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광주의 진정한 벗은 누구인가
5월 광주민중항쟁과 5월 평택평화항쟁
오늘 가장 파렴치한 기회주의는 광주와 평택을 분리시키려는 데 있다
지난 5월 4일 대추리를 유린한 군경합동작전 ‘여명의 황새울’을 보고, 26년 전 광주를 학살한 ‘화려한 휴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군대를 비롯한 압도적이고 ‘합법적’인 물리력을 동원한 갈등의 억압, 갈등 지역을 고립시키려는 체계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외부와의 차단을 바탕으로 현지에서 자행되는 (준)계엄적 조치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배경을 이루는 미국…….
광주와 평택의 유사성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지배계급들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다. 윤광웅은 시간을 더 끌면 5․18을 연상시킬 것 같아 속히 군대를 투입했다고 뻔뻔스레 대답한다. 법질서와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대중들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서 군대도 동원할 수 있다는 지배계급의 발상은 평택에서도 광주에서처럼 발포를 했어야 했다는 지만원 따위의 극단적 대응에 길을 열어 준다. 이것이 몇몇 극단적 보수 세력의 망상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한명숙과 노무현의 발언을 통해 알 수 있다. 불법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기존의 실정법이 수호하는 불의에 맞서 저항하는 모든 대중들을 잠재적 폭도로 낙인찍어 탄압하는 동시에 법과 질서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저 태도. 그것이야말로 광주의 유혈 진압을 정당화하고 지지했던 근본 원인이었다. 이로써 우리는 오늘날 민주주의를 가장 크게 위협하고 반동을 체계적으로 양산하는 것이 다름 아닌 저 ‘타락한 민주화’ 세력, 신자유주의자들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렇게 5월 평택을 5월 광주와 동일한 상황으로 밀어 넣었으면서도, 지배계급들은 양자를 분리시키기 위해 갖가지로 노력한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같은 여론전에 NGO들을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 김동민 대표의 국정브리핑 기고문이다. 여기서 그는 이번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도한 언론들이 군경의 과잉진압만 부각시킬 뿐 반미의 경직된 흐름과 시위대의 폭력에는 눈을 감았다고 비난한다. 또한 이들 언론이 5월 평택 항쟁과 5월 광주 항쟁을 억지로 연결시킴으로써 불행한 사태를 유도하고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는 기막힌 발언을 내뱉는다.
6.15 공동위원회 남측 대표이자 원로 지식인으로 행세하는 백낙청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과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학자적 자질을 의심케 하는 무식한 주장을 하는 한편, 기본적으로 수도에 있는 미군기지가 이전되는 것이니 만큼 평택 미군기지 확장은 미국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고 사태의 본질을 체계적으로 호도한다. 그에게 있어 문제는 정부가 과잉진압을 하고 설득을 소홀히 했다는 것뿐이며, 이 점 역시 총리가 인정한 만큼 해결의 실마리가 주어져 있다.
또 한겨레신문은 5월 12일자 사설에서 시민사회단체 지도급 인사들이 제기한 ‘중립적인 사회적 협의 기구’를 주된 대안으로 말하면서, “협의기구가 활동하는 동안 강제집행과 영농행위를 동시에 중단”한다는 실로 기회주의적인 조치를 타협의 조건으로 내세움으로써 그 동안의 객관적 보도 노력을 무색케 한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입장을 편드는 가운데, 현재의 갈등을 절차상의 문제로 축소시킨다. 저들이 볼 때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막는 것은 정부의 졸속적인 사업 추진, 그리고 정부 못지 않게 ‘극단적’인 일부 저항세력들이다. 저들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수단을 통해 노무현이 말하듯 “억압된 사회, 권위주의 사회에서 자유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의 일부의 무질서․ 갈등”을 중재하는 매개자로 자임한다.
그러나 군을 동원한 폭압만큼이나, 첨예한 갈등을 앞에 두고 발호하는 이 같은 기회주의적 행태에서 우리는 1980년 5월 광주가 반복되는 것을 재발견한다.
광주와 평택에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했던 이유
물론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지배계급들이 극히 비민주적이고 기술관료적인 방식으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문제를 처리하려 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한 이는 단순한 현상 묘사에 그칠뿐더러, 문제의 적합한 해결을 가로막는다.
