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산별노조의 지역정책 수립에 대한 단상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산업정책은 없다. 그러나 산별노조는 산업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지역정책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역을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복지정책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기업복지를 넘어 사회적 복지, 민중복지를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노동정책의 핵심은 고용임금생산의 전방위에서 벌어지는 노동의 유연화다. 그러나 우리는 줄곧 안정된 일자리 창출을 외치고 있다. 거기에 타협이 있을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자들이 답할 수 없는 것을 노동자운동은 답해야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오래 전에 휴지통에 버린 답안지를 노동자운동이 자신의 것으로 주워 챙기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산별노조가 조직형태 상 유리한 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산별노조가 신자유주의를 돌파할 수 있는 노동자조직이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산별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든, 안 붙든 노동조합은 항상 조합원대중에게 산업과 임금과 고용과 복지에 대해서 답변하고 가야 하는 대중조직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답변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노동조합이 어쩔 수 없이 답변해야 할 산업과 고용과 지역이라는 화두는, 그런 점에서 자칫 신자유주의에 포섭되는 덫으로 작용할 위험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개발)발전산업발전 이데올로기와의 싸움
형광등 만드는 대기업에 다니던 친형이 광주공장 이전으로 직장을 옮겨 광주 첨단지구에 위치한 광(光)산업단지 내의 한 벤처기업을 다닐 때였다. "너 왜 광주시가 광산업 육성도시가 된 줄 아냐? 광주(光州)가 빛(光)고을이라서 그렇댄다. 참! 내!" 밤이 있는 한 조명은 안 망한다던 국내 최대 형광등 기업도 광주에서 철수하자 형은 곧바로 중소 조명업체로 이직했다가 지역 언론이 광산업육성을 한참 떠들던 시기에 다시 광산업단지 내 연구업체로 들어갔다. 사회생활 전부를 빛(光)만 찾아 헤매다가 지금은 그마저도 때려치우고 딴 생활로 근근이 살고 있으니, 그 양반도 빛 볼 인생은 아니었던가 보다.
광주가 왜 광산업 육성도시로 채택되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이유가 없다. 광산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고부가치산업이라고 떠들 때마다 고용촉진 산업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면 별로 틀리지 않았다. 광주 첨단산업단지 내 노동자들이 5천여 명인데, ATK(반도체회사) 3천여 명, 삼성전자 광주2공장 1천여 명, 그밖에 자동차 부품사 등 수십 개 업체를 빼면 도대체 광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몇이라는 말인가?
사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광주를 문화수도로 만들겠다고 했다가 세계 어느 나라에 문화수도라는 단어가 있더냐?는 비판에 문화중심도시로 말을 바꾼 게 정치권의 선거공약이었다. 그러더니 예전 도청 일대와 지하에 공연전시시설 좀 만들고 손 털 심산이다. 5.18 마지막 수배자였던 윤한봉 선생 왈 광역도시중 공연율 최하위, 전시회도 최하위, 영화관람율 최하위, 심지어 독서율도 최하위가 광주인데, 이발소마다 그림 몇 장 걸려 있다고 그게 문화도시 되는 거냐?라고 할 때 나는 무릎을 친 후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요즘엔 광주시가 생태문화도시 이야기하던데, 대선 땐, 다음 지자체 선거 땐 또 무슨 도시 이야기하려나?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산업정책이 특별히 없다. 신자유주의 자체가 생산이 아니라, 주식외환 시장을 중심으로 한 금융화를 통해, 저하되는 이윤율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가를 올리기 위한 노동의 유연화와 글로벌소싱, 아웃소싱 등 생산의 유연화와 같은 구조조정들이 산업정책이라면 정책이다. IT, BT, 나노산업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산업을 재편한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인 고용창출 효과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본연의 의미에서 산업정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들 산업을 강조하는 것은, 그와 연동된 주식시장의 일시적 활성화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사실 OECD 국가 중 자동차산업을 포기한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다. 규모나 고용창출 면에서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산업이 없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중국과 동남아 등으로의 해외이전 때문에 발생한 제조업 공동화는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 차원에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04년 현재 하루 평균 12건, 1년이면 공단 하나 규모의 공장들이 해외이전하고 있고, 금속노조의 경우도 2002년 출범한 후 3년 만에 1만여 명의 조합원이 탈퇴했는데, 대부분 사업장 해외이전에 따른 것이다. 기업들의 중국이전은 임금 때문도 아니고, 한국의 노사관계 불안정 때문도 아니다. 중국 임금이 한국의 1/7이라고 해서 상품 가격이 1/7인 것은 아니다. 노사관계 불안정 때문에 중국으로 갔다는 기업은 채 2%도 되질 않으며 오히려 중국 공산당과 공회(工會)의 외국기업에 대한 개입, 통제는 강해지고 있다. 결국 IMF 금융구제 이후 세태를 따라 중소기업들이 무분별하게 나갔단 것밖엔 안 된다. 그래서 장밋빛 계산에 따라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이 자리를 잡은 경우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20%가 되지 않는다.
