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12.70호

[쟁점토론]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 새로운 시작을 위한 토론

문설희, 박준도, 이소형 |
사회자: 안녕하세요. 민중총궐기로 한창 바쁘신 중에도 토론에 참가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올해의 대표적인 투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일 것입니다. 『사회운동』 12월호에 이 투쟁을 평가하는 글을 싣자는 것이 애초의 기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주체들이 모여 함께 평가를 하는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총궐기를 비롯한 여러 일정 때문에 평가의 자리를 잡는 것 자체가 여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더라도 지금쯤은 논의를 시작해야 내년 계획을 내실 있게 세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번 쟁점 토론을 본격적인 평가를 시작하는 계기로 삼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아직 생각이 충분히 정리되지 않으셨더라도 그동안 고민했던 쟁점을 격의 없이 제기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각자의 위치에서 평택 투쟁을 하시면서 느낀 소회를 말하는 것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얘기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장진범

평택 투쟁과 우리

박준도: 소규모이긴 하지만 인천 지역에서 독자적 실천 공간을 연 것이 성과다
문설희: 초기와 달리 최근 들어 사회진보연대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이소형: 평택 투쟁에 관한 전국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전선을 만들어가기 위한 구호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고민이었다

박준도: 인천지역에서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을 한 경험에서 얘기를 시작해
박준도
볼까 합니다. 다른 지역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데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에 대한 인천지역 사회단체들 사이의 고유한 연대 운동은 무척 미비했었습니다. 집중 일정에 단체들이 개별적으로 참가하는 방식이 주였고, 그에 비하면 인천지역에서 단체들 사이의 독자적인 실천 활동은 너무도 부차적이었습니다. 2006년 내내 이 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었던 것 같습니다. 소규모 선전활동이라도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이라는 주제에 대한 인천지역의 독자적인 실천을 안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작은 규모로라도 책임 있는 단위들이 인천지역에서 실천 공간을 여는 것이 필요했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5월, 6월, 7월에 있었던 목요촛불문화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실천 흐름이 9월 빈집 철거 반대를 위한 긴급행동과 목요촛불문화제, 전국행진으로까지 이어졌죠.
실천 규모가 무척 미비하긴 했지만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 주체의 참여 범위를 넓혀놓은 점이나 인천 지역에서 독자적인 실천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의 실마리를 풀려 했다는 점이 성과라면 성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말 그대로 선전전 이상을 넘지 못했고, 이데올로기적 대응에서 미비했던 점 등은 두고두고 아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제가 초반에 평택미군기지 반대 운동과 한미FTA 투쟁을 함께 묶어서 투쟁하자는 식의 논의에 반대했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죠. 대중조직 내에서 평택미군기지 반대 운동이 선언적인 수준인데, 여기다 한미FTA 투쟁과 묶자는 이야기는 제가 보기에 이 모두를 다 조직 기구와 명칭만 있는 선언적인 실천 수준에 묶어두자는 이야기로 보였습니다. 운동의 결합은 의제에 대한 대중의 참여 과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결합을 주장하면 회의 참가자 일손만 덜어주는, 상층 중심의 결합이 될 뿐이라는 것이죠. 그것의 실천적 양상은 운동이 아니라 구호의 나열입니다.

문설희: 제가 평택 투쟁에 결합했던 과정을 돌아보면, 처음에는 사회진보연대 회원으로서 결합했고, 다음으로는 제가 속한 단체의 문제의식과의 결합 방안을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고, 마지막에는 전국행진에 철폐연대가 결합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 중 특히 두 가지 점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우선 사회진보연대의 활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올해의 경우 초반에는 농활이나 회원 소모임을 꾸리는 등 각자의 위치에서 고민할 지점을 모아내서 회원들이 일조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만들면서 고민을 심화시킬 수 있었는데 후에는 그런 공간들이 전반적으로 축소되면서 활동이 많이 위축된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최근 사회화와 노동 ‘평택 대추리를 잊었는가’를 보고 당황했습니다. 9. 24 이후 상황을 잘 듣지 못했고, 김지태 이장의 실형 선고 소식을 듣고 안타깝다는 생각만 했었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마음을 풀어낼 대중행동 공간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가을추석연휴기간을 활용한 가을농활이나, 800일 촛불집회의 대규모 회원참가를 독려해봄직도 했을 텐데 그러한 지점에 대한 아쉬움이 큽니다. 사회진보연대의 평택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동참했던 입장에서, 9. 24 평화대행진 이후 사회진보연대의 실천 계획이 부재한 상황이 아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후 계획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11월 22일 민중총궐기로 집중한다는 것 외의 답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평택 대추리를 잊었는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아가 9. 24 이후 평택투쟁에 대한 사회진보연대의 입장과 계획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선동은 계몽에 불과하다는 점을 문제제기하고 싶습니다. 단지 잊지 않는다고 하여 운동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진보연대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평택 투쟁의 이후 계획을 실천적으로 제기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소형: 올해 초 평택범대위 회의에 참가하면서 평택 투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진재연 동지의 평택지킴이 활동을 조직적으로 소통
이소형
하고 대추리, 도두리 현지에서의 투쟁을 서울 및 전국적인 투쟁의 흐름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저의 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평택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3월 용수로 파괴 공사를 막아내는 포크레인 투쟁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2006년에 평택 문제가 어떻게 전개될지, 미군기지 건설을 위해 그 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 아닌가 싶어요. 주민들도 그렇고, 활동가들도 그렇고, 그 누구도 5월 4일의 폭력, 유혈 진압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3, 4, 5월에 벌어진 현지의 급박한 투쟁을 활동가들이 정말 열심히 조직했고, 긴박한 하루하루의 대응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결과적으로 보면, 평택 미군기지확장 저지 투쟁이 대추리, 도두리 현지를 지켜내는 투쟁 이외에 일상적이고 다양한 차원의 미군기지 반대운동의 흐름이나 전국적인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다는 것이 냉정한 평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조직적으로 준비된 국가 폭력을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운동진영이 5월 4일을 맞이한 후, 수세적인 투쟁의 조건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당시에도 “현지에서의 투쟁만으로 막아낼 수 없고 전국적인 투쟁 전선이 만들어져야 하며 그만큼 강력한 정치적인 투쟁이 서울에서 필요하다.”는 의견이 이미 3월부터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3, 4월 평택투쟁에서 최초의 구속자가 생기면서 서울에서 촛불집회를 열자는 의견이 제안되면서 서울 지역의 운동 단위들이 적극 결합했는데, 이는 당시 상황이 급박한 점도 있었지만, 평택 투쟁을 정치화하고 전국화해야 한다는 인식, 그리고 현지에서의 투쟁만으로는 수세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동아일보사 앞에 서울 촛불집회의 거점을 확보하였고 특히 5월 4일 이후에 서울에서의 대중적인 투쟁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이 성과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성과들이 모여 평택서울대책회의를 실천적인 활동을 중심으로 건설할 수 있었고 당시 평택투쟁에 있어 필요했던 운동의 공간을 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에서 생각해 볼 때 ‘올해에도 농사짓자’라는 슬로가 현재의 농지를 수호하자는 구호였다면, 이 투쟁에 대한 전국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전선을 만들어가기 위한 구호를 찾아내는 것이 저를 포함한 활동가들의 고민이었습니다. 9. 24 평화대행진을 앞두고 전국행진을 하면서 그런 과제들을 풀어가고자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할 수 있었던 것은 소수의 상징적인 선도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략적 유연성의 문제와 민중의 평화적 생존권에 대해 선전할 때 어느 순간 그 추상성 때문에 막혔던 어려움들은 여전히 과제로 남습니다.

