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평화운동과 사회진보연대
이 글은 1998년 이후, 한반도의 전쟁위기와 통일 문제, 그리고 국제적으로 벌어졌던 오늘날의 전쟁에 대한 사회진보연대의 관점과 그에 입각한 활동의 궤적을 기록한 것이다. 출범초기 사회진보연대는 <한반도위원회>를 통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비판하였고, 1990년대 이후 변화하는 미국의 대북전략과 남북경협 등의 쟁점에 대해 사회운동의 올바른 시각을 정립하고자 노력해왔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사회진보연대는 <반전팀>을 구성하여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평행하는 군사세계화’라는 분석틀로 오늘날의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벌이는 대테러전쟁을 비판하였다. 또한 정세적으로 벌어졌던 반전 평화운동에 실천적으로 결합하여 이 운동의 대중적, 정치적 성장에 복무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사회진보연대는 2006년 북한의 핵보유선언과 핵실험을 통해 한반도 핵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정세 속에서 평화운동이 견지해야 할 반핵평화와 일방적인 군비축소라는 관점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며 동아시아차원의 반핵평화 국제연대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지난 10년 동안 사회진보연대가 걸어온 반전평화운동의 궤적 속에서 성과와 평가지점을 도출해내고, 오늘 다시 출발해야 할 운동의 과제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햇볕정책
1998년 12월 사회진보연대 출범 당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북한은 1998년 1월 당보, 군보 공동사설을 통해 새 정부의 연북화해정책을 촉구했다. 김대중과 DJP 연합을 결성했고, 그 후 새 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은 김종필은 1998년 2월 베이징에서 김 당선자의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위한 6개국 선언> 구상을 발표했다.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남북 기본합의서 이행과 남북한 주도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특사교환을 제의했다. 새 정부의 100대 과제에는 그 외에도 정경분리 원칙으로 남북 경제협력의 적극적 추진.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사회문화 교류 활성화, 대북 경수로 사업의 원활한 추진, 이산가족 재회의 조속한 실현 등이 담겼다.
특히 1998년 4월 30일 김대중정부는 정경분리 원칙에 따른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남북교역에 관해서 통일부장관의 개별적 승인이 필요 없는 포괄승인품목을 확대하고, 위탁가공 교역을 촉진하기 위해 생산설비의 반출 제한을 폐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에 조응하여, 1998년 6월과 10월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했고, 11월에는 총사업 규모가 약 10억 달러에 달하는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실행되었다.
한편 1996년 4월 김영삼, 클린턴 대통령이 제안한 4자회담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1998년 3월에 비로소 1차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주요 의제로 한국과 미국은 남북 당사자가 중심이 되고 미국과 중국이 실효성 있게 뒷받침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제시한 반면, 북한은 미군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이 핵심이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기존의 입장 차이로 인해 4자회담 개최가 2년 간 지연되었으나, 본회담 개시 시점에서도 이러한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김대중정부 역시 김영삼정부를 이어 남북한이 중심이 되고 미국과 중국이 보장하며 러시아와 일본이 지지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와중에 1998년 8월 31일 북한은 인공위성 광명성의 발사 실험을 발표했다. 북한은 로켓이 일본 상공을 지나 1646km를 날아 태평양 공해상에 떨어졌다고 밝혔다. 미국은 인공위성과 탄도미사일 실험이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북한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북한의 핵탄두 개발과 함께 미사일 문제가 심각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한반도위원회의 문제의식과 활동
사회진보연대는 출범과 함께 이처럼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도래한 새로운 한반도 상황에 직면하여 분석과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한반도위원회 구성을 결정했다. 위원회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95년 아태재단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이 제안한 3단계 통일방안은 1) 공화국연합제에 의한 남북연합단계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을 위한 제반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권한이 매우 적은연합기구), 2) 연방제통일단계 (1연방과 2지역의 자치정부, 외교군사 전면적 권한 및 주요 내정에 대한 주요한 권한을 갖는 연방), 3) 완전통일단계(1국가 1정부)로 요약된다. 즉 경제적 관계의 통합을 확대해 나가면 최종적으로 정치적 통합까지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경제적 통합이 정치적 통합으로 질적으로 비약할 것인가? 여기서 핵심은 공화국연합제에 의한 남북연합 단계가 사실상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는 과도적인 단계로서 설정된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다당제와 자유선거를 허용하는 것이 그 핵심으로 제기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통일방안 수준에서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이 언급하고 있는 “흡수통일반대”는 김영삼정부가 구사한 대북강경책에 대한 반대 즉 북한의 조기붕괴에 의한 흡수통일와 반대되는 개념이자 더욱 중요하게는 “합의된 통일”(예컨대 독일통일)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미국의 대북전략 구도 하에서 한국-미국-일본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햇볕정책은 그 전제조건으로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확산의 봉쇄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대북정책의 핵심적 목표를 3국의 공동관심사로 승격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햇볕정책의 기본적인 기조는 과거 한때 검토했던 북한의 붕괴-즉각적인 흡수통일이 가능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이 확인됨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사활적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다른 방편의 하나로서 3국이 공동의 압박전선을 형성하여 대량파괴무기의 봉쇄라는 당면한 목표를 획득해야 한다는 정책적 목표를 수용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단기적 목표가 구조적으로 보장받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으로는 북한을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시켜 북한이라는 존재 그 자체의 위협을 궁극적으로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구상은 북한이 핵-미사일을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남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북한의 현존하는 정권에게 안정성을 부여해주면서, 점진적으로 한반도 ‘경제’통합을 추진하겠다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이를 위한 세부적인 방안으로서 남북 간의 ‘무역자유화’ 시나리오의 관철 즉 △주로 남한경제에 통합(남한경제의 하위파트너),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로의 전환(가공무역형 수출기지) 등이 제출되고 있다. 결국 한국-미국의 구상은 남측의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질서의 확장을 분명하게 지지한다. 따라서 이러한 전략은 순전한 의미에서의 ‘평화공존’이 될 수 없으며, 평화공존이라는 형식을 통해 사실상의 통일의 효과를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이는 즉각적인 흡수통일이 수반할 수 있는 ‘불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비용을 절약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둘째, 남북경협의 진척이 한반도 평화안착에 도움이 되며, 남북 공동이익을 증진시킨다는 논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 남한 자본의 북한 진출이 북한의 경제난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한반도에서 민족적 경제공동체가 회복됨으로써 국제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남한의 노동자운동과 민중운동에도 무비판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정치논리로부터 자유로운 경제논리’는 곧 자본의 논리를 뜻한다. 자본이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돈이나 경제 요소가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가 주도하는 일체의 사회적 관계도 함께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당면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의 저임노동력의 활용과 유지가 남한의 경쟁력 강화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발상이다. 이미 여러 연구단체가 ‘상호보완적 남북 경제 통합방안’이라는 제목으로 남북간 수직적 분업구조 구축이나 남북 노동자들의 임금체계의 분화방안을 제출하고 있다. 이것은 남한의 노동운동이 지난한 투쟁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획득해가고 있는 생존권이 대북교류와 관련해서는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즉 노동권의 차별적 적용이라는 문제는 향후 남북경협의 활성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쟁점으로 드러날 것이다.
