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 금속산별노조의 과제와 쟁점
기업별 노조들, 한지붕 아래로 들어가긴 했지만
전국금속노조는 지난 11월 23일 서울 88체육관에서 720여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금속 산별 완성대의원대회(전국금속노조 18차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었다. 이로써 금속노조는 기존 180여개 지회 41,131명 조합원에서 새로 전환한 34개 노조를 더해 250여개 사업장(지역지회 분회까지) 14만 4,492명의 조합원과 연간 예산만도 약 270억이 넘는 국내 최대 산별단일노조가 되었다.
1998년 산별노조 건설을 목표로 민주금속연맹, 자동차연맹, 현총련이 통합하여 금속산업연맹을 출범시키고 2001년 2월 8일 108개 지회 30,795명의 조합원으로 산별노조인 전국금속노조의 깃발을 움켜쥔 지 5년여 만이다.
"통합"이냐, "완성"이냐라는 가당치 않은 논쟁을 차치하면, 대공장들이 기업별 노조에서 금속노조로 소속을 바꾼 셈이니 일단 외형적으로는 한 식구가 된 셈이다. 그러나 조직형태를 둘러싼 규약개정 논쟁이 진통을 겪다 12월 20일 임시대의원대회 속개 회의에서 기업지부를 3년간 한시적으로 인정하고, 철강 업종지부 허용 여부를 중앙위원회에 위임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으니, 당분간 자동차 완성 4사 대공장들은 한 지붕이 아닌 단독주택을 유지하게 되었다.
개정된 규약대로라면 기존 14개 지역지부와 1개 기업지부(만도) 체계에서 강원지부(준)를 포함한 13개 지역지부와 4개의 기업지부(현대, 기아, GM대우, 쌍용차)로 편재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대구-구미지부 통합, 경주-포항지부의 통합, 기업지부인 만도지부의 지역지부 편입을 전제한 것이며, 철강사업장들의 업종지부 허용이 중앙위에서 부결될 것을 가정한 것이다. 어차피 자동차 완성 4사 기업지부가 인정된 상황에서 예외적인 기업·업종지부 허용 요구에 대한 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 들어 설 5기 지도부에겐 2009년 기업지부를 해산시켜야하는 만만치 않은 조직적 소명이 부여된 것이다.
문제는 3년 뒤 기업지부가 해산하고 명실상부한 '완성' 금속산별노조 건설이 가능하냐가 아니다. 노조 간부인 필자는 이 과제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하지만, 정녕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완성산별노조가 담아야할 사업과 투쟁의 방향이다.
대공장들의 산별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아래로부터 조합원들의 충분한 토론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 일부 동지들이 십 수년간 주장해왔던 것처럼 "투쟁을 통해서"는 더욱 아니다. 산별전환 성공의 근간에는 복수노조 도입과 함께 기업별노조가 앉아서 당했던 일본 전투적 노동운동의 몰락의 예처럼 "복수노조 시대의 도래", "노사관계 로드맵의 도입 예고"에 따른 위기의식이 깔려있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들에서 끊임없이 패배해 온 상황에 대한 방어적, 수세적 반응인 것이다. 한편 "묻지마 산별"전환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작년 6월 산별전환 투쟁이 한 창일 때, 완성사 한 간부가 조합원 교육에서 "대우차에서 해고되면 기아차에서 고용을 책임지는 것이 산별노조다. 좋은 거다."고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필자는 거의 쓰러질 뻔 했다. 만성적인 고용불안 속에서 기업별 노조가 고용을 지켜줄 수 없다는 위기감은 산별노조가 "평생고용보험"이라는 식으로까지 둔갑하게 했으니 말이다.
대공장들의 산별전환 성공이 민주노조의 위기라는 현실에 기인했다는 역설은 완성산별노조가 심각히 고민해야할 점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산별노조의 조직적, 형식적 통일성을 확보 하는 것이나 산별중앙교섭을 안착화 하기 위한 대기업 전환노조들의 조직정비나 법·제도 개선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핵심은 다음에 제기하는 두 가지를 극복하느냐는 것이며, 위의 두 가지는 그 결과에 뒤따르는 것들이다. 현상의 과제보다 더 근본적인 것들이다.