평택 투쟁에서 무엇을 평가할 것인가

이소형: 5월 4일 이후 수세적인 상황에서, “올해에도 농사짓자”는 구호를 대체할 보다 확장된 계획을 제대로 제출하지 못한 것이 가장 뼈아프다
박준도: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이 지배 세력의 반동성을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것 아닌가
문설희: 바뀐 국면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계획이 부재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사회자: 각자의 소회를 간략히 들어 보았는데요, 그러면 올해 투쟁에 관한 좀 더 본격적인 평가에 들어가 보면 좋겠습니다.

박준도: 5월 4일 난폭한 국가 폭력이 드러나면서 운동 지형에 상당한 변화가 옵니다. 이소형씨도 이야기했지만 사실 누구도 이 만큼의 국가 폭력이 노골적으로 자행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인데, 이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운동 주체들이 평택 투쟁 자체를 상당히 낙관적으로 생각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련하여 다음 두 가지는 발본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지배 세력에게 평택미군기지 확장이란 국회동의절차가 끝난, 그리하여 강력한 행정집행만 남아있는 사업에 불과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이런 처지에 놓인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조차도 국가의존적인 활동방식에서 크게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두 알다시피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사업은 해외주둔 미군재배치의 일환인데, 사실 이 사업야말로 무질서와 폭력의 확산에 대한 지배 세력들의 가장 강력한 반동적 조치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배세력들이 자신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죠. 더구나 2004년 겨울 관련된 법안들을 처리한 마당에 국가로서는 동의를 구하는 과정은 끝났고 이제는 말 그대로 집행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지배세력들의 반동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상당히 낙관적이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올해 상반기 주요하게 제기했던 ‘올해에도 농사짓자’라는 구호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구호는 일단 씨 뿌리고 농사를 짓는 데 성공만 하면 당분간 저들이 어찌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서 제기된 측면이 강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였구요. 물론, 이 구호가 평택미군기지반대운동을 조직하려면 농민 생존권 문제를 부각시켜야 했고, 그런 면에서 일정한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장 사회진보연대만 하더라도 이 구호가 회원들의 정치실천 공간을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그렇다 해도 지배세력들의 반동성을 폭로하는 데는 물론이거니와 이 반동성의 실체를 대중들과 공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죠. 미군기지확장을 강행하려는 사람들과 그래도 농사를 짓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 이상을 드러내기에는 한계였다는 것이죠.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둘러싼 대립구도는 사실 한반도,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길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그러니까 무장력을 강화하는 반동적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확장, 평화를 향한 사회운동의 구조화를 선택할 것인가 ― 에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는 투쟁의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쟁점입니다. 보편적인 슬로를 제시할 수 있는 운동이야말로 대중의 운동이니까요.

