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9.77호
반성폭력 운동 평가와 여성운동의 과제
■ 일시: 2007년 8월 24일 금요일
■ 장소: 사회진보연대 회의실
■ 사회: 정지영(사회진보연대 편집국장)
■ 토론: 최은아(인권운동사랑방 반성폭력위원회 위원), 김정은(사회진보연대 여성국장), 임혜숙(금속노조 정책국장), 지현(전국학생행진, 연대 문과대 여성주의 네트워크)
사회자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이하 100인위)> 이후로 사회진보연대도 논의를 통해 규약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내부적 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운동사회 대부분의 운동단체도 반성폭력 규약이 있고 어느 정도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반성폭력 운동을 통해 과연 여성에 대한 폭력이 사라지고 있는지, 운동의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듭니다. 이러한 내용을 좌담을 통해 밝혀 보고자합니다. 각자 속해있는 단체의 상황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지현 전국학생행진의 경우 페미니즘을 중요하게 사고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반성폭력 뿐 아니라 여성 노동권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페미니즘은 반성폭력운동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 반성을 하고 여성권과 노동권의 결합을 사고하자라는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반성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야기하자면, 운동이라면 다수 대중의 변화를 도모해야하는데 반성폭력 운동이 사건 해결에만 매몰되는 경향이 크고, 또 이러한 것이 대중운동으로 자리매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게는 일종의 안도감이나 피해목록을 작성하는 것으로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피해 상황에 대한 분석과 논의 보다는 불편함이나 폭력이라는 단어로 여성들의 경험을 치환하는 모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소통과 합의를 만들어 가기보다는 적대감만을 양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이러한 평가 속에서 반성폭력 운동이 다소 부차적인 쟁점이 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반성폭력운동을 넘어서자는 이야기는 많이 되고 있는데 아직 그 구체적인 내용이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임혜숙 현재 노동운동 내에서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사건을 해결하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노동운동이 반성폭력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듭니다. 노동운동 진영의 반성폭력 운동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다. 성폭력은 제제조치가 있어야 하고 근절되어야 한다.”를 합의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공동으로 형성된 것은 여성 활동가들의 노력의 성과물입니다. 하지만 내규에서 “성폭력은 뭐다.”라고 규정해버리면 이 규정을 바꾸는 작업은 어려워집니다. 또 반성폭력 운동이 논의의 확장을 목표로 한다고 했을 때 지금의 반성폭력 운동이나 내규가 성폭력의 개념이나 논의를 한정짓는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김정은 <100인위>를 계기로 당시 여성 활동가들이 언제든지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고, 사회진보연대 여성 활동가들도 이러한 사건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대처해야하는 지에 대한 논의를 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여성 활동가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운동사회의 가부장성이 어떻게 드러나는 지 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세미나 등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로 여성위원회가 만들어 지게 되었죠.
사회진보연대에서는 <100위>를 계기로 내규를 만들었지만 단체 외부에서 회원의 성폭력 사건, 비공개로 진행된 성폭력 사건 이외의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내규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사건이 거의 발생하지 않으니까 운동사회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해 활발히 논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폭력이 없다고 여성에 대한 배제와 폭력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발생한 사건을 계기로 하는 반성폭력 운동을 넘어,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논의와 실천으로 반성폭력 운동을 구성되어야 하는데 그 양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이기도 하고 사회진보연대 고민의 일천함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사회진보연대에서는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를 평가해보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론으로 지현 씨가 말한 것처럼 반성폭력 운동을 넘어서야 한다고 정리하였습니다. 오늘 좌담에서 이와 관련된 의견을 다른 분들이랑 나눠보고 싶습니다.