첫 번째 과제는 기업별 임단투 체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산별중앙교섭을 얘기하는 것인가? 다 아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왜 또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금속노조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4년간 피터지게 중앙교섭을 해왔고, 합의사항만 보면 어려운 조건에서도 적지 않은 것을 쟁취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금속산업 최저임금이나 비정규직 조합활동 관련 내용, 사용자단체 구성과 법인 등록을 강제함으로써 투쟁으로 산별교섭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 모두 소중한 성과다.
하지만 과정을 보자. 해년마다 중앙교섭 시기에 중앙쟁대위(중집) 동지들이 하는 고민은 "중앙교섭"에 대한 현장 조합원들의 관심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교섭요구-조정신청-쟁의찬반투표와 같은 절차와 일정을 대부분 따라 가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조합원들은 중앙교섭 내용도 제대로 모르고 파업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니 2005년의 경우처럼 쟁의 일정을 조금이라도 당길라 치면, 현장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도 있고, 파업참여율도 산별단일노조치곤 높다 할 수 없다. 심지어 현장으로 내려가면 중앙교섭속보가 조합원들에게 홍보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 홍보가 안 돼서 문제인가? 그렇다면 게으른 지회 간부들을 닦달하면 해결되는가? 결코 아니다.
정치혁명보다 문화혁명이 더 어렵다고 했던가! 조합원들은 십 수년간 진행되어온 임단투와 임단투 중심의 사업풍토에 익숙해져 있다. 산별전환 후에도 구래의 단사 임단투와 내용과 방식이 전혀 다른,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조합활동을 경험할 수 있는 장이 없었거나 부족했다. 기업별 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기제(구호로만 남발하는 연대투쟁 호소 같은 것 말고)가 부족했다. 이렇게 해서는 산별교섭이 심화·확장될 수 없다.
중앙교섭에 집중하자는 것이 아니다. 산별노조 "중앙교섭이 담아야 할 내용과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이와 연관된 "산별노조의 일상사업이라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하자는 거다.
1년간의 투쟁에서 나올 수 있는 교섭내용이나 본조든, 지부든, 지회든 2년 집행기간 동안 조합원의 가시거리에 있는 '성과 보여주기'식 사업 말고, 5년, 10년의 계획으로 산별노조활동의 폭과 저변을 사회적으로 확대시키는 지역적, 전국적 사업이 필요하다.
"누가 지회장으로 올라오든 사업장 임단투 결과는 오십 보, 백 보다"라는 이야기는 조합원들도 타결 전에 감으로 때려 맞추는 종례의 판에 박힌 사업장 임단투(지회 보충교섭)에 여전히 방점을 찍는 한 산별노조는 서서 죽을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최근 대공장들의 임단투는 임금성 단협을 확대하여 실리를 추구하고, 조합원들의 관심도가 떨어져가는 조합활동 관련 조항이나 현장투쟁 방어장치 관련 단협은 상대화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기업임금과 기업복지 쟁취 투쟁을 "사회적 임금투쟁, 사회적인 민중복지, 지역복지" 투쟁으로 전환해야 하는 데, 이에 대한 대공장들의 사고 전환과 실험은 여전히 지체되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사회적 임금투쟁"은 산별임금투쟁이나, 법정최저임금투쟁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사회연대연금 같은 연기금 정책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생활임금 투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이번 금속노조 임원선거에서 한 후보가 "생활비 절반, 노동시간 절반"이라는 파격적인 구호를 걸고 나왔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를 의미한다. 이 구호는 구체적으로 생산의 영역이 아니라, 생활비 영역, 즉 노동력 재생산 영역으로 노동조합의 정책과 투쟁영역을 확대하자는 주장이었다.
두 번째 과제는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표상을 바꾸는 일이다.
정권과 자본, 보수언론이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데는 일정한 공식이 있다. "노동조합 = 대공장노조 = 집단이기주의, 부패, 패거리싸움=공공의 적"으로 표상화 하는 방식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표상이 이렇게 굳어지면, "비정규직노조나 대공장-정규직노조나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다. 고로 나쁜 놈들이다"라는 식으로 정리된다.
