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운동의 첫발을 내딛으며
귀향
나의 고향은 5월 혁명의 도시 광주다. 태어나서 대학 입학 전까지 줄곧 광주에서 자라며 지내왔다. 1995년인 중학교 2학년까지는 교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최루탄 냄새 때문에 한여름 찜통더위에 창문을 닫고 수업을 하기 일쑤였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고 분주히 교정을 뛰어다니던 대학생들의 모습이 창밖을 장식했다. 이것이 내가 TV나 신문이 아닌 두 눈과 코에 직접 새긴 ‘운동권’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그리고 광주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이라고 하면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실의에 빠진 가운데 호남민들에게는 선생님으로 추앙받던 ‘신자유주의 전도사’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일이다.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대선 이후 며칠간은 곳곳의 음식점마다 술과 안주를 무료 제공한다는 딱지를 문 앞에 써 붙여 놓고 이벤트를 열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오죽했으면 도청 앞 분수대에 맥주를 가득 채워 컵만 가져가면 무한대로 마실 수 있도록 축제를 벌인다는 말이 나돌았으니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이 지역에서는 정말 큰일은 큰일이었나 보다. 그밖에 크고 작은 기억이 많긴 하지만 중고등학교 때는 집과 학교를 쳇바퀴 굴러가듯 오가며 지내던 시절이라 강렬한 기억에 비해 깊이 있는 성찰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대학 입학과 함께 광주와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세상만물을 모두 신기하게 여겼을 만큼 질주하던 대학시절은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았다. 자동차 매연으로 매캐한 서울 도심 거리 위에서 느낀 해방감은 고향 광주에 대한 기억을 멀리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다시 광주에 내려와 무언가 해보리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시 광주에 섰다. 8년만의 귀향이다. 지난해 사회진보연대 신입회원교육에 함께할 무렵, 잠정적으로 결론 내린 나의 운동공간은 광주였다. 동기들과의 열띤 논의와 지역 동지들과의 몇 차례 간담회도 있었고 당시 집안 문제로 평소보다 잦은 고향 방문을 하게 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광주의 낯설지 않은 편안함과 향후 활동을 도모해볼 수 있는 열린 가능성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부족한 가운데 잘 적응하였으며 긴 호흡에 장기적인 전망도 밝혀보고자 부단히 노력 중이다.
광주전남지역 운동에 대한 단상
광주전남지역 운동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다. 철거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인 도청 별관과 집회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광주출정가’ 속에 80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기에는 역부족이지만, 30년이라는 세월 안에 농익은 투쟁의지는 여느 지역에 못지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홉 달의 짧은 활동 속에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없지 않다. 첫째는 비정규, 여성, 이주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투쟁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을 여는 문제다. 활동의 많은 부분이 광주전남진보연대 또는 민주노총 지역본부를 중심으로 하는 해당 단위의 지침에 의거해 투쟁에 결합하고 움직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곧 대공장 중심으로 대중을 집회에 동원하는 방식의 활동으로 굳어져 실험적이고 자생적인 활동 흐름은 오히려 정체된 느낌을 많이 받는다. 비정규, 여성, 이주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투쟁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그/녀들의 주체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교육과 더불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가는 것이 처방임에 틀림없다. 비정규, 여성, 이주 노동자들 스스로 현재의 정형화된 틀 안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기획을 들고 제안하며 치고 올라올 수 있다면 이는 지역운동에 신선한 활력이 될 것이다.
둘째는 논쟁하고 토론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할 필요성이다. 올해 초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이 불거졌을 때, 지역의 금속노조 로케트 해고자 동지들의 복직 투쟁이 한창일 때, 아시아문화전당 건립과 도청 별관 철거 문제를 둘러싼 갈등,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투쟁 전술 등 숱한 논쟁거리가 운동사회 안에 던져졌을 때, 운동의 자양분 삼아 한걸음 전진하기 위한 계기로 삼기보다 그저 묵묵히 자기 활동에만 매진하는 편협함이 있지는 않았는지 나부터 반성해본다. 지역의 주류 운동세력의 입김에 이내 묻히고 말거라 지레짐작한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크다. 짜인 일정에 결합하는 방식의 잔잔한 운동판에 작은 돌멩이 하나 던질 용기가 있다면 보다 풍성한 의제들로 혁신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이상은 보다 튼실한 지역운동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과제들로 문득 든 생각들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지역지부 운동에 대한 단상
이쯤 되니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일하는 곳은 공공노조 광주전남지부로 공공노조 산하 가스, 연금 등과 같은 공공기관지부와 달리 지역 소재 다양한 중소영세비정규사업장을 포괄하는 초기업지부다. 업종별로 보자면 건물 청소용역, 자치단체 직접고용 환경미화원, 민간위탁 대형폐기물 처리업무, 사회복지, 보육교사 등으로 다양하며, 사업장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대개 30명 이하의 조합원들로 구성된 분회로 편재되어 있다.
