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도하개발의제, 또 한번의 실패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7월 비공식 각료회의, 세부원칙 합의 도출 실패
WTO 도하개발의제(DDA) 협상을 타결하려는 또 한 차례의 시도가 좌초되었다. 지난 7월 21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TO 비공식 각료회의는 농업, 비농산물시장접근, 서비스 등 도하개발의제의 주요 세 분야의 세부원칙을 확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파스칼 라미 WTO 사무총장이 제출한 초안을 바탕으로 무역협상위원회와 그린룸 회의(소규모 비공식회의), 주요 7개국 회의(G7-미국, 유럽연합, 브라질, 인도, 호주, 일본, 중국)를 번갈아 진행하며 각국 간의 입장 차이를 좁혀 최종 세부원칙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라미 사무총장은 7월 29일 153개 전 회원국 협상대표가 참가하는 무역협상위원회에서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선언했다.
현재 WTO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우루과이라운드에 이어 더 많은 분야를 포괄하고, 무역 자유화 수준을 훨씬 높인 새로운 무역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WTO의 구상이 합의 도출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WTO 4차 각료회의에서 개시된 도하개발의제는 2005년 말 타결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2003년 5차 각료회의에서 협상의 기본골격과 구체 일정을 마련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후 2004년 7월 비공식 각료회의를 통해 기본골격을 타결했다. 그러나 2005년 홍콩에서 열린 6차 각료회의에서 정한 각국의 이행계획서 제출 시한이었던 2006년 7월에는 라미 사무총장이 협상의 잠정 중단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2009년 말 라미 사무총장의 임기 만료 및 올해 말~내년 초에 이루어질 미국 대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개최, 인도 총선 등으로 협상이 원활히 진행되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협상의 진척정도에 비해 무리하게 소집된 이번 비공식 각료회의에서도 다자간 무역협상이 처한 교착상태를 돌파하지는 못했다.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이토록 난항을 거듭하는 것은 이 의제가 가지는 모순 때문이다. 도하개발의제는 “무역 자유화로 각국의 경제적 발전을 확대하고 그 혜택을 전 세계 민중이 고루 누리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표방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연합은 막대한 농업 보조금을 고수하며 자유무역의 원칙을 스스로 거스르면서도 개도국에게는 이를 통해 값싸게 생산한 농산물을 덤핑하기 위해 관세 감축을 요구하고 있다. 비농산물시장접근 협상을 통해 추진하는 공산품 관세인하 역시 관세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는 개도국일수록 더 큰 비율로 급속하게 관세를 감축하는 안을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각국의 발전을 촉진하기는커녕 개도국의 유치산업을 세계적인 경쟁에 내몰아 실업을 유발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개도국에 부여되는 우대조치와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나, 서아프리카 면화 4개국이 요구하고 있는 미국 정부의 면화 보조금 감축 등은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도 않고 있다는 점도 큰 쟁점사항이다. 결국 개발은 개도국과 최빈국들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이며, 선진국의 입장만 대폭 반영되고 있다는 비판이 WTO 회원국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개도국과 최빈국들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협상 결렬의 원인
미국은 농업 분야에서 인도가 무리한 주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이번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주장한다. 칸쿤 각료회의 무산 이후 협상의 교착상태가 계속되자 결렬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은 미국의 태도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주장한다. 대선을 코앞에 둔 부시 행정부가 도하개발의제 협상 타결의 중요한 고리인 농업보조금 감축을 이행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 협상은 지난 2004년 7월 일반이사회와 2005년 홍콩 5차 각료회의를 거쳐 마련된 기본골격에서 더 나아가 관세 및 보조금 감축의 구체적인 수치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 중 특별긴급관세(SSM) 발동 요건이 막판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특별긴급관세는 관세감축 등 시장개방 확대에 따라 농산물 수입이 급증할 경우 추가적인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조치를 말한다. 인도는 특별긴급관세 그룹(G33)의 입장을 대변하여 이 조치가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 해당연도 수입량이 이전 3개년 평균수입량(발동기준물량)의 110%를 초과할 때부터 우루과이라운드 양허관세보다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는 이것이 농산물 수입 확대로 인한 개도국 농민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G7이 마련한 안대로 발동기준물량의 140%이상이 되어야 특별긴급관세 조치를 부과할 수 있으며 초과 수준도 훨씬 낮게 책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특별긴급관세 발동으로 인해 정상적인 무역흐름이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인도로 대표되는 G33과 G7의 입장이 계속 대립하자 유럽연합은 우루과이라운드 양허관세보다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경우를 2가지로 나누어 (115~120%와 135~140%) 각기 다른 수준의 양허관세 초과범위를 설정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인도는 이를 바탕으로 조율안을 제시했으나 미국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결국 협상 결렬이 선언되었다.
