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8.9-10.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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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_분석_임월산.pdf

이주노동자 운동에서 인종과 젠더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

임월산 | 서울경인이주노조 국제연대차장
머리말

지난 6개월간 표적단속으로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이하 이주노조) 중앙 간부 5명이 잡혀갔다. 2003~2004년 명동성당 농성투쟁 이래 이주노동자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까지만, 라주, 마숨 세 동지는 잠복하고 있던 출입국관리소 단속반원들에 의해 집 앞과 일터에서 체포되었고 3주 뒤 한 밤중에 추방되었다. 그리고 2008년 5월 이주노조는 새로 선출된 토르나 위원장과 소부르 부위원장을 똑같은 방식으로 잃었다. 이 두 사건은 이주노조와 이주노동자 운동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주노조는 이러한 공공연한 탄압에 직면하여 노조를 재조직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이를 위해 네팔과 방글라데시 출신 미등록 남성 이주노동자라는 기존의 조직적 기반을 확장하여 국적, 성별, 비자 상태에 있어 훨씬 다양한 이들을 조합원으로 포괄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지난 4월에 열린 총회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명문화했는데, 이주자 공동체 구성원, 고용허가제 노동자, 여성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조직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기로 결의했다. 표적탄압이 있은 후 이주노조가 전진하도록 노력을 기울이면서, 그리고 그 동안 공백 상태였던 여성 이주노동자 조직화를 담당하게 되면서 나는 노조 내 활동에서 인종과 젠더 문제를 가장 먼저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이주노동자운동, 그리고 더 나아가 진보운동 내에서 별로 논의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 이 문제들을 충분히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두 부분간의 관련성은 분명치 않다. 첫 번째 부분은 구체적으로는 인종주의 정책으로서 표적단속을, 더욱 일반적으로는 이주노동자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인종주의를 다룬다. 두 번째 부분은 남성/여성이 선천적이며 엄격히 구분되는 두 성별로 다뤄질 때 젠더 분할선에 따른 조직화가 가지는 한계를 살핀다. 이러한 이분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성별 정체성을 지닌 한 이주노조 조합원과 만났던 필자의 경험을 통해 이를 다룬다. 이 작업을 통해 이주노동자운동의 현 상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이주노조의 토대와 지도력을 재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방향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인종주의에 대하여