최은아 인권운동사랑방(아래 사랑방)은 2002년 2월 ‘성차별 금지 및 성폭력사건 해결을 위한 내규’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해 처리하는 과정에서 내규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성폭력 예방 차원에서 교육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도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방 내규는 크게 성폭력 사건 해결 처리과정과 예방활동을 모든 활동가의 권리와 의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면 내규는 의도하지 않게 잠을 자게 됩니다. 물론 내규에서 연2 회 교육을 명시하고 있으나, 6개월에 한 번 하는 교육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기교육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의 자세도 소극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공동체 내에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한편으로는 큰 피로감을 주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100인위>에서 제기했던 어려움들이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년부터 이어진 사건으로 올해 4월에 종결된 「자원 활동가 박00 씨 성폭력과 신뢰파괴 사건」의 경우, 처음에는 비공개로 사건이 진행했는데, 그러다 보니 서로 서로 힘들어하는 눈치인데 공식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하니까, 공감할 수도 없고, 소통할 수 없는 것 자체가 괴로웠습니다. 사건이 공개된 후에는 해결과정에서 가해자가 여전히 자신의 활동공간에서 떳떳하게(?) 활보할 때, 그 운동 공간에서 가해자를 ‘같이 고생한 사람인데 껴안아야하지 않겠냐’라는 얘기가 나올 때, 성폭력 사건을 공동체 내 우리문제로 인식하기보다는 ‘가해자 대 피해자’의 구도 안에서 보려할 때 힘들었습니다. 지난 번 사회운동포럼 새로운 활동양식 워크숍(페미니즘 거울에 비춰본 운동) 때도 느꼈지만 반성폭력 운동이 활동가들 사이에 공포감으로 다가온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게 반성폭력운동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이런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김정은 워크숍 관련하여 덧붙이자면 사회운동포럼 내에서 새로운 사회운동 활동양식이라는 기획단이 있는데, 이곳에서 여성 활동가 2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워크숍을 했습니다. 이때 ‘나에게 페미니즘은….’이라는 주제로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남성 활동가들이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토로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페미니즘은 ‘문득문득 존재가 느껴지는데 단지 검열의 계기’로써 혹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지위와 실제 가해자가 되었을 때 쏟아지게 되는 주변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페미니즘이 반성폭력 운동으로 표상되는 상황에서 이를 남성 활동가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각 단체의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반성폭력 운동의 쟁점이 몇 가지 이야기 된듯합니다. 그 중 반성폭력운동이 내규로 대표되고 있고 또 내규가 가진 한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관련하여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봅시다.
최은아 정확한 조사를 해보지 않아 얼마만큼 운동사회 안에 반성폭력 내규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규는 공동체 안에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고 예방하기 위한 내부적인 약속인데 이는 마치 법과 같이 최소한의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를 운동과 삶의 원리로 만들어가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이 필요한데 내규는 그 중 하나인 것이죠. 사랑방에서는 내규를 만드는 과정에서 다른 단체들의 내규도 검토하고 쟁점에 관한 학습과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그 과정이 상당히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들어 지고 나면 이런 과정이 잊혀지고 앙상하게 내규만 남습니다. 내규 그 자체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반성폭력과 관련해 일상에서 풀어가기 위한 구조-예방 교육과 실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령, 여성주의가 각 팀 사업에서 어떤 방식으로 스며들 수 있는지, 여성주의가 드러난 사업의 형태나 의제선정을 사려 깊게 보았으면 좋겠다. 또한 내규가 없는 단체 같은 경우 내규가 존재하는 다른 단체들과 경험이나 문제의식을 교류하면서 내규를 만들어가는 것도 유의미하다고 본다.
