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7-8.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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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의 새로운 모색- 진보적 인권운동과의 대화

김도현, 배경내, 손상열, 이소형, 장진범 |
<일시> 2007년 6월 29일(금)
<장소> 사회진보연대 회의실
<사회> 장진범 | 편집부장
<참석자>
김도현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배경내 |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손상열 | <인권단체연석회의> 촉진자
이소형 | <사회진보연대>
<속기·정리> 이승운 | 편집부장 김혜진 | 여성부장




1. ‘진보적 인권운동’의 핵심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사회자: ‘인권’은 90년대 이후, 특히 김대중 등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집권 이후 지배 이데올로기 중 하나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여러 민중들의 인권이 극심하게 공격받은 때이기도 하다. 이 같은 역사적 경험은 인권 이념의 채택이 반드시 인권 현실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인권 이념의 채택이 인권 현실의 악화라는 도착적(倒錯的)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인권의 이름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사례일 것이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이는 비단 인권 이념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라, ‘민주주의’ 등 87년 이후 여러 해방적·보편적 이념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겪은 운명이며, 오늘날 이런 이념 및 이를 표방하는 정치와 운동에 대해 대중들이 불신과 냉소를 보내는 데는 이 같은 사정이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
스스로를 ‘진보적 인권운동’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핵심적 문제의식 중 하나는, 90년대 이후 인권 이념이 처한 이 같은 역설적 상황의 원인을 반성하고 인권 이념을 보다 민주적·민중적으로 확장하는 데 있을 것이다. 관련한 고민들을 듣고 싶다.

배경내: 진보적 인권운동이라는 화두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인권이 일상적인 정치적 수사가 되기 시작한 97년 이후 정세를 중요한 배경으로 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87년 민주항쟁 10년을 맞이하여 민주주의가 심화되고 인권의 시대가 열렸다는 식으로 분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 자체를 좀 더 진보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사실 보편적 가치, 예컨대 인권, 평화, 민주주의 등은 누구 입에나 오르고 수사로 사용되곤 한다. 박정희조차 인권 얘기를 많이 했을 정도니까. 그렇기는 해도 그 전까지는 이런 말을 정치적으로 편하게 사용하진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지배자들의 입에서 정말이지 매일매일 인권이 오르내리는 상황이 되었다. 반면 수사와 현실의 괴리는 더욱 심해졌다.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한국이 민주적 권리를 적극 보장한다는 연설을 했지만, 알다시피 정리해고가 법제화되어 수많은 노동자들의 권리가 파괴되고 있었다. 또 고 최옥란 씨는 빈곤에 시달리다가 최저생계비를 반납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게다가 미국은 인권과 해방과 자유라는 낱말로 이라크 선전포고문을 작성했다.
이렇듯 반(反)인권의 현장에서 인권의 수사가 사용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인권은 무엇이고 내가 하는 운동이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인권은 저들과 어떤 점에서 구별되는가 하는 질문이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실존적 고민으로 다가왔다. 진보적 인권운동은 이런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진보적 인권운동의 문제의식을 크게 세 가지를 중심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자유권-사회권의 비대칭적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다. 당시까지 인권운동이란 종교인의 종교적 권위에 기대거나 법률가 등 명망가나 전문가 중심의 운동이었다. 뭐랄까, ‘인본주의’적인 분위기도 있었고, 법의 ‘정상적 지배’를 지향하는 식이었다. 주로 다루는 쟁점도 의문사, 고문, 자의적 법집행 같은 것이었고. 이에 대해 기층 대중들의 인권을 의제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사회권’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권의 문제를 버린 것은 아니었고, 자유권이 실제로 신장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세밀하게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법의 정상적 지배’를 넘어서는 인권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둘째, 지금까지의 인권이 누구의 권리였는가에 관해 성찰하는 것이다. 이는 2000년대 들어서 본격화된 이른바 ‘소수자’ 운동들의 도전에 따른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는 인권의 기존 가치를 잘 보장하는 것을 넘어서 그 체계 전반을 반성하고 재구성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특히 기존 인권의 장에서 보이지 않았던 주체들의 삶과 인권을 중심으로 인권을 다시 쓰자 그런 얘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셋째, 운동 자체의 가치를 인권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여기서는 100인위 사건이 준 충격을 빼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함께 운동사회 내부의 담합, 비민주성 이런 문제도 점차 수면 위에 올라 왔고. 그러면서 운동 자체의 가치를 인권적으로 바꾸는 문제 역시 진보적 인권운동의 새로운 의제와 과제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얘기를 했다.
물론 진보적 인권운동이라는 말을 만들 때, 인권이라는 가치 자체가 진보적인데, 여기에 ‘진보적’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것은 동어반복이거나 인권 자체를 제한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기도 했다. 사실 나도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지만, 인권운동을 진보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김도현: 약간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해 보겠다. 인권운동 하는 사람들은 대개 인권 자체는 기본적으로 진보적인 가치라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단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기초로 삼는 운동 쪽에서는, 인권을 진보적인 가치라기보다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해 온 전통이 있다. 문제가 많은 비판이기는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인권 자체는 진보적이라고 전제하고 시작하면 이런 운동들과 아예 대화가 되지 않는다. 나는 양 측이 서로를 비판하고 서로 변화했다면 훨씬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서로의 전제가 완전히 달랐던 것이 그런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한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김도현