인종주의란 무엇인가?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강제단속과 탄압에 대한 수사는 여러 가지가 있다. 반인권적, 반노동자적, 야만적, 인간사냥 등. 그러나 이를 두고 인종주의적이라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표적단속을 더 넓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살펴본다면, 그리고 이것이 시위를 조직하는 이주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다면, 표적단속이 인종주의적인 정책이며 장기적으로 우리운동의 활력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인종주의라는 개념은 인종적 차이에 기반을 둔 차별(인종차별)이라는 단순한 개념 또는 사람들을 인종 집단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인종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둔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 보다는 사회를 조직하는 체계라는 의미로 인종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인종 차별 행위(개인적 행위, 정부 정책, 법제)와 인종 이데올로기(인종주의화된 언사, 미디어 보도, 정책 설명을 통해 표현되는) 양자 모두 이 체계적인 인종주의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다. 이 요소들은 체계적인 인종주의 안에서 반복되고 상호작용하며 부, 기회, 권력에 있어서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렇게 해서 일상적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돈을 버는 방식을 조직하는 인종주의적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정당화한다. 인종적 범주와 인종적 위계는 선전척이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종에 기반을 둔 정책과 인종적 사고의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변하고 형성되고 재형성된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의식 수준에서부터 자원 분배 수준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표적단속을 포함한 강제단속을 인종주의적이라고 일컬을 때, 바로 이러한 정의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것이 인종주의인 이유는 국적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표적으로 삼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인종주의적이라는 수사를 사용함으로써 이주자들을 위험한 “아시아” 외국인(마치 한국인은 인종 체계 내에서 “아시아인”이 아니라는 듯이!!)으로 딱지를 붙이고 범죄화하는 정부와 언론이 강제단속을 정당화하고, 이를 통해 이주노동자들을 인종적으로 낙인찍는 역할을 한다는 점 또한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표적단속이 한국 사회 내에서, 그리고 우리 운동 내에서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사이에서 권리와 힘의 불평등을 확대, 강화 하는 방식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어떻게 증가하는가? 우선 표적단속이 단지 개인들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들로부터 지도부와 그들이 축적한 집단적 경험을 박탈함으로써 이주노동자들의 세력화를 위한 공동 노력을 공격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조직화하고 집단적 힘과 경험을 구축하는 것은 억압받는 소수자(노동자, 인종화된 소수 등)가 권리 불평등을 상쇄하고 억압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근본적인 수단이다. 정부는 이주노조를 공격함으로써 평등을 향한 기세를 꺾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인종적, 계급적 위계 안에서 그들의 위치에 머무르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평등의 강화를 극복하기 위해 당장 우리 운동 내에서 이 불평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까지만 위원장, 라주 부위원장, 마숨 사무국장이 2007년 11월에 연행되었을 때, 이주노조는 민주노총 및 40여 다른 단체들과 함께 ‘이주탄압분쇄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결성하였다. 비대위는 처음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건물에서 농성투쟁을 시작하였고 이후 민주노총 건물로 옮겼다. 이 농성에 적을 때는 약 4~5명에서 많을 때는 15~20명의 이주노동자가 참여하였다. 이주노동자 대부분은 농성투쟁에 처음 참여하는 것이었지만 이번 농성이 세 번째인 이주노동자들도 있었다. 처음 참여하는 이들은 평등노조 이주지부나 명동성당 농성투쟁의 경험이 없는 새로운 조합원들이었다. 실제로 일부는 이주노동자 운동을 잘 모르기도 했다. 이주노조는 전략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민주노총 서울본부 및 다른 경험 있는 단체들에 의지했다. 비대위 집행위원회, 상황실회의에는 이주노동자보다 한국인이 더 많이 참석했고 한국인들이 이주노동자들의 의견을 주도하거나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농성장에 있는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명백하게도 경험이 더 많은 한국 활동가들이 주도하는 투쟁에서 같은 발언권을 누리지 못했다. 그래도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이주노조의 기반을 재건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주노조 지부와 분회 간부가 되었다. 농성의 결과로 이주노조는 100여명이 넘는 조합원과 연대단위들이 참여하는 성공적인 총회를 열었고,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했다. 앞으로 위험이 닥쳐올 것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도부가 앞에 나섰다.
토르너 위원장과 소부르 부위원장 체포 이후 긴장감이 더욱 확대되었다. 가장 경험이 많은 다섯 명의 활동가들이 사라진 후 노조 중앙 사무실에는 사무국장만 남게 되었다. 남은 사무국장은 헌신적인 활동가였지만 노조 중앙지도부 활동 경험은 없었다. 그 후로 표적 단속이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다시금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될 때까지는 당분간 한국인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안전과 이동의 자유는 물론이거니와 경험과 언어능력 상의 불평등이 농성투쟁 시기와 작년 11월 지도부 표적단속 이전 기간 동안보다 훨씬 커졌다. 그러나 또한 전반적인 자원과 역량은 훨씬 부족한 상황에서 강제단속에 맞서 이주노조를 방어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다.
한국인 활동가들은 지도력, 인력, 능력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이주노조에 대한 탄압을 비판하고 노조를 전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왔다. 한국인 동지들이 연일 계속되는 기자회견, 헌법소원, 소송, 국가인권위 제소 등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일상적인 노조활동을 지속하는 것을 보면 감탄스럽고 부끄럽다. 이겨내기 어려워 보이는 뜻밖의 상황에서도 그들의 확고한 헌신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단체와 개별 한국 활동가들이 제공하는 자원에 의존함으로써 생기는 장기적인 효과에 대해 우려감이 들기 시작했다. 한국 활동가들이 일을 추진할 때 그들의 전문적 능력과 그들에게 편한 공간에 맞는 활동이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면 이주노동자의 목소리와 목표는 뒤쪽으로 훨씬 멀리 물러나게 된다. 예컨대 국제연대차장으로서 내가 주되게 맡고 있는 활동 분야, 즉 국제 인권조약들과 UN, ILO 보고와 제소 메커니즘의 세부사항들이 이주노조 조합원과 간부들 다수가 파악하기에 얼마나 힘든 일인지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출입국관리법과 고용허가제의 대안적 개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그 내용을 토론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려는 시도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여기에 드는 시간과 노력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이러한 중요한 과제들을 진행하면서, 우리는 가장 영향 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활동을 지도하도록 하는 의무를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의 “이주노동자 운동”은 다른 한국인들과 점점 더 많이 얘기하고 있지만 이주노동자 자신들과는 점점 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노조의 활동과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해 신규 조합원들과 지도부가 주인 자격을 주장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주인 자격에 대한 의식이 없이는 우리의 활동을 발전과 경험 축적의 기회로 전환시키는 것이 어렵고, 결국에는 경험 많은 한국 활동가들의 주도성만 강화하게 된다.
확실하게도 여기서 묘사한 경향이 항상 존재했는데, 대부분의 이주 센터와 지원 단체들은 이런 경향을 기껏해야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식하는 정도였고 최악의 상황에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여겼다. 이주노조는 사실 이러한 유형의 불평등을 인식하고 이에 맞서는 용기 있는 노력을 통해 형성되었다. 우리의 가장 경험 많고 훌륭하고 헌신적인 지도부들의 다수가 폭력적으로 추방된 후 문제의 경향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문제를 인식하는 한편 그 문제를 점검할 때 이주노조의 원래 목표, 즉 이주노동자들에 의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조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어느 때보다 필수적이다.(이주노조 규약에서 한국인들을 조합원과 선출 직위에서 배제하는 것은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표적단속 이후 한국인들이 숫자로나 경험으로나 중앙상황실을 주도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이러한 규약의 정신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해법?

