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은 전쟁에 맞설 수 있는가
『처음 하는 평화 공부』, 『전쟁범죄란 무엇인가』
1. 국제법은 전쟁 앞에 과연 무력할까
어느덧 미국의 이란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반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는 4년이 지났다. 불과 몇 년 간격으로 주요 강대국을 포함한 전면적 군사 충돌이 발생한 현 상황은 이례적이다. 문제는 전쟁을 막을 방법이 일견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나라를 공격한 나라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비난과 제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한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전쟁을 빠르게 끝낼 것을 기대하는 것이 오늘날의 상식이다. 하지만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과 러시아가 가진 거부권으로 인해 UN 안보리 차원의 공식적인 제재가 불가능한 상황이나, 개별 국가의 경제 제재가 있다 해도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면 국제사회의 규칙이 전쟁을 막기에 무력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국제사회는 힘의 논리만이 작동하므로 개별 국가가 군사력을 갖추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소위 현실주의적 관점이 힘을 얻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회의론에 빠지지 않고 현실적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현대 전쟁론을 역사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제정치학, 국제법학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세 가지다. 전쟁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는 현실주의, 전쟁을 절대악으로 간주하고 모든 무력 사용을 거부하는 평화주의, 절충론으로서 ‘정의로운 전쟁’의 경우에만 전쟁이 정당화된다는 정전론(正戰論)이다. 이 중 지배적 견해인 현대의 정전론은 전쟁에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법적·도덕적 요건을 부과하여 무력 분쟁의 발생과 진행을 억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전쟁법, 전시국제법이라고도 불리는 국제인도법은 이러한 정전론을 바탕으로 형성된 일련의 국제법 체계이다.
국제정치 독서모임 ‘책으로 여는 세계’에서는 올해 여름 ‘국제법과 평화’를 주제로 책 4권을 읽었다. 그중 모가미 도시키의 『처음 하는 평화 공부』(이하 『평화』)와 후지타 히사카즈의 『전쟁범죄란 무엇인가』(이하 『전쟁범죄』)는 정전론과 그에 기반해 국제인도법, UN 집단안보체제가 형성된 역사와 함의를 다룬다. 이를 통해 국제사회가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전쟁을 규제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그 노력이 국제법의 형태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정전론과 국제인도법은 현실주의적 관점에 맞서 전쟁 억제와 전범국에 대한 공적 제재가 필요하다고 보는 활동가에게도, 평화를 바라지만 평화주의가 너무 이상적이라 한계적이라고 느끼는 시민에게도 의미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처음 하는 평화 공부: 인권과 인도에 관한 아홉 가지 이야기』
지은이: 모가미 도시키
출판사: 궁리
출간일: 2019.1.10.

『전쟁범죄란 무엇인가』
지은이: 후지타 히사카즈
출판사: 산지니
출간일: 2017.4.28.
2. 1차 세계대전 이전:
무차별전쟁관 속에서 싹튼 인권 보호 사상
『전쟁범죄』를 통해 국제인도법이 형성된 역사를 상세히 알 수 있다. 국제법은 17세기 유럽 주권 국가의 성립과 함께 태동했다. 당시의 전쟁관은 ‘주권자가 행하는 모든 전쟁은 국제법상 합법’이라는 무차별전쟁관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겪으며 인권 관념과 함께 포로 보호 사상이 대두된다. 또한 19세기에는 크림 전쟁 등을 거치며 전장의 잔혹함이 알려지고, 이에 인도적 차원에서 전쟁방식을 규제하는 교전법칙과 부상자 공동 구호 협약이 형성된다. 이처럼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형성된 헤이그 협약과 제네바 협약은 국제인도법의 핵심을 구성한다.
헤이그 평화회의는 1899년(제1차)과 1907년(제2차) 두 차례 개최되어 전쟁법 일반을 규정한 헤이그 육전협약과 부속규칙인 헤이그 육전규칙을 채택한다. 헤이그 육전협약은 포로의 자격과 대우, 상병자 대우, 금지되는 전쟁 수단, 교전 행위 수칙, 항복규약, 휴전, 점령 법규 등을 규정하였다. ‘이미 전투에서 배제된 사람의 고통을 무익하게 증대시키는 무기 사용은 전쟁의 목적 범위를 벗어난다’는 원칙에 따라 질식성 가스나 인체에 들어가 파열되는 탄환 등 잔혹한 무기 사용을 금지했다. ‘전투원과 일반 시민을 구분하고 비전투원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이때 성립했다.