나는 인권 자체가 진보적이다 아니다 그런 식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지배계급의 가치와 민중의 가치가 서로 뒤섞여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권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혹자의 말처럼 ‘지배적’ 이데올로기, 곧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고 그런 한에서 유의미성과 가능성을 갖는 담론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얘기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대중들이 움직일 수 있으며, 나아가 끝까지 밀고 나가면 기존의 질서에 대해 흘러넘치는 부분이 있는 그런 담론. 나는 이런 식으로 인권을 규정한다면 모 아니면 도 식이 아니라, 다른 식의 얘기가 가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배경내: 인권의 문제를 철학과 지향, 가치 면에서 심화시키는 작업은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이게 안 돼서 서로를 건드리는 깊이 있는 논의가 안 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 십 년이 그런 터를 닦는 시간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인권이 운동사회에서 하나의 담론으로 통용되기 위한 활동을 벌인 시기. 사실 전에는 인권 하면 체제 내에 머무르는 거 아니냐는 의혹과 홀대가 많았는데, 이제는 만나고 받아들이고 하는 정도까지 온 것 아닌가.

이소형: 활동을 통해 논의의 지평을 넓히고 인권 관념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관점에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그 대표적 사례가 사회권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인권운동과 진보적 인권운동이 달라지는 출발점 중 하나가 사회권을 제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논의를 위해 약간 쟁점적으로 제기하자면, 자유권/사회권을 정치/경제 분할에 대응하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권을 제기하면서 기존의 권리 개념과 구획 자체를 문제 삼고 양자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관련하여 <인권단체연석회의>의 경찰폭력 대응팀의 활동이 한 사례가 될 것이다. 경찰폭력에 희생당한 고 전용철, 하중근 열사 등의 경우 애초에 생존권의 문제에서 투쟁을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일종의 ‘사회권’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생명의 희생이라는 자유권에 대한 극단적 파괴로 이어졌다. 당시 이에 맞서 투쟁하면서 우리는 생존권·사회권을 정치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대중들의 권리로 자유권을 재정의하고, 양자를 구획하는 것이 아니라 일치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요컨대 진보적 인권운동의 ‘사회권’이란, 단지 현존하는 법 체계 안에서 인간이 ‘경제활동을 누릴 수 있는 권리’라거나, 그동안 부차화되었던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룬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에 대한 기존의 통념 자체를 정세적으로 재구성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진보적 인권운동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권/자유권의 분할을 극복하고 양자를 일치시키는 기획을 지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손상열: 인권운동을 하면서, 진보적 인권담론이 빈곤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성명서 쓰는 예를 들어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는, 일단 구체적 상황을 자세히 지적한 후, 결국 ‘인권의 원칙으로 비판한다’는 식으로 쓴다. 이 때 인권의 원칙이 뭘까 생각해 보면, 대개는 존재하는 사회 체제를 초월하는 천부적·잠재적 권리인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너무 모호해지고 또 관념적으로 되는 면이 있다.
손상열

