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저항과 연대로 살아 숨쉬는 3·8 세계 여성의 날!
* 이 글은 여성운동네트워크(준)에서 3·8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작성한 교육안입니다.
3·8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와 의의
"임금을 인상하라!"
"10시간만 일하자!"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8년 3월 8일, 미국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1만 5천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은 무장한 군대와 경찰에 맞서 외쳤습니다. 여성도 인간이라고, 살인적인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는 살 수가 없다고, 여성도 시민이라고, 정치적인 권리가 박탈당한 채 살 수는 없다고 외치며, 용감하게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동시적으로 발생한 경제공황 속에서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은 빵 대신 먼지를 마시며 쉬지 않고 일을 하여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그러나 그녀들은 정작 인간이자, 노동자, 시민으로서 그 어떤 권리도 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봉기는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라 유럽대륙에서도 빈번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물가가 오르자 "주부들의 봉기"는 점점 빈번해졌고,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로 퍼졌습니다. 여성노동자들은 시장의 상품 진열대를 부수거나 사악한 상인들을 위협하는 것으로 생계비용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행동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여성의 참정권이 필수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은 여성노동자들의 저항을 기억하고 나아가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여성노동자회의에서는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의견은 독일의 사회주의자이자 여성운동가인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에 의해 제출된 것인데요, 이는 즉흥적으로 제안된 것이 결코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분출하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하나의 흐름으로 모아내어 더욱 힘찬 운동으로 만들어나가고자 한 유럽의 사회주의 여성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준비된 것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세계여성의 날은 20세기 산업국가에서의 열악한 노동현실에 분노하여 거리에 선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이러한 저항을 기억하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도모하고자 했던 여성운동진영의 의식적인 노력을 배경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11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부터 여성의 날이 준비되었습니다. 이 날의 계획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기사가 정부와 사회에서의 여성의 평등에 관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모든 기사들이 여성이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여 의회를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정치적 기회를 별로 갖지 못했던 여성들도 여성의 날을 위한 회의와 시위, 포스터와 팜플렛, 신문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첫 번째 여성의 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쏟아져 나와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남성들은 변화를 위해 아이들과 함께 집에 머물렀고, 그들의 아내들, 포로였던 주부들은 거리로 나섰습니다. 여성노동자들은"이 날은 우리의 날이다. 여성노동자들의 축제일이다"라고 외치면서 서둘러 회의와 시위가 열리는 곳을 향했습니다. 작은 도시 곳곳에서 회의가 열렸고, 마을의 강당을 가득 채운 여성들은 노동자들(남성)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거리 곳곳에서 시위가 열렸고, 대규모 시위를 막으려는 경찰들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세계여성의 날은 여성들의 집단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으며, 이 날 이후 더 많은 여성들이 사회주의당과 노동조합에 가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날은 노동자들의 국제연대를 강화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즉 여성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싸움에 있어서 여성의 날은 필수적인 날로 자리매김된 것입니다.
여성해방의 역사와 3·8 세계 여성의 날
3·8 여성의 날은 전 세계 여성들이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는 날이며, 이를 계기로 각 국에서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남녀차별 철폐, 여성빈곤 타파 등을 요구하는 여성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반대 및 물가안정 운동, 오스트리아·에스파냐에서 일어난 군부독재 반대운동, 1943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무솔리니 반대시위를 비롯해, 1979년 칠레의 군부정권 반대시위, 1981년 이란 여성들의 차도르 반대운동, 1988년의 필리핀 독재정권 타도 촛불시위 등이 그 대표적인 투쟁입니다.