김정은 규약이 최소한의 법이라는 최은아 씨의 말이 현재 내규로 완성되는 반성폭력운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를테면 반성폭력 운동이 발생한 사건에 대해 성폭력이냐 아니냐라는 찬반 논의로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여성 억압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는 운동의 계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내규 중심의 운동은 사후적으로 사건을 처리하는데 머물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법 담론 안에서 성폭력은 남녀를 떠나 누구나 피해자/가해자가 될 수 있는 개개인의 사건으로 처리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성폭력 가해자라는 규정에 있어서는 성별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때 우리가 반성폭력 운동을 통해 제기하고자 했던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 여성의 권리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은 희미해져가고, 반성폭력 운동이 결국 개개인의 피해를 내규에 의해 처리하는 식의 활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이랜드 투쟁을 할 때 이랜드 조합원들이 자신들을 아줌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아줌마라고 부르면 성폭력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왜 아줌마라는 호칭을 거부하는지에 대해 제기를 하였습니다. 회사 측에서 노동자들을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비정규직 채용과 저임금을 정당화하는 등 노동권을 제약하였기 때문에 여성 노동자들은 이러한 호명을 거부하였습니다. 이러한 호명을 노동자 운동에서도 사용했던 것은 여성의 일차적 공간은 가족이라는 생각과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중년 여성들을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은 맞을 수 있지만 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여성노동자로 호명해야 하는지 논의가 가능했던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사례를 아줌마라고 부른 누군가를 성폭력 가해자로 제기했다면, 개개인의 문제로 해결하고자 했다면, 남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반성폭력 운동이 확장되기 위해서는 ‘뭐가 폭력이다, 불편하다.’를 이야기하는 피해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이 억압하는 여성의 권리가 무엇인지,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집단적으로 논의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임혜숙 최근의 경험을 하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얼마 전 서울지방법원에서 판결문이 왔습니다. 금속노조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였고 가해자를 징계 처리하였는데 그 가해자가 승복하지 않고 징계무효소송 낸 것에 대한 판결문이었습니다. 가해자 징계의 내용은 조합원 자격을 2년 동안 정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가해자 소송의 근거는 다양했습니다. 일단 진상조사위원회가 모두 여성으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는 것, 피해자 대리인은 그 진상조사위원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가해자 대리인은 참가하지 못했다는 것, 또 성폭력 사건의 내용 자체가 없었던 일이라는 것, 그래서 그 사건을 본인이 인정하지 않기에 그 징계는 무효라는 것입니다. 또 징계 내용이 너무 가혹하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2차 가해자도 함께 소송을 냈는데 내용은 2차 가해에 대한 개념 자체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금속노조도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에 대응하였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법원에서는 그 징계가 정당하다고 판결 내렸습니다. 재판부의 근거는 바로 내규였습니다. ‘너희 공동체 내에서 합의한 내규에 근거하여 그 절차가 이루어 진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징계 수위도 ‘이전까지 너희 조직 내에서 이러한 사건과 관련된 징계 수위를 봤을 때 그렇게 가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법에는 2차 가해라는 개념이 없지만 너희 내규에서 적시하고 있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내용의 판결이 났습니다.
내규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사건이 발생했을 때만 그 효력이 발휘되는 등의 문제점이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이렇게 가해자가 대부분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이런 소송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내규는 나름대로 피해 여성을 지지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봅니다.
내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차이는 그 조직의 공약수가 있냐, 없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공약수를 인정하고 한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안을 찾아보는 것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요? 공약수가 없는 상태에서 쟁점만 붙으면 힘들다고 봅니다.
한편 좀 전에 이랜드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 조직 내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줌마라는 호칭을 성폭력으로 제기했습니다. 피해자는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인해 수치심을 느끼고 차별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줌마라는 말은 규약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이게 성폭력이냐 아니냐라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성폭력 사건이든 아니든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건이 발행했을 때 우리 여성들도 이를 내규에 근거하여 성폭력 사건이라고 겁니다. 왜 이러한 문제가 발행했는지, 그 원인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논의가 제기되어야 하는데 성폭력 사건으로 제기하면 이러한 논의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를 조직 전체는 할 수 없고 진상 조사단 내부 몇 사람만 하게 됩니다.
반성폭력 내부 규약에 대해 이러한 두 가지 면이 공존한다고 했을 때 이를 어떻게 여성운동적 관점에서 진전시킬 것인가에 대해 더 고민을 해야 합니다.
최은아 아줌마라는 말이 규약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이게 성폭력이냐 아니냐라는 논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규 개정에 관한 목소리로 모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내규에 따라 이것이 해석의 문제라면, 피해자의 경험에 비추어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내규에 담지 못하는 성폭력 개념이라면 내규를 개정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규가 사문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개정되어야 합니다. 사랑방의 경우, 내규개정을 준비하고 있는데, 현재 내규에는 성이 sex와 gender 개념만을 포함하고 있어서 sexuality 개념까지 넣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지현 내규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규가 서술되는 방식이 무언가를 금지하는 방식으로 가게 되면 논의를 봉쇄하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성 활동가들의 경우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도 발언을 못하고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넘어가게 됩니다.
