원폭자료관은 핵무기의 위험성과 한국인 원폭피해자가 겪은 참상을 널리 알려 다시는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것을 목표한다.
2019년 11월 25일에는 이규열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 등 한국 원폭피해자 1세, 2세 14명이 나가사키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미사에 초청받아, 한국과 모든 나라가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여 모든 핵무기를 폐기할 것을 요청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핵 없는 세계 실현을 위한 한국 피폭자들의 염원을 알리는 편지를 교황에게 전달했다.
2023년 11~12월 ‘한국인 원폭 피해자 방미증언단’에는 피폭 1세인 강윤자 씨, 2세인 김미미 씨,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이태재 한국원폭피해자후손회 회장 등이 참여하여 미국 주요 도시를 돌며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고통을 미국에 사는 한인과 미국인에게 알리고, 핵무기 없는 세상을 향한 연대를 촉구했다. 2025년 2~3월에도 피폭 1세 박정순 씨와 2세인 딸 김규리 씨, 이태재 후손회 회장 등 2차 ‘방미증언단’이 미국 각지에서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증언을 하고, 3차 핵무기금지조약 당사국회의 부대행사에 참가했다.
합천평화의집, 한국원폭2세환우회, 한국원폭피해자후손회 등이 주도한 8월 5~6일 ‘2025 합천비핵·평화대회’와 8월 8일 ‘세계 피폭자 초청 증언대회’에는 마셜제도, 타히티, 일본, 카자흐스탄, 콩고, 미국에서 온 핵무기·핵실험 피폭자들을 초청하여, 피폭자운동과 반핵평화운동의 저변을 넓히자는 공감대를 나눴다.
7. 나가며
이 글은 배운 것을 소개한다는 마음으로 한국과 일본 피폭자운동의 역사와 요구를 정리했을 뿐, 양자를 비교하거나 평가를 덧붙이는 일은 최소화했다. ‘약사’다보니 최근 사례들을 자세히 담지도 않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이번에 하지 않은 작업과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사회운동 측면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초점을 두다 보니, 핵무기가 왜 금지되어야 할 비인도적 무기인지 절실히 느끼게 하는 피폭자들의 실태도 소략하게 썼다. 특히 이 글에 이름이 언급된 피폭자들은 각자 말로 다 못 할 인생사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로 글의 주제와 분량 탓에 개개인의 이야기를 담지 못했다. 본문과 각주에 언급된 자료들을 찾아 읽어보면 글에 미처 담지 못한 부분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다시는 핵무기가 세상에서 사용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일생을 다한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은 고령의 나이로 사라져가고 있다.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이들이 걸어온 길을 우리가 이어가야 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글에서도 확인했듯 피폭자 지원과 핵무기 철폐 운동이 갈 길이 아직도 멀다. 함께 길을 내는 데에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