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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7-8.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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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이후 그리고 좌파의 정치

서동진 |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문화학과 강사
5. 31이라는 사건

5. 31 선거가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 결과에 충격을 받은 이들은 아마 “열린우리당”을 빼곤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알다시피 수많은 여론조사는 일찌감치 한나라당이 압승할 것임을 예상하였고 이는 그대로 현실로 나타났다. 집권정당이 선거에서 진다는 것은 흔한 일이므로 그리 대단히 여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번 선거 결과가 남다르게 받아들여진 데는 이번 선거 결과가 동일한 구조를 재생산하는 상황 전개의 한 계기로 여겨질 수 없는 어떤 특징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알다시피 현실적인 사태와 구조적인 사건이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태는 예외적으로 구조의 논리를 집약하고 현실화하는 것처럼 등장할 수 있다. 평범한 사회적 사태와 정치적 사건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번 5.31 선거는 바로 그러한 구조적 논리와 현실적 사태가 겹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적지 않은 이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예컨대, 이번 선거 결과가 1987년 이후의 역사적 주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는 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이는 현재 “열린우리당”으로 대표되는 정치세력(흔히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불리는 헤게모니 블록)의 역사적 유효기한이 임박했으며 어쩌면 이미 상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그런 판단이 막연하고 불명료한 것일지 몰라도 그렇다고 이를 부인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판단을 거칠게 풀이해보자면 이럴 것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란 이름의 정치적 기획을 주도했던 세력의 헤게모니는 역사적 반환점을 지났다. 그들이 추진한 “민주화 기획”이란 정치는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전환과 절묘하게 호흡을 맞추어 왔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현재 진보진영이 자신의 정치적 실천을 결정하는 수많은 곤란한 물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물음들 가운데 당장 떠오르는 몇 가지를 열거해보자. 먼저 “민주화 기획”은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위한 정책과 제도 그리고 여러 가지 사회적 관행을 가리키는 것일까. 거칠게 단순화시켜 말해, 신자유주의적 이행이란 사회적 현실을 가리키고 민주화 기획이란 그런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행위나 제도로서의 정치에 불과한 것일까. 따라서 우리는 소박하게 “민주화 기획”이 충분히 민중적이지 못하다는 것, 충분히 평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주장만으로 너끈히 “민주화 기획”을 극복하고 “민주화 이후”의 진보 정치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인 전환을 겪은 이후 변화된 현실을 보다 깊이 반영하고 그 현실과 보다 일치된 투쟁만으로 우리는 진보 정치를 충분히 실천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아가 “민주화 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1987년 이후 자본의 정치가 과연 그러한 내용으로 모두 환원될 수 있는 것일까. “민주화 기획”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 이상의 무엇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정치”를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런 복잡한 물음과 직면하여 있고 이 물음들에 답하지 않는 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물론 정치란 사회적 현실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정치는 사회에 근거한다거나 사회적 현실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언제나 정치는 이미 주어진 역사적 조건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 정치는 무(無)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역사적 재료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진보진영은 언제나 자신의 정치를 자본주의의 역사적 법칙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자동적으로 정치가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표상한다는 생각을 끌어낼 수는 없다. 보편적인 시민으로서의 노동자와 직접적인 생산과정에 참여하며 구체적인 사회적 생활을 영위하는 노동자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곧바로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편적인 시민 혹은 인민으로서의 노동자는 분명 직접적인 사회 현실 속에 놓여있는 노동자와 다르다. 이 두 가지를 어느 하나로 환원하는 것, 즉 정치로부터 사회가 도출된다는 식의 입장을 절대화하는 것이나 아니면 정치는 사회를 반영하고 그것을 표상하는 것이라는 식의 입장(예컨대 경제주의)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특수한 사회계급인) “노동자의 해방을 통해서만 만인(인민)의 해방이 가능하다”는 널리 알려진 마르크스의 수수께끼같은 주장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노동자라는 사회적 행위자와 인민이라는 정치적 주체를 단숨에 연결하는 이 놀라운 선언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진보정치를 계급정치라고 할 때 그 때의 계급정치란 인구 혹은 주민 중의 일부에 속하는 특수한 사회집단으로서의 계급이 있고 그 계급의 이해를 대표하는 것이라는 식의 이해와 전연 무관하다. 