이소형: ‘올해에도 농사짓자’라는 구호는 농민생존을 결합시키기 위한 구호였다기보다는 행정대집행을 막아내기 위한 실천적인 구호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구호는 5월 4일 땅을 빼앗기기 전까지만 유효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5월 4일 전까지는 이미 미군기지 협정의 법적인 절차가 다 끝난 상태에서도 주민들은 땅과 마을을 점유하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투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에도 농사짓자”라는 슬로는 3, 4월의 ‘포크레인 투쟁’을 조직하고 대추분교를 사수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구호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5월 대추분교가 무너지고 땅을 빼앗기고 군부대가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운동진영은 상대적으로 열악하고 수세적인 입지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부터 평택투쟁을 좀 더 다른 조건에서 확장시키기 위한 구호, 즉 “올해에도 농사짓자”를 대체할 구호가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박준도: 요컨대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진행했던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이 자신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적이었는가라는 점입니다.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모든 정부기관들은 이 문제를 대의를 외면한 ‘보상’ 문제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몰아붙였고, 우리는 팽성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로 대응하거나, 군사기지건설에 맞서는 투쟁으로서 ‘평택’에서 농사짓는 투쟁이 유력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문제의 접점을 너무 ‘평택’으로만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식의 사고가 실천 투쟁의 거점을 또한 모조리 ‘평택’으로만 맞추게 하였다는 것이죠. 결국 5월 4일, 5일 이후 모든 사고는 오로지(!) 대추리 사수 투쟁으로만 집중되었고, 이것이 불가능해지자 다른 구체적인 수단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고가 멈춰버린 것이죠. 이것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왜 그 쪽으로만 생각이 몰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구나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 역시 국가 의존적 경향이 강화되고 있는 현 시기 운동의 흐름과 쉽게 결별할 수 있는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국가 폭력이 다가오자, 한 편에서는 국가 폭력에 압도되어 아예 투쟁이 위축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국가 기구의 개입을 통한 중재와 문제 해결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다시금 강화된 것이죠. 사고가 ‘평택’으로만 몰리다 느닷없이 중재라는 방향을 찾게 된 것이죠.

문설희: 동의하는데, 그 구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국면이 바뀌었을 때 어떠한 구호를 걸 것인가, 어떠한 쟁점을 보편화시킬 것인가에 있어 미흡했다는 것이 오히려 더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전까지는 대추리·도두리라
문설희
는 최소한의 거점 확보,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이라는 최소한의 투쟁 주체 확보에 성공한 셈인데, 그 이후 이를 전국적인 투쟁으로 확장시키고 투쟁의 다른 주체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미흡했다는 것이지요.

평택 투쟁과 대중운동, 그리고 장애물

문설희: 다양한 실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준도: 정치적 수사를 넘어서 대중들과 함께 토론하고 조직하는 실천을 밟아가지 않는다면 평화운동은 결코 지속될 수 없다