셋째,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도 한반도 군축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오히려 한미동맹의 강화, 현대화가 추진되고 있다. 1998년 1월 김 당선자를 만난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한국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예산을 삭감하고 있지만, 국방예산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고, 김대중 정부가 제시한 100대 중심과제에는 한반도 군축이 아니라 확고한 한미 안보협력 유지가 강조되고 있다. 특히 한미연합사령부의 전쟁계획인 <작전계획 5027>은 대북 선제공격 전략을 승인하는 방향으로 호전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넷째,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통일운동 진영은 드디어 통일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전기가 마련되었다고 받아들이고 기존의 반정부적, 집회와 시위 중심의 통일운동을 벗어나서 정부와 유효하게 공조할 수 있는 대중적, 전문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통일운동이 노선 전환을 꾀하는 것은 한반도 정세변화에 본질적으로 부적합하다. 오히려 전쟁이 아닌 상태로서의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대중의 통제력과 민주적 역량의 강화에 따른 평화의 구조화가 진정한 쟁점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평화운동이 전면적으로 강화될 필요가 있다. 또한 향후 북한의 개혁개방의 흐름이 가시화될 경우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북한 민중의 노동권 문제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태세가 구축되어야 한다. 또한 분단으로 인해 남과 북 모두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정치적 기본권의 확대(대표적으로 국가보안법의 문제)가 적극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운동의 실질적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초기 한반도위원회는 조사연구와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한반도 연대>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소식지 머릿기사를 살펴보면, <평화권과 노동권을 통일운동의 핵심 쟁점으로 삼기 위하여>(1999.1.28), <한반도 전쟁위기론 다시 읽기: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전쟁을 준비하는 행위다>(1999.3.3), <나토확대, 그러나 평화에 대한 무능력: 유고공습을 계기로 본 나토의 현재와 미래>(1999.4.20), <현대재벌이 북한개발전략이 제기하는 쟁점>(1999.6.11) 또한 1999년 1월부터 7월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노동운동과 통일> 기획토론회를 진행했다. 주요 주제는 ‘독일통일의 역사적 성격과 통일문제’, ‘세계자본주의 체제와 한반도 통일 문제’, ‘북한경제의 현황과 남북 경제교류의 문제점’, ‘북한의 노동력 관리체제와 노동조직’ 등이었다.
한편 사회진보연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999년 이후로 굵직한 정세적 사안이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1999년 6월 15일에는 서해상 북방한계선(NLL) 남쪽 2.5킬로미터 지점에서 남과 북의 전투함의 무력충돌이 발생해서, 북한 경비선 한 척이 침몰하고 또 한 척이 침몰하여 북한군 최소 30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한국 정부는 이를 1차 연평해전이라고 부른다. 2002년 6월 29일에는 2차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남측 고속정이 침몰하고 한국군 6명이 사망한다.) 1999년 9월 30일에는 AP통신이 자체 웹사이트에 <한국전쟁에서의 피난민 학살에 대한 퇴역 미군병사의 증언>이라는 제목의 특별 취재기사를 게재함으로써, 노근리 학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이를 계기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문제가 사회쟁점으로 부상했다. 위원회는 서해 무력충돌을 계기로 북한한계선이 정전협정에서 규정된 공식적인 군사분계선이 아니며 (현재 정전협정 상에서는 서해상의 군사분계선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오히려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 정부가 감행할 수 있는 대북 무력시위나 도발 억제하기 위해 정한 내부 규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다. 또한 노근리 사건은 단지 전투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실수가 아니라 군사작전으로 수행된 체계적 민간인 학살이었음을 주장했다. 한편 다음해 2000년 4월에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전격 발표되고,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남북정상회담, 6.15 공동선언 발표가 이뤄졌다. 위원회는 이를 계기로 사회운동 진영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의 모순을 더욱 분명히 인식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2000년 6월 30일에 결성된 <매향리 미군 국제폭격장 폐쇄 범국민대책위원회>에는 사회진보연대가 참가단체로 참여하였다. <매향리범대위>는 1999년 10월 6일 결성된 <불평등한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국민행동>과 함께 ‘매향리 미군폭격장 즉각 폐쇄, SOFA 전면개정, 양민학살 진상규명 및 사죄 배상’ 등을 내걸고 2000년 투쟁을 주도했다. 특히 <매향리 범대위>는 사회단체와 주민운동이 결합하여 군사기지의 폐쇄와 주민 생존권 보장을 위한 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함으로써 2000년대 반전 평화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한편 2000년 8월에는가 결성되었다. 사회진보연대는 네트워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사회진보연대 상근활동가를 정책실장으로 파견하고 있었던 <전국민중연대>를 통해 2001년 4월 한반도위원회가 제작한 을 배포하고, 관련 활동을 전개했다.
2001년 9.11과 아프간 공격
2000년 말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2001년 미국의 대외정책은 변화를 예고했다. 그동안 공화당은 클린턴의 대외정책이 미국의 국익을 확고히 수호하지 못하고, 악당국가들이 미국을 위협하고 실리를 챙기는 나쁜 버릇에 물들게 했다고 줄곧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부시정부로의 미국 행정부 교체에 따라 세계 각지에서 정치적 경색국면이 발생하거나 최소한 새로운 정책수립 과정에서 새로운 양상의 마찰이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남북관계의 측면에서도 부시정부가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면서 새로운 정책방향 수립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북미관계의 교착 상태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9.11 공격이 발생했다.
9.11은 미 본토가 항구적인 ‘전장’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는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미국은 이를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군사교리를 천명하며 범세계적인 공안정국을 형성할 수 있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대테러동맹’이라는 명분하에 항구적인 예방, 선제 군사공격을 정당화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0월 7일, 빈라덴 체포를 목적으로 즉각적인 아프간 보복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국에서는 10월 10일 <전쟁반대 평화실현을 위한 765개 사회단체 시국선언>이 발표되고, 부시 방한에 맞추어 준비되고 있던 집회를 10월 20일 ‘전쟁반대 평화실현 신자유주의세계화반대 범국민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했다 (부시 방한은 취소되었다.) 11월 8일 <전쟁반대평화실현공동실천>이 발족하여 미국의 보복전쟁 즉각 중단, 한국군 파병과 전쟁지원 반대를 주장했다.
‘살인미군 규탄’에서 ‘전쟁반대’ 운동으로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에서 미 2사단 소속 장갑차가 앞서가던 여중생 신효순, 심미선 양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주한미군의 살인 만행에 대해 한국 법무부는 재판권 포기 신청을 하였으나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동두천 군사법정에서 진행된 미군 재판은 당시 범죄행위를 저지른 관제병 페르난도 리도와 운전병 마크 워커에게 무죄평결을 내렸다. 이 사건에 분노한 대중들은 자발적으로 촛불집회를 조직하였고, 이는 곧 범국민적인 반미시위로 확산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문제, 구체적으로는 주둔미군지위에 관한 일반협정(SOFA)의 불합리함이 대중적으로 폭로되었다. 2002년 12월, 두 여중생 살인 만행을 규탄하는 범국민적인 촛불집회가 조직되었고, <미군장갑차 고 신효순, 심미선 양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는 12월 14일 10만 촛불대행진을 벌이게 된다.
2003년 1월, 부시는 연두교서를 통해 이라크와 이란,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하고 미국에 위협이 되는 세력에 대해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통해 응징하겠다는 ’선제 공격(pre-emption)‘을 천명하였다. 나아가 미국은 이라크가 알카에다 등 테러세력을 지원하고 있으며,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며 명분삼아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침공을 단행하였다.
대중적인 반미시위가 고조되던 2003년 초, 반전평화운동 단위들은 대중들의 반미 열기를 미국의 군사패권과 중동지역의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반미반전운동 연대조직 이었던 <전쟁반대평화실현공동실천>과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는 ‘살인미군 규탄’에서 ‘전쟁책동 미국반대’로 나아가야한다는 공동의 인식 하에 합동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 한국군 파병을 반대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하였다. 사회진보연대는 합동운영위 상황실에 활동가를 파견하여 이러한 운동의 흐름에 적극 개입하였다.