우리 운동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의 효과와 싸우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한국 활동가와 이주노동자 활동가들 사이에서 조심스럽지만 솔직한 토론과 비판이 필요 할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필자의 능력을 넘어선다. 그러나 여기에서 개인적인 몇 가지 반성을 해 보겠다.
지난 6월에 홍콩에 있었을 때, 필자는 주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출신의 가사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몇몇 이주노동자 단체와 노조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이주노동자협회(Association of Indonesian Migrant Workers in Hong Kong, ATIK), 인도네시아이주노동자노동조합(Indonesian Migrant Workers Union, IMWU), 필리핀이주노동자노동조합(Filipino Migrant Workers Union, FMWU)을 포함하여 많은 조직들이 상근자도 없고 중심적 역할을 하는 홍콩 활동가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이 조직들을 지원하는 NGO의 소수 상근 활동가들은 이전에 가사 노동자였거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 운동 경험이 있는 그 나라 출신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이 조직들이 감당하는 활동의 양은 더 많은 상근자들이 있거나 홍콩에서 오랜 경험을 가진 홍콩 활동가들의 많은 도움이 있는 경우보다는 적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헌신적인 지도력을 발전시키고, 비교적 많은 회원들을 조직하고(IMWU의 경우2000명 이상에 달한다)홍콩 사회에서 이주노동자 이슈에 관해 실질적인 정치적 행위자가 되는데 성공했다.
홍콩과 한국의 환경은 매우 다르고(홍콩에서는 강제단속이 없고 조직된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완전히 등록되어 있다), 필자가 한국 활동가들이 한국 이주노동자 운동에서 없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홍콩 조직들은 우리가 이주노동자 지도력의 더 큰 발전을 위해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사고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첫째, 우리의 활동과 일상 어휘에서 다음과 같은 어휘를 중심에 놓을 필요가 있다. “역량강화(Empowerment)”, “지도력 개발(leadership development)”은 동등한 노동권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원칙으로 삼아야 하고, 단속추방 중단과 고용허가제 폐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원칙과 목표를 수행함에 있어 우리는 한국 활동가들이 이주노동자로부터 ‘지도력을 끌어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해야 하고, 가혹한 탄압이 벌어지는 중에 이주노동자들이 이러한 지도력을 행사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말들의 의미에 대해 집단적 토론을 지속하지 않고서는 이를 그리는 것은 역시 어렵다. 그러나 생각해볼 만한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있다. 회의 구조를 바꿔서 일부 회의는 이주노동자의 언어로 하고 (불가피하게 부분적으로) 한국말로 통역하는 식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언어가 특권을 가지는 현실에 대응해서 이주노동자의 발언, 의견, 분석을 우선시 할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일 수 있다. 또한 이는 신규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이 현재의 회의 형식에 비해 더 비판적인 능력과 지도력을 개발할 수 있는 보다 편안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게 하려고 노력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개요 파악, 추론, 기억 등과 같은 인식 과정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새로운 지도부를 이주노조 지역 간부들과 조합원들, 지지자들 가운데에서 발굴하고, 그들이 이미 공동체 조직과 센터들에서 하는 활동을 더 알아가고 지원하며, 이주노동자들이 생각과 제안에서 도출된 활동을 한국 활동가들의 것보다 우선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주노조는 물론 더 폭넓은 이주노동자운동이 주력하는 활동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운동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젠더에 대하여

