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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의 땅에도 봄은 온다

최은숙 |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 상임활동가
양기(陽氣)로 지탱되는 노숙인추모제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공동 주최로 진행되어온 노숙인 추모제(이하 추모제)가 올해로 6회째를 맞는다. 추모제는 매해 동지,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진행된다. 추모제를 채우는 다수가 맨몸으로 억지스럽게 추위를 견디며 살아 온 사람들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혹한을 피하는 게 배려일 것이지만 동지를 선택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동지는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또한 음기가 극성한 가운데 양기가 새로 생겨난다고 하여 일 년의 시작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노숙인의 생활패턴은 처한 상황 상 낮과 밤의 구분이 모호하다. 어쩌면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밤 시간대에서야 안정된 일상이 시작될 지도 모른다. 밤에서야 역동하는 사람들.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밝음 속에서 축적된 긴장을 풀 수 있는 사람들. 추모제는 가장 춥고 긴 밤, 모인 이들의 충만한 양기를 원동력으로 인간답지 못한 삶과 죽음에 대해 끈질기게 알려내는 자들이 있음을 과시한다. 추모제의 취지는 순탄치 못했던 노숙당사자의 생존과 죽음을 위로하는 것이나, 이것이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당사자의 힘들고, 외롭고, 억울하고, 불쌍한 죽음에 이입되어 눈물 흘리고, 슬퍼하는 것 이상의 의미와 기능이 내포되어 있다.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아픔, 그 이상의

지금까지의 추모제는 그리고 앞으로의 추모제는 단지 그들의 죽음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우리가 추모제란 형식을 빌려 사회에 던지고자 하는 것은 노숙인의 현실이다. 혹한과 폭염 속의 거리, 후미진 곳 혹은 인적이 즐비한 거리에서의 ‘죽음’. 이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순간 노숙인을 둘러싼 문제의 본질은 희석된다. 공감과 동의를 쉽게 이끌어 내는 ‘죽음’이라는 코드와 이로부터 파생되는 고민 없는 얕은 연민의 감정과 동정. 연민의 감정에 충실한 노숙인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곤란하게도 노숙당사자의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노숙인은 물질적 지원이 부족해서, 수요에 비해 생활시설의 공급이 적어서, 자활프로그램이 미흡해서, 양질의 급식지원이 부족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집단이 아니다. 여기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앞서 열거한 생활시설, 무료급식, 사회복지서비스 등을 포괄하는 현재의 노숙인지원체계가 충분하고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이미 노숙상황에 처한 당사자를 지원하는 노숙인지원체계에도 양․질적 보완과 개선이 필요하나 이와 함께 노숙을 강제하는, 노숙을 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인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노숙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비자발적인 선택이라면, 사적 차원에서의 통제 불가능했던 요인에 대해서도 건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추모제는 일 년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노숙인 혹은 그들의 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한다.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 그 고민의 깊이와 무게는 묵직하게 다가온다. 또한 추모제는 한 해 동안의 역동적이었던 노숙판을 결산하는 자리이다. 이는 마무리가 아닌 시작을 의미한다. 노숙을 둘러싼 사건과 이슈, 옹호활동, 정책적인 요구 등 ‘그해 일 년’을 돌아보고 다가올 해의 다짐과 활동을 선포하는 장이다. 선포는 노숙당사자자와 함께 하는 약속이기에 이벤트성이 농후하다거나 가벼울 수 없다.

노숙당사자와 함께 하는 추모제

여담이지만 가장 많은 노숙당사자를 집결시킬 수 있는 행사(?)는 불행하게도 일방적인 물품나누기 행사이다. 그건 그렇고. 그 다음이 추모제였다. 동료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억지로 독려하고 홍보하지 않아도 집중을 하게 된다. 왜일까? 단지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죽었나?’, ‘올해는 또 몇 명이 죽었나?’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료의 죽음에 자신의 삶과 죽음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관련된 추모제, 집회 등에서는 정말 많은 당사자가 눈물을 흘린다.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 옆자리에서 잠을 자던, 무료급식 때문에 바로 내 앞자리에 줄을 섰던, 서울역대합실에서 스포츠중계를 보며 같은 팀을 응원했던…익숙한 존재의 상실감이 저렇게도 슬픈 걸까? 슬프겠지. 아울러 그들의 죽음을 통해 위태롭고 위험한 자신의 삶을 보는 것이겠지. 두렵겠지. 무섭겠지. 까만 피부에 푹 눌러 쓴 모자. 어두운 얼굴에서 그들의 눈은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빨갛게 충혈 된 두 눈 안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를 확인할 때면 가슴이 많이 아프다. 울고 있는 모습이 불쌍하고 측은해서가 아니라 당사자들 스스로 불투명할 삶과 죽음을 예견하고 있기에 가슴이 아픈 것이다.
추모제는 그 곳을 찾아온 노숙당사자의 눈물샘을 자극하여 작위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는다. 추모제는 그 곳을 찾아온 노숙당사자에게 적지 않은 동료의 죽음이 인간답지 못했음을, 이러한 죽음은 인간답지 못한 것임을, 우리는 노숙인이 아닌 인간이기에 이러한 죽음과 현실에 분노할 줄 알아야함을 말한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빈곤, 통제 불가능했던 요인을 곱씹어 보고 내가 처한 지긋지긋한 삶에 대한 탓을 사회와 세상에 돌릴 줄도 알아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바닥에 떨어져 잊고 있었던 자존감을 끌어올리도록 독려한다.

