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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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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_대안세계화_김선희.hwp

신자유주의와 지속 불가능한 성장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쟁점

김선희 |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
[편집자 주: 최근 한․미 FTA 협정문이 공개된 가운데, FTA를 둘러싼 논쟁의 제2 라운드가 시작될 전망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항목 하나하나에 시선을 두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진정 중요한 쟁점은 FTA 추진 세력들이 제시하는 󰡐전망󰡑이자 󰡐약속󰡑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한․미 FTA를 통해 직접투자가 더욱 촉진되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으로 미국의 선진 기술이 보급될 것이고, 이는 성장과 효율성, 수익성을 제고를 가져 올 것이라는 전망. 또 자유무역과 󰡐비교우위󰡑 원리에 따라 세계적 분업 체계에 적응하면 산업의 경쟁력이 제고되며,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구조조정과 낙후산업의 폐쇄는 경쟁력을 갖춘 산업의 이익에 의해 충분히 상쇄될 수 있다는 약속이 그것이다.
이는 사실 말 그대로 전망이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옳고 그름을 판정하기가 어렵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FTA가 신자유주의를 관철하는 정책 수단 중 하나라는 점을 고려할 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자유화?개방화를 받아들인 나라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역사와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그 양상은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분석한다면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선택한 나라는 아르헨티나다. 아르헨티나는 1980년대 초반에 발생한 외채 위기 때문에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경제 불황을 겪었는데, 1990년대 들어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면화하면서 1991년~1998년 사이의 평균 성장률이 5.2%에 이르는 등, 상당한 회복세를 보인다. 이 때문에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아르헨티나는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들어 다시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아르헨티나는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이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점, 그러나 그것이 지속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사례다.
이에 『사회운동』 편집국에서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아르헨티나와 한국 양국의 과거 권위주의 청산 과정을 비교연구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동포 김선희씨를 찾아가 인터뷰를 청했다. 이 자리를 빌어 김선희씨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참고로 아래 아르헨티나 경제에 관한 추가 설명은 G?rard Dum?nil and Dominique L?vy, Argentina's Unsustainable Growth Trajectory: Center and Periphery in Imperialism At The Age of Neoliberalism, 2006(http://www.jourdan.ens.fr/~levy/dle2006j.htm)을 주로 참고했다.]


사회운동: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990년대 내내 신자유주의 정책이 전면화됐다는 점에서, 최근 아르헨티나가 겪은 경제 위기에대한 신자유주의의 책임을 면제시킬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얘기하면 신자유주의자들은, 이 같은 문제는 신자유주의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었던 아르헨티나 경제의 자체 모순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컨대 페론 시절의 포퓰리즘이나 수입대체공업화의 모순 등이 진정한 문제이고,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신자유주의는 역부족이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때문에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르헨티나 경제가 본격적인 위기에 빠지게 된 80년대 초 외채 위기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선희: 물론 아르헨티나 경제의 내적 모순이 전혀 없었다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그렇지만 80년대 초 외채 위기에 관해서 보자면, 그 일차적 책임은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권의 경제 정책,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조장한 국제 금융 자본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국제 금융 자본부터 얘기하자면요. 아르헨티나와 다른 제3 세계 국가들은 1960~70년대부터 외채를 끌어들이기 시작하는데, 60년대에는 주로 유럽 은행들이, 70년대에는 주로 미국 은행들이 대출을 해 줍니다. 특히 70년대의 경우 신자유주의가 시작되면서 금융화가 본격화된 시기로, 제3 세계에 유입된 금융은 투기성이 매우 높은 것이었습니다. 또 당시 미국에서는 외채 정책을 통해 제3 세계에 대한 주도권을 잡으려는 전략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1976년 군사 정권이 쿠데타로 집권합니다. 이들이 집권한 1976년부터 외채가 급격히 증가하여, 1978년 말이 되면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의 부채가 각각 세 배와 두 배 가량 증가하고, 2001년이 되면 이전 외채의 20배에 달하게 되지요.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이 외채가 불법적이고 정통성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시기에 엄청난 자본 도피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역자: 실제로 한 보고서는 1979~82년 사이 224억 달러가 빠져나간 것으로 추산한 바 있는데 이는 당시 외채 규모와 맞먹는 수치다.]
그런데 이 같은 외채의 증가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당시 정부의 경제 기조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군사 정권은 이전의 수입대체산업화 모델을 대체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경제를 자유화?개방화하려고 합니다. 이로써 자원 배분에서 시장의 헤게모니를 복구하고, 국가의 경제 개입을 제한하며, 인플레이션을 막고, 국제 수지 균형을 달성하는 것 등을 목표로 삼았지요. 또 경제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비교 우위·를 이용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국내 시세를 외국 시세와 동일시하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비효율적인 부문은 국내시장에서 수입품으로 대체되고, 효율적인 부문은 성장하여 경쟁적이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김선희