계급정치가 함축하는 뜻은 사회 안에 계급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계급적 적대를 만들어냄으로써만 자본주의는 자신의 사회를 만들어낸다는 것, 계급으로서 살아간다는 것과 사회를 형성한다는 것은 같은 과정이라는 것,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착취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사회 “내부”에서 자신과 자본가계급 사이에 조화로운 이해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회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뜻에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만인의 해방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계급정치는 사회를 형성하는 행위로서의 정치라는 입장과 정치는 항상 그것의 외부인 사회(마르크스주의자는 물론 이것을 “경제”라고 부른다)에 준거한다는 입장을 함께 묶어내는 입장이다. 따라서 정치로부터 사회가 나오는 것도 또한 사회로부터 정치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하위 영역(경제, 문화, 정치 등) 가운데 하나가 정치가 아니라는 생각은 좌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정치가 사회로부터 자율적이고 심지어 정치로부터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가 만들어지지만 또한 동시에 그 정치가 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재료를 통해, 즉 이미 주어진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만 출현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좌파에게는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생각을 또한 당연한 듯이 잊을 수 있다.
1987년 이후의 지배적인 정치를 비판하고자 할 때 진보진영이 저지른 잘못은 바로 이런 당연한 생각을 잊은 채 지냈다는 점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민주화 기획”을 1987년 이후의 경제적 현실의 변화와 동일시하는 것, 그리하여 “민주화 기획”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통해 형성된 자본주의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일치라든가 조응관계를 찾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사고를 마감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좌파정치의 핵심적인 곤경이 놓여있다. 좌파정치는 신자유주의 비판이란 이름으로 투쟁을 수행하여왔지만 그것으로 온전히 현재의 “정치”, 즉 “민주화 기획”의 정치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 기획”과 그것의 정치학

1987년의 민주항쟁 이후 정권들이 교체되었고 각각은 나름의 통치 프로그램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민주화 기획을 각 정권이 실행한 통치의 내용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 1987년 이후 민주화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이행이라는 특성을 견지하고 있었고 이는 연속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외환위기 이전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은 적어도 외환위기 이후의 노사정 대타협 혹은 노동유연화에 버금갈만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교육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노동정책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사이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따지는 것이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니란 점을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교육 정책이 고용정책을 비롯한 노동의 사회적 조직과 통제에 관련한 정책과 거의 같은 비중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재생산과 관련되어있다는 것은 달리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민주항쟁 이후 20년간 우리는 단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논리에 따라 한국자본주의를 재편하기 위한 정치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라고, 새로운 자본주의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자본의 정치였던 오직 신자유주의적 정치가 있었을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왜 그럴까.
안타깝게도 한국의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비판이란 이름으로 민주화 기획을 비판하는데 머물렀을 뿐 민주화기획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효력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진보진영은 바로 그 민주화 기획의 “이데올로기”에 갇힌 채 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그 결과는 당연히 민주화기획을 이끈 세력과 구분되는 거의 유일한 “정치” 세력이라 할 한나라당이 기사회생하여 마침내 집권을 눈앞에 둘 지경에 이르렀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리고 이변이 없는 한 이들은 다음 대통령선거를 통해 집권할 것이고 또 이변이 없는 한 한 번의 집권을 끝으로 역사의 지평선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왜 우리는 이런 허무맹랑한 시나리오를 예상하는 것일까. 