제네바협약은 1864년부터 1949년까지 만들어진 4개의 협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1864년 제1 제네바협약은 “상병 전투원은 국적 여하를 불문하고 수용하고 간호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4차 협약에 이르면 전쟁 지역의 민간인 보호를 명문화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포로의 기본적인 권리를 여러 면에서 규정했으며, 부상자의 보호를 명문화했다.
[그림] 적십자 포스터
“자비의 이름으로 베풀어 주소서!”라는 구호와 다친 군인을 안은 간호사가 그려진 적십자 포스터. 전쟁 구호 기금을 모으기 위해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미국 화가 앨버트 허터가 그렸다.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한 앙리 뒤낭은 국적과 이념을 가리지 않는 국제 구호단체의 창설과 구호 조약의 체결을 제창했다. 이 주장이 반향을 얻어 국제 적십자 운동이 시작되었고, 1864년 최초의 국제 인도주의 조약인 ‘전장에 있는 부상병의 상태 개선을 위한 조약’, 즉 제1 제네바 협약이 성립했다. 뒤낭은 1901년 초대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한 책임은 헤이그 육전협약 3조에서 “규칙을 위반하는 교전 당사자는 배상이 요구되는 경우 배상을 지불할 책임을 진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교전 당사자는 ‘국가’를 뜻하므로, 배상책임을 국가에 지움으로써 병사의 전투행위가 국가행위라는 것을 확인한 의미가 있다. 반면 여전히도 관련 협약과 규칙을 위반하는 개인의 형사책임이나 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라는 관념은 없었다. 한편 관할권 측면에서는 적국 군인의 행위에 대하여, 피해국이 자국의 법률과 절차에 따라 직접 범죄를 심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3.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위법화와 국제형사법원의 필요성 대두
헤이그 협약 등이 전장에서의 ‘행위’를 규제하기는 했지만 주권 국가가 이익을 위해 전쟁을 ‘개시’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규제받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무차별전쟁관의 귀결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전쟁 개시에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지가 쟁점이 되었다. 또한 1차 세계대전에서는 화학무기, 잠수함, 비행기 등 전쟁 수단이 발달하여 일반 시민의 피해가 커졌으나, 종래의 교전규칙은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전쟁법이 필요해진 것이다.
1차 세계대전 후 전쟁법 위반 행위는 연합국이 파리에서 개최한 평화예비회의에서 다루어진다. 평화예비회의 산하의 ‘전쟁개시자 책임과 형벌집행위원회’(15인 위원회)는 1919년 3월 보고서를 제출한다. 첫째로, 전쟁을 계획한 자의 책임을 논하며 독일과 오스트리아, 터키와 불가리아의 책임을 물었다. 둘째로는, 전쟁의 법규관례 위반을 논하며 범죄 목록으로 학살과 테러리즘, 인질 살해, 민간인 고문 등을 포함한 32개 범죄 항목을 논했다. 셋째로는 개인 책임을 논하며, 국가 수장을 포함하여 개인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형사소추대상이 된다고 보았다. 넷째로는, 적절한 법원의 구성과 절차를 논하였다. 전쟁의 법규관례와 인도법 위반에 대해서는 각 교전국이 자신의 절차에 따라 범인을 재판할 수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개별 국가에서 재판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사건들, 예컨대 많은 연합국 사람의 생명과 인권을 침해한 적국인, 전쟁의 법규관례 위반을 명령한 사람 등에 대한 재판을 위해 고등법원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판사는 여러 국가에서 임명된 사람으로 구성되며, 적용될 법은 ‘여러 문명 인민들 간에 확립된 관행, 인도법과 양심의 명령으로부터 나오는 국제법 원칙들’이 된다.
이 보고서는 기존 전쟁범죄관으로부터 비약을 담고 있다. 우선 무차별전쟁과 달리 세계전쟁을 시작한 사람의 책임 문제가 거론되었으며, 국가원수조차도 개인 책임을 면제받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여주었고, 고등법원이라는 국제법원 설치가 권고되었다.