특별긴급관세 문제가 결렬 직전 부각되어 직접적인 결렬요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잠복된 쟁점들이 많았다. 비농산물시장접근 분야의 ‘분야별자유화’ 문제 역시 중대한 쟁점이었다. 개도국일수록 높은 비율로 관세를 감축하도록 하는 일반적인 관세감축 외에 특정 공산품 분야를 선정해서 관세를 철폐하는 것을 분야별 자유화라고 하는데, 이는 원칙적으로 회원국의 자발적 의사에 따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G7이 마련한 안은 주요 회원국들이 최소한 2개 이상의 분야별 자유화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여기에 참여하는 개도국은 관세감축에서 신축성을 부여받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중국과 인도는 G7의 안이 자발적 참여라는 원칙을 거스르는 것이며, 이를 관세감축과 연계시키는 것 역시 2005년 홍콩의 합의를 벗어나는 것임을 지적하며 반대했다.
면화 보조금 감축 역시 중대한 문제였다. 면화수출이 국가 소득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아프리카 4개국(말리, 부르키나 파소, 차드, 베넹)은 정부로부터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받는 미국 농기업의 면화 시장 독점으로 소득이 1년에 10억 달러씩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미국의 면화보조금을 감축할 것을 줄곧 요구해왔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의 면화보조금 감축문제를 중국의 면화관세감축 문제와 연계시키며 실질적인 협상을 회피했다. 즉 중국이 면화를 개도국 특별품목으로 지정하여 관세감축을 하지 않는다면 자국의 면화보조금 감축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협상 결렬의 직접적인 원인이 특별긴급관세에 대한 인도의 무리한 요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G33뿐만 아니라 주로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로 구성된 여타의 협상그룹들도 지지한 입장이었다. 더불어 유럽연합이 제시한 중재안을 거부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별긴급관세 문제를 크게 부각시키면서 면화보조금 감축 문제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되는 것을 사전에 회피하려는 것이 미국의 의도였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 5월 22일 미국에서는 2012년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2002년 농업법의 주요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농업보호의 수준을 한층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2008년 식품.보전.에너지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는 ‘관세감축’, ‘국내보조금의 실질적인 감축’, ‘수출보조금 철폐’라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의 원칙을 크게 훼손하며 면화보조금을 비롯한 농업보조금을 유지/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은 이 법에 반하는 내용의 협상을 타결할 의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WTO를 넘어 대안적 무역체계로
도하개발의제 협상 개시 후 지난 8년 동안 이 협상의 모순은 거듭 확인되어왔다. 시애틀에서도, 칸쿤에서도 미국과 유럽연합은 도리어 스스로 자유무역의 원칙을 훼손하며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여러 개도국과 최빈국 정부는 도하개발의제가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한다며 저항했다. 여러 차례 협상이 결렬되고 좌초되면서 온갖 회유와 협박, 밀실협상만이 도하개발의제를 추동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제는 그 누구도 WTO 도하개발의제가 완성할 새로운 무역체제가 전 세계 민중에게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상을 믿지 않는다. WTO의 자유무역은 국경을 넘나들며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초민족자본의 자유만을 보장할 뿐 전 세계 민중에게는 재앙만을 가져다주었다. 초국적 농기업이 지배하는 농산물 무역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농업협정은 농민을 농촌에서 쫓아내고 민중의 식량주권을 파괴했다. 서비스협정은 공공서비스 사유화를 부추기며 이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박탈한다. 비농산물시장접근 협상은 개도국의 탈산업화를 조장하고 실업과 빈곤을 확대하고 있다. 지적재산권협정은 초민족자본에 지식과 기술에 대한 무한한 독점권을 부여하며, 종자를 비롯한 농산물 투입재와 농업 지식에 대한 농민의 권리, 민중의 의약품 접근권 등을 박탈하고 있다.