그 까닭은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평택미군기지 확장 및 이를 규정짓는 전략적 유연성 합의가 금융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사활적 이해에 반하는 모든 세력들을 정치군사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무장한 세계화’의 일환이라는 점, 그러나 이것이 한반도 및 동아시아 전반의 평화를 근본적으로 위협할 수밖에 없는 한에서 지배계급들이 이 사안의 쟁점화를 어떻게든 회피하고자 했다는 점에 있다. ‘내 땅에서 농사짓겠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어찌 보면 아주 소박해 보이는 요구에 입각한 팽성 주민들의 저항은 이 같은 은밀한 기도를 정면으로 막아선다. 이 때문에 더욱 강화되는 한미전쟁동맹의 호전성 및 남한의 지배계급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해 온 ‘민주화’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이는 지배계급에게 매우 심각한 정치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지배계급이 이 문제에 관한 대중들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한 것, 또 26년만의 군 투입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동원하면서까지 평택의 저항을 억압하려는 것은 이 같은 사안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정확히 동일한 상황을 만난다. 강금실은 5월 17일 망월동에 찾아가 광주항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었음에도 군사정권이 무력을 동원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5월 광주를 규정하는 정세를 이보다 피상적으로 진단할 수 있을까? 당시 지배계급이 신군부를 앞세워 광주를 학살한 것은, 남한자본주의의 근본적 위기라는 정세를 떼어놓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주지하듯 1979년에 이르러 박정희의 발전주의는 최종적으로 실패하고 남한자본주의는 붕괴 지경에 이른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중화학공업부문의 투자조정, 그리고 임금 및 농산물가격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핵심 골자로 하는 남한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서 이른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실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기를 대중들에게 체계적으로 전가시키려는 신자유주의적 시도에 대해 대중들은 온몸으로 저항한다. 부마항쟁과 YH 사건은 이를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저항은 결국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과 박정희의 죽음을 초래한다. 하지만 발전주의가 붕괴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하지 않는 것은 남한의 자본주의적 미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의 저항을 체계적으로 말살할 억압적 토대를 구축하고 이에 입각해 남한 사회를 반동적으로 재편하는 것이 당시 지배계급들에게 사활적 과제였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이 한가로이 말하는 ‘평화적 해결’이 아니라 그처럼 끔찍하고 살인적인 폭압이 광주에 가해진 것은, 바로 이 같은 정세를 배경으로 한다.
바로 여기에 광주와 평택의 구조적 동일성이 있다. 양자 모두 지배계급이 사활적으로 추진하는 반동적 질서 재편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이 때문에 지배계급은 매우 극단적이고 잔혹한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 그들의 저항을 짓누른다. 단지 폭력만이 아니다. 1980년 광주에서도, 2006년 평택에서도 아주 막대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가해진다. 이렇듯 지배계급은 자신의 정치적 명운을 걸고 철저한 사전계획에 따라 저항을 진압한다. 그에 비해 이에 맞서는 피지배계급들은, 적어도 최초의 주체적 태세 면에서는, 상당히 소박한 모습을 보인다. 광주에서도 평택에서도, 지배계급의 어마어마한 탄압이 비로소 사태의 본질과 엄중함을 가르쳐 주는 역설이 초래된다. 이 과정에서 저항세력들은 사태의 엄중함을 받아들이고 그 수준의 대응을 모색하려는 경향과, 사태의 엄중함을 감당하지 못한 채 다양한 방식으로 지배계급에게 굴복하려는 경향 사이에서 동요한다. 이를 틈타 온갖 기회주의가 침투한다. 바로 이 점에서도 광주와 평택은 정확히 동일한 상황을 겪고 있다.
무장해제와 자기파괴를 넘어서 - 광주의 무장과 평택의 철조망 철거가 의미하는 것
가장 대표적인 기회주의는 바로 무원칙한 ‘평화주의’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 평택 문제에 대해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과 충돌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이때 전제가 되는 것은 바로 기존의 실정법에 대한 복종이다. 국가가 설정한 한계를 넘지 않는 한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주의가 이상화하는 타협은 서로 갈등하는 원칙들 모두를 왜곡하고 타락시키는 경향을 갖는다. 타협은 갈등 일반을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갈등의 표출을 회피하기 위해 서로의 원칙을 ‘거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거래는 상대편 원칙에 속하는 본질적 측면의 희생과 자신의 원칙에 속하는 본질적 측면의 희생을 ‘교환’한다. 이러한 거래는 갈등의 근본적인 쟁점을 흐리게 만들뿐만 아니라, 양쪽 원칙 모두의 왜곡과 타락으로 귀결된다. 바로 이 때문에 평화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한 준거점으로 삼곤 하는 간디는 원칙간의 갈등이 문제인 한에서 상대편에게 설득되거나 패배할망정 타협은 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우리의 문제로 되돌아오면, 죽느냐 사느냐, 독재냐 민주주의냐, 기지와 전쟁이냐 쌀과 평화냐의 갈등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을 갖는다. 이렇듯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을 타협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힘으로 한쪽 원칙을 억압하는 것이거나, 타협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타협하기 쉬운 부차적 문제로 쟁점을 호도함으로써 결국 본질적 문제를 회피하고 무력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광주와 평택 모두에서, 기존의 실정법, 그리고 국가가 대중들에게 강제하는 한계는 근본적인 불의와 억압, 배제를 실행하는 도구와 다를 바 없었다.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도, 평택 대추분교를 철거하고 농민들의 땅에 철조망을 친 것도 모두 실정법에 따른 것이었다. 죽지 않기 위해 무장을 금지하는 국가의 제한을 넘어서야 했던 광주에서도, 농사를 짓기 위해 ‘군사보호시설법’에 따라 설치된 철조망을 넘어서야 했던 평택에서도, ‘공권력’이라는 국가의 조직된 무장력이 이들의 앞을 막아섰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히며, 공권력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중들을 유린한다.