행진의 경우 규약을 여성의 권리 개념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들은 ~권리를 지닌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금지의 언어로 서술된 내규가 희화화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연대 같은 경우 총여학생회도 있고, 반성폭력 담론이 학생사회에 어느 정도 사회화 되어 있고, 전반적인 합의가 존재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대동제나 술자리에서 간혹 반성폭력 내규가 희화화됩니다. ‘너 그런 얘기하면 총여학생회에 끌려간다. 몇 조 몇 항 위반이다.’라는 이야기를 재미삼아 합니다. 내규가 희화화되는 것은 그것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충실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는 속에서 기본적인 합의를 명시하는 것은 중요하며 합의는 지속적인 논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다들 내규의 양면성에 대해 지적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내규를 개정한다든지 금지의 언어를 긍정의 언어로 바꾼다고 했을 때, ‘무엇이 성폭력이냐’ 라는 질문에 대해 더 근본적으로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계신 분들 사이에 기본적으로 성폭력에 대한 합의는 있겠지만 미묘한 차이가 존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임혜숙 노조의 경우 합의하고 있는 성폭력은 법으로 정하고 있는 성폭력의 개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성폭력운동을 통해서 성폭력의 범위를 확대하고, 대중운동화 하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전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합의가 된다면 그게 노조 내로도 들어와 규약으로도 반영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몇 명이 규약을 만들고 개정한다고 해서 조합원들 사이의 합의가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조직 바깥의 여러 활동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권리가 침해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발생시키는 구조를 문제 삼고 이러한 구조를 변화시키는 운동의 흐름이 존재한다면 노조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노조에서도 역시 반성폭력 내규를 희화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고해. 신고해. 여기 위원이 있어. 위원이.’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면서 제 앞에서는 입을 닫아버립니다. 그래서 오히려 여성들이 소외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또 성폭력이 발생하면 이를 담당하고 해결하는 주체는 거의 초죽음이 됩니다. 결국 그 활동가를 잃는 경우가 있기도 하죠. 그런데 내규에는 이러한 내용을 담을 수 없습니다. 반성폭력운동은 여성 활동가, 여성 조합원 더 나아가 이 땅의 여성들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운동인데 이러한 운동의 주체인 여성들은 더 힘들어 하는 상황이 발행합니다. 이는 구조적으로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죠. 이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합니다.
최은아 사랑방은 ‘성차별 금지 및 성폭력사건 해결을 위한 내규’ 1조에서 성폭력을 “성(sex, gender)에 기반 한 모든 육체ㆍ정신ㆍ환경적 침해 및 차별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마 다른 단체랑 많이 차이가 나는 것은 차별행위까지 포함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인해 수치심과 차별을 느껴 문제를 제기했다면 아마도 차별행위로 규정할 수 있을 듯합니다. 내규를 제정할 때, 차별영역까지 확대했던 것은 성에 대한 차별이 구조적이고 광범위하게 발생한다는 공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방의 경우, 대중조직이라는 정체성보다는 아직까지는 활동가들의 공동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내규에서 성폭력과 성차별의 개념을 넓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아서 소통과 동의를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의미 일뿐 활동가 조직이 대중조직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임혜숙 씨가 지적한대로 성폭력이 발생하면 이를 담당하고 해결하는 주체는 너무 힘들어 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을 내규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령, 대책위만의 고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든지, 대책위에서 활동했던 활동가를 정서적으로 지원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도입한다든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원체계를 내규를 통해 모을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공개사건의 경우 공동체 안에서 함께 논의해 동료들이 힘을 주어 담당자를 지지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만, 비공개 사건의 경우 여전히 주변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힘든 조건이 존재하는 만큼 대책위 활동가가 재충전할 수 있는 공식․비공식 제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령, 사랑방의 경우「자원 활동가 박00 씨 성폭력과 신뢰파괴 사건」이 마무리되는 즈음,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어려움을 소통하고 공감하는 자리를 기획했습니다. 이름 하여, ‘토닥토닥 여성주의로 말 걸기’란 프로그램을 통해 반성폭력 운동의 운동적 지향과 현실에서 만나는 한계를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책위 활동을 했던 활동가는 자신이 힘들었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운을 얻었고, 남성 활동가들은 솔직하게 자신의 고민을 던져주었습니다.