걸핏하면 수구보수집단이라고 규탄 받던 정치집단이 즉 이미 현실적으로 자신이 대표하여야 할 사회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여전히 현실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 자신이 대표할 현실이 없는 데도 그것이 끊임없이 상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왜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령으로 남아 현실 속에서 살아있는 죽음이 되어 활보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이해집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 즉 거칠게 말하자면 그들은 무(無)를 대표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표하던 사회적 집단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더 이상 역사적 유효성이 없는 집단이다. 그들은 국가의 보호와 후견을 통해 성장하던 재벌이라는 독점자본도 또한 방대한 관료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분명히 현실적으로 죽은 집단이었지만 정치적 공간 속에서는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 비밀은 그들이 “열린우리당”으로 대표되는 정치 집단과 구분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 집단이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한나라당은 사회적으로 무의미하고 심지어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정치세력이지만(그들의 정책과 프로그램은 온갖 것을 뒤섞어놓은 잡탕에 불과하다) 그들이 차지하는 정치적 위치는 매우 뚜렷하고 더불어 위력적인 것이었다. 무를 대표한다는 것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은 부정성의 공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부정성의 공간이란 지금 여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할 때의 지금 여기, 그것을 가리키는 개념적 용어를 빌자면 실정성(positivity)의 공간의 반대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주어진 사회가 있고 그 사회를 인식하기 위한 상징적 질서가 있을 때, 우리는 그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현실”을 가지게 된다. 실정성의 공간이란 바로 그런 자명하고 당연시되는 현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부정성의 공간은 바로 “지금 여기가 유일한 것이 아니다”는 믿음 혹은 거리두기가 뿌리를 내리게 되는 곳이다. 결국 부정성은 사회 혹은 이미 주어진 현실의 바깥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그렇다고 현재의 사회와 무관한 자의적인 상상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낭만적인 유토피아주의일 뿐이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지배적인 표상 즉 사회를 인식하는 방식이 한계에 다다르는 지점, 그것의 비일관성을 드러내는 지점에서 터져 나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나라당은 바로 그 지점에 서있을 수 있었다.
한나라당은 어쩌면 몰락하고 있는 소상인, 자영업자, 주변화된 노동자계급 등 잡다한 계층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대표하는 사회계층은 현재의 정치적 공간에서 자신을 대변할 어떤 정치적 주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고통스럽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으며 그들의 목소리를 분절할 수 있는 어떤 정치적 상징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그 자체로 현재의 정치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고발하고 증언한다. 그들은 사회적 삶 내부에 있지만 정치적 삶은 부여받지 못한 이들이다.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피해자”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피해자들을 단순히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 생명으로 다루지 않고 현재의 사회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투쟁 속에 있는 주체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정치적 주체(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적 약자로 다뤄지는 것(이를테면 현재의 “양극화” 담론과 “고용과 함께 하는 성장”이란 담론을 생각해보라)에 머무르는 한 그들은 정치적 주체가 되기는커녕 정치의 장으로부터 영원히 배제된 채 머물러있을 것이다.
이미 누구나 수긍하는 조직된 사회가 있고 그 속에서 각자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의 이해를 대표하고 발언하는 것이라면 그 목소리는 “여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치의 공간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그와 다른 목소리이다. 정치적 사건은 이해와 욕구의 실현을 위한 여론을 종합하고 대표하는 것에서 출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치란 여론조사와 전문가들의 과학적 지식이 필요한 사회적 관리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정치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한 정치, 한국 사회에서 이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인 “민생정치”의 현장에서 한나라당이 행하는 정치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알다시피 한나라당은 “차떼기 당”이라는 오명이 알려주듯 반(反)민생적인 정치세력으로 악명이 높다. 