이처럼 타협할 수 없는 원칙들 간의 갈등 앞에서 기존의 법질서가 정상적인 중재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의를 체계적으로 집행할 때, 즉 말의 강한 의미에서 ‘압제’로 타락할 때, 주권자로서 대중들은 기존 법질서에 대한 저항권을 발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정은 불가피하게 일정한 혼란과 무질서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대중운동의 새로운 조건이 된다. 우선 그 체제의 성격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체제의 재생산을 자신의 고유한 임무로 하는 국가는 법질서의 수호와 확립이라는 명목으로 경찰과 군대 등 억압적 장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주권자로서 대중들에 대한 반동적 공세를 강화한다. 또한 대중들에게는 법으로 대표되는 안정적 질서나 규범에 의존하지 않는, 주권자로서의 보다 창발적인 결정과 막대한 책임이 요구된다. 한편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대중들의 불안을 틈타 무원칙한 평화주의와 기회주의가 더욱 크게 발호할 수도 있다.
80년 5월 광주는 이 같은 조건을 구체적으로 예증한다. 특히 대중들의 무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기회주의의 본질을 극명히 폭로한다. 당시 기회주의자들은 무원칙한 평화주의라는 모습을 띠었다. 그들은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 작정인가’라고 말하면서, 대중들의 대항폭력이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올 뿐이기 때문에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당시 대중들의 대항폭력은 자기파괴가 아니었으며, 그에 대한 대안이 무장해제라는 비폭력일 수는 없다. 지배계급들이 선제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한에서, 대중들의 저항은 필연적으로 대항폭력의 계기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구조적 폭력을 해체할 수 있는 인식 및 노선이 존재하는가, 동시에 대항폭력의 도착가능성을 제어할 수 있는가 라는 기준에 따라 대항폭력을 구체적으로 분별하고 개조하는 것이다.
윤상원 열사로 상징되는 최후의 항쟁 지도부는 자기파괴도, 무장해제도 아닌 반폭력의 길을 제시한다. 주지하듯 광주 시민들은 항쟁 과정에서 계엄군이라는 가장 살인적인 폭력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창발적으로 다양한 저항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계급들조차 놀라 마지않았던 질서 유지 능력을 통해 자신들의 대항폭력이 어떤 의미에서도 자기파괴적이지 않음을 감동적으로 입증한다. 광주의 최후 지도부는 이 같은 대중들의 지성과 목소리를 도청 앞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조직하고, 이에 힘입어 무원칙한 평화주의를 앞세운 기회주의 세력을 교체한다. 5월 26일 외신 기자회견에서 승리에 자신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윤상원 열사는 잠시 생각하다 ‘7일’ 곧 ‘일주일만 버틸 수 있다면’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당시 지도부가 무장이라는 특수한 대항폭력 형태를 타협하지 않은 것이, 기회주의자들이 말하듯 정세를 고려하지 않은 모험주의가 아니라, 광주를 전국적 연대와 민주화 운동의 재개를 촉발할 수 있는 거점으로 사고한 현실주의적 판단에 기초한 것임을 말해 준다.
평택에서 우리는 동일한 상황을 만난다. 한반도 전쟁기지화와 기술관료적 행정에 맞서 평화적 생존권과 민주주의를 외치는 대중들에게 저들은 26년만의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광주에서처럼 저들은 가장 급진적인 저항을 철저히 탄압하고 고립시키는 것을 반동적 질서 재편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광주에서처럼 대중들은 그냥 패배하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잔혹한 행정대집행이 끝난 바로 다음날 5월 5일, 철조망을 끊어낸 대중들의 불복종투쟁이었다. 이는 사실 지도부에서 처음부터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광주에서 대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평택에서 대중들은 ‘올해에도 농사짓자’라는 원칙을 견지하는 가운데 이를 구현하는 창발적인 전술을 스스로 제시했고, 지도부는 이 같은 대중들의 지성과 의지를 총화하여 5월 5일 투쟁을 벌인 것이다. 대중들이 이처럼 비타협적인 불복종 투쟁을 벌여내자,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갖 기회주의 세력들은 이를 불법과 폭력으로 매도하기 시작한다.