산별에 걸맞은 집단교섭 틀을 확보하지 못한 탓에 지역지부는 일 년 중 투쟁과 교섭이 끊일 날이 없다고들 한다. 어디 그게 교섭방식만의 문제겠냐만 실제 투쟁과 교섭이 끊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최저임금 또는 그에 약간 상회하는 수준의 임금을 받는 사업장들로 위탁이나 용역업체의 계약이 만료되는 해이면 늘 고용위협에 시달리게 되며, 직접고용 사업장들도 예산감축, 총액인건비제 등의 정부 정책에 화답하듯 효율성과 예산절감을 빙자하여 민간위탁 수순을 밟아가고자 혈안이 되어있다. 따라서 고용의 적신호가 켜지기 무섭게 투쟁 태세를 갖춰야만 하는 것이 지역지부의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도 사업장별로 진행되는 교섭은 연중 끊이질 않으니 몸이 두 개였으면 하는 마음마저 간절할 때가 많다.
구조적으로 개선되어야할 부분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공공노조 비정규단위에 일부 존재하는 생각과 태도를 마주하며 더 당혹스러운 경험이 종종 있었다. 지난 9개월 동안 광주전남지부와 유사한 지역지부 동지들을 만나본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비정규단위 운동의 고뇌와 고달픔이 노조 중앙, 심지어는 정규직 동지들을 향한 질책으로 표출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했다. 활동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예산과 인력 지원을 요구하고 정규직 동지들의 연대를 호소하는 것이다. 틀린 얘기가 아니다. 예산과 인력이야 활동의 기본이고 비정규단위 투쟁에 더 많이 연대하는 것은 더 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과연 지역지부 활동이 정체되고 힘든 것이 예산과 인력 때문 만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돈과 사람이 있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아니 오히려 희망사항이 100% 충족되기도 쉽지 않을 테니 “지금 어려운 조건에서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먼저 찾는 것이 암흑의 시기 공동의 전망을 밝히는 데 보다 유효하지 않을까. 나의 생각은 이렇다. 대개 비정규단위 사업장의 조직력, 파업 등 쟁의행위의 파괴력이 현저히 낮은 수준임을 감안할 때 지역의 단체, 언론, 노조 등을 폭넓게 아우르는 지역운동을 전면에 내걸지 않고서는 지역지부는 내일도 미래도 없다. 그러한 점에서 올해 광주전남지부의 핵심투쟁과제의 하나인 민간위탁 철회 투쟁을 위해 당, 언론, 단체를 포괄하는 지역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공동의 연구, 학습, 실천을 전개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본다. 향후 모임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나 전국 동지들 앞에 사례 발표할 만한 성과도 남길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또 하나는 간혹 접하는 정규직에 대한 질책 또는 연대를 호소하는 방식의 문제다. 일장 연설이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배부른 정규직, 이래서 안 돼”로 맺어지는 레퍼토리는 뼈아픈 운동 현실이 투영된 듯하여 가슴마저 미어지게 한다. 자본의 분할통치 전략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도 예외는 아닐진데 우리 스스로 그 구획을 보다 강화하며 투쟁의 어려움을 정규직을 향한 화살로 돌리는 인식. 그건 분명 적을 향한 일침이 아니다. 언젠가 나의 목을 향해 되돌아올 부메랑이다.
