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 창립의 문제의식과 현재
지난 1998년, ‘민주적 계급적 사회운동’을 표방하며 사회진보연대가 출범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주요한 주체로 역할을 하고 있는 NGO운동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한편, 노동자, 여성, 빈민, 그리고 보건의료, 정보통신 등 다양한 부문에서 운동주체의 형성에 기여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계급운동, 대중운동의 확장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99년 말,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가 창립했다. 사회진보연대가 표방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지역적 실천의 확대를 꾀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창립 이후 10년 가까운 시간동안의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 운동의 성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현재의 시각에서 본다면, 주요 평가지점을 지역운동 사회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지 못하다는 점, 그리고 앞서 언급한 사회진보연대가 표방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지역운동적 실체를 여전히 제대로 밝히고 있지 못하다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보다 세밀하게 짚어보기 위해서는 인천지부를 포함한 사회진보연대의 지역운동에 대한 입장과 실천, 그리고 인천 사회운동의 변화와 현재적 조건이라는 두 가지 축을 함께 평가해야 할 것이다.
창립 10주년을 맞이하며 사회진보연대의 지난 10년 운동을 평가하고 전망을 수립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다. 더욱이 10년 전 IMF 구제금융 당시보다 더욱 심각한 경제위기가 예고되는 상황인 만큼, 사회운동의 보다 비상한 대응이 준비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사회운동의 주요한 대중적 토대라 할 수 있는 지역운동의 대응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예비하면서, 이 글에서는 인천지역운동이 현재와 같은 조건에 이르기까지의 인천지역운동의 역사, 그리고 인천지부운동의 창립 이후 현재까지의 활동을 간략히 평가하는 것을 중심적으로 서술하도록 하겠다.
인천지역운동 약사
1970~80년대 지역운동의 형성과 확대
인천지역운동의 형성과 변모 과정 역시 대체적인 지역운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공단의 밀집, 그로 인한 변두리 빈민촌의 대거 형성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노동자, 빈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종교기관의 활동이 비교적 일찍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70년대 주로 노동자 중심의 선교활동을 벌여온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1980년대 이후에는 빈민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빈민지역 곳곳에 공부방, 탁아소, 진료소, 협동조합 등을 설립하여 이를 매개로 빈민들 간 상호부조 체계를 구축하고 생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조직하였다. 빈민운동은 1980년대의 민주노조 운동의 조직적 진출과 87년 투쟁을 경과하며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주민운동으로 재조직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선교사들 뿐 아니라 여성운동, 그리고 당시 매우 급속히 급진화되고 있는 학생운동 등이 결합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인천지역빈민활동가협의회>, <공부방연합회>, 각종 주민회 등이 조직되었다.
1980년대 전국적으로 많은 지역과 부문에서 민주화운동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하면서, 인천지역에서는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이 결성된다. 동시에 사회변혁 이론이 도입되며 계급적이고 급진적 사회운동들이 활성화되면서 사회변혁운동의 대중적 토대로서 지역운동을 사고하는 흐름들이 확대된다. 특히 87년 투쟁 이후에는 비공개 노동운동 조직들의 공개 활동으로의 노선전환, ‘생존권 확보와 노동현장의 민주화’로 집약되는 요구를 내건 노동조합 건설 확대 등 민주노조 운동의 흐름이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기간 동안 인천지역에서 10만 5천 여명이 참가하는 220여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6월 이전까지 100여개 수준이던 노동조합은 8월이 되면 200여개로 증가한다. 이러한 흐름은 1988년 6월, 27개 노조 5천여 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의 건설로 수렴되는데, 창립 이후 1년 후에는 가입노조가 80여개로 급증한다. 다른 한편,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활성화는 연대연합 운동의 확대로 이어진다. 6월 항쟁 당시의 <4.13호헌분쇄 및 민주개헌을 위한 인천지역공대위>를 시발로 하여, 1988년 <전국민중민주운동연합>의 지역조직인 인민련 창립, 1990년 <민자당일당독재분쇄 및 민중기본권쟁취 국민연합 인천본부>의 결성, 그리고 이 양 전선체의 통합 형태로 만들어진 1992년의 <민주주의민족통일인천연합> 등으로 이어지는 지역 전선체, 연대연합 운동의 흐름이 조직되었다. 인천연합은 결성 당시 인노협, 인대협, 전교조, 인사연, 천사협, 인천노운협, 민천민중연합, 인천문화예술운동연합, 여성노동자회 등이 참여하여 당시까지의 인천지역운동 사상 최대의 결집체를 이루었다. 1987년을 기점으로 한 민주노조운동의 급격한 성장, 연대연합운동의 확대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흐름은 정치세력화, 정당건설 운동이다. 1987년 대선을 기점으로 정치세력화의 경로와 연대연합의 대상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화되면서 인천지역에서도 이러한 논의가 진행된다. 그러나 대략 1992년 시기까지는 후보 단일화, 민중후보 추대 등의 전술을 통해 공동활동을 벌여나가기도 한다. 민통련이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대선방침으로 결정하자 민통련에 소속되어 있던 인사연은 민통련의 결정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결정한다. 인민노련은 이 같은 민통련의 결정에 가장 강력히 반발했으며, 또한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했던 일부 단체들은 인사연을 탈퇴하여 <인천시민공동회>를 창립하게 된다. (인천시민공동회는 ‘인천지역민주화실천협의회’와 통합하여 1988년 ‘인천민주시민공동회’로 재창립되며, 1990년에 인천민중연합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이러한 분화된 흐름을 반영하여 1988년 총선에서 <민중의당>의 이름으로 당 공동대표위원을 맡고 있던 대우자동차 해고노동자 송경평이 부평을에 출마한다. 그리고 <한겨레민주당>으로는 당시 <인천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던 오순부를 비롯한 3명이 출마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역의 제운동세력들은 <인천지역민중후보 추대위>, 인민노련 등이 주축이 되어 민중후보로 오순부와 송경평을 추대하여, 선거지원활동을 펼친다. 이후 3당 합당 후 치러진 1991년의 지방선거에서 인민련은 전국에서 최초로 민중당을 포함한 야권 후보단일화를 제안하여 성사시킨다.
1992년 총선을 앞두고 본격화된 정당건설 흐름을 계기로 인천지역에서도 범NL계 비판적 지지 그룹과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그룹의 실질적인 분화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1989년 전국조직 결성을 준비하며 지도부를 교체한 인민노련은 이후 <한국노동당> 창당 준비위 성격의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를 통해 노동조합 간부와 활동가들의 참여를 조직하여 한국노동당 창당까지 이러지는 흐름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한노당과 민중당이 통합하여 <통합민중당>을 결성, 대응한 1992년 총선에서 인천에서는 송경평을 비롯한 5명의 후보가 통합민중당의 이름으로 출마한다. 이 과정에서 인천민중연합 황선진 의장이 한노당에 합류하여 통합민중당의 후보로 총선출마를 하게 되는데, 이는 인천민중연합의 분화로 이어진다. 당시 민중연합 내부에는 한노당으로의 총선 전 합류 입장과 정당참여를 배제한 좌파세력 결집으로 입장이 분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결국 1992년 총회에서 양측은 공식적인 분리를 하게 된다. ‘민중의 정치세력화’ 그룹이 이와 같은 독자정당 건설 흐름으로 나아가는 동안, 인민련을 주축으로 한 비판적 지지 그룹은 <민주정부 수립과 범민주후보 단일화를 위한 인천시민회의>를 발족시켜, 1991년 지방선거 당시와 마찬가지로 범민주후보 단일화를 추진한다. 그러나 이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에 따라 인민련 자체적으로 인천지역 범민주 후보를 선정하게 된다.
1990년대 시민운동의 양적 확대와 영역별 분화 전문화
1990년대 초반을 거치며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운동이 쇠퇴하고 시민운동이 양적으로 급격히 팽창하게 된다. 인천지역에서 그 흐름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개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중앙(서울)에서 창립되는 단체들이 1~2년 후에 지역조직을 건설하는 형태의 시민단체 창립이 활발했다. 둘째, 인천지역의 지역적 특수성에 착목한 부문운동의 활성화인데, 특히 굴업도핵폐기장 문제, 계양산 개발문제, 공장의 집중으로 인한 공해문제 등의 환경문제, 그리고 쓰레기매립장, 공항건설 등의 대규모 국책 건설사업이 급증하면서 환경운동단체의 창립이 활발했다. 세번째는 1980년대 빈민지역의 공동체성 구축을 중심으로 운동을 조직했던 주민운동도 보다 다양한 형태로 분화된다. 특히 안착되어가던 지방자치시대에 주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을 기치로 정책개발능력을 중시하는 대변형 시민운동 경향이 강화된다. 네 번째로 지역문화, 개발, 시민사회의 활성화 등에 관심을 두는 지역밀착형 시민운동의 흐름도 형성된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1980년대의 민주화, 생존권 쟁취 등을 목표로 한 전선형성 중심의 연대연합 운동은 1980년대가 되면 굴업도핵폐기장 반대투쟁, 계양산 개발반대투쟁 등 보다 지역적인 사안을 중심으로 벌어지게 된다.
