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은 노점상 운동, 그러나...
1988년 서울 올림픽쯤이었나?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쯤. 아빠는 트럭에 과일과 야채를 싣고 파는 이른바 ‘차량노점’이었고, 엄마는 동네 골목 한 귀퉁이에 리어카를 대고 과일을 파는 ‘리어카노점’이었다. 나는 우리 집이 특별히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좋아하는 과일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과 특히 당시 700원하던 자장면과 맞먹는 고급 과일인 바나나를 가끔이라도 먹을 수 있어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여름 어느 날인가 모자를 쓴 아저씨들이 엄마 리어카에 와서 자기들 트럭에 과일을 우르르 쏟아 넣고 리어카도 싣고, 리어카 위에 까는 좌판도 실어갔다. 엄마는 특별히 저항하지 않고 그저 죄지은 사람처럼 눈물을 훔치며 한 구석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모자를 쓴 아저씨들도 몇 마디 욕만을 내뱉고는 ‘얌전히’ 물건만 실어갔다. 그 장면을 본 나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고, 한편으로 엄마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왜 우리 과일을 가져가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내 머리 속에는 착한 짓, 나쁜 짓과 같은 최소한의 도덕적 개념만 있었지 ‘합법, 불법’ 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 후로도 엄마는 그 동네를 떠날 때까지 몇 년간 리어카노점을 계속 했고, 아빠는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차량 노점을 했다. 다 커서도 난 아빠가 하는 일이 불법인지 몰랐다. 운동을 접하면서야 노점상은 불법이고, 불법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철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렸을 때 내가 경험했던 일이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점상의 현황
아침 일찍 지하철 입구에서 김밥과 샌드위치를 파는 아줌마, 지하철 역사를 돌며 떡 파는 할머니, 재래시장에서 대야를 놓고 앉아 나물 이것저것 파는 할머니, 지방에 5일장, 7일장이 서면 여기저기 떠돌면서 좌판을 펼치는 아저씨, 휴게소에서 차를 대놓고 각종 물건을 파는 사람들, 명동, 종로 등 도시 번화가에서 각종 공산품과 떡볶이, 튀김 등을 파는 사람들. 밤이면 불을 켜는 포장마차 등. 이들은 다양한 시간대에, 다양한 형태로 장사를 하지만 공통점은 길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노점의 숫자는 정확하게 집계되지 않는다. 워낙 노점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기준으로 노점통계를 내느냐에 따라 수치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1998년 행정자치부는 전국 노점 숫자를 187만 명으로 집계했다. 그리고 최근인 2008년 12월 서울시는 노점 숫자를 1만 204개로 집계했다. 전국노점상총연합(이하 전노련)은 노점의 숫자를 백만으로 추산하고 있다.
내가 어디 가서 노점상 단체에서 일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곧장 ‘돈 잘 버는 노점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언론에서 기업형 노점이니, 노점상의 재산이 몇 십억이니, 세금 한 푼 안내서 돈을 차곡차곡 모을 수 있다느니, 웬만한 대기업 연봉 보다 노점 수입이 낫다느니…. 이런 이야기를 떠들어 대니 사람들은 노점상이 다 그런 줄로만 안다. 물론 노점상들 중에서는 상권이 발달한 곳 목 좋은 자리에서 장사가 잘되 돈을 긁어모으거나, 한 사람이 여러 대의 마차를 소유하면서 다른 이에게 임대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생을 쓰면서 장사를 하기도 한다. 혹은 공유지를 점거해 장사를 하면서 나중에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팔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노점상이 그런 것은 아니다. 정확히 통계를 낼 수 없지만 많은 노점상들은 아직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거리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노점상이 빈곤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노점상에 대한 오해를 풀고 현실을 이야기 하고자 함이다. 노점상 내 빈부 차가 극심한 것 또한 사실이니까.