그 중에서도 1917년 2월23일1) 여성의 날은 러시아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첫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더욱 뜻 깊은 날이 되고 있습니다. '사건'은 식량구입을 위해 줄을 서 있던 한 여성이 빵 가게의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상 그러한 사건은 당시 러시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요, 1915년 봄부터 본격화된 소위 '식량폭동'은 하나의 시위가 또 다른 시위를 촉발시키고, 빵을 위한 시위가 정치적 요구를 위한 시위로까지 연결되곤 하였던 것입니다.2)1917년에도 식량구입을 위해 기나긴 줄을 서 있던 여성들이 살인적인 기아와 빈곤에 분노하며 줄서기를 관두고 시위대가 되어 페트로그라드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 또다른 곳에서 '전쟁, 높은 물가, 여성노동자들의 상태'라는 테마로 여성의 날 집회를 하고 있던 여성노동자들과 동맹파업자들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이 지친 주부들의 행렬에 가세했습니다. 성난 여성들의 시위는 짜르의 비밀 군대도 감히 평소와 같이 진압하지 못할 만큼 위협적이고 위압적인 것이었습니다.3)이처럼 전쟁으로 인한 물가폭등, 경제파업, 정치파업, 여성들의 단결 등 여러 요소의 결합으로 인해 폭발한 1917년 여성의 날의 투쟁은 러시아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여성의 해방을 위한 행동은 결국 노동자민중 전체의 해방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뜻깊습니다. 여성의 날은 여성에게만 특별한 날이 아니라 모든 러시아의 노동자들과 전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투쟁의 날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여성의 날을 시작으로 러시아 혁명이 전개되기는 하였으나, 투쟁에 앞장선 여성노동자와 병사들 아내의 요구가 혁명의 핵심과제로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이는 당시의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 각각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인데요, 혁명 전에 무수하게 발생했던 식량폭동에 있어서의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노동조합 및 당이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혁명 이후에도 노동자운동 진영은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조직에 큰 힘을 쏟지 않습니다. 여성운동 진영의 경우에는 '여성참정권 획득'을 목표로 하여 맹목적인 활동을 전개한 나머지 여성노동자들의 바램을 받아 안을 수가 없었습니다.4) 참정권 그 자체보다 중요했던 것은 '무엇을 위한' 참정권인가? 라는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여권주의자들은 참정권을 획득하는 것이 곧장 여성해방으로 직결된다고 여기고 여성들이 행사할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증명하는 데에만 골몰하게 됩니다. 그로인해 여성해방을 표방하는 여성운동 진영이 러시아의 참전을 지원하고 전쟁을 지지하게 되는, 아이러니하고도 비극적인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여권주의자들은 세계대전에서의 러시아의 승리를 위해 다방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성들도 애국군인이 되어야 함을 선동하면서 많은 여성들을 전쟁터로 보냈고, 또한 여성들만의 부대가 설립되어 여성들이 군인으로서 용맹하게 싸울 수 있음을 증명하는 데에 힘썼습니다.5)이로 인해 과거에는 여성 참정권 획득에 결코 반대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은 군국주의를 부활시키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여성들의 국경을 초월한 국제연대의 정신이 훼손되는 안타까운 결과가 초래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하고자 했던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러시아 혁명은 결국 여성해방과 무관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은 열악한 여성들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알려냈을 뿐만 아니라 여성노동자와 병사아내들 스스로가 조직되어 자신들의 요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공간들을 만들어냈으며, 노동자운동이 여성해방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이를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주장했습니다.6) 또한 전쟁을 지지하는 여권주의자를 비판하며, 여성들이 힘을 쏟아야 할 것은 전쟁이 아닌 혁명이라는 사실을 호소했습니다. 누가 전쟁을 원하는가? 전쟁의 수혜자는 결코 여성이 아니다! 전쟁으로 인한 물가폭등은 여성의 삶을 더욱 곤란하게 하고 있지 않는가! 여성노동자들은 타국의 노동자와 싸울 것이 아니라, 국제주의의 깃발 아래 전쟁반대, 물가인상저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국가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 그리고 '여성의 날'은 투표권 쟁취를 위한 날에서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국제적인 투쟁의 날'로 바뀌어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3·8 여성의 날은 여성해방을 앞당기는 투쟁의 날이었습니다. 이러한 여성해방의 역사는 여성의 날이 여전히도 '전 세계 여성들의 투쟁의 날'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여성노동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노동자로 여기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는 노동자운동의 관행이 남아있고, 또한 여성의 해방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누구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지를 간과한 채 일부여성들의 권익을 위해 전체 여성의 단결과 연대를 훼손하는 여성운동의 한계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사적 투쟁의 주역이 되었던 이들이 가장 빈곤한 여성, 가장 불안정한 조건에서 일을 하던 여성, 가장 사회적으로 억압받던 여성이었다는 점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하는 빈곤과 폭력에 맞선 싸움에 가장 앞장설 이들은 바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빈곤한 여성들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이러한 억압받는 여성들의 치열한 싸움에 인종과 계층,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여성들이 화답하고 연대해야한다는 점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008년, 3·8 세계여성의 날은?