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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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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 1반 뜸 이호순 할머니

진재연 | 정책편집부장
대추리 도두리의 가을, 집집마다 콩과 깨를 털어 말리는 손길이 분주합니다. 마당에는 흙갈색 들깨가 햇살을 받으며 펼쳐져 있고 밭 한가운데 앉아 쇠막대기로 콩을 터는 농민들이 보입니다. 대추리 1반 뜸에 사는 이호순(69) 할머니가 빠른 손길로 콩잎을 털어 내면 노란색 콩이 우수수 떨어지며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콩을 널어 말리는 겨. 메주 쑤는 건 안 말려도 되고. 그냥 먹는 건 한참을 말려야 해.” 봄에 모내기 끝나고 심은 콩인데 벌써 이렇게 영글어 말리는 가을이 되어 바람이 제법 쌀쌀해 졌습니다. 올해는 왜 이렇게 비가 안 왔는지 예전에 비해 수확량도 훨씬 줄었다고, 벼농사도 못했는데 밭작물 수확도 그리 순탄치 못했다고 콩을 터는 손길마다 한숨이 더해졌습니다. 우리가 곧 마주 하게 될 겨울이 할머니의 한숨을 더욱 깊어지게 할 것 같아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진 것 없이 고생고생 했지만 그저 이곳에서 죽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하시는 이호순 할머니. 할머니가 44년 동안 마음 붙이고 살아온 대추리 1반 뜸에서 내년에도 콩을 털어 말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철조망 가생이에서 살았어. 결혼하기 전에는 저 미군기지가 조그맣게 있었는데 점점 커지더라구. 예전에는 기지 안에 안정리로 가는 길이 뚫려서 걸어다녔어. 그런데 요놈들이 점점 먹어 들어오더니 학교 정문 있는 데를 딱 막더라고. 막으니까 어떻게 해. 갈 데가 없잖아. 그래서 동네에서 돈을 걷어 가지고 땅을 사서 길을 맨들었어. 지금 버스 다니는 길 있잖아. 그거 우리가 맨든 거지. 그때는 다 흙길이었어 ”

녹두밭머리라 불리는 대추리 1반 뜸은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즈(K-6)철조망과 바로 맞붙어 있습니다. 주민들의 집과 캠프 험프리즈 사이에는 철조망 하나만이 있을 뿐이고, 뒷마당에서 미군기지 쪽을 바라보면 구보하는 미군들이 바로 앞에 보이기도 합니다. 밭에서 허리 구부리고 일하는 주민들과 캠프 험프리즈 안의 미군들의 모습이 언제나 동시에 시야에 들어옵니다. 제가 이호순 할머니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습니다. 겨울의 끝자락 할머니의 집을 찾아갔을 때, 텃밭에서 봄을 준비하던 할머니의 등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미군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너무나 생소하고 야릇한 느낌이 들던 순간이었지만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땅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철조망 너머 구대추리에서 쫓겨나 바로 이 자리에 허둥지둥 움집을 짓고 터를 잡았을 사람들. 미군기지가 점점 커지면서 자꾸자꾸 뒤로 밀려났을 사람들. 1반 뜸에 오면, 감히 상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모를 그 모습이 할머니들의 얼굴과 자꾸 겹쳐집니다.

대추리 1반 뜸은 비행기 뜨는 소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귀를 찢고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밤새 들립니다. 대추리 어느 곳도 헬기소리에서 자유로운 곳이 없지만 '철조망 가생이'에서 살아온, 유난히 어렵게 사는 분들이 많은 1반 뜸 주민들의 지난 세월과 이호순 할머니가 감당했어야 할 아픔은 귀를 찢는 비행기 소리처럼 강하게 다가옵니다.

“비행기 소리가 너무 커서 못 살겠더라구. 아기를 낳았는데 놀라서 잠을 못 자. 깜짝깜짝 놀라고. 그 소리에 태어난 지 3일 만에 애가 죽었어. 첫 애였는데 그렇게 됐어.”

경기도 광주가 고향인 이호순 할머니는 스물 다섯 살에 결혼해 대추리에 왔습니다. 수녀가 된 딸 이야기를 언제나 자랑삼아 하시는 할머니는 결혼 안 한 막내 아들과 단 둘이 살고 있습니다. 자식 이야기를 하시면서 딸 하나가 더 있었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 할머니는 비행기 소리에 시름시름 앓다 죽은 아이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대추리가 고향이었던 할아버지는 2001년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청소일과 식당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아저씨는 이발소를 했어. 처음에는 집에서 했어. 근데 다른 사람들이 이사 와서 이발소를 냈어. 동네서 3개니께 이발소가 안 되지. 그래 가지고 아저씨가 시내로 나갔어. 시내에서 하다가 도두리 말랭이에 이발소를 샀어. 거기서 22년 동안 했지. 그러다가 저녁에 집에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어. 오토바이 타고 오다 사고났는데 뺑소니였어. 잡지도 못했어. 기억력이 없어지고 이발도 못하고. 집에서 놀기가 그러니까 평택에 아파트 경비일 나가고, 나도 청소하러 나가고 그랬지. 나이가 먹으면서 후유증으로 시력이 떨어지니까 경비도 못하고. 몇 년 쉬다가 돌아가셨지."

이호순 할머니는 논 700평이 전부입니다. 700평 논이 5월 4일 이후 구덩이와 철조망으로 갈라져 두 개가 되었던 날 할머니는 목놓아 울다 결국 실신하셨습니다.

"저걸로 먹고살았는데. 일해서 먹고살았는데. 그러니 저거 파놓을 때 내가 정신을 잃었지.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생각만 하면 치가 떨려."

더운 여름, 이호순 할머니는 군홧발에 밟혀 죽어 가는 저쪽 편 논을 등지고 남은 거라도 살리기 위해 날마다 몸을 굽혔습니다. 그렇게 구부러진 허리로 피를 뽑고 논을 가꾸었고 마을에 들어오는 경찰들과 국방부로 맞서 싸웠습니다.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 그때 지질 검사한다고 기계 들어왔을 때 신부님 끌어내리는 거 보고 구하는데 경찰들이 명치를 밟았어. 군홧발로 밟았으면 그 때 죽었어. 운동화를 신었더라고. 올해 죽을 운인가. 초등학교 무너진 이튿날도 여경들이 사지를 들고 저기 갔다 버리더라고. 그때 팔꿈치로 얼굴을 때려서 지금도 아파.”

이호순 할머니는 지금 김장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11월 중순이 되면 9월에 심은 김장배추를 수확해 김장을 할 것입니다. 해마다 그래왔던 것처럼 집집마다 돌아가며 김장을 담그고 그렇게 겨울을 날 준비를 하겠죠. 올해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 김장도 금세 할거라고 말끝을 흐리지만 옹기종기 모여 앉아 파를 다듬고 은행을 까는 주민들의 모습은 여느 가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호순 할머니도 그렇게 월동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국방부의 비열한 회유가 끊이지 않지만 할머니는 오늘도 저녁 7시가 되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촛불행사장으로 향합니다. 촛불행사 800일을 앞두고 있는 늦가을 쌀쌀한 저녁, 이호순 할머니는 느린 걸음을 한발 한발 옮깁니다.

“지금 죽으면 너무 억울하잖아. 몰라, 죽어도 여기서 그냥 살아야지. 집집마다 전화해서 나가라고 하잖아. 그렇게 마을을 들쑤셔 놓고 뭐하는 짓들이야. 너 죽고 나 죽고 할 판이여. 이놈의 정부 악독한 놈들이여. 즈들이 이기나 우리가 이기나 한번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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