국가의 불의한 폭력에 맞서 대중들의 저항이 대항폭력의 형태를 취할 때, 저들은 이를 기화로 저항의 정당성을 공격하고 더 강력한 탄압을 가한다. 이는 변수가 아니라 사실상 상수다. 이 때문에 타협할 수 없는 갈등간의 충돌이 심화될수록, 도덕적 우위를 점함으로써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고 폭력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것을 명분으로 하는 이른바 ‘비폭력’ 노선이 내외부에서 항상 제기된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하지만 비폭력이라는 가면을 쓰고 무원칙한 평화주의와 기회주의가 함께 입장해 대중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결국 불의에 굴복시키려 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광주 항쟁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기도 하거니와, 위에서 살펴보았듯 평택 항쟁 과정을 전후해서도 무원칙한 평화주의로 대표되는 동일한 기회주의가 발호한다. 이들은 비폭력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간디가 비폭력과 비겁함을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되며, 비겁한 것보다는 차라리 폭력을 사용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왜냐하면 비겁함은 폭력의 공포에 굴복해 원칙을 타협하는 것인 데 반해, 간디적 의미에서의 비폭력은 불의한 법에 비타협적으로 저항하면 필연적으로 전면에 나서게 되는 막대한 폭력에 굴하지 않고 그렇다고 원한과 복수로 귀결되지도 않으면서 비타협성을 유지하는 것을 기본 정신으로 하기 때문이다. 타협할 수 없는 원칙에 관한 비타협성을 유지하지 않는 비폭력이란, 대중들을 운동에 나서게 한 최초의 대의를 훼손하고 그/녀들을 무장해제시킴으로써 대중운동의 심각한 사기저하와 중도반단이라는 가장 해악적인 전술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이 공포에 대한 굴복과 무원칙한 타협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면서 도리어 원칙의 고수를 완고하거나 심지어 폭력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도덕적 측면에서도 극히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광주를 죽이는 타락한 민주화 세력에 맞서 오늘 투쟁하는 이들이 바로 광주의 벗이다
누구나 사후적으로는 역사적으로 옳다고 판명된 노선을 지지한다. 항일운동이나 광주항쟁에 관한 일반적인 평가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시점, 역사적 현재의 순간, 어떤 분명한 선험적인 규준이나 성공의 보증도 없고, 사태의 모든 전개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할 때, 그 같은 노선을 실행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역사의 전개 방향 자체, 기존 법질서와 국가의 정당성 자체, 그리하여 상쟁하는 계급들의 명운 자체를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질 때, 심지어 그 역관계마저 심하게 비대칭적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곳이야말로 정치적 진리와 변혁의 장소이며, 이는 승패 여부와 무관하게 그렇다. 1980년 5월 광주는 이의 가장 탁월한 사례다. 광주의 대중들은 패배했지만,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죽음과 시체로서 이곳을 지킴으로써, 80년대 이후 새로운 사회운동을 낳는 가장 거대한 원천이 된다.
물론 오늘날 광주는 저 타락한 민주화 세력으로 인해 박제화되고 모독되고 몇 번씩 다시 죽어가고 있다. 민중의 삶을 압살하는 신자유주의의 취약한 정당성을 보충하기 위해 저들은 매번 광주 망월동을 찾는다. 그렇게 해서 획득된 정당성을 가지고 한반도 전쟁기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이제는 26년만의 군 투입을 통한 평택의 압살까지 자행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같은 불의에 저항하는 대중들을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편향된 반미세력이라고 모독한다. 광주와 평택을 어떻게 비교하느냐고 말하면서 광주를 높이는 척 하지만, 실상은 광주를 가장 잔혹하고 뻔뻔스럽게 살해하고 있다.
80년 광주를 역사와 기억의 저 편으로 보내려는 자, 그 정신이 오늘날의 투쟁과 결합하지 못하게 획책하는 자, 그들이 바로 광주의 적이다. 그들에 맞서 투쟁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광주의 벗이다. 황새울에서 저들이 쳐 놓은 철조망을 뚫고 군인과 경찰이라는 조직된 폭력에 두려움 없이 맞서는 민중들. 오키나와에서 평화와 미군 없는 세상을 외치는 일본의 민중들. 독재에 맞서 투쟁하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흥얼거리는 동아시아 민중들. 반동적 질서재편에 맞서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외치고 투쟁하는 세계 민중들. 그/녀들이 바로 광주의 벗이다.
