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상반기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의 평가와 과제
들어가며
2008년 상반기의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은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약화라기보다는 정체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촛불집회 등 큰 흐름에 함께 흘러가는 양상을 보였다. 중요한 것은 상반기가 어떠했다 규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후 비정규직 운동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비정규직 운동이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 운동 속에서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를 담아 새 정권의 등장, 촛불시위, 비정규악법 시행 1년 등 정세적 상황 속에서 비정규직 운동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보고, 비정규운동의 주체의 측면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이후 투쟁의 과제를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정세 속에서의 비정규직 운동
비정규직 악법 폐기 전선은 왜 확대되지 못했나
2008년 7월 1일로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 1년을 맞았다. 비정규직보호법은 올해 7월부터는 100인 이상 30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 적용되었고, 2009년 7월부터 5인 이상 10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 적용될 예정이다. 게다가 2006년 통과된 비정규악법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보호가 아니라 착취를 위해 악용됨에도 불구하고, 더 후퇴하는 방향으로 개정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어 그 심각함은 더욱 크다. 이미 한나라당에서 비정규법보호법을 안착화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정안을 내놓았다. 한나라당은 △비정규직 계약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최저근로조건 부여, △파견근로 업종 확대, △노동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의신청 간소화, △4대 보험 적용의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개정안 추진을 검토 중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기업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기간을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현재 32개 업종으로 제한된 파견근로 허용 업종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보호법의 적용 대상을 더욱 확대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더욱 늘리고 노동권을 박탈하려는 의도로이며 심각한 사회 문제를 낳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면에서도 지난해 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인해 사회 이슈화된 비정규악법은 안타깝게도 2008년에는 시행 1년에 즈음한 6월과 7월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투쟁의 쟁점으로 떠오르지 못했다. 그렇다면 비정규악법을 폐기하고 권리보장을 쟁취하기 위한 전반의 투쟁 전선이 확대되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묻혀가는 것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까?
우선, 운동사회 내의 주된 이슈가 되지 못한 것에는 이미 통과된 법에 대한 무기력도 존재하겠지만, 더 이상 이 투쟁을 이끌 투쟁의 선도적 주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이는 오래된 쟁점 중의 하나인 비정규직 운동을 비정규직 당사자만이 할 문제는 아니라는 점과 맞닿아 있는데, 그동안 비정규악법 폐기 투쟁이 여러 운동단체 나름의 노력은 있었지만 주로는 비정규직 당사자만의 투쟁으로 연명하였다. 2008년 상반기의 비정규악법 폐기 투쟁은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새롭게 떠오르지 않았고, 투쟁이 수면위로 오르지 못했다. 살펴보면 지난해 이랜드-뉴코아 노조의 투쟁은 비정규악법을 둘러싸고 자본과 노동의 대리전을 보였던 반면 2008년에는 그러한 투쟁이 없었다. 물론 2008년 6월 주택금융공사와 신용보증기금에서도 비정규직보호법의 법망을 피해가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 계약해지가 있었지만 지난해와 같은 폭발적인 대응력은 보이지 못했다. 이는 투쟁할 주체가 없으면 투쟁이 없다는 자명한 이치의 반증이겠지만, 투쟁의 주체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해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작년 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에 모든 운동진영이 힘을 쏟아 부었지만, 이를 대표적 투쟁으로 삼아 일점돌파하는 것보다 각각의 영역에서 어떻게 실천할지를 고민했어야 했다. 400일이 걸려 투쟁을 정리한 뉴코아노조의 투쟁 결과도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다. 촛불집회라는 정세적 사안과 운동진영의 전반적인 무력감이 이와 같은 투쟁의 정체 상태를 낳은 것도 사실이다. 비정규악법 폐기라는 입장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투쟁을 선도적으로 만들어준다면 모를까 아무도 이를 중요한 투쟁의 과제로 배치하고 투쟁을 만들어 나가려는 단위는 없었다. 또 이미 비정규보호법이 통과되고 심지어 확대 개악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양상은 비정규직보호법을 둘러싼 문제를 자기 과제로 삼으려는 고민이 부족한 현실을 보여준다. 진단을 이렇게 하더라도, 여전히 하반기에도 운동사회 내에서 비정규악법 폐기 투쟁으로 투쟁전선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비정규악법 폐기 투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장기적 투쟁의 과제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다.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 문제를 50년이 넘게 끈질기게 제기하며 투쟁의 국면을 만드는 움직임과 같이 비정규직 악법의 문제를 계속적 제기하고 각각의 위치에서 일상의 과제로 만들어 가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촛불집회, 정세적 투쟁에 있어서의 비정규직 문제
5월부터 시작된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 네티즌의 적극적 활동을 중심으로 거의 네 달 동안 식을 줄 모르며 번져 나갔다. 이러다보니 대부분의 일상 활동도 광우병 반대 촛불집회 일정에 따라 바뀌거나 지속하기 어려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촛불집회 국면에서 비정규직 운동의 공간이 확장될 가능성도 존재했다. 여기에서는 촛불집회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상반기 정세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촛불집회에 비정규직 운동은 어떻게 움직였고, 어떠한 한계가 있었는지를 짚어 보고자 한다.