그들은 민생정치에 관한 한 아무런 책임 있는 행위를 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유일한 짓이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정치란 것이라 감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그들이 아무 것도 대표하지 않으면서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시늉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 그들이 대표하는 사회란 그것을 이루고 있는 성원들 모두가 망라된 유기적인 전체로서의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그 사회 속에서 배제된 자들, 즉 그 사회를 형성하고 규정하는 근본적인 결정과 선택의 공간에서 배제된 채 막연히 피해자나 약자로 분류된 채 살아가는 자들이 상상하는 사회이다. 즉 한나라당은 놀랍게도 지금 사회의 “불가능성”, 즉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사회를 상상하기 위해 결국 없는 것처럼 가정된 자들을 대표한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의 일부가 아니라 사회의 불가능성을 표시하고,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사회라는 상상을 방해하고 자본주의적 적대의 위치를 가리키는 바로 그러한 이들을 대표한다. 물론 문제는 그들이 한나라당을 선택했다는 것이고, 이는 또한 한나라당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문제가 될 것이다. 한나라당을 지지한 이들은 “열린우리당”이 표상하는 사회, 그것이 만들어내고 당연시하여 온 현 사회, “지금 여기가 유일한 세상이다”는 메시지를 수락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나라당을 찍은 것은 “우리의 이해를 보다 많이 대변하는 정당은 한나라당이다”는 평범한 대표의 메시지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결정의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전환 이후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적 주체가 출현할 수 있음을 알리는 징후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참담하게도 그 역할이 한나라당의 손에 맡겨졌다는 것이다. 현재 한나라당이 가진 유일한 가치는 “다른 정치”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대신하는 은유로 작용한다는 점에 있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적대라고 말할 때 그것은 두 개의 외적인 실재(예컨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라는 두 “주체”) 사이의 갈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자기 스스로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경향적인 모순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파괴해야 한다는 운명, 자본주의가 가능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으로서의 적대가 현실적인 정치투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헤게모니란 통속적인 지식사회학이 제공하는 정의, 즉 물질적 지배에 더한 도덕적, 정신적 지배로서의 헤게모니란 개념이 아니라 라클라우같은 정치학자가 제시했던 헤게모니에 대한 이해에 가깝다. 그는 헤게모니를 은유란 개념과 연결하며, 자본주의의 적대가 현실적인 이해의 대립으로 직접 현실화할 수 없지만 그것이 “우리”와 “그들”이라는 헤게모니적 접합을 통해 현상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헤게모니란 자본주의적 적대가 초래하는 수많은 사회적 효과(노동자에 대한 착취, 여성의 예속, 생태 파괴, 인종주의 등)를 접합하여 우리와 그들의 관계로 은유한다. 그리고 그 은유의 과정을 우리는 헤게모니적 접합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나라당은 다양한 사회적 갈등 속에 놓여있는 사회집단을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접합시키는 헤게모니를 발휘할 수 있을까. 현실의 사회적 조건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다양한 사회 집단을 “인민”으로 혹은 개발독재 시대의 은유를 빌자면 “국민”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변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한나라당이 현기증나리만치 성공을 거둔 이후에 보여주는 행태는 이를 반증한다. 한나라당이 수구보수세력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현대화하여한다고 주장하는 한나라당의 분파가 당 대표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박근혜’라는 정치지도자의 개입과 후원에 따른 결과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그 성공을 가능케 했던 원인 자체를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보수파(?)는 자신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세력이라 할 수 있다. 한나라당이 “현실적인” 정치세력이 되면 될수록 그것은 열리우리당과 같은 정체성에 도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들을 “탈정치화”시킬 것이다. 물론 음침한 예상이지만 한나라당이 비록 반동적인 방식이겠지만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구성할 수 있을 수 있다고 예상해 볼 수 있다. 만약 그런 가능성이 실현된다면 우리는 초유의 파퓰리즘적인 정권을 얻게 될 것이고 역사는 돌이킬 수 없게 후퇴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도 능력도 한나라당에게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진보진영의 역할이다. 아마 진보진영은 다시 한 번 집권 가능성에 직면할 수도 있다. 현재의 능력과 조건으로 그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되겠지만 물론 그것을 불가능한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기회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칠 것인지 전연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상상하고자 하는 것까지 억압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점은 현재 진보진영이 자신의 정치에 관한 사고를 전환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화” 이후의 정치