문설희: 저는 평택 투쟁이 남한 평화운동에서 첫 걸음의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평화를 택하라”라는 구호의 탄생이라고 봅니다. ‘평택’이라는 지명에 ‘평화를 택하라’는 정치적 의미를 담아 대중적으로 외칠 수 있었다는 점은 성과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평택 투쟁이 평화운동의 맥락 속에 자리매김되었다는 사실이 또한 한계로 작동하기도 했다는 점도 동시에 지적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전체운동에서 평화운동이 지녀온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한계 중의 하나가 노동자운동과의 결합이 미흡하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지점은 평택 투쟁을 더욱 확장시키고 급진화시키는 데에 걸림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덤프연대에서 평택투쟁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였으나 그것이 실천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된 것이 평택투쟁과 노동자운동과의 결합이 실패로 그친 단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덤프연대가 5월4일 대추분교 침탈 이후 발표한 성명서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지요. 그러나 이러한 상징을 계기로 덤프연대를 비롯한 노동자대오를 평택투쟁으로 적극적으로 견인하려는 과정이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덤프 연대 자체도 자기 고민을 발전시키지 못하면서, 지금은 성토작업에 덤프노동자들이 동원되는 비극적 결말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박준도: 덤프의 사례를 말씀하시니까, 이라크 파병 반대할 때 비행사 노조에서 수송을 거부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던 게 생각납니다. 물론 시의적절한 성명은 자체로도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어떻게 그것을 수행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은 채 정치적 수사들을 모은다고 될 일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행동계획이 동반되지 않는 수사적인 성명으로는 곧바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행사노조는 물론 덤프노조도 되씹어 보아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최근에 반전팀에서 검토하고 있는 자료 가운데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1차 세계대전 당시 총파업을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노동자운동 내에서 벌어진 논란입니다. 당시 논의를 보면, 총파업을 한 나라는 전쟁에서 패할 것이고, 전쟁에서 패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노동자운동은 망한다, 총파업을 안 한 나라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따라서 노동자운동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총파업을 하면 안 된다 는 식으로 논리가 나오는데, 이게 아주 만만치 않은 얘기입니다. 저는 덤프 연대 문제도 비슷하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평택과 관련된 일체의 작업 거부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구체적인 실천을 채택한 조합원은 생계에 어려움이 생기고, 채택을 안 하면 2년간 보장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지도부의 지침을 따르는 노동자들은 경제적으로 불리해지고, 그 지침을 따르지 않는 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올라오게 될 거구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이냐면, 말로 작업 거부를 하는 것 자체는 쉬울 수 있지만, 그 구체적인 실행으로 들어가면 사태가 매우 어렵고 복잡해진다는 점에서, 이런 어려움을 충분히 감안한 계획을 세워서 대중들과 함께 토론하고 조직하는 실천을 밟아가지 않는다면, 운동이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런 문제는 비단 특정 노동자 집단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노동자운동 전반, 나아가 학생, 여성, 농민운동 등 다른 사회운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겠지요. 이런 각각의 지형을 고려한 구체적인 방법들이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봅니다. 물론 이는 근본적으로는 사회운동의 취약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저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애초 논의 지형 자체가 다소 협소하게 만들어진 데도 그 원인이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이소형: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막아내기 위한 대중들의 다양한 실천과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조직화 과정이 부족했던 점을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양하고 적극적인 노동자의 대중적 실천이 촉발되지 못했는지 좀 더 깊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략적 유연성 반대’라는 구호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한미군이 신속 기동군으로 재배치되고 한반도가 전쟁위협에 더 많이 휩쓸리게 된다는 주장을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해봤습니다.
한국사회에서 평화군축운동은 대중적인 투쟁으로 진행되지 못했고 운동의 내용 자체도 매우 전문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반대하는 운동 역시 한미동맹의 군사안보정책들을 전문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넘어, 대중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했던 점을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6년 대추리에서 벌어진 투쟁은 단순히 남한사회의 군사안보정책을 비판하고 개선하는 기존의 평화운동의 지평을 완전히 새롭게 확장한 사건이었습니다. 평택기지를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을 위한 사활적인 전쟁기지로 확장하겠다는 계획이 남한의 지배계급을 통해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삶을 지켜내고 전쟁을 거부하는 민중들의 보편적인 평화운동이 유례없이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 Vs 이를 거부하는 민중의 생존을 건 투쟁"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곳이 바로 대추리였다는 뜻이죠.
평택투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선전한 내용을 살펴봅시다. 주되게 주한미군주둔의 부당성(한반도 전쟁위협, 대북공격력 증강, 민족의 자주권 침해)을 언급하면서 통한 민족주의적인 반미투쟁을 호소하고, 여기에 덧붙여 조직적인 (남한의)국가 폭력의 야만성을 폭로한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증요한 문제는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남한의 지배계급이 왜 그토록 조직적이며 치밀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느냐인 점인데, 이 부분은 운동 주체 내에서도 여전히 명확하게 토론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5월 4일 그토록 엄청난 행정대집행의 규모를 운동진영이 예측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시간을 다시 돌려 아직 대추분교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면, 평택미군기지확장 저지투쟁과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의미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토론을 조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설희: 저는 다양한 실천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습니다. 5월 4일 대추 초등학교 철거상황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도 대추리로 뛰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대단히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죄책감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서울 대책회의 주최로 열린 서울지역 촛불집회는 혼자서 꾸역꾸역 삼키던 분노를 표출하고 투쟁의 의지를 다질 수 있게 한 최소한의 공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이러한 소중한 공간을 계속 열어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오히려 서울대책회의의 실천이 확장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대책회의의 실천이 하나의 모델이 되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필요했을 텐데, 오히려 서울대책회의의 실천은 더 축소되었던 것에 대해 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사회진보연대 같은 경우에도, 평택으로 지킴이 파견을 하고 농활을 조직해내고 사수투쟁을 하러 가는 것과 더불어 회원들과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들을 개발했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시도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평택 회원 소모임을 만들어서 회원 소모임 자리에서 토론했을 때, 적지 않은 참석이 있었고, 적지 않은 논의가 됐었고, 적지 않은 결의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지속되지 못한 원인이 무엇인지, 이런 것들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그런 토론을 진행하면서 내가 농활이라든지 범국민대회라든지 혹은 일상적으로 평택을 가는 것이 아닌, 내 공간에서 평택 투쟁을 할 수 있는 것을 이 사람들과 같이 논의해 가면서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것들이 지속되지 못했다는 점을 저는 주로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투쟁이 보편화되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사회진보연대 내적 평가를 하자면, 이런 점을 지적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박준도: 지역운동의 취약성이라는 부분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그동안 총력 집중 투쟁이라고 얘기했던 것들을 돌이켜 보면, 각 지역의 투쟁이 취약하고 부재한 것을 가리는 알리바이가 됐던 면도 없지 않습니다. 좀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이번 총궐기 투쟁을 봅시다.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진행하자 가장 형편없는 지역이 서울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점은 인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천 지역의 경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잘 되지 못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평택으로 내려가자고 하면 상당히 많이 내려간 편입니다. 철거 투쟁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최대치가 80명이라는 것이지요.
요는 전국 집중을 하지 말자 그런 얘기가 아니고, 각자의 취약성을 냉정하게 인식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집중을 통해 이 같은 취약성과 성장의 필요성을 가리는 식으로만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문설희: 대추리로 집중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거점의 사수는 기본이니까요. 문제는 그것과 병행해서 투쟁을 전국화시킬 수 있는 계획일 텐데, 그것이 왜 되지 않았는가에 관해서는 평가가 꼭 필요합니다.
촛불 집회를 예로 들면, 물론 촛불 집회 자체가 갖는 운동 방식 상의 한계도 있겠지만, 그 공간에 모인 사람들의 역동성을 제대로 북돋지 못한 방식으로 갔던 게 문제가 아니었나 싶어요. 초반에는 대추리의 소식을 알리고 공감하는 공간이면 충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 공간을 전환해서 평화운동을 하기 위해 어떤 요구를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내용이 발전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냥 추상적인 ‘평화를 사랑해요’ 식으로 가게 되다 보니까, 무력감을 느끼면서 동력이 이탈된 면도 있다고 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평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지금까지 주로는, 평택 사수 투쟁을 넘어서는 어떤 다른 투쟁 태세나 계획, 방식과 수단 등에 관한 평가를 제기해 주신 것 같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지속적인 토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런 문제도 토론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실제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장애물로 작용한 대중 이데올로기상의 난점이 어떤 것이었는지 하는 것 말이지요. 좀 성글게 말하자면, 한미동맹에 대한 (원칙적이든, 실리적이든) 수용, 급진적이고 대중적인 평화운동이나 평화주의의 부재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관련해서 이런 것이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지,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실마리는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지 등을 얘기해 봤으면 합니다.