그러다 보니까 구체성을 보충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의 헌법이나 국제 규범 등으로 뒷받침을 하는데. 그럼 인권운동이 이런 국제 규범을 준수할 것을 촉구하는 운동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면서 딜레마적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인권 개념을 추상적으로 제기하는 자유주의 인권관은 지금 이 곳에서 인권을 실현해야 한다는 급박함을 주지 못하고, 구체적 규범에 호소하면 그 규범을 낳는 체제는 비판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물론 인권 담론이 논리적 작업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고, 현장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야 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인권 담론이 사회변혁의 이념으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아쉽다. 뿐만 아니라 인권 담론의 빈곤함 때문에 현실 개입에도 제약이 된다.
‘집회의 자유’ 문제가 대표적 사례다. 이 문제를 개인이란 측면에서 제기하는 것과 공동체의 측면에서 제기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자의 경우 핵심 원리는 각 개인의 기본권이고, 그 대표적 형태는 표현의 자유다.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합하면 집회의 자유가 되고, 따라서 국가권력이 집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면 안 된다는 식의 논리가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냐 하면, ‘권리들의 충돌’이라는 딜레마에 부딪치게 된다는 점이다. 개인의 권리는 집회의 권리 말고도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시민들의 행복추구권과의 대립이다. 그러다 보면 권리들의 조화를 위해 규범을 만들자는 논의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의 측면에서 접근하면 전혀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즉 집회의 자유가 각 개인의 권리의 합이 아니라, 공동체를 기초짓는 근본 원리로서 인민주권을 발휘할 수 있는 핵심 통로가 되고, 공동체의 구성·운영 등에 관한 핵심적 권리로 규정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논리는 아직 대중적 호소력이 떨어지는데, 아직 우리 사회에 개인주의적 권리 관념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실천적인 노력 뿐 아니라 이론적인 부분에서도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배경내: 나는 인권이 여러 권리들 중 하나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여러 무수한 권리들 사이에서 우리가 사람으로서 함께 지켜야 할 권리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누군가의 특허권과 사람들의 생명권이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인권과 다른 여타의 권리를 구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인권의 보편성을 놓지 않으면서도 인권의 당파성, 누구의 권리인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권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특권일 수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인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편에 서는 당파적 접근이 인권의 보편성을 회복하는 길일 수 있다. 그러려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 지금 이 곳의 인권 상황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필요하다.
얼마 전에 베네수엘라 헌법을 봤는데 인상적인 점이 있었다. 한국 헌법에서처럼 단순히 이런 권리가 있다는 것을 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위해서 어떤 조건과 조치가 동반되어야 하는지를 권리 체계 안에 함께 포함시키고 있었다. 아주 세세한 조치를 쓰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인권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성찰과 그를 넘어서기 위한 조건이라는 문제를 함께 사고해야 한다는 얘기다.

2. 인권운동의 의제와 활동방식에 대한 평가

사회자: 인권운동 역시 현실적인 조건과 관계, 제약 안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기존의 인권운동이나 이른바 ‘민중운동’의 핵심을 이루는 (노동자운동, 농민운동 등) 대중조직운동, 정당운동, 좀 더 보수적인 NGO 운동이나 보다 급진적인 사회운동, 그 외 여러 운동 및 조직들이 있다. 현실적으로 이런 세력들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면서도 현재의 인권운동이 이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독자적 질서, 예컨대 <인권단체연석회의> 등으로 묶일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의의와 한계에 대한 평가는 어떤지 토론해 봤으면 한다.