5.31선거의 결과는, 어느 정치학자의 표현을 빌자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실패를 최종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0년간 지속되어왔던 지루한 민주주의의 실험은 끝이 났다. 따라서 끝난 것에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끝난 것이란 바로 민주화란 이름으로 진행되었던 정치적 기획이다. 물론 그 정치적 기획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었는지 세심하게 묻고 그를 비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1987년 이후의 민주화 기획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목적에 이바지하고 위기에 직면한 자본의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에 불과했다고 강변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화 기획이 왜 성공할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를 외면하는 소극적 비판에 불과하다. “그들은 빈곤과 실업을 양산했을 뿐이다”, “그들의 민중의 이해에 충실하지 않다”, “그들은 공공성을 거스르고 있다” 등의 비판은 굳이 좌파 정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약간의 감상적 도덕과 약간의 자유주의적 상식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비판 안에 적어도 좌파에게 고유한 정치적 사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를 주도하여왔던 민주화 기획이란 것과 그것을 조정한 핵심적인 담론은 이른바 “반공훈육사회 비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군사독재 비판”에 들어있던 잡다한 정치적 지향들 속에서 점차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렇다면 군사독재 비판에서 반공훈육사회비판으로 정치적 기획의 헤게모니가 이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알다시피, 87년 민주항쟁 이후 짧은 기간 동안 우리는 거의 마법에 홀린 것과도 같은 순간을 살았다. 이 시기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효력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면서 생겨난 공백이었고 새로운 정치가 출현하기 위한 조건을 형성하는 때였다. “군사독재 비판”이라는 기획 안에 들어있던 다양한 정치적 계기들이 무엇이었는지 굳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바로 1987년 민주항쟁의 시기 동안 우리는 놀랍게도 다양한 사회집단들이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과 더불어 정렬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란 “민중”이다. 그리고 이때의 민중이란 나름의 욕구와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회집단들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구분되는 자율적인 주체, 이를 위해 마련된 유일한 이름인 “정치적 주체”를 가리킨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는 군사독재 때문에 자신들이 노예와도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고 믿었으며, 학생들은 군사독재 때문에 고문과 검열, 탄압이 횡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다. 교사들은 바로 군사독재 때문에 수많은 학생들이 권위적인 규율과 입시지옥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고 믿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농민들은, 자영업자들은.... 그리고 그들은 민중이란 이름으로 놀랍게도 응축되었다. 그리고 이 때의 민중을 그것을 구성하는 각 계급이나 집단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둘 사이의 거리를 지울 수 없다는 점 역시 명백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민중이 앞서 말한 사회적 적대의 은유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주체는 언제나 불안정한 것이다. 그것은 곧 사회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규칙과 제도, 관행으로 현실화되어야 한다. 즉 정치적 주체는 사회적 삶의 행위자들과 대응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지는 장소이다. 헤게모니 투쟁이 바로 이런 정치적 주체를 현실 속의 사회적 행위자 그리고 사회적 현실을 규제하는 제도와 전략으로 번역해내는 것이라면 진보진영은 그 헤게모니 투쟁에서 명백히 실패하였다. 승리한 것은 바로 우리가 “민주화 기획”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정치이다. 물론 그것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개혁의 프로그램으로 그리고 그와 연관된 다양한 사회적 개조의 전략과 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 기획”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 “반공훈육사회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정치적 사고를 흡수하며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을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일터에서의 “핵심인재”와 “지식노동자”, 학교에서의 “자기주도적 평생학습자”, 일상생활에서의 “자신을 책임지고 돌보는 능동적인 개인”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주체의 형태로 다양하게 마주하고 있다. 정치란 정치적 주체성의 형성을 위한 투쟁, 현실의 사회적 행위자와 구분되는 정치의 공간에 속하는 주체를 구성하는 투쟁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좌파는 군사독재비판에서 출현한 정치적 주체인 “민중”을 평범한 사회적 계층의 집합으로 환원하거나(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주된 경향이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본래적 의미에서의 신자유주의, 즉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기획으로서의 신자유주의에 굴복하였다.
