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한 세계화와 북한의 핵실험
무장한 세계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세계적인 위기는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탈냉전시기 들어 세계적으로 발전주의적 틀이 해체되고 이를 신자유주의가 대체하면서,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 전략이 한계에 봉착하고, 금융 우위의 축적 구조에서 배제된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구도 하에서는 미국과 유럽을 잇는 범대서양적 축적공간을 중심으로 자본의 이동이 집중되며, 예외적으로 새로운 생산의 중심지로 등장한 동아시아 몇몇 국가 정도에만 자본 유입이 지속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처럼 자본의 필요에 따른 한정된 지역과 지정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들만이 세계화의 구도 속에 편입될 뿐, 그 외의 광범하게 배제된 지역들에서는 사회적 몰락이 관찰된다. 이들 지역에서 국가성 또는 국가 구조의 해체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자유주의에 통합된 지역 내에서도 빈곤의 증대와 경제의 불안전성 증가는 일반적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가 무장한 세계화를 동반하는 것은 이처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질서의 해체에 대해, 쇠퇴하는 세계 헤게모니인 미국이 불안전성을 관리하고자 반동적 대응을 전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배제된 지역이 증가하면서 기존의 세계질서의 틀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워졌고, 이탈 세력은 점차 증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적 축적을 지속하고자 선별된 지역들만을 포함, 관리하는 구상만으로는 해체되는 세계질서 전체를 관리하기 어려워지며, 이러한 '카오스적' 상태가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금융적 축적구조 자체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의 이점을 가진 동시에 세계 금융흐름이 집중되고 있는 국가인 미국에게 자국 중심의 금융 우위의 신자유주의적 축적구조를 지속시키기 위한 세계질서의 안정적 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따라서 미국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9·11을 계기로 미국의 세계 전략은 선제공격/예방공격이라는 논지까지 동원하면서 매우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을 노골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세계 여러 지역의 불안전성을 더 키우고 있을 뿐이다.
9·11 이후 신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새로운 노선은 클린턴 시기의 세계전략만으로는 세계질서로부터 이탈한 지역에 대한 관리가 불가능함을 강조하고, 이들 지역에 대한 적극적 개입 전략, 즉 군사적 개입에서 정권교체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개입 전략을 주창하였다.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시기 들어서, 냉전 하 얄타 체제에 기초한 미국 헤게모니의 세계전략은 새롭게 등장하는 도전에 취약해졌는데, 미국이 새로운 위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세 가지 정도다. 첫째는 미국적 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고,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된 지역에서 새로운 구도로 지역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세력의 등장이다. 이라크가 그 대표적 사례였다. 두 번째는 국가의 응집력이 약화되거나 국가구조가 해체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위협요소들로, '세력균형'의 논리에 따라 상대 국가를 통제하는 이전의 방식은 이런 위협요소를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발칸 반도의 위기, 그리고 알카에다는 이런 특징을 보여주는 위협요소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앞의 둘과 달리 그 자체로는 인근지역이나 미국에 대한 즉각적 위협의 확대라 볼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적 통치전략의 토대를 침식할 것으로 보이는 지역이나 국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다. 북한은 이런 차원의 문제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럼스펠드의 말처럼).1) 여기서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 보자면, 현재 우호적 영향 하에 있는 지역들에서도 향후 미국의 우위에 대한 도전이 제기될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클린턴 시기의 미국의 국제전략은 군사적 개입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긴 했지만, 이런 위협적 요소들을 현상유지하거나, 제한적으로 개입하거나, 그리고 이들 지역을 세계경제 구도 속에 편입시키는 등의 정책을 혼합하는 방식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이 침식되는 것을 되돌리기에는 그 효과가 미미했고, 9·11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의 침식을 두드러지게 부각시켰다. 9·11 이후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세계질서를 다시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목표를 향해 출발했으나, 그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만큼 세계적인 군사적 개입은 군사적 위협성과 불안전성을 더욱 증폭시키게 되었다. 이라크 전쟁의 시작점에서는 새로운 세기를 만들어 내겠다는 강력한 미국의 이미지가 확산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그 귀결점에 이르러서는 직접적 군사개입의 확대라는 무장한 세계화로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다시 되살려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재삼 확인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잠시 1990년대 중반 이후 무장한 세계화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적 세계전략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미국에게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세계지역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유럽으로, 여기서는 대서양 공동지배를 유지하면서, 유럽의 주변부의 '해체된 국가들'로부터 발생하는 불안전성을 자체 제어할 수 있는 군사적 구도를 재형성하고, 또한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분리를 유지하도록 미국의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두 번째는 세계적 생산의 중심지인 동아시아 지역으로, 여기서는 중국과 일본 양국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이 지역 전체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세 번째는 중동지역으로, 여기서는 석유자원에 대한 미국의 장기적 통제력을 확보하고, 이 지역 내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성을 감소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현재 미국의 영향력은 이 세 지역에서 모두 난관에 봉착해 있는 셈이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던 윈-윈(win-win) 전략, 즉 세계 두 지역에서 동시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동시에 두 지역에 모두 개입해 미국이 원하는 방향의 승리를 획득한다는 전략은 이미 1990년대 중반에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어졌다. 