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6.75호

87년 6월, 기억 속의 몇 장의 사진과 넋두리

박하순 | 공동운영위원장
20년 전 6월 10일, 명동성당 청년단체 연합회 소속 조그만 단체의 회원이자 증권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었던 나는 시청에서 열리기로 했던 6·10 국민대회(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결성 이후 첫 국민대회)에 참가하려 했다가 하루 종일 최루탄과 백골단을 피해 이리저리 쫓겨 다녔다. 물론 국민대회는 보지도 못했다. 당시엔 오늘날처럼 합법적으로 집회신고를 하고 성대하게 국민대회를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어서, 중간에 성공회교회 안에서 국본 주요 지도자들 몇 분이 모여 국민대회를 치렀다는 소식을 듣고 그래도 대회는 치렀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을지로 입구 근처에서 텅 빈 거리를 보며 오늘 투쟁도 이걸로 끝나나 하며 아쉬워하고 있던 차, 퇴계로에선 아직 싸움이 진행 중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급히 퇴계로로 달려갔다.

깨진 돌과 돌을 실어 나르는 데 쓰인 리어카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많은 시위대들로 거리는 어지러웠지만 퇴계로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다. 그리고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진압경찰을 격퇴시키기 위해 여기저기서 날아다니는 화염병으로 거리는 오히려 환했다. 여길 못 들르고 집에 갔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뒤 시위대는 조금 더 싸운 뒤 자연스럽게 명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명동성당이 퇴계로와 거리도 가까운 까닭도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명동성당과 천주교회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발언과 행동을 곧잘 했기 때문에 시위대가 명동성당을 자연스럽게 농성 장소로 선택한 듯하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니던 복음주의적 개신교회를 대학에 온 후 어렵게 작파하고 교회를 한동안 다니지 않다가 군대에서 ‘졸병’의 권유가 있었긴 하지만 부대 근처 가까운 천주교회인 명동성당엘 나가기 시작한 데에도 천주교회와 명동성당의 이런 모습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6월 항쟁의 시작은 이랬다. 물론 이 날이 있기까지는 광주항쟁 이후 야당과 재야 및 학생운동 세력의 지속된 투쟁이 있었다. 굵직굵직한 것만 꼽아보아도 김영삼 26일 단식사건, 미 문화원 점거 투쟁, 신민당 결성 및 2·12 총선 투쟁과 개헌현판식 투쟁, 인천 대우자동차 투쟁, 구로 동맹파업 투쟁, ‘서울대 연합시위 사건’, ‘인천 사태’와 이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일어난 권인숙씨 성고문에 대한 규탄 투쟁, 대학생 전방입소 거부 투쟁, ‘건대 사태’,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투쟁’ 등 무수하다. 이런 투쟁이 있을 때마다 정권이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 등을 통해 ‘공장과 학원가에 침투한 좌경용공 세력’ 운운하며 반공이데올로기를 전 국민에게 주입시켜도 투쟁은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조직이 생겼으며, 꼭 열혈 활동가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투쟁 과정에서 경찰서와 감옥엘 들락거려야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투쟁은 두 차례(1987년 2월 7일, 3월 3일) 열렸는데 이 때 경찰에 잡혀 들어간 시위대 숫자가 각각 3~4천 명을 족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내가 운동조직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서 조직내외를 오가는 중요한 정보들을 접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어서 정확한 이야기는 아닐 수 있겠으나, 명동성당 농성은 요즘의 농성처럼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한다. 물론 농성자들 중에 일부 그런 생각을 가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당시에는 심야 투쟁이 일반적이어서 그 자연스러운 연장으로 농성 투쟁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리고 이후 중요한 투쟁 시기까지 투쟁 에너지를 이어간다는 정도로 농성 투쟁을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나도 농성 첫날을 함께 했는데, 선전홍보나 농성단 뒷바라지 등을 명동성당 청년단체 연합회원들이 분담했던 것만 보아도 농성 주체들이 사전에 튼튼히 준비된 것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동성당 농성을 지속하여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를 철회시키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지 않았나 싶다. 당연히 국본 주요 관계자들이 결합하거나 결합하게 하려는 노력조차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농성 시작 초기에는 성당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긴 했지만 들어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들어올 수는 있었고, 명동성당 안에 들어온 사람들도 ‘문화관’에서 농성을 하는 농성대오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것은 아니었다.