그러나 보고서에 따라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은 곤란을 마주했다. 우선, 독일 카이저(황제)가 세계전쟁을 도발하고 개시한 행위에 대해, 과연 연합국이 타국의 황제를 재판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되었다. 당시 학자들은 ‘국가원수로서의 행위는 국제법에 따라 재판받을 수 있고, 국제 도의에 반하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입장과 ‘국가의 책임을 개인에게 물을 수 없고, 기존 국제법이 전쟁 개시를 위법으로 규정하지 않은 이상 소급하여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대립했다. 결국 중립국인 네덜란드가 카이저의 신병을 인도하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카이저 처벌은 실패한다. 둘째로, 카이저 외의 전쟁범죄인들에 대해서도, 독일이 자국 전쟁범죄인을 타국 재판부에 인도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독일 국내 법원인 라이프치히 대법원에서 재판이 이루어졌다. 라이프치히 대법원의 판결이 너무 가볍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연합국의 관심이 배상 문제로 넘어감에 따라 전쟁범죄인 처벌은 흐지부지된다.
[사진] 캘로그-브리앙 조약
‘전쟁의 포기에 관한 조약’은 전쟁 위법화를 최초로 실체화한 조약으로, 미국 국무장관 프랭크 켈로그와 프랑스 외무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주도로 이뤄져 켈로그-브리앙 조약이라고도 불린다. 전쟁을 할 권리를 부정했으므로 부전조약(不戰條約)이라고도 한다. 사진은 최초 체결 당시인 1928년 15개국이 서명한 조약문의 모습이다. 1934년까지 총 63개국이 가입했고, 2차 세계대전 종전 뒤에도 가입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을 계기로 전쟁 금지를 요구하는 여론이 조성되었고, 국제연맹규약에서 전쟁의 금지·제한이 규정된다. 획기적인 변화는 1928년 체결된 ‘전쟁의 포기에 관한 조약’(부전조약)에 담겼다. 켈로그-브리앙 조약이라고도 불리는 이 조약에는 대부분의 국가가 가입하여 국가정책 수단으로서 전쟁을 포기할 것을 선언했다. 무차별전쟁관에서의 전환, 전쟁 위법화에 한 걸음 다가간 것이다. 같은 시기 국제형사법원을 설립하자는 제안도 연이어 제기되나 이는 전간기에는 실현되지 못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실현된다.
4. 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와 도쿄의 유산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형사재판이 실시되어 축적되면서 현대적인 국제인도법의 기틀이 마련된다. 1945년에는 독일의 전쟁범죄인을 재판하기 위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가 설치되어 1946년까지 재판을 진행했고, 1946년에는 일본의 전쟁범죄인을 재판하기 위해 극동 국제군사재판소가 설치되어 도쿄 재판이라고도 불리는 재판을 1948년까지 실시했다. 재판은 세 가지 범죄, 즉 평화에 대한 죄, 통상적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사진] 도쿄재판
1946년 5월 21일 극동 국제군사재판(도쿄 재판) 법정에 앉아 있는 일본 A급(평화에 대한 죄 관련) 전범들의 모습. 앞줄 왼쪽부터 도조 히데키 전 총리(사형), 오카 다카즈미 해군 중장(종신형),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 대장(종신형), 아라키 사다오 육군 대장(종신형), 무토 아키라 육군 중장(사형), 뒷줄 왼쪽부터 히라누마 기이치로 전 총리(종신형),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징역 20년),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징역 7년)이다. 시게미쓰 마모루는 가석방되어 1954년 다시 외무대신이 된다.
우선 평화에 대한 죄는 ‘국제조약, 협약에 반하여 침략전쟁을 계획·준비·개시·실행한 행위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공동모의에 참가한 것’을 의미한다. 켈로그-브리앙 조약으로 상징되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위법화를 반영한다. 통상적 전쟁범죄는 좁은 의미의 교전 규칙 위반을 의미하며, 민간인 살해, 학대, 추방, 재산약탈, 마을 파괴행위 등을 포함한다. 앞서 보았던 헤이그 육전규칙과 제네바 협약에 따른 것이다. 반인도적 범죄는 ‘전쟁 전 또는 전쟁 중 일반 주민에 대한 살인, 절멸, 노예화, 강제이주, 기타 비인도적 행위 및 정치·인종·종교적 박해’를 의미하며, 훗날 ‘제노사이드’로 규정된 행위를 말한다.