그런데 이 같은 개방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환 보유고가 증가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미국 정부 및 은행들과의 합의 아래 진행된 것이고, 실제로 당시 정권은 북미 민간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기 위하여 국내 공기업에게 빚을 지도록 강요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와 함께 1970년대의 세계적인 자본 과잉, 그리고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사실상 무이자에 가까운 저금리 상황도 라틴 아메리카 외채가 증가한 한 이유일 것이다. 이 같은 자본 과잉의 가장 근본적 원인은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들의 산업자본에서 이윤율이 저하한 것으로, 이 때문에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본들이 금융 세계화를 개시하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오일 쇼크' 때문에 석유 달러가 많아지고, 미국이 무역과 재정의 쌍둥이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달러를 마구 찍어낸 것도 한 이유가 된다. 이 같은 조건 아래서 은행을 중심으로 한 국제 금융 자본은 장기 저리의 자본을 미끼로 라틴 아메리카를 비롯한 반주변 국가들을 금융 세계화에 편입시킨다.
그리고 1979년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에 폴 볼커(Paul Volker)가 취임하면서 인플레이션을 공공의 적 1호로 지목하고 급격한 금리 인상 정책을 도입하는 이른바 '1979년 쿠데타'가 발생한다. 이처럼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으로 전 세계 금융 자본이 집중되면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에 빌린 외채의 이자율도 덩달아 급상승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금융 위기에 빠져든다. 개별 국가들의 내적 문제가 없진 않았겠지만, 위기의 출현이 매우 급격했고 많은 국가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8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외채 위기는 국제적 금융 조건, 또는 차라리 금융 자본의 세계적 공세를 도외시하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사회운동: 그러니까 군사 정권 들어서 아르헨티나가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금융화 메커니즘에 말려들었고, 그 결과 외채 위기가 발생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런 점에서 70년대 말 군사 정권을 아르헨티나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사(前史)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만 신자유주의를 가장 체계적이고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은 아무래도 1990년대의 메넴 정권일 텐데요. 당시 상황에 대해서 좀 듣고 싶습니다.

