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대추리 투쟁
2007년 4월 9일 매향제
“대추리 고향을 떠나게 되는 이 날… 뭐라고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정 때 논밭전답을 빼앗기고… 6·25전쟁 때도 쫓겨… 또 다시 이와 같은 처지에 놓였습니다.”
마을 곳곳이 황폐했다. 집 곳곳에서 나부끼던 노란 깃발은 찢겨져 있었고, 집과 집을 구분하던 벽들은 시와 그림들로 엉기정기 얽힌 채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창틀이든 문지방이든 고물로라도 내다 팔 물건들을 지녔던 것들은 이리저리 뜯긴 채 너부러졌다. 대추리·도두리를 지켰던 문무인상도 타서 재가 되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주민들, 기자들, 활동가들, 문화예술인들 그리고 이리저리 다해서 지킴이들까지… 이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매향제가 진행되었다.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향나무 판이 대추초등학교 운동장 한복판에 묻혔다. 기약할 수 없는 귀향의 꿈, 미련, 그리움, 그리고 미군기지에 대한 원망과 대추리의 부활을 향한 열망이 쓰인 판들이 묻히자, 사람들은 흙을 덮고는 둘레둘레 돌며 주위 흙을 다져나갔다. 그 사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곳곳에서 많은 눈물이 보였다.
이 날 여기 모인 주민들과 지킴이들의 주술행위에는 집터와 고향을 잃은 애절함 이상이 있었다. 지난 3 년 간 한국사회에서 ‘대추리’와 ‘평화’가 사실상 동의어였음을 상기해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참세상>의 최은정 기자는 ‘평화’를 묻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묻었다. 민중미술의 부활을 예고할 것 같은 벽화·조각들도 무너지고 문무인상은 타서 재가 되었으며, 어설펐지만 사랑받았던 노래들이 이제 불릴 곳이 없고 숱한 기록을 남겼던 사진·영상도 찍을 대상이 없어졌으니 ‘예술’도 묻은 셈이다. 삶(대추리)도 묻고, 운동(평화)도 묻고, 영혼(예술)도 묻었으니 모두 다 꾹꾹 묻었다.
사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다시 만날’ 것이라는 의미의 매향제는 현실에서는 이별을 뜻한다. 하늘(예술)과 땅(삶)과 사람(평화)의 이별.
5월 4일 부서진 대추초등학교
“우리 사회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국민 누구나 정부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견의 표출 방식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이어야 합니다.”
2006년 5월 4일 경찰이 대추초등학교를 무너뜨리고 난 이후 한명숙 국무총리는 직접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한명숙 국무총리는 국민의 의견 표출 방식이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것만 강조했지 국가행정기구의 집행방식도 평화적(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점은 철저히 비켜갔다. “모든 당사자들이 한걸음씩 물러나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자”며 중재자인 양 제안했지만, 애초 그녀는 대추초등학교 복원은 커녕 철조망이나 군·경을 철수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국가행정기구(이 점이 중요하다!)의 수장이었고, 이 기구들이 폭력을 조직하고 저지른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민운동 경력은 이 상황에서 매우 유용했다. 그 경력은 평화운동진영 일부에 잠복해 있던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미망을 자극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자제하게 하였다. 또 그 경력은 국가행정기구가 마치 ‘중재자’인 양 보이도록 하여 국방부가 이제는 자신의 손에 더 피를 묻히지 않고도 대추리·도두리를 강제 수용할 수 있게 하였다.