어떤 행위를 전쟁범죄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이전부터 국제법상 금지된 행위로 규정되어 있어야 했다. 재판 과정에서는 전쟁에 관련한 각 행위가 과연 국제법상 위법한 행위였는지, 국가가 일으킨 범죄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물을 수 있는지, 개인 책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등 다양한 쟁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쟁을 거쳐 재판부는 독일과 일본의 주요 전쟁범죄인에 대해 다수의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고, 재판에서 확립된 원칙이 이후 국제인도법에 반영된다.
우선 통상의 전쟁범죄는 헤이그 육전규칙과 제네바 협약에 따라 관습국제법이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비교적 명확히 범죄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반인도적 범죄는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을 염두에 둔 것으로 특히 처벌 필요성이 높았음에도, 기존에는 전쟁범죄로 규정되지 않았던 새로운 유형의 행위여서 처벌의 근거가 부족했다. 재판부는 반인도적 행위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절차이자 수단이라면 반인도적 범죄로 인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라 1939년 전쟁 시작 이전에 행해진 행위에 대해서는 일괄적으로 소급하여 반인도적 범죄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보았고, 1939년 이후 저질러진 행위는 범죄로 인정하였다.
또한 침략전쟁을 개시한 행위를 위법하다고 규정하는 것, 즉 평화에 대한 죄를 인정하는 일에도 부침이 있었다. 켈로그-브리앙 조약은 서명국들이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서 전쟁을 포기한다”는 국가의 의무를 선언했을 뿐, 이를 어긴 국가 지도자나 개인을 처벌하는 내용을 포함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관련하여 “국가 정책 수단으로서 전쟁을 공식적으로 포기함은, 그러한 전쟁이 국제법상 위법이라는 것, 그리고 이를 위반하여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당연히 국제법상 불법이며, 이를 계획하고 감행하는 개인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는 명제를 당연히 포함”한다는 논리로써 이를 돌파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국제인도법에 특징적인 새로운 원칙들이 확립된다. 원칙 중 하나는 ‘개인 책임의 원칙’이다. 침략과 집단살해 등은 대개 국가정책을 통해 실행되나, 국가를 재판하는 일은 어려우므로 책임이 큰 개인을 재판하고 처벌함으로써 실효성을 높인 것이다. 재판부는 “국제법을 위반하는 범죄는 추상적인 존재인 국가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며, 국제법 규정은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는 개인을 처벌함으로써만 비로소 집행될 수 있다”고 하여 개인 책임의 원칙을 수립했다.
둘째 원칙은 ‘상관 명령의 항변 배제’이다. 전쟁범죄를 저지른 병사가 상관의 명령을 집행하였을 뿐이라고 항변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1945년 뉘른베르크 조약 제8조는 “피고가 본국 정부 또는 상관의 명령으로 행위한 경우에도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고 경감 사유로 고려될 수 있을 뿐”이라고 규정했다. 재판부는 ‘통상적인 지성과 도덕성을 가진 개인’이라면 민간인 학살과 같은 불법적인 명령이 명백한 범죄임을 알 수 있으므로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판결했다. 전쟁 중 개인이 도덕적 판단을 할 가능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원칙을 수립한 것이다.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의 가장 큰 의의는 최초의 국제군사재판이라는 점에 있다. 기존에도 국내 군사법원이 통상의 전쟁범죄를 저지른 적국 국민을 재판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전쟁 후 설립된 국제법원에서 전쟁범죄인을 재판한 것은 뉘른베르크 재판이 최초였다. 국제법이 원칙을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국제법상의 범죄자를 재판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전승국에 의해 패전한 추축국 범죄인만을 처벌하는 데 그쳐 ‘승자의 심판’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승전국인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였다는 점에서 ‘평화에 대한 죄’ 혐의가 있음에도 이는 다루어지지 않았으며, 통상의 전쟁범죄는 개념상 연합국 측 행위에도 적용되어야 마땅하나 연합국 측을 심판하는 국제법원은 없었다.