일단 운동진영 전반의 촛불정국에 대한 대응 부족이 비정규직 운동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비정규직 노동조합 등 비정규직 운동 진영에서는 촛불집회가 시작된 직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는 못했다. 이는 비정규노조 만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진영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권에서부터 유포된 ‘집단 이기주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자유롭지 못한 민주노총은 촛불집회 국면 초기에 수세적인 자세로 대응하며 오히려 투쟁을 하지 못하고 정세 주도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뒤늦게 발표한 투쟁 없는 총파업 투쟁의 선언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노총의 이러한 행보는 노동자운동 전반의 대응 약화로 나타났고, 비정규직 운동 자체도 이에 규정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민주노총 때문에 노동자운동 전반의 대응이 약화되었다는 것보다는 비정규직 운동이 촛불집회라는 정세적 국면에서 왜 대응하기 어려웠는가를 살펴보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촛불집회라는 정세에 대응하는 비정규운동의 모습을 통해 거꾸로 비정규운동의 한계를 살펴 볼 수 있다.
그 한계의 하나는, 그동안 비정규직 운동이 촛불집회 만이 아니라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하거나 이와 결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초기대응이 어려웠더라도 비정규직 노조 등은 6월경부터 촛불시위와 비정규직 문제를 연결하고 촛불집회를 정치적 공간으로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전전도 진행하고, 시청광장에 비정규직 천막도 치고, 거리토론회도 진행했다. 이러한 것 자체는 훌륭한 시도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촛불 의제 확장의 방향으로 더 진척시키지 못했고, 비정규직 운동 자체가 정치적으로 진전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에도 많은 한계를 보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촛불집회에 열심히 참석했지만, 촛불집회라는 국면 자체에 대한 인식과 판단보다는 촛불집회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를 알려나가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다보니 6월 이후 광우병 문제를 넘어 의제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연결하여 이를 확장하려는 데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했다.
이는 단지 촛불집회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주체들이 정치적인 문제를 바라보고 이를 행동화하는 데 익숙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그동안 비정규직 운동은 너무나 열악한 조건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매몰될 수밖에 없었다. 비정규직 투쟁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들이 해고되어 극한에 몰리면서 투쟁이 시작되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문제와 비정규직의 문제를 연결하여 더 높은 정치의식으로 나아가는 데는 일정 수준에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촛불집회에서의 대응은 비정규직 문제를 전체 운동 흐름 속에서 어떻게 연결하고 어떻게 함께 할지에 대한 한계를 드러냈고, 비정규운동이 정치적 운동과 어떻게 조우할 것인가를 과제로 남겨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단지 비정규직 주체들만의 문제는 아니며,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운동 진영 전반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비정규직 운동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시혜적인 시각과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또한 비정규직 운동은 비정규직 주체 당사자가 주로 해야 한다는 인식도 여전히 남아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많은 운동단체들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정치적 분화도 겪고 있지만, 비정규직의 문제를 권리의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시혜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데 더 익숙하며, 비정규직 운동은 어떠한 방식으로 함께 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고민하고 있지 못하다. 이런 현실을 더 들여다보면 촛불집회에서 왜 비정규직 문제만이 다른 의제와 다른 양상을 보였는지 고민해 볼 수 있다. 비정규직 투쟁은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분리되는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광우병 위험은 국민 모두의 문제였지 누군가가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 있지만 광우병에 걸릴 당신들이 불쌍하니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이후 확장된 의제인 의료민영화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달랐다. 물론 의제의 특성도 있다. 광우병 문제로 불거진 검역주권 문제나 의료민영화로 나타날 건강권 문제는 생활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국민 공감대를 쉽게 살 수는 있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특정 계층의 문제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검역주권이나 건강권 등 생활권의 문제에도 계급적인 문제는 그대로 도사리고 있다. 광우병 위험도 계급 간에 불균등하며, 의료민영화가 되면 건강권의 계급적 격차는 더욱 심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비정규직 문제와 다른 문제가 의제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운동의 상황이 다르게 나타났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이는 투쟁을 만들어 내는 방식 및 방향이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존재로서의 비정규직 문제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노동 불안정화의 문제와 인간답게 살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노동할 권리를 지켜내는 문제를 사회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방향으로 그동안 비정규운동이 나아가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주체의 측면에서 비정규직 운동
비정규노동자 주체화 문제: 전략조직화, 일상적 주체화
비정규직 운동이 시작된 이래로 비정규 노동자 주체화 문제는 늘 고민되는 부분이다. 일상 활동에서 비정규직을 주체화하기 위한 시도가 이뤄졌고, 최근 몇 년간 민주노총에서 제안한 전략조직화 사업도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상반기에는 비정규노동자 주체화라는 과제에서 특별히 두드러진 활동이 없었다.