전쟁 직전인 2003년 2월 15일, 세계사회포럼을 통해 조직되어 전 세계 수백 개의 도시에서 개최된, “이라크 침공 반대 국제공동행동의 날”을 기점으로 한국에서도 이라크 전쟁 반대, 파병반대를 위한 대중적인 반전평화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2003년 이라크 전쟁과 반전평화운동의 성장
2003년 4월 2일, 한국군 파병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국방부는 이에 따라 4월 12일에는 이라크전 파병 의료부대(제마부대, 100명)과 건설공병부대(서희부대, 573명)를, 4월 17일에는 선발대 30명을, 4월 30일에는 제1제대 300여명을, 5월 14일에는 제2제대 300여명을 각각 파견한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그리고 5월 1일,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였다. ‘충격과 공포’로 명명된 ‘이라크의 자유화(해방)’ 작전은 이제 ‘점령과 지배’ 단계로 이행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미국의 점령에 대한 이라크 내의 저항은 갈수록 거세어졌고, 미국의 개전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와 후세인 정권의 테러조직 연관성은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은 2003년 9월 장기화되는 이라크 전쟁 및 점령의 부담을 동맹국에 떠넘기기 위해 한국에도 사단규모의 대규모 전투부대 추가파병을 요구하였다.
사회진보연대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평행하는 군사세계화”라는 분석틀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 그리고 ‘대테러전쟁’을 비판하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반전팀을 결성하여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정세를 분석하고, 대중적인 반전행동을 기획, 실천하였다. 또한 전국민중연대(준) 참가단체들과 공동으로 정기적인 <반전 소식지>를 발간하여 전국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반대, 파병반대운동에 정책적으로 개입하였다.
한국정부의 이라크 전투병 추가파병이 확정되자 2003년 9월 23일 전국 353개 단체가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이하 파병반대국민행동)>을 결성하여,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한국군 추가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사회진보연대는 <파병반대국민행동> 공동대표 단체로 참가하여 범국민대회, 인간띠잇기, 철야농성 등의 대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파병반대국민행동> 상황실에 활동가 파견했고, 이라크 상황 모니터 팀을 구성하고 운영하는데 참가했다. 더불어 2004년 총회에서는 국제반전공동행동에 대한 특별결의문을 채택하여 반전운동에 대한 조직적 결의를 높였다.
한편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인권운동 내부의 토론이 활성화되어 <평화권을 위한 모임>이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평화인권연대, 인권운동사랑방, 다산인권센터, 천주교인권위, 국제민주연대,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 사회진보연대가 참여했다. 2003년 모임은 이라크 전쟁범죄 보고서를 발간했고,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관련 자료를 축적했다.
2004년에는 한국정부의 파병정책으로 인해 오무 전기 노동자들과 김선일씨가 이라크 저항세력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무현 정권은 한-미 군사동맹을 위해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고 이에 분노한 대중들은 더욱 격렬하게 전쟁반대, 파병반대운동의 대열에 나섰다.
이렇듯 엄중한 정세에서 반전평화운동진영 내에서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태도를 두고 입장이 갈렸다.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 시민단체들은 미국비판과 노무현 비판을 분리하고 노무현 퇴진투쟁은 파병반대운동과는 별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정권이자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무장한 군사력으로 엄호하려는 정권인 노무현 정권의 퇴진은 반전평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였다. 따라서 반전운동, 파병반대운동은 ‘노무현 정권 퇴진’을 정치적 요구로 내걸어야 했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러한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는 <파병반대국민행동>참가 단체들과 함께 <만민공동회>집회를 기획하여 노무현 퇴진, 한미동맹 폐기라는 정치적 방향을 분명히 제기하고자 하였다.
한편 <평화권을 위한 모임>은 <전쟁은 끝난다. 우리가 원한다면! 부시-블레어-노무현 전범민중재판>을 제안했다. 9월 20일 발기인 총회를 개최한 후 12월까지 기소인을 조직하여 기소인들이 직접 기소장을 작성하는 운동을 벌였다. 사회진보연대는 전범민중재판을 제안하고 기소인을 조직하는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파병반대운동의 정치적, 대중적 성장에 복무하고자 노력하였다.
대테러전쟁 비판과 운동의 쟁점
2005년과 2006년, 중동에서 미국이 벌인 “대테러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레바논, 이란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미국은 ‘새로운 중동’ 정책을 표방하면서 헤즈볼라와 하마스 같은 저항세력을 제거하여 이란과 시리아 같은 반미국가를 압박하고 봉쇄하여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는 친미 중동을 만들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대테러동맹’이라는 명분하에 전쟁비용, 파병을 지원하고 각 국가마다 ‘테러방지법’을 제정하여 세계화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을 억압하고 있었다. 2005년과 2006년을 거치면서 노무현 정부는 세 차례나 이라크 자이툰 부대 파병기한을 연장했고, 아프가니스탄에 동의다산부대를 파병하였다. 또한 2006년 11월 한미 정상회의에서 자이툰 파병 연장과 함께 레바논 파병을 약속하였고, 그해 12월, 국회는 자이툰 파병연장 동의안과 레바논 특전사부대 파병동의안을 통과시켰다.
2007년이 되자 미국과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함께 미국의 이란 공격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부시 행정부는 이란의 핵개발과 이라크 저항세력 지원을 문제 삼으며, 유엔 안보리가 설정한 이란 핵개발 중단시한을 앞두고 페르시아 만에 항공모함 전단을 추가로 배치하는 등, 이란 공습을 위한 비상계획을 수립한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중동에서의 ‘대테러전쟁’의 확전과 이에 대한 한국정부의 파병정책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에서 故 윤장호 하사가 저항세력의 폭격으로 사망하였고 2007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탈레반에 의해 피랍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파병반대국민행동>을 비롯한 반전평화운동은 이라크 점령 종식과 자이툰 철군 운동과 함께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파병반대, 그리고 이란 확전반대운동으로 반전평화운동의 의제를 확장해나갔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문제에 대한 이슈도 주요한 투쟁과제로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히 아프간 피랍사건은 반전평화운동에게 있어 중대한 쟁점을 던졌다. 당시 <파병반대 국민행동>은 피랍사태 직후,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 미국의 아프간 점령과 한국정부의 아프간 파병정책에 있으며, 오무전기 노동자들, 고 김선일와 고 윤장호 하사의 죽음에 이어 ‘미국의 대 테러동맹’에 동참한 한국정부가 겪어야 하는 참혹한 피의 대가라는 점을 원칙적으로 제기하였다. 그러나 당면 투쟁의 슬로건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탈레반의 피랍행위에 대한 운동진영 내 시각차가 쟁점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민간인의 생명을 볼모로 한 탈레반의 잘못된 요구는 수용될 수 없다.”는 입장과 “미국의 점령을 비판하고, 점령 종식을 압박할 수 있는 요구로써 탈레반의 요구는 수용 가능하다.”는 입장이 대립되었다. 이러한 쟁점들로 인해 성명 발표, 촛불집회 기조를 결정할 때마다 참가단체들은 상당한 논란을 벌였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탈레반에게 피랍자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활동을 독자적으로 조직하기도 하였다. (2007년 8월 7일, 평화 여성 환경 종교, 문화 분야 78개 시민단체, ‘노란 리본 달기’운동.)