별로 득 될 것 없는 잡설이 아닌가 싶어 우려도 크지만 각자의 지역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동지들을 책망하고자 함이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아니 오히려 열악한 현장에서 버티고 또 버텨온 노고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 할수록 어렵고 고민되는 공공노조 지역지부 활동, 지역운동을 일구는 선봉장답게 전국의 수많은 동지들과 더 많이 교류하고 소통하며 전체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무기를 벼릴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기 위하여
사계절 한 순환도 채 마무리 짓지 않은 9개월의 평가는 활동 뿐 아니라 변화된 환경의 일상생활을 포괄해야하는 것이라 더욱 어렵다. 그러나 스치는 단상의 조각모음 수준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라 한계도 많지만 이번 글을 쓰면서 차분히 나의 활동과 일상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하면 할수록 해야 할 게 많고 하나같이 쉽지 않은 지역운동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는 지역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의 다른 말이다. 어느 선배가 주문했던 ‘성실함’은 어느새 활동의 첫 번째 덕목이 되었고, 현재 몸담은 공공노조 광주전남지부에서도 실제 발로 뛰며 현장을 조직하고 학습하고 투쟁하는 것이 먼 미래의 꿈같은 얘기가 아니라 자신한다. 활동의 매순간 부딪히는 갈등과 난관은 힘겹지만 그 과정에 되뇌는 ‘원칙’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교육과 경험을 통해 습득한 기준과 원칙이 때로는 유연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활동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새 몸에 배어버린, 책상머리에 앉아 컴퓨터 안에 빨려 들어갈 듯 몰입하는 습관. 이제 박차고 일어나 분주히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함께하는 동지들이 있어 더욱 금쪽같았던 아홉 달이다. 이제는 하루를 금쪽같이, 희망을 싹틔우는 지역운동을 만들어갈 것을 다짐해본다.
근래 한 무리의 동지들이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운동에 뛰어들거나 준비 중이라 들었다. 해가 갈수록 알차게 채워져 가는 교육프로그램에 시샘도 나지만 이 또한 한 해 한 해 사회진보연대가 쌓아올린 성과를 바탕에 둔 것임을 감안하면 뿌듯하기 그지없다. 새로운 활동공간을 찾아가는 동지들 모두 각자의 지역과 현장에서 그려갈 청사진에 맑은 날이 가득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나의 고향은 5월 혁명의 도시 광주다. 태어나서 대학 입학 전까지 줄곧 광주에서 자라며 지내왔다. 1995년인 중학교 2학년까지는 교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최루탄 냄새 때문에 한여름 찜통더위에 창문을 닫고 수업을 하기 일쑤였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고 분주히 교정을 뛰어다니던 대학생들의 모습이 창밖을 장식했다. 이것이 내가 TV나 신문이 아닌 두 눈과 코에 직접 새긴 ‘운동권’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그리고 광주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이라고 하면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실의에 빠진 가운데 호남민들에게는 선생님으로 추앙받던 ‘신자유주의 전도사’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일이다.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대선 이후 며칠간은 곳곳의 음식점마다 술과 안주를 무료 제공한다는 딱지를 문 앞에 써 붙여 놓고 이벤트를 열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오죽했으면 도청 앞 분수대에 맥주를 가득 채워 컵만 가져가면 무한대로 마실 수 있도록 축제를 벌인다는 말이 나돌았으니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이 지역에서는 정말 큰일은 큰일이었나 보다. 그밖에 크고 작은 기억이 많긴 하지만 중고등학교 때는 집과 학교를 쳇바퀴 굴러가듯 오가며 지내던 시절이라 강렬한 기억에 비해 깊이 있는 성찰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대학 입학과 함께 광주와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세상만물을 모두 신기하게 여겼을 만큼 질주하던 대학시절은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았다. 자동차 매연으로 매캐한 서울 도심 거리 위에서 느낀 해방감은 고향 광주에 대한 기억을 멀리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다시 광주에 내려와 무언가 해보리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시 광주에 섰다. 8년만의 귀향이다. 지난해 사회진보연대 신입회원교육에 함께할 무렵, 잠정적으로 결론 내린 나의 운동공간은 광주였다. 동기들과의 열띤 논의와 지역 동지들과의 몇 차례 간담회도 있었고 당시 집안 문제로 평소보다 잦은 고향 방문을 하게 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광주의 낯설지 않은 편안함과 향후 활동을 도모해볼 수 있는 열린 가능성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부족한 가운데 잘 적응하였으며 긴 호흡에 장기적인 전망도 밝혀보고자 부단히 노력 중이다.