우선,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전략조직화는 더 이상 진척된 것이 없다. 민주노총은 상반기 평가에서도 나오듯이, 민주노총은 “비정규 미조직 노동자 조직, 복수노조 대응, 중소영세사업장 조직화 등 민주노총 조직 확대 사업전략 마련이 시급하다”는 판단 하에 이를 포괄적으로 추진하는 단위로 조직확대기획단을 구성하였고, 수차례 회의의 교육을 진행하려 했지만 촛불 정국 하에서 뚜렷한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또한 몇 년간 진행된 전략조직화 사업의 일환으로 각 산별연맹과 지역본부에 조직 활동가들이 포진했지만 이러한 사업이 비정규직 전략조직화라는 목적에 잘 부합했는지는 의문이 든다. 이는 조직 활동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산별연맹과 지역본부의 노조 일상사업과, 아이러니하게도 급박하게 발생하는 (비정규직) 투쟁으로 인해 본래 취지에 맞는 전략조직화가 이루어지지는 못했고, 조직 활동가들이 전략조직화 사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물론 노조의 일상사업과 투쟁이 비정규직 전략조직화라는 것과 반드시 분리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시스템의 점검 없이 전략조직화 사업이 한 두 명 활동가의 배치로 해결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전반적인 시스템 구축이 어려운 것인가? 작년의 경우 이랜드뉴코아라는 정세적으로 굵직한 투쟁이 배치되어 있었다지만, 올해 비정규직 투쟁은 이전의 투쟁이 장기적으로 계속된 상황에 머물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상적 비정규직 주체화나 전략조직화가 왜 고민되지 못했는지는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부분 산별연맹으로 전환된 노조의 현실도 돌아봐야 한다. 물론 이전의 기업별 노조의 형태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전환된 산별연맹의 형태로 인해, 전환 이후 오히려 비정규직의 주체화라는 과제는 망각되거나 여전히도 뒷전으로 돌려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상반기 비정규노동자 주체화는 거의 진전되지 못했다. 일상적 주체화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촛불집회와 임단협 등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화할 활동가들의 손발도 부족했고, 비정규직을 주체화 하는 시스템도 쉽게 마련되지 못했다. 물론 소산별이나 개별노조 차원에서, 지역운동 단위, 노동 단체 등에서 이러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러한 활동이 노동자운동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임에도 투쟁의 중요도에서 밀리는 현실을 되짚어 봐야한다.
비정규직 연대운동의 현실
상반기는 비정규직 연대운동에 있어서도 답보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비정규공동투쟁단의 형태로 진행된 연대운동은 두 차례의 조합원 공동투쟁 등 나름 의미가 있었지만, 어떠한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에 대한 초점이 없었다. 이는 단지 이번 공동투쟁단의 운영 목표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나타난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비정규직 노동조합 연대운동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상반기 비정규직 노조 하나하나 개별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투쟁, 연대투쟁은 제대로 되지 못했다. 이는 비정규직 연대운동, 공동투쟁을 이어낼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공동투쟁의 목표도, 정세적 계기도 만들지 못했다. 이는 지난 몇 년간 비정규 연대운동의 한계나 공동투쟁의 경험을 통한 성과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조합 연대운동의 구심이어야 할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전비연) 활동도 침체되어 있다. 전비연이 활성화되던 시기에는 ‘비정규직 법안’을 둘러싼 공동대응이 정세적으로 모두에게 중요한 고리로 작용했고, 열린우리당 점거와 같은 공동투쟁 역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고리가 없다. 아니 있지만,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비정규악법 폐기가 비정규직 노조의 공동투쟁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했고, ‘간접고용철폐’나 ‘특수고용 노동자성 인정’과 같은 각 영역의 투쟁도 정세적으로 공동투쟁의 의미를 획득해 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개별 비정규직 노조 역시 이러한 공동투쟁에 의미를 두고 투쟁을 전개할 동인을 찾기 어려웠다.