김도현: 전에 <전장연>에서 회의하다가 인권활동가 대회 참여에 관한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그 때 누군가 왜 장애인운동이 인권운동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런데 막상 그런 질문이 나오니까 딱 뭐라고 답하기가 힘들었다.(웃음) 그래서 왜 장애인운동이 인권운동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얘기를 했는데, 확실하게 답이 나오진 않더라.
내 생각에 인권운동과 다른 운동이 주제나 영역 면에서는 겹치고, 다만 문제를 풀어나가는 개념이나 논리로 구별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완전히 구별되는 자기완결적 운동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점은 인권운동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인권운동이 보편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 아니라 유효한 접근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보편성은 유대를 말하는 것이고 당파성은 적대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식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양자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배경내: 인권운동은 기본적으로는 해체를 준비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운동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할 이야기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노동자운동이나 농민운동, 여성운동 등 구체적 주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 있고, 인권, 평화 등 지향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 있는데, 후자는 모두 소멸을 준비하는 운동이라고 본다.
다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어느 정도 지속성을 갖는 인권운동의 영역은 있는 것 같다. 우선 아직 조직화되지 못한 이들을 지원하는 측면이 있다. 인권운동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노숙인, 재소자, 청소년 등의 주체적인 조직화 등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역할은 당분간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배경내
또 모두의 과제이기 때문에 정작 잘 이야기되지 않는 문제도 인권운동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인민의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등. 변혁운동에 총론이 있다면 이런 얘기가 반드시 들어가겠지만 정작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는 운동 집단은 많이 없는 것 같다. 인권운동은 집회의 자유를 꾸준히 제기해 왔고, 사랑방의 경우 전에 사회진보연대 등과 함께 국민발의/국민소환 문제를 제기한 경험도 있다. 이런 문제를 지속적으로 고민할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김도현 씨가 유대의 문제를 얘기했는데, 인권이 서로 다른 운동들을 엮어 나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손상열: 이상의 역할을 인권운동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데 모두 동의하지만, 현실에서 인권운동이 규정되는 방식은 사뭇 제한적이다. 다른 운동들이 인권운동에 대해 갖는 이미지란, 법에 좀 더 밝을 것 같다거나, 인권위를 활용한 사업도 더 잘 할 것 같다 는 식이 지배적이다.

이소형: 나는 인권운동이 매우 의미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그 역할이 점점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이제는 조직적·대중적인 확장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는 인권운동이 앞서 지적한 바 있는 특정한 이미지에 갇혀 있는 상태가 아닌가 싶고, 이를 넘어서는 조직적 계획이 제출되고 있는지 다소 의문이다. 진보적 인권운동의 현실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대중들의 운동 속으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이에 개입하기 위한 전략이나 새로운 활동양식 등이 기획되어야 할 것인데. 현실적인 역량 문제도 있겠지만, 이런 부분이 계속 유보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현재 <인권단체연석회의>가 있는데, 이것이 일종의 상설적 연대체라면, 정세나 방향에 관한 공동의 토론이 있고 이에 기초해서 결론을 내는 과정이 필요한데, 현재의 경우는 여러 단체들의 입장을 조합해서 듣는 것 이상으로 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다양한 인권운동의 의제들을 상호 소통·교류하는 자체로도 의미가 있겠지만, 이제는 인권운동 자체의 전략적 논의를 진척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김도현: 전체적으로는 인권운동이 대중운동에 개입하기 위한 계획을 더 적극적으로 세우고, 또 당파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얘기로 들린다. 관련해서 나는 강조점이 약간 다르다. 우선 나는 인권운동이 자기 대중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운동 등의 대중운동과 달리 무차별적인 대중이라서 좀 막연하기는 하지만, 예컨대 인권교육 등을 통해 그런 기획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랬을 때 강조해야 하는 점은 여전히 보편성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인권운동은 당파적 대중운동이 진출할 때 그것을 배척하지 않고 맞아들일 수 있는 대중을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배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지속적인 반성과 성찰을 조직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소형: 사실 인권운동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현재 정세를 나름대로 분석한 가운데 어떤 인권이 필요한가 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관련해서 나는 진보적 인권운동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대중 일반의 보편적 가치가 파괴되는 상황, 인권·생존권·평화·민주주의가 말살되는 정세에 대응할 수 있는 당파성을 세워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대중들이 처한 일반적인 상황과 그에 대한 불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점까지 도달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그에 비해 민주노총과 전농을 비롯한 주요 대중조직들의 생존권 투쟁은 어떤 일정한 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는 대중들의 투쟁이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 등의 보편적 가치와 재결합할 수 있도록 기존 대중운동을 개조·변화시켜야 하고, 이럴 때에야 인권운동에 대한 대중적 정당성을 새롭게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권운동 내부적으로 조직적인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손상열: 결국 인권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일 텐데. 현실적인 조건 문제는 있다. 현재 인권운동은 그렇게 단일성 있는 집단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인권운동이라기보다는 인권운동‘들’이 있는 것이고, 그들이 모이는 <인권단체연석회의> 같은 공간이 있는 것이다. 이 공간에서 진행되는 토론도, 서로 다른 마인드나 의견의 적극적 마주침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서로의 이해와 실천, 사고의 폭을 넓히는 상호 교통이 우선인 셈이다.
다만 인권운동 ‘진영’으로 묶일 때가 있는데, 이는 정세적 조건이 규정하는 것 같다. 인권단체들이 2003년에 정세적 사안을 두고 공동투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면서 공감대가 만들어졌고, 이게 연석회의로 이어진 것이다. 작년 평택 투쟁도 공감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함께 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개인적으로는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것에 고민이 많지만, 아직까지는 다소 무리인 면이 없지 않다. 일단은 터전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