‘농사만 지으면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현실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국방부는 용역과 포크레인을 동원해 물길을 막고 농지를 파헤쳤으며 경찰은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감금했다. 그리고 언론은 불법 점유가 계속되고 있어 큰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논조의 이야기를 계속 흘렸다. 상황이 진전될 기미가 없자 경찰은 자신의 모든 동원 가능한 물리력을 이용해 주민들과 지킴이들을 몰아내었고, 이후 국방부가 평택미군기지 반대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던 대추초등학교를 부술 수 있도록 지켜주었다. 국방부는 경찰이 시위대의 접근을 차단시킨 사이 철조망을 치고 초소를 세웠다. 군경 15,000여명이 몰려들어 1,000~2,000여명의 시위대들을 상대로 이 일을 해치우는 데는 이틀이면 충분했다. 그 사이 시위대 200여명이 다치고, 6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언론은 사태의 폭력적 충돌만을 부각했고, 시위대의 폭력성을 비난하거나 양측의 과잉충돌을 문제삼았을 뿐이다. 사법기관은 연행자들 일부를 구속함으로써 여기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해주었고, 국가기구의 과잉 폭력을 감시한다던 국가인권위원회는 상황을 지켜만 보거나 판단을 미룸으로써 여기에 사실상 면죄부를 제공하였다. 이 모든 일들은 (주도면밀 이라기보다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마치 ‘자동기계’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을 겪고도 평화운동진영 일부에서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며 사태 해결을 위한 ‘사회적 협의기구 구성’을 요구했다. 국가행정기구의 폭력성이 거의 절정에 달한 시점인데도 이들은 이런 유연한(?) 전술로 국가의 폭력성을 추가로(?) 폭로할 수 있다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실상은 기회를 잡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놓치던 중이었다. ‘사회적 협의기구 구성’ 요구는 당시 대추리 상황을 당사자 문제로 축소하는 데 일조했을 뿐이었다. 이 때 드러난 것은 국가의 폭력성이 아니라 평화운동진영 일부의 기회주의성이었다. 국무총리는 태연자약하게 이를 거부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자 일부 명망가들은 급기야 정부와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주민들이 각각 한발씩(!) 양보할 것을 요구했다. ‘평택 대추리·도두리 빈집 철거계획 중단과 정부-주민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각계인사 77인 선언’을 했던 것이다.
평화운동진영이 동요하고 있던 사이 경찰과 국방부는 점점 더 옥쇄를 조여 왔다. 강제토지수용농지이라고 쳐놓은 철조망 안쪽만이 아니라 대추리·도두리 마을의 출입 자체를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추리·도두리 토지 강제수용 문제가 당사자 문제로 축소된 데다 중립기구인 양 가면을 쓰는데 성공한 국가행정기구들은 이제 대추리·도두리를 죽이는데 더 이상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힐 이유가 없었다. 출입을 통제하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이면 그만이었다. 사법기관은 언제나 그랬듯이 국방부의 강제토지수용을 합법적이라며 손들어 주었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번에도 판단을 미루다 대추리·도두리가 모두 고사 당한 뒤에야 경찰 검문은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며 경고를 했을 뿐이었다.
곳곳에서 평화운동진영이 이 옥쇄를 깨뜨리려고, 걷고 선전하며 시민들에게 호소하였지만 상황은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대추초등학교가 어떻게 부서졌는지를 잊기 시작했다. 맨 몸으로 뭇매를 맞으며 버텨야 했던 지킴이의 그 고통, 대나무 하나 들고 대추초등학교 안으로 내몰린 지킴이의 그 아비규환 소리, 검은 진흙을 뒤집어 쓴 채 찢어진 눈가 사이로 피를 흘리며 끌려가던 지킴이의 그 안타까움, 옷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채 연행 당하던 지킴이의 그 수치심, 사지를 뒤로 묶인 지킴이의 그 처절함, 밤늦도록 쫓기며 연행될까 떨어야 했던 지킴이의 그 두려움, 그저 울면서 부서지는 대추초등학교를 바라만 봐야 했던 지킴이의 그 원통함 들을 잊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지난 3년 평화운동의 불씨를 지폈던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운동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5월 18일 평택 대추리 투쟁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그 해 5월 평택 지킴이들은 당시 평택이 처한 상황을 1980년 광주에 빗대었다. 군경의 폭력에 짓밟히고 부서진 평택의 현실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야기한 국가 간 세계질서의 불안정성을 군사주의로 관리하려 드는 지배세력들의 반동성이, 당시 광주의 현실과 한국경제의 급격한 위기상황으로 인한 민중의 불만을 군부 쿠데타로 다스리려던 지배세력의 반동성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불행히도 우리는 당시와 또 다시 똑같이 유비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광주사태’라 불리며 사람들에게 잊혔는데, 지금 평택 대추리와 ‘대추초등학교’의 그 참혹한 붕괴과정도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1980년 5월 27일 총성과 함께 항쟁지도부가 학살당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잊혔다면, 평택평화투쟁은 2006년 한 해 지루한 공방 속에서 고사 당한 채로 잊혔다는 점이다.