78개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를 호소하는 성명에는 탈레반에 대한 비판과 인질들의 조속한 석방요구가 가장 중심적인 내용으로 담겨있었다. 이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 살해하는 탈레반의 폭력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키고, 인질을 구해내는 것이 사태의 해결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파병반대 국민행동>의 촛불집회 기조와 관련해서도 한·미 동맹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로부터 무사귀환의 염원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한편에서는 이 사태를 반전·반미의 목소리를 보다 확산시켜 나가는 적극적인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운동진영의 역할은 피랍자 석방의 기술적 방법 자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며, 한·미 동맹 반대라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여 반전평화운동의 정치적 고양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고도의 군사공격에 의해 격퇴 당한 탈레반은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복을 감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피랍자들의 생명구제는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탈레반 전쟁포로들이 미군에 의해 최소한의 포로대우도 받지 못하고, 끔찍한 인권유린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은 탈레반이 민간인 납치를 볼모로 포로석방을 요구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도록 추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탈레반을 규탄하며 피랍자를 즉각 석방하라는 국제캠페인을 펼치거나, 정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예컨대 석방 조건 수용) 피랍자 석방을 우선시하라는 요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프간 피랍사태를 통해 제기된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오늘날 일반화되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속성, 즉 극단적인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이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테러’는 정치· 군사적 약자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제아무리 압도적인 정치· 군사적 우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확산해 나간다 하여도 반복적으로, 심지어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증오와 보복’의 전쟁과 폭력에 대응하는 반전평화운동의 향후 실천이 어떠한 원칙과 관점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보다 진지한 성찰과 숙고가 필요할 것이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투쟁과 한미군사동맹 해체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사업은 해외주둔 미군재배치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의 동아시아 신속 기동군으로의 전환을 추진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 중 하나이다.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 투쟁은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투장과 미국의 군사패권과 전쟁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운동이 만나 대중적인 반전평화운동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대추리 150가구, 도두리 40가구가 주축이 되어 2003년부터 팽성 주민대책위가 결성되었고 900일이 넘는 주민 촛불집회와 다양한 투쟁들을 벌여냈다. 2005년 2월, 115개 시민사회단체로 결성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범국민 대책위>는 농지와 대추 초등학교 사수투쟁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2006년 3월과 4월 국방부는 농지를 파헤치고 철조망을 설치하여 주민들의 출입을 차단했고, 급기야 5월 4일에는 대추초등학교를 철거하고 말았다. 국방부는 이 과정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주민의 저항을 무력화했다.
2006년 사회진보연대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을 반전평화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이슈로 삼아 대추리 현지에서의 투쟁(평택지킴이 활동과 솔부엉이 도서관 건설 및 운영, 소식지 발간, 주 1회 평택방문, 후원조직)과 서울에서의 촛불집회를 병행해 나갔다. 그리고 전국적 차원에서 평화 대행진을 조직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평택미군기지 확장은 단순히 한국정부의 졸속적으로 수립된 군사안보정책이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전략과 한-미군사동맹 현대화를 위한 사활적인 과제였다. 따라서 주민과 국민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행정대집행은 무리하게 강행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체계적인 탄압이 거침없이 진행되는 동안 반전평화운동은 ‘불법과 폭력/합법과 평화적 해결’ 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다. 대추리 현지가 군사력에 의해 봉쇄되면서 주민들의 고립감은 심화되었고, 대중집회의 위력적인 힘이 완강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800명이 넘는 구속, 수배자가 발생하였고, 총 1억원이 넘는 벌금이 주민들과 운동단체에게 짐 지워졌고, 대추리 현지에서는 일상적인 인권유린과 공안탄압이 거침없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평택투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미 군사동맹의 반민중성은 결국 남한의 반전평화운동의 역사적인 투쟁의 기록을 만들어 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전쟁을 예비하는 미국의 전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투쟁과 이에 함께한 반전평화 운동은 ‘평화’라는 보편적인 상징을 만들어 냈고, 반전평화운동의 대중적 위력을 실감케 했다.
2007년 2월 13일, 정부의 집요한 협박 끝에 주민들은 이주를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은 소강국면에 이르게 되었지만,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저항하는 투쟁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전북 군산지역의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에 이어 경기도 파주의 무건리에 훈련장 확장저지투쟁은 여전히 반전평화운동의 주요한 이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드러난 주한미군 재편의 비용과 책임문제, 즉 10조원이 넘는 미2사단의 이전비용, 평택 기지건설 비용을 한국 방위비 분담금으로 불법 전용하는 문제 그리고 비용조차 가늠할 수 없는 반환 미군기지 환경오염 정화비용의 문제는 반전평화운동의 과제가 될 것이다. 2007과 2008년을 거치면서 한-미 군사동맹은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따라 현대화되어 가고 있다. 2012년 전시작전통제권 반환을 대비하여 한미연합사령부를 대체하는 새로운 미군 한국사령부((US KOCOM)건설과 유엔사령부의 존속을 포함하여 한-미간의 새로운 군사지휘체계가 논의되고 있다. 또한 대북선제공격을 위한 첨단화된 한-미 공동 군사훈련이 진행되는 가운데, 각종 신무기 도입과 미사일 방어망 구축 등 한-미 군사동맹의 기술적 진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패권을 보다 공고히 하고 유사시 북한에 대한 점령통치를 합법화하기 위한 한미동맹의 현대화를 비판하고, 이를 해체하기 위한 대중적 운동을 조직하는 일은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의 핵심적인 과제이다.
2006년 한반도 핵 위기와 동아시아 반핵평화 운동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예고했던 핵실험을 단행했다. 10월 14일 국제연합(UN)은 북한 핵?미사일의 완전한 폐기를 목표로 하는 대북결의안을 채택했고, 10월 20일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는 확장된 핵 억지력(extended deterrence)을 천명함으로서, 한반도 핵 위기가 가시화 되었다.
사회진보연대는 북한이 택하고 있는 “국가 체계의 보존과 북미간의 일괄타결 수단으로서의 핵무장”의 맹점과 위험에 대해 제기하였다. 북한의 핵보유 시도가 “미국의 핵독점, 핵패권주의와 다르며 미국의 대북 핵전쟁 계획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군사적 억지력이자 협상용 수단”이라는 민중운동 내 일부의 변호론적 주장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 비판의 이유는 첫째, 핵전쟁은 민중에 대한 절대적 파괴, 상호절멸을 낳기 때문에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 사이의 구별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며 둘째, 핵무기는 그 속성상 핵보유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셋째, 북한의 핵 개발 의도가 세계적인 핵확산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핵무기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을 견지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진보연대는 미국의 한반도 핵전쟁 위협을 막는 수단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아니라 대중적인 반핵평화운동의 힘이라는 관점을 확고히 지켜나가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식하에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의 반핵평화와 남한정부에서부터의 일방주의적인 군비축소를 주장했고, 한국정부의 모든 군사주의적 노선을 반대하면서 전쟁유발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을 벌여내는 것, 그리고 핵무기에 대한 숭배나 무감각을 깨고 핵무기주의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는 것을 과제로 제기했다.
당시, 북한 핵실험에 대한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이 공론화되고 있는 가운데 사회진보연대는 회원토론회 “북한 핵실험과 반전평화운동의 대응(2006. 10.13)”와 민중운동 공동토론회 “북 핵실험 국면, 민중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2006, 10.19)”를 개최(노동자의 힘, 노동자의힘, 문화연대, 사회진보연대, 이윤보다인간을, 인권운동사랑방, 전진, 평화인권연대)하였다. 또한 전국민중연대와 통일연대가 공동주최한 토론회 “북의 핵실험 정국과 진보진영의 대응(2006.10.12)” 에 참가하여 북한 핵실험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운동진영 내에서 적극적으로 제기하였으며 반미반전민중대회(2006.10.22)에 참가하여 사회화와 노동 특별호를 배포하면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의 반핵 평화운동을 대중적으로 제안하기도 하였다. 2007년 5월 26일~27일에는 국내의 20여 개의 사회단체를 포함하여 일본과 미국의 반전반핵운동 단체와 함께 “반전반핵평화 동아시아 국제회의”를 공동개최하였다. 이 국제회의에서는 반핵 반전 활동가 400여명이 참가하여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다시금 부각된 동아시아 핵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현 정세와 향후 동아시아 반핵평화 국제연대방안을 논의하였다. ‘핵 없는 동아시아’, ‘미국의 군사패권으로부터 자유로운 동아시아’라는 기치로 진행된 국제회의에는 <원수폭금지 일본 국민회의>(이하 원수금), <원수폭금지 일본 협의회>(이하 원수협), <일본 평화 위원회>, <평화인권환경포럼>을 비롯하여 <미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아시아 공동행동 일본 연락회의>와 미국 <뉴햄프셔평화행동>의 활동가가 참여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사회운동의 과제와 반전반핵평화운동의 확장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진행하였다.