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여성의 날은 '어머니의 날'과 '발렌타인데이'를 뒤섞은 형태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3월8일에는 여성들에게 꽃과 초콜렛을 선물하세요~"라는 선전문구가 여성의 날이 되면 등장하는 실정이니까요. 이러한 모습은 비단 광고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작년 3월8일 서울지역에서 열린 99주년 여성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의 한 여성간부는 "오늘 남성 동료가 꽃을 주던가요? 남편에게서 선물을 받으셨나요?"라고 확인을 하시더군요. 우리의 기억 속에 '여성의 날'은 여성들 애썼다며 선물을 받는 기념일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여성의 날은 저명한 여성인사들을 모시고 한 말씀 듣거나, 유명한 여성 연예인들의 공연을 즐기는 기념행사를 치루는 날로 변질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왜 이렇게 여성의 날의 의미가 퇴색되게 된 것일까요? 이는 여성운동이 위기에 처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성운동의 국가에 대한 의존성이 커짐에 따라 해방을 위한 변혁이라는 운동의 본래적 의미가 희석되고 있는 것입니다.7)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류적인 여성운동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활용되고, 그로 인해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 은폐되고 왜곡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의 여성의 날의 발자취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에 처음 3·8 여성의 날 투쟁이 시작되었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그 맥이 끊겼다가, 1985년에 이르러서야 다시금 여성의 날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85년의 '세계여성의 날 기념 여성대회'에서는 여성운동의 과제로 '민족·민주·민중'이라는 '삼민이념'을 여성해방의 이념으로 정립하는 '85 여성운동선언'이 이루어졌는데요, 70,8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주역이 된 여성노동자들의 저항의 정신과 85년 구로동맹파업으로 대표되는 연대의 정신이 그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대중의 생존권 투쟁과 진보적 여성단체운동이 결합됨에 따라 여성의 날이 그 본래적 의미를 되찾아 빛을 발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86년 3월 8일 여성대회 이후 여성대중이 겪는 문제를 여성운동의 실질적인 과제로 위치지우고 이들의 여성운동에의 주체적 참여를 실현하기 위한 연대틀거리가 생겨났고, 이는 다음해 '여성단체연합'의 건설로 이어집니다. 이와 같이 3·8 여성의 날의 부활과 함께 생겨난 여연은 '기층여성 중심성'과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이라는 규정을 수용했는데요, 이때 '기층여성'이란 생산직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빈민여성을 말하며,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이란 민족민주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 민주화 투쟁에 복무하는 여성운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여연에게 '민주화 투쟁에 복무하는 여성운동'이라는 지향은 즉시 모호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여연은 6월 항쟁 이후를 "불완전하고 왜곡된 상태이긴 하나 자율적인 시민사회 영역이 구축된" 상황으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식 하에서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은 여성노동자들의 요구를 수렴하여 법을 제·개정하는 것으로 치우치고, 민주화 투쟁은 상층 중심으로 결합하는 것에 국한되게 됩니다. 이는 '기층여성 중심성'과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이라는 지향, 즉 여성운동의 '주체'와 '전망'이 분리8)되기 시작함을 의미하는데요, 이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남녀유권자한마당'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1995년 여성대회였습니다. 이제 여성은 여성들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자신의 손으로 근본적으로 바꾸어내는 주체로 호명되지 않고, 다만 투표를 할 수 있는 한 표를 가졌을 뿐인 국민으로 전락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여성대중운동의 역동성은 상실되고, 신자유주의 정부의 통치성에 여성운동이 적극적으로 편입되게 됩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여성정책이라는 것이 일과 가정의 양립-자본의 이윤창출을 위해 여성들이 언제든 저임금의 비정규직으로 유연하게 쓰일 수 있고 또한 여성들에게 여전히도 출산과 양육, 가족의 돌봄이라는 재생산의 1차적 책임이 부가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지원책에 불과하다는 본질을 간과한 채, 여성이 의회에 진출하여 적극적으로 여성정책에 개입하는 것이 여성들의 현실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합니다. 여성억압의 원인과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여성대중의 삶이 나아질리 만무하며, 이는 오히려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여성억압이 강화되도록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몇몇 여성이 정치인이 되고 고위관료가 된다고 해서 전체 여성의 삶이 나아진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는 일부 여성들이 CEO가 되거나 전문직에 종사하게 된다고 하여 여성의 빈곤과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제한적이고 개별적인 해법이 마치 전체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인 양 여겨지는 것은, 정작 현실의 여성의 문제를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게끔 할 뿐 아니라, 알파걸과 알파우먼, 골드 미스가 될 수 있는 소수의 여성과 그렇지 못한 다수의 빈곤·비정규직 여성 간의 간극을 더욱 크게 하고 위계질서를 강화한다는 위험을 내포합니다. 또한 이로 인해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문제해결방식은 점점 더 요원한 일이 되어 갑니다.