2008년 상반기 한국사회를 휩쓸었던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논란은 이러한 WTO 무역체제가 초민족 농업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민중의 식량주권과 건강을 내팽개친다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시켜주었다. 뿐만이 아니다. WTO가 획책한 농산물 무역자유화는 세계의 수많은 민중을 굶주리게 만든 식량위기를 낳았다. 초민족자본의 이익을 전적으로 대변하면서 민중의 권리를 박탈하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은 현재와 같은 회유와 협박, 밀실협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타결될 수 없을 것이다. 1999년 시애틀 3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개시되어 꾸준히 성장해온 대안세계화운동은 WTO가 내세우는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 아니라 진정 민중에게 이익이 되는 무역체계의 원칙을 제시했다. 대안세계화운동은 국제적인 무역이 실질적인 발전으로 귀결되기 위해서는 초민족자본의 이익에 일차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필요를 바탕으로 해아 하며 노동권, 식량주권, 필수서비스(교육, 의료, 에너지, 물, 의약품)에 대한 민중의 접근권 등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WTO의 자유무역체제가 낳은 현재의 위기는 대안세계화운동이 제시하는 국제적인 무역의 새로운 토대 위에서만 극복 가능할 것이다. 이는 다자간 협상이 위기에 빠졌으니 한미 FTA를 비롯한 양자간 무역자유화 협상에 주력해야 한다는 이명박 정부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WTO 도하개발의제(DDA) 협상을 타결하려는 또 한 차례의 시도가 좌초되었다. 지난 7월 21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TO 비공식 각료회의는 농업, 비농산물시장접근, 서비스 등 도하개발의제의 주요 세 분야의 세부원칙을 확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파스칼 라미 WTO 사무총장이 제출한 초안을 바탕으로 무역협상위원회와 그린룸 회의(소규모 비공식회의), 주요 7개국 회의(G7-미국, 유럽연합, 브라질, 인도, 호주, 일본, 중국)를 번갈아 진행하며 각국 간의 입장 차이를 좁혀 최종 세부원칙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라미 사무총장은 7월 29일 153개 전 회원국 협상대표가 참가하는 무역협상위원회에서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선언했다.
현재 WTO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우루과이라운드에 이어 더 많은 분야를 포괄하고, 무역 자유화 수준을 훨씬 높인 새로운 무역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WTO의 구상이 합의 도출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WTO 4차 각료회의에서 개시된 도하개발의제는 2005년 말 타결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2003년 5차 각료회의에서 협상의 기본골격과 구체 일정을 마련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후 2004년 7월 비공식 각료회의를 통해 기본골격을 타결했다. 그러나 2005년 홍콩에서 열린 6차 각료회의에서 정한 각국의 이행계획서 제출 시한이었던 2006년 7월에는 라미 사무총장이 협상의 잠정 중단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2009년 말 라미 사무총장의 임기 만료 및 올해 말~내년 초에 이루어질 미국 대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개최, 인도 총선 등으로 협상이 원활히 진행되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협상의 진척정도에 비해 무리하게 소집된 이번 비공식 각료회의에서도 다자간 무역협상이 처한 교착상태를 돌파하지는 못했다.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이토록 난항을 거듭하는 것은 이 의제가 가지는 모순 때문이다. 도하개발의제는 “무역 자유화로 각국의 경제적 발전을 확대하고 그 혜택을 전 세계 민중이 고루 누리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표방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연합은 막대한 농업 보조금을 고수하며 자유무역의 원칙을 스스로 거스르면서도 개도국에게는 이를 통해 값싸게 생산한 농산물을 덤핑하기 위해 관세 감축을 요구하고 있다. 비농산물시장접근 협상을 통해 추진하는 공산품 관세인하 역시 관세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는 개도국일수록 더 큰 비율로 급속하게 관세를 감축하는 안을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각국의 발전을 촉진하기는커녕 개도국의 유치산업을 세계적인 경쟁에 내몰아 실업을 유발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개도국에 부여되는 우대조치와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나, 서아프리카 면화 4개국이 요구하고 있는 미국 정부의 면화 보조금 감축 등은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도 않고 있다는 점도 큰 쟁점사항이다. 결국 개발은 개도국과 최빈국들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이며, 선진국의 입장만 대폭 반영되고 있다는 비판이 WTO 회원국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개도국과 최빈국들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협상 결렬의 원인
미국은 농업 분야에서 인도가 무리한 주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이번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주장한다. 칸쿤 각료회의 무산 이후 협상의 교착상태가 계속되자 결렬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은 미국의 태도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주장한다. 대선을 코앞에 둔 부시 행정부가 도하개발의제 협상 타결의 중요한 고리인 농업보조금 감축을 이행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 협상은 지난 2004년 7월 일반이사회와 2005년 홍콩 5차 각료회의를 거쳐 마련된 기본골격에서 더 나아가 관세 및 보조금 감축의 구체적인 수치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 중 특별긴급관세(SSM) 발동 요건이 막판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특별긴급관세는 관세감축 등 시장개방 확대에 따라 농산물 수입이 급증할 경우 추가적인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조치를 말한다. 인도는 특별긴급관세 그룹(G33)의 입장을 대변하여 이 조치가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 해당연도 수입량이 이전 3개년 평균수입량(발동기준물량)의 110%를 초과할 때부터 우루과이라운드 양허관세보다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는 이것이 농산물 수입 확대로 인한 개도국 농민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G7이 마련한 안대로 발동기준물량의 140%이상이 되어야 특별긴급관세 조치를 부과할 수 있으며 초과 수준도 훨씬 낮게 책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특별긴급관세 발동으로 인해 정상적인 무역흐름이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인도로 대표되는 G33과 G7의 입장이 계속 대립하자 유럽연합은 우루과이라운드 양허관세보다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경우를 2가지로 나누어 (115~120%와 135~140%) 각기 다른 수준의 양허관세 초과범위를 설정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인도는 이를 바탕으로 조율안을 제시했으나 미국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결국 협상 결렬이 선언되었다.