여성 이주노동자를 말해 본 적이 있는가?
머리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기반이 취약해진 상황에서 이주노조가 시도하고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새로운 부문에서 조직화를 확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다양한 국적을 지닌 이주노동자, 고용허가제 노동자, 여성 이주노동자를 조직하려고 한다. 활동가가 심각한 정도로 부족하고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이 없는 상황에서 이주노조의 여성 이주노동자 모임(우리의 일차적 조직화 방식)을 운영하는 것이 필자의 몫이 되었다.
여성 이주노동자 조직화와 “여성 이주노동자 모임”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할 때, 모호하고 분명치 않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것은 “여성 이주노동자”라는 범주를 만드는 순간 우리가 특정한 경험을 정의하고 특정한 정체성을 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본국의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 혹은 딸, 성희롱의 대상, 육체적으로 약해서 이주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조건에 의해 더욱 억압받고, 가장 불쌍한 희생자를 여성 이주노동자의 본질로 여기곤 한다. 이러한 정의들은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복수적이고 다양한 경험의 가능성을 즉각적으로 대상화하고 봉쇄한다. 심지어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경험 중에는 여성에 대한 진보적 관념과 들어맞지 않는 것도 있다.
여성모임 참가자들과 교류하면서 여성의 신체를 가진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여러 형태의 차별과 곤란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참가자들은 이러한 고정관념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들 중 상당수가 결혼하지 않았고 당분간은 생각조차도 않고 있다. 수원에 있는 한 공장의 여성들은 주간작업보다 야간작업을 선호하고, 14시간 교대로 일하고 일요일에 일하는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불만이 적다. 다른 한편으로, 남성 이주노동자 상담 사례를 몇 건 다루었는데 그들은 동일한 노동조건을 견딜 수 없어서 작업장을 옮기고 싶어 했다.
“여성 이주노동자” 범주에 대해 실제로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는 12월에 이주노조에 가입한 K와 알게 되면서이다. K에게서 즉시 감명을 받았는데, 야간조로 일하면서 낮에는 영어를 가르치고 일요일도 거의 쉬지 못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을 위해 시간을 내기까지 한다. 그는 공장에서 노동조건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친구들을 이주노조 조합원과 여성모임 참가자로 조직해서 자기 집에서 모임을 개최하는 등 이주노조 활동에 빠르게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열정은 이주노조 다른 상근자들도 곧 주목했다. 우리는 그가 여성 이주노동자를 대표해서 발언하고 글을 쓰고 여성모임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공식적인 여성모임이 열리기 약 한 달 전에 K가 나에게 전화해서 무언가 불편한 것이 있다며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우리가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내가 이성애자가 아닌지 알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레즈비언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래요.”라고 얘기했다. 그때서야 필자는 여성 젠더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K는 여성이면서 남성을 지향하는 트랜스젠더였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리고 언젠가 수술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외모로 드러내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K의 경험은 여성의 신체를 가진 사람이 항상 여성 정체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K의 정체성을 훨씬 더 일찍 감지했어야 했다. 우리가 여성모임에 대해 얘기할 때 K의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그러면 왜 그가 여기 있어요?”라고 물은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리고 한번은 내가 K를 일컫기 위해 언니에 해당하는 필리핀 단어를 사용했을 때 K는 “아니요. 그건 맞지 않아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필자는 뉴욕에 있을 때 많은 성소수자 단체들과 일하는 동안 이성애중심주의, 동성애혐오, 트랜스젠더 혐오에 대해 훈련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성적/젠더 정체성에 대해서 짐작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연대 공간에서 우리는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이 선호하는 대명사를 얘기하곤 했다(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월산입니다. 저는 이주노조 국제연대 차장입니다. 저는 여성 대명사를 씁니다).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자마자 왜 이러한 원칙을 잊어버렸을까?
K는 마치 어떤 대표적인 여성 이주노동자인 것처럼 놀랍게도 나의 요청을 이해해왔다. 그는 여성이 처한 억압과 여성 이주노동자의 특수한 경험이 여성모임의 중요성을 더한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여성 친구들 사이에서 친구이자 지지자로서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워준다. 그러나 가끔 K는 여성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불편하고 명예멤버로서 참여한다는 것을 필자에게 상기시킨다. 이러한 경험은 필자에게 반성과 자기비판을 하게끔 했다. 여성 이주노동자 정체성을 가진 활동가를 찾으려는 나의 열망이 K가 일상에서 대면하는 억압을 반영하는 억압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정체성을 그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해법

