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5-6.82호
이주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어느 날 아침
8월 집중단속이 시작된 이후 격주로 진행한 출입국 집회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나려던 순간 한통의 전화가 왔다. 이주노조 최정규 선배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영찬아 큰일 났다. 위원장이 연행됐다. 급히 노조로 와라!” 얼떨결에 받은 전화인 터라 정신이 혼미했다. 전화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그냥 멍할 뿐이었다. 이어온 문자 메시지 한통. “긴급 이주노조 위원장, 부위원장 출입국 강제연행, 마숨 사무국장도 연락두절 강제연행 추정됨.” 난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위원장님과 사무국장님이 이야기 하던 그때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때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몰랐다. 이것은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동지들의 지루한 투쟁에 정 조준된 한발의 총알이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남한에는 현재 50여 만 명의 이주노동자가 살고 있다. 이중에 23만 명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추산되고 있으며 이들은 공장과 주거지 할 것 없이 매일 같은 단속과 차별로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이주노조 지도부 3인의 표적단속에 항의하는 면담에서 출입국관리국 소장은 “우리에게 필요한 불법노동자는 18만 명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23만 명의 불법체류자가 있고 더욱이 고용허가제 3년 시행 이후 매달 4천명 이상의 불법체류자가 만들어지고 있어 단속과 추방은 어쩔 수 없다”고 버젓이 이야기했다. 이는 한국 정부 역시 이주노동자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지만, 모든 책임을 이주노동자에게 전가하고 단속과 추방으로 실패를 덮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주노동자들은 등록과 미등록을 가리지 않고 많은 고통과 애환을 안고 살고 있다. 공장에서 욕설과 구타 심지어 성폭력까지 감수하면서 코리안 드림을 이루고자 일하고 있다. 이러한 공장에서의 차별과 인권유린을 부추기는 것이 정부의 반인권적 이주정책과 단속추방이다. 농성에 참여한 한 동지는 “자본과 정권이 등록과 미등록 그리고 외국인과 내국인이라는 잣대로 노동자를 분할하고 탄압하고 있으며 가장 약한 고리인 이주노동자를 공격하고 있어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번 이주노조 지도부 3인의 강제 단속은 그동안 무수한 인권유린을 자행해온 정부의 무작위식 단속과 추방의 결과를 은폐하기 위한 시도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남한 이주노동자 운동의 선두에서 투쟁하고 있는 이주노조를 겨냥한 정치적 탄압이란 것이다.
기독교회관(KNCC) 농성 투쟁
12월 초순 매서운 바람이 불던 날 동지들이 회의실로 모였다. 이주노조 지도부 3인의 강제 연행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것은 투쟁을 결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동지들은 몇 시간의 논의 끝에 최후의 선택인 농성투쟁을 결의했다. 몇몇 동지가 “이주투쟁은 매번 너무나 혹독하고 춥다”고 되뇌었다. 동지들의 가슴에는 아직 2004년 명동성당 투쟁의 춥고 쓰라린 경험이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해 투쟁했던 동지를 외면할 수 없다”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동지들과 함께 투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이주농성투쟁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떨쳐 버릴 수 있는 희망이었다.