배경내: 전체적으로 비슷한 고민이다. 인권운동의 현실에 관해서는 비슷한 생각이고. 다음으로 다른 운동과 인권 운동이 만나는 것에 관해서는, 인권의 가치를 다른 운동이 받아들이려면 인권운동이 자기 발언력과 실천력을 가져야 할 텐데, 지금까지 인권운동은 그런 것이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는 그것을 만들어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소형 씨가 개입의 문제를 얘기했는데, 우리는 딱히 개입이라는 방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고, 다만 인권운동으로서 부딪히는 자기 한계가 분명히 있고 이것을 넘으려고 하는 지점에서 다른 운동과 만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편이다. 사회권이 대표적인데, 사회권을 구체화하는 과정으로 넘어가면, 그 운동의 현장 및 사람들과 만나고 접합하는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주거권을 고민하면서 빈민운동 등과 만나는 식으로. 이렇게 공동 사업과 의제를 통해 상호침투하는 것이 하나의 고민이다.
나아가 좀 더 널리 인권의 가치를 나누고 확장하는 문제의 경우, 별도의 계획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진행 중인 사회운동포럼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다른 운동에 인권운동의 가치를 주겠다기보다는, 뭔가 더 큰 전망을 세워가는 가운데 서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운동들과 만나고 배워야 하지 않느냐 는 얘기를 많이 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노동, 생태 운동 등 우리와 함께 전선을 만들고자 하는 운동과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3. 사회운동의 새로운 활동양식 하나: 조직 내 민주주의와 의사소통

사회자: 현재 사회운동포럼의 열쇠말 중 하나로 <새로운 사회운동의 활동양식>(이하 <새활동양식>) 논의가 진행 중이고 여기에 인권운동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는 인권운동이 (민중운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사회운동의 혁신에 관해 의견을 제시하고 개입하는 중요한 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련해서 여러 쟁점이 있겠지만, 일단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조직 내 민주주의와 의사소통(또는 의사결정)’이다. 현재 어떤 쟁점이 다루어지고 있는지, 그에 관한 의견이 어떤지 듣고 싶다.

배경내: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민주주의가 의사결정을 위한 형식적 절차 문제로 한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의사형성과 의사소통, 의사결정의 전반적 과정으로 보아야 하고, 아울러 의사결정 과정에서 상대화된 소수의 의견이나 문제의식이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조직 안에서 경청하고 유통하고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느냐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다.
그랬을 때 함께 제기되는 것은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구조, 위계의 문제이다. 성별분업, 대표자와 실무자, 전문성을 가진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나이에 따른 위계에 대한 질문 등을 던지고자 한다. 공식적인 의사결정 말고도 의사를 형성해 가는 다양한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 속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없는가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가 사람들이 운동을 그만두는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운동의 중요한 성찰 지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소형: 새로운 대안적 활동양식으로는 어떤 것들이 이야기되는가?

배경내: 논의를 하면서, 일반화된 모델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 문제에 접근할 때 형식적 절차를 넘어 소통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기본으로 깔면서, 여러 사례를 조사하는 중이다. 예컨대 회의와 총회, 조직의 방향과 운명을 결정하는 절차들과 관련하여, 사전에 어떤 식으로 준비되는가 같은 문제들. 또 공식적인 결정 자리뿐만 아니라 실제로 소통을 하기 위한 자리들이, 뒷풀이 같은 것 말고, 조직 안에서 얼마나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조사 대상이다.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간에 관한 질문인 셈이다.