한편 지방자치가 시작되던 1990년대 초반, 경실련, YMCA, 종교단체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공명선거감시활동은 1990년대 중반이 되면 특정한 지역적 사안이나 부문의 요구를 중심으로 한 지자체 선거에서의 정책개입, 자방자치단체의 행정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참여와 감시운동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시민운동 내외부의 조건변화 속에서 1990년대 후반의 인천 시민운동은 시단위가 아닌 구군단위에 기반을 두는 생활밀착형 운동이 활성화되고, 환경, 교육, 문화, 여성 등 다양한 부분과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운동의 전문화를 꾀한다. 따라서 1990년대 초반에 만들어지는 시민단체들이 전국조직의 인천조직 형태가 많았던 것에 비해 1990년대 후반이 되면 인천의 지역적 기반 위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지는 곳들이 많았다. 또한 19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며 합법적 진보정당 건설 노선으로 전환한 정당지향성 민중운동과 노동운동 역시 이와 같은 흐름 속에 조응해 갔다.
2000년 이후 시민운동, 진보정당 운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운동의 재편
지역적 사안을 중심으로 한 연대운동이 자리를 잡아가던 가운데, 1996년의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에 맞선 인천지역운동 차원의 공동대응은 결과적으로 연대연합운동의 중심이 시민운동으로 이전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투쟁이 확대되는 가운데 인천지역에서도 <날치기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철회와 민주수호를 위한 인천대책위(인천대책위)>가 구성된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그리고 지역 내 대부분의 민족 민중운동단체, 시민단체, 진보정당 운동세력들이 총 망라되어 대략 60여개의 조직들이 참여하여 농성과 가두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대책위는 1997년이 되면 노동운동, 시민운동 등을 포괄하는 상설적 연대운동체를 지향하며 <민주개혁을 위한 인천시민연대>로 전화된다.
그러나 시민연대 출범초기의 폭넓은 외연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인천연합과 인천연대 등의 주요조직들이 시민연대를 탈퇴하게 된다. 인천연대는 전국연합이 전선체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통일운동단체 중심으로 축소되던 시기인 1996년, 인천연합에 소속된 조직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시민운동단체 <평화와 참여로 가는 시민문화센터>가 1998년 명칭개정을 한 것이다. 이후에도 시민연대는 지속적으로 규모가 축소되어 2002년 이후 현재까지 대략 30개 안팎의 참여단체를 유지하고 있다. 인천연대는 명칭변경 이후 각 구단위 지부를 창설하며 조직적 확대를 꾀함으로써 사실상 연합체적 성격의 조직으로 확대되어 왔다. 시민연대 출범 이후 인천지역 시민운동은 시민연대와 인천연대를 축으로 크게 양분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총선시기의 낙선낙천 운동과 같이 전국적으로 시민운동진영이 총집중하여 공동대응을 하는 사안에 있어서도 이 양 조직은 대체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경향이 굳어져 왔다. 이 같이 시민연대가 창립 당시 구상하였던 것과 같은 지역 내 상설적 전선운동체의 위상은 실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없지만, 민주노총인천본부의 가장 핵심적인 연대파트너로서의 지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한편 시민연대는 10년 전 IMF 사태 당시 <실업극복 국민운동본부 인천본부> 결성을 주도하였고, 시민연대에 소속된 지역의 명망가들이 거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인천시와의 공조로 고용대책 수립, 일자리 창출사업, ‘사랑의 쌀모으기 운동’ 등을 중점적으로 벌여냈으며, 이것이 자활후견기관의 설립 흐름으로 이어졌다.
거칠게 정리한다면, 시민연대는 1980년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주장했던 운동세력들이 시민운동, 진보정당 운동 외곽의 주민운동 등으로 다채롭게 변화, 포진되면서 주축을 형성해왔고,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생겨난 일단의 시민운동단체들도 참여해 왔다. 그리고 인천연합과 인천연대를 중심으로, 그리고 이들이 의식적으로 운동을 조직하고 확장해 나간 다양한 부문, 영역의 운동들이 지역 내에서 또다른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존재가 민주노동당-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통합적 연대운동의 흐름을 단발적으로나마 형성하기도 했지만, 민주노동당 내부적으로 시당 지도부 수권을 둘러싼 경쟁 구도가 심화되고 각 지구당의 정파별 분할구도가 지속적으로 고착화되는 과정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지역운동의 구도가 형성되는 과정은 사실 노동자운동, 노동조합운동의 쇠퇴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왔을 뿐 아니라, 그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영향을 끼쳐왔다. 민주노총지역본부는 지역연대 운동에서의 역할을 시민연대, 민주노동당과의 역할분담 관계 속에서 조직하려는 경향을 강화해왔는데, 이러한 운동방식은 노동조합의 현장에서부터 연대를 조직하기보다는 상층 중심으로, 그리고 노동운동의 사안을 시민운동이 다룰 만한 제도적 차원으로 치환하는 경향을 강화해 왔다.
결론적으로 1980년대 후반을 경과하면서 나타난 민족 민중운동의 분별정립, 정당지향적 성격이 강했던 인천 노동자운동의 특성, 그리고 1990년대를 거치며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의 일부가 시민운동의 일부로 자기전화하면서 현재와 같은 지역운동의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약평해볼 수 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양대 축으로 분할되어 있는 연합체적 성격의 시민단체가 지역연대운동의 중심을 차지하고 민주노총 역시 그러한 구도 안에서 연대운동을 사고하는 경향이 강해져왔다. 합법적 진보정당운동은 이러한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만들어져 왔다. 특히 인천지역에서 시민운동의 등장과 확대는 새로운 운동주체의 형성 확대를 통해서보다는 기존 민중운동세력들의 전화를 통해 주도되어 왔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는 2000년대 이후 상층, 정책대안 중심의 1990년대식 시민운동을 비판하면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주민운동의 흐름에서도 역시 다르지 않다. 그로 인해 시민운동이 자신의 운동기반을 스스로 새롭게 형성하기 보다는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지역의 대중운동을 시민운동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하는 식의 접근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분별정립이 명확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시민운동의 경향으로의 수렴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다.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의 창립 이후 현재까지
인천지부 창립: 사회진보연대 운동의 지역적 기반의 확대를 모색
창립 초기 지역운동에 대한 사회진보연대의 고민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사회진보연대 운동의 지역적 기반을 확대하는 것에 초점이 있었다. 이것은 전국조직 건설 지향과 같은 조직형식적인 의미에서라기보다, 사회진보연대가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의 경향성을 보다 폭넓게 확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회진보연대 출범의 문제의식이나 당시의 정세적 조건 상 무엇보다 경제위기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인식하는 것, 즉 신자유주의 비판의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일차적인 과제였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구조조정, 정리해고 투쟁 등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방어하는 투쟁에 헌신적으로 연대하는 한편, 빈곤, 여성, 정보통신, 보건의료 등 그 동안 계급적 대중운동이 주목하지 못했던 사회운동의 제영역들을 재조직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인천지부의 창립 과정에서는 본조직과 지부조직의 관계와 역할의 규정 등과 같은 조직적 측면은 되도록 유연하게 사고되었고, 새로운 사회운동의 창출이라는 큰 방향성에 대한 합의를 중심으로 인천지역에서 이러한 운동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에 고민을 집중하였다. 1)
이와 같은 문제의식 아래서 창립 당시 인천지부는 주요 활동기조를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정보통신] 진보네크워크와 같은 진보적 정보통신운동의 지역적 흐름 형성 • [평화와 인권] 인권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의 확산을 목표로 지역 내 평화인권의제의 발굴과 실천적 연대 •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 대우자동차, 발전 등 지역 내에서 벌어질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 • [환경] 만성적인 공해문제, 90년대 진행된 굴업도 핵폐기장, 영흥발전소 투쟁과 같이 지역 내에 잠재되어 있는 환경적 쟁점에 대한 대응 • [여성] 지역 여성운동단체, 여성노조와의 연대 • [교육, 토론 사업] 신자유주의 비판, 지역적 쟁점 사안에 대한 문제의식의 확산 등. 창립초기에는 이와 같은 활동기조를 실현하기 위한 내외적 토대 구축에 주력했는데, 본조직과의 공동 논의를 통한 이론적 정책적 역량의 구축, 인천지부 내적 사업역량을 마련하기 위한 회원모임 구축, 그리고 다른 단체들과의 공동 교육, 지역연대 활동에의 결합을 통한 연대기반의 마련 등이 중심이었다.
대우자동차 해외매각반대와 공기업화를 위한 투쟁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기조에 따른 활동이 충분히 조직되었다고 평가하긴 힘들다. 창립 초기라 인천지부 내적 역량이 매우 취약한 가운데, 경제위기로 인한 인천지역 내의 많은 사업장, 특히 제조업 사업장들에서의 구조조정, 정리해고 사태가 줄지어 나타났고, 그에 대한 공동대응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및 매각 반대투쟁은 1999년 대우그룹 구조조정 발표와 공적자금 투입으로 시작하여, 2001년 2월 1,750명의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 단행, 그리고 GM과의 최종 매각협상이 타결된 2002년 4월에 이르기까지, 근 2년이 넘도록 인천 지역운동을 압도하는 중점 사안이었다. 경제위기에 대한 반응이 매우 단기간에 민감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인해, 1998년 당시 인천의 실업률은 1월 5.9%(6만3천명)에서 시작해 7월이 되면 9.5%(10만4천명)에 이를 만큼 매우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는 당시 전국적 평균 실업률에 비해 30% 가량 높은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터져 나온 대우차 부도 위기는 운동진영 뿐 아니라 인천시 자체가 긴장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대우자동차는 인천시 제조업 매출액의 25%를 차지하고,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면 고용 인원이 5만에 달하는 상황이었다. 지역 경제에서 대우자동차가 차지하는 이와 같은 위치 상 대우차동차 투쟁은 여러 방향으로 분화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었다. 구조조정 계획 발표 직후, 민주노총 인천본부를 비롯한 지역의 노동사회단체 26개가 결합하여, ‘대우차 해외매각 반대와 공기업화’를 기치로 내걸고 <대우사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인천시민대책위>를 구성하였다. 또한 대우자동차 매각반대 투쟁은 노동자들의 고용사수라는 측면에서 뿐 아니라, 정리해고가 법제화된 이후 1998년 현대자동차에 뒤이은 대량 정리해고라는 점, 그리고 김대중 정부에 의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던 구조조정 투쟁의 전국적 전선을 형성하는데 매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 등으로 중앙차원에서도 ‘대우자동차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여 조직적 대응을 함께 하였다.