한편 최근 두드러지는 비정규직 투쟁의 장기화 역시 비정규직 연대운동의 한계를 드러낸다. 사실 상반기에 새로 나타난 비정규직 투쟁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짧게는 1년, 길게는 2~3년간 투쟁을 지속해온 노동조합이다. 상반기 비정규직 투쟁은 금속노조 기륭분회, 철도노조 KTX승무원지부, 사무금융연맹 코스콤비정규노조, GM대우 비정규지회, 이랜드일반노조, 뉴코아노조 등 이미 지난 몇 년간 투쟁을 반복해온 노조라는 점 역시 공동투쟁을 만들기 어려운 조건을 형성한다. 한동안 비정규직 노조의 장기투쟁에서 신화처럼 있었던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의 517일간의 투쟁의 기록은 깨진지 오래다. 800일, 1000일이 넘는 투쟁이 되면서 투쟁의 의미를 함께 만들기에는 역량이 소진되고 지친 측면이 많다. 그동안 이러한 노동조합이 공동투쟁을 시도해보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공동 연대투쟁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남아있는 것은 개별노조 하나하나다. 문제 해결이 안 될수록 투쟁주체들의 상태가 연대투쟁을 할 만큼의 여유도 없게 된다. 제 발등의 불끄기에 급급한 현실이 생기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투쟁, 왜 장기화 되나
그렇다면 왜 비정규직 투쟁은 장기화되는 것일까? 비정규직 투쟁이 장기화되는 것은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법판정이 나도, 몇 번의 점거를 해도 사태 해결이 어렵다. 자본이 그만큼 악랄해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정규직 투쟁이 10년여가 되면서 투쟁방식이 답보상태에 머문 것도 한계다. 자본은 대응지침을 만들고 교묘하게 나오는데, 우리의 투쟁은 그러하지 못하다. 물론 이는 힘의 논리인 투쟁에서 그 투쟁의 수는 많아졌지만 투쟁의 힘은 역으로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투쟁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투쟁 장기화와 연관이 있다. 이는 비정규직 투쟁의 목표와도 닿아있다. 한편으로는 지금 운동의 수준과 상황이 투쟁을 정리할 때는 어떻게 해야 올바른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투쟁만이 살길이다’ ‘투쟁으로 돌파하자’라는 말의 유의미성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성과 남기기 식 투쟁을 지향하다보니 성과가 남을 수 없는 투쟁은 마무리 할 수 없는 투쟁이 된다. 투쟁을 정리한 이후에 다시 투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어떻게 투쟁의 의미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투쟁의 주체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를 좀 더 논의한다면 현재와 같은 투쟁의 장기화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 문제는 비정규직 노조만의 문제는 아니다. 운동이 어려워질수록 운동의 의미를 지켜야한다는 우리의 원칙도 허물어져간다. 그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흐릿해진다. 투쟁의 원칙을, 운동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 이러한 문제를 풀어가는 시작이 될 것이다.
나가며
지금까지 비정규직 투쟁은 당사자들이 처절하게 투쟁해서 존재를 인식하게 하고 처절한 투쟁에 연대를 촉구하는 방식이었다면, 앞으로는 비정규직 투쟁이 모두의 투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인권(노동권)의 측면에서의 권리 찾기, 노동 불안정화에 대한 대응으로 나아가야만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의 문제도 돈 몇 푼 올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생활임금의 문제로 접근해 보자. 투쟁의 목표가 개별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 전반의 권리보장 확대로 나아가야 한다.
비정규운동의 화두를 전환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 동안 비정규직 투쟁은 고용을 유지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투쟁도 해고투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대해 자본은 지쳐 떨어질 때까지 내버려두거나, 무기근로계약과 같은 방식으로 교묘히 고용을 유지시켜주는 방식으로 포장하여 비정규직노동자를 반쪽짜리 권리를 지닌 노동자로 고착화시켜 버린다. 우리의 투쟁의 화두를 고용의 측면을 넘어 안정적으로 일할 권리의 문제로, 반(反)빈곤의 문제로 만들어 가자.