세계적으로 배치된 미국의 군사기지는 미국 군사력의 상징이긴 하지만, 냉전 하의 세력균형과 달라진 세계의 구도 하에서는 적절한 개입력을 발휘할 수 없는 약한 상징성을 지닐 뿐이었다. 미국은 이런 변화된 상황에 대처해 주둔군 체제에서 신속대응군 체제로 군사전략 구도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를 몇 개의 주요 지역으로 묶고, 각 지역 내에서는 발생하는 분쟁들에 대해 동맹국과 함께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 광범한 지역에 걸친 대응을 전개할 수 있도록 대응방식을 전환하는 것을 뜻했다. 이를 위해 분산 배치된 주둔군을 몇 개의 거점 중심으로 집중 배치하고, 개별 국가의 상황에 매이지 않는 군사작전의 유연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커졌다. 현재 한반도에서 추진되고 있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처럼, 신속대응군 중심의 군사편제와 동맹국들의 군사적 책임의 강화, 개별국가 중심이 아닌 더 넓은 지역을 포괄하는 군사무기 체계의 개발 등의 변화가 진행되어 온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이전에 비해 군사적 위협을 감소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증폭시키게 되는데, 미국의 전략적 판단이 중심에 놓임에 따라 국지적 분쟁이라도 이것이 세계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증폭되어, 특정한 국가/지역들이 비대칭적 군사적 위협 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세계질서에 대한 헤게모니적 통제의 역량은 약화된데 비해 군사적 대응의 범위와 정도가 확대됨에 따라 분쟁과 충돌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일단 분쟁에 미국의 초국가적 개입이 개시되면 해당 국가나 지역에 대한 파괴력이 급가속화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군사적 개입력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우위를 유지한다는 구도 하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 앞서 말했듯이 이는 무장한 세계화로 진행된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관철되면서 나타나듯이, 그 축적기반의 안정적 구도를 형성하기 위한 무장한 세계화의 개입력 또한 세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둘째, 이 무장한 세계화는 미국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 하에서 유지된다. 이는 미국의 핵우위에 의해서, 그리고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틀이 보여주듯이 기존 핵보유국을 미국의 군사적 통제 하에서 관리함으로써 유지되며, 다른 한편 군사기술혁명의 추진이 보여주듯 새로운 군사무기 개발기술의 독점에 의해 유지된다. 셋째, 이는 전쟁의 성격 또한 바꾸어 놓았는데, 군사력의 우위가 있는 쪽에서 보자면 전쟁은 점점 더 '자동화한 전쟁'이 된다. 그러나 반면 군사적 열위에 있는 쪽에서 보자면 점점 더 일반화한 대량학살과 대량 파괴의 전쟁이 된다. 넷째, 자동화한 전쟁의 성과를 강화하고, 전략핵의 사용불가능성이라는 제약을 돌파하기 위해, 소규모 국지화한 전술핵이 집중적으로 개발된다. 이미 벙커버스터나 열화우라늄탄의 개발에서 보듯이, 핵억지력 차원의 전략핵과 별개로 실용무기로서 핵의 실전 적용은 군사력의 비대칭성에 있어서 중요한 시금석이 되고 있다. 다섯째, 군사적 공격대상이 국가 대 국가에서부터 다양한 형태로 변환되면서 선제공격/예방공격이라는 새로운 개전의 논리가 정당화된다. 여섯째, 이렇게 변화된 군사적 구도를 확립하기 위해 미국은 세계적 군사력 배치를 신속대응군 중심으로 전환하여, 좀 더 광범한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력을 확대하려 한다.
이렇게 변화된 구도 하에서 우리 편과 적의 구분은 수시로 변경되며, 세계적 개입력의 확대를 위한 연합세력의 재편 또한 수시로 일어난다. 각 지역/국가들의 이해관계는 자체적으로 결정되지 못하고, 미국의 세계적 전략 하에서 늘 새롭게 재해석되며, 부차적이거나 국지적 성격을 지닌 갈등들이 미국의 전략적 의미 해석에 따라 전면적으로 확대될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북한 핵실험
그러나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이 성공할 것이라는 것은 미국만의 기대였고, 오히려 새로운 세계전략은 스스로의 한계를 노정하면서 미국 헤게모니의 토대를 빠르게 침식해 들어가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데, 한편에서 미국의 군사적 제스추어는 커지고, 또 미국은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에 더욱더 군사적 개입에 의존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러한 군사적 개입의 효과는 점점 더 의심스러운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지구 도처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노출되어 있는 국가와 지역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역설적이다. 그 첫 번째 메시지는 미국이 이라크에 매어 있고 이라크에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다른 지역으로 확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미국의 윈-윈의 구도가 오히려 'fail-fail'(실패-실패)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발생할 가능성은 9·11 이전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두 번째로 이라크가 미국의 집중적 군사적 침공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대량살상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억지력을 갖지 못했다는 교훈을 준 것이다. 미국이 내세우는 선제공격/예방공격의 대상은 군사력의 비대칭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지역/국가가 되는데, 따라서 위협에 노출된 국가들은 확실한 군사적 억지력을 보유함으로써 이 구도를 다시 국가 간의 세력균형의 구도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새롭게 재편된 국가 간 체계의 구도로부터 받는 위협을, 아직 해체 중인 이전의 국가 간 체계의 구도 속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보호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세계적인 군사적 위험성을 더욱 확대하고 세계적 군비경쟁을 확대할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주도의 NPT를 결국 붕괴시키는 주요한 촉발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북한의 핵실험은 이런 맥락 하에서 등장했다. 북한 문제는 더 이상 냉전 하의 체제 간 대립의 문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지만,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북한은 이라크 전쟁의 수렁 속에서 미국이 발을 빼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동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으며, 여기서 국가 간 체계의 '생존의 논리'를 전면에 부각시킨 것이다.
