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용역깡패
듣고 말하기를 반복하면 욕도 는다
내 나이 30대 후반에 들어 시작한 빈민 운동, 그것도 철거민 운동을 시작하면서 평생 살아오다 먹어본 욕 이상의 욕을 다 듣는 듯하다. 바로 운동의 특성상 항상 만나야 하는 '용역 깡패'의 존재 때문이다. 용역 깡패들과 대립할 때마다 경찰들은 출동하여 욕하는 용역깡패와 욕먹는 우리를 열심히 관찰해준다. 경찰들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한다. '먼저 때리는 사람 잡아가야지!'라는. 따라서 우리는 주먹으로 싸우기보다는 욕설로 싸운다. 여성, 노인, 장애인 철거민을 만나면 그들의 욕설의 강도는 더 강해진다. 한 마디로 사회적 약자들의 약점이 용역깡패로 인하여 확실히 부각된다.
용역깡패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솔직히 두려웠다. 나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선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마음이 따라오질 못한다. 그들의 외모는 뭐랄까, 지나치게 크다. 그리고 험상궂다. 그들이 주로 노인과 여성이 많은 철거민들에게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면 나도 모르게 흥분하여 함께 욕설을 해댄다. 그러면서 욕을 많이 먹은 만큼 내 욕 솜씨도 갈수록 늘어나는 편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두렵다. 술이나 한 잔 하고 밤에 집으로 가는 좁은 골목길에 젊은 남자가 둘 이상만 모여 있으면 가슴을 쓸어내리곤 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미 주류언론에서도 조직폭력배가 철거용역으로 거듭나며 양성화되고 있다고 보도하였고 실제로 그들을 만나 본 사람이라면 그 보도가 틀리지 않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빈민 현장 활동'을 위해 용역깡패들과 대치하고 있는 지역에 방문한 한 대학생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어왔다.
"용역깡패 분들, 아니, 용역깡패들의 인권도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 아닐까요?"
나는 "어? 용역 깡패들이 인간들이었나요?"라고 대답해줬었다.
천안에서 생긴 일
2007년 7월 어느 날 새벽. 천안에서 용역깡패들이 침탈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눈에 낀 눈곱을 떼어가며 부랴부랴 천안으로 내려갔다. 회원이 주로 서울에 밀집한 우리 단체의 회원들을 끌어 모으느라 천안에 내려가는 내내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어야 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고, 서울에는 몇 몇 동지들이 구속되려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미 건물이 반 이상 철거되었다니 내려가면서 한숨만 나왔다. 도착하는 순간 나를 맞아준 것은 서로 팔짱을 끼고 우리 출입을 저지하고 있는 '지난번에 만난' 낯익은 용역깡패들이었다.
"형,(내가 그들에게 이렇게 불리다니.) 또 오셨네요. 헤헤헤."
"인사도 하지마라 이놈들아!!"
인간관계라는 것이 원래 자주 만나면 친해지는 것인가?
내가 도착한 시간인 오전 열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무려 열 시간동안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몸싸움을 하다가 쉬다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나름대로 당시 투쟁이 시작되었던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을 그 사람들이 왜 하는가를 설명해주고, 너희들도 경호원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거나, 아니면 대부분이 무술 유단자이니 도장 사범 같은 일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해보기도 하였다. 그들은 자신도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며 요즘 유도나 태권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고 반박했다.
용역깡패들과 이렇게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처음이었지만, 결국은 가진 자들의 장난으로 못 가진 자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러던 와중 덩치가 아주 큰 용역 혼자 앉아있는 것을 보고 내가 먼저 말을 붙여 보기도하였다.
"넌 몇 살이나 되었니? 덩치가 커서 나이 판단이 안 된다"
스무 살 재수생이라는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학원 쉬는 날인데 친구가 좋은 알바 있다고 해서 와봤어요. 형, 근데 이런 일 영화 같은데서 봤는데 나쁜 짓 아니에요? 다음부턴 안 올래요."
새해 소원 - 용역깡패가 없어지기를
나중에 나에게 귓속말로 "형, 저는 아까 미는 척만 했어요." 라고 한 그 귀여운(?) 용역에게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일당 6만원에 팀장에게 10%를 상납하고 하루에 5만 4천원을 받아 간다한다. 그들이 '팀장'이라고 부르는 용역은 자신이 정규직임을 '자랑'했었다.
