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시대의 지리학, 슬럼과 도시- 마크 데이비스, 『슬럼, 지구를 뒤덮다』
세계화는 이 단어가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바대로 지극히 공간적인 현상이지만, 세계화의 지리적 함의가 충분히 주목받은 것 같지는 않다. 흔히 세계화가 공간적인 현상이라는 말이 세계화 시대에는 모든 것들이 근본적으로 세계적 규모에서 결정된다는 식으로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세계화의 구조를 정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리적인 거시변화를 놓치지 않으면서, 서로 다른 규모에서 실행되는 다양한 과정들을 면밀하게 파악해야 한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마이크 데이비스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2007)를 통해 신자유주의 시대에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도시의 빈곤화를 상세히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세계화 시대의 지리학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 후반의 가장 극적이고 가장 영향이 널리 미친 사회적 변화이자 우리를 과거세계로부터 영원히 단절시킨 변화는 농민층의 사멸”(『극단의 시대』(하), p. 402)이라고 주장하면서, 도시와 도시화 과정에 주목했다. 하지만 데이비스에 따르면 이러한 도시화 과정은 21세기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2050년에 약 100억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구의 95%가 개발도상국의 도시에 집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시의 인구 규모와 도시의 경제 규모의 상관관계가 점점 더 옅어진다는데 있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각지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야기한 국내경제와 사회안전망의 붕괴로 인해 도시의 경제가 붕괴되었다. 하지만 농촌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는 힘 또한 강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시로 몰린 것이다.
이렇게 도시로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슬럼에 정착하게 되고, 도시 내부에서는 경제의 붕괴로 빈민들의 슬럼이 확대된다. 보수적인 유엔의 집계에 따르더라도 2005년 슬럼 거주자는 전세계적으로 10억 명을 넘어선다. 놀랍게도 유엔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도 1,420만명이 슬럼에서 살고 있으며, 이는 도시 인구 중 37%에 이른다. 슬럼의 형태는 다양하다. 도심의 퇴락 지역에 형성되던 전통적인 도심 슬럼이 지속되고 있고 이는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도시 노숙의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지만, 1970년대부터는 무질서하게 뻗어나가는 도시 외곽을 따라 변두리형 슬럼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변두리형 슬럼은 토지나 건물을 점거하는 스쿼팅으로 대표되는데, 이 지역은 상하수도와 전기 같은 도시의 기반시설의 한계지이다. 이런 분류에 따르면 서울의 포이동과 서울시 외곽에 존재하는 비닐하우스 촌은, 대부분 '철거'되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변두리형 슬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서울역 근처의 동자동 쪽방촌은 도심형 슬럼의 예가 될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도시화와 슬럼화가 급격히 발생한 까닭은 국가 관리와 통제 체계가 변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의 식민지 정부는 선주민이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막았고, 남아메리카의 권위주의 정부도 이주 통제 정책을 펼쳤다. 또 중국은 개방 이전에는 아주 엄격한 이주 통제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급속한 도시화가 슬럼의 확산과 동의어가 될 필연성은 없었다. 60년대 몇몇 국가의 개혁주의 정부, 혁명 정부는 토지 재분배와 야심찬 주택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중앙 정부가 주택 공급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축소한 IMF와 세계은행의 경제 강령 때문에 완전히 좌절되었다.
세계은행은 1970년대부터 도시 주택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빈민 정책에 있어서 세계은행은 자조의 이념을 강조했다. 그러나 자조 이데올로기는 국가의 보조와 책임을 방기하는 근거가 되었고, 자조를 위해 융자된 자금에 대한 회수를 강조했기 때문에 극빈층에게는 돈을 빌릴 기회도 없었다. 한편 슬럼을 재개발하는 재정착 프로젝트는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중산층의 부를 증가시키는 데는 도움이 됐지만 빈민은 다른 슬럼으로 다시 이주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세계은행과 유엔개발계획, 기타 원조 기구들은 정부를 매개로 하지 않고 직접 지역의 주민 NGO와 연결되는 경향을 보였다. NGO의 폭발적인 증가로 도시개발 원조의 양상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모델은 권능화, 참여통치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전환의 실질적인 해택은 지역 주민이 아니라 대형 NGO에게 돌아가고 있다. 지역사회가 활성화되고 주민들의 삶이 개선되기보다는 초국적 전문가, 개발대행업체, 국제NGO의 삼각 동맹이 공공해진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후견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이전에 좌파가 차지했던 사회공간을 획득한 NGO는 도시 사회운동 전반을 관료화·탈급진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NGO는 전통적인 정치기구와 같은 방식으로 전문지식 제공자 및 중간상 역할을 독점하고, 풀뿌리 운동으로서의 동원력은 약화되었다. 저자는 '좋은 통치'와 같은 감언이설은 세계적 불평등 및 채무라는 핵심 문제를 비껴가고, 빈곤을 경감시킬 거시 전략의 부재를 은폐한다고 강력히 비판한다.
슬럼을 소탕하기 위한 계획은 항상 폭력을 동반한다. 국제적인 행사는 제3세계 도시빈민을 '청소'하는 가장 좋은 구실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해 쫓겨난 서울시민이 72만명에 달했는데 20년 뒤인 2008년 올해 올림픽을 치르는 베이징에서도 같은 상황이 재현될 것이다. 몇몇 지역에서는 고의적인 방화와 같은 방법으로 훨씬 더 폭력적인 슬럼 소탕 작전이 이루어진다. 한편 슬럼을 제거하기 위해 슬럼을 범죄화하는 방법이 흔히 사용된다. 범죄소탕을 위해서 슬럼 철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 이후 뚜렷해졌다. 2005년 프랑스의 방리유에서 발생한 소요사태는 이민자와 특정 지역에 대한 범죄화의 결과였다.