동지들의 투쟁경험은 농성을 하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남한 사회에서의 10년 이상 생활한 동지들은 누구보다도 내국인 동지들을 잘 이해했고, 발생되는 여러 가지 마찰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후배 활동가들을 지도하는 능력 역시 탁월했다. 방글라데시 꼬빌 동지는 언젠가 나에게 슬쩍 다가와서 디스켓 세 장을 건네주었다. 디스켓에는 지난 2004년 명동투쟁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벌써 3년이 지난 투쟁 기록을 디스켓으로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고 무척 고마웠다. 꼬빌 동지는 벌써 농성투쟁만 네 번째라고 한다. 2002년 정부의 자진출국 조치에 맞선 농성, 2004년 명동성당투쟁, 아느와르 전 이주노조위원장의 강제단속에 맞선 2005년도 인권위농성, 그리고 2007년 지도부 3인 강제 단속에 맞선 투쟁까지. 한국에서 보다 잘 살고 싶었던 한 이주노동자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이후 꼬빌 동지는 한국에서의 모든 기억을 뒤로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몇 년 전부터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터라 계획을 취소하고 농성에 결합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농성투쟁 동안 내내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아픔을 동지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돌아가기 며칠 전 짐정리를 하면서 나에게 이것저것을 보여주었다. 여행 가방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앨범에는 지난 농성투쟁에 함께 했던 동지들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안에는 젊은 시절 그 또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나왔던 신문 기사를 스크랩한 파일을 보여줬는데 “요리사 꼬빌”이라는 기사와 함께 정말 많은 인터뷰와 신문 기사가 있었다. 꼬빌 동지는 이것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의 돌아보며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짐을 다 싸고 보니 한국에서 10년 넘게 살았던 동지의 짐이 작은 여행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마음속으로 안쓰럽고 감탄의 탄성이 나왔다. 마지막 가는 길은 차마 보지 못했지만, 본국에 가서도 한국의 상황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며 동지들 걱정을 한다는 소식이 온다.
이주노조 지도부 강제 출국
12월 12일 아침 농성장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출입국사무소와 법무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여론의 압박과 파장을 고려해 이주지도부 강제출국을 강행하는 무리수를 둘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두 차례 회의를 진행한 뒤에 동지들은 청주보호소로 내려가기로 했다. 우리의 힘이 미약하지만 세 동지가 강제 출국되는 것을 손 놓고 볼 수만은 없었다. 나는 농성장 생활을 담당하던 터라 기독교회관에 머물고 다른 동지들 30여명이 청주로 향했다. 농성장에는 침묵이 흘렀다. 가고 싶어도 갈수 없었던 이주동지들과 나는 초초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은 청주보호소 항의 집회가 있어서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기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새벽 4시경 청주에 있는 동지에게 전화가 왔다. 강제 출국 시도가 있었고 지금 이를 저지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보호소 입구를 차로 막고 이를 바리케이드 삼아 지도부가 타고 있는 벤을 막고 있다고 했다. 지원이 더 필요하고, 조만간 경찰 병력이 올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했다. 부랴부랴 청주로 가기로 한 동지들의 출발시간을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여덟 시로 한 시간 앞당긴 상황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만행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법무부와 정부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나 또한 상황실에 남아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급한 마음에 언론사와 기자들에게 전화를 하고 취재요청을 했다. 이러는 도중 일곱 시경 청주보호소 안에 지도부 3인이 있다는 것이 확인이 안 된다는 연락이 왔다.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입에서는 내가 알 수 없는 욕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 네팔에 도착한 지도부 3인을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출입국은 지도부 3인을 정문으로 빼내는 데 실패하자 보호소 뒤편의 철조망을 절단기로 뚫고 동지들을 짐승처럼 끌고 인천공항으로 연행해 갔다고 한다.
장기적 투쟁을 준비하며 민주노총으로 가자
모두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지도부 3인의 야만적 강제추방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농성장을 엄숙하게 만들었다. ‘이주노조 지도부 3인 석방’, ‘이주노조 인정과 이주노동자운동 탄압 중단’, ‘단속추방 중단과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출입국관리법 개정안 폐지 및 이주노동자 인권과 노동권 보장’이라는 슬로건이 무색할 정도로, 지도부 3인의 출국은 농성단의 방향과 목표에 일대 혼란을 가져왔다. 또한 우리 투쟁의 힘이 부족함을 명확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농성투쟁을 결의했지만 그간 정부의 표적 단속과 탄압으로 이주노조의 지역 조직은 거의 붕괴되었다. 조합원들은 추방되거나 뿔뿔이 흩어져 단속이 끝날 때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여기에 농성단에 결합해 있는 이주동지 조차도 갑작스런 농성 결합으로 생계 문제가 심각했다. 심지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단속 상황을 대비해 본국으로 갈 티켓 한 장만 가지고 있는 동지도 있었다.
