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④ 한국여성운동사] 한국여성노동자운동, 그 길찾기 (1)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 평가를 중심으로
2007년 여성의 날의 풍경
2007년 3월 8일은 99주년을 맞는 세계여성의 날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여성의 날에 딱 맞춘 듯이 울산과 광주에서는 알몸을 선택한 여성노동자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울려퍼졌다.
#1. 2007년 3월 7일, 울산과학대의 청소미화원 여성노동자들은 알몸인 상태로 울산과학대 직원들에 의해 농성장 밖으로 끌려나왔다. 저임금과 비인간적인 대우, 일방적인 계약해지가 너무나도 억울해서, 농성을 시작한 그녀들. 술냄새를 풍기며 학교직원들이 들이닥쳐 집기를 때려부수며 난동을 피우자 그녀들 중 누군가 외쳤다. 옷을 벗자. 벗고 있으면 그 누구도 손을 못 댄대! 하지만 그녀들은 알몸으로 끌려나왔다.
#2. 2007년 3월 8일, 비정규직 직원 고용을 승계하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던 광주시청 청소미화원 여성노동자들도 알몸인 채로 시청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노조를 만들었다고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분해서, 시장한번 만나보자고 열 두 시간을 기다린 그녀들. 그러나 새벽이 되자 젊은 남성공무원들이 그녀들을 끌어내려 하였다. 누군가가 우리 몸에 손대지 말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녀들은 윗옷을 벗었다. 하지만 경찰들과 술 취한 시청직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들을 내동댕이쳤다.
울산과 광주에서의 울부짖음을 전해들은 이들은 모두 30여년전 동일방직 여공들의 나체시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3. 1976년 동일방직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들은 노조활동 보장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를 외치며 농성에 돌입했다. 농성 사흘째, 수 백 명의 경찰이 농성장에 들이닥쳤다. 그녀들은 손을 잡았다. 그 때 누군가 옷을 벗자. 벗고 있으면 그 누구도 손을 못 댄대!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들은 옷을 벗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들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30년을 넘나들며 되풀이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 그것이 바로 진보여성 총 단결로 대선투쟁 승리하자는 공허한 수사에 가려졌던 2007년 여성의 날의 풍경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풍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현시기 우리에게 필요한 여성노동자운동은?
저임금과 불안정노동, 빈곤과 폭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여성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과 처절한 투쟁은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와 지배체제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여성노동자운동이 시급히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여성노동자운동은 어떻게 형성되고 활성화될 수 있는가?
한국여성단체연합을 비롯한 주류여성운동진영은 87년 민주화 대투쟁을 경과하며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본다. 여성노동자운동 역시 여성노동자의 고용안정, 고용평등, 모성보호,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지원조치 확대, 여성노동기본권 확보 등의 과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고, 이는 남녀고용평등법의 제정, 출산휴가에 대한 사회분담화, 보육의 공공성 확대 등과 같은 성과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운동은 정체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는 노동시장의 변화에 따라 여성노동력이 주변화되는 문제에 대해 노동조합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조직과 운영상에 있어 남성 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노동조합이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운동진영에서도 여성노동자의 고용불안정 문제 및 여성 비정규직화, 빈곤의 여성화 문제 등에 대한 대응이 미흡했고, 따라서 운동 영역을 확대하고 여성노동력의 주변화를 막기 위한 제도개선 투쟁,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의 처지에 맞는 조직방식을 확대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1)
그러나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은 성장했는데 여성노동자운동은 침체했다는 진단은 여성노동자운동을 노동운동․여성운동과 별개의 것으로 설정하지 않고서야 설명되기 어렵다. 또한 노동조합이 남성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데에서 여성노동자운동의 침체원인을 찾는 것은 그러한 노동조합의 가부장성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가 함께 이야기되지 않고서야 그 자체로 원인진단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비정규직화와 빈곤심화의 문제가 기존 여성노동자들의 현실과는 별개로 새롭게 덧붙여진 문제라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운동영역의 확대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도 적절한 방안이라고 하기 어렵다.
반면 노동운동진영에서는 1970~80년대의 여성노동자운동이 민주노조운동의 뿌리이며 태동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여성노동자운동은 주변화되고 여성노동자조직운동은 민주노총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민주노총이 민주노조 정신을 계승․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2) 그러나 여성노동자운동의 침체가 비단 민주노총으로의 조직변경의 문제로 해명되는가? 그리고 여성노동자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소위 전노협 정신을 복원하면 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남는다.
이처럼 주류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 양자 모두 현시기 여성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운동 경로 제시는 물론이고, 현상 진단 및 원인파악 조차 정확하게 하고 있지 못하다. 때문에 현시기 필요한 여성노동자운동의 실내용을 밝히고 그것을 가능케 할 방법을 모색하는 작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본 글에서는 그 작업의 일환으로 한국여성노동자운동의 출현기에 해당하는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3)을 중심으로 역사적 평가를 하겠다. 당시 운동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단절된 원인은 무엇인가? 19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의 형성과 소멸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저항의 기초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고찰해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반면교사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1.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배경
전후의 장기호황이 끝나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경제의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하자 미국법인기업과 정부는 생산요소의 일부를 해외로 이전하면서 값싼 노동력, 반(反)노조정책, 수출가공 또는 자유무역지대의 제도들의 이점을 누릴 수 있는 전략으로 이에 대응했다. 이런 전략은 여성 노동을 선호하는 전자와 섬유산업의 예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세계각지에서 여성은 빠르고 싼 손가락 덕분에 이러한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최상의 노동력이 되었고 이를 통해 지역정부는 절실하게 필요한 외화를 얻었으며 다국적 법인기업은 이윤을 증대시켰다.
남한사회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1970년대 수출 중심의 노동집약산업은 여성노동력을 엄청나게 요구했다. 이에 농촌을 떠나 대도시의 공장에 취직하는 여성들이 줄을 이었다. 수출산업의 고도성장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시화를 촉진하였고 동시에 농촌의 궁핍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농촌은 수출지향적 산업화에 투입될 노동력을 무제한적으로 공급하는 기지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나이 어린 농촌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와 형제들의 학비보조를 위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의 공장으로 유입되었다. 여성은 자본에게는 값싸고 유순한 최상의 노동력이자 가족에게는 생계를 위한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산업화 과정은 광범위한 저임금 여성노동자층을 형성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객관적 조건이 마련될 수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이 집중된 수출산업부문의 저임금․장시간 노동이라는 조건은 한편으로는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을 교육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없게 함으로써 여성노동자들의 의식을 억제하는 요인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적인 공장노동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공동의 요구가 마련될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당시 한국 사회에 팽배해있던 노동자 천시풍조와 남존여비사상 역시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배경이 된다.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정신노동을 높이 평가하는 사농공상 사상에서 기인한 생산직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경멸, 그리고 여성 노동자를 관리자하는 남성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대우와 성적 모욕은 여성노동자들로 하여금 소위 공순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게 만듦으로써 적극적인 사회의식 형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인간으로 대접해주는 노동조합 활동에 희열을 느끼고 동참하게 되는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2.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전개와 그 특징
살인적인 작업환경 속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던 여성노동자들의 실망과 분노는 서서히 뜨거워져 급기야 활화산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여성노동자의 힘으로 민주노조 결성 :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동일방직에서는 여성조합원들의 힘으로 1972년에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노조를 민주화하는 데에 성공한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와 JOC 등의 단체에서 실시해왔던 소그룹 활동과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왔던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그녀들이 공장에서 겪는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는 데에 노동조합이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합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이 조합활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도록 새롭게 노조를 구성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노조민주화 투쟁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사회 최초의 여성지부장이 선출되기도 한다. 이렇게 노조 민주화 투쟁이 불붙자 회사와 정부는 본격적으로 노조탄압에 나섰고, 동일방직 지부의 본조인 섬유노조까지 합세한다. 이 과정에서 1976년의 나체시위, 1978년의 똥물세례사건 등이 발생한 것이다.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은 자율적인 노조를 되찾기 위해 구속을 불사한 노동절 기념행사장에서의 투쟁, 목숨을 건 명동성당에서의 단식투쟁 등을 전개해나가며 회사와 정부, 그리고 섬유본조와 노총을 상대로 끈질긴 싸움을 전개해나간다.