슬럼의 범죄화와 동시에 도시 내외에 상류층을 위한 안전한 지대가 조직되었다.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폐쇄형 교외 주택단지가 생성되고, 전기담장과 최첨단 방법시설을 갖춘 주택이 늘어난 것이다. 엄격한 출입통제를 하는 타워 펠리스와 같은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 급격히 늘어나는 사설 경비업체는 한국도 이런 추세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이렇게 도시의 공간이 재구조화되면서 부유층과 빈민의 공간적 단절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 중류층이 빈민과 공유하는 최소한의 공간이 사라지고 공적 공간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다. 빈곤과 폭력이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슬럼은 안전과 보건 위생의 측면에서도 최악의 공간이다. 슬럼은 쓰레기매립장, 폐광 같은 오염된 땅과 근접해 있고, 도금, 염색, 화약약품 제조 등 다른 지역에서 쫓겨난 유해산업들이 입지해 있다. 또 슬럼은 가파른 산비탈처럼 자연재해에 의한 피해가 집중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홍수와 산사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는 빈민과 슬럼 거주자에게 집중되는 것이다. 얼기설기 밀집한 슬럼의 주택과 정비되지 않은 전기시설, 난로와 아궁이는 빈번한 화재를 발생시키고, 한번 발생한 화재는 재산과 인명의 대규모 피해로 번진다. 자동차 중심의 교통정책은 도시 공기를 악화시키고, 교통사고율을 높여 슬럼의 보건상황을 한층 악화시킨다.
슬럼에서는 정화조 시설이 없기 때문에 배변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곳곳에서 썩어가고, 화장실조차도 충분치 않다. 화장실 수의 부족은 특히 여성에게 큰 문제가 된다. 여자의 정숙함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여성은 남성처럼 자유롭게 야외 공간을 이용할 수 없고, 따라서 심야까지 배변을 조절하고 참아야 한다. 그리고 여성은 배변을 위해 항상 성폭력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슬럼에는 정화조뿐 아니라 상하수도 시설도 부족하다. 슬럼에서 오염된 물로 인한 전염병은 의료접근도가 낮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따라서 거대슬럼은 신종 질병이나 전통적인 질병을 유례없는 규모로 키워서 전세계로 확산시키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슬럼이 급속히 팽창하고 슬럼의 환경이 더 악화된 것은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1980년대 IMF와 세계은행이 채무를 빌미로 제3세계의 경제를 구조조정하면서 농업보조금이 끊긴 소농과, 안정적인 직장을 잃은 도시민이 슬럼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실업률도 늘었지만, 불완전고용과 비공식 경제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특히 여성의 생존기술과 능력이 구조조정의 시기에 활용되었다. 국경이 강화되고 국가 간 이주가 엄격해지면서 21세기의 잉여인간을 담을 공간은 슬럼밖에 없는 것 같다. 유엔에 따르면 슬럼 인구는 해마다 2,500만명씩 증가하고 있다.
세계화는 공간과 관계된 우리의 경험을 바꿀 뿐만 아니라, 여기에 적합한 저항과 정치를 만들 것을 요구한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분석적 이해와 정치적 행위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범하는 잘못은 유일무이한 하나의 규모에만 우리 모두의 생각을 고정시키고, 이 규모에서의 차이들을 정치적 분열의 근본적인 선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발생한다.”(『희망의 공간』, p. 119)고 주장하면서 세계화의 지리학적 속성을 파악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우리의 경험을 반추해 볼 때 전통적인 좌파 정치의 지리학은 공장과 민족국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장, 기업별 노조, 산별노조, 진보정당, 계급정당 …. 이러한 용어 일람은 공장/국가의 지반 위에서 전개된 정치적 관념을 보여준다. 하지만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도시 경제가 재편되고, 빈곤의 문제가 대두되고, 여전히 광범위한 자영업자 층과 비공식경제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좌파의 정치형태가 한계적인 상황에 직면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세계화의 지리적 변모에 걸맞는 정치의 공간을 발명할 것이 요구되고 있고, 최근 일각에서 제기하는 '지역사회운동'을 이러한 측면에서 정치를 새롭게 사고하자는 제안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이러한 제안은 뒤늦은 감이 있다. 최근 주목받은 바 있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로 시의 참여예산제나, 시간이 좀 지나기는 했지만 1980년대 영국 런던의 광역시의회의 경험이나 일본의 혁신지자체 등의 사례 등을 봤을 때 그들은 일찍부터 지역운동에 주목해온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마이크 데이비스의 지적처럼 현재는 좌파가 차지했던 지역의 사회적 공간을 신자유주의 NGO와 기업이 탈취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또 한국에서도 이미 20년 전부터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일각은 지역운동을 주목했고, 지금까지 여러 가지 성과와 한계를 낳고 있다. 혹은 미국처럼 지역공동체나 풀뿌리 차원에서는 활발한 운동이 연방정치 차원에서는 무력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역사회운동에 주목한다고 했을 때는 세계화의 지리학에 대한 탐구와 지난 역사에 대한 분명한 평가를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모호한 용어인 “지역”을 단순히 새로운 공간이나, 조직화의 대상으로 수단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 책에서 말하듯 세계화 시대의 도시공간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현실이며, 따라서 우리의 사고와 경험을 근본적으로 재조직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