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세계 여성의 날이 100년을 맞이했지만, 현실에서 여성의 삶은 여전히 빈곤, 저임금,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지난 해 3월 8일, 바로 여성의 날에 그저 계속 일할 수 있게만 해달라는 요구를 걸고 시청을 점거하다 무참히 강제해산된 광주시청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일터로 돌아가지 못한 채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기는 저임금과 수시로 자행되는 해고에 맞서 2005년 8월 파업을 시작했던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지금도 공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비정규법안 시행령을 앞두고 회사의 외주용역화 시도에 맞서 파업을 시작한 이랜드, 뉴코아 노동자들도 200일이 넘게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이들만이 아니다. 청소, 간병, 보육 등 사회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노동을 하지만, 여성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이라는 부당한 저평가 속에서 저임금과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는 여성노동자들, 심지어 노동자로서의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가능성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한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임금을 인상하라!", "10시간만 일하자!",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100년 전 미국의 방직공장에서 봉기한 여성노동자들이 외쳤던 요구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여성노동자들의 요구와 무엇이 다른가. 사회 곳곳에서 '골드미스', '女風'과 같이 여성을 둘러싼 화려한 수사가 난무하는 2008년 오늘,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임금 인상, 최저임금 현실화, 근로기준법 준수,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투쟁하고 있는 이 현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여성인력 활용의 실체

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이 비정규직화와 해고에 저항하며 일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격렬히 투쟁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김대중-노무현 신자유주의 정권 10년 동안 강조됐고 이명박 정권 하에서도 주된 의제로 제기되는 '여성인력 활용'의 기만성을 극명히 보여준다. 지배세력은 저출산·고령화 위기 담론을 강화하면서 미래 사회의 위험과 위기에 대처하는 데 핵심적인 인력으로 여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결과란 여성들의 삶을 개선하고 권리를 확장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랜드, 뉴코아 여성노동자들은 비정규 법안의 시행령을 앞두고 700여 명의 계산업무 노동자들이 계약해지 통보를 받으면서 투쟁을 시작했다. 그녀들의 요구는 자신의 일터에서 계속 일하는 것이었다. 계약 때마다 해고의 불안에 떨어야 하는 외주용역화나 영원한 비정규직인 직무급제가 아니라 안정된 일자리를 원했다. '아줌마'라고 무시하면서 저임금/임금차별이 당연한 듯 여기는 회사를 비판했고, '걸핏하면 회사를 그만두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정규직으로 고용하냐'는 회사의 선동에 맞서 저임금, 고강도 노동으로 노동자를 혹사시키는 이랜드 그룹의 노동 착취가 이직의 원인임을 제기하며, 고용안정과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요구했다. 그녀들은 남성생계부양자-여성가사전담자라는 관념 속에서 가사의 책임을 전담해야 하고, 또 이런 관념이 가족 밖에서의 노동까지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에 묶어두는 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이를 바꾸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직장과 가정을 양립하게 해준다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 확대가 국가 경쟁력이라고 떠들어대던 정부는 이랜드, 뉴코아 여성노동자들의 요구에는 공권력을 동원한 탄압과 묵살로 일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 사태의 원인이 노조에 있다며 이랜드 그룹에게 '프랜들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앞으로도 여성노동자들의 비정규직 문제를 심화시키는 방향에 변함이 없을 것임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인력 활용 방안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여성인력 활용 정책은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과 자율성을 위해 충분한 임금을 받으며 안정된 일자리에서 노동할 권리나 이를 가로막는 성별분업, 성차별 구조, 이데올로기를 제거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여성인력 활용 방안 하에서 여성들은 이런 권리들을 가진 주체라기보다는 그저 활용 가능성이 높은 노동력으로 간주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본이 이윤 추구를 위해 가장 손쉽게 택하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확산하는 바탕으로, 분리직군제, 직무급제 등 새로운 노동 유연화, 임금 유연화의 형태의 우선 적용 대상으로 말이다.

재생산 노동에 대한 여성의 책임 강화

여성인력을 활용하여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낳은 위기를 관리하겠다는 정부와 지배세력의 움직임은 더욱 적극적이고 공세적이 되고 있다. 기존에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어 온 재생산 영역까지 적극적으로 정부 정책으로 포괄하면서 여성인력 활용을 위한 조치들을 강화하는 것이다. '일-가정 양립' 정책에서부터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국가가 책임진다'는 이명박 정권의 보육정책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독려하면서 재생산 노동의 부담을 덜어주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정부와 지배세력은 여성들이 이를 전담하게 된 성별분업의 구조나 이로 인해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저임금이 당연시 되어온 문제, 재생산 노동의 가치 저평가 등은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산 노동을 여성들'만'의 책임과 부담으로 인식시키면서 이를 국가가 보조해주는 것이 여성들에 대한 커다란 특혜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기만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단적으로 최근 저출산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일-가정 양립' 정책은 (이제는 정부가 출산과 양육을 지원해주기 때문에) 여성들이 출산의 의무를 다하면서 일을 병행할 수 있다는 식의 관념을 유포하면서 여성들에게 출산의 의무를 강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여성의 권리 진전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게다가 최근 가사 도우미, 간병, 노인 돌봄, 보육 등 기존에 가족 내에서 무급으로 수행하거나 비공식 부문에서 수행되던 여성들의 일과 노동이 공식 부문에서 제도화되고 있다. 이런 추세는 한편으로 '일-가정 양립'을 위해 자신의 재생산 노동을 시장에서 구입함으로써 대체해야 하는 여성들의 요구, 다른 한편으로 전반적인 노동자 계급의 소득 하락, 빈곤 심화에 따라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를 보충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여성들의 요구에, 정부와 지배세력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더욱 확대되고 있다. 가사, 간병, 노인 돌봄, 보육 등의 영역은 저출산, 고령화,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에 따라 '수요 증가'가 예상되는 영역이라면서 늘 정부의 여성 일자리 창출 정책의 주요 영역으로 꼽힌다. 즉, 노인 인구에 대한 돌봄 수요 및 출산과 양육과 가사를 일과 병행해야 하는 여성들의 가사, 보육 등에 대한 수요를 예상하면서, 이 분야가 여성들이 (기존에도 집에서 해오던 일이므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역할은 일차적으로 가족을 돌보는 일이며, 여성이 가족 내에서 수행하는 많은 일들은 여성이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특별한 숙련과 지식을 요하지 않는 일로 치부되어 평가 절하되어온 구조와 역사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여성을 개인 개인의 상황과 사정에 따라 재생산 노동의 구매자와 판매자로 분리하면서 여성의 권리나 요구를 개별화하고, 재생산 노동에 대한 평가 절하를 그대로 유지하며 해당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당연시 하고 노동자성조차 인정하지 않는 현실이, 이런 일자리 창출 전략이 근본적으로 여성의 해방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성들의 연대가 어려워지는 현실