다행히 억센 이주투쟁을 경험한 동지들이 쉽게 포기 하지 않았고, 이주노동자들의 자주적 결성체인 이주노조에 대한 믿음이 누구보다도 강했다. 이주동지들은 밤이면 늘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서 “깃발만 내리지 않으면 우린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다 잡혀가도 이주노조는 지켜낼 수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우리의 투쟁은 정당하며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는 대의를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다. 단지 함께 싸우던 동지들이 정부에 의해 희생당했을 뿐이다. 농성장에서는 이번과 같은 정부의 야만적 강제추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또한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으로 그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던 이주노조 조직 복원에 더욱 주력해야 한다는 장기적 과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해를 넘기고 1월 15일 우리는 민주노총으로 농성장을 옮기기 위해 짐을 꾸렸다. 장기적 투쟁과제에 주력하고 이 땅의 이주노동자 문제가 더 이상 이주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한사회 노동자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공동의 과제이며, 이주노동자와 남한 노동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동지들은 민주노총으로 가더라도 그리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을 많이 했다. 남한의 노동자운동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있고, 투쟁의 공감대 형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였다. 이주노동자운동이 남한 노동자운동의 적극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내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항상 굴종적인 위치에서 시달려 왔던 동지들은 민주노총과의 노동자 사이에 마찰이 생긴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빚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걱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투쟁하는 동지들은 우리 농성단을 더 없이 반겨주었다. 투쟁 사업장 동지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투쟁하는 이주노동자 동지를 보며 많은 힘을 얻는다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 지도부 보위 문제로 진행하지 못했던 연대 사업을 전해투 동지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전해투는 사용하던 농성장을 우리에게 내주고 지도부 보위와 차량지원, 그리고 투쟁 일정까지 꼼꼼히 배려했다. 이제 우리는 매주 지역을 돌아다니며 흩어진 조합원들을 추스르고 새로운 조합원을 조직화할 수 있었다. 농성이 지속되면서 동지들은 아직 지역조직이 죽지 않았다는 데서 희망을 찾았고, 우리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많은 연대단위가 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비록 농성장의 이동과 함께 목표했던 ‘남한 노동자의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이주노조의 조직 복원’이라는 농성단의 장기적 과제는 달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국 조직화 가능성을 발견했고, 실질적 연대의 폭이 확장되었고, 이주노동자 문제를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공유하고 논의 할 수 있는 틀을 형성했다는 점은 이번 농성의 성과였다. 이것은 이주노동자 운동이 한걸음 전진 할 수 있는 기반이라 생각한다.
농성을 마무리 하며
99일간 농성투쟁을 하면서 정말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이주지도부 3인의 강제단속으로 촉발된 농성이 99일이나 지속될 수 있던 것은, 남한 노동운동사에 유일한 이주노동자의 주체적 조직인 이주노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긴박함으로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 이주농성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항상 이주노동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주노동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되었다. 언어와 피부색의 장벽을 넘어 단결할 수 있는 힘은 여기서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이주노조는 3월 11일 농성단 해단식과 15일 이주노조 후원주점으로 끝으로 이주농성단 활동을 정리하고 지금은 일상 투쟁으로 복귀했다. 농성투쟁은 늘 그렇듯 서로에게 많은 아쉬움과 과제를 남긴다. 이것을 모두 글로 쓴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마지막 자리에서 나는 동지들에게 올해 이주노조 합법화 농성을 지금부터 준비하자라는 농담 섞인 말을 했다. 정권교체 이후 2008년 4월에 다시 합동 단속이 강화 되고 있다. 이명박이 쏟아 낸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방침과 이주노조 불인정 발언은 나의 예상에 적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오늘도 함께 했던 동지들이 무사하길 바랄 뿐이다. 같이 다닐 때도 항상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던 큰 눈방울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까지만, 마숨, 라주, 수바수 동지에게 드립니다.