김정은 애초 반성폭력 운동이 성폭력 사건 처리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습니다. 좀 전 임혜숙 씨가 이야기 했듯이 아줌마라는 단어에 여성비하의 의미가 어떻게 담겨있는지 등에 대한 논의가 그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하는데 실제 논의는 진상조사위원회에서만 이뤄지고 거기서 결과가 나오면 나머지 사람들은 다 받아들여야 하고 가해자도 이를 인정하면 징계를 받는, 절차에 따라 치러지는 상황입니다. 이는 내규의 기능적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 반성폭력운동이 1990년대 후반에 대학가에서 시도가 됐던 맥락은 성폭력을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구조와 문화를 보자는 거였고 이를 해결하기위해 공동체의 논의가 필요하다는 제기였습니다. 이런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원인이 뭐냐를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로서 성폭력 사건을 매개로 잡았던 것이고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사건 공개는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건 공개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공개가 안 되는 경우 논의하기 힘든 구조가 발생하고 결국 논의 없이 처리만 됩니다. 성폭력 규정과 사건 처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2차 가해라고 규정했던 지점은 공동체의 합의를 위한 논의를 봉쇄했던 측면이 크다고 평가해볼 수 있습니다. 성폭력 사건이 없다고 해서 여성이 처한 현실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건의 유무를 떠나 공동체 내에서 논의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지만, 반성폭력 운동에서는 발생한 사건에 대한 처리 외에 무엇을 어떻게 논의할 것인가가 불명확했던 것이 공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폭력을 하나의 ‘발생하는’ 사건으로 한정하게 되면, 반성폭력 운동은 발생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성폭력은 여성의 육체적․정신적 고유성, 인간적 존엄성과 권리를 침해하는 제도, 관행, 실천으로 확장해서 봐야합니다. 그래야지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반대하는 운동은 사건 처리를 넘어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여성운동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현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고 피해자가 사건 공개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을 알고 있는 여성이 있었고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 여성은 매우 괴로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연 그게 옳은 방식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피해자를 치유하는 것과 공동체에서 함께 그 문제를 안고 가는 것은 대립되는 것이 아닌데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성폭력의 문제를 어떻게 공동체의 문제로 안고 갈 것인지, 공동체의 변화를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히 진행되어야 합니다.
저는 여성이 스스로의 성을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을 가로막는 기제, 그것이 성폭력이고 성폭력적인 구조라고 생각한다. 성폭력을 이렇게 바라본다면, 성폭력에 대한 대응은 이러한 억압기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해체하려는 운동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지만 성폭력 사건 ‘해결’이라고 했을 때, 해결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고민이 듭니다. 성폭력 사건이 해결될 수 있을까?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 반성폭력 운동은 단일사건 해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고 대상화하는 흐름에 대한 싸움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반성폭력운동이 사건에만 갇혀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존재하는 사회적 맥락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여성억압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을 해야 합니다. 아까 이야기 했었던 아줌마 논쟁이나 이랜드 노동자가 빨간 립스틱을 바르기를 강요받았던 것 등이 그러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성폭력운동은 여성과 남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이것은 여성과 남성이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윤리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나가는 운동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자 각자가 생각하는 성폭력에 대한 정의와 성폭력 사건의 공동체 내의 공론화, 피해자 상처 치유 및 반성폭력 운동주체가 느끼는 어려움 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덧붙여 성폭력 사건이 피해자/가해자 구도로 나누어서 논의되는 과정에 대해서도 평가해봅시다.
