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기 위한 성장통
'나는 삶이 내게 별반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두 살에 성장을 멈췄다'고 읊조릴 줄 아는 열두살짜리 주인공이 등장하는 은희경의『새의 선물』은 나에겐 참으로 상콤한 충격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주로 봐왔던 성장소설에는 사내 아이들의 주먹다짐이 있었고, 주먹다짐을 통해 우정을 확인한 사내 아이들은 옆집 누나나 사촌 누나 등등의 몸을 몰래 훔쳐보는 과정을 통해 몽정을 경험하며, 그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푸근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나누어줄 주 아는 어머니가 든든하게 서 있는 모습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새의 선물』에는 어머니의 한결 같은 사랑도, 남자 아이들의 시선과 입장에서 다루어지는 性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왜 그토록 많은 성장소설들은 ‘여자아이들의 성장’을 주제로 한 글쓰기에 인색했던 것일까?
작가들이 여자아이들의 성장을 다루는 것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여성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더 탄탄하게 만들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라면서 엉뚱하게 나는 작가들을 탓해보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진희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상대 또는 외부가 느낄 수 있는 ‘보여지는 나’와 자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바라볼 때 느껴지는 모습인 ‘바라보는 나’를 분리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소설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두개의 자아를 경험 한다. 바로 상대 또는 외부가 느낄 수 있는, 그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보여지는 나’와 내 스스로의 내면과 감정에 충실한 ‘바라보는 나’. 이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 서로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한 몸뚱아리에서 이 두개의 자아를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안에 존재하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는 나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두개를 합치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합치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 게 참 괴로운 거다.
그렇다면 내 안의 이 두개의 자아가 가장 극심하게 대립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 것은 아마도 운동을 하는 순간, 그 중에서도 ‘페미니즘’을 말하는 순간 일 것이다.
과격한 몸싸움을 하는 순간이면 내 안의 두개의 자아들은 서로 삐질삐질 엉겨붙어 있는데 ‘보여지는 나’는 “여자들은 모두 뒤쪽으로 비키세요.”라는 언행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부당하다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하고 있지만, ‘바라보는 나’는 그런 언행에 보란 듯이 악착같이 싸우지 않고 울상을 짓고 서 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몸이 부대끼는 그 순간과 후덥지근한 공기, 그 팽팽한 긴장감과 전경과의 기 싸움, 그리고 전선은 꼭 공권력 그 하나에만 맞춰져 있다는 것이 아님을 잊지 않고 일깨워주는 남성 동지들의 행태까지. 이런 것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비단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은 아닐 지언데, ‘바라보는 나’는 두렵더라도, ‘보여지는 나’는 이런 굴절된 현실에 맞서서 정말 그 남들 보란 듯이 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보여지는 나’는 가족은 여성에게 가장 억압적인 것이다 라고 말하지만, ‘바라보는 나’는 가족이라는 구조를 스스로 해체할 용기를 조금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바라보는 나’는 엄마의 희생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세탁, 집안청소, 요리 등을 날로 먹는 것이 굉장히 익숙하고도 편한 거다.
아직도 아주 많은 경우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는 일치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일치될 수 있는 페미니스트의 삶이란 무엇일까? 페미니즘을 고민하면서 꼭 해결해야 할 과제인 연애, 결혼, 가족문제 등에 있어서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분리되는 나를 보면서 앞으로 스스로를 여성주의자, 페미니스트라고 쉽사리 호명하지 말자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우리의 운동은, 그리고 페미니즘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 것은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고민을 해본다. 또한 그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으로 치환될 수 없을 것이다.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구조는 무엇인지, 또한 그 두개의 자아가 화해하고 하나가 될 수 있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지. 또한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는 것을 통해서 운동에 남길 수 있는 성과는 무엇인지.