2008년 2월, 상도 4동. 양녕대군 후손들의 사유지에 투기성 있는 가옥주들이 양녕대군 후손들의 허락도 없이 재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세종대왕 형님의 후손들은 용역을 급파하시어 조상이 물려준 신성한 토지를 보호하려 하고 있다. 참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용역 발주는 재개발 조합원인 가옥주가 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보통 그 와중에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는' 세입자들이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이도 옆에서 지나가면 무서워 보일 청년들이 (역시 나는 외모로 사람을 많이 따지는 건가?) 동네를 가로막고 낯선 사람 신분 확인은 물론 주민들이 들고 다니는 물건도 검사하고 있다. 도대체 지들이 뭔데 이런 짓을 하는 건지? 혹시나 미군에게 점령당한 이라크 주민들이 상도 4동 세입자 주민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2008년이 되면서 솔직히 '올해는 용역이 없어지기를, 그게 좀 힘들다면 마주치지 않기를'이라고 새해 소원을 빌었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렇게 적재적소에서 만나버리고 말았다.
용역들이 왜 있어야 하는지 간단히 말하자면 현행법상 재건축을 하는데 일반적으로 대기업인 시행사는 재개발 지역의 조합원(가옥주)들에게 선정되고 그 가옥주들은 시행사가 빨리 들어와서 공사할 조건을 만들어주기 위하여 용역을 발주한다. 철거 용역 회사는 공사가 이루어질 환경을 빨리 조성하면 상금도 받지만 시간이 늦춰질수록 위약금을 물어야하는 사태도 발생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큰 훼방꾼인 세입자가 말을 안 들을수록 거칠게 대한다. 재개발에 따른 가장 큰 수혜자인 대기업 건설자본은 여기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책임이 없다. 사고가 발생하면 역시 용역회사의 책임이지 시행사의 잘못은 없다. 따라서 대기업 하청 노동자들의 모습이 생각나 약간 동정이 들기도 하였다. 실제로 "우리도 먹고 살게 좀 도와주슈!!" 라고 절규하는 용역반 소장도 있었다.
사실 이미 아르바이트건 정규직이건 그리 부유하지 않은 청년들이 용역으로 나서는 상황인데 역시 서민들끼리 싸움 붙여놓고 건설 자본은 위에서 구경만 하는 형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건설자본이 존재하고 거기에 기생하는 용역깡패. 용역깡패가 없어지길 바라는 것보다 먼저 건설자본이 없어지는 사회를 바라는 게 더 빠를까?
상도4동에 집회신고를 내기 위하여 정보과 형사와 같이 동네를 돌아보니 용역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용역들이 경찰을 무서워 한다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동네 한 구석에서 만난 어느 용역.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 고생하세요."
라고 수줍은 듯 웃으며 인사까지 하는 용역의 모습이 당연히 가식적이어야 했을 텐데도 내겐 그가 너무 천진난만해보였다. 그래서 더욱 머리가 혼란스럽다.
내 나이 30대 후반에 들어 시작한 빈민 운동, 그것도 철거민 운동을 시작하면서 평생 살아오다 먹어본 욕 이상의 욕을 다 듣는 듯하다. 바로 운동의 특성상 항상 만나야 하는 '용역 깡패'의 존재 때문이다. 용역 깡패들과 대립할 때마다 경찰들은 출동하여 욕하는 용역깡패와 욕먹는 우리를 열심히 관찰해준다. 경찰들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한다. '먼저 때리는 사람 잡아가야지!'라는. 따라서 우리는 주먹으로 싸우기보다는 욕설로 싸운다. 여성, 노인, 장애인 철거민을 만나면 그들의 욕설의 강도는 더 강해진다. 한 마디로 사회적 약자들의 약점이 용역깡패로 인하여 확실히 부각된다.
용역깡패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솔직히 두려웠다. 나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선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마음이 따라오질 못한다. 그들의 외모는 뭐랄까, 지나치게 크다. 그리고 험상궂다. 그들이 주로 노인과 여성이 많은 철거민들에게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면 나도 모르게 흥분하여 함께 욕설을 해댄다. 그러면서 욕을 많이 먹은 만큼 내 욕 솜씨도 갈수록 늘어나는 편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두렵다. 술이나 한 잔 하고 밤에 집으로 가는 좁은 골목길에 젊은 남자가 둘 이상만 모여 있으면 가슴을 쓸어내리곤 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미 주류언론에서도 조직폭력배가 철거용역으로 거듭나며 양성화되고 있다고 보도하였고 실제로 그들을 만나 본 사람이라면 그 보도가 틀리지 않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빈민 현장 활동'을 위해 용역깡패들과 대치하고 있는 지역에 방문한 한 대학생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어왔다.
"용역깡패 분들, 아니, 용역깡패들의 인권도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 아닐까요?"
나는 "어? 용역 깡패들이 인간들이었나요?"라고 대답해줬었다.
천안에서 생긴 일
2007년 7월 어느 날 새벽. 천안에서 용역깡패들이 침탈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눈에 낀 눈곱을 떼어가며 부랴부랴 천안으로 내려갔다. 회원이 주로 서울에 밀집한 우리 단체의 회원들을 끌어 모으느라 천안에 내려가는 내내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어야 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고, 서울에는 몇 몇 동지들이 구속되려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미 건물이 반 이상 철거되었다니 내려가면서 한숨만 나왔다. 도착하는 순간 나를 맞아준 것은 서로 팔짱을 끼고 우리 출입을 저지하고 있는 '지난번에 만난' 낯익은 용역깡패들이었다.