임혜숙 반성폭력 내규에서 피해자/가해자라는 대립구도가 남성 일반을 적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공동체 속에서 합의한 내규이지만 사건이 발생하고 그 내규에 따라 사건처리가 이루어지게 되면 남성 일반을 적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남성들을 입을 닫습니다. 우리가 내규를 만드는 과정에서 목표했던 것은 바로 조직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우리의 무기를 만들자는 거였는데 오히려 이것이 논의를 가로막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다들 뒤에서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논의를 공식적인 자리로 끌어와야 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와서 우리가 처음 성폭력을 인지한 것도 얼마 안 됐고 그런 성폭력을 조직적 관점에서만 접근했지 여성노동권의 맥락에서 접근했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성적 관점, 여성노동권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조직 내 구조적인 문제를 들여 보기 위한 논의를 촉발하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오히려 이런 문제가 조직의 위상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신속하고 빠르게 처리해야한다는 관점이 우세했고 때문에 논의는 거의 안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김정은 지금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전반적인 반감이나 여성운동에 대한 반감은 남성을 적으로 만들거나 남성이 기존에 누린 권리를 빼앗는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이 적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자본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할 때도 자본가 개인을 적으로 규정하기 보다는 노동력을 상품화하고 있는 사회 구조에 문제제기합니다. 그렇다면 반성폭력 운동에서 남성들의 지위에 대한 고민이 들 것인데, 여기서는 여남 관계를 바꾸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억압적이지 않고 육체적, 심리적, 경제적으로 종속되지 않는 여남의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개별 개인들의 관계를 바꾸는 문제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자신들의 집단적인 권리를 제기하고 이를 인정하는 사회로 만들어 나감으로써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남성들이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는 경우는 딸이 생기고 자신의 딸이 그러한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인데, 가족이나 친한 누군가가 그러한 폭력에 처하지 않아야 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식이 아니라, 여성이라면 누구나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을 공동체가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최은아 여성주의에 관한 교육을 상반기에 진행했을 때, “여성주의란 내게 00이다.”라는 방식으로 이야기의 물꼬를 터 보았습니다. 대개 여성주의가 여성에게는 ‘해방’의 언어이지만 남성에게는 ‘검열과 조심’의 언어로 다가왔습니다. 가부장적인 질서에서 여성 못지않게 남성도 지배관계에서 인간의 존엄을 거부당하는 경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느낌대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여성주의는 드센 여성들만 하는 운동으로 이미지화되었고, 어찌되었건 피해자 여성 가해자 남성으로 고착되었습니다. 그런 구도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행하면 남성들은 침묵으로 자기를 표현합니다.
또한 현실에서 여성주의를 남성들에게 얘기할 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죽~ 목록화해서 얘기하자니 참 기운이 딸렸습니다. 사랑방에서 운동과 일상을 여성주의로 재구성한다고 할 때 남성 활동가들의 딱 한마디 “그게 뭔데요?”라고 하면, 맥이 풀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함께 풀어간다기보다는 아직까지 여성이 주도하고 남성이 이해와 공감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참 피곤합니다. 그런 노력(?) 덕분에 ‘머리’로는 남성들이 여성주의를 인지하는 데 그 앎이 아직 ‘가슴과 손’까지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임혜숙 그래서 나는 가해자 징계 프로그램에 반대합니다. 보통 조직의 징계 내용에는 면책, 경고, 정권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데 성폭력은 유독 가해자를 교화키는 프로그램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징계위원회에서 결정하면 결국 그 몫을 고스란히 여성들이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여성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침해받지 않고 어떻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하는데 가해자 남성의 인간화를 위해서도 역량을 쏟아야 하니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여성이 울분과 고통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상담을 해오면 우리는 보통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문제이니 조직 내에서 함께 풀자고 설득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부터 끝날 때 까지 그 여성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 받았냐고 묻는다면 자신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그 동안 반성폭력 운동 과정에서 드러났던 문제점이나 쟁점에 대한 의견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반성폭력 운동이 실질적으로 여성들에 대한 폭력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운동이 확장되기 위해서 우리의 대안이 무엇이 있을 수 있는지 추상적인 수준에서라도 이야기를 해봅시다.