결국 대다수의 여성들은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빈곤과 불안정노동에 시달리며 동시에 가족 내 보살핌 노동과 재생산 노동도 책임지는 이중부담을 떠맡아야하는 삶을 살지만, 이러한 현실의 원인을 정확하게 문제제기하지 못한 채 다만 여성들이 의회로 진출하는 것에 골몰하고 정부정책에 개입하는 것만 중시하는 여성운동은 한국사회 여성의 현실을 오히려 은폐하고 왜곡시키며 여성의 권리를 협소한 틀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성운동이 '해방을 위한 변혁'이라는 성격을 잃어감에 따라 여성의 날 역시 '여성해방을 위한 저항과 연대의 날'이라는 본래적 의미가 퇴색된 채 단순한 기념일로 전락하고 있는 것입니다.9)
이처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불평등의 심화, 그로 인해 여성들이 겪는 고통과 피해를 신자유주의 발전전략에 여성을 보다 깊숙이 편입시킴으로써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현재 우리사회가 처한 역설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대안세계화운동의 고양과 더불어 여성의 날이 그 본래의 색을 되찾아 가는 반가운 모습이 눈에 띄고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 폭력과 빈곤이 난무하는 세상에 맞서 전지구적 저항을 일궈내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3월 8일'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여성행진(World March of Women)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전세계 여성운동들의 연대체임과 동시에 '행진'이라는 행위 그 자체이기도 한 세계여성행진은 1995년 캐나다 퀘백지역에서 여성의 빈곤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요구하며 10일간 "빵과 장미"행진이 진행되고 같은 해 북경여성대회 때 이러한 행진을 지구적으로 확산하자는 제안이 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10)1998년 10월 17일 '국제 빈곤퇴치의 날'에 "빈곤 제거"와 "여성에 대한 폭력 제거"를 중심으로 "세계여성행진 2000 요구안"이 만들어졌고, 2000년 3월 8일 '세계여성행진'이 결성되었으며 지구적 행진이 발의되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 3월 8일, 브라질 상파울루에 전 세계 3만 여명 여성들이 모여 '인류를 위한 여성의 지구적 헌장'을 선포하면서 시위를 벌인 것을 출발로 하여 50여 개국을 통과하는 '릴레이 행진'이 진행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에 반대하는 전 세계 여성들의 공동의 목소리와 실천은 세계 빈곤철폐의 날인 10월 17일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모여졌으며, 이날 정오에 각 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실시된 선포식은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희망이 되어 24시간 내내 지구에 울려 퍼졌습니다. 한국의 경우 7월3일에 여성헌장 및 퀼트-또 다른 세상을 향한 전 세계 여성들의 바램이 수놓아진-가 통과하였으며, 이 날 한국여성들의 행진이 진행되기도 하였죠. 물론 10월 17일에도 전 세계 여성의 저항과 연대에 동참하는 공동행동을 하였고요.
이와 같이 신자유주의 국가정책이 여성에 대한 기회라고 생각하고 포섭되는 경향과는 완전히 단절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국제 연대를 강화하는 날로 세계 여성의 날은 거듭나야 합니다. 2008년 3월 8일 여성의 날은 바로 그러한 거듭남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100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저항하는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투쟁의 날로 다시 살아 숨 쉬어야 합니다.
저항_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빈곤-불안정노동-재생산노동의 여성전가에 맞서자!
"최저임금 현실화하라! 생활임금 쟁취하자!"
"외주용역화 저지하고 정규직화 쟁취하자!"
"노동자성 인정하고 노조결성 보장하라!"