박준도: 경험적인 문제라 일반화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인천에서 집회를 하면 온갖 분들이 와서 방해를 합니다. 니들은 김정일이 품에나 안기라고 말하고, 서명을 하면 서명 자체를 방해하고... 근데 이 분들한테, 미국이 이렇게 나쁜 짓을 하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이런 걸 지지하려 하느냐 식으로 맞대응을 하면 그 판은 난리가 납니다. 동네 주민들 다 모이고, 열혈 보수주의자들 다 와서 다 뒤집어져요. 이럴 때 우리가 미군 나가란 소리 하는 거 아니다, 확장만 하지 말라는 거다 는 식으로 수세적으로 말하면, 대충 무마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죠. (웃음)
그런데 누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 모두 전쟁을 겪었고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너무 잘 알지 않느냐, 현재 한반도의 경우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전쟁 가능성이 극히 높아진 상황이다, 그러니 그게 미국이건, 북한이건, 남한이건 간에 누구라도 이 가능성을 단 1%라도 올려선 안 된다, 그런데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라는 것은 이 가능성을 높이는 행위다, 그러면 안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러니까 분위기가 역전되는 거에요. 물론 그렇게 말한 분 특유의 설득력도 있었겠지만 여기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제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누구에 의한 것이든 전쟁 가능성을 1%도 올려선 안 된다는 논리에는 누구도 쉽게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한미동맹을 해체하는 운동이 대중화되려면, 한반도에서의 민족적 순결성 같은 민족주의 논리를 넘어서야 할뿐더러, 한미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게 많다, 누가 옳고 그른지 따져보자는 식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으로 얘기하려는 것 중 하나가,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지식만 가지고는 대중들을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거 아닙니까. 뭔가 틀이 바뀌면서 쟁점이 바뀌거나, 아니면 새로운 쟁점이 출현하면서 틀 자체가 바뀌거나 하는 식으로 해 줘야 문제에 대해서 재사고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저는 고 김선일씨의 예가 그런 경우가 아니었나 싶어요. 당시를 생각해 보면, 미국이 잘 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어쨌거나 미국은 우리의 은인이었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데 좀 도와줘야 되는 거 아니냐는 입장도 있었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 그런 얘기도 있고 했지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그 대가가 이렇게까지 비극적일 것이라고 대부분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이 비참한 죽음을 앞에 두고, 뭐 과거 한국전쟁이 어쩌고 얘기할 것 없이 지금 이 상황만 놓고 얘기하자, 이렇게까지 사태가 비극적으로 가야 하나 등으로 얘기가 진행되면서, 그 때까지와는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저는 고착되어 있는 쟁점과 대립선을 이동시킬 수 있어야 뭔가 가능해지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한미동맹 문제에 대해서도 그런 고민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설희: 전략적 유연성 반대투쟁에 대한 입장을 대중적 실천으로 풀어내지 못한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말이 되게 어렵잖아요. 사실 서명을 받을 때에도 그래요. 평택 주민들이 이렇게 잔인무도한 짓을 당하고 있습니다, 서명해주세요 하면 쉬운데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말을 하자면 상당히 많은 설명이 필요하거든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추상적인 어휘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중들과 어떻게 결합하고 대중운동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지 개발이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저 개인적으로는 전국행진 당시 경험한 군산에서의 선전전이 이 문제를 풀어나갈 단초를 보여준 것 같아요. 당시 연사로 나선 분이 군산 직도 폭격장 얘기에서 시작해 평택의 사안과 군산의 사안이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군사 패권 유지를 위해 전세계적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는 얘기도 하고, 그러면서 새만금 얘기도 하시더라구요. 새만금이 농지로 쓰이는 게 아니라 군용으로 쓰인다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죽 확장시켜 내면서 대중적으로 동의를 받아내는 방식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이 부분은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인데, 앞으로 이에 관한 고민을 더 해 볼 생각입니다.

박준도: 저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말 만들어내는 데 천재들이 만들어내는 말이다 보니, 그 말이랑 싸우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워요. 예전 90년대 말, 2000년 때를 생각해 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노동유연화 그러면 대단히 좋은 말인 것처럼 보이고 그랬는데, 요새는 유연성이라는 말만 붙으면 나쁜 말이라 생각해서 뭔가 싸워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됐거든요. 그런데 평택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든 누구든 그런 일을 해 내지 못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보자면,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얘기하면, 용산 미군기지 확장, LPP 협정 뭐 이런 것들하고 연계가 되는데, 그러다 보니까 어쨌거나 사울에서는 없어져 지방으로 가는 것이고, 하여튼 다 몰아놓는 건데, 왜 난리냐는 식의 생각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과거 노동유연화를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말로 대체했듯, 뭔가 그런 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러니까 군사기지 유연성이라는 것은 곧 침략기지화다 뭐 이런 건데, 이런 말을 계속 고민해 보기는 하는데 아직은 잘 잡히지가 않아요. 사실 이 문제를 한 번씩 얘기하려면 미군기지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미군의 군사 작전의 변화, 뭐 이런 것들을 최소한 10분에서 20분 정도 설명을 해줘야만 하는 것인데, 이래가지고는 쟁점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큰 한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평택 투쟁과 평화운동