인천시민대책위는 노동조합, 시민단체, 민중운동 단체 등 다양한 운동세력들이 결집한 만큼 활동의 내용은 다양했고,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대응방향에 대한 이견들이 나타났다.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해외매각 반대, 공기업화’가 현실 불가능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며, 그동안 물밑에서, 그리고 시민대책위 활동의 한 축으로 벌여왔던 인천시와 정치권을 상대로 한 로비를 본격화했고, 급기야는 노사정위 위원을 지낸 이목희를 핵심으로 하여 정재계인사들로 구성된 100인 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하였다. 이들은 GM으로의 매각에 부평공장이 포함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는 사실상 보다 철저한 구조조정을 주문하며 이른바 강성노조를 대우차 해결의 장애물로 지목한 김대중 정부와 GM의 논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목희를 소장으로 하는 ‘대우차 희망센터’가 설립되어 정리해고자를 포함한 당시까지의 대우차 해고자 6,000 여명을 대상으로 하는 재취업사업을 벌여 노동조합의 투쟁을 교란시켰다.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는 창립 직후 대우자동차 매각반대 투쟁에 집중하면서 신자유주의 비판, 그리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본질을 폭로하는 연장에서 해외매각 반대, 공기업화 주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특히 공기업화 주장을 소유형태에 대한 대안으로 축소하며 현실가능성 논리로 치환하려는 시민단체를 비롯한 많은 개혁주의 논자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공적자금 투입으로 그 비용을 고스란히 노동자 민중에게 떠넘기고 해외매각을 통해 초민족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려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동학을 선전하였다.
전국적인 구조조정 저지 투쟁전선의 유실과 연대의 약화, 현장투쟁력의 이완, 지역 사회운동의 다양한 분화와 그로 인한 개혁주의 세력들의 득세 등의 종합적 결과로 대우자동차 투쟁은 GM으로의 매각으로 결론이 났다. 이러한 결정 이후에도 김대중 정부와 개혁주의 세력들은 대우자동차 매각을 구조조정의 모범으로 만들려고 하는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대우차 정상화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대우자동차 투쟁이 지역운동에 남긴 상흔은 막대한 것이었다.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을 비롯하여 노동조합운동 전반에 ‘투쟁을 해봐야 얻을 것이 없다’는 순응주의적 태도가 확산되었다. 그리고 기업의 경영권이 훼손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고, 지역경제, 기업 살리기를 노동자 권리의 우위에 두는 시민단체들의 활동방식은 고착화되었다.
2002년 대선투쟁과 좌파운동의 통합적 전망모색을 위한 시도
2002년 대선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정치세력화인가 전선재편인가’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하였는데, 신자유주의 반대투쟁 전선의 구축이 정치세력화의 선결조건임을 주장하며 대선공투본-공선본 구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을 실질적으로 성사시킬 좌파운동진영의 결집체인 ‘노동해방대선실천단’을 공동으로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러한 중앙 차원의 흐름에 조응하여 인천지역에서도 좌파운동단체들 간의 대선 공동투쟁체를 구성하여 지역차원의 대중투쟁 흐름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공동활동의 동인은 대선시기의 공동투쟁 뿐만 아니라, 당시 대선 공동투쟁 전술과 함께 모색되고 있던 좌파통합정치조직 건설 흐름이었다. 1990년대 후반을 거치며 인천지역운동이 진보정당운동과 연합체적 수준의 시민운동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계급적 대중운동을 지향하는 운동세력, 혹은 좌파운동 세력들은 급격히 축소, 주변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노동자운동은 대우자동차 투쟁을 필두로 구조조정 투쟁의 패배를 반복하면서 투쟁력과 활력을 소실해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좌파운동 세력들의 통합적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고, 대선투쟁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선공투본-공선본, 그리고 노동해방선봉대로 이어지는 구상이 중앙차원에서의 논의과정에서 실질적으로 해체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인천지역의 계획에 대한 논의가 조직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대한 많은 논란 끝에 결국 인천지역에서의 계획도 폐기하는 결정을 하게 된다. 대선투쟁 계획에 대한 이러한 결정은 결국 지역에서의 좌파통합정치조직 건설 문제를 둘러싼 논쟁, 즉 인천지부 운동의 전망을 둘러싼 본격적인 고민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인천지부 내적으로는 창립 직후, 조직적 사업기반을 구축할 새도 없이 숨가쁘게 결합했던 대우자동차 투쟁의 경험이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인천의 지역적 특성과 지역운동의 조건 상, 그리고 인천지부 운동의 기본토대를 구축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노동자운동과의 결합은 매우 핵심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천지부 뿐 아니라 사회진보연대 운동 일반이 이제 막 사회운동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노동자운동과 결합하기 위한 조직적 기반, 현장투쟁의 결합에 요구되는 실무적 경험과 지식, 그 밖에도 교육의 매개 등 모든 것이 한계적인 조건이었다. 다른 한편, 계급적 지향의 연대운동이 축소되고 있는 가운데 좌파연대운동 속에서 운동의 역량을 꾸준히 축적해 나갈 수 있는 조건도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파통합조직 건설의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인천지부 뿐 아니라 좌파정치단체들 각각의 내적 조건은 상이했지만, 인천지역운동의 당시 조건에 대해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앙차원의 대선공동투쟁이 폐기되고, 통합좌파정치조직 구성을 위한 논의가 난맥상에 빠진 가운데, 지역에서의 논의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판단근거와 합의를 요구하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인천지부 내부 논의에도 반영되었고, 좌파통합조직 건설이 인천지부 운동의 주객관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인가를 둘러싸고 쉽사리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이를 둘러싼 논쟁이 다소 소모적으로 진행되었고, 인천지부 운동 역량을 오히려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당시의 논의 진행의 성격 상 객관적인 평가는 여전히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사후적으로나마 몇 가지 쟁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첫 번째는 인천지부 내부 역량의 한계와 직결되는 문제인데, 지역 좌파운동의 통합적 발전을 위한 정치적 기획을 수립하지 못하고, 그를 좌파조직통합의 문제로 환원해 버리거나, 그에 대한 무대안적 비판으로 일관하는 식으로 논의가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 두 번째는 창립 당시 좋게 말하면 유연하게, 사실상 모호하게 정립되었던 사회진보연대 운동의 지역적 실천이라는 방향성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특히 통합적 운동 전망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중앙조직, 지역조직 각각의 역할, 지부운동의 조직적 과제에서 기인하는 쟁점이 존재한다. 당시의 사례로 본다면, 대선투쟁이나 통합적 정치조직 건설과 같은 조직의 중대한 운동방침의 결정, 나아가 정세적 투쟁을 조직하는데 있어 사회진보연대의 방침과 결정은 어떻게 수립되며, 또한 그것의 실행과 집행 과정에서 조직적 통합력은 어떻게, 어떤 수준에서 발휘되고 강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존재했던 것이다. 셋째 노동자운동과의 결합력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토대로 지역적 운동기반의 확대를 이룰 구체적 방안은 문제인가가 당시 논의의 진짜 쟁점이었던 것인데, 이것이 인천지역 운동, 그리고 인천지부의 특수한 조건의 차원으로 축소되어 버린 문제가 있다. 사실 이것은 사회운동을 막 시작하던 사회진보연대 운동 전체의 과제라 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중앙운동의 위상을 가지는 본조직의 경우 그러한 문제의식이 보다 뒤늦게 도입되었다 할 수 있고, 인천지부의 경우 단기간의 성과에 긴박되어 다소 강박적으로 문제에 접근했던 측면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강박감과 조급증이 운동의 토대를 확대하기 위한 내부 통합력과 활동역량의 강화로 이어지기보다 이견과 갈등적 요소를 확대시키는 부정적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침체기를 거쳐 모색기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인천지부 운동은 상당기간 침체기에 빠져있었다. 어찌보면 창립 직후 대우자동차 투쟁에 결합해 들어가면서 급속하게 인천지부의 한계가 드러나게 된 것은 인천지역에서 사회진보연대 운동을 뿌리내리기 위해 갖추어야 할 선결조건에 대해 단기간에 경험적 근거와 인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성은 인천지부 운동역량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측면만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또한 몇몇 좌파운동단체들이 조직을 해산하거나 진로를 새롭게 모색하는 조건에 처하게 되면서 이들과의 공동활동을 통한 전망의 모색도 쉽지 않은 조건이 되었다.