광주전남지역 운동에 대한 단상
광주전남지역 운동에는 독특한 향기가 있다. 철거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인 도청 별관과 집회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광주출정가’ 속에 80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기에는 역부족이지만, 30년이라는 세월 안에 농익은 투쟁의지는 여느 지역에 못지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홉 달의 짧은 활동 속에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없지 않다. 첫째는 비정규, 여성, 이주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투쟁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을 여는 문제다. 활동의 많은 부분이 광주전남진보연대 또는 민주노총 지역본부를 중심으로 하는 해당 단위의 지침에 의거해 투쟁에 결합하고 움직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곧 대공장 중심으로 대중을 집회에 동원하는 방식의 활동으로 굳어져 실험적이고 자생적인 활동 흐름은 오히려 정체된 느낌을 많이 받는다. 비정규, 여성, 이주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투쟁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그/녀들의 주체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교육과 더불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가는 것이 처방임에 틀림없다. 비정규, 여성, 이주 노동자들 스스로 현재의 정형화된 틀 안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기획을 들고 제안하며 치고 올라올 수 있다면 이는 지역운동에 신선한 활력이 될 것이다.
둘째는 논쟁하고 토론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할 필요성이다. 올해 초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이 불거졌을 때, 지역의 금속노조 로케트 해고자 동지들의 복직 투쟁이 한창일 때, 아시아문화전당 건립과 도청 별관 철거 문제를 둘러싼 갈등,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투쟁 전술 등 숱한 논쟁거리가 운동사회 안에 던져졌을 때, 운동의 자양분 삼아 한걸음 전진하기 위한 계기로 삼기보다 그저 묵묵히 자기 활동에만 매진하는 편협함이 있지는 않았는지 나부터 반성해본다. 지역의 주류 운동세력의 입김에 이내 묻히고 말거라 지레짐작한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크다. 짜인 일정에 결합하는 방식의 잔잔한 운동판에 작은 돌멩이 하나 던질 용기가 있다면 보다 풍성한 의제들로 혁신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이상은 보다 튼실한 지역운동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과제들로 문득 든 생각들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지역지부 운동에 대한 단상
이쯤 되니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일하는 곳은 공공노조 광주전남지부로 공공노조 산하 가스, 연금 등과 같은 공공기관지부와 달리 지역 소재 다양한 중소영세비정규사업장을 포괄하는 초기업지부다. 업종별로 보자면 건물 청소용역, 자치단체 직접고용 환경미화원, 민간위탁 대형폐기물 처리업무, 사회복지, 보육교사 등으로 다양하며, 사업장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대개 30명 이하의 조합원들로 구성된 분회로 편재되어 있다.
산별에 걸맞은 집단교섭 틀을 확보하지 못한 탓에 지역지부는 일 년 중 투쟁과 교섭이 끊일 날이 없다고들 한다. 어디 그게 교섭방식만의 문제겠냐만 실제 투쟁과 교섭이 끊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최저임금 또는 그에 약간 상회하는 수준의 임금을 받는 사업장들로 위탁이나 용역업체의 계약이 만료되는 해이면 늘 고용위협에 시달리게 되며, 직접고용 사업장들도 예산감축, 총액인건비제 등의 정부 정책에 화답하듯 효율성과 예산절감을 빙자하여 민간위탁 수순을 밟아가고자 혈안이 되어있다. 따라서 고용의 적신호가 켜지기 무섭게 투쟁 태세를 갖춰야만 하는 것이 지역지부의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도 사업장별로 진행되는 교섭은 연중 끊이질 않으니 몸이 두 개였으면 하는 마음마저 간절할 때가 많다.