"빈곤과 불안정노동 양산하는 비정규악법 철회하라!"
2008년 한국사회 여성노동자들의 외침은 100여년전 울려퍼졌던 여성노동자들의 구호와 너무나 흡사합니다.이는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이 중단없이 계속되어야 함을 알려준다고 하겠습니다. "女風당당", "2000년 이후 '골드미스족' 12배나 급증!","신임검사 절반 이상이 여성"....여성을 둘러싼 화려에 수사에 가려져, 비정규직의 70%가 여성이고 빈곤층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현실이 은폐되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명박이 대통령 당선자가 되자마자 여성인사를 인수위원장으로 임명한 것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나듯이, 신자유주의 여성인력활용 정책 하에서 '성공한 여성'들의 신화는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이는데, 인수위에서는 "여성 유망직종 발굴과 기업수요에 맞는 맞춤형 훈련, 취업연계 서비스 개발, 결혼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여성의 고용지원 확대 등을 통해 150만개의 여성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을 여성정책의 핵심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즉 '맞춤형 일자리 제공해줄께 열심히 일해라 (빈곤, 비정규직에서 탈출하고) 성공할 수 있다'라는 것일텐데요, 그러나 이것은 여성의 현실을 개선하기는커녕 문제를 은폐하고 해결을 더욱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만일 뿐입니다. 여성이 비정규직이 되고 빈곤해지는 것은 단지 적당한 일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성이 가사와 육아의 일차적 책임자가 되고 또한 유연한 노동력으로 취급되면서 저임금이 당연시되기 때문인데, 그러한 조건은 그대로 두고서 어떻게 여성의 삶의 질이 개선될 수 있다는 걸까요? 아니 오히려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여성에게 적합한 일자리란 집안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할 수 있는 파트타임 노동이거나 여성이 가족 내에서 해오던 '여성적인 노동'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일이라는 도식을 강화함으로써 빈곤과 불안정노동, 재생산노동이 여성에게 전가되는 조건을 더욱 공고하게 하여 여성의 삶을 더욱 곤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해방이라는 것이 집단적인 문제해결방식을 우회하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능력과 자질이 되어 성공한 여성과 그렇지 못하여 비정규직과 빈곤상태에 놓여있는 여성이 확연히 구분되는 조건은 여성간의 위계와 분할, 경쟁을 가속화시킬 뿐 해방을 더욱 요원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100주년 여성의 날을 맞아 전개될 우리의 저항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하는 빈곤과 불안정노동, 재생산노동의 여성전가에 맞선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 정부가 선전하는 성공신화라든지 여성정책의 기만성을 철저히 폭로하고 여성억압의 구조 자체를 변혁해냄으로써 여성해방으로 나아가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연대_ 투쟁하는 여성-남성(비정규직-정규직, 이주-정주 노동자)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빈곤과 불안정노동, 재생산노동의 여성전가에 맞선 저항을 위해서는 일차적으로는 여성내부의 위계와 분할을 극복하고 단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연대도 필수적입니다. 여성운동이 만들어갈 또 다른 세상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해방되는 새로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는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 간의 연대와 단결 역시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요?