그 후 몇 년간 인천지부 운동은 지역운동 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동인을 소진하고 본조직 활동의 기조와 방식을 지역에 적용하는 수준에서 진행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중연대를 통한 연대운동, 전선운동의 복구 그리고 운동세력의 결집과 운동의 기획에 대한 면밀한 판단과 내적역량의 구축이 부재한 가운데서의 여성, 이주 등에 대한 의제중심적 접근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지역 내의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이 일반노조 건설 등으로 가시화되었지만, 지역 사회운동 전반의 공동과제로 인식되지는 못하는 조건에서 <불안정노동철폐를위한연석회의> 등을 구성하여 진보정당, 노동사회단체 등 지역 운동주체들의 공동활동과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지원을 조직하는 유의미한 활동을 주도적으로 벌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정규직 조직화를 넘어서는 비정규직 운동주체의 형성이 활발하기 못한 지역적 조건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단체 간 연대를 통해 외곽에서의 지원을 조직하는 이상의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결론적으로 내적역량과 통합력이 약화되고, 좌파운동 일반이 분화, 침체일로를 겪는 가운데 운동의 활력을 상실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인천지부는 상당기간의 침체기를 거쳐 대략 2~3년 전부터 현재까지 다시금 새로운 활동의 전망을 모색하는 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진보연대 전체적으로 2004~5년을 거치며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노동자운동의 사회운동적 개조로 표현해왔던 노동자운동과의 결합 구상을 ‘노동자사회운동론’으로 구체화하며 노동자운동으로의 조직적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연장에서 지역의 운동역량을 보충하고 사회진보연대 차원의 통합력 있는 지역운동 계획을 수립하며 이를 내적 구조에도 반영하는 등의 적극적인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인천지부 운동 역시 내적 운동역량을 보강하고 교육사업, 비정규직 주체형성을 위한 활동, 지역 연대운동의 재조직화, 회원활동의 재조직화 등을 주요 축으로 하여 지난 2~3년간 활동을 조직해 왔다. 무엇보다 지역 노동자운동의 쇄신과 계급적 주체형성이 핵심적인데, 실리주의적 경향을 넘어서기 위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이념형성이 필요하다. 또한 급진적 사회운동들 간의 연대운동의 기반 확장 역시 지역운동을 급진적으로 재조직화하는데 있어 필수적이다. 현재와 같은 인천지역운동의 조건에서 인천지부(를 포함하여 계급적 급진적 사회운동을 표방하는 조직들의) 운동의 장기적 전망 수립은 그와 같은 과정과 동반하여야 실질화될 수 있을 것이다.
뼈아픈 반성과 새로운 각오
신자유주의가 지역의 자율성, 지방자치의 활성화라는 이름으로 지역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강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확대되어 오면서 지역의 역할 변화, 지역운동에 대한 사회운동의 관심이 점점 높아져왔다. 그러나 세계화에 대응하는 다양한 층위의 활동들(경제적, 정치적 비판에서부터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와 같은 대항담론의 형성까지)에 비한다면 지역운동에 대한 사회운동의 인식은 ‘지역적 사안’이 생겨나는 지리적 단위, 혹은 운동조직이 용이한 공간이라는 관념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역을 재조명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은 정세적 사안에 대한 전국적 공동대응(예를 들어 한미 FTA와 같은)으로, 그리고 지역운동은 지역개발이나 지역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특정 사안에 대응하는 운동과 같은 식으로 분리되어 나타난다. 즉 ‘지역적 사안’을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의 맥락으로 재해석하고 운동적 확장을 이루는데 있어서의 한계가 지속되고 있다.
단적인 경우가 세계화 반대를 외치면서 경제위기와 구조조정 시기에 ‘지역경제 활성화와 고용안정’을 기조로 하는 류의 운동들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어떤 의미에서는 국수주의, 민족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반세계화를 주장하는 흐름의 지역적 판본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지속가능한 세계화’,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표방하는 국제 NGO 운동과 같은 흐름 역시 지역운동에도 이미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천에는 1990년대의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연합 기본협약’,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에서 선언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의제21’과 같은 흐름의 지역적 실천을 표방하며 민간과 기초자치단체의 협력구조로 구성된 ‘의제21’이 대부분의 구마다 설치되어 있다. 이들은 개발이나 생태와 관련되는 의제를 발굴하여 시민단체와의 연계 하에 적정수준의 개발, 지역경제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개발 등의 정책제언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세계적으로나 한국사회 내에서도 세계화에 반대하는 흐름이 국수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 반세계화, 국제 NGO들에 의해 주도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그리고 대안세계화를 지향하는 운동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는데, 지역운동 내에서도 세계화 아래서의 지역의 발전전망을 둘러싸고 이들 각각에 조응하는 흐름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지역은 신자유주의로 인한 계급적 대립과 다양한 모순이 생겨나는 갈등적 공간이며, 그 만큼 다양한 정치적 경향성이 경합하는 공간인 것이다. 지역통합과 지역공동체의 이해라는 것은 이러한 갈등과 모순을 객관적 조건으로 전제하고 그의 해소를 위한 대안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실상은 매우 허구적인 것이거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방향성일 뿐이다.
이러한 경향성들이 실천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1990년대 후반 이후 지역운동이 개입해온 인천 지역 내의 핵심적 사안들 몇몇을 통해 돌아볼 필요도 있겠다. 제조업의 축소, 이른바 산업공동화 문제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 그리고 이른바 사회공공성 투쟁 등을 대표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비판하는 투쟁이 즉각적으로 구조조정 사업장 노동자들의 고용에 대한 대안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의 역량이 축소된 현재와 같은 조건에서 개별 사업장의 대응만으로는 오히려 고용사수 조차도 역부족인 것이 현실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에 기초한 공동대응, 지역적 전선형성이야말로 고용을 비롯하여 자본으로부터 최소한의 양보라도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경로다. 경제자유구역 문제의 경우 추진된 지 5년여가 지났지만 그 성과는 매우 지지부진하고, 특히 핵심으로 거론되었던 외자유치는 고작 1500달러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송도, 영종, 청라지구는 단기 유동성 자금 확보와 사업기반 조성을 명분으로 아파트, 주상복합 건설 등을 통해 부동산 투기붐을 인천시 전역으로 확대해온 주범이다. 뿐만 아니라 아시안게임 유치, 뉴타운 건설 등 인천시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사업들 대부분이 경제자유구역의 활성화를 통한 동북아 관문도시로의 도약이라는 미망으로 수렴되어 끝도 없이 혈세가 투입되고 있다. 사실 이는 하나의 사안이라기보다 금융화된 세계경제에 편입하기 위한 지방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략의 문제이다. 그러나 시민운동 전반이 지역발전 이데올로기를 시민운동의 논리로 윤색하여 수용하고 있는 가운데, 지역 사회운동은 실상 거의 이에 대응을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안적 지역개발에 관심을 두는 일부 단체들을 중심으로 ‘적정수준에서의 개발과 투자’를 중점적인 기조로 비판적 지지식의 대응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공공성 투쟁의 경우 공공서비스, 사회복지 부문의 제도개선투쟁이 실천의 중심 형태가 되면서 지역운동 차원에서는 그 실체가 모호하거나, 사회복지 등 공공부문에 대한 지자체 예산확대와 같은 원칙적 구호만 난무하는 실정이다.
이상의 조건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지역운동에 대한 기본 관점과 실천의 방향으로 • 금융 세계화가 초래하는 지역적 발전의 불균형, 지역의 위계화와 그로 인한 인민들의 삶의 기반의 황폐화에 대한 대응(구조조정 투쟁, 생존권 투쟁의 확대) • 노동운동의 업종, 산별 구조를 가로지르는 노동자의 단결, 통일을 위한 지역적 전략의 실현(정규직-비정규직 간 실질적 연대의 실현, 계급적 주체형성) • 생태운동,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결합(새로운 운동주체의 형성과 대안세계화운동의 지역적 기반 형성) • 지역 발전전략의 폐해, 재생산 기반의 붕괴가 야기하는 지역공동체 위기에 맞서 노동자운동, 여성운동, 진정한 의미에서의 풀뿌리 대중운동 등 쇄신된 운동주체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공동체성에 대한 운동적 대안의 실험과 발전 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노동자운동의 급진화와 새로운 주체형성은 매우 관건적인데, 노조운동의 혁신이 단지 내부의 체계, 기구, 운영을 정비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점차 자명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인천지부 역시 이와 같은 운동방향을 인천지역 내에서 실현하기 위한 보다 다각도의 계획을 수립하고 적극적으로 역량을 배치해햐 할 시점이다.