8월 집중단속이 시작된 이후 격주로 진행한 출입국 집회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나려던 순간 한통의 전화가 왔다. 이주노조 최정규 선배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영찬아 큰일 났다. 위원장이 연행됐다. 급히 노조로 와라!” 얼떨결에 받은 전화인 터라 정신이 혼미했다. 전화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그냥 멍할 뿐이었다. 이어온 문자 메시지 한통. “긴급 이주노조 위원장, 부위원장 출입국 강제연행, 마숨 사무국장도 연락두절 강제연행 추정됨.” 난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위원장님과 사무국장님이 이야기 하던 그때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때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몰랐다. 이것은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동지들의 지루한 투쟁에 정 조준된 한발의 총알이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남한에는 현재 50여 만 명의 이주노동자가 살고 있다. 이중에 23만 명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추산되고 있으며 이들은 공장과 주거지 할 것 없이 매일 같은 단속과 차별로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이주노조 지도부 3인의 표적단속에 항의하는 면담에서 출입국관리국 소장은 “우리에게 필요한 불법노동자는 18만 명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23만 명의 불법체류자가 있고 더욱이 고용허가제 3년 시행 이후 매달 4천명 이상의 불법체류자가 만들어지고 있어 단속과 추방은 어쩔 수 없다”고 버젓이 이야기했다. 이는 한국 정부 역시 이주노동자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지만, 모든 책임을 이주노동자에게 전가하고 단속과 추방으로 실패를 덮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주노동자들은 등록과 미등록을 가리지 않고 많은 고통과 애환을 안고 살고 있다. 공장에서 욕설과 구타 심지어 성폭력까지 감수하면서 코리안 드림을 이루고자 일하고 있다. 이러한 공장에서의 차별과 인권유린을 부추기는 것이 정부의 반인권적 이주정책과 단속추방이다. 농성에 참여한 한 동지는 “자본과 정권이 등록과 미등록 그리고 외국인과 내국인이라는 잣대로 노동자를 분할하고 탄압하고 있으며 가장 약한 고리인 이주노동자를 공격하고 있어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번 이주노조 지도부 3인의 강제 단속은 그동안 무수한 인권유린을 자행해온 정부의 무작위식 단속과 추방의 결과를 은폐하기 위한 시도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남한 이주노동자 운동의 선두에서 투쟁하고 있는 이주노조를 겨냥한 정치적 탄압이란 것이다.
기독교회관(KNCC) 농성 투쟁
12월 초순 매서운 바람이 불던 날 동지들이 회의실로 모였다. 이주노조 지도부 3인의 강제 연행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것은 투쟁을 결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동지들은 몇 시간의 논의 끝에 최후의 선택인 농성투쟁을 결의했다. 몇몇 동지가 “이주투쟁은 매번 너무나 혹독하고 춥다”고 되뇌었다. 동지들의 가슴에는 아직 2004년 명동성당 투쟁의 춥고 쓰라린 경험이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해 투쟁했던 동지를 외면할 수 없다”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동지들과 함께 투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이주농성투쟁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떨쳐 버릴 수 있는 희망이었다.