'비정규직의 70%가 여성이고 빈곤층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현실이 문제라는 점에 대해서는 노동자 운동과 여성 운동 모두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 어느 쪽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가족 내의 성별분업이 존재하고 그것이 전사회적인 성차별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저임금·불안정노동이 여성에게 전가되게끔 함으로써 여성의 빈곤과 이중부담이 강화된다는 악순환의 고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혹은 파악하려들지 않는 것!-이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실정입니다. 나아가 경제성장과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OECD 국가에 비해 턱없이 낮은 여성경제활동참가율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자유주의 정부의 논리와,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아 전사회적인 노동력이 줄고 부양책임은 늘어난다는 저출산·고령화 위기담론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수용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여성해방-노동자해방을 위한 운동을 자임한 이들이 신자유주의가 핵심기치로 삼고 있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대책마련에 동참하고 '저출산·고령화' 대책기구에도 참석하면서 여성의 비정규직, 빈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고 있는, 실로 모순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게다가 주류적인 여성운동 진영은 정부의 여성정책 개입 및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을 통해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골몰함으로써, 여성대중운동의 수동화를 초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이 마치 여성이익집단을 위한 것으로 치부되는 데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성억압의 구조는 그대로 둔 채 그것을 적당히 활용하는 운동양태는 여성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여성억압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며, 빈곤-비정규 여성대중집단을 정책의 대상이나 제도개선의 수혜자로만 위치지우는 운동방식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사회변화를 주도해 갈 주체의 형성을 더디게 한다는 문제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합니다. 노동자 운동과 여성운동의 이러한 한계가 극복될 때에 비로소 여성-남성, 비정규-정규, 이주-정주 노동자의 연대는 강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100주년 여성의 날을 맞아 펼쳐질 싸움은, 노동자운동과 여성운동이 각각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안적인 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사회적인 문제로 여겨지고 있는 여성의 빈곤과 불안정노동의 문제는 다만 그것이 너무나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에 문제시되기 보다는, 그러한 현실이 여성-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전반적으로 후퇴시키는 기제가 된다는 점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정규직 여성 당사자 뿐만이 아니라, 정규직 여성도, 농민 여성도, 장애 여성도, 그리고 남성들도, 이주노동자도, 저임금의 불안정한 형태 말고는 노동에 대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을 중심으로 기존의 운동이 개조되고 연대전선이 강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99주년 3·8 여성의 날에 광주시청에서는 비정규직여성노동자들의 처절한 싸움이 진행되었던 반면, 서울에서의 여성의 날 기념대회에서는 진보여성 총 단결로 대선투쟁 승리하자는 선언이 허공에 외쳐졌습니다. 이러한 아이러니로 인해 3·8 여성의 날의 의미가 변질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올해의 여성의 날은 투쟁하는 여성들이 들러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즉 진정한 여성의 날이 되게끔 해야 할 것입니다. 여성의 날이 100주년이 되었음을 다만 기념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100년간 투쟁해 온 여성들의 저항을 기억하고 100년을 이어져온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되새기면서 바로 지금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하는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에 맞선 싸움에 나섭시다. 그러할 때에야 여성들 스스로의 힘으로 만드는 새로운 세상, 즉 1년 365일이 여성의 날인 세상이 비로소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바로 여성들의 '저항'과 '연대'로!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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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해 엮음, 『세계여성운동1-사회주의 여성운동 편』, 동녘, 1987
-한국여성노동자회,《일하는 여성》23호, 1995. 2
-한국여성노동자회,《일하는 여성》24호, 1995. 4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사회진보연대여성위원회 번역, 〈세계여성의 날〉,《사회운동》35호, 2003. 5
-전소희,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세계를 향해 전진하는 세계여성행진〉, 《노동자의 힘》74호, 2005.3
-헤스터 에이젠슈타인, 이진숙·정지영 번역,〈위험한 불륜? 페미니즘과 법인기업 세계화〉,《사회운동》63호, 2006.4
-노동자의 힘 여성활동가 모임, 〈38 여성의 날 유래와 현재적 의미〉,《노동자의 힘》98호, 2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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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한국여성단체연합과 성주류화 전략 평가〉,《사회운동》72호, 2007.3