더욱이 자본주의의 위기가 거론되는 경제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이고, GM대우를 비롯하여 제조업 부문에서는 감산, 전환배치, 구조조정 등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운동을 필두로 인천지역 사회운동의 대응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뿐 아니라, 이후 지역운동의 형세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지난 인천지역운동의 역사, 특히 10년 전의 경제위기 시기의 대응, 그 이후 형성되어온 지역운동의 현재적 조건이 주는 뼈아픈 반성과 교훈이다. 사회진보연대 운동의 지역적 확대, 그리고 인천지부가 인천지역 내에서 굳건히 뿌리 내리고 운동의 기반을 확장하는 과정이 지역 내 급진적 사회운동들 간의 공동의 전망모색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지역운동의 조직적 대응 태세가 마련되어야 하며, 인천지부 역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1)“따라서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의 커다란 사업기조의 하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한 ‘신자유주의 반대’이다. 아울러 우리는 ‘새로운 사회운동’에 대한 고민을 ‘사회진보연대 전 활동 속에 녹여내려 한다. 현재 진보운동이 취하고 있는 조직형태의 표상으로서 ’산별노조‘와 ’진보정당‘에 국한되지 않고 또한 ’계급적대‘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적대‘에 기반한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모색해보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인천지역‘이라고 하는 우리가 발딛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과의 만남이다. ”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 창립선언문 중, 1999년 12월 19일)본문으로
창립 10주년을 맞이하며 사회진보연대의 지난 10년 운동을 평가하고 전망을 수립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다. 더욱이 10년 전 IMF 구제금융 당시보다 더욱 심각한 경제위기가 예고되는 상황인 만큼, 사회운동의 보다 비상한 대응이 준비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사회운동의 주요한 대중적 토대라 할 수 있는 지역운동의 대응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예비하면서, 이 글에서는 인천지역운동이 현재와 같은 조건에 이르기까지의 인천지역운동의 역사, 그리고 인천지부운동의 창립 이후 현재까지의 활동을 간략히 평가하는 것을 중심적으로 서술하도록 하겠다.
인천지역운동 약사
1970~80년대 지역운동의 형성과 확대
인천지역운동의 형성과 변모 과정 역시 대체적인 지역운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공단의 밀집, 그로 인한 변두리 빈민촌의 대거 형성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노동자, 빈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종교기관의 활동이 비교적 일찍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70년대 주로 노동자 중심의 선교활동을 벌여온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1980년대 이후에는 빈민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빈민지역 곳곳에 공부방, 탁아소, 진료소, 협동조합 등을 설립하여 이를 매개로 빈민들 간 상호부조 체계를 구축하고 생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조직하였다. 빈민운동은 1980년대의 민주노조 운동의 조직적 진출과 87년 투쟁을 경과하며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주민운동으로 재조직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선교사들 뿐 아니라 여성운동, 그리고 당시 매우 급속히 급진화되고 있는 학생운동 등이 결합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인천지역빈민활동가협의회>, <공부방연합회>, 각종 주민회 등이 조직되었다.
1980년대 전국적으로 많은 지역과 부문에서 민주화운동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하면서, 인천지역에서는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이 결성된다. 동시에 사회변혁 이론이 도입되며 계급적이고 급진적 사회운동들이 활성화되면서 사회변혁운동의 대중적 토대로서 지역운동을 사고하는 흐름들이 확대된다. 특히 87년 투쟁 이후에는 비공개 노동운동 조직들의 공개 활동으로의 노선전환, ‘생존권 확보와 노동현장의 민주화’로 집약되는 요구를 내건 노동조합 건설 확대 등 민주노조 운동의 흐름이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기간 동안 인천지역에서 10만 5천 여명이 참가하는 220여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6월 이전까지 100여개 수준이던 노동조합은 8월이 되면 200여개로 증가한다. 이러한 흐름은 1988년 6월, 27개 노조 5천여 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의 건설로 수렴되는데, 창립 이후 1년 후에는 가입노조가 80여개로 급증한다. 다른 한편,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활성화는 연대연합 운동의 확대로 이어진다. 6월 항쟁 당시의 <4.13호헌분쇄 및 민주개헌을 위한 인천지역공대위>를 시발로 하여, 1988년 <전국민중민주운동연합>의 지역조직인 인민련 창립, 1990년 <민자당일당독재분쇄 및 민중기본권쟁취 국민연합 인천본부>의 결성, 그리고 이 양 전선체의 통합 형태로 만들어진 1992년의 <민주주의민족통일인천연합> 등으로 이어지는 지역 전선체, 연대연합 운동의 흐름이 조직되었다. 인천연합은 결성 당시 인노협, 인대협, 전교조, 인사연, 천사협, 인천노운협, 민천민중연합, 인천문화예술운동연합, 여성노동자회 등이 참여하여 당시까지의 인천지역운동 사상 최대의 결집체를 이루었다. 1987년을 기점으로 한 민주노조운동의 급격한 성장, 연대연합운동의 확대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흐름은 정치세력화, 정당건설 운동이다. 1987년 대선을 기점으로 정치세력화의 경로와 연대연합의 대상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화되면서 인천지역에서도 이러한 논의가 진행된다. 그러나 대략 1992년 시기까지는 후보 단일화, 민중후보 추대 등의 전술을 통해 공동활동을 벌여나가기도 한다. 민통련이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대선방침으로 결정하자 민통련에 소속되어 있던 인사연은 민통련의 결정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결정한다. 인민노련은 이 같은 민통련의 결정에 가장 강력히 반발했으며, 또한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했던 일부 단체들은 인사연을 탈퇴하여 <인천시민공동회>를 창립하게 된다. (인천시민공동회는 ‘인천지역민주화실천협의회’와 통합하여 1988년 ‘인천민주시민공동회’로 재창립되며, 1990년에 인천민중연합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이러한 분화된 흐름을 반영하여 1988년 총선에서 <민중의당>의 이름으로 당 공동대표위원을 맡고 있던 대우자동차 해고노동자 송경평이 부평을에 출마한다. 그리고 <한겨레민주당>으로는 당시 <인천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던 오순부를 비롯한 3명이 출마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역의 제운동세력들은 <인천지역민중후보 추대위>, 인민노련 등이 주축이 되어 민중후보로 오순부와 송경평을 추대하여, 선거지원활동을 펼친다. 이후 3당 합당 후 치러진 1991년의 지방선거에서 인민련은 전국에서 최초로 민중당을 포함한 야권 후보단일화를 제안하여 성사시킨다.
1992년 총선을 앞두고 본격화된 정당건설 흐름을 계기로 인천지역에서도 범NL계 비판적 지지 그룹과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그룹의 실질적인 분화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1989년 전국조직 결성을 준비하며 지도부를 교체한 인민노련은 이후 <한국노동당> 창당 준비위 성격의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를 통해 노동조합 간부와 활동가들의 참여를 조직하여 한국노동당 창당까지 이러지는 흐름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한노당과 민중당이 통합하여 <통합민중당>을 결성, 대응한 1992년 총선에서 인천에서는 송경평을 비롯한 5명의 후보가 통합민중당의 이름으로 출마한다. 이 과정에서 인천민중연합 황선진 의장이 한노당에 합류하여 통합민중당의 후보로 총선출마를 하게 되는데, 이는 인천민중연합의 분화로 이어진다. 당시 민중연합 내부에는 한노당으로의 총선 전 합류 입장과 정당참여를 배제한 좌파세력 결집으로 입장이 분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결국 1992년 총회에서 양측은 공식적인 분리를 하게 된다. ‘민중의 정치세력화’ 그룹이 이와 같은 독자정당 건설 흐름으로 나아가는 동안, 인민련을 주축으로 한 비판적 지지 그룹은 <민주정부 수립과 범민주후보 단일화를 위한 인천시민회의>를 발족시켜, 1991년 지방선거 당시와 마찬가지로 범민주후보 단일화를 추진한다. 그러나 이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에 따라 인민련 자체적으로 인천지역 범민주 후보를 선정하게 된다.
1990년대 시민운동의 양적 확대와 영역별 분화 전문화
1990년대 초반을 거치며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운동이 쇠퇴하고 시민운동이 양적으로 급격히 팽창하게 된다. 인천지역에서 그 흐름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개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중앙(서울)에서 창립되는 단체들이 1~2년 후에 지역조직을 건설하는 형태의 시민단체 창립이 활발했다. 둘째, 인천지역의 지역적 특수성에 착목한 부문운동의 활성화인데, 특히 굴업도핵폐기장 문제, 계양산 개발문제, 공장의 집중으로 인한 공해문제 등의 환경문제, 그리고 쓰레기매립장, 공항건설 등의 대규모 국책 건설사업이 급증하면서 환경운동단체의 창립이 활발했다. 세번째는 1980년대 빈민지역의 공동체성 구축을 중심으로 운동을 조직했던 주민운동도 보다 다양한 형태로 분화된다. 특히 안착되어가던 지방자치시대에 주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을 기치로 정책개발능력을 중시하는 대변형 시민운동 경향이 강화된다. 네 번째로 지역문화, 개발, 시민사회의 활성화 등에 관심을 두는 지역밀착형 시민운동의 흐름도 형성된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1980년대의 민주화, 생존권 쟁취 등을 목표로 한 전선형성 중심의 연대연합 운동은 1980년대가 되면 굴업도핵폐기장 반대투쟁, 계양산 개발반대투쟁 등 보다 지역적인 사안을 중심으로 벌어지게 된다.
한편 지방자치가 시작되던 1990년대 초반, 경실련, YMCA, 종교단체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공명선거감시활동은 1990년대 중반이 되면 특정한 지역적 사안이나 부문의 요구를 중심으로 한 지자체 선거에서의 정책개입, 자방자치단체의 행정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참여와 감시운동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시민운동 내외부의 조건변화 속에서 1990년대 후반의 인천 시민운동은 시단위가 아닌 구군단위에 기반을 두는 생활밀착형 운동이 활성화되고, 환경, 교육, 문화, 여성 등 다양한 부분과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운동의 전문화를 꾀한다. 따라서 1990년대 초반에 만들어지는 시민단체들이 전국조직의 인천조직 형태가 많았던 것에 비해 1990년대 후반이 되면 인천의 지역적 기반 위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지는 곳들이 많았다. 또한 19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며 합법적 진보정당 건설 노선으로 전환한 정당지향성 민중운동과 노동운동 역시 이와 같은 흐름 속에 조응해 갔다.