노점상 운동의 발생
다시 옛날 이야기로 돌아가서, 한국에 노점상이 급증한 것은 1970~80년대이다. 산업화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 중 공장에 취직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노점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종로, 명동, 남대문…. 노점상들이 한둘씩 늘어났고 그만큼 단속도 심했다고 한다. 당시 ‘방범’들이 매일 단속을 했고, 즉결심판을 받으면 일주일에 3일, 5일씩 구류를 받아 살다나오고, 그래도 또 장사를 나가고. 방범들, 공무원들, 상인들, 깡패들한테 돈도 뜯기고, 맞기도 많이 맞으면서 그렇게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1980년 말,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해서 유난히 국제행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국제행사를 하면 정부에서는 거리미화사업을 벌이고 노점상은 청소 대상 영순위가 된다. 당시 거리에서는 매일 데모가 있었고, 여기저기 민중들의 투쟁이 들끓고 있는 사회분위기에서 노점상들도 조직되기 시작했다. 1986년 ‘도시노점상 복지회’를 결성하고 간헐적으로 데모도하고 ‘장사투쟁’도 했다. 그러다 ‘88 서울올림픽’을 목전에 둔 1987년 당시 정부는 노점상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 계획을 발표했고 노점상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노점상들 사이에서는 ‘아시안 게임 때도 거의 장사를 못하게 하는데 올림픽이면 완전 죽겠구나’라는 위기감이 돌기 시작한다. 한편으로 1987년 민중들의 투쟁이 지속되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에서 노점상들이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조직됐다. 1987년 6월 13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전국의 노점상들이 최초로 규모 있게 집회를 개최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투쟁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지고, 노점상들도 조직적인 싸움을 더욱 확장하자 정부도 여러모로 부담을 느꼈는지 1988년 결국 노점단속 유보라는 발표를 한다. 하지만 1989년 노태우 정권은 법질서 확립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또 다시 공안정국을 형성하며 한편으로 대대적인 노점단속을 했고 이에 맞서 노점상들 역시 거세게 저항했다. 노점상운동은 이렇게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며 ‘도시노점상연합회’, ‘전국노점상연합’으로 조직의 형태를 갖추며 성장한다. 이후 노점상 운동은 몇 가지 굴곡을 겪었고, 또 노점상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과 몇 가지 운동의 방향이 있지만 각설하고 현재 노점상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장사만 할 수 있다면 만사 오케이?
노점상의 요구는 단순하다. 장사를 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그런데 문제는 “생존권을 보장하라!”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노점상이 단속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불법인 노점상의 지위, 각종 도시개발 정책(대표적으로 서울시의 ‘디자인 서울’), 국제행사, 주변 상가나 시민의 민원 등. 하지만 노점상 운동은 “생존권을 보장하라!” 이상의 구호를 외치지 못하고 있다. 노점상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이에 맞서는 투쟁이 중요하다는 문제의식이 부족하다. 작년 10월 10일 전노련의 ‘디자인 올림픽’ 대응 집회 취소 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물론 작년 ‘디자인 올림픽’ 대응 집회 취소는 전노련 운동에 더 많은 의미를 가지지만 이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다.) 서울시가 서울시내 주요 30곳을 디자인 거리로 선정하고 이곳에 있는 노점상들을 싹쓸이했다. 해당 노점상들은 이에 맞서 싸웠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좋지 않았다. 완전철거되어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아니면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이면도로로 들어가야 했다. 물론 개별 지역 싸움에서 패배할 수 있다. 하지만 노점상 운동 전체 차원에서는 불도저식 도시 개발사업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이러한 내용을 사회적으로 선전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맥락으로 10월 10일 집회가 상정된 것이었지만 결국 집회는 취소되었다. 노점상에게 “단속 중단하라!”라는 구호는 당연한 것이지만 “디자인 올림픽 반대한다!”는 당장의 요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기로에 선 노점상 운동
노점상 운동 초기부터 노점상 양성화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1992년에는 노점상 자립합법화 공동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사회 각계 인사들과 토론회도 개최했다. 서울시도 노점 합법화 조례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서울시의 조례안은 현실 불가능한 것으로 폐기되었다. 다양하고 무수한 노점상을 통제/관리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전노련도 얼마 전까지 “노점 합법화 쟁취!”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내부 논란으로 잠정 폐기되었다.