부패하고 관료화된 노조 상층부를 노동조합과 등치시킴으로써 사회적으로 노동조합운동을 매장한 외국의 사례는 많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학생운동의 위기가 폭발해버린 1997년 '한총련사태'를 되돌아봐도 알 수 있다. 한총련 출범식 성사투쟁 과정에서 전경 1명과 프락치 혐의를 받은 2명의 시민이 죽었고. 언론은 학생운동권을 도덕적 패륜아로 몰았다. "학생운동 = 한총련 = 도덕적패륜아 = 사회악"이라는 표상화는 학생운동을 도덕적 근간부터 흔들며 고립시켰다. 그 와중에 "나는 한총련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시민들이 보기엔 다 같은 '학생운동'인데.
노동조합의 위기가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활동가와 간부들의 부패와 관료화에서 왔다고 답변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것이다. 사실 노동조합간부들의 부패는 노조 운동의 위기에서 비롯된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래서 부패방지를 위한 노력들이 매우 필요하지만, 노조의 위기에 대한 처방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표상을 바꾸자."는 것은 이미지 개선 사업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거라면 이미 대공장 노조들이 임단투 시기에 언론 공격 면피용으로 "사회공헌기금"을 간판에 내걸고 있다. 사업을 바꾸고 투쟁의 방향을 바꾸어 시민과 전체 노동자들과 함께 힘을 키우는 노동조합운동을 만들자는 것이다. 시민들에 대한 시혜성 베풀기로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고 함께 해야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거듭남으로써 변혁적 힘을 키우는 것이 진정으로 고립을 극복한 노동운동이 되는 길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산별노조의 힘이다. 산별노조의 진정한 힘은 노조 내부의 수직적 통일성이나 쪽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사회, 시민들에 뿌리내린 노동대중 일반의 지지로부터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산별노조 운동의 거점은 지역"이라는 말은 산별노조의 실질적인 힘을 갖기 위한 경로를의미하며, 변혁운동의 출발점과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전국금속노조는 지난 11월 23일 서울 88체육관에서 720여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금속 산별 완성대의원대회(전국금속노조 18차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었다. 이로써 금속노조는 기존 180여개 지회 41,131명 조합원에서 새로 전환한 34개 노조를 더해 250여개 사업장(지역지회 분회까지) 14만 4,492명의 조합원과 연간 예산만도 약 270억이 넘는 국내 최대 산별단일노조가 되었다.
1998년 산별노조 건설을 목표로 민주금속연맹, 자동차연맹, 현총련이 통합하여 금속산업연맹을 출범시키고 2001년 2월 8일 108개 지회 30,795명의 조합원으로 산별노조인 전국금속노조의 깃발을 움켜쥔 지 5년여 만이다.
"통합"이냐, "완성"이냐라는 가당치 않은 논쟁을 차치하면, 대공장들이 기업별 노조에서 금속노조로 소속을 바꾼 셈이니 일단 외형적으로는 한 식구가 된 셈이다. 그러나 조직형태를 둘러싼 규약개정 논쟁이 진통을 겪다 12월 20일 임시대의원대회 속개 회의에서 기업지부를 3년간 한시적으로 인정하고, 철강 업종지부 허용 여부를 중앙위원회에 위임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으니, 당분간 자동차 완성 4사 대공장들은 한 지붕이 아닌 단독주택을 유지하게 되었다.
개정된 규약대로라면 기존 14개 지역지부와 1개 기업지부(만도) 체계에서 강원지부(준)를 포함한 13개 지역지부와 4개의 기업지부(현대, 기아, GM대우, 쌍용차)로 편재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대구-구미지부 통합, 경주-포항지부의 통합, 기업지부인 만도지부의 지역지부 편입을 전제한 것이며, 철강사업장들의 업종지부 허용이 중앙위에서 부결될 것을 가정한 것이다. 어차피 자동차 완성 4사 기업지부가 인정된 상황에서 예외적인 기업·업종지부 허용 요구에 대한 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 들어 설 5기 지도부에겐 2009년 기업지부를 해산시켜야하는 만만치 않은 조직적 소명이 부여된 것이다.