2000년 이후 시민운동, 진보정당 운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운동의 재편
지역적 사안을 중심으로 한 연대운동이 자리를 잡아가던 가운데, 1996년의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에 맞선 인천지역운동 차원의 공동대응은 결과적으로 연대연합운동의 중심이 시민운동으로 이전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투쟁이 확대되는 가운데 인천지역에서도 <날치기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철회와 민주수호를 위한 인천대책위(인천대책위)>가 구성된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그리고 지역 내 대부분의 민족 민중운동단체, 시민단체, 진보정당 운동세력들이 총 망라되어 대략 60여개의 조직들이 참여하여 농성과 가두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대책위는 1997년이 되면 노동운동, 시민운동 등을 포괄하는 상설적 연대운동체를 지향하며 <민주개혁을 위한 인천시민연대>로 전화된다.
그러나 시민연대 출범초기의 폭넓은 외연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인천연합과 인천연대 등의 주요조직들이 시민연대를 탈퇴하게 된다. 인천연대는 전국연합이 전선체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통일운동단체 중심으로 축소되던 시기인 1996년, 인천연합에 소속된 조직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시민운동단체 <평화와 참여로 가는 시민문화센터>가 1998년 명칭개정을 한 것이다. 이후에도 시민연대는 지속적으로 규모가 축소되어 2002년 이후 현재까지 대략 30개 안팎의 참여단체를 유지하고 있다. 인천연대는 명칭변경 이후 각 구단위 지부를 창설하며 조직적 확대를 꾀함으로써 사실상 연합체적 성격의 조직으로 확대되어 왔다. 시민연대 출범 이후 인천지역 시민운동은 시민연대와 인천연대를 축으로 크게 양분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총선시기의 낙선낙천 운동과 같이 전국적으로 시민운동진영이 총집중하여 공동대응을 하는 사안에 있어서도 이 양 조직은 대체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경향이 굳어져 왔다. 이 같이 시민연대가 창립 당시 구상하였던 것과 같은 지역 내 상설적 전선운동체의 위상은 실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없지만, 민주노총인천본부의 가장 핵심적인 연대파트너로서의 지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한편 시민연대는 10년 전 IMF 사태 당시 <실업극복 국민운동본부 인천본부> 결성을 주도하였고, 시민연대에 소속된 지역의 명망가들이 거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인천시와의 공조로 고용대책 수립, 일자리 창출사업, ‘사랑의 쌀모으기 운동’ 등을 중점적으로 벌여냈으며, 이것이 자활후견기관의 설립 흐름으로 이어졌다.
거칠게 정리한다면, 시민연대는 1980년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주장했던 운동세력들이 시민운동, 진보정당 운동 외곽의 주민운동 등으로 다채롭게 변화, 포진되면서 주축을 형성해왔고,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생겨난 일단의 시민운동단체들도 참여해 왔다. 그리고 인천연합과 인천연대를 중심으로, 그리고 이들이 의식적으로 운동을 조직하고 확장해 나간 다양한 부문, 영역의 운동들이 지역 내에서 또다른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존재가 민주노동당-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통합적 연대운동의 흐름을 단발적으로나마 형성하기도 했지만, 민주노동당 내부적으로 시당 지도부 수권을 둘러싼 경쟁 구도가 심화되고 각 지구당의 정파별 분할구도가 지속적으로 고착화되는 과정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지역운동의 구도가 형성되는 과정은 사실 노동자운동, 노동조합운동의 쇠퇴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왔을 뿐 아니라, 그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영향을 끼쳐왔다. 민주노총지역본부는 지역연대 운동에서의 역할을 시민연대, 민주노동당과의 역할분담 관계 속에서 조직하려는 경향을 강화해왔는데, 이러한 운동방식은 노동조합의 현장에서부터 연대를 조직하기보다는 상층 중심으로, 그리고 노동운동의 사안을 시민운동이 다룰 만한 제도적 차원으로 치환하는 경향을 강화해 왔다.
결론적으로 1980년대 후반을 경과하면서 나타난 민족 민중운동의 분별정립, 정당지향적 성격이 강했던 인천 노동자운동의 특성, 그리고 1990년대를 거치며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의 일부가 시민운동의 일부로 자기전화하면서 현재와 같은 지역운동의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약평해볼 수 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양대 축으로 분할되어 있는 연합체적 성격의 시민단체가 지역연대운동의 중심을 차지하고 민주노총 역시 그러한 구도 안에서 연대운동을 사고하는 경향이 강해져왔다. 합법적 진보정당운동은 이러한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만들어져 왔다. 특히 인천지역에서 시민운동의 등장과 확대는 새로운 운동주체의 형성 확대를 통해서보다는 기존 민중운동세력들의 전화를 통해 주도되어 왔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는 2000년대 이후 상층, 정책대안 중심의 1990년대식 시민운동을 비판하면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주민운동의 흐름에서도 역시 다르지 않다. 그로 인해 시민운동이 자신의 운동기반을 스스로 새롭게 형성하기 보다는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지역의 대중운동을 시민운동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하는 식의 접근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분별정립이 명확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시민운동의 경향으로의 수렴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다.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의 창립 이후 현재까지
인천지부 창립: 사회진보연대 운동의 지역적 기반의 확대를 모색
창립 초기 지역운동에 대한 사회진보연대의 고민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사회진보연대 운동의 지역적 기반을 확대하는 것에 초점이 있었다. 이것은 전국조직 건설 지향과 같은 조직형식적인 의미에서라기보다, 사회진보연대가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의 경향성을 보다 폭넓게 확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회진보연대 출범의 문제의식이나 당시의 정세적 조건 상 무엇보다 경제위기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인식하는 것, 즉 신자유주의 비판의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일차적인 과제였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구조조정, 정리해고 투쟁 등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방어하는 투쟁에 헌신적으로 연대하는 한편, 빈곤, 여성, 정보통신, 보건의료 등 그 동안 계급적 대중운동이 주목하지 못했던 사회운동의 제영역들을 재조직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인천지부의 창립 과정에서는 본조직과 지부조직의 관계와 역할의 규정 등과 같은 조직적 측면은 되도록 유연하게 사고되었고, 새로운 사회운동의 창출이라는 큰 방향성에 대한 합의를 중심으로 인천지역에서 이러한 운동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에 고민을 집중하였다. 1)
이와 같은 문제의식 아래서 창립 당시 인천지부는 주요 활동기조를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정보통신] 진보네크워크와 같은 진보적 정보통신운동의 지역적 흐름 형성 • [평화와 인권] 인권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의 확산을 목표로 지역 내 평화인권의제의 발굴과 실천적 연대 •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 대우자동차, 발전 등 지역 내에서 벌어질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 • [환경] 만성적인 공해문제, 90년대 진행된 굴업도 핵폐기장, 영흥발전소 투쟁과 같이 지역 내에 잠재되어 있는 환경적 쟁점에 대한 대응 • [여성] 지역 여성운동단체, 여성노조와의 연대 • [교육, 토론 사업] 신자유주의 비판, 지역적 쟁점 사안에 대한 문제의식의 확산 등. 창립초기에는 이와 같은 활동기조를 실현하기 위한 내외적 토대 구축에 주력했는데, 본조직과의 공동 논의를 통한 이론적 정책적 역량의 구축, 인천지부 내적 사업역량을 마련하기 위한 회원모임 구축, 그리고 다른 단체들과의 공동 교육, 지역연대 활동에의 결합을 통한 연대기반의 마련 등이 중심이었다.
대우자동차 해외매각반대와 공기업화를 위한 투쟁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기조에 따른 활동이 충분히 조직되었다고 평가하긴 힘들다. 창립 초기라 인천지부 내적 역량이 매우 취약한 가운데, 경제위기로 인한 인천지역 내의 많은 사업장, 특히 제조업 사업장들에서의 구조조정, 정리해고 사태가 줄지어 나타났고, 그에 대한 공동대응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및 매각 반대투쟁은 1999년 대우그룹 구조조정 발표와 공적자금 투입으로 시작하여, 2001년 2월 1,750명의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 단행, 그리고 GM과의 최종 매각협상이 타결된 2002년 4월에 이르기까지, 근 2년이 넘도록 인천 지역운동을 압도하는 중점 사안이었다. 경제위기에 대한 반응이 매우 단기간에 민감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인해, 1998년 당시 인천의 실업률은 1월 5.9%(6만3천명)에서 시작해 7월이 되면 9.5%(10만4천명)에 이를 만큼 매우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는 당시 전국적 평균 실업률에 비해 30% 가량 높은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터져 나온 대우차 부도 위기는 운동진영 뿐 아니라 인천시 자체가 긴장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대우자동차는 인천시 제조업 매출액의 25%를 차지하고,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면 고용 인원이 5만에 달하는 상황이었다. 지역 경제에서 대우자동차가 차지하는 이와 같은 위치 상 대우차동차 투쟁은 여러 방향으로 분화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었다. 구조조정 계획 발표 직후, 민주노총 인천본부를 비롯한 지역의 노동사회단체 26개가 결합하여, ‘대우차 해외매각 반대와 공기업화’를 기치로 내걸고 <대우사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인천시민대책위>를 구성하였다. 또한 대우자동차 매각반대 투쟁은 노동자들의 고용사수라는 측면에서 뿐 아니라, 정리해고가 법제화된 이후 1998년 현대자동차에 뒤이은 대량 정리해고라는 점, 그리고 김대중 정부에 의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던 구조조정 투쟁의 전국적 전선을 형성하는데 매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 등으로 중앙차원에서도 ‘대우자동차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여 조직적 대응을 함께 하였다.