지난 5월 4일 대추리를 유린한 군경합동작전 ‘여명의 황새울’을 보고, 26년 전 광주를 학살한 ‘화려한 휴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군대를 비롯한 압도적이고 ‘합법적’인 물리력을 동원한 갈등의 억압, 갈등 지역을 고립시키려는 체계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외부와의 차단을 바탕으로 현지에서 자행되는 (준)계엄적 조치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배경을 이루는 미국…….
광주와 평택의 유사성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지배계급들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다. 윤광웅은 시간을 더 끌면 5․18을 연상시킬 것 같아 속히 군대를 투입했다고 뻔뻔스레 대답한다. 법질서와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대중들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서 군대도 동원할 수 있다는 지배계급의 발상은 평택에서도 광주에서처럼 발포를 했어야 했다는 지만원 따위의 극단적 대응에 길을 열어 준다. 이것이 몇몇 극단적 보수 세력의 망상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한명숙과 노무현의 발언을 통해 알 수 있다. 불법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기존의 실정법이 수호하는 불의에 맞서 저항하는 모든 대중들을 잠재적 폭도로 낙인찍어 탄압하는 동시에 법과 질서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저 태도. 그것이야말로 광주의 유혈 진압을 정당화하고 지지했던 근본 원인이었다. 이로써 우리는 오늘날 민주주의를 가장 크게 위협하고 반동을 체계적으로 양산하는 것이 다름 아닌 저 ‘타락한 민주화’ 세력, 신자유주의자들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렇게 5월 평택을 5월 광주와 동일한 상황으로 밀어 넣었으면서도, 지배계급들은 양자를 분리시키기 위해 갖가지로 노력한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같은 여론전에 NGO들을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 김동민 대표의 국정브리핑 기고문이다. 여기서 그는 이번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도한 언론들이 군경의 과잉진압만 부각시킬 뿐 반미의 경직된 흐름과 시위대의 폭력에는 눈을 감았다고 비난한다. 또한 이들 언론이 5월 평택 항쟁과 5월 광주 항쟁을 억지로 연결시킴으로써 불행한 사태를 유도하고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는 기막힌 발언을 내뱉는다.
6.15 공동위원회 남측 대표이자 원로 지식인으로 행세하는 백낙청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과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학자적 자질을 의심케 하는 무식한 주장을 하는 한편, 기본적으로 수도에 있는 미군기지가 이전되는 것이니 만큼 평택 미군기지 확장은 미국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고 사태의 본질을 체계적으로 호도한다. 그에게 있어 문제는 정부가 과잉진압을 하고 설득을 소홀히 했다는 것뿐이며, 이 점 역시 총리가 인정한 만큼 해결의 실마리가 주어져 있다.
또 한겨레신문은 5월 12일자 사설에서 시민사회단체 지도급 인사들이 제기한 ‘중립적인 사회적 협의 기구’를 주된 대안으로 말하면서, “협의기구가 활동하는 동안 강제집행과 영농행위를 동시에 중단”한다는 실로 기회주의적인 조치를 타협의 조건으로 내세움으로써 그 동안의 객관적 보도 노력을 무색케 한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입장을 편드는 가운데, 현재의 갈등을 절차상의 문제로 축소시킨다. 저들이 볼 때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막는 것은 정부의 졸속적인 사업 추진, 그리고 정부 못지 않게 ‘극단적’인 일부 저항세력들이다. 저들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수단을 통해 노무현이 말하듯 “억압된 사회, 권위주의 사회에서 자유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의 일부의 무질서․ 갈등”을 중재하는 매개자로 자임한다.
그러나 군을 동원한 폭압만큼이나, 첨예한 갈등을 앞에 두고 발호하는 이 같은 기회주의적 행태에서 우리는 1980년 5월 광주가 반복되는 것을 재발견한다.
광주와 평택에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했던 이유
물론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지배계급들이 극히 비민주적이고 기술관료적인 방식으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문제를 처리하려 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한 이는 단순한 현상 묘사에 그칠뿐더러, 문제의 적합한 해결을 가로막는다.