지나가는 이야기이지만, 명동성당 농성 대오에서 한 명의 ‘스타’를 배출했는데, 바로 아직도 활동을 하고 계시는 ‘명동 할아버지’ 이천재 선생이시다. 그는 젊은 사람들 속에 있는 몇 안 된 나이 드신 분이었고 머리가 하해서 쉽게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연설 솜씨나 발언 내용이 빼어나 농성단 안에서 유명해졌다. 그 분은 농성단 첫날 회의에서부터 매우 조리 있고 내용 있는 발언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는데, 초자 활동가인 나에겐 매우 인상적이었다. 명동성당 청년단체에서 배정받은 선전홍보팀의 일원으로 밤에 잠깐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난 첫날 농성을 하고 아침에 명동성당을 나와 을지로 입구 근처 회사에 출근했다가 퇴근 후 비밀스러운 길을 따라 명동성당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아직도 내 머리 속에 선명한 사진으로 박혀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명동성당 주변 을지로 등지에는 명동성당으로 들어가려는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낮부터 공방이 있었고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다. 당연히 길거리에는 사람들도 평소보다 적었다. 그런데 어렵게 성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성당 마당의 하얀 돌과 벽돌들 위로는 아직 채 지지 않은 6월의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앉거나 혹은 서거나 각자 자유로운 포즈로 약간의 승리감에 젖어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여기저기서 지원을 해서인지 성당 마당 여기저기 빵이 널려 있거나 쌓여 있거나 했다. 자욱하고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뒤덮인 바깥 거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성당 안의 평화롭고 안온한 분위기. 한마디로 명동성당은 또 다른 해방구였던 것이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서 오현우와 한윤희가 숨어살던 갈뫼의 분위기와 비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끄러운 세상과 격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지극한 평화와 안온이라는 면에서 말이다. 아무튼 투쟁으로 쟁취한, 그리고 투쟁열기가 가득했던 해방구 퇴계로와 명동성당 안의 평화로운 해방구, 둘 다 87년 투쟁에서 잊지 못할 장면이다.

앞에서도 약간 비쳤지만, 당시의 투쟁은 요즘처럼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정리 집회를 하는 식의, 일정한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의식(儀式)처럼 진행하는 박제화된 집회나 투쟁이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경찰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싸웠고, 을지로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퇴계로나 종로에서도 열심히 싸우고 있겠지’ 하며 싸웠고, 퇴계로나 종로에 있는 사람들은 ‘을지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 하고 싸웠다. 그리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신나게 싸웠다. 멀리 있는 백골단에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흡사 멋들어진 춤사위였고, 얼굴 표정은 자기가 세운 계획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표정, 즉 결의와 성취감이 교차하는 표정 딱 그것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신나게 열심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긴 하지만 확실히 최루탄과 백골단의 공이 컸다. 싸우다 운이 없으면 잡히기야 하겠지만 앞에서 날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과 그 책임자인 파쇼 전두환을 그냥 두고 뒤돌아 집에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87년 이후 도입된, 신고만으로 합법집회가 가능하게 된 집회신고제, 백골단 해체, 최루탄 미사용 등의 제도 변화나, 문민정권의 등장과 같은 일들은 민주적 공간을 넓힌 계기이기도 하지만 운동세력을 순치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후자의 측면이 훨씬 더 커 보인다. 그런데도 운동세력은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분위기 속에서 별 생각 없이 순치의 길을 달려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한 당시의 집회나 투쟁은 이렇다 할 의식(儀式)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의식을 모르는 일반 시민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거리낌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요즘, 조직원만의 모임이 아니라 대중 집회나 대중투쟁이 의식(儀式)처럼 진행되는 것은 문제다. 의식(儀式)이 새로운 사람들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수단이 되지는 않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연단, 연설, 노래, 동작, 행진, 깃발, 투쟁방식 등 모든 부면에서. 대중 집회나 대중투쟁이 의식을 집전하고 의식을 이해하는 사람들만의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명동성당은 촛불집회, 점심시간을 이용한 인근 지역 직장인들의 방문, 명동 일대에서 벌어진 화이트칼라의 시위, 농성단 해산, 6월 18일 대규모 2차 국민대회 등으로 이내 뚫렸다. 인천 답동 성당과 부산의 어디에선가도 농성이 진행되었지만 국면은 분명 농성 국면은 아니었다. 6월 18일과 6월 26일의 2, 3차 국민대회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민중들의 대거 진출이 있었던 것이다.