인천시민대책위는 노동조합, 시민단체, 민중운동 단체 등 다양한 운동세력들이 결집한 만큼 활동의 내용은 다양했고,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대응방향에 대한 이견들이 나타났다.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해외매각 반대, 공기업화’가 현실 불가능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며, 그동안 물밑에서, 그리고 시민대책위 활동의 한 축으로 벌여왔던 인천시와 정치권을 상대로 한 로비를 본격화했고, 급기야는 노사정위 위원을 지낸 이목희를 핵심으로 하여 정재계인사들로 구성된 100인 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하였다. 이들은 GM으로의 매각에 부평공장이 포함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는 사실상 보다 철저한 구조조정을 주문하며 이른바 강성노조를 대우차 해결의 장애물로 지목한 김대중 정부와 GM의 논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목희를 소장으로 하는 ‘대우차 희망센터’가 설립되어 정리해고자를 포함한 당시까지의 대우차 해고자 6,000 여명을 대상으로 하는 재취업사업을 벌여 노동조합의 투쟁을 교란시켰다.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는 창립 직후 대우자동차 매각반대 투쟁에 집중하면서 신자유주의 비판, 그리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본질을 폭로하는 연장에서 해외매각 반대, 공기업화 주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특히 공기업화 주장을 소유형태에 대한 대안으로 축소하며 현실가능성 논리로 치환하려는 시민단체를 비롯한 많은 개혁주의 논자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공적자금 투입으로 그 비용을 고스란히 노동자 민중에게 떠넘기고 해외매각을 통해 초민족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려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동학을 선전하였다.
전국적인 구조조정 저지 투쟁전선의 유실과 연대의 약화, 현장투쟁력의 이완, 지역 사회운동의 다양한 분화와 그로 인한 개혁주의 세력들의 득세 등의 종합적 결과로 대우자동차 투쟁은 GM으로의 매각으로 결론이 났다. 이러한 결정 이후에도 김대중 정부와 개혁주의 세력들은 대우자동차 매각을 구조조정의 모범으로 만들려고 하는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대우차 정상화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대우자동차 투쟁이 지역운동에 남긴 상흔은 막대한 것이었다.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을 비롯하여 노동조합운동 전반에 ‘투쟁을 해봐야 얻을 것이 없다’는 순응주의적 태도가 확산되었다. 그리고 기업의 경영권이 훼손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고, 지역경제, 기업 살리기를 노동자 권리의 우위에 두는 시민단체들의 활동방식은 고착화되었다.
2002년 대선투쟁과 좌파운동의 통합적 전망모색을 위한 시도
2002년 대선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정치세력화인가 전선재편인가’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하였는데, 신자유주의 반대투쟁 전선의 구축이 정치세력화의 선결조건임을 주장하며 대선공투본-공선본 구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을 실질적으로 성사시킬 좌파운동진영의 결집체인 ‘노동해방대선실천단’을 공동으로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러한 중앙 차원의 흐름에 조응하여 인천지역에서도 좌파운동단체들 간의 대선 공동투쟁체를 구성하여 지역차원의 대중투쟁 흐름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공동활동의 동인은 대선시기의 공동투쟁 뿐만 아니라, 당시 대선 공동투쟁 전술과 함께 모색되고 있던 좌파통합정치조직 건설 흐름이었다. 1990년대 후반을 거치며 인천지역운동이 진보정당운동과 연합체적 수준의 시민운동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계급적 대중운동을 지향하는 운동세력, 혹은 좌파운동 세력들은 급격히 축소, 주변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노동자운동은 대우자동차 투쟁을 필두로 구조조정 투쟁의 패배를 반복하면서 투쟁력과 활력을 소실해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좌파운동 세력들의 통합적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고, 대선투쟁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선공투본-공선본, 그리고 노동해방선봉대로 이어지는 구상이 중앙차원에서의 논의과정에서 실질적으로 해체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인천지역의 계획에 대한 논의가 조직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대한 많은 논란 끝에 결국 인천지역에서의 계획도 폐기하는 결정을 하게 된다. 대선투쟁 계획에 대한 이러한 결정은 결국 지역에서의 좌파통합정치조직 건설 문제를 둘러싼 논쟁, 즉 인천지부 운동의 전망을 둘러싼 본격적인 고민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인천지부 내적으로는 창립 직후, 조직적 사업기반을 구축할 새도 없이 숨가쁘게 결합했던 대우자동차 투쟁의 경험이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인천의 지역적 특성과 지역운동의 조건 상, 그리고 인천지부 운동의 기본토대를 구축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노동자운동과의 결합은 매우 핵심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천지부 뿐 아니라 사회진보연대 운동 일반이 이제 막 사회운동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노동자운동과 결합하기 위한 조직적 기반, 현장투쟁의 결합에 요구되는 실무적 경험과 지식, 그 밖에도 교육의 매개 등 모든 것이 한계적인 조건이었다. 다른 한편, 계급적 지향의 연대운동이 축소되고 있는 가운데 좌파연대운동 속에서 운동의 역량을 꾸준히 축적해 나갈 수 있는 조건도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파통합조직 건설의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인천지부 뿐 아니라 좌파정치단체들 각각의 내적 조건은 상이했지만, 인천지역운동의 당시 조건에 대해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앙차원의 대선공동투쟁이 폐기되고, 통합좌파정치조직 구성을 위한 논의가 난맥상에 빠진 가운데, 지역에서의 논의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판단근거와 합의를 요구하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인천지부 내부 논의에도 반영되었고, 좌파통합조직 건설이 인천지부 운동의 주객관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인가를 둘러싸고 쉽사리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이를 둘러싼 논쟁이 다소 소모적으로 진행되었고, 인천지부 운동 역량을 오히려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당시의 논의 진행의 성격 상 객관적인 평가는 여전히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사후적으로나마 몇 가지 쟁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첫 번째는 인천지부 내부 역량의 한계와 직결되는 문제인데, 지역 좌파운동의 통합적 발전을 위한 정치적 기획을 수립하지 못하고, 그를 좌파조직통합의 문제로 환원해 버리거나, 그에 대한 무대안적 비판으로 일관하는 식으로 논의가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 두 번째는 창립 당시 좋게 말하면 유연하게, 사실상 모호하게 정립되었던 사회진보연대 운동의 지역적 실천이라는 방향성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특히 통합적 운동 전망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중앙조직, 지역조직 각각의 역할, 지부운동의 조직적 과제에서 기인하는 쟁점이 존재한다. 당시의 사례로 본다면, 대선투쟁이나 통합적 정치조직 건설과 같은 조직의 중대한 운동방침의 결정, 나아가 정세적 투쟁을 조직하는데 있어 사회진보연대의 방침과 결정은 어떻게 수립되며, 또한 그것의 실행과 집행 과정에서 조직적 통합력은 어떻게, 어떤 수준에서 발휘되고 강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존재했던 것이다. 셋째 노동자운동과의 결합력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토대로 지역적 운동기반의 확대를 이룰 구체적 방안은 문제인가가 당시 논의의 진짜 쟁점이었던 것인데, 이것이 인천지역 운동, 그리고 인천지부의 특수한 조건의 차원으로 축소되어 버린 문제가 있다. 사실 이것은 사회운동을 막 시작하던 사회진보연대 운동 전체의 과제라 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중앙운동의 위상을 가지는 본조직의 경우 그러한 문제의식이 보다 뒤늦게 도입되었다 할 수 있고, 인천지부의 경우 단기간의 성과에 긴박되어 다소 강박적으로 문제에 접근했던 측면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강박감과 조급증이 운동의 토대를 확대하기 위한 내부 통합력과 활동역량의 강화로 이어지기보다 이견과 갈등적 요소를 확대시키는 부정적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침체기를 거쳐 모색기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인천지부 운동은 상당기간 침체기에 빠져있었다. 어찌보면 창립 직후 대우자동차 투쟁에 결합해 들어가면서 급속하게 인천지부의 한계가 드러나게 된 것은 인천지역에서 사회진보연대 운동을 뿌리내리기 위해 갖추어야 할 선결조건에 대해 단기간에 경험적 근거와 인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성은 인천지부 운동역량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측면만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또한 몇몇 좌파운동단체들이 조직을 해산하거나 진로를 새롭게 모색하는 조건에 처하게 되면서 이들과의 공동활동을 통한 전망의 모색도 쉽지 않은 조건이 되었다.