집단적이고 단결된 노조활동 전개 : 반도상사 여성노동자 투쟁
반도상사는 가발수출 붐을 타고 엄청난 호황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반도상사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1973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부평지역 여성지도자 훈련에 참여한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조결성을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1974년에는 14시간에 걸친 파업과 단식농성이라는 집단행동에 돌입한다. 계속되는 농성으로 생산에 지장이 생긴 회사측은 파업을 수습하기 위해 연행된 노동자들을 풀어줄 것을 경찰에 요청한다. 단 하루만에 1,400여명의 노동자가 조직되어 단결력을 과시하게 되었던 점, 단결된 투쟁을 통해 연행된 노동자들까지 되찾아오게 된 점은 반도상사 여성노동자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후의 노동조건 개선 투쟁과 노조 결성 과정에서 단체행동이 여러 번 있었다. 이것은 엄연히 국가보위법 위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힘과 단결로 인해 국가보위법이 무색하게 됐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크다.
민주적인 토론과 교육의 공간 형성 : 원풍모방, 청계피복, 콘트롤데이타 여성노동자 투쟁
원풍모방 노조는 1970년대 가장 좋은 근로조건을 쟁취하는 등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노조에서 실시한 수많은 교육이 조합원들에게 민주노조를 지켜가는 지지대가 된 것과 연관된다. 원풍노조는 당시 다른 노조에 비해 교육의 빈도와 종류가 훨씬 많았다. 또한 여성노동자 대다수가 살고 있는 기숙사에 자치회를 만들어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민주적인 토론과 교육의 공간으로 변모시킨 것도 주목할 만하다.
청계피복 노조는 여성노동자 대부분이 분리된 작업공간에 흩어져서 장시간 노동을 함에 따라 노조 조직이 쉽지 않았던 곤란함을 소모임 활동을 통한 미싱사들 사이의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극복한다. 그리고 소모임에서 조합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교육활동은 이후 노동교실 결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노동교실은 회합 및 교육의 공간이 되었는데,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깨닫게 된 조합원들이 노동시간 단축투쟁을 벌여 8시 퇴근을 쟁취하게 된 점이나 노조 최초의 쟁의행위가 노동교실을 되찾아오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다른 사업장에서와 같은 갈등이 없이 무난하게 노조를 결성한 콘트롤데이타 노조에서는 임금인상, 생계보조비 지급, 생리휴가 실질화, 안전한 출퇴근을 위한 통근버스 운행 등을 요구,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결혼․임신 퇴직 철폐와 유급 산전후휴가 등을 쟁취했으며, 미혼 여성노동자들에게는 가족수당을 주지 않던 관행을 깨도록 하였다. 이는 미국본사가 장기적인 방침으로 한국에서의 철수계획을 세워 신규채용을 하지 않자 노조에서 기존 여성조합원들이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과 관련있으며, 또한 노조가 끊임없이 다양한 교육과 문화활동을 진행했던 것과 연관된다. 당시에는 기혼 그리고 임신한 여성이 직장을 다니는 것을 같은 여성노동자들도 부끄럽고 창피한 일로 여기고, 남편을 잘못 만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노조에서는 조합원들의 이러한 생각을 바꾸기 위해 여성이 결혼과 임신, 출산 이후에도 직장을 다니는 것이 개인에게도 중요하고 또 노조의 조직유지를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라는 교육을 끊임없이 진행했다.
유신정권 붕괴의 기폭제 역할 : YH무역 여성노동자 투쟁
YH무역은 기업주의 재산해외도피, 경영부실, 가발산업의 사양산업화 등으로 1979년 일방적인 폐업공고를 한다. 이에 온갖 노조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노조 운동을 진행해왔던 YH무역노조는 회사정상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최후의 수단으로 생존권 보장, 폐업 철회 등을 규탄하며 187명의 조합원이 신민당사 농성을 결단한다.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이 진압되던 과정은 당시 독재정권의 폭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었고, 이는 이후 큰 파장으로 퍼져나가 결국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결과로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여성노동자들은 수년 동안 민주노조를 운영하면서 지치지 않고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였고, 여성노동자운동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운동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노동운동을 억제하기 위한 정부의 탄압이 극대화되고, 어용노조가 민주노조운동의 억제력으로 작용했던 상황에서, 당시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1970년대 노동운동 전반이 가지는 한계-이념과 조직적 연대에 있어서의 미성숙-를 지녔지만, 집단적 노동운동의 기원을 이루고 민주노조 결성을 수호했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집단적 주체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이 바로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집단적인 주체화는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당시 남성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발적이고 전투적으로 발생하기는 하였으나 일회적으로 끝나버렸던 것에 비해 여성노동자들은 어떻게 수년에 걸쳐 지속적인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인가? 합법적인 노동운동이 불가능했고, 유신체제하의 폭압적인 노동탄압 하에서 이루어진 여성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조 투쟁의 사례를 살펴보면 그 투쟁력과 지속성, 단결력은 사전의 치밀한 준비와 강한 조직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숫적 증가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자생적으로 투쟁이 발생했다는 설명만으로는 해명되기 어려운 지점이다. 여성중심의 조직적인 민주노조 운동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와 관련하여서는 앞서 살펴본 운동의 배경, 즉 객관적인 조건 외에도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주체형성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주체형성과정
좌절된 꿈과 가혹한 노동현실
1970년대 수출집약 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농촌에서 상경한 여성노동자들이었다. 궁핍한 농촌가정에서도 적어도 아들만은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관념은 뿌리깊었고, 이들을 위해 딸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4) 그녀들 역시 가족의 생계와 남동생 혹은 오빠의 학업을 위해 자신이 대도시에서 공장노동자가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였지만, 교육기회조차 박탈당해야 했던 가족 내에서의 이러한 차별적 경험은 깊은 한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당시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에게 있어 대도시에서 일한다는 것은 못 이룬 학업에대한 열망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산업화과정은 여성노동자들의 꿈과 희망을 조국의 근대화라는 지상목표 아래 양보하도록 하였다. 수출의 확대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저임금․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하며 모든 것들을 양보하고 협동할 것을 강요받았고, 이러한 방향에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철저한 이기주의적 사고이며 나아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서울에 올라오면서 가졌던 기대가 성취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게다가 공장에 들어가 직면하게 된 노동자로서의 삶은 그녀들이 내면화해 온 성정체성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여자 목소리가 담을 넘어가도 아니되고 여자는 얌전하고 교양있게 얘기를 해야 하며 행동도 조용해야 한다고.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자로 잰다면 우리는 여자로선 제로 아닌가. 큰 목소리로 하지 않으면 말이 전달이 안 되고 작업복을 입고 분주하게 기계 사이를 오가며 일해야 하니 자연히 행동이 덤성덤성하다. 이 나라의 산업발전과 경제성장을 위해 밤잠도 못 자고, 땀 흘리는 우리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공순이라는 천시하는 명칭과 세상에서 말하는 여자다움이 박탈되는 거라면 우린 뭔가? 누구를 위해 일하며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인가? 이렇게 모두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분한 생각이 들며 옆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안쓰러워 꼬옥 껴안아주고 싶다.5)
또한 여성노동자들에게 도시생활과 공장에서의 노동은 충격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여진다. 급속한 산업성장과 도시화과정은 공단주변을 중심으로 판자촌과 빈민가를 동시에 만들어내었다. 실제 여성노동자들이 접했던 대도시는 자신이 전에 살았던 농촌의 환경보다 지저분하고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자유롭게 커 온 여성이 엄격한 노동규율을 익히기란 쉽지 않았다.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살아온 그녀들에게 기계의 작동과 생산량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공장생활은 못배우고 가난해서 겪어야만 하는 서러움으로 다가온다. 육체적으로 이겨내기 벅찬 노동 강도와 군대식과 흡사하게 조직된 노동 과정 역시 끔찍한 것이었다. 게다가 노동자를 향한 차별과 멸시라는 사회․심리적 억압과 더불어 여성노동자를 향한 작업과정에서의 폭행과 공장안팎에서의 성적 폭력이라는 현실은 가혹했다.