김선희: 아시다시피 알폰신 정권은 1989년도에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됩니다. 1989년 메넴의 임기가 시작하기 전 상황에 대해서 몇 가지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갑자기 밤에 총소리가 나더니 개들이 짖어대고 사람들도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학교 가는 길에 보니 집 근처 식료품 가게의 셔터가 강제로 열려 휘어졌더군요. 나중에 들으니 그 전날 밤에 몇몇 사람들이 그 가게에 쳐 들어와 식료품과 현금을 훔치고, 경찰이나 상점 주인한테 추격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런 일이 한동안 매일같이 반복되었습니다. 또 기억나는 것은 몇 주 사이에 새로운 화폐가 4~5종이나 나왔던 것입니다. 인플레이션은 상품에 붙어 있는 가격표의 급속한 변화에서뿐만 아니라 화폐의 변화로 명시화될 정도였습니다.
메넴은 이 같은 상황에서 집권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당시 사람들이 느끼던 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강력한 반인플레이션 기조를 내세우게 됩니다. 이와 함께 민영화, 탈규제, 탈중앙집중화 등을 표방하지요. 아르헨티나는 선진국으로 갈 것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다 라는 식의 선전과 함께 말이지요.
탈중앙집중화의 경우 핵심은 각 주(州)에 재정적 책임을 떠넘기는 것인데, 사실 돈이 제대로 들어오는 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정도거든요. 각자 알아서 살라는 얘기지요. 또 민영화의 경우, 흔히 쓰는 말로 정말 졸속적으로, 규제 없이, 헐값에, 그것도 더 팔 게 없다고 할 정도로 다 팔았습니다. 당시에 보면, 국가 기업은 적자만 내고 비효율적이다, 서비스 수혜자들도 불평이 많다는 식의 얘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국영 기업들이 다 적자는 아니었거든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이른바 '태환 정책'(Convertibility Plan)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역자: 1991년 당시 메넴 정부는 기존 화폐인 아우스트랄과 미 달러의 교환비율을 10,000 대 1로 고정시킨 후 태환법을 제정해 고정환율제를 법적으로 보장한다. 이와 함께 외환거래에 관한 모든 규제를 철폐하여 국내 통화의 가치를 보장했으며, 나아가 1992년 1월 1일을 기해 '10,000 아우스트랄 = 1페소' 비율로 아우스트랄을 페소로 대체함으로써 '1페소 = 1달러'의 등가교환 시대가 열린다.] 사실 이 정책을 위해서 위의 조치들이 다 동반됐다고 볼 수도 있거든요.
태환 정책은 몇 가지 전제 및 조치를 동반합니다. 우선 고정된 환전 평가를 위해서는 유통되는 통화의 총액이 보증되어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물가의 안정성을 추구했구요. 둘째로 무역 개방과 이로 인한 외부 경쟁을 통해 민간 부문을 규율시켜 상품 가격이 증가하는 것을 막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국가 개혁, 특히 민영화 계획이 추진되는데, 이를 통해 지출을 줄이고 정규 수입을 증대시킴으로써 재정 수지의 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듯 태환 정책은 단순히 인플레이션을 감소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으로 구조조정을 심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화폐 정책과 재정 정책을 비롯하여, 경제에 대한 국가의 전통적 정책 수단들이 근본적으로 제한되지요.


태환 정책의 핵심적 수단은 통화위원회(currency board)였다. 그 원리는 간단히 말해, 달러와 페소의 태환을 보장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오는 달러 양만큼 페소를 찍어내고, 나가는 달러 양만큼 페소를 거둬들이는 것이다. 이런 정책 목표를 위해 중앙은행이 독립되며, 달러-페소 태환성을 유지하기 위한 지불준비금 확보가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되기 때문에 일체의 공적 지출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이처럼 중앙은행을 필두로 한 은행 개혁이 진행된다. 한 편으로 외국 은행 설립의 제한을 폐지하면서, 다른 편으로 태환 정책의 실현을 제1 기준으로 전체 은행을 규제한다. 이에 따라 자본 여건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부과되고, 지불 준비금이 40% 수준으로 고정된다. 이 때문에 은행의 대부와 신용 창출 자체가 크게 제약된다. 1991~1999년 사이에 은행의 숫자는 167개에서 119개로 줄어들었고, 그 중 공적 은행 숫자는 35개에서 16개로 줄어든다.
당시 이 같은 급진적 신자유주의 정책을 뒷받침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데올로기였다. 곧 아르헨티나처럼 규모가 작고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나라는 자신의 거시 경제를 '붙들어 매기' 위해 미국과 같은 '큰 형님'의 금융 시스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경제 위기로 극적으로 드러나듯, 미국의 금융 제도는 아르헨티나 거시경제 상황의 요구가 아닌, 자신의 수익성을 비롯한 자체적 판단에 따라 움직인다. 이 같은 이데올로기는 아르헨티나의 거시경제 상황에 대한 통제 수단의 상실, 그리고 경기순환 진폭의 격화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와 함께 물가 안정을 위한 엄격한 임금 통제, 수출입에 대한 세금과 의무 폐지를 골자로 하는 무역 자유화, 그리고 연금의 사유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이 전면 실시된다.


사회운동: 90년대 경제 상황은 어땠습니까?

김선희: 저로선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메넴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그의 집권을 전후해서 아르헨티나 경제가 상당히 좋았던 게 사실입니다. 태환 정책을 쓰면서 외국 자본이 상당히 들어왔구요. 또 수출은 잘 안 됐지만, 페소화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외국의 물건들이 싼 값에 수입되었습니다. 또 강력한 반인플레이션 정책을 쓰다 보니까 화폐 가치가 안정되어 중산층들의 구매력이 회복됐지요. 그런 점에서 소비 면에서는 상당히 풍요로웠다고 할 수 있고, 이런 향수 때문에 아직까지도 중산층 사이에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시기 경제 성장에서 주목할 점은, 그것이 체계적으로 부채를 증가시키는 구조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90년대 들어 회복된 자본 축적은 대개 높아진 페소화의 구매력에 따른 해외 자본재 수입 증가에 기초한 것이었는데, 자본재 수입을 위해서는 차입이 필요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태환 계획 및 은행 규제 때문에 국내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고, 이 때문에 주로 해외 금융으로부터 부채를 끌어오는 상황이 벌어진다. 부채를 지더라도 이렇게 구입한 자본재로써 성장이 이루어지면 부채를 갚을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불안하게 믿으면서.