그 후 몇 년간 인천지부 운동은 지역운동 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동인을 소진하고 본조직 활동의 기조와 방식을 지역에 적용하는 수준에서 진행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중연대를 통한 연대운동, 전선운동의 복구 그리고 운동세력의 결집과 운동의 기획에 대한 면밀한 판단과 내적역량의 구축이 부재한 가운데서의 여성, 이주 등에 대한 의제중심적 접근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지역 내의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이 일반노조 건설 등으로 가시화되었지만, 지역 사회운동 전반의 공동과제로 인식되지는 못하는 조건에서 <불안정노동철폐를위한연석회의> 등을 구성하여 진보정당, 노동사회단체 등 지역 운동주체들의 공동활동과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지원을 조직하는 유의미한 활동을 주도적으로 벌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정규직 조직화를 넘어서는 비정규직 운동주체의 형성이 활발하기 못한 지역적 조건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단체 간 연대를 통해 외곽에서의 지원을 조직하는 이상의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결론적으로 내적역량과 통합력이 약화되고, 좌파운동 일반이 분화, 침체일로를 겪는 가운데 운동의 활력을 상실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인천지부는 상당기간의 침체기를 거쳐 대략 2~3년 전부터 현재까지 다시금 새로운 활동의 전망을 모색하는 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진보연대 전체적으로 2004~5년을 거치며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노동자운동의 사회운동적 개조로 표현해왔던 노동자운동과의 결합 구상을 ‘노동자사회운동론’으로 구체화하며 노동자운동으로의 조직적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연장에서 지역의 운동역량을 보충하고 사회진보연대 차원의 통합력 있는 지역운동 계획을 수립하며 이를 내적 구조에도 반영하는 등의 적극적인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인천지부 운동 역시 내적 운동역량을 보강하고 교육사업, 비정규직 주체형성을 위한 활동, 지역 연대운동의 재조직화, 회원활동의 재조직화 등을 주요 축으로 하여 지난 2~3년간 활동을 조직해 왔다. 무엇보다 지역 노동자운동의 쇄신과 계급적 주체형성이 핵심적인데, 실리주의적 경향을 넘어서기 위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이념형성이 필요하다. 또한 급진적 사회운동들 간의 연대운동의 기반 확장 역시 지역운동을 급진적으로 재조직화하는데 있어 필수적이다. 현재와 같은 인천지역운동의 조건에서 인천지부(를 포함하여 계급적 급진적 사회운동을 표방하는 조직들의) 운동의 장기적 전망 수립은 그와 같은 과정과 동반하여야 실질화될 수 있을 것이다.
뼈아픈 반성과 새로운 각오
신자유주의가 지역의 자율성, 지방자치의 활성화라는 이름으로 지역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강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확대되어 오면서 지역의 역할 변화, 지역운동에 대한 사회운동의 관심이 점점 높아져왔다. 그러나 세계화에 대응하는 다양한 층위의 활동들(경제적, 정치적 비판에서부터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와 같은 대항담론의 형성까지)에 비한다면 지역운동에 대한 사회운동의 인식은 ‘지역적 사안’이 생겨나는 지리적 단위, 혹은 운동조직이 용이한 공간이라는 관념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역을 재조명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은 정세적 사안에 대한 전국적 공동대응(예를 들어 한미 FTA와 같은)으로, 그리고 지역운동은 지역개발이나 지역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특정 사안에 대응하는 운동과 같은 식으로 분리되어 나타난다. 즉 ‘지역적 사안’을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의 맥락으로 재해석하고 운동적 확장을 이루는데 있어서의 한계가 지속되고 있다.
단적인 경우가 세계화 반대를 외치면서 경제위기와 구조조정 시기에 ‘지역경제 활성화와 고용안정’을 기조로 하는 류의 운동들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어떤 의미에서는 국수주의, 민족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반세계화를 주장하는 흐름의 지역적 판본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지속가능한 세계화’,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표방하는 국제 NGO 운동과 같은 흐름 역시 지역운동에도 이미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천에는 1990년대의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연합 기본협약’,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에서 선언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의제21’과 같은 흐름의 지역적 실천을 표방하며 민간과 기초자치단체의 협력구조로 구성된 ‘의제21’이 대부분의 구마다 설치되어 있다. 이들은 개발이나 생태와 관련되는 의제를 발굴하여 시민단체와의 연계 하에 적정수준의 개발, 지역경제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개발 등의 정책제언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세계적으로나 한국사회 내에서도 세계화에 반대하는 흐름이 국수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 반세계화, 국제 NGO들에 의해 주도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그리고 대안세계화를 지향하는 운동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는데, 지역운동 내에서도 세계화 아래서의 지역의 발전전망을 둘러싸고 이들 각각에 조응하는 흐름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지역은 신자유주의로 인한 계급적 대립과 다양한 모순이 생겨나는 갈등적 공간이며, 그 만큼 다양한 정치적 경향성이 경합하는 공간인 것이다. 지역통합과 지역공동체의 이해라는 것은 이러한 갈등과 모순을 객관적 조건으로 전제하고 그의 해소를 위한 대안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실상은 매우 허구적인 것이거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방향성일 뿐이다.
이러한 경향성들이 실천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1990년대 후반 이후 지역운동이 개입해온 인천 지역 내의 핵심적 사안들 몇몇을 통해 돌아볼 필요도 있겠다. 제조업의 축소, 이른바 산업공동화 문제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 그리고 이른바 사회공공성 투쟁 등을 대표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비판하는 투쟁이 즉각적으로 구조조정 사업장 노동자들의 고용에 대한 대안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의 역량이 축소된 현재와 같은 조건에서 개별 사업장의 대응만으로는 오히려 고용사수 조차도 역부족인 것이 현실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에 기초한 공동대응, 지역적 전선형성이야말로 고용을 비롯하여 자본으로부터 최소한의 양보라도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경로다. 경제자유구역 문제의 경우 추진된 지 5년여가 지났지만 그 성과는 매우 지지부진하고, 특히 핵심으로 거론되었던 외자유치는 고작 1500달러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송도, 영종, 청라지구는 단기 유동성 자금 확보와 사업기반 조성을 명분으로 아파트, 주상복합 건설 등을 통해 부동산 투기붐을 인천시 전역으로 확대해온 주범이다. 뿐만 아니라 아시안게임 유치, 뉴타운 건설 등 인천시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사업들 대부분이 경제자유구역의 활성화를 통한 동북아 관문도시로의 도약이라는 미망으로 수렴되어 끝도 없이 혈세가 투입되고 있다. 사실 이는 하나의 사안이라기보다 금융화된 세계경제에 편입하기 위한 지방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략의 문제이다. 그러나 시민운동 전반이 지역발전 이데올로기를 시민운동의 논리로 윤색하여 수용하고 있는 가운데, 지역 사회운동은 실상 거의 이에 대응을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안적 지역개발에 관심을 두는 일부 단체들을 중심으로 ‘적정수준에서의 개발과 투자’를 중점적인 기조로 비판적 지지식의 대응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공공성 투쟁의 경우 공공서비스, 사회복지 부문의 제도개선투쟁이 실천의 중심 형태가 되면서 지역운동 차원에서는 그 실체가 모호하거나, 사회복지 등 공공부문에 대한 지자체 예산확대와 같은 원칙적 구호만 난무하는 실정이다.
이상의 조건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지역운동에 대한 기본 관점과 실천의 방향으로 • 금융 세계화가 초래하는 지역적 발전의 불균형, 지역의 위계화와 그로 인한 인민들의 삶의 기반의 황폐화에 대한 대응(구조조정 투쟁, 생존권 투쟁의 확대) • 노동운동의 업종, 산별 구조를 가로지르는 노동자의 단결, 통일을 위한 지역적 전략의 실현(정규직-비정규직 간 실질적 연대의 실현, 계급적 주체형성) • 생태운동,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결합(새로운 운동주체의 형성과 대안세계화운동의 지역적 기반 형성) • 지역 발전전략의 폐해, 재생산 기반의 붕괴가 야기하는 지역공동체 위기에 맞서 노동자운동, 여성운동, 진정한 의미에서의 풀뿌리 대중운동 등 쇄신된 운동주체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공동체성에 대한 운동적 대안의 실험과 발전 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노동자운동의 급진화와 새로운 주체형성은 매우 관건적인데, 노조운동의 혁신이 단지 내부의 체계, 기구, 운영을 정비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점차 자명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인천지부 역시 이와 같은 운동방향을 인천지역 내에서 실현하기 위한 보다 다각도의 계획을 수립하고 적극적으로 역량을 배치해햐 할 시점이다.
더욱이 자본주의의 위기가 거론되는 경제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이고, GM대우를 비롯하여 제조업 부문에서는 감산, 전환배치, 구조조정 등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운동을 필두로 인천지역 사회운동의 대응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뿐 아니라, 이후 지역운동의 형세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지난 인천지역운동의 역사, 특히 10년 전의 경제위기 시기의 대응, 그 이후 형성되어온 지역운동의 현재적 조건이 주는 뼈아픈 반성과 교훈이다. 사회진보연대 운동의 지역적 확대, 그리고 인천지부가 인천지역 내에서 굳건히 뿌리 내리고 운동의 기반을 확장하는 과정이 지역 내 급진적 사회운동들 간의 공동의 전망모색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지역운동의 조직적 대응 태세가 마련되어야 하며, 인천지부 역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1)“따라서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의 커다란 사업기조의 하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한 ‘신자유주의 반대’이다. 아울러 우리는 ‘새로운 사회운동’에 대한 고민을 ‘사회진보연대 전 활동 속에 녹여내려 한다. 현재 진보운동이 취하고 있는 조직형태의 표상으로서 ’산별노조‘와 ’진보정당‘에 국한되지 않고 또한 ’계급적대‘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적대‘에 기반한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모색해보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인천지역‘이라고 하는 우리가 발딛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과의 만남이다. ”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 창립선언문 중, 1999년 12월 19일)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