우리가 평택평화투쟁을 광주민중항쟁에 빗댄 것이 당시 선열들의 숭고한 투쟁을 그저 한번 빌려보려 했던 것만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1980년대 민중운동이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재평가 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구성해나갔음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면, 우리는 평화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구성하는 첫 페이지에 평택 대추리 투쟁을 각인하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을 벌여나가야 한다.
1980년대 민중운동은 ‘1980년 광주’를, 한편으로는 1970년대 운동의 비극적 유산으로 평가하면서 1970년대 운동에 대한 뼈저린 각성과 함께 ‘과학으로 무장’하고 ‘조직(/민주주의)으로 단결’하자는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 준거점으로 삼아왔다. 또 다른 한편으로 1980년대 민중운동은 광주민중항쟁 당시의 계발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1980년 광주’를 자기 해방의 이념적 분수지로 위치 지워왔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투쟁 의지를 재차 삼차 다짐하여 왔다. 지금까지도 이 운동의 전통은 유효하다. 이 점을 분명히 상기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1980년 잊힌 광주'가 찬란하게 부활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윤상원 열사의 마지막 증언을 이렇게 분명하고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평택 대추리 투쟁’은 정의의 편이었기 때문에 언젠가 ‘부활’할 수 있는가? 10년이고 20년이고 지나면 사람들이 평택 대추리 투쟁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부활할 수 있다면 그것은 ‘평택 대추리’여서가 아니라 평택 대추리 투쟁에 이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이념이 현존하는 평화운동의 이념으로 재구성될 때 부활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부터 전개될 평화운동이 평택 대추리 투쟁을 평화운동의 역사에서 어떻게 위치 지울 것인가 ― 평택 대추리 투쟁의 교훈에서 우리가 무엇을 찾아내고, 이후 어떻게 평화운동을 전개하는가에 따라 ‘평택 대추리 투쟁’을 우리 마음속에 살아 숨쉬는 존재로 기억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평택 대추리 투쟁의 그 처절함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까지 ‘평화운동’에서 우리가 어떤 잘못과 오류를 범했는지를, 평택 대추리 투쟁이 왜 그렇게 가슴 아프게 고사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평화운동’에서 취약한 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평화’를 단지 ‘폭력 없는 상황’이라는 하나마나한 말로 정의하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 문제를 기원하는 한 우리는 이런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평화’를 타협으로 구할 수 있고, 그리하여 극단적인 대립을 회피함으로써만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마찬가지다. ‘평화’를 몇몇 개인의 저항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현실의 평화가 어떻게 위협받고 있는지 그것의 구조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에 의해서 지속되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해체할 수 있는지를 분석하고, 동시에 운동의 차원에서 평화를 어떻게 영속적으로 구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천상을 떠도는 ‘평화주의 이념’을 현실의 운동 차원에서 정확히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오늘날 사회운동에게 어떤 과제로 어떤 위상으로서 위치 지워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이제까지 ‘평화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평화운동이 좀 더 과학적인 분석과 이데올로기적인 비판 위에서 자리매김 될 때, 그리하여 오늘날 자본주의가 ‘무장한 세계화’라는 반동적인 선택을 통해 세상을 절멸로 몰아가고 있는 국면에서 이에 맞서 이를 비판하고, 평화를 향한 머나먼 길에 자신의 발을 구체적으로 내딛게 될 때, 그리하여 평화를 향한 사회운동의 도전이 좀 더 구조화되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명명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때 ‘평택 대추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온전히 부활하게 될 것이다. 평화란 무엇인지를 놓고 근본적으로 되물음으로써 평화에 대한 협소한 이해를 넘게 했던 평택 대추리 투쟁, 더 많은 대중적인 참여와 더 직접적인 대중의 행동을 호소했던 평택 대추리 투쟁, 죽어버린 예술과 예술에 대한 대중의 권리를 새로운 차원에서 밝혀놓은 평택 대추리 투쟁, 주민·농민들과 지킴이·평화활동가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같은 이념적 지향을 밝히려 했던 평택 대추리 투쟁, 바로 그 이름으로 말이다.