문제는 3년 뒤 기업지부가 해산하고 명실상부한 '완성' 금속산별노조 건설이 가능하냐가 아니다. 노조 간부인 필자는 이 과제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하지만, 정녕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완성산별노조가 담아야할 사업과 투쟁의 방향이다.
대공장들의 산별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아래로부터 조합원들의 충분한 토론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 일부 동지들이 십 수년간 주장해왔던 것처럼 "투쟁을 통해서"는 더욱 아니다. 산별전환 성공의 근간에는 복수노조 도입과 함께 기업별노조가 앉아서 당했던 일본 전투적 노동운동의 몰락의 예처럼 "복수노조 시대의 도래", "노사관계 로드맵의 도입 예고"에 따른 위기의식이 깔려있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들에서 끊임없이 패배해 온 상황에 대한 방어적, 수세적 반응인 것이다. 한편 "묻지마 산별"전환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작년 6월 산별전환 투쟁이 한 창일 때, 완성사 한 간부가 조합원 교육에서 "대우차에서 해고되면 기아차에서 고용을 책임지는 것이 산별노조다. 좋은 거다."고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필자는 거의 쓰러질 뻔 했다. 만성적인 고용불안 속에서 기업별 노조가 고용을 지켜줄 수 없다는 위기감은 산별노조가 "평생고용보험"이라는 식으로까지 둔갑하게 했으니 말이다.
대공장들의 산별전환 성공이 민주노조의 위기라는 현실에 기인했다는 역설은 완성산별노조가 심각히 고민해야할 점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산별노조의 조직적, 형식적 통일성을 확보 하는 것이나 산별중앙교섭을 안착화 하기 위한 대기업 전환노조들의 조직정비나 법·제도 개선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핵심은 다음에 제기하는 두 가지를 극복하느냐는 것이며, 위의 두 가지는 그 결과에 뒤따르는 것들이다. 현상의 과제보다 더 근본적인 것들이다.
첫 번째 과제는 기업별 임단투 체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산별중앙교섭을 얘기하는 것인가? 다 아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왜 또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금속노조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4년간 피터지게 중앙교섭을 해왔고, 합의사항만 보면 어려운 조건에서도 적지 않은 것을 쟁취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금속산업 최저임금이나 비정규직 조합활동 관련 내용, 사용자단체 구성과 법인 등록을 강제함으로써 투쟁으로 산별교섭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 모두 소중한 성과다.
하지만 과정을 보자. 해년마다 중앙교섭 시기에 중앙쟁대위(중집) 동지들이 하는 고민은 "중앙교섭"에 대한 현장 조합원들의 관심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교섭요구-조정신청-쟁의찬반투표와 같은 절차와 일정을 대부분 따라 가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조합원들은 중앙교섭 내용도 제대로 모르고 파업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니 2005년의 경우처럼 쟁의 일정을 조금이라도 당길라 치면, 현장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도 있고, 파업참여율도 산별단일노조치곤 높다 할 수 없다. 심지어 현장으로 내려가면 중앙교섭속보가 조합원들에게 홍보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 홍보가 안 돼서 문제인가? 그렇다면 게으른 지회 간부들을 닦달하면 해결되는가? 결코 아니다.
정치혁명보다 문화혁명이 더 어렵다고 했던가! 조합원들은 십 수년간 진행되어온 임단투와 임단투 중심의 사업풍토에 익숙해져 있다. 산별전환 후에도 구래의 단사 임단투와 내용과 방식이 전혀 다른,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조합활동을 경험할 수 있는 장이 없었거나 부족했다. 기업별 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기제(구호로만 남발하는 연대투쟁 호소 같은 것 말고)가 부족했다. 이렇게 해서는 산별교섭이 심화·확장될 수 없다.
중앙교섭에 집중하자는 것이 아니다. 산별노조 "중앙교섭이 담아야 할 내용과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이와 연관된 "산별노조의 일상사업이라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하자는 거다.