연대감 형성과 새로운 정체성 획득
가혹한 노동현실이 야기하는 갈등과 여성성 상실에 대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선적으로 동원된 방법은 위장과 탈출의 방법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삶을 위장할 수 있는 사치스럽고 우아한 옷차림, 외모 가꾸기 등을 통해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을 강화시켜 그럴듯한 신부감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려 하였다. 학생인 체 하는 방법도 취해졌다. 그러나 교양 교육을 받거나 남성들이 선호하는 신부감이 되도록 노력한다고 해서, 여성노동자들이 대학생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더더구나 신분을 상승시켜줄 남편을 만나기는 어려운 현실이었다. 진학을 통한 계층이동을 꿈꾸었던 여성노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공장생활을 하며 학업을 병행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고, 또한 노동자가 개인적 실천으로 신분상승을 하기에는 계급적 장벽은 너무나 두터웠다. 공장노동자의 삶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불만은 고조되고 갈등은 심화된다.
이때에 여성노동자들에게 있어 동료들과의 친밀한 관계형성을 통해 접하게 된 야학과 교회의 소모임 활동 등은 이들에게 자극제 역할을 한다.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을 함께하고 기숙사 생활까지 같이하는 동료들과는 빈농의 딸이라는 소외감의 공유와 가족에 대한 경제적 부양이나 남자형제들의 교육을 책임지겠다는 공통의 책임의식 등으로 강한 결속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소모임과 노조활동은 여성노동자들에게 놀랍고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비참한 삶, 이러한 삶의 유일한 탈출구로 여겼던 꿈들의 좌절이 안겨준 현실의 불만이 세상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으로 연결된 상황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만나게 된 새로운 사회적 관계는 그녀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가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은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깨닫도록 하였고, 노동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시켜 나가도록 하였다.
활발한 교육활동 및 일상생활의 공유를 통한 의식화 과정
교육열이 강한 한국사회의 특수성과 가부장적 가족구조의 결합은 여성노동자들의 배움에 대한 강한 열망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의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제도적 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돈이 들지 않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유일한 단체인 산업선교회나 JOC의 소모임 활동은 여성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비록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주로 신분상승의 열망으로 야간학교나 교회가 후원하는 소모임 활동에 참여했지만, 이런 교육활동은 점차 노동자 의식화로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화된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결성에 큰 역할을 하게 되고, 이후 노동조합에서의 교육활동 역시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게끔 한다.
또한 당시 기숙사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생활의 공유도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의식화 과정에 있어 일정한 역할을 한다. 기숙사는 원래 생산에서 차질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공간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신입노동자들이 낯선 도시생활에 적응하고, 동료들간의 정서적 결합으로 인한 신뢰가 형성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기숙사생활으로 일상생활의 공유는 자연스럽게 집단적인 여가생활로 이어졌다. 여가는 대체로 소모임과 노조, 교회 등에서 준비한 교육이나 야유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은 단지 현장에서 쌓였던 피로를 푼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새롭게 사회를 인식하는 과정이 되었다. 즉 여가생활이 잠시나마 지겹고 고달픈 노동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새로운 의미규정을 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집단적이고 의식적인 여가생활은 여성노동자들에게 진정으로 자신의 노동이 어떤 의미인가를 깨달아가는 교육의 과정이었던 것이다.6)
투쟁경험과 조직에 의한 성장
반공이데올로기와 국가보위논리가 팽배한 가운데 1970년대 노동자들은 노조결성 및 운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단체교섭 및 행동에 있어서도 큰 제약을 겪어야했다. 이러한 조건은 노동조합이 공식적인 조직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간관계에 기초한 비공식조직을 얼마만큼 확보하느냐가 조직화방식의 핵심관건이 되게끔 했다. 소모임과 같은 비공식조직은 민주노조 결성에 있어서 일종의 전위조직적인 성격을 가졌고, 민주노조가 만들어진 후에는 공식조직인 노조와의 긴밀한 연계 하에 조직의 기동성과 단결력을 증대시켰다. 특히 당시 여성노동자들에게 공식적인 관계맺음은 낯선 것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공식적 조직은 여성노동자가 노동조합활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또한 노동조합이 의식적으로 기획한 다양한 형태의 투쟁경험의 축적은 여성노동자들의 의식을 증진시키는 조건이 되었다. 노동조합은 여성노동자들을 대리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가 아니라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하여 집행하고 조합원 스스로의 자율적인 힘을 증대시키는 기구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4.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 평가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활성화,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쇠퇴
1970년대 수출중심의 노동집약산업은 엄청난 여성노동력을 요구했고, 이러한 산업화 과정은 광범위한 저임금 여성노동자층을 형성시켰다. 살인적인 저임금․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 사회적 멸시와 차별을 감내해야만 했던 여성노동자들은 결국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집단적인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여성노동자들이 자본과 정권의 폭압적인 탄압 속에서도 지속적인 운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의 억눌린 한을 풀고 비로소 인간임을, 노동자임을 확인하면서 해방감을 만끽하는 공간으로써 노동조합이 기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한사회 가족의 생존전략에 의해 학업의 기회마저 잃고 가족의 생계와 남자형제들의 학비를 위해 공장으로 향해야했던 데에서 연유하는 여성노동자들의 배움에대한 강한 욕구를 노동조합의 교육 프로그램이나 외부 의식화단체의 소모임 등에서 적극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상생활을 공유하면서 획득된 정서적 일체감, 집단적인 여가활동을 통해 형성된 자율적인 노동자문화 등도 19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한다.
이러한 여성노동자운동은 유신독제 체제가 붕괴되는 데에 결정타를 날리는 역할까지 하였으나, 정부가 집중육성한 중화학공업이 엄청난 보호와 특혜, 독점가격으로 성장하면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이 사양사업으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약화되었고, 군부쿠테타 이후 출현한 독재정권의 노조파괴 과정에서 결국 좌절되고 만다.7) 이때 핵심적인 여성노동활동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결혼과 함께 노동운동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여성노동자운동은 1983년 말 이후 유화국면이 전개됨에 따라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는 상황과 더불어 다시금 활성화되는 듯하였으나8), 더 이상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한다. 그리고 1986~88년 3저 호황을 계기로 노동시장 교섭력이 증가하고 중소기업 내에서 모순이 폭발하면서 한국의 (남성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조운동은 성공을 거둔다. 여기서 점차 대중동원능력과 산업적, 사회적 파급력이 운동의 중심적 토대가 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은 서서히 대기업 남성 노동자들 중심의 노동조합운동으로 변형된다. 이때 남성생계부양자 이데올로기의 물적 토대인 가족임금이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노동자계급 내에서도 중산층 가족을 이상화한 가족구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동시에 여성노동은 기존 노동시장에서 불안정화 되거나, 비공식 시장으로 흡수되고, 젊은 여성들은 주로 서비스산업에 고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단적 저항을 통해 주체적인 노동자의식을 형성하고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여성노동자운동은 더 이상 그 특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 여성노동자 운동은 주변화되고 단절되고 만다.
객관적 조건의 변화, 그리고 주체형성 과정에서의 한계
1970년대 활성화되었던 여성노동자운동이 1985년 구로동맹 파업 이후 더 이상 지속․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 전반이 활성화되는 가운데에서도 여성노동자운동은 오히려 주변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산업재편 등과 같은 여성노동자운동을 둘러싼 객관적인 조건의 변화도 원인이었겠지만,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한계에서 비롯된 운동의 시효만료라는 점이다.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한계지점은 여성노동자 주체화 및 조직화 과정에 있어서 큰 역할을 했던 기능이 자체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던 한계와 관련된다.