2008년 상반기의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은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약화라기보다는 정체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촛불집회 등 큰 흐름에 함께 흘러가는 양상을 보였다. 중요한 것은 상반기가 어떠했다 규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후 비정규직 운동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비정규직 운동이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 운동 속에서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를 담아 새 정권의 등장, 촛불시위, 비정규악법 시행 1년 등 정세적 상황 속에서 비정규직 운동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보고, 비정규운동의 주체의 측면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이후 투쟁의 과제를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정세 속에서의 비정규직 운동
비정규직 악법 폐기 전선은 왜 확대되지 못했나
2008년 7월 1일로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 1년을 맞았다. 비정규직보호법은 올해 7월부터는 100인 이상 30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 적용되었고, 2009년 7월부터 5인 이상 10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 적용될 예정이다. 게다가 2006년 통과된 비정규악법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보호가 아니라 착취를 위해 악용됨에도 불구하고, 더 후퇴하는 방향으로 개정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어 그 심각함은 더욱 크다. 이미 한나라당에서 비정규법보호법을 안착화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정안을 내놓았다. 한나라당은 △비정규직 계약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최저근로조건 부여, △파견근로 업종 확대, △노동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의신청 간소화, △4대 보험 적용의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개정안 추진을 검토 중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기업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기간을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현재 32개 업종으로 제한된 파견근로 허용 업종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보호법의 적용 대상을 더욱 확대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더욱 늘리고 노동권을 박탈하려는 의도로이며 심각한 사회 문제를 낳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면에서도 지난해 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인해 사회 이슈화된 비정규악법은 안타깝게도 2008년에는 시행 1년에 즈음한 6월과 7월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투쟁의 쟁점으로 떠오르지 못했다. 그렇다면 비정규악법을 폐기하고 권리보장을 쟁취하기 위한 전반의 투쟁 전선이 확대되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묻혀가는 것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까?
우선, 운동사회 내의 주된 이슈가 되지 못한 것에는 이미 통과된 법에 대한 무기력도 존재하겠지만, 더 이상 이 투쟁을 이끌 투쟁의 선도적 주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이는 오래된 쟁점 중의 하나인 비정규직 운동을 비정규직 당사자만이 할 문제는 아니라는 점과 맞닿아 있는데, 그동안 비정규악법 폐기 투쟁이 여러 운동단체 나름의 노력은 있었지만 주로는 비정규직 당사자만의 투쟁으로 연명하였다. 2008년 상반기의 비정규악법 폐기 투쟁은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새롭게 떠오르지 않았고, 투쟁이 수면위로 오르지 못했다. 살펴보면 지난해 이랜드-뉴코아 노조의 투쟁은 비정규악법을 둘러싸고 자본과 노동의 대리전을 보였던 반면 2008년에는 그러한 투쟁이 없었다. 물론 2008년 6월 주택금융공사와 신용보증기금에서도 비정규직보호법의 법망을 피해가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 계약해지가 있었지만 지난해와 같은 폭발적인 대응력은 보이지 못했다. 이는 투쟁할 주체가 없으면 투쟁이 없다는 자명한 이치의 반증이겠지만, 투쟁의 주체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해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작년 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에 모든 운동진영이 힘을 쏟아 부었지만, 이를 대표적 투쟁으로 삼아 일점돌파하는 것보다 각각의 영역에서 어떻게 실천할지를 고민했어야 했다. 400일이 걸려 투쟁을 정리한 뉴코아노조의 투쟁 결과도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다. 촛불집회라는 정세적 사안과 운동진영의 전반적인 무력감이 이와 같은 투쟁의 정체 상태를 낳은 것도 사실이다. 비정규악법 폐기라는 입장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투쟁을 선도적으로 만들어준다면 모를까 아무도 이를 중요한 투쟁의 과제로 배치하고 투쟁을 만들어 나가려는 단위는 없었다. 또 이미 비정규보호법이 통과되고 심지어 확대 개악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양상은 비정규직보호법을 둘러싼 문제를 자기 과제로 삼으려는 고민이 부족한 현실을 보여준다. 진단을 이렇게 하더라도, 여전히 하반기에도 운동사회 내에서 비정규악법 폐기 투쟁으로 투쟁전선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비정규악법 폐기 투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장기적 투쟁의 과제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다.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 문제를 50년이 넘게 끈질기게 제기하며 투쟁의 국면을 만드는 움직임과 같이 비정규직 악법의 문제를 계속적 제기하고 각각의 위치에서 일상의 과제로 만들어 가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촛불집회, 정세적 투쟁에 있어서의 비정규직 문제
5월부터 시작된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 네티즌의 적극적 활동을 중심으로 거의 네 달 동안 식을 줄 모르며 번져 나갔다. 이러다보니 대부분의 일상 활동도 광우병 반대 촛불집회 일정에 따라 바뀌거나 지속하기 어려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촛불집회 국면에서 비정규직 운동의 공간이 확장될 가능성도 존재했다. 여기에서는 촛불집회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상반기 정세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촛불집회에 비정규직 운동은 어떻게 움직였고, 어떠한 한계가 있었는지를 짚어 보고자 한다.