어쩔 수 없이…산다

언젠가 내가 아는 당사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노숙을 한다.
“40km를 완주해야하는 마라톤 대회가 있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걷기대회가 있습니다. 40km 완주 마라톤에 입상하면 많은 명성과 돈, 부가적으로 얻게 되는 게 많겠죠. 걷기대회에 참여하면 참가 상 정도만을 받겠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라톤보다 걷기대회를 참여하죠. 왜일까요? 걷기에는 비교적 많은 훈련이 필요 없지만 마라톤은 다르죠. 그곳에 참여해서 40km를 완주하려면 많은 훈련과 연습이 필요해요. 지금의 내 상황과도 같아요. 갑작스레 이 생활에 놓여 졌고, 이 생활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노동수단은 노가다에요. 하지만 노가다는 내게 너무 힘든 일입니다. 난 노가다와 같은 노동 강도가 센 일에 익숙하지도 훈련되어 있지도 않았어요. 힘듦과 어려움을 짓누르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서 인력시장에 나가지만 체력을 넘어서는 노동 강도는 내겐 상당한 부담이며 스트레스입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싶을 때면 사먹기 위해서, 피곤할 때 들어가 편히 잘 수 있는 숙박비용 등을 벌기 위해 그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일을 합니다.”
배부른 소리로 들리는가?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고, 노동 강도가 ‘세다 세다’ 하니까 세게 느껴지는 것이지…’, 일하기 싫은 자의 핑계로 들리는가? 본인의 삶을 마라톤, 걷기대회에 비유한 것이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다. 그 자체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당사자에게서 저 말을 듣는 순간 그의 고통과 불행이 느껴졌다. 그들은 언제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다. 싫어도 어쩔 수 없으니까 시설에 들어가고, 익숙하지 않은 일임에도 다른 길이 없어서 공공근로, 건설일용근로, 정부에서 마련한 일자리에 참여한다. 노동의 대가가 부당해도 어쩔 수 없이 숨죽이며 일한다. 노동대가를 따질 처지가 아니니까. 그럴 처지가 아니라고들 하니까. 시설이 싫어서 어쩔 수 없이 거리에 있고, 노상에서 먹는 밥이 맛없고 창피해도 어쩔 수 없이 무료급식을 먹는다. 밥 먹기 위해 기도하는 게 더럽고 치사해도 먹고살기 위해 식전 1시간의 기도와 찬송, 그보다 더한 비참함을 인내해야만 한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알아도 어쩔 수 없이 역에 앉아 있고, 청결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른 채 어쩔 수 없이 모자로, 더욱 어두운 색으로 더러움을 덮는다. 자발적으로 노숙을 택하는 경우도 있을까? 속세의 속박을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 거리로 나온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낭만적인 사고로 거리생활, 노숙을 택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 본다. 사적인 사정 혹은 공적인 사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내몰린 것이라면, 내몰린 이후에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받는 것이라면 이에 대해 분노할 필요도 있지 않은가.

동토의 땅에서도 꽃은 핀다

그들을 둘러싼 더 큰 세상에도 다양함이 존재하듯 그들 안에도 다양성이 공존한다. 하지만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세상은 노숙 안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획일화된 저급정책으로 길들어 지기를 강요한다. 열 받게도 노숙집단을 한데 싸잡아 낙오된 집단, 사회의 치부 정도로 간주하려 한다. 그래야 저급 정책도 가능하고, 기들이기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노숙당사자 자신도, 그들을 둘러싼 사회도 왜 거리에 나와서 살아야만 하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작용했을 외부적인 요인과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모른다. 무지를 탓하고, 계몽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었던 것들을 제대로 알리고 싶은 것이다.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추모제에서는 알려내는 것, 알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 안의 거침없는 소통과 공유가 가능하고, 세상을 향한 표출과 그들도 생동하고 있음을 확인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노숙당사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공감하고 공통의 목적과 요구를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추모제는 당사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 이상의 가치 있는 의미와 기능을 갖고 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동지섣달에도 꽃이 핀다고 하는데, 추모제와 같은 일련의 활동에 정성을 다한다면 동토의 땅에서도 꽃은 피지 않을까?
주제어
빈민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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