미국이 사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 중국 내에서 이른바 '국제파'와 '아시아파' 사이의 대립이 있고, 남한 내에서도 북한 제재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긴 하지만, 지정학적인 고려 때문에 중국과 남한이 중기적으로 미국과 완전히 같은 보조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도 북한의 핵실험 카드가 단기적으로 효과를 갖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물론 당분간 경제제재의 고난은 고스란히 북한 민중에게 돌아갈 것이고, 북한은 이란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과정을 견뎌냄으로써 얻게 되는 다른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대립에서 얻고자 하는 목적은 '정상국가화'라고 알려져 있다. 이 점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이란의 경우와 다르다. 이란은 미국의 개입을 배제함으로써 자립적 힘과 지역적 영향력 확대를 달성하려 하며, 이를 위해 핵억지력을 확보하려고 한다면,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의 도구로서 핵억지력을 활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 목표의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중기적으로 보자면, 포용정책을 통해 북한을 동아시아 경제 구도 내에 포섭한다는 목표를 갖는 클린턴 시기의 '페리 프로세스'로의 복귀가 반드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보인다. 북한 또한 이 점에서 이견은 없는 듯하다. 이는 핵실험의 핵심 관건이 방코델타아시아 거래중지와 관련되어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선군정치가 정상국가화를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북한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게 남는다. 그리고 페리 프로세스는 그 자체로 평화정착의 구도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만 클린턴식 무장한 세계화의 틀 속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위기의 구도는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해결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현 시점에 북한 핵실험을 둘러싸고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에는 국가 간 체계에서 발생하는 현실정치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다.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 핵억지력은 그것을 지님으로써 갖게 되는 위험성과 파급력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간 체계의 현실정치의 논리에서 발생한 핵실험의 과정을 '민족', '사회주의', '약소국'이라는 차원으로 덧칠함으로써 마무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오래전부터 한반도 통일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쟁점, 즉 북한의 국가 전략에 여타의 중요한 고려들이 모두 종속되는 문제가 다시 등장하게 된다.
동아시아 평화구도라는 문제
이라크 전쟁이 NPT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체제임을 보여준 역설적 사건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문제는 누가 그것을 깨느냐, 그리고 세계적으로 이것이 지역적 구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이다. 북한의 핵실험은 중기적으로 볼 때 세계적인 핵확산을 가속화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핵보유는 선제공격/예방공격의 위협에서 다소나마 벗어나 핵보유국을 세력균형의 보호틀로 복귀시켜주는 외피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붕괴하는 세력균형을 되돌리기 위해 핵보유에 의한 세력균형으로 돌아간다는 구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세계적 위험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특히 현 상황은 진영 간 대립 하에서 미 소간에 존재한 세력균형과 핵우산이라는 구도와도 매우 달리, 핵보유의 아나키적 상태를 낳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핵확산은 당장 민감한 지역인 동아시아보다는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개시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1980~90년대에 핵개발을 진행하다 중단한 지역들에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봐가면서 핵개발을 재개할 가능성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이 문제는 민감한 사안이고, 단기적으로는 이 지역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개별 국가 내에서의 저항도 적지 않기 때문이 빠른 시일 안에 핵확산의 움직임이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핵확산이 진행되고, 핵확산에 대한 동아시아 내의 제약 요인이 약해지면서, 첫 주자가 출발을 하게 되면 연이은 연쇄반응이 나타날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북한의 핵문제를 북한과 미국 사이의 국제적 거래 차원의 문제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에서 핵확산을 막고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평화를 정착할 수 있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필요성, 특히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통제력을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필요성이 매우 높아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세 가지 측면이 중요해 질 것이다. 첫 번째는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미국의 전략적 구도가 이 지역의 군사적 위협성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통제력을 늘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 자체적 대립구도를 최소화하고, 국지적 분쟁이 증폭되지 않도록 하는 집단적 대응의 틀을 만들어 낼 필요성을 사고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물론 국가들 사이의 협력구도겠지만, 이것만을 통해서 이 과제가 달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핵무장 반대가 전쟁 위협에 대한 반대와 결합하는 것이 과제일 것이고, 이는 다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와도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전쟁과 핵무장에 대한 반대가 국가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내에서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출발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핵무기라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대중적 통제를 가능케 하기 위해 국가를 어떻게 변환시킬 것인가의 과제도 제기된다.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또는 국가권력에 청원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상일 뿐이지만, 극단적 폭력에 대한 억제와 국가 사이의 고리를 사고해야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와 핵무기
그렇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핵무기의 문제는 좀 더 역사적이고 근본적인 재사고를 요구한다. 북한 핵실험은 이런 재사고를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인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핵억지력은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데, 핵무기는 특히 국가 간 체계의 논리를 매우 강하게 부과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대중적 개입의 여지를 배제하는 특징을 갖는다. 냉전과 핵억지력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냉전이 보여주듯 '상시화된 전쟁'은 전쟁을 대중적 정치의 통제력 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 정치를 전쟁과 국가 간 체계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따라서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통제라는 문제는 처음부터 제기될 수 없었다. 북한 핵실험이 보여주는 문제의 근원에도 같은 쟁점이 놓여 있다.
1970년대 유럽에 퍼싱II 미사일 배치를 둘러싸고 등장한 유럽의 핵무기 반대 평화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것은 당시 유럽 공산당들의 모호한 태도였다. 이는 사회주의 운동이 역사적으로 핵무기 반대 운동과 결합되지 못한 역사를 되풀이해 보여준 것이었다. 유럽 공산당의 모호한 태도는 소련의 핵보유와 관련된 문제였다. 소련은 미국 제국주의의 침공 위협에 대한 생존의 논리로서 핵보유를 정당화했다. 소련의 핵보유는 방어적이고 생존적인 것이라는 논리는 자기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논리였다.
소련의 핵보유는 사실 2차 대전에 대한 평가와도 관련된 문제다. 미국의 핵개발은 나치의 핵개발 첩보에 대한 대응으로 개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절대적 평화주의자'이던 아인슈타인이 나치의 핵개발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의 핵개발을 촉구하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에 서명한 사실은 그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독일 패전 후 미국은 대일전의 조기 종전을 위해 각각 농축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원료로 제조된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고, 25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사망하였다. 핵무기의 등장과 그 실전 사용은 사실 전쟁의 종료인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파멸적 전쟁의 개시와 무기 확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인구밀집지역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민간인 대량학살을 초래한 전쟁범죄 행위였지만, 파시즘에 반대한 정의의 전쟁이라는 2차 대전의 공식적 정리방식이 이 쟁점을 덮어버렸다.