6월 18일 대회에서도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장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신세계 앞 분수대 사건. 신세계 앞 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남대문 시장과 신세계 앞 일대의 시위대와 최루탄 발사기로 무장한 채 소공동 쪽에 포진해 있던 전경들 사이에 돌과 최루탄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이 있었는데, 순간 전경들이 분수대까지 밀고 들어오자 시위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돌과 육탄전을 이용해 상당히 많은 수의 전경들을 고립시켜 장비도 회수하고 전경들을 분수대에 빠뜨려 버렸다. 그 때까지 만날 전경들에게 쫓겨 다니기만 했던 시위대들은 분수대에 빠진 전경들을 보고 무척 통쾌해 했다. 우리가 이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조금 있다가 더 많은 전경들이 와서 다시 쫓겨나긴 했지만 말이다. 또 하나는 부산 시위 소식. 한참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가 저녁 네다섯 시 무렵이었을까? 식사를 하러 들어간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 식당 안 텔레비전에서 전국 각 지역에서 일어난 노도와 같은 시위대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어디 몇 천, 어디 몇 만’ 하는 보도가 이어졌는데, 부산 시위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규모도 10만 명으로 가장 많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인상적인 것은 화면으로 전해진 시위대의 분노와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부산 시위대의 모습을 보고 ‘이 정도면 이제 우리가 승기를 잡은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신세계 앞 분수대에서의 일시적이나마 작은 승리와 부산의 노도와 같은 시위대로 인해, 6월 18일은 6월 항쟁의 결정적인 날이 되었다.
6월 18일 이후 6월 26일에 다시 한 번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마침내 지배세력이 6·29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연이어 7월에서 9월 사이에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대규모 노동자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그러면 당시 민중들은 왜 그렇게 떨쳐 일어났을까? 지금은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인명진 목사가 대변인이었던 국본이 결성되자마자, 국민대회를 몇 번 개최하지도 않았는데도 지배세력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민중들이 대대적으로 진출한 이유를 허약하디 허약한 국본의 지도력과 조직력에서 찾을 수는 없다. 국본은 대대적으로 진출할 결의에 차 있는 민중들에게 판을 열어주었을 뿐이다.