이소형: “평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제시되어 온 민족주의적인 해법 자체가 변화해야 한다
박준도: 일종의 부문운동으로 사고되는 평화운동이 아니라, 사회운동의 핵심 주체인 노동자, 농민, 여성을 재조직할 수 있는 평화운동이 필요하다
문설희: 평택투쟁의 수많은 스펙트럼 중에서 무엇을 더 밀고 나갈지 토론해야 한다

이소형: 저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평택 투쟁을 경험하면서도 다시 한 번 느낀 것이지만, “평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동안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제시되어 왔던 해법 자체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 동안의 평화 공식이라는 것이, 미국으로 인한 한반도 전쟁위협을 막아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 민족끼리 단결하여 미국을 몰아내야 한다, 뭐 대략 이런 식이었잖아요. 반면 그동안 사회진보연대는, 신자유주의와 군사세계화 속에서 한미동맹의 양상은 변화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구체적 전략의 변화를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렇지만 그 주장은 결국 “그러니까 투쟁을 더 대중화시키고 더 정세적인 투쟁을 하자는 것 아니냐” 식으로 논리에 귀결되고 말았던 것 같아요.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문제를 폭로하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에 저항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결국에는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내는 투쟁을 대중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선전의 매개 정도로 인식되었다는 것이지요.
사실 평택 투쟁에서도 사회진보연대가 갖고 있는 입장 자체가 쟁점이 되어서 토론이 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의 활동이 기존의 ‘평화’ 관념을 제대로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평택 투쟁 과정에서 인권운동 등에서 ‘평화권’이나 ‘평화적 생존권’ 등을 제기하는 흐름이 있기도 했습니다. 평화를 민중의 보편적인 권리로서 제기하고 대추리 주민들의 생존의 권리가 바로 모든 민중의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주장이었지요. 이에 관해서는 저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면이 있는데, 여전히 평화운동의 구체적인 전략과 전망을 밝혀내는 것은 중요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박준도: 말씀하신 부분은 기존 운동 진영이 평화 운동을 바라보는 일반적 관점과 연결될 것 같습니다. 대개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통일전선, 즉 당의 방침을 전제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해당 시기의 몇 가지 의제를 놓고 포괄할 수 있는 범위를 최대한 넓히자는 사고방식이지요. 평화운동에 대해서도, 이 운동이 기본적으로는 개량이지만, 현 단계에서는 필요하니까 데리고 가자는 게 기본 발상입니다.
그런데 이 점은 민족주의 세력과 좌파 할 것 없이 마찬가지입니다. 전자의 경우, 한민족이 미군기지 없이 살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비록 개량적이고 좌익모험주의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애들이 있지만 품을 넓혀서 얘들을 다 끌어안고 가자 이런 식이겠지요. 후자의 경우도 평화운동에 관해서, 말하자면 합법적인 운동도 필요한 거 아니냐는 정도의 판단을 갖고, 헌법 소원하는 거 가져다 맡기고, 개량적인 실천이지만 필요한 것들을 맡기는 식으로 하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는 평화운동에 대한 그런 식의 접근은 평화운동 자체를 더욱더 몰락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운동 자체는 언제나 합법적인 운동이나, 몇몇 전문가들이 대표해서 하는 운동이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거기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되는 게 되고, 그 운동 자체는 계속 그런 식으로 머무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합법주의적이고 국가 장치에 의존하는 방식의 비폭력 노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평택 투쟁에서도 보면, 대중운동이 잘 되지 않는 상황에서, 국회에서 뭘 해야 한다는 둥, 중재자를 데리고 와야 한다는 둥, 중간층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등의 얘기를 하면서 투쟁을 교란시킨 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더욱 문제는 평화운동의 상징을 그런 세력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급진적이고 대중적인 평화운동의 역사가 부재하고 그것이 투쟁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이소형: 사실 남한의 경우 평화운동이 전통이라든지, 이론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부재하고 척박한 면이 많죠. 그렇기 때문에 국가 정책들을 반대하는 투쟁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고, 말씀하신대로 국가 장치에 의존하지 않는 평화운동의 가능성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돌파하려면, 좀 더 알아듣기 쉬운 구호를 만들어내자는 식의 접근으로는 안 될 거라고 봅니다. 결국 전략적 유연성이라고 하는 것이 미국의 전반적인 새로운 군사 재편의 중심 기조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민중들의 대안적인 평화나 세계라는 그만큼의 전망을 갖고 있는지, 그 전망 하에서 평택 투쟁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일단 활동가 차원에서라도 제대로 토론하고 정리하고 있는가를 우선 평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쟁점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한번 이런 식으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 비핵지대화 선언이라든지 하는 정책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 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군축의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평화운동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런 운동들이 한계적이며 대중운동을 제대로 고양할 수 없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평택 투쟁을 하면서 우리가 느꼈던 답답함이랄지, 특정 정책에 대한 반대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운동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런 정도의 목표, 평화운동의 목표와 전망이라는 것을 한반도나 동아시아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앞으로 직도 등의 투쟁들이 이어질 텐데, 그런 투쟁이 우리가 앞서 지적한 한계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저의 이 같은 견해에 관해서는 쟁점이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평화운동이 한계적이라고 해서, 대안세계화 운동이 말하는 평화의 전망 식으로 가는 것도 다소 추상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 역시 논의 과제이지요.