"형,(내가 그들에게 이렇게 불리다니.) 또 오셨네요. 헤헤헤."
"인사도 하지마라 이놈들아!!"
인간관계라는 것이 원래 자주 만나면 친해지는 것인가?
내가 도착한 시간인 오전 열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무려 열 시간동안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몸싸움을 하다가 쉬다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나름대로 당시 투쟁이 시작되었던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을 그 사람들이 왜 하는가를 설명해주고, 너희들도 경호원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거나, 아니면 대부분이 무술 유단자이니 도장 사범 같은 일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해보기도 하였다. 그들은 자신도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며 요즘 유도나 태권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고 반박했다.
용역깡패들과 이렇게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처음이었지만, 결국은 가진 자들의 장난으로 못 가진 자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러던 와중 덩치가 아주 큰 용역 혼자 앉아있는 것을 보고 내가 먼저 말을 붙여 보기도하였다.
"넌 몇 살이나 되었니? 덩치가 커서 나이 판단이 안 된다"
스무 살 재수생이라는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학원 쉬는 날인데 친구가 좋은 알바 있다고 해서 와봤어요. 형, 근데 이런 일 영화 같은데서 봤는데 나쁜 짓 아니에요? 다음부턴 안 올래요."
새해 소원 - 용역깡패가 없어지기를
나중에 나에게 귓속말로 "형, 저는 아까 미는 척만 했어요." 라고 한 그 귀여운(?) 용역에게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일당 6만원에 팀장에게 10%를 상납하고 하루에 5만 4천원을 받아 간다한다. 그들이 '팀장'이라고 부르는 용역은 자신이 정규직임을 '자랑'했었다.
2008년 2월, 상도 4동. 양녕대군 후손들의 사유지에 투기성 있는 가옥주들이 양녕대군 후손들의 허락도 없이 재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세종대왕 형님의 후손들은 용역을 급파하시어 조상이 물려준 신성한 토지를 보호하려 하고 있다. 참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용역 발주는 재개발 조합원인 가옥주가 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보통 그 와중에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는' 세입자들이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이도 옆에서 지나가면 무서워 보일 청년들이 (역시 나는 외모로 사람을 많이 따지는 건가?) 동네를 가로막고 낯선 사람 신분 확인은 물론 주민들이 들고 다니는 물건도 검사하고 있다. 도대체 지들이 뭔데 이런 짓을 하는 건지? 혹시나 미군에게 점령당한 이라크 주민들이 상도 4동 세입자 주민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2008년이 되면서 솔직히 '올해는 용역이 없어지기를, 그게 좀 힘들다면 마주치지 않기를'이라고 새해 소원을 빌었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렇게 적재적소에서 만나버리고 말았다.
용역들이 왜 있어야 하는지 간단히 말하자면 현행법상 재건축을 하는데 일반적으로 대기업인 시행사는 재개발 지역의 조합원(가옥주)들에게 선정되고 그 가옥주들은 시행사가 빨리 들어와서 공사할 조건을 만들어주기 위하여 용역을 발주한다. 철거 용역 회사는 공사가 이루어질 환경을 빨리 조성하면 상금도 받지만 시간이 늦춰질수록 위약금을 물어야하는 사태도 발생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큰 훼방꾼인 세입자가 말을 안 들을수록 거칠게 대한다. 재개발에 따른 가장 큰 수혜자인 대기업 건설자본은 여기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책임이 없다. 사고가 발생하면 역시 용역회사의 책임이지 시행사의 잘못은 없다. 따라서 대기업 하청 노동자들의 모습이 생각나 약간 동정이 들기도 하였다. 실제로 "우리도 먹고 살게 좀 도와주슈!!" 라고 절규하는 용역반 소장도 있었다.
사실 이미 아르바이트건 정규직이건 그리 부유하지 않은 청년들이 용역으로 나서는 상황인데 역시 서민들끼리 싸움 붙여놓고 건설 자본은 위에서 구경만 하는 형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건설자본이 존재하고 거기에 기생하는 용역깡패. 용역깡패가 없어지길 바라는 것보다 먼저 건설자본이 없어지는 사회를 바라는 게 더 빠를까?
상도4동에 집회신고를 내기 위하여 정보과 형사와 같이 동네를 돌아보니 용역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용역들이 경찰을 무서워 한다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동네 한 구석에서 만난 어느 용역.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 고생하세요."
라고 수줍은 듯 웃으며 인사까지 하는 용역의 모습이 당연히 가식적이어야 했을 텐데도 내겐 그가 너무 천진난만해보였다. 그래서 더욱 머리가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