구조적으로 개선되어야할 부분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공공노조 비정규단위에 일부 존재하는 생각과 태도를 마주하며 더 당혹스러운 경험이 종종 있었다. 지난 9개월 동안 광주전남지부와 유사한 지역지부 동지들을 만나본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비정규단위 운동의 고뇌와 고달픔이 노조 중앙, 심지어는 정규직 동지들을 향한 질책으로 표출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했다. 활동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예산과 인력 지원을 요구하고 정규직 동지들의 연대를 호소하는 것이다. 틀린 얘기가 아니다. 예산과 인력이야 활동의 기본이고 비정규단위 투쟁에 더 많이 연대하는 것은 더 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과연 지역지부 활동이 정체되고 힘든 것이 예산과 인력 때문 만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돈과 사람이 있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아니 오히려 희망사항이 100% 충족되기도 쉽지 않을 테니 “지금 어려운 조건에서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먼저 찾는 것이 암흑의 시기 공동의 전망을 밝히는 데 보다 유효하지 않을까. 나의 생각은 이렇다. 대개 비정규단위 사업장의 조직력, 파업 등 쟁의행위의 파괴력이 현저히 낮은 수준임을 감안할 때 지역의 단체, 언론, 노조 등을 폭넓게 아우르는 지역운동을 전면에 내걸지 않고서는 지역지부는 내일도 미래도 없다. 그러한 점에서 올해 광주전남지부의 핵심투쟁과제의 하나인 민간위탁 철회 투쟁을 위해 당, 언론, 단체를 포괄하는 지역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공동의 연구, 학습, 실천을 전개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본다. 향후 모임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나 전국 동지들 앞에 사례 발표할 만한 성과도 남길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또 하나는 간혹 접하는 정규직에 대한 질책 또는 연대를 호소하는 방식의 문제다. 일장 연설이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배부른 정규직, 이래서 안 돼”로 맺어지는 레퍼토리는 뼈아픈 운동 현실이 투영된 듯하여 가슴마저 미어지게 한다. 자본의 분할통치 전략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도 예외는 아닐진데 우리 스스로 그 구획을 보다 강화하며 투쟁의 어려움을 정규직을 향한 화살로 돌리는 인식. 그건 분명 적을 향한 일침이 아니다. 언젠가 나의 목을 향해 되돌아올 부메랑이다.
별로 득 될 것 없는 잡설이 아닌가 싶어 우려도 크지만 각자의 지역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동지들을 책망하고자 함이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아니 오히려 열악한 현장에서 버티고 또 버텨온 노고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 할수록 어렵고 고민되는 공공노조 지역지부 활동, 지역운동을 일구는 선봉장답게 전국의 수많은 동지들과 더 많이 교류하고 소통하며 전체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무기를 벼릴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기 위하여
사계절 한 순환도 채 마무리 짓지 않은 9개월의 평가는 활동 뿐 아니라 변화된 환경의 일상생활을 포괄해야하는 것이라 더욱 어렵다. 그러나 스치는 단상의 조각모음 수준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라 한계도 많지만 이번 글을 쓰면서 차분히 나의 활동과 일상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하면 할수록 해야 할 게 많고 하나같이 쉽지 않은 지역운동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는 지역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의 다른 말이다. 어느 선배가 주문했던 ‘성실함’은 어느새 활동의 첫 번째 덕목이 되었고, 현재 몸담은 공공노조 광주전남지부에서도 실제 발로 뛰며 현장을 조직하고 학습하고 투쟁하는 것이 먼 미래의 꿈같은 얘기가 아니라 자신한다. 활동의 매순간 부딪히는 갈등과 난관은 힘겹지만 그 과정에 되뇌는 ‘원칙’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교육과 경험을 통해 습득한 기준과 원칙이 때로는 유연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활동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새 몸에 배어버린, 책상머리에 앉아 컴퓨터 안에 빨려 들어갈 듯 몰입하는 습관. 이제 박차고 일어나 분주히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함께하는 동지들이 있어 더욱 금쪽같았던 아홉 달이다. 이제는 하루를 금쪽같이, 희망을 싹틔우는 지역운동을 만들어갈 것을 다짐해본다.
근래 한 무리의 동지들이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운동에 뛰어들거나 준비 중이라 들었다. 해가 갈수록 알차게 채워져 가는 교육프로그램에 시샘도 나지만 이 또한 한 해 한 해 사회진보연대가 쌓아올린 성과를 바탕에 둔 것임을 감안하면 뿌듯하기 그지없다. 새로운 활동공간을 찾아가는 동지들 모두 각자의 지역과 현장에서 그려갈 청사진에 맑은 날이 가득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