앞서 장황하게 신자유주의자들이 포기한 산업정책의 공백과 제조업 공동화를 언급한 것은 지역특성산업 육성, 기업클러스터 조성, 기업하기 좋은 도시 등으로 표현되는 정책적 수사들이 지역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어두운 그림자, 즉 산업정책의 공백과 그에 따른 고용위기, 지역 간 불균등 심화 등을 가리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병 주고 약 준다는 얘긴데 그나마도 죽을 병을 주고 소화제 먹이는 꼴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지역엘리트들과 지자체들이 고작 하는 것은 지역(산업) 발전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지역의 주요 대공장들의 눈치를 보는 것뿐이다. 기업하기 좋은 도시는 고용이 유연한 도시요, 파업과 노조가 없는 도시를 의미한다. 지자체가 노사평화선언 자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지역 대공장 제품 사주기 운동을 통해 영업사원 역할을 한다든지, 지역기업 살리기 캠페인에 적극 나서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금속산별노조 지역조직들이 지역 특성산업 유치발전, 고용확대 사업으로 표현되는 지역산업 정책에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말 그대로 지역발전 이데올로기에 발목을 잡히고, 파업 자제 등 노사관계 안정을 위한 역 제안을 노동조합이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지역 산업-노동시장 개입정책은 어떠한 일자리인가 라는 질문부터 출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지역엘리트들이 일자리 몇 개 창출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숫자에 현혹되지 말고, 어떠한 일자리인가를 되물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접근 방식은 원하청 불공정 거래 척결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지역여론을 일으켜 지자체를 설득하고, 지역의 대공장 자본을 상대로 투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CR(Cost Reduction; 원가절감) 강요를 통한 단가 후려치기, 부품 역수입(Buy-Back) 할당, 폭력적인 부품 이원화, 원청 완제품 판매 강요, VE 등 원청 대기업의 하청 불공정거래는 지역 특성상 몇 개의 대공장과 그 하청업체들로 돌아가는 지역 산업구조를 심각히 왜곡하고, 동시에 노동의 불안정화를 광범위하게 초래한다.
CR(원가절감) 강요는 매년 아이템 계약 때마다 반복하고 있어 부품하청업체들의 부도 또는 지불능력 악화를 초래하고 이는 다시 소속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악화와 비정규직 고용의 유인이 되고 있다. 심지어 자동차 완성사 자본들은 임단투가 끝난 직후 부품하청업체들에 CR 얘기를 꺼내어, 마치 완성사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때문에 부품사에 CR이 강요되는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심어주기까지 한다.
바이백(부품 역수입) 강요는 납품 부품 중 일정 비율 이상을 해외공장에서 역수입 제품으로 조달함으로써 부품단가 절감을 강요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또한 부품사들의 해외 생산 증가를 강요함으로써 국내 공장들의 고용을 줄이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부품 이원화는 원청이 원하는 대로 거래가 이뤄지지 않거나 부품사에서 노조가 생겨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똑같은 부품을 생산하는 다른 업체를 만들어 기존 업체를 길들이거나 문닫게 하는 방식이다.
이미 현대-기아차 자본은 모비스와 위아(WIA)와 같은 현대차그룹 소속의 1차 밴드를 중심으로 2차, 3차 밴드 부품사를 줄 세워 많은 부품업체들을 문닫게 한 적이 있고, 지금도 부품사들에게 불공정거래를 강요하고 있다.
이게 어디 자동차산업 뿐이겠는가? 재벌 중심의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은 세기를 넘어도 바뀌지 않은 고질적인 것이기에, 자본의 합리화 문제가 노동조합의 과제로 떠넘겨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투쟁과 조직화 계획이 병행되는 지역정책이어야 한다
그런데 원하청 불공정거래 척결이 금속노조의 가장 어려운 숙제다. 완성사정규직 활동가들과 조합 간부들이 가장 당혹스러워 하는 점이기도 하다. 부품사 원가절감(CR)은 원청 완성사의 영업이익 및 순이익에 연결되는 것이고, 이는 완성사 조합원들의 연말 성과급과 연동되어 있다. 그러니 활동가들과 간부들도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다. 물론 완성사 조합원을 탓할 일은 아니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가 많이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중소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가 적게 받는 게 문제이기 때문이다. 혹자가 제기한 것처럼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팔 수밖에 없다. 부품사로부터 투쟁을 역으로 만드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는 얘기다.
①일본식 생산에 대한 역공을 조직해야 한다.
대부분의 제조업 대공장의 생산방식은 일본식 적기생산(JIT: Just In Time)과 무재고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이미 상당부분 진척되어 있다. 자동차완성사가 파업하게 되면 1차 밴드 부품사들의 라인이 동시에 멈춘다. 물론 부품사에 고용된 비정규직들의 월급봉투는 줄어든다. 부품사 자본들은 그 모든 책임을 완성사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돌린다.
거꾸로 투쟁을 조직하면 어떨까? 불공정거래 관련해서 하청부품사에서 라인을 멈추면 완성사가 멈춘다. 적기생산이 그런거다. 여기에 완성사 조합원들이 함께 해야 한다. 이런 투쟁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모비스, 위아 등 현대차그룹 핵심 1차 밴드를 비롯한 1, 2차 밴드에 고용된 노동자들 중 간접고용 하청 비정규직 비중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1, 2차 밴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이 가장 관건이 된다. 역순으로 생각하면 무엇부터 차분히 준비해가야 하는지가 나온다.