사회운동: 신자유주의 정책의 도입은 정치나 국가, 이데올로기의 전반적인 변화도 동반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신자유주의 시대 새로운 인민주의의 대표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사람이 메넴인데, 메넴 식 정치 행태가 어땠는지 듣고 싶습니다.

김선희: 메넴은 기본적으로 인물 자체가 카리스마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넴의 정치 행태를 가리키는 '임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의회를 거쳐서 법률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과 재량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고, 모든 권력이 한 사람한테 집중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또 중요한 것은 메넴이 페론당이었다는 점입니다. 이건 아르헨티나의 다소 특수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페론당이면 일단 기본 지지율이 높습니다. 더구나 메넴이 등장한 것은,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라디깔당마저 실패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더 지지율이 높았지요. 그런데 집권 후에는 대중들이 기대하는 정책을 펴지 않았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대학을 다닐 때 수업 시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기득권은 왜 페론당인 메넴을 정권에다 앉혔는가, 그것은 '페론이 시작한 것을 메넴이 끝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페론이 활성화시켰던 민중을 메넴이 수동화시켜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메넴은 성공한 것 같아요. 그만큼 국민들 대다수가 지지를 했습니다. 당연히 시위도 있었고 반대하는 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메넴 정권 말기에나 가야 그런 모습이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노동자들도 메넴파와 반메넴파로 분열되었습니다.


메넴은 선거 초반만 해도 페론주의 개혁파를 대표했다. 그는 국가 주도적 경제발전과 재분배를 선거공약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 당선과 동시에 페론주의적 수사를 완전히 철회하고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로 나선다.
이 과정에서 메넴은 모든 국가권력을 대통령 개인과 행정부에 집중시킨다. 특히 그는 의회를 우회하는 포고령을 즐겨 사용했는데, 아르헨티나가 독립한 1853년부터 1989년까지 총 25건의 포고령이 공포된 반면, 메넴은 1989년 7월부터 1994년 8월까지 무려 336건의 포고령을 공포한다.