박준도: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일종의 부문운동으로 사고되는 평화운동이 아니라, 사회운동의 핵심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농민, 여성을 재조직할 수 있는 평화운동이며, 그런 점에서 평화운동의 고민은 이런 사람들이 평화운동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들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평화운동 조직이 대중조직처럼 자기 회원을 늘려 운동을 확장하는 방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대중, 대중운동 내에서 평화의 쟁점을 확산시키는 문제, 그 운동들의 다양한 의제들 중에서 평화라는 쟁점을 어떻게 우선 순위로 올릴 것인지 하는 고민들을 같이 진행하지 않으면, 결국 제자리걸음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조직화라는 말의 의미를 다르게,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건설이라는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봅니다. 특정 조직에 대중들을 가입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대중들 내에서 토론과 실천의 구조를 건설하는 문제로 말입니다. 사실 제가 일부 평화운동에 대해 갖는 문제의식은 그들이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대로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무장이나 제한된 선도투의 반복, 개인적 실천들의 중요성을 앞세우는 것 등은 대중투쟁에 대한 고민의 결여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러저러한 대중운동들을 혁신하고 건설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및 동아시아의 평화라는 의제가 우선 순위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벌여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른바 사회운동적 노조주의고, 사회운동적인 실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라크 전쟁이 터질 무렵에 세계사회포럼에서 선택하려 했던 여러 정치적 실천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급의 대중 조직들과 각급의 정당 조직들, 여러 운동 주체들이 이런 것은 안 된다, 이런 것이 운동의 의제여야 한다 면서 반전평화의 문제를 운동의 1번, 2번 의제들로 상승시켜 낸 것입니다.
앞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반전팀에서 1차 대전 자료를 검토하다 보니까 재미있는 게 많습니다. 제가 좀 충격을 받았던 것은, 당시 제2 인터내셔널에서 독일 노총이건 프랑스 노총이건 간에 조직의 10가지 의제에 전쟁반대가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운동의 우선 순위가 되지 못한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당시 운동의 한계와 동시에 전쟁을 막을 수 없었던 이유를 가장 극명히 보여 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원칙적인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사회운동이 사회운동답게 갈 수 있는 각고의 노력이 동반되어야지, 그것 없이 평화운동의 독자적 노력만 가지고는 안 되는 면이 클 것입니다.

문설희: 대안세계화 운동으로서의 평화운동을 위해 우리가 착목해야 하는 점이 무엇인지를 이번 평택 투쟁을 통해서 읽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평택 투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평화란 무엇이냐>는 노래 같은 경우, 평화운동에 대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잖아요.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복직하는 것이 평화♪”라는 부분은 적극적으로 운동으로 만들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그 중에는 그렇지 않은 내용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이제까지 우리가 평택 투쟁을 하면서 보았던 수많은 스펙트럼에서 어떤 부분에 착목해서 계속 우리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라고 봅니다. 평택 투쟁을 평가하고 이후 투쟁의 준거지점을 명확하게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평택 투쟁,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박준도: 전쟁가능성을 단 1%라도 높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견지하면서 평택 투쟁과 평화운동을 함께 진전시킬 수 있는 계획을 토론해야 한다
문설희: 평화운동과 노동자운동 양자가 모두 변화해야만 평택 투쟁이 더 진전될 것이다
이소형: 북핵 문제를 계기로 한반도 평화운동 자체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

사회자: 평택 투쟁 당시 느꼈던 난점을 얘기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평화운동에 관한 생각까지 나온 것 같습니다. 앞서 나온 얘기이기도 한데, 대중들이 투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들을 개발, 확장해야 한다는 것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구요. 평화운동과 관련해서는, 뭔가 고유한 의제를 가지는 평화운동의 독자적 전망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고, 별도의 부문운동으로서 평화운동이라기보다는 이념으로서 평화주의를 매개로 대중조직 자체를 재조직하는 평화운동이 더 필요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서서히 토론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앞서 여러 가지 평가 지점과 의견을 제기해 주셨는데, 그러면 평택 투쟁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각자의 견해를 들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박준도: 덤프건 비행사 노조건 간에, 왜 실패한 것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것들을 좀 냉정히 돌이켜 봐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저 한 두 사람의 의식적인 선언이나 실천 가지고는 절대 안 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지속적인 노력만 강조하다 보니 열심히 하자는 식으로 되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하네요. (웃음)
인천에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을 지역 비정규직 사업장 앞에서 진행하는 방식을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대우 자동차 사내 하청 노동자들 퇴근 시간 맞춰서 그 앞에서 촛불 집회를 진행하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방식들을 좀 더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건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게, 원래 1차 세계대전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지침이 공장 앞에서 제국주의 전쟁 반대를 선동해야 한다는 것이었거든요. 애매한 시민적 감수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공장 앞에 가서 선전, 선동하고, 왜 노동자 민중들이 반전평화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맨 앞에 서야 하는가를 토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들을 다방면으로 벌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진보연대도 그런 고민과 계획들을 계속 확장하는 중에 있다고 봅니다. 예전에는 솔직히 말해서 기자회견만 쫓아 다녔죠. 그랬다가 매향리에 소수가 가보고, 그 다음에 파병반대 싸움하다가 지하철 선전전을 해 보고,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실천을 기획해 보는 등, 점점 선동과 실천의 공간을 확대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더 확대시켜 나갈지, 그러기 위한 역량을 내부적으로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소형: 지금 시점에서는 무엇보다 평택 범대위 투쟁의 궤적들에 대한 평가를 잘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서울 대책회의의 실천들도 함께 평가해야겠지요. 사실 범대위의 상황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가면서, 그나마 실천력이 담보되었던 서울 대책회의가 예를 들어 전국행진 같은 실천을 기획했고,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서 서울 지역의 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점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걸 따로 떼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점 때문이지요.
어쨌거나 계속해서 범대위 운동에 적극 참여해서 운동을 함께 기획해 가야 할 것입니다. 겨울맞이 사업도 그렇고, 또 내년 3월에 있는 성토작업 저지를 계기로 다시 한 번 대중 투쟁을 만들 고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운동, 특히 덤프연대에 소속되거나 소속되지 않은 덤프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과정을 범대위의 주요 사업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범대위 및 서울대책회의 안에서 기획력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2007년 새로운 국면에서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인데요. 한반도 전쟁위기라는 문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면서 평택의 상황들을 계속 알려내고 투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현재 이와 관련하여 범대위에서는, 지난 주택 철거 당시처럼 시민단체 중심의 평화 선언을 한반도 평화 선언으로 전환해서, 모든 시민사회 단체들의 모든 인사를 조직한다는 기획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획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사실 9월 주택 철거 투쟁 당시 조직된 선언이 별로 위력적이지도 못하고 일회성 참가로 끝난 이유는, 평화운동의 주체들을 발굴하고 조직하는 사회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한 데 있을 텐데, 현재의 기획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사실 이는 중간층의 참가라는 사고방식의 고유한 한계라고 보는데, 그런 식으로는 절대 운동이 확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기하는 동시에, 그런 방식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동시에 제기해야 할 것입니다.