민중들은 분명히 그 이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이는 2·12 총선과 개헌 현판식에 몰려든 민중들, 그리고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을 불사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투쟁에 몰려든 민중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이유로는 우선 전두환 등 지배 세력의 파쇼 통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자유는 전혀 없었고, 오로지 최루탄, 경찰력, 군대, 정보기관의 사찰 등 억압적 국가기구에 의해 정권이 유지되었고, 정권이 불러주는 내용을 앵무새처럼 떠벌이는 관제 언론 및 어용 지식인만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숱한 사람들이 군대에서, 학원가에서, 공장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민중들은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이런 파쇼 통치를 참을 수 없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둘째로는 경제적 모순의 심화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파쇼통치의 많은 부분도 이 경제적 원인과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한국 자본주의는 이윤율이 하락하고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게 된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뒤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강력한 경제위기 극복책을 시행해나간다. 노동법 개악, 정부 부문에서 대규모 해고 단행, 퇴직금 제도 개악, 임금 억제 정책과 같은 노동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였고, 물가를 강력히 통제하였다(전두환 정권이 벌인 ‘3대 부정심리 추방운동’ 목록에는 ‘물가오름세 심리’도 들어있었다). 1986~7년에는 이런 공격과 1986년부터 불어 닥친 3저로 인해 자본의 이윤율이 급격히 개선되고 있었는데도, 이전부터 진행된 노동에 대한 공격과 임금 억제책은 지속되고 있었다. 내수침체로 자영업자들의 상태는 매우 안 좋았고, 수출대기업은 조출, 잔업, 노동 강도 강화로 노동자들을 혹사시켜 컬러텔레비전과 VCR을 계속 실어내 떼돈을 버는데 정작 그것을 만든 노동자는 빈털터리였다. 자영업자들과 사무 관리직들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노동자들도 7월~9월에 작업장에서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투쟁을 벌이기 전, 6월 항쟁 거리시위에도 개별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민중들의 대대적인 진출에는 이런 정치적·경제적 배경이 있었고, 1986년 2월 진행된 필리핀 민중혁명과 마르코스 축출도 한국 민중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1987년 투쟁에서 민중들은 무엇을 원했는가? 그리고 그것을 쟁취했는가? 부산 시위대의 투쟁에서부터 얘기를 풀어보기로 하자. 우선 1987년 6월 항쟁에서 부산 시위대 규모가 커진 것은 김영삼과 연결해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김대중을 빼고 광주 개헌 현판식에 몰려든 사람들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데 이 부산 시위대들이 김영삼을 지지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통해 김영삼을 대통령 시키려고 대거 시위에 나섰을까? 난 그랬을 수 있었다고 본다. 아니 그랬다고 이야기하는 게 사태를 더 정확히 보는 것일 테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 보자. 그러면 이들은 단지 김영삼을 대통령을 시키는 것 그 자체을 목적으로 삼았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다. 답은 ‘아니오’다. 그들은 김영삼을 통해서 자신들의 특정한 요구를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파쇼 세력과 기구의 일소를 비롯한 민주주의의 신장 및 제 권리의 확대와 경제적 형편의 개선과 억압과 착취의 제한 및 철폐 등이었을 것이다. 김영삼은 이들의 요구에 부응했는가? 그 이후 정치적 과정을 보면 김영삼은 이들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물론 김대중도 6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자신의 지지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전두환의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실시했고, 민중 생활의 어떤 측면에서는 전두환 때보다 더 못해지기까지 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카드는 노동자 민중들의 희생 하에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시키자는 ‘신자유주의’라는 카드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6월 항쟁에 참여하였을 민중들은 김영삼에게 실망한 뒤에는 김대중을 지지하고, 김대중에게 실망한 뒤에는 노무현을 지지하고, 이젠 노무현에 실망하고 이명박을 지지하려 하고 있다. 왜 민중들은 계속해서 배반당하면서도 비슷한 정치인을 계속해서 지지하고 있는가? 혹은 속을 줄 알면서도 지지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왜 그렇게 생명력이 강한 것인가?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면 이 글의 제목에 넋두리라는 단어가 들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넋두리삼아 몇 마디 해 본다면 그 이유는 대안적 이데올로기, 즉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질적 부재 때문이 아닐까? 이번 프랑스 선거를 보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치세력의 몰락은 그 끝이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강력하던 프랑스 공산당이 2%의 지지도 못 얻었으니…. 임시변통은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 또는 다른 좌파 후보가 일정한 지지를 얻고 더 나아가서 그 이후 선거에서 오늘날 이명박의 자리를 넘겨받을 수도 있을지라도, 그것이 대수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민중들의 해방의 열망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없다면 민중들의 봉기를 맞이해서도 민중들의 해방의 열망을 여기저기로 흘려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1987년 6월의 퇴계로와 명동성당의 해방구를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서 내가 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즈음에 1987년을 경험한 ‘87년의 자식들’ 중의 하나로 ‘운동’에 뛰어들어 20여 년이 흐른 지금, 답답해 자문해 본다.
주제어
노동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