2차 대전 종전 후 핵무장과 핵무기에 대한 반대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핵무장이었다. 소련은 1949년 핵실험에 성공했고, 미국 핵보유에 대한 억지력을 갖기 위해 핵무장을 정당화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핵폭격 위협에 노출된 중국 또한 핵개발을 추진하였으며, 중소분쟁이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핵보유의 논리를 더욱 정당화하여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여기서 모두 핵보유는 '국가생존'의 차원에서 정당화되었으며, 소련의 핵보유는 소련이나 소련 외부에서 모두 사회주의 운동이 핵무장에 반대하는 싸움을 전제할 수 없는 자기무력화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조국을 방위'해야 하기 때문에 핵무기 개발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기파괴적이었다. 핵보유는 결국 국가 간 체계의 논리를 사회주의 국가들에 깊숙이 내장시키는 핵심 기제로 작동했으며, 국가권력의 논리가 대중보다 우위에 서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관련해 중국혁명의 경험은 두 가지 서로 충돌하는 논리를 보여준 바 있다. 한편에서 마오의 '정치우위'는 전쟁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강조하면서 군사력의 우위가 아닌 대중의 조직력의 우위로 군사적 승리와 혁명을 달성할 것을 주장했다. 중국혁명에서 베트남 전쟁까지 이어진 과정은 이 논리가 관철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문화혁명 기간 제기된 사회주의 과도기론은 사회주의에 대한 위협이 외부의 침입에 있기보다 내부의 모순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권력 장악 과정까지만 정치우위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 설립 이후에도 정치우위는 계속해서 중요한 쟁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핵보유를 통해 국가권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대중노선의 우위가 관건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중국 또한 소련과 마찬가지로 핵억지력 보유를 통한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 포섭되는 과정이 발생했다. 문화혁명 기간에 인민해방군은 문화혁명의 영향 밖에 남아 있었다는 점과 1967년 중국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이것을 민족적 경사로 추앙한 것은 이후 중국이 걷게 되는 길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핵보유가 대중운동을 희생하는 대가로 국가를 생존시키고 국제주의를 억압하는 계기이자 논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반대로 국가권력의 지속성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더라도 운동을 소생시키고 국제주의로 나아가는 길은 봉쇄되었다. 세력의 비대칭성을 운동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체계의 동학을 통해 세력균형의 틀 속에 들어감으로써 좀 더 쉽게 비대칭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이 커졌던 것이다.
이 쟁점은 사실 1차대전 시기 제2인터내셔널을 붕괴시킨 '조국방위전쟁'의 쟁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1차대전이 촉발되자,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태도를 놓고 분열되었다. 다수가 자국의 운동을 살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데 동의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국제주의를 붕괴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결성된 찜머발트 좌파는 국제주의를 다시 내걸었고, 이는 러시아 혁명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로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그 맥락이 핵보유와 같은 것은 아닐 텐데, 당시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아니었고, 이 전쟁은 제국주의 간 전쟁이었다는 이유를 들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작동하는 논리와 쟁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핵보유는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되었고, 대중운동의 억압 기제로 작동하게 되었다. 소련의 핵우산 하에 있던 동유럽 사회주의의 역사가 그것을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차르 봄바'라는 최대 수소폭탄 실험은 핵보유를 통해 사회주의를 유지한다는 소련의 역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2) 15년 내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흐루시쵸프의 선언은 핵무기 개발에서도 나타나, 1961년 지금까지 최대의 위력을 지닌 수소폭탄 개발을 개시해 10월 30일 미츄시카 만 핵실험장에서 공중투하 방식의 핵실험을 시행하였다. 그 위력은 50메가톤으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15킬로톤이었으니 그보다 3천배 이상의 위력을 지녔다. 미국이 실제 실험한 수소폭탄은 15메가톤 규모였다. 차르 봄바는 무게 27톤에, 길이 8미터 직경 2미터의 어마어마한 괴물이었고, 투하 후 발생한 버섯구름이 직경 40km 높이 64km에 이르렀고, 4천 미터 상공에서 폭발하였음에도 지상에서 폭발의 화구만 반경 7km를 넘게 남겼고, 모든 사물을 파괴해버리는 반경만 25km였으며, 100km 밖에서도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의 가공할 위력을 보였다.
그리고 25년 후 체르노빌에서 노심용해의 대참사가 발생했고, 그 후 5년이 지나서 사회주의 소련은 붕괴했다. 차르 봄바도 소련 사회주의를 지켜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대안세계화와 핵무장 해제-반전의 길로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세계전략이 세계적인 군사위협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일상화한 전쟁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중단시키지 않고서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위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다시금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신자유주의 반대와 무장한 세계화 반대가 핵무장 반대와 함께 진행되지 않을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북한 핵실험 정세 하에서도 더욱 속도를 붙여 진행되는 한 미FTA 협상과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으로 나아가는 군사적 재편은 이를 다시 확인시켜 준다.
카오스 상태로 나아가는 국가 간 체계의 위기는 생존의 논리로서 핵무장에 대한 유혹을 더욱 확산시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핵무장의 길은 신자유주의 반대와 무장한 세계화를 반대하는 길과 함께 가는 길일 수 없다. 대안세계화를 향한 길은 대중의 정치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고 전쟁의 위협을 통제하는 길이다. 사회주의의 역사 또한 군사력 우위의 신화가 결국은 국가를 국가 간 체계 속의 전쟁기계로 변신시키면서 사회운동을 억압해 온 과정을 보여주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속에서 우리는 국가보다 호흡이 길고, 국가의 테두리로 한정되지 않는 운동이 가능하고 또 필요함을 발견하게 된다. 늘 위기는 새로운 돌파의 지점이기도 했다.