마치며
지난 10년 동안, 야만적인 전쟁과 군사동맹에 반대하는 반전평화 대중운동은 비약적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세계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더욱 위험해졌으며 이 가운데 한반도의 핵 위기가 현존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위기와 함께 전쟁의 위험이 가중되고 있는 오늘날, 반전평화운동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사회진보연대가 복무하고 있는 반전평화운동이 보다 대중적으로 확장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지난 운동을 평가하고 여기서 제기된 쟁점들을 숙고하면서 향후 운동의 과제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햇볕정책
1998년 12월 사회진보연대 출범 당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북한은 1998년 1월 당보, 군보 공동사설을 통해 새 정부의 연북화해정책을 촉구했다. 김대중과 DJP 연합을 결성했고, 그 후 새 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은 김종필은 1998년 2월 베이징에서 김 당선자의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위한 6개국 선언> 구상을 발표했다.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남북 기본합의서 이행과 남북한 주도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특사교환을 제의했다. 새 정부의 100대 과제에는 그 외에도 정경분리 원칙으로 남북 경제협력의 적극적 추진.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사회문화 교류 활성화, 대북 경수로 사업의 원활한 추진, 이산가족 재회의 조속한 실현 등이 담겼다.
특히 1998년 4월 30일 김대중정부는 정경분리 원칙에 따른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남북교역에 관해서 통일부장관의 개별적 승인이 필요 없는 포괄승인품목을 확대하고, 위탁가공 교역을 촉진하기 위해 생산설비의 반출 제한을 폐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에 조응하여, 1998년 6월과 10월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했고, 11월에는 총사업 규모가 약 10억 달러에 달하는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실행되었다.
한편 1996년 4월 김영삼, 클린턴 대통령이 제안한 4자회담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1998년 3월에 비로소 1차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주요 의제로 한국과 미국은 남북 당사자가 중심이 되고 미국과 중국이 실효성 있게 뒷받침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제시한 반면, 북한은 미군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이 핵심이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기존의 입장 차이로 인해 4자회담 개최가 2년 간 지연되었으나, 본회담 개시 시점에서도 이러한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김대중정부 역시 김영삼정부를 이어 남북한이 중심이 되고 미국과 중국이 보장하며 러시아와 일본이 지지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와중에 1998년 8월 31일 북한은 인공위성 광명성의 발사 실험을 발표했다. 북한은 로켓이 일본 상공을 지나 1646km를 날아 태평양 공해상에 떨어졌다고 밝혔다. 미국은 인공위성과 탄도미사일 실험이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북한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북한의 핵탄두 개발과 함께 미사일 문제가 심각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한반도위원회의 문제의식과 활동
사회진보연대는 출범과 함께 이처럼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도래한 새로운 한반도 상황에 직면하여 분석과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한반도위원회 구성을 결정했다. 위원회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95년 아태재단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이 제안한 3단계 통일방안은 1) 공화국연합제에 의한 남북연합단계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을 위한 제반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권한이 매우 적은연합기구), 2) 연방제통일단계 (1연방과 2지역의 자치정부, 외교군사 전면적 권한 및 주요 내정에 대한 주요한 권한을 갖는 연방), 3) 완전통일단계(1국가 1정부)로 요약된다. 즉 경제적 관계의 통합을 확대해 나가면 최종적으로 정치적 통합까지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경제적 통합이 정치적 통합으로 질적으로 비약할 것인가? 여기서 핵심은 공화국연합제에 의한 남북연합 단계가 사실상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는 과도적인 단계로서 설정된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다당제와 자유선거를 허용하는 것이 그 핵심으로 제기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통일방안 수준에서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이 언급하고 있는 “흡수통일반대”는 김영삼정부가 구사한 대북강경책에 대한 반대 즉 북한의 조기붕괴에 의한 흡수통일와 반대되는 개념이자 더욱 중요하게는 “합의된 통일”(예컨대 독일통일)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미국의 대북전략 구도 하에서 한국-미국-일본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햇볕정책은 그 전제조건으로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확산의 봉쇄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대북정책의 핵심적 목표를 3국의 공동관심사로 승격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햇볕정책의 기본적인 기조는 과거 한때 검토했던 북한의 붕괴-즉각적인 흡수통일이 가능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이 확인됨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사활적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다른 방편의 하나로서 3국이 공동의 압박전선을 형성하여 대량파괴무기의 봉쇄라는 당면한 목표를 획득해야 한다는 정책적 목표를 수용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단기적 목표가 구조적으로 보장받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으로는 북한을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시켜 북한이라는 존재 그 자체의 위협을 궁극적으로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구상은 북한이 핵-미사일을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남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북한의 현존하는 정권에게 안정성을 부여해주면서, 점진적으로 한반도 ‘경제’통합을 추진하겠다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이를 위한 세부적인 방안으로서 남북 간의 ‘무역자유화’ 시나리오의 관철 즉 △주로 남한경제에 통합(남한경제의 하위파트너),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로의 전환(가공무역형 수출기지) 등이 제출되고 있다. 결국 한국-미국의 구상은 남측의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질서의 확장을 분명하게 지지한다. 따라서 이러한 전략은 순전한 의미에서의 ‘평화공존’이 될 수 없으며, 평화공존이라는 형식을 통해 사실상의 통일의 효과를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이는 즉각적인 흡수통일이 수반할 수 있는 ‘불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비용을 절약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둘째, 남북경협의 진척이 한반도 평화안착에 도움이 되며, 남북 공동이익을 증진시킨다는 논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 남한 자본의 북한 진출이 북한의 경제난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한반도에서 민족적 경제공동체가 회복됨으로써 국제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남한의 노동자운동과 민중운동에도 무비판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정치논리로부터 자유로운 경제논리’는 곧 자본의 논리를 뜻한다. 자본이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돈이나 경제 요소가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가 주도하는 일체의 사회적 관계도 함께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당면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의 저임노동력의 활용과 유지가 남한의 경쟁력 강화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발상이다. 이미 여러 연구단체가 ‘상호보완적 남북 경제 통합방안’이라는 제목으로 남북간 수직적 분업구조 구축이나 남북 노동자들의 임금체계의 분화방안을 제출하고 있다. 이것은 남한의 노동운동이 지난한 투쟁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획득해가고 있는 생존권이 대북교류와 관련해서는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즉 노동권의 차별적 적용이라는 문제는 향후 남북경협의 활성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쟁점으로 드러날 것이다.
셋째,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도 한반도 군축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오히려 한미동맹의 강화, 현대화가 추진되고 있다. 1998년 1월 김 당선자를 만난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한국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예산을 삭감하고 있지만, 국방예산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고, 김대중 정부가 제시한 100대 중심과제에는 한반도 군축이 아니라 확고한 한미 안보협력 유지가 강조되고 있다. 특히 한미연합사령부의 전쟁계획인 <작전계획 5027>은 대북 선제공격 전략을 승인하는 방향으로 호전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넷째,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통일운동 진영은 드디어 통일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전기가 마련되었다고 받아들이고 기존의 반정부적, 집회와 시위 중심의 통일운동을 벗어나서 정부와 유효하게 공조할 수 있는 대중적, 전문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통일운동이 노선 전환을 꾀하는 것은 한반도 정세변화에 본질적으로 부적합하다. 오히려 전쟁이 아닌 상태로서의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대중의 통제력과 민주적 역량의 강화에 따른 평화의 구조화가 진정한 쟁점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평화운동이 전면적으로 강화될 필요가 있다. 또한 향후 북한의 개혁개방의 흐름이 가시화될 경우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북한 민중의 노동권 문제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태세가 구축되어야 한다. 또한 분단으로 인해 남과 북 모두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정치적 기본권의 확대(대표적으로 국가보안법의 문제)가 적극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운동의 실질적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초기 한반도위원회는 조사연구와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한반도 연대>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소식지 머릿기사를 살펴보면, <평화권과 노동권을 통일운동의 핵심 쟁점으로 삼기 위하여>(1999.1.28), <한반도 전쟁위기론 다시 읽기: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전쟁을 준비하는 행위다>(1999.3.3), <나토확대, 그러나 평화에 대한 무능력: 유고공습을 계기로 본 나토의 현재와 미래>(1999.4.20), <현대재벌이 북한개발전략이 제기하는 쟁점>(1999.6.11) 또한 1999년 1월부터 7월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노동운동과 통일> 기획토론회를 진행했다. 주요 주제는 ‘독일통일의 역사적 성격과 통일문제’, ‘세계자본주의 체제와 한반도 통일 문제’, ‘북한경제의 현황과 남북 경제교류의 문제점’, ‘북한의 노동력 관리체제와 노동조직’ 등이었다.