그런데 2007년 서울시는 “노점종합관리대책”을 발표한다. 노점종합관리대책은 노점을 선별하여(재산, 주거 기준) 장소, 품목, 시간을 통제하고 매년 계약을 갱신한다는 내용이다. 언뜻 보면 노점을 합법화하는 안 같지만 본질은 노점을 엄격하게 관리하여 점차적으로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규노점 발생이라는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노점종합관리대책은 2007년 시범운영하고 이를 기반으로 2008년 노점조례를 제정할 예정이었지만 전노련의 강력한 반대로 시범운영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노점조례는 유보되었다. 그러나 서울시가 노점종합관리대책을 폐기한 것은 아니다. 각 구청들이 여전히 산발적으로 노점을 선별하기 위한 실태조사를 요구하고 있고 노점상을 개별관리하려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고양시과 광명시는 이미 노점조례가 제정되었고, 조례를 만들지 않는 지자체도 노점관리정책은 실행하고 있다.
전노련 중앙은 노점관리대책 반대, 실태조사 거부라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각 구청이 각종 변형된 노점관리대책(예를 들어 “재산조사는 안 하겠다.”)을 들이밀며 노점상을 포섭하려 하고 있고 기층 노점상들은 당장 단속을 안 한다고 하니 귀가 솔깃해진다는 것이다. 지자체는 일부 노점상을 포섭하고 이를 발판삼아 나머지 노점상을 강력하게 단속하겠다는 심사다. 이미 조직된 노점상인 전노련의 각 지역연합은 포섭되는 쪽이기도 하고 배제되는 쪽이기도 하다. 중앙의 지침은 존재하지만 기층 노점상은 여러 가지 현실론과 투쟁에 대한 패배감을 근거로 포섭되기도 한다. 또 전노련 지역, 중앙 간부 중에서도 ‘이제 노점상 운동도 변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기류가 있다. 노점상 운동은 현재 기로에 서있다.
경제 위기와 노점상 운동
전노련 사무실에 있으면 어떻게 노점을 시작할 수 있냐는 문의전화가 가끔 온다. 그런데 요즘 이런 문의전화가 부쩍 늘었다. 현 경제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규노점상 조직화는 전노련에 있어서는 다소 어려운 문제다. 왜냐하면 신규노점상이 기존 전노련 회원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면 상관없지만(장소, 품목 등 상권이라는 미묘한 문제) 충돌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노점상이 더 적극적으로 노점상을 탄압(?)한다. 전노련 중앙은 신규 노점상을 적극적으로 조직해야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각자 먹고 사는 문제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노련은 신규 노점상을 조직하고 이들과 함께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 조직된 노점상으로 기득권을 인정받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지속적으로 반빈곤운동과의 접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전노련 회원 중에는 기초수급대상자, 파산신청자, 주거 빈곤층들이 있다. 때문에 노점상운동은 다양한 반빈곤 운동의 의제와 무관하지 않다. 반빈곤 운동의 의제들이 당사자운동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일단 당사자들을 조직하고 주체로 세우는 문제는 중요하다.
