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계에 대하여
예전에 한 친구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때, 비록 남들이 보지 않더라도, 위선과 진실 사이의 경계가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는 다르지만 사람들은 때로 어떤 경계에 위치하게 되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대학 시절 운동권도 아니고 비운동권도 아니었다. 취업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4학년 친구들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취업 준비 안하고 매일 데모만 하러 다니냐’였다. 그 당시에는 많은 학우들이 나와 비슷했을 거라 생각한다. 87년 6월 항쟁 때 이른바 ‘넥타이부대’ 혹은 수많은 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졸업 후 서울로 직장을 잡으면서 어느 정치조직에 가입하였다. 나의 정치적 경향과는 다르지만, 그냥 사람 좋아서 막연히 가입한 상태였다. 한 발은 담그고 한 발은 뺀 경우라서 그런지 열심히 활동하진 않았던 것 같다.
몇 년 전 잠시 쉬고 있을 때 어떤 선배의 권유로 당에 가입하면서 지역위원회에서 상근을 시작하였다. 선거정치와 집권이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는 진보정당이라는 정체성은 이념적으로 맞지 않았다. 흔히 진보정당이라 하면 의회주의와 대중투쟁의 결합이라고 한다. 의회와 선거 일반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선거에 임하는 선거정책이나 선거운동방향은 보수정당과 달라야 하지 않은가. 대중투쟁/일상사업도 마찬가지다. 사회운동적 대중정당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른 상태이고, ‘당’의 고유한 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운동적 정당이라는 지향점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당의 사회운동적 성격의 강화라는 요구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진보정당, 오늘도 양쪽에서 부단히 동요한다. 과연 현실 속에서 가능할까?
언젠가 후배들에게 ‘나는 당신들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즉각 되돌아 온 답변, ‘사랑한다는 말 백 번, 천 번 하면 뭐 하냐, 활동/실천을 같이 해야지’였다. 몸으로 부대끼며 실천 속에서 같이 한다는 일체감, 그것이 곧 사랑/동지애가 아니냐는 질책이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 꺼내도 그녀에게선 ‘당신이 무슨 여성주의자냐, 집에서나 잘해라, 말만 하면 뭐 하냐 실천을 제대로 해야지’라는 답변만 되돌아오곤 했다. 백 번 맞는 말이다. 내가 아이들을 다그칠 때면 그녀는 ‘당신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을 당신 자식들에게 되돌려주려고 그러느냐, 당신 운동하는 사람 맞아?’라고 말한다. 육체에 각인된 남성적 이데올로기 탓만 할 수는 없는데, 의지가 부족하고 나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밖에서는 당당히 페미니즘에 대해서 발언하고 이해하며 실천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혹시 그녀가 이 글을 보면, 이런 나의 노력에 대해 이중성을 지적할지 모른다. 벌써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삶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이다.
작년 평택 대추리 도두리 미군기지 투쟁이 한창이었을 때 사회진보연대 회원 누군가에게서 평택 투쟁에 참가해 달라는 전화를 몇 번 받았다. 당시 당에 상근하면서, 5·31지방선거 회계책임자여서 마음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기 어려웠다. 회원으로 가입만 해 놓고 이런 저런 이유로 못 가게 되어 미안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냈으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회진보연대 기관지인 『사회운동』에 <책과 나>, <갈월동 기행>을 두어 번 부탁받았는데 글 쓰는 재주가 없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지나간 시간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금 더 활동에 성실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최근 이랜드 비정규노동자들의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농성장에서, FTA저지 범국민대회에서, 사회운동 세미나에서 회원들을 만나게 되어서 조금이나마 경계가 허물어지고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는 데 위안을 삼는다.
지금 뉴코아-이랜드 일반노조의 비정규직 투쟁이 한창이다. 이랜드그룹의 비정규직 대량해고 문제는 남한 사회 850만명 비정규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과 자본의 대리전이다. 이랜드-뉴코아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범적인 공동투쟁·파업은 전체 노동자 투쟁의 선봉에 서 있다. 노동자들의 연대가 무엇인지 몸으로써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7월 1일을 기점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다. KTX 여승무원의 무기한 단식 농성이 막 시작되었고, 롯데호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용역 전환의 문제로 회사와 대치중이다. 이번 뉴코아-이랜드 연대투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단하기 힘들지만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에 연대하는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되고, 이후 비정규투쟁의 새로운 형태 나아가 노동운동위기를 돌파하는 기회로 자리매김한다면 바랄 게 없겠다.
삶이 힘들수록, 경제적 빈곤이 악화될수록 정치적 냉소주의 혹은 원한을 동원하는 인민주의가 만연한다. 노동자들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노동이 아니라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동 때문에 ‘정치’를 하고 싶어도, ‘참여’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을 바꿀수 있는 주체로 설 수 없게 만드는 경제적 착취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점점 무기력해지고 있다. 돈이 있고 힘 있는 자들만이 ‘정치’라는 장소를 독점한다. 하지만 2007년 남한 사회의 모든 모순이 바로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들은 비정규직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여성노동자들이다. 노동과 자본, 정규직과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정책적 귀결의 하나인 비정규악법 투쟁 등등. 뉴코아-이랜드 노동자의 파업 현장, 여기가 바로 우리들의 ‘정치’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집에서는 아내이자 엄마로서 밖에서는 노동자로서 고단한 삶의 경계를 뚫고 분연히 파업투쟁에 자신의 몸을 던진 뉴코아-이랜드 노동자들에게 뜨거운 동지애와 연대의 마음을 보내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
대학 시절 운동권도 아니고 비운동권도 아니었다. 취업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4학년 친구들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취업 준비 안하고 매일 데모만 하러 다니냐’였다. 그 당시에는 많은 학우들이 나와 비슷했을 거라 생각한다. 87년 6월 항쟁 때 이른바 ‘넥타이부대’ 혹은 수많은 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졸업 후 서울로 직장을 잡으면서 어느 정치조직에 가입하였다. 나의 정치적 경향과는 다르지만, 그냥 사람 좋아서 막연히 가입한 상태였다. 한 발은 담그고 한 발은 뺀 경우라서 그런지 열심히 활동하진 않았던 것 같다.