한편 사회진보연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999년 이후로 굵직한 정세적 사안이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1999년 6월 15일에는 서해상 북방한계선(NLL) 남쪽 2.5킬로미터 지점에서 남과 북의 전투함의 무력충돌이 발생해서, 북한 경비선 한 척이 침몰하고 또 한 척이 침몰하여 북한군 최소 30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한국 정부는 이를 1차 연평해전이라고 부른다. 2002년 6월 29일에는 2차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남측 고속정이 침몰하고 한국군 6명이 사망한다.) 1999년 9월 30일에는 AP통신이 자체 웹사이트에 <한국전쟁에서의 피난민 학살에 대한 퇴역 미군병사의 증언>이라는 제목의 특별 취재기사를 게재함으로써, 노근리 학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이를 계기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문제가 사회쟁점으로 부상했다. 위원회는 서해 무력충돌을 계기로 북한한계선이 정전협정에서 규정된 공식적인 군사분계선이 아니며 (현재 정전협정 상에서는 서해상의 군사분계선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오히려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 정부가 감행할 수 있는 대북 무력시위나 도발 억제하기 위해 정한 내부 규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다. 또한 노근리 사건은 단지 전투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실수가 아니라 군사작전으로 수행된 체계적 민간인 학살이었음을 주장했다. 한편 다음해 2000년 4월에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전격 발표되고,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남북정상회담, 6.15 공동선언 발표가 이뤄졌다. 위원회는 이를 계기로 사회운동 진영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의 모순을 더욱 분명히 인식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2000년 6월 30일에 결성된 <매향리 미군 국제폭격장 폐쇄 범국민대책위원회>에는 사회진보연대가 참가단체로 참여하였다. <매향리범대위>는 1999년 10월 6일 결성된 <불평등한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국민행동>과 함께 ‘매향리 미군폭격장 즉각 폐쇄, SOFA 전면개정, 양민학살 진상규명 및 사죄 배상’ 등을 내걸고 2000년 투쟁을 주도했다. 특히 <매향리 범대위>는 사회단체와 주민운동이 결합하여 군사기지의 폐쇄와 주민 생존권 보장을 위한 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함으로써 2000년대 반전 평화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한편 2000년 8월에는
2001년 9.11과 아프간 공격
2000년 말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2001년 미국의 대외정책은 변화를 예고했다. 그동안 공화당은 클린턴의 대외정책이 미국의 국익을 확고히 수호하지 못하고, 악당국가들이 미국을 위협하고 실리를 챙기는 나쁜 버릇에 물들게 했다고 줄곧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부시정부로의 미국 행정부 교체에 따라 세계 각지에서 정치적 경색국면이 발생하거나 최소한 새로운 정책수립 과정에서 새로운 양상의 마찰이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남북관계의 측면에서도 부시정부가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면서 새로운 정책방향 수립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북미관계의 교착 상태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9.11 공격이 발생했다.
9.11은 미 본토가 항구적인 ‘전장’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는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미국은 이를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군사교리를 천명하며 범세계적인 공안정국을 형성할 수 있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대테러동맹’이라는 명분하에 항구적인 예방, 선제 군사공격을 정당화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0월 7일, 빈라덴 체포를 목적으로 즉각적인 아프간 보복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국에서는 10월 10일 <전쟁반대 평화실현을 위한 765개 사회단체 시국선언>이 발표되고, 부시 방한에 맞추어 준비되고 있던 집회를 10월 20일 ‘전쟁반대 평화실현 신자유주의세계화반대 범국민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했다 (부시 방한은 취소되었다.) 11월 8일 <전쟁반대평화실현공동실천>이 발족하여 미국의 보복전쟁 즉각 중단, 한국군 파병과 전쟁지원 반대를 주장했다.
‘살인미군 규탄’에서 ‘전쟁반대’ 운동으로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에서 미 2사단 소속 장갑차가 앞서가던 여중생 신효순, 심미선 양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주한미군의 살인 만행에 대해 한국 법무부는 재판권 포기 신청을 하였으나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동두천 군사법정에서 진행된 미군 재판은 당시 범죄행위를 저지른 관제병 페르난도 리도와 운전병 마크 워커에게 무죄평결을 내렸다. 이 사건에 분노한 대중들은 자발적으로 촛불집회를 조직하였고, 이는 곧 범국민적인 반미시위로 확산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문제, 구체적으로는 주둔미군지위에 관한 일반협정(SOFA)의 불합리함이 대중적으로 폭로되었다. 2002년 12월, 두 여중생 살인 만행을 규탄하는 범국민적인 촛불집회가 조직되었고, <미군장갑차 고 신효순, 심미선 양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는 12월 14일 10만 촛불대행진을 벌이게 된다.
2003년 1월, 부시는 연두교서를 통해 이라크와 이란,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하고 미국에 위협이 되는 세력에 대해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통해 응징하겠다는 ’선제 공격(pre-emption)‘을 천명하였다. 나아가 미국은 이라크가 알카에다 등 테러세력을 지원하고 있으며,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며 명분삼아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침공을 단행하였다.
대중적인 반미시위가 고조되던 2003년 초, 반전평화운동 단위들은 대중들의 반미 열기를 미국의 군사패권과 중동지역의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반미반전운동 연대조직 이었던 <전쟁반대평화실현공동실천>과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는 ‘살인미군 규탄’에서 ‘전쟁책동 미국반대’로 나아가야한다는 공동의 인식 하에 합동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 한국군 파병을 반대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하였다. 사회진보연대는 합동운영위 상황실에 활동가를 파견하여 이러한 운동의 흐름에 적극 개입하였다.
전쟁 직전인 2003년 2월 15일, 세계사회포럼을 통해 조직되어 전 세계 수백 개의 도시에서 개최된, “이라크 침공 반대 국제공동행동의 날”을 기점으로 한국에서도 이라크 전쟁 반대, 파병반대를 위한 대중적인 반전평화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2003년 이라크 전쟁과 반전평화운동의 성장
2003년 4월 2일, 한국군 파병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국방부는 이에 따라 4월 12일에는 이라크전 파병 의료부대(제마부대, 100명)과 건설공병부대(서희부대, 573명)를, 4월 17일에는 선발대 30명을, 4월 30일에는 제1제대 300여명을, 5월 14일에는 제2제대 300여명을 각각 파견한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그리고 5월 1일,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였다. ‘충격과 공포’로 명명된 ‘이라크의 자유화(해방)’ 작전은 이제 ‘점령과 지배’ 단계로 이행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미국의 점령에 대한 이라크 내의 저항은 갈수록 거세어졌고, 미국의 개전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와 후세인 정권의 테러조직 연관성은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은 2003년 9월 장기화되는 이라크 전쟁 및 점령의 부담을 동맹국에 떠넘기기 위해 한국에도 사단규모의 대규모 전투부대 추가파병을 요구하였다.
