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기획은 유효한가?
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과 헤게모니』, 박상훈 엮음, 후마니타스, 2006
1. 민주화 기획의 기본 논리
문민정부와 국민정부를 잇는 민주정부 3기로 평가되는 참여정부의 몰락이 거의 가시화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지배적인 담론인 ‘민주화 기획’을 돌아보는 일은 의미가 없지 않다. 물론 해마다 이런저런 기념일을 전후로 쏟아지는 수많은 민주주의 논문들을 꼼꼼히 읽는 일은 시간낭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인 최장집의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세계 자본주의의 변혁을 상정하지 않을 때 ‘민주화 기획’이 어디까지 급진적/근본적(radical)일 수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적절한 준거점이다.
최장집의 민주화 기획은 우선 민주주의가 실패했다는 평가에서 시작한다. 전체적인 논리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전작의 제목에 잘 드러나 있다. 민주화는 성공했지만(선거를 핵심으로 하는 정당 간의 경쟁 규칙을 확립했지만), 민주주의는 실패했다(보수독점의 정치적 대표체제로 귀결했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성공과 민주주의의 실패 사이의 연결고리는 사회운동이다. 최장집은 한국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이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고 강조한다. 사회운동이 민주화의 성공을 가져왔지만,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민주주의의 실패를 야기했다는 논리이다.
왜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문제인가? 가지를 치고 줄기만 정리해보면, 문제의 핵심은 사회운동의 변형과 무능력이다. 여기서 변형이란 운동세력이 이념과 대의를 상실한 채 기존 정당체제에 개별적으로 흡수되는 현상이고, 무능력이란 국가의 구조·작동원리를 이해하고 민주주의를 제도로서 운용하는 능력의 부족이다. 전자는 운동세력이 정당을 통해 현실 정치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후자는 사회운동 특유의 이상주의로 인해 현실적인 대안과 전망을 추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보수독점 정당체제의 재생산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한 대안은 무엇인가? 최장집은 운동의 재활성화에서 답을 찾는 것은 후퇴라고 주장한다. 다시 운동으로 돌아가자는 논리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을 회피하는 퇴행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 혹은 제도적 실천으로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 핵심은 선거와 정당이다. 그래서 최장집은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사회 균열을 대표할 수 있는 ‘좋은 정당’을 창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보수독점의 정당체제를 개혁하여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갈등을 폭넓게 반영하는 새로운 정당체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최장집은 운동과 정당 중에서 후자에 방점을 찍는다. 사회운동은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어도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고, 폭발적으로 분출할지라도 여하튼 탈동원화되어 일상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과도한 이상주의로 인해 현실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데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곧 정당정치이기 때문이고, 절차적 민주주의(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립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민주주의(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이유는 기존 정당체제가 시민사회의 이해와 갈등을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민주정부의 연속 집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가 제도화된 이유도 이런 정당체제의 저발전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운동에 있고 해답은 정당에 있다. 혹은 운동의 문제는 (운동의 이상주의와 무능력, 보수세력의 헤게모니 때문에) 정당으로의 정치세력화에 실패한 데 있으므로, 문제도 정당에 있고 해답도 정당에 있다. 물론 그는 ‘운동과 정당의 변증법’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여기서 변증법은 단순한 상호작용이 아니라, 정당(동일성)이 운동(차이)을 매개하고 포섭하는 변증법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정당에 의해 대표되지 않거나 대표될 수 없는 운동은 쉽게 기각될 수 있다.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는 ‘운동은 이제 그만!’이라는 오랜 보수적 논리의 세련된 판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
2. 민주화 기획에 관한 의문들