앞서 반복적으로 지적되었다시피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민주노조 운동에 동참하게 된 데에는 참혹한 노동현실에 대한 울분 외에도 빈농의 딸로 태어나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것에 대한 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민주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운동에 동참하게 되면서 교육받고 성숙된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들은 해방감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이 그녀들을 억압적인 현실에 직면하게끔 한 원인, 즉 왜 여성은 스스로의 교육을 포기하면서 남자형제의 학비를 벌어야 했는지? 왜 여성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벌어야 했는지? 왜 여성노동자에게는 저임금은 당연시되는지? 등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여성노동자에게 행해지던 교육이나 의식화 프로그램, 노조의 투쟁 내용 어디를 살펴보아도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총체성에 대한 고민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처럼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민주노조 활동을 통한 주체화 과정에서 노동자의 계급적 귀속감을 획득하였으나, 그것이 그녀들의 삶의 억압지점으로 작용하고 있던 결혼 및 가족제도에 대한 명확한 인식 및 대안적 사고까지 담보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9) 결국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는 가난하고 배움이 짧기 때문 이상으로 인식되지 못한다. 즉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의 본질을 파악해내는 자기교육훈련을 당시의 운동은 담보하지 못한 것이다.10)
여전히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여성노동자운동의 성맹목
이렇게 여성노동자운동이 여전히도 성맹목을 노정하고 있었던 한계는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과정에서도 잠복되어 있었고 이후의 실천 속에서도 극복되지 못하였다. 이는 여성노동자운동의 활성화를 목표로 하며 현장으로 투신한 여성노동자 조직 활동가가 겪었던 곤란함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여성노동자 조직 활동가들의 경우, 분명 여성들의 불평등상황을 느끼고 알고 있었고 그것의 불합리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줄 수 있는 여성운동이라는 공간이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들은 추상적인 여성해방의식을 지니는 것에 머물게 되었으며, 이는 여성노동자 조직 활동에 있어서의 어려움으로 귀결된다.11)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은 남성노동자들의 경험을 주로 반영한 작업장내의 문제뿐만 아니라 작업장 밖에서의 경험들과 가족 내의 문제들이 포함되어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여성이라는 경험을 고려하지 않은 작업장내 노동자로서의 경험만으로 축소시켜 보았다. 여성노동자 대중의 현실에 대한 이러한 협소하고 부분적인 이해는 조직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여성 활동가들과 여성노동자들 간의 불일치를 야기한다. 여성노동자들의 욕구를 제대로 이해하고 반영하지 못하는 조직화는 한계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분리해서 보는 추상적인 여성해방의식은 여성노동자 조직 활동에 걸림돌로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의식은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성적인 노동자를 조직하고자 하는 태도로 귀결됨으로써 당시 보수적인 여성이데올로기에 지배받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현실문제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조직적 성과와 전망을 찾지 못한 채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현장을 나오고 조직 활동에서의 패배감과 함께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 대다수는 결혼이라는 탈출구를 찾는다.12)
이처럼 여성을 둘러싼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그쳤던 19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의 한계는 이후 여성노동자운동의 쇠퇴로 귀결된다. 산업구조의 재편에 따른 여성노동자의 불안정화와 주변화 문제나 남한사회의 가족형태가 핵가족화 됨에 따라 발생하는 여성의 문제 등에 대해 대응하는 데에 여성노동자운동은 무기력 할 수밖에 없었고, 1970년대와 같은 집단적이고도 조직적인 여성노동자운동은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이 노정했던 한계지점은 여전히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가? 이는 현시기 주류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여성노동자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밝히질 수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 6월호에서는 87년 이후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여성노동자문제에 대처해 온 과정을 개괄한 후, 2007년 현재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의 정세적 의미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여성운동의 형성을 위한 쟁점들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1) 이옥지․강인순,『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기획, 한울, 2001 / 최상림,「여성노동자의 현실과 여성노동운동」,『기억과 전망』 2004 여름본문으로
2) 전순옥,「민주노총 10년의 역사 속에서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민주노총 10주년 여성정책토론회>, 2005.본문으로
3) 물론 1970년대 이전에도 여성노동자운동은 존재했다. 식민지시대의 여성노동자 운동, 해방시기의 여성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부정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러나 6․25를 거치면서 이후의 역사 속에서 그 전통을 이어왔다기 보다는 철저히 단절되었다. 이는 식민지시대 민족해방운동의 경험이 완전히 소멸되고, 분단체제하에서 냉전이데올로기가 노동자들의 의식 속에 실체화된 힘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형성된 노동자계급은 대부분이 대규모 공장제 생산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들이었으며, 자본주의적 생활규율 그 자체에도 익숙치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미혼의 젊은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여성노동자운동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현시기 여성노동자운동의 시작점으로써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에 주목하고자 한다.본문으로
4) 당시 한국사회에서 가족의 생계와 생존을 위해서 취해지는 가장 일반적이고 우선적인 조치가 딸의 진학 포기와 조기 취업이었다. 이를 통해 아들을 대학에 진학시켜 가족의 경제적 또는 신분적 상승을 희망하는 것이 일반적인 가족의 전략이었다.본문으로
5) 장남수,『빼앗긴 일터』,창작과 비평사, 1984본문으로
6) 이러한 집단적인 여가활동은 소모임과 야학, 노동자 문화센터 등을 통해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찾아 나가려는 실천을 벌이게 된 것과 관련된다. 당시 대표적인 문화센터는 영등포의 산업선교회와 청계피복노조 평화의 집이 있었다. 이곳에서 진행된 탈춤, 연극, 노래 등의 문화 활동은 노동자들의 의식화교육의 일환이 되었다. 특히 야학에서는 글쓰기 활동을 장려하여 노동자들이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또한 씌어진 글을 중심으로 집단의 동료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비판적인 인식을 갖게 하였다.본문으로
7) 1978년 동일방직노조의 파괴, 1979년 8월 YH노조, 1981년 1월 청계피복노조, 4월 반도상사노조, 1982년 7월 콘트롤데이타노조, 10월 원풍노조 순으로 파괴되었다.본문으로
8) 1985년 구로지역 10개 사업장에서 3천 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대투쟁을 전개, 한국노동운동사의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 된 구로동맹파업투쟁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었다.본문으로
9) 물론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신분상승의 경로로써 결혼을 사고하고 그러한 결혼을 가능하게 해줄 남성에 대한 기대를 내면화했던 과정이 민주노조 운동에 참여하면서 극복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직한 남성노동자와의 소박한 결혼을 꿈꾸는 것으로 결혼관과 남성관이 변모한 것 이상은 아니었다. 관련하여 정현백(「여성노동자의 의식과 노동세계」,『여성1』,1985)은 여성노동자들의 수기 어느 구석에서도 여성에게 결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회적 노동에의 참여와 그를 통한 사회적 기여라고 주장하는 구절을 발견하기 어려우며, 이는 바로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들조차도 여성문제에 있어서는 적극적인 사고로 전환하는 과정을 겪지 못한 것이고, 이런 현상은 한편으로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인식변화가 매우 느린 속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이 정치․경제적인 이슈로 머물고 그 신념이 여성노동자의 생활세계로까지 내면화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본문으로
10) 여성이 스스로의 교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한 분석은 미흡한 채 실시되던 교육은 그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례로 1970년대에는 여성노동자들의 배움의 욕구를 사회나 기업에서 제도적으로 흡수하지 않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욕구가 제도화되는 과정이 있었고, 이것은 여성노동자에 대한 노동조합의 조직화 기능에 일정한 타격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민주노조인 원풍모방이나 YH무역, 반도상사의 경우에는 다른 기업에 비해서 내부에 노동조합 주체의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실시되었고 이는 활발한 노조활동으로 연결되었던 반면, 1970년대 산업체 학교가 있었던 한일합섬이나 대성모방, 충남방직 등에서는 타 사업장과 마찬가지로 노동조건이 열악하거나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들의 집단적이고 행동은 조직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 이후에 가서는 더욱 심화된다.본문으로
11) 여성노동자 조직 활동을 전개했던 여성 활동가들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학생운동․노동운동과 여성해방의식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당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여성문제를 부차적인 문제로 여기고 학습체계에서 배제시켰을 뿐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던 사실은 여성 활동가들이 스스로의 문제에 대한 의식과 자각을 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즉 여성문제를 운동의 과제로 여기지 않았던 사회운동은 여성 활동가들이 여성으로서의 의식과 행동을 억압하고 성적 정체감 형성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그녀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추상적인 여성해방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이다.본문으로
12) 허성우,『1980년대 후반 여성노동자 조직활동가의 여성해방의식 연구-대전지역을 중심으로』,이대석사학위논문, 1994.본문으로
2007년 3월 8일은 99주년을 맞는 세계여성의 날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여성의 날에 딱 맞춘 듯이 울산과 광주에서는 알몸을 선택한 여성노동자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울려퍼졌다.
