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4.73호

역사공부를 하는 우리의 자세

권태훈 | 노동부장
나는 사극을 즐겨 본다. 고등학교 때부터였던 거 같은데 특히 KBS에서 주말 9시 뉴스가 끝난 후 방영하는 사극은 거의 모조리 봤다. 대학에 입학한 후 각종 집회가 주말에 있어 못 챙겨볼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방송국 홈페이지에서 지난 방송보기를 통해 잊지 않고 보곤 했다. 사실 이런 사극들의 레퍼토리는 거의 비슷한데, 중요한 것은 사극 작가들이 자신의 사극의 주요 인물들, 사건들을 현재 한반도 정세에 끼워 맞추려고 노력한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최근 일부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행보를 󰡐주몽󰡑에 비유하면서 상대 정파를 비난하곤 했고, 일부 운동 진영에서도 한나라당을 비판하면서 자주냐 예속이냐를 놓고 󰡐주몽󰡑과 󰡐대소󰡑의 대립에 비유하는 선전을 하기도 했다. 이를 바라보는 나는 상당히 불편했다. 최근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이 여지없이 드러난 비유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온갖 역사왜곡과 오버 연기로 유명한 드라마 󰡐연개소문󰡑은 더 이상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해석하는 작업은 언제나 현실 역관계를 구성하는 모든 세력들이 하려는 일이다. 과거를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세력들, 이론들, 활동들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 정부는 죽어도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이 대규모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사과하지 못한다.
얼마 전 홉스봄의 『역사론』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사실 사회진보연대에서 발간한 단행본 두 권과 백승욱 선생님의 책을 제외하곤 그렇다할 책을 읽지 않고 있었는데 홉스봄의 책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에릭 홉스봄은 1917년생인데 그러고 보면 러시아혁명이 있었던 1917년에 태어나 별의별 세계사적 사건들을 다 본 셈이다. 이제 90세가 다된 홉스봄은 생애 마지막 책을 출간한 느낌이다. 자서전을 제외하고 말이다. 홉스봄은 역사학이 󰡐종합적인 인문사회과학󰡑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상당히 설득력있다. 과거의 사건들은 해석하기 나름이고 역시 중요한 것은 어떤 해석의 방법을 쓸 것인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운영하던 싸이월드 클럽에 󰡐미국의 대외침략사󰡑라는 글을 스크랩해 올린 적이 있었다. 내용인즉슨 미국은 건국될 당시부터 끊임없이 정복전쟁을 해왔다는 거다. 특히 180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을 수도 없이 했다는 거다. 연도와 어느 나라를 침략했는지만을 열거한 단순한 글이었다. 당시 이 글을 보고 여러 클럽 회원들의 반응은 그저 󰡐놀랍다.󰡑였다. 미국이 이렇게 많은 지역을 침략하면서 성장해온 국가임을 몰랐다는 것이다. 아니 대강 추상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사건들을 접하게 되니 개개인들에게 충격이었던 거 같다. 앞서 사극 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여러 측면에서 과거의 사건들을 날조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일 거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놈들이 과연 어떤 측면에서 거짓말을 해대고 있는지 인식하는 것인데 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역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헤아리기 힘든 양의 노력이 투여되어야만 하나의 역사적 사건의 윤곽을 대강이나마 그릴 수 있다. 게다가 사건사별로 정리하는 것을 넘어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어내는 이론적 작업은 상상하기 힘든 어려운 작업일 거다.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몫이라고 치고, 그렇다면 나처럼 그저 남이 해놓은 연구 성과를 학습하려는 사람은 어떨까. 일단 암기부터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칠레 아옌덴 정부가 쿠데타로 붕괴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사건들의 발생과 전개, 결말을 알아야 하고 또 각 개별사건들의 인과관계를 알아야 한다. 정확한 순서대로 말이다. 이건 당연히 암기의 과정이다. 그렇다고 시험공부 하듯 달달 외울 일은 아니고 그냥 이 책 저 책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암기되고 이해가 된다. 물론 이 책 저 책 읽어보고 자료를 뒤적이는 것은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다.
예전에 사회진보연대 총회 뒤풀이에서 어떤 활동가와 역사연구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분은 활동가라면 누구나 다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지 않느냐라는 말을 했었는데 사실 별로 그렇진 않다. 󰡐어떤 일에 관심이 있다.󰡑라는 표현이 상당히 낮은 수준의 흥미를 의미한다고 보였는데, 그 정도 낮은 흥미는 활동가들에게 어떠한 진지한 효과도 발휘하지 않는다. 논쟁을 벌여야할 현실 쟁점들은 항상 넘쳐 나고 있으며 조직하고 함께 실천할 동지들을 규합하는 것 역시 항상 해야 하는 일들이다. 또 더 진지하게 연구해야 할 이론적 과제들도 많으니, 역사 연구는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목표를 갖고 연구를 개시하는 것인데 사실 이래저래 불투명하다. 그날 나는 사회진보연대 회원들의 소모임 정도로 역사연구모임을 운영해보면 어떨까 하는 구상을 했지만 당분간 그런 모임을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할거 같다. 그저 어디선가 의로운 자가 나타나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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