이상의 논의를 단순하게 도식화하면, ‘사회운동 → 민주화 → 민주주의 → 민주화’라는 논리 구조로 표현할 수 있다. 사회운동이 민주화(정치적 민주주의)를 확립했지만, 이제 민주주의(정치적 민주주의)가 민주화(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 구조의 근저에 있는 것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립이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가져온다는 일종의 ‘2단계 성장진화론’이다.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판이 짜이고 게임의 규칙이 제도화되고 나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그에 부수적으로 따라온다는 소박한 믿음이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현실은 그 반대였고, 그래서 최장집은 이를 ‘민주화의 역설’이라고 지칭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후퇴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곧 문제틀은 이미 해답을 예고한다. 최소한의 제도가 구비되어 있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뭐가 문제겠는가? 당연히 제도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담당자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최장집이 민주정부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이해 부족과 무능력을 강력히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논리 구조는 복합적인 문제들을 발생시킨다. 첫째 과연 정치적 민주주의는 확립되었는가? 87년 6·29선언과 대선 이후의 과정은 ‘제한적인 정치적 민주화’였으며, 오히려 운동에 의한 민주화를 왜곡·축소하면서 민주주의를 향상시킬 수 있는 민중운동의 잠재력을 봉합한 것이 아닌가? 물론 최장집은 이에 동의할 수도 있겠지만, 형식·절차적 민주화의 완성이라는 환상은 때로 ‘노동운동에 대한 권위주의적 억압장치들이 제거된 민주적 정치환경’이라는 주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노동파업은 여전히 공권력으로 강제되고 있고 심지어 파업 손실에 대해 손해배상금까지 물리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둘째 정당체제 자체가 하나의 국가장치가 아닌가? 억압적·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는 계급적인 ‘전략적 선택성’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이런 문제는 자연히 해소되는가? 최장집은 ‘제도의 편향성’을 언급하면서도, 전체적인 논의에서는 마치 제도가 어떤 세력이든 의도에 따라 능력껏 운용할 수 있는 중립적인 것인 양 취급한다. 셋째 민주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제도화한 것이 아니라 이미 1970년대 말-80년대 초부터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되었던 것이 아닌가? 민주정부는 전두환·노태우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승하면서 본격화시킨 것이 아닌가? 최장집은 구체제와 민주정부의 ‘정책적 연속성’을 지적하면서도, 신자유주의는 IMF 이후에 비로소 도래한 것처럼 사고한다.
이런 문제들은 전체적으로 최장집이 정치, 즉 제도 영역의 정치에 과도한 자율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어쩌면 이를 ‘정당-정부의 의지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그의 강력한 민주주의 비판에 누락되어 있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그가 설정하는 인과관계에 의문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후퇴는 정당체제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효과 때문이 아닌가? 전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민주정부의 무능력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구조적인 무능력이 아닌가? 금융세계화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일국의 집권세력이 정책적으로 대항하기 어려운 세계 금융자본의 힘이 아닌가?
물론 그에게 경제 분석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는 폴라니를 따라 정치와 경제를 외재적으로 이분화한 후 양자의 대립 및 통일(사회와 시장의 이중운동)을 상정한다. 그에 따라 자본주의는 시장경제로 치환되고, 문제는 ‘사회공동체와 시장경제가 균형을 이루는 공동체적 시장경제(시장경제의 인간화)를 어떻게 확립할 수 있는가’로 전환된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문제틀) 또한 이미 해답을 예고한다. 균형이 필요하다면, 그 적절한 지점은 중간이 아니겠는가? 최장집은 이를 ‘자유주의적 평등주의’(혹은 ‘민주적인 부르주아 우위와 사민주의적 헤게모니 양자 사이의 어느 지점’)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혁명적 이념인 PD(민중민주주의)를 계승해 그것을 실현가능하도록 최소강령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가 제시하는 최소강령적 PD의 내용은 노동의 경제적 시민권 획득,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존중과 민주적 규제, 재벌 중심 경제구조의 다원화이다. 이것이 혁명적 이념으로서의 PD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또한 그가 평가하듯이 NL의 내용이 과연 민주정부에서 구현된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아마 여기까지가 세계 자본주의의 변혁을 상정하지 않을 때 민주화 기획이 도달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최대치일 것이다. 여하튼 여기서 공동체적 시장경제는 ‘중소기업 중심의 성장 모델’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 방법은 ‘사회 협약(코퍼러티즘)’이다.