사회진보연대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평행하는 군사세계화”라는 분석틀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 그리고 ‘대테러전쟁’을 비판하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반전팀을 결성하여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정세를 분석하고, 대중적인 반전행동을 기획, 실천하였다. 또한 전국민중연대(준) 참가단체들과 공동으로 정기적인 <반전 소식지>를 발간하여 전국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반대, 파병반대운동에 정책적으로 개입하였다.
한국정부의 이라크 전투병 추가파병이 확정되자 2003년 9월 23일 전국 353개 단체가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이하 파병반대국민행동)>을 결성하여,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한국군 추가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사회진보연대는 <파병반대국민행동> 공동대표 단체로 참가하여 범국민대회, 인간띠잇기, 철야농성 등의 대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파병반대국민행동> 상황실에 활동가 파견했고, 이라크 상황 모니터 팀을 구성하고 운영하는데 참가했다. 더불어 2004년 총회에서는 국제반전공동행동에 대한 특별결의문을 채택하여 반전운동에 대한 조직적 결의를 높였다.
한편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인권운동 내부의 토론이 활성화되어 <평화권을 위한 모임>이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평화인권연대, 인권운동사랑방, 다산인권센터, 천주교인권위, 국제민주연대,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 사회진보연대가 참여했다. 2003년 모임은 이라크 전쟁범죄 보고서를 발간했고,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관련 자료를 축적했다.
2004년에는 한국정부의 파병정책으로 인해 오무 전기 노동자들과 김선일씨가 이라크 저항세력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무현 정권은 한-미 군사동맹을 위해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고 이에 분노한 대중들은 더욱 격렬하게 전쟁반대, 파병반대운동의 대열에 나섰다.
이렇듯 엄중한 정세에서 반전평화운동진영 내에서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태도를 두고 입장이 갈렸다.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 시민단체들은 미국비판과 노무현 비판을 분리하고 노무현 퇴진투쟁은 파병반대운동과는 별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정권이자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무장한 군사력으로 엄호하려는 정권인 노무현 정권의 퇴진은 반전평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였다. 따라서 반전운동, 파병반대운동은 ‘노무현 정권 퇴진’을 정치적 요구로 내걸어야 했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러한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는 <파병반대국민행동>참가 단체들과 함께 <만민공동회>집회를 기획하여 노무현 퇴진, 한미동맹 폐기라는 정치적 방향을 분명히 제기하고자 하였다.
한편 <평화권을 위한 모임>은 <전쟁은 끝난다. 우리가 원한다면! 부시-블레어-노무현 전범민중재판>을 제안했다. 9월 20일 발기인 총회를 개최한 후 12월까지 기소인을 조직하여 기소인들이 직접 기소장을 작성하는 운동을 벌였다. 사회진보연대는 전범민중재판을 제안하고 기소인을 조직하는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파병반대운동의 정치적, 대중적 성장에 복무하고자 노력하였다.
대테러전쟁 비판과 운동의 쟁점
2005년과 2006년, 중동에서 미국이 벌인 “대테러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레바논, 이란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미국은 ‘새로운 중동’ 정책을 표방하면서 헤즈볼라와 하마스 같은 저항세력을 제거하여 이란과 시리아 같은 반미국가를 압박하고 봉쇄하여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는 친미 중동을 만들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대테러동맹’이라는 명분하에 전쟁비용, 파병을 지원하고 각 국가마다 ‘테러방지법’을 제정하여 세계화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을 억압하고 있었다. 2005년과 2006년을 거치면서 노무현 정부는 세 차례나 이라크 자이툰 부대 파병기한을 연장했고, 아프가니스탄에 동의다산부대를 파병하였다. 또한 2006년 11월 한미 정상회의에서 자이툰 파병 연장과 함께 레바논 파병을 약속하였고, 그해 12월, 국회는 자이툰 파병연장 동의안과 레바논 특전사부대 파병동의안을 통과시켰다.
2007년이 되자 미국과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함께 미국의 이란 공격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부시 행정부는 이란의 핵개발과 이라크 저항세력 지원을 문제 삼으며, 유엔 안보리가 설정한 이란 핵개발 중단시한을 앞두고 페르시아 만에 항공모함 전단을 추가로 배치하는 등, 이란 공습을 위한 비상계획을 수립한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중동에서의 ‘대테러전쟁’의 확전과 이에 대한 한국정부의 파병정책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에서 故 윤장호 하사가 저항세력의 폭격으로 사망하였고 2007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탈레반에 의해 피랍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파병반대국민행동>을 비롯한 반전평화운동은 이라크 점령 종식과 자이툰 철군 운동과 함께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파병반대, 그리고 이란 확전반대운동으로 반전평화운동의 의제를 확장해나갔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문제에 대한 이슈도 주요한 투쟁과제로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히 아프간 피랍사건은 반전평화운동에게 있어 중대한 쟁점을 던졌다. 당시 <파병반대 국민행동>은 피랍사태 직후,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 미국의 아프간 점령과 한국정부의 아프간 파병정책에 있으며, 오무전기 노동자들, 고 김선일와 고 윤장호 하사의 죽음에 이어 ‘미국의 대 테러동맹’에 동참한 한국정부가 겪어야 하는 참혹한 피의 대가라는 점을 원칙적으로 제기하였다. 그러나 당면 투쟁의 슬로건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탈레반의 피랍행위에 대한 운동진영 내 시각차가 쟁점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민간인의 생명을 볼모로 한 탈레반의 잘못된 요구는 수용될 수 없다.”는 입장과 “미국의 점령을 비판하고, 점령 종식을 압박할 수 있는 요구로써 탈레반의 요구는 수용 가능하다.”는 입장이 대립되었다. 이러한 쟁점들로 인해 성명 발표, 촛불집회 기조를 결정할 때마다 참가단체들은 상당한 논란을 벌였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탈레반에게 피랍자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활동을 독자적으로 조직하기도 하였다. (2007년 8월 7일, 평화 여성 환경 종교, 문화 분야 78개 시민단체, ‘노란 리본 달기’운동.)
78개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를 호소하는 성명에는 탈레반에 대한 비판과 인질들의 조속한 석방요구가 가장 중심적인 내용으로 담겨있었다. 이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 살해하는 탈레반의 폭력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키고, 인질을 구해내는 것이 사태의 해결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파병반대 국민행동>의 촛불집회 기조와 관련해서도 한·미 동맹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로부터 무사귀환의 염원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한편에서는 이 사태를 반전·반미의 목소리를 보다 확산시켜 나가는 적극적인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운동진영의 역할은 피랍자 석방의 기술적 방법 자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며, 한·미 동맹 반대라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여 반전평화운동의 정치적 고양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고도의 군사공격에 의해 격퇴 당한 탈레반은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복을 감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피랍자들의 생명구제는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탈레반 전쟁포로들이 미군에 의해 최소한의 포로대우도 받지 못하고, 끔찍한 인권유린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은 탈레반이 민간인 납치를 볼모로 포로석방을 요구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도록 추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탈레반을 규탄하며 피랍자를 즉각 석방하라는 국제캠페인을 펼치거나, 정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예컨대 석방 조건 수용) 피랍자 석방을 우선시하라는 요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프간 피랍사태를 통해 제기된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오늘날 일반화되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속성, 즉 극단적인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이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테러’는 정치· 군사적 약자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제아무리 압도적인 정치· 군사적 우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확산해 나간다 하여도 반복적으로, 심지어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증오와 보복’의 전쟁과 폭력에 대응하는 반전평화운동의 향후 실천이 어떠한 원칙과 관점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보다 진지한 성찰과 숙고가 필요할 것이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투쟁과 한미군사동맹 해체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사업은 해외주둔 미군재배치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의 동아시아 신속 기동군으로의 전환을 추진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 중 하나이다.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 투쟁은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투장과 미국의 군사패권과 전쟁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운동이 만나 대중적인 반전평화운동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대추리 150가구, 도두리 40가구가 주축이 되어 2003년부터 팽성 주민대책위가 결성되었고 900일이 넘는 주민 촛불집회와 다양한 투쟁들을 벌여냈다. 2005년 2월, 115개 시민사회단체로 결성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범국민 대책위>는 농지와 대추 초등학교 사수투쟁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2006년 3월과 4월 국방부는 농지를 파헤치고 철조망을 설치하여 주민들의 출입을 차단했고, 급기야 5월 4일에는 대추초등학교를 철거하고 말았다. 국방부는 이 과정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주민의 저항을 무력화했다.