-문은미, "99주년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민중언론 참세상 기고, 2007.3.8
-이꽃맘, "100년, 30년 그리고 울산과학대와 광주시청의 여성노동자", 민중언론 참세상 칼럼, 2007.3.9
-피플파워, "3 8 세계여성의날, 여성운동의 현황과 과제", 2007.3.14
-류은숙, 〈"빵과 장미": 이랜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바치는 시〉,《인권오름》63호, 2007.7
1)짜르시대 러시아는 중세시대의 '줄리안'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달력은 대부분의 나라들이 사용하고 있던 '그레고리'력보다 13일이 뒤처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3월8일은 구력(舊曆)으로는 2월 23일이다.본문으로
2)약 1만1천 명의 여성 방직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가담한 1915년 6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파업은 처음에는 '밀가루 파업'이었다. 한 달 후에 그것은 전쟁을 중지하고 투옥된 노동자를 석방하라는 정치적 시위로 발전했다. 이와 동시에 코스트로마에서 일어난 시위는 무력 진압을 당했고 뒤따라 대중의 장례행렬과 함께 여성노동자들이 병사들에게 총탄 대신 시위대를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는 또 다른 시위가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발생한 소요의 수는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본문으로
3)여성들은 격렬한 소동이 벌어진 거리에서 정면충돌한 노동자와 병사들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녀들은 방어선 위로 올라가서 총을 잡으며 "총검을 내려놓고 우리와 합세합시다!"라고 선동하는 등 대담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본문으로
4)"당신들은 우리의 권익을 지켜주기 위해 여기 온 것은 아니다. 당신들은 제헌의회에서 당신들 자본가의 이익을 지켜줄 우리의 투표를 요구하고 있다." - (볼셰비키, 니콜라에바 Nikolaeva), 여성노동자들의 페트로그라드 협의회의 한 토론에서, 1917년 10월 12일본문으로
5)'죽음의 부대'라고 불렸던 이 여성부대가 10월 혁명 당시 동궁함락에 맞서 노동자들과 대치하게 되었다는 점은 비극의 절정을 이룬다. 본문으로
6)러시아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콜론타이(Alleksandra M. Kollontai)가 『프라우다』에 실은 최초의 논설 중 하나는 임시정부의 남자들은 빵을 달라는 시위와 요구로써 2월 혁명을 점화시켰던 노동계급의 여성들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위원회나 부서를 당에 설치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교육과 선전에 힘썼다. 그리고 레닌이 『국가와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으로 건설될 새로운 국가의 모습을 설파했을 때, 콜론타이는 『공산주의와 가족』을 통해 공산주의 혁명이 여성억압적인 가족을 전화(轉化)함으로써 여성이 해방되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음을 설파했다. 본문으로
7)관련하여 현재의 여성운동이 미국 내외에서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이데올로기적·실천적으로 활용됨으로써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성장과 확산을 촉진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자매애에 기초한 비판과 분석을 통해 밝히고 있는 〈위험한 불륜? 페미니즘과 법인기업 세계화〉(헤스터 에이젠슈타인,《사회운동》63호, 2006.4)를 참조하시오.본문으로
8)1990년대 들어 운동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여연의 논의는 '기층여성 중심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리고 기층여성 중심주의가 갖는 국지성을 극복하고 여성운동의 주체를 사무직, 주부 등 제 계층으로 확산할 것, 생산현장에서 가족으로 운동의 중심을 옮겨 재생산 역할 담당자인 여성과 직결된 환경, 교육, 성, 문화,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운동의 영역을 확대할 것, 직접적인 정치투쟁보다는 지방자치시대에 맞는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정책대안을 모색할 것을 여성운동의 방향으로 합의한다. 즉 '민주화의 확대'라는 정세인식은 여성적 이해를 민주화 문제와 분리시켜 정책화하고 여성의제의 제도화를 위해 '여성의 정치세력화'시도를 본격화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그러나 국가와 파트너쉽을 형성하면서 정책을 통해 여성의 의제를 실현한다는 것은 여성억압의 구조 자체를 철폐하기 위한 사회변혁적 지향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본문으로
9)그러나 이러한 여성운동의 위기는 비단 여성운동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불안정노동이 확산되는 현상에 대해 여연을 중심으로 한 여성운동진영에서 끊이없이 문제제기하고 대응을 호소하였으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노동자운동과 여성운동의 분리주의적 경향이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가속화로 인해 여성노동자들이 정리해고 1순위가 되고, 파견법제정당시 여성 직종이 우선적인 대상이 되었을 때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자운동진영에서 취한 태도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본문으로
10)"빵과 장미"는 세계여성의 날의 유래와도 관련되는 1900년대 미국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구호에서 기원한다. 당시 미국 여성노동자들은 가혹한 노동조건에서 일을 했다. 공장주들은 생산에 사용되는 실과 바늘, 심지어 노동자들이 앉는 의자의 비용까지 값을 물렸다. 형편없는 임금, 장시간 노동, 위험한 공장 환경, 그리고 그와 다를 바 없는 비좁고 지저분한 주거 속에서 그곳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전국 최하위에 속했다. 참다못한 여성노동자들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임금상승,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며 실을 끊고 파업에 나섰다. 그녀들이 손에 쥔 펼침막 속에 '빵 뿐만이 아니라 장미를 원한다'는 구호가 있었고, 그 후로 이 투쟁은 '빵과 장미의 파업'으로 알려지게 된다. 여성의 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세계여성행진이 여성의 날의 유래가 되는 '빵과 장미를 위한 투쟁'과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