여성모임을 어떻게 지속하고 동시에 K의 경험과 정체성을 인정하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려운 과제다. 이주노조나 대부분의 한국 진보운동 내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관한 집단적인 이해가 부족하고, 심지어 이를 위한 기본적 개념조차도 없다. 필자는 여성모임 참가자들과 어느 정도 (그리고 K의 동의하에) 논의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젠더 정체성과 젠더 유동성(gender-fluidity)을 제기할 공간이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K와 함께 나는 그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다른 이들과 함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성소수자 공간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를 통해 K가 혼자가 아니고 한국 이주노동자 사이에 넓은 범위의 젠더와 성적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모임 안에서 우리는 그 공간을 대략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간략하게 논의했다. 그것은 참여하는 K의 친구가 K의 정체성에 대해 짐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가능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이야기지만 필자에게 그 경험은 젠더 정체성이 얼마나 유동적인지 그리고 여성모임이나 이주노조에 다른 트랜스젠더가 없더라도(있을지도 모르지만) 여성(또는 남성) 이주노동자라는 특정한 생각에 들어맞지 않는 범위의 정체성과 경험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결론

K의 사례는 인종과 마찬가지로 젠더가 억압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부과될 수 있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재확인해 준다. 젠더와 인종 양자가 조직화의 기반이 되는 것은 그것들이 억압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쓰면서 필자는 인종과 젠더구조 혹은 인종과 젠더 분할선을 따르는 조직화가 대등하다고 간단히 결론을 이끌어내는 실수를 바라지는 않는다. 사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는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다. 첫 번째 것은 인종화된 그룹 사이의 차이와 불평등을 보다 명확하게 인정할 것을 요청하고 두 번째 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관념을 흔들고 젠더 유동성의 현실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궁극적 목표가 계급 자체의 폐지에 있듯이 인종기반의 투쟁의 목표는 인종적 위계를 폐지하고 인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철폐하는 것이다. 그러면 젠더 기반의 투쟁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종과 젠더 분할선을 따라 조직하는 것은 권리, 사회적 신분과 권력의 불평등과 이러한 불평등이 경험을 형성하는 방식을 인식하고 명명하는 것에 기반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러한 범주를 선천적이거나 고정된 것으로 여기면 그것이 구성되는 성질과 바뀔 수도 있는 가능성을 망각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K가 남성 또는 여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나만의 가정들을 넘어서는 길을 제시해 준 것처럼, 전 사무국장이 마숨 동지는 최근에 이주민/한국인의 구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글을 썼다.

“저를 외국인, 이주노동자로 부를 때 저는 한국 경제에 도움 되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사장을 먹여 살리고 공장의 기계를 돌리고 한국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3D업체는 한국 경제의 없을 수 없는 산업입니다. 그 업체에 이주노동자 없이 기계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한국말 배우고, 한국 문화도 배우고 한국사회를 아는 사람인 저를 어떻게 외국 노동자라고 불렀나? 저는 외국인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지만 한국의 노동자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보더라도, 마숨 동지는 한국의 노동자로서 삶을 경험했고, 자신의 투쟁이 한국 노동자의 투쟁과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를 한국 노동자로 여겼다.
이주노조를 만들 때 “이주노동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한국 활동가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규약을 만든 것은 필요한 것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말을 하고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다수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사회, 정부, 진보운동에 도전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집단적 힘과 지도력을 발전시키는 공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이주노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궁극적 목표는 언젠가 마숨 동지의 꿈 즉, 그와 같은 사람 역시 한국 노동자로 인정받겠다는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 운동 내부에서부터 이주노동자들을 한국 노동자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주노동자로부터 지도력을 이끌어 내거나 지도력을 이주노동자들에게 부여하며, 지도력 개발과 역량강화를 실천한다면, 우리는 이주노동자운동 내에서 권력 차이를 평등화하고 한국 활동가의 실질적인 한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한국인/이주민이라는 이분법을 깰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여성들의 공간이, 그리고 여성들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이주노동자운동 내에서 지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여성”이라는 범주가 어떻게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는지, 그것이 여성 억압의 기초인 젠더 이분법에 도전하는 우리의 노력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인식해야 한다고 믿는다. 덧붙여, K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여성”이라는 범주의 설정은 그러한 이분법에 이미 도전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여지를 주지는 않는다. 성소수자의 정치학은 적어도 이러한 이분법에 부분적으로 도전하기 때문에, 여성해방을 위해 성소수자로서 조직하는 것이 여성으로서 조직하는 것만큼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처럼 어떤 점에서 우리는 이주노동자운동 내에서 성소수자 이슈에 대응하기 위한 개념을 익히고 경험을 배워서 젠더에 기초한 억압에 대항하는 우리의 투쟁에서 그것들을 우리의 디딤돌로 삼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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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여성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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