후자의 예는 지난 20년간 성행하였던 좌파 담론의 추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반공훈육사회 비판”은 민주주의를 정상화한다며, 실질적 민주화 이전에 확충되어야할 형식적 민주주의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는 숱한 이론적, 실제적 이데올로기를 생산하여 왔다. 물론 이런 이데올로기 안에는 잡다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신세대 담론에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지적 유행까지, 지역주의, 권위주의, 반공주의, 남성우월주의 나아가 “우리 안의 파시즘” 비판에서부터 다문화주의와 인권의 담론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주장들. 물론 그것이 1987년 이후 “민주화 기획”이라는 정치의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관료성을 비판하고 훈육사회의 잔재를 규탄하는 좌파 지식인들과 이들 정부의 규제와 간섭을 비판하는 기업가와 경영담론 사이에는 그다지 거리가 없다. 그리고 아직도 내내 불충분하기만 하다고 비판받는 그 자유화의 프로그램을 “개혁”이란 이름으로 추진하여 왔던 “민주화 기획”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5.31 선거”란 바로 그 위기가 마침내 적나라하게 분출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5.31선거에서의 패배는 신자유주의적 한국 자본주의의 개조 프로그램에 다름 아니었던 “민주화 기획”의 실패를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 현실에서 출현하는 고통과 곤란의 효과는 아니었다. 만약 그것뿐이었다면 우리는 당연히 “5.31 선거”를 마주하기 이전에 거리에서의 투쟁과 마주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적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투쟁(노동해방)과 현실 속에서 투쟁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인간행방)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발리바르라는 정치학자의 표현을 빌자면 평등 없이 자유 없고 자유 없이 평등이 없는 것이다. 평등은 경제에 속하는 것이고, 자유는 정치에 속하는 것이라는 상식적인 믿음은 거부되어야 한다. 평등을 위해 투쟁하는 주체인 노동자가 되는 것은 시민 혹은 인민으로서의 노동자가 되는 것과 동일한 문제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굳이 좌파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문제이다. 국가보안법의 폐지 없이 노동자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뼈저리게 깨달아 왔던가. 그러나 “민주화 기획”의 정치를 비판할 때 자유 없는 평등(경제주의적 신자유주의 비판) 그리고 평등 없는 자유(반공훈육사회 비판) 사이에서 동요하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요점은 간단하다.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의 정치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사회적 현실과 그 현실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해와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으로서의 정치와 그것과는 구분되는 정치, 즉 사회적 현실에 사로잡혀있는 주체를 그것을 변화의 대상으로 응시할 수 있도록 하는 주체로 변화시키는 정치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물론 다른 것일 수도 없고 또한 달리 취급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진보진영이 “민주화 기획”의 주역이었던 현재의 지배 세력과 다른 점이 오직 “보다 좋은, 보다 많은 민생정치”를 외쳤다는 것이라면, 이는 슬픈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제시하면 할수록 그리고 보다 많은 현실적인 대안과 정책을 내놓으려 애쓸수록 정반대로 진보진영이 비현실적인 세력으로 비쳐지기만 하는 악순환으로부터 영원히 헤어날 수 없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대안은 모두 훌륭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는 누구나 알고 있는 패배적인 태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른바 “현실 정치” 혹은 “민생 정치”의 덫에 걸리는 한 진보진영은 다른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결정의 행위에 영원히 이를 수 없다. 그 결정의 행위는 가능한 것을 벗어나 즉 현재의 상태, 주어진 사회로부터 불가피하게 벗어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민생정치 안에 그런 선택의 공간은 없다.
가난한 자들이 노동자계급이 될 때,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의 행위를 통하여 변화시킬 대상으로 바라보게 될 때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때 그들은 특수한 이해의 담지자에서 보편적인 주체가 된다. 노동자의 해방이 없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회라는 것을 그들이 선언할 때, 그리고 그들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책임을 지닌 주체로 자신을 자각할 때 자본주의사회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사회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과정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회적 생명”(민생정치가 말하는 그 민생)을 다시 정치적 주체인 “인민”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진보진영에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런 인민을 만들어내는 일, 정치적 주체화의 투쟁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모든 사회적 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라면 진보진영에게 정치란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있다. 진보진영의 고역스러운 투쟁은 정치적 주체가 없는 투쟁,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으로서의 정치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굳이 진보진영의 정치라 불릴 이유가 없다. 투기자본가들과 초국적자본의 기업가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거스를 수 없는 자연적인 운명인양 떠들어대며 그것의 측은한 피해자들을 향하여 선의 가득 한 기부와 자선을 퍼붓고 있다. 나눔과 보살핌, 배려와 존중의 사회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호소하는 대기업들의 광고를 우리는 하루 종일 티비에서 마주하고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정치적 주체를 빚어내는 일이 바로 지금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주어진 과제다. 물론 그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음을 회피하는 한 우리는 진보진영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현실에서 벗어날 어떤 출구도 없다는 점 역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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