1년간의 투쟁에서 나올 수 있는 교섭내용이나 본조든, 지부든, 지회든 2년 집행기간 동안 조합원의 가시거리에 있는 '성과 보여주기'식 사업 말고, 5년, 10년의 계획으로 산별노조활동의 폭과 저변을 사회적으로 확대시키는 지역적, 전국적 사업이 필요하다.
"누가 지회장으로 올라오든 사업장 임단투 결과는 오십 보, 백 보다"라는 이야기는 조합원들도 타결 전에 감으로 때려 맞추는 종례의 판에 박힌 사업장 임단투(지회 보충교섭)에 여전히 방점을 찍는 한 산별노조는 서서 죽을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최근 대공장들의 임단투는 임금성 단협을 확대하여 실리를 추구하고, 조합원들의 관심도가 떨어져가는 조합활동 관련 조항이나 현장투쟁 방어장치 관련 단협은 상대화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기업임금과 기업복지 쟁취 투쟁을 "사회적 임금투쟁, 사회적인 민중복지, 지역복지" 투쟁으로 전환해야 하는 데, 이에 대한 대공장들의 사고 전환과 실험은 여전히 지체되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사회적 임금투쟁"은 산별임금투쟁이나, 법정최저임금투쟁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사회연대연금 같은 연기금 정책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생활임금 투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이번 금속노조 임원선거에서 한 후보가 "생활비 절반, 노동시간 절반"이라는 파격적인 구호를 걸고 나왔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를 의미한다. 이 구호는 구체적으로 생산의 영역이 아니라, 생활비 영역, 즉 노동력 재생산 영역으로 노동조합의 정책과 투쟁영역을 확대하자는 주장이었다.
두 번째 과제는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표상을 바꾸는 일이다.
정권과 자본, 보수언론이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데는 일정한 공식이 있다. "노동조합 = 대공장노조 = 집단이기주의, 부패, 패거리싸움=공공의 적"으로 표상화 하는 방식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표상이 이렇게 굳어지면, "비정규직노조나 대공장-정규직노조나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다. 고로 나쁜 놈들이다"라는 식으로 정리된다.
부패하고 관료화된 노조 상층부를 노동조합과 등치시킴으로써 사회적으로 노동조합운동을 매장한 외국의 사례는 많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학생운동의 위기가 폭발해버린 1997년 '한총련사태'를 되돌아봐도 알 수 있다. 한총련 출범식 성사투쟁 과정에서 전경 1명과 프락치 혐의를 받은 2명의 시민이 죽었고. 언론은 학생운동권을 도덕적 패륜아로 몰았다. "학생운동 = 한총련 = 도덕적패륜아 = 사회악"이라는 표상화는 학생운동을 도덕적 근간부터 흔들며 고립시켰다. 그 와중에 "나는 한총련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시민들이 보기엔 다 같은 '학생운동'인데.
노동조합의 위기가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활동가와 간부들의 부패와 관료화에서 왔다고 답변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것이다. 사실 노동조합간부들의 부패는 노조 운동의 위기에서 비롯된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래서 부패방지를 위한 노력들이 매우 필요하지만, 노조의 위기에 대한 처방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표상을 바꾸자."는 것은 이미지 개선 사업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거라면 이미 대공장 노조들이 임단투 시기에 언론 공격 면피용으로 "사회공헌기금"을 간판에 내걸고 있다. 사업을 바꾸고 투쟁의 방향을 바꾸어 시민과 전체 노동자들과 함께 힘을 키우는 노동조합운동을 만들자는 것이다. 시민들에 대한 시혜성 베풀기로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고 함께 해야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거듭남으로써 변혁적 힘을 키우는 것이 진정으로 고립을 극복한 노동운동이 되는 길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산별노조의 힘이다. 산별노조의 진정한 힘은 노조 내부의 수직적 통일성이나 쪽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사회, 시민들에 뿌리내린 노동대중 일반의 지지로부터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산별노조 운동의 거점은 지역"이라는 말은 산별노조의 실질적인 힘을 갖기 위한 경로를의미하며, 변혁운동의 출발점과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