2006년 사회진보연대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을 반전평화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이슈로 삼아 대추리 현지에서의 투쟁(평택지킴이 활동과 솔부엉이 도서관 건설 및 운영, 소식지 발간, 주 1회 평택방문, 후원조직)과 서울에서의 촛불집회를 병행해 나갔다. 그리고 전국적 차원에서 평화 대행진을 조직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평택미군기지 확장은 단순히 한국정부의 졸속적으로 수립된 군사안보정책이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전략과 한-미군사동맹 현대화를 위한 사활적인 과제였다. 따라서 주민과 국민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행정대집행은 무리하게 강행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체계적인 탄압이 거침없이 진행되는 동안 반전평화운동은 ‘불법과 폭력/합법과 평화적 해결’ 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다. 대추리 현지가 군사력에 의해 봉쇄되면서 주민들의 고립감은 심화되었고, 대중집회의 위력적인 힘이 완강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800명이 넘는 구속, 수배자가 발생하였고, 총 1억원이 넘는 벌금이 주민들과 운동단체에게 짐 지워졌고, 대추리 현지에서는 일상적인 인권유린과 공안탄압이 거침없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평택투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미 군사동맹의 반민중성은 결국 남한의 반전평화운동의 역사적인 투쟁의 기록을 만들어 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전쟁을 예비하는 미국의 전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투쟁과 이에 함께한 반전평화 운동은 ‘평화’라는 보편적인 상징을 만들어 냈고, 반전평화운동의 대중적 위력을 실감케 했다.
2007년 2월 13일, 정부의 집요한 협박 끝에 주민들은 이주를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은 소강국면에 이르게 되었지만,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저항하는 투쟁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전북 군산지역의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에 이어 경기도 파주의 무건리에 훈련장 확장저지투쟁은 여전히 반전평화운동의 주요한 이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드러난 주한미군 재편의 비용과 책임문제, 즉 10조원이 넘는 미2사단의 이전비용, 평택 기지건설 비용을 한국 방위비 분담금으로 불법 전용하는 문제 그리고 비용조차 가늠할 수 없는 반환 미군기지 환경오염 정화비용의 문제는 반전평화운동의 과제가 될 것이다. 2007과 2008년을 거치면서 한-미 군사동맹은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따라 현대화되어 가고 있다. 2012년 전시작전통제권 반환을 대비하여 한미연합사령부를 대체하는 새로운 미군 한국사령부((US KOCOM)건설과 유엔사령부의 존속을 포함하여 한-미간의 새로운 군사지휘체계가 논의되고 있다. 또한 대북선제공격을 위한 첨단화된 한-미 공동 군사훈련이 진행되는 가운데, 각종 신무기 도입과 미사일 방어망 구축 등 한-미 군사동맹의 기술적 진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패권을 보다 공고히 하고 유사시 북한에 대한 점령통치를 합법화하기 위한 한미동맹의 현대화를 비판하고, 이를 해체하기 위한 대중적 운동을 조직하는 일은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의 핵심적인 과제이다.
2006년 한반도 핵 위기와 동아시아 반핵평화 운동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예고했던 핵실험을 단행했다. 10월 14일 국제연합(UN)은 북한 핵?미사일의 완전한 폐기를 목표로 하는 대북결의안을 채택했고, 10월 20일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는 확장된 핵 억지력(extended deterrence)을 천명함으로서, 한반도 핵 위기가 가시화 되었다.
사회진보연대는 북한이 택하고 있는 “국가 체계의 보존과 북미간의 일괄타결 수단으로서의 핵무장”의 맹점과 위험에 대해 제기하였다. 북한의 핵보유 시도가 “미국의 핵독점, 핵패권주의와 다르며 미국의 대북 핵전쟁 계획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군사적 억지력이자 협상용 수단”이라는 민중운동 내 일부의 변호론적 주장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 비판의 이유는 첫째, 핵전쟁은 민중에 대한 절대적 파괴, 상호절멸을 낳기 때문에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 사이의 구별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며 둘째, 핵무기는 그 속성상 핵보유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셋째, 북한의 핵 개발 의도가 세계적인 핵확산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핵무기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을 견지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진보연대는 미국의 한반도 핵전쟁 위협을 막는 수단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아니라 대중적인 반핵평화운동의 힘이라는 관점을 확고히 지켜나가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식하에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의 반핵평화와 남한정부에서부터의 일방주의적인 군비축소를 주장했고, 한국정부의 모든 군사주의적 노선을 반대하면서 전쟁유발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을 벌여내는 것, 그리고 핵무기에 대한 숭배나 무감각을 깨고 핵무기주의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는 것을 과제로 제기했다.
당시, 북한 핵실험에 대한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이 공론화되고 있는 가운데 사회진보연대는 회원토론회 “북한 핵실험과 반전평화운동의 대응(2006. 10.13)”와 민중운동 공동토론회 “북 핵실험 국면, 민중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2006, 10.19)”를 개최(노동자의 힘, 노동자의힘, 문화연대, 사회진보연대, 이윤보다인간을, 인권운동사랑방, 전진, 평화인권연대)하였다. 또한 전국민중연대와 통일연대가 공동주최한 토론회 “북의 핵실험 정국과 진보진영의 대응(2006.10.12)” 에 참가하여 북한 핵실험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운동진영 내에서 적극적으로 제기하였으며 반미반전민중대회(2006.10.22)에 참가하여 사회화와 노동 특별호를 배포하면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의 반핵 평화운동을 대중적으로 제안하기도 하였다. 2007년 5월 26일~27일에는 국내의 20여 개의 사회단체를 포함하여 일본과 미국의 반전반핵운동 단체와 함께 “반전반핵평화 동아시아 국제회의”를 공동개최하였다. 이 국제회의에서는 반핵 반전 활동가 400여명이 참가하여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다시금 부각된 동아시아 핵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현 정세와 향후 동아시아 반핵평화 국제연대방안을 논의하였다. ‘핵 없는 동아시아’, ‘미국의 군사패권으로부터 자유로운 동아시아’라는 기치로 진행된 국제회의에는 <원수폭금지 일본 국민회의>(이하 원수금), <원수폭금지 일본 협의회>(이하 원수협), <일본 평화 위원회>, <평화인권환경포럼>을 비롯하여 <미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아시아 공동행동 일본 연락회의>와 미국 <뉴햄프셔평화행동>의 활동가가 참여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사회운동의 과제와 반전반핵평화운동의 확장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진행하였다.
마치며
지난 10년 동안, 야만적인 전쟁과 군사동맹에 반대하는 반전평화 대중운동은 비약적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세계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더욱 위험해졌으며 이 가운데 한반도의 핵 위기가 현존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위기와 함께 전쟁의 위험이 가중되고 있는 오늘날, 반전평화운동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사회진보연대가 복무하고 있는 반전평화운동이 보다 대중적으로 확장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지난 운동을 평가하고 여기서 제기된 쟁점들을 숙고하면서 향후 운동의 과제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