②자본의 그린필드 경영전략을 분쇄할 전략 지역 조직화와 타깃투쟁이 필요하다.
금속노조는 07년 미조직비정규직 사업계획(안)으로 미조직된 재벌사를 전략적으로 파고들자는 안을 제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방법도 중요하지만, 전략지역을 타깃으로 해서 비정규직 사업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본은 그린필드(green field) 투자를 선호하고 있다. 그린필드 투자란 제조업체들이 기존 공장의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부지에 공장을 건설하여 획기적으로 경쟁우위를 확보하려는 경영전략이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차 아산공장인데 도요타자동차의 큐슈 미야타 공장을 공장 레이아웃부터 경영기법까지 그대로 베낀 것이다. 다만 미야타 공장은 독립법인으로 ERP(인적자원관리)를 통한 참여형 생산체제를 정착시킨 반면, 아산 공장은 현대차법인의 분(分)공장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에 기반한 권위적 생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충남 서산의 기아차 모닝 공장은 비정규직 전용공장이다. 그린필드 경영전략의 핵심은 무노조-비정규직 전용공장을 별도법인으로 설립하려는 것이다. 분공장이 아니라, 독립법인화를 시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노조가 강력한 기존 공장의 물량을 줄이고 독립법인 공장의 물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시도하기 위해서다. 또 노조가 없어야 비정규직 고용 등 구조조정이 쉽기 때문이다. 금호타이어는 3년 전 평택공장을 건설하면서 별도법인화를 시도하였지만, 노조의 강한 반발로 분공장이 되었다. 노동운동이 약하고, 땅값이 싸며, 항만 등 물류조건이 좋은 입지에 공장을 새로 설립하여 신자유주의적 경영기법을 도입하는 것이 기존의 공단(brown field)에 신설비를 투자하는 것보다 유리하다고 자본은 판단한다. 노동조합을 박살낼 수 있으니 말이다.
조선업종은 현대삼호중공업이 위치한 전남 영암 대불산단을 중심으로 대규모 블록공장과 완성사들에 투자하고 있다. 대불산단의 조선소 부품사(블록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매우 열악하며 계속 비정규직화되고 있다. 울산과 거제가 조선업의 브라운 필드라면 영암 대불산단이 그린필드인 셈이다.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산별노조의 일상사업들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2005년 7월 여수산단의 한 사업장에서 유독가스(포스겐) 누출 사고로 인근 공장 노동자까지 무려 64명이 입원한 사건이 있었다. 포스겐은 2차 대전 때 나치가 유대인 학살과 전투용으로 사용했던 독가스였다. 여수산단의 화학섬유 사업장들에서는 일 년이면 몇 차례나 폭발사고나 유해물질 누출 사고가 터진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대개 은폐되거나 후속대책 없이 무마된다. 거기에는 조합원들의 고용불안을 의식한 노동조합들의 일조가 있었다. 왜 과감히 시민들의 편에 서서 대체물질 사용 같은 다른 방안을 제출하지는 못했을까? 이쯤 되면 환경단체들이 왜 노동조합을 비판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포스코 광양 제철소 인근 토양은 청정지역보다 다핵방향족탄화수소류(독성물질, 일부는 발암성)가 100배 이상 검출되고 있으며 인근 태인도 주민들은 호흡기 질환이 전국평균 10배에 이른다. 금속노조 광양지역지회도 지역 환경문제를 핵심으로 가져가겠다고 했지만, 모두가 포스코 사내하청 사업장들이고 포스코의 광폭한 탄압에 대응하는 데 바빠 이런 사업에는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사업들 속에서 노동조합의 힘이 커가는 법인데, 이런 식으로라면 계속 고립될 수밖에 없다. 시민(곧 지역 노동대중)들의 삶에 뿌리내리는 산별노조의 일상사업들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정책 생산과 사업을 담당할 간부주체도, 조직 내 투자도 전무한 상황이다. 또한 지부, 지회 간부들이 너무 지쳐 있다.
금속노조는 교육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하여 교육사업을 올해부터 대폭 강화한다고 하는 데, 교육사업의 내용에 담아야 할 것들이 안전보건, 성, 사회소수자, 보육교육, 환경주거 등 지역 사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역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의 행복한 조우를 기대하며
정서상의 벽도 있다. 한국의 노조운동은 생산영역 내 투쟁에만 익숙해 있어 공장 밖의 생활 영역(재생산 영역)에 대한 개입은 왠지 낯설다. 그래서 재생산 영역에 대한 개입을 노조의 정체성이 없어지는 것으로 괜한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솔직히 지금의 조직된 노동조합과 현장 활동가들의 상황을 살피건대 지역적 의제, 사회적 의제, 생활의제에 접근하라고 요구만 한다면 쓰러지겠다는 소리가 나온다. 조직적 태세도 안되어 있고, 방향각도 못 세우고 있다. 여기에 사회운동의 자기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