동지들의 투쟁경험은 농성을 하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남한 사회에서의 10년 이상 생활한 동지들은 누구보다도 내국인 동지들을 잘 이해했고, 발생되는 여러 가지 마찰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후배 활동가들을 지도하는 능력 역시 탁월했다. 방글라데시 꼬빌 동지는 언젠가 나에게 슬쩍 다가와서 디스켓 세 장을 건네주었다. 디스켓에는 지난 2004년 명동투쟁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벌써 3년이 지난 투쟁 기록을 디스켓으로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고 무척 고마웠다. 꼬빌 동지는 벌써 농성투쟁만 네 번째라고 한다. 2002년 정부의 자진출국 조치에 맞선 농성, 2004년 명동성당투쟁, 아느와르 전 이주노조위원장의 강제단속에 맞선 2005년도 인권위농성, 그리고 2007년 지도부 3인 강제 단속에 맞선 투쟁까지. 한국에서 보다 잘 살고 싶었던 한 이주노동자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이후 꼬빌 동지는 한국에서의 모든 기억을 뒤로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몇 년 전부터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터라 계획을 취소하고 농성에 결합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농성투쟁 동안 내내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아픔을 동지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돌아가기 며칠 전 짐정리를 하면서 나에게 이것저것을 보여주었다. 여행 가방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앨범에는 지난 농성투쟁에 함께 했던 동지들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안에는 젊은 시절 그 또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나왔던 신문 기사를 스크랩한 파일을 보여줬는데 “요리사 꼬빌”이라는 기사와 함께 정말 많은 인터뷰와 신문 기사가 있었다. 꼬빌 동지는 이것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의 돌아보며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짐을 다 싸고 보니 한국에서 10년 넘게 살았던 동지의 짐이 작은 여행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마음속으로 안쓰럽고 감탄의 탄성이 나왔다. 마지막 가는 길은 차마 보지 못했지만, 본국에 가서도 한국의 상황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며 동지들 걱정을 한다는 소식이 온다.
이주노조 지도부 강제 출국
12월 12일 아침 농성장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출입국사무소와 법무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여론의 압박과 파장을 고려해 이주지도부 강제출국을 강행하는 무리수를 둘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두 차례 회의를 진행한 뒤에 동지들은 청주보호소로 내려가기로 했다. 우리의 힘이 미약하지만 세 동지가 강제 출국되는 것을 손 놓고 볼 수만은 없었다. 나는 농성장 생활을 담당하던 터라 기독교회관에 머물고 다른 동지들 30여명이 청주로 향했다. 농성장에는 침묵이 흘렀다. 가고 싶어도 갈수 없었던 이주동지들과 나는 초초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은 청주보호소 항의 집회가 있어서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기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새벽 4시경 청주에 있는 동지에게 전화가 왔다. 강제 출국 시도가 있었고 지금 이를 저지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보호소 입구를 차로 막고 이를 바리케이드 삼아 지도부가 타고 있는 벤을 막고 있다고 했다. 지원이 더 필요하고, 조만간 경찰 병력이 올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했다. 부랴부랴 청주로 가기로 한 동지들의 출발시간을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여덟 시로 한 시간 앞당긴 상황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만행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법무부와 정부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나 또한 상황실에 남아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급한 마음에 언론사와 기자들에게 전화를 하고 취재요청을 했다. 이러는 도중 일곱 시경 청주보호소 안에 지도부 3인이 있다는 것이 확인이 안 된다는 연락이 왔다.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입에서는 내가 알 수 없는 욕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 네팔에 도착한 지도부 3인을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출입국은 지도부 3인을 정문으로 빼내는 데 실패하자 보호소 뒤편의 철조망을 절단기로 뚫고 동지들을 짐승처럼 끌고 인천공항으로 연행해 갔다고 한다.
장기적 투쟁을 준비하며 민주노총으로 가자
모두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지도부 3인의 야만적 강제추방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농성장을 엄숙하게 만들었다. ‘이주노조 지도부 3인 석방’, ‘이주노조 인정과 이주노동자운동 탄압 중단’, ‘단속추방 중단과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출입국관리법 개정안 폐지 및 이주노동자 인권과 노동권 보장’이라는 슬로건이 무색할 정도로, 지도부 3인의 출국은 농성단의 방향과 목표에 일대 혼란을 가져왔다. 또한 우리 투쟁의 힘이 부족함을 명확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농성투쟁을 결의했지만 그간 정부의 표적 단속과 탄압으로 이주노조의 지역 조직은 거의 붕괴되었다. 조합원들은 추방되거나 뿔뿔이 흩어져 단속이 끝날 때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여기에 농성단에 결합해 있는 이주동지 조차도 갑작스런 농성 결합으로 생계 문제가 심각했다. 심지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단속 상황을 대비해 본국으로 갈 티켓 한 장만 가지고 있는 동지도 있었다.