정치경제학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은 좋았던 옛시절의 경제결정론으로 회귀하자는 말이 아니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중요한 결론 가운데 하나는 정치와 경제의 상호 내재성이다(따라서 그것은 정치와 경제의 균형이 아니라 양자 모두의 동시적인 변혁을 상정한다). 세계체계론을 일부 수용하자면, 여기서 정치는 일국적 민족국가이고 경제는 세계 자본주의이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자본 이윤율 및 성장률의 하락으로 인해 1980년대 이후 물질적 축적이 금융적 축적으로 변모하는 금융세계화이다. 이와 더불어 화폐와 노동력 관리에서 일국적 민족국가의 자율성은 크게 약화되고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데 무능력을 드러내면서 ‘정치의 실종’ 현상이 만연해진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시장경제로 치환하는 최장집은 신자유주의를 시장 논리가 전일화하는 시장중심주의로 이해할 뿐이다. 또한 세계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이나 중심부-반주변부-주변주로 구분되는 ‘남북 분할’에 대한 문제의식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최장집이 고민하듯이, 동일한 자본주의일지라도 그 사회구성(체)은 역사·문화·제도 등의 경로의존성에 의해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다양성은 ‘정당-정부의 의지주의’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사회의 이해를 반영하면서 사회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정당의 대표성과 책임성을 논의하기는 하지만, 이 또한 선거 기제에 의한 평가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정당의 일관성과 지속성에서 답을 찾을 뿐, ‘시민소환권’ 같은 시민에게 필요한 새로운 권리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를 제외하곤 ‘어떻게(how)’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최장집이 실현가능한 정책으로 제시하는 사회 협약을 통한 중소기업 중심의 성장 모델은 또 다른 ‘이상주의’에 가깝다. 또한 그 사회경제적 기반이 부재한 가운데 ‘이상적인’ 사회 협약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사회 협약에 대한 지지 담론으로 작동할 가능성도 크다. 그가 다른 책(위기의 노동)에서 1970년대 중반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에서 이루어진 사회 협약을 통한 복지체계 모델을 신자유주의의 대안 사례로 제시한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본격화한 신자유주의의 대안 사례를 그 이전 시대에서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3. 유효성의 조건
그렇다면, 이상의 문제들과 의문들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기획은 유효한가? 그것은 서구에서 향유했던/하는 정도만큼 한국 사회에서는 실현된 적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유효한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세에서 현대 사회의 상징적 좌표인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상징을 거부하고서는 어떤 정치적 행위도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일국적이든 세계적이든) 민주화 기획은 쉽게 포기될 수는 없다. 다만 그 유효성의 조건에 관해 몇 가지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첫째,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상징을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주의’라는 명목으로 민주주의를 ‘선거를 중심에 두는 정당 간 경쟁 규칙의 제도화’로 협소화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가치인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를 보편적인 시민권으로 정립할 수 있는 이론적·철학적 지표를 세공할 필요가 있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쟁점에서 보수세력의 헤게모니에 맞설 수 있는 중요한 담론적 자원이 될 것이다.
둘째, 민주주의의 정치적 주체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어쩌면 정당정치 혹은 정당으로의 정치세력화의 가장 큰 실패는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주체를 새롭게 구성하지 못한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주권을 행사하는 유권자’라는 호명은 선거 국면에서 일시적인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선거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주체를 구성해내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이 시민사회의 이해와 갈등을 대표하고 이를 정당 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합리적으로 조정·실현한다는 논리는 소박한 믿음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에 무관심하거나 그에 반하는 시민사회의 이해와 요구를 어떻게 대표하고 조정할 것인가?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사회 전반에 걸친 헤게모니 투쟁과 그에 기초한 ‘연대’의 형성일 것이다.
셋째, 정치적 행위(political act)의 윤리를 새롭게 확보해야 한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란 무엇인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집합행동론에서처럼 무임승차를 방지하기 위해 적절한 자극과 유인을 제공하는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 최장집도 우려하듯이, 국가-정부의 무능력과 주기적인 선거 게임의 성과없는 반복에 실망한 이들은 냉소적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반대급부로 카리스마적 인물의 영웅적인 정치적 행위에 대한 기대가 점차 증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진정한 정치적 행위를 고민하는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 등 새로운 사회운동은 흔히 기득권 세력에 의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비판되고 억압된다. 민주적인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지배적 윤리가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행위와 대립한다는 것은 민주화 기획의 유효성을 침해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