그 까닭은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평택미군기지 확장 및 이를 규정짓는 전략적 유연성 합의가 금융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사활적 이해에 반하는 모든 세력들을 정치군사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무장한 세계화’의 일환이라는 점, 그러나 이것이 한반도 및 동아시아 전반의 평화를 근본적으로 위협할 수밖에 없는 한에서 지배계급들이 이 사안의 쟁점화를 어떻게든 회피하고자 했다는 점에 있다. ‘내 땅에서 농사짓겠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어찌 보면 아주 소박해 보이는 요구에 입각한 팽성 주민들의 저항은 이 같은 은밀한 기도를 정면으로 막아선다. 이 때문에 더욱 강화되는 한미전쟁동맹의 호전성 및 남한의 지배계급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해 온 ‘민주화’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이는 지배계급에게 매우 심각한 정치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지배계급이 이 문제에 관한 대중들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한 것, 또 26년만의 군 투입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동원하면서까지 평택의 저항을 억압하려는 것은 이 같은 사안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정확히 동일한 상황을 만난다. 강금실은 5월 17일 망월동에 찾아가 광주항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었음에도 군사정권이 무력을 동원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5월 광주를 규정하는 정세를 이보다 피상적으로 진단할 수 있을까? 당시 지배계급이 신군부를 앞세워 광주를 학살한 것은, 남한자본주의의 근본적 위기라는 정세를 떼어놓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주지하듯 1979년에 이르러 박정희의 발전주의는 최종적으로 실패하고 남한자본주의는 붕괴 지경에 이른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중화학공업부문의 투자조정, 그리고 임금 및 농산물가격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핵심 골자로 하는 남한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서 이른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실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기를 대중들에게 체계적으로 전가시키려는 신자유주의적 시도에 대해 대중들은 온몸으로 저항한다. 부마항쟁과 YH 사건은 이를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저항은 결국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과 박정희의 죽음을 초래한다. 하지만 발전주의가 붕괴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하지 않는 것은 남한의 자본주의적 미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의 저항을 체계적으로 말살할 억압적 토대를 구축하고 이에 입각해 남한 사회를 반동적으로 재편하는 것이 당시 지배계급들에게 사활적 과제였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이 한가로이 말하는 ‘평화적 해결’이 아니라 그처럼 끔찍하고 살인적인 폭압이 광주에 가해진 것은, 바로 이 같은 정세를 배경으로 한다.
바로 여기에 광주와 평택의 구조적 동일성이 있다. 양자 모두 지배계급이 사활적으로 추진하는 반동적 질서 재편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이 때문에 지배계급은 매우 극단적이고 잔혹한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 그들의 저항을 짓누른다. 단지 폭력만이 아니다. 1980년 광주에서도, 2006년 평택에서도 아주 막대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가해진다. 이렇듯 지배계급은 자신의 정치적 명운을 걸고 철저한 사전계획에 따라 저항을 진압한다. 그에 비해 이에 맞서는 피지배계급들은, 적어도 최초의 주체적 태세 면에서는, 상당히 소박한 모습을 보인다. 광주에서도 평택에서도, 지배계급의 어마어마한 탄압이 비로소 사태의 본질과 엄중함을 가르쳐 주는 역설이 초래된다. 이 과정에서 저항세력들은 사태의 엄중함을 받아들이고 그 수준의 대응을 모색하려는 경향과, 사태의 엄중함을 감당하지 못한 채 다양한 방식으로 지배계급에게 굴복하려는 경향 사이에서 동요한다. 이를 틈타 온갖 기회주의가 침투한다. 바로 이 점에서도 광주와 평택은 정확히 동일한 상황을 겪고 있다.
무장해제와 자기파괴를 넘어서 - 광주의 무장과 평택의 철조망 철거가 의미하는 것
가장 대표적인 기회주의는 바로 무원칙한 ‘평화주의’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 평택 문제에 대해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과 충돌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이때 전제가 되는 것은 바로 기존의 실정법에 대한 복종이다. 국가가 설정한 한계를 넘지 않는 한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주의가 이상화하는 타협은 서로 갈등하는 원칙들 모두를 왜곡하고 타락시키는 경향을 갖는다. 타협은 갈등 일반을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갈등의 표출을 회피하기 위해 서로의 원칙을 ‘거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거래는 상대편 원칙에 속하는 본질적 측면의 희생과 자신의 원칙에 속하는 본질적 측면의 희생을 ‘교환’한다. 이러한 거래는 갈등의 근본적인 쟁점을 흐리게 만들뿐만 아니라, 양쪽 원칙 모두의 왜곡과 타락으로 귀결된다. 바로 이 때문에 평화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한 준거점으로 삼곤 하는 간디는 원칙간의 갈등이 문제인 한에서 상대편에게 설득되거나 패배할망정 타협은 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우리의 문제로 되돌아오면, 죽느냐 사느냐, 독재냐 민주주의냐, 기지와 전쟁이냐 쌀과 평화냐의 갈등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을 갖는다. 이렇듯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을 타협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힘으로 한쪽 원칙을 억압하는 것이거나, 타협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타협하기 쉬운 부차적 문제로 쟁점을 호도함으로써 결국 본질적 문제를 회피하고 무력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광주와 평택 모두에서, 기존의 실정법, 그리고 국가가 대중들에게 강제하는 한계는 근본적인 불의와 억압, 배제를 실행하는 도구와 다를 바 없었다.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도, 평택 대추분교를 철거하고 농민들의 땅에 철조망을 친 것도 모두 실정법에 따른 것이었다. 죽지 않기 위해 무장을 금지하는 국가의 제한을 넘어서야 했던 광주에서도, 농사를 짓기 위해 ‘군사보호시설법’에 따라 설치된 철조망을 넘어서야 했던 평택에서도, ‘공권력’이라는 국가의 조직된 무장력이 이들의 앞을 막아섰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히며, 공권력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중들을 유린한다.