#1. 2007년 3월 7일, 울산과학대의 청소미화원 여성노동자들은 알몸인 상태로 울산과학대 직원들에 의해 농성장 밖으로 끌려나왔다. 저임금과 비인간적인 대우, 일방적인 계약해지가 너무나도 억울해서, 농성을 시작한 그녀들. 술냄새를 풍기며 학교직원들이 들이닥쳐 집기를 때려부수며 난동을 피우자 그녀들 중 누군가 외쳤다. 옷을 벗자. 벗고 있으면 그 누구도 손을 못 댄대! 하지만 그녀들은 알몸으로 끌려나왔다.
#2. 2007년 3월 8일, 비정규직 직원 고용을 승계하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던 광주시청 청소미화원 여성노동자들도 알몸인 채로 시청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노조를 만들었다고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분해서, 시장한번 만나보자고 열 두 시간을 기다린 그녀들. 그러나 새벽이 되자 젊은 남성공무원들이 그녀들을 끌어내려 하였다. 누군가가 우리 몸에 손대지 말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녀들은 윗옷을 벗었다. 하지만 경찰들과 술 취한 시청직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들을 내동댕이쳤다.
울산과 광주에서의 울부짖음을 전해들은 이들은 모두 30여년전 동일방직 여공들의 나체시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3. 1976년 동일방직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들은 노조활동 보장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를 외치며 농성에 돌입했다. 농성 사흘째, 수 백 명의 경찰이 농성장에 들이닥쳤다. 그녀들은 손을 잡았다. 그 때 누군가 옷을 벗자. 벗고 있으면 그 누구도 손을 못 댄대!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들은 옷을 벗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들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30년을 넘나들며 되풀이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 그것이 바로 진보여성 총 단결로 대선투쟁 승리하자는 공허한 수사에 가려졌던 2007년 여성의 날의 풍경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풍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현시기 우리에게 필요한 여성노동자운동은?
저임금과 불안정노동, 빈곤과 폭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여성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과 처절한 투쟁은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와 지배체제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여성노동자운동이 시급히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여성노동자운동은 어떻게 형성되고 활성화될 수 있는가?
한국여성단체연합을 비롯한 주류여성운동진영은 87년 민주화 대투쟁을 경과하며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본다. 여성노동자운동 역시 여성노동자의 고용안정, 고용평등, 모성보호,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지원조치 확대, 여성노동기본권 확보 등의 과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고, 이는 남녀고용평등법의 제정, 출산휴가에 대한 사회분담화, 보육의 공공성 확대 등과 같은 성과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운동은 정체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는 노동시장의 변화에 따라 여성노동력이 주변화되는 문제에 대해 노동조합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조직과 운영상에 있어 남성 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노동조합이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운동진영에서도 여성노동자의 고용불안정 문제 및 여성 비정규직화, 빈곤의 여성화 문제 등에 대한 대응이 미흡했고, 따라서 운동 영역을 확대하고 여성노동력의 주변화를 막기 위한 제도개선 투쟁,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의 처지에 맞는 조직방식을 확대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1)
그러나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은 성장했는데 여성노동자운동은 침체했다는 진단은 여성노동자운동을 노동운동․여성운동과 별개의 것으로 설정하지 않고서야 설명되기 어렵다. 또한 노동조합이 남성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데에서 여성노동자운동의 침체원인을 찾는 것은 그러한 노동조합의 가부장성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가 함께 이야기되지 않고서야 그 자체로 원인진단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비정규직화와 빈곤심화의 문제가 기존 여성노동자들의 현실과는 별개로 새롭게 덧붙여진 문제라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운동영역의 확대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도 적절한 방안이라고 하기 어렵다.
반면 노동운동진영에서는 1970~80년대의 여성노동자운동이 민주노조운동의 뿌리이며 태동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여성노동자운동은 주변화되고 여성노동자조직운동은 민주노총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민주노총이 민주노조 정신을 계승․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2) 그러나 여성노동자운동의 침체가 비단 민주노총으로의 조직변경의 문제로 해명되는가? 그리고 여성노동자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소위 전노협 정신을 복원하면 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남는다.
이처럼 주류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 양자 모두 현시기 여성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운동 경로 제시는 물론이고, 현상 진단 및 원인파악 조차 정확하게 하고 있지 못하다. 때문에 현시기 필요한 여성노동자운동의 실내용을 밝히고 그것을 가능케 할 방법을 모색하는 작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본 글에서는 그 작업의 일환으로 한국여성노동자운동의 출현기에 해당하는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3)을 중심으로 역사적 평가를 하겠다. 당시 운동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단절된 원인은 무엇인가? 19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의 형성과 소멸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저항의 기초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고찰해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반면교사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1.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배경
전후의 장기호황이 끝나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경제의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하자 미국법인기업과 정부는 생산요소의 일부를 해외로 이전하면서 값싼 노동력, 반(反)노조정책, 수출가공 또는 자유무역지대의 제도들의 이점을 누릴 수 있는 전략으로 이에 대응했다. 이런 전략은 여성 노동을 선호하는 전자와 섬유산업의 예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세계각지에서 여성은 빠르고 싼 손가락 덕분에 이러한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최상의 노동력이 되었고 이를 통해 지역정부는 절실하게 필요한 외화를 얻었으며 다국적 법인기업은 이윤을 증대시켰다.
남한사회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1970년대 수출 중심의 노동집약산업은 여성노동력을 엄청나게 요구했다. 이에 농촌을 떠나 대도시의 공장에 취직하는 여성들이 줄을 이었다. 수출산업의 고도성장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시화를 촉진하였고 동시에 농촌의 궁핍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농촌은 수출지향적 산업화에 투입될 노동력을 무제한적으로 공급하는 기지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나이 어린 농촌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와 형제들의 학비보조를 위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의 공장으로 유입되었다. 여성은 자본에게는 값싸고 유순한 최상의 노동력이자 가족에게는 생계를 위한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산업화 과정은 광범위한 저임금 여성노동자층을 형성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객관적 조건이 마련될 수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이 집중된 수출산업부문의 저임금․장시간 노동이라는 조건은 한편으로는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을 교육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없게 함으로써 여성노동자들의 의식을 억제하는 요인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적인 공장노동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공동의 요구가 마련될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당시 한국 사회에 팽배해있던 노동자 천시풍조와 남존여비사상 역시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배경이 된다.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정신노동을 높이 평가하는 사농공상 사상에서 기인한 생산직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경멸, 그리고 여성 노동자를 관리자하는 남성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대우와 성적 모욕은 여성노동자들로 하여금 소위 공순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게 만듦으로써 적극적인 사회의식 형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인간으로 대접해주는 노동조합 활동에 희열을 느끼고 동참하게 되는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2.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전개와 그 특징
살인적인 작업환경 속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던 여성노동자들의 실망과 분노는 서서히 뜨거워져 급기야 활화산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여성노동자의 힘으로 민주노조 결성 :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동일방직에서는 여성조합원들의 힘으로 1972년에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노조를 민주화하는 데에 성공한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와 JOC 등의 단체에서 실시해왔던 소그룹 활동과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왔던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그녀들이 공장에서 겪는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는 데에 노동조합이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합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이 조합활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도록 새롭게 노조를 구성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노조민주화 투쟁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사회 최초의 여성지부장이 선출되기도 한다. 이렇게 노조 민주화 투쟁이 불붙자 회사와 정부는 본격적으로 노조탄압에 나섰고, 동일방직 지부의 본조인 섬유노조까지 합세한다. 이 과정에서 1976년의 나체시위, 1978년의 똥물세례사건 등이 발생한 것이다.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은 자율적인 노조를 되찾기 위해 구속을 불사한 노동절 기념행사장에서의 투쟁, 목숨을 건 명동성당에서의 단식투쟁 등을 전개해나가며 회사와 정부, 그리고 섬유본조와 노총을 상대로 끈질긴 싸움을 전개해나간다.
