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8.7-8.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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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행진, 노동자운동이 함께 하기 위해서

박준형 | 공공노조 정책기획국장
5월초 촛불집회가 시작되던 때 다른 사회운동은 물론이려니와 노동자운동도 이에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들 뭐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고 활동가들도 호기심에 집회를 다녀와 본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신기하게 듣는 정도였다. 이후 이런저런 사회운동들이 촛불집회에 결합하고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조직된 사회운동 중에서 노동자운동의 결합은 가장 굼뜬 것이었다. 촛불집회가 확대되면서 젊은 활동가들과 현장간부들이 촛불집회 장소에 꾸준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운동에 조직적 결합이 필요하다는 제기는 거의 없었고, 일부 고참 노조간부들은 여전히 철부지들의 냄비현상으로 운동을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대한 운동의 발전 속에서 결국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논의에 이르렀다.

조직된 노동자 운동의 무관심

민주노총의 총파업 찬반투표가 진행될 만큼 노조에서도 촛불집회가 만들어낸 정세를 주목하게 된 상황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주목 혹은 긴장이 현장까지 확산되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노조의 각급 집행기구(산별노조, 연맹, 민주노총 등)가 이 운동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 우선 중요한 원인이다. 노조 집행부는 임단협 혹은 구조조정 저지와 같은 투쟁이 아닌 이러한 쟁점에 대해서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사태가 전개되면서 이 정세에 결합하는 것이 노조운동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회복하고 공공부문 사유화, 구조조정을 막아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확대되면서 총파업을 논의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또 한편의 문제는 이러한 소극적 대응이 노조 상층기구의 무기력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민주노총 총파업 찬반투표의 결과를 보더라도 조합원들의 상대적인 무관심이 확인된다. 민주노총 총파업 찬반투표를 진행하지 못하는 단위도 상당히 많을 뿐 아니라, 투표율이 낮은 단위일수록 찬성률도 낮다. 조합원들 역시 한 명의 시민으로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경우는 많지만 내가 속한 노동조합을 통해서 이 운동에 참여해야한다는 의식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종종 얼굴이 익은 조합원들을 노조 깃발 아래가 아닌 곳에서 만나곤 한다.
그것은 노조 집행부나 조합원 모두 노동조합이 광우병 쇠고기 반대운동과 같은 임단협 혹은 고용 문제와 거리가 있는 쟁점에 대한 운동을 하는 기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노조에 대한 이러한 고정관념은 현재 노동자운동의 상태를 생각하면 괜한 것이 아니다.

새롭게 열리는 정세, 노동조합은 운동조직인가를 묻다

그러나 실상 민주노총의 결의까지 이루어지게 되는 과정은 이러한 정세와 노조의 투쟁과제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대중들이 공공부문 사유화 반대, 대운하 반대까지 외치는 상황이 되자 이러한 투쟁에 결합하지 않고서는 노조의 독자적인 투쟁에서도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었다.
그것은 노조의 투쟁과제라는 것이 공공부문 시장화, 사유화 저지 혹은 노동기본권 보장과 같은 사회적 보편성을 가지는 이상 사회운동의 흐름, 정치정세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노조가 자신의 운동과제를 사회운동과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과정이다. 따라서 촛불집회와 투쟁에 결합하는 과정은 곧 노조운동의 정체성을 묻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명확하다. 노조운동이 하나의 사회운동으로서 사회적 쟁점에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문제는 노조가 이러한 문제와 답을 하나의 문제제기로서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당면한 이번 촛불집회에 결합하는 것을 넘어서 노조의 운동방식, 조직의 성격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개시되어야한다는 것을 이번 사태에 결합하는 과정에서 확인해야한다.