1) 북한 핵실험 이후 여러 가지 '음모론'이 등장했는데, 그 중 중국을 통제하기 위해 북한 핵실험을 용인했다는 음모론이나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위기를 증폭시켰다는 음모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이런 맥락에서 적절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2) 차르봄바에 대해서는 http://nuclearweaponarchive.org/Russia/TsarBomba.html, http://blog.naver.com/bloodredglow?Redirect=Log&logNo=90000100422 본문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세계적인 위기는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탈냉전시기 들어 세계적으로 발전주의적 틀이 해체되고 이를 신자유주의가 대체하면서,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 전략이 한계에 봉착하고, 금융 우위의 축적 구조에서 배제된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구도 하에서는 미국과 유럽을 잇는 범대서양적 축적공간을 중심으로 자본의 이동이 집중되며, 예외적으로 새로운 생산의 중심지로 등장한 동아시아 몇몇 국가 정도에만 자본 유입이 지속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처럼 자본의 필요에 따른 한정된 지역과 지정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들만이 세계화의 구도 속에 편입될 뿐, 그 외의 광범하게 배제된 지역들에서는 사회적 몰락이 관찰된다. 이들 지역에서 국가성 또는 국가 구조의 해체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자유주의에 통합된 지역 내에서도 빈곤의 증대와 경제의 불안전성 증가는 일반적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가 무장한 세계화를 동반하는 것은 이처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질서의 해체에 대해, 쇠퇴하는 세계 헤게모니인 미국이 불안전성을 관리하고자 반동적 대응을 전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배제된 지역이 증가하면서 기존의 세계질서의 틀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워졌고, 이탈 세력은 점차 증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적 축적을 지속하고자 선별된 지역들만을 포함, 관리하는 구상만으로는 해체되는 세계질서 전체를 관리하기 어려워지며, 이러한 '카오스적' 상태가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금융적 축적구조 자체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의 이점을 가진 동시에 세계 금융흐름이 집중되고 있는 국가인 미국에게 자국 중심의 금융 우위의 신자유주의적 축적구조를 지속시키기 위한 세계질서의 안정적 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따라서 미국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9·11을 계기로 미국의 세계 전략은 선제공격/예방공격이라는 논지까지 동원하면서 매우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을 노골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세계 여러 지역의 불안전성을 더 키우고 있을 뿐이다.
9·11 이후 신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새로운 노선은 클린턴 시기의 세계전략만으로는 세계질서로부터 이탈한 지역에 대한 관리가 불가능함을 강조하고, 이들 지역에 대한 적극적 개입 전략, 즉 군사적 개입에서 정권교체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개입 전략을 주창하였다.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시기 들어서, 냉전 하 얄타 체제에 기초한 미국 헤게모니의 세계전략은 새롭게 등장하는 도전에 취약해졌는데, 미국이 새로운 위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세 가지 정도다. 첫째는 미국적 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고,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된 지역에서 새로운 구도로 지역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세력의 등장이다. 이라크가 그 대표적 사례였다. 두 번째는 국가의 응집력이 약화되거나 국가구조가 해체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위협요소들로, '세력균형'의 논리에 따라 상대 국가를 통제하는 이전의 방식은 이런 위협요소를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발칸 반도의 위기, 그리고 알카에다는 이런 특징을 보여주는 위협요소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앞의 둘과 달리 그 자체로는 인근지역이나 미국에 대한 즉각적 위협의 확대라 볼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적 통치전략의 토대를 침식할 것으로 보이는 지역이나 국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다. 북한은 이런 차원의 문제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럼스펠드의 말처럼).1) 여기서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 보자면, 현재 우호적 영향 하에 있는 지역들에서도 향후 미국의 우위에 대한 도전이 제기될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클린턴 시기의 미국의 국제전략은 군사적 개입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긴 했지만, 이런 위협적 요소들을 현상유지하거나, 제한적으로 개입하거나, 그리고 이들 지역을 세계경제 구도 속에 편입시키는 등의 정책을 혼합하는 방식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이 침식되는 것을 되돌리기에는 그 효과가 미미했고, 9·11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의 침식을 두드러지게 부각시켰다. 9·11 이후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세계질서를 다시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목표를 향해 출발했으나, 그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만큼 세계적인 군사적 개입은 군사적 위협성과 불안전성을 더욱 증폭시키게 되었다. 이라크 전쟁의 시작점에서는 새로운 세기를 만들어 내겠다는 강력한 미국의 이미지가 확산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그 귀결점에 이르러서는 직접적 군사개입의 확대라는 무장한 세계화로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다시 되살려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재삼 확인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잠시 1990년대 중반 이후 무장한 세계화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적 세계전략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미국에게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세계지역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유럽으로, 여기서는 대서양 공동지배를 유지하면서, 유럽의 주변부의 '해체된 국가들'로부터 발생하는 불안전성을 자체 제어할 수 있는 군사적 구도를 재형성하고, 또한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분리를 유지하도록 미국의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두 번째는 세계적 생산의 중심지인 동아시아 지역으로, 여기서는 중국과 일본 양국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이 지역 전체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세 번째는 중동지역으로, 여기서는 석유자원에 대한 미국의 장기적 통제력을 확보하고, 이 지역 내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성을 감소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현재 미국의 영향력은 이 세 지역에서 모두 난관에 봉착해 있는 셈이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던 윈-윈(win-win) 전략, 즉 세계 두 지역에서 동시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동시에 두 지역에 모두 개입해 미국이 원하는 방향의 승리를 획득한다는 전략은 이미 1990년대 중반에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어졌다. 