집단적이고 단결된 노조활동 전개 : 반도상사 여성노동자 투쟁
반도상사는 가발수출 붐을 타고 엄청난 호황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반도상사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1973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부평지역 여성지도자 훈련에 참여한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조결성을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1974년에는 14시간에 걸친 파업과 단식농성이라는 집단행동에 돌입한다. 계속되는 농성으로 생산에 지장이 생긴 회사측은 파업을 수습하기 위해 연행된 노동자들을 풀어줄 것을 경찰에 요청한다. 단 하루만에 1,400여명의 노동자가 조직되어 단결력을 과시하게 되었던 점, 단결된 투쟁을 통해 연행된 노동자들까지 되찾아오게 된 점은 반도상사 여성노동자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후의 노동조건 개선 투쟁과 노조 결성 과정에서 단체행동이 여러 번 있었다. 이것은 엄연히 국가보위법 위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힘과 단결로 인해 국가보위법이 무색하게 됐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크다.
민주적인 토론과 교육의 공간 형성 : 원풍모방, 청계피복, 콘트롤데이타 여성노동자 투쟁
원풍모방 노조는 1970년대 가장 좋은 근로조건을 쟁취하는 등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노조에서 실시한 수많은 교육이 조합원들에게 민주노조를 지켜가는 지지대가 된 것과 연관된다. 원풍노조는 당시 다른 노조에 비해 교육의 빈도와 종류가 훨씬 많았다. 또한 여성노동자 대다수가 살고 있는 기숙사에 자치회를 만들어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민주적인 토론과 교육의 공간으로 변모시킨 것도 주목할 만하다.
청계피복 노조는 여성노동자 대부분이 분리된 작업공간에 흩어져서 장시간 노동을 함에 따라 노조 조직이 쉽지 않았던 곤란함을 소모임 활동을 통한 미싱사들 사이의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극복한다. 그리고 소모임에서 조합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교육활동은 이후 노동교실 결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노동교실은 회합 및 교육의 공간이 되었는데,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깨닫게 된 조합원들이 노동시간 단축투쟁을 벌여 8시 퇴근을 쟁취하게 된 점이나 노조 최초의 쟁의행위가 노동교실을 되찾아오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다른 사업장에서와 같은 갈등이 없이 무난하게 노조를 결성한 콘트롤데이타 노조에서는 임금인상, 생계보조비 지급, 생리휴가 실질화, 안전한 출퇴근을 위한 통근버스 운행 등을 요구,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결혼․임신 퇴직 철폐와 유급 산전후휴가 등을 쟁취했으며, 미혼 여성노동자들에게는 가족수당을 주지 않던 관행을 깨도록 하였다. 이는 미국본사가 장기적인 방침으로 한국에서의 철수계획을 세워 신규채용을 하지 않자 노조에서 기존 여성조합원들이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과 관련있으며, 또한 노조가 끊임없이 다양한 교육과 문화활동을 진행했던 것과 연관된다. 당시에는 기혼 그리고 임신한 여성이 직장을 다니는 것을 같은 여성노동자들도 부끄럽고 창피한 일로 여기고, 남편을 잘못 만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노조에서는 조합원들의 이러한 생각을 바꾸기 위해 여성이 결혼과 임신, 출산 이후에도 직장을 다니는 것이 개인에게도 중요하고 또 노조의 조직유지를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라는 교육을 끊임없이 진행했다.
유신정권 붕괴의 기폭제 역할 : YH무역 여성노동자 투쟁
YH무역은 기업주의 재산해외도피, 경영부실, 가발산업의 사양산업화 등으로 1979년 일방적인 폐업공고를 한다. 이에 온갖 노조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노조 운동을 진행해왔던 YH무역노조는 회사정상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최후의 수단으로 생존권 보장, 폐업 철회 등을 규탄하며 187명의 조합원이 신민당사 농성을 결단한다.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이 진압되던 과정은 당시 독재정권의 폭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었고, 이는 이후 큰 파장으로 퍼져나가 결국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결과로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여성노동자들은 수년 동안 민주노조를 운영하면서 지치지 않고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였고, 여성노동자운동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운동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노동운동을 억제하기 위한 정부의 탄압이 극대화되고, 어용노조가 민주노조운동의 억제력으로 작용했던 상황에서, 당시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1970년대 노동운동 전반이 가지는 한계-이념과 조직적 연대에 있어서의 미성숙-를 지녔지만, 집단적 노동운동의 기원을 이루고 민주노조 결성을 수호했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집단적 주체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이 바로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집단적인 주체화는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당시 남성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발적이고 전투적으로 발생하기는 하였으나 일회적으로 끝나버렸던 것에 비해 여성노동자들은 어떻게 수년에 걸쳐 지속적인 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인가? 합법적인 노동운동이 불가능했고, 유신체제하의 폭압적인 노동탄압 하에서 이루어진 여성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조 투쟁의 사례를 살펴보면 그 투쟁력과 지속성, 단결력은 사전의 치밀한 준비와 강한 조직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숫적 증가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자생적으로 투쟁이 발생했다는 설명만으로는 해명되기 어려운 지점이다. 여성중심의 조직적인 민주노조 운동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와 관련하여서는 앞서 살펴본 운동의 배경, 즉 객관적인 조건 외에도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주체형성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주체형성과정
좌절된 꿈과 가혹한 노동현실
1970년대 수출집약 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농촌에서 상경한 여성노동자들이었다. 궁핍한 농촌가정에서도 적어도 아들만은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관념은 뿌리깊었고, 이들을 위해 딸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4) 그녀들 역시 가족의 생계와 남동생 혹은 오빠의 학업을 위해 자신이 대도시에서 공장노동자가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였지만, 교육기회조차 박탈당해야 했던 가족 내에서의 이러한 차별적 경험은 깊은 한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당시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에게 있어 대도시에서 일한다는 것은 못 이룬 학업에대한 열망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산업화과정은 여성노동자들의 꿈과 희망을 조국의 근대화라는 지상목표 아래 양보하도록 하였다. 수출의 확대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저임금․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하며 모든 것들을 양보하고 협동할 것을 강요받았고, 이러한 방향에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철저한 이기주의적 사고이며 나아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서울에 올라오면서 가졌던 기대가 성취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게다가 공장에 들어가 직면하게 된 노동자로서의 삶은 그녀들이 내면화해 온 성정체성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여자 목소리가 담을 넘어가도 아니되고 여자는 얌전하고 교양있게 얘기를 해야 하며 행동도 조용해야 한다고.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자로 잰다면 우리는 여자로선 제로 아닌가. 큰 목소리로 하지 않으면 말이 전달이 안 되고 작업복을 입고 분주하게 기계 사이를 오가며 일해야 하니 자연히 행동이 덤성덤성하다. 이 나라의 산업발전과 경제성장을 위해 밤잠도 못 자고, 땀 흘리는 우리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공순이라는 천시하는 명칭과 세상에서 말하는 여자다움이 박탈되는 거라면 우린 뭔가? 누구를 위해 일하며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인가? 이렇게 모두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분한 생각이 들며 옆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안쓰러워 꼬옥 껴안아주고 싶다.5)
또한 여성노동자들에게 도시생활과 공장에서의 노동은 충격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여진다. 급속한 산업성장과 도시화과정은 공단주변을 중심으로 판자촌과 빈민가를 동시에 만들어내었다. 실제 여성노동자들이 접했던 대도시는 자신이 전에 살았던 농촌의 환경보다 지저분하고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자유롭게 커 온 여성이 엄격한 노동규율을 익히기란 쉽지 않았다.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살아온 그녀들에게 기계의 작동과 생산량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공장생활은 못배우고 가난해서 겪어야만 하는 서러움으로 다가온다. 육체적으로 이겨내기 벅찬 노동 강도와 군대식과 흡사하게 조직된 노동 과정 역시 끔찍한 것이었다. 게다가 노동자를 향한 차별과 멸시라는 사회․심리적 억압과 더불어 여성노동자를 향한 작업과정에서의 폭행과 공장안팎에서의 성적 폭력이라는 현실은 가혹했다.