충분한 임금, 안정된 일자리, 재생산 노동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같이 여성들이 삶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과 권리는 삭제한 채 여성들에게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력으로 활용되고 가족과 재생산 노동에 대한 부담을 짊어질 선택지만을 강요하는 것이 지금의 여성정책이자 여성인력 활용의 요구다. 그러나 이런 본질은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리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가족의 생계나 생존을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여성들의 현실적 요구가 있고, 일과 가사를 병행하면서 가중되는 부담이 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확대하고 가사와 양육의 부담을 일정 분담한다는 정책과 논리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있으면 좋은 것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물론 이런 정책의 혜택과 수혜를 받는 여성들도 존재한다. 따라서 여성을 둘러싼 매우 혼란스러운 현실이 나타난다. 알파걸, 골드미스, 증가하는 여성 전문직, 고위직과 같이 성공한 여성들의 신화가 월 80만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나이 많고, 여성이고, 숫자 얼마 안 되는 비정규직 사업장이고, 청소 용역이라는' 이유로 운동 진영에서조차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 최저 임금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면서 다른 집의 돌봄 노동을 떠맡아야만 하는 빈곤 여성들의 상황을 압도하고 은폐하는 것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 기회를 확대하고 지원하는 정책 속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건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아간다. 여성 억압의 구조,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지고, 여성들의 권리와 요구는 개별화되면서 여성들이 스스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권리를 쟁취하는 투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은 점차 좁아진다.
하지만 이런 갈등과 혼란함이 여성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늘 저임금 노동력으로 인식되어 온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를 비롯한 전체 노동자 민중의 지위와 권리를 위협하는 바탕으로 활용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이제는 너무나 일반적이 되어버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신자유주의 정책 속에서 지배 세력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가족주의 등 각종 분할선을 따라 노동자 대중에 대한 분할과 배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노동자 민중의 전반적인 삶의 질과 권리를 후퇴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에 대한 해법이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제기되기도 한다. (남성)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을 양보하여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보장하자는 분리직군제와 같은 방식이 그것이다. 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빈곤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기주의 때문으로 몰아붙이며,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의 조건을 전반적으로 하락시키는 자본의 전략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여성노동자들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문제를 도외시하고서는 이런 지배 세력의 전략에 맞설 수 없다. 여성노동자들의 비정규 불안정 노동을 철폐하는 것은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권 쟁취와 전체 노동자 민중의 권리 쟁취에 필수적인 과제다.

여성 저임금, 비정규 노동 철폐! 여성노동권 쟁취! 재생산 노동의 사회적 책임 강화!
저항과 연대가 살아 숨쉬는 3·8 세계 여성의 날로!

100년의 역사 속에서 3·8 세계 여성의 날은 자신의 노동을 인정받지 못하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착취당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어떤 정치적 권리도 없이 노동자로도 인간으로도 시민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세계적인 투쟁의 날이자 연대의 날이었다. 여성노동자들 스스로가 투쟁의 주체로 일어서고 서로 연대하면서 자신들의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웠고, 이를 통해 자신의 현실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바꿔왔다. 2008년 3·8 세계 여성의 날 또한 이런 정신을 이어받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의 날이 되어야 한다. 여성에 대한 착취와 재생산 노동에 대한 부담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가족과 재생산의 위기를 관리하는 데 여성을 활용하는 신자유주의 여성정책을 더욱 확대하는 것은 여성들의 권리를 쟁취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여성들을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로 고착화할 것이 분명한 비정규 악법의 시행령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은 이랜드 뉴코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저항이었다. 그 투쟁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한 사업장의 문제로 고립될 때, 쟁취되지 못한 것은 비단 이랜드 뉴코아 여성노동자들의 요구만이 아니다. 여성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철폐하는 것이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자로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권리를 쟁취하는 것에 한 발 나아가는 것이고, 전체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쟁취하는 것에 한 발 다가가는 것이다. 100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을 빈곤, 저임금, 비정규직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현실을 폭로하고 그에 맞선 여성들의 투쟁을 선포하는 날이 되도록 하자. 더불어 노동자 민중의 인간다운 권리를 실현하는 사회를 위해 여성/남성, 비정규직/정규직 노동자들이 여성노동자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매개로 연대하는 날이 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