기존에는 불명확했던 전쟁범죄의 개념을 확립했다는 의의도 있다. 『전쟁범죄』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평화에 대한 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인정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법리적으로는 죄형법정주의 위반이자 사후법이라는 비판도 가능하지만, 당시 미증유의 잔혹행위에 대응해야 했던 국제사회의 요구에 부합했으며, 이러한 죄가 이후 UN 체제하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국제인도법으로 정착되었으므로 국제법 발달 관점에서 타당하고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5. 현대의 국제인도법: UN 집단안보체제, 국제형사재판소
『평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를 위한 국제기구인 국제연합(UN)이 창설된 과정과 의의를 다룬다. UN은 19세기 중반부터 통신과 위생 등 분야에서 국제협력을 추진했던 ‘다자간 협조 체제’를 세계 평화라는 목적을 위해서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였다. 평화를 위한 국제기구의 주요 활동은 첫째로,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무력충돌 전에 갈등을 수습하는 것, 둘째로, 침략 등 위법행위를 저지른 나라를 제재하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던 국제연맹의 실패를 교훈삼아 UN은 더 강한 제재 능력을 갖춘 ‘집단안전보장’ 체제를 확립한다.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통해 군사적 제재를 포함한 공동의 강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것이었다.
UN 체제는 전쟁 위법화 흐름을 발전시켜, 단순한 전쟁 금지를 넘어 무력행사를 금지했다. 오늘날 무력행사는 원칙적으로 불법이며, UN 안보리 결의를 거쳤다는 절차적 합법성과 침략에 맞서는 방위전쟁이라는 내용적 정당성을 동시에 갖춘 예외적 경우에만 허용된다. 『평화』는 이것이 “인류가 몇 세기에 걸쳐 이뤄낸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2003년 이라크 전쟁,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2026년 이란 전쟁 등은 모두 이러한 현대 국제인도법의 원칙을 위배한 침략 행위다.
UN에서 금지하는 침략 범죄를 저지른 개인과 지도부를 처벌하기 위해 설립된 기구가 바로 국제형사재판소(ICC)다. 탈냉전기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르완다 내전에서 심각한 인권유린 사태가 발생하자 국제사회는 국제인도법에 기반한 조직적인 개입의 필요성을 느낀다. UN 안보리는 뉘른베르크·도쿄 재판 이후 최초로 공식 집행력을 가진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1993년)와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1994년)를 설치하여 인도법 위반 책임자를 심판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계기로, 중대한 전쟁범죄는 지역을 떠나 국제사회 전체의 관심사이므로 개별 분쟁을 넘어 공평하게 전범을 소추·처벌할 상설 국제형사재판소를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1998년 UN총회에서 국제형사재판소 규정(로마 규정)이 채택되고, 2002년에는 세계적 관할권을 가진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설립된다.
『전쟁범죄』에서 소개하는 국제형사재판소 규정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국제형사재판소를 UN의 보조기관으로 설치하는 안도 고려되었으나 결국 다자조약을 통한 독립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대신 협정을 통해 UN과 적절하고 밀접한 연결 관계를 확립하도록 했다. 재판관은 당사국 절대다수결 비밀투표로 18명을 선출하고, 다룰 수 있는 범죄로는 (a) 집단살해(제노사이드)죄, (b) 침략범죄, (c) 무력분쟁 적용 법규 관례의 중대한 위반, (d) 반인도적 범죄를 규정하여 기존 국제인도법상 범죄를 모두 포함하였다. 재판소의 관할권은 규정 당사국이 일정한 범죄에 대해 규정에 구속된다는 동의를 표할 때 부여된다. 단 UN 안보리가 재판소에 문제를 회부하면 개별 국가의 수락 없이도 관할권이 생긴다. 강제관할권을 갖지 않고 개별 국가의 조약 가입과 관할권에 대한 동의를 기초로 운용함으로써, 법적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찾은 것이다.