연대감 형성과 새로운 정체성 획득
가혹한 노동현실이 야기하는 갈등과 여성성 상실에 대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선적으로 동원된 방법은 위장과 탈출의 방법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삶을 위장할 수 있는 사치스럽고 우아한 옷차림, 외모 가꾸기 등을 통해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을 강화시켜 그럴듯한 신부감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려 하였다. 학생인 체 하는 방법도 취해졌다. 그러나 교양 교육을 받거나 남성들이 선호하는 신부감이 되도록 노력한다고 해서, 여성노동자들이 대학생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더더구나 신분을 상승시켜줄 남편을 만나기는 어려운 현실이었다. 진학을 통한 계층이동을 꿈꾸었던 여성노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공장생활을 하며 학업을 병행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고, 또한 노동자가 개인적 실천으로 신분상승을 하기에는 계급적 장벽은 너무나 두터웠다. 공장노동자의 삶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불만은 고조되고 갈등은 심화된다.
이때에 여성노동자들에게 있어 동료들과의 친밀한 관계형성을 통해 접하게 된 야학과 교회의 소모임 활동 등은 이들에게 자극제 역할을 한다.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을 함께하고 기숙사 생활까지 같이하는 동료들과는 빈농의 딸이라는 소외감의 공유와 가족에 대한 경제적 부양이나 남자형제들의 교육을 책임지겠다는 공통의 책임의식 등으로 강한 결속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소모임과 노조활동은 여성노동자들에게 놀랍고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비참한 삶, 이러한 삶의 유일한 탈출구로 여겼던 꿈들의 좌절이 안겨준 현실의 불만이 세상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으로 연결된 상황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만나게 된 새로운 사회적 관계는 그녀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가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은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깨닫도록 하였고, 노동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시켜 나가도록 하였다.
활발한 교육활동 및 일상생활의 공유를 통한 의식화 과정
교육열이 강한 한국사회의 특수성과 가부장적 가족구조의 결합은 여성노동자들의 배움에 대한 강한 열망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의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제도적 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돈이 들지 않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유일한 단체인 산업선교회나 JOC의 소모임 활동은 여성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비록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주로 신분상승의 열망으로 야간학교나 교회가 후원하는 소모임 활동에 참여했지만, 이런 교육활동은 점차 노동자 의식화로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화된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결성에 큰 역할을 하게 되고, 이후 노동조합에서의 교육활동 역시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게끔 한다.
또한 당시 기숙사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생활의 공유도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의식화 과정에 있어 일정한 역할을 한다. 기숙사는 원래 생산에서 차질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공간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신입노동자들이 낯선 도시생활에 적응하고, 동료들간의 정서적 결합으로 인한 신뢰가 형성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기숙사생활으로 일상생활의 공유는 자연스럽게 집단적인 여가생활로 이어졌다. 여가는 대체로 소모임과 노조, 교회 등에서 준비한 교육이나 야유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은 단지 현장에서 쌓였던 피로를 푼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새롭게 사회를 인식하는 과정이 되었다. 즉 여가생활이 잠시나마 지겹고 고달픈 노동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새로운 의미규정을 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집단적이고 의식적인 여가생활은 여성노동자들에게 진정으로 자신의 노동이 어떤 의미인가를 깨달아가는 교육의 과정이었던 것이다.6)
투쟁경험과 조직에 의한 성장
반공이데올로기와 국가보위논리가 팽배한 가운데 1970년대 노동자들은 노조결성 및 운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단체교섭 및 행동에 있어서도 큰 제약을 겪어야했다. 이러한 조건은 노동조합이 공식적인 조직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간관계에 기초한 비공식조직을 얼마만큼 확보하느냐가 조직화방식의 핵심관건이 되게끔 했다. 소모임과 같은 비공식조직은 민주노조 결성에 있어서 일종의 전위조직적인 성격을 가졌고, 민주노조가 만들어진 후에는 공식조직인 노조와의 긴밀한 연계 하에 조직의 기동성과 단결력을 증대시켰다. 특히 당시 여성노동자들에게 공식적인 관계맺음은 낯선 것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공식적 조직은 여성노동자가 노동조합활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또한 노동조합이 의식적으로 기획한 다양한 형태의 투쟁경험의 축적은 여성노동자들의 의식을 증진시키는 조건이 되었다. 노동조합은 여성노동자들을 대리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가 아니라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하여 집행하고 조합원 스스로의 자율적인 힘을 증대시키는 기구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4.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 평가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활성화,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쇠퇴
1970년대 수출중심의 노동집약산업은 엄청난 여성노동력을 요구했고, 이러한 산업화 과정은 광범위한 저임금 여성노동자층을 형성시켰다. 살인적인 저임금․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 사회적 멸시와 차별을 감내해야만 했던 여성노동자들은 결국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집단적인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여성노동자들이 자본과 정권의 폭압적인 탄압 속에서도 지속적인 운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의 억눌린 한을 풀고 비로소 인간임을, 노동자임을 확인하면서 해방감을 만끽하는 공간으로써 노동조합이 기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한사회 가족의 생존전략에 의해 학업의 기회마저 잃고 가족의 생계와 남자형제들의 학비를 위해 공장으로 향해야했던 데에서 연유하는 여성노동자들의 배움에대한 강한 욕구를 노동조합의 교육 프로그램이나 외부 의식화단체의 소모임 등에서 적극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상생활을 공유하면서 획득된 정서적 일체감, 집단적인 여가활동을 통해 형성된 자율적인 노동자문화 등도 19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한다.
이러한 여성노동자운동은 유신독제 체제가 붕괴되는 데에 결정타를 날리는 역할까지 하였으나, 정부가 집중육성한 중화학공업이 엄청난 보호와 특혜, 독점가격으로 성장하면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이 사양사업으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약화되었고, 군부쿠테타 이후 출현한 독재정권의 노조파괴 과정에서 결국 좌절되고 만다.7) 이때 핵심적인 여성노동활동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결혼과 함께 노동운동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여성노동자운동은 1983년 말 이후 유화국면이 전개됨에 따라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는 상황과 더불어 다시금 활성화되는 듯하였으나8), 더 이상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한다. 그리고 1986~88년 3저 호황을 계기로 노동시장 교섭력이 증가하고 중소기업 내에서 모순이 폭발하면서 한국의 (남성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조운동은 성공을 거둔다. 여기서 점차 대중동원능력과 산업적, 사회적 파급력이 운동의 중심적 토대가 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은 서서히 대기업 남성 노동자들 중심의 노동조합운동으로 변형된다. 이때 남성생계부양자 이데올로기의 물적 토대인 가족임금이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노동자계급 내에서도 중산층 가족을 이상화한 가족구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동시에 여성노동은 기존 노동시장에서 불안정화 되거나, 비공식 시장으로 흡수되고, 젊은 여성들은 주로 서비스산업에 고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단적 저항을 통해 주체적인 노동자의식을 형성하고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여성노동자운동은 더 이상 그 특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 여성노동자 운동은 주변화되고 단절되고 만다.
객관적 조건의 변화, 그리고 주체형성 과정에서의 한계
1970년대 활성화되었던 여성노동자운동이 1985년 구로동맹 파업 이후 더 이상 지속․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 전반이 활성화되는 가운데에서도 여성노동자운동은 오히려 주변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산업재편 등과 같은 여성노동자운동을 둘러싼 객관적인 조건의 변화도 원인이었겠지만,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한계에서 비롯된 운동의 시효만료라는 점이다.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한계지점은 여성노동자 주체화 및 조직화 과정에 있어서 큰 역할을 했던 기능이 자체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던 한계와 관련된다.