“대추리 고향을 떠나게 되는 이 날… 뭐라고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정 때 논밭전답을 빼앗기고… 6·25전쟁 때도 쫓겨… 또 다시 이와 같은 처지에 놓였습니다.”
마을 곳곳이 황폐했다. 집 곳곳에서 나부끼던 노란 깃발은 찢겨져 있었고, 집과 집을 구분하던 벽들은 시와 그림들로 엉기정기 얽힌 채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창틀이든 문지방이든 고물로라도 내다 팔 물건들을 지녔던 것들은 이리저리 뜯긴 채 너부러졌다. 대추리·도두리를 지켰던 문무인상도 타서 재가 되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주민들, 기자들, 활동가들, 문화예술인들 그리고 이리저리 다해서 지킴이들까지… 이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매향제가 진행되었다.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향나무 판이 대추초등학교 운동장 한복판에 묻혔다. 기약할 수 없는 귀향의 꿈, 미련, 그리움, 그리고 미군기지에 대한 원망과 대추리의 부활을 향한 열망이 쓰인 판들이 묻히자, 사람들은 흙을 덮고는 둘레둘레 돌며 주위 흙을 다져나갔다. 그 사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곳곳에서 많은 눈물이 보였다.
이 날 여기 모인 주민들과 지킴이들의 주술행위에는 집터와 고향을 잃은 애절함 이상이 있었다. 지난 3 년 간 한국사회에서 ‘대추리’와 ‘평화’가 사실상 동의어였음을 상기해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참세상>의 최은정 기자는 ‘평화’를 묻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묻었다. 민중미술의 부활을 예고할 것 같은 벽화·조각들도 무너지고 문무인상은 타서 재가 되었으며, 어설펐지만 사랑받았던 노래들이 이제 불릴 곳이 없고 숱한 기록을 남겼던 사진·영상도 찍을 대상이 없어졌으니 ‘예술’도 묻은 셈이다. 삶(대추리)도 묻고, 운동(평화)도 묻고, 영혼(예술)도 묻었으니 모두 다 꾹꾹 묻었다.
사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다시 만날’ 것이라는 의미의 매향제는 현실에서는 이별을 뜻한다. 하늘(예술)과 땅(삶)과 사람(평화)의 이별.
5월 4일 부서진 대추초등학교
“우리 사회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국민 누구나 정부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견의 표출 방식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이어야 합니다.”
2006년 5월 4일 경찰이 대추초등학교를 무너뜨리고 난 이후 한명숙 국무총리는 직접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한명숙 국무총리는 국민의 의견 표출 방식이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것만 강조했지 국가행정기구의 집행방식도 평화적(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점은 철저히 비켜갔다. “모든 당사자들이 한걸음씩 물러나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자”며 중재자인 양 제안했지만, 애초 그녀는 대추초등학교 복원은 커녕 철조망이나 군·경을 철수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국가행정기구(이 점이 중요하다!)의 수장이었고, 이 기구들이 폭력을 조직하고 저지른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민운동 경력은 이 상황에서 매우 유용했다. 그 경력은 평화운동진영 일부에 잠복해 있던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미망을 자극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자제하게 하였다. 또 그 경력은 국가행정기구가 마치 ‘중재자’인 양 보이도록 하여 국방부가 이제는 자신의 손에 더 피를 묻히지 않고도 대추리·도두리를 강제 수용할 수 있게 하였다.