특별긴급관세 문제가 결렬 직전 부각되어 직접적인 결렬요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잠복된 쟁점들이 많았다. 비농산물시장접근 분야의 ‘분야별자유화’ 문제 역시 중대한 쟁점이었다. 개도국일수록 높은 비율로 관세를 감축하도록 하는 일반적인 관세감축 외에 특정 공산품 분야를 선정해서 관세를 철폐하는 것을 분야별 자유화라고 하는데, 이는 원칙적으로 회원국의 자발적 의사에 따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G7이 마련한 안은 주요 회원국들이 최소한 2개 이상의 분야별 자유화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여기에 참여하는 개도국은 관세감축에서 신축성을 부여받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중국과 인도는 G7의 안이 자발적 참여라는 원칙을 거스르는 것이며, 이를 관세감축과 연계시키는 것 역시 2005년 홍콩의 합의를 벗어나는 것임을 지적하며 반대했다.
면화 보조금 감축 역시 중대한 문제였다. 면화수출이 국가 소득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아프리카 4개국(말리, 부르키나 파소, 차드, 베넹)은 정부로부터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받는 미국 농기업의 면화 시장 독점으로 소득이 1년에 10억 달러씩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미국의 면화보조금을 감축할 것을 줄곧 요구해왔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의 면화보조금 감축문제를 중국의 면화관세감축 문제와 연계시키며 실질적인 협상을 회피했다. 즉 중국이 면화를 개도국 특별품목으로 지정하여 관세감축을 하지 않는다면 자국의 면화보조금 감축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협상 결렬의 직접적인 원인이 특별긴급관세에 대한 인도의 무리한 요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G33뿐만 아니라 주로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로 구성된 여타의 협상그룹들도 지지한 입장이었다. 더불어 유럽연합이 제시한 중재안을 거부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별긴급관세 문제를 크게 부각시키면서 면화보조금 감축 문제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되는 것을 사전에 회피하려는 것이 미국의 의도였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 5월 22일 미국에서는 2012년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2002년 농업법의 주요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농업보호의 수준을 한층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2008년 식품.보전.에너지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는 ‘관세감축’, ‘국내보조금의 실질적인 감축’, ‘수출보조금 철폐’라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의 원칙을 크게 훼손하며 면화보조금을 비롯한 농업보조금을 유지/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은 이 법에 반하는 내용의 협상을 타결할 의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WTO를 넘어 대안적 무역체계로
도하개발의제 협상 개시 후 지난 8년 동안 이 협상의 모순은 거듭 확인되어왔다. 시애틀에서도, 칸쿤에서도 미국과 유럽연합은 도리어 스스로 자유무역의 원칙을 훼손하며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여러 개도국과 최빈국 정부는 도하개발의제가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한다며 저항했다. 여러 차례 협상이 결렬되고 좌초되면서 온갖 회유와 협박, 밀실협상만이 도하개발의제를 추동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제는 그 누구도 WTO 도하개발의제가 완성할 새로운 무역체제가 전 세계 민중에게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상을 믿지 않는다. WTO의 자유무역은 국경을 넘나들며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초민족자본의 자유만을 보장할 뿐 전 세계 민중에게는 재앙만을 가져다주었다. 초국적 농기업이 지배하는 농산물 무역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농업협정은 농민을 농촌에서 쫓아내고 민중의 식량주권을 파괴했다. 서비스협정은 공공서비스 사유화를 부추기며 이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박탈한다. 비농산물시장접근 협상은 개도국의 탈산업화를 조장하고 실업과 빈곤을 확대하고 있다. 지적재산권협정은 초민족자본에 지식과 기술에 대한 무한한 독점권을 부여하며, 종자를 비롯한 농산물 투입재와 농업 지식에 대한 농민의 권리, 민중의 의약품 접근권 등을 박탈하고 있다.