일단 운동진영 전반의 촛불정국에 대한 대응 부족이 비정규직 운동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비정규직 노동조합 등 비정규직 운동 진영에서는 촛불집회가 시작된 직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는 못했다. 이는 비정규노조 만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진영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권에서부터 유포된 ‘집단 이기주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자유롭지 못한 민주노총은 촛불집회 국면 초기에 수세적인 자세로 대응하며 오히려 투쟁을 하지 못하고 정세 주도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뒤늦게 발표한 투쟁 없는 총파업 투쟁의 선언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노총의 이러한 행보는 노동자운동 전반의 대응 약화로 나타났고, 비정규직 운동 자체도 이에 규정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민주노총 때문에 노동자운동 전반의 대응이 약화되었다는 것보다는 비정규직 운동이 촛불집회라는 정세적 국면에서 왜 대응하기 어려웠는가를 살펴보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촛불집회라는 정세에 대응하는 비정규운동의 모습을 통해 거꾸로 비정규운동의 한계를 살펴 볼 수 있다.
그 한계의 하나는, 그동안 비정규직 운동이 촛불집회 만이 아니라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하거나 이와 결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초기대응이 어려웠더라도 비정규직 노조 등은 6월경부터 촛불시위와 비정규직 문제를 연결하고 촛불집회를 정치적 공간으로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전전도 진행하고, 시청광장에 비정규직 천막도 치고, 거리토론회도 진행했다. 이러한 것 자체는 훌륭한 시도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촛불 의제 확장의 방향으로 더 진척시키지 못했고, 비정규직 운동 자체가 정치적으로 진전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에도 많은 한계를 보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촛불집회에 열심히 참석했지만, 촛불집회라는 국면 자체에 대한 인식과 판단보다는 촛불집회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를 알려나가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다보니 6월 이후 광우병 문제를 넘어 의제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연결하여 이를 확장하려는 데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했다.
이는 단지 촛불집회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주체들이 정치적인 문제를 바라보고 이를 행동화하는 데 익숙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그동안 비정규직 운동은 너무나 열악한 조건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매몰될 수밖에 없었다. 비정규직 투쟁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들이 해고되어 극한에 몰리면서 투쟁이 시작되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문제와 비정규직의 문제를 연결하여 더 높은 정치의식으로 나아가는 데는 일정 수준에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촛불집회에서의 대응은 비정규직 문제를 전체 운동 흐름 속에서 어떻게 연결하고 어떻게 함께 할지에 대한 한계를 드러냈고, 비정규운동이 정치적 운동과 어떻게 조우할 것인가를 과제로 남겨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단지 비정규직 주체들만의 문제는 아니며,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운동 진영 전반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비정규직 운동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시혜적인 시각과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또한 비정규직 운동은 비정규직 주체 당사자가 주로 해야 한다는 인식도 여전히 남아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많은 운동단체들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정치적 분화도 겪고 있지만, 비정규직의 문제를 권리의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시혜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데 더 익숙하며, 비정규직 운동은 어떠한 방식으로 함께 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고민하고 있지 못하다. 이런 현실을 더 들여다보면 촛불집회에서 왜 비정규직 문제만이 다른 의제와 다른 양상을 보였는지 고민해 볼 수 있다. 비정규직 투쟁은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분리되는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광우병 위험은 국민 모두의 문제였지 누군가가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 있지만 광우병에 걸릴 당신들이 불쌍하니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이후 확장된 의제인 의료민영화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달랐다. 물론 의제의 특성도 있다. 광우병 문제로 불거진 검역주권 문제나 의료민영화로 나타날 건강권 문제는 생활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국민 공감대를 쉽게 살 수는 있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특정 계층의 문제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검역주권이나 건강권 등 생활권의 문제에도 계급적인 문제는 그대로 도사리고 있다. 광우병 위험도 계급 간에 불균등하며, 의료민영화가 되면 건강권의 계급적 격차는 더욱 심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비정규직 문제와 다른 문제가 의제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운동의 상황이 다르게 나타났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이는 투쟁을 만들어 내는 방식 및 방향이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존재로서의 비정규직 문제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노동 불안정화의 문제와 인간답게 살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노동할 권리를 지켜내는 문제를 사회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방향으로 그동안 비정규운동이 나아가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주체의 측면에서 비정규직 운동
비정규노동자 주체화 문제: 전략조직화, 일상적 주체화
비정규직 운동이 시작된 이래로 비정규 노동자 주체화 문제는 늘 고민되는 부분이다. 일상 활동에서 비정규직을 주체화하기 위한 시도가 이뤄졌고, 최근 몇 년간 민주노총에서 제안한 전략조직화 사업도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상반기에는 비정규노동자 주체화라는 과제에서 특별히 두드러진 활동이 없었다.