운동의 과정에서 답을 찾아야
올해 2월로 전노련에서 활동한지 딱 1년이 되었다. 노점상 운동을 하면서 과연 노점상이 바라는 세상이 무엇인지 내내 궁금했다. 노점상은 흔히 이렇게 이야기 한다. “누가 거리에서 장사하고 싶어서 하느냐, 먹고 살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그렇다면 노점상이 바라는 세상은 거리에서 장사하지 않고 자신의 노동권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인가, 아니면 누구나 마음껏 장사를 할 수 있는 세상인가. 노동자 운동의 이념이 따로 있고, 노점상 운동의 이념이 따로 있고, 여성운동의 이념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 누군가가 노점상 운동의 이념은 ‘이거야’ 하고 정리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지만, 현존하는 노점상 운동이 어떤 세계를 지향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더 많이 고민하고 활동가들과 토론하면서 밝혀 나가야 하고, 운동으로 실현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드는 생각은 노점상이 자기 몫을 더 챙기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이 없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주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많은 고민 없이 우연한 기회로 전노련에서 활동하게 됐다. 하지만 전노련에서 활동하면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전노련에 있으면서 대중조직의 생리를 더 알게 되었고, 또 그동안 추상적인 수준으로 고민하던 것들이 정정되고, 활동가들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필요한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더 풀어야 할 고민도 많지만 운동의 과정에서 답을 찾겠다.
노점상의 현황
아침 일찍 지하철 입구에서 김밥과 샌드위치를 파는 아줌마, 지하철 역사를 돌며 떡 파는 할머니, 재래시장에서 대야를 놓고 앉아 나물 이것저것 파는 할머니, 지방에 5일장, 7일장이 서면 여기저기 떠돌면서 좌판을 펼치는 아저씨, 휴게소에서 차를 대놓고 각종 물건을 파는 사람들, 명동, 종로 등 도시 번화가에서 각종 공산품과 떡볶이, 튀김 등을 파는 사람들. 밤이면 불을 켜는 포장마차 등. 이들은 다양한 시간대에, 다양한 형태로 장사를 하지만 공통점은 길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노점의 숫자는 정확하게 집계되지 않는다. 워낙 노점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기준으로 노점통계를 내느냐에 따라 수치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1998년 행정자치부는 전국 노점 숫자를 187만 명으로 집계했다. 그리고 최근인 2008년 12월 서울시는 노점 숫자를 1만 204개로 집계했다. 전국노점상총연합(이하 전노련)은 노점의 숫자를 백만으로 추산하고 있다.
내가 어디 가서 노점상 단체에서 일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곧장 ‘돈 잘 버는 노점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언론에서 기업형 노점이니, 노점상의 재산이 몇 십억이니, 세금 한 푼 안내서 돈을 차곡차곡 모을 수 있다느니, 웬만한 대기업 연봉 보다 노점 수입이 낫다느니…. 이런 이야기를 떠들어 대니 사람들은 노점상이 다 그런 줄로만 안다. 물론 노점상들 중에서는 상권이 발달한 곳 목 좋은 자리에서 장사가 잘되 돈을 긁어모으거나, 한 사람이 여러 대의 마차를 소유하면서 다른 이에게 임대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생을 쓰면서 장사를 하기도 한다. 혹은 공유지를 점거해 장사를 하면서 나중에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팔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노점상이 그런 것은 아니다. 정확히 통계를 낼 수 없지만 많은 노점상들은 아직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거리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노점상이 빈곤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노점상에 대한 오해를 풀고 현실을 이야기 하고자 함이다. 노점상 내 빈부 차가 극심한 것 또한 사실이니까.