이소형: 모범 사례 등이 시사점을 줄 수 있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민주주의를 규범이나 모델로 접근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완전한 평등의 ‘상태’라는 것이 있는가.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설정하고 이 잣대로 현실을 판정하는 방식이라면 오히려 더 힘이 빠지게 할 수 있는 상황이 될 것이다.
이소형

특히 운동사회에서는 이런 게 없어야 하는데, 여기에도 이런 게 있다 이런 접근은 아닌 것 같다. 운동사회가 그런 모순에서 면제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각기 고유한 역사와 조건에 따른 갈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갈등이 사라지지 않고. 그랬을 때 오히려 중요한 것은 현실론과 이상론의 대립과 어느 한 편에서 이 갈등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갈등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드러내서 서로에게 긴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갈등에 권리를 주고 이를 어떻게 운동의 계기로 삼을 것이냐를.

김도현: 좀 고민이 되는데, 각 운동 별로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특수성이 있는 것 같다. <전장연>을 놓고 보면, 지금 주로 고민하는 것은 상당히 초보적인 수준, 그러니까 어떻게 간담회 같은 걸 한 번이라도 더 해서 정보라도 제대로 공유할 것인가 정도다. 이게 우리의 현실적 조건이다.
알다시피 장애인운동이 상당히 전투적인 편이고 이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는데, 앞서 말한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는 좋은 답을 주기 어려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전에 알려지지 않은 기습시위를 잡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럴 때 자세한 상황은 집행국 안에서만 소통시키고, 현장에서는 돌입 직전에 사람들에게 얘기해 준다. 그러다 보니 동의하지 못하는 대중들 사이에서 문제제기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또 현장에서 급박한 상황이 벌어질 때 여기에 대처하고 조율하는 사람들은 대개 소위 ‘지도부’나 대표들, 또는 경험이 많은 실무자들인데, 따지고 보면 이 점을 문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이런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기 시작하면 논의가 안 풀린다. 그렇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늘 고민이 되기는 하는데, 그러다 보면 실무자들이 더 열심히 뛰어서 공유지반을 넓혀야 한다는 식으로 결론이 나곤 한다. 그래서 답답함이 있다.
다른 대중운동도 비슷한 딜레마가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소통의 문제라고 할 때, 사실 그 소통에도 조건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 조건이나 기반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곳일수록 민주주의의 문제가 심각할 텐데, 이렇게 조건이나 기반이 부족한 데는 사회적 구조도 영향이 있을 것이고. 사실 이 구조 때문에 운동을 하는 것일 텐데. 말하자면 소통의 부족이 운동을 제한하고, 역으로 운동의 부족이 소통을 제한하는 악순환의 딜레마에 처해 있을 때, 어디서부터 출발할 것이냐 하는 고민이 든다.