‘농사만 지으면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현실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국방부는 용역과 포크레인을 동원해 물길을 막고 농지를 파헤쳤으며 경찰은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감금했다. 그리고 언론은 불법 점유가 계속되고 있어 큰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논조의 이야기를 계속 흘렸다. 상황이 진전될 기미가 없자 경찰은 자신의 모든 동원 가능한 물리력을 이용해 주민들과 지킴이들을 몰아내었고, 이후 국방부가 평택미군기지 반대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던 대추초등학교를 부술 수 있도록 지켜주었다. 국방부는 경찰이 시위대의 접근을 차단시킨 사이 철조망을 치고 초소를 세웠다. 군경 15,000여명이 몰려들어 1,000~2,000여명의 시위대들을 상대로 이 일을 해치우는 데는 이틀이면 충분했다. 그 사이 시위대 200여명이 다치고, 6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언론은 사태의 폭력적 충돌만을 부각했고, 시위대의 폭력성을 비난하거나 양측의 과잉충돌을 문제삼았을 뿐이다. 사법기관은 연행자들 일부를 구속함으로써 여기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해주었고, 국가기구의 과잉 폭력을 감시한다던 국가인권위원회는 상황을 지켜만 보거나 판단을 미룸으로써 여기에 사실상 면죄부를 제공하였다. 이 모든 일들은 (주도면밀 이라기보다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마치 ‘자동기계’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을 겪고도 평화운동진영 일부에서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며 사태 해결을 위한 ‘사회적 협의기구 구성’을 요구했다. 국가행정기구의 폭력성이 거의 절정에 달한 시점인데도 이들은 이런 유연한(?) 전술로 국가의 폭력성을 추가로(?) 폭로할 수 있다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실상은 기회를 잡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놓치던 중이었다. ‘사회적 협의기구 구성’ 요구는 당시 대추리 상황을 당사자 문제로 축소하는 데 일조했을 뿐이었다. 이 때 드러난 것은 국가의 폭력성이 아니라 평화운동진영 일부의 기회주의성이었다. 국무총리는 태연자약하게 이를 거부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자 일부 명망가들은 급기야 정부와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주민들이 각각 한발씩(!) 양보할 것을 요구했다. ‘평택 대추리·도두리 빈집 철거계획 중단과 정부-주민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각계인사 77인 선언’을 했던 것이다.
평화운동진영이 동요하고 있던 사이 경찰과 국방부는 점점 더 옥쇄를 조여 왔다. 강제토지수용농지이라고 쳐놓은 철조망 안쪽만이 아니라 대추리·도두리 마을의 출입 자체를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추리·도두리 토지 강제수용 문제가 당사자 문제로 축소된 데다 중립기구인 양 가면을 쓰는데 성공한 국가행정기구들은 이제 대추리·도두리를 죽이는데 더 이상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힐 이유가 없었다. 출입을 통제하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이면 그만이었다. 사법기관은 언제나 그랬듯이 국방부의 강제토지수용을 합법적이라며 손들어 주었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번에도 판단을 미루다 대추리·도두리가 모두 고사 당한 뒤에야 경찰 검문은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며 경고를 했을 뿐이었다.
곳곳에서 평화운동진영이 이 옥쇄를 깨뜨리려고, 걷고 선전하며 시민들에게 호소하였지만 상황은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대추초등학교가 어떻게 부서졌는지를 잊기 시작했다. 맨 몸으로 뭇매를 맞으며 버텨야 했던 지킴이의 그 고통, 대나무 하나 들고 대추초등학교 안으로 내몰린 지킴이의 그 아비규환 소리, 검은 진흙을 뒤집어 쓴 채 찢어진 눈가 사이로 피를 흘리며 끌려가던 지킴이의 그 안타까움, 옷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채 연행 당하던 지킴이의 그 수치심, 사지를 뒤로 묶인 지킴이의 그 처절함, 밤늦도록 쫓기며 연행될까 떨어야 했던 지킴이의 그 두려움, 그저 울면서 부서지는 대추초등학교를 바라만 봐야 했던 지킴이의 그 원통함 들을 잊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지난 3년 평화운동의 불씨를 지폈던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운동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5월 18일 평택 대추리 투쟁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그 해 5월 평택 지킴이들은 당시 평택이 처한 상황을 1980년 광주에 빗대었다. 군경의 폭력에 짓밟히고 부서진 평택의 현실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야기한 국가 간 세계질서의 불안정성을 군사주의로 관리하려 드는 지배세력들의 반동성이, 당시 광주의 현실과 한국경제의 급격한 위기상황으로 인한 민중의 불만을 군부 쿠데타로 다스리려던 지배세력의 반동성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불행히도 우리는 당시와 또 다시 똑같이 유비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광주사태’라 불리며 사람들에게 잊혔는데, 지금 평택 대추리와 ‘대추초등학교’의 그 참혹한 붕괴과정도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1980년 5월 27일 총성과 함께 항쟁지도부가 학살당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잊혔다면, 평택평화투쟁은 2006년 한 해 지루한 공방 속에서 고사 당한 채로 잊혔다는 점이다.