최은아 우리가 결과중심과 수직(위계)적인 사고에 익숙해져 있는데 이를 과정중심과 수평적으로 엮어내는 방식으로 변화시켰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활동의 방식과 일의 배열이 달라질 것입니다. 가령, 권력이라는 것을 수직적인 대표성으로 정의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서로에게 힘을 주는 방식으로 규정한다면 아마 조직문화 전반이 지금보다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가까운 소통이 될 것입니다.
임혜숙 여성들이 너무 친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권리가 있는데 내 권리를 발휘하기에는 너무 제약이 많은 구조와 조건 속에 살고 있습니다. 피해자를 보면 자기 얘기만 안합니다. 가해자들이 제발 제명만 피해달라고 하고, 처자식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 피해 여성들은 가해 남성의 부인을 걱정하고 징계의 수위를 낮춥니다. 조직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에 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피해 감정을 필터를 대고 거릅니다.
대안을 이야기 해보자면 여성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권리를 쏟아내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조직적으로 합의가 된 내용이든 아니든 간에.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합니다. 그러면 조직에서 ‘너가 너무 이기적이다. 조직을 너무 모른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논의가 될 것이다. 또 자신의 권리를 어디에 쏟아낼 것인가 했을 때 노동권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를 사는 여성들의 권리가 무엇이냐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여성들의 노동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현 앞서 행진이 여성권과 노동권의 결합을 이야기 하면서 반성폭력 운동이 부차화 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사실 이 둘은 분리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를 분리시켜 고민하게 된 것은 실제 노동권과 여성권의 결합의 실내용이 밝혀지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반성폭력 운동이 내규나 사건에 매몰되지 않고 확장되어야 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대안은 바로 노동권과 여성권의 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실내용을 투쟁의 과정에서 언어화하여 풀어내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은아 반성폭력운동이 소극적으로 사건 해결에 그치는 것을 넘어 여성주의를 풍부하게 하는 운동으로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즉 여성주의가 운동의 가치와 조직의 원리로 녹아들기 위해서는 운동의 의제를 여성주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호주제 폐지 운동을 여성의 가족구성권까지 확대한 것이나 이랜드 투쟁을 여성 비정규직의 노동권으로 제기했다는 점은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또한 여성주의가 조직의 원리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삶에서 훈련과 교육을 해야 합니다. 또 편하게 성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 문화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랑방 같은 경우 활동가 온라인 소통 공간 ‘마당’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여성주의에 관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기획을 정기적으로 합니다. 가령 여성주의에 관해 읽거나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책, 영화, 음악을 안내하거나 비혼으로 살기위해 필요한 것들을 같이 얘기한다든지, 성폭력 사건 해결과정에서 느낀 경험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등에 대한 고민을 나눕니다. 이렇게 자신의 어려움이나 상처를 드러내면 치유가 되는 효과를 봤습니다.
김정은 반성폭력 운동을 평가할 때 핵심적으로 대중운동으로서 반성폭력 운동이 자리매김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반성폭력 운동이 결과적으로 그 사건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가해자 남성과 피해자 여성 개인의 문제로 소급되었고 결과적으로 대중운동으로 풀어가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언제부턴가 집회에서 발언되는 ‘노동형제’라는 말 속에 여성이 배제되어있다는 문제제기가 계속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고 ‘왜 이런 말을 쓰냐, 이건 성폭력이다, 발언자는 사과하라’고 이야기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노동자의 표상에 왜 여성이 없는지를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바꿔내기 위한 과제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게 필요합니다. 70년대 신발, 고무 공장 등에서 일하던 미혼의 여성노동자들이 해당 산업들이 사양길에 오르자 직장을 잃게 되고 결혼을 하면서 주부가 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비공식적인 일이나 파트타임으로 일해 왔지만. 이런 과정에서 여성노동자는 비가시화되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에 따르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형제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는 제안이나 비난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를 주체화하고 조직화하기 위한 전략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성폭력 운동을 넘어서기 위한 대안을 이야기해본다면 여성운동을 잘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자 반성폭력 운동을 넘어 여성운동의 확장에 대한 고민까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오늘 논의되었던 내용들이 계속해서 소통되고 대중운동 상의 계기들을 통해서 구체화되길 바립니다. 오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