2008년 상반기 한국사회를 휩쓸었던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논란은 이러한 WTO 무역체제가 초민족 농업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민중의 식량주권과 건강을 내팽개친다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시켜주었다. 뿐만이 아니다. WTO가 획책한 농산물 무역자유화는 세계의 수많은 민중을 굶주리게 만든 식량위기를 낳았다. 초민족자본의 이익을 전적으로 대변하면서 민중의 권리를 박탈하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은 현재와 같은 회유와 협박, 밀실협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타결될 수 없을 것이다. 1999년 시애틀 3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개시되어 꾸준히 성장해온 대안세계화운동은 WTO가 내세우는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 아니라 진정 민중에게 이익이 되는 무역체계의 원칙을 제시했다. 대안세계화운동은 국제적인 무역이 실질적인 발전으로 귀결되기 위해서는 초민족자본의 이익에 일차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필요를 바탕으로 해아 하며 노동권, 식량주권, 필수서비스(교육, 의료, 에너지, 물, 의약품)에 대한 민중의 접근권 등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WTO의 자유무역체제가 낳은 현재의 위기는 대안세계화운동이 제시하는 국제적인 무역의 새로운 토대 위에서만 극복 가능할 것이다. 이는 다자간 협상이 위기에 빠졌으니 한미 FTA를 비롯한 양자간 무역자유화 협상에 주력해야 한다는 이명박 정부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도하개발의제(DDA)는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다. 도하 라운드를 폐기하라!
- 아시아 사회운동 행동호소문
우리,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농민조직, 여성, 이주자, 노동자, 도시와 농촌의 빈민, 어민, 사회운동, 시민사회단체 대표는 도하라운드 폐기를 호소한다.
우리는 2008년 7월 21~26일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비공식 각료회의를 통한 도하 개발의제 타결 시도를 규탄하며 이 회의에 주목할 것을 긴급하게 요청한다. 파스칼 라미 WTO 사무총장이 소집한 이 비공식회의는 7월 21일에 시작되어 1주일간 열릴 예정이다. 이 회의에는 고작 약 30개국의 통상 장관밖에 초청되지 않았으며, 불공정하고 불균형한 문서를 기초로 삼아 비공식적이고 배타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현재 제출된 문서로 확인되는 바, 이번 협상의 핵심 요소는 농업 및 공산품, 서비스 시장의 대폭적인 개방을 추진하면서도 개도국 발전과 개도국을 위한 유연성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서에는 한편으로는 농업보조금을 감축하라는 [농업수출 개도국들의] 요구에 대해 절대 양보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실질적인 시장 접근성을 공격적으로 추구하는 선진국들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도하라운드 및 이를 되살리기 위한 모든 시도를 중단할 것을 거듭 촉구한다. 우리는 협상의 3대 주요 영역인 농업, 공산품시장접근(NAMA), 서비스에서 논의 중인 대부분의 제안이 부국과 초민족기업의 이익을 방어하고 촉진하기 위해 작성되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
라미 사무총장은 세계은행, IMF의 지도자들과 더불어 도하라운드 타결을 전 세계적인 식량 가격인상이라는 위기의 해법으로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수년에 걸친 무역자유화가 [무역을 통한] ‘발전’이 공허한 약속이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틀렸다.
도하는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다. 추가적인 무역 자유화와 개도국 시장에 대한 강제적 개방은 개도국을 식량 가격 위기와 금융 위기에 훨씬 더 취약하게 만들 것이다. 각국 각료가 현재 문서에 동의하여 도하 라운드가 타결된다면 개도국은 발전의 기회를 빼앗기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각국 정부가 민중들을 희생시키면서 도하개발의제를 타결하는 모든 시도를 중단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2008년 7월 21일~26일에 열리는 도하개발의제의 부활을 중단시키기 위한 일국적, 지역적, 국제적 행동의 조직화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는 모든 운동, 민중 조직, 시민사회단체들이 우리의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다.
희망을 세계화하자, 투쟁을 세계화하자!
2008년 7월 21일
* 제안단체: 필리핀 진보적 노동자 동맹(APL), 주빌리사우스 아시아 태평양 지역 위원회, 아탁 재팬, 남반구 포커스, 태국 FTA 감시, 인도네시아 신식민주의-제국주의 반대 민중운동(Gerak Lawan), 홍콩 세계화 감시, 홍콩노총, 국제 젠더 무역 네트워크(IGTN), KALAYAAN!(민중의 자유를 위한 운동) Philippines, 필리핀 어민운동, 민주노총, 아시아 이주자 포럼(MFA), 인도네시아농민운동, 필리핀, 뉴라운드반대연합, 세계화와 빈곤에 반대하는 여성, 여성의 건강(필리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