촛불행진에서 배워야할 운동들

한편 촛불집회는 노동조합의 운동문화에도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노조의 관성화되고 화석화된 집회 문화, 참여가 배제된 동원식 운동 문화와는 전혀 다른 운동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 집회란 대부분 투쟁사업장-상급단체 임원-산하조직 임원-문화공연-상징의식-폐회 등으로 이어지는 진부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연사마다 똑같은 내용의 발언이 반복된다. 그러나 촛불집회는 참가자들이 스스로 발언하고 공연한다. 항상 새롭고 창의적인 발언이 이어진다. 새로운 구호를 발명한다.
그렇다면 노조의 집회에 조합원 자유발언을 도입하면 되는 것일까? 물론 매우 의미 있는 시도다. 집회 진행방식, 프로그램 자체부터 바꾸어내는 것이 시작이다. 그러나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있다. 현재의 노조운동 문화에서 사전에 조직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자유발언에 나서는 조합원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구호를 만들어서 외치거나, 피켓을 만들어오는 조합원도 거의 없을 것이다. 노조의 운동방식이란 으레 동원되는 방식, 집행부가 준비한 집회 발언을 듣는 것에 불과하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집회 프로그램과 문화만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노조의 일상운영에서부터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현장의 조합원이 스스로 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조직의 운영과 구조, 사업이 모두 혁신되어야한다. 이 과정은 특히 어떤 일상활동의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조합원 대신 임금, 단체협상을 대리해주는 기구로 굳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노무관리기구가 아니라 운동조직으로서 노조를 재구성하는 것, 이를 위한 운동을 현장에서 전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항상 조합원을 움직이고,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사회운동을 노조의 활동에 결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총파업 조직화 과정, 책임은 현장으로?

민주노총의 총파업 찬반투표는 이글을 쓰고 있는 현재 투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공공노조 가스지부, 철도노조, 서울지하철노조 등의 투표결과가 나오면 가결 선언이 이루어지고 발표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총파업 찬반투표가 가결되고 예정대로 7월2일 총파업이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이 투쟁이 조직되는 과정은 여러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총과 산하조직들은 촛불집회 결합부터 총파업 조직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운동 조직이라는 위상에 전혀 걸맞지 않게 정세에 따라가기 급급했던 것이다. 투쟁과 쟁점을 선도하는 것은 고사하고 민주노총이 고유하게 제기해야할 쟁점을 제기하는 데도 지독하게 느렸다. 시민들이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하고 이명박 퇴진을 외친 날, 바로 5월 24일, 민주노총은 청계광장에 눌러앉는 농성을 시작하고 쇠고기 재협상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 단적인 예로 총파업의 선언과 조직화 방식을 들 수 있다. 애초에 쇠고기 수입과 공공부문 민영화 등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총파업은 정세가 고양되는 6월 10일 전후로 정치적 선언으로 현장을 조직하자고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투본회의에서는 총파업 찬반투표로 결정되고, 총파업 시기는 7월로 미루어지고 말았다. 결국 쇠고기 수입 장관고시(6월 25일)가 이루어진 상황에서도 찬반투표가 계속되는 상황이다.
어차피 정치총파업은 노동법상 불법파업이기 때문에 찬반투표는 정치적 결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민주노총은 정치총파업을 선언하고 조직해야하는 자신의 책임을 현장의 조합원에게 미룬 셈이다. 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 시기는 정세와 무관하게 늘어지는 투표시기에 맞추어 연기를 거듭하고, 필수공익사업장들은 필수유지업무제도의 모순에 완전히 노출되고 있으며, 불법파업의 책임은 현장으로 더 떠넘겨지게 되었다.