우리가 평택평화투쟁을 광주민중항쟁에 빗댄 것이 당시 선열들의 숭고한 투쟁을 그저 한번 빌려보려 했던 것만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1980년대 민중운동이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재평가 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구성해나갔음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면, 우리는 평화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구성하는 첫 페이지에 평택 대추리 투쟁을 각인하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을 벌여나가야 한다.
1980년대 민중운동은 ‘1980년 광주’를, 한편으로는 1970년대 운동의 비극적 유산으로 평가하면서 1970년대 운동에 대한 뼈저린 각성과 함께 ‘과학으로 무장’하고 ‘조직(/민주주의)으로 단결’하자는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 준거점으로 삼아왔다. 또 다른 한편으로 1980년대 민중운동은 광주민중항쟁 당시의 계발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1980년 광주’를 자기 해방의 이념적 분수지로 위치 지워왔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투쟁 의지를 재차 삼차 다짐하여 왔다. 지금까지도 이 운동의 전통은 유효하다. 이 점을 분명히 상기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1980년 잊힌 광주'가 찬란하게 부활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윤상원 열사의 마지막 증언을 이렇게 분명하고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평택 대추리 투쟁’은 정의의 편이었기 때문에 언젠가 ‘부활’할 수 있는가? 10년이고 20년이고 지나면 사람들이 평택 대추리 투쟁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부활할 수 있다면 그것은 ‘평택 대추리’여서가 아니라 평택 대추리 투쟁에 이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이념이 현존하는 평화운동의 이념으로 재구성될 때 부활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부터 전개될 평화운동이 평택 대추리 투쟁을 평화운동의 역사에서 어떻게 위치 지울 것인가 ― 평택 대추리 투쟁의 교훈에서 우리가 무엇을 찾아내고, 이후 어떻게 평화운동을 전개하는가에 따라 ‘평택 대추리 투쟁’을 우리 마음속에 살아 숨쉬는 존재로 기억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평택 대추리 투쟁의 그 처절함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까지 ‘평화운동’에서 우리가 어떤 잘못과 오류를 범했는지를, 평택 대추리 투쟁이 왜 그렇게 가슴 아프게 고사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평화운동’에서 취약한 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평화’를 단지 ‘폭력 없는 상황’이라는 하나마나한 말로 정의하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 문제를 기원하는 한 우리는 이런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평화’를 타협으로 구할 수 있고, 그리하여 극단적인 대립을 회피함으로써만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마찬가지다. ‘평화’를 몇몇 개인의 저항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현실의 평화가 어떻게 위협받고 있는지 그것의 구조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에 의해서 지속되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해체할 수 있는지를 분석하고, 동시에 운동의 차원에서 평화를 어떻게 영속적으로 구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천상을 떠도는 ‘평화주의 이념’을 현실의 운동 차원에서 정확히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오늘날 사회운동에게 어떤 과제로 어떤 위상으로서 위치 지워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이제까지 ‘평화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평화운동이 좀 더 과학적인 분석과 이데올로기적인 비판 위에서 자리매김 될 때, 그리하여 오늘날 자본주의가 ‘무장한 세계화’라는 반동적인 선택을 통해 세상을 절멸로 몰아가고 있는 국면에서 이에 맞서 이를 비판하고, 평화를 향한 머나먼 길에 자신의 발을 구체적으로 내딛게 될 때, 그리하여 평화를 향한 사회운동의 도전이 좀 더 구조화되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명명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때 ‘평택 대추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온전히 부활하게 될 것이다. 평화란 무엇인지를 놓고 근본적으로 되물음으로써 평화에 대한 협소한 이해를 넘게 했던 평택 대추리 투쟁, 더 많은 대중적인 참여와 더 직접적인 대중의 행동을 호소했던 평택 대추리 투쟁, 죽어버린 예술과 예술에 대한 대중의 권리를 새로운 차원에서 밝혀놓은 평택 대추리 투쟁, 주민·농민들과 지킴이·평화활동가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같은 이념적 지향을 밝히려 했던 평택 대추리 투쟁, 바로 그 이름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