배경내: 여기서는 선택이 필요할 것 같다. 예컨대 어떤 장소를 타격하는 투쟁을 한다고 할 때. 이미 결정을 내린 상황에서 끝까지 가겠다는 결의가 되는 20명으로 하는 투쟁도 있고, 조금 늦더라도 40명과 함께 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투쟁도 있지 않을까. 후자와 같은 목표라면, 당장 이 사건에 대응하는 것을 조금 늦추고 주체들을 만나는 과정을 밟아가야 할 것이다. 즉 목표에서부터 세밀하게 점검하고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돌발적 상황에 관해서는, 사실 현장에서 어떻게 하라고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는 것이 더 문제인 경우가 있다. 나는 다른 점을 지적하고 싶다. 집회 때 오늘 우리가 거둔 성과가 무엇이고 뭐가 부족했다는 방식의 평가는 들어봤지만, 집회 과정에서 이루어진 판단에 대해서 그 조건이 무엇이고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경우는 별로 본 적이 없다. 사실 긴급한 상황이 되면 결정을 위임하는 순간이 올 수 있는데, 그게 기꺼우려면 신뢰가 필요하고, 그것은 결정 전후의 과정과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소형: 근데 아까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도 앞 분과 비슷한 점이 있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순간에 ‘민주주의’를 이유로 결정을 유보하는 경우, 이를 민주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칫 지배계급의 논리와도 맞닿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왜 시민사회에서 합의되지 않는 파업을 하느냐의 질문 같은 것. 즉 경우에 따라 민주주의라는 논리가 정반대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결국 그런 문제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대중들의 의사를 모으는 과정이라고 할 때, 대중들의 의사는 억압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조적으로 제약받는다. 따라서 이런 구조적 제약 때문에, 또 이를 돌파하려다 실패했을 때 나타날 위험부담 때문에, 운동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리 의견을 모으려 해도 공간이 열리지 않아서 그게 안 되는 경우, 그래서 일단 공간을 열어야 의견이 모아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다른 입장이 대립할 때, 이 중 특정한 입장을 중심으로, 그러니까 한 입장을 상대화하고 다른 입장을 편드는 의사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다. 주로 ‘지도부’나 대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나 제도, 결국 의사결정 권한을 지닌 부위에서 그런 일을 할 텐데. 나는 이런 일은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모든 의사결정에서 일종의 상수처럼 나타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의사결정 이전에 갈등의 표출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런 갈등이 있었고, 결국 갈등의 한 편을 편들면서, 따라서 다른 한 편을 누르면서 결정이 내려졌다는 점을 은폐하지 않고 드러내는 것, 그리고 한 번 결정이 내려졌으니까 끝이라는 식이 아니라 이 결정의 효과를 끊임없이 반성하고 책임지는 갈등적 과정을 의사결정 이후에도 구조적으로 보장하는 것 등이 아닐까.

배경내: 쟁점이 있는 것 같다. 소형 씨가 말한 것에 일면 동의하지만, 일면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함정을 파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여기서 이 문제를 길게 논의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새활동양식> 준비팀에서 이에 관한 공개 토론회를 준비하고 있으니까, 앞으로 토론을 이어가자.

4. 사회운동의 새로운 활동양식 둘: 주체화의 계기로서의 교육

사회자: 또 한 가지 다뤄보고 싶은 주제는 ‘교육’이다. 최근 많은 사회운동들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비해 실제로는 교육이 부차화되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 진행되는 교육도 여러 평가 지점을 안고 있다. 현재 열쇠말 토론에서 어떤 쟁점이 다뤄지고 있고, 그에 관한 의견이 어떤지 듣고 싶다.
장진범


배경내: 현재 가장 일차적인 문제는, 교육이 지닌 운동적 의미에 관한 합의가 없다는 점이다. 저 같은 사람은 교육이 곧 변혁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하면 좋은 것이다 정도로 생각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또 교육답다고 하면 그것이 무엇인지, 교육을 통해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런 문제도 있다. 말하자면 교육관의 문제인데, 이런 문제가 아직까지 제대로 토론된 적이 없다. 그런 부분에 관한 성찰과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전에 새만금이나 평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장기적인 싸움이 예상되는 현안들에 대한 투쟁을 준비할 때, 교육이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도 있다.