세계적으로 배치된 미국의 군사기지는 미국 군사력의 상징이긴 하지만, 냉전 하의 세력균형과 달라진 세계의 구도 하에서는 적절한 개입력을 발휘할 수 없는 약한 상징성을 지닐 뿐이었다. 미국은 이런 변화된 상황에 대처해 주둔군 체제에서 신속대응군 체제로 군사전략 구도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를 몇 개의 주요 지역으로 묶고, 각 지역 내에서는 발생하는 분쟁들에 대해 동맹국과 함께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 광범한 지역에 걸친 대응을 전개할 수 있도록 대응방식을 전환하는 것을 뜻했다. 이를 위해 분산 배치된 주둔군을 몇 개의 거점 중심으로 집중 배치하고, 개별 국가의 상황에 매이지 않는 군사작전의 유연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커졌다. 현재 한반도에서 추진되고 있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처럼, 신속대응군 중심의 군사편제와 동맹국들의 군사적 책임의 강화, 개별국가 중심이 아닌 더 넓은 지역을 포괄하는 군사무기 체계의 개발 등의 변화가 진행되어 온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이전에 비해 군사적 위협을 감소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증폭시키게 되는데, 미국의 전략적 판단이 중심에 놓임에 따라 국지적 분쟁이라도 이것이 세계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증폭되어, 특정한 국가/지역들이 비대칭적 군사적 위협 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세계질서에 대한 헤게모니적 통제의 역량은 약화된데 비해 군사적 대응의 범위와 정도가 확대됨에 따라 분쟁과 충돌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일단 분쟁에 미국의 초국가적 개입이 개시되면 해당 국가나 지역에 대한 파괴력이 급가속화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군사적 개입력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우위를 유지한다는 구도 하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 앞서 말했듯이 이는 무장한 세계화로 진행된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관철되면서 나타나듯이, 그 축적기반의 안정적 구도를 형성하기 위한 무장한 세계화의 개입력 또한 세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둘째, 이 무장한 세계화는 미국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 하에서 유지된다. 이는 미국의 핵우위에 의해서, 그리고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틀이 보여주듯이 기존 핵보유국을 미국의 군사적 통제 하에서 관리함으로써 유지되며, 다른 한편 군사기술혁명의 추진이 보여주듯 새로운 군사무기 개발기술의 독점에 의해 유지된다. 셋째, 이는 전쟁의 성격 또한 바꾸어 놓았는데, 군사력의 우위가 있는 쪽에서 보자면 전쟁은 점점 더 '자동화한 전쟁'이 된다. 그러나 반면 군사적 열위에 있는 쪽에서 보자면 점점 더 일반화한 대량학살과 대량 파괴의 전쟁이 된다. 넷째, 자동화한 전쟁의 성과를 강화하고, 전략핵의 사용불가능성이라는 제약을 돌파하기 위해, 소규모 국지화한 전술핵이 집중적으로 개발된다. 이미 벙커버스터나 열화우라늄탄의 개발에서 보듯이, 핵억지력 차원의 전략핵과 별개로 실용무기로서 핵의 실전 적용은 군사력의 비대칭성에 있어서 중요한 시금석이 되고 있다. 다섯째, 군사적 공격대상이 국가 대 국가에서부터 다양한 형태로 변환되면서 선제공격/예방공격이라는 새로운 개전의 논리가 정당화된다. 여섯째, 이렇게 변화된 군사적 구도를 확립하기 위해 미국은 세계적 군사력 배치를 신속대응군 중심으로 전환하여, 좀 더 광범한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력을 확대하려 한다.
이렇게 변화된 구도 하에서 우리 편과 적의 구분은 수시로 변경되며, 세계적 개입력의 확대를 위한 연합세력의 재편 또한 수시로 일어난다. 각 지역/국가들의 이해관계는 자체적으로 결정되지 못하고, 미국의 세계적 전략 하에서 늘 새롭게 재해석되며, 부차적이거나 국지적 성격을 지닌 갈등들이 미국의 전략적 의미 해석에 따라 전면적으로 확대될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북한 핵실험
그러나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이 성공할 것이라는 것은 미국만의 기대였고, 오히려 새로운 세계전략은 스스로의 한계를 노정하면서 미국 헤게모니의 토대를 빠르게 침식해 들어가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데, 한편에서 미국의 군사적 제스추어는 커지고, 또 미국은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에 더욱더 군사적 개입에 의존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러한 군사적 개입의 효과는 점점 더 의심스러운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지구 도처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노출되어 있는 국가와 지역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역설적이다. 그 첫 번째 메시지는 미국이 이라크에 매어 있고 이라크에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다른 지역으로 확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미국의 윈-윈의 구도가 오히려 'fail-fail'(실패-실패)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발생할 가능성은 9·11 이전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두 번째로 이라크가 미국의 집중적 군사적 침공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대량살상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억지력을 갖지 못했다는 교훈을 준 것이다. 미국이 내세우는 선제공격/예방공격의 대상은 군사력의 비대칭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지역/국가가 되는데, 따라서 위협에 노출된 국가들은 확실한 군사적 억지력을 보유함으로써 이 구도를 다시 국가 간의 세력균형의 구도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새롭게 재편된 국가 간 체계의 구도로부터 받는 위협을, 아직 해체 중인 이전의 국가 간 체계의 구도 속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보호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세계적인 군사적 위험성을 더욱 확대하고 세계적 군비경쟁을 확대할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주도의 NPT를 결국 붕괴시키는 주요한 촉발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북한의 핵실험은 이런 맥락 하에서 등장했다. 북한 문제는 더 이상 냉전 하의 체제 간 대립의 문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지만,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북한은 이라크 전쟁의 수렁 속에서 미국이 발을 빼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동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으며, 여기서 국가 간 체계의 '생존의 논리'를 전면에 부각시킨 것이다.