앞서 반복적으로 지적되었다시피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민주노조 운동에 동참하게 된 데에는 참혹한 노동현실에 대한 울분 외에도 빈농의 딸로 태어나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것에 대한 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민주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운동에 동참하게 되면서 교육받고 성숙된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들은 해방감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이 그녀들을 억압적인 현실에 직면하게끔 한 원인, 즉 왜 여성은 스스로의 교육을 포기하면서 남자형제의 학비를 벌어야 했는지? 왜 여성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벌어야 했는지? 왜 여성노동자에게는 저임금은 당연시되는지? 등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여성노동자에게 행해지던 교육이나 의식화 프로그램, 노조의 투쟁 내용 어디를 살펴보아도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총체성에 대한 고민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처럼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민주노조 활동을 통한 주체화 과정에서 노동자의 계급적 귀속감을 획득하였으나, 그것이 그녀들의 삶의 억압지점으로 작용하고 있던 결혼 및 가족제도에 대한 명확한 인식 및 대안적 사고까지 담보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9) 결국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는 가난하고 배움이 짧기 때문 이상으로 인식되지 못한다. 즉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의 본질을 파악해내는 자기교육훈련을 당시의 운동은 담보하지 못한 것이다.10)
여전히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여성노동자운동의 성맹목
이렇게 여성노동자운동이 여전히도 성맹목을 노정하고 있었던 한계는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과정에서도 잠복되어 있었고 이후의 실천 속에서도 극복되지 못하였다. 이는 여성노동자운동의 활성화를 목표로 하며 현장으로 투신한 여성노동자 조직 활동가가 겪었던 곤란함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여성노동자 조직 활동가들의 경우, 분명 여성들의 불평등상황을 느끼고 알고 있었고 그것의 불합리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줄 수 있는 여성운동이라는 공간이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들은 추상적인 여성해방의식을 지니는 것에 머물게 되었으며, 이는 여성노동자 조직 활동에 있어서의 어려움으로 귀결된다.11)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은 남성노동자들의 경험을 주로 반영한 작업장내의 문제뿐만 아니라 작업장 밖에서의 경험들과 가족 내의 문제들이 포함되어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여성이라는 경험을 고려하지 않은 작업장내 노동자로서의 경험만으로 축소시켜 보았다. 여성노동자 대중의 현실에 대한 이러한 협소하고 부분적인 이해는 조직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여성 활동가들과 여성노동자들 간의 불일치를 야기한다. 여성노동자들의 욕구를 제대로 이해하고 반영하지 못하는 조직화는 한계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분리해서 보는 추상적인 여성해방의식은 여성노동자 조직 활동에 걸림돌로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의식은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성적인 노동자를 조직하고자 하는 태도로 귀결됨으로써 당시 보수적인 여성이데올로기에 지배받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현실문제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조직적 성과와 전망을 찾지 못한 채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현장을 나오고 조직 활동에서의 패배감과 함께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 대다수는 결혼이라는 탈출구를 찾는다.12)
이처럼 여성을 둘러싼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그쳤던 19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의 한계는 이후 여성노동자운동의 쇠퇴로 귀결된다. 산업구조의 재편에 따른 여성노동자의 불안정화와 주변화 문제나 남한사회의 가족형태가 핵가족화 됨에 따라 발생하는 여성의 문제 등에 대해 대응하는 데에 여성노동자운동은 무기력 할 수밖에 없었고, 1970년대와 같은 집단적이고도 조직적인 여성노동자운동은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이 노정했던 한계지점은 여전히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가? 이는 현시기 주류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여성노동자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밝히질 수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 6월호에서는 87년 이후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여성노동자문제에 대처해 온 과정을 개괄한 후, 2007년 현재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의 정세적 의미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여성운동의 형성을 위한 쟁점들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1) 이옥지․강인순,『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기획, 한울, 2001 / 최상림,「여성노동자의 현실과 여성노동운동」,『기억과 전망』 2004 여름본문으로
2) 전순옥,「민주노총 10년의 역사 속에서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민주노총 10주년 여성정책토론회>, 2005.본문으로
3) 물론 1970년대 이전에도 여성노동자운동은 존재했다. 식민지시대의 여성노동자 운동, 해방시기의 여성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부정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러나 6․25를 거치면서 이후의 역사 속에서 그 전통을 이어왔다기 보다는 철저히 단절되었다. 이는 식민지시대 민족해방운동의 경험이 완전히 소멸되고, 분단체제하에서 냉전이데올로기가 노동자들의 의식 속에 실체화된 힘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형성된 노동자계급은 대부분이 대규모 공장제 생산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들이었으며, 자본주의적 생활규율 그 자체에도 익숙치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미혼의 젊은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여성노동자운동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현시기 여성노동자운동의 시작점으로써 19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에 주목하고자 한다.본문으로
4) 당시 한국사회에서 가족의 생계와 생존을 위해서 취해지는 가장 일반적이고 우선적인 조치가 딸의 진학 포기와 조기 취업이었다. 이를 통해 아들을 대학에 진학시켜 가족의 경제적 또는 신분적 상승을 희망하는 것이 일반적인 가족의 전략이었다.본문으로
5) 장남수,『빼앗긴 일터』,창작과 비평사, 1984본문으로
6) 이러한 집단적인 여가활동은 소모임과 야학, 노동자 문화센터 등을 통해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찾아 나가려는 실천을 벌이게 된 것과 관련된다. 당시 대표적인 문화센터는 영등포의 산업선교회와 청계피복노조 평화의 집이 있었다. 이곳에서 진행된 탈춤, 연극, 노래 등의 문화 활동은 노동자들의 의식화교육의 일환이 되었다. 특히 야학에서는 글쓰기 활동을 장려하여 노동자들이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또한 씌어진 글을 중심으로 집단의 동료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비판적인 인식을 갖게 하였다.본문으로
7) 1978년 동일방직노조의 파괴, 1979년 8월 YH노조, 1981년 1월 청계피복노조, 4월 반도상사노조, 1982년 7월 콘트롤데이타노조, 10월 원풍노조 순으로 파괴되었다.본문으로
8) 1985년 구로지역 10개 사업장에서 3천 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대투쟁을 전개, 한국노동운동사의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 된 구로동맹파업투쟁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었다.본문으로
9) 물론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신분상승의 경로로써 결혼을 사고하고 그러한 결혼을 가능하게 해줄 남성에 대한 기대를 내면화했던 과정이 민주노조 운동에 참여하면서 극복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직한 남성노동자와의 소박한 결혼을 꿈꾸는 것으로 결혼관과 남성관이 변모한 것 이상은 아니었다. 관련하여 정현백(「여성노동자의 의식과 노동세계」,『여성1』,1985)은 여성노동자들의 수기 어느 구석에서도 여성에게 결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회적 노동에의 참여와 그를 통한 사회적 기여라고 주장하는 구절을 발견하기 어려우며, 이는 바로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들조차도 여성문제에 있어서는 적극적인 사고로 전환하는 과정을 겪지 못한 것이고, 이런 현상은 한편으로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인식변화가 매우 느린 속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이 정치․경제적인 이슈로 머물고 그 신념이 여성노동자의 생활세계로까지 내면화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본문으로
10) 여성이 스스로의 교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한 분석은 미흡한 채 실시되던 교육은 그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례로 1970년대에는 여성노동자들의 배움의 욕구를 사회나 기업에서 제도적으로 흡수하지 않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욕구가 제도화되는 과정이 있었고, 이것은 여성노동자에 대한 노동조합의 조직화 기능에 일정한 타격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민주노조인 원풍모방이나 YH무역, 반도상사의 경우에는 다른 기업에 비해서 내부에 노동조합 주체의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실시되었고 이는 활발한 노조활동으로 연결되었던 반면, 1970년대 산업체 학교가 있었던 한일합섬이나 대성모방, 충남방직 등에서는 타 사업장과 마찬가지로 노동조건이 열악하거나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들의 집단적이고 행동은 조직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 이후에 가서는 더욱 심화된다.본문으로
11) 여성노동자 조직 활동을 전개했던 여성 활동가들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학생운동․노동운동과 여성해방의식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당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여성문제를 부차적인 문제로 여기고 학습체계에서 배제시켰을 뿐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던 사실은 여성 활동가들이 스스로의 문제에 대한 의식과 자각을 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즉 여성문제를 운동의 과제로 여기지 않았던 사회운동은 여성 활동가들이 여성으로서의 의식과 행동을 억압하고 성적 정체감 형성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그녀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추상적인 여성해방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이다.본문으로
12) 허성우,『1980년대 후반 여성노동자 조직활동가의 여성해방의식 연구-대전지역을 중심으로』,이대석사학위논문, 1994.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