몇 년 전 잠시 쉬고 있을 때 어떤 선배의 권유로 당에 가입하면서 지역위원회에서 상근을 시작하였다. 선거정치와 집권이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는 진보정당이라는 정체성은 이념적으로 맞지 않았다. 흔히 진보정당이라 하면 의회주의와 대중투쟁의 결합이라고 한다. 의회와 선거 일반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선거에 임하는 선거정책이나 선거운동방향은 보수정당과 달라야 하지 않은가. 대중투쟁/일상사업도 마찬가지다. 사회운동적 대중정당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른 상태이고, ‘당’의 고유한 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운동적 정당이라는 지향점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당의 사회운동적 성격의 강화라는 요구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진보정당, 오늘도 양쪽에서 부단히 동요한다. 과연 현실 속에서 가능할까?
언젠가 후배들에게 ‘나는 당신들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즉각 되돌아 온 답변, ‘사랑한다는 말 백 번, 천 번 하면 뭐 하냐, 활동/실천을 같이 해야지’였다. 몸으로 부대끼며 실천 속에서 같이 한다는 일체감, 그것이 곧 사랑/동지애가 아니냐는 질책이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 꺼내도 그녀에게선 ‘당신이 무슨 여성주의자냐, 집에서나 잘해라, 말만 하면 뭐 하냐 실천을 제대로 해야지’라는 답변만 되돌아오곤 했다. 백 번 맞는 말이다. 내가 아이들을 다그칠 때면 그녀는 ‘당신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을 당신 자식들에게 되돌려주려고 그러느냐, 당신 운동하는 사람 맞아?’라고 말한다. 육체에 각인된 남성적 이데올로기 탓만 할 수는 없는데, 의지가 부족하고 나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밖에서는 당당히 페미니즘에 대해서 발언하고 이해하며 실천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혹시 그녀가 이 글을 보면, 이런 나의 노력에 대해 이중성을 지적할지 모른다. 벌써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삶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이다.
작년 평택 대추리 도두리 미군기지 투쟁이 한창이었을 때 사회진보연대 회원 누군가에게서 평택 투쟁에 참가해 달라는 전화를 몇 번 받았다. 당시 당에 상근하면서, 5·31지방선거 회계책임자여서 마음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기 어려웠다. 회원으로 가입만 해 놓고 이런 저런 이유로 못 가게 되어 미안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냈으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회진보연대 기관지인 『사회운동』에 <책과 나>, <갈월동 기행>을 두어 번 부탁받았는데 글 쓰는 재주가 없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지나간 시간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금 더 활동에 성실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최근 이랜드 비정규노동자들의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농성장에서, FTA저지 범국민대회에서, 사회운동 세미나에서 회원들을 만나게 되어서 조금이나마 경계가 허물어지고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는 데 위안을 삼는다.
지금 뉴코아-이랜드 일반노조의 비정규직 투쟁이 한창이다. 이랜드그룹의 비정규직 대량해고 문제는 남한 사회 850만명 비정규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과 자본의 대리전이다. 이랜드-뉴코아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범적인 공동투쟁·파업은 전체 노동자 투쟁의 선봉에 서 있다. 노동자들의 연대가 무엇인지 몸으로써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7월 1일을 기점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다. KTX 여승무원의 무기한 단식 농성이 막 시작되었고, 롯데호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용역 전환의 문제로 회사와 대치중이다. 이번 뉴코아-이랜드 연대투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단하기 힘들지만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에 연대하는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되고, 이후 비정규투쟁의 새로운 형태 나아가 노동운동위기를 돌파하는 기회로 자리매김한다면 바랄 게 없겠다.
삶이 힘들수록, 경제적 빈곤이 악화될수록 정치적 냉소주의 혹은 원한을 동원하는 인민주의가 만연한다. 노동자들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노동이 아니라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동 때문에 ‘정치’를 하고 싶어도, ‘참여’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을 바꿀수 있는 주체로 설 수 없게 만드는 경제적 착취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점점 무기력해지고 있다. 돈이 있고 힘 있는 자들만이 ‘정치’라는 장소를 독점한다. 하지만 2007년 남한 사회의 모든 모순이 바로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들은 비정규직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여성노동자들이다. 노동과 자본, 정규직과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정책적 귀결의 하나인 비정규악법 투쟁 등등. 뉴코아-이랜드 노동자의 파업 현장, 여기가 바로 우리들의 ‘정치’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집에서는 아내이자 엄마로서 밖에서는 노동자로서 고단한 삶의 경계를 뚫고 분연히 파업투쟁에 자신의 몸을 던진 뉴코아-이랜드 노동자들에게 뜨거운 동지애와 연대의 마음을 보내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