두개의 분리된 자아의 격렬한 부대낌으로 인해 아직도 깊디 깊은 성장통을 앓고 있는 나는, 이 두개가 일치되는 순간을 종종 상상하곤 한다. 어쩌면 나는 이 것들이 일치되는 순간을 끝끝내 맞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두개의 자아를 일치시키기 위한 내 노력 그 자체가 투쟁의 과정이기 때문에,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기 위한 긴 여정에 나는 계속 도전할 작정이다.
그러나『새의 선물』에는 어머니의 한결 같은 사랑도, 남자 아이들의 시선과 입장에서 다루어지는 性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왜 그토록 많은 성장소설들은 ‘여자아이들의 성장’을 주제로 한 글쓰기에 인색했던 것일까?
작가들이 여자아이들의 성장을 다루는 것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여성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더 탄탄하게 만들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라면서 엉뚱하게 나는 작가들을 탓해보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진희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상대 또는 외부가 느낄 수 있는 ‘보여지는 나’와 자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바라볼 때 느껴지는 모습인 ‘바라보는 나’를 분리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소설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두개의 자아를 경험 한다. 바로 상대 또는 외부가 느낄 수 있는, 그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보여지는 나’와 내 스스로의 내면과 감정에 충실한 ‘바라보는 나’. 이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 서로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한 몸뚱아리에서 이 두개의 자아를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안에 존재하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는 나의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두개를 합치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합치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 게 참 괴로운 거다.
그렇다면 내 안의 이 두개의 자아가 가장 극심하게 대립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 것은 아마도 운동을 하는 순간, 그 중에서도 ‘페미니즘’을 말하는 순간 일 것이다.
과격한 몸싸움을 하는 순간이면 내 안의 두개의 자아들은 서로 삐질삐질 엉겨붙어 있는데 ‘보여지는 나’는 “여자들은 모두 뒤쪽으로 비키세요.”라는 언행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부당하다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하고 있지만, ‘바라보는 나’는 그런 언행에 보란 듯이 악착같이 싸우지 않고 울상을 짓고 서 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몸이 부대끼는 그 순간과 후덥지근한 공기, 그 팽팽한 긴장감과 전경과의 기 싸움, 그리고 전선은 꼭 공권력 그 하나에만 맞춰져 있다는 것이 아님을 잊지 않고 일깨워주는 남성 동지들의 행태까지. 이런 것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비단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은 아닐 지언데, ‘바라보는 나’는 두렵더라도, ‘보여지는 나’는 이런 굴절된 현실에 맞서서 정말 그 남들 보란 듯이 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보여지는 나’는 가족은 여성에게 가장 억압적인 것이다 라고 말하지만, ‘바라보는 나’는 가족이라는 구조를 스스로 해체할 용기를 조금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바라보는 나’는 엄마의 희생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세탁, 집안청소, 요리 등을 날로 먹는 것이 굉장히 익숙하고도 편한 거다.
아직도 아주 많은 경우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는 일치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일치될 수 있는 페미니스트의 삶이란 무엇일까? 페미니즘을 고민하면서 꼭 해결해야 할 과제인 연애, 결혼, 가족문제 등에 있어서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분리되는 나를 보면서 앞으로 스스로를 여성주의자, 페미니스트라고 쉽사리 호명하지 말자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우리의 운동은, 그리고 페미니즘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 것은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고민을 해본다. 또한 그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으로 치환될 수 없을 것이다.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구조는 무엇인지, 또한 그 두개의 자아가 화해하고 하나가 될 수 있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지. 또한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는 것을 통해서 운동에 남길 수 있는 성과는 무엇인지.
두개의 분리된 자아의 격렬한 부대낌으로 인해 아직도 깊디 깊은 성장통을 앓고 있는 나는, 이 두개가 일치되는 순간을 종종 상상하곤 한다. 어쩌면 나는 이 것들이 일치되는 순간을 끝끝내 맞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두개의 자아를 일치시키기 위한 내 노력 그 자체가 투쟁의 과정이기 때문에,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일치시키기 위한 긴 여정에 나는 계속 도전할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