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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5.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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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악어>, 실천문학사

고대권 | 회원


'Once upon a time in America'라는 영화가 있었다. 옛날에 봐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가 놀랍도록 길었다는 것, 음악이 매력적이었다는 것 정도가 희미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 와중에 로버트 드니로나 스모그가 낀 미국의 어느 도시나 총싸움 같은 굵은 선들을 뒤로 하고, 아릿하게 떠오르는 게 있다. 소년이 벽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한 소녀가 발레를 추는 모습을 구경하는 장면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먼지들, 소녀의 가쁜 숨소리, 똘망똘망한 소년의 눈. 이 장면은 단순하게 소년의 호기심이나 동경 같은 것만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마 ‘두 개의 세계’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두터운 벽은 소년의 몸이 건너편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막지만, 소년의 시선과 마음은 이미 이 세계를 자연스럽게 벗어난다. 이 장면이 아름다웠던 것은 소년이 건너편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고, 덕분에 소년에게 이 순간은 영원히 존재하는 시원으로 남을 수 있다. 어른이 된 소녀가 싸구려 쇼에 오르는 댄서가 되더라도, 소년과 소녀의 순정은 영원하다.
이것은 ‘구멍’ 혹은 ‘틈새’가 가지고 있는 불운이며 혹은 행운이기도 하다. 구멍은 문이 아니다. 우리는 구멍을 통해 다른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없지만, 구멍이 없다면 다른 세계를 동경할 수 없다. 구멍이 좁다고 벽을 부수면 이제 세계는 하나가 되어버리겠지만 그것이 건너편의 세계를 동경하던 시절보다 더한 행복을 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구멍은 구멍의 자리에, 문은 문의 자리에, 벽은 벽의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삶의 곤란함을 직설적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견디는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익히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세계는 구멍이나 문을 별로 허용하지 않으려 하는 속성이 있는 것 같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방이라는 것이 지금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유가 될 수 있으려나?

어머니 방문 앞에 앉아 / 침 발라 세운 실 끝 / 아득하여라. / 한 삶, 한 땀
/ 바늘귀에 꿰고 있다. / 저 빗나감, 찰나 / 불러도 대답이 없다. /어머니 없다.
<17, 몰입 中>

그러나 천천히 잘 보면 보일 것 같다. 아무리 눈이 침침하고 어두워도 어머니는 작디작은 바늘귀에 침 바른 실을 보란 듯이 밀어 넣지 않으셨던가. 고영민 시인의 <악어>라는 시집을 보고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은 시인이 구멍/틈새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시에 대해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많이 부러워했다. 시인은 단추 하나를 들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는 단추 구멍을 통해 그의 유년 시절과 고향 그리고 부모님을 보았다. 시인도 어렸을 때는 몰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보고 있는 풍경들,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경험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 시인은 과거의 경험을 잊지 않고 있으며 적당히 뒤늦은 시간에 그것들에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의미가 없었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기억들에 하나하나 주석을 다는 그의 모습은 무척 행복해 보인다. 자신의 과거를 잘 기억해내는 사람을 나는 부러워한다. 어렸을 때 누워있던 구들장의 온기와 까실까실하던 이불의 촉감까지 기억해내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다. 대개 과거를 잘 기억해내는 사람들은 현재의 삶도 쉬이 흘려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오늘도 내일의 과거이고, 그래서 그들은 십 년 전을 기억하듯 오늘을 기억한다. 나에게 과거가 지우개 가루만 남은 흔적이라면, 그들에게 과거는 점자이며 쐐기문자인 셈이다. 사람이 사는 것처럼 살아가려면 과거를 껴안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나에게 과거는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면서 문득 그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을 배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날이 추워지면서 출퇴근길, / 붐비는 지하철 안 / 사람 몸 닿는 것이 좋다
/ 남자도 좋고 여자도 좋다 / 내 가장 따뜻한 곳을 / 너의 가장 차가운 곳에 댄 채
/더욱 밀착한 채 / 몸이 훌쩍이는 소리 / 내내 비좁아 뒤척이는 / 소리 듣는다
<88, 치한 中>

책장의 책을 빼내 읽고 / 제자리에 다시 꽂으려고 하니 / 좀처럼 들어가지 않는다 //
빽빽한 책 사이, / 있던 자리가 없어져버렸다 / 한쪽 모서리를 걸치고
/ 열심히 디밀어도 제자리를 못 찾는다 / 한 권의 틈을 주지 않는다
/ 옆의 책을 조금 빼내 함께 밀어보니 / 가까스로 들어간다
<85, 틈에 관하여 中>