노동권의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다

현재 모든 사회적 쟁점이 이명박 반대를 중심으로 부각되고 서로를 지지하는 상황이다. 공기업 사유화, 대운하 건설과 같은 쟁점이 정권반대를 중심으로 쇠고기 문제와 서로 결합하면서 서로를 강화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부각되고 있지 못한 것이 비정규직 문제, 노동권 문제와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쟁점이 제대로 결합되지 못한 것은 촛불집회의 쟁점이 이명박 정권이 당장 가시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정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권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정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 이미 이 쟁점에 대해서라면 “노무현이 할 만큼 했다.”는 것이 이유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쟁점으로 꾸준히 투쟁해왔던 노동자운동이 촛불집회의 공간에서 운동을 잘 풀어내지 못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진행된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것이 생존권 투쟁이라고 해도 이 정세 속에서 충분히 시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최저임금을 거의 동결하자는 정부와 자본의 입장에 대한 투쟁은 어떤가? 물가가 살인적으로 인상되는 가운데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살인적인 폭력일 수밖에 없는 이런 문제는 충분히 중요한 쟁점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자운동 진영은 최저임금 투쟁을 저임금노동자의 임금인상 투쟁을 넘어서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기 위한 사회적 투쟁이라는 측면에서 제대로 조직화해내지 못했다.
노동자운동 스스로가 비정규직, 최저임금 문제와 같은 것을 시청광장의 촛불집회와는 다른 것으로 생각해왔던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오히려 이러한 노동자의 생존권의 문제가 광우병 쇠고기로부터 안전할 권리, 공공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와 마찬가지로 시민적인 권리라고 제기해오지 못했던 결과일 수 있다. 이 점은 총파업을 힘 있게 조직했느냐 문제보다도 오히려 더 징후적이고 중요할 수 있다. 무엇으로, 무엇을 위해서 총파업을 조직할 것인가를 묻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누가 운동을 조직할 것인가

촛불집회와 행진으로 이어진 이번의 거대한 투쟁은 쉽게 마무리되지 않겠지만 어떤 지속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대중들에게 남길 것이다. 이 운동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조직하려 할 것이다. 그것은 운동이 진행되는 중에 다음 아고라 등을 중심으로 인터넷에서도 이미 시작되고 있다.
이 운동의 과정에서 진보정당이든, 노동조합이든, 시민단체들이든, 혹은 정파들이든 기존의 운동조직들은 거의 대중을 조직해내지 못하고 있다. 쟁점을 선도하고 있지도 못하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운동은 어떤 조직형태를 취하는 것을 통해서 영속화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당장의 문제만은 아니다. 기존의 운동조직들이 대중을 조직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여전히 새로운 조직형태들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조직될 운동이 기존의 운동과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가가 문제다. 기존의 운동조직이 대중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무능함을 드러내는 가운데 기존 운동의 외부에서 분리된 새로운 운동으로 조직될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사회운동의 긍정적인 성과와 결합되고 서로를 강화할 것인가? 새롭게 형성되는 운동을 오히려 구(舊) 노사모와 같은 성향을 갖는 단체들이 더 유능하게 조직하는 가운데 기존 민중운동 조직의 무능은 더 눈에 띄는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기존 여러 운동 조직형태, 즉 정당, 노조, 시민사회단체 등이 새로운 정치적 경험을 갖게 된 대중을 조직하기 위해서 자신을 바꾸어나가는 것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노동조합도 그런 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운동을 내부에서 개조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대중들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 해야 한다. 노조의 관료화되고 대리주의적인 관행을 내부에서 바꾸지 않는 한, 이미 능동적인 운동을 경험한 대중들을 어떻게 조직할 수 있겠는가.
또 한편 촛불집회에 나오는 수십만의 시민들은 반 이상이 비정규직인 것은 물론이고 상당수는 실업노동자, 최저임금노동자들, 88만원 세대들일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이들을 광장에서 노조가 만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일까? 물론 노조만 그러해야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진보정당이나 여타의 사회운동 단체들도 마찬가지다.
노동권의 문제에 대해서라면 어떤 조직보다 ‘정통’한 노동조합도 거리에서 시민들을 그렇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가입한 자기 조합원들만의 노동권 문제가 아니라 시민들의 노동권을 제기하고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자운동의 역할이라도 제대로 해볼 수 있는 기회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운동의 조직들이 유능하게 대응하지 못한 결과로 현재 진행 중인 운동, 새롭게 형성되는 운동과 결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마치 유럽의 68혁명 이후에 새롭게 활력을 갖는 사회운동이 기존의 운동조직들, 당과 노조를 우회해서 외곽에 조직되었던 것과 같은 역사가 한국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여전히 진보적인 민중운동이 80년대와 2000년대의 운동이 만나도록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볼 일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운동이 자신을 하나의 사회운동 조직으로 변모시켜야하는 것과 같이 기존 운동들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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