우선,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전략조직화는 더 이상 진척된 것이 없다. 민주노총은 상반기 평가에서도 나오듯이, 민주노총은 “비정규 미조직 노동자 조직, 복수노조 대응, 중소영세사업장 조직화 등 민주노총 조직 확대 사업전략 마련이 시급하다”는 판단 하에 이를 포괄적으로 추진하는 단위로 조직확대기획단을 구성하였고, 수차례 회의의 교육을 진행하려 했지만 촛불 정국 하에서 뚜렷한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또한 몇 년간 진행된 전략조직화 사업의 일환으로 각 산별연맹과 지역본부에 조직 활동가들이 포진했지만 이러한 사업이 비정규직 전략조직화라는 목적에 잘 부합했는지는 의문이 든다. 이는 조직 활동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산별연맹과 지역본부의 노조 일상사업과, 아이러니하게도 급박하게 발생하는 (비정규직) 투쟁으로 인해 본래 취지에 맞는 전략조직화가 이루어지지는 못했고, 조직 활동가들이 전략조직화 사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물론 노조의 일상사업과 투쟁이 비정규직 전략조직화라는 것과 반드시 분리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시스템의 점검 없이 전략조직화 사업이 한 두 명 활동가의 배치로 해결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전반적인 시스템 구축이 어려운 것인가? 작년의 경우 이랜드뉴코아라는 정세적으로 굵직한 투쟁이 배치되어 있었다지만, 올해 비정규직 투쟁은 이전의 투쟁이 장기적으로 계속된 상황에 머물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상적 비정규직 주체화나 전략조직화가 왜 고민되지 못했는지는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부분 산별연맹으로 전환된 노조의 현실도 돌아봐야 한다. 물론 이전의 기업별 노조의 형태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전환된 산별연맹의 형태로 인해, 전환 이후 오히려 비정규직의 주체화라는 과제는 망각되거나 여전히도 뒷전으로 돌려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상반기 비정규노동자 주체화는 거의 진전되지 못했다. 일상적 주체화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촛불집회와 임단협 등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화할 활동가들의 손발도 부족했고, 비정규직을 주체화 하는 시스템도 쉽게 마련되지 못했다. 물론 소산별이나 개별노조 차원에서, 지역운동 단위, 노동 단체 등에서 이러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러한 활동이 노동자운동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임에도 투쟁의 중요도에서 밀리는 현실을 되짚어 봐야한다.
비정규직 연대운동의 현실
상반기는 비정규직 연대운동에 있어서도 답보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비정규공동투쟁단의 형태로 진행된 연대운동은 두 차례의 조합원 공동투쟁 등 나름 의미가 있었지만, 어떠한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에 대한 초점이 없었다. 이는 단지 이번 공동투쟁단의 운영 목표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나타난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비정규직 노동조합 연대운동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상반기 비정규직 노조 하나하나 개별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투쟁, 연대투쟁은 제대로 되지 못했다. 이는 비정규직 연대운동, 공동투쟁을 이어낼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공동투쟁의 목표도, 정세적 계기도 만들지 못했다. 이는 지난 몇 년간 비정규 연대운동의 한계나 공동투쟁의 경험을 통한 성과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조합 연대운동의 구심이어야 할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전비연) 활동도 침체되어 있다. 전비연이 활성화되던 시기에는 ‘비정규직 법안’을 둘러싼 공동대응이 정세적으로 모두에게 중요한 고리로 작용했고, 열린우리당 점거와 같은 공동투쟁 역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고리가 없다. 아니 있지만,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비정규악법 폐기가 비정규직 노조의 공동투쟁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했고, ‘간접고용철폐’나 ‘특수고용 노동자성 인정’과 같은 각 영역의 투쟁도 정세적으로 공동투쟁의 의미를 획득해 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개별 비정규직 노조 역시 이러한 공동투쟁에 의미를 두고 투쟁을 전개할 동인을 찾기 어려웠다.