물론 UN 집단안보체제와 국제형사재판소가 전쟁을 억제하는 능력에 한계는 있다. 『평화』는 침략범죄(뉘른베르크 재판에서의 ‘평화에 대한 죄’)를 국제형사재판소가 제재하도록 하는 과정에 부침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침략범죄는 국제형사재판소 규정 초안부터 관할권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냉전 대립 속에서 침략성에 대한 정의나 관할권 행사 요건을 국가 간에 합의하기가 어려워 규정에 이름만 올라가 있고 재판소가 실질적 권한을 갖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결국 냉전 해소 후 2010년이 되어서야 침략범죄의 정의와 관할권 행사 조건이 합의되어(캄팔라 합의) 2018년부터 관할권이 발효되었다. 『전쟁범죄』는 관할권이 있어도 침략범죄를 재판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지적한다. 개인을 침략의 죄로 책임을 물으려면 UN 안보리가 먼저 해당 국가의 침략행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거부권을 가진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도자의 침략 행위는 소추하기 어렵다. UN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만 복무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평화』가 지적하는 것처럼 미국, 러시아, 중국과 같은 강대국이 국제형사재판소 규정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특히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국제형사재판소 반대 정책을 쓰고 있다는 점은 큰 문제이다. 미국은 2002년 미군보호법(ASPA)을 제정하여 미국인의 국제형사재판소 이송 방지를 위해 필요 시 군사력 행사까지 허용하고, 국제형사재판소에 협력하는 국가에 대한 군사 원조를 제한한다.
최근 국제형사재판소가 푸틴과 네타냐후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일은 국제형사재판소의 의의와 한계를 다시금 명확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2023년 우크라이나 아동을 강제 이송한 혐의(전쟁범죄)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에게, 2024년 가자지구에서 기아를 무기화한 혐의(전쟁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로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에게 각각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성립 요건이 까다로운 침략범죄 대신 전쟁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를 적용하였고, 국제형사재판소 규정에 가입하지 않은 가해국 대신 피해국의 관할권에 기반해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국제형사재판소가 강대국의 현직 지도자에게 사법적 책임을 묻는 모범적인 결단을 내린 셈이나, 자체적인 집행 수단(경찰력)이 없어 당사국의 협조에 의존해야 한다는 구조적 한계도 명확히 드러났다. 체포영장 발부는 120여 개 회원국 영토 내에서 피의자들의 외교적 이동을 극도로 제한하는 억제 효과를 지니지만, 규약 당사국조차 협조를 거부하면 체포를 강제할 수단이 없다. 실제로 2024년 9월 ICC 회원국인 몽골을 방문한 푸틴 대통령이 체포 없이 무사히 귀국한 사례는 이를 보여준다. 또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겨냥한 ICC의 행보에 반발하며 ICC 재판관에 대한 비자 발급 중단, 자산 동결 조치를 내렸다. 미국의 국제형사재판소 반대 정책이 트럼프 행정부 시기를 맞아 노골화된 것이다.
추가적으로, 『평화』는 현대에 들어 더욱 심화한 위협으로서 핵무기라는 새로운 위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가 투하된 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시민 위협의 사상’과 ‘섬멸의 사상’이 극에 달하여 전략 폭격이 감행되었던 맥락에서 일어났다. 전략 폭격은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국가 기반을 파괴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일반 시민과 민간시설에 피해를 입히는 것을 의미한다. 핵무기는 태생적으로 이러한 전략 폭격을 위해 만들어진, 즉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별하여야 한다는 국제인도법의 대원칙을 무시하는 무기이다. 또한 핵무기는 침략전쟁은 금지, 방위전쟁은 제한적으로 허용한다는 기존 전쟁범죄의 문법을 흔든다. 방위전쟁이라고 하더라도 핵무기를 사용하면 방어에 필요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서 비례성을 인정할 수 없으므로 핵무기 사용은 어떤 경우에도 위법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핵무기 규제는 국제인도법 제도상 오랫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었으나, 1996년 국제사법재판소(ICJ)가 “핵무기의 사용과 위협은 원칙적으로 위법”이라는 판단을 함으로써 국제인도법의 일관성을 확립한다. 이는 권고적 의견이므로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핵무기 사용에 국제법이 제동을 걸 근거가 생긴 것이다.