노점상 운동의 발생
다시 옛날 이야기로 돌아가서, 한국에 노점상이 급증한 것은 1970~80년대이다. 산업화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 중 공장에 취직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노점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종로, 명동, 남대문…. 노점상들이 한둘씩 늘어났고 그만큼 단속도 심했다고 한다. 당시 ‘방범’들이 매일 단속을 했고, 즉결심판을 받으면 일주일에 3일, 5일씩 구류를 받아 살다나오고, 그래도 또 장사를 나가고. 방범들, 공무원들, 상인들, 깡패들한테 돈도 뜯기고, 맞기도 많이 맞으면서 그렇게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1980년 말,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해서 유난히 국제행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국제행사를 하면 정부에서는 거리미화사업을 벌이고 노점상은 청소 대상 영순위가 된다. 당시 거리에서는 매일 데모가 있었고, 여기저기 민중들의 투쟁이 들끓고 있는 사회분위기에서 노점상들도 조직되기 시작했다. 1986년 ‘도시노점상 복지회’를 결성하고 간헐적으로 데모도하고 ‘장사투쟁’도 했다. 그러다 ‘88 서울올림픽’을 목전에 둔 1987년 당시 정부는 노점상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 계획을 발표했고 노점상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노점상들 사이에서는 ‘아시안 게임 때도 거의 장사를 못하게 하는데 올림픽이면 완전 죽겠구나’라는 위기감이 돌기 시작한다. 한편으로 1987년 민중들의 투쟁이 지속되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에서 노점상들이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조직됐다. 1987년 6월 13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전국의 노점상들이 최초로 규모 있게 집회를 개최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투쟁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지고, 노점상들도 조직적인 싸움을 더욱 확장하자 정부도 여러모로 부담을 느꼈는지 1988년 결국 노점단속 유보라는 발표를 한다. 하지만 1989년 노태우 정권은 법질서 확립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또 다시 공안정국을 형성하며 한편으로 대대적인 노점단속을 했고 이에 맞서 노점상들 역시 거세게 저항했다. 노점상운동은 이렇게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며 ‘도시노점상연합회’, ‘전국노점상연합’으로 조직의 형태를 갖추며 성장한다. 이후 노점상 운동은 몇 가지 굴곡을 겪었고, 또 노점상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과 몇 가지 운동의 방향이 있지만 각설하고 현재 노점상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장사만 할 수 있다면 만사 오케이?
노점상의 요구는 단순하다. 장사를 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그런데 문제는 “생존권을 보장하라!”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노점상이 단속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불법인 노점상의 지위, 각종 도시개발 정책(대표적으로 서울시의 ‘디자인 서울’), 국제행사, 주변 상가나 시민의 민원 등. 하지만 노점상 운동은 “생존권을 보장하라!” 이상의 구호를 외치지 못하고 있다. 노점상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이에 맞서는 투쟁이 중요하다는 문제의식이 부족하다. 작년 10월 10일 전노련의 ‘디자인 올림픽’ 대응 집회 취소 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물론 작년 ‘디자인 올림픽’ 대응 집회 취소는 전노련 운동에 더 많은 의미를 가지지만 이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다.) 서울시가 서울시내 주요 30곳을 디자인 거리로 선정하고 이곳에 있는 노점상들을 싹쓸이했다. 해당 노점상들은 이에 맞서 싸웠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좋지 않았다. 완전철거되어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아니면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이면도로로 들어가야 했다. 물론 개별 지역 싸움에서 패배할 수 있다. 하지만 노점상 운동 전체 차원에서는 불도저식 도시 개발사업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이러한 내용을 사회적으로 선전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맥락으로 10월 10일 집회가 상정된 것이었지만 결국 집회는 취소되었다. 노점상에게 “단속 중단하라!”라는 구호는 당연한 것이지만 “디자인 올림픽 반대한다!”는 당장의 요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기로에 선 노점상 운동
노점상 운동 초기부터 노점상 양성화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1992년에는 노점상 자립합법화 공동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사회 각계 인사들과 토론회도 개최했다. 서울시도 노점 합법화 조례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서울시의 조례안은 현실 불가능한 것으로 폐기되었다. 다양하고 무수한 노점상을 통제/관리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전노련도 얼마 전까지 “노점 합법화 쟁취!”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내부 논란으로 잠정 폐기되었다.
그런데 2007년 서울시는 “노점종합관리대책”을 발표한다. 노점종합관리대책은 노점을 선별하여(재산, 주거 기준) 장소, 품목, 시간을 통제하고 매년 계약을 갱신한다는 내용이다. 언뜻 보면 노점을 합법화하는 안 같지만 본질은 노점을 엄격하게 관리하여 점차적으로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규노점 발생이라는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노점종합관리대책은 2007년 시범운영하고 이를 기반으로 2008년 노점조례를 제정할 예정이었지만 전노련의 강력한 반대로 시범운영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노점조례는 유보되었다. 그러나 서울시가 노점종합관리대책을 폐기한 것은 아니다. 각 구청들이 여전히 산발적으로 노점을 선별하기 위한 실태조사를 요구하고 있고 노점상을 개별관리하려 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고양시과 광명시는 이미 노점조례가 제정되었고, 조례를 만들지 않는 지자체도 노점관리정책은 실행하고 있다.