한편 최근 두드러지는 비정규직 투쟁의 장기화 역시 비정규직 연대운동의 한계를 드러낸다. 사실 상반기에 새로 나타난 비정규직 투쟁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짧게는 1년, 길게는 2~3년간 투쟁을 지속해온 노동조합이다. 상반기 비정규직 투쟁은 금속노조 기륭분회, 철도노조 KTX승무원지부, 사무금융연맹 코스콤비정규노조, GM대우 비정규지회, 이랜드일반노조, 뉴코아노조 등 이미 지난 몇 년간 투쟁을 반복해온 노조라는 점 역시 공동투쟁을 만들기 어려운 조건을 형성한다. 한동안 비정규직 노조의 장기투쟁에서 신화처럼 있었던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의 517일간의 투쟁의 기록은 깨진지 오래다. 800일, 1000일이 넘는 투쟁이 되면서 투쟁의 의미를 함께 만들기에는 역량이 소진되고 지친 측면이 많다. 그동안 이러한 노동조합이 공동투쟁을 시도해보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공동 연대투쟁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남아있는 것은 개별노조 하나하나다. 문제 해결이 안 될수록 투쟁주체들의 상태가 연대투쟁을 할 만큼의 여유도 없게 된다. 제 발등의 불끄기에 급급한 현실이 생기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투쟁, 왜 장기화 되나
그렇다면 왜 비정규직 투쟁은 장기화되는 것일까? 비정규직 투쟁이 장기화되는 것은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법판정이 나도, 몇 번의 점거를 해도 사태 해결이 어렵다. 자본이 그만큼 악랄해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정규직 투쟁이 10년여가 되면서 투쟁방식이 답보상태에 머문 것도 한계다. 자본은 대응지침을 만들고 교묘하게 나오는데, 우리의 투쟁은 그러하지 못하다. 물론 이는 힘의 논리인 투쟁에서 그 투쟁의 수는 많아졌지만 투쟁의 힘은 역으로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투쟁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투쟁 장기화와 연관이 있다. 이는 비정규직 투쟁의 목표와도 닿아있다. 한편으로는 지금 운동의 수준과 상황이 투쟁을 정리할 때는 어떻게 해야 올바른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투쟁만이 살길이다’ ‘투쟁으로 돌파하자’라는 말의 유의미성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성과 남기기 식 투쟁을 지향하다보니 성과가 남을 수 없는 투쟁은 마무리 할 수 없는 투쟁이 된다. 투쟁을 정리한 이후에 다시 투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어떻게 투쟁의 의미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투쟁의 주체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를 좀 더 논의한다면 현재와 같은 투쟁의 장기화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 문제는 비정규직 노조만의 문제는 아니다. 운동이 어려워질수록 운동의 의미를 지켜야한다는 우리의 원칙도 허물어져간다. 그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흐릿해진다. 투쟁의 원칙을, 운동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 이러한 문제를 풀어가는 시작이 될 것이다.
나가며
지금까지 비정규직 투쟁은 당사자들이 처절하게 투쟁해서 존재를 인식하게 하고 처절한 투쟁에 연대를 촉구하는 방식이었다면, 앞으로는 비정규직 투쟁이 모두의 투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인권(노동권)의 측면에서의 권리 찾기, 노동 불안정화에 대한 대응으로 나아가야만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의 문제도 돈 몇 푼 올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생활임금의 문제로 접근해 보자. 투쟁의 목표가 개별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 전반의 권리보장 확대로 나아가야 한다.
비정규운동의 화두를 전환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 동안 비정규직 투쟁은 고용을 유지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투쟁도 해고투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대해 자본은 지쳐 떨어질 때까지 내버려두거나, 무기근로계약과 같은 방식으로 교묘히 고용을 유지시켜주는 방식으로 포장하여 비정규직노동자를 반쪽짜리 권리를 지닌 노동자로 고착화시켜 버린다. 우리의 투쟁의 화두를 고용의 측면을 넘어 안정적으로 일할 권리의 문제로, 반(反)빈곤의 문제로 만들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