박준도: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의 향방과 관련하여 현재 시점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바로 북핵 문제입니다. 한반도 핵 위기라는 문제에 대해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이 어떤 입장과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라는 질문을 점점 더 회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북핵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정도의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기존의 논점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방식보다는, 논점 자체를 전환시키는 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저는 한미동맹이 아니라 남북공조라고 대응하는 것은 논점을 바꾸기보다는, 기존의 논점에 고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한미동맹에 의한 전쟁 추구가 아닌 동아시아 내에서의 평화를 주장하자는 것은 아니구요. 저는 일단 앞서 말한 것처럼, 전쟁가능성을 단 1%라도 높이는 것은 무엇이든 안 된다는 원칙을 분명하게 견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북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게 되면 위의 원칙이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고 그 순간부터 대중들은 우리의 주장을 의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앞에서 힘의 비대칭성이나 역사적 기원을 얘기해 봤자 설득이 안 된다고 생각하구요. 동아시아 내에서의 전반적인 평화를 어떻게 사회운동적인 방식으로 구축해낼 것인가에 관한 수미일관된 입장들을 토론하고 만들어내는 계기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이 서야만 평택 투쟁도 살고 평화운동의 전망도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는 둘 모두에게 비극이 되겠지요. 어쨌든 이 문제가 평택 투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소형: 북핵 관련해서 이 시기와 사안이 사실은 평택 투쟁뿐만이 아니라 남한 사회 반전 평화 운동 자체가 내용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9. 24 이후 투쟁이 굉장히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서 북핵 사태를 계기로 평택 범대위나 평택 투쟁의 주체들이 이 문제로 토론을 벌였다면 그것이 이후 반전평화 운동의 미래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통일연대 쪽에서는 자신들의 실천에 평택 사안을 함께 조직해 보자는 의견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본적인 정세토론조차 여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이 문제가 쟁점이 되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비해 사회진보연대가 의식적으로 논쟁을 기획해야 할 필요도 느낍니다.

문설희: 평택 투쟁이 평화를 향한 노동자 사회운동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번 투쟁의 걸림돌이 되었던 조건들을 명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평화운동이 갖는 그 자체의 한계나, 노동 단체에서 평화운동에 대해 갖는 부정적 인식이 결합하면서 이 운동과 만나지 못했던 조건들을 평가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안들이 실천적으로 제기되지 않는 한 평택 투쟁의 한계들은 계속 반복되지 않을까 싶어요. 또 한 가지는, 정치적인 선언에 그치지 않는 실천들에 대한 고민입니다. 평택 투쟁에 대한 덤프 연대의 선언에 굉장히 환호했다가 슬퍼했던 과정들을 보더라도, 평화운동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나는 평화주의자라는 선언을 넘어서는, 평화를 위한 투쟁 과제와 방식을 해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진보연대가 내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택 투쟁이 현재 끝난 건 아니지만, 국면이 전환되는 시기라고 한다면, 9. 24 평화대행진 이후 사회진보연대의 평가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평가를 계기로 보다 실천적인 계획을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계속 만들었으면 합니다.

박준도: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사회진보연대가 평택 투쟁과 관련된 계획들을 수행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빠졌던 한계에 대한 냉혹한 인식이 필요하고 실천 공간을 넓혀 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지킴이 운동을 했던 흔적들을 어떤 식으로든 확산시켜 내어야 합니다. 사실 사회진보연대 회원들이 지금껏 이런 류의 활동을 한 적이 없었어요. 어떻게든 들어가 보겠다고 발버둥 치고, 들어가서 라면 끓여 먹고, 불법 검문 감시도 스스로 해보는 등, 집행위원들과 몇몇 위원들 중심의 활동을 넘어서 폭을 넓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확장시킬 방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관련하여 지금이 분명 침체된 국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뭔가 토론할 수 있는 내부적 계획들을 내야 합니다. 아까 9. 24 이후 토론회라도 한 번 했어야 했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평택 지킴이를 결의했던 우리들은 평택 투쟁이나 좀 더 넓게 말해 평화주의의 진전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임을 다시 안정적으로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것이 결국 내부 민주주의고 내부 조직화일 텐데, 이런 모임이 있어야만 조직 내의 민주주의도 확대되고 운동도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관해 사회진보연대 차원의 고민이 많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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