손상열: 앞서 민주주의 얘기도 했지만, 그 문제 관련해서 사실 학습이나 교육이 핵심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인권단체연석회의>에서도 민주주의 얘기가 많이 나온다. 한 달마다 정기 회의를 하는데 안건으로 다루는 것이 굉장히 다양하다. 참석자들이 느끼는 점은, 자기 안건은 잘 논의할 수 있는데 다른 안건은 논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회의 진행자나 안건 발의자가 제안한 대로 간다. 이런 상황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이를 타개하는 좋은 방식이 교육이나 학습이라고 생각한다. 안건의 배경이 되는 사상이나 철학에 관한 공동 교육이 필요하다. 사실 이게 아니라면 합의가 될 수 있는 안건만 다루고 나머지는 빼는 방식이 있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보다 적극적인 방식은 그 안건에 대해서 더 이해하고 발언할 수 있는 능력이랄까, 이해의 정도랄까 그런 것을 키우는 것이다. 이런 게 증진되지 않으면, 결국 회의를 주도하는 사람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권력자가 되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대중을 설득할 때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선전을 열심히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평상시에 일반적으로 시민들이 자기 학습을 할 수 있는 풍토나 기제들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활동가들의 자기 교육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도현: 앞서 민주주의나 소통의 조건을 얘기했었는데. 그 핵심 중 하나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평등한 소통을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교육은 매우 절실하다.
<전장연>에서는 관련한 준비를 제대로 못 했다. 교육을 하려면 텍스트나 내용도 필요하고, 대중들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방식이나 기제들도 필요한데, 그런 게 부족했다. 그런 걸 만들어 보려는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한 때 장애인이나 장애인권 등의 문제를 다루는 연구교육센터를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다급한 현안 투쟁이 많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려 났다. 또 현실적으로 돈이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서 고민을 놓친 면도 크다. 사실 장애인운동이 현장투쟁을 중시하는데, 이것이 지속성을 갖고 생존하려면 교육이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연대나 의제보편화에 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 가시적인 결과를 많이 못 만든 것 같다. 전반적으로 다른 운동의 내용, 아니면 전반적으로 기본이 될 만한 내용에 대해서 접근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보니까 우리 자신의 고민도 진전이 더딘 게 아닌가 싶다.
다른 한 편에서는 자체적인 교육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교육 곧 학교교육에 개입하는 것도 고민이다. 결국 장애인운동이 진전하려면 장애인들 스스로의 변화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들의 변화도 필요할 텐데, 그러려면 우리 내용을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 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소형: 평화에 관한 인권 교육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체험에 중심을 둔 교육 방식이 다소 어색하기도 했다.(웃음) 교육의 방식이 새로운 체험을 주는 것이든, 새로운 지식을 주는 것이든, 어쨌든 기존의 조건에서는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점이 있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주체성의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앞서 인권운동의 이념적 지향이 보다 많은 사회 운동 속으로 확장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얘기를 했는데. 관련해서 교육의 문제를 일종의 프로세스로 공동의 모색을 만들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배경내: 그래서 <인권교육센터>를 만들어보려고 하는 문제의식이 있다. 교육이라고 하면, 당사자 주체들을 지원하는 교육도 있고, 활동가 교육도 있고,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도 있을 테고, 각각 기획하는 목적과 결도 다를 텐데, 이런 부분들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싶은 욕심이 있다. 우리가 가장 크게 고민하는 것은 운동 속으로 인권 교육이 어떻게 걸어들어 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운동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 대리주의와 당사자주의인데, 둘 다 문제다. 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과 균형이 필요한데 그 가장 유력한 경로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교육의 과정을 짤 때 성공하려면 두 가지 자만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나는 안다’, 하나는 ‘저들은 모른다’이다. ‘나는 안다’는 흔히 활동가들이 많이 빠지는 자만이다. 활동가들이 정보도 많고 듣는 것도 많고 하지만, 실제로 교육을 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고백하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는 마음과 몸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더 잘 알고자 하는 열정을 갖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나는 교육이 여러 운동을 만나게 하는 밑바닥 공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저들은 모른다’라는 자만은 운동과 대중 사이의 위계와 관련될 것이다. 이것을 깨지 못하면 주체들의 힘 있는 투쟁과 조직화는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이 운동의 본새를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교육에 운동적 의미가 많다고 느끼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울러 아까 학교교육 문제도 얘기하셨는데. 지금의 학교가 ‘비(非)시민’으로 치부되는 미성년자, 청소년들의 공간으로 한정되어 있어서인지, 운동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많이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운동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속해 있는 공장과 거리, 정치의 현장에서는 급진적인 요구를 하면서, 이 사회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하는 국가 교육을 고민하지 않는 것은 엄청난 아이러니이고, 운동의 확장을 크게 제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교육계’만의 고립된 고민이어서는 안 된다. 운동사회에서 보면 자기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어떤 학교의 내용을 보면 거의 자본가를 양성하는 내용일 정도로, 대안학교에도 문제가 많다. 자기 자식 맡겨놓고도 문제의식 없다는 것도 아이러니 아닌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별도의 ‘교육계’, ‘교육운동’이란 없다. 모두의 운동이 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아무도 제대로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많은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

사회자: 긴 시간 동안 고생 많으셨다. 앞으로 <사회운동포럼> 등을 통해서 더 많은 토론을 해 갔으면 한다.
주제어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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