6. 국제인도법의 완성: 시민사회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정전론과 국제인도법의 현실적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로서 학자들은 국가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시민의 존재에 일찌감치 주목했다. 『평화』를 저술한 모가미 도시키는 “평화를 실현하는 주체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과거에는 군인·정치인·외교관이 주된 주역이었지만, 평화를 ‘인간의 생명과 인간다움을 보장하는 것’으로 정의하면 전쟁 희생자, 난민,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을 구호하는 평범한 시민이 더 중요한 주역이 된다. 이는 ‘인권의 시대’가 곧 ‘시민의 시대’, 좀 더 구체적으로는 ‘NGO(비정부기구)의 시대’를 낳은 배경이다”라고 썼다.
영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메리 캘도어는 2000년 저술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구축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국가의 행위가 국제법을 더 엄격히 준수하도록 책임을 묻고, 세계 무기 시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군대의 역할을 평화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재건 프로그램에서 사회적 갈등과 긴장을 완화하는 데 더 큰 중점을 두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NGO는 국제인도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먼저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에 NGO의 활동이 핵심적이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국제형사재판소를 위한 NGO 연대’(CICC)는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 규정(로마 규정)이 UN총회에서 채택되기까지, 전문적인 법률 보고서를 제출하거나 규정에 동의하는 중소국을 조직하고 반대하는 강대국에 대한 비난 여론을 형성하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1996년 국제사법재판소(ICJ)가 핵무기의 원칙적 위법성을 인정한 권고적 의견을 내놓은 배경에도 시민사회 NGO들의 주도적인 역할이 있었다. 국제 NGO 연합체들은 먼저 세계보건기구(WHO)를 설득하여 핵무기 사용이 인류 건강에 미치는 치명적 영향에 대한 판단을 구하도록 유도했고, UN총회도 다각도로 압박하여 ICJ에 공식적인 자문을 요청하게 했다. 2017년 UN총회에서 핵무기금지조약(TPNW)이 채택된 성과도 이 공로로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을 비롯한 전 세계 시민사회의 집요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대표적 사례이다.
7. 평화를 위해 인류가 얻은 교훈을 떠올리자
국제인도법의 역사는 전쟁에서 인류가 교훈을 얻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국제사회는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과오를 반성하고자 했고, 전쟁의 정의로운 해결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논쟁은 구체적인 제도를 발전시켰고 제도는 국제질서에 편입되었다. 국제법상 금지되는 행위, 즉 전쟁범죄의 개념을 합의하려는 노력에 발맞춰 국제형사재판소로 대표되는 사법제도를 확립하고자 한 끊임없는 시도는, 평화를 위협하는 국가를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질적 책임도 묻겠다는 목표의 결과였다. 전후 정전론과 국제인도법이 국제사회에서 합의를 얻은 역사를 무시하고, UN의 집단안보체제가 잘 작동하지 않는 현실만으로 현실주의적 관점만이 국제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국제인도법을 포함한 국제법과 UN 안전보장체제를 강대국의 이해관계에만 복무하는 제국주의의 산물로 치부하는 것도 섣부르다. 물론 현재 국제법이 기초하는 미국 헤게모니와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에는 근본적 모순이 있다. 레닌이 20세기 초 “제국주의와 전쟁은 자본축적의 위기에서 비롯한 독점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라고 말한 것처럼, 현대의 전쟁과 군사적 긴장의 근원에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이 놓여 있고 자유주의 세계질서는 이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운동이 반미 구호에만 몰두하여 진영논리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유주의 세계질서의 대안을 찾고자 한다면, 전쟁 위기를 부르는 모든 국가의 행위를 일관된 기준으로 비판하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현실적 비판의 출발점 역시 국제법일 수밖에 없다.
전쟁과 대량학살을 막고 전쟁에 책임 있는 국가에 공적 제재를 가한다는 국제인도법의 정신은 평화를 원하는 시민과 사회운동 활동가라면 누구나 존중하고 지킬 가치가 있다. 우선, 전쟁을 일으킨 국가에 윤리적 책임 이상의 제재를 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궁극적으로는, 평화가 당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라 시민과 사회운동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전쟁을 공동으로 억제하려 노력했던 흔적, 인류가 도달했던 마지막 합의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