사회운동: 그랬군요. 다시 경제 얘기로 돌아가 보죠. 이렇게 어느 정도 모범적인 것이라고까지 평가되던 경제가 2000년대 들어 다시 위기를 맞게 되지 않습니까. 사실 얼핏 보면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면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정책적인 실패도 있었을 테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뭔가 메넴 시절 잘 나갔던 경제 어딘가에 모순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짐작이 드는데요. 그에 관해서 얘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선희: 태환 정책이 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낮은 이자율의 해외 자본 공급, 외채의 재협상 등 유리한 국제 상황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국제 상황의 변화에 무척 취약할 수도 있는데, 예컨대 아르헨티나 경제의 성장률은 1995년 멕시코 위기와 1999년 브라질 위기와 같은 국제위기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또 태환 정책의 실행 이후 4년 동안의 경제 성장은 국내 소비의 확대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이 역시 외국 자본의 도입으로 인한 통화 공급의 확장, 소비를 위한 신용의 재등장 등으로 가능했지요.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내 저축 금액은 점점 떨어지고, 무역 수지의 적자는 점점 높아져 갔습니다.
또 앞서 지적한 것처럼 수출이 수입보다 많았기 때문에 무역수지는 기본적으로 적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들어온 외국자본 덕분에 국가의 준비금은 증대되었던 것인데요.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구요. 또 민간과 국가의 부채가 점점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90년대 아르헨티나 경제의 회복은 전적으로 해외 자본 유입에 의존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아르헨티나 경제가 다시 위기에 빠진 것은, 이 같은 자본 유입이 지속적이고 안정적이지 않았다는 것, 즉 해외 자본은 투자 대상국을 보살펴 주는 '큰 형님'이 아니었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다. 금융 세계화 시대의 자본은 투자 대상국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어려울 때 함께 손해를 참으며 새로운 호황을 기다리는 따위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 특히 금융 자본은 한 번도 그런 동기에 따라 행동한 적이 없었지만, 과거에는 노동자들의 권리나 조직, 국가의 제도 등으로 물질화 된 세력 관계에 의해 이들을 일정하게나마 제약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금융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이 세력 관계가 금융 자본 쪽으로 완전히 역전되고 이들을 제약할 수 있는 수단이 완전히 제거된 상황에서, 금융 자본은 상황이 나빠지면 아무런 제한 없이 자본을 철수하고 이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물론 상황이 좋아진 다음 ― 그 전이 아니라 ― 다시 들어와서 경기를 과열시키고 거품을 만들어내겠지만. 자본 유치를 독립변수로 놓고 경기 활성화를 종속변수로 놓는 신자유주의적 사고는 독립변수와 종속변수를 완전히 혼동한다. 구조조정을 목표로 한 자본 유치는 오히려 성장을 떨어뜨린다. 또 금융화 된 자본의 유입은 경기순환의 진폭을 한층 크게 만들 뿐, 침체된 경제를 일으키거나 경제의 침체를 조절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해외 자본의 운동은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국내 자본의 운동은 어떤가? 국내 경제가 구조적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국내 자본은 자산을 자국 내에 투자하는 대신 해외 자산에 투자('자본 도피')하고, 축적과 설비 투자에 쓸 자본은 차입한다. 이렇게 되면 설사 국내 경제가 위기에 빠지더라도 자신들의 자산은 해외에서 안전하게 보호되며, 설비 투자를 위한 부채는 국가 개입을 통해 사회 전체로 분산된다. 이 때문에 축적에 융자하기 위한 차입과 자본의 유출이 나란히 발생한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반)주변부의 자본은 해당 지역의 경제 상황과 무관하게 꾸준히 중심으로 이동하며, 그 대부분은 미 재무성 증권 등 정부 자산에 대한 간접투자다. 혹자는 이를 󰡐부패󰡑라고 부르지만, 사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위험을 분산하고 수익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다. 결국 위기는 계급에 따라 차별적으로 경험되며, 금융 세계화에 편입한 자본가들은 국내 경제의 부침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자산을 보존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해외 자본과 국내 자본 가릴 것 없이 금융화에 동참하여 일상적으로, 그리고 위기 시에는 더욱 급격하게 해외로 유출되기 때문에, (반)주변부의 경제는 더욱 악화되고 경기순환의 진폭은 더욱 격렬해진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책적 수단마저 무력화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새로운 직접투자의 물결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으로 외국 기술을 보급하고, 이로써 성장과 효율성, 수익성이 제고되며,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이자율이 충분히 상쇄된다는 신자유주의의 약속은 금융 세계화 시대에 애초부터 지켜질 수 없는 것이었다. 자유무역과 󰡐비교우위󰡑 원리에 따라 세계적 분업 체계에 적응하면 산업의 경쟁력이 제고되며,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구조조정과 낙후산업의 폐쇄는 경쟁력을 갖춘 산업의 이익에 의해 충분히 상쇄될 수 있다는 논리 역시 마찬가지다.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손 치더라도 재분배 장치가 파괴되고 자본 도피가 일반화되는 상황에서 그 이익은 전체 민중의 것이 될 수 없다.


사회운동: 현재 아르헨티나의 사회적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김선희: 현재 아르헨티나는 실업률이 매우 높고 빈곤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러다 보니 민주주의보다 과거 권위주의가 더 낫다 이런 얘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것은 특히 경제 위기가 치안의 악화나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지는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대낮에도 강도 사건이 비일비재한데, 저도 당한 적이 있고 제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하다 보니, 사람들 중에서는 그나마 군사 정권에서는 규율이 엄격해서 범죄율이 낮았다는 식의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민주주의보다 권위주의가 낫다는 얘기가 나오곤 합니다. 현재 한국의 상황도 보면, 3~4년 전까지만 해도 범죄율이 낮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최근 들어 굉장히 높아진 걸 보면 그런 면에서 한국도 세계화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사회운동: 긴 시간 동안 아르헨티나 상황에 관해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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