이처럼 타협할 수 없는 원칙들 간의 갈등 앞에서 기존의 법질서가 정상적인 중재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의를 체계적으로 집행할 때, 즉 말의 강한 의미에서 ‘압제’로 타락할 때, 주권자로서 대중들은 기존 법질서에 대한 저항권을 발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정은 불가피하게 일정한 혼란과 무질서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대중운동의 새로운 조건이 된다. 우선 그 체제의 성격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체제의 재생산을 자신의 고유한 임무로 하는 국가는 법질서의 수호와 확립이라는 명목으로 경찰과 군대 등 억압적 장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주권자로서 대중들에 대한 반동적 공세를 강화한다. 또한 대중들에게는 법으로 대표되는 안정적 질서나 규범에 의존하지 않는, 주권자로서의 보다 창발적인 결정과 막대한 책임이 요구된다. 한편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대중들의 불안을 틈타 무원칙한 평화주의와 기회주의가 더욱 크게 발호할 수도 있다.
80년 5월 광주는 이 같은 조건을 구체적으로 예증한다. 특히 대중들의 무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기회주의의 본질을 극명히 폭로한다. 당시 기회주의자들은 무원칙한 평화주의라는 모습을 띠었다. 그들은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 작정인가’라고 말하면서, 대중들의 대항폭력이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올 뿐이기 때문에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당시 대중들의 대항폭력은 자기파괴가 아니었으며, 그에 대한 대안이 무장해제라는 비폭력일 수는 없다. 지배계급들이 선제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한에서, 대중들의 저항은 필연적으로 대항폭력의 계기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구조적 폭력을 해체할 수 있는 인식 및 노선이 존재하는가, 동시에 대항폭력의 도착가능성을 제어할 수 있는가 라는 기준에 따라 대항폭력을 구체적으로 분별하고 개조하는 것이다.
윤상원 열사로 상징되는 최후의 항쟁 지도부는 자기파괴도, 무장해제도 아닌 반폭력의 길을 제시한다. 주지하듯 광주 시민들은 항쟁 과정에서 계엄군이라는 가장 살인적인 폭력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창발적으로 다양한 저항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계급들조차 놀라 마지않았던 질서 유지 능력을 통해 자신들의 대항폭력이 어떤 의미에서도 자기파괴적이지 않음을 감동적으로 입증한다. 광주의 최후 지도부는 이 같은 대중들의 지성과 목소리를 도청 앞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조직하고, 이에 힘입어 무원칙한 평화주의를 앞세운 기회주의 세력을 교체한다. 5월 26일 외신 기자회견에서 승리에 자신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윤상원 열사는 잠시 생각하다 ‘7일’ 곧 ‘일주일만 버틸 수 있다면’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당시 지도부가 무장이라는 특수한 대항폭력 형태를 타협하지 않은 것이, 기회주의자들이 말하듯 정세를 고려하지 않은 모험주의가 아니라, 광주를 전국적 연대와 민주화 운동의 재개를 촉발할 수 있는 거점으로 사고한 현실주의적 판단에 기초한 것임을 말해 준다.
평택에서 우리는 동일한 상황을 만난다. 한반도 전쟁기지화와 기술관료적 행정에 맞서 평화적 생존권과 민주주의를 외치는 대중들에게 저들은 26년만의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광주에서처럼 저들은 가장 급진적인 저항을 철저히 탄압하고 고립시키는 것을 반동적 질서 재편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광주에서처럼 대중들은 그냥 패배하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잔혹한 행정대집행이 끝난 바로 다음날 5월 5일, 철조망을 끊어낸 대중들의 불복종투쟁이었다. 이는 사실 지도부에서 처음부터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광주에서 대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평택에서 대중들은 ‘올해에도 농사짓자’라는 원칙을 견지하는 가운데 이를 구현하는 창발적인 전술을 스스로 제시했고, 지도부는 이 같은 대중들의 지성과 의지를 총화하여 5월 5일 투쟁을 벌인 것이다. 대중들이 이처럼 비타협적인 불복종 투쟁을 벌여내자,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갖 기회주의 세력들은 이를 불법과 폭력으로 매도하기 시작한다.