미국이 사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 중국 내에서 이른바 '국제파'와 '아시아파' 사이의 대립이 있고, 남한 내에서도 북한 제재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긴 하지만, 지정학적인 고려 때문에 중국과 남한이 중기적으로 미국과 완전히 같은 보조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도 북한의 핵실험 카드가 단기적으로 효과를 갖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물론 당분간 경제제재의 고난은 고스란히 북한 민중에게 돌아갈 것이고, 북한은 이란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과정을 견뎌냄으로써 얻게 되는 다른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대립에서 얻고자 하는 목적은 '정상국가화'라고 알려져 있다. 이 점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이란의 경우와 다르다. 이란은 미국의 개입을 배제함으로써 자립적 힘과 지역적 영향력 확대를 달성하려 하며, 이를 위해 핵억지력을 확보하려고 한다면,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의 도구로서 핵억지력을 활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 목표의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중기적으로 보자면, 포용정책을 통해 북한을 동아시아 경제 구도 내에 포섭한다는 목표를 갖는 클린턴 시기의 '페리 프로세스'로의 복귀가 반드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보인다. 북한 또한 이 점에서 이견은 없는 듯하다. 이는 핵실험의 핵심 관건이 방코델타아시아 거래중지와 관련되어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선군정치가 정상국가화를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북한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게 남는다. 그리고 페리 프로세스는 그 자체로 평화정착의 구도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만 클린턴식 무장한 세계화의 틀 속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위기의 구도는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해결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현 시점에 북한 핵실험을 둘러싸고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에는 국가 간 체계에서 발생하는 현실정치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다.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 핵억지력은 그것을 지님으로써 갖게 되는 위험성과 파급력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간 체계의 현실정치의 논리에서 발생한 핵실험의 과정을 '민족', '사회주의', '약소국'이라는 차원으로 덧칠함으로써 마무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오래전부터 한반도 통일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쟁점, 즉 북한의 국가 전략에 여타의 중요한 고려들이 모두 종속되는 문제가 다시 등장하게 된다.
동아시아 평화구도라는 문제
이라크 전쟁이 NPT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체제임을 보여준 역설적 사건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문제는 누가 그것을 깨느냐, 그리고 세계적으로 이것이 지역적 구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이다. 북한의 핵실험은 중기적으로 볼 때 세계적인 핵확산을 가속화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핵보유는 선제공격/예방공격의 위협에서 다소나마 벗어나 핵보유국을 세력균형의 보호틀로 복귀시켜주는 외피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붕괴하는 세력균형을 되돌리기 위해 핵보유에 의한 세력균형으로 돌아간다는 구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세계적 위험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특히 현 상황은 진영 간 대립 하에서 미 소간에 존재한 세력균형과 핵우산이라는 구도와도 매우 달리, 핵보유의 아나키적 상태를 낳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핵확산은 당장 민감한 지역인 동아시아보다는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개시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1980~90년대에 핵개발을 진행하다 중단한 지역들에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봐가면서 핵개발을 재개할 가능성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이 문제는 민감한 사안이고, 단기적으로는 이 지역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개별 국가 내에서의 저항도 적지 않기 때문이 빠른 시일 안에 핵확산의 움직임이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핵확산이 진행되고, 핵확산에 대한 동아시아 내의 제약 요인이 약해지면서, 첫 주자가 출발을 하게 되면 연이은 연쇄반응이 나타날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북한의 핵문제를 북한과 미국 사이의 국제적 거래 차원의 문제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에서 핵확산을 막고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평화를 정착할 수 있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필요성, 특히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통제력을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필요성이 매우 높아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세 가지 측면이 중요해 질 것이다. 첫 번째는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미국의 전략적 구도가 이 지역의 군사적 위협성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통제력을 늘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 자체적 대립구도를 최소화하고, 국지적 분쟁이 증폭되지 않도록 하는 집단적 대응의 틀을 만들어 낼 필요성을 사고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물론 국가들 사이의 협력구도겠지만, 이것만을 통해서 이 과제가 달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핵무장 반대가 전쟁 위협에 대한 반대와 결합하는 것이 과제일 것이고, 이는 다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와도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전쟁과 핵무장에 대한 반대가 국가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내에서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출발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핵무기라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대중적 통제를 가능케 하기 위해 국가를 어떻게 변환시킬 것인가의 과제도 제기된다.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또는 국가권력에 청원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상일 뿐이지만, 극단적 폭력에 대한 억제와 국가 사이의 고리를 사고해야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와 핵무기
그렇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핵무기의 문제는 좀 더 역사적이고 근본적인 재사고를 요구한다. 북한 핵실험은 이런 재사고를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인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핵억지력은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데, 핵무기는 특히 국가 간 체계의 논리를 매우 강하게 부과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대중적 개입의 여지를 배제하는 특징을 갖는다. 냉전과 핵억지력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냉전이 보여주듯 '상시화된 전쟁'은 전쟁을 대중적 정치의 통제력 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 정치를 전쟁과 국가 간 체계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따라서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통제라는 문제는 처음부터 제기될 수 없었다. 북한 핵실험이 보여주는 문제의 근원에도 같은 쟁점이 놓여 있다.
1970년대 유럽에 퍼싱II 미사일 배치를 둘러싸고 등장한 유럽의 핵무기 반대 평화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것은 당시 유럽 공산당들의 모호한 태도였다. 이는 사회주의 운동이 역사적으로 핵무기 반대 운동과 결합되지 못한 역사를 되풀이해 보여준 것이었다. 유럽 공산당의 모호한 태도는 소련의 핵보유와 관련된 문제였다. 소련은 미국 제국주의의 침공 위협에 대한 생존의 논리로서 핵보유를 정당화했다. 소련의 핵보유는 방어적이고 생존적인 것이라는 논리는 자기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논리였다.
소련의 핵보유는 사실 2차 대전에 대한 평가와도 관련된 문제다. 미국의 핵개발은 나치의 핵개발 첩보에 대한 대응으로 개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절대적 평화주의자'이던 아인슈타인이 나치의 핵개발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의 핵개발을 촉구하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에 서명한 사실은 그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독일 패전 후 미국은 대일전의 조기 종전을 위해 각각 농축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원료로 제조된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고, 25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사망하였다. 핵무기의 등장과 그 실전 사용은 사실 전쟁의 종료인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파멸적 전쟁의 개시와 무기 확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인구밀집지역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민간인 대량학살을 초래한 전쟁범죄 행위였지만, 파시즘에 반대한 정의의 전쟁이라는 2차 대전의 공식적 정리방식이 이 쟁점을 덮어버렸다.