다행히 억센 이주투쟁을 경험한 동지들이 쉽게 포기 하지 않았고, 이주노동자들의 자주적 결성체인 이주노조에 대한 믿음이 누구보다도 강했다. 이주동지들은 밤이면 늘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서 “깃발만 내리지 않으면 우린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다 잡혀가도 이주노조는 지켜낼 수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우리의 투쟁은 정당하며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는 대의를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다. 단지 함께 싸우던 동지들이 정부에 의해 희생당했을 뿐이다. 농성장에서는 이번과 같은 정부의 야만적 강제추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또한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으로 그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던 이주노조 조직 복원에 더욱 주력해야 한다는 장기적 과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해를 넘기고 1월 15일 우리는 민주노총으로 농성장을 옮기기 위해 짐을 꾸렸다. 장기적 투쟁과제에 주력하고 이 땅의 이주노동자 문제가 더 이상 이주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한사회 노동자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공동의 과제이며, 이주노동자와 남한 노동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동지들은 민주노총으로 가더라도 그리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을 많이 했다. 남한의 노동자운동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있고, 투쟁의 공감대 형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였다. 이주노동자운동이 남한 노동자운동의 적극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내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항상 굴종적인 위치에서 시달려 왔던 동지들은 민주노총과의 노동자 사이에 마찰이 생긴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빚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걱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투쟁하는 동지들은 우리 농성단을 더 없이 반겨주었다. 투쟁 사업장 동지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투쟁하는 이주노동자 동지를 보며 많은 힘을 얻는다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 지도부 보위 문제로 진행하지 못했던 연대 사업을 전해투 동지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전해투는 사용하던 농성장을 우리에게 내주고 지도부 보위와 차량지원, 그리고 투쟁 일정까지 꼼꼼히 배려했다. 이제 우리는 매주 지역을 돌아다니며 흩어진 조합원들을 추스르고 새로운 조합원을 조직화할 수 있었다. 농성이 지속되면서 동지들은 아직 지역조직이 죽지 않았다는 데서 희망을 찾았고, 우리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많은 연대단위가 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비록 농성장의 이동과 함께 목표했던 ‘남한 노동자의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이주노조의 조직 복원’이라는 농성단의 장기적 과제는 달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국 조직화 가능성을 발견했고, 실질적 연대의 폭이 확장되었고, 이주노동자 문제를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공유하고 논의 할 수 있는 틀을 형성했다는 점은 이번 농성의 성과였다. 이것은 이주노동자 운동이 한걸음 전진 할 수 있는 기반이라 생각한다.
농성을 마무리 하며
99일간 농성투쟁을 하면서 정말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이주지도부 3인의 강제단속으로 촉발된 농성이 99일이나 지속될 수 있던 것은, 남한 노동운동사에 유일한 이주노동자의 주체적 조직인 이주노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긴박함으로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 이주농성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항상 이주노동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주노동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되었다. 언어와 피부색의 장벽을 넘어 단결할 수 있는 힘은 여기서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이주노조는 3월 11일 농성단 해단식과 15일 이주노조 후원주점으로 끝으로 이주농성단 활동을 정리하고 지금은 일상 투쟁으로 복귀했다. 농성투쟁은 늘 그렇듯 서로에게 많은 아쉬움과 과제를 남긴다. 이것을 모두 글로 쓴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마지막 자리에서 나는 동지들에게 올해 이주노조 합법화 농성을 지금부터 준비하자라는 농담 섞인 말을 했다. 정권교체 이후 2008년 4월에 다시 합동 단속이 강화 되고 있다. 이명박이 쏟아 낸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방침과 이주노조 불인정 발언은 나의 예상에 적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오늘도 함께 했던 동지들이 무사하길 바랄 뿐이다. 같이 다닐 때도 항상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던 큰 눈방울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까지만, 마숨, 라주, 수바수 동지에게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