전노련 중앙은 노점관리대책 반대, 실태조사 거부라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각 구청이 각종 변형된 노점관리대책(예를 들어 “재산조사는 안 하겠다.”)을 들이밀며 노점상을 포섭하려 하고 있고 기층 노점상들은 당장 단속을 안 한다고 하니 귀가 솔깃해진다는 것이다. 지자체는 일부 노점상을 포섭하고 이를 발판삼아 나머지 노점상을 강력하게 단속하겠다는 심사다. 이미 조직된 노점상인 전노련의 각 지역연합은 포섭되는 쪽이기도 하고 배제되는 쪽이기도 하다. 중앙의 지침은 존재하지만 기층 노점상은 여러 가지 현실론과 투쟁에 대한 패배감을 근거로 포섭되기도 한다. 또 전노련 지역, 중앙 간부 중에서도 ‘이제 노점상 운동도 변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기류가 있다. 노점상 운동은 현재 기로에 서있다.
경제 위기와 노점상 운동
전노련 사무실에 있으면 어떻게 노점을 시작할 수 있냐는 문의전화가 가끔 온다. 그런데 요즘 이런 문의전화가 부쩍 늘었다. 현 경제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규노점상 조직화는 전노련에 있어서는 다소 어려운 문제다. 왜냐하면 신규노점상이 기존 전노련 회원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면 상관없지만(장소, 품목 등 상권이라는 미묘한 문제) 충돌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노점상이 더 적극적으로 노점상을 탄압(?)한다. 전노련 중앙은 신규 노점상을 적극적으로 조직해야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각자 먹고 사는 문제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노련은 신규 노점상을 조직하고 이들과 함께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 조직된 노점상으로 기득권을 인정받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지속적으로 반빈곤운동과의 접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전노련 회원 중에는 기초수급대상자, 파산신청자, 주거 빈곤층들이 있다. 때문에 노점상운동은 다양한 반빈곤 운동의 의제와 무관하지 않다. 반빈곤 운동의 의제들이 당사자운동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일단 당사자들을 조직하고 주체로 세우는 문제는 중요하다.
운동의 과정에서 답을 찾아야
올해 2월로 전노련에서 활동한지 딱 1년이 되었다. 노점상 운동을 하면서 과연 노점상이 바라는 세상이 무엇인지 내내 궁금했다. 노점상은 흔히 이렇게 이야기 한다. “누가 거리에서 장사하고 싶어서 하느냐, 먹고 살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그렇다면 노점상이 바라는 세상은 거리에서 장사하지 않고 자신의 노동권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인가, 아니면 누구나 마음껏 장사를 할 수 있는 세상인가. 노동자 운동의 이념이 따로 있고, 노점상 운동의 이념이 따로 있고, 여성운동의 이념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 누군가가 노점상 운동의 이념은 ‘이거야’ 하고 정리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지만, 현존하는 노점상 운동이 어떤 세계를 지향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더 많이 고민하고 활동가들과 토론하면서 밝혀 나가야 하고, 운동으로 실현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드는 생각은 노점상이 자기 몫을 더 챙기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이 없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주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많은 고민 없이 우연한 기회로 전노련에서 활동하게 됐다. 하지만 전노련에서 활동하면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전노련에 있으면서 대중조직의 생리를 더 알게 되었고, 또 그동안 추상적인 수준으로 고민하던 것들이 정정되고, 활동가들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필요한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더 풀어야 할 고민도 많지만 운동의 과정에서 답을 찾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