2차 대전 종전 후 핵무장과 핵무기에 대한 반대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핵무장이었다. 소련은 1949년 핵실험에 성공했고, 미국 핵보유에 대한 억지력을 갖기 위해 핵무장을 정당화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핵폭격 위협에 노출된 중국 또한 핵개발을 추진하였으며, 중소분쟁이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핵보유의 논리를 더욱 정당화하여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여기서 모두 핵보유는 '국가생존'의 차원에서 정당화되었으며, 소련의 핵보유는 소련이나 소련 외부에서 모두 사회주의 운동이 핵무장에 반대하는 싸움을 전제할 수 없는 자기무력화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조국을 방위'해야 하기 때문에 핵무기 개발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기파괴적이었다. 핵보유는 결국 국가 간 체계의 논리를 사회주의 국가들에 깊숙이 내장시키는 핵심 기제로 작동했으며, 국가권력의 논리가 대중보다 우위에 서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관련해 중국혁명의 경험은 두 가지 서로 충돌하는 논리를 보여준 바 있다. 한편에서 마오의 '정치우위'는 전쟁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강조하면서 군사력의 우위가 아닌 대중의 조직력의 우위로 군사적 승리와 혁명을 달성할 것을 주장했다. 중국혁명에서 베트남 전쟁까지 이어진 과정은 이 논리가 관철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문화혁명 기간 제기된 사회주의 과도기론은 사회주의에 대한 위협이 외부의 침입에 있기보다 내부의 모순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권력 장악 과정까지만 정치우위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 설립 이후에도 정치우위는 계속해서 중요한 쟁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핵보유를 통해 국가권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대중노선의 우위가 관건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중국 또한 소련과 마찬가지로 핵억지력 보유를 통한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 포섭되는 과정이 발생했다. 문화혁명 기간에 인민해방군은 문화혁명의 영향 밖에 남아 있었다는 점과 1967년 중국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이것을 민족적 경사로 추앙한 것은 이후 중국이 걷게 되는 길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핵보유가 대중운동을 희생하는 대가로 국가를 생존시키고 국제주의를 억압하는 계기이자 논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반대로 국가권력의 지속성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더라도 운동을 소생시키고 국제주의로 나아가는 길은 봉쇄되었다. 세력의 비대칭성을 운동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체계의 동학을 통해 세력균형의 틀 속에 들어감으로써 좀 더 쉽게 비대칭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이 커졌던 것이다.
이 쟁점은 사실 1차대전 시기 제2인터내셔널을 붕괴시킨 '조국방위전쟁'의 쟁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1차대전이 촉발되자,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태도를 놓고 분열되었다. 다수가 자국의 운동을 살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데 동의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국제주의를 붕괴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결성된 찜머발트 좌파는 국제주의를 다시 내걸었고, 이는 러시아 혁명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로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그 맥락이 핵보유와 같은 것은 아닐 텐데, 당시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아니었고, 이 전쟁은 제국주의 간 전쟁이었다는 이유를 들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작동하는 논리와 쟁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핵보유는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되었고, 대중운동의 억압 기제로 작동하게 되었다. 소련의 핵우산 하에 있던 동유럽 사회주의의 역사가 그것을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차르 봄바'라는 최대 수소폭탄 실험은 핵보유를 통해 사회주의를 유지한다는 소련의 역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2) 15년 내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흐루시쵸프의 선언은 핵무기 개발에서도 나타나, 1961년 지금까지 최대의 위력을 지닌 수소폭탄 개발을 개시해 10월 30일 미츄시카 만 핵실험장에서 공중투하 방식의 핵실험을 시행하였다. 그 위력은 50메가톤으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15킬로톤이었으니 그보다 3천배 이상의 위력을 지녔다. 미국이 실제 실험한 수소폭탄은 15메가톤 규모였다. 차르 봄바는 무게 27톤에, 길이 8미터 직경 2미터의 어마어마한 괴물이었고, 투하 후 발생한 버섯구름이 직경 40km 높이 64km에 이르렀고, 4천 미터 상공에서 폭발하였음에도 지상에서 폭발의 화구만 반경 7km를 넘게 남겼고, 모든 사물을 파괴해버리는 반경만 25km였으며, 100km 밖에서도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의 가공할 위력을 보였다.
그리고 25년 후 체르노빌에서 노심용해의 대참사가 발생했고, 그 후 5년이 지나서 사회주의 소련은 붕괴했다. 차르 봄바도 소련 사회주의를 지켜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대안세계화와 핵무장 해제-반전의 길로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세계전략이 세계적인 군사위협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일상화한 전쟁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중단시키지 않고서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위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다시금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신자유주의 반대와 무장한 세계화 반대가 핵무장 반대와 함께 진행되지 않을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북한 핵실험 정세 하에서도 더욱 속도를 붙여 진행되는 한 미FTA 협상과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으로 나아가는 군사적 재편은 이를 다시 확인시켜 준다.
카오스 상태로 나아가는 국가 간 체계의 위기는 생존의 논리로서 핵무장에 대한 유혹을 더욱 확산시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핵무장의 길은 신자유주의 반대와 무장한 세계화를 반대하는 길과 함께 가는 길일 수 없다. 대안세계화를 향한 길은 대중의 정치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고 전쟁의 위협을 통제하는 길이다. 사회주의의 역사 또한 군사력 우위의 신화가 결국은 국가를 국가 간 체계 속의 전쟁기계로 변신시키면서 사회운동을 억압해 온 과정을 보여주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속에서 우리는 국가보다 호흡이 길고, 국가의 테두리로 한정되지 않는 운동이 가능하고 또 필요함을 발견하게 된다. 늘 위기는 새로운 돌파의 지점이기도 했다.
1) 북한 핵실험 이후 여러 가지 '음모론'이 등장했는데, 그 중 중국을 통제하기 위해 북한 핵실험을 용인했다는 음모론이나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위기를 증폭시켰다는 음모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이런 맥락에서 적절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2) 차르봄바에 대해서는 http://nuclearweaponarchive.org/Russia/TsarBomba.html, http://blog.naver.com/bloodredglow?Redirect=Log&logNo=9000010042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