마찰과 부대낌이 주는 온기, 아마 그것이 시인이 마음 속 어딘가에 단추 구멍을 갖게 된 계기가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책장에 책이 한 권 빠진 자리에 다시 책을 꽂기 위해서는 다른 한 권을 빼내 같이 밀어 넣으면 쉽다는, 간단한 경험에서 찾은 방법론 같은 것, 타인의 차가운 것과 나의 뜨거운 것을 섞어 보려는 뭉툭한 몸짓 같은 것 말이다. 사람이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요즘 나는 이 소리를 “인간이 되어라.” 정도의 소리로 이해하고 있다. 혼자서는 못 사는 세상이라는 것쯤 나도 알지만, 타인을 만난다는 건 언제나 피곤하고 지치고 때로는 두근거리면서도 무서운 일이다. 관계를 만들고 발전시키고 정리하는 건 생각보다 많은 상처를 남길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인 것 같다. 상처 받기를 각오하는 사람은, 동시에 상처를 주려는 독한 마음까지 먹어야 한다. 그래야 공평하다. 상처 주기가 두려워 상처를 받지 않으려는 사람은 어쩌면 이기적일 수도 있다. 그냥 마음 편히 먹고 하이킥, 니킥을 섞어서 적당히 치고 받고 싸우다가 화해하는 거다. 그러고는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거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 이 넓은 세상에서 일부 성인군자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관계 맺기에 있어서 애들에 가깝다. 싸우지 않고 피해주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대개 무기력증에 빠지기 쉽다. 젊은 날의 무기력증은 낭만이요 우울이지만, 나이 먹어서 무기력증은 퇴폐에 가깝다.

권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 그 사이에 놓은 푸른 멍/
너무 멀면 주먹이 닿지 않고 / 너무 가까우면 팔을 뻗지 못하는 /
가까워도, 멀어도 안 되는 사람 사이의 거리 /
그 거리가 만든 카운터 펀치, 푸른 멍이다. //

주먹들은 끝없이 휙휙, 소리를 날리며 / 그들 식으로 서로 말을 나눈다 / 사랑한다 //
<82, 당신의 카운터펀치 中>

무식하게 때려놓고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이 시가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대한 시인 것은 아니다. 시의 제목처럼 ‘카운터 펀치’니까. 그냥 ‘조각’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나는 돌로 태어났지만, 누군가의 끌과 연장이 내 속 어딘가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 낼 것이라고 믿는 거 말이다. 그리고 나도 타인을 조각하는 중이다. 그렇게 만나고 싸우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배신한다. 반복하고 돌아보고 후회하고 일어나고 돌아눕는다.
그런데, 자기 모순일수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좋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않으려는 결심을 아주 오래전에 했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이들에게 까칠하다는 지탄을 받아왔다. 내 딴에는 행복하기를 어느 정도 포기하고 내린 중대한 결심인데, 지인들의 반응을 보건대 동정이나 연민보다는 비웃음이 먼저 문고리를 잡았던 것 같다. 행복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불행도 별 거 아니다. 그저 타인의 행복에 대해서도 나의 불행에 대해서도 덜 예민해지기로 마음먹었을 뿐이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행복에 대해서 나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멋있어 보이게 불행을 택한 것도 아니다. 그냥 행복을 유예시키고 있다. 당장 알 수가 없는 것들을 꼭 지금 알아야겠다고 고집을 피울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이런 시집을 보면서 뭐랄까, 마음의 위안 같은 것을 얻는 것 같다. 난 아직 행복으로 가기 위한 바늘구멍을 가지고 있다는 것, 행복하기 보단 행복해지기 직전의 어느 순간들을 끊임없이 그리워 할 거라는 것, 그런 것을 느끼는 것 같다. 사실 겁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저녁밥을 해주러 잠깐 집에 들어오시던 시간을 떠올려보면,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셔서 부엌에서 수선을 떠시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것은, 곧 어머니가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마당에 턱을 괴고 앉아 바라보던 구름이었다.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비우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조차, 그것을 떠나보내면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망설임조차 지금은 추억이다. 그러니 고맙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모든 사람들이.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 건물 전체가 울린다. /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 만들기 위해
/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 일도 아니다.
<9, 즐거운 소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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