국가의 불의한 폭력에 맞서 대중들의 저항이 대항폭력의 형태를 취할 때, 저들은 이를 기화로 저항의 정당성을 공격하고 더 강력한 탄압을 가한다. 이는 변수가 아니라 사실상 상수다. 이 때문에 타협할 수 없는 갈등간의 충돌이 심화될수록, 도덕적 우위를 점함으로써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고 폭력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것을 명분으로 하는 이른바 ‘비폭력’ 노선이 내외부에서 항상 제기된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하지만 비폭력이라는 가면을 쓰고 무원칙한 평화주의와 기회주의가 함께 입장해 대중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결국 불의에 굴복시키려 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광주 항쟁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기도 하거니와, 위에서 살펴보았듯 평택 항쟁 과정을 전후해서도 무원칙한 평화주의로 대표되는 동일한 기회주의가 발호한다. 이들은 비폭력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간디가 비폭력과 비겁함을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되며, 비겁한 것보다는 차라리 폭력을 사용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왜냐하면 비겁함은 폭력의 공포에 굴복해 원칙을 타협하는 것인 데 반해, 간디적 의미에서의 비폭력은 불의한 법에 비타협적으로 저항하면 필연적으로 전면에 나서게 되는 막대한 폭력에 굴하지 않고 그렇다고 원한과 복수로 귀결되지도 않으면서 비타협성을 유지하는 것을 기본 정신으로 하기 때문이다. 타협할 수 없는 원칙에 관한 비타협성을 유지하지 않는 비폭력이란, 대중들을 운동에 나서게 한 최초의 대의를 훼손하고 그/녀들을 무장해제시킴으로써 대중운동의 심각한 사기저하와 중도반단이라는 가장 해악적인 전술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이 공포에 대한 굴복과 무원칙한 타협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면서 도리어 원칙의 고수를 완고하거나 심지어 폭력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도덕적 측면에서도 극히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광주를 죽이는 타락한 민주화 세력에 맞서 오늘 투쟁하는 이들이 바로 광주의 벗이다
누구나 사후적으로는 역사적으로 옳다고 판명된 노선을 지지한다. 항일운동이나 광주항쟁에 관한 일반적인 평가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시점, 역사적 현재의 순간, 어떤 분명한 선험적인 규준이나 성공의 보증도 없고, 사태의 모든 전개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할 때, 그 같은 노선을 실행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역사의 전개 방향 자체, 기존 법질서와 국가의 정당성 자체, 그리하여 상쟁하는 계급들의 명운 자체를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질 때, 심지어 그 역관계마저 심하게 비대칭적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곳이야말로 정치적 진리와 변혁의 장소이며, 이는 승패 여부와 무관하게 그렇다. 1980년 5월 광주는 이의 가장 탁월한 사례다. 광주의 대중들은 패배했지만,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죽음과 시체로서 이곳을 지킴으로써, 80년대 이후 새로운 사회운동을 낳는 가장 거대한 원천이 된다.
물론 오늘날 광주는 저 타락한 민주화 세력으로 인해 박제화되고 모독되고 몇 번씩 다시 죽어가고 있다. 민중의 삶을 압살하는 신자유주의의 취약한 정당성을 보충하기 위해 저들은 매번 광주 망월동을 찾는다. 그렇게 해서 획득된 정당성을 가지고 한반도 전쟁기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이제는 26년만의 군 투입을 통한 평택의 압살까지 자행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같은 불의에 저항하는 대중들을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편향된 반미세력이라고 모독한다. 광주와 평택을 어떻게 비교하느냐고 말하면서 광주를 높이는 척 하지만, 실상은 광주를 가장 잔혹하고 뻔뻔스럽게 살해하고 있다.
80년 광주를 역사와 기억의 저 편으로 보내려는 자, 그 정신이 오늘날의 투쟁과 결합하지 못하게 획책하는 자, 그들이 바로 광주의 적이다. 그들에 맞서 투쟁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광주의 벗이다. 황새울에서 저들이 쳐 놓은 철조망을 뚫고 군인과 경찰이라는 조직된 폭력에 두려움 없이 맞서는 민중들. 오키나와에서 평화와 미군 없는 세상을 외치는 일본의 민중들. 독재에 맞서 투쟁하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흥얼거리는 동아시아 민중들. 반동적 질서재편에 맞서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외치고 투쟁하는 세계 민중들. 그/녀들이 바로 광주의 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